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사의 기능과 위상1) 언론 삼사의 결성 과정과 각각의 위상일반적으로 삼사(三司)는 사간원(司諫院)·사헌부(司憲府)·홍문관(弘文館)을 합해 부르는 명칭으로, 언론기관 계열의 세 관청이라는 의미이다. 성종 대
이전까지만 해도 삼사라 할 경우에는 언론 삼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관청 3곳을 묶어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성종 대 홍문관이 설립되면서부터 삼사는 언론 삼사를 의미하게 되었다. 홍문관은 본래 언론기관은 아니었으나 홍문관이 언론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사간원·사헌부와 연대해 활동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삼사라 하면 으레 언론 삼사를 의미하게 되었다. 언론 삼사로서의 삼사라는 용어는 대략 성종 대 그 기초가 닦아지기 시작해 선조 대에 이르면 일상적으로 통용되기에 이른다.
<실록사료1> 신 등은 생각건대, 대간은 풍속과 사회 기강을 맡은 관사이고 형조는 법을 집행하는 기관입니다. 『태종실록』권2, 1401년(태종 1년) 10월 27일(임오), 첫 번째 기사 위 기사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사헌부와 사간원은 풍기를 관장하는 관사로 인식되고 있다. 이때 풍기를 맡는다 함은 조정 및 민간의 기강 유지를 위해 활동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이 두 관사에서는 조정 관료들은 물론 일반 백성에 대해서도 유교적 규범을 잘 지키는지를 감시하고 문제점이 발견될 경우 탄핵해 처벌받도록 하는 업무를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삼사는 공론 주재 기관삼사는 공론을 주재하는 언론기관으로서의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다시피 조선은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나라이다. 왕도정치의 추구 속에 덕치와 인정이 베풀어지는 왕정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적인 군주정을 이루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군주가 언론을 너그럽게 수용한다는 ‘납간(納諫)’이라는 미덕이었다. 왕은 백성들의 목소리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인다는 입장이라 할 수 있는데, ‘천하는 군주 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라 천하 만민의 천하이다’라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의 입장에서, 군주의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정치 운영을 지양하고, 공론을 통해 정치를 운영한다는 지향이라 할 수 있다. <실록사료2> 사신은 논한다. 공론은 비록 삼사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 형세가 혹 막히면 반드시 대신이 일어나서 아울러 보고를 올리고 나서야 임금이 그 말을 믿고 사람들이 의지하는 바가 있어서 공론이 크게 행해지게 되는 것이다. 『명종실록』 권31, 1565년(명종 20년) 1월 13일(신해), 첫 번째 기사 위 기사는 대간뿐만 아니라 홍문관을 포함한 언론 삼사가 공론의 주체임을 언급하고 있는 기사이다. 이처럼 대간과 홍문관의 언론은 기본적으로 공론으로 인정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대간에서 안건을 한 번 발의하면 그것이 수용될 때까지 고집스럽게 주장하곤 했다. 또한 그러한 삼사의 공론이 막힐 경우엔 대신이 직접 군주에게 삼사에서 아뢴 공론을 전달해 결과적으로 공론이 통용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인식되고 있었다. 3) 삼사 사이의 위상 차이와 대외적 영향력삼사는 언론기관으로서 각종 현안에 서로 보조를 맞추며 공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삼사 각각의 위상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삼사 가운데서는 홍문관의 위상이 가장 높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홍문관이 배후에서 사간원과 사헌부의 언론을 이끌어가는 양상이 굳어지게 된다. 대간이 민감한 사안에 적극적으로 언론을 제기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거나, 혹은 권력의 눈치를 보며 발언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는 방식으로 대간의 언론을
관리하고 있었다.
