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음악가이자 작가 한돌. 사진 조현 기자


‘코로나19 사태’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코로나는 엎친 데 덮친 충격이다. 이 충격은 일시적 재앙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코로나가 근본적인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이 전환의 시기, 우리는 어떻게 살며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할까. 선각자의 혜안을 얻기 위해 휴심정이 플라톤아카데미와 공동으로 ‘인생 멘토에게 코로나 이후의 길을 묻다’ 시리즈를 진행한다. 4주 간격으로 10회에 걸쳐 연재하는 시리즈의 네번째 인터뷰는 음악가이자 작가인 한돌이다.


코로나19는 모든 사람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개인에게 다가오는 위협의 크기는 공평하지 않다. 자영업이 무너지고 실직자가 늘어나고 그늘이 짙어갈 때, 더욱 가파른 생계 위기에 처하고 더 고립되고 더 외로운 처지에 내몰리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1등(승자)을 우상화하는 자본주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꼴찌와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약자를 위해 노래를 짓는 치유음악가 한돌(67)을 지난 7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정발산 기슭에서 만났다.

10분이면 올 길을 정발산을 넘어서 30분 걸려 왔다는 한돌은 효율 제일주의인 자본주의 사회인은 아니다. 30여년 전 야전 잠바를 입고 방송국에 갔다가 피디에게 군소리를 듣고 ‘이곳은 내가 올 곳이 아니다’라며 발걸음을 끊은 그는 조명·의상·분장으로 포장한 세상 속에 부적응한 대중음악가다. 일산에서 가장 싼 5천원짜리 미장원에서 머리를 깎으면 막걸리 아홉병 값이 생기고, 버스비를 아끼면 막걸리 한병 값이 생긴다는 그다. 그러나 걷기를 즐기는 것이 꼭 막걸리 때문만은 아니다. 정발산 아래 들어가 20여년째 살아가는 그는 누군가를 만날 때 산을 넘어가서 만난다. 상대를 신선한 눈으로 보기 위해서다.

정발산에 오르내릴 때 그 흔한 ‘브랜드 아웃도어’조차 걸쳐본 적도 없으니, 그가 국민 애창곡인 <홀로 아리랑>과 <개똥벌레>의 작사·작곡가임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일부러 떠는 궁상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개똥벌레로 살아가고 있다. 최근 그가 펴낸 <늦었지만 늦지 않았어>(열림원 펴냄)엔 그런 자전적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강원도 춘천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온 한돌은 친한 친구가 없던 차에 중학교 1학년 때 유급을 당하면서 왕따가 되고 말았다. 공부를 내팽개쳐 고등학교 때는 전교 꼴등을 하고,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대를 지원해서 떨어지고, 화가가 되고 싶어 미대를 지원했다 떨어져 영영 대학을 포기했다. 군대 훈련소에서도 이른바 ‘고문관’으로 체벌과 구타를 당하고, 제대해서는 외딴 빈집에 살다가 간첩으로 경찰에 신고를 당하기도 했다. 한돌은 중·고교 때부터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고 땅만 보고 걷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그때 눈에 낀 외로움 탓에 하늘은 언제나 흐리게 보였다. 스스로 사람들을 볼 수는 있지만,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같다고 생각했다. 골수에 맺힌 외로움은 자폐 증세가 돼 지금도 사람을 만날 땐 4명이 상한선이다. 초대를 받은 자리에서도 4명 이상이 되면 그는 남모르게 자리를 뜨고 만다. 사람이 많아지면 더욱 외로움이 꿈틀대며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런 외로움 속에 만든 노래가, 방송에 나간 적도 없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꼴찌를 위하여>였다. 이 노래만 뜨면 그도 신산한 삶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을 터다. 그러나 학부모들로부터 항의 전화가 몰려왔다. ‘노래를 그따위로 만들어서 우리 아이가 공부를 안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에 대한 연민의 감옥에서 살았던 것만은 아니다.

