남진-조용필 폭행 - namjin-joyongpil poghaeng

[내외뉴스통신] 장혜린 기자= 가수 남진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1947년생으로 올해 나이 일흔 네살인 김세레나(김희숙)는 서울 출신으로 서라벌예술대 음악과를 졸업했다.

박초월 명창 등에서 창법을 배운 그녀는 고교 2학년 때인 1964년 12월 동아방송 '가요백일장' 연말결선대회에서 장원을 하며 데뷔했다.  '새타령'(1967년), '갑돌이와 갑순이'(1968년), '꽃타령', '까투리사냥', '성주풀이'(1969년), '창부타령', '울릉도사랑'(1971년) 등 신민요 히트곡을 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녀에게 ‘국보가수’라는 타이틀을 붙여줬고, 노무현 전 대통령만 빼고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 앞에서 노래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관심이 워낙 큰 탓에 육영수 여사가 이를 질투해 한때 방송 3사에서 출연 금지를 당했다는 일화가 있다.

1946년생으로 올해 나이 일흔 다섯살인 남진(김남진)은 전남 목포 출신으로 목포일보의 발행인이었던 아버지 김문옥과 어머니 장기순 사이에서 3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남진은 아버지 덕분에 목포 최고의 부잣집으로 불릴만큼 꽤 부유하게 자랐다. 아버지 김문옥은 목포를 주름잡는 거부이자 야당계의 거물이었다. 신익희, 조병옥 등이 호남 지역에 가면 항상 그의 집에서 머물렀으며 김대중 또한 인사차 들렀다고 한다.

하지만 형 김상진이 아버지를 이어 신문사 및 정계에 관련된 사업을 이어가자 남진은 아버지처럼 정계에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 인기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목포고를 졸업하고 상경했다. 어린 시절부터 배우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남진은 아버지 몰래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평소 배우 지망생이던 남진은 약 2년을 한동훈 음악학원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1965년에 '서울 플레이보이'를 발표하면서 팝 가수로 데뷔했다. 데뷔 당시 여러 팝 장르의 노래들을 불렀지만 히트를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즐겨서 불렀던 그의 트로트 곡 〈울려고 내가 왔나〉가 처음으로 히트하자 일찌감치 트로트로 전향하였으며 1967년에 히트곡메이커였던 작곡가 박춘석의 〈가슴 아프게〉를 부르면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남진의 직업은 가수였지만 1967년에 박상호 감독의 영화 《가슴 아프게》에 주연으로 처음 출연하면서 부터 영화 배우로도 활동하게 됐다.

그 해 장일호 감독의 영화 《그리움은 가슴마다》에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국도극장에서 처음 개봉하여 약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시킨 흥행작으로 지방에서도 폭발적인 흥행기록을 올렸다. 데뷔와 동시에 인기를 얻었던 남진은 1968년 해병대 청룡부대(해병 2여단 2대대 5중대 2소대)에 입대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1971년에 전역한 후 〈마음이 고와야지〉를 발표하였고 서울시민회관에서 리사이틀 공연을 시작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복직 당시 정통 트로트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던 나훈아와 가요계의 쌍벽을 이루었다.

1972년 〈님과 함께〉를 발표하며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게 되었고 톱 가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나훈아와 라이벌 구도를 이루게 되면서 1970년대의 대한민국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남진과 나훈아는 서로 호남과 영남 출신의 가수로서 지역 사이에서 경쟁을 벌였으며 박진감 넘치고 활발한 성격의 남진과 조용하고 서정적인 성격을 가진 나훈아의 차이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1970년대의 가요계를 이끌었다.

당시 가수왕에는 줄곧 남진이 1등을 하며 가수왕상을 수상하고 나훈아는 2등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전성기를 맞이한 남진과 나훈아를 꺾을 가수가 없었다.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도 남진은 또한 뛰어난 외모로 영화계에서도 알아주는 배우여서 주연으로 여러 번 캐스팅됐다. 한창 바쁠 시기에 유명한 여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약 6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76년에 윤복희와 결혼을 발표하면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남진 부부는 가정폭행과 연루되어 결국 3년 7개월만인 1979년 3월 9일에 이혼하게 됐다. 남진과 나훈아는 결혼과 동시에 방송 출연이 줄어들고 조용필의 등장으로 점차 가요계의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다.

그리고 1980년에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남진은 정치적 탄압을 받았고 이 시점부터 남진은 가수 활동을 그만두고 재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몇 년간 미국에서 지내다가 1982년에 귀국하여 〈빈잔〉을 발표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남진의 귀국과 함께 남진은 정통 트로트 곡 〈빈잔〉이 크게 히트했다. 그렇지만 약 3년 간의 공백으로 가요계에는 수많은 가수가 등장했고 결혼 후 신인시절처럼 그다지 인기를 많이 얻지는 못했다.

1985년에 그는 가수 복직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자 고향인 목포로 내려가 유흥업소를 운영했다. 1989년 11월 목포에서 유흥업소를 운영하던 남진은 조직 폭력배와 난투극 중에 중상을 입어 몇 차례의 대수술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남진은 휴식기에 접어들었다.

