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 눈을 왜 그렇게 떠

밤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을 쳐다보며 어떤 여인을 그리워하는 남자가 있었다. 닉이었다. 닉은 유럽의 꿈 커뮤니티에서 엘리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청순하고 가련해 보이는 얼굴에 다소곳한 표정과  어여쁜 눈매가 닉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커뮤니티가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엘리스 생각에 마음이 심숭생숭했다.  그동안 혼자 애를 태우다가 엘리스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인지 얼마 되지 않는다.

5년 전에 닉은 아내와 함께 매로나 마을에 입주했지만 아내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닉의 아내는 몇 달을  못버티고 파리로 돌아갔다. 파리의 사교생활에 익숙한 아내는 이런 한적한 곳은 맞지 않는다며 메로나 마을을 떠나갔다. 그 이후 2년간 닉은 아내와 별거를 했다.  어느 날 닉은 아내로부터 서류봉투를 받았다. 이혼서류였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파리 사교가에서 이름을 날리던  화가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닉은  이혼남이 되었다.

그 이후 아침에 일어나 텃밭을 일구고  낮에는 회계 업무를 하거나 커뮤니티 활동을 하다가  저녁에 유튜브 보며 잠이 드는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던 닉이었다.  그렇게 혼자 살던 닉은 자신도 이제  새 출발을 할 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유럽의 꿈 커뮤니티에 가입한 엘리스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엘리스를 한 달여간 지켜본 닉은 저 정도의 여인이라면 한번 사귀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연악해 보이면서도 가련한 이미지의 엘리스는 무엇보다도 닉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에 닉의  휴대폰에 엘리스의  메시지가 떳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편안한 밤 되세요."

오후에 커뮤니티가 끝난 후 닉이 엘리스에게 산책이나 같이 가자고 제안했지만  엘리스가 다음에 하자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거절당한 닉이 시무룩하게 있던 차에 엘리스의 문자를 받은 것이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괜찮습니다. 갑작스런 제안에 당황하신 것 같아 제가 오히려 죄송합니다."

산보를 거절당했지만, 엘리스가 문자를 보낸 것만으로도 닉은 보상받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렇게 조금씩 다가가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언젠가 엘리스와 가까워질 날이 오겠지.  닉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오늘같이 초승달이 뜨는 날이면 왠지 모를 감상에 젖게 되네요. 닉은 어때요?"

연이어 보낸 엘리스의 문자를 보며 닉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이런 문자는 다분히 연인들 사이에나 주고받는  문자가  아닌가.  닉은 이미  엘리스의 마음을  얻기라도 한 것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도 초승달을 좋아해요. 엘리스와 손잡고 같이 초승달을 감상할 날이 오기를 바래요." 

조금 성급했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과감하게 엘리스에게 다가가기로 했다.

"너무 앞서가지는 마시고요. 오늘은 피곤해서 이만."

엘리스의 문자를 보고 닉은 아차 싶었다. 닉은 입맛을 다시며 생각에 잠겼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엘리스의 문자를 받고 잠시 들떠있던 닉은 다시 가라앉은 기분이 되었다. 그래도 다음 주 커뮤니티에서 또 엘리스를 볼 수 있다. 그 전에라도 메시지를 주고받을 여지가 남아있으니 실망할 건 없다.  초승달을 보며 마음을 달래는 수 밖에 없었다. 

초승달은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달리 보인다. 닉은 아무도 없는 황량한 사막의 모래언덕에 홀로 서있는 것처럼 처량맞은 심정으로 초승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승달 눈을 왜 그렇게 떠
달과 모래언덕 / 출처 : 한겨레신문 ( Royal Observatory Greenwich 제공 )  

닉은 초승달을 볼 때마다 '히포크라테스의 초승달'을 연상하곤 했다. 초승달을 보며 히포크라테스를 떠올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마는 닉이 그러했다.  BC 5세기에 고대 그리스에는 두 명의 히포크라테스가 있었다. 한 명은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이고 다른 한 명은 수학자 히포크라테스이다. 그중에 닉이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은 수학자 히포크라테스였다.