“성남 골목에서 아버지가 운영하던 코딱지만한 약방 골방에 야전침대를 하나 놓고 유일한 벗인 기타를 안고 살았다. 약방 맞은편엔 자그마한 영세 공장이 많았다. 야근하려고 잠 안 오는 약을 사러 오는 공장 아이가 많았다. 이를 악물고 잠을 이기며 일하는 아이들이 일하는 공장의 형광등 불빛은 개똥벌레 같았다.”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 저기 개똥 무덤이 내 집인걸/ 가슴을 내밀어도 친구가 없네/ 노래하던 새들도 멀리 날아가네/(…)/ 아아, 외로운 밤 쓰라린 가슴 안고/ 오늘 밤도 그렇게 울다 잠이 든다’

<개똥벌레>는 그 자신과 공장 아이들의 외로움을 표현했기에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골수에 맺힌 외로움과 아픔이 타인의 외로움과 아픔을 치유하는 거름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상처받은 치유자’다. 그는 자신을 보도블록 틈에 피어난 민들레라고 표현했다. 그러니 부모나 교사도 민들레를 짓밟지 말아달라고 호소한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도 한 가지 재능은 갖고 태어난다고 봐요. 만약 그 재능을 귀히 여긴다면 즐거운 인생을 사는 것이고, 업신여긴다면 어려운 인생을 사는 거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는 스무살 넘도록 그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오래전부터 제 마음속에 음악의 씨가 자라고 있었지만 저는 그걸 재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거든요.”

그러나 그가 더욱 중요시하는 것은 재능보다 진정성이다. 남을 의식해 유행을 따라 살며 겉멋만 들면 자신의 젊은 날처럼 허망한 인생이 되고 만다며 젊은이들에게 당부한다. “저도 젊은 날엔 인생은 꾸미는 것이 아니라 가꾸는 것이란 걸 몰랐어요. 어떤 집에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데 그걸 몰랐어요. 그러니 무엇을 배우든 남에게 보여주려고 배우지 마세요. 남을 의식하면 기교를 배우게 되고, 기교에 치중하다 보면 기본을 놓쳐요. 악기를 배우고 싶거든 악기와 한 몸이 되도록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해요. 문학을 일구려면 문학과 한 몸이 돼야 해요. 1등 하려고 공부하지 말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해요. 실용음악과를 졸업한다고 모두 가수가 되고 연주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미대를 졸업한다고 모두 화가가 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원하는 대학에 못 갔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어요. 간절함이 있다면 대학 같은 들러리 때문에 인생이 흔들리지 않아요.”

조현 종교전문기자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한돌의 천천히 철학

‘빨리빨리’가 몸에 밴 ‘다이내믹 코리안’이 코로나 답답증에서 벗어나고픈 조급증이 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한시도 가만히 있기 힘들어하는 아이와 청춘의 조급증은 더하다. 그러나 한돌은 지금이야말로 ‘급할수록 돌아가라’던 ‘천천히의 진리’를 체득할 기회라고 말한다. 그는 “인생엔 정답이 없다고들 하지만, ‘천천히’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정답이 아주 많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지진아였다. 공부도, 운동도 잘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클라리넷을 하고 싶었지만 “공부도 못하는 놈이 무슨 클라리넷이냐”는 담임 선생님의 불호령에 접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기념비적인 노랫말과 곡을 만들어냈다. 음대를 나오긴커녕 제대로 음악 공부 한번 해본 적이 없는 그가 말이다.

“천천히 걸어야 빨리 걸을 땐 보이지 않던 잡초들이 보어요. 천천히 보아야 잡초가 얼마나 예쁜지 그제야 보여요. 산에서 천천히 걸으며 심호흡을 깊게 하면 산신령이 내게 준 노랫말이 드디어 떠올라요.” 자기 재주로는 그런 노랫말을 만들 수 없었지만, 천천히 걷다 보니 하늘에서 노랫말이 뚝 떨어지듯 와줬다는 것이다. 그는 “아이 때부터 조급함을 버리고 더욱 천천히 걸었더라면 내 인생이 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서둘러 어른이 된 나무는 거친 바람에 쉽게 쓰러지지만, 천천히 자란 나무는 쉽게 쓰러지지 않는 법이지. ‘빠름’에 속지 마라. 세상에 기타 3개월 완성이 어디 있으며, 영어회화 3개월 완성이 어디 있느냐?”