1993년, 남진은 〈내 영혼의 히로인〉을 발표하면서 다시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 노래는 여성 팬들에게 많은 성원을 받게 되었다. 남진은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7년만에 앨범을 발표하여 1999년에는 〈둥지〉를, 2005년에는 〈저리 가〉를 발표하였고 2008년에는 〈나야 나〉를 발표하며 현재까지도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2008년 초대 대한가수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약 3년 간 역임하였고 2009년에는 장윤정과 함께 〈당신이 좋아〉를 발표하여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2010년 데뷔 45주년 기념 음반을 발표하고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남진이 데뷔할 당시에는 시대상으로 정부가 대한민국의 대중가요를 왜색 가요라고 시비를 불러일으켰고 방송가요심의전문위원회가 발족되어 창조적이지 못하고 건전하지 못한 가요와 왜색가요는 방송의 규제를 받게 되면서 대한민국 대중가요의 암흑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에 남진과 나훈아의 등장으로 대중가요의 활성화를 불러 일으키면서 트로트 말고도 다양한 장르가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계기가 마련되어 대중음악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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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 크리에이터》ㅣ천현숙 지음ㅣ나남 펴냄ㅣ312쪽ㅣ2만4000원

남진-조용필 폭행 - namjin-joyongpil poghaeng

1970년대, 시골에서 무작정 서울 구로공단으로 간 ‘영식이’는 노래를 곧잘 불렀다. 그가 트롯(뽕짝) 한 가락을 간드러지게 뽑아대면 주변 사람들은 ‘남진, 나훈아 뺨 친다’며 박수를 쳐댔다. 이 박수에 홀린 영식씨는 가수가 되기 위해 콩나물 죽을 먹기로 했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는 표어를 천장에 붙여놓고 죽을 힘을 다했지만 그는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스러져야 했다. 배호, 현인, 이미자, 하춘화, 남진, 나훈아, 송창식, 양희은, 조용필 같은 가객들 발 아래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영식이들’의 피눈물이 흘렀다. 그래서 이들을 하늘의 별(스타)에 빗대는 것이다.

영화배우, 탤런트, 개그맨, 프로 스포츠 선수, 음악가, 미술가, 요리전문가(쉐프) 등등 어느 분야든 대중 스타가 되는 길이 멀고 험난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공통 덕목을 치라면 필시 ‘독창성과 끈기’일 것이다. 자신만의 남다른 실력을 무기로 대중들이 그 가치를 알아줄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SNS가 유행 하기 전에 팟캐스트(팟캐)라고 있었다. 유튜브가 개인 TV 채널이라면 팟캐는 소리만 듣는 라디오다. 수많은 팟캐스터들이 명멸했던 가운데 군계일학은 누가 뭐래도 ‘나꼼수’(나는 꼼수다)다. 나꼼수가 그렇게 떴던 배경은 ‘독창성’이었다. ‘쫄지마 **’로 대변되는 그들의 콘텐츠는 기존 공중파 방송이 심의 때문에 넘지 못하던 벽을 깨고 ‘찧고 까불어댐’으로써 대중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B급에 충실했다.

지금 SNS의 대세라는 유튜브의 몇몇 스타 유튜버들이 잿팟을 터뜨려 빌딩주가 됐다는 소문(?)에 너도 나도 유튜버가 되겠다고 나서는 형국이 마치 금광을 찾아 서부로 몰려가던 19세기 미국의 골드러쉬를 연상케 한다. ‘오늘 네가 마지막 삽질을 포기하고 떠난 자리가 내일 오는 사람의 첫 삽질에 터지는 노다지’라는 금언이 이 시절 금광을 찾는 사람들의 표제어였다. 바로 ‘끈기’를 말하는 것인데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의 다음 대목이 똑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어떤 사내가 에메랄드를 캐기 위해 5년 동안 99만9999개의 돌을 깨뜨렸지만 허사였다. 끝내 꿈을 포기한 사내는 5년 간의 헛고생에 화가 나 돌 하나를 세차게 집어 던졌다. 그런데 그 돌이 깨지면서 커다란 에메랄드가 빛났다. 살렘의 왕 멜키세덱이 그의 삶에 개입한 것이었는데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돕는다’는 명언의 출처가 바로 여기다.

《컨텐츠 크리에이터》 저자 천현숙은 광고 카피라이터 출신의 학자다. 독창성과 끈기 중 주로 독창성에 견줘 현재 SNS 등에서 잘 팔리는 컨텐츠들을 연구, 분석했다. ‘게나 고둥’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발군의 컨텐츠들을 분석함으로써 나만의 컨텐츠를 차별화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저자 천현숙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아버지 면회를 하루도 거르지 않음으로써 신의가 무엇인지 가르쳐 준 오빠 천윤기에게 이 책을 선물로 드린다’고 했는데 필자는 그러한 천윤기님에게 이 서평을 선물로 드린다.

남진-조용필 폭행 - namjin-joyongpil poghaeng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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