지금쯤 엘리스는 초승달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둥근 눈썹같이 보이는 초승달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련하고 애절한 사연을 지닌 여인의 애처로운 눈길이 연상된다. 초승달 속에서 엘리스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보름달은 눈으로 보지만 초승달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오늘처럼 실감 나는 날도 없었다. 

초승달을 보며 마음을 달래던 닉에게 전화벨이 울렸다. 엘리스였다. 

"피곤해서 일찍 자려고 했는데 잠이 안 오네요. 산보나 같이 하실래요?"

엘리스의 전격적인 제안에 닉은 얼씨구나 좋다고 화답했다.

"좋습니다. 어디에서 볼까요?"

메로나 마을 서편 하늘에 초승달이 애처롭게 떠 있는 이른 밤,  닉은 엘리스와 산보를 했다. 메로나 마을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산책하기에는 제격이었다. 마을 서쪽 숲에는 수없이 갈라져 미로처럼 이어진 오솔길이 있다. 오솔길에는 구부러진 길목마다 벤치들이 놓여있다. 벤치의 색깔은 무지개색이며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빨주노초파남보'의 역순으로 벤치 색상이 달라진다. 닉과 엘리스는 보라색 벤치를 지나 남색 벤치가 있는 오솔길로 향하고 있다. 

숲속으로 꼬불꼬불 이어져 있는 오솔길을 걸으며 엘리스가 슬그머니 닉의 손을 잡았다.  닉으로서는 다소 의외였다.  여인이 남자의 손을 잡는다는 건 손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닉에게는 엘리스가 마음의 문을 열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닉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화사한 얼굴과는 달리 엘리스의 손은 차가운 편이었다. 닉은 엘리스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걸었다. 그러자 엘리스가 닉에게 말했다.

"손이 따뜻하신 걸 보니 마음도 따뜻하시겠어요."

그 말을 들은 닉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정한 거리를 두던 엘리스가 아니던가.  닉은 순간적으로 들뜬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닉은 자신이 왜 메로나 마을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엘리스는 닉의 말을 들으며 때로는 웃기도 하면서 대체로 반응이 좋았다.

                                                                                                                                        (사진 출처 : Pxfuel)

엘리스는 윤리위원의 업무에 대해서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닉은 아무 의심 없이 엘리스가 묻는 대로 답변을 해주었다. 아마도 자신이 윤리위원이라서 관심 표명의 차원에서 질문을 하나보다, 생각했다.  엘리스는 윤리위원회 소속의 다른 윤리위원들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캐물었다. 

"닉과 함께 활동하는 분들이 어떤 분인가 궁금해서요. 다들 마을을 위해 공적인 활동을 하시는 분들인데 주민들이 윤리위원들에 대해 잘 모르더라구요. 많이들 궁금해하기도 해요.  신경쓰이면 대답하지 않아도 되요."

"아닙니다. 말씀드리지요.  윤리위원들이 무슨 비밀요원도 아닌데 말하지 못할 것도 없지요."

닉으로서는 엘리스의 집요한 질문이 의아스럽긴  했다. 그래도 엘리스와 산보하는 이 천금같은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다. 엘리스에게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고 엘리스의 마음속에 닉이라는 존재를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윤리위원들의 신상이라든가 주요 인적 사항들을 엘리스에게 알려줬다. 엘리스는 가볍게 듣는 표정이었다.

엘리스는 다이아나의 죽음과 관련한 질문도 했다. 다이아나의 죽음에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지만 윤리위원회에서는 아무 혐의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닉은 다이아나의 사망과 관련하여 윤리위원회의 처리과정을 아는대로 소상하게 엘리스에게 설명했다. '엘리스가 다이아나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엘리스는 닉의 표정을 읽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질문에 열심히 답변하는 닉을 바라보며 엘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이 사람은 순진한 건가, 아니면 멍청한 건가.  자신의 질문에 아무 의심도 없이 너무도 성실하게 답변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그렇다면 닉이라는 남자는 꽤나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닉이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혹시 초승달에 얽힌 이슬람과 아기 예수에 대해 알고 있어요?"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의 갈등에 관심이 많은 엘리스가 들려달라고 말했다.

"초승달이 이슬람의 상징이 된 이유는, 초승달과 샛별이 떠 있을 때 무함마드가 알라 신으로부터 최초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슬람의 라마단은 초승달이 뜰 때 시작하지요."

