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왜 일본과 무역을 제한했나

조선은 왜 일본과 무역을 제한했나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28일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한 뒤 이동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반도체 등 3개 핵심 소재 수출규제를 발표하기 5일 전 “안보를 이유로 한 수출규제는 무역투자 자유화를 저해할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펴낸 것으로 16일 뒤늦게 밝혀졌다. 일본 정부 스스로 대 한국 수출규제의 이율배반성을 드러낸 것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주요 20개국(G20) 오사카 정상회의 개최를 이틀 앞둔 지난 6월 26일 ‘2019년 연례 불공정무역 보고서’를 통해 “안전보장을 이유로 한 수출제한 예외를 쉽게 인정하면 자유무역질서가 형해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런 수출규제가 장기화하면 (전세계의) 산업발전과 경제적 혜택이 상실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미국의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른 철강·알루미늄 관세 부과 등 안전보장을 이유로 한 무역제한 조치가 남용될 경우 세계무역기구(WTO) 같은 다자무역체제를 빈껍데기로 만들 수 있다고도 했다.

803쪽에 달하는 이번 보고서는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안보상 이유를 댄 수출제한 문제를 특집으로 다뤘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이 보고서가 발간된 사흘후 G20 정상회의에서 자유무역과 열린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이틀 만인 지난달 1일 한국에 대해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 3개 물품의 수출을 제한했다.

당시 일본은 명확한 근거를 대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안보상 수출규제는 예외로 인정한다는 논리를 폈다.

국제통상법 전문가 송기호 변호사는 “일본 정부가 한국에 수출규제를 가하면서 안전보장에 근거한 무역관리라는 외관을 유지해 왔다는 측면에서 이 보고서는 일본 정부 스스로 한계와 모순을 노출시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의 조치가 무역에 관한 주류입장과 얼마나 동떨어지고 내부적으로도 논리적 기반이 미흡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실제 보고서는 216쪽에서 “미국의 경우에 비춰봐도 과도한 안보상 예외를 인정할 경우 각국이 이를 남용할 수 있다”면서 “결과적으로 글로벌 교역이 위축되고 다자무역체제도 형식만 남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20쪽에서는 중국의 희토류 수출 규제 사례와 비교해 볼 때 자국의 산업통상 운용이 국제규범상 투명하다고 자평했다.

중국의 안전보장 무역관리에 대해선 안전보장 관련성이 결핍된 과잉 수출규제이고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11조 위반 가능성이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GATT 11조 1항은 회원국이 수출허가 등을 통해 수출을 금지하거나 제한하지 못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82쪽 제3장 ‘수량제한’에서는 수출규제 문제를 다루면서 “기업의 예측 가능성을 해쳐 무역투자 자유화를 저해할 수 있다”면서 “수출 수량제한이 장기화하면 산업 발전과 경제적 혜택을 상실할 수 있다”고 밝혔다.

송 변호사는 “일본이 WTO 협정에 위반한 불공정 무역이 무엇인 지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면서 “일본의 수출 규제는 앞뒤가 안 맞는 만큼 WTO와 국제사회를 상대로 일본에 대해 지속적인 명분과 논리상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동아시아 교역망의 발달

 명‧청의 무역 정책

 류큐의 중계 무역

 조선의 무역

 일본의 무역

동아시아 교역망의 발달

 1. 명‧청의 무역 정책


동아시아 교역망의 발달

  • 명의 무역 정책
      조공 무역 정책 : 조선, 류큐, 베트남 등이 명에 조공하고 명은 정규 조공 사절에게 감합부 지급해금 정책 : 민간인의 해외 무역 금지 → 명과 일본 상인이 왜구로 가장하여 밀무역 성행 → 명의 왜구 토벌, 그러나 밀무역 여전 → 16세기 후반 도항과 무역 허용(해금 완화) → 사무역 발달