그가 몇년 전 <늦었지만 늦지 않았어>란 노래를 만든 것도 자기와 같은 ‘느림보 거북이’를 위해서였다. ‘버림받은 아이들아 내 말 좀 들어보렴/ 들꽃을 보았느냐 저마다 예쁘단다/ 아무리 캄캄해도 희망의 끈 놓지 마라/ 언젠가는 너의 꿈을 만나게 될 테니// 늦었다고 생각 마라 늦었다고 생각 마라/ 늦었지만 늦지 않았어 늦었지만 늦지 않았어/ 미움아 나오너라 우리 한번 안아보자/ 미움아 나오너라 우리 서로 용서하자’

조현 기자


출처: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well/people/975438.html 한겨레 휴심정, 플라톤아카데미‘인생멘토에게 코로나 이후의 길을 묻다’ 5) 천천히 봐야 보이고, 천천히 봐야 예뻐요 (한돌 치유음악가) 인터뷰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필자_조현 기자
걷고 읽고 땀흘리고 어우러져 마시며 사랑하고 쓰고 그리며 여행하며 휴심하고 날며…. 저서로 <그리스 인생학교>(문화관광부장관 추천도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누리꾼 투표 인문교양 1위), 숨은 영성가들의 <울림>(한신대, 장신대, 감신대, 서울신대가 권하는 인문교양 100대 필독서). 숨은 선사들의 <은둔>(불교출판문화상과 불서상), 오지암자기행 <하늘이 감춘땅>(불교출판상).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우리시대 대표작가 300인’에 선정.

친구(잘못된 친구)

본문) 왕하9:27-28

◇잘못된 친구들에 관하여 한 시간 더 살펴보자.
자식의 손가락을 잘라 돈을 벌려고 한 사람은, 다른 표현으로 하면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런 결과를 얻었다 할 수 있다.
"그가 친구를 잘못 사귀었다" 하는 말의 이미는?
그가 가지고 있는 사고의 방향, 다시 말하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느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주관, 가지고 있는 사고 방식이 곧 그 사람의 친구다. 
예를 들면 [나는 남에게 빚을 한 푼도 지고 살지 않겠다] 하는 생각, 그 생각이 바로 그 사람의 친구다.
그러한 사고 방식을, 마음에 가지고 있을 때 그 사고방식이 그 사람을 어디로 인도하느냐 하는 것이 친구다.
만일 여러분이 진리를 몰랐더라면 진리를 모르는 그 세계에서 여러분 마음속에 친구를 모시고 산다.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여러분 나름대로 여러분 안에 친구를 데리고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무엇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고,
어떻게 깨달아서 살고 있느냐?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삶을 주관하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친구를 바로 모시고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또한 연구하고 또 뒤돌아보고 해서 우리의 삶을 고쳐 나가야 한다.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망처지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같이 잘 살다가도, 같은 말씀을 가지고 살다가도 잘못된 사상이 들어오면 그냥 삐뚤어져 나간다.
내내 같은 말씀 가지고 살다가 조그만 한 것이  마음속에 들어와서 속삭속삭하면
그게 부풀어서 온 몸을 다 누룩화 시켜서 삐뚤어진 길로 만드는 것이 바로 사단의 역사다.
바로 여러분 속의 속삭임이다.

◇잘못된 친구를 사귀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지금 성경에서는 무엇을 잘못된 친구라 얘기하는가를 계속 공부하고 있다.
본문의 아하시야도 그가 주관을 뚜렷하게 가지고 말씀의 바른 길을 가고 있었더라면
오늘 이와 같이 죽임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기에, 잘못된 길, 잘못된 친구를 사귀어 가다가 결국은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에게 아사히야와 같은 상황에 들어가지 말라고, 오늘 우리의 경계로 삼기 위해서 이 말씀을 기록해 두신 것이다. 잘못된 줄 알았으면 멈춰야 한다.

