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로울 두 귀가 왜 밖에 달려 있는 이유

 

영원의 시간에 서서

   S. O. L. 라게를뢰프

  제1부 선조의 도움

     잉그마르손 집안

  빛나는 태양이 내리쬐이는  어느 여름날 아침, 한  농부가 부지런
히 밭을 갈고 있었다. 풀잎에 고인 이슬이  반짝이고 대기는 형용할
수 없이 가볍게 온누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싱그러운 아침 바람, 쟁기를 짊어진 말도 즐거운지  신나게 밭 위
를 달려 농부도 거의 뛰다시피 뒤를 따라야  했다. 쟁기로 파헤쳐진
검고 기름진 흙은 습기를  머금고 있어 곧바로 귀리를 심어도 되었
으므로 농부의 마음은 매우 흡족해졌다.
  '모든 게 잘되어 가는데도 내 마음은 왜 늘 우울하단 말인가?'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햇빛과 맑은 날씨, 좋은 땅이 있는데 무얼  더 바라는 것일까. 어
떻게 해야 천국에 사는 사람들처럼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골짜기라기보다는 차라리 무슨  평원과 같은 초록과 노랑빛의 밀
밭이 아득히 펼쳐  있고, 알맞게 베어낸 클로버의  목초지가 잇닿아
있으며, 한창  꽃이 만발한  감자밭과 아마밭에는 수많은  흰나비가
아름답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이런 풍경이 바로  마을의 전부인 셈이
다. 펼쳐진 풍경의  한복판에는 잿빛 창고와 붉은색  집들로 이루어
진 농장 건물이  한폭 풍경화의 완성을 위한  양 우뚝우뚝 서 있었
다. 그 중 한 주택가에는 가지가 축축 늘어진  배나무 두 그루가 높
이 솟아 있고,  문전에는 한 쌍의 자작나무가  싱그럽게 서 있었다.
풀로 덮인 뜰에는 잘 쌓인 장작더미가 때를  기다리고 있었고, 창고
뒤에는 겨울을 위해 말리고 있는 건초더미가 여기저기 큼직하게 쌓
여 있었다. 이 농장 건물은 밭이 전부  내려다보이도록 자리잡고 있
어 마치 여러개의 돛단배가  넓은 바다 위에 두둥실 떠있는 것철머
매우 근사하게 보였다.
  '그래, 정말이지 나는 더이상 비길 데 없는 농장을 상속받았어'
  밭을 갈다가 농부는 저편의 집을 바라보며 혼자서 중얼거렷다.
  '훌륭한 집에다 많은 창고, 튼튼한 말과 소,  또한 온순하며 일 잘
하는 하인에다  나 역시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망할 염려는  없고,
결국 두려워하는 건 가난이 아니란 말야'
  농부는 상념을 떨쳐버리려는 듯 열심히 밭을 갈았다.
  '나도 할아버지나 아버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젠
장, 그런데 왜 이렇게 터무니 없는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지 모르겠
군'
  젊은 농부는 머리를 흔들었다.
  '방금만 해도 무척 행복한 기분이었는데.... 그래, 아버지가 살아계
실 때 마을사람들은  모두 아버지를 따랐어. 건초를  장만하면 마을
사람들도 모두 그 일을 시작했고, 놀리던 땅을  일구기 시작하면 사
람들도 골짜기마다 쟁기질을 했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말야. 두
시간이 넘도록  내가 밭을 가는데도 아무도  따라하는 사람이 없으
니. 나도 잉그마르손 집안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농장 일
을 잘 한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건초만 해도 그래.  과거의 아버지 때보다 너넉히  준비할 수 있
지. 아버지가 농장을 가로질러 파놓은, 잡초를 막기 위한 고랑도 그
냥두진 않아 물론 아버지도 농토로 넓히려고 불을 지르겠다고는 했
었어. 하지만 사람들도  나라고 해서 숲을 잘못  관리한다고 생각하
진 않을거야. 이따금 많은 일들이  견딜 수 없이 나를 괴롭혀. 할아
버지나 아버지 때 사람들은 그분들이 교구를 다스려 주길 진심으로
원했어. 잉그마른손  집안은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므로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를 기쁘게 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거라고 생각
했던거지. 목사를 임명하고  교회에 하인을 두는 것부터  학교는 어
떤 장소에서 세울 것이며  도랑은 언제 만들 것인가를 전부 그분들
이 결정하셨어. 하지만 누구도  나에게는 의논하려고 들질 않아. 어
떠한 일에든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단 말야.  어쨌든 우습긴 하지만
지금 같은 괴로움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어. 돌아오는 가을엔
극도로 악화될 것만 같은  나의 상황을 생각하면 웬만한 일은 견딜
수 있지. 만약에 내가 마음먹은 대로 어떤 일을 해버린다면, 일요일
날 교회에서  만날 목사님이나 판사님은 내  손조차 잡아주려 하지
않을거야. 그렇게 되면  내가 바라는 교회 집사가  되기는커녕 오히
려 지금의 빈민 위원직을 그만둬야 할테지'
  쟁기를 따라 밭고랑 사이를 오르락내리락거리며 무엇엔가 골몰한
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홀로 앉아 있거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라곤 풀쩍대며 벌레를 잡아먹는 까마귀뿐인 곳이라
면 누군가 귓전에  속삭여 주기라도 하듯 절로  생각이 풀리겠지만,
그런데 극히 드물게도 이  날만은 쉽게 명중한 생각이 떠올라 그는
기쁨으로 힘이 솟구쳤다.  누구도 자신이 비참한 지경에  빠지길 바
라고 있지 않다는 것과  더불어 자기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
음을 깨달은 것이다.
  '옛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 늘 그랬던 것처럼, 만일
지금도 아버지가 생존해 계신다면 이 문제를 의논할 수 있을텐데....
아!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길만 있다면!'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재미있어 하며 중얼거렸다.
  '날씨가 화창한 어느날, 내가  각고 끝에 아버지를 찾아갔다고 치
자. 위대한 잉그마르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살아계실 때 언제나
그랬듯이 검정소나 얼룩소는  한 마리도 가지고 있지  않을테구. 그
렇지만 많은 붉은소와 목초지, 넓은 밭과 여러개의  헛간이 딸려 있
는 거대한 농장  주인이 돼 있겠지. 그래 내가 그  집안으로 들어간
다면....'
  농부는 고랑 한가운데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고 하늘을 향하여 웃
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하늘에 있는지  지상에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이나 즐거웠다.  한순간 천국에  있을 늙은 아버지에게로  불쑥
끌어올려지는 듯하기도 했다.

  내가 거실로  들어가니 많은 농부들이 벽에  붙여진 의자에 앉아
있다. 모두 눈썹이 하얗고  노랑 머리에 아랫입술이 두텁다. 한결같
이 아버지와 비슷한 게 마치 완두콩알들이 닮은  것과 같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으므로  나는 들어서지 못한 채 부끄러워 문
밖에서 쭈삣거린다.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아, 어서 오너라."
  테이블 상좌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나를 발견하곤 벌떡 일어서서
내 앞으로 다가온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읍니다. 여기엔  제가 모르는 분들이 많겠
군요."
  "그렇다. 그러나 모두  친척이지. 잉그마르 농장에 살던 사람들이
야. 저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이교시대의 아주  먼 조상
이란다."
  "저어, 아버지와 단둘이서만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아버지는 잠깐 생각에 잠겨 옆방으로 가야 할지 어떨지를 궁리하
는 듯싶더니 주방으로 들어간다. 난로 옆엔 아버지가  앉고 나는 작
두대에 걸터앉는다.
  "아버지는 여기서도 좋은 땅을 소유하셨군요."
  "좋은 편이지. 집의 일은 요즘 어떠냐?"
  "모든 게  순조로와요. 작년에  1톤의 건초로 12크로네의  수입을
올렸어요."
  "그래? 잉그마르, 날 놀리러 왔느냐?"
  "하지만 저는 많은 어려운 일들로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
은 언제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만큼이나 현명했다고 말하면서도
조금도 저의 일은 보살펴 주지 않아요."
  "너는 마을의 참사회원이 아니냐?"
  "저는 학무위원회에도 교구위원회에도 나가지  않아요. 마을의 참
사위원은 물론 아니구요."
  "마을사람에게 무슨 좋잖은 일을 저질렀기에 그러냐."
  "타인에게 지도할 사람은  우선 자신의 일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
야 한다고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나는 아버지가 깊은 생각에 잠겨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잠시 후  아버지는 "잉그마르야, 이젠 네게도  아내가 있어야겠구
나. 사랑스럽고 얌전한 처녀와 혼례를 치러야 하겠어"라고 말한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저는 바로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의 농사꾼 중엔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들도 저에게 딸을
내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답니다."
  "도대체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느냐. 잉그마르, 너의 상황을 차근
차근하게 얘기해 보아라"
  아버지가 매우 다정하게 말을 건네온다.
  "실은 4년 전,  제가 아버지의 농장을 물려받던  해에 베리스코그
의 브리타에게 구혼을 했었지요."
  "가만, 우리 일족이 베리스코그에도 살았던가?"
  그는 지상에서의 일들은 아득히 잊고 있는 듯하다.
  "우리 일족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두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에
요.  브리타의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는 걸  아버지도  기억하시겠
죠?"
  "그래, 그렇지.  그러나 네가 우리 집안  사람과 결혼을 했었으면
우리의 관례 관습을 잘 아는 부인을 얻었을게다."
  "네, 아버지, 하지만 저는 그러구 싶지 않았읍니다."
  이때 아버지와 나는 잠시 말을 멈춘다. 이윽고  아버지가 말을 잇
는다.
  "그 처녀는 물론 아름다왔겠지?"
  "그렇습니다. 검은 머리에 분홍빛  얼굴, 맑고 깊은 눈을 가진 아
가씨였지요. 게다가 아주 영리해서 어머니도  매우 기뻐하시기에 모
든 일이 잘 되길  바랬지만 불행하게도 그 아가씨는 저를 좋아하지
않았답니다."
  "어린것이 좋고 좋지 않고가 어디 있어."
  "아닙니다. 부모님들이 그녀에게 억지로 결혼하도록 했으니까요."
  "억지로 승낙시켰다는  걸 너는 어찌 알았느냐.  잉그마르 잉그마
르손아, 사실 그 처녀는 너와 같은 부자 남편을  얻게 된 게 즐거웠
을게다."
  "아닙니다. 기뻐하는 기색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어요. 어쨌
든 약혼식이 거행되고 결혼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연로하신 어머니
가 몸이  몹시 쇠약해 있었으므로 브리타는  잉그마르 농장에 와서
어머니를 거들었지요."
  "잉그마르야, 그런데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단 말이냐?"
  나를 격려하듯 아버지가 묻는다.
  "그런데 그해에 암소는  병이 나고 감자를 비롯한 모든 농작물은
흉작이었읍니다. 어머니와 저는 결국 결혼식을  일년 뒤로 연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약혼은 이미 했겠다. 결혼식 같은 건 그다
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었던거지요. 지금  생각하니
그게 조금 잘못한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일족 중에서 선택했다면 일이 잘 풀렸을텐데."
  "그렇겠지요. 아뭏든  브리타가 결혼식 연기를 원치  않고 있음을
알긴 했지만 그땐 도리가 없었습니다. 은행 돈을  꺼내고 싶지는 않
았고, 게다가 봄에는 장례식도 있었으니까요."
  "기다리기로 한 것은 네가 잘한 일이다."
  "그래도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브리타가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우리들의 아이를 낳고 싶진 않으리라 생각되었으니까요."
  "수입이 있을지 없을지를 먼저 확실하게 알아두어야 하는거다."
  "브리타는 날이 갈수록 우울해졌어요.  브리타가 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집이 그리워서 그런 줄로만  알았지요. 브리타는 고향과
부모 생각이 간절햇으니까요. 그러나 그것도  차차 우리들과 익숙해
지면 머지 않아 괜찮아질거라고 생각했어요.  한동안 브리타 문제를
갖고 혼자서만 끙끙 앓다가 마침내  어머니께 여쭈었지요. 브리타가
왜 그렇게 눈매가  날카롭고 안색이 좋지 않은가고요.  어머니는 그
녀가 아이를 가졌으며  해산 후엔 다시 좋아질거라고 말씀하시더군
요. 결혼식을 미룬 것이 못마땅한 것이리라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
니었지만 그것을  그녀에게 직접  묻는다는 것이 웬지  두려웠어요.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던,  제가 결혼하는 해엔 집을  빨간 페인트로
새로 칠해야 한다는 것도  영 자신이 없었답니다. 기운이 없었어요.
그때 저는 내년엔 모든 일이 잘 될거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지요."

  농부는 걸음을 옮기며 정말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줄곧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분명하고 진실되게 모든  상황을 말하지 않으면
안 돼. 아버지는 내게 조언을 해줄 수 있을거야'
  그리고 다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겨울이 오고  또 지나갔는데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읍니다.
브리타가 계속 슬퍼한다면  차라리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좋으
리라는 생각이 이따금 들곤  했지요.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읍니다.
5월 초 어느날 밤, 브리타가 없어졌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우리
들은 밤이 새도록 찾았지만 아침에야 한 하녀에게 발견되었어요."
  "망할 것! 그래 죽어단 말이야?"
  "죽진 않았읍니다."
  아버지는 대답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알아챈다.
  "아이를 낳았더냐?"
  "예, 그런데 아이는 이미 목이 졸려  죽은 채 브리타 옆에 뉘어져
있더군요."
  "정신이 나갔던게야."
  "아닙니다. 자신도 잘 알고 한 짓이랍니다."
  내가 설명을 계속한다.
  "만일 결혼식을 올렸다면 그런 일은  없었겠지만, 아뭏든 제가 무
리하게 일을 처리했다는  이유로 앙갚음을 한 셈이죠.  브리타는 저
의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답니다. 결혼  전에 아이를 낳
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한거지요."
  "너는 너의 아이를 기뻐했더냐, 잉그마르야?"
  "그렇습니다."
  "안 됐구나. 좋지 않은 계집과 사귄 게 잘못이다. 여자는 물론 감
옥살이를 했겠구나."
  "3년 형입니다."
  "그래, 그 일들이  누구도 네게 딸을 주지 않으려는  이유더란 말
이냐?"
  "네, 저도 새로운 여자를 얻고 싶진 않습니다."
  "그리고 교구에 네 직위가 없는 것도 그런 이유냐?"
  "모두들 브리타에 대한 제 태도가  옳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가 아버지처럼 사리에 밝았다면 브리타와 얘기를 해서 무엇을 괴로
와하는가를 알아냈을거라고들 합니다."
  "아니다. 남자라면 누구나 좋고 나쁜  여자를 쉽사리 구분하지 못
한다."
  "아닙니다, 아버지. 브리타는 나쁘지  않아요. 단지 오만할 뿐이지
요."
  "결국 같은 얘기다."
  "사람들은 제가  브리타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아이가 죽어서
태어난 것처럼 꾸몄어야 했다고들 하던데요."
  "여자가 왜 벌을 받아선 안 된다는거지?"
  "모두 한결같은  의견이에요. 아버지라면 분명히 그녀를  처음 찾
아낸 하녀에게 조심하도록 하여 뭇사람들 귀에 그 사실이 새어들어
가지 않도록 했을거라는 생각이지요."
  "그렇다면 넌 브리타와 결혼을 할 수 있었겠냐?"
  "천만에요. 그럴 까닭이 없겠지요. 빠른 시일 안에 그녀를 부모에
게 돌려보내고  파혼했을거예요. 브리타가 우리집에선 늘  불행해할
것이니 말입니다."
  "옳은 생각이구나.  노인이 가지는 분별력을 너  같은 젊은이에게
바란다는 건은 어려운 일이지."
  "마을 사람들은 제가 브리타에게 지독하게 했다고들 그럽니다."
  "브리타 쪽이 나빴던게다. 진실한 남자에게 되레 모욕을 줬어."
  "아니예요. 제가 일방적이었죠."
  "그 점이 브리타에겐 행운이었음을 깨달았어야지."
  "그렇지만 브리타가  형무소로 간 것은  제 잘못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아버지?"
  "내 생각엔 제 발로 찾아들어간 것 같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느릿느릿 얘기를 계속한다.
  "브리타가 오는 가을에  출감하면 제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지요?"
  아버지는 잠시 동안 나를 건너다본다.
  "태도를 취하다니, 결혼 말이냐?"
  "그게 제 도리인 것 같거든요."
  아버지의 눈길이 다시금 나를 주시한다.
  "브리타를 사랑하냐?"
  "아닙니다. 저의 사랑은 그녀로 인해 이미 상실됐습니다."
  아버지가 눈을 감는다.
  "아버지 저는 한 인간을, 누군가의  삶을 수렁에 빠지도록 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견딜 수가 없읍니다."
  아버지는 침묵한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제가 브리타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곳은 법정이었지요. 너
무나도 온순해져서 아이  얘기만 하던 브리타! 저에 관해서는  한마
디의 불리한  증언도 없이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만  있다는겁니다.
법정 안은 사람들의 눈물로 가득했지요.  판사님도 감동해서 그녀에
게 3년 이상은 선고할 수 없었을겁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다.
  "그녀의 입장으론 가을에  출감하면 부모를 만나는 일이 가장 괴
로울거예요. 고향 사람들도 그녀를  환영해 주지 않을태고, 일가 사
람들은 집안의 수치라는 생각으로 그녀를  괴롭히겠지요. 바깥 출입
을 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며, 교회에도  물론 나가
지 못할겁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말이 없다.
  "저도 그녀와 결혼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예요. 전통 있는 가문의
사내로서 집안의 종들조차  업신여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건
즐거운 일이  못 되지요. 물론  어머니도 그러실테구요.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는 집안 사람들을 초대할 수도 없겠지요."
  "...."
  "재판 때도 저는 브리타를 어떻게든  도우려고 했어요. 여자의 의
견과는 상관없이 억지로 오게 했던 내가 잘못이라고 판사님께 얘기
했읍니다. 또한 그녀가 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준다면 언제든
결혼할 생각이라고, 그녀가 저지른 죄는 아무렇지 않다고도 했어요.
가벼운 처벌을  바란다고 간절히 부탁하면서 말입니다.  그녀에게서
두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내용을  보니 저에 대한 두드러진  감정
표시는 전혀 없더군요. 그러니 제 입장에선 이미  뱉아버린 말에 대
해 책임을 져야 하는겁니다."
  아버지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 앉아 있을 뿐이다.
  "사내로서 일을  단순하게 생각하는 바도 있겠지만,  우리들 잉그
마르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떳떳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
지고 있잖읍니까?  하긴 만일에 예수님이  살인자의 편을 드신다면
누구도 좋아하진 않을거라는 생각을 가끔은 하지만요."
  그래도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가 없다.
  "아버지, 사람을 괴롭히고도 구해주지  않으면 마음이 어떻겠읍니
까. 지난 몇년  동안 저는 편하게 지냈고,  그녀가 출감하는 마당에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아버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급기야 눈물이  쏟아질 판이
다.
  "저는 아직 젊고, 그녀와  결혼할 경우 좋지 않은 일도 있겠지요.
안그래도 사람들은 제가  일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앞으
로는 더욱 그렇겠지요."
  그래도 나는 아버지에게서 동조의 말을 한 마디도 끌어내지 못한
다.
  "가끔 저는 다른  농장은 모두 주인이 바뀌었는데 우리 잉그마르
는 어떻게 계속 눌러  있을 수 있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읍니
다. 그건 우리  집안사람들이 하나님이 원하는 생을  살아가려고 했
던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러니 우리 잉그마르는  인간을 두려워할 이
유가 없지요. 단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면 되니까요."
  그때 얼굴을 들며 아버지가 말한다.
  "몹시 어려운  일이구나. 들어가서  다른 잉그마르손들과  의논을
해봐야겠다."
  아버지가 거실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부엌에 앉아  한참 동안 기
다리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몇 시간쯤 그렇게  앉아 있던
나는 드디어 방을 가로질러 아버지에게 다가간다.
  "끈기있게 기다려라, 잉그마르. 이건 쉽지 않은 문제다."
  방안을 둘러보니  늙은 농부들이 생각에 잠겨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 있다. 그리하여 나는 별도리 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인내
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농부는 빙글거리며 쟁기를 따라갔다. 점점  쟁기는 느려지고 말들
은 매우 지쳐 보였다. 그는 고랑 끝에 닿자  쟁기를 놓고 아주 진지
한 기분이 되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참 이상한 일이야.  저절로 기막힌 생각이 떠오르다니.  3년 동안
꼬박 찾아도 찾지 못했던 것이 갑자기 발견되다니.  이건 분명 하나
님의 뜻일게야'
  그는 이 일이 기필코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자 금방 주저앉을
듯 가슴이 아팠다.
  '주여! 도와주소서'
  그때 밭을 가로지른 꾸불꾸불한 길을 한 노인이 터덜터덜 걸어오
는 것이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깨
에는 자루가 긴 페인트  솔을 짊어졌고 모자에서 발끝까지 온통 붉
은 페인트가 묻어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사방을  둘러보며 칠이 필
요한 농가를 찾고 있었으나 쉽게 발견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자그마한 언덕과 골짜기에 서 있는 잉그마르손 농장을 발견했
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며 외쳤다.
  '저것 좀 보아. 까맣게  되어 버린 세월의 흔적을 거의 백년은 칠
을 하지 않았겠어. 곡물 창고엔 처음부터 페인트 칠을 하지 않았군.
내가 아무리 빨리 한다 해도 가을까지는 걸리겠어'
  잠시 후 노인은 밭을 갈고 있는 한 농부를 보았다.
  '좋아, 이곳의 주변 일을 모두 아는 이 마을의 농부 같은데 저 농
가 일을 물으면 자세히 얘기해 줄거야.'
  그는 길을 가로질러 밭으로 들어가 잉그마르에게로 다가가 이 근
처에 칠을 할 만한 집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잉그마르는 깜짝 놀라
유령이라도 만난 듯 멍하게 노인을 쳐다보았다.
  '아! 이 사람은 분명 칠쟁이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금방 넋을 읽을 듯하게 대답을 할  수 없
었다.
  누군가 "잉그마르님, 집이 너무 낡아서 새로 칠을  해야겠는데요."
라고 얘기하면, 아버지는 늘상 "잉그마르가  결혼하는 해에 칠할 생
각이지" 하고 대답하던 일이 생각났다.
  '이 순간에 칠쟁이가 나타나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노인이 그  말을 두 번,  세 번 되풀이하는 동안에도  잉그마르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너무도
이상한 느낌이었다.
  '비로소 그 사람들이 답변을 주는 것인가. 그리구 올해 나한테 결
혼하라는 아버지의 전갈인가'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그는 집에 칠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기쁨에  젖어서 밭갈이를 계속
했다.
  '아버지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그것도 어려운 문제만은 아닐게야'

  2 주일  후, 잉그마르손은 마구를 손질하고  있었다. 일하는 품이
기분이 몸시 언짢고 귀찮은 듯했다.
  '내가 예수라면....'
  그는 마구를 한두 번 반복해 손질했다.
  '내가 예수라면 말야, 결심이  섰을 때 곧바로 일을 진행할 수 있
도록 준비해 놓을거야. 이토록 오래 고뇌를 주고  온갖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록은 하지 않아. 마차를 칠하고 마구를 씻고  하는 데 시간
을 낭비하지 않고 밭갈이가 끝나는 대로 곧장 진행했을테지'
  길 쪽에서 수레바퀴  소리가 나자 그는 밖을  내다보았다. 누구의
마차인지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있는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베리스코그에서 상원의원님이 오셨어요."
  부랴부랴 새 장작에 불이  붙여지고 커피 가는 밀이 돌기 시작했
다.
  상원의원의 마차가 뜰안으로 들어섰으나, 그는  내리지 않고 마차
안에 그대로 앉은 채 말했다.
  "아닐세, 안으로 들어가진 않겠네. 자네와 잠시 할 얘기가 있어서
왔네. 곧 교구 회의에 나가봐야 하거든"
  "어머니가 지금 새로 커피를 끓이시는데요."
  "고맙네, 그러나 늦게 갈 순 없다네."
  "무척 오랫만에 오셨는데 좀 들어가시지요."
  잉그마르는 끈기있게 권했다. 이때 잉그마르의  어머니가 문 앞에
나와서 불평하듯 말했다.
  "설마, 커피 한잔도 들지 않고 가신다는 건 아니겠지요?"
  잉그마르가 마차의 무릎걸이  단추를 풀자 의원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르타 부인이 몸소 나오셔서 명령하시는데야...."
  상원의원은 뛰어난 용모에 키가 훤칠하고  의젓한 사람이었다. 잉
그마르나 그의 어머니처럼  맵시없는 몸짓이나 나른하게 풀린 듯한
표정의, 어는 면으로나  소박해 보이는 사람들과는 다른  류의 사람
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통있는 잉그마르 가문에 대한  깊은 존경심
을 지니고 있어 뛰어난 자신의 외양에도 불구하고 잉그마르를 닮고
싶어하며, 또한 잉그마르의 일원이나 된 듯 행동하려 했다. 그는 언
제나 잉그마르 편에서 딸을 대했고, 이렇게 반가운  대접을 받고 나
면 한동안 마음이 가벼웠다.
  마르타가 커피를 쟁반에 받쳐들고 나오자 그는 용건을 꺼냈다.
  "내 생각엔"
  그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서두를 꺼냈다.
  "브리타의 처리 문제를 댁에서도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
다."
  마르타의 손에  들려 있던 쟁반이 가볍게  떨리며 찻스푼이 쟁반
위에서 작은 소리로 달그락거렸다.
  "...."
  "그 앨 미국으로 보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것 같군요."
  그가 말을 맺자  역시 무거운 침묵이 대답처럼  들어섰다. 상원의
원은 자기의 이야기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겨
졌다.
  "표는 이미 사 두었지요."
  "저어, 일단 집에 들르겠지요?"
  "아닐세. 돌아오면 뭘 하겠나."
  잉그마르는 입을 다물었다.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앉아  있는 게
마치 반은 잠듯 듯했다.
  "옷들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마르타가 대신 물었다.
  "모두 준비했답니다. 가방에 챙겨서, 읍에 나가면 늘 들르던 레브
벨리의 여관에 맡겨놨지요."
  "부인께선 마중을 나가시겠죠?"
  "아마 나가지  않을겁니다. 가고 싶어하겠지만 나는  만나지 않는
게 좋을거라구 생각하니까요."
  "그렇기도 하겠군요."
  "여관에 표와 돈이  모두 맡겨져 있으니까 브리타에게 필요한 건
전부 준비된거죠. 잉그마르가  이 일을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
았읍니다. 그래야 브리타로 인해 마음이 무겁지 않을테니까요."
  마르타도 역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머리에 쓴  스카프가 한편으
로 흘러내렸는데도 똑바로 앉아 앞치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잉그마르, 자네는 새장가를 가는 게 좋을게야."
  두 모자는 계속 말이 없었다.
  "부인께서 이 큰 집을 혼자 돌보신다는 건 무리일 듯싶은데.... 잉
그마르, 자네는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드려야 하네."
  상원의원은 잠시  말을 멈추고 그들이 자기의  말을 듣고 있는지
어떤지 눈치를 살폈다.
  "저와 집사람 역시 모든 일이 새로이 시작되길 바라지요."
  그는 분명하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러는  동안 잉그마르의 마음
은 너무도 가벼워졌다.
  '브리타는 미국으로 가려 한다. 이제 결혼은  필요없다. 뼈대 있는
가문에 살인자를 주부로 두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잉그마르는 계속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이런 생각을 내색할 수는 없지'
  그러나 결국 무슨  말인가를 하지 않으면 입장이 곤란해지리라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상원의원은 조용히  상대방의 응답을 기다렸다. 그는  사고방식이
완고한 사람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꽤 필요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
다.
  "브리타는 벌을 받은거예요. 이젠 우리 차례지요."
  드디어 마르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상원의원이 자기들의 애로
점을 해결해 준 댓가로, 만일의 경우 잉그마르  집안에 어떤 사례를
요구한다면 선뜻 응하겠다는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잉그마
르는 어머니의 말을  달리 받아들였다. 그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듯 꿈틀 놀랐다.
  '아버지는 이 일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이 상황들을 모두
아버지께 고하면 아버지는? ....'
  잉그마르는 초조했다.
  - 너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네가  브리타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워도 하나님이  그런 너를 벌하지 않고 못본체하리라
고 생각한다면  그건 무서운 일이다.  잉그마르손아, 만일 브리타의
아버지가 네게 돈을 얻어내기 위해 브리타를 버려가면서까지 네 호
의를 사려고 해도 너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아버지는 이 사건으로 줄곧 나를 지켜보고 계신 게 확실해. 나의
비열함 - 브리타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려던 - 을 깨우쳐 주기
위해 브리타의 아버지를  내게 보내신거야. 아버지는 분명  내가 지
금까지 브리타가  그렇게 떠나는 걸 원치  않았음을 알고 계셨던거
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에 약간의 브랜디를 떨어뜨리고 잔을
집어들었다.
  "오늘 여기까지 와 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그는 상원의원의 찻잔에 자기의 잔을 살짝 부딪쳤다.

  브리타가 출감하는 날 아침, 잉그마르는  자작나무 주변에서 부산
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우선 발판을 만들고, 두 그루의 나무 끝을
양쪽에서 잡아당겨 아치 모양을 말들었다.
  "무얼 할 생각이냐?"
  "그냥 이런 모양을 해 두면 새로운 기분으로 재미있을 것 같아서
요."
  정오가 되자  사람들은 일손을  놓았다. 머슴들은 점심을  먹고서
안마당으로 나가 풀섶에  누워 낮잠을 즐겼다. 잉그마르도  거실 옆
방의 넓은  침대에서 낮잠을 잤다.  오직 한 사람 마르타만  널찍한
방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때 대문이 슬며시 열리며 장대에 광주리 두 개를 멘 노파가 들
어섰다. 인사를 하고  난 노파는 문 옆에 놓인 의자에  가서 앉으며
광주리 뚜껑을 열었다.  한쪽엔 러스크 비스켓과 포도를  넣은 단빵
이, 다른 한쪽엔 향료를  넣은 빵이 담겨 있었다. 마르타는 곧 노파
앞으로 가서 값을 흥정하기 시작했다. 여느 때  같으면 한사코 돈을
쓰지 않는 그녀도 단것을  커피에 적셔 먹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과자를 고르며 그녀는 노파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흔히 그렇듯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많은 사람을 대하는 이 노파도 여간 수다스러운
게 아니었다.
  "카이자,  당신은 사리에  밝은 사람이니  모두들 믿고  의논하겠
지?"
  "예, 그렇지요. 전 많은 얘기를 듣지요.  하지만 만약의 경우 제가
그런 것들을 멋대로  지껄였다간 머리채가 휘둘리는 망신살이 숱하
게 생길거예요."
  "그랬군. 어쩐지 어떤 때는 지나치게  입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기
도 하더니만."
  노파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인지 선뜻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
문이다.
  "주께서 용서하시기를!"
  노파는 눈물이 글썽해지며 말했다.
  "베리스코그에서 상원의원님의 마나님과  얘기를 나누고 곧장 이
리로 오는 길입니다."
  "아니, 상원의원님의 마나님과 얘기를 하고 이리로 곧장?"
  마르타는 '상원의원의  마니님'이라는 말에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말했다.
  잉그마르는 바깥문 열리는  소리에 문득 눈을 떴다.  아무도 들어
온 것 같진  않은데 문이 열린 채 삐그덕거렸다. 누군가가  열어 두
었는지 저절로  튕겨졌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잠결에 일어나고
싶지 않아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때 바깥방에서  말을 주고받는 소
리가 들려왔다
  "얘기 좀 해보게, 카이자. 잉그마르가 브리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애초에 부모가 억지로 떠맡긴 때문이라고 말들 하더군요."
  노파도 교묘히 피하며 대꾸했다.
  "솔직히 말해 봐요. 카이자. 내가 묻는거니까 굳이 돌려서 얘기하
지 않아도 돼요. 할멈이 무슨 소릴 해도 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
을테니까 염려 말라구"
  "그럼 먼저 이 얘기부터 하지요.  언제나 베리스코그에 가보면 브
리타는 늘 우울해  보였답니다. 한번은 브리타와 제가  부엌에 단둘
이 있게  되었는데 그때 제가 '훌륭한  신랑을 얻게 되었구료, 브리
타'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브리타는  제가 놀리기라도 했다는 듯 저
를 쳐다보더군요.  그리구는 제게 다가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
니.... 카이자  할머니, 훌륭하다구요, 네?'하지  않겠어요. 그 말투는
마치 잉그마르 도련님을  눈앞에 두고 바라보면서 아무리 바라보아
도 좋은 구석을  찾을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어요. 저는  평소에 잉
그마르 집안의 모든 분들을 참으로 존경했답니다. 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 그만 저도 모르게  빙긋이
웃고 말았어요. 그런  저를 한참 바라보던 브리타가  다시 그러잖겠
어요. '훌륭하다구요, 네?' 그러구는  휙 돌아서더니 목이 찢어질 듯
울어제끼며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가  버리더군요. 그래도 저는  그
집을 나서며  속으로 생각했지요. '모든  일이 잘 될거야.  잉그마르
집안은 늘 모든 일이 잘 되니까'하구요. 만일 잉그마르손이 제 딸에
게 청혼을 해왔다면 저는  딸이 얼른 승락하기 전에는 잠시도 마음
을 놓지 못했을거예요."
  잉그마르는 침대에 누운 채  오고가는 말들을 전부 들을 수가 있
었다.
  '어머닌 일부러 저러셔. 내일 내가 읍에 나가는 것이 브리타를 집
으로 데려오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게지. 나를  그러지도 못할 만
큼 비겁한 놈이라곤 생각지 못하시니까'
  "그 다음에 제가 브리타를  만난 것은 그애가 댁으로 오고 난 뒤
였답니다. 마침 댁엔 손님이 꽉 차서 이 댁이  마음에 드는가 안 드
는가를 물어볼 경황이 없었는데, 제가 숲속을 지나는  걸 보고 브리
타가 따라오며 '카이자 할머니! 요즘 베리스코그에 가 본 일이 있으
세요?'하고 묻지 않겠어요. '엊그제께  들렸지'하고 제가 대답했지요.
'어머! 엊그저께요? 저는 집에  안 가본 게 몇 년은 되것  같아요'하
더군요. 그 말에 뭐라고 해야 좋을지 무척 난감했어요. 아주 사소한
일에도 참을성이 없어져서 제가 무슨 소리라도 할라치면 금새 울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요. '집에 다녀올 수  있으면 좋을텐데'라고 말하
자, '아뇨,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어요' 하고 대답하더
군요. '그러지  말구 한번 다녀와요. 지금  거긴 참으로 아름답다우.
풀숲엔 빨간 진달래가  자욱하고 숲엔 딸기며 뭐며  한창이지' 하니
까,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벌써  진달래가 폈어요?' 합디다. '늘
듣는 얘기지만 잉그마르 집안  사람들은 함께 살기가 말할 수 없이
좋다던데. 모두 곧은 사람들이구'라고 했더니  브리타는 '네, 그래요.
그분네들 하는  식으론요' 하잖겠어요.  '언제나 공평하고  올바르고
마을에서 제일 좋은 사람들이지' 하고  내가 덧붙이니까, '하지만 억
지로 아내를 맞는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진  않던데요'하고 비꼬듯
말하는거예요. 내가  다시 '게다가 모두들 매우  영리하구'하며 우기
니까 '유식한 건 자기들뿐인줄 알더군요'하며 여전하길래, '아무말도
하지 않우?'하고 물었더니, '꼭 필요한 말  이외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아요.'하더군요. 이젠 가야겠구나 생각하는데  마침 화제가 결혼식
은 어디서 올릴 예정인가,  시댁이냐, 친정에서냐 하는 데로 옮겨지
게 되었지요. '여기서 하게 될거예요,  방이 많으니까'하고 말하길래,
저는 식을 오래 미루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지요. '한달 안으로 식을
올릴거예요'하고 브리타는  말하더군요. 그런데  브리타와 헤어지기
전에 문득 잉그마르 집안에  흉년이 든 생각이 떠올라 예정대고 식
을 올릴 수 없지 않을까를 넌지시 물었지요. 그랬더니 '만일 그렇게
되면 저는  강물에 뛰어들어야  할거예요'하고 대답하지  않겠어요?
한 달쯤 지나  저는 결혼이 연기 되었다는  말을 듣구 일이 무사할
것 같지  않은 걱정이 곧 베리스코그로  달려가 브리타의 어머니와
얘기를 했답니다. '잉그마르 농장에선 정말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
고 있어요', 그랬더니 브리타의 어머니는  '우린 무슨 일이든 그분들
이 하는 일엔 마음이 놓여요. 딸아이에게 모두  극진하게 대해 주어
서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이지요' 하더군요"
  '어머니는 저토록 번거로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텐데'
  잉그마르는 생각했다.
  '이 농장에선 브리타를 데리러 갈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그
까짓 자작나무  아치를 보구 저토록 갈피를  잡지 못하시다니 그저
재미삼아 해봤던 걸  가지구.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가는 생각
해 볼 필요가 있겠지만 말야'
  "제가 브리타를 마지막 봤던 것은"
  카이자는 계속했다.
  "깊어진 겨울, 한 차례  폭설이 쏟아진 후였어요. 저는 무척 걷기
가 힘든 숲속의 쓸쓸한 오솔길을 지나고 있었지요.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눈 속에 앉아 쉬고 있는 사람을  하나 발견했어요. 브리타였지
요. '아니 이런델 혼자서 나왔수?' '네,  산책하러 나왔어요.' 저는 가
만히 서서  브리타를 바라보았지요.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던거예요. 한참 후에 브리타가  말하더군요. '이 근
처 어디에 험한 산이 없을까  찾고 있었어요' '아이고,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릴 작성이군'  가슴이 몹시 뜁디다.  내가 보기에도 브리타는
삶을 지탱하는 데 넌더리가 난 듯했어요. 그러구  있을 때 브리타는
'높고 험한  산이 있으면 정말 전  거기서 뛰어내릴 거예요' 하더군
요. '그런  소릴 하다니 부끄럽지  않수? 다들 매우 잘해  준다던데'
'제가 몹시 나쁜 계집이죠, 카이자 할머니?' '그런 것 같구먼' '꼭 무
슨 무서운 일을 저지를 것 같아요. 그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나을거예요' '그런 소릴 함부로 하면 못써요.  너무 어처구니없고 쓸
데없는 생각이야' 제가  나무랐지요. '저는 말예요, 잉그마르 사람들
과 함께 살고부터 모든 게 악순환이에요' 브리타는  매우 무서운 눈
초리로 다가왔어요. '그 앙갚음으로  줄곧 어떻게 하면 잉그마르 집
안 사람들을 괴롭힐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한답니다.'하며 소리치
더군요. '못써요! 그분들은 좋은  사람들이야, 브리타' '그 분들이 하
려는 일은 모두 나를 욕되게 하는거예요' '그 분들에게도 그런 말을
해봤수?' 내가 물었지요.  그랬더니 점점 한다는 소리가  '뭣 때문에
그런 소릴 해요? 저는 단지 어떻게 하면 복수를 할 수 있을까를 생
각할 뿐이에요. 농장에 불을 지를 생각도 해봤어요. 그이가 무척 소
중히 여긴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암소에 독물이라고  먹이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간절했었는지! 암소들은 모두 눈언저리가  허연
것이 늙어서  흉하기 짝이 없는데 잉그마르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소와 친척이라도  되는 듯해요'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지
요. '짖는 개는 물지 않는 법이라우' '저는 그이에게 무슨 일이든 저
지르지 않고는 가슴이 답답해  죽을 지경이에요' '아가씨는 지금 무
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구 있어요. 지금 하려는  일들이 자신을 평
생 동안 괴롭게 따라다닐거라는 것도'  그러자  브리타는 갑자기 오
열을 터뜨리더군요. 그러더니 잠시 후, 불쑥 솟구친 나쁜 생각 때문
에 몹시 괴로왔다며  무척 온순하게 말하겠지요, 함께  집으로 돌아
와선 헤어지며 제가 비밀만  지켜 준다면 분별없는 짓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더군요."
  노파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저는 누구한테든 이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었어요. 그런데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이렇게 훌륭한 댁에
는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고...."
  그때 마침 마굿간  위의 종이 울렸다.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
는 것이었다. 마르타는 갑자기 노파의 말을 가로막았다.
  "카이자 할멈,  할멈은 브리타와 잉그마르가 다시  원만한 상태로
돌아갈 것 같은가?"
  "예에?"
  노파는 화들짝 놀라며 짧게 숨을 들이켰다.
  "아니, 만일에 브리타가 미국에 가지  않게 된다면 잉그마르와 함
게 살 것 같은가 말일세."
  "어떻게....? 제 생각엔 그럴 리가 없을 것 같군요."
  "그럼 할멈은 그  아이가 잉그마르에게 같이 살지 않겠다고 할거
란 말인가?"
  "길게 얘기하면 뭣합니까?"
  잉그마르는 양 다리를 흔들며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네 차례다, 잉그마르'
  그는 생각했다.
  '이쯤 되면 내일이라도 집을 떠나야 할게야'
  그는 침대 모서리를 주먹으로 툭툭 쳤다.
  '어째서 어머니는,  브리타가 나를 여전히  좋아하지 않고 있으며
내가 여행을 시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시는걸까?'
  그는 마치  머릿속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구둣발로 침대 옆구리를 연거푸 툭툭 쳤다.
  '아뭏든 다시 한번 시도해 보는거야'
  그는 결심을 굳혔다.
  '우리 잉그마르는 무슨 일이든 쉽게 포기하지 않아. 몇 번이고 다
시 해보는 인간들이지.  내가 저지른 실수로 인해  불안감으로 정신
분열을 일으킨 여자를 방관한다는 것은 남자다운 처사가 아냐'
  그는 자신이 심각할 만큼 완벽하게 패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
면서 마음을 모질게 먹으려고 애썼다.
  '만일 내 집에서  브리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 난  인간 쓰
레기에 불과해'
  그는 마지막으로 침대 윗기둥을 탕 치며 슬슬 일을 시작해 볼 생
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건 틀림없이 아버지가  나를 읍에 나가도록 하기  위해 카이자
할머니를 이리로 보내신거야'

  읍에 도착한 잉그마르는  웅장한 형무소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
고 있었다.  형무소는 공원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언덕 위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주위의 풍경에는 아랑곳없이 쇠약한  노인처럼 비
틀거리며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인 채 몸뚱이를 끌다시피 걸어갔
다. 이 날은 여느 때의 얼룩진 농부옷은 벗어  버리고 검은 나사 양
복에 빳빳하게  풀을 먹인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으나 셔츠는 이미
구겨져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매우 담담해 보였으나  걱정으로 자꾸
만 마음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자갈이 깔린 형무소 안마당에  들어섰을 때, 당직 수위가 보였다.
그는 오늘이 브리타 에릭손이라는 여자의 석방 날이 아니랴고 물어
보았다.
  "글쎄요, 어떤  여자 한  사람이 오늘  나오게 되어 있긴  합니다
만...."
  "갓난아이를 죽인 죄로 들어간 여잔데요."
  "네, 네, 그렇지요. 틀림없이 오늘 나가는 사람입니다."
  잉그마르는 나무 밑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잠시도 형무
소 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개중에는 아마 재수없이 저 속에 갇혀 있는 사람도 있을거야'
  그는 생각했다.
  '바보 같은 말이지만  어쩌면 저 속에 있는 사람 중엔  밖에 있는
나보다 괴로움이 훨씬  덜한 사람도 많을거야. 어쨌든  아버지는 형
무소로부터 아내를 데려가도록 나를 여기로  보내신거야. 하지만 아
들인 내가  그 생각을 기뻐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군.  그보다는
딸을 신랑에게 넘겨주기 위한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영광의 문을
지나오는 신부를 보는  편이 훨씬 좋을테지. 그리고  꽃가마를 타고
뒤엔 긴  결혼식 행렬을 이루며  교회에 가는 편이, 더불어  신부는
잘 차려 입은 신랑 옆에 앉아 다소곳이 미소짓는 편이 좋았을거구'
  문이 몇  번인가 열렸다. 고해신부가  나오고, 형무소장의 부인이
나오더니 다음에는 시내에 나가려는 몇  사람의 교도관들이 나왔다.
마지막에 브리타가 나타났다.  문이 열리는 순간 그는  마음에 심한
동요를 느꼈다.
  '아, 브리타!'
  그는 아래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마비라도 된 듯  움직일 수가 없
었다. 간신히 아음이 진정되자 그는 눈을 들었다. 그때 브리타는 문
밖의 디딤돌 위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잠시 꼼짝도  하지 않고 못박힌 듯 서 있었다.  머리에 덮
어쓰는 쇼올을  뒤로 내려뜨리고 맑고 또렸한  눈으로 주위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형무소는 지대가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으
므로 그녀는 한눈에 거리와  펼쳐진 숲 저편의 고향 산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별안간 그녀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흔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돌층계 위에  주저 앉았다. 잉그
마르가 앉아 있는 곳까지 그녀의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얼
른 그녀에게로 달려갔으나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고 잇는 그녀 앞
에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그는 입
을 열었다.
  "그렇게 울지마, 브리타!"
  그녀가 얼굴을 들었다.
  "아니!"
  하고 그녀가 나직이  소리쳤다. 브리타는 자신이 남편에게  한 행
동이 일시에 가슴을 찔러오는 모양이었다.
  '여기에 오기까지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을텐데'
  다음 순간 그녀는 기쁨의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그의 목에 두 팔
을 감고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잉그마르는 자기가 온  것을 그녀가 이토록 기뻐한다고 생각하니
걷자븡ㄹ 수 없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봐, 브리타. 정말 나를 기다렸소?"
  "당신께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어요."
  잉그마르는 몸을 뒤로 제끼고 아주 차갑게 말했다.
  "그러기엔 시간이  걸렸겠지만 이곳엔 그다지  오래 있을 필요가
없소."
  "그래요. 여긴 언제든 있어서 좋을 곳은 못 돼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레브벨리의 여관에서 잤지"
  거리로 나서며 그가 말했다.
  "제 트렁크가 있는 곳이네요."
  "거기서 나도 봤소.  마차 뒤에 매달기엔 너무 크니까  그냥 맡겨
두었다가 나중에 누굴 시켜 가져오도록 합시다."
  브리타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잉그마르가 그
녀를 집에 데려갈 생각을 은근히 비친 최초의 의사표시였다.
  "오늘 아버지에서서  편지를 받았어요.  아버지께서는 당신  역시
제가 미국으로 가길 원한다고 그러셨던데요."
  "나는 당신이  어떻게 하든 하등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지.  나와
함께 집으로 가길 원할지 어떨지를 확신할 수 없었거든."
  그녀는 그가 자기와  함께 가 주길 원한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음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또다시 강요하고 싶지  않은 까닭
이라고 여겼다. 그녀는 썩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잉그마르 농장에
서 지기와 같은 인간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
닌 것이다. 순간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빨리 말해.  미국으로 가겠다고, 그것만이 죄값을  치르는 길이라
고. 어서 그렇게 말하라구.'
  그녀의 내부로부터 무엇인가가 재촉했다. 그러나  이 생각이 그녀
의 마음속에서 주춤하는 순간  또 다른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
렸다.
  '저는 아무래도 미국으로 건너갈  만한 의지가 없어요. 다들 그곳
에선 일이 여간 고된 게 아니래요.'
  마치 자기 자신이 아닌 딴사람이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
  "모두들 마찬가지더군."
  잉그마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마음이  다부지지 못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그날
아침 형무소의 신부에게 말한 일들을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사회에 나가 선량하게 살겠읍니
다."
  그러자 자기 자신에 대한 짜증으로 묵묵히 걸음을 옮기면서도 어
떻게 자신이  한 말을 취소할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어쨌든  입을
떼려던 순간 그녀는 만일 잉그마르가 아직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데 그것을 다시 뿌리치게  된다면 그야말로 은혜를 모르는 가장 천
한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이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윽고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벽에 기대섰다.
  "이렇게 소란스럽고 많은 사람을 보면 현기증이 나서...."
  그녀는 말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쥔 채 걸었다.
  '이렇게 하고 있으니 마치 사랑하는 사이 같군.'
  잉그마르는 생각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이 어
떻게 대할는지'
  레브벨리에 도착하여 말이 충분히 쉬자,  잉그마르는 그녀에게 별
다른 생각이 없다면 곧 출발해서 그날 안에 몇 군데의 여관을 가볍
게 통과해 버리자고 말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이야말로 그에게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야. 고맙다는 인
사부터 하고 어서 말해야 해'
  그녀는 그가 자기를  데리러 왔는지, 어떤지를 가르쳐  달라고 신
에게 기도했다. 그러는 동안에 잉그마르는  헛간에서 마차를 끌어내
고 있었다.  마차는 칠을 새로  한데다가 좌석에는 새 덮개가  덮여
있고 흙받이는 번쩍번쩍  광이 났다. 한쪽에는 약간  시들어 보이는
조그맣게 묶인 들꽃다발이 있었다. 그 꽃을 발견한  브리타는 그 자
리에 우뚝 서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마굿간으로  돌아갔던 잉그마
르는 말에 마구를  앉어 몰고 나왔다. 그때 그녀는 말  목덜미의 굴
레 사이에도  같은 꽃다발이 묶여 있음을  발견하고는 아직도 그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아
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를 배운  망덕한 인간으로 볼  것이고, 그토록 큰 사랑을  베푸는데
이해조차 못 해준다고 안타까와 할 것이다.
  잠시 동안 그들은 묵묵히 말을 달렸다. 이윽고  그녀는 침묵을 깨
뜨리기 위해  집안 일들을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잉그마르에게
그 질문 하나하나는  두려워하던 피곤한 사람들의 이름을 떠오르게
했다. 누구는 무척 놀라겠지, 누구는 아마 비웃을게구 하며 그는 생
각했다.
  그는 그저 '응', 혹은 '아니'만 되풀이했다.
  브리타는 몇 번이나 되돌아가자고 부탁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를 원하는 게  아니야.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  이이는 그저
자비심에서 이럴 뿐이야'
  그녀는 곧 질문을 그만두었다. 그들은 침묵한 채  몇 마일을 쉬지
않고 달렸다. 첫  역참에 닿으니 여관에서 따뜻한  커피와 비스켓을
차려 내왔다. 그리고 쟁반 위에는 많은 꽃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녀
는 전날 잉그마르가 지나오면서 시켜 놓은 것임을 알았다.
  '이것도 역시 측은한  마음고 친절만으로 취한 행동일까?  이이는
어제는 행복했었을까? 그런데 오늘 출감하는 나를 보면서부터 우울
해진 것일까? 내일이 되면 오늘의  모든 일을 잊고 아마 상태가 다
시 좋아질거야'
  비탄과 후회가 브리타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
상 그를 불행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마을의 교회가 보이는 곳까지  당도했을 때 시간은 10시쯤 되어 있
었다. 교회로 이어지는 한길을 달려가니 마침 종이  울리고 많은 사
람들이 떼를 지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일요일이었군요."
  브리타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깍지를 끼며  소리쳤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볼 생각을 하니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
다.
  "저, 교회에 가고 싶어요."
  그녀는 잉그마르에게 말했다. 그가 자기와  함께 사람들의 구경거
리가 될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마음속엔  차오르는 신
앙심과 감사만이 온통 가득했던 것이다.
  잉그마르는 호기심에 찬  사람들의 눈초리와 수닷런 입방아에 정
면으로 맞설  자신이 없어, 도대체  브리타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만간에 겪어야 할 일이지.'
  그는 생각을 고쳤다.
  '뒤로 미룬들 마음이 편치 않긴 마찬가지야.'
  그는 교회의  안마당으로 마차를  몰았다. 기도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잔디나  돌담 위에 모여 앉아  몰려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앞에 잉그마르와  브리타가 나타나자 옆사람
을 팔꿈치로  쿡쿡 찌르곤  수군덕거리며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잉그마르는 브리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깍지를 낀 채  주위의 일
엔 무신경한 듯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분명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으나 잉그마르는 너
무도 또렷이  사람들의 태도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마차 뒤로  우
몰려왔다. 그들이  몰려들고 구경하는 것이 잉그마르에겐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지도 몰랐다. 잉그
마르와 자기의  아이를 목졸라 죽인 장본인이  함께 하나님의 집에
나타나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들 하는군. 견딜 수가  없겠어. 어서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
을 것 같아, 브리타."
  "그렇게 해요."
  그녀는 오직 기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러
이곳에 온 것은 아닌 것이다.
  마구를 끄르고 말에게 먹이를 주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많
은 시선이 잉그마르에게 쏠렸지만 누구 하나 말을 건네오는 사람은
없었다. 잉그마르가 교회로 들어섰을  때, 이미 자리는 정돈되어 있
었고, 사람들은 예배를 시작하는  찬송가를 불렀다. 좌석 사이를 지
나면서 그는 부인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훑어보았다.  긴 걸상은 한
군데만 빼놓고 모두 꽉 차 있었다. 잉그마르는  그것이 먼저 들어와
있던 브리타임을 알았다.  어느 누구도 그녀와 자리를  함께하고 싶
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잉그마르는  그녀 옆으로 가서 앉았다. 브리
타는 움찔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그때까지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
했던 브리타도 비로소 자기  혼자만이 비어 있는 걸상에 앉아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마음 깊이 차 있던 신앙심이  어두운 절망
감으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와 함께 이곳에  온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리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눈물이 그냥  쏟아질 것만 같
아 그녀는 얼른  낡은 성격책을 펼쳐 들었다. 눈물에 가려  한 귀절
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쉬지 않고 책장을 넘겨 갔다.  그런데 문득
밝은 무엇이 눈에 띄었다. 책장 사이에 끼워져  있던 붉은색 하트가
달린 책끼움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잉그마르 쪽으로  살며시
밀어 보냈다. 그는  큼직한 손으로 그 위를 덮으며 흘깃  그녀를 바
라보았다. 다음 순간 책끼움은 마룻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앞으로 우린 어떻게 될까'
  브리타의 성격책 위로 몇 방울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잉그마르는 부랴
부랴 마구를  얹었고 브리타도  그것을 거들었다. 신도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을 때 브리타와 잉그마르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두 사
람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죄를 지은  자는 사람들의 무리에
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교회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참회
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쓰라리고 슬픈 마음의 브리타 앞에 드디어 잉그마르 농장이 나타
났다. 그것은  낯설도록 밝고 붉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잉그마르가
결혼하는 해에 집을  새로 칠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결혼식이 미루
어졌던 것은 그 무렵  잉그마르 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을 떠올렸다. 이제는 형편이  많이 좋아졌다. 그런데도 그들의 결혼
문제가 이번엔 곤란한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이 농장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도련님이 오시는데요!"
  한 농부가 밖을 내다보며 소리쳤다.
  마르타는 무거운 눈까풀을  어렵게 들어 올리며 식탁에서 일어섰
다.
  "그냥들 앉아 있어요! 아무도 식탁에서 일어날 필요가 없어"
  명령하듯 말을 마친 마르타는 느릿느릿 방윽 가로질러 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제일 좋은 옷에 비단 쇼올을 걸치고  비단 스카프를 쓴
품이 평소보다 권위  있게 보였다. 말이 섰을 때 마르타는  이미 문
간에 나와 섰다. 잉그마르는 곧장 뛰어내려 아직  엉거주춤 앉아 있
는 브리타 곁으로 돌아가서 마차 무릎 덮개를 풀어 주었다.
  "안 내릴거요?"
  브리타는 양 손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돌아오지 말 것을...."
  그녀의 말끝이 흐느낌 속에 묻혀 버렸다.
  "어서 내려요, 브리타"
  잉그마르가 안타깝게 말했다.
  "저를 돌려보내 주세요,  저는 이곳에 올 자격이 없는 여자예요."
그녀의 말엔 일리가  있었으나, 잉그마르는 손을 무릎  덮개에 걸친
채 묵묵히 내려서길 기다렸다.
  "뭐라는게냐?"
  마르타가 문  앞에서 물어왔다.  브리타의 말이 울음소리에  섞여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에게 올 자격이 없다는군요."
  "울기는 왜 우는게야?"
  마르타가 퉁명스레 말했다.
  "전 정말 구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에요."
  브리타는 손으로 터질 듯한 가슴을 눌렸다.
  "뭐라구?"
  "구제받지 못할 죄인이랍니다."
  잉그마르가 되풀이했다.
  그의 차갑고 무정한 말투를 들으며 브리타의 가슴에 퍼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래, 만일 저이가 아직도 나에게 애정을 갖고 있다면 저렇게 내
가 한 말들을 어머니 앞에 반복하진 않을거야'
  "어서 내려오질 않고 뭐하는게야?"
  그때 마르타가 소리쳤다.
  "잉그마르를 불행하게 하고 싶진 않아요!"
  가까스로 울음을 삼키며 브리타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불행해질 가능성이 많지."
  마르타가 말했다.
  "보내 주어라, 잉그마르.  그러지 않으면 내가 나가겠다.  제가 낳
은 애를 죽인 여자와는  한지붕 밑에서 하룻밤이라도 같이 자고 싶
은 생각은 없으니까"
  "보내 주세요, 제발...."
  브리타가 애원하듯 중얼거렸다.
  잉그마르는 마땅찮다는 듯  혀를 차고는 말머리를 돌리더니 마차
에 뛰어올랐다. 이런  일엔 진저리가 나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던
것이다.
  거리에 나서자 그들은  교회에서 돌아오는 사람들과 빈번하게 맞
부딪혔다. 초조해진 잉그마르는 느닷없이 방향을  바꿔 숲속의 오솔
길로 마차를 몰았다. 막 방향을 바꾸는데 누군가가  그를 불러 세웠
다. 돌아보니 우체부가  그에게로 온 편지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편지를 받아 주머니에 쑤셔넣고 계속하여 마차를 몰았다.
  한길에서 꽤 멀어졌을  즈음에 잉그마르는 속력을 늦추고 편지를
꺼내들었다. 브리타가 그의 무릎을 잡으며 말했다.
  "읽지 마세요"
  "왜 그러지?"
  "읽을 필요 없어요. 별거 아네요."
  "브리타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제가 보낸 편지거든요."
  "그렇다면 편지 내용을 당신이 말해 봐요."
  "아녜요. 말할 수가 없어요."
  잉그마르는 브리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상기된 채 눈은
놀란 듯 커다랗게 열려 있었다.
  "아뭏든, 읽어 봐야겠어."
  잉그마르는 겉봉을 뜯기 시작했다.
  "어쩌면! 제 입장이 난처해지잖아요, 잉그마르"
  그녀가 애원했다.
  "제발, 제가 미국으로 떠난 후에 읽도록 하세요."
  브리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편지를 펴들고 읽기
시작했다. 브리타는 손으로 편지를 가렸다.
  "잉그마르, 제 말을 들어줘요, 네? 고해신부가 제게 그 편지를 쓰
게 한거예요. 내가 미국행 배를 탈 때까지  부치지 않겠다고 약속했
었는데 이렇게 일찍  배달되다니, 아직 읽을 권리가  당신에겐 없어
요. 제가 떠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잉그마르."
  잉그마르는 브리타를  노려보고는 마차에서 훌쩍 뒤어내렸다.  차
분한 마음으로 편지를 읽으려는 것이었다.  브리타는 몹시 흥분하여
아연실색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 편지에 쓰인  것은 고해신부가 쓰라는 대로 적은 것뿐이라니
깐요. 전 지금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잉그마르"
  잉그마르는 눈을 들어 가만히 브리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형무소에서 그녀는 겸손의  미덕을 배웠떤 것이다.
말하자면 자손심을 지나치게 네세우는 것도 겸손은 아니었다.
  편지 내용을  되새기던 잉그마르는 별안간 참기  어려운 듯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편지를 구겨 쥐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야."
  그는 브리타 곁에 바짝 다가가서  그녀를 억세게 움겨잡았다. "나
를 사랑한다구, 편지에 그렇게 썼다구?"
  음성은 지나치게 거칠고 눈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브리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편지에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썼단 말이지?"
  잉그마르가 거칠게 다시 물었다.
  "네"
  브리타는 가냘프게 대꾸했다.
  잉그마르는 잔뜩 이그러진 얼굴로 브리타를 난폭하게 흔들어대고
는 한쪽으로 밀쳐버렸다.
  "어쩌면 그런 거짓말까지!"
  그는 냉소를 띠며 메마른 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을 다아...."
  "하나님은 아실거예요.  저는 밤낮으로 떠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했어요."
  그녀는 침착하고 또렷하게 말했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이야?"
  "물론 미국이죠."
  "뭐라구? 빌어먹을!"
  잉그마르는 마음을 가누지  못한 채 비틀비틀 숲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그리곤  털썩 주저앉아서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브리타가
달려가 그의 옆에 바짝 다가앉았다.
  "잉그마르, 나의 잉그마르!"
  그녀는 묘한 기쁨에 젖어 사랑스럽게 그를 불렀다.
  "그런데두 당신은 아직도 나를 미워한단 말이지."
  "그래요."
  잉그마르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저에게도 얘기할 기회를  좀 주세요. 당신이 3년  전에 법정에서
한 말들을 기억하세요?"
  "기억하고 있소."
  "당신에 대한 저의 생각이 달라진다면 저와 결혼하겠다던...."
  "그래, 그래"
  "그때부터 전  당신이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누구도  저를 그토록
사랑해 주리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하물며 온갖 몹쓸  짓을 다했던
제가 당신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리라곤! 도무지 밎어지지 않았어요.
그날의 당신은 이 세상 누구보다 훌륭해 보였어요.  다시 없는 어진
분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녀는 숨가쁘게 말을 이었다.
  "이분이야말로 평생을 같이할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솟구치는 당
신에 대한 애정이 뻔뻔스럽게도 당신과 나는 하나라는 생각을 다하
게 했지요. 그런데,  당신이 나를 데리러 와  주리라는 바램이 점차
흐려지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고쳤지요."
  잉그마르는 고개를 들었다.
  "그럴 때 왜 편지를 쓰지 않았소?"
  "썼지요"
  "용서해 달라던? 썩 내키지 않는 듯이 쓴 편지 말인가?"
  "그럼 무슨 말을 써야 했나요?"
  "다른게 있잖소."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어요, 제가"
  "하마터면 나는 정말 안 올 뻔했어."
  "하지만 잉그마르, 제가 그런 짓을  하고도 어떻게 당신에게 사랑
의 편지를 쓸 수 있었겠어요. 출감되기 전날에  쓴 편지는 고해신부
가 그렇게 써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죠. 제가  떠날 때까진 절대
부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말예요."
  "나는 당신을 때릴 수도 있소."
  잉그마르는 브리타의 손을 찰싹 치면서 말했다.
  "얼마든지요, 잉그마르."
  그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고뇌의 그림자  뒤에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고요하게 깃들어 있었다.
  "이런 당신을 그냥 보낼 뻔하다니!"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한때는 나도 당신을 증오했었소."
  "조금도 이상한 게 아니지요."
  "당신이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심 기
뻤지."
  "그래요, 아버지의  편지에도 당신이  좋아하더라고 적혀  있었어
요."
  "나는 웬지 어머니께  당신을 데려오게 해달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소."
  "그럼요, 잉그마르 그건 당연해요."
  "당신 일로 나는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어.  당신에 대한 내 처사
가 나빴다고 모두들 경시했으니까"
  "지금은 당신께서  해야 할 행동을 하신거예요.  나를 때렸으니까
요."
  "내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견딜 수 없었는지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소."
  브리타는 잠자코 들고 있었다.
  "지난 몇주일간 괴로왔던 일을 모두 생각하면...."
  그는 말을 이었다.
  "하마터면 당신을 보내 보릴 뻔한 것을 생각하면!"
  "하지만, 잉그마르. 당신은 저를 사랑하지 않았지요?"
  "그래, 조금도"
  "형무소를 나서면서부터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까지도 줄곧?"
  "한순간도! 당신과 함께 집으로 가면서는 줄곧  울화가 치밀고 있
었으니까"
  "그럼, 언제부터 그 마음이 변했나요?"
  "이 편지를 보구부터"
  "저는 당신의 사랑이 완전히  식어 버린 걸 알았기 때문에 제 사
랑이 싹튼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거예요."
  잉그마르는 쿡쿡 소리내어 웃었다.
  "뭐가 우습죠. 잉그마르."
  "우리가 교회에서  살짝 도망쳐 나오던 꼬락서니며,  잉그마르 농
장에서 받은 아주 근사했던 환영식을 생각하구 있었지."
  "그래, 웃음이 나와요?"
  "웃지 못할 건 또 뭐야. 어쨌든 우린  이제 부평초처럼 떠돌이 신
세가 될 것 같군. 아버지가 알면 뭐라고 하실까?"
  "웃는 것까진 좋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잉그마르. 그건 안 돼요"
  "그럴 수 있어.  이제 나는 당신 이외엔 아무것도  개의치 않을테
니까!"
  브리타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런 그녀와는 상관없이
잉그마르는, 몇 번이나 자기를 생각했으며, 얼마나 자기를 그리워했
는가를 브리타에게 말하도록 했다.
  그는 점차 자장가를  듣는 어린아이와 같이 조용해져  갔다. 브리
타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는 그가  만일 자기를 데려간
다면 자신의 죄가  얼머나 더 무거워지는가를 얘기할 작정이었으나
뜻밖의 그의 태도에  주눅이 들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잉그마르와
그의 어머니, 또는 자기를 맞이할 그 누구  앞에서든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고 초라해질 것인가를 얘기하려고 했으나 그런 말은 한 마디
도 꺼낼 수가 없었다.
  잉그마르가 무척 다정하게 말을 건네왔다.
  "그런데 나한테 뭐 할 말 없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브리타는 잉그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니, 아직도 그 생각이야?"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듯 그가 말했다.
  "한시도 빼놓지 않고 그 생각뿐이에요."
  "그럼 모든 것이 원상태로군"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의 생각을 얘기해 봐요. 이제 우린 하나니까"
  잉그마르는 브라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앉아 있었다. 그녀
는 마치 궁지에 몰린 노루새끼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브리타는
줄곧 이어온 자신의  생각들을 이야기했고, 그러자 차츰  마음이 가
라앉는 것 같았다.
  "이제 마음이 후련한가?"
  그녀가 이야기를 마치자 잉그마르가 말했다.
  "마치 가슴에서 큰 짐을 들어낸 것 같아요."
  "둘이서 함께 그걸  받들고 있기 때문이지. 이제 다신  떠날 생각
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저두 얼마나 떠나기 싫었는지 몰라요."
  "자, 함게 집으로 돌아가는거야."
  잉그마르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니예요. 전 두려워요."
  "어머니는 그렇게 무서운 분이 아냐."
  잉그마르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토록 뉘우쳤다면 그것으로 된거야."
  "아녜요, 잉그마르. 저  때문에 어머니를 나가시게 할  순 없어요.
역시 미국으로 가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요."
  "당신에게 하구 싶었던 얘기가 있어."
  잉그마르는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아요. 우릴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도와주는 사람?"
  브리타는 의아한 듯 물었다.
  "그래, 나의  아버지지. 아버지가 모든 일이  잘 되도록 돌봐줄거
야."
  그때 누군가  숲속의 길을 걸어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
다. 얼핏 누군지 알아볼 순 없었지만 그건 분명 카아지였다.
  "안녕하세요?"
  잉그마르와 브리타가 인사를 하자 노파는 가까이 다가와서 두 사
람의 손을 잡아 쥐었다.
  "이런! 이런 곳에 있다니. 농장 사람들이 모두들 찾느라고 야단인
데, 교회에서도 두  사람이 그렇게 빨리 사라지는  바람에 만나보지
도 못했었잖우. 그래서  농장으로 가 브리타에게 인사나  하려구 했
는데 가 보니까 목사님밖에 안 계시더군. 목사님은  또 집안에 대고
큰소리로 마나님을 부르고 있어 인사할 겨를이 없었지 그런데 마나
님이 나오시자 목사님은 인사를  하기가 무섭게 '마르타 마나님, 이
제 마나님은 얼마든지 아들을 자랑하실 수 있게  됐읍니다. 역시 뼈
대 있는 집안은 다르다는 걸 똑똑히 알았어요.  그러니 우리들은 이
제 잉그마르를 위대한 잉그마르라  부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
다.' 쇼올의 끈을 매시면서 가만히 서 계시던 마나님이 이윽고 물으
시니까, '잉그마르가  브리타를 데리고 돌아왔읍니다.'라고 말하시면
서, '그라니까 마르타 마나님, 잉그마르는  그일로 해서 지금부터 평
생 동안 존경을 받을겁니다.' 하고 설명하시더군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마나님이 말씀하시니까,  목사님은 '나는 두 사람이 교
회에 와 앉아  있는 것만을 보고도 그만 더 이상  집전을 할 수 가
없었읍니다. 내가 지금껏 설교해 왔던  어떠한 가르침보다 잉그마르
의 행동이 훨씬 훌륭한 가르침이었으니까요.  잉그마르는 우리 모두
가 명예로 삼을 인물입니다. 잉그마르의  옛날 아버님께서 그러셨듯
이 말입니다.'  하면 칭찬이 대단합디다. 목사님께서  대단한 기별을
가지고 오셨더라며 마르타 마나님은 은근히  기뻐하고 계셨어요. 그
런데 목사님께서  아직 잉그마르가 돌아오지  않았느랴고 물으시니
까, 마나님은  그렇다면서 '집에는 없어요. 베리스코그에서  자고 올
는지도 모르지요'하고 얼버무리시더군요"
  "어머니가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지요?"
  잉그마르가 소리쳤다.
  "그러믄요.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리구 우리가 두 분이 나
타나길 기다리는 동안에 마니님은  연신 사람을 시켜서 두 분을 찾
으셨어요."
  카이자는 주절주절  이야기를 계속했지만 잉그마르에겐  이제 그
녀가 하는 말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잉그마르의  생각은 다시 아버
지에게로 달려갔다.