<실록사료3> 전교하기를, "만약 대간에게 끌려서 대간이 옳다 하면 따라 옳다 하고 대간이 그르다 하면 따라 그르다 하여, 오직 대간의 의사만을 따른다면 권세가 대간에 돌아가서 국가의 위태로움이 기약 없이 저절로 이를 것이니, 대간의 말에 이끌리지 않고 거리를 두는 것이 마침내 정의일 것이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권29, 1498년(연산 4년) 2월 11일(정축), 첫 번째 기사 위 기사는 무오사화(戊午士禍)5) 이전 연산군과 삼사의 갈등이 커가는 과정에서 연산군이 대간을 향해 내뱉은 말이다. 대간의 말에 따라 시비가 결정되는 것이 옳지 않으며 그럴 경우 권력이 대간에게 돌아가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연산군의 주장이다. 비록 홍문관에 대한 언급은 빠져 있지만 이미 대간이 홍문관의 영향력 가운데 있게 된 상황에서 권력이 대간에게 돌아간다는 말은 권력이 홍문관으로 대표되는 삼사에게 돌아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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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림이란 무엇인가?1) 실록에 등장하는 사림이라는 용어국사교과서에서 사림이라는 개념은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낙향한 온건개혁파 사대부의 제자 혹은 그 후예들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성리학 사상에 전념하며 향촌 자치를 추구하다가 성종 대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한 인사들이다. 그리고 조정에 진출한 지방 출신 사림들은 언론 삼사에 포진해 훈구세력과 대립하며 국왕권 강화에 일조했다고 설명되고 있다.
<실록사료1> 대사간 유세침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다. (중략) 성종께서 20여 년 배양한 선비들이 잇달아 저자에서 주륙을 당하여 하루에도 10명이나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림(士林)이 기운이 손상되어 말하기를 싫어하였으므로, 수십 년 동안에는 반드시 바른말 하는 선비가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너그러이 용납하고 아껴주는 마음으로 말하는 자를 인도하기를 전대의 임금보다 10배로 하지 아니하시면, 위험을 무릅쓰고 정당한 언론을 행하는 이가 결국 전하의 곁에 이르지 아니할 터인데, 어찌하여 대간을 가리켜 군주의 말을 거역한다거나, 이기기를 힘쓴다거나, 군주를 기망한다는 말씀을 계속 내리십니까? 『중종실록』 권7, 1508년(중종 3년) 11월 22일(병진), 두 번째 기사 위 기사는 중종 3년 사간원에서 올린 상소로 연산군이 사류를 주륙해 사림의 기운이 손상되어 당분간 현안에 대해 시비를 분간할 사람이 없게 되었으므로, 임금은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연산군의 폭정이 사림의 사기를 손상시켜 제대로 된 언론이 제기되기 힘들어졌으니 군주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언론을 너그러이 용납해 주어야지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2) 사림은 공론의 대변자라는 의미사림이라는 용어는 도덕적 평가를 주도하는 가상의 집단으로 설정되는 한편, 공론을 전달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실록사료2> 그 의논에 또 ‘중대한 일을 일으킬 때에는 큰 의리를 따라야 하고 잡의(雜議)는 돌볼 것이 못된다.’ 하였는데, 이른바 잡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신들은 모르겠으나, 신들의 말이 현실적이지 않다 하여 잡의라고 지칭하였을 것입니다. 작은 이익을 큰 의리라 하고 정론을 잡의라 하며, 조그만 공이 성취되기만을 바라고 뒤에 생길 해독이 멀리 갈 것은 돌보지 않으며, 위로 성상의 원대한 염려를 막고 아래로 사림의 공정한 논의를 물리치니, 대신이 나라를 근심하는 뜻이 어디에 있으며, 만세의 해독을 막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에 말세의 역사를 읽을 때, 그 대신으로서 스스로 욕심을 갖고 자기만 착하다 하며 남의 말은 돌볼 것이 못 된다고 하는 자를 보면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였는데, 어찌 지금의 대신이 이런 말을 전하께 올릴 줄 생각하였겠습니까. 『중종실록』 권83, 1537년(중종 32년) 2월 4일(계축), 첫 번째 기사 위 기사는 명종 대 유생들이 숭불정책의 폐지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유생들의 불교 비판 논의를 대신들이 잡의로 폄하했다며 그 부당함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대신들의 이 같은 행태는 결국 사림의 공론을 배척하는 것으로서, 대신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유생들은 ‘사림’을 공론을 생성하고 통용시키는 주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라 할지라도 사림의 공론을 너그러이 수용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대신이라는 자들이 사림의 공론을 잡스러운 의론이라고 간주하며 배척하는 어리석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며 비난하고
