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인권 운동가 - heug-in ingwon undong-ga

1960년대 마틴 루터 킹과 함께 미국 흑인 민권운동을 이끈 인권운동가 제임스 포먼이 세상을 떠났다.포먼의 아들은 1991년부터 결장암으로 투병생활을 해온 아버지가 10일 밤 워싱턴의 호스피스 시설에서 가족과 친구들에 둘러싸여 “매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11일 밝혔다. 향년 76.시카고에서 태어나 미시시피에서 성장한 포먼은 1960년대초부터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의(SNCC) 사무총장으로서 1963년의 워싱턴 대행진과 프리덤 라이드 등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적 사건들의 주요한 지도자로 활동했다. 특히 공공시설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차별에 맞서기 위해 버스와 기차를 타고,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이 극심한 남부 지역 곳곳을 여행해 결국 흑백 분리를 철폐시킨 프리덤 라이드 운동은 미국 민권운동의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포먼은 마틴 루터 킹보다 급진적인 노선을 주장하며 경쟁하기도 했고, 흑인 노예 보상운동을 주도했다.박민희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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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인 인권 운동가 - heug-in ingwon undong-ga

미국의 1월 세 번째 월요일은 공휴일이다.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을 추모하기 위한 날로 그의 생일인 1월 15일에도 특별 추모 행사가 열린다. 한 사람을 위한 추모의 공휴일. 그의 어떤 면이 이런 날을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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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진리를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피부색이 만든 차별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960년대에도 차별은 극심했다. 흑인은 백인과 같은 시설을 사용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물조차 흑인이 마시는 물을 따로 표시해두었고 ‘흑인과 개는 사절’ 같은 문구를 단 상점을 보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대중교통인 버스에서도 앞 네 줄은 백인만이 앉을 수 있었다. 1955년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이 앞자리에 앉아있다가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며 본격적인 흑인 인권 운동이 시작되었다. 문제가 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흑인들은 집단 파업과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때 구성된 연합체의 의장이 마틴 루서 킹 목사다.

많은 박해가 있었지만 결국 1956년 미국 대법원은 버스의 인종 차별이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그간 마틴 루서 킹은 자택이 폭파되는 등 살해 위협을 견뎌냈고 결국 흑인 인권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가 인권 운동의 방법으로 선택한 길은 비폭력주의였다. KKK단 같은 직접적인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같이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힘을사용하고자 했다. 동시대를 산 맬컴X는 자기방어를 위한 폭력은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방법이 효과적인지는 오늘날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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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유효한 꿈
지금 이 글에서 마틴 루서 킹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흑인인권운동사를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차별이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이 입법 예고된 지 10년이 지났다. 아직도 통과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성적지향’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성소수자를 반대할 수 없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한다. 성소수자는 차별할 수 있도록 빼달라는 것일까?


세상에 차별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 아이라고 차별해서는 안 되며, 늙었다고 차별할 수 없다. 너무 말랐다고, 너무 뚱뚱하다고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쉬운 명제란 말인가. 문명의 발달이 세상을 빠른 속도로 편하게 하고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설상가상으로 요즘은 차별이 알게 모르게 심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뚱뚱한 사람은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해서 체중이 늘었으니 정신 차리라고 비난하는 것이 마치 그를 위하는 일인 것처럼 포장된다. 어떤 노동자들은 ‘너 나중에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을 들어도 공부 안하고 게으르게 살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차별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면서 자신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진리를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이 한 구절이 반백 년이 넘은 지금 이렇게 가슴에 사무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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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해설.

이 글에는 마틴 루서 킹의 조각상과 사진이 있습니다.

신문은 선생님

[핫 피플]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 사망 50주기 맞아 추모 열기 뜨겁죠

입력 : 2018.01.19 03:09

마틴 루서 킹 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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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중략)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사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1963년 8월 28일 미국 워싱턴DC의 링컨 기념관 광장. 25만여 명 군중 앞에 선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인 마틴 루서 킹 주니어(Luther King Jr·1929~1968·사진) 목사가 이렇게 말했어요. 비폭력 저항을 강조한 이날 연설은 흑인 인권 운동의 전설로 남았어요.