  내가 거실로 들어서자 아버지는 잉그마르의 옛 조상들과 함께 앉
아 있다.
  "어서 오너라, 위대한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아"
  아버지는 몸소 내 앞으로 다가온다.
  "안녕하십니까, 아버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성스러운 결혼식을 올릴 수  있을게다. 그러고 나면 다
른 일들은 자연히 풀릴게야."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께서 늘상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잘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 건 대수로운  게 아니다. 우리들 잉그마르가 해야  할 일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
  영원의 시간에 서서

  제2부 위대한 잉그마르

     전도관과 예루살렘

  80년대 초엽, 옛  잉그마르손 집안이 살고 있던  마을에서는 새로
운 종교를 갖거나 새로운 형식의 예배를 보는 일이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종파가 달레카를리아  주의 다른 마을에서는
여기저기에 일어나, 새로운  의식에 따라 사람들은 온몸을  물에 담
그러 강이나 호수를 찾아나섰지만, 잉그마르손  마을의 사람들은 침
례교로 알려진 새로운  종파에 대해 "저런 일은 아콜레보나 가그네
프에 사는 자들에겐 알맞을지 모르나 우리 마을 사람들에겐 조금도
반가운 게 못 돼" 하며 비웃음을 던졌다.
  이곳의 사람들은 옛 풍습이나 습관에  집착하고 있었으며, 일요일
에 반드시 교회에 나가는 것도 그런 사고방식  탓이었다. 아무리 혹
독한 추위가 닥쳐도 마을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  나갔다. 어쩌면 그
럴수록 교회에 나가야  했는지도 몰랐다. 영하 20도까지  기온이 뚝
떨어지는 겨울날에 불을  피우지 않은 교회에서, 문간까지  가득 사
람이 들어차지 않고서는 도저히 예배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도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드는 것은 뛰어난 목사나 기막힌 설교
자 때문은 아니었다. 그 무렵 사람들은 설교를  즐기려는 것이 아니
라, 그들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교회에 나갔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황량한 벌판의 시골길에서 살을 에는 듯한 바람과 싸우며
사람들은 생각했다.
  '주님께선 내가 이  시리고 추운 아침에도 어김없이  교회에 나가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주실게야'
  이것만이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설교자가
목사직에 임명되고부터 일요일마다 신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말이외
에는 한 마디도 지껄이지  않은다고 해도 그것은 탓할 바가 아니었
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현재 얻을 수 있는 것만큼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듯했다. 그들은  목사가 읽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고 있어서, 자연히 그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다만 학교
의 교장이나 의식있는  한두 사람의 농부들만이 이따금 자기들끼리
이런 말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목사님은 설교 자료가  한 가지밖에 안 되는 것  같군. 하나님의
지혜라든가 하나님의 지배라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이야기하질 않
아, 이교도가  밀려들기 전까지는 그것도  괜찮겠지. 하지만 이렇게
허술해서야 첫 공격만으로도 대번에 그냥 허물어지겠는걸."
  마을 사람들이 속되다고 하는 타종파의 설교자들은 대개가 이 마
을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 "거긴 가서  뭘해? 그곳 사람들은 깨우침
을 싫어하는데"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설교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이웃마을의 이른바  <선각자>들
도 모두 잉그마르손  마을의 교인들을 죄인으로 여겼고,  그들의 교
회에서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 종은 '너희들의  죄에 감싸여서 잠
들지어다, 너희들의 죄에 감싸여서 잠들지어다!'  하고 울린다고까지
말했다.
  잉그마르손 마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교회종이 그런 식으로 모
독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늙은이고 젊은이고 할 것 없이 모
두 격분했다. 그들은 종이 울릴 때마다 어김없이 기도를 올렸고, 밤
마다 참회의 기도 시간이  되면 남자는 모자를 벗어들고 여자는 몸
가짐을 단정히 하여  '주기도문'을 외는 동안 줄곧 서  있기도 했다.
여름날의 해질 무렵엔,  첫번째 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움직이던 낫
과 쟁기가 멎었고,  경운기도 짐을 잔뜩 실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순간만큼  하나님이 위대하며 거룩하게 여겨지는 때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예수가 종소리를  통해 모든
신도들의 머리에 축복을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교구에 가르침을 주는  사람으로 대학 과정을 마친 사람은 아
직 한 사람도  없었다. 교장은 신분이 낮은  구식 농부로, 독학으로
공부한 스톰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스톰은 백 명의  아이들 정
도는 혼자서 다룰 수 있다고 자부하는 유능한  인물이었다. 30년 이
상이나 이 마을에  머문 단 한 사람의 교사였으며, 모든  사람의 존
경을 받았다. 스톰은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인 행복을  자기의 책임
으로 여겼으므로, 사람들이  설교사답지 못한 목사를 찾을  때면 몹
시 신경이 쓰였다.
  목사가 뜻하지 않게  신식 세례방식을 채택하는 것까지는 그런대
로 참을  수 있었지만, 한술  더 떠서 성찬식까지도 새로운  방식을
채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
게 되었다. 스톰  교장은 자기는 가난했으므로 마을의  유지들은 찾
아다니며 설득을 하여 전도관을 세우기로 작정했다.
  "아시다시피 나는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앙대로,  마을 사람들
을 강하게 하기 위한 설교를 원합니다. 만일  다른 설교자들이 나타
나서 새로운 세례방법이나 성탄을 들고 들어온다면 어떤 결과가 초
래될까요? 또한 무엇이 진짜  교리이며 무엇이 가짜 교리인가를 가
르쳐 주는 사람은 어찌 되겠읍니까?"
  마을의 목사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스톰을 좋아했다. 사람
들은 목사와 교장이 학교와 목사관 사잇길을 몇 번이나 왔다갔다하
면서 마치 이야기할 게 끝이 없다는 듯이 나란히 거니는 모습을 자
주 발견할 수 있었다. 목사는 또한 저녁  무렵에 어슬렁어슬렁 교장
댁에 들러서 장작이 타고 있는 따스한 주방에 앉아 스톰의 부인 스
티나와 한가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어떤 때는  거의 하루도 빠짐
없이 그 집을 찾았다. 아내가 늘 앓고  있어서 집안에선 단란함이나
즐거움을 찾을 수가 없어 쓸쓸하고 적적했던 것이다.
  어느 겨울 밤, 스톰과 스티나는 부엌의 난로가에  앉아 낮은 음성
으로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선 열두
살 난 계집애가  혼자 놀고 있었는데, 이 소녀는 그들의  딸로서 이
름은 게르트루드였다. 소녀는 연한 황갈색  머리와 토실토실한 장미
빛 볼을 가진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흔히 학교  교사의 아이들에게
서 볼 수 있는 약삭빠르거나 능청스러운 티는 조금도 없었다.
  방 모퉁이는  게르트루드의 놀이터였다. 거기에다 그녀는  색유리
조각이나 부서진 찻잔과 쟁반, 냇가에서 주워 온 동멩이, 네모난 나
무토막 따위의 잡동사니를 가득 모아 놓고 있었다.
  부모들은 그날밤 게르트루드가 마음껏 놀도록  내버려 두었다. 누
구 하나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놀이  이외에 공부를 해야
한다든가 어떤 다른 일을  해야 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밤엔 아버지를 돕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애'라고 그녀
는 생각했다.
  게르트루드는 방 한쪽에서 아주 큰일에  착수하고 있었다. 마을을
만들어 볼 작정이었던 것이다. 강과 다리, 교회와 학교가 있는 교구
전체를 만들 생각이었다.  물론 모든 것이 완전하지  않으면 안되었
다.
  마을 모형은 이제 거의 완성되어 갔다. 마을을  에워싼 나직한 산
들은 크고 작은  돌맹이로 만들었다. 틈새마다 자그마한  소나무 가
지를 빽빽하게 심고, 뾰쪽하게 모가 난 돌 두  개로 강 양쪽에다 크
라크 산과 오르프의 봉우리를 똑바로 세웠다. 산  사이에 있는 길다
란 골짜기는 어머니의  화분에서 퍼 온 흙으로  덮었다. 여기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로왔다.  한 가지 골짜기의 꽃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꽃이나 보리가 눈에 띄지  않는 이른봄이라는 점을
구실로 위안을 삼았다.
  골짜기를 흐르는 넓고  아름다운 강은 길쭉한 유리조각으로 근사
하게 꾸밀  수 있었다. 마을의  양쪽을 연결하는 다리는 물  위에서
쉴 새  없이 흔들거렸다. 꽤나  멀리 위치한 농장이나 곡간을  붉은
벽돌조각으로 표시했다. 제일  북쪽 끝에는 밭과 목장  사이에 잉그
마르 농장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산기슭에  클레젠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남쪽 끝에는  폭포가 있는 물살 빠른  강이, 골짜기를 지나
산을 가로질러 가는 곳에는 베리소나 주물공장이 서 있었다.
  강을 따라 만든 시골길에  모래와 자갈을 깔자 비로소 전경이 완
성되었다. 평원  위나 오두막  근처에는 조그만 숲까지도  여기저기
만들어 놓았다.  게르트루드가 온  마을을 한눈에 바라보려면  그저
유리와 돌과  흙 또는 나뭇가지만으로 꾸며진  이 구조물들을 한번
쓱 훑어보기만 하면 되었다. 게르트루드는  그것을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나 그녀는 고개를  들고 어머니를 불러 이 완성된 마을을
구경시키려다가 그만두었다.  어머니로 하여금 자기에게 주의를  돌
리도록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르트루드는 모형마을을 만드는 데 가장 어려운 일을 착수해 들
어갈 차례였다. 그것은 강  양쪽에다 도심 거리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자면 돌과 유리조각을  많이 움직여야만 했다. 주  장관의 집을
만들자니 상인의 가게를  밀어내야 했고, 의사의 집  옆에는 판사의
집을 만들 만한  여분이 없었다. 거기에는 교회와  목사관도 있었으
며, 약국과 우체국, 헛간이나  창고과 딸린 농가, 여관, 전신국 등이
모두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이런 것들을 빠짐없이  기억한다는 것
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흰 집과 붉은  벽돌집의 시가가 초록색 숲에 끼여 들어갔
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학교를 만드는 일뿐이었다. 게르트루드가
지금껏 무척 애를 쓴 것은  마지막에 가서 학교를 잘 세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학교는 넓은  공지가 필요했고, 거기에는
또 커다란 운동장과 한가운데엔 깃대를 세운 잔디밭을 만들어야 했
으므로 강가를 택했다.
  게르트루드는 학교를 짓기  위해 특별히 좋은 나무토막과 돌조각
을 남겨두었다. 이젠  어떻게 하면 훌륭하게 지을  것인가만이 문제
인 것이다. 그녀는 아래층과 이층에 넓은 교실이 있고, 자신의 가족
이 살고 있는  것처럼 큼직한 부엌과 방이 딸린, 사실과  똑같은 것
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자면 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부모
님은 자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놀고 있도록 놔두지는 않을게 분명했
다.
  그때 문간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면서 누군가가  툭툭 눈을 터는
소리가 들렸다.  게르트루드는 다시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그녀는
목사님이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러 오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늘밤엔 마음대로 놀 수 있겠어!'
  그녀는 자신감을 가지고 마을의 절반은 될 커다란 학교를 만들기
시작했다.
  스티나는 문간에서 나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얼른 일어나서 낡은
안락의자를 벽난로 옆에 끌어야 붙이며 남편을 향해 말했다.
  "오늘밤 그 말씀을 하실 생각이세요?"
  "응"
  스톰이 대답했다.
  "분위기가 자연스러울 때 말하는 게 좋지."
  이윽고 목사가 들어섰다. 추위로  몸이 거의 얼어붙은 터라, 난로
가 있는 후끈후끈한 방에 들어서자 그는 기분이 좋아져서 언제나처
럼 말이  많았다. 늘상  저녁때쯤이면 어슬렁어슬렁 나타나서  크고
작은 세상사를  지껄여댈 때의 목사만큼 사람  좋은 인물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우둔한 설교자라고는  도무지 믿어
지지 않을 만큼  자신감 있게 청산유수로 세상  일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간혹  영혼에 관한 것을 묻기라도  할라치면 그는 얼굴을
붉히고 더듬거리며 주의를 끌  만한 얘기들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
다. 그저 "하나님은 슬기롭게 지배하신다"는 정도의 말이 전부였다.
  목사가 기분 좋은 듯 앉아 있을 때 스톰은 별안간 그를 바라보며
유쾌한 듯이 말했다.
  "목사님께 얘기해야 할 소식이 하나  있읍니다. 나는 지금 전도관
을 세울 생각입니다."
  목사는 안색이 파리해지면서 힘없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뭐라고 말씀하신겁니까, 스톰 선생?"
  그가 신음하듯 말했다.
  "이곳에다 전도관을 세울  작정이라구요? 그럼 나나 교회는 어떻
게 되는거지요?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겁니까?"
  "아니요, 교회와 목사님은 여전히 필요하겠지요."
  스톰이 확신 있는 태도로 말했다.
  "내 목적은  전도관을 통하여 교회의 번영을  촉진하려는 겁니다.
너무나 많은 종파가  우리나라에 생겨났으나, 어떻게 하든  우리 교
회도 새롭게 변모와 발전을 해야죠."
  "나는 스톰 선생을 친구로 알고 있었는데."
  목사가 슬픈 듯이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믿고 기
꺼운 마음으로 찾아왔는데,  전도관 얘기로 단번에 맥이  풀리고 잔
뜩 혼이라도 난 듯 멍멍한 느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스톰은 목사가 왜 이렇게 괴로와하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한때
이 목사는 매우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학창시절
한때의 방종으로 오점을 남겼던 것이 오늘날까지 그에게 타격이 되
어 오고 있었다.
  목사는 그만 낙심하여 사고력이 마비된 모양으로 꼼짝도 하지 않
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목사님."
  마침내 스톰이 낮은 음성으로 되도록 친근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스톰 선생, 나도 내 자신이 적절한  설교자는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읍니다. 하지만  선생이 나의 생계를 막으리라곤  생각도 하
지 못했군요."
  스톰이 부정적인  몸짓을 보였다.  그런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는
뜻이었지만 말로 표현하기가 묘연했다.
  스톰은 육십의  나이에도 모든 책임있는 직무를  도맡아 할 만큼
여간 정정하지 않았다. 그는  목사와는 아주 상반되는 모습으로, 달
레카를리아 주의 남성 중에서도 가장 훤칠했으며 검은 머리칼에 구
릿빛 살갗, 남자다운 용모에  체격도 튼튼했다. 목사는 가슴이 좁고
머리가 벗겨진 조그만 사나이였다.
  스티나는 당당한 입장의 남편에게 그만두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
러나 남편의 태도에는 그럴 만한 기미가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스톰은 솔직하게 요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이 마을에 이단자가 침입할  게 틀림없으니 교회의 예배 이외에 다
른 형식으로 신도들에게 설교할  만한 집회소를 갖는 게 매우 절실
하며, 거기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부분을 고르거나  아니면 성
서 전체를 해설할 수도 있고, 또 쉽사리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은 함
께 의논해서 들려줄 수도  있도록 하려는 의도이지 다른 뜻은 없다
는 게 스톰의 설명이었다.
  스티나는 다시 남편에게 그만두라는 눈짓을  했다. 그녀는 남편이
이야기하는 동안 목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사람들에게 가르침이 될 만한 말을  제대로 해낸 적은
없지. 믿음을 갖기 위한 무엇 하나 가르쳐 준 것도 없고, 내가 무능
력한 목사의 표본이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아. 흥, 스톰 자신이 나
보다 훌륭한 설교자라고 자부하는 것도 내가 모르진 않지.'
  스톰은 계속하여 양떼를  이리로부터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까지 했다.
  "이리가 어딨소?"
  목사가 말했다.
  "벌써 코앞에 닥쳤지요."
  "그렇다면 스톰 선생. 당신이야말로 이리에게  문을 열어 주고 있
는 겁니다."
  벌떡 일어서며 목사가  말했다. 스톰의 말이 그를  격분시켰던 것
이다. 흥분으로 지난날의 위엄이 되살아났다.
  "스톰 선생, 전도관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맙시다."
  목사는 스티나 쪽을 돌아보며 얼마 전, 그녀가  옷을 입혀 주었던
아름다운 신부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녀는 교구  내의 모든
신부에게 옷을 입혀 주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농가 출신의 여자임에도, 스티나는 목사가  자기의 남편에게 노골
적으로 무능을  지적당한 기분이 어땠을까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
다. 그녀는 목사에 대한 동정심으로 자꾸 눈물이  흘러내려 그의 말
에 대꾸를 하지 못했다. 목사는 혼자서 많은  얘기들을 지껄여야 했
다.
  이야기중에도 목사는 줄곧 생각에 잠겼다.
  '아아, 만일 내게 젊은 날의 패기와 능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
면, 지금 스톰이 범하고 있는 과오를 쉽게 깨우쳐 줄 수 있을텐데.'
  목사는 스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돈은 어떻게 장만하셨소, 스톰 선생?"
  "기성회가 하나 조직되었지요."
  스톰이 찬조를 승락한 몇몇 사람을 들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들도 결코 목사님이나 교회를 불리하게 하려는 건 아닙니다."
  "아니! 잉그마르 잉그마르손도 그 속에 끼였단 말이오?"
  목사가 소리쳤다.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인 모양이었다.
  "나는 잉그마르 잉그마르손도 스톰 선생만큼이나 믿었는데!"
  목사는 전도관에 관한 말은 그 이상 꺼내지  않고, 단지 스티나를
상대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도 그냥 모르는  척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다시  스톰에게 말을
건넸다.
  "그 일을 중지해 주십시오."
  그가 애원조로 말했다.
  "나를 위해서  중지해 주십시오. 만일  사람이 선생의 학교  옆에
또 다른 학교를  짓는다면, 아마 선생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겁니
다."
  스톰은 마룻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렇게는 안 되겠군요, 목사님."
  꼬박 십 분간이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침묵  속에서 목사는 외
투를 걸치고 모자를 쓰고는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스는 스톰이 이번  계획으로 목사를 몰아낼 뿐만  아니라, 교구마
저 허물고 말거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말을 찾으려고 했으나 온갖
생각과 말들이 뒤범벅된 채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파멸이구나'
  문간으로 걸어가던 그는  문득 방 한쪽에서 게르트루트가 나무토
막과 유리조각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걸음을 멈
추고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아이는 오늘밤의 대화를  한 마디도
듣지 못한 듯했다. 눈은 기쁨으로 빛나고, 볼은 막 터져오르는 장미
처럼 붉고 생생해 보였다.
  게르트루드는 목사의 가슴에 미묘한 충격을 주었다.
  "뭘 하니?"
  목사는 게르트루드에게로 다가서며 물었다.
  소녀는 이미 완성시킨 마을을 모두 쓰러뜨리고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좀 일찍 오시지 그랬어요."
  게르트루드가 말했다.
  "조금 아가 정말 예쁜 마을을 만들었었는데, 교회랑, 학교랑...."
  "어디 좀 보자, 어디 있지?"
  "으응, 벌써 부숴 버렸는걸요.  인제 예루살렘을 만들거예요. 그래
서...."
  "뭐?"
  목사가 말을 막으며 물었다.
  "예루살렘을 만들려고 교구를 부쉈어?"
  "그래요, 좀전에 만든 마을은 정말 예뻤어요. 하지만 어제 학교에
서 예루살렘 이야기를  읽었으니까 이번에는 교구를 부수고 예루살
렘을 만들기로 한거예요."
  목사는 지그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손을 이마에  대고 잠
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건 확실히 누군가 훌륭한 사람이 네 입을 빌어 이야기하고 있
는거다."
  아이의 말이 무언가 암시적으로  들려서 그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보았다. 차츰 촉망되던 지난날의  능력이 그에게로 돌아왔
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이 그 의지를  작용시키는 원칙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목사의 눈엔 새로운 빛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교장 앞
으로 되돌아가, 여느 때처럼 쾌활한 음성으로 말했다.
  "스톰 선생, 이젠 선생에게 화를 내지 않겠읍니다. 선생이 옳았읍
니다. 나는 여태까지  줄곧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  왔었지만 아직
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군요. 현재도  마찬가지겠지만 선생
께서 하시려는 일은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일이라는 것
만은 확실히 알겠읍니다."
  영원의 시간에 서서

  제2부 위대한 잉그마르

     잉그마르의 죽음

  전도관이 완성된 해의 봄, 겨우내 엄청나게 쌓였던  눈이 녹아 강
물이 놀랍도록  불어났다. 더구나  하늘에서는 폭우가 마구  쏟아져
그 빗물이 산중턱에서부터는 화살 같은 물줄기가 되어 밀려 내려왔
다. 모든 수레바퀴  자국이나 고랑마다 물이 넘쳐흘러  강에까지 이
르렀고, 강은 거친 파도를  일으켰다. 거울같이 투명하던 강물은 흙
탕물이 되어 우중충한  갈색으로 변했다. 거친 풍랑  위엔 통나무와
얼음덩어리가 함께 출렁거려 위협적인 느낌을  주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이 봄의 홍수가 위험하리라곤 생각하지 않
았다. 그저 아이들만이 강으로 달려나가  발작적으로 솟구치는 물보
라를 신이 나서 구경했다.
  그러나 이제  떠내려오는 것은 나무와 얼음덩어리만이  아니었다.
세탁물이나 탈의장 같은  것이 휩쓸려 내려오더니 다음에는 보트와
부서진 다리까지도 떠내려왔다.
  "우리 다리도 떠내려가겠는데!"
  아이들이 소리쳤다. 아이들은 약간 불안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뭔
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좋아하고 있었다.
  별안간 뿌리째  뽑혀 휩쓸렸던 소나무가 물  위로 쑥 솟구치더니
잇달아 흰 백양나무가  떠올랐다. 그것들은 물 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던 터라  가지마다 잔뜩 싹이  부풀어 있었다. 또한 나무에  끌려
조그만 건초 헛간이 뒤집힌 채 떠내려왔는데, 건초와  짚이 가득 차
있는 게 마치 용머리에 얹힌 배처럼 지붕 위에 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떠내려오면서부터 어른들은 매우 분주해졌다.  그
들은 이제 북쪽의 여러 곳에서 둑이 넘친 것을 알고 건조물이나 가
구 같은 것을 끌어올리려고 장대와 길다란 쇠갈고리를 들고 강가로
달려나왔다.
  마을의 북쪽 끝에는 집이 몇 채 안 되어서 사람들도 별로 없었으
므로 잉그마르 잉그마르손만이  홀로 강둑에 올라서서 근심어린 표
정으로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 육십이  다 되었고 얼굴
은 주름이 깊었으며, 허리가 굽은 모습이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였
다. 그는  졸린 듯이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 묵직한 긴  쇠갈고리에
기대서서 강물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거품을 문 채  강가에서 약탈
해 온 물건들을  이고 난폭하게 밀어닥쳤다. 그것은  마치 잉그마르
의 우둔함을 비웃는 것 같았다.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은 바로 둑 옆을 흘러가는 다리나 보트의 선
체 같은 것들은 건지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저런 것은 모두 마을 사람들에게 건져올려지겠지.'
  그는 생각했다. 그는 잠시도  강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떠내
려오는 모든 것을 그저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문득 저만치
먼 상류에서 무언가  노랗게 반짝이는 것이, 드문드문  못질한 판자
위에 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아, 이게 바로 내가 기다리던거야'
  처음에 잉그마르는  노란 것이 뭔지 똑똑하게  분간할 수 없었지
만, 달레카를리아 주의  어린아이들이 어떤 옷을 입는가를  알고 있
었으므로 곧 짐작이 됐다.
  "저건 빨래터에 나가 놀던 아이들이 틀림없어."
  그는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노는 데 정신 팔려서  미처 육지에 올라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강물에 휩쓸렸던게야."
  곧 그는 자기의 추측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이제  아이 셋아 손으
로 짠 노란 웃도리에 황색 모자를 쓰고, 엉성하게  짠 뗏목 위에 달
라붙어서 둥둥 떠내려오는 것을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뗏목은 거
센 물결과  부딪쳐 오는 얼음덩어리들 때문에  자꾸 부숴지려 하고
있었다.
  아이들과의 거리는 아직  꽤 멀었다. 잉그마르는 강과  육지가 닿
는 지점에서 물줄기가 한 번 굽어 돌아오리란 걸 알고 있었다.
  '만일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 아이들을 태운 뗏목이  둑가로 오
드로록 해주신다면 곧 육지로 끌어올릴 수 있을텐데'
  잉그마르는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 슬며시  뗏목을 한 번 쿡 치는 것같이  보였다. 뗏목
은 그대로 빙 돌더니 잉그마르를 향해 똑바로  움직여 왔다. 아이들
은 더욱 가까워져서 겁에 질린 조그만 얼굴들을 정확히 볼 수 있었
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잉그마르가 쇠갈고리
를 갖다대기에는 아직 거리가 있어서 그는 철벅철벅 물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 뭔가 그를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는 이제 젊지  않다, 잉그마르. 그런 짓을 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을 겪을거다'하고 소리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잠깐 생각했다.
  '목숨을 걸 권리가 내게 있는 걸까?'
  잉그마르는 지난 겨울 아내가  죽은 후로 하루 빨리 아내의 뒤를
따르고 싶은  바람뿐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가 돌봐줘야  할
아들이 있었다. 아들 혼자서 농장을 돌보기에는 너무 일렀다.
  "하나님의 뜻에 맡길 수밖에!"
  그는 중얼거렸다.
  이제 잉그마르는 어설프지도 우둔하지도 않았다.  그는 망설임 없
이 거센 물결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서, 쇠갈고리  장대를 강
바닥에 단단히 세워  물결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해  놓고는, 얼음덩
어리며 나무  같은 것을 조심스럽게 피해  아이들의 뗏목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는 발에 힘을 주어 몸을 가누며 쇠갈고리를 내밀었다.
  "꼭 잡고 있거라!"
  그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별안간 뗏목이 빙그르르  돌면서
판자가 삐걱거렸던 것이다. 그러나 뗏목은 부서지지 않았다. 잉그마
르는 세찬 물결로부터  그것을 끌어냈다. 아이들을 구하자  그는 뗏
목을 아무렇게나 흘려보냈다. 뗏목은 제멋대로 물결 위로 흘러갔다.
  잉그마르가 쇠갈고리로  강바닥을 더듬으며 둑으로  나가려는 순
간, 굵직한 통나무 하나가 그에게로 돌진해 왔다. 통나무는 그의 옆
구리에 거칠게 부딪쳤고, 그 무서운  타격으로 잉그마르는 비틀대며
고꾸라질 뻔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장대를 움켜쥔  채 둑까지 걸
어나왔다. 둑 위로 나왔으나 그는 자기의 몸을  만져 보려하지 않았
다. 이미 가슴이 망가져 버린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그의 입
안에 피가 가득 고였다.
  '아, 나는 이제 틀렸어.'
  그는 둑 위로  쓰러졌다. 이제는 더 이상 한 발자국도  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곧 마을 사람들에게 그 사고를 전했다. 사
람들이 달려왔고 '위대한' 잉그마르는 그의 집으로 옮겨졌다.
  목사가 불려와 오후 한나절을 줄곧  잉그마르 농장에서 머물렀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교장 집에 들렸다. 그날의  온갖 일들을 이해해
줄만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스톰과 스티나는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들은  잉그마르 잉
그마르손이 운명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목사는
의외로 빙글빙글 웃음 띤 얼굴로 그들의 부엌에 들어섰다.
  "임종을 지켜볼 수 있었읍니까?"
  스톰이 물었다.
  "다행히도 늦지 않았지요."
  목사가 대답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가지 않아도 될 뻔했소."
  "무슨 말씀이죠?"
  스티나가 묻자 목사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예, 내가 없어도 하등 지장이 없었겠어요. 때론 임종에 입회하기
가 매우 난처할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요."
  스톰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마을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일 때는 더욱 그렇지요."
  "네, 그래요."
  "그러나 세상엔 상상 외의 것도 있습니다."
  목사는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고 앉아 있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
는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맑고 진지했다.
  "스톰 선생이나 스티나 부인께서는, 옛날  그분의 청년 시절에 일
어난 신기한 사건을 들으신 적이 있읍니까?"
  목사가 물었다.
  "물론이지요."
  "그런데 무엇보다 이상한 일은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려는 겁니
다. 잉그마르에겐 친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 사람도 잉그마르라
는 이름이었지요. 사람들은 그를 억센  잉그마르라고 구분해 불렀읍
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잉그마르의 소작지에 있는 조그만 오두막에서 살고 있었읍
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의 부친이 주인댁에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잉그
마르라고 지었답니다. 어는 토요일, 대낮처럼 밝은 아름다운 한여름
밤에 잉그마르와 억센 잉그마르는  그 날의 일을 다 마치자 나들이
옷을 입고 마을로 놀러 나갔더랍니다."
  목사는 잠깐 말을 끊고 생각했다.
  "맑게 개어 온화하며, 하늘은 밝은 초록으로 물들고, 땅은 안개에
덮힌 듯 어스름한 빛으로  감기던 그날밤.... 두 사람이 다리를 건너
는데 '위를 보아라' 하는 말소리가 들리는  듯했답니다. 그들이 위를
올려다보니 하늘이 마치 두  장의 커튼이 걷히듯 좌우로 활짝 열리
더랍니다. 그들은 자리에 목박힌 듯 손을 맞잡고  서서 하늘의 영광
을 보았지요. 스톰  선생과 부인께서도 일찌기 이런  이야기를 들으
신 적이 있습니까?"
  목사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상 좀  해보십시오. 두 사람이  다리에 서서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모습을! 그런데  두 사람은 그날의 일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답니다. 그러나 그 환영은 그들의 기억 속에  가장 값진 보물로
깊숙이 살아 있었겠지요."
  목사는 눈을 감고 가슴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여태까지 이런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나도 그들과 함께 다리 위에 서서 그 일을 체험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오늘 아침 잉그마르는 집으로 옮겨지기가 무섭게  억센
잉그마르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답니다. 곧  심부름꾼이 소작지로 달
려갔으나 공교롭게도 억센 잉그마르는 집에  없더랍니다. 숲속에 장
작을 패러 갔는데  찾기가 쉽지 않다나요. 사람들이  잇달아 찾으러
뛰어나갔읍니다. 그러는 동안  잉그마르는 살아 생전 그를  두번 다
시 못 볼 것 같아 무척 조바심을 내더군요.  제일 먼저 의사가 달려
오고 다음으로 내가 갔는데 억센 잉그마르는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
았읍니다. 잉그마르는  우리에겐 관심조차 두지  않더군요. 그는 곧
운명할 것 같았습니다. 그가  나를 부르더니 '하나님이 나를 부르십
니다. 가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억센  잉그마르를 만나보고 싶어요.'
하고 말하더군요. 그는 거실에 딸린 조그마한 방의  널찍한 침대 위
에 누워 눈을  커다랗게 뜨고 멀고먼 저쪽,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
를 조용히 바라보는 듯했지요. 그가 구해낸 세  아이들은 심상치 않
다는 낯빛으로 침대 아래쪽에 물려앉아  있었읍니다. 잉그마르의 눈
이 허공에 걸려 있다가 잠깐 다른 데로 옮겨질 때는 반드시 아이들
에게서 멎었읍니다. 그런 그의  얼굴엔 온통 미소가 번져 있었지요.
마침내 사람들은  억센 잉그마르를 찾아냈습니다. 잉그마르는  문간
을 울리는 억센 잉그마르의  발소리를 듣더니 후-하고 안도의 숨을
쉬면서 아이들에게서  눈길을 거둡디다.  그가 침대 곁으로  다가선
억센 잉그마르의 손을  쥐고 손등을 가만히 토닥거리며  '하늘이 열
리던 날 밤을 기억하고 있나?'라고 하자 '그날밤 일을 어찌 잊을 수
가 있겠소.'하고  억센 잉그마르가 대답하더군요. 그를  바라보는 잉
그마르의 얼굴은 아주 즐거운  소식이 있다는 듯 밝게 빛나고 있었
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지금 거기로 가려는 걸세'라고 말했습니다.
억센 잉그마르는 잉그마르의 얼굴 위로 바짝 상반신을 굽히며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더니, '나도  곧 뒤쫓아가겠소.'하고 말하더군
요. 잉그마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아드님이 순례에서
돌아오기 전에  가셔서는 안 됩니다.'하고  억센 잉그마르가 덧붙여
말하자, 그는 '그래 그래,  알구 있어'하고 중얼거리더니 숨을 몇 번
가쁘게 들이쉬다간 이내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목사가 말을 마쳤다.
  스톰 내외와 목사는 잉그마르의 죽음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생
각했다. 세 사람은 오랫동안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억센  잉그마르가 말한 아드님의 순례라는 건 무슨
말일까요?"
  갑자기 스티나가 물었다.
  "말씀대로 정말 알 수 없는 말입니다, 부인."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목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런데, 억센 잉그마르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말은 목사님
도 들어서 아시겠지요?"
  스티나가 계속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목사는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열심히 이마를 문지르며 앉아 있었
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지력으론  알 수가 없어. 그러나 그것을
알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세상을 사는 가장 큰 보람일거야.'
  영원의 시간에 서서

  제2부 위대한 잉그마르

     잉그마르의 딸 카린

  가을이 오고 다시 학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스톰
과 게르트루드는 아이들의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부엌에 앉아 스티
나가 차려낸 커피를  기분 좋게 마시고 있었다. 그때 손님이  한 사
람 들어왔다.
  그는 할보르 할보르손이라는 젊은 농부로 최근에 이 마을에서 가
게를 차린 사람이었다.  그는 팀즈 농장에서 왔으므로  팀즈 할보르
로 통했는데, 훤칠한 키에 어딘지 약간 우울해  보이는 맵시있는 사
나이였다. 스티나가 그에게  커피를 권하자 그는 식탁에  앉아 손수
커피를 따르면서 스톰에게 말을 건넸다.
  스티나는 바깥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뜨개질을  했다.
그녀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상반신을 창쪽으로 내밀었다.
  "오늘은 별의별 사람이 다 나다니는구먼."
  짐짓 태연하게 보이려 애를 쓰며 그녀가 말했다.
  팀즈 할보르는 그녀의 태도가  뭔지 이상한 것 같아서 몸을 일으
켜 바깥을  내다보았다. 큰 키에  등이 구부정한 여자와 성숙한  한
소년이 학교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 눈이 틀림없다면 저건 잉그마르의 딸 카린이야."
  스티나가 말했다.
  "틀림없이 카린입니다!"
  팀즈 할보르가 확정지었다. 그는 당황한  모습으로 아무말도 없이
방을 휘둘러보다가, 곧 침착해져서는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작년 여름 아직 잉그마르가 살아 있을 때,  할보르는 카린 잉그마
르손에게 청혼을  했었다. 그의  청혼은 꽤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잉그마르는  할보르의 아버지가 술주정뱅이이니 아들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르므로 카린과는  짝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이다. 그러나 결국  결혼 날짜를 정하고 약혼식을  발표할 단계까지
이르렀다. 약혼 발표가 있기 전날 카린과 할보르는  결혼 반지와 성
경책을 사기 위해 파른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사흘 후, 여행에서 돌
아온 카린은 느닷없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할보르와는 결혼하기 싫
다고 말했다.  별로 이렇다 할  결점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으나  꼭
한번 과음한 일 때문에  그 역시 술주정꾼이 될까봐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들은 파혼을 하고 말았다.
  할보르는 그 일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이건 정말 견딜 수 없는 모욕이오. 대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
떻게 생각하겠소? 멀쩡한 사내에게 이런 봉변을 주다니."
  그러나 카린은 동요하지  않았고 그후로 할보르는 점점 침울해져
갔다. 그는 그때의  일들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할보르가 앉아 있는 곳을 향하여 카린이 오고 있는 것이다.
  작년 가을 카린은  에로프 엘손이라는 사나이와 결혼을  했다. 그
녀는 남편과 함께  잉그마르 농장에 살고 있으며,  잉그마르가 죽고
난 금년 봄부터는  농장을 관리하고 있었다. 잉그마르는  딸 다섯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아직 너무 어려서  소유권을 상속받
지 못했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  카린이 들어섰다. 그녀는 스물  두 살이었으
나 노숙한 타입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무척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부석부석한 눈두덩이에다 금빛 머리칼과 입 언저리의 선이 몹시 드
세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장 부처는 그녀가  늙은 잉그마르와
아주 닮았기 때문에 여간 좋아하지 않았다.
  카린은 할보르를 보고도  낯빛 한번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침착
한 걸음걸이로 사람들과 차례차례 인사를  나눴다. 그녀가 할보르에
게 손을 내밀었을  땐 그가 얼른 손을  비켰으므로 두 사람은 겨우
손가락이 스쳤을  뿐이었다. 평소에도  약간 꾸부정한 평인  카린이
할보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서자 여느 때보다 더 구부정해 보였
다. 그러나 할보르 쪽은 더욱 훤칠하고 호리호리해 보였다.
  "카린, 마침 잘 나왔어요."
  스티나는 목사가 즐겨 앉는 의자를 그녀에게 권하며 말했다.
  "예, 이슬이 내려서 걷기가 좋아졌어요."
  "간밤엔 정말 이슬이 많이 내렸더군."
  스톰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몇분 동안  깊은 침묵이 흘렀다. 할보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모두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움찔했다.
  "전 이만 가게에 가 봐야겠읍니다."
  "왜, 갑자기?"
  스티나가 물었다.
  "제발 제게 마음을 쓰지 마세요, 할보르 씨"
  상냥한 음성으로 카린이 말했다.
  할보르가 나가자 분위기는 부드러워졌고, 스톰은  무슨 얘기가 필
요한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카린이 데려온 소년을 보았다. 그때가
지 아무도  그 소년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소년은  아직
어렸고 게르트루드보다도  그다지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맑고
부드러운 앳된 얼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어딘가 나이와는
다른 무엇이  풍기는 아이였다.  그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우리에게 신입생을 데리고 오신게로군."
  "제 동생이에요. 오늘의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이지요."
  "그 이름에는 아직 너무 어린데?"
  "그렇지요. 하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으니 도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왔어요. 선생님과 부인께서 이  애를
맡아 주셨으면 해서요."
  카린의 말에 스톰과 스티나는 내심 놀라며 서로의 얼굴을 멀뚱이
쳐다보았다. 두 사람 다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면 집이 너무 좁은데...."
  스톰이 간신히 말했다.
  "저어, 우유와 버터와 달걀을 하숙비의  일부로 받아 주셨으면 합
니다만...."
  "그런 것까지 생각하실 건 없어요."
  스티나가 말했다.  스티나는 카린이  이런 의문스런 부탁을  하는
데는 필경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카린, 더 이상 말씀 마세요. 잉그마르손 집안을 위해서라면 하는
데까지 해볼테니까"
  그녀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두 여자는  잉그마르의 행복을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의논했다. 그동안 스톰은 그를 교실로  데려가서 게르트루드의 옆자
리에 앉혔다. 수업 첫날 잉그마르는 종일토록 입을 열지 않았다.

  팀즈 할보르는  한 주일 이상  학교 근처에는 절대 가지  않았다.
거기서 다시 카린을 만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
침부터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할보르는 이런  날 물건을
사러올 손님은 한 사람도 없을 것 같아 스티나 부인을 찾아가 가벼
운 대화나 잠깐 나누고 돌아오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누구든 친
절하고 다정한 사람과 마음이 후련해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
이다. 그는 기분이 무척 우울했다.
  '나는 살 가치가 없어.  누구 하나 날 존중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말야.'
  이것은 카린에게 버림받은 후부터 비롯된  넋두리로, 그는 너무도
괴로와했다.
  가게를 닫고 우비를 걸치고서  그는 바람과 비와 진흙 속을 걸어
학교로 갔다. 할보르는  학교의 분위기 속으로 돌아온  것이 즐거웠
다. 그가 부엌에 앉아 있는데 쉬는 종이 울리고, 스톰 교장과 두 아
이가 커피를 마시러 들어왔다.  세 사람은 그에게로 다가왔다. 스톰
과 악수를 하고 소년  잉그마르가 손을 내밀었을 때 할보르는 짐짓
스티나와의 이야기에 열중하는 듯 모르는  척했다. 잉그마르는 머뭇
거리며 서  있다가 이윽고 식탁에  가서 앉았다. 그는 전날  카린이
그 자리에 앉아서 그랬듯이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다.
  "할보르 씨가 새 시계를 보여 주러 오셨답니다."
  스티나가 말했다.
  할보르는 주머니를 뒤져 새 은시계를  꺼냈다. 자그마한 아름다운
시계로 뚜껑에는 꽃무늬가 새겨진 것이었다.  스톰은 교실에서 확대
경을 들고 와서 뚜껑을 열고 시계의 부품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
는 놀란  듯이 조그만  톱니바퀴의 정밀성을 살펴보더니,  여태까지
이렇듯 정교한 세공은  본 일이 없다며 감탄하였다.  할보르는 교장
에게서 시계를 돌려받아  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자기 물건을 칭찬
받았을 때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기뻐하거나 자랑스러운 기색을 조
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잉그마르는 식사를 하는 동안  말 없이 있다가 커피를 마시고 나
서 스톰에게 물었다.
  "정말 시계에 관해 잘 아시나요?"
  "알구말구. 뭐든 조금씩은 알고 있지."
  잉그마르는 조끼 주머니에서 시계 하나를  꺼내 보였다. 큼직하고
둥근 은시계였는데, 할보르의  시계에 비하면 보잘 데가  없는 것이
었다. 시곗줄은 세공이  어설픈 데다가 뚜껑은 아무런  장식도 없이
이그러져 있었다. 유리는 깨어지고 문자판의  에나멜도 여기저기 떨
어져 나가 고물에 지나지 않았다.
  "시계가 안 가는데?"
  시계를 귀에 갖다대고는 스톰이 말했다.
  "예, 아 안 가요."
  소년은 더듬거렸다.
  "고칠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스톰은 뚜껑을 열어  톱니바퀴가 모두 헐렁하게 흔들거리는 것을
보았다.
  "너 이 시계로 못질이라도 했니? 이래가지곤 손도 못 대겠는걸"
  "시곗방 에릭 씨는 고칠 수 있잖을까요?"
  "아니야, 나나 다를 바  없어. 파른에 보내서 새 부속품을 넣는게
좋을거다."
  "저도 그럴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예요."
  잉그마르는 이렇게 말하고 시계를 받아들었다.
  "대체 그걸로 무슨 짓을 했지?"
  스톰이 소리쳤다.
  "이건 아버지의 시계였어요. 지난번 홍수가  났을 때 아버지가 통
나무에 부딪쳤잖아요. 그때 이렇게 된거예요."
  잉그마르는 시계를 꼭  쥐며 말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모두 시계
에 흥미를 느꼈다.  잉그마르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애를  쓰면서 말
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부활제 전주에 일어난  일로, 그때 저는 집에
있었지요. 아버지가 그렇게  되셨다는 소리를 듣고 저는  제일 먼저
강가에 달려갔어요. 아버지는 둑에 쓰러져 이 시계를  손에 쥐고 계
셨어요. '오 잉그마르야, 난 이제 틀린 것 같다. 시계가 망가져 마음
이 좋질 않구나. 내 너한테 이것을 부탁할테니  아버지가 몹시 미안
한 일을 했던 어떤 사람에게 용서해 달란다며  좀 전해다오'라고 말
씀하시고는, 그 사람의  이름을 대면서 시계는 파른에  가지고 가서
고친 다음 그분에게  드리라시더군요. 그런데 저는 파른으로  갈 수
없게 됐으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스톰은 가까운  시일 내에 파른에 갈  사람이 있었던가를 생각했
다. 그때 스티나가 잉그마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시계를 드릴 분이 누구지, 잉그마르?"
  "저.... 말씀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어요."
  잉그마르는 주저했다.
  "팀즈 할보르 씨 아닌가? 지금 여기 앉아 계시는"
  "그래요."
  잉그마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할보르는 줄곧 무뚝뚝한 얼굴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시계를 그냥 할보르 씨에게 드리지 그래? 그러는 것이
이분을 더없이 기쁘게 하는 걸거야."
  잉그마르는 스티나의 말에 순순히 일어섰다.  그리곤 시계를 꺼내
어 조금이라도 광을  내려는 듯이 옷소매에다 문질렀다.  그는 할보
르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아버지가 용서해 달라시면서 이걸 드리라고 했어요."
  그는 할보르에게로 시계를 내밀었다.
  잉그마르가 옆으로 다가왔을 때 할보르는 상대를 보고 싶지 않다
는 듯 손으로  눈을 가렸다. 잉그마르는 시계를 내민 채  그렇게 서
있다가 도움이라도 구하듯 스티나를 바라보았다.
  "받아 주세요, 할보르 씨"
  스티나가 말했다.
  "할보르 씨, 이 이상의  보상은 바랄 수 없을겁니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이 살아 계셨다면  좀더 빨리 당신에
게 응분의 보상을 했을겁니다."
  스톰이 끼어들며 말했다.
  시계를 힐끗 바라본 할보르는 별로 내켜하지 않으면서 손을 내밀
었다. 그러나 시계가 손에 닿기가 무섭게 얼른  조끼 안주머니에 쑤
셔넣었다.
  "아무도 그 시계를 빼앗진 않을거요."
  할보르가 웃도리와 단추를  단단히 채워두는 모양을 바라보며 스
톰이 웃으면서 말했다. 할보르도  웃어 보였다. 이윽고 그는 자리에
서 일어서더니 몸을 쭉 펴고 깊이 한숨을  들이마셨다. 얼굴은 생기
가 돌고 눈은 방금 발견한 새로운 행복으로 빛났다.
  "이제 할보르 씨는 새로 태어난 기분이겠네요."
  스티나가 말했다.
  할보르는 자기의 새 시계를 꺼냈다.  그는 잉그마르에게 다가서서
말했다.
  "내가 너한테서 아버지의 시계를 받았으니,  너도 내 시계를 받는
것이 도리야."
  할보르는 식탁  위에 시계를 올려놓고 인사도  없이 밖으로 나갔
다. 그는 온종일 혼자서  터벅터벅 돌아다녔다. 할보르와 거래를 하
기 위하여 멀리서부터 찾아온  농부 두 사람이 점심때부터 밤 늦게
까지 할보르의 가게 앞에서 서성거렸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
다.

