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는가 린다

린다 노클린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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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린다 노클린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에 대해서 요약, 정리해 놓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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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최근 미국 내에서 급격하게 고조되고 있는 페미니스트 활동은 해방을 위한 운동이었으나, 그 힘은 그것과 관련된 다른 급진적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감정적인 것, 즉 개인적, 심리적, 주관적인 것으로서, 현상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공격이 자동적으로 제기되는 지적 논쟁점들을 역사적으로 분석한 것이라기 보다는 현재의 즉각적인 요구에 집중되어 왔다. 그러나 모든 혁명이 그렇듯이 페미니스트 운동도 현행 사회적 제도의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궁극적으로는 역사, 철학, 사회학, 심리학 등 다양한 지적, 학문적 원리들의 지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근본토대를 파악해내야 한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지적한대로 우리에게 무엇이든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적인 규범 속에서 뿐 아니라 학문적인 연구의 영역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학문적인 영역에서도 또한 “당연시되는” 가정들에 의문이 제기되어져야하며, 사실로 일컬어지던 많은 신화적 토대들이 밝혀져야만 한다. 모든 학문적 서술에서 주체가 되는 중성적인 “사람”(one)은 실상은 당연하다고 인정된 백인 남성의 위치(White-male-position -accepted as-natural)를 반영하며, 숨겨진 “그 남자”(he)를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이제 여성이 중성적인 “사람” 대신, 인정된 주변인, 비동조자 “그녀”(she)라고 불리는 입장도 단지 장애물이나 주체의 왜곡이기보다는 오히려 확고한 장점이 될 수 있다.
미술사의 영역에서 백인 서구 남성의 시각은 무의식적으로 미술사의 관점으로 인정되었고, 그것이 엘리트주의이기 때문이라거나 단순한 도덕적, 윤리적 이유에서라기보다, 순수하게 학문적인 맥락에서 부적절하다고 판명되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비평은 수많은 미술사 연구와 역사 연구의 허점을 폭로하고, 역사적 탐구에 관계하는 알려지지 않는 가치체계와 주체가 바로 현존함을 고려함에 있어 아직도 개념적인 거만함과 초-역사(meta-historical)의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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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 이것은 미국의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klin)이 자신의 책제목으로 썼던 질문이다. 이 말의 의미를 짚어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미술가라 함은 남, 여 모두를 지칭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노클린의 주장이다. 남성일 경우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수식하는 데 성을 부기하지 않는다. 남성 미술가는 그냥 미술가라고 부른다. 그러나 여성일 경우는 문제가 다르다. 우리는 사회적 지위와 계층을 표현하는 모든 명사에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에 익숙하다. 여성 정치가, 여자 교수, 여학생, 여자 대학교, 여성 관료 등등 여성의 지위나 신분에 성(性)을 전제하지 않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그래서 미술가가 아니라 여성 미술가로 불리며, 이 말은 '남성 미술가'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호칭되는 '미술가'의 반대말이 된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남성은 으레 일반적인 것이고 여성은 괄호를 쳐야 될 특별한 존재처럼 여겨진다는 점이다. 여성이 정치를 하고 교육을 하고 사회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특별한' 경우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그 일들이 여성에게 있어 여전히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일이라는 뜻일까? 오히려 일반명사인 '미술가'의 반대말이 '남성 미술가'라면 어땠을까?

대답을 잠시 미루고 두 번째 해석으로 넘어가기로 하겠다. 바로 '위대한'이란 형용사가 지니는 성적 차별성에 대해서이다. 위대한 미술가는 미술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많이 언급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루벤스, 피카소, 백남준 등등 모두가 거장이며 훌륭한 미술가이다. 위대한 남성 미술가들은 이렇게 많은데 이름이 거론될 만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왜 드물까? 위대하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말이 남성에게만 해당된다든가 혹은 남성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는 형용사일까? 여성은 예쁘거나 아름답거나 할 수 있어도 용감하거나 위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노클린은 이와 같은 질문을 계속하면서 미술사를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녀는미술이 개인적인 재능보다는 다양한 사회적 제도들에 의해, 예컨대 교육제도나 후원체계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문화-이데올로기적 한계를 꿰뚫을 수 있는, 즉 반드시 여성 작가들의 문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미술사라는 학문이 가치 있는 것으로 설정한 문제 자체의 형성에 개입된 편견과 부당함을 드러내는 페미니스트적 비판이 필요하다."

미술사라는 학문이 체계화되면서 발생한 몇 가지 근본적인 부조리에 대해 설명해 보겠다. 우선 미술의 역사를 기록하고 구성했던 미술사는 남성들에 의해 '고고한' 취미로 학문화되었다. 그것은 18세기 중엽에 나타난 신고전주의 미술관에 근거한 철저히 남성 우월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여성적 취향이 강했던 로코코 미술을 퇴폐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숭고미 등의 개념을 앞세우며 철저히 남성 위주의 미감을 우위에 두었다.각주 Avant-Garde and After, 1995, p. 19: "솔직히 예로부터 천재, 장인, 재능과 같은 개념들은 남성들에게 부여되었다. 하지만 여성도 그들 못지않은 업적을 이루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Indeed, since concepts of 'genius', 'mastery', and 'talent' apply to men, it was remarkable that women had achieved as much as they had)."">1)

