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유전자 조작 장점 - ingan yujeonja jojag jangjeom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어떻게 태어날지 정해져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모습과 성격, 지능, 신체적 특징을 우리의 보호자가 정하고, 그들이 만족하는 '완벽한' 상태에서 우리가 태어난다면?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렇게 완벽하게 태어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많은 과학자는 현재 유전자 조작 기술에 대해 활발히 연구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유전자 조작 기술을 통해 완벽한 사람들이 태어날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유전자 변형 아기에 대해서는 많은 찬성과 반대 주장이 존재합니다. 

인간 유전자 조작 장점 - ingan yujeonja jojag jangjeom

유전자 변형 아기에 대해서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주로 의학적인 이유와 더 뛰어난 아기를 창조할 수 있음을 근거로 주장합니다.

첫 번째로, 유전자 변형 기술을 아기에게 적용함으로써 유전병으로 분류되는 겸상적혈구 빈혈증, 낭포성 섬유증, 당뇨병, 고혈압, 심장질환, 비만 등을 사전에 유전자 변형을 통해 예방하여서 아이가 생전에 겪을 고통을 줄여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찬성 측에서는 현재 저출산 현상이 심각하게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건강한 소수의 자녀를 원하며, 그로 인해 희귀 유전 질환에 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고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고 아이들의 고통을 줄이려면 유전자 변형 기술이 아주 효과적이라고 주장합니다.1

두 번째로, 크리스퍼-CAS9과 같은 유전공학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아인슈타인 같은 똑똑한 아기를 만들 수 있는 시대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며, 이전보다 똑똑하고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아기를 만든다면 결국 인류는 새로운 단계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똑똑한 두뇌와 건강한 신체를 가진 아기들만이 미래에 태어난다면 자연히 전체적인 인류의 수준이 우월해질 것이고, 인류 진화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2

저는 찬성 측에서 첫 번째 주장에서 내세운 것처럼 유전병으로 고통받을 잠재성이 있는 아기들을 도와준다는 면에서 유전자 변형 아기는 인류에게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우려하는 점은 아직 유전자 공학 기술이 많이 발달하지 않았고, 의학 목적으로만 쓰인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시에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아이의 유전자를 변형하는 일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어떠한 기술이 나오면, 그 기술을 악용하는 사람은 항상 있지만, '유전자 변형 기술'은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기술이고 생명 윤리와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이를 악용하면 정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찬성 측의 또 다른 주장인 '더 뛰어난 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에 저는 반대합니다. 물론 더 뛰어난 아기를 만들 수는 있겠지만 이는 자칫하면 인류가 심각한 빈부 격차에 시달릴 수도 있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유전자 변형을 한 아이와 하지 않은 아이 사이의 격차가 벌어질수록 유전자 변형을 하는 데에 드는 돈을 지불할 수 있는 계층과 그럴 수 없는 계층 사이에 빈부 격차는 좁혀질 수 없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영화 [가타카]에서는 NASA와 같이 우주비행사를 양성하고 그에 관련된 연구를 하는 어느 대기업에 일정한 신체 조건을 갖출 수 있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사회를 묘사합니다. 그 신체 조건은 유전자 변형을 통해서만 모두 갖추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인류의 표면적인 발전이 일어난다고 해도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기에 더 뛰어난 아기를 만들기 위한 유전 공학 기술은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전자 변형 아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주로 윤리적인 문제와 안정성의 문제를 근거로 주장합니다. 첫 번째로,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모두 비슷하게 아름다운 외모와 똑똑한 두뇌, 그리고 건강한 신체를 가지기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며 모두 각자 개성을 가지고 다르게 태어나며, 그런 '각기 다름'이 인간의 존엄성을 만들어준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아기도 하나의 인격체인데 보호자가 그렇게 마음대로 아기의 모습과 성격 등을 정하는 것은 아기의 권리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라는 주장도 있습니다.3

두 번째로, 현재 크리스퍼-CAS9과 같은 유전자 변형 기술에 대해서는 안전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018년 허젠쿠이 당시 중국 난팡과기대 교수는 에이즈에 면역력을 가진 쌍둥이 '룰루'와 '나나'를 탄생시켰다고 밝혔습니다.  이 실험 과정에서는 많은 돌연변이가 발생하였는데, 그것이 룰루와 나나에게 직접적으로 큰 피해를 준 것은 아니지만 이 같은 상황이 지속해서 반복되어 위험한 돌연변이가 생길 경우 안전성을 절대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4

저는 반대 측의 첫 번째 주장인 윤리적 문제에서는 우선 인간의 존엄성이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읽은 책 중 [완벽에 대한 반론]에서 마이클 센델은 유전자 변형 기술에서 아이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이렇게 반박하였습니다.