  카린 잉그마르손의 남편 에로프 엘손은 잔인하고 욕심 많은 농사
꾼의 아들로 아버지의 학대를 받으며 자라왔다. 어릴  때는 늘 배를
곯았고 자라서도 아버지의 명령대로 움직여야  했다. 그는 아침부터
밤까지 노예처럼 일만 하며 낙이 없는 나날들을  보냈다. 다른 젊은
이들처럼 함께 어울려 춤을  출 수도 없었고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
  결혼 후에도 늘 마찬가지였다. 그는  잉그마르의 농장에서 장인의
지배 아래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죽도록 일하고  알뜰히
절약하는 것만이  그의 하루하루의 일과였다. 사람들은  이번에야말
로 잉그마르 집안이 마음에 드는 사위를 제대로 골라잡았다고들 했
다.
  그런데 잉그마르가 죽고  나서부터 에로프는 폭음을 즐기기 시작
했다. 더불어  마을의 건달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농장에  부르기도
하고, 함께 댄스 홀이나  선술집에 드나들기도 했다. 일체의 일손을
놓고 날마다 술로  지낸 그는 불과 두  달 만에 가련한 주정뱅이가
되어 버렸다.
  카린은 곤드레만드레가 된 남편을 처음 보았을 때 암담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내가 할보르에게 한 모진 짓에 대해  하나님이 벌을 주시
는거야'
  남편에게는 어떤 충고나 비난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병든 나무와도 같아서 결국은 말라서 썩고  말 것이 틀림없
다. 살릴 수도 보호할 수도 없다.'라고 그녀는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린의 여동생들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에로프의 경우
없는 몸가짐에 화를 내기도 하고, 그의 천한  표정과 더러운 말버릇
에 흥분하면서 으르다가 안 되면 달래기도 했다.  사람이 좋은 편인
에로프이지만 때론 화를 내며 처제들과 맞붙어 싸웠다.
  카린은 마음 편치 않은 나날을 보냈다. 그저  어떻게 하면 동생들
을 멀리 떠나보내어, 자기가 겪어야 하는 이  비참한 생활에서 빠져
나가도록 할 수  있을까만을 궁리했다. 여름이 바뀌기  전에 그녀는
나이 많은 동생 둘을 시집보내고, 나머지 여동생  둘은 유복하게 살
고 있는 미국의 친척집으로 보내 버렸다. 그녀의  자매들은 모두 한
사람당 2만 크로네 이상의 유산을 분배받았다.  농장은 어린 잉그마
르가 성년이 되었을 때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카린이 맡았다.
  남 보기에 어설프고  얌전하기만 한 카린이 동생들을 결혼시키고
새 가정을 갖도록 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녀는 모든
일을 혼자서 결정해야  했다. 남편은 이제 무능력해져서  아무런 도
움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어린 남동생,  그러니까
지금의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의 문제였다. 그의  행동은 누이들 이상
으로 에로프를  노엽게 했다. 어떤  때는 에로프가 들고 온  옥수수
브랜디를 몽땅 쏟아버렸고, 또 어떤 때는 술에  물을 타다가 들키기
도 했다.
  가을이 되자 카린은  잉그마르를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파른의 중
학교에 되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잉그마르의  보호자인 셈인 에
로프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내  아버지처럼 농군이 되었듯이  잉그마르도 제 애비처럼
농군이 돼야 해. 학교엔 가서 뭘해? 겨울이  오면 나하고 숲에 가서
숯굴이나 만들도록 하지. 그게 무엇보다 좋은  교육이 아니겠어? 저
만한 나이에 나는 겨울 내내 숯굴에서 일만 했다구. 알겠어?"
  카린은 도무지  남편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잉그마르에겐
적당히 얼버무려 당분간이라도 그럭저럭 집에 머물도록 해야 했다.
  에로프는 잉그마르의 신용을 얻으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그는 어
디를 가든지 잉그마르를  데리고 가고 싶어했다. 잉그마르는  썩 내
키지 않는  마음으로, 들떠서  돌아다니는 그를 따라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에로프는  일단 잉그마르를 마차에 태우기만  하면 멀리
베리소나의 대장간이나  카름순드의 주막까지 내려가곤  했던 것이
다.
  카린은 남편이 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내심 기뻤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카린은 나가서 다음날  아침 여덟시에 돌아
온 에로프의 옆에 정신없이 잠들어 있는 잉그마르를 발견했다.
  "이봐 카린, 나와서 이 꼬마 좀 봐줘!"
  에로프가 소리쳤다.
  "데리고 들어가라구!  이자식, 진드기처럼 처먹구선  취해 가지구
꼼짝도 못한다니까"
  카린은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그녀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지 않고선 동생을 안아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두 손이 잉그마르에게 닿는 순간  그녀는 동생이 자
고 있는 것이 아니라  추위에 얼어붙어 인사불성이 되어 있다는 것
을 알았다. 그녀는  동생을 안아다 침실에 눕히고  문을 잠갔다. 꽤
오랫동안 그녀는 잉그마르의 의식이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애를 썼
다. 그녀는  곧장 남편 앞으로  걸어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지금 실컷 먹어 뒤요. 만일 당신이 먹인  술로 인해 동생이 죽기
라도 한다면, 당신은 지금껏 잉그마르 농장에서 먹던  것보다 더 나
쁜 음식으로 견뎌야 할테니까요."
  "별소릴 다 듣는군. 브랜디 몇 방울 가지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
다는 말투잖아."
  "내 말을 잘  들어 둬요. 만일 잉그마르가 죽으면  당신은 형무소
에서 이십 면은 살아야 돼요. 알겠어요. 에로프?"
  카린이 침실로 돌아와  보니 잉그마르는 이제 의식은 돌아왔으나
열에 들떠 있었고 팔다리는 움직이지 못했다.
  "카린 누나, 나 죽으려는거야?"
  잉그마르가 괴로운 듯 신음하며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난 뭘 마시는지도 몰랐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카린이 진정으로 말했다.
  "혹시 내가 죽거든, 누나들에게 술인  줄 모르고 마셨다고 편지해
줘"
  잉그마르는 슬프게 말했다.
  "그래, 그러마"
  "정말, 정말 난 몰랐어.... 맹세할 수 있어."
  잉그마르는 종일토록 열에 들떠서 보챘다.
  "제발 아버지한테는 말하지 마."
  잉그마르가 정신없이 지껄여댔다.
  "아버지는 괜찮아 모르실거야. 잉그마르"
  "하지만 내가 죽어 봐. 아버지는  틀림없이 알게 되잖아 아버지를
어떻게 보지?"
  "잉그마르, 넌 조금도 잘못하지 않았어. 괜찮아."
  "아버지는 아마 에로프가  주는 걸 먹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
실거야. 그치? 아....  마을 사람들도 모두 내가 술에  취했었다는 걸
알고 있겠지. 안 그래, 누나?"
  그는 계속 물어댔다.
  "일꾼들은 뭐라고 그래? 리자  할멈은 뭐라고 하지? 그리구 억센
잉그마르는?"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
  "누나는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되지
않아? 우린 카름순드의  주막에 갔었어. 거기서 에로프와  친구들이
밤새도록 술을 마신거야.  나는 구석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
는데. 에로프가 옆에  와서 깨웠어. '눈을 떠 잉그마르. 자,  몸이 훈
훈해지도록 이걸 마셔' 그러면서  잔을 입에다 마구 갖다대잖아. 뜨
거운 물에 설탕을 탄 거라면서 말야. 나는 자다  깨서 몸이 춥고 떨
리길래 받아마셨지 뭐.  그때는 그저 따끈하고 달다는  생각밖에 못
했어. 그런데 거기에  뭔가 독한 것이 들어 있었던거야.  아아, 아버
지가 알면 뭐라고 하실까?"
  카린은 거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에로프는 아직도  지리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서도 이쪽의  이야기가 들
리는 게 좋을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좋았을걸. 누나, 아버지가 살아 계셨
더라면...."
  "살아 계셨으면 어떡하게, 잉그마르?"
  "저 사람을 죽여버렸을거야. 그랬을 것 같지 않아?"
  에로프가 갑자기  큰소리로 웃어댔다.  잉그마르는 깜짝 놀라  세
파랗게 질렸다. 카린은 다시 얼른 문을 닫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에로프에게 큰 영향을 주어서,  카린이 동생을
스톰의 학교에 넣겠다고 하자 다시 반대하지는 않았다.

  할보르가 시계를 받은 직후 그의 가게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을의  농부란 농부는  읍에 나가기만 하면  할보르의
가게에 들러서  '위대한' 잉그마르의 시계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다.
희고 길다란 털가죽 웃도리를  입은 농부들은 시간을 정해 놓고 계
산대 위에 덮치듯 몸을  내밀면서 주름살로 덮인 그 소박하고 진지
한 얼굴오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따금 할보르는  시계를 꺼내
어 우묵하게 찌그러진 뚜껑이며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문자판 따위
를 보여주었다.
  "아아 바로 거기에 탁 부딪친거로구나"
  그들은 잉그마르가 다쳤을 때의 광경을 눈앞에 보는 듯한 표정으
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할보르, 당신이 그 시계를 갖구 있다니 정말 대단한 일일세."
  할보르는 시계를  보여줄 때 언제나 누가  빼앗기라도 하듯 줄을
꼭 쥐고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날도 할보르는  역시 몇 사람의 농부들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한창 고비에 으르자 예의  그 시계가 나왔다
할보르가 시곗줄을 쥔 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자 사람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그  사이에 에로프가 가게로 들어왔지만  온통 시
계에만 정신을 쏟고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깨닫지 못했다. 에
로프는 장인의 시계 이야기를 듣고 있었으므로 금방 무슨 일인가를
알았다. 에로프는 할보르가  장인의 유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시기
하진 않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다  찌그려진 고물
은시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
  에로프는 슬그머니 사람들 뒤에 다가가서 손을 뻗어 시계를 낚아
챘다. 할보르에게서 시계를  뺏자는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니라 단순
히 장난을 치려 했던 것이다.
  할보르가 시계를 되빼앗으려  하자 그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시계
를 높이 쳐들었다.  할보르는 사나운 얼굴로 계산대를  펄쩍 뛰어넘
었다. 놀란 에로프는  시계를 돌려주는 대신 문간으로  내닫기 시작
했다.
  문 앞에는 작은 나무로 만든 디딤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 구멍
에 발이 빠져 버린 에로프는 그 자리에  나뒹굴고 말았다. 할보르는
그 위로 덮쳐 시계를 움켜쥐고는 몇 번인가 호되게 걷어찼다.
  "이봐 이봐, 그만 차구 내 등이 어떻게 됐나 좀 봐줘."
  에로프의 말에 할보르가 곧 발길질을 멈췄다.
  "일으켜 줘."
  일어나려고도 하지 않고 에로프가 다시 말했다.
  "한 숨 자구 술이 깨면 스스로 일어날 수 있을게야."
  "난 취하지 않았는걸."
  에로프가 대꾸했다.
  "실은 내가 디딤상자을 뛰어내리려구 하는데 저쪽에서 죽은 잉그
마르가 시계를 빼앗으려고  내게로 막 달려오는 것  같았어. 그래서
이렇듯 어이없게 넘어진거야."
  할보르는 허리를 굽혀  가련한 에로프를 끌어 일으켰다.  그는 수
레에 실려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리가 못쓰게  된
것 같았다. 그날부터  에로프는 처량한 앉은뱅이가 되어서  줄곧 자
리에 누워 있게 되었다. 그는 종일 술타령만 해댔다. 그러나 의사는
술은 뭐든지  주면 안 된다고  카린에게 단단히 일러 놓았다.  한번
마시게 되면 죽도록  마시기 때문이었다. 에로프는 고함을  치고 괴
성을 지르면서 술을  손에 넣으려고 안달이었다. 밤이면  특히 심했
다. 그는 미치광이처럼 온 집안 사람들의 잠을 설쳐 놓았다.
  카린은 너무도 쓰라린  나날을 보냈다. 남편은 이따금  도저히 견
딜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괴롭혔다. 집안의  공기까지도 에로프의
천한 말투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들로 더렵혀져 마치 지옥과도 같
았다. 카린은 스톰  교장에게 방학 동안에도 계속  잉그마르를 그들
과 함께 지내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동생이  자기와 함께
단 하루도, 심지어 크리스마스 때조차 같이 있도록  하고 싶지 않았
다.
  잉그마르 농장의 하인들은 모두 먼 일가로 그들이 잉그마르손 집
안에 속한다는 감정이 없었다면  그런 조건 아래서는 단 하루도 함
께 살며 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겐 편안히 잠드는  밤이 거
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에로프는 카린과  하인들을 괴롭
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내서 그들이 자기의 요구에 응하도록 강
요했던 것이다. 이렇듯 비참한 속에서 겨울이 가고  여름이 오고 또
겨울이 지났다.

  카린은 한군데 피난처를 가지고 있어서 이따금 거기에 숨어 혼자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곳은 밀밭 뒤에 마련된 조그마한 자리로, 카
린은 거기에 앉아  두 팔꿈치를 무릎 위에  세우고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똑바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그녀 앞에는  탁 트인 밀밭이  펼쳐져 있고, 그 건너편에는  숲과
아득히 잇닿은 상봉우리와 크라크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사월의 어느 날 밤,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호프는 전나무
숲 그늘에서 아직도  잠이 깨지 않은 채 깔려 있었고,  나직한 야산
앞은 눈 녹을 때 흔히 보게 되는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 있었다. 이
제 봄이 머지 않았다는  생각이 그녀로 하여금 한층 노곤한 피로를
느끼게 했다. 그녀는 올 여름도 지난 여름과  같다면 한시도 견딜수
없을 것 같았다. 눈 앞에 가로놓인, 씨  뿌리기에다 건초 만들기, 베
짜기, 옷 깁기, 청소, 빵 굽기등의 많은 일들도 걱정이었다.
  "차라리 죽어버렸음...."
  그녀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듯 중얼거렸다.
  '에로프가 술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만이 내 유일한 희망일까'
  그녀는 문득  눈을 들었다. 누군가가  부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할보르 할보르손이 울타리에  기대어 똑바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
다. 언제 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기로 오면 당신을 만날 줄 알았지."
  할보르가 말했다.
  "어머, 어째서요?"
  "옛날에도 당신은 여기로  도망쳐 와선 혼자 생각에 잠기곤 했잖
소?"
  "지금에 비하면 그 시절엔 생각할 것도 없었어요."
  "그 시절, 당신의 번민은 대개 공상적인 것이었지."
  카린은 할보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이는 필경 나를 무척 어리석은 여자라고 생각할거야. 자기같이
품위있는 남자를 거절하고 되레 주정꾼과  결혼해선 이 모양이라구.
나를 조롱하러 온 게야.'
  "방금 댁에서 에로프와 얘기를 나누고 온 길이오."
  할보르는 힘주어 말했다.
  "내가 만나고 싶은 것은 에로프였으니까."
  카린은 차가운 태도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을 땅으로
내리깔고 두 손을 깍지낀  채 할보르가 언제 자기에게 퍼부을지 모
를 온갖 모욕을 견디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다져 두었다.
  "에로프에게 말했소."
  할보르가 말을 이었다.
  "그가 다친 것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이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카린은 아
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얼마  동안 나의 집에서 함께 있자고  했지. 하다못
해 기분전환이라도 될거고, 또 여기 있을 때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
날 수도 있을테고 해서."
  카린은 눈을 들었다. 그러나 그 외에 자세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
았다.
  "내일 아침  새 집으로 옮기기로 했소.  에로프는 응할거요. 술을
마실 수 있을  줄로 알고 있으니까. 그건 물론  안 될 일이오. 나도
역시 절대 술을  내놓지 않을테니까 말이오. 내일  집에서 기다리겠
소. 가게 건너편의 작은  방에서 지내도록 할 참인데, 문을 활짝 열
어 놓고 왕래하는 사람들을  모두 볼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
지요."
  카린은 처음엔 그를 의심했으나 차츰 그의 말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임을 깨달았다.  카린은 할보르가  자기에게 청혼한 이유는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녀에게 많은 재산과 훌륭한 친척이 있기 때문이라
고 상상해 왔다.  그녀는 자신이 남자들로 하여금  매력을 느끼게끔
하는 그런 여자가 아님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
도 할보르나 에로프에게 사랑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할보르가 곤란한  처지에 놓인 자기를 도우려  하고 있다.
그녀는 그가 이토록  친절하다는 점에 놀라고 있었다.  확실히 어느
정도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자기를 찾아와 도우려 할 까닭이 없으리란 생각이었다.
  카린의 가슴이 야릇하게 몹시 두근대기  시작했다. 그녀가 여태까
지 경험해 보지 못한 느낌으로, 불현듯 할보르의  친절이 자기의 얼
어붙은 가슴을 녹여 사람이  온 몸에 타오르기 시작한 것을 깨달았
다.
  할보르는 계속하여 열심히 자기 계획을 늘어놓았다.
  "에로프도 괴로울거요. 장소를 바꿔 볼 필요가 있지. 그리고 나한
테는 당신에게처럼 그렇게 애를 먹이진  않으리라 생각하오. 계산을
해봐야 할 인간을 상대로 할 경우엔 전혀 달라지는 법이니까."
  카린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기가 할보
르를 사랑한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고는 꼼짝도 할 수 없고 한 마디
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윽고 할보르는 이야기를  그치고 가
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린은 일어서서  비틀비틀 그에게로 다가
가 그의 손을 잡았다.
  "하나님의 은총이.... 당신에게 있으시길.... 바래요, 할보르!"
  그녀는 더듬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하나님의 은총이 당신에게...."
  갑자기 할보르가 그녀의 손을  잡아 낚아채듯 자기 앞으로 확 끌
어당겼다. 그녀가 몹시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엇인가 눈치
를 챘던 것이다.
  "싫어! 싫어요!"
  카린은 엉겁결에 소리치며 그를 뿌리쳤다.  그리고는 총총히 달아
나 버렸다.

  그해 여름 에로프는  할보르의 집에서, 가게 건너편의  침실에 누
워 지냈다. 그러나  할보르는 그를 돌보는 데 더 이상의  시간을 낭
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을이 되자 에로프는 덧없이  세상을 뜬 것
이다.
  에로프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서 스티나가 할보르에게 말했다.
  "할보르, 나와 꼭 약속할 게  한 가지 있어요. 카린을 꾹 참고 기
다리겠다고 약속하세요."
  "물론 참고 기다릴겁니다."
  할보르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설사 칠 년을 기다려야 한대도 나는 그녀를 기다릴거예요."
  그러나 이 참고 기다린다는 것이 할보르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
다. 왜냐하면 얼마 안 가서 많은 사람들이  카린에게 청혼하고 있다
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에로프의 장례식이 있은  지 채
이 주일도 안 되서부터였다.
  일요일 오후, 할보르는  가게 앞 계단에 주저앉아  오고가는 사람
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는 여느  때와 달리 아름다
운 마차 세 대가 잉그마르 농장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발견했다.
  첫번째 마차에는 베리소나 주물공장의 검사관이  앉아 있었고, 두
번째 마차에는 카름순드 여관 주인의 아들이 타고  있었다. 또한 세
번째 마차에는  장관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서부 달레카를리아에서 제일가는  부자이며 사리에도 밝고 또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확실히  젊지는 않았다. 두 번 결혼해서
지금은 두번째로 홀아비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보르는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이 달려가는 것을  보자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한길로 뛰어나갔
다. 어느새 그는  다리를 건너 강 저쪽의 잉그마르 농장이  있는 곳
에 서 있었다.
  '마차들이 과연 어디로 간걸까'
  그는 거의 뛰다시피  수레바퀴 자국을 따라갔다. 갈수록  그 목적
지는 뚜렷해 보였다.
  '이런 짓을 하다니 나도 여간 미련한 게 아니군'
  그는 스티나가 주었던 주의를 되새기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문 앞까지 가 보는 거야 어떨라구. 사람들이 거기 있나만
확인할건데.'
  잉그마르손 집안의 제일 좋은 방에는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과 나
머지 두 사나이들이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잉그마르는 아직
도 학교에서  기숙하고 있었지만 그날은 일요일이라  집에 와 있었
다. 그는 손님들과  식탁에 앉아 주인 노릇을 했다.  카린이, 하녀들
이 스톰 교장의 설교를  들으러 전도관에 가고 없어서 부엌에 할일
이 많다며 자리를 떴기 때문이었다.
  방안의 공기는  매우 서먹했다. 모두  한 마디 말도 없이  커피만
홀짝대며 앉아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카린에게로  가서 은밀
한 말  한마디라도 속삭일 수  있을까, 각기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며 다른 손님 한 사람이  들어섰다. 손님은 잉그마
르의 안내를 받아 식탁에 와 앉았다.
  "이분은 팀즈 할보르 할보르손 씨입니다."
  잉그마르가 새로 온 손님을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에게 소개했다.
  스헨 페르손은  자리에 앉은 채 손을  크게 흔들면서 할보르에게
놀리는 투로 말했다.
  "그토록 유명한 분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소."
  잉그마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의자를 할보르 옆으로 끌어당
겼다.
  할보르가 방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청혼자들은 갑자기 말이 많아
지더니 기염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세 사람이  마음을 합쳐 할
보르를 우선 탈락시키기로 작정이나  한 듯 서로를 차례로 추켜 올
리며 옹호했다.
  "장관께서는 오늘 보니 정말 훌륭한 말을 가지셨더군요."
  검사관이 시작했다.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을  검사관이 지난 겨울
곰을 잡은 얘기를  인사로 꺼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여관  주인 아
들을 향해 그의 아버지가  지은 집이 어떻느니 하면서 칭찬을 아끼
지 않았다.  그들은 점점 더  능변이 되어 갔으며 할보르로  하여금
그의 신분이 얼마나 낮으며 자기들과 대항할 인간이 도저히 못된다
는 것을 깨우치게 하려는 듯했다. 할보르는 자신이  몹시 비굴한 생
각이 들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마침 카린이 금방 끊인 차를 들고 왔다.  할보르를 발견한 그녀의
마음은 금방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곧 남편이 죽은  지
얼마 안 되는데 찾아왔다는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조급히 찾아오면  사람들은 필경 그가 나와  결혼하기 위
해 에로프를  제대로 돌봐주지 않았다든가, 없애버렸다고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여댈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할보르가 한  이삼 면 기다리다가 찾아주었으면 좋았으리
라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조급한 것이었을까?  내가 자기 이외에 바라는  사람
이 없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을텐데...."
  카린이 나타나자마자 모두 일제히 일을  다물었다. 그들은 할보르
와 카린이 어떻게  인사하는가를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가볍게 악
수를 했을 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장관을 휘파람을  불어 기쁨을 나
타냈고, 검사관은 큰소리로 너털웃음을 웃었다. 할보르는 조용히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뭐가 우습죠?"
  검사관은 대답이 궁했다.  그는 카린이 노여워할 말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양반은 토끼를  몰아놓고 다른 사람에게 잡도록 하는 사냥개
를 생각했던겁니다."
  여관 주인 아들이 비꼬아서 말했다.
  카린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계속하여 찻잔에 커피를 채웠다.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 선생님도 그리고 다른 손님들도 커피만으
로 만족하셔야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이 농장에서는 이제  어느 분에게도 술은 드리지 않기로 했답니
다."
  "나는 집에서도 술을 마시지 않지요."
  장관은 매우 기분이 좋은 듯 대꾸했다.
  검사관과 여관 주인  아들은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들은 베르게
르 스헨 페르손이 아주 유리해졌다고 생각했다.
  장관은 곧 금주와 그것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카린은 흥미롭게 귀를  기울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이
것이 그녀를 움직일 수  있는 화제임을 알자 장관은 더욱 우쭐해져
서 음주의 피해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카린은  이 문제에 관
한 한 자기의 의견도 모두 같다면서 그 의견이 장관 같은 슬기로운
사람의 공명을 얻었다는 데 대해 기쁨을 표했다.
  이렇게 화제를 독차지하여  혼자 지껄이던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
은 흘깃 할보르 쪽을 바라보았다. 할보르는 불쾌한  듯이 얼굴을 찌
푸리고 앉아 커피잔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저 친구에겐 좀  너무했나? 더군다나 사람들 얘기대로  에로프가
저승에 가도록 다소나마 거들어 주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야.
아뭏든 카린에게는 그 끔찍한 주정뱅이가 없어졌으니 도움이 된 셈
이야.'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은  이제 게임에서 승리했다는 생각으로 할
보르에게는 오히려 친밀감조차 느꼈다. 커피잔을  쳐들며 그가 말했
다.
  '할보르 씨 당신을 위해  건배합니다. 당신이 카린으로부터 그 주
정뱅이을 없애 줘서 확실히 좋은 방향 전환이 된 셈이니까.'
  할보르는 이  건배에 응할 수  없었다. 그는 똑바로 상대의  눈을
쏘아보고 앉아 저 사람이 자기의 이러한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를 생각했다.
  검사관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정말 좋은 방향 전환이지."
  여관 주인 아들도 맞장구를 치며 낄낄거렸다.
  그들이 왁자하게 웃어대기  전 카린은 그림자처럼 부엌문으로 사
라졌지만 그곳에서도 거실에서 주고받는 소리를 전부 들을 수가 있
었다. 그녀는 시기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할보르의 방문이 안타까왔
고 동시에 난처했다. 벌써 마을에 나쁜 소문이  돌아 할보르와 결혼
할 수 없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저이를 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어'
  거실에서는 잠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윽고  의자를
뒤로 미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일어서는 것 같았다.
  "벌써 가세요, 할보르?"
  잉그마르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응, 더 이상 있을 수가 없군. 카린에게 인사나 전해 주게."
  할보르의 목소리였다.
  "왜 부엌에 가서 직접 하시잖구요?"
  "뭐, 우리 두 사람은 이제 별다른 할말이 없는걸."
  카린의 가슴은 마구 방망이질  치고 온갖 생각이 날개가 돋힌 듯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지금 할보르는  그녀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 그녀는 그와 악수조차 제대
로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때도 입을  열어 옹호
하려고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살며시 나와 버리지 않았던가.
  '지금 저이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줄로 알고 있을거야. 이
젠 다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어째서 자신이  그를 그토록 비굴하게 만들었는지 스스로
도 알 수 없었다. 그토록  그를 사랑하는 자신이 말이다. 그러자 문
득 옛날 아버지가 자주 하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잉그마르손 집안  사람들은 인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직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카린은 얼른 문을  열고, 막 방을 나서려는 할보르 앞을  막아 섰
다.
  "벌써 가세요, 할보르? 저녁을 드시고 가실 줄 알았는데."
  할보르는 가만히  서서 카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전혀  달라진
듯이 보였다.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그 모습에는 무언가
부드러운, 도움을 구하는 듯한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가겠소. 그리고 이젠 오지 않겠소."
  할보르는 말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 계시다 가세요. 커피도 좀 드시고."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다시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정숙한 그녀
는 몇 번이나 용기를 읽을 뻔했으나 용감하게 밀고 나갔다.
  '이젠 이이도 내가 자기를 원한다는 걸 알아주겠지.'
  그녀는 손님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 선생님. 그리고 여러분! 할보르 씨와 저는
제가 상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으로 이 일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읍니다만 지금 여러분께서  알아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씀드리겠읍니다. 저는 할보르 씨와 결혼할 생각입니다."
  그녀는 말을 끊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마지막으로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온갖 허황된 말들을  다 할테지만,
할보르 씨나 저는 아무런 그릇된 일도 한 적이 없읍니다."
  카린은 말을 마치고 마치  장차 닥쳐올 온갖 참혹한 고난에 보호
라도 구하듯이 할보르에게 바짝 붙어섰다.
  사람들은 카린 잉그마르손이 일찌기  본 적이 없을 만큼 젊어 보
이고 아름다와 보이는 데  은근히 놀라면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
다.
  할보르가 감동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린, 나는 당신  아버지의 시계를 받았을 때 그 이상  더 큰 일
이 내게  일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당신이 한  말은
모든 고난을 초월하는구료."
  이때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모두 카린 부인과 할보르 씨를 축하합시다."
  그가 시원스레 말했다.
  "잉그마르의 따님 카린  부인이 고른 사람이 정말 정직한 분이라
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테니까."

  영원의 시간에 서서

  제2부 위대한 잉그마르

     전도관에서 생긴 일

  시골의 늙은  교장이 이따금 자기 자신을  과신했다고 해서 별로
놀랄 건 없다. 거의 한평생을 마을 사람들에게  지식을 주고 조언을
해온 그이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농민들이 자기가  가르친 것에 따
라 생활하는  것을 보았고, 어느  누구고 그가 이야기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은 본 일이 없었다. 그의 눈엔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어도 단순한 학생으로밖에 비쳐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자신을  어느 누구보다도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눈에는 모두 볼에는  보조개가 오목하
게 패인, 동그랗고 앳된 눈을 가진 철부지  어린아이로 밖에는 보이
지 않았다.
  겨울의 어느 일요일,  예배가 끝난 직후 목사와  교장은 성의실에
서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화제가 구세군 이야기로  옮겨 갔
다.
  "이상한 것을 다  생각하셨군요. 살아 생전 그런 것을  다 보아야
하다니, 나는 상상도 못한 일이군요."
  목사가 말했다.
  스톰은 눈을 굴려  목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목사의  비판이 전혀
겨냥을 빗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혁신
이 그들의 교구에까지 들어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는 목사님이 그것을 보시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스톰은 힘주어 말했다.
  목사는 자기가 무능력하고 쓸모도 없게 된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교장이 무엇을 하든 내버려 두었지만 때로는 좀 골려주
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떻게 우리가 구세군을  피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소, 스톰
선생? 아시다시피 목사와 교장이 손을 잡고 선다면 그 따위 방해물
은 아무리 몰려와도 하등 두려워할 것이 없겠소만, 스톰 선생, 나는
선생이 내  편에 서리라는 건  조금도 기대할 수가 없군요.  선생은
전도관에서 마음대로, 편리할 대로 설교하고 계시니까요."
  이 말에 스톰은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아주 부드
럽게 말했다.
  "목사님은 한 번도 내 설교를 들으러 오시지 않더군요."
  전도관이야말로 목사에겐  바위와도 같은 진짜 방해물이었다.  그
는 그 안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해결
되지 않는 문제를 화제에 올려놓고 그 두 사람은 서로 감정이 상할
말을 꺼낸 것을 후회했다.
  '아무래도 나는 스톰 선생에게 미안한 짓을  했어. 지난 4년 동안,
주일마다 스톰 선생은  오후에 성서 강의를 열어  왔지만, 그러면서
부터 교회의 아침 예배에는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예
상과는 달리 교회 내에 분열의 조짐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어. 스톰
선생은 약속대로 나를 무너뜨리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았던거지.
저 사람은 정말  성실한 벗이야. 내가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줘야지'
  오전의 조그마한 알력이 원인이 되어 목사는 오후에 교장의 강의
에 나가기로 했다.
  '스톰 선생을 한번 기쁘게 놀래 줘야지. 그 양반이 전도관에서 설
교하는 것을 한번 들어 보자'
  전도관으로 가면서 목사는 그것을 짓던  옛일들을 떠올렸다. 공기
까지도 예언에 차 있었고  하나님이 무언가 위대한 존재가 되기 위
하여 그런 것을  계획했다고 그는 얼마나 확고하게 믿고  있었던가!
그러나 그의 예감과는 달리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도관은 방이 넓고 벽이 희끄무레했다.  양쪽에는 털가죽으로 가
장자리를 댄 외투를  입힌 루터와 란히톤의 목조상이  걸려 있었다.
천정에 가까운 벽 둘레에는  꽃과 천국의 나팔과 그리고 저음 나팔
따위로 장식한 성서의 문구가 높다랗게 걸려 있었다.  방 정면의 연
단 위에는  그리스도를 그린, 얼핏  보면 유화 같기도 한  석판화가
걸려 있었다.
  넓은 방은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농부 옷을 걸쳤고,  빳빳하게
풀을 먹인 아낙네들의 머릿수건은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돌았다.
  이야기를 진행 중이던 스톰은 목사가 한쪽 통로를 내려와서 앞줄
에 앉는 것을 보았다.
  '너는 특별한 인물이야, 스톰!'
  스톰 교장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모든 것이 내게로 온다. 목사까지 나에게 경의를 표하러 오지 않
았는가'
  스톰은 이날 오후 묵시록에 나와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과 영원한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목사가 온 것이  무척 기뻐서 속으
로 생각했다.
  '나는 영원히 연단  위에 서서 아이들같이 선량하고  양순한 사람
들을 가르치는 것 이외엔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거기다가 오늘 목
사가 나의 설교를 들으러 왔듯이 이따금이라도 주께서 이곳을 찾아
주신다면 하늘 위의 그 누구도 나만큼 기쁠 수 없을거야'
  스톰이 예루살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목사는 흥미를 느끼
면서 동시에 먼 옛날 가졌던 의문이 되살아났다.  한창 예배가 무르
익을 무렵 문이  열리면서 한떼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기도
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문 옆에 가만히 물러서 있었다.
  '가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데'
  목사는 생각했다.
  스톰이 '아멘' 하고 말하기가  무섭게 문 옆에 물려 서 있던 사람
들 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나와 방안에 가득 퍼졌다.
  "제발 저에게도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건 분명 헤이크 마츠 에릭손이다!'
  목사와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동시에 생각했다.  이 마을에
그토록 아름답고 어린아이처럼 낭랑한 음성을 가진 사람은 그 외에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유순한 얼굴의 작달막한 사나이가  연단을 향해 성큼
성큼 걸어나갔고, 그 뒤에 그를 옹호하고 격려하기  위해 따라온 듯
한 스무 명 남짓한 남녀들이 따라나섰다.
  목사를 비롯한 스톰,  그 밖의 회중들이 모두  자리에서 엉거주춤
하게 엉덩이를 들었다. 그들은 헤이크 마츠가 필시  무슨 끔찍한 재
난을 알리러 왔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왕이 돌아가셨거나 선전포고
가 나붙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 물에 빠져  죽었을지도 몰랐
다.
  그러나 헤이크 마츠는 조금도  불길한 소식을 전하러 온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약간 흥분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또 매우 즐
거워서 싱글싱글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저는 교장 선생님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 이렇
게 왔습니다. 2주일 전, 저는 식구들과 집에 앉아 있다가 성령이 제
게 강림하여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가족은  그날 심한 폭설
때문에 여기 와서 스톰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
서 하나님의 말씀을 목말라 하고  있을 때 문득 저도 설교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겁니다.  저는 벌써 두 번이나  주일에 설교를
했답니다. 그 설교를 들은 집안 식구들과 이웃  사람들이 저더러 전
도관에 가서 여러분들께도 한번 들려 드려야 한다고 권하지 않겠읍
니까"
  헤이그 마츠는 자기처럼  무식한 사람에게도 그런 재능이 주어진
데 놀라고 있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도 따지고 모면 한낱 농민이지 않았습니까?"
  얼마간 그는 자신있게 말했다.
  이렇게 서두를 마친 헤이크  마츠는 두 손을 잡으며 당장 설교를
시작하려고 했다.
  "헤이크 마츠,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이야기를 할 참인가?"
  허를 찔린 놀라움에서 벗어나며 스톰이 소리쳤다.
  그렇다고 확실하게 대답하려던  헤이크 마츠는 스톰이 눈을 부릅
뜨자 어린아이처럼 움츠려들었다.
  "물론,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께 허락을 받아야 하지요."
  그는 더듬거렸다.
  "우리는 오늘 더 이상 설교가 필요치 않네."
  스톰이 깎아 자르듯 말했다.
  "제발 저에게  두어 마디만 지껄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저는
단지 밭을 갈  때와 숯굴에서 일하고 있을  때 제게 일어난 일들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그 말들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헤이크 마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에워했다.
  스톰은 자신도  그러한 경험을  가졌었지만, 몸집이 작은  가련한
이 사나이에게 도무지  아무런 연민의 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자네는 왜 혼자 느낀 괴상한 생각을 가지고 여기 나타나서 그것
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겨대는가?"
  헤이크 마츠는 이제 감히 더는 항의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스톰은
찬송가 책을 폈다.
  "자 여러분, 함께 부릅시다. 찬송가 187장을 펴십시오."
  그는 커다란 목소리로 찬송가를  한 번 읽고는 힘껏 목청을 돋우
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너의 창문은 예루살렘 쪽으로 열려 있는가-
  그 동안에 그는 생각에 잠겼다.
  '역시 오늘 목사가 와 있어서 잘됐어. 내가 이 전도관에서 어떻게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가를 알았겠지'
  찬송가가 끝나자마자 한 사나이가 벌떡  일어섰다. 의젓하고 위엄
있는 륭 비오른  오라프손이었다. 그는 잉그마르 딸과  결혼하여 마
을의 중심에 있는 커다란 농장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끝나 버린  일이지만 교장 선생님께선 마츠 에릭손 문제를
처리하시기 전에 저희들의 의견도 물어 주셨어야 옳습니다."
  그가 점잖게 항의했다.
  "호- 그렇게 생각하는가, 오라프손?"
  스톰은 건방진 아이들을 꾸짖을 때 늘 하던 투로 말했다.
  "그럼 말하겠는데 나 이외엔 아무도 이곳에서 무슨 얘기든 할 수
없네."
  륭 비오른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스톰에게 시비를  걸 생각
은 아니었다. 다만  헤이크 마츠가 입은 타격을 조금 덜어  주고 싶
었을 뿐이었다. 이제 그는 자기가 받은 수모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응수할 만한 말을  채 마련하기도
전에 헤이크 마츠와 함께  들어온 한 사나이가 커다란 소리로 말했
다.
  "저는 헤이크 마츠의  설교를 두 번이나 들었는데, 저  사람은 정
말 신기한 사람입니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께서도 한번  들어 보시
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을 줄로 압니다."
  스톰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교실에서 훈계하는 조로 말했다.
  "이봐 크리스텔 랄손,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단 말이다. 알아
듣겠나? 만일 오늘 헤이크 마츠에게 설교를 시켰다가는 다음주일엔
크리스텔 자네가 설교하겠다고  나설테고, 그 다음 주일에는  륭 비
오른이 덤벼들게야!"
  이 말을 듣고 몇몇 사람이 웃음을 흘렸지만 륭 비오른은 얼른 그
말에 부당함을 지적하고 있었다.
  "어째서 저나 크리스텔이  교장 선생님처럼 설교를 해서는 안 됩
니까? 그 까닭을 모르겠군요."
  팀즈 할보르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사람들을 달래어  언쟁을 막
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 전도관을 짓고  운영하는데 헌금을 한 우리들 입장에선 새로
운 설교자가 이야기할 허락을 얻고자 할 때 마땅히 함께 의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텔 랄손도 기운을 되찾아 다시 일어서며 말했다.
  "저 역시 기억하기론,  우리가 함께 이 전도관을 세울  때 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예배당이지 어는 한 사람만이 주관하는 곳
은 아니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던 걸로 압니다."
  그가 이렇게 말을 맺자, 사람들은 모두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불
과 한 시간  전만 해도 교장 이외의  다른 누구의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터인데, 이젠 무언가  새로운 설교를 듣는
다는 것이 아주 즐겁게 여겨졌다.
  "뭐 좀 새로운 것을 듣고 싶어요. 연단  저편에 다른 사람이 서는
것을 봤으면...."
  누군가가 소근거렸다.
  그런데 만일 브레트 군네르가  이날 이 자리에 없었던들 아마 소
동은 그 선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는 팀즈 할보르의 동서로, 후리후
리한 키에 어딘가 쓸쓸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고 거무스름한 피부에
눈길이 매우  날카로운 사내였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교장을 좋아했으나 그날의  재치있는 싸움에서만은 물러설 수 없었
다.
  "우리들이 전도관을 짓기  시작할 때는 자유에 대해 퍽이나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읍니다만, 문을 열고부터는 좀처럼  그런 류의 말을
듣지 못하게 된 것 같군요."
  스톰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군네르의 말은 여지없는 적의, 다
시 말해서 뚜렷한 반대의 첫 징조였다.
  "아니, 잘 생각해 봐. 브레트 군네르,  자넨 여기서 루터가 가르친
것처럼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들었을게야. 단지 여기서는  오늘 나
타나서 내일 땅에 묻힐  그런 어쭙잖은 설교가 허락되지 않을 뿐이
지."
  "선생께선 무엇이든 기존의 교리에 저촉되는 새로운 것만 나타나
면 우리로 하여금 당장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토록 하셨지요."
  군네르는 유감스럽다는 듯이 그러나 부드럽게 대꾸했다.
  "새로운 방법으로  소를 돌보거나 최신  농기구를 사용하는 것은
희망하시면서도, 지금 하나님의  밭을 가는 데 사용할  새로운 말씀
에 대해서는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하십니다."
  스톰은 브레트 군네르가  제멋대로 짖도록 내버려 두느니 물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볍게 말했다.
  "그럼 뭔가,  자네의 의견은 루터  교도들과 다른  교리를 여기서
설교시켜야 한다 그 말인가?"
  군네르가 소리쳤다.
  "새로운 교리의  문제완 상관없습니다. 지금 여기선  설교하는 사
람에 관해 얘기하는 중이지요. 제가 알기로, 마츠 에릭손은 교장 선
생님이나 목사님과 다름없이 훌륭한 루터 교도입니다."
  이 순간, 목사의 존재를 잊고 있던 스톰은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목사는 지팡이 손잡이  위에 턱을 괸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
다. 그의 눈은 호기심으로 빛나며 스톰을 응시한  채 움직이지 않았
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전에도 경험한 일과 어딘가 비슷하다고
스톰은 생각했다. 화창하게 갠 어느날 아침, 참새가 교실의 창문 바
깥 문턱에 앉아 즐거운 듯이 재잘거리고 있을 때면 흔히 이러한 일
들이 일어 별안간 아이들이 공부를 집어치우고 그만 쉬자고 졸라대
면서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한다. 이것을 바로잡기란 여간  힘이 드
는 일이 아니다. 그와 흡사한 일이 지금  헤이크 마츠가 나타나면서
부터 마을 신도들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스톰은  목사나 그 밖
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가  이 폭동을 능히 진압하고도 남는 인물
이라는 것을 보여줄 작정이었다.
  '우선 저들이 사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둬야지. 주모자들이 목이 쉬
도록 실컷 지껄이게 내버려 둬야 해'
  스톰은 물병이 놓여 있는 테이블 저쪽의 의자에 가서 앉았다.
  항의의 폭풍은 그칠  줄을 몰랐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도 교장
과 다름없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에 기세가 등등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장이 전도관을 세우며  평범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후부터 자연히 그들의 마음
속에 싹터온 것이 분명했다.
  '폭풍은 곧 가라앉을게야. 이제는 이곳의 지도자가 누구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시켜야 해.'
  스톰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탕탕 두드리며 소리쳤다.
  "집어치워! 도대체 이  소동이 뭔가. 나는 이제  돌아가겠소. 여러
분들도 돌아가시오. 불을 끄고, 문을 잠가야 하니까."
  몇 사람이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들은 스톰의  학교에 다녔던 사
람들로, 선생이 테이블을 칠 때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유있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교장은 지금, 우리들이 이미 성인이라는 것을 잊고 있어"
  누군가가 말했다.
  "테이블을 치기만 하면 우리가 여전히 당장 도망칠 줄로 알고 있
다니까"
  또 다른 사람이 맞장구쳤다.
  그들은 새로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누구를  부르면 좋
을까를 이야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는 곧  국립복음협회의
성서 판매원을 불러오면 어떨가 하는 문제로 왈가왈부 지껄여댔다.
  스톰은 신도들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그의 기분은  마치 괴물들
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하나하나
의 얼굴에서 오직  어린아이를 느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동
그란 어린아이의  뺨이나 부드러운 어린아이의  곱슬머리나 귀여운
눈동자는 모두 사라지고,  다만 억세고 뻔뻔스러운 얼굴을  한 어른
의 집단만이 눈에  비쳤다. 그는 이제 도저히 그들을 다스릴  수 없
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동은 계속되고 목소리는  차츰 왁자하게 커져 갔다.  스톰은 꼼
짝도 하지 않고, 거칠어지는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브레트
군네르, 륭 비오른 그리고 크리스텔 랄손이 앞장을 서고 있었다.
  전혀 악의는 없었으나 이  난처한 사건의 원인이 된 헤이크 마츠
는 이따금  일어서서 조용히 하라고 사정했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스톰은 다시금 목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목사는  여전히 꼼짝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고, 그의 눈 역시 똑같은  빛으로 자신
을 주시하고 있었다. 스톰은 생각했다.
  '저 사람은  아마 내가 전도관을  세우겠다고 주장하던 4년  전의
그날밤 일을 회상하고 있을거야.  역시 그가 옳았어. 만사가 목사의
말대로 되고  있으니 말야. 아, 이단과  반역과 분열.... 내가 이것을
짓겠다고 고집하지 않았던들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결론이 확실해지자 스톰은  고개를 쳐들고 등을 꼿꼿이  폈다. 그
는 주머니에서 반짝거리는  조그마한 강철 열쇠를 꺼내  들었다. 바
로 전도관의 열쇠였다.  그는 구석구석에서도 볼 수  있도록 열쇠를
불빛에 비추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자, 이 열쇠를 테이블 위에  놓아 두겠네. 나는 두번 다시 이 열
쇠에 손을 대지 않을게야. 그 까닭은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려던 모
든 것에게 이것이 문을  열어 주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
지"
  스톰은 열쇠를 내려놓고  모자를 집어들더니 곧장 목사에게로 걸
어갔다.
  "오늘 이렇게 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만일 오늘  안 오셨
으면 영원히 내 이야기를 듣지 못했겠지요."
  영원의 시간에 서서

  제2부 위대한 잉그마르

     폭풍의 밤

  사람들은 에로프 엘손이  카린이나 어린 잉그마르에게 실컷 애를
먹였기 때문에  무덤 속에서도  편치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에로프
엘손이 죽고  카린은 정말 무던히  고생을 했다. 그가 돈을  한푼도
남기지 않고 다 써버렸고 게다가 밭은 거금에 저당잡혀 있었으므로
만일 할보르가 빚을 갚을 재력이 없었던들 그것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었을 정도였다. 잉그마르의 재산 2만  크로네도 에로프에 의해
온데 간데 없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가 어디엔가  돈을 묻어 놓
았다느니, 남에게 주어 버렸다느니 수군대기도 했다. 아무튼 그것은
찾을 도리가 없었다.
  잉그마르는 자신이  한푼도 없는 신세가 된  것을 알고 카린에게
의논했다. 그는 우선 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고, 대학에 들어갈 나
이가 될 때까지 그냥 스톰 교장댁에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마
을에 있는 동안은 교장이나  목사에게 언제라도 책을 빌릴 수 있고
게다가 더 좋은 것은 학교에서 스톰 선생을 도와 아이들에게 책 읽
히기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훌륭한 실습이 될 것이었다.
  "그렇겠지. 집에 있기는 싫을거야. 여기서는 주인이 될 수 없으니
까, 그렇지?"
  카린이 생각 끝에 말했다.
  스톰의 딸은  잉그마르가 돌아온다는 소리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남자아이를 데리고  살 바엔 판사의 아들인  베르틸 쪽이나 헤르크
마츠 에릭손의 아들인  쾌활한 가브리엘 쪽이 낫다고 게르트루드는
생각했다. 게르트루드는 가브리엘과 베르틸은 좋아했지만, 잉그마르
에 대한 감정은 분명치가 않았다.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하인
처럼 잔심부름을 해주기도  해서 그 점은 마음에  들었지만, 어설프
고 소심하여 놀 줄을 몰라 때로는 짜증스럽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부지런하고 공부를 좋아하는  데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
나 그에겐 매우 둔한 면이 있어 게르트루드는 노골적으로 놀려대곤
했다.
  게르트루드의 머릿속은 언제나 우스꽝스러운 공상과 꿈으로 가득
했다. 그녀는 그것을 잉그마르에게 털어놓게 되었다. 또한 어쩌다가
잉그마르가 사나흘  집을 비우게 되면 그녀는  초조해 했고 말벗이
없어진 사실을 절실하게  느꼈지만, 일단 그가 돌아오게  되면 무엇
이 그렇게 그리웠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잉그마르
를 하찮게  여겼다. 그러나  잉그마르가 예전과는 달리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녀는 그를 위해 울었고, 그가  다시 재
산을 모을 생각은 하지 않고 교사가 될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너
무나 흥분하여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켜야 했다.
  '언젠가는 다시 회복될거야'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스톰의 학교 학생들은  매우 엄한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엄격히
그 규율을 지켜야 했고 논다는 것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데 스톰이 설교를 그만둔 해의 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여보,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다워야 해요. 당신이나 저나 젊었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그 왜,  우리도 열 일곱 살 때는 해가 질 때부
터 해가 뜰 때까지, 며칠씩 꼬박 춤으로 지새잖았어요?"
  스티나가 그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후 어느 일요일 밤, 젊은 가브리엘과 시의원의  딸 군힐드가 스
톰의 집에 찾아왔을  때 그들은 학교에서 한바탕  춤을 출 수 있었
다.
  춤을 추어도 괜찮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게르트루드는 미친 듯이
좋아했으나 잉그마르는 도무지 함께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책을  들고 창문 옆의 긴  의자에 가서 주저앉아 버렸
다. 게르트루드가 몇 번이나 춤을 추게 하려고  시도했으나 그는 말
없이 수줍은 듯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스티나는  그 모양을 지켜보
다가 머리를 저었다.
  '과연 전통 있는 집안의 태생답군. 하지만 젊은이답진 않아'
  춤을 춘 세 사람은 너무나도 즐거웠다. 그들은  다음 토요일 밤에
정식으로 춤을 추러  가자고 말하면서 스톰과 스티나에게 괜찮겠느
냐고 물었다.
  "억센 잉그마르의  집에서 춤을  춘다면 승낙하겠어요.  거기라면
훌륭한 사람들이 모이는 데니까."
  스티나가 말했다.
  스톰도 조건을 붙이기로 했다.
  "나는 잉그마르가 함께 가지 않는다면 게르트루드를 춤추러 보낼
수 없다."
  세 사람은 잉그마르에게 몰려들어 함께 가 달라고 부탁했다.
  "내키지 않아."
  그가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부탁해 봐야 소용없어!"
  게르트루드가 거센 어조로 말했다.
  잉그마르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방금 춤을 춘 끝이라 눈부시게 아름다와 보였다.  그녀는 야릇한 조
소를 띠고는  잉그마르를 날카롭게 쏘아 보더니  이내 외면해 버렸
다. 그것은 마치 애늙은이 같은 그를 마음껏  경멸한다는 태도 같았
다.
  잉그마르는 하는  수 없이 마음을  돌려야 했다. 그 밖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스티나와  부엌에서 실
을 감고 있던 게르트루드는 문득 어머니가 이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이따금 물레를 둘리다  말고 귀
를 기울였다.
  "저게 무슨 소릴까? 도무지 알 수가 없네. 게르트루드, 네 귀에도
들리니?"
  "네, 들려요. 누가 이층 교실에 있나본데요."
  "이런 시간에  있긴 누가 있겠니? ....  저것 봐, 들리지?  .... 뭔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 같은데."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분명 무엇인가 쓱쓱쓱,  쿵쿵쿵 하고 소리
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긴장하여 소름이 돋았다.
  "틀림없이 누군가 올라간거예요."
  게르트루드가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니까 저건 너희들이 춤을 춘 뒤로 밤마다 들려오
는 소리야."
  '어머니는 우리가 춤을  춘 뒤로 이 집에 귀신이 나오게  된 줄로
알고 있나봐'
  게르트루드가 생각했다. 만일 그 생각이  어머니의 머리에서 사라
지지 않는다면 게르트루드는 두번 다시  춤을 출 수 없게 될 것 같
았다.
  "제가 이층에 가서 뭔지 보고 올께요."
  게르트루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티나는 황급히 딸의  스커트
자락을 붙잡았다.
  "괜찮겠니?"
  "아이 참, 엄마두! 뭔가 확인해 두는 것이 마음 편하잖아요."
  "그럼 나도 같이 가자"
  스티나는 결심한 듯이 말했다.
  두 사람은 살며시 계단을 올라갔다. 문 앞까지  왔을 때는 두려움
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문을  열지 못한 채 망설이다가  스티나가
허리를 굽혀  열쇠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곧 그녀는  소리를
죽이고 킥킥거리고 웃었다.
  "뭐가 우스워요, 엄마?"
  게르트루드가 물었다.
  "네 눈으로 한번 들여다봐라, 소리내지 말고!"
  이번엔 게르트루드가  열쇠구멍에 눈을 갖다댔다. 안에서는  책상
과 걸상을 한쪽 벽에 밀쳐 놓고 잉그마르가 교실 한복판 먼지 구덩
이 속에서 의자 하나를 껴안고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잉그마르가 미쳤나봐!"
  게르트루드가 소리쳤다.
  스티나는 딸을 문에서 떼어내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아마 혼자서  춤을 배우는 모양이다. 그걸  익혀두면 모임에서도
어울릴 수 있을테니까"
  스티나 부인은 몸을 흔들면서 웃어대기 시작했다.
  "어떻게나 놀랐는지 정말 십년 감수할  뻔했다. 아무튼 다행한 일
이다. 잉그마르도 한번쯤은 젊어질 수 있으니!"
  겨우 웃음을 진정시켰을 때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너 이 일을 아무한테도 얘기해선 안 된다. 알겠니?"
  토요일 밤, 네  사람의 젊은이가 학교 계단에 서서 막  떠나려 하
고 있었다. 스티나는  무척 만족스러운 듯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
다. 소년들은  노란 노루가죽의  반바지에다 눈부시게 빨간  소매가
달린 초록색 수직  조끼를 입고 있었다. 군힐드와  게르트루드는 헐
렁하게 소매를  부풀린 블라우스에 빨간 천으로  단을 두른 세로줄
무늬의 스커트를 받쳐  입고, 꽃무늬가 있는 스카프를  둘러 가슴께
에다 매었으며,  스카프와 똑같은  꽃무늬를 새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네 사람은 봄의 해거름에 깃든 어스름 속을  걸어갔다. 그들은 한
참이나 아무말  없이 걷기만  했다. 간혹 게르트루드만이  곁눈질로
잉그마르를 훔쳐보면서 그가  춤을 배우려고 애쓰던 모습을 떠올렸
다. 이유야 어쨌든 그녀의 마음은 차츰 두둥실 가벼워졌다. 다른 사
람들보다 좀 떨어져 걸으며  그녀는 아무런 방해 없이 명상에 잠기
려 했다. 그녀는 나무가 새로운 나뭇잎을 가지게  된 조그마한 이야
기를 꾸며 보았다.