그들이 만들었던 미술사의 얼개는 남성 특유의 영웅의식과 역사관에 기초한 것이었다. 여기서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서구 중심적 가치관을 기준으로 세계의 미술을 평가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성과 합리주의로 무장한 서구 백인 남성의 절대적 위치를 잣대로 그들이 지배했던 제3세계의 문화와 역사를 판단하였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는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서구인들의 그러한 시각을 분석하였다. 미술사를 포함한 모든 지식과 학문은 그들의 존재와 위치를 그들이 '지배'하는 타자들과 구별하기 위해 만든 분류 체계와 유사하다. 그 구별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적 차별성을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식민주의 사회에서 백인은 '지배하는 남성'으로, 식민지인은 '지배받는 여성'으로 그려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멀리 고대 그리스인이 여성들로만 구성된 상상의 국가 아마존을 혐오하며 정복의 대상으로 떠올린 것이나, 그들의 적대 세력인 페르시아나 이방민족을 아마존에 비유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금 이르지만 결론을 내리자면, 여성은 생물학적인 성(sex)에 의해서 구별될 뿐만 아니라—이러한 구별은 단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운명적인 차이이다—사회적 성(gender)에 의해 구별된다. 여기서 구별은 단지 분류가 아닌 차별의 의미를 갖는다. 이 차별은 사회의 온갖 제도에서 가시적으로 구축되고, 신앙이나 도덕 따위들에 의해 비가시적으로 구축되어 온 역사적 결과이다.

현대미술에서의 페미니즘

1970년대 초반부터 일기 시작한 여성운동과 더불어 여성 작가들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여성운동은 그때까지 제한적이던 여성의 사회, 정치 활동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부터 문화적인 측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번져 나갔다. 여성 미술가들도 조직적인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969년 Wider Art Worker's Coalition(약칭 AWC)이 뉴욕에서 결성되고, 이것이 다시 Women Artists in Revolution(약칭 WAR)으로 재조직되면서 여성 작가들은 보다 자유롭고 비판적인 활동 공간을 보장받게 되었다. 미국 서부 지역에서도 같은 시기에 미리엄 샤피로(Miriam Schapiro)나 주디 시카고(Judy Chicago) 같은 작가들이 남성에게 치중된 현대미술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루시 리퍼드(Lucy Lippard)와 흑인 예술가인 페이스 링골드(Faith Ringgold)는 휘트니 미술전이 여성 작가들을 편견과 몰이해로 대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을 위한 전시회를 기획하고 갤러리를 운영하였다. 같은 시기인 1971년에 린다 노클린의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가 출판되고, 그해에 루시 리퍼드가 '26명의 현대 여성 미술가들'이란 전시회를 위해 카탈로그를 만든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권위적인 남성 위주의 미술사와 미술계를 비판하고 여성 작가의 지위와 역할, 여성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거친 투쟁을 시도하였다.

비틀즈의 멤버인 존 레논의 아내로 더 널리 알려진 오노 요코(Ono Yoko, 1933~ )는 여성 미술가의 역사에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는 백남준과 함께 플럭서스(Fluxus)각주1) 라는 예술가 그룹에서 활동했으며, 전위적인 행위예술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녀가 1964년에 일본 교토에서 행한 〈Cut Piece〉라는 이름의 행위예술(Action-Art)각주2) 은 여성의 정체성과 신체에 대한 의식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오노 요코, Cut Piece, 1964년, 도쿄

그녀는 조용히 무대 위로 올라가 40여 분간 가만히 앉아 있는다. 관객들(특히 남성 관객)은 그녀에게 다가가 준비해 둔 가위를 들고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을 조금씩 자른다. 여기서 예술가와 관객의 관계는 기존의 상식에 정확하게 반대가 된다. 예술가는 대상이 되고, 오히려 관객이 행위의 주체가 된다. 그녀는 무표정과 무반응으로 앉아 있을 뿐이다. 관객들은 그녀의 옷을 자르면서 점점 더 드러나는 그녀의 벗은 몸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다루었던 대상으로서의 여성과 그 신체를 보는 관습적인 남성적 의식에 대한 자각된 반응이다. 오노 요코는 여성의 신체를 (가학적) 대상으로 전환시켜 놓으면서 남성의 의식과 행위가 같은 경우임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여성의 신체에 대한 통념과 관습적인 사고에 저항했던 이는 오노 요코뿐만이 아니었다. 주디 시카고는 1972년에 발표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Christina of Sweden)〉라는 작품을 통해서 자신이 파악한 여성의 신체성을 드러냈다.

〈스웨덴의 크리스티나〉는 화가가 계획했던 '위대한 여성 시리즈' 중의 하나이다. 화가는 마리 앙투아네트, 대 예카테리나 황제, 빅토리아 여왕 들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그러나 화가는 인물의 초상화를 그리는 대신에 자신만의 독특한, 즉 추상적인 형상언어로 그녀들을 그려 냈다. 주디 시카고는 그런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 작품들은 나의 형상언어를 만들기 위한 것이며, 색들은 역사 속에서 특정한 한 여인에 관한 실제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 즉 한 개인의 총체적인 가치이다."