◇여러분이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 굉장히 중요하다.
이것은 대인 관계만을 지금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대인 관계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인 속삭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속삭이는 그 속삭임은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말도 못하게 무서운 것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자생하는 것이다.
생각도 안 했던 것들이 일어나서 주님을 대적하고 말씀을 부인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
밖에 사람이야 봐서 아니면 돌아서면 되는데, 이 속에서 속삭이는 속삭임은 참말로 어렵다.
왜 그러냐면 이 안에서의 속삭임은 하나님처럼 나타난다.
이 속삭임이 나타나서 자기가 하나님이라 한다.
영의 세계를 보여준다, 말씀의 깨달음을 준다.
말씀의 깨달음을 주는데 그 깨달음이 옳은 게 아니다. 살짝 왜곡된 것이다.
하와를 유혹했던 그 유혹인 것이다.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깨달았다고 하는데, 잘 살펴보면 그게 옳은 것이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 깨달음 속에 빠져 들어가다 보니까 영 삐뚤어져 잘못 된 길로 가는 사람이 부지기수 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가운데 빠져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항상 빛 가운데 살아야 되고,
나 자신이 잘못된 부분, 나 자신의 문제점,  이런 것을 계속해서 말씀 드리는
근본적인 이유가 그런 속삭임을 잘라 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오늘도 그런 문제를 다뤄 보도록 하자.

빌3:2 <개들를 삼가고>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개의 삶에서 두 가지를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진짜 좋은 것을 좋은 것 인줄 모른다.
귀한 것을 귀한 것 인줄 모르는 것이 개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다.
두번째 개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이다.

◆ {토했던 것}
벧후2:22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다시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개가 토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것 굉장히 무서운 얘기다.
개가 토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도록 하자.
여기 베드로후서에서 말하는 것이 굉장히 광범위 하다.
벧후2장에서 말씀하시는 [개가 토했다는 내용]이 무엇인가 살펴보도록 하자.

