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300 배경 - yeonghwa 300 baegyeong

영화 300의 배경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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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는 이란민족의 고대제국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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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왕의 계보를 열거하면,

고레스 - 캄비세스 - 스베르디스 - 다리우스1세 - 크세르크세스1세

아닥사스다 - 크세르크세스2세 - 다리우스2세 -   ?   -다리우스3세

이렇게 10명의 왕이 있었고, 헬라제국(알렉산더 대왕)에 패망합니다.

여기서 고레스는 성경 에스라서 1장에 나오는 그 고레스이구요,

'바사'라는 국가가 바로 페르시아입니다.

다리우스1세는 에스라서 6장에 나오는 다리오왕입니다.

그를 뒤 잇는 크세르크세스1세가 바로 영화 300에서 나오는

페르시아의 그 대머리왕입니다.

사실, 영화에서는 이 사람을 대머리에, 온 몸에 피어싱을 한

비호감 인물로 그리지만

기록에 의하면 굉장한 미남이었답니다.

성경 에스더에선 '아하수에로'왕이라고 나오는데요,

이는 '크샤아르쉬'의 히브리어식 이름입니다.

(크세르크세스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페르시아는 3차에 걸쳐서 그리스원정에 나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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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는 폭풍에 의해 별 성과없이 끝났고

2차는 지금의 마라톤을 있게 한 마라톤전투입니다.

한 그리스 용사가 42.195km를 달려와

승전보를 알리고 그 자리서 숨졌다는 일화가 있죠.

영화 300 배경 - yeonghwa 300 baegyeong

3차 원정이 영화 300의 배경입니다.

3차원정은 또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테르모필레전투-> 아르테미시온전투-> 살라미스 해전.

아하수에로왕이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는

먼저 테르모필레협곡을 지나게 됩니다.

이곳에서 스파르타왕 레오니다스는

스파르타군 300명과 700명의 그리스연합군으로

페르시아에 맞서죠. 

지역사람의 밀고로 전멸했다고 하구요, 

레오니다스가 여기서 3일이라는 시간을 벌어주었기 때문에

살라미스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야사에 의하면 크세르크세스가 레오니다스에게 

'내게 무릎을 꿇으면 스파르타에서 계속 왕노릇하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는데

아마 이 얘기를 미화시켜서 표현한 것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여기까지가 300 전편의 배경이구요.

스파르타를 뚫은 페르시아는 아르테미시온전투를 한 차례 더 치르고,

이 원정의 하이라이트인 살라미스 해전을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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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팔가해전, 칼레해전, 한산도대첩과 함께 세계 4대해전 중 하나인 살라미스 해전은

스파르타가 빠진 상태에서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이 헬라군을 이끌게 됩니다.

11시간에 걸친 이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하게 됨으로써

페르시아의 그리스원정이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이것이 영화 300 후편의 배경입니다.

아하수에로는 재위 제3년인 B.C 482년에 잔치를 베풉니다(에스더 1:3).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이 잔치는 아하수에로가 헬라 침공계획을

세우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으나, 그후 살라미스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B.C 479),

그는 여자들에게서 위안을 찾으려 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와스디가 폐위되고 에스더가 왕비가 됩니다.

고전/역사/문학

영화 300의 역사적 배경 - 동서양의 충돌, 페르시아 전쟁

영화 300 역사적 배경 페르시아 전쟁

얼마 전에 <300>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물론 단순한전쟁과영웅의 영화로 윤색되고, 서양역사와 문화의 우월주의, 동양 문화에 대한 왜곡 등으로국가적인감정싸움도 있었다. 그런시비거리가있으면 당연 영화를 보며 객관적평가를해야 하는데, 그럭저럭시간이지나버렸다. 그러다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를 읽으면서 시모니데스의 일화를 다시 접하게 되고, 그가 묘비의 시가 영화 <300>인용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읽은 1년이 지난 책을더듬으며 당시숨가쁘게움직였던 역사의 장면을영화처럼그려본다. 역사는내가외면한다고해서 생략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며....