그림을 보면 정방형의 화면에 몇 단계로 나누어진 정방형의 구획이 들어가 있고, 그림의 중심부로부터 물결치는 듯한 곡선들이 외곽으로 펼쳐져 있다. 이 그림은 여성의 질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루시 리퍼드는 주디 시카고의 작품에 대해 "이제, 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신체의 형식적인 기관인 여성의 질을 빈번히 자신들의 신체를 위한 은유로 삼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라고 말했다.

주디 시카고,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1972년, 뉴멕시코 산타페

"이 작품은 나의 형상언어를 만들기 위한 것이며, 색들은 역사 속에서 특정한 한 여인에 관한 실제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여성의 신체는 욕망의 대상이자 금기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만큼이나 모순적이다. 여성이 자신의 신체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일종의 터부로 여겨졌는데, 1970년대에 나타난 여성 미술가들의 신체에 대한 관심은 기존의 사고를 반성적으로 비판하고 여성의 신체에 대한 주체적인 의식을 가지려던 시도였다. 그러나 행위예술의 은유적인 성격이나 주디 시카고의 추상적 표현은 그런 의미를 즉각적으로 이해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극한 추상인 미니멀 아트를 주도한 것이 남성들이었고, 그들의 형상언어를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이제 새로운 조형성을 위한 고민이 되었다.

이후 여성운동은 개인적인 성향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비판성을 갖추고, 다른 사회 비판 세력들과 결탁하여 나갔다. 급진적인 여성운동가들은 대개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영국의 비평가인 그리셀다 폴록(Griselda Pollock)의 말을 빌리면, "예술가가 활동하는 사회의 속성은 전제적이거나 자본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이고 남녀 차별적(sexist)이다." 여성의 해방은 단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총체적인 구조에서 생각되어야 할 문제이다. 여성운동가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 중 하나는 '진보'에 대한 기존 사고와의 관계이며, 그들이 사회의 주류가 아니라 아웃사이더로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여성은 그런 점에서 사회의 소수자일 뿐이다. 조금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은 다음에 나오는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캐롤 슈네만(Carolle Schnemann)은 〈Interior Scroll〉이란 제목의 행위예술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이 행위예술은 1975년 롱아일랜드에서 개최된 여성 미술가 모임에서 처음 보여졌다. 그녀는 자신의 신체를 발가벗기며 꾸미지 않은 대상으로 사용하였다. 그녀는 두 개의 시트를 들고 탁자로 다가갔다. 그런 다음 옷을 벗고 한 개의 시트로 몸을 감았다. 다른 하나는 탁자 위에 덮었다. 그녀는 관객들을 향해 자신이 1974년에 쓴 「세잔, 그녀는 위대한 화가였다(Cézanne, She was a Great Painter)」라는 텍스트를 읽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탁자를 덮었던 시트를 밀어 떨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서서 큰 붓질로 자신의 얼굴과 몸의 윤곽을 그려 넣었다. 이 행위예술은 그녀가 그녀의 질 속에 감추어 두었던 텍스트의 한 부분을 읽는 부분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녀에게 신체는 남에게 보여 주는 대상이 아니라 자의식의 원천이자 진실이 되었다.

캐롤 슈네만, Interior Scroll, 1975년

신체에 대한 자의식을 표현한 또 다른 여성 예술가로 신디 셔먼(Cindy Sherman, 1954~ )이 있다. 셔먼은 사진이라는 방식을 취했다. 그녀의 작품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사진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혹은 사물들이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사진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자화상이라는 점을 부인한다. 그러므로 나르시시즘(Narcissism)과 같은 자기 연모가 아니라, 오히려 "보여 주려고 의도된 대상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연극적인 행위(theatrical costume dramas)로서의 사진 찍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인물만이 아니라 인물을 둘러싼 환경이나 상황도 적절하게 연출되었다. 사실 이러한 관계는 남성 화가와 여성 모델이라는 기존의 관계성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자신이 모델이자 또한 모델을 바라보는 예술가라는 점에서 그렇다. 사진 속 상황은 영화나 광고 혹은 『플레이보이』 같은 성인 잡지에 나오는 사진을 연상시킨다. 때로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보이는 그녀의 작품들이 대부분 여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라 하겠다.

신디 셔먼, 무제 no 70, 1980년, 런던 Saatchi Collection

현대미술에서 페미니즘은 무시할 수 없는 자의식이자 다양한 관점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여성 예술가들은 정치적인 성 담론의 하나로 떠오른 여성의 신체를 예술 주제로 다루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타자로서, 즉 남성의 시각의 대상으로서 인식되었던 여성의 신체를 주체적으로 재인식하는 예술적 행위이자 선언이었다. 사실상 그녀들이 행위예술이나 회화, 사진을 통해 보여 준 자신들의 신체는 남성이 요구하는 그런 아름다움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미감이야말로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제도적 문제라고 여성 예술가들은 지적한다.

오늘날 페미니즘은 단지 여성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전 사회적인 문제이며, 남성의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오로지 가부장 제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거창한 선언만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

여성 중심적, 여성 지향적인 의식 혹은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여성주의 담론. 하지만 페미니즘을 여성에게만 국한된 담론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페미니즘은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세계관과 다른 새로운 세계관과 성차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이미 20세기 초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시작되었지만 여성 운동이 좀 더 본격화된 것은 1960년대 정치적 변혁 운동의 과정에서였다. 1960년대 급진적인 변혁 운동은 여성의 성 해방 운동을 낳았고, 여기서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또는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제로 인해 억압받고 있는 여성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과 담론의 집합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페미니즘은 계급적인 문제를 성차 문제로 바꿔 놓았고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탐구를 통해 '여성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여성의 정치적 해방 운동을 양산했다.