◇[토한 내용이 무엇인가?]
[벧후 2: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이 말씀이 토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그러나>-[그러나]는 그 문장의 잎 부분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라 해놓고, 앞 문장의 내용이 어떻하더라도
뒤 문장에는 부정적인 일이 벌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 말씀 철저하게 연구하고, 가르쳐도 이렇게 잘못된 일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왜[그러나] 라고 하시는가? 
벧후1:20-21 의 말씀을 전제해 놓고 [그러나]하시는 것이다.
 :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하나님의 말씀을 사사로이 자기 유익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여러분은 옳은 것이 무엇인지 그른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사로이 푸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일부의 목사들은 [모세가 구스의 여인을 취한 사건]을 목사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하고 나서 미리암과 아론이 비난하고 나서자 하나님께서 미리암에게 문둥병을
주셨다. 이 말씀을 이용하여 목사 자신이 범죄했을 때 자기 변호하는 것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참으로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책망하는 것이니까 교인들은
목사의 잘못된 죄를 지적하면 아니된다고 괴변을 늘어놓고 교인들의 입을 봉쇄하는 것이다.
목사의 죄를 잘못이라고 지적하면 문둥병 걸린다고 가르친다.
그런 것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
목사가 목사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서 교인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 . --이것이 경의 예언을 사사로이 푸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 중에도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설교를 하거나, 가르친다거나, 말씀을 해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것 주의해야 한다. 성경을 해석해 놓고 마음이 높아졌다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높아져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
그것은 사단의 세계가 이루어져 버린 것이다. 사단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그러니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 말씀을 이해 할 수도 풀 수도 없습니다.
억지로 성경을 풀다 보니까 문제가 된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것을 1:20절이하에서 못박아 놓고 2장에 가서
<그러나>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민간에>--백성들 중에, 바깥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안에서 벌어질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 교회 안에서 말한다.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나니>-- 교회 안에서 나온다. 교회 안에서 거짓선지자들이 나와서 삐뚤어져 나간다.
:<너희 중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으리라> --지금 현재도 그럴 수 있다. 앞으로 또 일어난다.
사도 베드로가 [교회는 교회대로 깨끗하게 영원히 보전되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영원히 변치 않고 그대로 있으리라]고 장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는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너무도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베드로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잘못되어 가고 삐뚤어져 갔다. 소위 복음을 깨달았던 사람들 마저도 잘못되어 갔다.
잘 봐야 한다. 분별 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도 그와같은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 들여>
교회안에 이단이 들어오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끌어들인다]는 말은 안에 있는 사람들이밖에 있는 것을
끌어들인 다는 것이다. 원래 교회안에는 이단이 없었는데 교회안에 있는 자들이 가만히 끌어 들인다는 것이다.
요란하게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슬그머니 들어온다. 끌어들이는 본인들도 그것이 이단인줄도 모르고
끌어들이는 것이다.
[가만히]란 말은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들여오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pareisa,gw (파레이사고)는  [가만히 끌어들여 ]라는 말의 희랍어 원어이다.
para 는 [옆에 가까이 붙어서]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a,gw 는 [데려오다. 동반하여 인도하다]는 뜻이다.   
비밀스럽게 교묘하게 끌어들인다는 뜻이다. 옆에 살짝 붙어서 들어오는 모습이다.
이단은 이렇게 들어오는 것이다. 나팔불고 광고하면서 들어오지 않는다.
조용히 그것을 옆에 달고 들어오는 사람 자신도 모르게 살짝 붙어서 들어오는 것이다.
베드로를 보라! 
베드로 자신도 모르게 살짝쿵 갈라디아주의가 붙어서 들어오지 않았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단은 들어오는 것이다. 너무 비슷하여 분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나중에 깨닫고 보면 틀리다.
어떻게 분별하는가?  영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요한일서 4장 1절이하의 말씀이 영들을 분별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시다.
영이 다르면 말씀이 틀리게 나온다. 영이 다르다는 것은 말씀이 틀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을 바로 알고 있어야 영들을 분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단이 슬그머니 들어올 수 있는데는 이유가 몇가지 있다. 
그 중에 한가지가 [게으름]이다. 이 [게으름]은 교회봉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자세히 보라. 처음에 거듭나서는 그 말씀이 듣고 싶고 읽고 싶고 그 말씀에 미쳤는데,
어느 날 가만히 보니까 [게으름] 이라는 것이 슬그머니 들어와 가지고 언제 내가 그렇게 열심을 냈던가?하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슬그머니 들어온다. 하나님의 말씀에대한 우리의 입맛이 변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변질되었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전에는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한 열심이었는데, 이제는 그 열심히 자신을 위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열심인데도 그 열심이주님을 위한 열심인 줄로 생각한다.
미혹되어 있는 것이다.
말씀을 연구하고 전도하는 모든 일에 자기의 자랑이 중심이 되어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주님은 밖으로 쫓겨나서 추운곳에서 헐벗고 굶주리게 되는 것이다.
다른 것에는 다 열심을 내고 있다. 말씀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전도도 열심히 한다. 교회 출석도 열심히 한다.
그런데 진정으로 [게으름]을 피우지 말아야 할 곳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미워하는 것은 죄인줄 알고 시기하는 것은 죄인줄 알고 괴로워하면서도
우리의 삶의 중심에서 주님을 몰아내어 추운곳에서 떨게 하면서도 그것은 깨닫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계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HAN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3절 말씀은 에베소교회가 아주 열심히 일하고 게으르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왜 4절에서는 곧바로 책망을 하셨을까?  그렇게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했으면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닐까? 
이것은 삶의 중심이 어디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열심은 곧 신앙이라고 하는 틀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한 말씀과 아주 유사한 것이다.
[마 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렸다. 열심히 드렸다.
그러나 진정 귀한 것은 버렸다는 것이다. 그 귀한 것이 무엇이냐?  의와 인과 신이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과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외형적인 신앙은 잘 이루어졌는데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내적인 것은 전혀 무시된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다.
외적인 일에는 부지런하고 충성스러운데
하나님이 보시는 내적인 일에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기서 처음 사랑이라는 말은 원어성경에
th.n avga,phn sou th.n prw,thn  이라고 길게 되어있다.
th.n (텐) 대격 정관사로써 [그]
avga,phn (아가펜) 대격 명사로 [사랑을] 
sou (수우) 속격으로 [너의]
prw,thn (프로텐) 대격 형용사로써 [가장 중요한, 첫째로 ] 등의 뜻이다.
prw,thn (프로텐)은 순서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가장 중요한]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
[첫째, 처음]은 가장 중요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번역을 해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그 가장 중요한 그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뒤의 문맥으로보다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옳고 또한 원어가 그와같다.
에베소교회는 가장 중요한 그 사랑은 버리고 오직 열심으로 일만 하면 되는 줄로 알았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도 모르고 외식하는 자리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잘 나태내 주고 있는 말씀이다.
이것은 자기를 높이는 외식에는 부지런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는 게으른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사랑이라는 것은 오래 될 수록 무르익은 것이다.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었는데도 마음은 점점 무르익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처음에는 냄비에 라면 끓듯 변덕이 많지만,
세월이 오래 지나면 지날수록 뚝배기 장 끓이듯 오래도록 끓으면서 식을 줄을 모른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 심령이 그래야 한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두 사람의 사랑이 여전 한 대, 왜 우리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흐리멍텅해 지는가? 왜 그런가?
하나님에 말씀에 대한 사랑이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피흘리셔서 속죄를 이루신 그분에 대한 감정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변할 수가 있는가? 변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이란 갈수록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이다. 가다가 막히고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님 안에서, 정말로 그 분 안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정말로 그 분의 세계를 알고 나면,
다른 것은 바라보기도 싫다. 다른데 가봐야 뻔한 것 아닌가?. 거기 들어가서 속 썩일 일이 뭐 있는가?
몇 달 지나면 다 그렇게 흐지부지 돼 [설교야 1주일에 한 번만 들으면 돼지] 하게 된다.
이상하게 하나님 말씀 처음에 들을 때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런데 가면서 점점 사랑이 식어간다. 왜 그런가?  왜 그리 변덕이 죽 끓듯 하는가?
정말로 진리가 좋아서 진리를 찾았다면 그럴 리가 없지만 한쪽 구석에 세상사랑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세월이 지나면서 세상 것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것이다.
진실로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교제는 인정의 관계로 맺어지면 반드시 후회 할 날이 온다.
말씀으로만 맺어져야 한다. 여러분들이 인정으로 교제를 맺으면 안된다.
. 인정으로만 맺어지면 복음마저도 흔들린다. 말씀안에서는 인정 기대해서는 안된다.
여러분들, 절대로 형제, 자매간에 인정으로 맺지 마세요. 서로가 잘하지 말라는 얘기 아닙니다.
서로 자기를 희생해 가며, 형제를 위해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인정으로만 관계를 맺어 가지고는 안 된다. 
말씀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런 인정 관계에서 떠나야 한다.
그래야 저쪽에서 내게 잘못을 해도 내 마음이 전혀 섭섭한 것이 없게 된다.
섭섭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김목사한테 섭섭한 것이 있는가?
아니면 내가 여러분에게 섭섭한 것이 있는가?
[인정으로 교회에서 관계 맺지 말자, 말씀만 바라보고 살자]
'자 사람 나한테 잘해 그러니까 교회 나가야지' 그래서는 안 된다.
말씀이 좋으니까 나가야 한다. 말씀만 가지고 살아야지 다른 것 가지고 왔다 갔다 하면 나중에 그것 깨진다.

