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마티스 역사 - angli matiseu yeogsa

[세기의 라이벌] 앙리 마티스-파블로 피카소

박정호 기자 입력 2011.11.18 16:39
수정 2011.11.18 16:39 생글생글 318호

색채 對 형태...서로를 디딤돌 삼아 '전위의 탑' 쌓다

앙리 마티스 역사 - angli matiseu yeogsa

한 사람은 정장 차림으로 낮에 그림을 그렸고 다른 한 사람은 캐주얼 복장으로 밤에 작업했다.

한 사람은 여인을 단지 작품의 모델로 삼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모델과 사랑을 나누고 그를 통해 영감과 창작의 에너지를 얻었다. 20세기 전반 미술계 최대의 라이벌인 앙리 마티스(1869~1954)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무나 달랐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어떤 게임보다 흥미를 끈다. 그러나 스타일이 너무 다른 라이벌의 대결은 관객이 원하는 격렬한 매치로 이어지기 어렵다.

인파이터와 아웃복서의 대결처럼 말이다.

마티스와 피카소의 대결은 그래서 피를 보고야 마는 패권지향적 라이벌이 아니라 서로를 선의의 경쟁자로 인정하고 상대의 장점을 취하면서 상호 발전을 도모해 나가는 호혜적 라이벌 관계다.

마티스와 피카소의 기질적 차이는 판이한 출신 배경과 성장과정 속에서 형성됐다.

마티스는 프랑스 북부 르 카토 캉브레지 태생으로 북유럽 예술가 특유의 냉철한 지성을, 안달루시아의 항구도시 말라가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정열적인 스페인 사람들의 기질을 타고 났다.

마티스가 법률행정가로 일하다 우연히 병상에서 그림을 그린 게 계기가 돼 뒤늦게 화가로 전향한 데 비해 피카소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여 화가 외에는 다른 장래를 생각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림에만 투신한 인물이다.

서로 다른 기질적 특징은 작품의 지향점에도 영향을 미쳤다. 마티스는 작품이란 안락의자처럼 편안해야 한다는 생각 아래 조화롭고 편안한 그림을 지향했다. 반면 피카소의 그림은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많으며 감각적이고 에로틱하다.

미국 저널리스트인 제이콥 위스버그는 두 사람의 이런 기질적 차이를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인용해 분석했다.

위스버그는 니체가 이 책에서 예술을 아폴론형과 디오니소스형으로 나눈 데 주목, 마티스를 ‘아폴론형’ 예술가, 피카소를 ‘디오니소스형’ 예술가로 규정했다.

태양신 아폴론은 빛을 관장하는 신으로 이성과 학문, 자제를 표상하고,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는 감성, 방종, 도취상태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두 예술가의 상반된 성향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이론적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공통분모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두 사람이지만 단 하나, 새 시대의 미술이 나아가야 할 좌표에 있어서는 일치를 보았다. 그들은 새 시대의 미술은 구린내나는 전통 미술의 구태를 답습해서는 안 되며 무거운 주제의식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해야 한다고 봤다.

그것은 사물의 순간적 외형을 포착하는 게 아니라 대상의 본질적인 모습을 파헤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이런 자기부정적 방향성은 누가 전통 예술의 패러다임을 뒤집고 첨단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구현하느냐 하는 경쟁으로 나타났고 이는 서양 현대미술의 오랜 여정의 출발점이 됐다.

흥미로운 점은 둘이 서로의 작업을 디딤돌 삼아 전위의 탑을 쌓아갔다는 점이다.

한 사람이 새로운 시도를 하면 다른 사람은 그 시도에 또 하나의 전위적 요소를 덧붙여 상대편에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둘은 그것을 표절이나 아이디어 도용이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서브한 공을 상대방이 맞받아친 것으로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야심만만한 두 사내가 처음 상대방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은 1903년 파리로 이주한 미국 여성시인 거트루드 스타인을 통해서였다.

이 시인은 당대의 대표적 아트 컬렉터로 세잔, 르누아르, 툴루즈-로트렉 등 전위적 예술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는 한편 이 예술가들을 집으로 초대해 자주 토론의 자리를 마련했다.

마티스와 피카소가 처음 얼굴을 맞댄 것도 이 자리를 통해서였다.

거트루드와 그의 동생 레오는 특히 마티스와 피카소 작품에 주목했는데 둘은 이 든든한 후원자의 눈에 들려고 선의의 경쟁을 펼치게 된다.

첫 단계의 경쟁은 열두 살 위인 마티스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1905년 가을 살롱전의 스포트라이트는 마티스가 주도하던 야수파에 비췄기 때문이다.

사물의 고유한 색채를 무시하고 원색을 나란히 배열함으로써 색채의 새로운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이 이단아들에게 평론가와 대중은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카미유 모클레르는 “페인트 통이 대중의 얼굴에 내동댕이쳐졌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새 시대의 미술을 꿈꾸던 이들에게 이들의 시도는 신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거트루드와 레오는 전시 작품 중 마티스의 ‘모자 쓴 여인’을 구입했고 앙드레 드랭,, 조르주 브라크 등 신예 화가들은 마티스의 도전정신에 경의를 표했다.

마티스가 한창 성가를 드높이고 있던 때 24세의 피카소는 청색시대(1901~1904)를 거쳐 장밋빛 시대(1904~1906)에 접어든 참이었다.

푸른색의 우울한 색조에서 막 벗어나 보헤미안적 삶에 탐닉하면서 삶에 대한 낙관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였다.

이때까지도 마티스는 피카소를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지 않았지만 피카소는 선배에 대해 강한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장차 대예술가로 성장하는 자극제로 작용한다. 한창 조바심을 내던 차에 피카소를 자극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1907년 초 마티스가 앙데팡당전에서 ‘청색누드’로 프랑스 대중을 또 한번 경악시킨 것이다.