1960년대 발전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남성 지배 메커니즘을 가부장제라는 이데올로기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고 남성이 여성에 비하여 특권을 누리는 성별에 기초한 권력 체계인 가부장제를 타파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영화에서의 페미니즘은 영화 이미지의 재현에서 여성이 어떻게 남성 중심적인 시선(관음증)의 대상이 되고 있나를 분석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영화에서 어떻게 재현되었는가를 문제 삼았고, 로라 멀비(Laura Mulvey)와 같은 여성학자는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라는 논문에서 영화적 장치가 남자 주인공과의 동일화를 통해 여성을 보기의 대상, 즉 수동적인 관객으로 만들고 있음을 지적했다. 많은 여성학자들은 멜로드라마, 서부극, 필름 누아르, 공포 영화의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내러티브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해명했다.

페미니즘 논의는 1970년대 후반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기호학적 정신분석 비평에 힘입어 점차 세련돼졌고 샹탈 아케르만(Chantal Akerman), 이본느 래네(Yvonne Rainer), 아녜스 바르다(Agnés Varda) 등이 만든 여성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적인 페미니즘 논의는 계급과 여성 간의 권력 관계, 여성 주체의 문제에 대한 명증한 해답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권력 개념과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담론과 실천이 페미니즘 논의에 개입됐지만 여전히 다양한 여성들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경험과 관련한 문제들이 논란이 되었다. 따라서 최근에는 흑인 여성, 아시아 여성 등과 같은 소수 집단의 여성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여성학

다른 표기 언어 Women's Studies , 女性學                     

요약 여성주의(feminism)를 인식론적 기반으로 하여 여성 개인과 집단의 사고와 행동에 대한 분석을 과학적 이론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통해 궁극의 목표인 여성해방의 이념과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그것에 기여하고자 하는 학문.

  1. 발전

    여성학은 보통 여성에 대한,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학문으로 정의된다.

    '여성에 대한'이란 여성학 연구의 대상인 여성 개인과 집단의 사고·행동에서의 문제, 즉 여성이 경험하는 차별과 억압의 구조적 배경이 되는 모든 사회제도와 문화·언어·지식체계 등을 말한다. '여성을 위한'이란 여성학의 목표가 사회 성원의 의식변화와 지식체계의 변화를 통해 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질서를 가져오는 사회구조적 변화를 추구하는 데 있음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여성에 의한'은 연구자가 여성이어야만 함을 의미하기보다는 여성주의라는 여성학의 시각을 말한다.

    여성주의는 여성학 이론, 실천적 전략, 여성학 연구의 인식론적 기초 등을 뜻하며, 그 다양한 시각의 편차에도 불구하고 ①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독자적 존재로 존중하는 태도, ② 사회가 여성을 억압하고 비인간화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시각, ③ 따라서 여성해방이 필요하다는 인식의 3요소를 공통분모로 갖는다.

    이같은 여성주의 인식론이 여성학을 독자적 학문 분과로 성립시키는 특징적 요소이다. 자유주의 여성주의, 마르크스주의, 급진적 여성주의, 사회주의 여성주의, 정신분석학적 여성주의, 후기 구조주의 여성주의 등과 같은 주요이론틀들은 서로 경합하면서도 보완해주는 발전과정을 보인다. 특히 가부장제를 계급체계의 이데올로기나 상부구조로 환원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면서 가부장제를 계급체계와는 다른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역동적 체계로 보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출현이 주목된다.

    1980년대에는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마르크스주의와 급진적 여성주의의 이론적 자산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이중체계론, 여성주의 유물론과 같은 여성주의 거대 이론의 틀을 잡는데 집중적인 관심을 보인 반면, 1980년대말부터는 여성공동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현실의 가부장제에 대한 구체적 연구, 가부장제의 시대적·사회구성체적 형태 차이에 주목하는 연구, 여성 내부의 인종·계급·생애주기 등에 따른 차이를 중시하는 연구풍토가 조성되고 있다.

    한편 여성학의 학문으로의 정립과 관련해 초창기부터 논란이 되고 있는 중요한 문제는 여성학의 정치적 요소와 사회과학으로서의 객관성을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다. 여성학은 연구주체가 연구 과정·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가치중립적일 것을 요구하는 점에서는 한결같으나 새롭게 객관성에 접근하는 방식에서는 차이를 나타낸다.

    기존 학문에의 통합을 주장하는 통합론, 기존의 사회과학과 구분되는 독자적 학문 분야로서의 '여성주의 사회과학'을 지향하는 여성주의 입장론이 있는가 하면, 최근에는 여성들이 가부장제하에서 일률적으로 억압되었다는 보편적 주장은 비현실적이라고 보고, 따라서 보편적인 여성주의 이론을 거부하는 여성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으로 다양하다. 현재는 각 학문 분야에서 여성학적 연구 및 지식 축적이 따로 이루어지고 있는 동시에 독자적인 통합 사회과학으로 여성학이 부상하는 2가지 추세가 상호보완적으로 병행되는 단계에 있다.