베드로후서로 다시 가보자.
:<자기들의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하나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상태를 얘기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상태를 얘기한다.
그래 가지고 인간적인 관계가 더 귀한 것으로 자리하고 있다. 얼마든지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열심을 가지고 맺어지면]
목사와 교인들 간에 열심을 가지고 맺어지면, 목사도 좋아하고 교인들도 칭찬을 받으면 좋아하니까,
그런 관계로 맺어질 수 있다. 열심으로 맺어져서는 안 된다.
[헌금을 많이 하고 적게 하는 관계로 맺어져서는 안 된다]
헌금의 과다에 따라서 맺어져서는 안 된다. 그런 관계는 전혀 없어져 버려야 한다.
그런 관계는 없어져 버리고 오직 하나님 말씀 안에서
[저 형제, 저 자매 속에서 이 말씀이 얼마나 이루어지는가]
그것만 목사는 바라봐야 한다. 딴 것 아무 것도 바라보면 안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그것이 우리 주님을 시인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돈을 얼마나 많이 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느냐 그게 문제다.
그게 문제지 우리가 얼마 냈냐 안 냈냐가 문제가 아니다.
[자기들의 사신 주를 부인했다는 것은] 토했던 것으로 다시돌아가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전혀 다른 관계로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관계가 맺어지고,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아니고,
다른 관계로 맺어져 사는 것을 말한다.
거듭남도 은혜고 생활도 100% 은혜다. 우리가 뭐 했다고 자랑 할 것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사신 주를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별로 관심 없고, 얼마나 큰 예배당을 잘 꾸미느냐
이것만 관심이 있으면 그것도 사신 주를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신 주를 부인했다는 말 잘 이해해야 한다. 까닭 하면 잘못 생각한다.
[나 예수 안 믿어!] 하는 것을 예수 부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정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 가셔야 한다. 조금 더 깊이 들어 가서 알고, 주를 부인하시는 분들이 없기 바랍니다.

