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혁 독자 술 - junghyeog dogja sul

-시나리오가 끝난 어느 평화로운 날

-동거설정

-캐붕 있음

-유치한 김독자 나옴

*

김독자는 제 스스로 무척이나 무던한 인간이라고 여겼다. 취향도, 입맛도, 성격도 까다롭지 않았으며 특별히 고집하는 성향도 없었다. 자연스레 흘러가고, 주어진 삶에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란 그에게는 무척 쉽기만 했다. 그랬기에 김독자는 자신했다. 유중혁과 함께 살아가는 일 또한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허. 상상 이상의 전개와 개연성을 깨부순 사건들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법이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 엿 됐다.

깔끔하게 정리된 테이블 위에는 온통 빨간색 과채류로 만들어진 요리들이 올라가 있었다. 물론 이것들을 만든 사람은 유중혁이며, 먹어야 할 사람은, 누구겠는가. 바로 김독자였다.

*

발단은, 이틀 전 저녁, 아니 밤 즈음 생긴 일이었다.

남자 둘이 함께 사는 집이라고는 해도 서로 생활패턴이 달랐던 유중혁과 김독자는 일이 끝난 저녁 무렵, 함께 저녁을 먹고, 가끔 이야기를 하고, 유승이나 길영이와 함께 놀러가기로 한 날의 일정을 계획하는 등 지극히 평범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평화로운 일상이 낯선 듯 빈 시간에 어쩔 줄 모르던 날도 있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현실이 되어주었으므로.

그러므로 두 사람이 점점 서로의 공간에 스민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특별한 일이 아닌 한 서로를 공기처럼 여기는 일도 적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런 관계는 대개 약간의 충돌과 트러블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그 동안은 그럴 일이 없었다. 김독자가 유중혁을 너무 잘 알았고, 유중혁은 생각보다 김독자의 신체 스펙을 하찮게 여겨 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겉보기엔 상당히 이상한 이유들이었으나, 평화가 지속되는데 어쨌든 나쁠 것은 없었다.

그날 밤, 유중혁은 드물게도 PC가 아니라 거실에 놓인 텔레비전에 콘솔 게임기를 연결해 신작 게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시나리오가 끝난 후, 놀라울 정도로 여가생활을 즐기지 못한 반동인지 그날따라 유중혁은 게임에 몰입해 있었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세이브도 잊은 채 엔딩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진행된 상태. 시간은 자정에 가까웠고, 저녁을 먹은 후 제 방에서 소설을 읽다가 거실로 나온 김독자는 그런 유중혁의 등을 힐끗 쳐다보고는 부엌으로 발을 움직였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텔레비전과 연결된 콘솔 게임기의 콘센트는 거실과 부엌을 가로질러 꽂혀있었다. 그리고 김독자가 거실을 통해 부엌으로 향했던 발걸음이, 아니, 김독자의 발이 콘센트 선에 제대로 걸리고 말았던 것.

게임기의 연결이 끊어졌다. 유중혁은 드물게도, 이날따라 세이브를 잊었다. 이 말인 즉, 유중혁의 플레이 데이터는 저 먼 곳으로 떠났다는 뜻이었다. 김독자는 연결 신호가 끊어져 푸른 화면만을 송출해내는 텔레비전과, 한 마디 말도 없이 조용한 유중혁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다가.

미안. 진짜 미안하다.”

그렇게 말하고 방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차라리 즉각 화를 냈으면 그걸 열심히 풀어봤을 테지만, 김독자는 솔직히 그래. 유중혁이 입을 다물고 화를 낼 때가 제일 무서웠다. 전지적 독자 시점도 사용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유중혁의 침묵이란 마치, 너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끝을 예비하라는 선고 같았다.

방으로 도망쳐 들어온 김독자를 쫓아올 법도 하건만, 바깥에서는 게임기를 정리하는 듯 작게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나다가, 그 다음엔 발소리가, 그리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과정을 끝으로 조용해졌다.

김독자는 두려워졌다. , 저거 진짜 화났나? 살그머니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어보면, 그림자도 빛도 없이 캄캄한 거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유중혁의 방을 찾아가기엔, 좀 그랬다. 솔직히 김독자는 유중혁의 방 문을 열었을 때 어떤 표정일지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들은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동안 대차게 싸우고 때리고 맞아봤으나 이런 애들 같은 다툼은 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래서 김독자는 일단 고민했다. 내일 아침에 사과를 해 볼까. 아침 준비를 대신 해 줘 볼까. 아니, 걔는 나보고 죽어도 요리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화만 더 돋우는 거 아닌가. 침대에 대충 걸터앉아 정말 세상에서 가장 진지하고도 쓸 데 없는 고민을 하던 김독자는, 체력이 바닥인 직장인답게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깨어보니 아침이었고, 유중혁은 아침부터 무엇이 그리 바쁜지 이미 나간 상태였다.