    발전

    여성학은 서구에서는 1960년대말, 국내에서는 1970년대말에 출현했다. 세계적으로 1960년대는 학생운동과 베트남전 반대운동, 흑인민권운동 등 시민운동의 파고가 높이 치솟았던 기간이다. 서구 여성들은 19세기의 노예제폐지 운동에서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남성들과 시민운동에 함께 참여하다 여성운동으로 분리되어 나오는 과정을 겪는다.

    즉 여성들은 시민운동에 함께 참여한 남성들의 성차별적 관행에 부딪치면서 여성도 흑인과 마찬가지로 억압받는 집단이라는 자각이 싹트게 되었다. 시민운동에 직·간접으로 연루되었던 미국의 여성학자들은 여성의 신비로 표현되는 베티 프리던(Betty Friedan) 세대의 주부 소외의 경험을 대학의 지역사회 사업인 성인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접하게 되면서 학문 내에서 무시되었던 여성에 초점을 맞추는 강좌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여성학 강좌 출현 후 수년 내에 학부와 대학원 모두에서 각 학문 분과마다 여성관련 강좌가 개설되고 여성학과가 생기거나 학생의 소속과와는 상관 없이 여성학을 부전공 또는 전공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미국 여성학 발전의 영향과 국내 여성 학자들의 진보적인 여성교육에 대한 모색의 일환으로, 1977년 2학기 이화여자대학교의 여성학 과목 개설을 출발로 하여 1970년대말에 고려대학교·덕성여자대학교·서강대학교·연세대학교·중앙대학교·홍익대학교 등의 7개 대학교에서 강좌가 개설되었다(→ 대한민국). 1980년대 들어 여성학은 남학생의 교련과목에 대한 여학생 대체과목으로 10여 개 대학교에서 새로 개설되었다. 1980년대말부터 각 대학교의 총학생회로부터 여학생회가 독립할 정도로 여학생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각 대학교의 여성학 개설은 급격히 증가했다. 이는 여학생회가 내건 1차 사업이 여성학 개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전과정을 거쳐 1990년 1학기 현재 전국 67개 대학교에 여성학 강좌가 개설되었으며, 개론 수준의 여성학 외에 여성과 법률, 여성과 문화, 여성사회학, 여성신학, 여성복지 등과 같이 보다 전문화된 여성학 고급강좌를 개설하고 있는 대학교도 10여 개에 이른다. 한편 이화여자대학교와 효성여자대학교가 각각 1982, 1990년에 대학원에 여성학과를 신설했고, 계명대학교는 1990년에 특수 대학원으로 여성학과를 신설했다. 이화여자대학교의 경우 1992년에 국내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최초로 여성학 박사과정을 신설했다.

    가부장제

    다른 표기 언어 patriarch , 家父長制

    요약 19세기 들어 메인으로 진화론과 가족에 대한 인류학적 발굴에 힘입어 원시시대의 인류 상태를 가부장제로 이론화 하면서 가부장제 가족을 진화의 한 형태로 보았다.
    20세기에 들어와 가부장제는 베버는 지배를 합리화하는 유형을 전통적 권위, 카리스마적 권위, 합리적 권위의 셋으로 나누었고 가부장제는 전통적 권위 유형에 속한다.
    경제인류학적·사회경제사적으로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이전의 농업경제에서 생산자 가족의 가장이 가구를 대표하면서 가족원의 노동을 통제하고, 그 노동 생산물을 획일적으로 지배하고 소유한다는 의미에서 소농생산이 가부장적 생산방식으로 파악된다.
    여성학에서는 사회영역 전반에서 여성의 성·출산·노동 등을 통제하는 남성 지배구조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1. 역사
      1. ┗ 개요
      2. ┗ 고대사회에서 조선 중기
      3. ┗ 조선 후기
      4. ┗ 구한말에서 현대

    여성학에서는 가족 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영역 전반에서 여성의 성·출산·노동 등을 통제하는 남성지배구조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사회의 기원적 요소로서 가부장제 가족을 이론화한 사람은 헨리 메인(Henry Maine)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19세기에 진화론이 대두하기 전까지 가부장제 가족을 가족의 자연적 원형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메인은 당시에 등장한 진화론과 가족에 대한 인류학적 발굴에 힘입어 원시시대(그에 따르면 구약성서 시대·유목민시대)의 인류 상태를 가부장제로 이론화 하면서 가부장제 가족을 진화의 한 형태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가부장제는 최고연장자 남성이 가구에서 자녀·주인·노예로 구성되는 가구성원에 대한 생사여탈권까지도 갖는 절대적인 주권자로 군림하는 가족형태로, 결속의 핵심은 상속규칙에 있다.

    이러한 가부장제 가족이 모여 혈족 또는 친족이 되고 이것들이 모여 부족이, 부족이 모여 사회가 된다고 보았다.

    20세기에 들어와 가부장제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권위에 대한 이론에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베버는 지배를 합리화하는 유형을 전통적 권위, 카리스마적 권위, 합리적 권위의 셋으로 나누었다. 가부장제는 장로제(gerontocracy)와 더불어 전통적 권위 유형에 속한다.