라케다모니아 사람들(스파르타군)은 적병이 산을 넘어 접근해 오자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았다. 그들은 야만인들에게 달려들어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며 강인함을 과시했다. 거의 모든 병사들의 창이 부러지자 칼을 빼들고 몰려오는 페르시아군을 헤쳐 나갔다. 이 살육전에서 레오니다스(스파르타왕)도 전사했다. - 헤로도투스의 역사 중에서

고대의 그리스민족은 차례에 걸쳐 커다란운명적인시기를 겪었다. ①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왕의대대적인공격, ②페리클레스의 빛나던 시기, ③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④헬레니즘 시대가그런획기적인 시대였다.

거대한 페르시아에대한조그만 헬라의항쟁은물질적으로 불리한 점을 이겨낸 세계정치사상 인간정신의최대승리였다. 살라미스해협의테르모필렌과 플라타이아이, 미칼레전투는세계사의 흐름을 결정했다. 서양이영원히오리엔트의 문화와생활관습속에서 살아갈것인가아니면 그리스의사상과관습 속에서 살게 것인가를 가름하는 전쟁이었다. 그처럼 세계사적인 사건의 의미를 레오니다스나 테미스토클레스, 파우사니아스로서는 없었을 것이다. 현재성의중요한의미를 당장은모르기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세대를막론하고자기가 살아가는시대를눈먼 사람이더듬듯 뿐이다.

B.C 480년부터 479년의 크세르크세스 페르시아왕이그리스에 대한 전쟁은유럽이존속할 것인지아닌지의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오리엔트세계가밀어닥칠 서양 세계는 태어나려는여명기에 있었다. 깨어 있는 것은 그리스뿐이었다. 그리스가 오리엔트 세계의도전에응전한 것이다. 인류역사에서전쟁의 희생자는대부분 의미 없이 사라진다. 그렇지만 B.C. 480 8 1일부터 3사이에 테르모필렌의 전장에서숨진레오니다스의스파르타용사 300명의 죽음만큼값진것은 없다.

테르모필렌은 뜨거운유황천때문에 이름이붙여진해협인데방어하기에알맞은 곳이었다. 현재는바라다훨씬 뒤로물러가고넓은 평원이들어서모양이 달라졌다. 그러나당시에는산줄기와 바다가 바싹 닿아 있는 그리스중심부로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가장 좁은 곳은 겨우 수레 하나가 지날 있을 정도였다. 스파르타 레오니다스는이곳에서 수천 명의병력으로페르시아군을저지해야 형편이었다. 테르모필렌 동쪽의멀지않은아르체미시온의에우보이아 북쪽의육지가바다로 뻗어나간곳에서그리스함대가해전에대비하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은정찰병을보냈다. 정찰병은 테르모필렌에서 스파르타군을 보았다. 병사들은 차분했다. 체조하는병사가있는가 하면 머리에빗질하는병사도 있었다. 크레스크세스에게는 이런병사들이생사를 싸움에나선다는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군사 자문역으로부터 스파르타 사람들은 죽음을눈앞에두면 머리단장을 한다는말을듣고 놀랐다.

페르시아군은 나흘동안 공격했다. 크레스크세스는 그리스병사들이좁은 협곡으로나와싸우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리스군은 꼼짝하지 않았다.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군이 경박하고 뻔뻔스럽다고 생각했다. 화가 치민페르시아왕은 메데아군과 키시어군에게 먼저 공격하도록 했다. 뻔뻔스러운 스파르타군을 사로잡아자기앞으로 끌고 오라는 명령이었다. 메데아병사들이그리스군을 집중공격했지만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투는하루종일계속됐다. 싸움 끝에 크세르크세스는 끔찍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페르시아군이 병력은많지만진정한 용사가없다고느낀 것이었다.