, 진짜 삐졌나?

메모 한 장 없이 쌩하니 나가버린 동거인에 대해 떠올린 건 그런 생각뿐이었다. 4의 벽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으리라.

김독자는 멍청이 이다.

*

우선 김독자는 유중혁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메신저를 켜 슬쩍 메시지를 보내 보았다.

[중혁아, 아직 화났어?]

[어제는 미안하다.]

[아침에 제대로 사과하려고 했는데 너 일찍 나갔길래.]

[너 좋아하는 만두집에서 만두 사갈까?]

[중혁아?]

[유중혁?]

답이 없다. 아니 답은 고사하고 읽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덜컥 걱정스러운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아니, 아침부터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말도 없이 나가서는 연락도 안 받아? 김독자는 자신도 일이 바쁠 때 연락을 못 보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은 까먹어버린 듯 분통을 터트렸다. 사실 오 분 간격으로 열 개가 넘는 메시지를 보내놓고 무시를 당한 셈이니 화를 낼 법도 했다. 오묘하게 걱정과 화가 뒤섞인 상태로 십 분에 한 번 핸드폰을 한 번, 메신저를 한 번 확인하던 김독자는 몇 시간 후에 울린 메신저 알림에 득달같이 반응해 버렸다. 그리고 즉시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말았다.

[됐다.]

마침표까지 포함해 고작 세 글자. 아니 사람이 이렇게 걱정을 했는데 어떻게 저렇게만 답을 할 수가 있지? 김독자는 역으로 화가 났다. 사실 제풀에 쫄고 사서 걱정을 한 게 조금 많이 억울했다. 이건 다 유중혁이 어제 말도 제대로 안 하고 오늘 아침엔 말도 없이 나가고 연락도 안 받은 게 나빴다. 김독자는 이제 스킬도 없는 주제에 훌륭한 자기합리화를 성공시켰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답장을 밀어 지워내고는 한수영에게 연락을 넣었다.

[, 술 마시자.]

답장은 금방 도착했다.

[웬일이야, 알콜 쓰레기 주제에. 네가 사냐?]

김독자는 언제나 지갑과 통장이 소중한 소시민이었으나, 이 갈 곳 없는 분노를 해결하기에는 술이 최고라는 사실도 알았다. 뒷감당은 미래의 자신이 해 주겠지.

[내가 살 테니까 이따 저녁에 늦지나 마라.]

*

김독자는 거나하게 취했다. 고작 소주 한 병에 이렇게나 취하기도 어려울 것을, 한수영은 김독자가 취한 모습을 보며 한껏 한심함을 담아 혀를 찼다. 이럴 거면 왜 술을 마시자고 하지? 이 새끼는 학습 능력이란 게 없는가보다. 게다가 취해서 뻗은 놈의 지갑을 열어 계산을 하기엔 한수영은 제법 양심적인 인간이었으므로, 술이 깬 김독자에게 오늘 술값의 두 배를 청구하는 것으로 참기로 했다. , 나 너무 착한 거 아니냐. 그렇게 자화자찬을 한 김에 한껏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 김독자의 핸드폰으로 유중혁에게 연락을 넣었다.

[여기 알콜 쓰레기 있음. 수거 바람.]

친절하기 그지없게도 주소까지 첨부해 주었으니 금방 올 터였다. 한수영은 시커먼 남자 둘의 애새끼 같은 싸움에 휘말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으므로, 가게 밖에서 담배를 태우다가 유중혁의 모습이 보이자 냉큼 턱짓으로 가게 안을 가리켰다.

난 간다.”

그래.”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는 어쩐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침착한 듯 보이기도 했다. 우선 하나 확실한 사실은 가까운 시간 내에 김독자가 큰 화를 입을 것이란 미래였다.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반쯤 쌀가마니마냥 들려 차에 실렸다. 한수영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뭐 죽이기야 하겠냐고 생각했다. 짐덩이를 보내고 나니 담배가 꿀 같이 달았다.

*

숙취와 두통이 아주 제대로 찾아왔다. 김독자는 내가 어제 얼마나 마셨길래 집에 들어온 기억이 안 나지 생각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 죽을 것 같다. 심지어 속도 안 좋았다. 물이 필요했다. 결국 어기적거리며 몸을 일으킨 김독자는 천근같은 몸을 이끌고 제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당연히, 유중혁이었다.

이제야 일어났나.”

, 어어.”

아침 다 됐다. 와서 먹어라.”