    장로제는 경제적·친족적 성격을 띠지 않는 집단에서 집단의 신성한 전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연장자 남성이 행사하는 권위가 중심이 되는 제도인 반면, 가부장제는 경제적인 친족의 기초 위에서 제도화된 가구 내에서 상속에 의해 임명된 가부장 개인이 가구 성원에 대해 행사하는 권위를 중심으로 한다. 베버는 가부장제 가족을 유사 이래의 보편적 가족 형태로 보고 가부장권의 정도가 역사적으로 다를 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구분한 권위 유형은 역사적 개념은 아니고 순수한 이념형이며, 따라서 그의 가부장제 개념도 역사적 개념은 아니다.

    메인과 베버는 공통적으로 가부장이 가구 내의 최고주권자임에도 불구하고 가부장과 가구 성원들간의 관계를 지배-종속 관계로 파악하지 않는데, 이는 가부장의 권위가 가구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사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편 경제인류학적·사회경제사적으로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이전의 농업경제에서 생산자 가족의 가장이 가구를 대표하면서 가족원의 노동을 통제하고, 그 노동 생산물을 획일적으로 지배하고 소유한다는 의미에서 소농생산이 가부장적 생산방식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가부장적 농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봉건시대에서 생산의 기초단위였다.

    오늘날 경영학에서 고용주와 피고용주의 관계가 가장과 가족원과의 관계와 흡사한 전근대적 노사관계 형태를 띠는 경우를 가부장적 경영 형태로 분류하는 것은 이와 관계된다.

    현대에 들어와서 여성학자들이 종래의 가부장제에서 가장은 왜 남성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가부장제는 성차별적인 양성관계의 구조로 새롭게 초점이 맞추어져 인식되고 있다. 즉 1970년대 이후 케이트 밀레트(Kate Millett), 줄리엣 미첼(Juliet Mitchell), 슐러미스 파이어스톤(Schulamith Firestone) 등의 여성학자들은 가부장제에 대한 전통적 어법에서 벗어나 가부장제를 양성의 사회적 관계 또는 여성의 지배-종속 관계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확대시켰다.

    그러나 모든 여성학자들이 가부장제를 하나의 통일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미첼 같은 이는 가부장제를 남성지배의 상징체계로 보고 갤리 러빈(galy Rubin) 같은 학자는 남성지배의 다양한 사회형태들을 가부장제로 부르는 것에 반대하고 가부장제는 구약시대나 유목민시대에 존재했던 성별체계의 고대적인 한 형태로 본다.

    한편 메어리 데일리(Mary Daly)는 가부장제라는 개념 대신 지구남성단(地球男性團 Planetary Men's Associa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대부분의 여성학 연구자들이 가부장제를 남성지배의 성별체계라는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가부장제 용어 앞에 서로 다른 역사적 형태의 특징을 나타낼 수 있는 수식어를 붙임으로써 러빈이 지적한 가부장제 개념의 몰역사성을 극복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중세 봉건적 가부장제, 가부장적 원시농경사회, 복지국가적 가부장제 등의 개념들이 그것이다.

    역사 개요

    여성의 시각에서 보면 가부장제의 역사는 남녀관계의 역사적 변천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녀관계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는 경제적 지위는 물론 노동력 재생산과 성(性) 등을 둘러싼 여성의 자율성 여부와 정도, 자율·억압의 형태가 밝혀져야 한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친족제도나 촌락 내의 혈연관계에 대한 역사자료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전환을 그대로 받아들여 삼국시대에 이미 확고한 부계제가 성립한 것으로 평가했다(→ 한국사).

    그러나 최근에 호적·족보·분재기(分財記)·장적(帳籍) 등을 바탕으로 친족제도를 연구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 엄격한 가부장제가 성립한 것은 조선 후기이며, 그 이전까지는 여러 영역에서 여성의 자율성이 상당히 허용된 느슨한 형태의 가부장제였거나 아니면 모계·부계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가부장제는 다음의 4가지 기준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결혼으로 인한 배우자와 자녀의 거주규칙, 혈통체계, 경제적 지위, 성적 자율성과 기타 사회적 지위 등이다.

    고대사회에서 조선 중기

    서류부가(婿留婦家)·남귀여속(男歸女屬)의 혼인풍습이 있었다.

    이는 고구려의 서옥제(壻屋制:데릴사위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혼인 후 남자가 여자 집에서 살다가 자녀를 낳고 아이가 자란 뒤에 부인·자녀와 함께 남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같은 모처(母處)-부처(夫處)의 거주규칙은 조선에 와서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인 지배계급이 서류부가의 예가 지켜지지 않음을 통탄하는 기록이나, 15~16세기 사림파에 처가·외가의 경제적 기반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을 볼 때 조선 중기까지 서민층은 물론 양반계급에도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친족과 성씨집단 등에 관한 연구를 보면 혈통체계 역시 이때까지는 부계(父系)라는 단일 혈통체계로 설명될 수 없다.

    신라의 왕위계승, 가계계승 및 상속제도, 양자제도, 혼인제도, 제사, 거주제, 친족조직은 부자계승의 원리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신라에는 모계씨족제가 유지되었다거나 부계가 우월하면서도 비부계적 요소도 공존했다거나 모계 아니면 부계라는 식의 이해는 곤란하며 좀더 연구되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들 연구는 친족체계에 대한 실증적 연구 없이 고대사회를 부계사회로 단정한 기존의 연구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며, 고려와 조선 중기까지도 강한 부계 친족집단이 성립되지 않았다고 했다.

