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 왜 당신을 사랑할까

영화 그녀 왜 당신을 사랑할까

영화 <툴리>의 한 장면.

“용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는 것이다.” 파티에 다녀온 남편이 어떤 아가씨를 데려다주는 길에 함께 자고 왔다고 말한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용서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덧보탠다. 용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는 것이라고, 진짜 이해했다면 용서라는 말이 필요 없다고 말이다. 아이 넷을 키우고 있는 아내 수전은 가정을 유지하는 일이 ‘지성적’인 판단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남편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용서한다. 눈치챘다시피, 용서로 지탱이 되는 이 가정은 이미 균열되어 있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의 가정 말이다.

영화 그녀 왜 당신을 사랑할까

20대 후반에 결혼한 수전은 꽤나 합리적인 판단으로 결혼을 하고, 전원주택으로 이사해 네 명의 아이를 낳았다. 모두 계획한 대로였다. 단조로운 생활을 하게 될 것도 알았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두렵거나 힘들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수전은 자신의 삶이 “자기 꼬리를 문 뱀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유지하는 게 원하던 일이었지만 그것을 유지하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막내가 제법 큰 이후엔 자기만의 방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집 안에 엄마의 방을 만들었지만, 수전은 그 방에서 하루 종일 아이들이 내일 입을 옷, 먹을거리, 일과를 설계하느라 생각이 쉴 틈이 없다. 혼자 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호텔 19호실을 빌린다. 그리고 드디어 그곳에서 혼자가 된다. 누구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친구가 아닌 익명의 존재가 된 것이다.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다보면 나 자신을 잃고 산다고들 말한다. 영화 <툴리>에서 만나게 되는 여자 마를로(샤를리즈 테론)도 그런 인물 중 하나이다. 1남1녀의 어머니인 그녀는 현재 만삭이다. 지금은 막내이지만 곧 둘째가 되어야 할 아들은 좀 특별하다. 지나치게 예민한 아들은 일종의 정서적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와중에 셋째가 태어나고, 마를로는 말 그대로 독박육아에 시달린다. 시도 때도 없이 깨는 아이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고, 그 와중에 두 아이의 식사와 등교, 준비물도 챙겨야 한다. 남편은 집에 돌아오면 이어폰을 낀 채 게임에 열중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나쁜 남편도 아니다. 아니, 그냥 평범한 남편의 모습이라는 게 문제다. 내가 젖이 나온다면 야간 수유라도 대신할 텐데라는 식의, 나름의 위로를 던지는 모습 말이다.

그때 밤에만 아이를 돌봐주는 도우미 툴리가 나타난다. 자신의 아이처럼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툴리 덕분에 마를로는 정말이지 너무나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잔다. 쉬는 것처럼 쉬니 기운이 나서 아이들 간식도 챙겨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넬 여유도 생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챙기고 돌아보게 된다. 야간 보모 툴리는 마를로를 찾아 온 첫째 밤, 나는 아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을 돌보기 위해서 왔어요, 라고 말한다. 그렇다. 보모는 사실 아이가 아닌 엄마에게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엄마 마를로에게 아이들은 금세 크니 잠시만 견디세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전을 보노라면,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만은 아닌 듯싶다. 미친 듯 체력을 불태우며 수유기를 지나 학교에 갈 정도로 아이를 키우고 나면 과연 ‘나’가 돌아올까? 아이들로 북적이던 시간이 아이가 빠져나가면 고스란히 나의 것이 되어 줄까? 도리스 레싱이나 오정희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 대답은 아니라는 것처럼 다가온다.

오정희의 소설 <옛우물>에도 사는 집에서 좀 떨어진 방에서 자기만의 짬을 가지는 한 중년 여성이 등장한다. 45살 생일을 맞게 된 여성은 그 떨어진 예성 아파트에 가서 곧 허물어진 연당집을 내려다본다. 바보 아홉 명, 당상관 다섯 명이 태어났다는 연당집은 바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의 내면, 젊음과 욕망의 결과물일 테다. 젊음과 욕망은 바보 같은 짓 아홉 개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당상관처럼 자랑스러운 결과도 다섯쯤은 만들어 낸다. 그렇게 깊은 자기의 내면은 나만 혼자 있을 수 있는, 예성 아파트에 가서야 보인다. 19호실에 가서야 볼 수 있는 자기 자신이 있는 것이다.

영화 <툴리>의 결말에는 반전이 숨어 있다. 그 반전을 보고 있노라면, 결국 출산과 육아, 결혼과 가정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가장 상처 입는 것은 엄마, 아내가 아니라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 툴리는 힘들어하는 마를로에게 지금 당신의 모습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미래의 모습이 아니냐고 묻는다. 둔감하지만 착한 남편, 귀여운 세 남매. 브루클린의 옥탑방에 세들어 살 땐, 그토록 간절히 꿈꾸었던 미래의 모습이 바로 지금 아니냐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아내에게도 19호실과 예성 아파트는 필요하다. 그 무엇이라는 수식어를 다 뗀, 익명의 존재가 되어 나를 완전히 놓고 그래서 나만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 이 공간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트르슈카 인형처럼 나를 벗기고 벗겨 마침내 드러나는 작은 나, 50대에서 40대, 30대, 20대, 10대의 나.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나와 만나는 과정. 마를로나 수전과 같은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이나 무관심, 용서가 아니라 이해이다. 그녀에게는 다만 이해가 필요할 뿐이다.