올해는 킹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50주년을 맞은 해예요. 미국은 킹 목사의 업적을 기려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법정 공휴일('마틴 루서 킹의 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갖고 있지요. 그런데 올해는 킹 목사를 추모하는 목소리가 예년보다 높았다고 해요.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일부 아프리카 국가를 향해 '거지 소굴(shithole)'이라고 말했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미국 사회가 인종주의 논란에 휩싸였기 때문이지요.

킹 목사는 1929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지요. 원래 킹 목사의 이름은 아버지와 똑같은 '마이클 킹'이었지만,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독일의 종교 개혁가 마르틴(마틴) 루터 이름을 본떠 개명(改名)하면서 '마틴 루서 킹'으로 이름이 바뀌었어요.

당시 미국은 흑인 노예 해방 선언(1862년)을 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백인과 흑인 간 차별이 만연한 사회였어요. 버스는 백인·흑인 전용 좌석이 분리돼 있었고, 흑인 출입을 금지하는 상점·음식점도 많았지요.

킹 목사는 1954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 한 교회에서 담임 목사를 맡았어요. 그런데 이듬해 12월, 몽고메리시에서 미국 전역을 뒤흔든 인종차별 사건이 벌어지면서 킹 목사의 인생이 큰 전환점을 맞아요.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퇴근길 버스에서 백인 남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연행당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지요.

이에 킹 목사는 흑인들을 독려해 '버스 타지 않기 운동'을 펼쳤어요. 수많은 흑인이 동참하면서 반(反)인종차별 운동으로 확산했지요. 1956년 12월 미국 연방법원이 인종에 따른 버스 좌석 분리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킹 목사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답니다. 이후 베트남전쟁 반대, 노동자 인권 보호 등 전방위적 인권 운동을 펼쳤고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어요.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신변을 둘러싼 위협은 끊이지 않았어요. 킹 목사는 1968년 흑인 청소 근로자의 파업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테네시주에 왔다가 한 백인 우월주의자가 쏜 권총에 맞고 숨을 거뒀어요.

킹 목사가 죽은 지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얼마나 인종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을까요?


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범죄자에서 흑인 인권 지도자로… "폭력엔 폭력으로" 외쳤죠

입력 : 2020.06.10 03:00

맬컴 엑스

미국 전역에서 백인 경찰의 폭력으로 숨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흘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위는 이제 미 50주(州) 전체, 600곳이 훨씬 넘는 도시와 마을에서 열리는 사상 최대 시위로 확대되고 있다고 해요.

그동안 미국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 운동을 이끈 흑인 운동가도 많았지요.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급진적인 흑인 차별 반대 운동을 펼쳤던 맬컴 엑스(Malcolm X·1925~1965)입니다. 오늘은 맬컴 엑스의 흑인 차별 반대 운동에 대해 알아볼게요.

◇백인 교사의 질타에 분노 품게 된 소년

1925년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의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난 맬컴 엑스의 원래 이름은 맬컴 리틀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도교 목사이자 열렬한 '백투아프리카 운동'(흑인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운동)의 지지자였어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맬컴의 아버지는 자주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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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3월 26일 미국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마주친 흑인 인권 운동가 맬컴 엑스(오른쪽)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모습이에요. 동시대에 흑인 인권 운동을 펼쳤던 두 사람은 이날 처음으로 서로에게 약 1분간 인사를 나눴다고 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결국 맬컴이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자살로 처리돼 가족들은 보험금도 받지 못했고, 그의 어머니마저 신경쇠약으로 보호시설로 보내져 가족 모두 빈곤에 허덕이게 되었어요. 맬컴을 포함한 형제들은 여러 위탁 가정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맬컴은 학창 시절 우수한 학업 성적으로 한때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도 가졌어요. 하지만 그를 가르치던 백인 교사에게서 돌아온 건 '깜둥이들은 그 주제를 알아야 한다'는 차가운 말이었죠. 이후 맬컴은 백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보스턴과 뉴욕을 옮겨 다니며 마약 판매, 매춘 알선, 도둑질 등의 범죄로 생계를 이어갔지요. 결국 맬컴은 어느 백인 가정집을 도둑질하다 덜미를 잡혀 절도죄로 체포되었고 8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교도소 생활은 맬컴의 삶과 가치관을 완전히 뒤바꿔놓았어요. 교도소에서 많은 독서를 한 그는 통째로 책 내용을 외우다시피 하며 미국의 역사, 문화, 철학에 대한 지식을 쌓아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면회를 온 형이 '네이션 오브 이슬람(Nation of Islam)'으로 불리는 블랙 무슬림(백인과 흑인 분리와 흑인 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이슬람 조직)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어요. 맬컴은 흑인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백인을 배척하는 이 종교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지도자였던 일라이자 무함마드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고, 자신의 성인 '리틀'을 버리고 맬컴 엑스로 개명했습니다. 미국 흑인들의 성은 보통 그들을 노예로 부리던 백인 주인이 붙여줬다는 사실에 반발, 미지수를 뜻하는 'X'를 써서 흑인의 빼앗긴 뿌리를 상징하고자 한 것이었어요.