    고려 초기의 지배권력은 중국의 종족제(宗族制)와 상례에 관한 오복제(五服制)를 받아들여 국가예절로 선포했으나, 고려의 가족제도를 반영하여 처부모를 친부모와 차별하지 않았다.

    부계 중심의 적장자(嫡長子)로 이어지는 제사상속제 및 유교적 제례가 고려말까지도 제정되지 않았다. 조선 초기까지 장자봉사(長子奉祀)를 우선시하면서도 자녀들이 번갈아가면서 제사를 지냈으며, 아들이 없는 경우 딸이나 외손이 제사를 지냈다. 족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에는 개인과 가족의 뿌리가 부계 시조(始祖)에 있지 않고 수많은 남녀 조상으로 확대되어, 궁극적으로 민족공동체로 귀착되는 16조도(祖圖) 가계보(家系譜)였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족보에는 여자로만 몇 세대 이상 직계로 연결되거나 남녀가 섞여 있는 계보 등이 발견되며, 외손 봉사(外孫奉祀)가 이루어져 양자제도도 없었다.

    조선 전기 여성의 경제적 지위를 볼 때 부모의 사유지(私有地)는 자녀에게 차별없이 상속되었고, 노비나 토지는 부부가 따로 소유했다. 여성의 성적 자율성과 기타 사회적 지위를 살펴보면 상당히 자율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때는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합의를 전제로 혼인이 이루어졌고, 고려시대에는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이었으며 처첩과 적서(嫡庶)의 구별이 없었다. 여자는 남편이 죽은 후 호주(戶主)가 될 수 있었고 재혼도 자유로웠다. 이런 현상은 조선 중기까지 이어졌다.

    조선 후기

    17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방계가족이 부계 직계가족으로, 부족 안에서 이루어졌던 혼인이 마을 밖의 먼거리 혼인으로 변하고, 부계 씨족이 성립하면서 모처-부처의 거주제는 약화되어갔다.

    조선초부터 강요되던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시행이 후기에 와서 양반을 중심으로 행해지면서 제사를 지낼 때 점차 여자들의 참여와 외손·여계의 제사상속을 배제했다. 부계 혈통을 내세운 적장자주의로 변해갔으며 여성은 시댁의 아들을 낳는 도구로 전락했다. 재산상속에 있어서도 17세기 중엽까지는 균분제(均分制)의 사례가 많으나, 차츰 장남우대·남녀차별·남자균분 등으로 바뀌었다.

    장자우대제의 확립은 상속분 자체를 우대하기에 이르렀고, 딸은 출가외인으로 모든 면에서 차별을 받게 되었다.

    이같은 부거제, 부계종족제, 남성 중심의 상속제로의 변화는 가부장제 가족과 이를 바탕으로 한 가장권을 강화시켰다. 양반 집안의 가장은 가족뿐 아니라 첩·노비·고공(雇工) 등의 비혈연을 통솔하는 지위를 나타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와서는 여성의 재산에 대해서도 가장이 그에 따른 이익을 가지고 처분할 수 있는 관리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까지 15명 정도의 집단 노동으로 짓던 한전(旱田) 농법이 3~4명의 가족 노동으로 바뀌면서 서민층에서도 가부장적 경제권이 확립되었다.

    즉 지주가 소작인을 함부로 바꿀 수 없는 경작권은 가족 대표인 가장에게 속한 것이었다. 이런 경제적 기반 위에서 가장은 양반이나 서민층 모두에서 가구를 대표하는 법적 지위와 책임, 즉 공법상(公法上)의 호구신고의 의무, 가족 혼인에 관한 의무, 그리고 국가가 법으로 금하는 행위를 가족이 범하는 경우 책임을 지는 '금제 위반 감독의 의무' 등을 가졌다.

    여성은 이러한 공적인 가장권에서 제외되었다.

    특히 서민층 여성은 조세·군역 및 유통수단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데도, 독립된 생산자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남편이나 시아버지인 가장에 예속되었다. 나아가 처첩제, 서얼제도(庶孼制度), 재가한 여성의 후손에 대한 과거(科擧) 금지 등의 제도는 여성의 성(性)과 노동력 재생산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도들이 시행되면서 여성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칠거지악(七去之惡)·일부종사(一夫從事)·내훈(內訓)과 같은 성차별적 유교이념이 강요되어왔다. 향리에서 유교이념을 가르쳐온 사림파와 전통을 위태롭게 했던 임진왜란·병자호란은 유교이념이 서민층에까지 뿌리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남편이 죽거나 외간 남자에게 손을 잡혔다고 자살하는 등 성통제 규범을 극도로 내면화한 열녀 형태에까지 이르렀다.

    구한말에서 현대

    조선 후기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도 전래의 관습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부분적으로 이어져왔다.

    예를 들면 1900년대초까지 함경도지방에서는 결혼 후 신랑이 처가댁에서 5~10년 동안 살다가 본가로 돌아가는 풍습이 있었으며, 경상도지역에서도 해묵이·달묵이 형태로 1900년대 중반까지 이 풍습이 유지되었다. 오늘날에는 결혼식 장소를 신부측이 사는 곳으로 하거나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처가에 먼저 가는 정도로 남아 있다.

