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 슈슈의 모든 것 에테르 - lilli syusyuui modeun geos eteleu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에테르 - lilli syusyuui modeun geos eteleu

"편안함과 영원의 장소. 그것이 에테르"

 

화학시간에나 들어봄직한 "에테르"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며

영화는 시작한다.

 

에테르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듯

푸른 들판에서 홀로 음악을 듣는 주인공 유이치

그리고 그 아래로 깔리는 다소 난해한 내용의 게시글들

 

이 영화의 제목 "릴리슈슈의 모든것"

릴리슈슈는 "에테르"를 음악으로 구현한 자다

 

류이치는 릴리슈슈의 인터넷 팬사이트인 "리리피리아"의 운영자이며, "피리아" 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에테르에 대한 상당히 높은 수준의 탐구와 체계적인 이론을 정립하고 있는 자로써 릴리슈슈의 팬들에게 정평이 나있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서 이지메를 당하는 중학생일 뿐이다.

절친했던 친구인 호시노의 괴롭힘이 두려워 ,

그가 시키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중학생.


벗어나고 싶은 지옥과 같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탱해주는것은 릴리슈슈의 음악과

"에테르"의 세계를 함께 공유하는 릴리슈슈의 팬들.

 

특히 "아오네코" 라는 유저와의

 심도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대화는 유이치의 에테르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며,

현실에 지친 유이치를 위로해준다.

 

 

하지만 종국에 아오네코가 자신을 괴롭히던 호시노라는 것을

아는 순간, 유이치의 에테르와 현실 세계의 경계는 붕괴된다.

아니 그 보다, 그토록 의지해왔던 것의 전부가 소멸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에테르의 세계에서 함께 자유로운 유영을 하던 자가 바로 현실에서 유이치의 안티-에테르(잿빛시대), 통칭 지옥의 창조자라니 !


사실 아오네코가 호시노 였다는 것을 가장 늦게 안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 유이치이다.

관객들은 아오네코의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고,

유이치의 혼란과 상실감을 그저 천천히 지켜볼 뿐이다.

그래서 더욱 더 처절한 슬픔을 느낄 뿐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한다.

끝없는 행복감을 누릴 것만 같은 나만의 천국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깊은 수렁에 빠져버리게 하는 나만의 지옥


( 호시노에게는 가족의 이산과 각각 쿠노네와 츠다네의 소유로 돌아가 버린 공장과 집이 그들만의 지옥이 되는 것이다.
  이 지옥은 호시노를 지독히도 변모시켰고,
  츠다에게는 원조교제, 쿠노에게는 이지메, 절친했던 유이치에게 이지메,괴롭힘이라는 지옥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

 

이와이 슌지 감독은,

" 교점없이 끝없는 평행선을 이룰 것 같은 이 두 세계가 사실은 매우 '근접하게' 맞닿아 있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공장 안에서 성폭행 당하는 쿠노의 상처, 첫사랑인 쿠노를 끔찍한 구렁텅이에 밀어넣은 유이치의 슬픔

이 와중에 뻔뻔스럽게도 잔잔히 흐르는 피아노 음악

 

부조화스럽게 느껴지는 이 두 종류의 이미지가

사실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공장에서 쫓기던 쿠노를 담아낸 앵글과 

오키나와에서의 한가로움을 담아냈던 카메라 앵글

전혀 다른 성격의 씬을 비슷한 앵글로 담아낸

감독의 의도는 무엇인가.


에테르이자 동시에 안티-에테르

천국이자 동시에 지옥

 

이 세계에 만연한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뱅골 보리수(교살 식물), 큰 나무에 점점 들러붙어 죽여버린다.

산호초, 자잘한 촉수를 늘려 옆의 산호초를 죽여버린다.

우리에겐 자연의 낙원일지도 모르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생물에겐 지옥일지도 모르지

자연이란 그런거야 생과 사가 이웃이 되는 장소

그래서 이 여행을 멈출 수 없는 이유라 이거지"


오키나와에 만난 아저씨가 남긴 말은

어리둥절한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친절한 해설지가 된다.

 

자연은 낙원이자 지옥,  생과 사가 이웃이 되는 장소

 

슬픔도 곧 행복으로 뒤바뀔 수 있다는 근거없는 낙관론도

 

행복이란 곧 슬픔으로 변할 수도 있는 단지 일시적이며

얕은 감정이라는 대책없는 비관론도 아닌

 

정확히 중립의 자세에서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인생은 낙원이자 지옥, 생과 사, 행복과 슬픔이 이웃이 되는 장소

그래서 이것은 삶을 멈출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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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행복을 줄 수 있는 것과

절대적인 슬픔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지옥을 피해 절대적인 행복감을 누리는 에테르에

안착하려는 일방적인 생각은 허황된 것이다.