[주를 부인하는 예]
<뭐 구원받았으면 됐지 천국은 받아 논 밥상인데 그럭저럭 살면 돼지>
이것 주를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만 두실 것 같은가?
그 귀한 보혈을 짓밟는 사람을 가만 두시겠는가 생각해 보라?
자기의 독생하신 아들을 희생 시켜, 이것을 이뤄 놓으셨는데, 가만 계시겠는가?
히브리서 말씀에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느니라] 하신다.

◆교회가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하나님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정말로 바라고
하나님 말씀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면, 그것이 가장 중심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 교회는 주를 부인하는 것이다. 목표가 딴데 있으면, 관심이 딴데 있다면 그것은 주를 부인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엇이 주를 부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일례로 [교회가 인정에 매이다 보면, 집사를 세우는데도 인정에 메이게 된다].
성경의 기준대로 거기에 합당한 사람, 정말 복음을 위해 살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인정에 메여서 집사를 세우다 보니까 교인들 중에 집사 아닌 사람이 없다.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주를 부인하는 것이 무슨 말인지 잘 아시고, 주를 부인하는 삶을 사시지 마시기 바란다.

:2절 <여럿이>-
누가 잘못 되어 가면 반드시 추종하는 사람이 생긴다. 아무리 잘못 되어도 그것이 옳다고 하는 사람이 생긴다.
:<저희 호색하는 것을 쫓으리니>
[호색]의 원어는
avse,lgeia,[앗셀게이야] → 나쁜 짓 하는데 허가 낸 것, 제멋대로 하는 것,
또 다른 표현으로 이성에 관하여 확 풀어진 사람들, 성 개방하는 사람들.
하나님께 순결을 지켜 말씀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저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음란과 호색은 인간적인 욕심만을 의미하지 않고
도를 배신하고 비진리를 추종하는 것을 말씀한다.
자기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나쁜 짓을 하는데 유리하게 말씀을 해석한다.
그래서 나쁜 짓을 합리화시킨다. 안 되는 얘기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개]가 토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과거에 그런 더러운 곳에서 살던 거기서 빠져 나와서 거듭났다고 살다가,
그것이 그리워서 토해 놓은 것, 옛날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도 그렇게 되기 쉽다. 무서운 얘기다.
2장 1절 말씀은 토했던 곳으로 돌아간 것이다 [자기들의 사신 주를 부인하고].
거기서 빠져 나왔으면, 거기 또 들어가지 말라.
이런 부분들은 여러분의 밖에서 침범해 들어온 경우가 있고, 여러분 안에 사단의 속삭임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 두 가지 다 잘라 버릴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넘어간다.