    근대 개혁의 기점이 된 갑오개혁은 여러 봉건제도를 근대화하려는 의지를 나타냈으나, 가족제도에 직접 관련된 것은 과부의 재가허용과 조혼금지 정도였다.

    이것도 관련된 형법의 개정이 뒤따르지 못해 실효를 나타내지 못했다.

    조선 후기에 확립된 가부장제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뒷받침하는 보수적 관습으로 이어지면서, 식민통치의 필요에 따라 몇 차례 부분적 개정이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1909년 일본식의 호적법을 적용한 민적법(民籍法)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신분을 파악하기 위한 호구조사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호적이 집안에서의 개인의 신분관계를 증명하는 공증문서가 되었다. 즉 호적이 가족상의 개인 신분과 이동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기본자료가 된 것이다. 그리고 호주의 지위를 가족상속자의 지위로 강화하여, 식민통치를 위해 가족구성원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호적부의 관장은 경찰관서가 맡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은 고려나 조선시대의 호적에서 차지했던 호주의 지위를 상실했다.

    조선시대의 동성동본 불혼, 성(姓) 불변의 원칙, 다른 성(姓)의 양자(養子)를 금하는 3가지 제도는 종족제의 기본이며, 여성을 차별하고 속박하는 가부장제의 기본이었다.

    이것을 일제는 민족을 말살하는 정책에 이용, 성불변의 원칙을 폐지하고 다른 성을 가진 양자제를 허용했다. 일본인 양자나 서양자(壻養子)를 허용해 양민족의 피를 섞는 내선일체의 수단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나아가 이것을 기반으로 가족의 성씨를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우리의 성씨제도가 성불변의 원칙에 따라 한 가족의 아버지·어머니·부인의 3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일본식은 1가 1씨 제도로서 우리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한편 1920년대에 자유주의 여성론이나, 이 시대의 소수 여성해방운동가들은 자유연애와 같이 유교적 보수주의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비난받을 거리만 남겨 놓고 1920년대 후반부터 사라져갔다(→ 여성운동). 1920년대 중반 등장한 사회주의 여성운동도 근우회가 해체된 뒤 여성 대중에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1930년대 발간된 여성잡지를 중심으로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긴 가족중심주의의 일본식 형태인 '현모양처의 상(像)'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남자들이 징병·징용되거나 유학·독립운동 등으로 가족을 떠나 아버지 부재현상을 가져왔다.

    따라서 이때의 여성은 가족을 이끄는 적극적인 가장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남존여비사상을 약화시키기보다 부계 혈통을 이어갈 남성의 생존을 확실히 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남편과 아들을 감싸고 아버지의 권위를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생각하게 해 남성우월주의를 강화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어 바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이 시행되어 이성양자(異姓養子), 서양자 제도는 무효화되었고, 성불변의 원칙과 다른 성을 가진 양자를 금하는 제도를 회복하여 전통적 가부장제를 현행 민법의 기본으로 삼았다(→ 8·15 해방).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은 동성동본 불혼과 다른 성을 입양하지 않는 원칙을 대한민국의 민법에 그대로 유지시켰다.

    1991년 개정된 가족법은 가부장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개혁 내용을 많이 담고 있으나, 종법제의 모국인 중국에서도 폐지된 호주제는 조금 손질되었을 뿐 여전히 가부장적 지위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해방 이후 특히 1960년대 산업화 이후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의 변화에 조응하여 새롭게 발전되고 있다. 즉 여성에게만 순결을 강요하는 봉건적 가부장제의 성이중규범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이 위에 일제강점기 현모양처론에서 이미 맹아를 보였던 낭만적 사랑과 노동 시장에서의 성차별적 성별분업이 확고히 자리잡아가고 있다.

    낭만적 사랑은 '사랑받는 아내, 성공하는 남편'이라는 대표적 여성잡지의 슬로건에 압축되어 있듯이 여성에게 추구해야 할 유일의 또는 제일의 가치는 남성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이 문화는 사실상 혼전 성관계의 개방을 요구하는 등 유교적 성규범과 충돌하는 면이 있다. 따라서 여성에게만 혼전 순결과 배우자와의 배타적 성관계를 요구하는 이중적인 유교적 성문화 규범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가운데 서구의 낭만적 사랑 문화가 들어와서 성생활의 측면에서 여성을 더욱 질곡에 빠뜨리고 있다. 최근에는 피상적·상투적인 낭만적 사랑의 문화에 남성 중심적인 성문화와 성까지 상품화하는 자본의 논리가 결합하여 성폭력, 포르노 산업, 향락산업의 형태로 여성의 성적 착취, 성적 수단화 현상이 극에 달하고 있는데, 이는 여성운동의 새로운 이슈가 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여자는 가정, 남자는 일터'라는 새로운 성별분업이 기본적인 사회적 분업으로 자리잡았는데, 우리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성별분업은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적인 성별분업으로 연결된다. 즉 남성은 기술직·관리직의 상대적인 고임금 분야로 나아가는 데 반해, 여성은 경력과 승진이 인정되지 않거나 일정 한도까지만 허용되는 단순 생산·사무직의 임금이 낮은 분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부장제 구조하에서 여성은 주부 소외, 이중노동,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 성폭력, 이중적인 성문화로 인한 피해 등과 같은 문제들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1980년대 들어 다양한 분야의 여성운동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가족, 여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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