곁에 있는 연인, 가족 등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 지기에 우리는 그들의 존재가 당연한 것이라고 의식한다. 하지만 그들의 부재 시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 슬픔은 마치 토네이도가 수많은 존재들을 한 번에 삼켜버리듯 매우 강력하다. 만약 당신과 언제까지나 함께 할 것 만 같던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할 시간이 단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면 우리는 찬미하는 그 사람을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 것인가?

영화의 주인공 이안,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 사만다는 여느 연인들과 다르지 않다.알콩달콩 서로를 향한 마음을 표현하며 사랑을 속삭이기도 하고, 티격태격 다투기도 하며 일상을 보낸다. 두 사람 사이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이안은 어린나이에 성공한 비즈니스 맨 으로서 그녀와 사랑을 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의 일 역시도 놓치고 싶지 않아 한다. 반면 사만다는 사랑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 사건이 발생하던 당일은 두 사람에게 있어 몹시도 중요한 날이었다. 사만다는 졸업연주회, 이안은 투자자들과의 미팅이 있는 날 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날에 아침부터 불길한 일의 연속이라니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느낀채 각자의 일터로 향한다.

영화 그녀 왜 당신을 사랑할까

사만다의 졸업 연주회 공연을 보러가기 위해 택시를 탄 이안. 택시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여자친구를 사랑하고 있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 라하는 이안의 말에 택시기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녀를 가진것에 감사하며 살고,

계산없이 사랑하라"


연주회가 끝난 뒤, 즐거워야 할 식사자리에서 두 사람은 그동안의 감정으로 인해 말다툼을 하게 된다. 이안에게 있어 자신은 늘 2순위 였다고 속상하다 말하는 사만다. 그동안 모든 일을 다 제쳐 두고 두 사람만을 생각한적이 없었다며 쌓여왔던 감정을 털어 놓는다.

레스토랑을 뛰쳐 나가 택시를 타려는 사만다를 붙잡는 이안. 그러나 사만다는 이안을 뿌리친다. 그녀와 함께 동행할 것이라고 묻는 택시기사는 이안을 연주회장까지 데려다 주었던 그 택시기사였다. 망설이던 이안은 결국 사만다를 혼자 택시에 태워 보내게 된다. 그러나 사만다가 탄 택시는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안이 보는 앞에서 큰 사고를 당하게 되고 결국 그녀는 병원으로 이송되지만 그날 밤 숨을 거둔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다정하게 건네주지 않았던 자신을 되돌아 보며 후회 하는 이안. 그녀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며 슬픔에 젖은채, 사만다의 일기장을 품에 안고 잠에든다.

 

운명의 장난인 걸까, 잠에서 깬 이안의 옆에는 마치 꿈인듯 사만다가 잠들어있었다. 몹시도 놀란 이안은 그녀에게 어찌된 영문인지를 묻지만 그녀는 오늘따라 무슨일이냐며 오히려 이안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본다. 그녀가 죽었던 어제로 시간이 되돌아 간 것이다. 이안은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죽음을 막아보기위해 노력하지만, 발생하는 일들은 어제의 것들과 피차 달라진것이 없다.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이안은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자신의 온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최고의 하루를 선물하기로 결심한다.

영화 속 여자주인공 사만다 역을 맡았던 제니퍼 러브 휴잇이 부른 If Only의 OST 인 Love will show you everything 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등장한다.

‘And if you ask me why ,,, I love you and why I'll never leave. My love'll show you everything'.

-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왜 떠나지 않는다고 물으신다면 내 사랑이 모든걸 보여주리.

사랑은 단지 그 자체일 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함께 머무름에 있어 사랑은 단지 그 자체로 위대한 것 이며 모든것의 이유가 된다. 사랑에 있어서 계산은 오히려 사랑을 갉아먹는 존재가 됨을 이 영화에서는 아주 잘 보여준다.

처음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느꼈던 설렘이 영원히 지속되기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설렘은 점차 익숙함으로 바뀌고 그 존재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니 말이다. 왜 이안이 진작 사만다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두 가지이다. 그녀가 너무나도 익숙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소중함을 느끼지 못해서, 그리고 그녀를 사랑함에 있어 쓸 데없는 계산을 했기 때문이다. 사만다가 원한것은 자신이 행복할것인가에 대한 계산이 아닌 그저 사랑 그자체였거늘.

영화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이안의 모습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을것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감동적이고 눈물겨운 남녀간의 로맨스뿐 만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건네보고 싶다. 당신은 곁에있는 소중한 존재를 후회 없이 사랑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