메데아군은 변변히싸우지못했다.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정예부대를 보냈다. ‘불사의 부대 불리는 정예군이었다. 부대의지휘관은히다르네스 장군이었다. 그러나 부대도 소용없었다. 싸움터가좁아병력을 전개할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그들의창은 그리스군의 창보다 짧았다. 스파르타 병사들은전투능력이 놀라울정도로뛰어났다. 스파르타군은 항상 달아나면서 페르시아군을 테르모필렌의 좁다란골짜기로끌어들였다. 페르시아군이 좁은협곡에들어차면스파르타군이돌아서서 숱하게그들을죽였다. 크세르크세스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그는 멀리서 전투를 보고흥분하여앉아있던 왕좌에서 번이나 뛰어 놀랐다. 신하들은어쩔 모르고바라볼뿐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자기 군대 때문에안절부절못했다. 다음날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이지친나머지 팔을 올릴 힘조차없으리라생각했다. 그러나그것은오판이었다. 그리스군은다시눈부시게 싸웠다. 레오니다스는 그리스군을 지휘했고 병사들은 진지를통하는우회로를 지켰다. 페르시아왕은속수무책이었다.

그때 그리스를 배반한 에피알테스가앞에 나타났다. 에피알테스는 산길을 돌아 테르모필렌의 배후인우회로를통하면페르시아군이승리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에피알테스가그런 짓을 했는지분명하게밝혀진 것은 없다. 페르시아군으로부터 상금을받으려고했을 가능성이많다고생각될 뿐이다. 에피알테스는 나중에 테살리아로 도망쳐 숨었다. 그는 현상수배되었다가 동향인에의해살해된다.

페르시아 보병이 그리스군의 배후를 덮친 것은 한밤중이었다. 레오니다스의 초병은고지에서적병이 다가오는것을알아챘다. 그리스군은 어떻게 것인지 의논했다. 철수하자는 의견도있었고버티자는 의견도 있었다. 레오니다스는 병사들을집으로돌려보낼 것처럼 보였다. 그는 목숨을내놓을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병사들을돌려보내려고 했다.

레오니다스는 불후의명성을남길 때가 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기와 스파르타군이전투를 역사에 피로 적어 영원히 남길시점임을알고 있었다. 예언자 마기스티아스는 제물로 바친 짐승의창자로점을 보고 레오니다스와 용사들이새벽 동틀 죽음을 맞을것이라고예언했다. 레오니다스는예언자도싸움터에서떠나게 생각이었다. 마기스티아스는 물러가지않고자기 아들만 떠나 보냈다. 피티아는델피의신탁에서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그들의왕이전장에서 쓰러지고 스파르타가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연합군들이 철수했다. 스파르타군과 함께 남은 병력은얼마간의테스피군과페르시아에우호적인 테베군이었다. 테베군은 마지못해 이곳에 주둔하여 올가미에 걸려있었다. 레오니다스가 그들을볼모로삼아 붙잡아두었던것이다. 테베군은 스파르타군이 패배할기색을보고페르시아군에게자발적으로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강요에 이겨 테르모필렌에서 싸우게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대부분은목숨을 부지할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 부대에는거친규율이 있었다. 죽임을 당한 테베 군인도있었고크세르크세스의 명령으로 이마에낙인을찍힌 군인도 있었다. 번째로 낙인 찍힌 인물이테베군사령관 레온티아데스였다.

해가떠오르자  페르시아 왕은 제물을 바쳤다. 레오니다스의 용사들은협곡입구 넓은 곳으로 약간 전진했다. 이곳에서 살육전이 벌어졌다. 헤로도토스는 전투장면을손이 땀이 나게 정도로묘사하고있다. 페르시아군 병사와볼모로잡힌 사람들에대해헤로도토스는기록하고있다. 지휘관들은 이들을매질해가며 앞으로 내몰았다. 고통에못이겨많은 사람들이바다로뛰어들었다. 공격에가담하려들지 않거나가담할능력이 없는 병사는 동료병사들이짖밟고 넘어갔다.