  나무가 한겨울 동안  조용히 푹 잠을 잔다. 별안간 꿈을  꾸기 시
작했다. 꿈은  한여름이었다. 들판은 풀잎과  파도를 이루는 곡물로
치장을 하고 아가위는 갓 핀 장미와 함께  반짝이고 있었다. 냇물과
못은 연꽃 잎으로  덮이고, 돌은 잔벌레가 기어다니는  풀의 털수염
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숲의 양탄자는  잡초로 수북하게 덮
여 있었다.
  이렇듯 모든 것이 옷을 입고 치장을 하는 가운데 나무는 유독 자
기들만이 여윈 몸으로 헐벗고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기
들의 발가벗은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무는 모든 자연이 자기를 비웃는 것 같아 어쩔 줄을 몰
라했다. 호박벌이 윙윙거리며 날아와 놀려대고, 까치도 얕잡아 보고
웃었다. 다른 새들도 모두 업신여기듯 야유의 노래를 불러댔다.
  "우리의 옷은 어디에 있지?"
  나무들은 맥이 풀린  몰골로 서로에게 물었다. 잎사귀  하나 붙어
있지 않은  몸뚱이 때문에 그들은  점점 더 괴롭고 슬퍼졌다.  바로
그때 잠이 깼다.
  그들은 아직도 잠이 가득  묻어 있는 눈길로 사방을 돌아보며 생
각했다.
  "아, 다행히도  꿈이었어! 분명 여름은 아직  이곳까지 오지 않았
군. 알맞게 잠이 깨서 참 잘 됐어."
  그런데 더 유심히  살펴보았을 때 그들은, 냇물에는  얼음이 녹고
풀잎과 크로커스는  잠자리인 흙속에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으
며, 자신들의 껍질 안에서도 이미 수액이 흐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쨌든 봄은 이미 와 있었구나!"
  나무는 중얼거렸다.
  "올해는 꽤 오래 잤는데!  역시 눈 뜨길 잘했어. 몸치장을 하기엔
꼭 알맞는 시기야"
  나무들은 부랴부랴 촉촉한 연두빛 잎을 달고, 단풍은  몇 개의 초
록 꽃을 달았다.  도장나무의 잎은 생기다 말고  쭈글쭈글하게 펼쳐
나와서 정말 팔푼이처럼 보인 데 반해, 수양버들은  매끈한 잎이 처
음부터 반질반질하게 귀여운 눈을 떴다.

  게르트루드는 이런 상상으로  걷다 말고 혼자 웃었다.  그녀는 지
금 잉그마르와 단둘이 있었다면  이 이야기를 모두 들려줄 수 있었
으리라 생각했다.
  잉그마르의 농장에 도착하자면 꽤 멀어서 그들은 한 시간 이상이
나 걸어야 했다.  그들은 강가를 따라 걸어갔다.  그러는 동안 내게
게르트루드는 다른 사람보다 약간 쳐져서  걸어갔다. 그녀의 공상은
벌겋게 지는 해의  가장자리를 맴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석양은 강
물 위에서 타기도  하고 물가에서 불붙기도 했다.  잿빛 도장나무와
초록빛 자작나무는 반짝이는  빛에 싸여서 금방 바알갛게 젖어들다
가는 다시 제 빛깔로 돌아가곤 했다.
  갑자기 잉그마르가  걸음을 멈추며 그때까지  지껄이던 이야기를
뚝 그쳤다.
  "왜 그래, 잉그마르?"
  군힐드가 물었다.
  잉그마르는 숨이  멎은 듯 새파랗게 질린  채 눈앞의 무엇인가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득한 밀밭과  야산에 둘러싸
인 넓은 평야.  그리고 그 평야 한복판의 커다란 농장  건물을 발견
했을 뿐이었다. 순간  붉은 지붕과 벽 언저리에는  불그스름한 빛이
황홀하게 감돌았다.
  게르트루드는 잉그마르를 잠시  바라보더니 군힐드와 가브리엘을
한쪽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잉그마르에게 이  근처 이야기는 아무것도 묻지  마. 저기까지가
모두 잉그마르 농장이야. 벌써 2년이나 여기서  안 살았는데 돈이다
없어졌기 때문이야. 그 때문에 아마 슬퍼진 모양이야."
  숲기슭에 있는 억센 잉그마르의 오두막으로 가려면 그 농장을 지
나야 했다. 얼마 안 가서 그들을 부르며 잉그마르가 뒤쫓아 왔다.
  "그쪽보다 이쪽 길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는 숲기슭을  꾸불꾸불 돌아가는  옆길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
길로 가면 농장을 가로지르지 않아도 억센 잉그마르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너 억센 잉그마르 알지?"
  가브리엘이 물었다.
  "응, 그전에 우린 좋은 친구였어."
  "마술을 한다던데, 정말이야?"
  "글쎄.... 그렇진 않을걸, 아마."
  잉그마르 자신도  절반은 믿고 있는 듯  약간 떠듬거리며 대답했
다.
  "얘기해 줘, 너는 알잖아."
  군힐드가 고집했다.
  "교장 선생님이 그런 건 믿지 않는 게 좋다고 그러셨어."
  "교장 선생님도 사람들이 보이는 걸 보고,  아는 걸 믿는 데야 도
리가 있겠어?"
  가브리엘이 잘라 말했다.
  잉그마르는 친구들에게  자기 집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농장을 보자 곧 되살아난 것이다.
  "그럼, 내가 옛날에 본 걸 하나 얘기해 주도록 하지."
  그가 입을 열었다.
  "아주 추운  겨울이었어. 아버지는 억센 잉그마르와  숲에 틀어박
혀 숯굴에서 입을  하고 있었지. 크리스마스가 가까와지자  억센 잉
그마르는 자기가 숯굴을 돌볼테니 아버지더러 집에 가서 축제를 즐
기도록 하라고 말했지. 크리스마스 전날  어머니는 억센 잉그마르에
게 줄 음식을  바구니에 담아 나를 숲으로 보냈어. 아침  일찍 출발
해서 점심 전에  도착할 수 있었지. 내가 도착해 보니  아버지와 억
센 잉그마르는 마침 숯굴에 바람을 넣고는 막 구워진 숯을 모두 꺼
내어 땅 위에 말리고 있었어. 아직도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 오르는
것이 두껍게 널린  곳에서는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듯했어. 그런데
다시 불이 붙어 마저 타버리면 안 되지. 그걸  막는 것이 숯을 만드
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아버지가 나를 보며 말했어.
  "아무래도 너 혼자서  돌아가야 되겠다. 잉그마르야.. 이  일을 모
두 억센 잉그마르에게 시킬 순 없잖겠니?"
  그러자 억센 잉그마르가 말하더군.
  "돌아가게. 위대한 잉그마르. 나는 이보다 훨씬 심한 일도 혼자서
해냈는걸."
  조금 있자니 연기가 한결 약해졌어.
  "자, 그럼  브리타가 얼마나 맛있는  성탄 음식을  만들어 보냈나
구경 좀 해볼까?"
  억센 잉그마르가 말했지. 그는 바구니를 받아들고 나를 불렀어.
  "우리가 얼마나 근사한 집에 살고 있나 보여줄께."
  그는 아버지와  자기가 거처하는  오두막으로 나를 데리고  갔어.
오두막엔 자연석이 하나 그대로 놓여 있고, 벽은  가문비 가지 같은
것으로 엮었더군.
  "어떠냐 꼬마야, 아버지가 이렇게 훌륭한  성을 숲속에 가지고 있
는 줄은 꿈에도 몰랐지? 이  안엔 폭풍우와 이슬을 막아 주는 벽이
있지."
  그가 웃으면서 주먹을 가문비  가지의 벽에다 한번 쓱 쑤셔 넣었
어."
  잉그마르는 잠깐 숨을 들이켰다.
  "얼마 안 지나서 아버지가 웃으시며  들어오셨어. 두 분은 똑같이
새까맣게 그을고 매캐한  연기가 몸에 배어 냄새가  고약하더군. 하
지만 나는 그토록 행복에  젖어 즐거워하는 아버지를 일찌기 본 적
이 없었어. 오두막은 지붕이 낮아서 똑바로 설  수도 없거니와 납작
한 돌이 두 개 있었을 뿐이었지만, 두 분은 정말 행복해 보였어. 침
대에 나란히 앉아 바구니를 끄르면서 두 분은 이런 얘기를 주고 받
더군.
  "아니, 브리타가  나한테 보내준 크리스마스 성찬을  자네가 먹어
서야 쓰겠나?"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나한테도 친절을 베풀어 줘야지"
  "맞아, 이럴 때일수록 가련한 숯장수  영감쟁이를 굶겨서는 안 되
지."
  두 분은 음식을  들기 시작했지. 어머니는 약간의  브랜디를 음식
과 함께 보내셨는데, 나는 두 분을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즐거워하
며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하고 정말 놀랬어. 그때 억센 잉그마르
가 소리쳤어.
  "너 집에 가거든 어머니한테 음식을 아버지 혼자 다 자셨다구 말
씀드려야 한다. 내일은 더 많이 보내주시라구 말이야, 알겠니?"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지 바로 그때였어. 내가  깜짝 놀라
귀를 기울이니,  갑자기 숯굴  속에서 따닥따닥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겠어? 누가 자갈을  한 주먹 집어던지는 것 같았지.  아직 아버지
는 깨닫지 못했지만 억센 잉그마르가 혼자서 중얼거리더군.
  "저런, 벌서 왔나?"
  그러고는 여전히 앉아서  먹고만 있었어. 그러자니 또  소리가 났
는데 이번엔 먼저보다  훨씬 요란했지. 마치 돌을 한 삽  떠서 불에
집어던지는 것 같았으니까.
  "원 세상에 성급하기도 하지"
  억센 잉그마르가 이렇게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더군.
  "틀림없이 숯이 타는게야!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요. 혼자 나갔다
올테니까"
  그는 혼자서 밖으로 나갔고 아버지와 나는 아무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지. 잠시 후,  억센 잉그마르가 돌아오고 두 분은 다시 새
로운 농담을 시작했어.
  "나이를 먹고 나서는  이렇게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가져 본 적이
없구먼"하면서 억센  잉그마르가 웃었는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소리가 나지  않겠어? "뭐야 또 사람을 자꾸  놀래키는데!" 그는
곧 뛰어 나갔어. 억센 잉그마르가 다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말씀
하시더군.
  "정말 자넨 저렇게 좋은 조수가 있으니 혼자라도 문제 없겠군."
  "그러니 잉그마르, 자네는 집에  돌아가서 크리스마스나 즐기도록
해요. 여긴 저것들이 나를 도와줄테니까"
  아버지와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억센 잉그마르가 돌본  숯굴이
타버린 일은 그 전이고 후고 한번도 없었어."
  군힐드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잉그마르에게 고맙다고  했지만,
게르트루드는 두려워진 듯이  묵묵히 걸음을 옮겨 놓았다.  벌써 어
둠이 깃들기 시작하여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토록 아름답게 장
미빛으로 물들어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푸르스름한 회색조로 변해
있었다. 숲의  여기저기엔 어슬푸레한  빛에 나뭇잎들이 마치  벌건
괴물의 눈알처럼 팔랑거렸다.
  게르트두드는 잉그마르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데
놀랐다. 그는 고향의 흙을 밟고부터 마치 딴사람이 된 듯했다.
  여느 때보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늠름한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게르트루드는 그의  이러한 변화가 그다지 다음에  들지 않
았다. 왠지  불안한 생각조차 들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춤추기 위해 자기 마을로 가고 있는 잉그마르를 이러쿵저러쿵 놀려
대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들은 조그마한 회색 오두막에  다다랐다. 집안에는 촛불
이 켜져 있었다. 창문이 작아 광선이 별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었
다. 그들은  바이올린소리며, 춤을 추는 발자국소리를  들었다. 그러
나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춤을 춘다고? 장소가 너무 좁아서 한 쌍도 못 들어갈 것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자. 이 오두막은 보기 보단 좁지 않아." 하고  가브
리엘이 말했다.
  활짝 열린 문 밖으로 벌써 몸이 훈훈해지도록 춤을 춘 소년 소녀
들이 나와서 몰려  서 있었다. 소녀들은 어깨걸이로  너울너울 부채
질을 했고, 소년들은 짤막한 검은 자켓을 벗어버린  채 빨간 소매가
달린 화려한 녹색 조끼 차림으로 있었다.
  새로 온 젊은이들은 문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을 뚫다시피 하며 오
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그들의 눈에 띈 것은  억센 잉그
마르였다. 그는 땅딸막하니 살이  찐 사나이로, 커다란 머리에다 기
다랗게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도깨비나  괴물의 친척인지도 몰라'라고 게르트루드는
생각했다.
  그는 춤추는  사람들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난로 위에 올라서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오두막은 밖에서  보기보다는 지만 빈약하고 너저분했다.  생나무
송판대기를 갖다댄  벽은 벌레가  먹었고, 대들보는 연기에  꺼멓게
그을려 있었다. 창문에는 커튼도 없었고  탁자에는 테이블보도 덮여
있지 않았다. 억센  잉그마르가 홀아비 신세라는 것은  첫눈에도 알
수 있었다. 아들들은 모두 그와 떨어져 미국에  가서 살고 있었으므
로 늙은 홀아비가 쓸쓸함을  달래는 길은 어떻게 토요일 밤마다 젊
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기가  켜는 바이올린에 맞춰 춤을 추게 하
는 것뿐이었다.
  오두막 안은 어둠침침한데다가  숨이 콱 막힐 듯이  답답했다. 게
르트루드는 당장 질식할 것  같아 얼른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문
간을 단단하게 막아 서  있는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뚫고 나갈 도리
가 없었다.
  억센 잉그마르는 정확한 솜씨로 완벽한 음률을 켜고 있다가 잉그
마르 잉그마르손이 방에 들어오는  순간 활을 옆으로 제껴 끽끽 쇳
소리를 냈다. 춤추던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에 서 버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춤을 계속 해!"
  그가 소리쳤다.
  잉그마르는 팔을  게르트루드의 허리에 두르고  피규어를 추려고
했다. 게르트루드는 그런 그가  매우 놀랍게 여겨졌다. 그러나 그들
은 어느 쪽으로도  움직여 갈 수가 없었다.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잇
달아 움직여 오는 바람에 처음부터 맞춰서 시작하지 않으면 도저히
그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억센 잉그마르는 팔의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활로 난로의 재받이
를 탕탕 치면서 명령하듯 말했다.
  "이 오두막에서는 누가 춤을 추든지간에 위대한 잉그마르의 아들
에게는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젊은이들은 일제히 잉그마르를 돌아보았다.  잉그마르는 겸연쩍어
서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게르트루드는 그를  껴안듯이 하여
방을 마구 가로질러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춤이 끝나자 바이올린을  켜던 억센 잉그마르는 아래로 내려서서
잉그마르에게 다가갔다. 그는 잉그마르의 손을  자기 손으로 감싸듯
어루만지다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이내 놓아 버렸다.
  "정신 차려야겠군. 그 따위  연약한 선생의 손이라니! 나 같은 늙
은이가 잡아도 금방 부러지고 말겠다."
  그는 젊은 잉그마르와 친구들을 테이블로 데리고 가서 거기 앉아
있던 몇 사람의  아낙네들을 쫓아버렸다. 그리고 찬장에서  빵과 버
터와 맥주를 들고 나왔다.
  "이런 때는 보통, 음식을  내놓지 않는 법이지. 하지만 여기 잉그
마르 잉그마르손만큼은 오늘 내  지붕 밑에서 마땅히 뭔가 한술 대
접받지 않으면 안 되지."
  억센 잉그마르는 조그마한  삼발 의자를 끌어다가 잉그마르 앞에
앉아서는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학교 교사가 되겠단 말이지?"
  그가 물었다.
  잉그마르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입가엔 엷은 미소를  띠고 그러나
슬픈 듯이 대답했다.
  "집에서는 불필요한 존잰걸요."
  "필요없다구, 네가? 곧  농장에서 살게 될거라는 걸  모르는 모양
이군. 에로프는  불과 2년밖에 살지 못했어.  할보르인들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누가 알겠어."
  "할보르는 건강하니 걱정 없어요."
  "물론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할보르는 네가 들어오기만 한다면
농장을 언제든지 내놓을게다."
  "어리석은 일이죠 뭐,  한번 손에 넣은 잉그마르 농장을  다시 내
놓는다는 건"
  잉그마르는 하얀 송판  테이블의 끝을 잡고 앉아  있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파사삭  하는 소리가  났다. 잉그마르가 테이블  귀퉁이를
쥐어뜯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네가 교사가 된다면, 할보르도  농장을 다시 내놓진 않을거
야."
  "그럴까요?"
  "그럴가요라니? 물론 그렇지. 우선은 네가  어떻게 자랐는가 하는
게 문제야. 잉그마르, 쟁기를 써 본 일이 있나?"
  "아뇨."
  "그럼 숯굴을 돌본 일은 있나? 커다란 소나무를 베어 본 일은?"
  잉그마르는 아주 침착하게  조용히 앉아 있었으나 테이블은 그의
손아귀에서 잇달아 부서져  내리는 소리를 냈다. 마침내  억센 잉그
마르도 그것을 눈치챘다.
  "아니, 잉그마르! 한번 더 혼내줘야겠군."
  그는 테이블 조각을 조금 집어 제자리에 맞추어 보았다.
  "개구장이 같으니! 이러려거든 장날에 돌아다니면서  요술장이 노
릇이나 해서 돈을 모으는 게 차라리 낫겠구나."
  그는 웃으면서 잉그마르의 어깨를 한번 툭 쳤다.
  "음, 너는 과연 훌륭한 선생이 되겠다."
  억센 잉그마르는 얼른  난로가로 되돌아가서 바이올린을 켜기 시
작했다. 그 연주는 이제 힘차고 활기가 넘쳤다. 그는 발장단을 맞추
며 춤추는 사람들을 숨가쁘게 몰아붙였다.
  "이건 잉그마르의 폴카다!  이 자리의 모든 사람들은  잉그마르를
위해 춤을 추는거다, 알겠나?"
  게르트루드와 군힐드, 이  아름다운 두 소녀는 물론  어느 춤이고
빠짐없이 추었다. 그러나 잉그마르는 별로 추지 않았다. 그는 방 한
쪽 옆에 비켜서서 늙은이들  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대부분
의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은 춤을  추다가도 그를 보면 마치  무슨
신비한 힘에 끌리듯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곤 했다.
  게르트루드는 잉그마르가 자기를  전혀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매우 비참한 기분이 되었다.
  '지금 저 사람은  자기는 위대한 잉그마르의 아들이고  나는 한낱
교장의 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녀는 뾰로통해져서는  자신이 그만한 일로  신경을 곧두세우고
있다는 것이 납득이  안 갔다. 춤을 추는 동안에 젊은이  몇 사람이
바람을 쐬려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칠흙같이 어두웠고, 밤공기는
폐부를 찌를 듯이 차가왔다. 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
았다. 누군가가 말했다.
  "좀더 머무는  게 좋을거야. 달도 곧  뜰테고. 이렇게 어두워서야
어디 갈 수가 있겠어?"
  잉그마르와 게르트루드도 문밖에  나와 서 있었다. 그때  억센 잉
그마르가 나와서 잉그마르를 끌었다.
  "가자, 보여줄 게 있다."
  그는 잉그마르의  손을 잡고 집에서 약간  떨어진 숲으로 들어갔
다.
  "여기 가만히 서서 아래를 내려다봐라."
  순간 잉그마르는 자신이  갈라진 낭떠러지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그 밑에는 허연 무엇이  어렴풋하게 빛나고 있었
다.
  "저건 랑그홀스 폭포지요?"
  잉그마르가 물었다. 억센 잉그마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런데 저런 폭포가 어떻게 이용되는지 아느냐?"
  "물레방아를 돌리는 데 쓰이겠지요."
  잠깐 생각 끝에 잉그마르가 대답했다.
  억센 잉그마르는 혼자 웃었다. 그는  기특하다는 듯이 잉그마르의
등을 몇 차례 치곤  옆구리까지 쿡 찔러 하마터면 잉그마르를 급류
속으로 떨어뜨릴 뻔했다.
  "그래, 누가 어디다가  물레방아를 놓겠느냐? 누가 돈을  벌어 잉
그마르 농장을 되찾겠느냔 말이다."
  그는 연신 킥킥대며 웃었다.
  "저도 알고 싶군요."
  억센 잉그마르는 가슴에 품고 있던 커다란 계획을 털어놓기 시작
했다. 잉그마르가 팀즈  할보르에게 권해서 이 폭포  밑에다 제재소
를 짓도록 한 다음에 그것을 빌린다는 것이었다.  여러해 전부터 품
고 있던 억센 잉그마르의 생각은 어떻게 해서든지 잉그마르 아들이
다시 자기  집에 되돌아갈 방법을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
다.
  잉그마르는 꼼짝도 하지 않고 허옇게 거품을 물고 흘러가는 거센
물결을 내려다보았다.
  "자, 이제 집에 돌아가서 춤을 추자."
  그러나 잉그마르는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얘가 정녕 잉그마르  집안의 사람이라면 당장 결론을  내리진 않
을게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잉그마르 혈통다운 행동
이지.'
  억센 잉그마르는 끈기있게 기다리며 생각했다.
  그들이 이렇게 한참을  서 있는데, 난데없이 날카롭고  거친 동물
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개가 짖는 소리 같았다.
  "저 소리가 들리냐, 잉그마르?"
  "네, 들립니다. 개 짖는 소리 같군요."
  그 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려왔다. 동물은 똑바로  오두막을 향해
달려오는 모양으로, 점점 가까와지는 듯했다. 억센 잉그마르가 잉그
마르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가자, 빨리! 되도록 빨리 집으로 들어가야 해."
  "왜 그러세요."
  놀란 잉그마르가 물었다.
  "얼른 돌아가자니까!"
  그들이 오두막을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을 때 그 울부짖는 소리
가 바로 뒤에 달라붙듯 불안하게 들려왔다.
  어떤 짐승이냐고 잉그마르가 몇 번이나 물었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 들어가기나 하라구!"
  억센 잉그마르는 고함을  치면서 잉그마르를 좁은 오솔길로 마구
밀어댔다. 집에 들어서자 그는 바깥문을 닫기 전에 일단 소리쳤다.
  "밖에 아무도 없나? 있거든 어서들 들어와!"
  그가 문을 열고 기다리는 동안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빨리, 빨리!"
  그는 발을 구르며 불안한 듯 안달을 했다.
  오두막 안에 있던 사람들도 갑작스런 소동으로 차츰 두려움을 느
꼈다. 그들은 무슨 영문인가를  알고 싶었다. 억센 잉그마르는 사람
들을 확인하고 나자 얼른 문을 닫고 빗장을 질렀다.
  "모두들 미쳤나? 이리 소리를 듣고도 밖에서 어슬렁거리다니!"
  이제 그 소리는 바로 오두막 문전에서 나는  듯했다. 마치 개들이
괴성을 지르며 집 둘레를 빙빙 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냥 개가 아닙니까?"
  누군가가 물었다.
  "그런 생각이 들거든 직접 나가서 한번 불러 보게, 닐슨 얀손"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쉴 새 없는 동물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
울였다. 무시무시하고 기분 나쁜  그런 소리였다. 모두 바들바들 떨
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간 듯 새파랗게 질린 사람도 있었다. 확실히
그건 보통 개가 아니라 지옥에서 쫓겨난 악마인지도 모른다고 사람
들은 생각했다.
  움직이고 있는 것은  다만 몸집이 작은 늙은이뿐이었다.  우선 그
는 연기가 나가는 굴뚝 구멍을 막고 다음엔 하나하나 촛불을 꺼 나
갔다.
  "안 돼, 안 돼."
  여자들이 소리쳤다.
  "불을 끄지 마세요!"
  "참아요,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한 소녀가 억센 잉그마르를 붙잡고 물었다.
  "이리가 그렇게 위험해요?"
  "아니, 저것보다 그 뒤에 오는 게 위험해."
  "뒤에 오는 거라구요?"
  억센 잉그마르는 다시 한참을 귀기울이고 있다가 말했다.
  "자, 모두 꼼짝도 하지 말구 가만히 있어야 해"
  갑자기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이리 짖는 소리가  다시 오두막을
둘러싸는가 싶더니 차츰 사그라들면서 늪을 지나 골짜기의 저편 산
쪽으로 올라가는 듯했다. 그러자 불길한 정적이 덮쳐 왔다. 더는 참
을 수 없었는지 한 사나이가 말했다.
  "이리들은 이제 사라졌어요."
  억센 잉그마르는 아무말 없이 손을 들어 그 사나이의 입을 쳤다.
  아득하게 먼 크라크 산  꼭대기 쪽에서 찌르는 듯 날카로운 음향
이 울려왔다. 바람소리 같기도 했고, 뿔나팔소리  같기도 했다. 이따
금 길게  꼬리를 물고 드높아지는가 하면  신음처럼 낮아지고 혹은
쿵쿵 걸음을 옮기듯, 아니면 콧김을 불듯 하는 다양한 소리를 냈다.
  돌연, 그것은  끔찍한 신음소리와 더불어  산을 돌진해 내려왔다.
얼마 만에 그것이 산밑에 다다랐는지는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얼
마 만에 그것이 숲 기슭을 스쳐오고, 자신들의  머리 위로 밀려왔는
가 그들은 생생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지구의 껍질을
잡아 흔들며 지나가는 우뢰  같기도 하고 온 산이 꺼지는 굉음같기
도 했다. 그들의 바로 위에까지 왔다고 느껴졌을  때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귀를 막으며 고개를 박았다.
  '아.... 찌그러질 것 같아. 틀림없이, 우린 찌그러지고 있는거야.'
  그러나 그들이 느낀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악마의
대왕이 그의 권속을  이끌고 들이닥치지나 않았나 하는 공포감이었
다. 무엇보다 소름끼치는 것은 다른 소리 위에  들려오는 비명과 신
음소리였다. 그 속에는  흐느끼는 울음소리와 신음소리, 웃음소리와
부르짖음, 훌쩍거리는 소리와 꾸짖는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그들이
천둥 같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머리 위에 왔다고 느꼈을 때는 흐느
낌과 노호, 신음소리와 질주하는  소리, 뿔나팔소리와 불꽃 튀는 소
리, 비운에  빠진 요정들의 탄식하는  소리와 악마들의 비웃음소리,
거기에 퍼덕이는 거대한 날개  소리 따위가 한데 엉긴 소리처럼 여
겨졌다.
  그들은 수많은 지옥의 망령들이 그날밤 모조리 풀려 나와서 자기
들을 깔아뭉갠다고 생각했다. 대지는 흔들리고  오두막은 당장 뒹굴
듯이 들먹거렸다. 그것은  마치 야생의 말들이 지붕  위에서 날뛰는
것 같기도 하고, 신음하며 울부짖는 귀신이 창문  앞을 돌진해 가는
것 같기도 했으며, 부엉이나 박쥐 떼가 한꺼번에  날개를 굴뚝에 부
딪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누군가가 팔을  게르트루드의 허
리에 감아 그녀를  꿇어 앉혔다. 그리고 그녀는  잉그마르가 속삭이
는 소리를 들었다.
  "게르트루드, 우리 함께 하나님께 기도해."
  그때까지 게르트루드는 죽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토록 무서운
공포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난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아. 다만 악마들이 머리 위에 군림하는게
무섭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떨고  있었다. 그러나 잉그마르의  팔을
몸에 느끼는 순간,  게르트루드의 심장은 다시 고동치고  다리의 무
감각도 일시에  사라졌다. 그녀는 잉그마르에게  몸을 기댔다. 이제
조금도 두려운 게 없었다. 잉그마르 역시 공포를  느낀 것은 틀림없
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믿음직한 위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 모든  소리들이 사라졌다. 그저 희미한  반향만이 멀리
서 울려올 뿐이었다.  그것은 이리떼가 지나간 흔적을  따라 늪으로
내려가서 오르프 봉우리 저편에 있는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했
다.
  그러나 억센 잉그마르의 오두막 안에서는  여전히 정적이 흘렀다.
움직이는 사람도 없고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도 없어 마치 공포
가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만 같았다. 간혹 죽음 같은  정적을 깨
고 깊은 한숨소리만이 새어나올  뿐이었다. 오래, 아주 오랫동안 아
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벽에 기댄 채 또  어떤 사람은
긴 의자에 엎드린  채 그대로 있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룻바
닥에 꿇어 앉아  근심에 싸인 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모두 넋을
잃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방안의  많은 사람들은 회개를
하며 하나님에게 더욱 가까이 갈 것을 결심했다.
  '무엇인가 내 죄로 인해 이런 일이 일어난거다.'
  그들은 제각기 느꼈던 것이다.
  다만 게르트루드만이 '나는 잉그마르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늘 그의  곁에 있을테야. 그는 나에게 신뢰감을  주었어.' 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차츰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부옇게 트는 먼동의  빛이 오두막
안으로 스며들어 창백한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새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하더니 억센 잉그마르의 암소가 아침을 달라고 울기 시작
하고 고양이가 문간에 와서 야옹거렸다.
  해가 동쪽 산에서 고개를  내밀 때까지도 움직일 줄 모르던 사람
들이 해의 몸통이 드러나자 아무런 말도 없이,  인사조차 하지 않고
한명 한명 오두막을 빠져나갔다.
  집밖에서 그들은 지난밤의  비참한 흔적을 발견했다. 문  옆에 서
있던 커다란 소나무가  뿌리째 뽑혀 뒹굴고, 나뭇가지와  울타리 기
둥은 땅바닥으로  나가떨어졌으며, 부엉이와 박쥐들이 바람벽에  부
딪쳐 찢겨져 있었다.
  크라크 산 꼭대기로 통하는  넓은 길 양쪽에는 나무란 나무가 모
조리 넘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차마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어서
참담한 기분으로 마을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그날은 일요일이었으므로 아직도  잠자리에 누워 있는 사람도 많
았지만, 벌써  일어나서 소를  돌보는 사람이나 외출복을  집밖으로
들고 나와 바람에 말리며 손질을 하는 노인도  있었다. 어떤 집에서
는 부부와 아이들이 모두  휴일의 외출복을 입고 문을 나서기도 했
다. 간밤에 숲에서 일어난 무서운 사건은 조금도 모르고, 작기 차분
하게 제 일을 보러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여간 큰 위안이 아니었
다.
  춤을 추러 갔다가 큰  재난을 당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은 이제 겨
우 강가에 닿았다. 거기는 집이 몇 채 서 있지 않았다. 이윽고 마을
에 들어서자 그들은 낯익은 교회와 그 밖의 모든 것을 보며 기뻐했
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이  새삼 마음을 흡족케 했던 것이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가게 앞의 간판, 우체국의  뿔나팔, 여관집
주인의 개,  그리고 자그마한 버드베리  나무가 밤새 꽃이 활짝  핀
것을 보는 것도  그들에겐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목사관  화원의 푸
른 잔디도 간밤 늦게 싹이 튼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집에 닿을 때까지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
다.
  게르트루드가 학교 계단에 섰을 때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 다시는 춤을 추지 않을테야, 잉그마르, 어젯밤으로 그건 마지
막이야."
  잉그마르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래, 너는 목사님이 돼야 해, 만일 목사님이 못 된다면 학교 선
생님은 꼭 돼야 해.  이 세상엔 싸워야 할 악이 너무 많다는  걸 깨
달았으니까."
  잉그마르는 똑바로 게르트루드를 쳐다보았다.
  "그 소리가 게르트루드에겐 뭐라고 말했지?"
  그가 물었다.
  "내가 죄악의  덫에 걸렸다구, 춤을 좋아해서  악마가 달려들었다
고 그랬어."
  "나는.... 잉그마르손 집안의 조상들이 일제히 나를 윽박지르고 저
주하는 것만 같았지.  그건 내가 뭔가 농부  이상의 것을 생각하고,
당을 갈거나 숲속에서 일하는  것 대신 다른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
기 때문인 것 같아."
  잉그마르는 침울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게르트루드가 안으로 들
어서려다 말고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영원의 시간에 서서

  제2부 위대한 잉그마르

     어떤 기적

  억센 잉그마르네 오두막에서 댄스 파티가 있던 날  밤, 팀즈 할보
르는 집에 없었고 그의  아내 카린만이 거실 건너편의 조그마한 방
에서 혼자 자고 있었다.
  밤중에 카린은 무서운 꿈을 꾸었다.  에로프가 되살아나 어처구니
없는 난동을 피워대는  꿈이었다. 그녀는 그가 옆방에서  술잔을 부
딪치기도 하고, 커다랗게 웃어대면서 음탕한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녀는 꿈속에서 생각했다.
  '에로프와 술친구들이  점점 더  왁자지껄하게 소란을 피우는  걸
보니 조금 있으면 테이블이나  의자를 다 때려부수겠구나. 아, 미칠
것만 같아'
  카린의 귀엔 마구  요란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카린은  그 소리에
퍼뜩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눈을 뜬 뒤에도 그  소리가 계
속되고 있었다. 지축이 흔들리고,  창문은 신경질적으로 덜컹댔으며,
지붕의 기왓장이 들썩거리는가 하면 박공 옆에 있는 늙은 배나무는
그 굵은 가지로 집을 후려쳤다. 마치 지구의 종말이라도 온 듯했다.
소음이 막 절정에 달했을 때,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쨍그렁하고 들
려왔다. 거센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방안으로 확 몰려들었다. 순간
카린의 귓전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꿈속에서 들은  것과 똑
같은 웃음소리였다.  그녀는 이제 죽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무서운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심장은 멎고  사지는
감각을 잃어 얼음처럼 차가와졌다.
  갑자기 소음이 멎었다.  몹시 차가운 밤바람이 방안으로  불어 들
어오고 있었으므로 카린은  일어나서 깨진 창문에다 뭔가 갖다대야
만 했다. 그녀는  사람을 부르는 대신 다시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도저히 한 발자국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헝크러
진 머리에 손을 얹었다.
  '기분이 좀 가라앉으면 걸을 수 있을 거야'
  잠시 후 그녀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
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그만  침대에서 마룻바닥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아침이 되어 집안의  사람들이 일어났고 곧 의사가  달려왔다. 의
사는 진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무엇이 카린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병에 걸린  것 같지도 않았고  분명 사지가 마비된 것도  아니었다.
무슨 일에 몹시 놀라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었다.
  "곧 괜찮아질 겁니다."
  의사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카린은  의사의 말을 유심히  듣기는
했지만 아무 말도 꺼내진 않았다. 그녀는 그날  밤 분명히 에로프가
집안에 있었다는  것과 그녀가 받은 쇼크의  원인도 그에게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 충격에서 도저히 회복될  수 없으리라는 슬
픈 예감을 갖게 되었다.
  아침 한나절 그녀는  줄곧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하나님이 어째서
자기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그 까닭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
나 아무리 자기 양심에 비추어 보아도 뚜렷한 까닭을 찾을 수가 없
었다.
  '이건 너무 불공평한 처사야.'
  오후에 그녀는 부축을  받으며 스톰 선생의 전도관으로  갔다. 마
침 다그손이라는 설교자가 사회를 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 벌을 받게 되었는가를 듣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다그손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화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날 오
후처럼 많은 청중들이 모인 적은 없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
여들어서는 간밤에 억센  잉그마르의 오두막에서 일어난 일들을 떠
들썩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공포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 공포를 물리쳐  줄 만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
꺼번에 몰려나온 것이었다.  청중의 4분의 1이 전도관  안으로 들어
가지 못한  채 열린 창문을 통해서나마  다그손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는  신도들이 자기에게 무슨 얘기를  원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먼저 간담이 서늘해지는 형용사를  써가며 지옥
과 마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둠을 타고  사람들의 영
혼을 움켜잡고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려 하는 악마의 형상을 청
중들의 가슴속에 생생하게 상기시켰다. 사람들은  위협을 느껴 몸서
리를 쳤다. 마치  그날 밤의 짐승들처럼 몰려나와서  괴로움에 시달
리며 함정 속을 헤매는 기분이 되었다.
  다그손의 목소리는 돌풍처럼  전도관 안을 휘몰아치며 그들의 마
음을 흔들어 놓았고, 그의  말은 혓바닥에서 불꽃을 뿜었다. 사람들
은 악마와 불과 연기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장 지옥에
라도 떨어진 듯 호흡이 가빠오고, 온 몸이 뜨거워지는가 하면, 머리
털이 불길에 깡그리  타버리는 것만 같았다. 다그손은  사람들을 지
옥 같은 시간 속으로 몰아넣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암담함 불길
과 피해갈  수 없는 파멸만을  볼 뿐이었다. 이렇게 절망감  속에서
허덕이고 있을 대 다그손은  드디어 구원의 손길을 뻗어 숲속의 녹
지대로 이끌어갔다. 거기는 평화롭고 시원하고 안전했으며, 꽃이 만
발한 목장에는 쫓겨서 몰려오는 남녀들을 향해 예수가 양팔을 벌리
고 앉아  있는 듯했다. 이제  모든 위험은 사라지고 그들은  영원히
아무런 고통도 박해도 받지 않을 것 같았다.
  "만일 예수의 발  아래 꿇어 엎드리기만 한다면 당신들의 마음속
엔 커다란 평화와 안정이 찾아오고, 이제 세상의  함정 따위엔 위협
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다그손이 설교를 마치자  전도관 안엔 커다란 감동이  일었고, 많
은 사람들이  그의 앞으로 뛰어나와 얼굴을  눈물로 적시며 경의를
표했다. 또한 그의  말이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하여 참된  신앙의 길
을 찾게 되었다고도 말했다.
  카린은 줄곧 목 박힌 듯 앉아 자기에겐 아무런 감동의 여지를 주
지 못한 그를 원망이라도 하는 양 꼿꼿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고 있
었다. 그때 밖으로부터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빵 대신 돌을 주는  자에게 화 있으라! 빵 대신 돌을  주는 자에
게 화 있으라!"
  사람들이 우르르 소리나는 곳으로 달려나갔다.  카린은 움직일 수
가 없어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는데, 잠시 후  그녀의 집안사람
들이 돌아와서 구체적인 상황을 얘기해 주었다.
  고함의 주인공은 키가 훤칠하게 크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낯선 사
나이로, 설교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과 마
차를 타고 길을  달려오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들
이 마차를  세워놓고 설교 소리를 듣다가  자리를 뜨면서 사나이가
그렇게 외치고 갔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과거에  금발의 여자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남자는  분명 그녀의 남편인데, 어쩜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한 억센 잉그마르의 딸네 부부 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
다. 평범한 농부  옷차림을 한 젊은 아가씨의 모습만 보아  왔던 사
람이 도회에서 세련된 차림으로 성숙해서 돌아온 여자를 한눈에 알
아보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그손의 설교에 관한 카린의 의견은 그 낯선 사나이와 일맥상통
하는 데가 있었다. 카린은 두번 다시 전도관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여름, 외부에서 침례교도가  들어오자 마을에서도 침례의식을
행하거나 개혁을 주장하는 모임이 있을  때는 마찬가지였다. 마을은
아제 종교적 혁신이  일어나고 있었다. 모든 집회에  각성과 변화가
생겼다. 사람들은 저마다 구하던 것을 찾은 것같이  보였으나 단 한
사람 카린만은  많은 설교들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 위안의 말을
듣지 못한 채였다.

  빌게르 랄손이라는 대장장이가  한길 가에 대장간을 경영하고 있
었다. 공장은 낮은 문이 하나에다 창문 대신의  개폐문이 하나 있을
뿐으로 매우 좁고 어두웠다. 그 안에서 칼을  만들거나 자물통을 고
치고 썰매나 달구지 바퀴에  쇠테를 끼우는 것이 보통 빌게르 랄손
의 일이었다. 달리 할일이 없을 때는 못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저녁, 일이 한꺼번에 몰려  대장간이 무척 바
빴다. 빌게르 랄손은  모루 앞의 한쪽에 서서  못대가리를 납작하게
만들고 있었다. 맏아들은 다른 모루에다  쇠몽둥이를 달구어 두들기
기도 하고 굵은 쇠못을 자르기도 했다. 둘째 아들은 풀무질을, 셋째
아들은 풀무에 석탄을 나르거나 쇠붙이를 뒤집는 일을 하다가 허옇
게 변하면 아버지에게 가져다 놓기도 했다. 넷째  아들은 아직 일곱
살이 채 안 되었지만 완성된 못을 모아 물통에 던져 넣었다가 나중
에 꺼내어 한 다발씩 묶었다.
  그들이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웬 낯선 사나이가 문 앞에 와
서 섰다. 훤칠하게  큰 키에 까무잡잡한 얼굴을 한 그는  안을 들여
다보기 위해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굽혀야 했다.  빌게르
랄손은 일손을 멈추고 눈을 들어 무슨 볼일이 있냐는 듯 사내를 쳐
다보았다.
  "아니, 제가 들여다보더라도  개의치 마십시오, 특별한 볼일이 있
는 건 아니니가요. 저도 젊었을 때 대장장이였기  때문에 대장간 앞
을 지나자면  저절로 걸음이  멈춰지고, 번번이 구경하고픈  충동을
느낀답니다."
  빌게르 랄손은  그가 진짜 대장장이다운 억센  손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곧 그의 이름과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사나이는 망
설임 없이 대답했지만  그의 신분은 밝히지 않았다.  빌게르는 그가
총명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느껴져, 공장을  두루 구경시키고는 함께
밖으로 나가서 네 명의 아들들을 자랑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 일을 거들 수 없었을 때는 여간 힘든 게 아
니었지요. 지금은 모두들 열심히 도와줘서  모든 일이 수월해졌답니
다. 2년쯤 지나면 한 밑천 모으게 될 것 같구료."
  사나이는 엷은 미소를 띠며 빌게르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도울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억센  손을 발게르의
어깨에 얹고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자제분들한테서 그렇게 물질적인  면에서 도움을 얻고 계시다면
정신적인 것도 자제분들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할 수 있지 않겠습니
까?"
  빌게르는 이 말에 의아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 이 얘기가 당신에겐 좀 생소하게 들리는 모양이군요. 다음에
뵐 때까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사나이는 야릇한 웃음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가 가버리자 빌게르
랄손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공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며칠  동안이나 낯선 사나이의 질문에  온통 정신을 뺏겨야
했다.
  '무슨 연유로 그런  말을 했을까. 뭔가 내막이 있는  모양인데, 도
대체 뭐가 뭔지 모를 일이야.'

  다음날 팀즈 할보르의 옛 가게에서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다. 가
게는 그가 결혼하면서 동서 브레트  군네르에게 넘겨주었는데, 그날
군네르는 외출하고 아내  브리타 잉그마르손 혼자서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브리타는  그녀의 어머니인,  '위대한' 잉그마르의 아름다운
아내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인데, 그녀는 어머니를  닮아 잉그마르 농
장에서 가장 미인이라는  평판이 나 있었다. 게다가  건실하고 정직
하기로도 가족의 그 누구 못지 않았다.
  군네르가 집에 없으면 브리타는 언제나 자기 방식대로 장사를 했
다. 가령은 늙은  펠트 중사가 거나하게 취하여  비틀비틀 찾아와서
맥주를 한 병 달라고  한다면 그녀는 언제나 냉정하게 거절해 버리
는 것이었다. 또한  콜뵤른의 레나가 찾아와서 고급  부로우치를 사
려고 할 때는  부로우치 대신 몇 파운드의  귀리 가루를 사도록 했
다. 농가의  아낙네가 싸구려  천이라도 사려고 할라치면  돌아가서
분에 맞게 베틀로 질긴 천을 짜 입으라며  타일러 보냈다. 브리타가
가게를 보고 있을 때만큼은 아이들조차 군것질을 하려고 가게를 찾
는다는 것은 감히 있을 수 없는 일로 되어 버렸다.
  아무튼 그날은 가게에 손님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몇 시간을 홀
로 앉아 하릴없이  허공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눈동자에 어두운
절망을 가득 담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밧줄을 한 가닥 꺼내 조그만
발판과 함께 가게 뒷방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발판  위로 올라가 천
장에 붙어 있는 고리에다  밧줄을 매고 한쪽 끝에 올가미를 만들고
나서 문득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면서 웬  사내가 불쑥 들어섰다. 그는 가게에
들어왔다가 아무도  없으므로 계산대 뒤로 와서  옆방의 문을 열어
본 것이 분명했다.
  막 발판에 올라섰던  브리타는 낭패한 얼굴로 천천히 발판으로부
터 내려섰다. 사나이는  아무말도 없이 물건이 진열되어  있는 곳으
로 걸어나갔다. 브리타도 느릿느릿  뒤를 따랐다. 브리타는 이 사이
사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곱슬머리에  구레나룻을 기르고 날
카로운 눈에 손이  크고 억새 보이는 그는  옷은 잘 차려 입었지만
웬지 노동자  같은 느낌이었다. 문  옆의 다 찌그러져 가는  의자에
앉아 그는 브리타를 그윽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브리타는 그에게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지도 못한 채 계산대 뒤
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다만  그가 어서 조용히 나가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사나이는 그저 뚫어져라 그녀를 주시하고만 있었다.
브리타는 그의 시선에 묶여 버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쩌자는건가요. 나를 구하려는  생각 때문이라면 거기 마음대로
앉아 계시지요. 하지만 난 이미 틀렸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 동안에
도 사나이는 눈길 한번 돌리지 않았다.
  '아, 나는 정말 장사하는 게 싫단 말이야.'
  브리타는 할보르에게서 가게를  물려 받을 때까지만 해도 군네르
와 함께 너무도 행복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가게
를 인수하기  전까지는 한 마디도  언짢은 말이 오간 적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가게를 맡으면서부터 모든 일들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
이다. 브리타는 브리타대로 장사에  관한 자기 방식을 주장했고, 군
네르는 그러한  브리타에게 불만을  품었다. 군네르가 물건을  파는
데만 급급한 데 반해 브리타는 양심적인 장사를 내세워 술 취한 사
람에겐 더 이상 술을  내어주지 않는 등 어처구니없는 장사를 하기
때문이었다. 서로 양보할 낌새도 없이 싸움은 그칠 날이 없었다.
  '그이는 이제 나를 좋아하지 않아'
  브리타는 생각 끝에 눈을 크게 뜨고 낯선 사나이를 쏘아보았다.
  '당신이 알는지  모르지만 나의  남편은 집달리를 시켜서  가난한
사람들의 집이며  땅이며 가재도구들을 차압하지요. 그들에게는  단
한 마리밖에 없는 황소와  양조차 빼앗아대는 남편 때문에 남 보기
부끄러워서 도저히 살아갈 양조차 빼앗아대는 남편 때문에 남 보기
부끄러워서 도저히 살아갈  재간이 없답니다. 이런 것이  좋은 결과
는 아니겠지만.... 제발  가 주세요. 내가 모든 일을 다시  보지 않도
록 어서 결말짓게 도와주세요.'
  브리타는 차츰  마음이 가라앉았다.  평정을 되찾은 그녀는  돌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계속 자기를 지켜보며  죽을 수 없게
해준 낯선 사람에 대한 감동의 눈물이었다.
  사나이는 브리타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되자 문간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녀를 돌아다보며 굵직한 소리로 말했다.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올바른 삶이 머지 않았소."
  그리고 그는 가게를 떠났다. 그의 묵직한 발자국  소리를 점점 멀
어져갈 때  브리타는 얼른 방으로 뛰어들어가  밧줄을 끌러 발판과
함께 다시 들고 나왔다.
  그녀는 꼬박 두  시간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동안은  모든 것
들이 어둠이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그녀는 길을  잃고 방황하며 한
발자국 떼어 놓을 때마다 늪에 빠지면 어쩌나,  구렁텅이에 굴러 떨
어지면 어쩌나,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오랫동안 해
메이던 그녀를 붙잡아 위험한 방황을 계속하지 않도록 일러준 것이
다. 이제 브리타는  조용히 앉아 밤이 새기를,  밝은 아침이 오기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억센 잉그마르에게는  안나 리자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시카고에서 존  헤르굼이라는 스웨덴  사람과 결혼해 살고  있었다.
헤르굼은 특수한 신앙과 교리를 가진 소규모 광적 종교단체의 지도
자였다. 억센 잉그마르의  집에서 댄스 파티가 있던  다음날 헤르굼
은 자기의 늙은 장인을 만나러 잉그마르의 오두막에 나타났다.
  헤르굼은 마을을 오랫동안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길
에서 만나는  어는 누구하고든  쉽게 친해졌는데, 처음엔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도 헤어질 때면 언제나 자신의 커다란 손을 상
대의 어깨에 얹고 몇  마디씩 위로나 충고의 말을 지껄이는 탓이기
도 했다.
  억센 잉그마르는 좀처럼  사위와 만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해 여름, 다시  잉그마르 농장으로 돌아온 잉그마르와  함께 폭포
의 급류 아래에다 제재소를 세우려고 거기서 일하느라 여념이 없었
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제재소가 완성되고  통나무가 기계톱에 썰
려 하얀 널판지로 변모하는 첫 순간이 무엇보다 기다려지는 대망의
날이었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일에서  돌아오던 억센 잉그마르는 딸  안나
리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움찔 놀라면서 그를 피하려는  기색이 역
력했다. 그것을 눈치챈 억센 잉그마르는 필시 집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으리라는 생각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오두막에  다다랐을 때 그
는 걸음을 멈추고  양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오랫동안 돌봐 왔던,
제 몸보다도 소중히 했던  장미 나무가 베어진 채 아무렇게나 나뒹
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사위의 것이었다.  사위는 늘 그
나무를 못마땅해 했었다.
  억센 잉그마르는 들고  있던 도끼자루를 힘주어 움켜쥐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헤르굼이 성서를 펼쳐  놓고 앉아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길로 억센  잉그마르를 힐끗 넘겨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처박고 소리 높여 성격 책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너희들, 나무와 돌을 받들어 이방인같이  되고 여러 나라의 종족
처럼 되고자 한다면,  너희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은  반드시 이
룩될 수  없느니라, 주 여호와  말씀하시기를, 나는 살리라,  반드시
억센 손을 가진 팔을 뻗어 노여움으로 더불어 너희를 다스리리라"
  억센 잉그마르는 말없이  발길을 돌려 오두막을 빠져  나왔다. 그
는 그날밤 헛간에서 잤다. 이튿날 그와 잉그마르는  숲으로 가서 숯
을 굽고 나무를 베었다. 그들은 겨우내 숲에서 머물기로 했다.
  헤르굼도 몇  번 기도회 같은  데서 설교를 하였다. 그는  자기가
말하려는 요점을  들어 번번이 그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교임을
주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그손처럼 화술이 좋지  못하여 그
를 따라  개종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바깥에서 그를  만나
몇 마디씩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다소 기대를 가졌지만 그의 긴 설
교를 들을라치면 언제나  짜임새 없고 지리멸렬한 이야기임을 재확
인하곤 했다.
  여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카린은 자기의 건강  상태에 대해
매우 절망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와도 얘기하길  싫어했
다. 온종일  꼼짝 않고 의자에  앉아 있는 날들만 지겹도록  되풀이
되었다. 이제는 설교를 들으러  나가는 일도 없었다. 하나님이 원하
시는 길을  걷기만 하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아버지의 말에서도
더 이상 진리를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할보르는 그런 카린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방법이  없었다. 그는
아내에게 새로운 설교자와 이야기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넌지시 물
어보았으나 그녀는 한 마디로 딱 잘라 거절했다.
  어느 일요일, 카린은 거실의 창문 앞에 앉아 있었다. 안식일의 적
막이 온 농장에 스며 있고 졸음에 겨워 자꾸만 눈이 감기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엷은 잠에 젖어 있던  그녀는 창
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핏 눈을 떴다.  누구의 목소린지 짐작
할 수는 없었지만  힘차고 굵직한,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말소리였다.
  "여태까지 많은 학자들도  실패를 했는데 무식하기 짝이 없는 나
같은 대장장이가 진리를  발견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가당찮은 얘
기라고 치부해 버리리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소."
  그 목소리는 말했다.
  "난 어째서  당신이 그것을 확신하고 있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군요."
  할보르의 음성이었다.
  '헤르굼과 할보르야'
  그녀는 창문을 닫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당신도 아다시피"
  헤르굼이 말을 이었다.
  "누군가가 우리의 오른  뺨을 친다면 왼쪽 뺨마저 대주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을  겁니다. 그런 별난 일을 모두 지킬  수는 없지
요. 만일 당신이  방어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런  당신을 얕잡아
보고 농장이건 식량이건 간에 모조리 빼앗으려 들테니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서 내  생각으론 주께서 그 말씀에다  무슨 의미를 둔 것이
아니고 무심코 뱉은 말씀 같단 말이지요."
  "글쎄요, 알 수가 없군요."
  "그래서, 당신이 생각해 볼 일이 있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로 인해  거듭났다고들 생각하고 있지요.  요즘에는 그래요, 훔치는
자도 없고 살인하는 자도 없고 약한 자를  학대하는 자도 없습니다.
아무도 이웃을 미워하거나 박해하지도 않습니다.  참으로 신성한 종
교 밑에서 어는 누구도 나쁜 짓을 하겠다는 생각이 일어날 리가 없
겠지요."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점이 더 많지요."
  할보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맥없이 말했다.
  "지금 당신이 만약에  탈곡기가 고장이 있다면 그 원인을 찾아내
려고 쉴 틈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
하는 데는 왜 어려움에 맞닥뜨리게 되는가에 대한 원인은 찾으려고
하지 않더군요. 그리스도교  그 자체에 무슨 결합이  있는지조차 생
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결함이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요?"
  "물론 처음에는  신성했지요.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기계라도 톱
니바퀴 하나만 어긋나 버리면 만사가 부질없게 됩니다."
  말을 찾듯 잠시 입을 다물었던 헤르굼이 다시 계속했다.
  "몇해 전 일입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교리를 통해  참되게 살
아 보려고 마음먹었지요.  나는 그때 공장에서 일을  했었는데 나를
파악한 동료 직공들은  모든 일을 나에게 떠맡기곤  했습니다. 저를
만만한 인간으로 보았던거죠. 그런데다가 나는  동료들 중 누군가의
죄를 뒤집어쓰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보답까지 받았습니다.  여지없
는 감옥행이었지요"
  "그렇게까지 나쁜 인간은 있을 수 없을텐데."
  할보르는 여전히 심드렁하게 지껄였다.
  "차라리 감옥에  있는 편이 제겐 즐거움이었답니다.  거기서는 아
무런 방해나 귀찮은  일이 없었거든요. 나는 혼자서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지요. 그런데 며칠 안 가서  회의가 생기
기 시작하더군요. 하나님이 세상에다 많은 사람을 둔  것은 서로 위
로하며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자각이  생긴겁니다. 그리
고 문득 떠오른  것은, 기독교를 멸망시키려고 마귀가  성경에서 무
엇인가를 뽑아 없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어요."
  "마귀가 어떻게 그런 일을...."
  "마귀가 뽑아버린  귀절은 '너희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는 동
포들에게 서로 도움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
  할보르는 시덥잖다는 듯  대답이 없었다. 창문 앞에서  문을 닫으
려다 말고 그들의 얘기를 계속 듣고 있던 카린은 헤르굼의 말에 고
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감옥에서 풀려나오자 옛 친구  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내
가 올바르게 살도록  도와달라고 했지요. 그래 둘이  마음을 모으니
까 훨씬 수월해지더군요.  점점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불어나서 지
금은 30명 남짓 되는데 모두 시카고의 한집에서  살고 있답니다. 우
리는 모든 주어지는  것들을 똑같이 나누지요. 그리스도와  같이 서
로를 아끼면서 남의 친절을 악용하거나 유순한 자라고 해서 짓밟거
나 하는 일은 절대 없지요."
  할보르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헤르굼은 납득이 갈 때까지
계속 지껄여댔다.
  "무슨 큰일을 하려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
람과 손을 잡지요. 당신의 경우 이 큰 농장을  혼자서 돌볼 수 없을
테고, 또는 공장을  하나 시작한다고 해도 협력회사의  도움이나 많
은 사람들의 협조가  필요하게 되겠지요. 하물며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기독교인다운  생활이 혼자서 가능할  것 같습니까? 당신은
지레 포기해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시카고의 친구들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조직한 조그마한  사회는 하늘에서 내
려준 새로운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충분히  갖고 있
지요. 하늘에서 설령의 힘이  우리 머리에 내려온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언하는 사
람, 병자를 고치는 사람...."
  "당신도 병자를 고칠 수 있습니까?"
  할보르가 헤르굼의 말을 자르며 성급하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능하지요."
  할보르는 잠깐 망설였다. 다른 무엇을 믿는다는 건  그리 쉬운 일
이 아닌 것이다.
  "아무튼 나는 확신합니다. 할보르. 머지 않아 당신께선 우리 예루
살렘의 번성을 적극 지지하게 될겁니다."
  갈등하고 있는 할보르를 주시하며 헤르굼이 그 특유의 묵중한 음
성으로 단언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카린은  헤르굼이 작별 인사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 문이  열리며 할보르가 들어왔다. 할보르는 창
문을 열어 놓고 그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카린을 바라보았다.
  "헤르굼이 한 말 모두 들었소?"
  "네."
  "그 사람을 믿으면 병이 낫는다는 말도?"
  카린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헤르굼의 말에 지금껏  들어왔던
그 누구의 말보다 진한 감동을 느꼈다. 그의  말엔 건전하고 실제적
인 것이 있어서  이것이 그녀의 지식에 호소했으며,  거기에는 일과
봉사가 따랐다. 또한  그녀에게 있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주정주
의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설교자와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
도 맺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신앙만으로 충분해요."
  그녀가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2주일쯤 지난 어느  날 카린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  집 둘레에는
가을 바람이 서늘하게 일렁이고 난로에선 타닥타닥 장작이 타고 있
었다. 방에는 그녀와  어린 계집아이만이 함께 있었는데  아이는 이
제 막 돐이 지났고 겨우 걸음마를 할  정도였다. 어린아이는 카린의
발치에 앉아 놀고 있었다.
  문득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키가 크고  얼굴이 검은 편인 웬
사나이가 들어왔다. 눈매가 날카롭고  손이 억새 보였다. 카린은 대
뜸 그가 헤르굼임을 알 수 있었다.
  "할보르 씨를 뵈러 왔는데요."
  귀 익은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카린은 남편이  시내의 집회에 참
석하러 갔으며 곧 올라올거라고 대답했다. 헤르굼이 의자에 앉았다.
그는 힐끔힐끔 카린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벌써 반년째예요, 다리를 쓰지 못하지요."
  "사실 부인을 위해 기도를 드릴 참으로 왔습니다만."
  카린은 몸을 움츠렸다.
  "주의 은혜로 제가 환자를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들으셨겠지요?"
  카린이 그를 의심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저를 생각해 주시는  것은 참으로 감사하지만 그런 일은 믿어지
지 않는군요. 저는 쉽게 신앙을 바꾸는 성격이 못 되거든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선 곧 부인을 구원하시리라 믿습니다. 부인께
선 언제나 올바른 삶을 살아가길 원하시니까요."
  "하나님은 저를 버리셨는걸요."
  "카린 부인은 왜 이런 시련이 찾아왔는가 깊이 반성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카린은 또  한번 몸을  움츠렸다. 헤르굼은 일어서서  카린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그 묵직한 손을 그녀의 머리에 얹고 물었다.
  "부인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까?"
  카린이 그를 뿌리쳤다. 헤르굼이야말로 자기  과신이 대단한 사람
이라는 생각이 그녀의 속을 뒤틀리게 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의 손길을 뿌리쳐선 안  됩니다. 감사하게
생각하셔야지요."
  그가 문간 쪽으로 물러서서 큰소리와 말했다.
  "그렇겠지요."
  카린이 비양거렸다.
  "하나님이 보내 주시는 거라면 뭐든지 달게 받아야겠지요."
  "명심하십시오. 오늘 구원의 손길이 당신에게 내려집니다."
  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가 이런 병에 걸린  것이 헤르굼에
게 기적을 행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처럼 느껴져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구원을 받을 때 저를 기억하십시오!"
  헤르굼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린은 꼿꼿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요즘엔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떠벌이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지'
  그때였다. 카린의 딸아이가 일어서서는 위태롭게  난로 쪽으로 걸
어갔다. 벌겋게  피어오르는 불꽃이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이다. 아이는 즐거운 듯 소리를 내면서 아장아장  불을 향해 걸어
나갔다. 카린은 아이를 불렀다.
  "이리와, 이리 오라니까!"
  아이는 어느 새  난로가에 기어오르려 했다. 두  번이나 굴러떨어
진 끝에 아이는  마침내 난로 가장자리에 올라섰다.  카린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사람을 불렀다. 그러나 집안엔 아무도  있을 턱이 없
었다. 아이가 깔깔거리며 불 위로  몸을 숙였다. 그때 불 붙은 장작
개비 하나가  아이에게로 굴러왔다. 카린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아이를 안아들고 옷에 붙은  불똥을 털어대며 다친 데가 없음을 확
인할 때까지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는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
다.
  '아!'
  카린은 문득  자기의 다리를 내려다보곤 억제할  수 없는 환희에
휩싸였다. 일찌기 느껴 보지 못한 너무나 큰 마음의 동요였다. 그녀
는 눈물이 날 만큼 행복감에 잠겼다.