명의 무역 정책
홍무제로부터 영락제의 치세에 결처(14세기 후반~15세기 초기) 명의 조공 체제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일부에까지 미쳤다. 명은 나라마다 입국 항구를 지정하고 시박사라는 입국 기관을 두어 외국 선박의 왕래를 관리했다. 광저우는 동남아시아 및 그 서쪽의 여러 나라들, 푸저우는 류큐의 입국 지정항이었다.
몽골은 명과 군사적 행동에도 계속해서 주로 무역을 하는 대규모 사절단을 보냈다. 명의 군사력이 약해졌을 때는 사절단의 수와 무역, 즉 명목상 예물교환의 조건을 자기 뜻대로 요구할 수 있었다. 명에 도착한 몽골인들은 중국이 원하는 전마(戰馬)를 가져왔으나, 답례로 명이 과도하다고 생각할 만한 양의 차, 밀, 비단을 요구했다. 명은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몽골을 달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사절단에게 사실상의 공물을 지불했다.
조선은 명의 조공 제도에 봉신으로 참여했다. 매년 세 차례 정규사절단을 보내며 무역과 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졌다.
명과 무로마치 막부 사이의 무역은 통상 감합 무역이라 한다.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1401년 명에 사절을 보내 통교하고자 했다. 왜구에게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던 명은 일본 중앙정부를 통해 왜구를 단속하고자 했고, 그리하여 조공 무역의 형식을 통한 교류를 인정했다. 요시미쓰는 이에 응하여 자신이 명 황제의 신하임을 자칭하고 명의 연호를 사용했다. 일본이 중국과 정식 국교를 다시 맺게 된 것은 견당사를 폐지한 이래 500여 년 만이며, 중국의 책봉을 받은 것은 5세기 왜 5왕 이후로 처음이었다. 감합 무역은 1404년부터 1410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견명선(遣明船)’이라는 교역선이 명과 일본을 왕래하였다. 대명 무역은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에 의해 명과 외교 관계 단절로 잠시 중단되었으나, 막부 재정이 궁핍해진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 시기에 재개되었다. 이 때 감합 무역의 규정도 개정되어, 10년에 조공 한 차례, 선단의 규모는 세 척, 인원수는 300명으로 정했다. 이후에도 1547년까지 11회에 걸쳐 견명선을 보냈다. 일본 조공 사절단은 명의 닝보에서 검사 절차를 마친 후 베이징에 가서 교역했다. 일본의 수입품 가운데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준 물품은 생사로, 네다섯 배에서 20배까지 이익이 남았다.
감합 무역 초기에는 무로마치 막부가 무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막부가 쇠퇴함에 따라 오우치 씨와 연결된 하카타 상인, 호소카와 씨가 지원하는 사카이 상인이 무역을 독점했다. 두 세력이 대외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격렬히 싸우는 과정에서 1523년 닝보의 난이 발생했다. 이 싸움의 결과 오우치 씨가 대명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으나, 1551년 오우치 씨가 멸망하면서 감합 무역도 중단되었다.
한편, 전국시대(1467~1573)에 이르러 무로마치 막부의 힘이 약해지자 막부의 지방 장악이 여의치 않게 되었고, 왜구의 활동이 다시 빈번해졌다. 16세기에 출현한 왜구를 ‘후기 왜구’라 한다.
명조는 중국 상품을 얻으려고 중국으로 도항하는 활동에 대폭적인 제한을 가하는 한편, 중국인들에 대해서는 해금 정책을 적용했다. 연해의 백성이 왜구에 호응하여 행동하거나, 또는 바다로 나가 해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취해진 일종의 쇄국적인 조치였다. 그 결과 중국의 해외 무역 상인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것을 무시하는 자는 밀무역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명조가 취한 조공정책과 해금정책으로 류큐의 중계무역이 활발해졌다.

[주215]

동아시아 교역망의 발달

 1. 명‧청의 무역 정책


동아시아 교역망의 발달

  • 청의 무역 정책
      명과 마찬가지로 조공 무역 정책청 초기의 해금령(천계령) : 반청 운동 막기 위한 천계령 → 무역 위축 → 17세기 후반, 반청 세력 진압으로 천계령 해제 → 나가사키로 가는 청 상선의 수 급증하며 청과 일본의 무역 활발

[주216]

동아시아 교역망의 발달

 2. 류큐의 중계 무역


동아시아 교역망의 발달

  • 배경
      명의 조공 무역과 해금 정책으로 중계 무역 활발(14세기 후반~16세기 전반)
  • 중계 무역
      조공 무역으로 명에서 도자기, 생사 수입 → 일본, 동남아시아 등지에 수출명과 조선에 류큐, 일본, 동남아시아산 물품 수출
  • 쇠퇴 : 명 후기 해금 정책 완화 → 사무역 발달


류큐의 중계 무역
명은 조공 횟수를 국가마다 지정하였는데, 베트남은 3년에 한 번, 일본은 10년에 한 번 정도를 지정해 주었다. 이에 비해 류큐는 1년에 한 번으로 우대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류큐는 공식적인 방법으로 더 쉽게 더 많이 중국 상품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명의 해금 정책으로 명 상인이 해외로 진출하기 어려워진 점도, 류큐 상인이 활동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류큐는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에 걸쳐 명과의 조공 무역을 중심으로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잇는 중계 무역을 왕성하게 전개하였다. 지도에 나온 류큐 왕국의 교역로는 류큐가 명의 상품을 일본, 조선, 동남아시아 등지에 팔고, 각국의 특산품을 배에 싣고 돌아왔음을 보여준다. 해외에서 조달한 물품에 자국의 생산품을 더하여 명으로 수출하고, 다시 배에 중국 상품을 가득 채워 귀환하는 전형적인 중계 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류큐의 조공 무역은 16세기 후반에 해금이 완화되면서 점차 쇠퇴해 갔다.