1907년 피카소는 마침내 선배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한다.

그는 야수파의 색채지상주의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구조적인 측면에서의 혁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의 평면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견고한 화면을 구축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끝에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묘사하고 이를 하나로 결합함으로써 후일 입체파로 불리게 될 새로운 회화를 창안한다.

그해 칸바일러 화랑에서 ‘아비뇽의 처녀들’이 전시되자 평론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바르셀로나의 매춘부들을 모델로 한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얼굴이 마치 아프리카 토인의 가면을 씌워놓은 것 같았고 명암법과 원근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의 새로운 시도는 혁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현란한 색채를 뽐내던 야수파 진영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충격을 받은 브라크도 야수파의 울타리를 벗어나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 운동의 전위가 된다.

이제 피카소는 감히 선배 마티스와 맞짱을 떠도 될 만큼 중요한 아방가르드의 리더로 떠올랐다.

마티스는 입체파의 움직임에 동요하지 않고 색채에 대한 실험을 계속했다. ‘춤’(1909), ‘음악’(1910)에서처럼 종전보다 색조를 누그러뜨리는 한편 회화와 음악의 결합을 시도했다.

이제 두 거장은 각자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피카소는 끊임없이 형태의 모험을 감행하면서도 마티스의 장점을 흡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점은 1935년 로마에서 마리-테레즈 발터와 사랑에 빠진 피카소의 작품 경향이 곡선적이고 강렬한 색채를 특징으로 하는 초기 마티스 작품과 유사한 모습으로 변해 간데서 잘 드러난다.

애송이 후배에게 왕좌를 빼앗겨 자존심이 상한 마티스는 2인자의 처지로 전락한 채 1930년대까지도 피카소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결국 후배의 탁월한 재능을 인정하고 그의 참신한 시도로부터 자극을 받는다. 둘은 1942년 서로 작품을 교환했고 1945년에는 런던에서 대규모 합동 전시회를 가졌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적대적 라이벌보다는 호혜적 라이벌이 보다 풍성한 예술의 토양을 일궈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패권지향적 라이벌 관계가 예술계를 하나의 독점적 사조로 획일화시키는 데 비해 호혜적 라이벌 관계는 ‘윈윈’효과를 통해 다양한 예술의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야수파와 입체파 이후의 서양 현대미술은 한결같이 마티스와 피카소가 주도한 두 사조의 영향 아래 전개됐다. 그 점에서 둘의 라이벌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다.

두 사람의 호혜적 경쟁 의식이 후배들에게 계승돼 오늘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미술사학 박사

앙리 마티스 역사 - angli matiseu yeogsa

북 프랑스의 노르주 출생인 화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ㆍ1869~ 1954). 피카소와 함께 현대 미술의 거장이라 불리는 마티스는 늘 20세기 미술 첫머리에 소개된다. 

그는 색채와 빛과 공간의 조화을 창조에 대한 가장 큰 의미로 여기며 한평생 예술에 대한 헌신과 꾸준한 색에 대한 연구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아티스트에 손 꼽히고 있다. 마티스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아티스트라 하지만 그의 그림은 잘 그렸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20세기 미술에 혁신적 바람을 일으킨 점은 엄연한 사실이다. 피카소가 형태에 대한 혁명을 일으켰다면, 마티스는 색에 대한 혁명을 일이켰다. 사실 마티스는 법률을 공부하며 꿈을 키워온 청년이었다. 베토벤과 같은 성숙한 천재도, 피카소와 같은 신동도 아니었지만 음악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운율의 자유로움, 영혼을 노래하는 신화적인 영혼의 춤과 리듬, 그 속에 음악이 깃든 작품을 만들어냄으로 위대한 예술적 창작을 발산해 냈다. 

그의 표현은 상식의 틀에 갇혀있지 않으며, 색채와 형태가 단순하면서도 상상력이 뛰어났다. 평범하게 인식되고 표현되는 색이 아닌 색채와 공간에 대한 상상력으로 그림을 만들어 갔고,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라 이르며 반듯이 그림이 현실의 그대로를 묘사 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비평가의 반응을 어떠했을까? 형현없는 질서없는 그림, 촌스러운 색채와 구조, 형태에 대한 부조화의 책임없는 선이라는 등의 비평과 핀잔을 들었다. 하지만 마티스의 <댄스> 시리즈는 지금 세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그림 중 하나이고, 영국인들이 가장 보고싶어하는 명화로 꼽은 아름다운 작품이다. 

<댄스>의 춤추는 사람들은 지구상에 발을 붙히고 춤을 추는 모습이 아닌, 우주속의 무중력 상태에서 몸을 맏기듯이 춤을 추는 것 처럼 보인다. 그림의 중앙에는 그림의 다이나믹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원이 나타나 있다. 왼쪽에서 춤을 추는 사람은 팽팽한 긴장된 자세를 유지하며 묵직한 움직임으로 나머지 함께 춤을 추는 사람들을 리드하며 이끄는 중심축처럼 움직이고 있다. 

마티스의 그림 안의 이 춤은 ‘삶과 리듬’을 만들어내며, 환희과 에너지, 삶의 열정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더불어 시각적인 음악 또한 함께 깃들어져 있다. 열정적인 느낌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림 속의 운율와 힘은 단순화된 인간의 신체와 푸른 공간의 빛과 초록대지의 평면적인 느낌을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해 냈음에, 이토록 세계 안의 예술역사의 근원지였던 유럽의 손꼽히는 명작이라 할 수 있지 않는가.

장은진 미국 뉴저지주 블룸필드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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