  그해 가을, 헤르굼은  자주 억센 잉그마르의 오두막  문전에 서서
주위의 풍경에 넋을  빼앗기곤 했다. 마을은 나날이  아름다와져 갔
고, 주변은 온통  황금빛에다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화려한 빨강이
나 눈부신  노랑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일대의 수풀 지대는  산들
바람 속에서  갸냘프게 떨며  환상적으로 빛났다. 스웨덴의  소박한
농촌 풍경은 이렇듯 찬란한 광휘 속에서 몸을 사르고 있었다.
  헤르굼은 경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때야,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내실.... 그 동안 뿌린 진리의 씨앗
을 거둬들일 때가 머지 않았어. 오늘일지도 모르지.'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팀즈 할보르가 억센  잉그마르의 오두막을
찾아와 헤르굼 부처를 잉그마르 농장에 초대했다.
  헤르굼과 안나  리자가 도착했을 때 할보르의  집안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집  둘레에 떨어진  자작나무 고목의 낙엽은  한쪽으로
깨끗이 쓸어모아져 있었고,  평상시엔 늘 마당에 널부러져  있던 달
구지며 농기구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손님이 무척 많은가본데?'
  안나 리자는 생각했다.
  거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엄숙하게 헤르굼 부부를 기
다리고 있었다.  마을에서 내노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헤
르굼이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륭 비오른 오라프손과 그의 아내
말타 잉그마르손, 그리고 브레트  군네르와 그의 아내였다. 그 다음
으로 크리스텔 랄손과 이스라엘 토마손의 두 내외로,  이 모두가 잉
그마르손 집안 사람들이었다. 그는 또 헤이크 마츠  에릭손과 그 아
들 가브리엘, 시 의원의  딸 군힐드,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을 보았
는데 모두 20명 남짓했다.
  파티가 끝나고 안나와  헤르굼이 돌아가려고 사람들과 인사를 마
치자 팀즈 할보르가 입을 열었다.
  "오늘 모인 사람들은 여름 내내 헤르굼 씨가 한 말들을 심각하게
생각해 봤습니다. 만일  헤르굼 씨가 우리를 도우실  생각이 있으시
다면 그 뒤를 기꺼이 따를 작정입니다."
  다음날 하나의 새로운  종파가 잉그마르 농장에 생겨났다는 소식
이 순식간에 온 마을에 퍼졌다. 사람들에게 이  종파는 기독교의 원
리를 구현하는 유일한 종교라고 그렇게 전해져 갔다.

  봄이 되어 대지의 눈이 완전히 녹자, 겨우내  산속에서 나무를 베
고 숯을 굽던 억센 잉그마르와 잉그마르는 마을로 내려와서 제재소
를 시작하기로 했다.  오랫만에 평지를 밟아 보는  잉그마르는 마치
굴에서 나온 곰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따가운  햇빛에 쉽게 익숙해
지지 않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거리의  소음과 사람들의 말소리도
견딜 수가 없었고, 어수선한 농장 분위기도 그의  귀를 피곤하게 했
다. 그러나 동시에 즐거움도  있었다. 모처럼 푹신한 침대에서 자는
것도 그렇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신선한  기쁨이었다. 무엇보
다도 자기를 유쾌하게  해주려고 마음써주는 카린과의 시간도 더할
수 없는 행복감을 자아내게 했다. 그녀는 동생을  위해 새옷을 장만
했으며, 대로는 부엌에  들어가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를  다루듯 맛
있는 간식을 내다주기도  했다. 잉그마르가 숲에 들어가  있는 동안
집안에선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고 카린과 할보르는 크나큰 행복에
젖어 있었다. 잉그마르는  헤르굼에 대한 막연한 소문이  이 집안에
서 확실한 증거로 나타났음을 알았다.
  "너도 우리 모임에 들어오리라 믿어."
  카린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녀와 할보르는 친구들과  함께 하
나님의 길을 걷기 위해 서로 돕고 애쓰며 나날을 보낸다고도 했다.
  "겨울 내내 나는 네가  집에 돌아와 하루라도 빨리 이 기쁨을 나
눌 수 있길 얼마나 기도했는지 아니?"
  카린이 말을 이었다.
  "요즘은 꼭 천국에라도 있는 기분이야."

  잉그마르는 헤르굼이  아직도 이 마을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기쁘다고 말했다. 지난 여름,  헤르굼은 가끔 제재소에 들러 잉그마
르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으므로 두 사람은 제법 친한 벗이 되어 있
었다. 잉그마르도 그를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멋진 사나이
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사내답고 신념이 굳으며 의지가  강한 사람
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다.  이따금 제재소 일이 정신없이  바쁠
때면 헤르굼은 옷을  벗고 나서서 그를 도와주었다.  잉그마르는 헤
르굼의 신속한 일솜씨에  놀랐다. 그처럼 거뜬하게 일을  처리해 내
는 사람도 드물었다.
  "너도 헤르굼 씨와  대화를 해봤으니까 당연히 우리 모임에 들어
올거라고 믿어."
  다시 확인하듯 카린이 말했다.
  헤르굼은 요 며칠 외부로 출타중이었으나 머지 않아 돌아올 예정
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늘 하나님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아?"
  카린이 주장했다.
  잉그마르에겐  모든 것이  희망적이고 믿음직스럽게만  여겨졌다.
사람들 틈으로 되돌아온 것이 이토록 행복할 것이라곤 미처 생각하
지 못했었다.  단지 한 가지  섭섭한 게 있다면 게르트루드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 그가  가장 바라던 일이었
던 것이다. 그는 벌써  1년 동안이나 그녀를 만나보지 못했다. 여름
동안 그나마 들을 수  있었던 소식도 이젠 완전히 단절되어 누구에
게도 선뜻 물어보지 못한  채 그는 답답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
다.
  잉그마르가 사람들에게 마냥 행복하고 흡족하게만  보여질 때, 억
센 잉그마르는  나날이 우울해지고 말수가  줄어들었으며 대하기가
무척 어려운 사람이 되어 갔다.
  어느 날 오후 두  사람은 제재소의 통나무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
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숲이 그리우신 모양이에요?"
  잉그마르가 말했다.
  "그런 것 같아. 난 그곳에 남아 있는 게 좋았을 뻔했어."
  "왜요? 뭐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어요?"
  "말해서 뭐하나, 헤르굼이  소란을 피우는 건 세상이 다  알고 있
는데."
  잉그마르는 그에게 헤르굼에 대한 주변 반응이 좋다는 걸 설명했
다.
  "그래, 분명히 훌륭하게도  됐고, 강하게도 됐지. 이  마을 전체를
거뜬히 뒤집어 엎어 버렸으니"
  억센 잉그마르가 한 입  가득 샌드위치를 물고 볼맨 소리로 비양
거렸다. 잉그마르는 그가  자기 혈족의 그 누구에게도  애정 표시를
하지 않는 데 대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저는 헤르굼 씨의 교리가 무척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뭐라구? 잉그마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거냐?"
  억센 잉그마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흐린 눈을 치켜 떴다.
  "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으냐?"
  잉그마르는 입을 다문  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결
론을 얻었다는  듯이 확신에 찬 어조로  억센 잉그마르에게 대답했
다.
  "아버지는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지지하실 겁
니다."
  "이런 빌어먹을!  그 '위대한'  잉그마르가 헤르굼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적이요 악마라고 부르기를 원하고 있단 말이냐? 옛 친구
들이 오랜 신앙을 지키구 있는 것은 어떻게 생각할거구?"
  "헤르굼을 추종한다고 해서  그런 나쁜 결과들만 생기는 건 아닙
니다."
  "그럼 한번 놈들에게 반대해 봐라,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잉그마르는 샌드위치 한 조각을 뜯어 입에 넣고 말 대신 그걸 씹
었다. 흥분해 있는 억센 잉그마르를 보고 있자니  웬지 마음이 불편
해졌다.
  "젠장, 세상 돌아가는 꼴이라니!"
  그가 탄식조로 떠들어댔다.
  "그래, 헤르굼이 말하고 다니는 게  훌륭한 교리는 교리인 모양이
지. 그러니까 마을 사람  대부분이 그녀석에게 감화를 받았겠지. 억
센 잉그마르인 나도 무색할  지경이니까. 그러니 점점 한다는 짓이,
자기패가 된 사람들에게 죄인들과 접촉해선 안 된다고 설교를 해서
아이들까지도 부모와 떼어 놓고 있어. 그 녀석이  약간의 눈치만 보
여도 형제는 동기간을  버리고 친구는 친구를 버리고,  사랑하는 사
람들은 서로 배신을 해.  이 모든 불화의 근원이 되구 있는데, 그래
'위대한' 잉그마르가  그런 걸 지지한다구?  암, 그렇기도 하겠구나.
좋아하구 있을 그 양반 모습이 눈앞에 있는 것 같은데?"
  잉그마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서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억
센 잉그마르가 짐짓 되는 대로 지껄이는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헤르굼이 신기한 일을 했다는 것은  나도 알지, 그녀석이 사람들
을 조종하는 거라든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친구로 여기도
록 만들어 함께  한다는 것은 사실 신기한 일이야. 부자의  것을 빼
앗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수법도 그렇고, 사람들이  서로 아껴
주고 도울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그래.   하지만 너는 생각도  못할
일이겠지만, 자기와 같은  패거리가 안 된다고 해서  도외시하고 악
마의 자식이라 부르는 건 한심하기 짝이 없어."
  잉그마르는 정말 도저히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마을은 그 이상 평화로울 수가 없었지."
  억센 잉그마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지껄였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은 흔적도 없어. 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만 해도 모든 사람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있었는데 지금은 서로
배척하며, 천사니 악마니 하는 것들이 들끊는단 말이야."
  '더는 못 참겠어!'
  잉그마르는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듯 몸을 뒤채였다.
  "너와 내가 끝장을  볼 날도 머지 않았을게야. 네가  헤르굼의 천
사들 패거리에 끼게 되면 녀석들은 분명 너와 나를 갈라 놓고 말테
니까."
  잉그마르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울화가  머리끝
가지 치밀어 올랐다.
  "그런 식으로 자꾸 말씀하신다면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몰라요. 우
리 집안 사람들이나 제가  존경해 마지 않는 헤르굼을 아무리 미워
하도록 하려고 해도 말짱 헛일이라는 걸 분명히 아셔야 해요."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억센  잉그마르는 한참을 멍청히  앉아
있다가 펠트 중사를  만나러 가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사리
가 분명한 사람과 얘기를  나눈 지가 무척 오래되었다고 그는 중얼
거렸다.
  잉그마르는 내심 속이  다 후련했다. 누구나 오랫만에  집에 돌아
오면 불쾌한 이야기는 듣기  싫고 주변의 모든 것이 평화롭고 활기
차 보이기만을 원하는 법이다.
  이튿날 아침 5시에 그는 제재소로 내려갔다.  억센 잉그마르는 벌
써 와 있었다.
  "오늘 헤르굼이  너를 찾아갈게다. 그녀석이 내  딸년하고 어젯밤
늦게 돌아왔지. 눈치를  보니 너를 개종시키려구 성찬  순회를 집어
치고 부랴부랴 돌아온 것 같았어."
  "또 시작이에요?"
  잉그마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젯밤 억센 잉그마르의  말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가치관에 혼란을 가져왔으므로, 또  다시 종
교에 관한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잠시 말을  끊고 앉아 있던 억센
잉그마르가 돌연 키들거리며 웃어댔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제재기를 작동시키려고  수문에 손을 갖다대며  잉그마르가 물었
다.
  "갑자기 스톰 선생 딸이 생각나서 그래. 게르트루드 말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킥킥, 내참  우스워서, 사람들이  말이야, 헤르굼을 움직일  만한
사람은 그 아가씨밖에 없다고들 그러잖겠어?"
  "게르트루드가요? 두 사람이 무슨 관계라도 있단 말예요?"
  잉그마르는 아직 수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억센 잉그마르
의 주름 투성이의 얼굴에  가닥가닥 짓궂은 웃음기가 서려 있는 것
을 보았다. 잉그마르도 약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언제나 할아범 편리한 대로 생각하시니까, 원"
  "그런게 아냐. 이유는  그 시의원의 머저리 같은 딸  군힐드가 글
쎄...."
  "그 아가씨는 머저리가 아니예요!"
  잉그마르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 그래, 그야 아무래도 상관없지. 아뭏든 문제는 잉그마르 농
장에서 새 종파가 번지려는 조짐을 보일 때 군힐드가 그 자리에 있
었다는 게야. 그 애가 집에  가 양친한테 한 말이 가관이라니까. 자
기는 이제 유일한 참신앙의 신도가 되었으니 부모를 떠나서 잉그마
르 농장에  가서 살겠다고 말했다니  말야. 하지만 부모 맘이  어디
그렇겠어? 당치도 않은 일이지. 그래 자기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참
다운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타일렀더니 군힐드가 펄쩍 뛰더라는게
야. 도무지 무슨 말을 해도 먹혀들지 않는 게  바위에 대침 꽂는 경
이었겠지. 다른 사람들은 온 집안식구들이  참 기독교인다운 생활을
함께 해나가기 땜에 자기처럼 그럴  필요가 없다더라나. 클레멘트손
은 그만 화가 나서 딸아이를 방에 가두어 버렸다는군."
  "그게 게르트루드와 무슨 상관이죠?"
  "참을성도 없긴. 계속  들어 봐. 그 다음날  아침이었지. 게르트루
드와 스티나 부인이 부엌에  앉아 실을 감고 있는데 클레멘트손 부
인이 찾아왔더래, 놀라운  건 평상시 그토록 쾌활하고  명랑하던 사
람이 눈이 퉁퉁  부어 가지고 꼭 실컷  울고 나온 사람 같더라는게
야.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두 사람이 물었더니  가장 사랑하는 보배
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그랬다잖겠니? 정말 이녀석들을 당장이라도
납작하게 두들겨 패줬으면 속이 다 후련하겠군."
  "때려주다니. 누굴요?"
  "빌어먹을! 헤르굼이랑  안나 말고  또 누가 있겠니?  그녀석들이
밤중에 군힐드를 납치했다니, 내참!"
  "납치를 했다구요."
  잉그마르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 강도는 같은 녀석에게 딸을 빼앗겼으니.... 밤중에 그녀석들이
군힐드를 찾아가선 왜 잉그마르  농장에 오지 않았냐구 묻는 걸 군
힐드의 양친이  옆방에서 다  엿들었대, 군힐드가 부모님이  자기를
가두었다고 대답하니까 헤르굼이  악마 같은 짓이라고 그랬던 모양
이야. 그런 소리까지 조금 열려 있던 문틈으로 다 들려 왔던거지."
  "아니, 그랬으면 뛰어나가 당장 돌려보냈으면 되잖아요."
  "딸아이에게 스스로 결정하도록 기회를  주었던거야. 설마 부모를
버리고 훌쩍  나가 버리리라고 생각인들  했겠어. '늙으신 부모님을
남겨두고 나가버릴  순 없어요'라는 군힐드의 목소리를  기다리면서
침대에 그냥 누워 있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기대완 달리 군힐드가 그들을 따라갔군요."
  "흥, 다 헤르굼 녀석  때문이야. 그녀석이 좀처럼 그냥 가려 들지
않으니까 군힐드도  결국 따라나섰다더군. 클레멘손 내외는  딸아이
가 헤르굼에게 넘어갔음을 알곤  그냥 포기해 버렸다나? 세상에 그
런 사람들도 다 있어. 하지만 아침이 되자  군힐드의 어머니는 후회
가 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지 남편에게 농장에 가서 딸을 데
려오라고 애원을  했다더군. 클레멘손은 '무슨  그 따위 소릴!  그런
짓은 못해.  제 발로 걸어들어온다면  또 몰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
내 그년을 두번 다시 만나면 손가락에 장을  지지지'라며 화를 벌컥
내더라는게야. 그래서  부인이 놀래가지고 학교로 찾아와서  게르트
루드에게 군힐드를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을 했던거지."
  "그래서 어떻게 됐답니까?"
  "게르트루드가 군힐드를 찾아갔지. 역시 말이 먹히질 않더래."
  잉그마르는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집에서 군힐드를 본 적이 없는데요."
  "그야 그렇겠지. 지금은 제 집으로 돌아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게
르트루드는 군힐드와 헤어져선 헤르굼을 만났던거야.  모든 게 헤르
굼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그녀석의 뺨따귀라도 갈길 듯이 충고를 해
댔던게지."
  "그래요, 게르트루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요. 게다가 여간
달변이 아니니까요."
  "밤중에 그런 식으로  젊은 여자를 꾀어내는 건 이교도의 병정이
나 하는  짓이지, 기독교의 설교자가  할 짓은 못 된다고  그랬다더
군."
  "헤르굼의 반응은요?"
  "그녀석이 할말이 있겠어? 아무 소리도 못하구 서 있다간 자기가
지나쳤다고 시인하고는,  그날 오후 군힐드를 부모에게  돌려보냈던
거지."
  잉그마르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일었다.
  "게르트루드는 역시  대단한 여자예요. 그리고 헤르굼도  좀 괴상
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훌륭한 사람이구요."
  "호, 네 생각은  그렇단 말이지? 그렇게 쉽사리  헤르굼이 게르트
루드에게 설복당한 점은 눈꼽만큼도 이상한 데가 없고?"
  잉그마르는 대꾸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네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 한결같이 궁금해 하는
모양이던데."
  "제가 어떻게 하든 뭐 그리 중요해요?"
  "네가 꼭 명심해 둬야 할 일이 있다.  이 마을에서는 언제나 우러
러 받들 만한  사람을 세워 놓는 관습이 있다.  '위대한' 잉그마르는
별세했고 교장은  사람들을 조종할 만한 힘을  잃었고 목사도 역시
마찬가지니 자연히 사람들이 헤르굼을 추종할  밖에, 네가 뒷짐지고
물러서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그러구 있을 때가 아니란 말야."
  잉그마르는 팔을 축 늘어뜨렸다. 몹시 피곤했던 것이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군요. 그냥 혼란스럽기만 해요."
  "사람들은 네가 헤르굼의 존재를 밀어내  주길 원하고 있어. 우리
는 겨우내 산에 틀어박혀  있어서 별 내용은 모르지만 처음에는 좀
끔찍한 일도 있었나  보더라. 한동안 사람들은 개종의  들뜬 분위기
에서 악마니, 마귀니 하는  소리쯤은 예사로 여겼던 모양인데, 결정
적으로 충격을 준 건 개종한 어린애들이 설교를 시작했다는게야."
  잉그마르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어린애들이 무슨?"
  "사실이 그렇다니까!"
  억센 잉그마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
  "헤르굼이 아이들에게 노는  대신 하느님께 봉사하라구 부추기는
바람에 아이들까지도 개종을 위해 꿈틀거리기  시작한거야. 이 얼마
나 무서운 일인가  말야. 그 어린 녀석들이 글쎄 길가에  기다려 섰
다가 누가 지나가는가  싶으면 불쑥 막아서선 '아저씨는  마귀와 맞
서 싸우지 않을거예요?  언제까지나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이실
텐가요?'라며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지껄인다는게야."
  잉그마르는 미심쩍은 듯  말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얘기는 모두 펠트 할아범한테서 들은거죠?"
  "아무려면 어때. 더  할말이 있다. 펠트도 당했다구!  이런 일들이
모두 잉그마르  농장에서 비롯된 것을 생각하면  내가 다 민망하고
부끄러워진다."
  "펠트 할아범이 무슨 일을 당했게요?"
  "얄미운 조무라기들 같으니!  그 어린 꼬마녀석들 말이다. 그녀석
들이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니까 어느 날 밤인가 펠트를 찾아
가 그 사람을 엄청난 죄인인 양 대하며 개종을 시키려 들었지"
  "아니, 애들은  전에 펠트를  도깨비나 마범사처럼  두려워했는걸
요."
  "물론 그랬지.  이번에도 겁이야 났겠지만 딴에는  뭔가 영웅심을
발휘해 볼 생각이었던게지.  그날밤 펠트가 저녁 스프를  휘젓고 있
는데 녀석들이 밀어닥친거야.  몇 놈은 펠트를 보자마자  기겁을 해
서 도망을 쳤는데 나머지 놈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선
늙은이를 빙 에워싸고 앉더니 노래를 부른다, 기도를  한다 하구 소
란을 떨었다는군."
  "충분히 쫓아버릴 수도 있었을텐데요."
  잉그마르가 말했다.
  "그래, 그랬으면 좋았을걸. 그 영감이 무슨 꿍꿍이 속이었는지 나
도 모르겠단 말야.  아마 영감은 나이탓으로 외롭고  허전해져서 맹
꽁이처럼 멀뚱거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거기다가 찾아온  게 애
들이라 펠트로 하여금  감상을 자아내게 만든거지. 애들이  늘상 자
기를 무서워했다는 게  그 영감태기한테는 하나의 슬픔이었을지 몰
라. 그런데 그 어린 얼굴들이 자기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으
니 맥이 탁 풀렸던 모양이야. 아이들은 행여나  늙은이한테 얻어 맞
기라도 할까봐 잔뜩 몸을  사리고는 열심히 노래도 하고 기도도 하
면서 언제라도 도망칠 태세를 갖추고 있더라나. 그런데  그 중의 두
녀석이 노인의 얼굴에서  뭔가 동요의 빛을 발견했던거야.  펠트 영
감의 얼굴에는 눈물 한 방울이  주루룩 미끌어져내린거지. 아이들은
할렐루야를 외치고 영감태기는 아이들한테  완전히 나가떨어진게야.
이젠 집회에 쫓아다니는 데만  온통 정신이 팔려서 다른 일은 거들
떠보지도 않구 급기야는  하나님의 소리가 들린다구 헛소리까지 해
대고 있으니"
  "전혀 나쁜 것  같지 않은데요. 헤르굼 신도가 술독에  빠져 있을
펠트영감의 운명을 바꿔 놓은 셈이니까요."
  "과연 그렇기도  하겠지. 넌 친구  하나 잃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닐테니까. 애들이 교장을 개종시켰더라면 정말 좋았겠지!"
  "상상도 못할 일인데요! 아이들이 스톰  선생님한테까지 달려들었
다구요?"
  잉그마르가 놀랐다는 듯이  입을 딱 벌렸다. 마을이  엉망으로 뒤
집혔다는 억센  잉그마르의 말엔 정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
다.
  "스톰 선생이 교실에서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지, 아마, 그런데
갑자기 한떼의 아이들이 몰려들어와선 선생에게 설교를 시작하더라
는게야."
  잉그마르가 생각해도 조금 어이가 없은 일이긴 했다.
  "처음에 선생은  말도 못하고 얼떨떨해 있었다더군.  마침 헤르굼
이 부엌에 와서 게르트루드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던데."
  "게르트루드와 함께 있었다구요?"
  "그래, 군힐드  사건이 게르트루드의  충고로 매듭지어진  후부터
두 사람은  친구가 된거지.  게르트루드는 교실에서 일어난  소동을
듣고서 헤르굼에게 이렇게 말했지. '헤르굼 씨,  마침 때맞춰 오셔서
재미있는 구경을  하시게 됐군요.  지금부터 애들이 교장  선생님을
가르친답니다.' 헤르굼은  그 어처구니없는  일에 난감해졌겠지.  그
녀석이 당장 아이들한테로  달려가서 얼른 쫓아버리는 통에 다행히
도 교장은 귀찮은 일을 겪지 않아도 됐던거지."
  잉그마르는 억센 잉그마르가  묘한 눈빛으로 자기를 주시하는 것
을 알았다. 그것은  마치 사냥꾼이 상처 입은 곰을 바라보며  한 방
더 보아줄지 어쩔지를 궁리하는 것만 같은 태도였다.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
  "내가 너한테  무얼 바라겠냐. 아직도  어리고 재산도 없고  있는
거라곤 그저 텅빈 두 손뿐인데."
  "헤르굼의 목을 조르길 바라시지요?"
  "그건 마을 사람 모두의 바람이야.  네가 헤르굼을 쫓아냄과 동시
에 당장 해결될 일이지."
  "새로운 종파가 들어올  때면 언제나 싸움과 불화가 있기 마련인
데 그렇다면 모든 게 마찬가지 아녜요?"
  "하지만 네 가문과 명예를 나타내는 것도 너 자신을 위해선 필요
한 일이지"
  잉그마르는 고개를 딴  데로 향하고 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게르트루드의 구체적인  소식을 듣도 싶었지만 묻지 않
았다. 어설프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체면을  깎이고 싶지는 ㅇ낳았던
것이다.
  여덟시쯤 되었을까. 잉그마르는 아침을 먹기  위해 집으로 되돌아
갔다. 여느 때와  같이 식탁 위엔 음식들이 보기좋게 잘  차려져 있
었고 카린과  할보르는 유달리  상냥스러웠다. 친절한 그들을  보고
있자니 억센 잉그마르의  말들은 한 마디도 믿어지지  않았다. 잉그
마르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늙은이가 공연히 과장해서 지껄인거야.'
  잉그마르는 가벼운  마음으로 푸짐하나 아침식사를  들기 시작했
다. 문득 게르트루드가 생각났다.  그녀에 대한 생각은 다시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금새  식욕이 떨어져서 음식에는 더  이상 손을
대는 것도 싫었다. 그는 카린을 향해 고개를 들며 느닷없이 물었다.
  "요즘 스톰 선생님댁은 어떻답니까?"
  "글쎄! 난  그런 신앙심 없는  사람들과는 교제하고 싶지  않으니
까"
  카린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카린의 냉담한 태도에  잉그마르는
잠시 머쓱해서 앉아 있었다. 그는 이야기를 계속할 것인지, 그만 둘
것인지를 망설였다. 이야기를 계속한다는 것은  다소 위험성을 내포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가족과의 인연이 끊길 수도  있다는 우려 같
은 것이었다. 그러나 잉그마르는 뭔가 잘못된 일일 경우, 그것을 알
면서 안전만을 위하여 그들을 지지하는 비열한 태도를 취하기는 싫
었다.
  "교장선생님 집안에  신앙심이 결여돼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걸요. 나는 그 분들과 4년 동안이나 함께 살았으니까요."
  그가 반의를 제시했다.
  이때 카린 역시  잉그마르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녀도
설혹 잉그마르의 기분을  상하게 할지라도 진리를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어떤 경우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한다면 그 사람들은 신앙심이 없다고 밖에 볼 수 없어."
  "그렇지. 거기다가 애들  문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지. 애들
에겐 올바른 교육이 필요해."
  할보르가 끼어들며 말했다.
  "스톰 선생님은  이 마을 모든  사람을 가르쳐 왔는걸요.  매형도
그 중 한 사람이구요."
  "하지만 그 분은 우리에게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
은 제대로 가르쳐 준 게 없어."
  카린이 말했다.
  "누님이 말하는 올바른  삶이란 것이 무엇인지 납득이 안 가는군
요."
  "그럼 옛날에  가르침받은 올바른 삶이 어떤  것이었나 얘기하지.
그건 마치 둥근  대들보 위를 걷는 것 같은 불확실한  거였어. 올라
가는가 싶으면 벌서 아래로 떨어져 있고 끊임없이 반복될 뿐이었지
그러나 이번엔 만난 참신앙은  온 몸을 그냥 맡겨두기만 해도 좁은
정의로운 길을 넘어지지 않고 걸어갈 수 있어."
  잉그마르는 미소를 띠며 카린을 바라보았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너무 편리해 보이던데요."
  "그렇지 않아. 지금은 가능하지만 처음엔 무척 어려웠어."
  "그래, 스톰 선생님댁은 어떻게 됐나요?"
  "우리 신도들은  모두 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려오기로  했어. 한시
라도 빨리 낡은 교육으로부터 구출해야 한다고 생각들 했으니까."
  "교장 선생님은 뭐라시던가요?"
  "학교에서 애들을  끌어내는 건 법률 위반이라더라.  이스라엘 토
마손 댁이나 크리스텔 랄손  댁에 당장 경찰을 보내서는 애들을 도
로 데려가 버렸지."
  "그래서 이젠 스톰 선생님과는 멀어지게 되었군요."
  "우린 우리끼리만 사귄단다."
  "그쪽 사람들은  다른 보통 사람들과는  아주 어긋나버린 모양이
죠?"
  "우릴 죄악으로 물들이려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뿐이야."
  세 사람의 말 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저음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가 그들 자신에게는  매우 무서운 것처럼 느껴졌다.  화제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한테 게르트루드의 안부를 전할 수는 있어."
  짐짓 명랑한 투로 카린이 입을 열었다.
  "헤그룸 씨와 지난 겨울 동안  여러번 만났었지. 게르트루드도 오
늘밤 우리 모임에 들어올거래. 헤르굼 씨가 그랬어."
  잉그마르는 입술을 떨었다.  그는 마치 총에 맞을  것을 예측하고
도 그 순간을 알지 못한 채 온종일 눈을 감고 돌아다니다가 드리어
총알에 심장이 뚫린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녀도 그렇게 돼 버렸단 말이군요."
  잉그마르는 맥풀린 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숲속의 어둠에 싸여 있는 동안에 여기서는 정말 많은 일들
이 일어났군요."
  잉그마르는 헤르굼이 그동안 게르트루드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온갖 수법으로 덫을 놓아  그녀의 환심을 사게 된거라고 그는 생각
했다.
  "나는, 나는 어떻게 되는거죠?"
  잉그마르의 목소리는 묘한 불안을 호소하는 듯했다.
  "자네도 우리를 따라야지."
  할보르가 못박듯 분명하게 말했다.
  "...."
  "헤르굼 씨가 지금 돌아와 있으니까 너도 그분 얘기를 들어 보기
만 한다면 곧 개종하게 될거야."
  "....나는, 개종하고 싶지 않아요."
  할보르와 카린이 멍하니 잉그마르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버지의 신앙 이외의 신앙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요."
  "아무말 말고 우선 헤르굼 씨의 설교부터 한번 들어 봐."
  카린이 부탁했다.
  "내가 만일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다면 나를 집에서 쫓아내 버리
겠죠."
  잉그마르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할보
르와 카린 이  두 사람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족
이라는 모든 끈으로부터 뚝 떨어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
슴이 허전하게  비어만 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냉정을 되찾으려고 애써야 했다.
  "그래, 제재소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참인가요."
  그는 이 문제만큼은 정확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가다듬
으며 물었다.
  할보르와 카린은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은
어떻게든 언질이 잡히는 건 싫었던 것이다.
  "이봐 처남, 우리가 자네를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수중한 사람으
로 여긴다는 건 알아주겠지?"
  할보르가 말했다.
  "네, 네, 그런데 제재소는 어찌 되는거지요?"
  잉그마르는 계속 다그쳐댔다.
  "중요한 건, 나무란 나무는 모두 제재해 버리는 일이야."
  "저는 그 얘길 듣자는 게 아녜요."
  "...."
  "필경 헤르굼이 경영하게 되겠군요. 안 그런가요?"
  잉그마르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카린과 할보르는 그의  돌발적
인 태도에 놀라고 당황했다. 그를  게르트루드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부터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잉그마르, 한 번만이라도  헤르굼 씨의 얘길 들어볼  수 없겠니?
내가 이렇게 부탁할께."
  카린은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동생의 소맷부리를 잡고 애원조
로 말했다.
  "네, 네,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지금 어떤 처지
에 놓였는가를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겠어요."
  "우린 진심으로  네 행복을 바라고 있어,  잉그마르! 정말 진심이
야."
  "짐작대로군요. 헤르굼이  제재소를 경영하는 일이 두  분 마음속
엔 이미 정해져 있었던거예요."
  "우린 뭐든 적당한  직업을 헤르굼에게 구해 줘서 그를 언제까지
나 우리 곁에서 머물게 해줘야 해. 잉그마르  자네가 우리들의 유일
한 참신앙을 영접해 들이기만  한다면 헤르굼과 함께 손을 잡고 사
업을 잘 해나갈 수 있을텐데 말이야. 헤르굼만큼  훌륭한 일꾼도 없
을거야."
  할보르가 변명처럼 느릿하게 말했다.
  "분명하게 말씀하십시오. 언제부터 그렇게  분명한 걸 두려워하시
게 되었어요?  ....내가 알고 싶은 건  헤르굼이나 나, 둘 중에  누가
제재소를 갖게 되느냐는 문제예요."
  "그건 처남에게  달렸어. 하나님에게 반항을 한다고  하면 헤르굼
의 몫이 될 수도 있지."
  "참으로 감사하군요.  내가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만큼의
이익을 건질 수 있는가를 깨우쳐 주셨으니까요."
  잉그마르가 빈정거렸다.
  "잉그마르!"
  카린이 나무라듯 불렀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지금 몰라서 그러는거니?"
  "물론 잘 압니다. 그건 헤르굼의  신도가 되지 않으면 게르트루드
고 집이고 간에 모두 잃을 수도 있다는 말 아닙니까?"
  잉그마르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휙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하늘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잉그마르는  게르트루드와 함께 보
내던 교장 선생댁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어중간한  상태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었다. 그가 막 교문을 들어설 때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
기 시작했다. 교정에는 벌서 푸릇푸릇 싹이 돋아  붉은 흙을 초록으
로 덮기  시작해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쪽에선
봉오리들이 고개를 쑥쑥  내미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잉그
마르는 이곳의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답고 평온하게 느껴져 그 자
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마음은 그새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었다.
  게르트루드는 아직  잉그마르를 보지  못했다. 그는 살며시  문을
닫고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잉그마르는 걸음
을 멈추고  활홀하게 그녀를  바라다보았다. 지난번 헤어질  무렵만
해도 겨우 소녀티나 벗었을까 말까 했던 그녀가 일년도 채 안된 지
금은 성숙한, 품위있고 아름다운 젊은 숙녀 같아 보였다. 키도 제법
크고 날씬한 몸매가, 완전한  여인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머리는 우
아한 목덜미에 아름답게 드리워지고 살결은 우유빛으로 부드러운데
다가 볼 언저리는  싱싱한 복숭아 빛이었다. 깊숙한  눈은 지적으로
보이고 장난기다 다분해 보이던 입가엔 이제 진지함과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잉그마르는 혼이라도 빠져나간 듯했다. 가슴속에선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일렁였다. 평화로운  고요가 그의 온 몸에  스며들어서 무
언가 위대하고 신성한  것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모든 것
이 그저 즐겁기만 해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어졌다.
  게르트루드가 잉그마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놀란  듯 눈
을 크게 뜨더니  이내 얼굴이 굳어지면서 양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잉그마르는 마음속을 파고드는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지금 게르트
루드는 자기의 출현을 달가와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여자를 놈들이 빼앗으려 하고 있어. 아니 이미 나는 놈들에게
게르트루드를 뺏긴거야.'
  안식일 같은 평화로운 감정은 사그러들고 공포와 격정이 다시 그
를 사로잡았다. 그는 인사 따위는 제쳐 놓고  다짜고짜 싸움하는 사
람처럼 언성을 높였다.
  "게르트루드, 헤르굼 신도들과 한패가 된다는게 사실이야?"
  "그래요."
  게르트루드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잉그마르는 화가 나서 물었다.
  "헤르굼 신도들은 자기들과 생각이 틀린 사람들하곤 상대도 하지
않는다던데, 그 점에 대해선 아무런 생각도 없나보지?"
  게르트루드는 자기도 충분히 생각해 보았다고 대꾸했다.
  "그럼 부모님의 허락은?"
  "아니요. 두 분은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소리야, 게르트루드!"
  "그만둬요, 잉그마르! 어쩔 수가 없어요.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에
요."
  "말도 안 돼. 그런 걸 보구 하나님의 뜻이라니, 그건...."
  게르트루드는 잉그마르의 말을 자르듯이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지
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동조할 수 없어."
  잉그마르는 게르트루드의  굳어진 표정을 무시하면서  말을 이었
다.
  "만일 게르트루드가 그들 무리에 낀다면 우린 영원히 끝나버리고
말거야."
  게르트루드는 침착하게  그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그녀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제발 게르트루드, 그러지 않겠다구 약속해 줘."
  잉그마르가 애원했다.
  "제가 지각없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큰 오산이에요. 나
는 나대로 오랫동안 진지하게 생각해 왔던 문제니까요."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도 있잖겠어?"
  게르트루드는 그를 외면했다.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잉그마르는 드디어 화가 치밀었다.
  "너는 헤르굼을 위해서라도 잘 생각해 봐야 할거야!"
  그녀의 팔을  거칠게 움켜잡으며 잉그마르가 소리쳤다.  게르트루
드는 얼떨결에 그의 손을 뿌리쳤다.
  "돌았어요, 잉그마르?"
  그녀도 큰 소리로 말했다.
  "흥, 그래, 헤그굼이 나를 미치게 했지.  그런 짓은 그만두게 해야
해!"
  "뭘 그만두게 한다는거예요?"
  "머지 않아 알게 될거야."
  게르트루드는 몸을 움츠렸다.
  "잘 있어, 게르트루드!"
  잉그마르는 목이 메었다.
  "....내 말 잘 들어둬.  넌 절대 헤르굼의 신도가 될 수 없어, 절대
로!"
  "어떡하려는거예요, 잉그마르? 왜 그러는거죠?"
  게르트루드는 불안해져서 그를 바라다보았다.
  "잘 있으라구! 내가 한 말을 잘 기억해야 할거야."
  잉그마르는 자갈길을 뛰어가면서 앞으로서의 사태를 심각하게 생
각했다.
  '아버지처럼 현명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중요한  것들을 모두
잃기 직전이야. 그런데 나는 아무런 대책과, 방법도 찾지 못하고 있
어.'
  그러나 잉그마르가 확실히  다짐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
것은 만일  예측했던 모든 불행이 닥쳐온다면  헤르굼을 결코 그냥
두지는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잉그마르는 헤르굼을 만나볼  생각으
로 억센 잉그마르의 집으로 찾아갔다.  입구가 가까와지자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이 많은 모양이군.'
  그는 발길을 돌렸다. 그때 한 사나이의 노기에  찬 소리가 잉그마
르의 귓전에까지 들려왔다.
  "우리는 삼  형제였소, 존 헤르굼. 동생의  신상을 알아보기 위해
예까지 찾아왔는데 동생은 2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당
신의 패거리에  들어갔다는 소릴  들었소. 그동안 편지를  받아보니
동생은 당신이 지껄여대는  말에 너무 심취해 있었던  모양인데, 끝
내는 정신 이상해졌다는 소식을 들었소. 당신에게 그  까닭을 좀 들
어 봅시다."
  잉그마르는 얼른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제재소로 갔다. 억센 잉
그마르는 벌써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윙윙거리는 톱소리와 사나운
물결소리를 비집고 높은 고함소리가 여전히 그에게까지 들려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헤르굼이 자신에게서 빼앗으려 하는  모든 것
들, 그러니까  가족이라든가 게르트루드라든가 집이라든가 하는  생
각들이 마음속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다시 고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헤르굼과 그를 찾아온  사람들
사이에 드디어 싸움이 일어난 것 같았다.
  '저녀석, 반 골병이 들어도 싸지.'
  그때였다. 사람 살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잉그마르는 일
을 집어치우고  산으로 뛰어올라갔다. 오두막에 가까와지자  헤르굼
의 처절한 고함소리가 더욱 확실하게 들렸다. 그가  문 앞에까지 당
도했을 때 오두막 안에서  벌어지는 격투로 집 주변의 뜰까지도 온
통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발 뒷꿈치를 들어 소리없이 안으로 들어
갔다. 헤르굼이 벽에 붙어서서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그곳엔 세 사람의 낯선 도끼가 있었는데  그들은 저마다 몽둥
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총을 지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그저 헤르굼이 끝까지 굽히려 들지 않고 의외로 제법 잘 맞붙어 싸
우며 화를 돋우자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그들은 잉그마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참 동안 잉그마르는 조용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꼭 꿈
을 꾸는 것만 같았다. 꿈속에선 가끔 바라고  바라던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헤르굼은 간헐적으로 도움을 청하듯 소리쳤다.
  '어림도 없어. 이게  얼마나 바라던 일인데. 내가 너를  도와줄 것
같애?'
  잉그마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한  사나이가 헤르굼의  머리를 후려쳤다. 헤르굼은  그만
손에 쥐고 있던  도끼를 마룻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나머지  두 사나
이가 칼을 떠내들고 덤벼들었다. 순간  잉그마르의 머릿속에서 세차
게 일고 있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이 집안은 사람들이  생을 살
아가다가 반드시 한 번은  비겁하고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한 것인가.'
  그는 더 이상  그러고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별안간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억센 손에 잡히는가 싶더니 번쩍 들려서 집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나머지 두 사나이도 미쳐 깨닫기도 전에  같은 꼴을 당하
여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잉그마르는 흥분하여 문간에 가서 섰다.
  "어때, 덤빌 생각은 없나?"
  그는 자기의 힘을 시험해  볼 좋은 기회라는 생각으로 세 사내를
향하여 씨익 웃어 보였다. 세 사람은 공격태세를 갖췄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도망가자, 느릅나무 밑에 누가 오고 있어."
  그들은 헤르굼은 해치우지 못한 것을 원통해 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달아나려다 말고 몸을 휙 돌렸다.  갑작그런 그의 역습을
당한 잉그마르는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칼에 목을 찔린 채 맥없이
쓰러졌다.
  "남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한 벌이다!"
  사나이가 소리치며 달아났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곳에 카린이 나타났다. 잉그마르가 목에 상처
를 입고 디딤돌에  앉아 있는 것을 본 카린은 소스라쳐  놀랐다. 또
한 안쪽에는 헤르굼이 얼굴에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도끼자루를 쥐
고 벽에 기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카린은 사태를  나름대로 해
석했다. 잉그마르가 헤르굼을 습격하여 이러한  싸움의 결과를 초래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의 무릎이 덜덜 떨렸다.
  '그럴 리가  없어. 아니야, 말도  안 돼. 우리 집안에  살인자라니,
정말 아니야!'
  그녀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런데 문득  어머니의 이야기가 머리
에 떠올랐다.
  "그래, 일이 이렇게 돼 버린거야."
  그녀는 서글프게 중얼거리며 잉그마르 앞을 가로질러 헤르굼에게
로 달려갔다.
  "잉그마르를 먼저!"
  헤르굼이 신음하듯 소리쳤다.
  "살인자를 먼저 구할 순 없어요."
  카린이 냉담하게 말했다.
  "잉그마르 잉그마르를 먼저 봐주라니까요!"
  헤르굼은 몹시 흥분하여 카린을 향해 도끼를 쳐들어 보였다.
  "잉그마르가 살인자들과 싸워서 내 목숨을 구했소!"
  그제사 카린은 모든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잉그마르를 돌아보
았으나 그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그녀는  마당을 가로질러 비
틀비틀 걸어가는 잉그마르를 발견했다.
  "잉그마르! 기다려, 잉그마르!"
  잉그마르는 돌아보지 않았다. 양 어깨가  고통과 슬픔으로 한없이
아래로 처지는 것만 같았다.
  카린은 동생의  곁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잉그마르의 팔에  손을
얹었다.
  "잠깐만, 잉그마르. 상처를 동여매야 해."
  잉그마르는 카린의  손을 뿌리치고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아니 앞을 못 보는 장님처럼 큰 오솔길을 되는 대로 거침없이 나아
갔다. 상처의  피가 옷속을 타고  흘러 한쪽 구두 속으로  미글어져
내려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 위에  붉은 선혈이 발자국으
로 남겨졌다. 카린은 어쩔 줄 몰라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잉그마르 기다려줘. 어딜 가는거니. 잉그마르, 제발...."
  잉그마르는 계속 비틀거리며 숲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카린은 잉
그마르의 구두만을  걱정스레 주시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피는
끊임없이 넘쳐흐르고 발자국은 점점 더 붉고 진해졌다.
  '숲에 가서 죽을 때까지 피를 흘리며 누워 있을 작정인가봐'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소리쳤다.
  "아아 잉그마르, 헤르굼을 살려 주었는데!  내가 잘못했어. 그러기
엔 큰 용기와 힘이 필요했을텐데."
  잉그마르는 카린의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터벅터벅 무거운 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카린은 달려와서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쳐
다보지도 않고 비켜갔다.
  "가서 헤르굼이나 도와줘."
  그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 말 좀 들어봐, 잉그마르.  네 매형과 나는 오늘 아침 네게 한
말을 무척 후회하고 있어. 그래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재소를 너
한테 맡기기로 결정했다구. 그 얘기를  하려고 헤르굼을 찾아갔던건
데...."
  "이젠, 헤르굼에게 줘도 상관없어."
  그는 돌과 나뭇가지에 걸려 비틀대면서  계속 걸어나갔다. 카린은
그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가면서 열심히 동생을 달래 보려고 했다.
  "용서해 주렴. 네가 헤르굼과 싸운 걸로 오해했던거야. 그땐 그렇
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 잉그마르"
  "누나는 그렇게도 쉽게 자기 동생을 살인자로 취급했어."
  잉그마르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는 계속하여 걸었다. 밟
힌 풀잎들이 다시  일어서며 선혈을 뚝뚝 떨어뜨렸다.  카린은 지금
잉그마르가 얼마나  헤르굼을 증오하고  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헤르굼을 구해준 것이다.
  "사람들이 오늘 네가 한 일을  안다면 모두들 감격할거야. 그런데
네가 그냥 죽어버리면 어떡하겠니, 잉그마르"
  잉그마르가 경멸하듯 웃었다. 그리고 파리해진  몰골로 그녀를 돌
아보았다.
  "왜 이러는거야.  난 지금 누나가  누굴 그토록 돌봐주고  싶은지
다 알고 있어."
  그가 걸어온 땅 위에 핏자국이 길다란 손을  이루었다. 그의 걸음
이 점점 위태로와졌다.
  카린은 마음이 괴로와 견딜 수가 없었다. 동생에  대한 사랑이 다
시금 열정을 품고  끊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새삼  동생이 믿음
직스럽고 자랑스러워 자신의  전통있는 집안의 튼튼한 거목으로 여
겨지는 것이었다.
  "잉그마르, 네가 이렇게 계속 피를  흘리다 죽으면 내가 하나님과
조상들을 뵐 면목이  없잖니? 너를 살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께. 그래 어떻게 해줬음 좋겠니?"
  잉그마르는 걸음을  멈추고 나무를  의지해 몸을 지탱했다.  그는
얼굴을 이그러뜨리며 웃음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헤르굼을 미국으로 보내 버릴 수 있겠어?"
  카린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순간 잉그마르의 발  밑에 괴기
시작한 핏물이  그녀의 시선에  섬뜩하게 들어왔다. 그녀는  동생의
말을 곰곰이 새겨 보고 있었다. 동생은 지금  자기에게 그 아름다운
천국을 버리라고, 옛날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덕이던 지옥  같은 세
계로 되돌아가라고 이렇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잉그마르는 똑바로 카린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얼굴이 파리해지
고 관자놀이에는 힘줄이  솟아 있었으며, 코 언저리는  송장처럼 거
무스름하게 죽어  있었다. 그의 아랫입술은  여느 때 같지 않게  툭
불거지고 꼭 다문 입가는 날카롭고 야무진 게 굳은 결의에 차 보였
다.
  "나는 헤르굼과 한마을에서  살 수 없어. 그렇다면 내  쪽에서 길
을 비켜줘야 하겠지."
  "아니야!"
  카린이 소리쳤다.
  "만일 네가 내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생명을 구하도록 가만히 있
어 준다면 헤르굼을 떠나보낼 것을 약속할께."
  그녀는 말을 마치며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지도자를 보내 주실테니까. 지금은 잉그
마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현명해.'
  그녀는 상처를 봐주고 피를 멎게 한 후,  잉그마르를 집으로 데려
가서 눕게 했다. 상처는 그다지  심한 편은 아니었다. 며칠 동안 안
전케 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나 치료법인 것  같았다. 이층방의
침대에 누워  있는 잉그마르를 카린은 마치  어린애 돌보듯 간호했
다.
  잉그마르는 헛소리까지 했다. 카린은 그로  인해 헤르굼과 제재소
만이 동생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얼마 후  잉그마르가
다시 의식을 되찾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카린이 입을 열었다.
  "널 찾아온 사람이 있단다."
  잉그마르는 몹시 지치고 피로하였으므로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곧 게르트루드가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예의 바르게  그러나 난
감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잉그마르는 옛날 어릴  적에 게르트루드
가 짓궂게 굴며 약을 올릴 때부터 그녀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러
나 그 무렵에는 뚜렷하진  않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에 뭔가 거부감
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를 어떻게든  소유하고 싶은 욕
망만이 그를 짓눌러댔다. 그녀에  대한 동경과 불안, 그리고 그리움
으로 보낸 한 해가 그에게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었다.
  게르트루드가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잉그마르는  괴로운
듯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제가 보기 싫은가요?"
  게르트루드가 말했다. 잉그마르는  고개를 저었다. 어린아이가 어
리광을 부린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어, 할 얘기가 있어요."
  "헤르굼의 신도가 되었다는 말?"
  잉그마르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게르트루드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가린
그의 손을 떼내었다.
  "저, 잉그마르! 잉그마르가 모르는  게 있어요. 작년에 말이죠, 잉
그마르가 우리집을 나간다고 할  때 난 비로소 내가 잉그마르를 사
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잉그마르는 잠시 귓부리가  빨개지고 얼굴에는 환희의 빛이 감돌
았다. 그러나 그는  금방 침울하고 미심쩍은 표정으로  안색이 변했
다.
  "여기 안 계셔서 정말 쓸쓸했어요."
  잉그마르는  물끄러미 게르트루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감사하는 표시로 약간 웃어 보이곤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
다.
  "그런데 잉그마르는 한 번도 나를 만나러 와 준 적이 없었죠?"
  그녀가 비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때 당신에게 있어서 내가 얼마나 무의미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왔어요."
  "난 난,  내 환경이 좋아져서  능력이 있을  때까진 게르트루드를
만날 수 없었어. 그렇게 되고 나면 청혼을 하려고 했던건데."
  "하지만 전 당신이 저를 조금도 생가지 않는다고 여겼어요."
  게르트루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굴러내릴
것 같은 눈물을 억제하려고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말했다.
  "잉그마르는 모르겠지만,  내게 그  일년은 고통의 나날이었어요.
헤르굼은 그런 저를  친절하게 위로해 줬던거예요. 그는  내게 삶을
전부 하나님께 맡겨두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말했죠."
  잉그마르의 두 눈은 이제 새 삶의 희망으로  빛났다. 그는 조용히
게르트루드를 응시할 뿐이었다.
  "오늘 아침, 전  우리집에 잉그마르가 나타난 걸 보고  정말 노랬
었어요. 난 지난날의  아픈 몸부림이 다시 시작되는구나  싶어서 마
음이 괴로왔죠. 왠  줄 아세요? 당신을 사랑하기 땜에  당신에 대한
나의 마음을 어쩔 수 없어서 그랬던거예요."
  잉그마르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그런데 오늘밤  오두막에서 있었던 잉그마르의  소식을 듣고 전
도저히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어요. 결국 저는  당신에게 향하는 나
의 마음을 거둬들일 수 없음을 깨달은거죠."
  그녀는 잉그마르에게  축제일의 커다란 종소리와도  같은 것이었
다. 마음속 가득  폭죽 같은 환희가 번지고  평화와 고요가, 달콤한
입술을 통해 닿아온 사랑이 그를 더할 수 없는 행복감으로 몰고 갔
다.