김독자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생각했다. 하루가 지나고 정신이 드니 숙취에 맛이 간 몸으로도 상황판단은 제대로 할 수 있었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유중혁이 맞았다. 게임 파일을 날려버린 사람은 김독자, 사과 한 마디만 남기고 도망친 사람도 김독자, 제풀에 걱정하고 화를 내고 삐친 것도 김독자, 어제 술에 진탕 취해서(비록 소주 한 병이었지만) 민폐를 끼친 것도 김독자. 그러니까 김독자는 일단 고개를 숙이고 봐야 했다. 물리적으로 고개를 숙이면 울렁거리는 속이 구역질을 일으킬 것이 뻔했으므로 우선 유중혁의 뒤를 졸졸 따라 부엌으로 향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리고, 부엌에 잘 차려진 테이블을 보고 깨달았다.

, 이 새끼 이거 진짜 화 많이 났구나.

테이블은 토마토로 도배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토마토 요리로 가득했다. 싱싱하기 그지 없는 토마토를 그대로 갈아낸 토마토주스를 시작으로, 토마토 계란볶음과, 토마토 카프레제 샐러드, 토마토의 색이 한껏 진한 미트 소스 파스타, 흡사 케첩 색에 가까운 토마토 스프까지. 이렇게 일관적인 재료 선택은 남들이 보기에도 이상했지만, 이걸 차린 사람이 유중혁이며, 먹게 될 사람이 김독자라는 시점에서 아주 명백한 사실을 가리켰다.

유중혁은 지금 요리로 김독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김독자는 정말이지 토마토가 싫었다. 겉껍질은 질기고 애매한 풋내가 나는 주제에 수분은 많아서 한 입 베어 물면 물이 줄줄 흐르는 점이라거나, 안에 녹색과 노란색이 섞여 찝찝한 식감을 주는 내용물도 싫었다. 토마토 특유의 냄새도 김독자에겐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햄버거를 시켜 먹을 때도 김독자는 꼭 토마토를 빼고 주문했다. 유난히 호불호가 없는 그에게 유일하게 미움 받는 식재료가 바로 토마토였다.

그러나 김독자는 지금 죄인이었다. 동거를 시작하고 몇 달,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는 유중혁과, 결국 유중혁을 화나게 한 김독자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명백한 결론이었다. 김독자는 정말 사약을 받는 표정으로 포크를 집어 들고, 그나마 먹을 수 있는 파스타에 손을 뻗었다. 유중혁의 시선이 김독자의 얼굴부터 손까지 집요하게 따라붙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을 질끈 감고 돌돌 만 파스타를 입에 집어넣으려는 순간, 맞은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유중혁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웃고 있었다. 김독자는 이 낯설고 이상한 상황에 포크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중혁아?”

조심스럽게 불러보는 김독자의 목소리에도 유중혁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너무 웃어서 이제 배까지 아픈지 배를 감싼 채였다. 김독자는 뭔가, 생각한 상황과 너무 다른 전개에 얼이 빠졌다. 음식에 이상한 게 들어 있었나? 아니, 유중혁 저놈 지금 아직 뭘 먹은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웃지?

, 유중혁.”

잘못한 건 순전히 저였으나 이렇게 사람을 앞에 두고 웃기만 하는 것을 보니 김독자의 좁아터진 속내가 삐죽 튀어나왔다. 목소리는 당연히 까칠하기 짝이 없었다. 김독자의 얄팍한 입술이 댓 발은 나올 때쯤 되어서야 유중혁은 웃음을 그치고 고개를 들었다.

화 안 났다, 김독자.”

뭐어?”

정말이지 뜬금없는 소리였다. 아니, 그럼 이 상은 뭔데? 김독자는 그 말을 입으로 하진 않았으나, 얼굴에 그대로 담았다.

숙취에 좋으니 토마토 주스나 다 비워라. 그걸로 봐 주지.”

아니 화 안 났다며 토마토 주스는 왜 다 마시라고 해? 김독자는 제가 지은 죄도 잠시 잊고 유중혁의 속을 알 수 없는 태도전환에 불만을 표시하려 했으나, 웃음기가 남은 유중혁의 얼굴이 지나치게 잘생긴 탓에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씨, 결국 김독자는 거의 코를 막다시피 하고 토마토 주스를 한 번에 들이키게 되었다.

숙취에 더해져, 싫어하는 음식으로 속이 더 뒤집힐 지경이었으나 그걸로 제가 한 잘못과 잔뜩 끼친 민폐를 봐주겠다는데 더 불평할 길도 없었다. 김독자는 예의도 잊고 테이블 위에 얼굴을 묻었다.

다음엔 미안하다고 할 거면 제대로 얼굴을 보고 해라. 술 마시고 하면 안 받아줄 거다.”

김독자의 뒤통수 위로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도대체 김독자는 지금 유중혁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저 놈을 십 년 넘게 봤는데, 왜 저러지? 고민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방금 닿았다 떨어진 손이, 놀랍도록 다정했다는 사실 외에는.

속을 가라앉히는 동안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그저 평화로웠다.

-

김독자는 멍청이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