"부모가 미리 유전적 구성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아이가 자신의 신체적 특성을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그릇된 가정을 함축하고 있다."5

라고 이야기하며 보호자가 유전적 특성을 결정하지 않아도 그 아기는 스스로 정할 자율성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저는 보호자가 유전적 특성을 결정하지 않아도 아기가 스스로 정할 자율성이 없기에 이를 아이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을 정의할 수 없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에 아이는 자율성을 가지지 않은 상태로 성격이나 외모가 정해져서 태어나기 때문에 반대측의 첫 번째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 바입니다. 

저는 또한 반대 측의 두 번째 주장인 안정성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술의 발전을 전망해보고, 유전자 변형의 정도를 확실히 정의하는 방법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전망하여보고, 유전자 변형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지, 의학적인 용도로만 사용할 것인지 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찬성 측의 첫 번째 주장처럼 유전자 변형 기술은 의학적인 용도로만 이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전자 변형 기술이 우리 사회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허용되어야 악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아이의 유전자를 변형시킨다는 것은 그 아이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기에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아이가 생전에 유전병 때문에 겪을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유전자 변형 기술에 부분적으로 찬성합니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라는 영화에서는 언니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생이 태어날 때부터 수도 없이 많은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언니에게 기증하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하지만 결국 언니는 살지 못하고 병으로 죽게 됩니다. 만약 나의 아이에게 장기 이식이 필요할 때, 이식할 적합한 사람이 없다면 유전자 변형 아기를 선택할 것인지는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너무나도 절박하고 간절한 의학적 상황에서는 과연 유전자 변형 아기를 허용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윤리'라는 학문에는 기준이 없기에 각자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자신만의 소신으로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모범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각주:

1 [파워풀한 교과서 과학 토론] 224쪽 참고

2 [파워풀한 교과서 과학 토론] 221쪽 참고

3 [파워풀한 교과서 과학 토론] 229쪽 참고

4 [파워풀한 교과서 과학 토론] 230쪽 참고

5 [완벽에 대한 반론] 22,23쪽 인용

인간 유전자 조작 장점 - ingan yujeonja jojag jangjeom

김애란 작가의 2011년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의 주인공 한아름을 통해 “삶은 선물”이란 말의 구체성을 보여준다. 사진은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같은 제목의 영화. 출처: 영화 <두근두근 내 인생>

어렸을 때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면, 보기 싫은 딱지가 앉는 것을 보곤 했다. 아스팔트 깔린 주차장이나 도로에서 놀던 시절이라, 모래와 돌멩이가 만드는 크고 작은 상처의 별무리 대신에 비교적 균일한 평행선이 상처 부위에 얽히고 그 위를 딱지가 덮게 마련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다친 곳이 가려워지면 무신경하게 딱지를 떼어버리곤 했고, 아래에서 차오르는 새 살을 보며 신기해하곤 했다. 그 딱지가 생명을 가를 수 있는 중요한 신체 기작(機作)이라는 것을 배운 건, 대학 때 졸음을 쫓으며 들었던 혈우병에 관한 수업에서였다.

혈우병은 여러 이유로 피가 멈추지 않는 질병의 총칭이다. 혈액의 응고를 담당하는 혈액 내 인자 중 어떤 것이 결핍되어 있는지에 따라 혈우병은 A에서 C까지 소분류로 나뉜다. 가장 큰 집단 중 하나인 혈우병 A는 혈액 응고 인자 VIII 결핍(factor VIII deficiency)을 가리키며, 심한 경우 생후 2~5개월에 자연 출혈이 발생한다. 가벼운 경우에는 외상이나 유치 발치 때 피가 멈추지 않는 것을 보고 처음 발견하게 된다. 혈우병은 인류에게 오랫동안 알려져 온 질병이었으며, 그 유전성이 일찍이 밝혀진 질병이기도 하다.

유전성이란 19세기 초 혈우병의 가족력에 관해 조사가 이뤄지면서 질병이 대를 이어 나타난다는 것이 밝혀졌음을 의미하기도 하거니와, 그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의 변이가 무엇인지 알려져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혈우병 A의 경우, 인간 유전체(genome)를 이루는 염색체 23쌍 중 성염색체인 X염색체에 있는 F8 유전자에서 돌연변이가 나타나 발병한다. 이 F8 유전자가 응고 인자인 VIII 단백질의 설계도이기 때문에, 이 유전자에 돌연변이, 즉 염기서열에 오류가 생기면 응고 인자 단백질 생성에도 문제가 생긴다. 이런 혈우병에는 오랫동안 치료법이 없었다. 문제가 생긴 유전자를 직접 손댈 수 없었기에, 환자를 안정시키고 필요하면 응고 인자를 공급하거나 수혈하는 것이 전부였다.

최근 혈우병의 치료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 지난 몇 년 동안 과학계를 뜨겁게 달궈온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CRISPR-Cas9) 기술이었다. 혈우병과 같이 돌연변이가 발생한 유전자의 염기서열 위치를 알고 있는 질병의 경우, 해당 유전자의 잘못된 부분을 고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간단한 생각은 오랫동안 그 실현 방법을 기다려 왔다. 세균이 유전자의 특정 서열을 인식하여 이를 자를 수 있는 제한효소라는 단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나, 이를 마음대로 활용하여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은 먼 일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다 인간 유전체 지도가 완성되고, 유전자 부위를 정확하게 인식하여 잘라낼 수 있는 유전자 가위가 개발되면서 그 길이 열린 것이다.