  영원의 시간에 서서

  제3부 사랑을 찾아서

     류니베르 호의 침몰

  교장의 전도관이  세워지고 헤르굼이 미국에서  돌아오기 약 2년
전, 그러니까  1880년 여름의 안개  짙은 어둠 속을 프랑스의  대형
정기 여객선 류니베르 호가 르아브르를 향해 대서양의 뱃길을 가르
고 있었다.
  새벽 4시쯤 되었을까. 근무자 외의 모든  선원들과 선객들은 아직
잠자리에 있었고, 넓은 갑판에는  그림자 하나 얼씬대지 않았다. 깊
디깊은 정적만이  바다 한복판을  떠돌고 있었다. 그때  새벽잠에서
깨어난 늙은 프랑스인 선원  한 사람이 해먹 속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마침 부옇게 먼동이  트고 있었고 파도는 높았으며, 선체가
쉴 새 없이  삐걱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때문에  그가 단잠
을 깬 것은 아니었다.
  선원들은 갑판 사이의  크고 낮은 선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불빛
아래로 빈틈없이 매달려 있는  진회색 해먹이 잠든 사람을 담은 채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따금 승강구 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드센 바람
은 뼛속을 파고들  만큼 차갑고 습기 차 있었다. 사방으로  넓게 펼
쳐진 바다는 안개의 베일 속에서 회록색 파도를 출렁이며 생생하게
살아 꿈틀거렸다.
  '바다만한 것도 없지.'
  늙은 선원은 생각했다.  어렴풋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이상한
이만큼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스크루가  물을 휘
젓는 소리도, 덜그럭거리던 키의  쇠사슬 소리도, 부딪치는 파도 소
리나 휘몰아치던 바람소리도,  그 밖의 모든 소리들이  별안간 일제
히 멎어 버린 것 같았다.  그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갑자기 배
가 침몰해서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관  속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진회색 해먹 속에 갇혀 바다 속을 마냥 떠돌아다닐 것만 같은 그런
예감이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전에는 언제나 자
기의 무덤이 바다 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몹시 두려웠었는
데, 자기를  덮을 것이 무겁고  숨막히는 검은 흙이 아니라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투명한 물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왠지 기쁘기까지
했던 것이다.
  '바다만한 것도 없다니까'
  그는 다시 생각했다. 이윽고 그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들을 되
새기기 시작했다. 임종시의 의식에서와 같이  기름을 바르지도 않고
바다 밑에 누워  있을 경우, 그것이 영혼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지,
그랬다가 영혼이 천국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지는 않을지
등등의 생각에 은근히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문득 앞갑판 밑쪽 선원실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불빛이 그의 눈
길을 끌었다. 그는 상체를 들어 해먹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
두 사람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엔 각기  촛불을 켜
들고 있었다. 누군지를 몰라 그는 좀더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해먹
은 마룻바닥 위로 빈틈없이  매달려 있어서 그 밑을 엉금엉금 기어
야만 잠들어 있는 사람들  밀치거나 부딪치지 않고 방을 지나올 수
가 있었다. 늙은 선원은 이렇게 복잡한 곳을  지나온 사람들이 대체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는  곧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하얀 성의를 입은 두 꼬마가  양 손에 촛불을 한개씩 들고 점점 가
까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선원은 놀라지 않았다.  저렇게 조그만 꼬마들이라면 불  켜진 초
를 들고도 해먹 밑을  충분히 걸어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사제도 같이 올까?'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대  어디선가 작은 종소리가  쨍그랑
쨍그랑 들려왔다. 꼬마들 뒤로 누군가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자제가
아닌 웬 노파로 아이들보다 별로 크지 않았다.
  '어머닌가?'
  지금껏 살아  오면서 자신의 어머니보다 작은  사람들 일찌기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아니라면 누가 저렇게 사람들을  깨우지 않고도 조용히
올 수 있었겠어?'
  그는 어머니가 검은 옷 위에 사제가 입는 것 같은 레이스로 넓게
두른 흰 린넨 성의를 입고 있음을 깨달았다.  손에는 금십자가가 박
힌 큼직한 성경이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그가  고향의 제단위에서
여러번 본적이 있는 성경이었다.
  꼬마들이 촛불을 그의  해먹 옆에 세웠다. 그리고는  꿇어앉아 향
로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늙은 선원은 향로에 달린  쇠줄이 흔들
리는 소리를 들으며 향이 타는 그윽한 냄새에 취해 파란 연기가 하
늘로 피어오르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동안에 어머니는 임종시에
나 읽는  기도문을 낭독하고 있었다.  그는 역시 무덤 속에  묻히는
것보다는 바다  밑에 누워 있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해먹 속에서 사지를  쭉 뻗었다. 한참을 라틴어로  중얼거리고 있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  들었다. 더불어 주위에서  떠돌고
있는 향연 속에서 단조롭고 절그렁거리는 향로의 소리도 들려왔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난 것 같았다. 꼬마들이 초를 들고  앞장 서자
어머니도 책을 덮고는 그 뒤를 따라갔다. 선원은  세 사람이 진회색
해먹 밑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사라지자  정적도
끝이 난 듯했다. 동료들의 숨소리, 선체의 삐걱이는 소리가 다시 들
려왔고, 바람이 몰아치고 파도가  배에 부딪쳐 부서졌다. 그는 자신
이 아직도 살아 있는 인간들  속에서 넓은 바다 위에 떠 있음을 자
각했다.
  '오늘 새벽에 본 건 대체 무엇이지?'
  십 분쯤 지나고  어떤 배 한 척이  류니베르 호의 허리에 충돌했
다. 기선은 두 동강이 난 듯 요란한 굉음을 냈다.
  '아, 짐작했던 대로야!'
  무서운 혼란 속에서 그는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정성껏 차려 입
었다. 다른 선원들은 겨우 잠을 털며 해먹  속에서 굴러나오고 있었
다. 그는 조금 전에 죽음이 달고 부드러울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
던 터라 마치  바다가 제집인 양 자신을  부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충돌이 일어났을 때,  식당 옆 갑판실에는 사환소년  하나가 아직
도 잠들어 있었다.   심한 진동으로 깜짝 놀란 소년은  침대에서 일
어나 무슨 일인가  멍하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머리  위의 조그마
한 현창을 통해  그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안개와
그 속에서  뛰어나온 듯한 알  수 없는 흐릿한 회색  물체뿐이었다.
그는 엄청나게  큰 회색 날개를  보는 듯했다. 거대한 새가  기선에
덤벼든거라고 그는  나름대로 생각했다.  기선은 그 거대한  괴물의
부리와 퍼덕이는 날개에  습격이라도 당한 듯 옆으로  기울었다. 소
년은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잠은 흔적도 없
이 달아나 버렸고 이젠  죽는구나 생각하고 있을 대 커다란 범선이
자기가 탄 배와  충돌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큼직한  돛과 어수선한
갑판을 볼 수  있었다. 갑판 위엔 우의를 입은 사람들이  미친 듯이
우왕좌옹하고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불어오자  돛이 북처럼 부풀어올
랐다. 돛대는 앞으로  툭 튀어나오고 활대에서는 총소리  같은 폭음
이 연달아 들려왔다.  돛대가 세 개나 달린 커다란 범선이  짙은 안
개 속을  달리다가 류니베르 호의 옆구리에  뱃머리를 축 처박고는
꼼짝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선 쪽이 많이  기울긴 했어도 아직
도 추진기가  돌고 있었으므로 이제는 두  배가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아, 큰일이야!"
  소년은 소리지르며 갑판으로 뛰어올라갔다.
  "저걸 어쩌지? 저 배는 곧 가라앉을 것 같은데!"
  소년은 자기가 탄 배는  크고 훌륭해서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판으로  뛰어올라온 선원들도 자
기들의 배에 충돌한 것이  한갓 범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안심을 하고 여유있게 두 배를 떼어 놓는 작업에 착수했다.
  소년은 맨발로 갑판에 서서 범선에 타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어서 기선으로  옮겨 타요! 그러지  않으면 배와 함께  가라앉을
거예요."
  그의 셔츠가 바람에 휘날렸다.
  "이리로 와!"
  맞은편에서 붉은  구레나룻의 사나이가 소년을  발견하고 소리쳤
다. 사나이는 뱃전으로 달려나왔다.
  "기선이 가라앉는다!"
  소년은 범선으로 옮겨 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가 보기엔 범
선이 위험해 보였고, 거기에 탄, 운명이 다 된 것 같은 사람들을 향
해 기선으로 옮겨 타라고 계속 고함을 쳐댈  뿐이었다. 범선의 다른
사람들은 장대와 긴  갈고리로 자기들의 배를 기선에서 떼어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붉은 구렛나룻의 사나이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
이 지금 저 앞에서 손짓하고 있는 소년을 어떻게 구해내야 할지 그
것만이 문제였다. 그는 소년이  너무도 가엾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
는 두 손을 입에 대고 나팔 모양을 만들어 소리쳤다.
  "이리 와, 이리 오라니까!"
  소년은 얇은 셔츠 바람으로  갑판에 서 있었으므로 몹시 춥고 안
돼 보였다.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저쪽 배에 탄  사람들에게 주먹
을 내둘렀다. 그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6백 명
의 선객과 2백 명의 선원을 태운 류니베르 호 같은 커다란 대양 항
해선이 가라앉으리라곤 소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선장과 선원
들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침착해 보였던 것이다. 갑자기  붉은 구레
나룻의 사나이가  긴 갈고리를 움켜잡더니 소년을  향해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는 갈고리가  소년의 셔츠에 걸리자 범선  쪽으로 잡아
당겼다. 소년은  뱃전까지 끌려가다가 기를  써서 갈고리를 벗겼다.
그는 운명이 다한 남의 배에 끌려가지 않은 것이다.
  그때 굉장한 소리가 울려왔다. 범선의  뱃머리에 튀어나온 나무가
뚝 부러지며 두 배가 떨어져 나갔다. 소년은  범선의 뱃머리에서 부
러진 부분이 건들거리는  것을 보았다. 기선은 속력을  다해 진로를
잡아나갔고 범선은 곧  안개에 묻혀 버렸다. 소년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쓰러진 돛뭉치  밑에서 기어나오려고 꿈틀거리는 사람들의 모
습이었다. 범선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만 가라앉은거야.'
  소년은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그는  혹시라도 사람들의 비명소리
가 들려오지 않을까 해서 귀를 기울였다.
  그때 옆에서 기선 쪽으로 발악하며 소리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선객을 살려라! 보트를 내려라!"
  다시 조용해졌으므로 소년은 또 조난의 소리가 들리지 않나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아득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나님께 기도해라, 모두 죽는다!"
  그때 한 늙은 선원이 선장 앞에 다가섰다.
  "배 중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읍니다.  우린 지금 가라앉고 있어
요."
  그는 체념한 듯 조용하게 말했다.

  사고 내용이 온통 배  안에 전해지자 작달막한 귀부인 한 사람이
갑판 위에 나타났다. 그녀는 일등선실에서  잽싼 걸음걸이로 걸어나
왔다. 옷차림이 단정했고 동여맨 보닛의 끈이 화사했다. 곱슬머리에
부엉이 같은 동그란  눈을 가졌으며, 얼굴 혈색이  좋은 노부인이었
다.
  그녀는 항해가 계속되는 짧은  기간에 벌써 배 안의 모든 사람들
과 친해져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미스 호그즈로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선원과  선객들에게도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죽어야
하는데, 그것이 언제 일어나든 자기에게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몇 번씩 되풀이해서  말하곤 했었다. 그녀가 갑판에  올라온 이유도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저 무슨 재미있는, 손에 땀을 쥘  만한 일
이라도 일어나지 않았나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그녀의 눈에  띈 것은 질린 얼굴로 정신없이 뛰어가는
두 사람의 선원이었다. 취사당번이 주방에서  반 벌거숭이로 뛰어나
와 선객들을  깨워 갑판으로 올려보내려  했다. 또 한 사람의  늙은
선원은 구명대를 잔뜩  들고 와서 갑판 위에  내던졌다. 사환소년은
얇은 셔츠만 걸친 채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공포에 떨며 울부
짖고 있었다. 선장은  선교에 서서는 엔진을 죽이고  선객들을 구조
보트에 태우라고 명령하고 있었고, 기관사와  화부들은 기관실로 통
하는 더러운 사닥다리를 달려 올라가 물이 벌써 아궁이까지 찼다고
소리쳤다. 미스 호그즈가 갑판에 나와 선 지 불과 몇 분, 그 자리는
순식간에 하등  선객들로 가득찼다.  얼른 보트에 올라타지  않으면
일.이등 선객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죽고 만다고  소리치며 그들은
무리를 지어 올라왔다.
  흥분과 혼잡의 아수라장에서  미스 호그즈는 그제사 자기들이 절
박한 위험에 직면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곳을  살짝 빠져 나
와 상갑판으로 나갔다. 보트 몇 척이 뱃전에 높다랗게 걸려 있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스 호그즈는 슬그머니 뱃전에  기어 올라
가서 바다 위의 허공에 덩그렇게  떠 있는 보트 한 채에 몰래 기어
들어갔다. 무사히 보트  안에 들어간 그녀는 자기의  지혜와 선견지
명을 기뻐했다. 이것은  명석하고 냉정한 두뇌를 가진  사람의 장점
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한  채의 보트가 내려지자마자  순식간에
미친 듯한 쟁탈전이 일어날 것이며 갑판으로 나가는 문이나 뒷갑판
계단의 혼잡은 말할 수가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즈 호그즈는 보트 뒤쪽에 기대어 보트마다 선원이 배치되고 사
람들이 올라타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별안간  무서운 비명소리가 들
렸다. 누군가가 흥분해서 배  밖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승객들
은 왁자하니 문 쪽으로 몰려 배의 계단 쪽으로 서로 먼저 나가겠다
고 엎치락 뒤치락하기 시작했다. 그 소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배 바
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계단에 이르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어
렵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이리저리 흩어지더니 바다로 뛰어들기 시
작했다. 헤엄이라도 쳐서 보트에 가 닿을 생각들이었던 것이다.
  보트는 인원이 차자 바다로 내려져 서서히 물살을 저어가기 시작
했다. 보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칼을 빼들고  기어올라오려는 사
람들에게 손가락을  자르겠다며 위협했다. 잇달아 보트가  내려지는
광경을 바라보던 미스 호그즈는 자꾸만 달려드는 사람들의 무게 때
문에 보트들이 뒤집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녀 가까이에 있던  보트도 모두 내려졌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
지 그녀가 타고 있던 보트만은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아, 다행이다. 이  보트는 위험이 사라질 때까지 그냥  놔둘 모양
이야'
  미스 호그즈는 계속하여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을 조망해야 했다.
그녀는 마치 지옥의  허공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또한  갑판은 보
이지 않았으나 들려오는 소리로 봐서 무서운 싸움이 벌어지고 있음
을 짐작할 수 있었다. 총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파란 연기가 하늘
로 번지며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주위가 고요해졌다.
  '이번에는 내 보트를 내려 줄거야.'
  미스 호그즈는 태연하게  앉아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데 갑자기 기선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로소  류니베르 호
가 가라앉고 있음과 동시에  자신의 보트가 잊혀진 채 버림받고 있
다는 것도 깨달아야 했다.
  기선에는 또  골든부인이라는 젊은  미국인 여자가 타고  있었다.
몇해 동안 파리에서 살고  있는 양친을 찾아서 유럽으로 가는 길이
었다. 그녀에겐 어린 사내아이가 둘이 있었는데 사고가  났을 대 세
사람은 선실에서 자고 있었다. 잠이 깬 골든  부인은 아이들에게 서
둘러서 옷을 입히고는 자기는 잠옷 위에다 망토를 걸친 채 선실 사
이의 좁은 복도로  달려나갔다. 복도는 갑판으로 올라가기  위해 객
실에서 뛰쳐나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정도까진 그래도 괜
찮았다. 무엇보다 승강구의 계단이  문제였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
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골든 부인은  두 아이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계단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막막하기 그지없었
다. 사람들은 서로 살겠다고 아우성이었고, 그녀의 가족을 거들떠봐
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골든 부인은 근심어린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이 하나쯤이
야 자기가 데려갈 수 있지만 남은 한 아이는 누가 갑판까지 데리고
나갈지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녀  가까이로 와 주는  사람은 없었고, 서로를 밀어  제치며
몸부림치고 있을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팡이를 들고  있었고
그 모습들  또한 가지각색이라서 담요를 걸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골든 부인과 같이  긴 잠옷 위에 외투만 걸친 사람도  있었다. 그녀
는 이런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한편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거칠진 않았지만 모두 정신이 없어 보
였고, 역시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혹시나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하여  그들에게서 눈을 때지
않았다. 그러나 도저히  누군가를 붙잡고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불
가능하다는 것을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포기하기 전에 청년
한 사람을 불러 보려고 했다. 언젠가 식탁의  옆자리에 앉아 여러모
로 친절하게 돌봐준 사람이었다.
  "저, 마텐스씨!"
  청년은 다른 사나이들의  눈빛과 똑같은 잔인하고 차가운 눈초리
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위협적으로 지팡이를 치켜들면
서 그녀가  만일 자기를 붙잡기라도 한다면  당장에 후려칠 기세였
다. 다음 순간 그녀는  신음소리를 들었다. 갑자기 휘몰아치는 강풍
이 좁은 통로에서 막혀 버렸을 때 일어나는  그런 소리로, 신음소리
라기보다는 노여움이 절정에  다다른 소리 같았다. 그것은  꽉 막혀
버린 승강구 계단 위의 군중들 속에서 일어난  소리였다. 한 사람의
앉은뱅이가 계단 중턱까지 업혀 올라가다 좁은 계단을 차지하고 앉
아 통행을 막고 있었다. 그는 식탁에도 업혀서 오가곤 했는데, 그의
하인이 무거운  그를 업고 간신히 계단  중턱까지 올라갔다가 너무
숨이 차서 한숨 돌리느라고  멈추어 선 것이 갑자기 뒤로부터 밀리
는 바람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던 것이다.
  골든 부인은 몸집이 크고 난폭해 보이는 한 사나이가 앉은뱅이를
들어 뱃전으로 내던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사람들
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치 길바닥의 돌멩이 하나를  집어
개골창에 던져 버리는 정도로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직
자기만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광경을 바라보는 골든  부인은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이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자신도 아이들도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음을 확실하게 느낀 것이다.

  한편 신혼여행중인 신랑  신부는 선체의 아래쪽에 위치한 선실에
서 배가 충돌한 것도 모른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배 상단에서 서
로 보트를 타겠다고 아우성치고 있는 것도 그들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그들을 깨우러 오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갑자기
머리 위에서 밤새도록 돌고  있던 추진기가 멈추는 바람에 잠을 깼
다. 신랑이 부랴부랴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삼 분 후 그는 다시 돌
아왔는데 침울한 얼굴로 조용히 선실의 문을 닫으며 신부에게 말했
다.
  "배가 가라앉고 있소."
  신부는 신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사적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보트는 이미 떠나 버렸소."
  두 팔로 신부를 막으며 신랑이 말했다.
  "승객의 대부분은 물에 빠졌고 아직 배에 남은 사람들은 갑판 위
에서 서로 나무토박이나 구명대를 빼앗느라고 무서우리만큼 결사적
이오."
  그는 문간에서 밟혀 죽은  여자의 시체를 타넘어야 했던 일과 사
방에서 들려오던 절규에 대해 이야기를 덧붙였다.
  "모든 게  절망적이오. 밖으로 나가도  소용 없으니 여기서  함께
죽음을 기다리는 편히 훨씬 나을게요."
  신부도 단념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곤 신랑 옆에 앉았다.
  "사람들이 서로 살겠다고 악을 쓰고 다른 사람을 밀쳐 내는 비참
한 꼴을  안 보느니만 못해요.  어차피 죽을 거라면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입시다."
  신부는 자기들에게 남은 이  짧은 시간을 남편과 함께 머물러 있
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라고 있던 것은."
  신랑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함께 오랜  세월을 살아간 다음 임종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내 곁에  앉아 있는 당신에게 지난날 길고 행복한  생의 동반자
가 되어 준 데 대해 감사의 말을 하는 거였소."
  신부는 순간 가느다란 물줄기가 문틈으로 꼬불꼬불 흘러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안 되겠어요!"
  그녀가 절망적으로 손을 치켜올리며 부르짖었다.
  "절 보내 주세요! 여기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다뇨.  네, 전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이러고 있을 순 없어요."
  그녀는 밖으로  정신없이 뛰쳐나갔다.  배가 가라앉을 듯  옆으로
기우뚱하며 기울었다.

  기선은 가라앉고, 아이들은 간 곳이 없고, 젊은 골든 부인은 물속
에 떠 있었다.  세 번이나 물 위로 떠올랐었으나 다시  가라앉는 순
간 그녀는 이제  드디어 죽는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남편이나 아이들 혹은 그 밖의 세상사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오
직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영혼은 마치  석방된 죄수처럼  뛰어 일어났다. 인간의  육신이라는
무거운 굴레를 벗어 던지게  된 것을 기뻐하며 영혼의 참된 고향을
찾아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죽을 수 있는 걸까?'
  그녀는 생각했다. 순간 파도치는 소리, 바람의  속삭임, 물에 빠진
자의 울부짖음, 둥둥 떠다니는 물체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 등 뒤범
벅이 된 주위의 온갖 소음들이 마치 형태 없는 구름이 어울려 회화
적인 정경을 자아내듯 그  어떤 언어가 되어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
다.
  '죽음에 비하면 사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지.... 아, 정말 그래!'
  그녀는 생을 죽음처럼  어렵지 않게 가볍게 살아가려면 어찌해야
하는가를 더불어 생각했다. 주위에서는 물에  빠진 사람들이 난파한
화물이나 뒤집혀진 보트에  매달리려고 기를 쓰며 허우적거리고 있
었다. 그 광적인  고함소리와 저주의 순간이 다시금  녹아들며 또렷
하고 힘찬 언어가 되어 들려왔다.
  '삶을 죽음보다  수월하게 하는 것은  협동하는 마음이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
  그녀에게 이  소리는 온 세계의 잡음을  말하는 대롱으로 바꾸어
그것을 통해 몸소 자기에게 대답을 주는 것 같이 여겨졌다.
  순간 그녀는  구조되었다. 그녀의 귓전에선 그때까지도  하나님의
말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조그만 보트에 건져  올려졌는데 그
녀 외에 제일 멋진 옷을 입었던 건장한 늙은 선원과 동그란 부엉이
눈을 한 늙은 부인, 찢어진 셔츠만 걸친 맥빠진  가련한 소년 등 세
사람만이 구조되었을 뿐이었다.

  다음날 늦은 오후,  한 척의 노르웨이 범선이  뉴펀들랜드의 넓은
모래톱을 따라 항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으며 바
다는 거울처럼 투명했다. 배는 아주 느리게 움직여 갔다. 돛은 모조
리 내걸려 곧 사그라질  것만 같은 약한 바람의 숨결이라도 잡으려
하고 있었다. 바다는 푸른 거울처럼 맑고 잔잔해 보였다. 간혹 산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잔물결을 일으키며 은빛으로 하얗게 반짝이
는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오후의 정적이 한참 지나갔을  때 선원들은 얼핏 검은 물체가 물
위에 떠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곧 그것이  사람의 시체임을 알
았다. 시체는 배  옆에까지 흘러왔고 옷차림으로 보아  선원의 시체
라는 것도  분간할 수 있었다.  시체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편안한
모습으로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그의 모습이 흉하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물속에서 오랫동안 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한  선원이 잔물결 치는  파도를 타고 있는 모습같이  보였다.
무심코 시선을  반대 방향으로 돌린 선원들은  외마디 소리를 질렀
다. 바다 위에 퉁퉁 불은 시체 하나가 또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파
도가 출렁하는  순간에 불쑥  솟구친 것이었다. 사람들은  뱃전으로
달려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름답게 차려  입은 계집아이의 몸
뚱아리가 거기 있었다.
  "아, 아!"
  선원들의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둥둥 떠내려가는 계집아이의  시체가 그들을 쳐다보는 것만 같았
다.
  눈동자엔 무척 얌전한 빛이  서려 있고 마치 무슨 바쁜 심부름이
라도 나온 듯한 표정이었다. 한쪽에서 선원 한 사람이 소리를 쳤다.
또 하나의 시체가  발견된 것이었다. 다섯, 여섯, ....열....  그들은 이
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체가 자꾸만 떠오는  것을 보았다.
배는 시체 사이로 바다를 가르며 느릿느릿 움직여  갔다. 시체가 배
를 에워쌌다. 마치 무언가  구하는 것이 있기라도 한 듯, 그 가운데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떠내려오는 것도 있었는데 얼핏 유목같이 보
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한데 얽힌 시체의 집단이었다.
  선원들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자리에 목 박힌 듯 서서 움직일 줄
을 몰랐다. 그들은 자기들이 본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갑자
기 또 하나의 물체가  바다 밑으로부터 불쑥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
다. 그것은 멀리서 봤을 때  섬 하나가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그
러나 그것이 차츰 가까와지자  사람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체가  한데 몰려 배를 사방에서  에워싸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시체는 배와 더불어 움직여 갔다. 마치 바다를 가로질러 함께
항해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선장은 키를 돌려  조금이라도 빨리 움
직여 가려고 했다. 그러나 돛은 헐렁하게 처지고  시체는 여전히 배
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선원들은 꼼짝도 못하고  서서 흑빛으로 변
한 얼굴들을 서로 멍청이 바라보기만 했다. 배의  속도는 너무도 느
렸다. 그래가지고선 시체를 떼어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
럼 여겨졌다. 그들은  밤새도록 이렇게 움직여 가야  할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그때 스웨덴 선원 한  사람이 고
물에 서서 기도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기도를 마치자  그는 찬송가
를 불렀다. 그의 찬송가 소리와 함께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곧 어슴푸레한 어둠이 번지고 저녁 바람이 불어오면서 돛을 팽팽하
게 부풀려 놓았다. 배도 이제 서서히 죽음의  나라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영원의 시간에 서서

  제3부 사랑을 찾아서

     에바 군네르스투테르

  숲속의 조그마한 통나무  집에서 노파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평
일이었는데도 마치 교회라도 가는 듯한 나들이옷 차림을 한 노파는
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입구 계단 밑의  늘 두는 곳에 넣어
두었다. 노파는 몇 걸음  걸어가다가 오두막을 돌아보았다. 눈을 잔
뜩 덮어쓰고 높다랗게 솟아  있는 전나무 그늘로 인해 오두막을 무
척 작아 보이고 우중충해 보였다. 노파는 애정어린  눈으로 그 초라
한 집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행복한 많은 날들을  나는 저 조그만 오두막에서 보냈지! 아,  주
님은 베푸시고 또 거두어 가시는구나.'
  노파는 숲속의 오솔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이가 많은 탓으로
몹시 쇠약해 있었지만 몸을 꼿꼿이 지탱하는 성격이라 아직 허리는
굽지 않았다. 그녀는 몸가짐이 정숙하고  얼굴은 온화했으며 머리는
희고 부드러웠다. 그런 그녀의 온화한 모습과는 달리  늙은 복음 전
도사처럼 거칠고 무거운  목소리로 지껄이는 것을 들을라치면 참으
로 묘한 느낌을 받는다. 그녀는 헤르굼 신도들의  모임에 나가기 위
해 잉그마르 농장에  가는 길이었다. 노파는 헤르굼의  가르침에 따
라 개종한 열렬한 신자의 한 사람으로 에바 군네르스투테르라 불리
었다. 그녀는 타박타박 걸어가며 혼자서 웅얼거렸다.
  '옛날엔 참  좋았어.... 교구의 절반이  헤르굼의 신도가 되었었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시 되돌아서 버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5년쯤 지났지, 아마? 이젠 겨우  스무 사람 남짓 남았나 몰라. 물론
어린애들은 끼워 넣지도 않았지만 말야.'
  노파는 옛날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 무렵, 그러니까 에바 군네르
스투테르 노파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채 오랜 세월을 홀
로 숲속에서 지내고 있을 때 불쑥 많은 형제 자매들이 그녀의 쓸쓸
한 집으로 찾아들었다.  그들은 큰 눈이 내리고 나면 잊지  않고 꼭
오두막에 이르기까지의  눈을 치워 주기도 하고  바짝 마른 장작을
언제나 가득 채워 주기도 했다. 물론 노파가 부탁한 일은 아니었다.
또한 잉그마르의  딸 카린과 그  여동생들, 그리고 그 밖의  이렇다
할 사람들이 그녀의 조그마한  회색 통나무 집에 몰려와서 자주 모
임을 갖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유일한 구원의 길을 저버리게 되다니!'
  노파는 한숨을 쉬었다.
  '벌이 내려질거야. 불과 몇  사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그
나마도 꿋꿋한  신앙을 지킨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 이번  여름에
모두들 멸망하게 될거야.'
  노파는 문득 헤르굼의  편지를 떠올렸다. 그 편지를  헤르굼의 신
도들은 마치  사도행전을 읽듯이 집회 때마다  소리 높여 낭독하곤
했다.
  '우리에겐 마치 그가 꿀 같은 존재였지. 그 무렵 헤르굼은 우리들
에게 개종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관대하게 친절을 베풀고 배반하는
사람들도 따뜻하게 용서하라고 가르쳤었는데, 요즘은  꼭 고뇌의 씨
앗 같은 사람이 되어 버렸어. 보내오는 편지마다  시련과 벌에 관한
얘기뿐이구.'
  노파는 숲을  거의 벗어났다. 멀리  아래로 마을이 내려다보았다.
상쾌한 2월의 하루였다. 눈은 새하얀 순결함을  드러내고 바람 한점
불지 않는 숲속의 나무들은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잠에서 나무들이 깨어날 때면 아름다운 풍경은 불과 유황
의 비로 모두 사라지고  잿더미 속에 파묻혀 버릴거라고 노파는 생
각했다. 포근히 눈의  도도자락을 덮어 쓴 일체의  것이 그녀에게는
불길에 휩싸일 듯한 암시적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헤르굼은 정확하겐 말하지 않았지만 밤낮  지독한 시련에 대해서
만 적어 보내구 있어.  아아, 이 마을이 소돔과 고모라의 성처럼 아
니며 바빌론처럼 재앙을 받는다 해도 이상할 건 하나도 없을거야!'
  에바 군네르스투테르는 마을을 지나면서 집들을 하나하나 눈여겨
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그것들이 장차  닥쳐올 재앙으로 뒤흔들
리고 허물어져 먼지와  재로 되어 버리는 광경들이  끊이질 않았다.
간혹 길을 가다 사람들과 마주치기라도 할라치면 그녀는 그들이 머
지 않아 지옥의 괴물들에게  몰리어 잡혀 먹힐 것이라는 상상을 하
곤 했다.
  그때 저만큼 앞에서 아름다운 처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건 교장댁 게르트루드 아냐!'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눈동자가 꼭 눈 위에  반사된 햇빛처럼 빛나네. 가을에는 잉그마
르와 결혼한다구 그랬지, 한창  행복할 때야. 응? 옆구리에 끼고 있
는 건 실뭉치인가?  혼수감으로 테이블보나 침대 시트  같은 걸 짤
모양이구먼. 하지만 그것을 다 짜기 전에 파멸이 오구 말거야.'
  노파는 음험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을은  놀라우리만큼
아름답게 변모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허술한  회색 오두
막과 마찬가지로 이처럼 멋을 부린 맞배지붕이나 큼직한 활 모양의
창문이 달린 희고 노란 훌륭한 가옥들도 머지않아 통나무 사이에는
이끼가 기고 결국은 허물어지고 말거라고  생각했다. 마을의 한복판
에 이른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별안간  분노의 감정이 복받
쳐 지팡이로 길바닥을 탕탕 두들기며 소리쳤다.
  "재앙이 내릴 것이야, 재앙이!"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다.
  "이곳의 집들엔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이교의 가르침에 취한 이간
들이 살고 있어.  왜 주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죄악의 구
렁텅이로 빠져드는지  몰라. 그런  사람들 때문에 모두가  멸망해야
하다니! 하나님께선  올바르지 않은 자와  더불어 올바른  자에게도
무섭게 채찍을 휘두르실게야."
  에바 군네르스투테르가 강을  건넜을때 다른 헤르굼 신도들이 뒤
를 따랐다. 그것은  펠트 중사, 브레트 군네르와 그의  아내 브리타,
또 그  뒤로는 헤이크 마츠  에릭손과 그의 아들 가브리엘,  시의원
클레멘손의 딸 군힐드가 뒤따르고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찬란한
민속적인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눈 위를 걸어가는 모습들이 참으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러나  에바 군네르스투테르의 눈에
는 그저 이미 운명이  결정된 죄수나 도살당하기 위해 끌려가는 소
와 같은 비참한 무리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절망이라는 무서운 짐에 짓눌린  듯 땅에 눈을
박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기다리던 하늘의 왕국이나  새로운
예루살렘은 사라지고 이제는  신도들 수마저 줄어들어 앞날의 희망
은 절단된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몸 안의 무엇인가가  뚝 떨어져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발을 질질 끌며 느릿느릿 나아갔다.
이따금 한숨소리만이 새어나올 뿐 서로에게 아무런 할 이야기도 없
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들 낙담한 얼굴들이지?'
  노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악의 날을 믿는  것 때문은 아닌 것  같구. 그렇다구 헤르굼의
편지 내용을 듣고  싶어하는 것도 아니구. 내가 그 사람의  말을 설
명해 봤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말이야.  그런데 무얼 저
렇게 근심하는건지 원. 흥, 이 푸른 하늘 밑 낮은 곳에서 사는 인간
들은 이제 무얼  두려워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야.  어두운 숲
속에 사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도 생각해 낼 줄 몰라.'
  그녀는 신도들이 수심에 찬 이유가 일요일도 아닌 평일에 할보르
의 부름을 받은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할보르에게서 신도들 가운
데 또 탈퇴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조차 할보르의 모임에  언제까지 머물러 있을
지 의심스러웠다. 자신들도  차라리 이 기회에 그만둬  버리는게 좋
을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 그만둬 버리는 게  좋을거야. 시들시들 죽어가는 것보다 급
사하는 편이 나으니까. 모임은 해체시켜 버리지 뭐. 이 조그만 평화
의 복음을 지닌  사회가, 한마음 한뜻으로 형제애를  나눴던 즐거운
생활이 이렇게 파멸해야 하다니'
  그들은 저마다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렇게 농장을 향해  그들이
걸어가고 있을 때 반들거리는 겨울의 태양은 경쾌하게 푸른 하늘을
움직여 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잉그마르 농장에 다다랐다.  농장의 가옥 거실에는
천장 가까이에 한  폭의 낡은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그것은  약 백
년 전에  시골의 어느 화가가  그린 것이었다. 높은 성벽을  둘러친
도시를 배경으로 성벽  위에는 지붕과 박공이 보였다.  어떤 집들은
잔디흙으로 지붕을 얹은  붉은 농가였고, 어떤 집은  슬레이트로 지
붕을 얹은  흰 저택이었다. 또  어떤 집은 파른의 커스티네  교회를
본떠 동판 지붕에  묵직한 탑을 올린 것이 보이기도 했다.  성벽 밖
에는 한 신사가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반바지에다 버클이 달린 구
두를 신고  손에는 벨가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한 대의  마차가
성문에서 달려나오고 있는  것이 보이고, 그 안에는  머리분을 바른
가발에다 외투 모자를 쓴 숙녀가 앉아 있었다.  성벽 저쪽에는 암록
색 잎이 무성한  나무숲이 있었다. 또한 땅에는 키 큰  풀이 나부끼
는 사이로 반짝이는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림  아래쪽에는 큼직
한 장식 문자로 '하나님의 성도 예루살렘'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 해묵은  그림은 천장 가까이에 높다랗게  걸려 있어서 좀처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잉그마르 농장을 찾는  대다수의 사람
들은 그곳에 그런  그림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은 푸른  월귤나무의 싸라 같은 가지로  가장자리가 둥그렇게 싸여
있어서 쉽사리  방문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에바  군네르스투테르는
그것을 보자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구, 잉그마르  농장 사람들도 드디어  우리들이 멸망하게 된
것을 알았구나. 그러니까  천당의 도시 쪽으로 우리의  마음을 돌리
게 하려는거야.'
  카린과 할보르가 그녀에게 인사하기 위해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다른 헤르굼 신도들보다 더 어둡고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도 세상의 종말을 예감하고 있는거야.'
  에바 군네르스투테르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모인 사람들 가운
데 제일 연장자였으므로  긴 테이블의 상좌에 앉혀졌다.  그녀 앞에
는 겉봉에 미국 소인이 찍혀진 한 통의 편지가 놓여져 있었다.
  할보르가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형제  헤르굼한테서 또 편지가 왔습니다.  ....그래서 여
러분을 오시라고 했지요."
  "퍽 중요한 편지인 모양이군요, 할보르"
  브레트 군네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헤르굼이  어떤 의미로 우리 신앙에  대시련이 닥쳤
다고 말했었는지 여러분도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나는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을 위한 시련을 두려워할 사람은 없
으리라 생각합니다."
  군네르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들은 신도들이 아직 전부 모이지 않았으므로 마지막 한 사람이
모습을 나타낼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에바 군네르스투테르 노파는
조용히 헤르굼의  편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묵시록에  있는
일곱 개의 봉인이 찍힌  편지를 생각하며 누군가의 손이 저 편지에
닿자마자 파멸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올지  모른다고 상상했다. 그
녀는 눈을 들어 예루살렘의 그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구 말구.  아, 나도 저 도시에 가고 싶어.  황금으로 대
문을 달고 성벽은 수정으로 쌓아올린 저 도시에....'
  그리고는 혼자서 무엇인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성곽의 기초석은 갖가지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이
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며, 다섯째
는 홍마노에다,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 아홉째는 당황옥,  열째는 비취옥, 열한째는 청옥이며, 열두째
는 자옥이라'
  노파는 묵시록에 넋을 잃고 있다가 편지를 놓아둔 테이블로 할보
르가 다가서자 졸다가 들킨 사람처럼 움찔하며 놀랐다.
  "그럼 시작하기 전에 찬송가를 하나 부르겠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내 복된 집'을 합창했다.
  두려워하던 순간이 약간 지연되자 에바 군네르스투테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 딱도 하지. 나 같은 늙은이가 이토록 죽음을 두려워하다니.'
  그녀는 자신의 심약함을 부끄러워하며 생각했다.
  찬송가가 끝나자 할보르는  편지를 집어 펼쳐 들었다.  에바 군네
르스투테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편지 안에  들어 있
는 전갈을 올바른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해달라고 지리한 기도를
시작했다. 할보르는 편지를  든 채 기도가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렸
다. 잠시 후, 그는 설교하는 어조로 편지를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나의 형제  자매여, 여러분의 안녕을 기도합니다. 지금
껏 나는 나와 나의 교리를 믿으시는 여러분이 신앙적으로 고독하다
는 생각을 해왔었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이곳 시카고에서 우리들
의 동지를  발견했습니다. 그분은  교리대로 생각하고 또  행동하는
사람이지요.
  먼저 여러분께 알리고 싶은  것은 오래 전에 이 시카고에서 살았
던 에드워드  골든이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골든이나 그  부인도
모두 신앙심이 두터운 분들로  세상에 너무도 고뇌가 많은 것을 보
고 깊이 슬퍼하며 불행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도록 가호를 내려 주
십사고 하나님께 빌었답니다.  마침 에드워드 골든 부인은  멀리 바
다를 건너는 여행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데 그 항해 도
중 배가 난파되는 불행을 당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는 위험에 처한
부인은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부인에게
온 인류가  한마음으로 협동하며 살도록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습니
다. 그리하여  위험을 겪고  되살아난 부인은 남편에게로  돌아오자
그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린 지상 명령이에요.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지극히  지엄해서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장소는 온  세계에 단  한군데뿐이에요. 그러니까 동료들을  모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요. 시온의 산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해야죠.'
  이윽고 골든 부처는  다른 30명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출발했습
니다. 지금 그 분들은 거기서  한 지붕 아래 협동.단결하며 살고 있
지요. 또한 금품의 보수는 일체 거부한 채  가난한 사람들의 자제를
맡아 기르거나 앓는  자들을 간호하며,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기꺼이 돕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교회나 길모퉁에서 설교를 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 분들
의 생각이지요. 그런 중에 유태인과  회교도들을 설교하고 가르쳐서
개종시키려고 팔레스티나에 와  있던 기독교도들은 그 분들을 소리
높이 비방했습니다. '바보에다  광신자임이 틀림없다' '대체 어떤 인
간들이지? 설교를  안하다니 필경 이단자들  속에서 그릇된 생활을
하고 죄를 물들이려고 이곳에 온 걸거야' 이렇게 떠들어댔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정착한 사람들 가운데 성장한  두 자식을 둔
돈 많은 과부가  있었습니다. 미국에 동생이 남아  있었는데 사람들
이 그 동생에게 이구동성으로 말하더랍니다. '어쩌자고 그렇게 무절
제한 생활을 하고 있는  무리들 속에 누님을 그냥 살도록 가만있는
거요? 그자들은  게으름뱅이에다 누님의 돈으로 살고  있는데....' 동
생은 누님에  대해 법률상의 수속을 밟아  아이들을 미국에 데려다
기르기로 했지요. 이 일로 인해 그 과부는  아이들과 함께 에드워드
골든 부처를 따라 시카고에 돌아왔습니다.  그때는 이미 예루살렘에
살기 시작한지 14년이 지난 뒤였답니다.
  그분들이 그 먼 나라에서 돌아오자 각 신문마다 가지각색의 보도
가 살렸습니다. 그분들이 미쳤다는 사람도  있고 사기꾼이라고 말하
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할보르는 읽던  것을 잠시 멈추고 지금까지  읽은 내용의 요점을
다시 되풀이해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읽어 나갔다.
  "그런데 시카고에는  여러분도 이미 잘 알고  계시는 집이 한 채
있습니다. 이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봉사하고
싶어하는 자들로서 일체의 것을 공동분배하며 서로 돌보며 살고 있
지요. 우리들, 그러니까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이 '미치광이'들에 관한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는 '이 분들은
우리들의 신앙과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다. 정의를  위해 일하고 단
결하는 것이 똑같다. 이  분들을 한번 만나보자'고 의견을 모았습니
다. 그분들에게 우리를 만나러  와 주십사고 편지를 쓰게 되었지요.
그분들은 그 초대에  응했습니다. 한 자리에 모이자  우리는 서로의
교리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신앙의  원리가 똑같다는 결론에  이른
우리는 서로를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무척 기
뻐들 했지요.
  그분들은 그 흰산 위에  찬란히 빛나는 성도의 영광에 대해서 우
리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우리  형제 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면 안 될까요?' 그 분들이 대
답했습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성도는 지금 투쟁과 압력, 결핍과 질
병, 증오와 빈궁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그러자 또  다른 형제가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러분을 보낸 것은 우리도 여러
분과 함께 그  먼 나라에 가서 그런  것들과 싸우고 있는 여러분을
도와드리라는 뜻이 아닐까요?'  순간 우리는 모두 그렇다는  성령의
소리를 듣는 듯했습니다.
  우리는 비록 가난하고 배운  것은 없지만 그분들 속에 우리도 넣
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결국  그분들도 그러마고 승락했지요.
그분들은 우리의 신앙을  받아들이고 우리도 그분들의 것을 받아들
인 것입니다.  그동안 성령이  우리들에게 강림하여 우리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에  가득 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
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일찌기 독생자를 보내신 땅에  우리를 보
내 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또 하나님이 그  거룩한 시온 산
에서 우리의 교리를 펼  것을 바라신다는 생각에 우리의 교리를 올
바르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스웨덴에  있는 다른 많은 형제  자매도 함께 예루살렘에
데리고 가서  그 거룩한  임무에 참여시키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들도 예루살렘에 함께 가서  사이좋게 살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지요. 그런데 예기치 않은  걱정이 생기기 시작
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옛부터 전해내려오는 훌륭한 농장과  직업
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걱정에 대해 예루살렘에서 온 분들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논밭이
나 목장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밟으신 길을 밟도
록 해드릴 수는 있지요.'
  우리는 그래도 미심쩍어서  '그 분들은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나라에는 결코 가려 들지 않을  겁니다'라고 했더니, '하지만 그분들
도 펠리스티나의 들에서  들려오는 구세주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알
아들으실 겁니다.'라고 합디다.  '그분들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재
산을 나누고 거지처럼 가난해지는 건 결코 원치  않을 겁니다. 물론
자기들의 권력을 포기하려  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겠구요. 그분
들은 지금껏 그  마을에선 이렇다 할 자리에  있어 왔으니까요'라고
도 했지요. 그랬더니 '우리는  그분들께 드릴 재산도 권력도 없습니
다. 그러나 구세주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해드릴
수는 있지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비로소 여러분이 오셔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형
제 자매 여러분,  이 편지를 다 읽고서 어떠한 논평을  하려고 들진
마십시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시고  성령이 여
러분에게 명령하는 대로 따르십시오."
  할보르는 편지 읽기를 마치고 그것을 접어 넣으며 말했다.
  "자, 여러분 가만히  앉아서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는 헤르굼이
써 보낸 대로 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각기 눈을  감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에바 군네르스
투테르 노파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묵묵히 자신에게 들려올 하나님
의 소리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했다.
  '말할 것도 없이, 헤르굼이  우리더러 예루살렘에 가라고 하는 것
은 커다란 파멸을  면하도록 해주려는거야. 하나님은 펄펄  끓는 지
옥불에서 우리들을 구해 주시고, 비오듯  쏟아지는 업화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겠지. 우리들은 내려질 벌책을  면하도록 경고하시는 하나
님의 말씀을 듣게 된거야'
  노파는 이쯤 되면 누구에게든 집을 버리고 고국을 떠난다는 것이
희생적인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난 고향의  숲과 강
과 기름진 밭을 버리는  것이 과연 현명한 것인지 아닌지 그녀로선
의심해 볼 여지가  없었다. 신도들 가운데는 생활방식을  바꾸는 일
과 조국, 부모,  친구, 친척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두려움으로 여기
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것들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
저 하나님이 옛날 노아나  롯을 구하신 것처럼 자기들을 도우려 한
다고만 생각되어질 뿐이었다. 그녀는 마치  헤르굼이 예언자 엘리아
처럼 자기들이 몸뚱이째  하늘로 끌려올라갈 것이라고 써 보내기라
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계속 깊은 묵상에 잠겨 있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도 심
한 정신적 괴로움으로 이마에 진땀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 이것이 언젠가  헤르굼이 말한 시련인가보다!'고 한숨을 쉬기
도 했다.
  지평에 걸린 태양이  그 날카로운 광선을 방안에  비추고 있었다.
저물어 가는 태양빛에 많은 사람들의 창백하던 얼굴이 붉게 물들었
다. 륭 비오른  오라프손의 아내 마르타 잉그마르손이  의자에서 내
려와 방바닥에 풀썩  꿇어 앉았다. 그러자 한 사람 한  사람 연달아
꿇어 앉았다. 별안간 몇 사람이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그들의 얼굴
이 미소로 환하게 밝아졌다.
  잉그마르의 딸 카린이 경탄하듯 소리쳤다.
  "저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요!"
  "저도 가겠어요, 하나님이 저를 부르고 계십니다!"
  군힐드가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온통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외
쳤다. 그때 동시에 크리스텔과 그의 아내도 외쳤다.
  "저도 들려오, 가야 한다고. 저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
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잇달아 그들에게 들려오고,  동시에 그 동안의
괴로움과 마음속의 미련들이 깡그리 사라졌다.  커다란 기쁨이 잉그
마르 농장에 소용돌이쳤다. 그들은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들의 조그마한 새로운 보금자리가 어떻게 가지를 뻗고 어
떻게 새로운 꽃을  피우게 될 것인가 하는 것과, 성령의  부름을 받
은 놀라움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할보르만
이 혼자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을 부르신
것처럼 왜 자기는 불러 주지 않는 것인지 괴로움에 잠겨 기도를 계
속했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밭과  농장을 더 중시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야. 아, 내가 이처럼 쓸모없는 인간이라니!'
  그런 그에게 카린이  다가왔다. 카린은 남편의 머리에  손을 가져
다 대며 조용히 속삭였다.
  "가만히 계세요. 할보르. 침착하게 조용히 귀기울여 보세요."
  할보르는 힘껏 손을  쥐어 짰다. 손가락의 관절이  뿌드득하고 소
리를 냈다.
  "하나님께선 아마 나를 보내실 만한 가치를 못 느끼시나봐"
  "그럴 리가 없어요. 할보르. 가만히 앉아  계세요. 당신은 꼭 가게
될거예요."
  카린이 그 옆에 꿇어앉아 남편의 목에 살며시 팔을 감았다.
  "조용히 들어봐요. 할보르. 두려워하지 말고."
  한참 후 할보르의 얼굴이 가볍게 개었다.
  "아, 들려.... 뭔가, 멀리서, 아주 멀리서 들려오고 있어."
  그가 쉰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사의 하프소리예요.  성령이 강림하시는 것을 알려오는거지요.
자, 좀더 조용히 귀기울여 봐요. 할보르"
  카린은 몸을 남편에게로  바짝 갖다댔다. 그것은 남들이  보는 앞
에선 결코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
  "아아!"
  할보르가 손뼉을 쳤다.
  "이제 들려, 정확하게,  아주 큰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천둥처럼 울렸어. '너는 우리의 성도 예루살렘으로  가거라!' 어때요,
여러분이 들은 것도 그랬습니까?"
  "그렇습니다. 네, 그래요."
  사람들이 소리쳤다.
  "우리도 모두 그런 말씀을 들었어요."
  이번엔 에바 군네르스투테르 노파가 한탄하기 시작했다.
  "나한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나는  여러분과 못 가게  되나
봐, 아아, 나는 롯의 마누라 같은 사람이어서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
지 못하고 뒤에 처지게 되었어. 나는 여기  남아서 소금기둥이 되어
버릴거야."
  그녀는 절망적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헤르굼  신도들이 그녀 가까
이로 모여 앉아 함께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그녀에겐 여전히 아무
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의 절망은 공포로 변했다.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어!"
  그녀는 신음했다.
  "하지만 함께 데려가  주겠지, 응? 설마 나만 혼자 불의  호수 속
에 파멸하도록 그냥 남겨두진 않겠지, 응?"
  "기다려 보세요, 에바 할머니!"
  신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오늘이나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 들려올거예요."
  "내 말에는 대답도 않는구먼!"
  노파가 울부짖었다.
  "지금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대답해 주지 않았어! 당신들은  내게
부르심이 오지 않으면 버려두고 갈 참이지?"
  "부르심은 옵니다. 기다리세요. 조용히 귀기울여 봐요!"
  "내 말에나 대답해 줘,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구먼!"
  노파는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
다.
  "에바 할머니,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함께 갈 수가 없어요!"
  신도들은 분명하게 잘라 말했다.
  "하지만, 틀림없이 부르심이 올겁니다."
  노파는 꿇어 앉았던 자세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흐늘흐늘해
진 늙은 몸을 쭉  펴고는 지팡이로 방바닥을 두들기며 벌컥 소리를
질렀다.
  "그래, 너희들은  날 버려두고  떠날 참이야, 저희들끼리만.  오냐
그래, 나 혼자만 멸망시킬 참이구나!"
  그녀가 사납게 분노를 터뜨렸다.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에서 성급
하고 거칠고 불 같은 젊은 날의 에바 군네르스투테르를 보는 듯 했
다.
  "좋아, 나는 이제 아무것도  너희들과 같이하지 않아도 돼! 안 도
와줘도 좋다구. 흥! 처자를  버리구 부모도 버리구 저희들만 살겠다
니! 훌륭한  농장을 버리다니, 이  바보 멍청이들아! 가짜 예언자의
엉덩이나 따라다니는 미련한  것들, 이것이 너희들의 꼬락서니구나!
너희들 머리 위엔 진짜 지옥의 불이 쏟아질게야.  멸망하는 건 이쪽
에 남는 우리들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야!"
  영원의 시간에 서서

  제3부 사랑을 찾아서

     잉그마르와 게르트루드

  사람들이 잉그마르의 집에  모여 헤르굼의 편지를 읽고  있을 때,
아름다운 2월의 태양 아래 두  사람의 젊은 남녀가 한길에 서서 이
야기를 하고 있었다.  청년은 방금 숲에서 커다란  통나무를 운반해
왔는데 통나무가 어찌나 무거운지 말도 빠듯이 끌  수 있었다. 그렇
게 무겁고 힘이  든 중에도 청년은 일부러  길을 돌아 마을을 통해
흰 학교의  문 앞으로 지나가기로  했다. 말이 학교 앞에서  멈추자
젊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게르트루드였다. 그녀는 무지막지
하게 큰 통나무를 바라보곤 눈을 크게 떴다.  통나무는 참으로 굵고
곧은데다가 황갈색 나무  껍질이 무척 아름다왔으며 단단한 나무질
에 흠집 하나  없었다. 그녀는 이것을 칭찬하기 위해 무슨  말을 해
야 할지 몰라 그저 찬찬히 훑어보기만 했다.
  청년은 그녀에게 그 나무가  오라프 산 북쪽 멀리 황야에서 자랐
다는 것, 그리고 언제 베었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눕혀 놓고 말려야
했는가를 감동적으로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그는  또 둘레의 직경이
얼마인가를 정확하게 덧붙여 말하는 것 잊지 않았다.
  "하지만 잉그마르, 이게 겨우 첫번째예요."
  잉그마르가 5년이나 걸려서 이제사  자기들의 집을 지을 첫 나무
를 운반해 왔다고 생각하니 게르트루드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조금만 기다려.  길이 뚫려 있는  동안에만 재목을 운반해  놓는
다면 곧 집을 지을 수 있을 테니까."
  잉그마르는 이제 앞으로의 모든 고난쯤이야 극복할 수 있다고 생
각했다.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지자 추워졌다. 말은 덜덜  떨면서 말굽을
차기도 하고 머리를 거칠게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갈기와 이마 털
엔 하얗게  서리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잉그마르와  게르트루드는
추위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들은  지하실에서 다락방에 이르기까
지 자기들의 집을  짓기 위해 열을 올렸다. 그들은 상상의  집이 완
성되자 이번에는 가구를 들여놓기도 했다.
  "이 긴 거실 벽쪽에다 소파를 놔야겠어."
  잉그마르가 말했다.
  "하지만 소파를 살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해요."
  게르트루드의 반문에 잉그마르는  아차 싶어 입술을 지그시 깨물
었다. 그가 가구점에서 소파를 사게 되어 있다는  것을 나중까지 말
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무심코 지껄이고 만 것이다.
  잉그마르에게서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게르트루드는 자기도 5년
동안 감추어 온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장식
으로 넣은 특이한 리본을 만들어 팔았으며, 그 돈으로 단지나 남비,
크고 작은 쟁반, 시트에다 베갯잇, 식탁보 등 갖가지 살림도구를 장
만해 두었던 것이다.
  잉그마르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런 그녀에게  어떠한 칭찬을
해도 모자랄 것 같았다. 아낌없이 감격의 말을  쏟아놓던 그가 갑자
기 입을 다물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아름답고 예
쁜 처녀가 머지않아 자신의 아내가 된다는 사실이 도무지 과분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세요?"
  게르트루드가 민망한 듯 볼에 홍조를 띠며 말했다.
  "난, 게르트루드가  나만의 여자가 된다는 게  너무 신기해. 내겐
과분한 것 같아."
  게르트루드는 빨개진 얼굴을  숙이고 말없이 커다란 통나무만 쓰
다듬듯이 계속 만졌다.  그녀에겐 사랑과 보호라는 것이  자기를 위
해 마련되어 있는 것 같았다. 배후자로서 지금  앞에 있는 잉그마르
가 선량하고 현명하며 또한 고상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점을 그녀
는 마음속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그때 한  노파가 그들 앞을  지나갔다. 그녀는 무슨 일인가  몹시
화가 난 사람처럼  혼잣말을 툴툴거리며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고 있
었다.
  "그래 그래, 네놈들의 행복은 먼동이  틀 때부터 장미꽃 새벽까지
밖에는 계속되지 않을거야.  시련이 닥치면 이끼 낀  새끼줄처럼 흐
트러져서 영원히 암흑 속에서 생을 보내야 할껄!"
  "설마 우리들에게 하는 말은 아니겠지요?"
  게르트루드가 안색이 변하여 소근거렸다.
  "당치도 않아, 우리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해!"
  잉그마르는 가볍게 웃어 넘겼다.