벧후2:17-21
:17<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이 사람들 어떤 사람들인가? 지금 까지 얘기한 사람들이다. 친구들이다.
잘못된 친구들이다.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
:<물 없는 샘>--샘은 샘인데 물 없는 샘이다.  말로만 풍성한 사람들이다. 삶은 없다.
말로는 다 되는데 실제의 삶은 전혀 변화가 없고 말씀에 촉촉히 젖어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메말라 있는 상태를 유지 하면서도 자신들의 메마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주님의 샘물은 아무리 퍼내도 또 나오고 또 나온다.  아무리 퍼내도 나온다.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안개는 정함이 없다. 안개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길을 잃도록 한다.

:18절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진리를 말하며 진리가 그 입에서 나오면,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지만,
이 사람들은 사람들을 사망으로 몰고 들어간다.
:<미혹한데서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    혹하여>
겨우 거듭나서 사람될 만한 것을 끌고 간다.
겨우 거듭나서 사람 될 만한 사람들 끌고가 잘못된 사상 집어넣는다는 그 얘기다.

:19절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무슨 얘긴가?
여기서 [자유를 준다]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도덕폐기론을 실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이 사람들이 얘기하는 [자유]라는 것은 진리로 부터도 자유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진리에서도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서도 자유를 얻었으므로
아무 것도 행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은 그냥 되는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간음을 해도 괜찮고, 살인을 해도 괜찮고, 도둑질해도 괜찮고 그런 것은 죄가 하나도 아니라 한다.
죄를 짓지 않으려는 마음은 아직 자유를 얻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다. 완전한 도덕폐기론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유]의 참된 의미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자유는 그런 식의 자유가 아니다.
그게 자유인가 아닌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도덕폐기론자들의 자유는 완전히 사단에게 패배한 결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단과의 싸움에서 졌다. 누구에게 졌는가? 마귀에게 졌다. 그래서 마귀의 종 일 수밖에.
●친구를 잘못 사귀면 이렇게 된다. 그 사람이 [개]인가, [돼지]인가 잘 보라.
누구를 만나든지 잘 보세요. 과연 옛것을 다 토해 버렸다가 다시 그리로 가는 사람인지 아닌지 잘 보시라.
보시면 금방 분별이 간다.

※그들의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20절 <--그 나중 형편이 처음 보다 더 심하니라>
이상하게도 구원을 받지 않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그 속에서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하고나서 삐뚤어져 나간 사람은 완전히 엉망이 되고 만다.
완전히 도덕 폐기론자 되어 버린다. 사도 베드로가 지금 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21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 버리는 것 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리라>
차라리 몰랐다면 저런 짓은 안 할텐데.
성경을 조금 깨달아 알아 가지고 저 지경이 되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저 지경은 안됐을 텐데.
이 사람들은 말만 묘하게 잘한다. 말은 어떻게나 잘 하는지 모른다.
어린 사람들은 백발백중 그 유혹에 빠진다.
※개, 돼지 사귀지 마라. 토했던 곳으로 다시 들어간 자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보시지 않는다.

아버지 하나님 악한 동무들에게 귀 기울이지 말게 하시고, 속아넘어가지 않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 주님의 형상 안에 집어넣기 위해서 구속하셨습니다.
세상의 악한 동무들은 우리를 거기서 빼내서 사단의 모습 닮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그 가운데 달콤한 유혹 받아서 끌려가지 않게 하시고,
주님 사랑 속에서 아버지의 음성 들으며 분별 할 수 있게 하시고,
주님의 모습보고 주님의 음성 듣고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