 

또한 두 세계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인생의 일련의 과정에서 겪을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연결위에 놓여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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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태어난 것은 1980년 12월8일 22시50분 이 날짜는 존 레넌이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에게 살해당한 일시와 완전히 똑같다. 하지만 내게 있어, 이 우연의 일치는 의미가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날, 그 시각에 그녀가 태어났다는 사실뿐이다. 그녀의 이름, 릴리 슈슈….”

분노의 계절을 잊었던가. 푸른 꿈보다는 살의(殺意)가 더욱 치밀어올랐던 그 시간들을. ‘데미안’마저 부재했던 그 완벽한 고립의 시간들을. 이와이 순지의 최근작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14살의 봄, 유충의 시대를 끝내고 음울한 누에고치에 갇힌 번데기의 계절로 접어든 ‘소년, 소녀들의 모든 것’이며, 의 영상적 화사함과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의 주제적 어두움을 한 작품 속에서 완벽하게 조율하게 된 감독 ‘이와의 순지의 모든 것’이다.

눈이 시린 초록빛 논 한가운데 소년이 서 있다. 대기 속을 부유하는 ‘릴리 슈슈’의 음악에 빠진 소년에게는 오로지 그녀의 음악만이 탁한 세상 속에서 호흡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관이다. 이런 아이들이 밤이 되면 릴리 슈슈의 팬사이트인 ‘릴리 필리아’의 대화창에서 만난다.

“리리의 에테르에는 특수한 힘이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치료해줘.”

“우리가 하찮을 존재일지라도 살아갈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힘….”

“내 등을 갈기 찢고 하늘로 춤추며 올라간다!”

“난 하늘을 날고 있다, 날고 있다! 날고 있다!”

학교에서, 식탁에서 묵묵히 침묵만을 유지하던 그들은 빠른 키보드 소리 속에 웅변하고, 모니터를 향해 절규한다. 그러나 그들은 ‘파란 고양이’, ‘필리어’ 등의 닉네임 뒤에 앉은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누군가의 배에 칼을 꽂기 전까진.

펄럭거리는 흰 커튼과 왁자지껄한 교실, 사선으로 빛이 스며들어오는 복도, <불꽃놀이 아래서 볼까, 옆에서 볼까> <러브레터> 까지 교실은 이와이 순지의 변함없는 무대였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도 드뷔시의 <월광>과 <아라베스크>가 피아노 선율을 타고 넘나드는 교실은 여전히 따뜻한 빛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제 그는 추억을 끝내고 기억한다. 벨 듯이 날카로운 기억으로, 그 지옥 같았던 유년을 잔인하게 기술한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에테르 - lilli syusyuui modeun geos eteleu

열네살 소년 유이치는 반항하지 않는다. 자신을 괴롭히며 돈을 뜯어내는 친구들에게도, 동정없는 세상에도, 그는 그저 조용한 먹잇감일 뿐이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한때 유이치의 친구였던 호시노다. 그는 교실의 생태계 속에 살아남기 위해 ‘오색 왕나비의 날개’를 스스로 찢어버리고 ‘송곳니’를 얻는다. 호시노 패거리에 덜미를 잡힌 소녀 츠다는 “모든 남자들이 고객으로 보일 정도”로 원조교제를 해야 한다. 피아노에 소질이 있는 쿠노 요코(<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 <엔타운>에서 아게하로 나왔던 바로 그 소녀!)는 이지메에 이어 집단강간을 당한다. ‘우화(羽化)할 시기가 지나도’ 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누에고치 속에서 아이들은 썩기 시작한다. ‘조숙한 자부터 차례차례, 내부에서부터 조금씩조금씩.’ 부패의 속도는 릴리 슈슈의 ‘에테르’(정기)가 막아내기엔 너무나도 강하고 빠르다. 그리고 아이들은 릴리 슈슈의 콘서트장 앞에서 친구의 칼에 의해 무릎을 꺾이며, 송신탑 아래서 제비연처럼 비상하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렇게 2000년 12월8일,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15살의 봄은 잔인하게도 찾아왔다.

이미 십여년 전 그 분노의 계절을 이겨냈던(그러나 과연 이겨냈었던가!) 나는 2001년 부산의 한 극장에서 ‘릴리 슈슈’와 조우했다. 그리고 그녀의 에테르에 휩싸인 채 유이치를, 호시노를, 츠다를, 쿠노를 만났다. 핑크빛으로 포장해 던져두었던 내 ‘살의의 시간들’이 떠올라, 허망하게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여름 논을 볼 때면 가끔 멍해진다. 미칠 듯한 초록색의 물결이 뇌수 속을 유영한다. 악취미라고 욕할지라도, ‘이와이 월드’로부터 날아든 이 슬프고 아름다운 초대장을 이제는 함께 펼쳐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