있다. <실록사료3> 사신은 논한다. 이 의논이 매우 올바른 것인데, 좌우의 의논이 분분하여 서로 시비를 다투고, 나중에는 양시 양비(兩是兩非)의 말이 나와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고 사림이 반목하여, 그 화의 실마리 됨이 비통하였다. 『중종실록』 권22, 1515년(중종 10년) 8월 8일(임술), 첫 번째 기사 위 사료는 삼사를 포함한 청요직 일원을 사림으로 이해하는 기사이다. 중종 10년 장경왕후의 사망으로 박상과 김정이 신씨복위상소6)를 올렸을 때 대간에서 박상과 김정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청요직들 사이에서는 대간의 처벌 주장이 정당하다는 입장과 과도하다는 입장으로 나뉘는 가운데, 처벌 측과 반대 측 모두 일리가 있다는 양시론까지 제기되며 분란이 심화되었다. 사관은 이를 가리켜 ‘사림이 반목’했다고 표현했다. 청요직 사이의 의견 분열을 사림의 반목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때의 사림 역시 언론 삼사를 포함한 청요직들을 지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사림이라는 존재의 부상과 개념의 확대성종 대에 이르게 되면 언론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사림이라는 존재가 적극적으로 부상되고, 동시에 사림이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그러면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것은 성종 대 들어서며 관료조직 내 권력관계의 변화와 그에 따른 권력구조의 변동에서 기인한다. 성종 대 이후의 시기는 관료조직 내에서 청요직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가운데 언론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언론 삼사가 공론의 권위에 기대어 국왕 및 대신들과 대립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켜 나갔던 시대였다. 사림은 바로 그 같은 상황에서 삼사로 대표되는 청요직 언론을 뒷받침해 주는 가상의 도덕적 집단으로 상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림은 정당한 언론과 공론의 대변자 집단으로 상상되면서 삼사 언론의 정당성을 보장해 주는 배후 집단으로 빈번하게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실록사료4> 대체로 기묘사림의 화가 한 번 일어난 뒤로는 권간(權奸)이 서로 뒤를 이어 정권을 잡고 서로 중상하였는데 이항도 역시 그 괴수였다. 『중종실록』 권95, 1541년(중종 36년) 6월 7일(임술), 첫 번째 기사 위 기사는 이항이라는 사람에 대해 사관이
비난하는 내용으로 조광조 등이 축출된 기묘사림의 화가 일어난 뒤로 권간(權奸)9)이 연이어 일어나 정치가 혼란스러워졌는데 이항 역시 그 같은 권간 중에 하나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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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론의 개념과 공론정치1) 대간의 임무와 공론으로서의 대간 언론조선은 인정(仁政)과 덕치(德治)라는 유교왕정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대간(언론기관)을 설치하고 언관들로 하여금 백성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국정에 대한 시시비비를 따지도록 허락했다. 대간을 소위 ‘언책지관(言責之官)’, 즉 언론의 책임을 맡은 관서로 설정하고 국왕 및 대신과 함께 시비 논쟁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던 것이다. <실록사료1> 대간(臺諫)이라는 것은 조정의 공론(公論)을 맡고 있는 곳이다. 임금은 구중의 높은 곳에 있고 억만 사람의 위에 있으므로, 그 높음을 해와 달에 비할 것이 아니며, 그 위엄은 천둥과 벼락에 비할 뿐만이 아니다. 그런데도 천안(天顔)에 항거하고 용린(龍鱗)을 거스르는 일은 오직 대간만이 그것을 할 수 있으며, 금문(金門)을 밀어 열고 옥지(玉墀)에서 부르짖으며 호소하는 일도 오직 대간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임금의 좌우에 서서 임금과 더불어 옳고 그름을 다투어 임금이 옳다고 하면 대간은 옳지 않다고 하며, 임금이 옳지 않다고 하면 대간은 옳다고 하여 위엄을 무릅쓰고 범하면서 피하지 아니하며, 강경하여 굽히지 아니하며, 비록 머리가 부서질지라도 사양하지 아니하는데, 어찌 형벌을 피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옷자락을 잡고 간한 일을 되풀이할 수 있으니, 난함(欄檻)이 부러지는 일만 어찌 홀로 아름답겠는가? 이런 경우는 비록 비궁(匪躬)이라고 하더라도 가하다. 『성종실록』 권161, 1483년(성종 14년) 12월 7일(병인), 첫 번째 기사 위 기사는 성종 14년 서거정이 지은 「비궁당기」 가운데 대간의 책무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비궁당기」는 조정 주요 기관의 신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책임을 어떻게 다할 것인지를 논하는 글이다. 인용한 부분은 대간의 기본적인 책임과 그것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으로,
대간이 공론을 담당하는 기관임을 첫 구절에서 이미 밝히고 있다. 따라서 대간이 공론을 담당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 만큼 임금의 역린을 건드려 그로 인해 형벌을 받게 되더라도, 끝까지 시비를 분간하며 적극적으로 간쟁하는 것이야말로 대간이 맡은 바의 임무를 다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공론에 기초해 군주와 시비를 다투며 치열하게 간쟁하는 것이 대간의 소임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2) 왕권과 공론 사이의 긴장한편 대간 언론이 공론으로 인정되고는 있었지만, 공론으로서의 대간 언론이 갖는 권위는 정치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었다. 즉 국왕의 전제권력이 강하게 행사되는 상황에서는 공론으로서의 대간 언론의 권위는 온전한 위상을 갖기가 어려웠다. 조선 초 태종과 세조의 치하에서 공론은 군주의 정치적 입장을 합리화시키는 방편으로 활용되거나, 무시되기 일쑤였다.