[주217]

동아시아 교역망의 발달

 3. 조선의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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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과 명‧청의 무역
      조선과 명 : 조공 무역 위주 → 16세기 이후 역관이나 상인들에 의한 사무역 활발, 종이‧붓‧화문석‧인삼 수출, 비단‧약재‧서적 수입조선과 청 : 조공 무역, 개시 무역‧후시 무역 발달, 쌀‧면포‧농기구‧인삼 수출, 비단‧약재‧문방구 수입


조선과 명‧청의 무역
- 조선과 명 : 조선과 명‧청의 관계는 조공‧책봉 관계 속에서 움직였다. 조선은 조천사(명), 연행사(청)로 불리는 사절을 명‧청에 파견하여 정기적으로 조공하였다. 명과 청도 칙사라 불리는 사절을 조선에 보냈다. 조선은 명과 청에 조공하면서 주로 특산물을 공물로 가져가고, 명과 청은 그에 대한 답례 형식으로 회사품을 내려주는 조공 무역이 이루어졌다. 16세기 이후에는 사신을 따라 가는 역관이나 상인들에 의해 사무역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일본산 은을 가져가 중국산 비단 등을 구입해 옴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기기도 하였다. 17세기 초 조선 상인들은 중국산 비단 등을 구입하여 일본에 되파는 중개 무역도 하였다.
- 조선과 청 : 정묘 전쟁을 계기로 시작된 청과의 무역은 이후 경원, 중강, 회령 등 조선의 변경 지역과 청의 책문에서 벌이는 개시 무역(공적으로 허용된 무역)과 후시 무역(사적인 무역-사상들이 전개한 밀무역)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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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조선의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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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과 일본의 무역
      무역 제한 :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정벌(세종) → 삼포 개항과 무역선 수 제한 → 삼포의 난 → 통제 강화 → 임진 전쟁으로 통교 중단임진 전쟁 이후 교역 재개(기유약조) : 조선의 통신사 파견과 왜관 복구, 일본 막부의 국왕사 파견과 각 지역 유력자의 개별 사절 파견교역품 : 쌀‧포목‧인삼 수출, 구리‧유황‧은 수입


왜관
왜관은 양국의 외교와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일본이 비단과 생사 등 중국산 물자를 수입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이 때문에 일본이 은 수출을 금지한 이후에도 왜관만은 예외가 되었다. 또한,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 인삼이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활발히 수출되었다. 왜관은 일본인들이 상주하는 조선 속의 ‘일본인 마을’이었다. 따라서 주변의 조선인들과의 접촉과 마찰 및 조선의 정보가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계속 제기되기도 하였다.

[주218]

[주219]

[주220]

동아시아 교역망의 발달

 4. 일본의 무역


동아시아 교역망의 발달

  • 무로마치 막부와 명의 무역
      명과 조공 무역 → 16세기 중엽에 단절 → 임진 전쟁 이후 명의 상선이 나가사키에서 교역
  • 에도 막부와 청의 무역
      일본의 조공 거부, 조선을 통해 청과 교역막부의 무역량 규제 : 청의 천계령 해제 → 나가사키로 가는 청 상선의 수 급증 → 무역량 제한(신패 발급, 은의 과도한 유출 방지 목적)

나가사키 지도

무역량 제한(신패)
천계령이 해제된 이후 남경선 등으로 불린 청의 무역선의 나가사키 입항이 급증하면서 생사 등의 수입 대금으로 은 유출이 급증하였다. 이에 에도 막부는 청 상선의 수를 제한하기 위해 신패라는 증명서를 발행하여 입항 예정 연도와 무역 허용량을 미리 정하였다. 신패를 소지하지 않은 상선은 입항할 수 없었다.

[주221]

동아시아 교역망의 발달

 4. 일본의 무역


동아시아 교역망의 발달

  • 에도 막부와 동남아시아
      슈인선(朱印船) 무역(1604~1635) : 슈인장(朱印狀, 막부의 교역 허가증) 발급과 교역 통제 → 일본 상인의 동남아시아 진출 → 일본인 마을 형성일본인 해외 도항 금지(1635)로 쇠퇴
  • 에도 막부와 유럽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만 나가사키 개방 → 서양 문물 수용, 난학 발전

동아시아 교역망의 발달

 명‧청의 무역정책

 조선의 무

 일본의 무


동아시아 교역망의 발달

  • 명의 조공 무역(감합부 지급)과 해금 정책(→ 밀무역 성행)
  • 명의 무역 정책으로 류큐의 중계 무역 발달 → 명 후기 해금의 완화로 류큐의 중계 무역 쇠퇴


  • 명‧청과 조공 무역, 16세기 이후 사무역 발달, 청과 개시 무역‧후시 무역 발달
  • 일본과는 무역 제한 및 전쟁으로 통교 중단 → 임진 전쟁 이후 교역 재개(왜관 복구)


  • 명과 조공 무역 → 16세기 중엽 단절 → 명의 상선이 나가사키에서 교역
  • 청의 조공 거부, 조선 통해 청과 교역, 천계령 해제 이후 일본‧청 무역 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