  영원의 시간에 서서

  제3부 사랑을 찾아서

     잉그마르 농장

  토요일, 목사는 숲속의 북쪽 끝 고지대에 살고  있는 어떤 병자에
게 불려갔다가 밤이 늦어서야 심한 어려움을 무릅쓰며 집으로 돌아
오고 있었다. 말은 바람에 날려 수북이 쌓인  눈구덩이에 자꾸 처박
혔으며 썰매는 몇 번이나 뒤집힐 뻔했다. 목사와  마부는 줄곧 말을
멈추게 하고  길 위의 눈을  치워야 했다. 다행히도 심하게  어둡진
않았다. 큼직한 보름달이  눈구름 뒤에서 굴러 나와  은빛으로 땅위
를 비추고 있었다. 목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으
는 눈송이가 빙그르 돌며 그에게로 떨어졌다.
  어떤 곳은 그런대로 수월하게 지날 수 있었다.  눈이 쌓이지 않은
외길도 있었고 또 눈은  높이 쌓였더라도 경사가 느리고 평평한 곳
도 있었다. 정말  힘든 것은 바람에 날려서 쌓인 눈이  나무 높아서
앞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곳을 지날 때였다.  그런 곳에서는 개골창
에 빠지거나 울타리의 나무에 말이 부딪치는 위험을 감수하고 부득
이 길을 벗어나  밭이나 울타리 같은 것을  마구 가로질러 가야 했
다.
  큰 눈이 올 때마다 목사와 마부는 잉그마르 농장 옆의 높다란 판
자 울타리가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그것만 잘 넘으면 그 뒤는 별문제가 없는데'
  목사는 잉그마르에게  유독 그 자리에 눈이  많이 쌓이도록 하는
높다란 판자 울타리를 치워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던 생각이 났
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설령 잉그마르 농장의 모든
것이 개조된다 하더라도 그 묵은 판자 울타리만은 절대로 움직여질
리가 없음을 목사는 잘 알고 있었다.
  가까스로 농장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예상대로 그곳은  눈이
날려서 벽처럼 높고  바위처럼 단단하게 쌓여 있었다.  여기서는 한
쪽으로 비켜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그  위를 곧장
뛰어넘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도 가능한 일은 아닌  것이다. 마부가
자기 혼자 농장에 내려가서  도움을 청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물
었다. 목사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카린과 할보르를 만난다는 것
이 유쾌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벌써  5년 이상이나 그들과  교류를
끊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들은 눈 위로  그냥 말을 몰고 갔다. 약간 얼어붙은  눈은 말이
꼭대기에 올라갈 때까지  그런대로 지탱하다가 마침내 허물어져 내
렸다. 말은 갑자기 무덤에라도 빠진 듯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기운이 쭉 빠져서 움직일  생각도 못한 채 멍청이 아래만 바라보았
다. 한쪽 썰매 끈이 끊어진 게 눈에 띄었다. 이젠 구덩이 속에서 말
을 끌어올린다 해도 더는 나아갈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목사는 잉그마르  농장으로 향했다. 거실의 난로에는  장작개비가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고, 카린이 그  한쪽 옆에 앉아 깨끗이  빗은
양털로 실을 잣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한 줄로 길게  앉아 아마를
잣고 있는 하녀들의  모습도 보였다. 남자들은 난로의  반대쪽을 차
지하고 있었는데 일에서 돌아온  참이라 쉬고 있거나 칼로 나무 막
대기를 다듬는다거나 쇠스랑의 날을 세우는 간단한 일들을 하고 있
었다.
  목사가 사정 얘기를  했다. 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남
자들은 눈에서  말을 끌어내기  위해 밖으로 달려나갔다.  할보르는
목사를 식탁으로 안내하여 자리를 권했으며,  카린은 하녀들을 부엌
으로 들여보내  커피를 새로 끓이게 하고  얼른 저녁을 준비하도록
일렀다. 또한 그녀는 목사의 커다란 털가죽 윗도리를  벗겨 불에 말
리도록 지시하고  등잔에 불을 켜게 하며  남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물레를 식탁 가까이로 가져다  놓는 등 수선을 떨었
다.
  목사는 그런 그녀를 지켜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위대한 잉그마르가 살아 있었다 해도 이 이상의  환영은 받지 못
했을거야.'
  할보르는 날씨며 길은  어떤지를 묻고, 밭은 좋은  값으로 팔았는
지, 오래 전부터 미해결로 되어 있던 집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등
을 연달아 묻기도 했다. 카린은 목사 부인의  안부를 물으며 그녀의
건강이 좋아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그때 목사의 마부가 들어왔다.  그는 말을 끌어냈으며, 안장도 다
시 이었고, 언제라도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카린과
할보르는 저녁을 들고 가라며 목사를 붙잡았다.
  커피가 나왔다.  쟁반에는 큼직한 은주전자와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특별한 의식 때가 아니고선 절대 사용하지  않는, 소중히 간직
해 두었던  은으로 만든 오래된  설탕단지, 그리고 갓 구운  러스크
과자와 비슷한 비스킷을 보기 좋게 담은 은그릇이 놓여져 있었다.
  목사의 작은 눈이  놀라움으로 동그랗게 열렸다. 그는  이게 꿈인
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할보르가 잉그마르 농장의  숲에서 잡았다며 커다란 노루 가죽을
꺼내 보였다. 그는 가 가죽을 마룻바닥에 폈다.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가죽은 생전 처음 보겠군"
  목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카린이 할보르에게 다가가 귓속
말을 했다. 할보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사를 바라보았다.
  "이 가죽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사양하지 말고 받아 주십시오."
  카린은 식탁과  식기장 사이를 분주히 오고가면서  제일 좋은 옛
은식기를 꺼내  왔다. 그녀는 또  만찬 때나 쓰려고 장만해  두었던
가장자리를 예쁘게 꾸민  식탁보를 테이블 위에 펴  놓았다. 그녀는
계속하여 우유나 생맥주 같은 것을 큼직한 은단지에 부어 차례대로
내왔다.
  성대한 만찬이 끝났다. 목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할보르와 머슴  두 사람이 뒤따라 나와 눈을 치워주
기도 하고 뒤집힐 듯한  썰매를 바로잡아 주기도 하면서 목사가 그
의 집 현관에 무사히 도착하기까지 돌아가지 않고 전송해 주었다.
  목사는 할보르에게  진정으로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다.  옛정을
다시 새롭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를 그는 새삼 깨달
았다. 할보르가 선뜻 자리를 뜨지 않고 주머니를 뒤졌다. 뭔가 한참
부스럭거리다가 그는 조그맣게 접은 쪽지 하나를 꺼냈다.
  '지금 목사께서 이걸 받아 줄까?'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아침 예배가 끝난 뒤에  읽어 주었으면 하
고 전하려던 어떤 통지였다. 만일 목사가 쉽사리  받아 준다면 교회
로 일부러 사람을 보낼 필요는 없어지는 것이다.
  목사는 할보르가 건네준 쪽지를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등잔에 불을 켜고 앉아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 저희가 예루살렘으로  이주할 생각이어서 잉그마르 농장
을 매도하려고...."
  '음, 드디어 올 것이 왔군.'
  그는 마치 태풍에  대한 예견이라도 하듯이 혼잣소리로 중얼거렸
다.
  '이것이야말로 오래 전부터 기다려 왔던 거지.'

  영원의 시간에 서서

  제3부 사랑을 찾아서

     농 부

  화창한 봄날이었다. 헤이크 마츠 에릭손이  아들 가브리엘과 함께
마을의 남쪽 경계  가까이에 있는 철공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들의 집은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철공장에 이르기까진 마
을의 거의 전부를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새로 씨를  뿌린 밭
에는 곡물이 막 싹을 트고 있었다. 그들은  파릇파릇한 귀리밭과 훌
륭한 목장들을 보았다.  목장은 클로버로 뒤덮여 달콤한  향내를 풍
기고 있었다.  그들은 밭을 갈고  파종을 한 채소밭을 지나서  새로
창문을 달거나 유리를 끼운, 혹은 베란다를 달거나  새로 칠을 하기
도 한 집들을 지났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신발에는 흙이 덕지덕
지 붙어 있고 손에는 때가  낀 것이 모두들 들일과 채소밭 일로 찌
들은 것 같았다.  밭에는 배추를 손질하는 사람,  고구마를 심는 사
람, 양배추나 홍당무의 씨를 뿌리는 사람 등이 잔뜩 나와 있었다.
  헤이크 마츠 에릭손은 자주 걸음을 멈춰서서 사람들에게 심고 있
는 고구마의 종류를 묻거나 귀리는 언제 심었는가를 물어보기도 했
다. 송아지나 망아지가 눈에 띄면 난 지  얼마나 되었는가를 셈하기
도 했으며, 또한 이 망아지나 송아지가 젖을 뗄  때면 과연 값을 얼
마나 부를 수 있을까 주먹셈을 해보기도 했다.  거기다가 어느 농장
이면 얼마만한 황소를 기를 수 있겠는가도 계산해 보았다.
  가브리엘은 그런  아버지의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 보려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제 생각에는요, 아버지와 저는 머지 않아 샤론은 평야나
유태의 사막을 걷구 있을 것 같아요."
  아들의 말에 헤이크 마츠 에릭손은 얼굴을 빛내며 웃음을 지어보
였다.
  "그래, 우리들이 주 예수께서 걸으신  길을 밟는다는 건 영광스런
일이지. 그 이상 감사할 것도 없고."
  그때 한 내외가 달구지 가득 석회를 싣고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헤이크 마츠 에릭손의 생각은 다시 금방 그쪽으로 쏠렸다.
  "가브리엘, 저들이 누군지 알겠느냐? 석회를  비료로 쓴다면 수확
이 많다는구나. 그렇게 되면 가을엔 네 눈이 무척 즐거워질거야."
  "가을이라구요, 아버지?"
  가브리엘이 비난하듯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이번  가을까지는 야곱의 천막에 살면서 예수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해야지"
  "아멘! 제발"
  가브리엘이 큰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한동안 봄이 무르익은 경치만을  바라보며 걸었다. 도랑에
는 물이 졸졸 흐르고 봄비로 길들이 몹시  허물어져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해야 할 일들 투성이였고, 사람들은 길을  지나다가 남의 밭
일이라도 서로 돌봐주려 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헤이크 마츠 에릭
손이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말이다, 나는  언제든지 일이 다 끝난 뒤의  가을에 집과
땅을 팔고 싶다.  정신없이 달려들어 일을 해야 할 이  초봄에 그걸
모두 처분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
  가브리엘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아버지가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들을 다 하도록 가만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마을 북쪽에 조그마한 황무지를 산  건 꼭 30년 전이다.
내가 아직 젊었을  때였지. 절반은 늪이고 절반은  돌밭으로 쟁기질
한번 안 해본 그런 땅이었지. 아주 엉망이었어. 나는 그곳에서 허리
가 부러질 정도로  노예처럼 일을 했다. 늪은  돌밭보다도 일하기가
훨씬 어려웠는데, 아뭏든 가까스로 물을 빼내고 메워  버릴 수 있었
지."
  "그래요, 아버지는 정말  힘든 일을 해내셨어요. 그러길래 하나님
이 특별히 아버지를 생각하셔서 성지로 불러들이시는거예요."
  "집도 처음엔 껍질도  벗기지 않은 통나무에 지붕은 잔디를 떠서
입힌 숲속의 움막보다  심하다 싶은 오두막에서 살았다.  비가 오면
물이 샜고, 사는 꼴이 소나 말과 다를 게 없었지. 첫해 겨울은 그렇
게 컴컴한 토굴 같은 곳에서 지내야 했어."
  "아버지, 그토록 모진 고생을 하신  곳에서 뭣땜에 들러붙어 사셔
야겠어요?"
  "하지만 가축들을 넣을 커다란 외양간을 지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나 해마다 소가 늘어서 외양간을 넓혀야 할 때의 기쁨을 생각해 봐
라. 너는 상상도 안 될게다.  만일 지금 그것들을 팔아야 하지 않는
다면 외양간과 마굿간의  지붕을 잇기 꼭 알맞은 때야. 씨  뿌린 직
후가 딱 좋지."
  "아버지,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돌 많은 땅
에, 또 어떤 씨는 길바닥에 떨어진답니다. 지금 우리는 기름진 땅에
떨어지는 씨를 뿌리게 된거예요."
  "....그리구 지금 사는  오두막은 먼저의 오두막이 있던 자리에 지
은 것인데, 올해는 그걸 헐구 훌륭한 새집을 지을 생각이었다. 그런
데 우리가 겨우내 날라다 놓은 나무도 이젠  쓸모없게 됐구나. 그걸
나를 때 말도 무척 고생을 시켰지만 우리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잖
니."
  가브리엘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지금 자기의 재산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바칠 생각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
기고, 웬지 아버지가 자기로부터 점차 멀어져 가고  있는 듯한 느낌
이 들었던 것이다.
  "글쎄요, 하지만 아버지. 한마음 한뜻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신성
하게 살 수  있는 복된 영광에 비한다면  새 집이나 마굿간 따위가
무슨 소용입니까?"
  "할렐루야!"
  헤이크 마츠 에릭손이 소리쳤다.
  "우리가 고마운 운명을 얻게 된 걸 모르는  게 아니다. 지금 재산
을 팔러 가는 길이 아니냐? 난 그저 이 길을 되돌아올 때는 아무것
도 남은 게 없이 내가  내것이라구 부를 수 있는 것도 하나도 없으
리란 생각 때문에 마음이 허전해서 그러는거다."
  가브리엘은 아무 말도  대꾸하지 않았으나 아직도 아버지가 결심
을 버리지 않았다는 데 기쁨을 느꼈다.
  그들은 곧 언덕  위에 아름답게 자리잡은 어는  농장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하얗게 칠한 발코니와 베란다가 딸린 집이 한 채 서 있었
는데 집 둘레에는 후리후리한 포플러나무가 수액으로 잔뜩 부푼 은
빛 줄기를 늘어뜨리고 빽빽이 둘러서 있었다.
  "저것 좀 보렴, 저런 것이 내가 세우고 싶었던 그런 집이야. 베란
다에다 발코니도 달구, 나무 세공의 장식도 많구.  아, 앞에는 잘 손
질된 잔디에다가.... 근사하잖아, 가브리엘?"
  가브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헤이크 마츠  에릭손은 아제 아들이
농장에 관한 이야기에  짜증이 났다고 생각하여, 아직도  다른 하고
픈 말들이 많았으나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기의 말이 새주인
을 만나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해 보고, 그  밖에도 여러가지 다른
일들이 어떻게 되어 갈지를 생각했다.
  '아아, 재산을 회사에 팔다니,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딨을가. 나
무는 모두 베어지구  농장은 황폐할 대로 버려질텐데.  자작나무 숲
도 옛날처럼 벌판이 될테구.  토지도 손대지 않아 높아질거야. 회사
측에선 그럭하구두 남아.'
  철공장에 도착하자 헤이크 마츠 에릭손의  흥미는 다시 살아났다.
거기서 최신식 쟁기, 쇠스랑 등을 보고 있자니  오래 전부터 새로운
농기구를 사고 싶어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잘생긴  아들의 얼
굴을 들여다보면서 마치  전쟁터에서 용사가 적을 무찌르듯 무성하
게 나부끼는 곡물을  베어 나가는, 빨갛게 칠한  농기구에 올라앉은
모습을 그려 보았다.  헤이크 마츠 에릭손은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
다. 그의 귀에는 아직도  농기구의 덜덜거리는 소리, 곡물이 베어져
쓰러지는 소리, 그리고  놀란 새떼의 날개짓 소리나  날카로운 벌레
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책상 위에는 증서가 놓여 있었다. 흥정은 끝나고  값도 정해져 있
었으며, 이제 거래를 끝내는 데 필요한 절차로  그의 서명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증서가 낭독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러이러한 숲이 몇  정보, 이러이러한 토지와 목장이 몇
평, 가축이 몇 마리,  이러이러한 가구 집기가 몇 점, 이  일체의 것
을 매도함. 증서가  낭독되어 가면서 그의 얼굴은  점점 굳어 갔다.
그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아냐. 이런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 돼.'
  낭독이 끝난 뒤, 그가 생각이  달라졌다고 말하려는데 가브리엘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아버지, 저와 농장  둘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시렵니까? 결과야
어찌됐든 저는 떠날 결심입니다."
  헤이크 마츠 에릭손은 오로지 자기 농장에만 정신이 팔려 아들이
자기한테서 떨어져 나갈 것에 대한 생각은 미처  하지도 못했다. 그
런데 지금 가브리엘은  어쨌든 떠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아들이 그런  태도만 취
해오지 않는다면 부득이  가산을 팔아 넘기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엔 아들이 가는  곳으로 자신도 마땅히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책상으로 다가섰다. 그의 서명을 기다리는 한 장
의 증서가 그  위에 활짝 펼쳐져 있었다. 지배인이 펜을  집어 헤이
크 마츠 에릭손에게 건네면서 손가락으로 서명란을 가리켰다.
  "여기에 이름을 적으십시오. 이름은 약자가 아닌 '헤이크 마츠 에
릭손'이라고 적으셔야 합니다."
  그가 펜을 받아 쥐었다. 문득 30년 전  얼마간의 황무지를 소유하
기 위해 서명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그 황무지에서 평생을
땀의 보람으로 살아갈 것을 생각했었다.
  지배인이 다시 손가락을  들어 서명란을 짚어 보였다.  그는 농부
가 어물거리는 것이 이름  쓸 장소를 확실히 모르는 걸로 받아들인
것이다.
  "여기에다 '헤이크 마츠 에릭손'이라고 쓰십시오."
  헤이크 마츠 에릭손은 펜을 종이 위에 갇다대면서 생각했다.
  '이것은 내 신앙과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야. 또한 헤르굼의 신
도인 내 친한 친구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  ....내가 그 사람들과 한
마음 한뜻으로 살기  위함이지.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
는데 나 혼자만 남아서는 안 될 일이지'
  그는 이름의 머리글자를 써 넣었다.
  '그리고 또  내가 이걸 쓰는  것은 내 아들 가브리엘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러면  내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아들이었다는
것을 가브리엘에게 인식시켜  주는 셈도 되고, 나에게  언제나 다정
했던 사랑스런 아들을 잃지 않아도 되는거지'
  그는 힘주어 이름의 가운뎃자를 써넣었다.
  '그런데....'
  펜을 움직이다 말고 생각했다.
  '내가 왜 이걸 쓰는거지?'
  그의 손이 마치 저절로 움직이듯 느닷없이 아래 위로 오르내리면
서 증오의 증서 위에 굵직한 선을 두어 줄 남겨 놓았다.
  '나는 늙었어. 이제 와서  내가 늘 노예처럼 일을 해온 곳을 버릴
순 없어 나는 언제까지나 이곳에서 밭을 갈고  있어야 해.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리고....'
  헤이크 마츠 에릭손은 미안해 하면서 지배인에게 서류를 보였다.
  "이해해  주시지요. 나는  정말 이  재산들을 매매할  생각이었는
데.... 막상 그렇게 하려니 마음이 영 내키질 않습니다."

  영원의 시간에 서서

  제3부 사랑을 찾아서

     배 신

  여름처럼 따뜻했던 5월  어느날, 잉그마르의 농장에서 경매가  있
었다. 여자들은 벌써 여름옷에  가까운, 소매가 헐렁한 흰 블라우스
차림이었고, 남자들은 모두 긴 양피 웃도리 대신  짧은 자켓을 입고
있었다.
  교장 부인도  경매에 나갈 준비를  했다. 남편 스톰은 학교  일로
바빴고, 게르트루드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기
때문에, 그녀밖에 나가 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준비가 끝나자 스
티나는 교실문을 열고,  남편을 향해 나갔다 오겠다는  인사로 고개
를 끄덕여 보였다. 스톰은 그때 거대한 소돔과  고모라 도시가 멸망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엄숙하고
무서워서 가엾게도 아이들은 겁에 질려 다 죽어가는 얼굴들이었다.
  잉그마르 농장으로 가는  길목엔 아가위 꽃이 무성했는데 스티나
는 늘 하던  버릇대로 그곳에서 잠시 동안이나마  걸음을 멈추었다.
향기로운 하얀 은방울꽃으로  장식된 자그마한 언덕에 올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예쁜 꽃들은 어디서도 본 일이 없어. 예루살렘같이 먼 곳
에선 보기 힘들거야'
  그녀는 마음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스티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을  사랑했다.
헤르굼 신도들이  마을을 제2의 소돔이라  부르며 그녀에게 마을을
버리도록 권하면서부터는 더더욱 그랬다. 그녀는  길가에 피어 있는
들꽃 몇 송이를 꺾어 사랑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우리가 만일 그 사람들 말처럼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면 하
나님이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쯤은 힘들 게 하나도  없어. 가령 강추
위가 계속되게 하고 영원히  눈으로 땅을 묻어 버린다든가 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지. 하지만 하나님은  적어도 우리들을 살려
둘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보셔. 그렇지 않으면 다시 봄이  오게 하
고 꽃이 피어나게 하실 리는 없거든.'
  이윽고 잉그마르 농장에  도착한 스티나는 걸음을 멈추고 낯설은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이 정든 집이 하나하나 팔려 나가는  것을 가만히 앉아
서 보고 있진 못할 것 같아. 그냥 집으로 가버릴까?'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그녀로선  이 농장
이 어떻게  처리되는가를 보지 않고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게 쉽지
않았다.
  이 농장을 내놓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젊은 잉그마르가 즉각 값을
불렀다. 그러나 베리소나 제재소라든가 철공장의  간부들이 2만 5천
크로네를 부른 데 비해 잉그마르는 불과 6천 크로네밖에 갖고 있지
않아 농장을 사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만한 대금
이라면 잉그마르도 곧 빌릴 수 있었다. 그러자  회사에서 는 3만 크
로네로 올렸으며, 이것은  잉그마르가 감히 겨룰 수  없는 거액이었
다. 그는 그렇게 엄청난 돈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이 농장은 이제
영원히 잉그마르 혈족들의 손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었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회사측에선 일단  이 농장을 차지하고 나면 무엇 하나
다시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랑그홀스 폭포의  제재소조차 잉
그마르에게 경영토록  하지 않을  것이다. 잉그마르는 생계를  잃게
되고 가을에 게르트루드와 결혼하려던 예정도  백지화될 것이다. 그
는 다른 곳으로  가서 직업을 구해야 할  지경에 놓일 것이 분명한
것이다.
  스티나는 이런  생각들로 마음이 흐려졌다. 카린이나  할보르에게
서 인간미를 느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제발 카린이 나한테 말을 걸지 않아야 할텐데.'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만일 말을 걸어오기만  한다면 잉그마르에 대한 그  사람들의 태
도에 대해 내  생각들을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어. 진작  농장이 잉
그마르의 소유로 돼 있어야 하는건데. 애시당초 큰 실수를 했어. 카
린도 너무해. 물론  여행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든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황폐
하게 돌보지 않고  나무도 모두 베어내 버릴  것이 뻔한 회사 같은
데다 농장을 팔아버릴 생각을 했을까.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단말야.'
  그녀는 나름대로 분석하며 생각해 보았다.  물론 회사가 아니더라
도 농장을 사려는 사람은 있었다. 부유한 마을  재판소 판사 베르게
스 스헨 페르손이 바로 장본인인데. 스티나의 생각으론  만일 이 사
람과 흥정이 이루어진다면  잉그마르손이 그런 어려움을 당하지 않
을 것 같았다.  스헨 페르손은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므로 잉그마르
에게 제재소를 계속하도록 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스헨 페르손은 옛날 이  농장에서 거위지기를 했었어. 그가 설마
하니 그때의 일들을  잊었을 리가 없지. 그 '위대한'  잉그마르가 그
를 맡아 돌봐주고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해준 일도 물론 잊지 않
았을테구.'
  스티나는 집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안마당에 쌓아 놓은 널판지
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경매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 틈에서  마치
정든 장소에 이별을 고하러 온 사람처럼 주위를 구석구석 둘러보고
있었다. 바깥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세 갈래로 줄을  지어 서 있었
다. 그 한가운데는 기둥을  세운 조그만 창고가 있었고, 두드러지게
이렇다 할 만큼  오래된 것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집 입구의 조각
모양이 있는 포치는  오래된 것 같았다. 또 하나 그보다  더 해묵은
것으로 세탁실 입구의  굵은 기둥의 꾸불꾸불한 포치가  있었다. 스
티나는 잉그마르손 집안의 조상들이 모두 이 마당을 밟았다는 것을
상기했다. 일을 마친 저녁 무렵 높다란 난로가에  둘러 앉은 모습이
라든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자기들 분에 넘치는 것을 일
체 받지 않으려던 그들의 몸가짐이 눈앞에 선연했다.
  그녀는 또 이 농장에서 늘 실천되던 근면과 정직성을 생각했다.
  '아,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어!'
  스티나는 다시 경매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자기 집
을 내놓은 것보다 더한 괴로움을 느꼈다.
  '나랏님께 상소라도 해야 할 일이야.'
  경매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무척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
었다. 마당에서 전시해  놓은 농기구를 구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
면 어떤 사람들은 가축을 보기 위해 축사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아니 저건 잉가 마누라와 스타바 마누라 아냐!'
  스티나는 중얼거렸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안에 들어가서 소를  한 마리씩 골라 놓고 나오는가보군.  흥, 이
젠 잉그마르 농장에서 혈통 좋은 소를 샀다고 꽤나 재고 다니겠어.'
  한쪽에선 크로프텔 닐스 영감이 쟁기 하나를 끌어내고 있었다.
  '크로프넬 닐스도  '위대한' 잉그마르가 사용하던 쟁기를  쓰면 자
기도 부자 농군이라도 된 듯 생각할거야.'
  그녀는 경멸의 웃음을 띠며 중얼거렸다.
  갈수록 경매되는 물건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많은
농기구를 이상한  듯 살펴보았다.  그것들은 오래 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엇에 사용된 것인지 짐작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구경꾼
몇 사람이 구닥다리  썰매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중에  가장 오래
전부터 대대로 물려온 것으로 빨강과 초록색이 칠해진 썰매가 있었
는데 하양 조개껍질이 박혀  있고 다양한 빛깔의 수술로 장식된 마
구가 하나 딸려 있었다. 옛날 잉그마르손 집안  사람들은 그 구닥다
리 썰매를 타고 집회에 참석하거나 교회의 결혼식에서 신부를 태우
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스티나 부인에겐 옛 잉그마르손  집안 사람
들이 농구와 헌 달구지와  썰매 같은 것이 경매되고 있는 오늘날까
지도 모두 지금의 농장에서 살고 있은 것 같이 여겨졌다.
  '좋은 사람들이 다들 마을을 떠나 버리는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잉그마르는 어디  갔지? 어떤 기분일지 몰라.  하긴 내가 이렇게
끔찍한 생각이 드는데 잉그마른들 오죽하겠어'
  날씨가 무척 좋았으므로 경매인인 방안의 혼잡을 덜기 위해 경매
에 붙일 만한 것들은 모두 밖으로 내놓고 있었다.  그 중에는 몇 세
기 동안이나 손도  대지 않고 방안에 간직해 둔 것도  있었는데, 궤
짝마다 한결같이 튜울립과 장미꽃이  그려져 있었다. 은 항아리, 구
식 구리 남비, 물레와  베틀, 그 밖의 온갖 집기류들이 계속하여 들
려 나왔다. 농가의  아낙들은 물건 주위에 몰려들어  그것을 요모조
모 뜯어보기도 했다.
  스티나는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아주 고운 비단을 짜는 베
틀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생각나서 그것을  찾아보러 나섰다. 그
때 하녀 한 사람이  엄청나게 큰 성경 책 한 권을 들고  나왔다. 그
것은 하녀가 겨우 들  정도로 무거운 책으로 가죽이 매우 두터우며
놋쇠고리와 장식이 붙어 있었다.
  스티나는 누구에겐가 한방  얻어맞은 기분으로 다시 제자리로 돌
아왔다. 카린이 그것마저 판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었다. 물론 스티나 자신도 그렇게 낡은 고어로  쓰여진 케케묵은 성
서를 이젠 누구도 읽으려 하지 않으리란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남편이 곰에 물려 죽었다고 사람들이 기별해 왔을 때, 젊은 잉그
마르의 종조모가 읽고 있던 성격책이 바로 저걸거야.'
  스티나는 물건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그것에  얽힌 사연들을 떠
올렸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죔쇠는 크라크 산의  괴물한테서 빼앗아
온 물건이라지? 저 흔들거리는  마차는 내가 어렸을 때 잉그마르손
집안 사람이 교회에 타고 다니던 거야.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가다
가 그가 옆을 지나치기라도 할라치면 어머니는 언제나 팔꿈치로 나
를 쿡쿡 치시며,  "자, 인사드려라, 스티나, 잉그마르 잉그마르손 어
른이 오셔" 하셨었지'
  스티나는 그때 어머니가  왜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에게 꼭 인사를
시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재판관이나 집달리를  만났을 때는
그렇게까지 별나게  주의를 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그녀는 어머니도 할머니한테서 번번이 그런 일을 겪었다는 말을 들
었다.
  '아, 게르트루드가 머지않아 이 집 주부가 되기 때문에 내가 슬퍼
하는 건 아냐. 마치 내겐 이 마을 전체가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아
서지.'
  목사가 그녀 앞에  엄숙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는  곧장 집안으
로 들어갔다.  스티나는 그가  카린과 할보르와 맞서서  잉그마르의
입장을 설득시키려고  왔으리라 추측했다. 이어 베리소나  제재소의
지배인과 함께 판사  페르손이 도착했다. 회사를 대표해서  온 지배
인은 집안으로  들어갔고, 스헨  페르손은 잠시 마당에서  서성이며
여러가지 연장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곧 스티나  부인과 함
께 판자더미  앉아 있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땅딸막한 노인 앞으로
다가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억센 잉그마르,  당신은 아실텐데.... 잉그마르가 내가  신청한 재
목을 사겠다고 결정했습니까?"
  "안 산다구 그럽디다. 마음이 또 변할지도 모르지만"
  억센 잉그마르는 대답하면서 스헨 페르손에게 엄지손가락으로 스
티나 부인을 가리키며  눈치를 주었다. 자기들의 말이  그녀에게 들
리지 않도록 하라는 주의였다.
  "내 생각엔 잉그마르가 기꺼이 그 조건들을 받아들일 것 같은데"
  페르손 판사가 말했다.
  "이런 제안을 날마다 제시하진  않아요. '위대한' 잉그마르를 생각
해서 그러는거지"
  "그러믄요. 아주 좋은 제안이지요."
  억센 잉그마르가 맞장구쳤다.
  "그런데 다른 데서 이미 흥정을 했다는 데요?"
  "자기가 정작 잃고 있는 것은 생각도 못하는 모양이군."
  스헨 페르손은 이 말을 남기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 동안 잉그마르손 집안  사람들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는
데 잉그마르가 한쪽  벽에 기대어 지그시 눈을  감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악수를 하려고  다가갔던 몇 사람이 바로  앞까지 갔다가는
되돌아오고 있었다. 잉그마르의  얼굴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창백
해 보였다.  그의 괴로움을 짐작한  사람들은 누구 하나 감히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는  너무나 조용히 서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그 자리에 서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일단 그를 발
견한 사람들의  머릿속엔 다른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경매에
따르기 마련인 소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머지 않아  남의 손에 넘어
가려 하는 옛집 벽에 기대어 묵묵히 서 있는 잉그마르를 앞에 두고
웃거나 농담할 기분은 아예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드디어 경매의 시간이 됐다.  경매인이 의자에 올라섰다. 그는 첫
번째로 헌 쟁기를 값을 매기기 시작했다. 잉그마르는  마치 조각 같
은 얼굴로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차라리 가버리는 게 나을텐데 저러는군"
  사람들이 숙덕거렸다.
  "구태여 여기 머물면서 비참한 일을 겪을 필욘 또 뭐야? 하긴 잉
그마르손 집안 사람들의 유별난 행동은 알아줘야 해."
  망치소리가 울렸다. 최초의 경매값의 결정을 알리는 소리였다. 잉
그마르는 자기가 얻어맞기라도 한 듯 움찔하더니 다시 원래의 모습
으로 돌아갔다. 망치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는 몸을 떨었다.
  농가의 아낙네 두  사람이 스티나 앞을 지나갔다.  그들은 잉그마
르에 대해 지껄이고 있었다.
  "생각 좀 해보세요.  돈 많은 농가의 딸에게 장가들기만  하면 이
농장을 사는 돈쯤은  문제도 아닐텐데. 하필이면 교장  선생댁의 게
르트루드한테 장가들겠다니, 원"
  "소문을 듣자니까 어느  돈 많은 유지가 자기 딸하구 결혼한다면
선물로 잉그마르  농장을 사주겠다고 했다면서요?  원체 집안 좋은
집 아들이다 보니까 저 사람 재산 없는 건 신경도 안 쓰나봐요."
  "그렇지요. '위대한' 잉그마르의 아들로 태어나서 덕보는거죠. 뭐."
  '정말 게르트루드가 가진 게 조금만 되었더라도 괜찮을텐데. 그러
면 잉그마르를 도울 수가 있을테니까.'
  스티나는 쓸쓸하게 생각했다.
  농기구가 모두 팔리고 경매인은 마당의 다른 곳으로 위치를 옮겼
다. 거기에는 가정용 린네르가  쌓여 있었다. 그는 식탁보, 시트, 그
밖의 수직물들을 경매하기 시작했다. 마당에서  경매인이 쳐드는 직
물에 수놓인 튜울립 무늬나 여러가지 다양한 모양들이 골고루 바라
다보였다. 높이  쳐든 린네르가  가벼운 바람을 일으키며  펄럭이고
있었다. 잉그마르는 무심코 눈을  들어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피
로하고 지친 눈이  잠시 동안 그 슬픈  경매의 현장에 꽂혀 있다가
이내 외면해 버렸다.
  한 농가의 아가씨가 잉그마르를 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이런 일은 처음이야. 저 가엾은 남자는  다 죽어가는 것 같
아. 여기 서서 가슴 아파하지 말고 어서 가버릴 일이지!"
  스티나는 돌연 벌떡 일어서서 이 일을 당장 중지하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앉히며,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나는 한갖 가난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아.'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스티나는 무엇인가에 끌리듯이  얼굴
을 들었다. 카린이 막 집안에서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가 마
당을 가로질러 가자  사람들은 모두 뒤로 물러섰다.  그녀에게 인사
하려고 손을 내미는 사람도, 말을 건네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눈
엔 비난과 적의, 경멸의 빛만이 가득 찼을 뿐이었다. 이것으로써 카
린과 그녀의 거래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가는 분
명해진 셈이었다. 여느  때보다 등이 꾸부정해 보이는  카린은 피로
에 지쳐 있었고,  양쪽 볼에 빨간 점이 선명하게 두드러진  것이 마
치 에로프와 고투하고 있던 때처럼 괴로와 보였다.
  "여기 계실 줄은 몰랐어요, 아주머니."
  그녀가 스티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그녀는 스티나 부
인을 찾아서 안으로  안내하기 위해 나왔던 것이다.  스티나는 처음
엔 극구 사양하다가 카린을 따라 일어섰다.
  "저희들은 이제 떠나는  마당이에요. 묵은 갈등 같은 건  모두 정
리하고 싶어요."
  집 쪽을  향해 걸어가다가 스티나는 마음을  다져먹고 입을 열었
다.
  "오늘은 카린에게도 마음 편한 날은 아닐거예요."
  "...."
  "어떻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물건들을  모두 팔아버릴 생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카린."
  "그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께 바쳐야 하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납득할 수...."
  "주의 이름으로 팔기  시작한 걸 다시 중지한다면 주님도 받아들
이실 수 없을거예요."
  카린이 스티나의 말을 자르며 재빨리 대꾸했다.
  스티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문이 막혀  카린에게 퍼부으려던 비
난의 말들은  뱃속으로 꿀꺽  삼켜지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카린의
모습에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고고한  위엄이 감도는 것
같았다. 현관 앞의  넓은 단 위에 섰을 때 스티나가  카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쳤다.
  "저기 서 있는 저 사람을 봤어요?"
  그녀는 잉그마르를 가리키며 물었다. 카린이  움찔하며 짐짓 동생
을 외면했다.
  "잉그마르에겐 주께서 길을 찾아 주실거예요, 틀림없이...."
  그녀는 중얼거렸다.
  얼핏 봐서 거실 안은 경매로  인해 변했다고 할 만한 게 별로 없
었다. 그러나 벽을  장식하고 있던 구리 제구는  눈에 띄지 않았고,
요와 시트가  모두 벗겨져 벌거숭이가 된  침대틀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늘 반쯤 열려져 있어 그 안에  가득 들어 있는 은항아리
며 은쟁반을 볼 수 있던 파란  칠의 찬장은 문이 꼭 닫힌 채 볼 것
이 하나도 없음을 경고해 주는 것 같았다. 이제  방에 남아 있는 볼
품 있는  것이라곤 언젠가 월귤꽃 줄기가  테두리에 장식되어 있던
예루살렘의 그림뿐이었다.
  넓은 방은 할보르와  카린의 친척, 그리고 같은  신도들로 가득했
다. 그들은 음식이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에 차례대로  안내되어 융
숭한 대접을 받았다. 안방 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매매에 대한 의논이 아직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두드러
지게 높은 목사의 음성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거실  안은 매우 조
용했다. 얘기를 할 때면  한결같이 음성을 낮추어 소곤거리곤 했다.
그야말로 농장의 운명이 결정되는 그런  순간이었다. 스티나가 가브
리엘을 돌아보며 말했다.
  "잉그마르가 농장을 손에 넣을 희망은 없을 것 같지요?"
  "경매에 붙여진 값으로  봐선 그런 셈이죠. 그 정도의  금액이 잉
그마르에겐 없으니까요. 카름순드에서  온 여관 주인이 3만  2천 크
로네를 부르는 바람에  회사에서 또 3만 5천으로  값을 올렸답니다.
지금 목사님께서는 그 문제로 카린과  할보르를 설득하는 중이에요.
회사에 주지 말고 여관 주인에게 주라고 말입니다."
  "그럼 베르게스 스헨 페르손은 어떻게 됐죠?"
  "그분은 오늘 입찰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목사는 아직도 큰소리로 지껄이고 있었다.  분명히 누군가를 설득
하는 어조였다. 말하는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아직 이야기
의 결말이 나지 않은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가 저
토록 계속 떠들 리가 없는 것이다. 잠깐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여관
주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톤이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렇다면 3만 6천 크로네를 내겠소.  이 농장이 그만큼이나 값이
나간다고 보진  않지만 회사의 소유가  되도록 보고  있을 순 없군
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왔다.  그리곤
곧 회사 지배인의 음성이 크게 들렸다.
  "나는 4만 크로네  내겠소. 이건 카린이나 할보르가  생각도 못하
는 엄청난 액수요. 자, 결정하시지요."
  스티나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일어서서 비
틀비틀 그곳을 빠져나왔다. 바깥은 황량하고  스산했지만 후끈한 방
에 앉아 값을 다투는 실랑이를 듣느니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했다.
  린네르의 경매는 이미  끝나 있었다. 경매인은 다시  장소를 옮겼
고, 이 집의 해묵은  은식기류를 매매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거기엔
금화가 새겨진 묵직한  은항아리며 17세기에 만들었다는 명문이 들
어 있는 큼직한 은그릇 같은 것들이 놓여져 있었다.
  경매인이 첫 항아리를 들어올리자 잉그마르는 도저히 참을 수 없
다는 듯 중지시킬 생각으로 뛰어나가려 하다가 곧 마음을 억제하며
제자리에 멈춰섰다. 몇 분이 지났다. 웬 늙은 농부가 은항아리 하나
를 들고 잉그마르에게로 걸어오더니 그의 발 앞에 공손이 내려놓았
다.
  "본시 모두  도련님의 것이어야 하지만  이것이라도 남아 있게끔
받아 주십시오."
  다시 소름이  끼치듯 전율이  잉그마르의 온몸을 휘감았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그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아무 말씀도 마십시오. 이건 언제까지든 도련님의 것입니다."
  농부가 서너 걸음 멀어지다가 다시 돌아왔다.
  "사람들은 도련님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 농장을 차지할 수 있다
구들 그럽디다. 그거야말로 도련님이 이 교구를 위해서  하실 수 있
는 가장 큰 봉사일겝니다."
  이 농장에는 늙은 머슴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젊었을 때
부터 늙어서  기력이 없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곳에 머물러 있었
다. 잉그마르 농장이 경매에 붙여지면서 이들은 머리  위에 마치 죽
음의 그림자와도 같은  불안감이 감돌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두려움은 새로운 주인한테 이  집에서 쫓겨나 거지가 되는 건 아닐
까 하는 것이었다. 설령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어떤 낯선 사
람이 현재의  주인 부부처럼 자기들을 돌봐줄  리 만무하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 가련한 사람들은 초조한 듯  온종일 마
당에서 서성거렸다. 힘없는  눈엔 눈물이 맺혀 있었으며  희망도 없
는 간절한 애원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들이 의지할 데  없는 무기
력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자면 측은한 생
각을 갖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백살 남짓한 늙은이  하나가 잉그마르 앞으로 절둑거리며 걸어왔
다. 그는 잉그마르가 서 있는 옆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떨리는 손을 꼬부랑 지팡이의  손잡이에 얹은 채 조용히 앉아 있었
는데, 몇몇  노인들에게 그곳이야말로  어떤 불안감도 떨쳐버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  꼬부랑 늙은이 벤크스
가 근사한 자리를 찾아 앉은 것을 본 리자 노파와 말타는 자기들도
비틀비틀 잉그마르의 발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은 막연하게나
마 당대의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인  그가 자기들을 보호해 줄 수 있
으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잉그마르는 이제 눈을 감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세 사람의 노인들
을 내려다보며 그들이 자기  집안에 봉사하며 살아온 긴 세월과 그
들이 겪어야  했던 온갖 역경을  헤아려 보았다. 순간 그는  자기의
첫 의무가 이 사람들을 잉그마르의 집에서 일생을 마치도록 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마당을 휘둘러 보았다. 한쪽에 남
루한 모습으로 앉아  있던 억센 잉그마르와 눈이  마주쳤다. 잉그마
르는 그 초라한 늙은이를 향하여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
다. 억센 잉그마르는  무슨 소린가 알아들은 듯이  잠자코 집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는 거실을  지나 안방 옆에 서서  잉그마르의 뜻을
전할 기회를 기다렸다.
  목사는 방  한가운데에 두 개의 미이라처럼  굳어져 꼼짝도 않는
카린과 할보르에게 한없이 지껄이고 있었다.  베리소나에서 온 지배
인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자기가 누
구도 맘먹을 수 없는 비싼값을 불렀다는 데  우쭐해 있었던 것이다.
카름순드에서 온 여관 주인은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흥분한 듯 이
마에 구슬땀이 맺힌 몰골로 창문 앞에 서 있었다.  방 저쪽 끝엔 베
르게스 스헨 페르손이 소파에 앉아  두 손을 배 위에 올려 놓고 엄
지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의 큼직한  얼굴은 위압하는 듯
한 냉냉한 표정이었다.
  목사의 이야기가 끝나자  할보르는 카린을 바라보며 조언을 구했
다. 그녀는 혼수상태에  빠진 듯이 멍하니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앉
아 있을 뿐이었다. 할보르가 목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린도 저도 여간  많은 생각을 가졌던 게 아닙니다.  하지만 우
리 낯선 타국에 가서 우리의 형제들과 함께 이 농장을 처분한 돈으
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곳에 도착하면 집도 구해야  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해야 하는데 돈의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거기다가 여
비도 한 사람당 1만 5천 크로네나 든다니까요."
  "그렇소, 회사에 넘겨주지 않으려고  카린과 할보르에게 헐값으로
이 농장을 팔도록 권유한다는 건 무리요. 더  이상 쓸데없는 논쟁으
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즉각 내 흥정을 따르는 게 현명한 처
사일거요."
  지배인이 나섰다.
  "그래요."
  카린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큰소리로 말했다.
  "제일 높은 값으로 결정하는 게 좋겠어요."
  목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이제 설교자가 아닌  하나의 인간
으로서 뭔가 정의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카린과 할보르가  이 전통 깊은 농장을 진심으로 사랑하리
라 생각합니다. 또한 두 사람이  일이천 크로네에 좌지우지하리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농장을 영원히  유지해 나갈 만
한 사람에게 팔기를 원한다고 저는 믿고 있지요."
  목사는 확신에 찬  어조로 논리정연하게 말을 계속해  나갔다. 특
히 카린에게  들으라는 듯 회사의 손에  넘어가서 완전히 황폐해진
여러 농장들의 얘기를  본보기로 제시했다. 목사는 자기가  어떤 말
을 해야 카린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
다.
  '자기가 전통있는 농가의  주부라는 긍지가 아직은 다소  남아 있
을게야.'
  카린은 간혹가다  목사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목사는  당장이라도
망할 것같이 돼 버린 농가며 충분히 먹을 것을 먹지 못해 말라가는
가축들의 이야기를 계속하여 줏어섬겼다.
  "만일 회사가  굳이 잉그마르 농장을  사겠다고 나서면 농민들을
얼마든지 농락할 수 있는 입장입니다. 결국 농민들도  손을 드는 수
밖에 없겠지. 그러나 카린과 할보르가 이 유서  깊은 터전을 회사의
소유지로 만드는 것을 거부하고 농장을 보존할 마음만 갖고 있다면
먼저 값을 정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농민들도 어떻게  하면 결말을
지을 수 있는가 알 수 있을테니까요. 언제까지  이렇게 무턱대고 값
을 올려나갈 순 없잖습니까?"
  목사는 카린과 할보르를 날카롭게 주시하면서  말을 끝맺었다. 할
보르는 난처한 얼굴로  카린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들
었다.
  "물론 저희들도  가능하면 우리와 같은  농민들에게 농장을 팔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예나 지금과  마찬가지로 지속되
어 나갈 것이고, 또한 저희도 마음놓고 이곳을  떠날 수 있을테니까
요."
  "그렇습니다. 만일 회사가  아닌 다른 분께서 이 농장에  대한 값
으로 4만 크로네를 내신다면  저희들도 흡족한 마음으로 거래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할보르는 아내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감지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억센 잉그마르는 스헨 페르손 앞으로 다가가서 무엇
인가 빠르게 소곤거렸다. 판사 페르손이  일어서서 할보르에게로 걸
어가더니 힘을 주어 말했다.
  "4만 크로네라면  이 농장을 기꺼이  내놓으시겠다구요? 내가 그
돈을 내겠소."
  순간 할보르의 얼굴에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그는  목구멍을 타
고 올라오는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것을 눌러 삼키고는 간신히 떠듬
거리며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판사님. ....저는....이런  훌륭한 분에게 농장을 넘
길 수 있게 돼서 기쁩니다!"
  페르손 판사는 카린의 손을 한번 힘있게 잡아  주었다. 감격한 카
린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안심하시오, 카린. 여기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할겁니다."
  "판사님께서 이 농장에 거처하실건가요?"
  "아니요."
  판사가 엄숙하게 말했다.
  "내 막대딸이 올 여름에 결혼하게 될텐데 딸 내외에게 이 농장을
선물할 생각입니다."
  판사는 목사를 바라보고 고맙다는 경의를 표했다.
  "보십시오, 목사님이 생각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나는 한때 이 농
장의 거위지기였지요. 그  시절엔 내가 내 힘으로  잉그마르 잉그마
르손에게 이 농장을 찾아줄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는데 말입
니다."
  사람들은 모두 영문을 알 수 없어 그저 멍하니 판사의 얼굴을 바
라보았다.
  카린은 곧 방에서  나왔다. 거실을 지나 마당으로  나가면서 그녀
는 몸을 쭉 펴고  머릿수건을 고쳐 쓰기도 하고 앞치마를 다듬기도
했다. 그녀는  진지하고 떳떳한  걸음걸이로 곧장 잉그마르  앞으로
다가갔다.
  "축하한다, 잉그마르."
  그녀는 기쁨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와 나는 요즘  줄곧 신앙 문제로 대립해 왔지.  그러나 하나님
께서 우리가 함께 살지 못하는 대신 너를 이 농장의 주인이 되도록
해주시는구나.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니."
  잉그마르는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서 있었다.  카린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잉그마르는  여전히 불행한 모습으로 서  있을 뿐이
었다. 최종 결정이 내려지자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몰려 나
와 잉그마르를 에워쌌다.
  "축하합니다. 잉그마르 농장의 잉그마르 잉그마르손"
  잉그마르의 얼굴이 잠깐 밝아지는가 싶더니 그가 중얼거렸다.
  "잉그마르 농장의 잉그마르 잉그마르손"
  마치 오래  전부터 갖고 싶어하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와 같던
그가 금방 역겨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갖고 싶던  선물을 내동댕이
친 어린아이의 그런 표정이었다.
  순식간에 온 농장에  소식이 퍼졌다. 들뜬 목소리로  지껄이는 사
람, 열심히 물어보는 사람,  어떤 사람은 기쁨으로 울음을 터뜨리기
도 했다. 이제 경매인의 고함소리는 들어주는 사람  하나 없이 허공
으로 무의미하게  흩어졌다. 농부나  신사나 가까운 사람이나  낯선
사람 할 것 없이 잉그마르에게 몰려와서 기쁨을  함께 나눴다. 그들
의 붕 뜬  분위기 속에서 잉그마르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다
른 사람들과 좀 떨어진 곳에서 홀로 서 있는 스티나와 눈이 마주쳤
다. 매우 창백한 낯빛에 늙고 남루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시
선이 잉그마르와  부딪치자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잉그마르는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는 그녀에게 허
리를 굽히고  얼굴의 근육에 경련을 일으키며  비통한 쉰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스티나 아주머니, 게르트루드에게 잉그마르가  배신을 했다고 전
해 주십시오. 농장을 위해서 몸을 팔았다구, 저 같은 파렴치한 인간
은 잊어달라고 일어주십시오."
  그는 울고 있었다.
  영원의 시간에 서서