◇킹 목사의 비폭력 투쟁 비판

1952년 가석방된 맬컴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정식으로 입단했어요. 뛰어난 연설 실력으로 많은 흑인에게 이슬람교 개종을 권유했고, 흑인들의 정신적·경제적 독립을 주장했지요. 블랙 무슬림 신문도 발행해 폭넓은 포교 활동을 했어요. 맬컴 입단 전 4곳에 불과하던 사원은 수년 만에 50여 곳으로 늘었고 신도 또한 500여 명에서 10년 만에 2만5000명으로 늘었어요. 무함마드는 이러한 맬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그를 대변인으로 임명하는 등 맬컴을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2인자로 천명했습니다. 맬컴은 평화적인 흑인 차별 반대 운동을 설파하던 마틴 루서 킹(King·1929~1968) 목사를 '얼간이' '백인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비판했고, '만약 누가 나의 발을 밟으면 나도 상대방의 발을 똑같이 밟아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비폭력 투쟁을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맬컴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1963년 맬컴이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에 대해 '자업자득'이라고 언론 인터뷰를 했는데, 이것이 슬픔에 빠진 미국 국민의 반감을 사게 된 것이죠. 파문이 커지자 교단에서도 그의 대변인 활동을 정지했어요.

사실 그 당시 맬컴은 교단에 갈수록 큰 실망을 느끼던 상태였습니다. 신도들에게 엄격한 생활을 강조하던 무함마드가 여성 비서들과의 사이에 여러 혼외 자식을 두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에요. 또 그는 교단이 흑인들의 시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너무 나태하다고 보았어요. 맬컴은 교단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의 지위가 급격하게 흔들리게 되었어요.

◇흑인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다

결정적으로 맬컴은 이듬해 사우디아라비아 메카 순례에서 자신의 극단적인 태도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메카에서 만난 백인 이슬람교도들이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든 이슬람교도를 반기는 것을 보고 '인종과 종족을 초월한 형제애'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는 정통 수니파 이슬람으로 귀의하고 이름을 '엘 하지 말리크 엘 샤바즈'로 바꾸며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 결별합니다. 그리고 '무슬림 모스크 인코퍼레이션'이라는 종교단체와 '아프리카계 미국통일기구'라는 정치단체를 조직해 반(反)백인주의를 넘어선 흑인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어요. 특히 그는 '투표권이 아니면 총알을'이라고 연설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투표 참여도 촉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교단을 배신한 맬컴을 지속적인 암살 시도로 위협했어요. 결국 1965년 2월 21일 맨해튼의 오두본 볼룸에서 청중 400명에게 연설을 하려던 맬컴은 암살자 3명이 쏜 총에 사망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맬컴이 교단에 의해 암살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범인 3명 중 2명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해 진실이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어요.

짧은 생을 살다 간 맬컴 엑스는 급진적인 행적으로 평가가 엇갈려요. 하지만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흑인 인권을 높이기 위한 운동을 펼치면서 큰 영향을 끼쳤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