페르시아군이우회로로 살그머니 숨어들어 레오니다스의 소규모병력을배후에서 공격하자 스파르타군은 그리스역사상유례가 없을 만큼장렬하게싸웠다. 창이 모두부러지자칼을 빼들고 수천 명의 페르시아군을 죽였다. 숱하게죽어간페르시아군의희생자중에는 크세르크세스의 형제도 있었다.

스파르타 병사들은앞뒤로공격받으며 오래된성벽이있는 협곡의 좁은 곳으로 물러섰다. 언덕에 진을 치고 얼마 남지 않은 무기를 들고 방어했다. 무기라야짐승잡는 칼과 맨주먹, 이빨이 고작이었다.

세계를 제패한 페르시아군의 화살로한줌밖에되지 않는 스파르타군이 파묻혔다. 살육전에서레오니다스가 쓰러지고 300명의 스파르타병사가모두 쓰러졌다. 그러나그들의죽음으로 그리스의영광은영원히 하늘 높이 올랐다. 그들의죽음을딛고 살라미스의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메데아군과 페르시아군은 화살을비오듯퍼부었다. 화살 때문에 기억해두어야이야기도 있다. 최후의저항에서용감하게 싸운 디에네케스라는 스파르타병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이야기가전하고 있다. 페르시아군이 화살을어찌나퍼부어댔는지 해가가려지자 병사는 차분한표정으로 땡볕에서 싸우지않고그늘에서 싸우니까 좋군.”이라고말했다는것이다. 


영화 300 배경 - yeonghwa 300 baegyeong

(다비드가 그린 테르모필렌에서의 레오니다스왕)

대혈투가 끝난 다음 크세르크세스는 이야기를전해 듣고 같은 용사가얼마나되느냐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데마라토스는 스파르타에는 남자어른이 8,000명인데 사람들모두가테르모필렌에서전사한용사와 같다고 대답했다.

레오니다스는막강한 적군을오랫동안붙들고 있었다. 그랬기때문에그리스 함대가안전할 있었다. A. 쾨스터의연구에따르면 페르시아함대와그리스 함대의승부를가리지 못한 아르테미시온 해전은 레오니다스가 전사하던같은 전투중이었던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헤로도토스가 전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실제로 레오니다스는 그리스함대를구해냈다. 그가 신중하지 못하게행동했다면이룰 없는 일이었다. 그의 행동은 그리스군의 승리에 앞서정신적으로 용기를 주었다.

전쟁에서전사한 스파르타 300 용사들을 위해, 고대그리스의서정시인시모니데스는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라케다모니아(스파르타)의 사람들에게

가서 전해주오

조국의 명 받들어

우리들, 여기에 잠 들었다고.....

테르모필렌에서있었던 피의드라마가현대적인 발굴 기술로 드러났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스 학자스피리돈마리나토스가 스파르타군이 스러져 구릉을 발견했다. 아소포스강과스페르케이오스강이흘러넘치며 테르모필렌 지대를몹시변형시켜 발굴작업은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콜로노스구릉을찾아내는것은 오랫동안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됐다. 그러던 것을 그리스학자가찾아낸 것이다. 그제야영웅적인싸움의 흔적을 발굴하려는 시도가 가능해졌다.

마리나토스는레오니다스의 용사들이마지막 사람까지산화한구릉을 파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런 작업을 끝에 그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그리스에서는 그때까지전혀 적이 없는화살촉이대량 쏟아져나왔던것이다. 철로 만든화살촉이있는가 하면 그보다정교하게만든 청동제화살촉도있었다. 페르시아군은 분명히 철로 만든화살촉을사용했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군의 주력부대는 메데아군이라고했다. 이에 비해 불사의부대로알려진 페르시아 정예부대는청동화살촉을 사용했다. 발굴을계기로당시의 드라마를 재구성해 있었다. 히다르네스가 지휘하는 페르시아군 정예부대는 그리스인배반자에피알테스를길잡이로콜로노스 구릉의바다와인접한 통로를 따라 그리스 군의 뒤로 진격했다. 그래서우회한구릉의 북쪽부분에서청동 화살촉이 발굴됐고, 남쪽부분에서 화살촉이 발굴됐다. 화살촉이 페르시아군의 것이라는것은페르세폴리스를비롯해페르시아 영역이었던다른곳에서도 같은 것이 발굴됨으로써 증명됐다. 그밖에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대왕이싸웠던 마라톤과 페르시아군이 점령했던 아크로폴리스의 북쪽부분에서도같은 화살촉을 발굴했다.