진지하게 듣는 엘리스를 보며 닉이 연이어 말했다.

"기독교도 초승달과 연관이 있어요. 바티칸에 따르면 아기 예수가 탄생한 성탄절 12월 25일은 초승달 밤이었다고 해요."

"그래요?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동방박사가 목성과 토성의 별빛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향할 때 동방박사의 밤길을 비춰준 달은 보름달이 아닌 초승달이었어요."

"아기 예수의 탄생을 비추는 달이 환한 보름달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언뜻 생각하면 그렇지만 의미가 있어요. 고대 메소타미아 문명에서 초승달은 원점, 출발, 부활을 의미했어요. 반면에 보름달은 완성의 끝이자 최후의 시간을 의미했지요. "

초승달 눈을 왜 그렇게 떠
(출처 : 한겨레신문)

"닉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초승달에 얽힌 이슬람과 기독교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갑자기 궁금해지는걸요. 더 해주세요. 재미난 이야기가 더 있을  것같은데.'

"그럼 히포크라테스의 초승달에 관해 이야기해 드릴까요?"

"히포크라테스 선서로 유명한 의사 말인가요?"

"아니요. 의사 히포크라테스와 동명이인으로 수학자 히포크라테스가 있어요. 둘 다 고대 그리스사람이고,  활동한 시기도 비슷해요. BC 5세기 무렵이었지요."

엘리스는 눈을 반짝거리며 닉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초승달의 넓이와 이등변 직각삼각형의 넓이가 같다는 것을 증명하는 초승달 구적법(求積法)을 알아냈어요.  그 구적법의 정리를 ‘히포크라테스의 초승달’이라고 부르지요." 

 "시인은 달을 보며 낭만적인 시를 읊조리는데 수학자는 달을 보며 수학 공식을 만들어낸 셈이네요. 그리고 초승달이 뜰 때마다 히포크라테스를 떠올리는 또 한 사람 닉이 있는 거로군요."

엘리스의 말을 듣고 닉이 호쾌하게 웃었다. 마치 자신을 알아주는 단 한 명의 소중한 사람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환한 웃음이었다.  닉은 초승달이 의미하는 바 그대로 자신도 사랑의 출발점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스와의 로맨스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닉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해서든 엘리스에게 전하고, 엘리스와 교감하고 싶어했다.

그런 닉의 마음이 엘리스에게 전달된 걸까.  엘리스가 닉에게 물었다.

"그럼 닉은 초승달을 볼 때마다 무함마드의 계시와 예수의 부활을 연상하며 수학자 히포크라테스를 떠올리고 있는 건가요?"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그렇다면 앞으로 거기에 한 사람이 추가될 것 같아요."

"한 사람, 누구요?"

닉이 엘리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엘리스, 바로 당신이지요. 앞으로 초승달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겁니다."

닉의 말에 엘리스의 마음이 동요했다.  이 남자가 지금 사랑 고백을 하고 있는 건가. 많은 남자를 만나봤어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남자는 처음이다. 엘리스의 가슴에 닉이 훅 들어온 느낌이다. 닉은 체구도 좋고 미남형이어서 호감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첫사랑에 실패한 이후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제 그 생각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엘리스는 생각했다. 

엘리스는 닉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엘리스가 한시적 체류자인 알렉스와 비밀스런 커넥션이 있는 줄을 닉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스는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잠시 닉을 이용한 것뿐이다. 그런 후에 적당한 선에서 닉과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닉은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대화가 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엘리스의 마음이 닉에게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닉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아마도 닉이 무함마드의 계시와 예수의 부활을 언급할 때부터 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닉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초승달을 볼 때마다 히포크라테스와 더불어 자신을 떠올릴 거라는 닉의 말 한 마디에 이제는 엘리스가 초승달을 볼 때마다 닉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닉은 한 번 쓰고 버릴 카드가 아니라 두고두고 삶의 고뇌와 즐거움를 함께 나눌 소중한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닉이 바라보던 히포크라테스의 초승달이 어느덧 엘리스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2부 > /  <끝>

편집 : 심창식 객원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