  제3부 사랑을 찾아서

     게르트루드의 사랑

  몸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게르트루
드는 그것을 막을  수도 누를 수도 없었다. 이상한 일은  점점 자라
고 또  자라서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것은 잉그마르가  그녀를 버렸다는 것을 알면서부터였다.  어디선
가 갑자기 잉그마르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길거리나 혹은 교회, 아
니면 그 밖의 다른 곳에서 별안간 마주치지나 않을까 하는 밑도 끝
도 없는 두려움이었다. 왜 그것이 그토록 무섭게  여겨지는지 알 수
는 없었지만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것만은 틀림없었다.
  게르트루드는 잉그마르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는  집안에 틀어
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어야 했으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었다. 그녀는  정원을 돌봐야 했고  소젖을 짜기 위해 먼길을  지나
목장에도 가야 했다. 또한 갖가지 생활 필수품을  사러 마을의 가게
에도 나가야 했다. 그녀는 언제나 스카프를 푹  눌러쓰고 눈길은 아
래로 둔  채 바람에 쫓기는  사람처럼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  또한
되도록 빨리 큰길을 벗어나 잉그마르와 부딪칠 가능성을 없을 만한
도랑이나 개울을 낀 샛길로 들어가곤 했다.
  한시도 그녀는 공포감에서  해방될 수 없었다. 이  마을 안에서는
어느 곳이든 잉그마르와 부딪치지  않을 만한 데가 한 군데도 없었
던 것이다. 배를  저어 강으로 나갈 경우 그가 재목을  띄우고 있을
지도 몰랐고, 숲속 깊숙이 들어갈 경우엔 일하러  나가는 그와 오솔
길에서 마주칠 확률이 높았다. 게르트루드는  마당에서 풀을 뜯다가
도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얼른 피할 심산으로 시선을 줄곧 한길 쪽
으로 향해 있었다.  공포는 나날이 더 커져서  게르트루드의 마음은
자꾸 쇠잔해져 갔다. 이제는 모든 슬픔까지도 공포로  변하는 것 같
았다.
  '미쳐 버리는 게 아닌가 몰라. 완전히 미치지는 않더라도 좀 이상
해질 것 같거든. 그러면 정말  밖엔 나다닐 수도 없겠지. 하나님 제
발 저한테서 이 끔찍한 공포를 거둬 주소서.'
  그녀는 소리쳤다.
  "어머니나 아버지는  제 장신이 이상해질  줄 알고 계셔요.  다른
사람들도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할거예요.  하나님, 저를 구원하소서,
제발!"
  이 공포상태가 절정에  이르렀던 어느 날 밤,  게르트루드는 터무
니없는 꿈을 꾸었다. 우유통을 팔에 걸고 젖을  짜러 가는 꿈이었는
데, 소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숲 기슭 울타리  안에서 풀을 뜯고 있
었다. 그녀는 개울과 도랑을  낀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마음이
몹시 괴로왔다. 너무  피곤하고 쇠약해 있어서 걸음걸이가  무척 위
태로왔다.
  '대체 왜 이럴까'
  그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걷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 그래, 내가 피로한 것은
그 무거운 슬픔의 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야.'
  어렵게 목장에 도착하니  소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풀숲이라든가 냇물 저쪽이라든가 자작나무 아래 같은 곳을 뒤져 소
를 찾기 시작했으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소를  찾던 그녀의 눈
에 숲을 등지고 세워진 울타리의 갈라진 틈이  발견됐다. 불현듯 소
가 이 틈을  이용해서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녀는 울타리 앞에 서서 양 손을 마주 잡고 꾸욱 힘을 주었다.
  '지치고 기운은  없지만 온  숲을 다  뒤져서라도 소를  찾아내야
해!'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곧장 숲속으로  들어가서 무성한 전나
무며 가시가  돋힌 소나무를 헤치며 슬슬  앞으로 나아가던 그녀는
문득 자신이 평지를 걷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런 곳을 걷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길은 전나무의 갈색  바늘잎으로 덮여 부
드럽고 윤기가 났다.  양쪽에 높다란 탑처럼 소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에는 이끼가 돋아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매우  아늑하고 평
화로운 곳이었다. 이제까지 줄곧 지니고  있던 공포감은 그녀에게서
자취를 감췄다.
  그녀는 뜻밖에도 한 노파가 나무 사이에서 얼씬거리는 걸 발견했
다. 핀네 마리트라는 유명한 마녀였다.
  '아, 무서워. 저 성깔 못된 늙은이가 아직도 살아 있어. 내게 다가
오면 어떡하지? 이런 숲속에서 도망칠 수도 없을텐데.'
  그녀는 핀네 마리트가  눈치채지 않도록 살금살금 그곳을 빠져나
오려 했다. 그러나 채 빠져나오기 전에 노파가 소리쳤다.
  "이봐! 게 좀 서 있어. 보여줄 게 있으니까."
  어느새 핀네  마리트는 길로 나와서 게르트루드  바로 앞에 꿇어
앉았다. 그녀는 첫째 손가락으로 융단처럼 깔려 있는  전나무 잎 위
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는  그 가운데다 얕은 놋쇠 주발을 놓았
다.
  '무슨 마법을  쓸려고 저러나 보지?  그럼 이 늙은이가  마녀라는
게 사실이었잖아!'
  "이 주발 속을 들여다봐. 보이는 게 있을테니까"
  핀네 마리트가 말했다.
  게르트루드는 어색하게 주발  안을 들여다보고는 기겁을 하고 놀
랬다. 주발 밑바닥에  잉그마르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춰  있었던 것
이다. 핀네 마리트가  그녀에게 길쭉한 바늘 하나를  건네주면서 낮
게 소근거렸다.
  "자, 이걸로 저 눈깔을 찔러 버려. 너를 배신한 놈이야. 어서!"
  사실 게르트루드의 마음은 그러고 싶다는  생각으로 간절했다. 그
녀가 주저하는 빛을 보이자 핀네 마리트가 부추키기 시작했다.
  "그놈은 유복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어.  너 따위는 까마득히 잊고
너무나무 맘  편하게 지내고 있지.  그런데 너만 왜 괴로와해야  하
니"
  게르트루드는 바늘을 쥔 손을 주발 밑바닥을 향하여 서서히 내리
기 시작했다.
  "자, 그래 똑바로 눈을 푹 찔러 버리는거야!"
  게르트루드는 바늘을 힘껏 내리 찔렀다.  처음에는 잉그마르의 한
쪽 눈을, 나중에는 나머지 눈을 찌르면서 그녀는  바늘이 훨씬 아래
까지 뚫고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단단히 금속에 부딪치
지도 않고 무언가  연한 것을 뚫는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바
늘을 뽑자 끝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게르트루드는 아찔했다. 바늘
에 묻은 피를  보니 정말 잉그마르의 눈을 찌른 것  같았던 것이다.
그녀는 양심의 가책으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상태에서 퍼뜩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게르트루드는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 떨며  흐느껴 울었다. 아무리
단순한 꿈에 지나지 않더라도 자신이 그런 독한 마음을 먹을 수 있
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두려움을 느꼈다.
  '제발 하나님 제발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게르트루드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곤
또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도 좁은 오솔길로  해서 목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또 소
가 보이지 않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숲으로 들어갔다. 좀 전의 꿈
과 같이 아름다운  길에 이르렀고, 그러자 그녀는  꿈속에서 일어난
일들이 모두 생각나서 다시  그 늙은 마녀를 만나게 될까봐 두려워
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노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갑자
기 푹신한 이끼 아래의 지면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난데없이 사람의
머리가 불쑥 솟았다. 그녀는 질겁을 하여 주춤 뒤로 물러섰다. 머리
에 이어 매우 작은 사나이의 몸뚱이가 땅속으로부터 서서히 빠져나
오기 시작했다. 그 동안 조그마한  사나이에게선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게르트루드는 그  사나이가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머리가 좀 돌았다고 해서  사람들이 윙윙
페테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간혹 마을에서 묵을  때도 있었
지만, 여름 동안에는 늘상 숲속의 진흙 굴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게르트루드는 문득 페테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고  싶을 때 페테만 시키면  발각될 염려가
없다.'
  게르트루드는 페테가 남의 사주를 받고 몇 번이나 불을 질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는  점도 떠올렸다. 그녀는 그  사나이에게로 다가
섰다. 잉그마르  농장에 불을 지를  생각이 없느냐고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그를 떠보았다.  그리곤 잉그마르가 자기보다 농장을  더 생
각하고 있으니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다고도 말했다. 다음  순간 게
르트루드는 움찔 놀랐다. 그가 벌써 그녀의 말을  실천에 옮기려 했
기 때문이다. 윙윙  페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느닷없이  신나게 농
장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도 허둥지둥 뒤를  쫓았지만 도
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옷은 풀섶에 걸리고  발은 늪에 빠졌으
며 길에서는 돌멩이에 걸려 넘어졌다.  간신히 숲에서 빠져나가려던
그녀는 나무들 사이로 벌겋게 불길이 치솟는 잉그마르 농장을 발견
했다.
  "아아, 페테가 한 짓이야. 페테가, 윙윙  페테가 농장에 불을 질렀
어!"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게르트루드는 그 순간  무서운 꿈에
서 깨어났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게르트루드의 양  볼에 눈물
이 줄줄 흘러내렸다.  꿈이 계속하여 연장될까 무서워  다시는 잠자
리에 들고 싶지 않았다.
  "오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도움이 필요하옵니다."
  그녀는 울부짖었다.
  "제가 얼마나 약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는 몰라도 저는 지금까지
잉그마르에게 복수해야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가져 본 일이 없나이
다. 제발 하나님, 이 죄의 유혹에서 구원하여 주소서!"
  그녀는 절망에 못 이겨 두 손을 쥐어짜며 외쳤다.
  "슬픔은 협박이야, 슬픔은 협박이야, 슬픔은 내게 위협해!"
  게르트루드 자신 역시 분명한 뜻을 가지고 외친 것은 아니었지만
웬지 자기의 가련한 마음이 마치 폐허가 돼 버린 정원 같은 기분이
었다. 꽃이란 꽃은  모조리 뿌리째 뽑혀지고 슬픔이  마치 정원사처
럼 쓸고 다니며 엉겅퀴와 독초를 심고 있었다.
  다음날 그녀는 여전히  꿈꾸는 듯한 기분으로 지냈다.  꿈이 너무
도 생생하여 머릿속에서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얼마나 만족스런
마음으로 잉그마르의  눈을 찔렀던가를 생각하니  온몸에 몸서리가
쳐졌다.
  '끔찍해!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니. 아, 이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애. 나는 정말 악녀가 되려는 것일까?'
  식사가 끝나고 게르트루드는  소젖을 짜러 나갔다. 여느  때와 마
찬가지로 스카프를 얼굴 위까지 끌어내리고 눈은 아래로 내리깐 채
였다. 꿈속에서 헤맨  길을 걸어가자니 길가의 꽃까지도  꿈에서 본
것 같았다. 비현실감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었던 것
이다.
  목장에 닿으니 소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그녀는 꿈속에서처럼
냇가라든가 자작나무 아래라든가 풀숲 뒤를  헤매며 찾아다녔다. 이
윽고 울타리의  틈이 생긴 부근까지 걸어나온  그녀는 소가 그리로
빠져나간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게르트루드는 숲속의  부드러운
흙 위에  찍힌 소의 발자국을  따라 계속 나아갔다. 멀리  사아텔로
통하는 한길 쪽으로 빠져나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 그래!  오늘 아침 행운  농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사아텔
쪽으로 가축을 몰고 가던데 우리 소도 그 황소떼의 목에 맨 방울소
리를 따라 함께 휩쓸려간 것이 분명해.'
  게르트루드는 사아텔까지 가서 소를 찾아올  결심을 굳혔다. 그렇
지 않으면 소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으므로 막연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험한 바윗길을  힘을 내어 걸어
갔다. 한참  올라가던 비탈길이  급경사를 이루면서 갑자기  솔잎에
덮인 매끄러운 평지가 나타났다. 꿈에서 본 길과  흡사한 게 거기에
는 탑처럼 솟은  소나무가 서 있었고, 이것 역시 노란  햇빛에 반짝
이고 있었다. 게르트루드는 다시 비현실감 속에 빠져들었다. 무언가
이상한 일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혹시  숲속 깊이 돌아
다니는 무슨 신비로운 것이 느닷없이 앞에 나타나지나 않을까 싶어
전나무 아래를  기웃거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타나는
건 없었다. 그녀의  가슴속엔 뜻하지 않은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
했다.
  '정말 내가  잉그마르에게 복수를 한다면 어찌  될까? 내 공포가,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그 공포감이 없어질까? 내가 괴로와하는 일을
그이가 괴로와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내가 편안해질 수 있을까?'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길을 꼬박 한 시간 남짓 걸었지
만 그녀에겐 놀랄 만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길은 마침
내 숲의 목장에서 끝이 났다. 목장은 신선한  수풀과 들꽃으로 우거
진 아름다운 곳이었다. 한쪽에는 험한 산이 치솟아  있고 다른 한쪽
은 흰 꽃이 만발한 마가목과 여기저기 자작나무와 오리나무가 무리
로 흩어져 있는, 키  큰 나무숲으로 가려져 있었다. 꽤 넓은 냇물이
산허리에서 흘러나와 목장을 굽이 돌아 나직한 나무며 풀숲에 덮인
골짜기로 힘차게 흘러들었다.
  게르트루드는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자기가  서 있
는 곳이 어디인지를 금방 알 것 같았다.  냇물은 흑수천이라는 내로
서 거기에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의 경
우 이 냇물을 건너다가 다른 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환영으로 똑
똑히 보았다고  하는데, 한 소년은  이 냇물을 건너다가 마침  같은
시각에 먼  마을로 움직여 가고  있는 결혼식 행렬을 보았고,  어떤
술장수는 말을 탄 임금님이  왕관과 홀을 들고 대관식에 나가는 광
경을 보았다고도 했다.
  게르트루드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나님, 제발 여기서 제게 무엇이든 볼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녀의 마음 한구석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그녀는 극구 애원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련하게 여겨지도록 했
다.
  '아, 비참하게도 나는  어찌됐든지 여길 건너지 않으면 안  돼. 여
기를 건너가서 소를 데리구 와야 하니까'
  그녀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으스러져라 힘을 주면서 공포에 사로
잡혀 빌었다.
  '주여, 제발 비나이다. 무서운 것이나 나쁜  것은 보여주지 마시고
저를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소서!'
  그녀는 꼭 자기가  좋지 않은 것을 보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었
다. 그 예감이 너무 강해서 냇물에 가로놓인  돌다리를 아예 건너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이 그녀를 건너도록  만들었다. 절반쯤 건너다가 그녀는  문득 냇
물 저편의 나무  사이로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조용히 목장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한 사나이의 모습이었다.
  사나이는 키가  크고 젊어  보였으며, 발목까지 닿는  치렁치렁한
검은 웃옷을 걸치고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와 안
으로 말려 있었고, 화사하며 무척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는 곧장 게르트루드를  행해 걸어왔다. 맑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신
비로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의 눈이 그윽히  게르트루드를 바라
보았을 때, 그녀는 그가 자기의 온갖 슬픔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기의  마음이 속세의 공포에 두대끼고  영혼은 복
수의 일념으로 그늘져서 가슴에 슬픔이라는 독을 품은 꽃과 엉겅퀴
가 가득 심어져 있는 것을 측은하게 여긴 듯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게르트루드의 가슴속엔 안정과 평온
이 피어나고 기쁨의  강물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쳐 가자
이제 그녀에게는 일말의  원한이나 공포감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사
악한 감정들은 깨끗이  씻겨져서 게르트루드는 황홀한 기분이 되었
다. 환영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게르트루드의 눈엔 아직도 그
의 아름다운 모습이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지금껏  지켜보던 낯
선 사내의 모습이 가슴에 각인되어 박혔다.
  "나는 그리스도를 보았어!"
  그녀는 두 손을 치켜들며 탄성을 질렀다.
  "아, 나는 그리스도를 보았어. 그는 나에게 슬픔을 거두어 가셨구
나. 사랑해요. 주님. 당신을  사랑해요. 이제 이 세상의 누구도 사랑
하지 않을거예요!"
  세상으로부터 비롯된 슬픔은  이제 그녀에게서 흔적도 없이 사라
지고, 길게만 느껴졌던  세월의 시간은 거울에 투명된  일순간에 지
나지 않은 듯  여겨졌으며, 세상에서 비롯된 기쁨이란  건 천박하고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지금까지의 모든 게 정리된 느낌이었다.
  그녀는 헤르굼 신도들을 따라서 예루살렘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의 생활에 있어 두번  다시 비열한 생각과 함흑 속에 빠지
지 않기 위해서,  가증스런 일에 대한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자신의 결심을 곧 수행하기로 했다. 그녀는  이 생각들이 방
금 전에 지나간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
것을 그리스도의 눈에서 읽었던 것이다.

  잉그마르와 결혼식이  있는 아름다운  6월의 어느날이었다.  키가
크고 몸매가 날씬한 젊은  여자가 아침 일찍 잉그마르 농장에 나타
나서 신랑을  좀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얼굴은  끌어
내려진 스카프로  인해 크림빛 볼과 장미빛  입술밖에 보이지 않았
다. 팔에는 바구니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손으로 만든
장신구 묶음과 털로 꼰 실 몇 타래, 그리고  털을 엮어 만든 팔찌류
가 들어 있었다.
  마당의 중간쯤에서 그녀는 늙은 하녀를  만났다. 안내를 부탁하자
하녀는 안으로 들어가서 안주인에게 전했다.  안주인은 냉정하게 대
답했다.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은 지금 막 교회에 가려는 길이니까 만나서
얘기할 시간이 없다. 나가서 그 여자에게 이대로 전해라."
  냉정하게 거절을 당한 젊은 여자는 곧 자리를 떠났다.
  혼례의 행렬이 교회에서 돌아왔다. 그녀는  다시 돌아와서 이번에
는 외양간 입구에서 서성거리는 머슴에게로 다가갔다.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을 좀 만나뵈러 왔는데요.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머슴은 안으로 들어가서 주인에게 전했다.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은 지금 막 피로연에 참석하는 참이라 얘기
할 틈이 없다고 그렇게 일러라."
  주인이 대답했다.
  그녀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해가 저물어 가는 늦은 저녁 무렵이
었다. 이번에는 대문  가까이에서 그네를 타고 노는  아이에게 부탁
했다. 아이는 곧장 집안으로  달려가서 신부에게 전했다. 신부가 대
답했다.
  "그 여자에게 말해.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은  지금 부인과 춤을 추
고 있으니까 만날 수가 없다고 그래."
  아이가 돌아왔다.
  "아줌마에게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은 지금 부인과 춤을 추고 있기
땜에 만날 수가 없다고 그렇게 말하랬어요."
  젊은 여자는 생긋 웃었다.
  "그래, 네가 전한 말은 가짜야.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은 지금 신부
와 춤을 추고 있지 않거든."
  그녀는 떠나지 않고 문간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한편 신부는 속으로 생각했다.
  '결혼식날 거짓말을 하다니!'
  그녀는 자책감에 빠져 잉그마르에게로 갔다.  그리곤 그와 얘기하
고 싶어하는 사람이 바깥에 와 있다고 말했다.  밖으로 나온 잉그마
르는 대문간에 서 있는 게르트루드를 발견했다.
  게르트루드는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한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잉그마르도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잉그마르는 지난 몇 주일의 짧은 동안에 사람들한테 무척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무언가 약삭 빠른
경계의 빛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재산을 갖게  된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보다  태도가 훨씬 겸손해지고 성격도 온순해
진 듯이 보였다.
  사실 그는 게르트루드와  만난 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경매
가 있고부터 날마다 그는  자기가 한 거래에 만족하고 있다는 신념
을 확고히 굳히려고 애를 써 왔다.
  '실상 우리 잉그마르손  집안 사람들은 농장의 밭을  갈거나 씨를
뿌리거나 하는 것 이외의 일엔 별로 개의치를 않아'
  그는 생각했다. 게르트루드를 잃은 것  이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배신을  했다는 점이었다. 그가 약속을  깨버린 한
여자가 지금 저 앞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게르트루드의 뒤
를 약간 처져서 뒤따라가며  그녀가 지껄일 만한 일체의 경멸의 말
들을 마음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이윽고 집에서  꽤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 게르트루드가  길가의
돌 위에  앉아 바구니를 땅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스카프를  한
층 더 얼굴 위로 끌어내렸다.
  "앉으세요."
  그녀는 잉그마르에게 다른 돌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해야 할 말들이 많아요."
  '잉그마르가 생각만큼  힘들 것 같진  않군. 게르트루드를 만나서
얘기를 듣자면 괴로와서 못 견딜 줄 알았는데.... 이 사람에 대한 애
정 때문에 스스로 질 줄 알았어.'
  "결혼식 날 이렇게  찾아와서 방해하고 싶진 않았어요 하지만 제
사정이.... 전 곧 이곳을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거예요. 실은 일
주일 전에  떠날 예정이었는데 그때 생각잖은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걸 얘기하려고 미룬거죠."
  게르트루드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잉그마르는 마치 다가오는 폭풍우에라도 대비하듯 쪼그리고 앉아
어깨를 안으로 숙이고 목을  깊숙이 묻은 채 그녀의 말에 귀기울이
며 생각했다.
  '게르트루드가 어찌 생각하든  내가 농장을 택한 것은  분명히 잘
한 일이야. 농장이 없었다면 난 살아 있지도 못했을테니까.'
  "잉그마르"
  이렇게 부르고 게르트루드는 얼굴을 붉혔다.  스카프 안쪽으로 들
여다보이는 한쪽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5년 전 제가 헤르굼 신도들에게 가담하려던 일을 기억하시겠죠?
그때 저는 제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바쳤었지요. 그런데  그 마음을
거둬들여서 잉그마르에게  드렸던거예요. 그것부터가 잘못이었어요.
그 일로 해서 제가 지독한 괴로움을 겪어야  했으니까요. 그때 제가
그리스도를 저버린 죄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을 받게 된거죠."
  잉그마르는 게르트루드가 헤르굼의 신도들과 함께 떠날 생각이라
는 말을 하려 하자 곧 반대하는 기색을 나타냈다.
  '게르트루드가 헤르굼  신도들과 섞여서 낯선 예루살렘에  가겠다
니 그건 안 될 일이야.'
  그가 아직도 그녀와 약혼한 사이였다면 별별 말을 다 줏어섬겨서
라도 적극적으로 그녀의 계획에 반론을 제시했을 것이다.
  "그래선 안 돼, 게르트루드. 하나님은 절대 벌 주시려고 그러신게
아닐거야."
  잉그마르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했다.
  "그럼요, 잉그마르. 벌 주신  건 아녜요 다만 두번째 선택의 경솔
함을 제게 깨우쳐 주신거죠. 이제 슬픔은 모두 기쁨이 됐어요. 주께
서 저를 선택하시고 불러 주셨다면 잉그마르도 이해하실 수 있을거
예요."
  잉그마르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의 눈에 피로한  빛이 역력했
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타일렀다.
  '쓸데없는 짓이야. 게르트루드를 붙잡아서  어쩌겠다는거야? 그래,
바다와 육지를 나와 게르트루드  사이에 둔다는 것 이상 좋은 일은
없어. 그래, 바다와 육지를 말이지.'
  그러나 잉그마르의 마음속에선 무언가 게르트루드를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 강하게 고개를 들고 일어섰다.
  "혼자서 떠나는 걸 양친께선 허락하지 않으실텐데."
  "물론, 그래요.  그거야 뻔하니까 부탁하지도  않을거예요. 아버지
는 절대로 승락하실 분이 아니구요. 저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 극단
적으로 폭력을 쓰실  지도 모르죠. 그렇게 된다면  도망쳐서라도 가
야죠. 그분들은 지금 제가 시골로 수공품을 팔러 다니는 줄 아세요.
결국 저는 고텐베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과 무사히 스웨
덴을 빠져나갈 때까진 부모님께 알리지 않기로 했죠."
  잉그마르는 마음이  아팠다. 게르트루드가 쓸데없는 억지를  부려
부모에게 모진 슬픔을 맛보게 하려는거라고만 생각되진 않았다.
  '게르트루드는 자신이 얼마나 독한 행동를  하려는지나 알고 있을
까 몰라.'
  그는 그녀에게 충고를  하려다가 꾹 눌러 버렸다.  자신이 게르트
루드가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을 책망할 권리가 없는 인간이라는 생
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어머니나  아버지를 얼마나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인
지 모르는 건  아녜요. 하지만 저는 예수님의 뜻을 다시  저버릴 순
없어요."
  그녀가 살포시 웃어 보였다. 고른 치아가 슬프도록 희게 보였다.
  "예수께선 저를 파멸의 길에서 구해  주셨으니까요. 저의 병든 영
혼을 깨끗이 고쳐 주셨어요."
  그녀는 천천히 스카프를 걷어올리고 새로운 용기를 되찾은 듯 잉
그마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잉그마르는  그녀가 마음에 새기
고 있는 존재와 자기를  비교하고 있음을 깨닫고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조그마한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부모님께서 무척 괴로와하시겠죠."
  그녀는 건조한 음성으로 되풀이했다.
  "아버지는 이제  연세가 많으셔서 학교를 그만두실  때가 되었고,
그러면 여태까지보다 더 궁색한 생활을  하셔야 되겠지요. 무엇보다
아버지에겐 무언가 마음을 붙이실 일이  필요하게 될거예요. 그렇잖
으면 침착성을 잃고 성미가 급해져서 어머니도 아버지와 편안한 날
들을 갖지 못하실테구요. 두 분은 다  불행해질거구.... 물론 제가 집
에 있다면 그렇게는 되지 않을테지만"
  게르트루드는 말을 뚝 끊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켜버
리는 듯한 태도였다.  잉그마르는 목이 막히고 눈자위가  뜨겁게 부
풀었다. 그는 지금  게르트루드가 늙은 부모들을 돌봐  달라는 부탁
을 망설이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게르트루드가  욕설이나 퍼붓고  자극을 주려고 찾아온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마음이 활짝 열여 있었다니!'
  "게르트루드"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돼. 아무튼 고마워. 그렇게까지 마음을 다
치게 한 나를 믿고  찾아주다니. 부모님들은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돌봐 드릴테니까"
  잉그마르의 얼굴에서 경계의 빛이 사라졌다.
  '이 여자는 나를 용서한다는  걸 보여 주려는거야. 단지 부모님을
염려해서만은 아냐. 이렇게까지 마음이 풍요로울 수 있다니...'
  "저도 잉그마르가 그럴거라는 걸 믿고 있었어요."
  그녀가 자신감있게 한 옥타브 높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것말고도 다른  할 얘기가 있어요. 잉그마르는  생각지도 못할
얘기예요."
  잉그마르에게 게르트루드의 모습은 마냥 신선하고 마냥 아름다우
며 목소리는 마치 은쟁반을 구르는 듯 투명하게 느껴졌다.
  "일주일쯤 전에  저는 집을 나왔었어요. 곧장  고텐베리로 가서는
헤르굼 신도들이 도착할 때까지 거기서  머무를 생각이었지요. 첫날
밤은 베리소나에 있는 마리 보빙이라는  가난한 과부댁에서 잤어요.
잉그마르, 이 마리 보빙이라는 이름을 잊지 마세요. 언제라도 이 마
리 보빙이라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해서 당신을 찾아오며는 꼭 도와
주시길 바래요."
  잉그마르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에
새삼 가슴이 저려왔다.
  '아! 나의 사랑,  게르트루드. 내가 잘못한거야. 밭과 농장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야. 내가 가장 괴롭고 슬플 때  위안이 돼 줄 사람을
잃었으니. 이 여자가 이렇게 떠나 버리면, 아 이 허탈감을 어찌해야
할지....'
  "그날 밤  저는 마리 보빙의 부엌에서  좀 떨어진 골방에서 잤지
요. 그 여자가 '침대는  잉그마르 농장에서 경매하는 걸 사온거랍니
다. 잠이 잘 올거예요. 아가씨'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자리에 누웠지
요. 뭔가 머리  밑에 딱딱한 감촉을 느꼈지만 침구가 별로  좋지 않
은 거라 그렇겠거니 생각했지요. 저는 너무 고단해서  쉽게 잠이 들
었어요. 그런데 잠결에도  머리가 불편한 게 느껴져서  베개를 뒤집
어 봤더니 베갯잇 한쪽에 잘랐다. 꿰맨 자국이 있잖겠어요. 그 속에
뭔가 빳빳한 게 느껴져서 베갯잇을 뜯어 보니 조그마한 종이뭉치가
포장지에 싸여진  채 들어 있더군요.  사람이 돌 위에 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저는 종이뭉치를 침대  머리맡에 놓아 두었지요.
아침에 마리에게 줄 생각이었거든요."
  게르트루드는 잠시 말을 끊고 잉그마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얼핏
보기에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잉그마르
의 생각은 엉뚱한 데로 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손놀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기품있는 여자는 일찌기 본 일이 없어. ....하지만 난 처신
을 잘못하진 않았어. 자기자신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옛날도 있듯
이 농장만이 나를 필요로 한  게 아니라 마을 전체가 내게 목을 매
달고 있었단 말야.'
  그러나 그는 마음이 영 좋질 않았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게
르트루드 이상으로 자기가 이 마을을 사랑했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
던 것이다.
  "그렇게 날이 밝았지요. 마리에게 갖다  줄 양으로 종이뭉치를 집
어들었는데 글쎄 거기에 잉그마르의 이음이 써 있잖아요? 내용물을
살펴보고 나서 그걸  당신에게 가져다 주기로 결정했어요.  그 얘기
는 물론 누구에게도 비밀로 했답니다.
  그녀는 바구니를 뒤져 예의 그 종이뭉치를 꺼냈다.
  "받으세요, 잉그마르. 제가 지금껏  말한 거예요. 잉그마르에게 물
려진 유산이에요."
  게르트루드는 잉그마르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그다지  기뻐하지
도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형식적으
로 무관심하게 건네주는 것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차라리 내게 앙탈를  부리고 욕지거리나 퍼부을 일이지  꼭 나한
테 버림받은 게  즐거운 것 같은 태도로군. 진작 이  여자의 매력이
더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았을텐데.'
  "잉그마르"
  게르트루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대한 얘기를 하려는 듯 불렀다.
  "에로프가 잉그마르 농장에  병이 나서 누워 있을 때,  그 베개를
베고 있었던 게 분명해요."
  그녀는 잉그마르의  손에서 종이뭉치를 집어들곤 그것을  펼쳤다.
빳빳한 새 지폐가 그녀의 손에 잡혀져 나왔다.  모두 천 크로네짜리
지폐로서 스무 장이 들어 있었다.
  "이게 에로프가 베개 속에 감춰  든 잉그마르의 재산이에요. 진작
물려받았어야 했던거죠."
  잉그마르는 게르트루드의  얼굴을, 다시 지폐를 번갈아  바라보았
다. 그는 현기증이라도 일으킬 듯했다. 게르트루드가 돈뭉치를 그의
손에 올려 놓았다.  지폐가 그의 손으로부터 힘없이  미끌어져 땅위
로 흩어져 내렸다.  그녀는 얼른 그것을 주워  잉그마르의 주머니에
집어넣어 주었다. 잉그마르의 몸이 취한 듯 휘청했다.
  '아아, 하나님.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없어!'
  잉그마르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다 마구 휘두르며 속으로
울부짖었다. 진작  이 돈이 발견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지금은 이미 게르트루드를 잃었고 돈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다. 이
제 그것이 나타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는 하나님께 묻고
싶었다.
  잉그마르의 손이 무겁게 게르트루드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너는 복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어!"
  "무슨 말이에요, 잉그마르?"
  "그럼 뭐라고 해야 하지? 왜 발견하는 즉시 내게 가져다 주지 않
았지?"
  "결혼식까지 기다리고 싶었던거예요."
  "바보, 바보 같으니! 진작  와 주었더라면 이렇게 돼 버리진 않았
을텐데. 나는 이 돈으로 스헨 페르손한테서 농장을  살 수도 있었잖
아."
  잉그마르는 양 손을 머리카락 사이로 찔러 넣고 쥐어뜯으며 괴로
운 듯 소리쳤다.
  "그랬겠지요. 네, 그래요. 그걸 몰랐던 게 아니예요."
  "그런데 무슨 심보야? 결혼식  날에 나를 찾아와서 이 돈을 건네
줘서 무얼 어떡하겠어. 이젠 필요없게 돼 버린 것을 가지구!"
  "처음부터 틀린거예요.  일주일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잉그마르는 맥없이 주저앉아  얼굴을 파묻고 처절하게 아주 처절
하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 길밖에 없는  줄 알았어! 나는.... 나는 그렇게  밖에는 별도리
가 없는 줄만 알았다구!  그런데 이제 와서 그걸 변경시킬 수  있는
길을 발견하다니.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이 아니고 뭐야."
  "내 말 좀  들어봐요. 잉그마르. 저도 그  돈을 처음 발견했을 땐
그것이 우리들에게  내려진 유일한 구원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분명히 알아  두셔야 할 것은 전 이제 다른  분의 것이예요.
이젠 세상의 어떤 것에도 현혹되지 않을거구요."
  "그 돈은  게르트루드나 가져 버려!  어쩔 도리가 없다고  믿었을
땐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진 않았어.  그러나 지금은 달라. 우린 맺어
질 가능성이 있었던 말야.  심장이 찢어발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야.
견딜 수가 없다구!"
  한편 잉그마르 농장에서는  모두들 신랑을 기다리다 못해 포오치
에 나와서 그를 찾고 있었다.
  "잉그마르! 잉그마르!"
  잉그마르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잉그마르, 이러지 말아요.  저는 잉그마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생각으로 찾아왔던거예요."
  잉그마르가 슬픈 듯이 집 쪽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신부는 또 신부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군. ....일을 이렇
게 만들어 놓다니. 게르트루드.... 그때 난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어
서 그랬다지만, 너는 다만 나의 불행을 위한 양  일을 꾸민 것 같구
나. 이제  비로소 내 어머니가  첫아이를 죽여 버렸을 때  아버지의
기분이 얼마나 비통했을까를 알 수 있을 것 같군."
  그는 다시 돌발적인 울음을 토해 놓았다.
  "사랑해, 게르트루드! 지금까지 사랑한 그 이상으로, 아니, 여태껏
이렇게까지 게르트루드에게서 사랑을 느껴 본  적은 없었어. 사랑이
이렇게까지 지독한 괴로움인 줄도 몰랐어!"
  "잉그마르"
  게르트루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녀는  따뜻하게
잉그마르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며 말했다.
  "당신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은 결코 가져  본 적이 없었어요. 마
음이 물질에 급급하면 언제나 슬픔도 뒤따르기 마련이에요."
  잉그마르는 고개를 푹  꺽고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게르트루드는 이미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집 쪽에서 사람들이  그를 찾으며 달려나오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자기가 않아 있는 돌을 내리쳤다.
  "우린 기필코 다시 만나게 될거야, 게르트루드"
  그가 비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잉그마르손들은 한번 마음 먹은 것은 반드시 손에 넣고 말
지. 우리가 다시 만날 땐 사정이 달라져 있을거야."
  영원의 시간에 서서

  제3부 사랑을 찾아서

     선임목사 미망인의 충고

  사람들은 모두 헤르굼  신도들의 예루살렘 순례를 만류하느라 여
념이 없었다. 지방의  유지들도, 집달리도, 재판관도, 시의원들도 온
갖 힘을 기울여 그들의 생각을 단념토록 하려고  애를 썼다. 헤르굼
신도들은 자기들이 어떠한  사람들과 살게 될지조차 모르는 상태였
으므로, 마을 사람  사람들은 그 미국 사람들이  사기꾼은 아니겠느
냐고 묻기도 했다.  그 먼 동방의 나라엔 법률도 질서도  없기 때문
에 언제 도둑을 만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다가  그 나라의 도로
는 거칠어서 신도들의 짐은 모두 말에 실어  운반해야 했다. 의사는
그곳은 천연두나 악성 열병의  소굴로 그들이 죽으러 가는 것과 마
찬가지라며 도저히 그 풍토에서  견뎌 낼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
다.
  헤르굼 신도들은 자신들도 다  알고 있는 일이여 그런 것들과 싸
워서 도를 닦기 위해 가는 거라고 대꾸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
를 그토록 황폐하게 방치해 둘 수 없으며,  자기들이 그곳을 낙원으
로 가꾸어 놓을 참이라고도 말했다. 누구 하나  그들의 마음을 돌려
놓을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아랫마을에 선임 목사의 미망인인 한 노파가 살고  있었다. 꽤 나
이가 든 늙은이로 남편이  세상을 뜨고부터 길 건너 교회 맞은편에
자리한 우체국 위층의 방을 빌어 살고 있었다.
  웬만큼 산다 싶은  마을의 아낙네들은 이 노부인에게 문안드리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어서, 일요일이면 갓 구운 빵이나 버터  한 덩
어리, 우유 한 병씩을 들고 오곤 했다.
  노부인은 그네들이 찾아올 때마다 커피를 끊여 내어 얘기할 분위
기를 만들었다. 그녀는 거의 귀가 들리지 않았으므로  여간 크게 말
하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낙들은  그 주일에
일어난 일을 노파에게  모두 알려주려고 해도 얼마만큼이나 알아들
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노파는 거의 방에서  나가는 일이 없었다. 때론  사람들이 그녀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그녀의 집 앞을 지나칠 때 창문에 드리워진 흰 커튼 사이로 그녀의
주름진 얼굴을 발견하게 되면 문득 생각하곤 했다.
  '저토록 쓸쓸하게 살고 있는 노인을 잊어서야 안 되지. 뭐라도 잡
술 만한 걸 가져다 드려야겠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노파는 일에 점점 무관해져 갔고 흥미조차
잃어버린 듯해서, 사람들은 그녀가 마을의  일들을 얼마만큼이나 알
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항상 낡은  성서의 주석
서나 읽고 앉아 있을 뿐으로 이제는 거의 외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녀에겐 함께 살며 돌봐주는 충실한 하녀 하나가  있었다. 두 사
람은 성격이 비슷해서 도둑과 새앙쥐를 두려워하는 거며 불을 무서
워하는 것, 불을 켜 두느니 차라리 어둠 속에  앉아 있는 편을 선택
하는 것까지도 똑같았다.
  최근 헤르굼 신도가 된  사람들 중에도 그녀를 찾아와 간단한 물
건들을 놓고 가곤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을 달
리하여 개종을 한 이후로는  이제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은 한 사람
도 없었다. 그들이 오지 않는 까닭을 노파도  알고 있는지 어떤지를
아는 사람도 물론  없었다. 또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이주한다는 말
을 듣고 있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노파는 산책을 하고픈  생각에 하녀에게 말
두 마리가 끄는  사륜마차를 준비하도록 시켰다. 하녀는  깜짝 놀라
이를 만류하려 했으나 노파는 못 들은 척 소리쳤다.
  "사라레나, 산책을 좀 하고 싶다니까. 어서 마차를 부르도록 해!"
  사라레나는 별수없이 목사에게로 가서 마차를  빌렸다. 그것은 꽤
고풍스러운 마차였다. 사라레나는 마차를 부르고  깊숙이 처박혀 있
던 헌 모피 망토와 낡은 빌로드 보닛을 꺼내어 솔질을 하여 바람에
말렸다. 준비가 다 끝나고 그녀는 노파를 부축해서  계단을 지나 마
차에 올려 앉혔다. 그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노파는 나무나
노쇠해 있어 금방 쓰러질 것만 같이 위태로와 보였다.
  그녀는 간신히 마차에 올라 앉아 마부에게 곧 잉그마르 농장으로
가지고 일렀다.
  잉그마르 농장 사람들은 노부인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를  부축해서 거실로  안내했다. 식탁에는 많은  헤르굼
신도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요즘 한자리에 모여  간소한 식사를
함께 들기로 되어  있었다. 메뉴는 주로 쌀밥과 차와 그  밖의 간단
한 음식들로, 이는 다가올 사막의 횡단 여행에 대비한 것이었다.
  노파는 방안을 두루  훑어보았다. 몇 사람이 그녀에게  말을 건네
려 했으나 그날 따라 그녀는 아예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녀가
갑자기 손을 흔들며 귀먹은  사람이 흔히 그렇듯 메마르고 거친 목
소리로 말했다.
  "요즘은 여러분이  통 기다려도 오질  안길래 내가 직접  왔어요.
예루살렘아 가지 말라고 충고하러 온 거예요. 거긴  좋지 않은 데예
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 박은 곳도 바로 그곳이라구요."
  카린이 뭐라곤가 말하려 했으나 그녀는 못 본 척하며 막무가내로
지껄였다.
  "아주 나쁜  곳입니다. 그리스도가 목 박힌  곳이 거기예요. 나쁜
사람들만 살구 있는  데지요. 오늘 내가 여기 온 것은  여기는 좋은
집안이기 때문입니다. 잉그마르손, 언제나  좋은 이름입니다. 그러니
까 여러분은 이 마을에 남아 있어야 해요."
  말이 끝나자  그녀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그녀는 이제  자기
몫의 마지막 봉사를 마친 것이다.
  노파가 떠난 뒤 카린은 울음을 터뜨렸다.
  '아, 알 수가 없어. 그곳으로 가는 일이 정말 잘못된 것일까.'
  카린은 아주 극히 잠깐, 자신의 계획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그
러나 그녀의 의구심은 쉽사리 사라졌으며 잠깐 가졌던 마음의 동요
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영원의 시간에 서서

  제3부 사랑을 찾아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드디어 헤르굼 신도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7월의 싱그러운 아침, 마차와 짐마차의 긴  행렬이 잉그마르 농장을
출발했다. 그들은 일단 역으로 말을 몰고 갈 예정이었다.
  마을을 벗어나자면,  일단 무크레미일레라고 일컫는 다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을 지나야  했다. 거기엔 소문이 지독히  나쁜 인간쓰레
기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그들을 하나님이 바
빴거나 혹은 한눈을 팔고 있을 때 제멋대로  태어난, 그야말로 하나
님의 실수로 태어난 인간들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그곳에는 더러운 누더기를 걸친 한 무더기의 아이들이 하루 종일
빈들거리며 놀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마차가 한 대씩  지나갈 때마
다 소리를  지르거나 그 안에 앉은  사람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게 유일한  놀이인 것 같았다.  또한 주름살 투성이의 노파가  술에
취해 길바닥에 퍼질러앉아 있는가 하면,  밤낮으로 말다툼을 하거나
구타하는 것을 일삼는  한심한 부부도 있었다. 그들은  주로 훔치거
나 동냥을 해서  생계를 이어 나갔으므로 어느  쪽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헤르굼 신도들이 오랜 세월을  비바람에 시달린 듯 다 쓰러져 가
는 오두막 앞에 이르렀을 때, 주름살 투성이의  한 늙은이가 맨정신
으로 똑바로 서  있었다. 그녀는 리나라 불리는 사람으로 그  길 한
복판에서 술에 곤드레만드레로 취해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지껄이며
서 있어야 할 노인이었다. 네 명의 아이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여느 때 같지 않게 몸단장을 할 말끔한 행색이었다.
  선두로 달리던 마차가 그들을 발견하곤 서서히 말의 속력을 늦추
었다. 그들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을 낮추는 어른들 틈에
서 아이들의 흐느낌은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거지 리나가 깨끗한 몸가짐으로  길가에 나와
서 있는 모습은  그들에게 무척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리나는 오늘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전송하기 위해 술도 먹지 않고 손자
들까지도 머리를 빗겨 가지고 데리고 나와 진지한 마음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소 있었던 것이다.
  헤르굼 신도들이 느릿느릿  그러나 금방 리나의 시야에서 사라졌
다.
  "저 사람들은 천당에 가는 거란다.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거야."
  리나가 울음을 터뜨리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이 이 길바닥에  서 있구나.
여전히 이러구만 있어."

  마차와 짐마차의 행렬이 마을을 절반쯤 지나오자 강 위에서 흔들
거리고 있는 부교앞에  다다랐다. 부교의 앞부분이 급경사가  져 물
가까이까지 늘어져 있었다.  두 군데의 약간 높은  부분의 밑으로는
작은 배나 뗏목이  지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아무튼  이 다리를
건너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심하게 경사진 부분들은  누구도 올
라가기를 두려워했다. 더군다나  다리에 깐 널판지는 쉽게  썩어 버
리기 때문에 자주 갈아주지  않으면 안 되어 사람들의 신경을 무던
히도 쓰이게 했다.  해빙기가 되어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밤낮으로
떠내려오는 얼음으로  인해 부서져 버리지 않도록  늘 주의를 해야
했다. 비라도 쏟아질라치면  갑자기 불은 비로 다리  전체가 물살에
말려들어 떠내려가기 일쑤였으므로 단단한 방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그 부실하기 짝이  없는 다리를 사랑하고
있었고, 동시에 자랑으로 여겼다. 다리를 건널 때마다 그들은 늘 감
사하는 마음이 용솟음쳤다.
  마차가 지나가자  다리는 악을  쓰며 몸을 흔들어댔다.  널판지의
벌어진 틈으로는 물이  솟아올랐고, 말은 다리털을 몽땅  적시는 봉
변을 당해야 했다.
  사람들은 자기들 공유의 재산인 정든 다리가 이제 마지막이라 생
각하니 마음이 슬퍼졌다.  집이나 농장, 숲, 목장 등은  주인들이 모
두 달랐지만 다리만큼은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닌 그들 모두의
재산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공유재산이  그것뿐이었던 것은 아
니었다. 깨끗하게 흰  칠을 한 학교라든가, 전도관, 다리  건너편 자
작나무 숲에 가려진 교회, 이 모두가 그들이  함께 누리던 것들이었
다. 아니다.  그들은 더 많은  것들을 공유했었다. 다리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정경들 - 삼림으로 우거진 제방 사이를 유유히
흐르며 수면 가득 눈부신 햇빛으로 반짝이던 여름의  강, 온통 푸르
고 맑고 광활한 산협의  경치, 이 모든 것이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로부터 떠나는 것이었다. 정들었던 고향  산천과의 영원한 결
별의 순간에 그들은 서 있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고 있는 일행들은 다리 중간 지점에 이르자
찬송가 한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다시 만나리
  저 하늘의 에덴 동산에서 만나리

  그들의 노래를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고향의 푸
른 산과 산들거리는 나무를  향해 흐느낌과 눈물에 목이 메어 이별
의 노래를 불렀다.
  "아, 사랑하는 나의  고향, 내 나라여, 희고 붉은  집들이 나무 사
이로 보이고 평화로운 농장이 있는, 기름진 밭과 푸른 목장, 과수원
과 숲들....  나의 산천이여, 갈라지는 긴  골짜기 끝에 닿은 강이여,
반짝이는 햇살이여,  우리 다시 만나길  기도하노라, 오 나의  사랑,
나의 고국이여!"
  긴 마차의 행렬이 다리를 건너자 묘지 앞에  이르렀다. 긴 세월의
흔적을 여실히 보이고 선 묘비에는 륭 집안의 조상의 뼈가 묻혀 있
다는 말만 전해질 뿐 이름도 날짜도 새겨 있지 않았다.
  예루살렘을 향한 무리에 섞인 륭 비오른 오라프손은 묘지를 바라
보며 어린 날의  회상에 잠겨 있었다. 어린 날의 언젠가  그는 동생
페르와 묘지 앞의  돌 위에서 놀다가 크게 싸운 일이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로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며 한바
탕 크게 다퉜다는 것만은 아직도 기억할 수  있었다. 한참을 정신없
이 다투고 있을  대 그들은 몇 번이고  돌 위를 차분히 두드려대는
이상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륭  비오른과 동생 페르는 두려워  곧
싸움을 그치고 둘이 손을 꼭 붙잡고는 그곳을  살짝 도망쳐 나왔다.
그 두 사람은 그 후로 묘비를  볼 때마다 어릴 때 그 날의 일을 떠
올리곤 했다.
  그런 륭 비오른이  지금 묘지 앞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
심코 그곳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머리를 감싸고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틀림없는 동생 페르였다. 륭 비오른은 얼른 말을 세웠
다. 그는 일행들에게  기다려 달라는 손짓을 한 뒤 묘지  앞의 동생
에게로 다가갔다.
  페르 오라프손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농장을 파셨더군요, 형님"
  "음, 그래. 내가 가진 것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기 위함이었지."
  "농장이 어떻게 형님 겁니까?"
  "아니 그럼, 내 것이 아니란 말이냐?"
  "그래요. 그건  오라프손 집안 것이지  절대 형님 것만은  아닙니
다."
  륭 비오른은 아무런 대꾸 없이 동생의 다음  말들을 기다렸다. 무
슨 말을 하든  두렵지는 않았다. 그는 동생이 돌에 앉아  있을 때는
뭔가 온화한 분위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란 걸 알고 있었던 것이
다.
  "저는 농장을 다시 샀어요."
  륭 비오른은 깜짝  놀랐다. 지금 동생은 자기가 판 것을  다시 샀
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너는 오라프손 집안에서  농장이 사라지는 걸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구나."
  "천만에요, 형님.  저는 그런 이유만으로 농장을  살 만큼 부자가
아녜요."
  륭 비오른은 알 수 없다는 듯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농장을 다시 산  까닭은 형님이 다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였
어요."
  륭 비오른은 가슴이 꽉 막히는 듯했다.
  "그리고 조카들이 돌아올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구요."
  비오른은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며  두 팔로 동생의 목을 감싸 안
았다.
  "또.... 형수님을  위해섭니다.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을거예요. 형
님. 언제든지요."
  "오, 페르. 나보다는  네가 천당에 가야 할 것 같구나.  나는 집에
남아 있는 게 좋겠어. 네가 내 대신 예루살렘에 가려무나."
  "아닙니다. 형님"
  페르는 미소를 함빡 머금었다.
  "제가 집에 있는 게 더 좋습니다."
  "아니야, 너는 천당에 가야 해."
  페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나를, 그 동안의 모든 잘못들을 용서해 주렴."
  륭 비오른은 동생의  어깨에 머리를 묻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일어서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은 소리가 나지 않는데요? 형님, 기억하시겠어요?"
  "그럼, 그럼. 네가 여기 와 있으리라곤 정말 상상도 못했다."
  "우린 한동안 서먹했어요."
  "오늘 나를 만나면 싸우게 될거라고 생각했냐?"
  "그렇진 않았어요.  하지만 형님이 떠나 버린다는  생각에 울화통
이 치밀어 올랐지요."
  그들은 서로의 어깨를  감싸 안고 한길로 내려섰다.  페르는 곧장
형수에게로 가 따뜻하게 손을 잡았다.
  "형수님, 륭 농장을 다시 샀습니다.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은 형수
님께서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걸 알
려드리려는 겁니다."
  그는 다시 조카의 손을 잡아 쥐었다.
  "꼭 잊지 말아라. 너에겐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는 집과 땅이 있
단다."
  그는 차례차례 조카들의 손을 잡아주면서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그는 두 살  난 어린 에릭에게 다가갔다. 에릭은 그를  쳐다보며 아
무런 영문도 알지 못한 채 방긋방긋 웃어댔다.
  "꼭 기억해 둬라. 너희들.  에릭이 자라서 이곳에 오고 싶어할 때
면 언제든 돌아갈 집이 있다고 꼭 알려줘야 해."
  이렇게 눈물겨운 이별의 순간이 지나갔다.  사람들은 다시 예루살
렘을 향해 순례의 길을 재촉했다.

  묘지를 지나고  그들은 전송을 나온 많은  친척들과 벗들을 만났
다. 모든 사람이  손을 잡아 보려 했고 한마디라도 이별의  말을 나
누려 하는 탓으로 그들은 꽤 오래 시간을 지체했다.
  마을을 지나니  길가에는 그들의 떠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집집마다 계단에 사람들이 서 있고, 거
리가 먼  곳의 사람들은 제방이나 언덕에  올라서서 이별의 손들을
저었다.
  긴 행렬은 느릿느릿 이들  앞을 지나 시의원 할스 클레멘손의 집
앞에서 멈추었다. 군힐드가 가족들과 작별하기  위해 마차에서 내렸
다. 그녀는  예루살렘에 가기로 결심하면서부터 잉그마르  농장에서
기거해 왔다. 부모의 반대로 늘 신경전을 벌이기보다는  그 편이 나
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차에서 내려서자  주위의 분위기가 무섭도록  스산하게 느껴졌
다. 집 밖이나 창문에는 그림자 하나 얼씬대지  않았으며 대문은 자
물쇠로 꼭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울타리를 넘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현관문도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그녀는 부엌으로 향했다. 거
기도 마찬가지였다.  문이 안으로  걸려 있었으므로 그녀는  한참을
두들겨 보았다. 그녀는 문을 바깥쪽으로  잡아당겨 막대기를 집어넣
었다. 간신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엌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실도 안방도 다 뒤져 보았으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군힐드는 부모님께 작별인사도 없이 그냥  떠나 버리기는 싫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늘 필묵과  종이 따위를 넣어 두는 이중 책상으로
다가가 뚜껑을 들어올렸다. 잉크를 찾기 위해 책상  서랍 속의 간막
이된 선반 뚜껑을 뒤지다 보니 문득 눈에 익은 자그마한 상자가 눈
에 띄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결혼 선물로 받은 것으로,
군힐드는 어릴 적에 어머니가 이따금 그것을 보여주던 생각을 떠올
렸다. 하얗게  에나멜을 입혔으며  뚜껑에는 육필로 그린  꽃무늬가
있는 예쁜 상자였다. 뚜껑 안쪽에는 목동이 한군데로  몰려 있는 어
린 양떼들에게 피리를 불어 주고 있는 그림도  붙어 있었다. 군힐드
는 상자를 집어넣으려다가 그 목동의 그림을 한 번 더 볼 생각으로
다시 뚜껑을 열었다.
  군힐드의 어머니는 언제나 이 상자 안에 귀중한 물건들을 간직해
두고 있었다. 가령  그녀가 늘 끼고 있던  날아빠진 결혼반지라든가
아버지의 구식 회중시계, 그녀 자신의 황금 귀걸이  같은 것들이 바
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물건들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고  한
통의 편지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그것은 군힐드가  쓴 편지였
다. 1,2년 전에  그녀는 배편으로 시리안 호를  건너 모라에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배가 뒤집히게 되었고 같이 탄 사람들  몇 사
람은 물에 빠져  죽었다. 그때 군힐드의 부모들은  딸아이도 죽었다
는 통지를 받았었는데  나중에 군힐드로부터 살아있다는 편지를 다
시 받게 되었던 것이다.
  군힐드는 가슴이 뭔가로 쿡 찔리는 듯했다. 지금  이 상자에 있던
다른 물건들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자신의 편지만이 들어 있는 까닭
은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어머니는 딸이 무사하다는  편지 이상으
로 귀중한 게 없을  만큼 군힐드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
다.
  군힐드는 온몸의 피가  식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죄책감
으로 죄어 들었다.
  '아, 나는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하려는거나 마찬가지야.'
  그녀는 인사말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접어두고 얼른 집에서 나
왔다. 마차에 오르니  사람들은 부모님께 인사를 했냐는  둥 여러가
지 물어댔지만 그녀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마차가 움직여
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채 묵묵히 앞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줄곧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하려는거야. 아, 어머니는  정말 돌아
가실지도 몰라. 나는 영원히  불행해지고 말거야. 이건 뭔가 모순이
야.'

  마차가 숲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면서 신도들은  문득 낯선 사람
두 명이 줄곧 자기들을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을에 있
는 동안은 작별 인사를  하느라 모두들 정신이 없었으므로 전혀 몰
랐는데 숲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마차는 줄곧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달리고  있었다. 마
차들은 보통 흔한 짐마차여서  어떤 게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수도
없었고, 설혹 다른 한 대의 마차가 낀다 해도  수를 헤아려 보지 않
는 이상은 그 사실을 알 리가 만무했다.
  그 낯선 마차는 흰  수염을 기른 늙은 할아버지가 모는 것이었는
데, 노인은 꽤  허리가 굽었고 손은 주름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이 노인이  누군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  옆에
앉은 여인에겐 모두들 낯익은 느낌을 갖고 있었다.  여인은 검은 어
깨걸이로 머리를  푹 감싸고 있어서 제각기  그녀의 몸매와 크기를
어림잡아 누구일거라는  추측들을 가져  봤지만, 서로 일치됨  없이
빗나갈 뿐이었다.
  한쪽에서 군힐드가 소리쳤다.
  "우리 어머니예요!"
  이스라엘 토마손의 아내는 맞받아 소리쳤다.
  "아냐, 우리 언니 같아."
  팀즈 할보르는 그녀가 에바 군네르스투테르 할머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상한 마차는 줄곧  그들을 따라왔고, 그 묘령의  여인은 한번도
어깨걸이를 끌어내리지 않았다. 헤르굼의 신도  가운데 어떤 이에게
는 그녀가 사랑하던 여인이 되기도 했고, 어떤  이에게는 두려워 한
사람도 되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녀는 자기들이 버리고 온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길이 넓어져서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게 되자 그 이상한 마차
는 행렬의  맨 앞까지 달려가서는 왼쪽으로  비켜서서 그들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묘령의 여인은 그들을 바라보며  앉아 있
었으나 누구도  그녀를 파악하여  단정지을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정거장까지 끈질기게 따라왔다. 그녀의 얼굴을  보겠다고 벼르고 있
던 사람들이  우루루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마차의 행렬이 마을을 지나는  동안엔 누구 하나 일을 하는 사람
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외출복 차림으로  길가에 나와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떤  사람들은 몇 마일씩 따라 걷기도 했
다. 그 중 단 한  사람, 헤이크 마츠 에릭손만은 밭에 나와 일을 하
고 있었다. 땅에서 돌을 들어내는 일이었는데, 그는 그 일이 어린아
이 장난처럼 수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마차를 몰고 가다가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다. 헤이
크 마츠 에릭손은 숲에서  쇠지렛대로 돌을 파내어 돌담을 쌓고 있
었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돌을  캐내어 무겁게 끌어내는
걸 되풀이했다. 멀리  있는 가브리엘의 눈으로도 그  돌의 무거움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헤이크  마츠는 돌을 들어서 힘차게  돌담 위에
던져 올렸다. 그들은 서로 부딪쳐 불꽃이라도 튀길 것만 같았다.
  헤이크 마츠는 아들 가브리엘이 어렸을 때 만큼이나 열심히 일하
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부림을 당하는 노예와 같았다. 슬픔이
그를 꼭 죄고 있었지만 그는  더 큰 돌을 파헤쳐 내어 다시 그것으
로 돌담을 쌓는 일에만 몰두했다.
  행렬이 지나가고 잠시  후 심한 뇌우가 일어났다.  모든 사람들이
피할 곳을 찾아  뛰었다. 헤이크 마츠도 뛰려다가  멈칫 멈춰서서는
아랑곳 없이 일을 계속했다.  점심 시간이 되었다. 딸아이가 문간에
나와 그를 불렀다.  그는 별로 시장기를 느끼지 않았고 뭐든  좀 먹
어 두는  게 좋을거라고는  생각하면서도 일을 중지하지는  않았다.
그의 아내는 가브리엘을  따라 정거장에 나갔다. 그녀는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남편에게 아들이 떠난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그는
귀기울이지 않고 계속 일만 했다.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그는 그저
죽기 살기로  일하는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몰려 나와서  그를
바라보다가 제  집으로 들어가서는 그가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고
쑥덕거렸다.
  어스름한 밤이 되어서까지도 헤이크 마츠는  일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움직일 힘이 남아 있는 한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슬픔에 함락
당할 것만 같은 지독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가 나와 서서
조용히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숲의 돌은 이제  거의 치워졌고
돌담도 높이 쌓여졌다.  그런데 저 작달막한 늙은이는  거인과 마찬
가지로 커다란 돌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  이웃 사람들이
나와 보곤  했지만 그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드디어 캄캄한 어둠이  대지를 빈틈없이 채웠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헤이크  마츠 에릭손은 일을 멈추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귀엔 그가 집어  올리는 돌과 돌이 서로 부딪치는 육중한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는 마침내  쇠지렛대를 집어 올리려고
허리를 굽히다간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는  슬픔이고 뭐고
한 가지도  생각할 틈이 없이  잠 속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는  잠이
깨어 집으로 돌아와서도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나무  의자에 몸을 내던지고는 다시  깊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할보르의 신도들이 도착한 역은 숲속의 넓은 개척지에 새로 세운
것이었다. 시가나 밭, 정원 따위는 없었지만 이 황야에 앞으로 철도
도시가 생길거라는 추측으로  온갖 것들이 대규모로 설계되고 있었
다.
  역에는 널찍한 석조  플랫홈이 마련되어 있었고, 넓은  수화물 축
적장과 자갈을 깐 긴 철길이 가로놓여 있었다. 매점  겸 공장 두 가
구, 사진관 한 가구, 여관 한 가구만이 자갈이 깔린 사거리 넓은 광
장 주변에  세워져 있을 뿐,  나머지 공지는 그루터기만 남아  있는
정지하지 않은 땅이 전부였다.
  여기에도 달 강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어두운  숲으로부터 성
난 급류가 되어 쏟아져 나와 포말을 터뜨리며  앞으로 돌진했다. 이
것이 오늘 아침 신도들이  건너온 그 장엄한 강의 일부라고는 도무
지 믿겨지지 않았다.  밝고 휘황한 골짜기는 이미  없었고 어둠만이
전나무로 우거진 고지대에 올올이 스며 있을 뿐이었다.
  성지로 가기 위해 부모들을 따라온 아이들은 이 황량하고 음습한
곳에서 마차를  멈추자 두려운  마음에 그만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떠나오기 전만 해도 예루살렘을 여행한다는 일을 매우 즐거워 했었
다. 그렇다고 해서  집을 나설 때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막상  역에 도착하고 보니 떠난다는  게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른들은 마차에서 짐을  끌어내어 화차에 싣느라고 여념이 없었
다. 누구 하나 쉬고 있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아이들을 볼봐줘야 한
다던가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가 살펴본다던가  하는 생각을 갖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모여 앉아 앞으로의  일들을 궁리했다. 잠시
후 그 중 나이가 좀  든 아이들이 어린 아이들의 손을 잡고 역으로
부터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로 짝을 이룬  이
행렬은 그들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넓은  모래밭을 넘었
다. 아이들은 계속하여 걸었다.  그루터기의 땅을 지나고 강을 건너
서 아이들은 어두운 숲속으로, 숲속으로 집을 향해 가는 것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던 한  아낙네가 문득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먹을 거라도 줘야겠다는 생각에 음식 바구니를 열고 아이들
을 불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한
아이의 모습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 사람의  남자가 아이들을
찾으러 나섰다. 그들은 모래 위의 조그마한 발자국  행렬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저만큼 앞에 아이들의  뒷모습이 길다랗게 걸어가
고 있었다. 그들이 소리쳐도 아이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진, 전
진하여 갔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어둠 속을 달렸다.  아이들도
내달리기 시작했다. 작은  몸들이 어찌할지 몰라 이리  부딪치고 저
리 부딪치며 달려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발을 가누지 못하
고 곤두박질쳤다. 계속 내닫던  아이들도 모두 우뚝 멈춰섰다. 비참
하고 슬픈 아이들의  모습이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  조그마한 가
슴들을 움켜쥐고 오열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너희들, 대체 어딜 가려는거냐?"
  한 어른이 물었다.
  제일 나이 어린 아이가 발작적으로 자지러질듯 울어 젖혔다.
  "우린 예루살렘에 가지 않을래요. 집에 가게 해주세요."
  아이들은 어른들의 손에 끌려 역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기차에
올라 탄 뒤에도 오래도록 소리내어 울면서 훌쩍거리는 소리로 말했
다.
  "집에 가구 싶어요. 집에 가게 해주세요."
  "우린 예루살렘에 가지 않을래요. 집에 가구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