발굴을 통해 다른 사실도 입증됐다. 마리나토스는 테르모필렌의 여러군데에서발굴하여 다른곳에서는 없는페르시아의화살촉을 찾아냈다. 이를 통해 구릉에서는창으로만 싸우지않았다는사실이 밝혀졌다. 레오니다스의 용사들은실제로단도만 들고 싸웠고나머지는이빨과 맨주먹으로 싸워야 했다. 결국 그들은멀리서쏘아대는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그랬기때문에 그늘속에서싸우게 됐다는 디에네케스의 말을 헤로도토스가 전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사실이었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테르모필렌에서 철과 청동화살촉의증거가드러남으로써오랜 옛날 서양을지켜낸레오니다스와 그의용사들이갑자기 우리 가까이다가서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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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모필렌 전투 당시의 지도)

뒤이어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에 따라살라미스해전에서그리스군이거둔승리, 스파르타 파우사우니아스가 플라타이아에서 거둔 전과를비롯해밀레토스 지방의미칼레해안에서 페르시아함대를궤멸시킨 등은 유럽 대륙에 숨과 정신을 불어 넣은 결정적요인이됐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자유를통한투쟁이 벌어졌고지금유럽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도록해주고있는 모든 것을 지킬 있었기 때문이다. 오리엔트의 집단주의에대한창의적인 인간의 승리였다. 그리스사람들은자기네가 살아온방법과다르게 살지않겠다고결판낸 것이다. 전쟁에서그리스사람들은 답답하게 순종하라는 압박을 이겨내고, 세계를제패한웅대한 세력도 이겨냈다. 아울러끝없는페르시아의지원세력과그들이 짓눌러오는 압박도 이겨냈다. 여러소국으로나뉘어 있던 조그만 헬라가, 그리고 테미스토클레스의 천재성이 승리했던 것이다. 여기서 사람 사람의개인적인재능이 최고도로 발휘되고, 노예에게서처럼 가지 뜻만강요하는거인 페르시아를 이겨냈다.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는 지상의 온갖 권력을움켜쥐고있었다. 지상의 어느민족이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위대한이상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크세르크세스는 또한 아버지 다리우스처럼 뛰어난국가경영능력도 없었다. 그런다리우스도마라톤에서아테네에패배했다. 그렇지만그가페르시아의위인이라는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지난날 페르시아의 거목이었다.

역사상테미스토클레스만큼다재다능한 그리스사람은 없다.”에두아르트 마이어는말하고있다. 오디세우스의 볼사판이라고만한 가난하지만 고귀한가정출신의 아테네정치가와맞선 인물은 다리우스가 아닌 크세르크세스였다. 다리우스는 B.C 486년에이미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정치가, 그리스인 테미스토클레스와 페르시아인 다리우스왕은 동안 마주칠기회가없었다. 마라톤 전투 당시 테미스토텔레서는 밀티아데스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페르시아는 다리우스왕이떨쳤던 위세를 다시 누리지 못했다. 그리스 역시 테미스토클레스만큼 나라에행복을가져다준 사람은 없었다.