<실록사료2> 김종련(金宗蓮)이《논어(論語)》를 강(講)하다가 말이 주자(朱子)의 태극(太極)의 설에 미치자, 김종련이 아뢰기를, "주자(朱子)의 말은 틀린 곳이 많이 있는데 신이 임금의 명령에 따라서 아뢰려고 했지마는, 천하의 공론(公論)이 두려워서 감히 비난하지는 못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틀린 곳이 있다고 말했으니, 어찌 공론을 두려워하겠는가? 또 공론이란 무엇을 이름인가?" 하니, 김종련이 대답하기를, "무릇 유자(儒者)에게는 모두 공론이 있게 마련인데 신이 젊었을 때부터 배운 바를 하루아침에 이를 저버린다면 유자들이 신을 비웃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유자들이 모두 공론이 있다면 조정의 대신들도 모두 유자인데, 그대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나라에는 권신(權臣)이 없는데, 그대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김종련이 대답하기를, "정자영(鄭自英)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도승지 신면(申㴐)에게 명하여 되풀이하면서 힐문하도록 하니, 김종련은 본디 겁쟁이어서 망령된 대답이 많았다. 임금께서는 김종련이 실제로 비난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할 말이 있는 것이라고 여겨, 장을 때려서 그 실정을 신문하려고, 마침내 의금부에 내리어 승지 어세공(魚世恭)에게 명하여 압슬형(壓膝刑)으로 이를 신문하도록 하였다. 『세조실록』 권39, 1466년(세조 12년) 8월 29일(무진), 첫 번째 기사 1466년(세조 12년) 예문관원 김종련은 세조와 함께 태극설(太極說)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이 때 자신은 주자(朱子)의 입장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천하의 공론’이 두려워 자신의 주장을 온전히 밝히지
못한다는 말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세조로부터 문초를 받게 되었다. 문초 과정에서 김종련은 ‘공론’이 무엇이냐는 세조의 질문에 ‘유자들의 공론’이라고 아뢰자, 세조는 감히 군주 앞에서 유자의 공론을 두려워해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드러내지 않는다며 역정을 내었다. 그런 다음 김종련을 의금부에 내려 압슬형을 가하며 신문하도록 했다.
<실록사료3> 사헌부 대사헌 이경동(李瓊仝) 등이 상소하였다. (중략) 전하께서는 성덕이 하늘과 같고 신하들의 말을 들어 행하시며 간언을 따르는 아름다움이 천고에 뛰어나셨는데, 근일에 신들이 나라 사람들의 공론을 가지고 아뢰었으나, 전하께서는 재상의 의논을 따르고 들어주지 않으시니, 언로가 이로부터 막힐까 염려됩니다. 『성종실록』 권189, 1486년(성종 17년) 3월 14일(기미), 네 번째 기사 위 기사는 성종 17년 임사홍의 직첩(職牒)14) 환급과 관련해 사헌부에서 이를 반대하는 상소이다. 사헌부에서는 성종이 그동안 대간의 간언을 너그러이 용납해 준 모범적인 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공론을 전달했음에도 재상의 잘못된 의견을 수용했다며, 결국 성종의 이 같은 모습은 군주가 간언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언로가 막히게 될 것이라는 우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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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송웅섭, 총신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