어느나라어느 때를막론하고페르시아 전쟁과 직후페리클레스시대의 그리스처럼 조그만 나라에서 그토록많은천재와 그토록걸출한인물이 배출된 일은 없다. 이처럼조그만땅에서 이루어진일이 되풀이된적도없지만 앞으로도 다시 없을 것이다. 마라톤의승자말티아데스와테르로필렌에서불후의 명성을 남긴스파르타 레오니다스, 살라미스해전을이끈 테미스토클레스, 플라타이아이의지휘자 파우사니아스, 그리고 페리클레스. 이들 모두가 고대그리스의거인들이다. 일련의천재들은인류 역사상 어느시대에서도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세계에영향을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위대한시대정신이있었는가하면 한없이 흘리고무의미한희생을 치룬 자살과 같은 암흑의시기도있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싸운펠로폰네소스전쟁이여기에 해당한다. 전쟁은아테네나스파르타가 직접 전쟁을촉발한것이 아니었다. 세계사에서전쟁이 항상그렇듯이 전쟁 역시국외자인코린트가 전쟁의원인이됐다. 전쟁은 페리클레스 시절에 시작되어, 마치 유럽의 30전쟁과마찬가지로 B.C 431부터 B.C 404년까지 30가까이계속됐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끝났지만풍요롭던 농토가 황폐화되고 국민들이궁핍에시달리게 되어 그리스세계에치유할 없는 상처를 주었다. 전쟁은 B.C 399년에 끝났는데 해는 이러한파국을상징하듯소크라테스가독약을 마시고처형되던해였다. 승리한 스파르타는 새롭고자유로운헬라를 부흥시킬만한정신적인 능력이 없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50년 동안 그리스는 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아이스킬로스∙소포글레스∙우리피데스의 비극,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데스의 역사학, 웅장한 파르테논 신전, 피디아스의 조각 등이 그 때의 것들이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가운데 아테네는 막강한 함대를 만들어 에게 해를 장악했는데, 이는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도시국가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B.C431년 스파르타는 아네테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지오프리 카퍼의 아틀라스 세계사 중에서

그리고는속의 불씨가깜빡이듯황혼의 시기, 고대그리스가사멸해가는 모순의시대가다가왔다. 그러나 모든 생명이죽음에서싹트듯 헬라 세계는 죽음 속에서정신의광휘를 세계를 향해 비추었다. 시기는 신과 인간의 시대이자, 알렉산더의 시대였고, 헬레니즘의 시대였다.

마치며

서양 역사가들이 페르시아는 전제군주제와 노예제도의 국가요, 그리스는 창의적인 인간의 역사라는다소과장된 표현을 것이 사실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이들국가도 모두노예제도가있었다. 단지시민권이있는 사람만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권리를 인정 받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정치, 문화 등은 제한적이었지만 개인적인자유를보장한 사회임은부인할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는그런문화적인 차이 또는배경등에대한 비판적 시각보다는 테르모필렌에서 만의페르시아군앞에서도 불굴의투혼을불사른레오니다스와 용사들의용기와 자세에감탄할뿐이고, 그들의위대한행동에 겸허해질 뿐이다.

참조 : <서양, 위대한창조자들의 역사>, 이바르 리스너(Ivar Lissner), 김동수, 살림출판사, 2005 11

이바르 리스너(Ivar Lissner)

1919 유럽북동부의리트비아공화국의수도리가에서 출생한이바르리스너는 독일의 베를린, 괴팅겐, 에어랑겐대학과프랑스의 리옹, 소르본느 대학에서 언어, 역사, 민속학,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유럽을비롯해서영연방, 태평양제도, 동아시아의 미답지역, 북만주, 북극의해안지역들을 17년간여행한다양한 경험을가지고있다. 프랑스의주간화보잡지 <파리 마치> 제작진에 참여하고 독일의 <크리스탈>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의저서에는영국, 미국,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아르헨티나, 브라질, 캐나다, 호주, 팔레스타인 개국의언어로번역 출간되었고 지금도많은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67년에 사망한 그는 < 사람들은이렇게살았다>, <로마제국황제들은이렇게 살았다>, <선사시대사람들은이렇게 살았다>, <위대한문화의 수수께끼> 등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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