유전자 가위, 불치병을 겨냥하다

최초로 개발된 유전자 가위는 징크핑거 뉴클레이즈(zinc-finger nuclease)라는 긴 이름을 가진 합성 단백질이었다. 그냥 제한효소를 하나 사용하지 않고, 유전자를 인지할 수 있는 효소 여러 개를 하나로 묶어 염기 서열을 더 잘 인식하도록 만든 것이다. 하지만 설계, 제작 과정이 복잡하고 오작동이 많아 실제로 원하는 유전자를 변경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유전자란 염기 A, T, G, C라는 네 글자로 이뤄진 긴 책과 같다. 이 중 정확히 열 글자 정도의 순서쌍을 찾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닌 데다, 다른 부분을 찾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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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도식. 유도 리보핵산(guide RNA; gRNA)이 원하는 유전자 위치에 결합하면, Cas9 뉴클레이즈(nuclease, 핵산 가수 분해 효소)가 해당 유전자를 잘라 기존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새로운 유전자로 교체할 수 있도록 한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징크핑거 뉴클레이즈 다음으로 탈렌(TALEN, Transcriptor Activator-Like Effector Nuclease)이라는 기법이 등장했다. 앞선 유전자 가위보다 좀 더 간단하고 정교해졌지만, 제작이 어렵고 고비용이라는 문제는 여전했다. 이러던 중, 2012년 말 이런 문제를 보완하여 3세대 유전자 가위로 등장한 것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다. 크리스퍼는 단백질을 만들어야 하는 앞 세대 유전자 가위와 달리 리보핵산(RNA), 즉 유전자에서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 정보를 전달할 때 사용하는 유전물질 조각만을 설계하면 되기 때문에 제작도 훨씬 간편하고 비용도 적게 든다.[1]

이 덕에, 2015년 7월 기초과학연구원(IBS) 김진수 단장이 이끄는 국내 연구진은 혈우병 환자 체세포에서 줄기세포를 채취, F8 유전자를 정상으로 교정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지난해 8월 연구진은 비후성 심근증을 일으키는 변이 유전자를 인간 정자와 난자의 수정 단계에서 유전자 가위 기법으로 교정해 질병의 유전 가능성을 낮추고, 원치 않는 부분의 유전자를 건드릴 가능성 또한 낮춘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2017년을 “크리스퍼의 해”로 만들었다.

유전자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설계도를 원하는 대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질병 유전자의 치료는 물론이거니와, 키, 눈 색깔, 피부색 등의 외관, 심지어 신체 능력이나 지적 능력 등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것을 탄생 전에 결정할 수 있는 시대의 문턱에 다가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기술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가치는 엄청날 것이다. 성형외과는 너무 거친 예일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현재 미국에서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치료제가 성적을 올린다는 낭설로 학생들이 가짜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 받아 먹고 있다. 치료제가 성적을 올려 준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도 열풍은 식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주 간단한 유전자 조작으로 아이가 좀 더 집중하는 방법을 개발한다면,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사회적 영향도, 경제적 이익도 엄청나리라는 것은 억측이 아닐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 수정란을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지에 관한 찬반 논란이 작년부터 더 뜨거워지고 있다. 찬성 측은 유전자 질환 환자의 이익을 그 이유로 제시하고, 반대 측은 유전자 가위 기술의 안전성을 문제로 삼는다. 배아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 제기도 있다. 아직 인간 배아와 태아의 유전자 치료가 금지된 국내 실정에서 위의 논점들은 시급한 논의가 필요하다. 무조건 금지만 하기에는 유전자 가위의 경제적, 과학적, 사회적 여파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유전자 편집의 윤리, 가치를 묻다

여러 복잡한 논의가 섞여 있기에, 하나의 축으로 전체 논의를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필요성 대 안전성’의 대립이나 배아의 지위에 관련한 논란은 좋은 출발점이지만, 관련한 문제 전체를 담아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여기에서는 “유전자 편집이 도착할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관해 조금 더 생각해보자. 예컨대, 20세기 초 핵물리학 연구가 도착한 지점은 핵폭탄과 핵발전소였다. 위험한 것은 무조건 만들면 안 된다는 주장은 큰 의미가 없다. 이미 개발 중이던 기술에 관해 눈을 가린들 기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단지, 핵물리학 연구가 도착할 지점이 핵폭탄과 핵발전소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그 결과를 생각하면서 연구를 진행했더라면 역사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뿐이다. 만약, 핵물리학을 통해 우리가 도착하려고 했던 곳이 다른 곳이었다면, 2차 대전의 광기가 원자력과 폭탄을 연결짓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삶은 조금 달라졌을까.

유전자 편집이 도착할 곳은 그 표현이 의미하는 대로, 유전자를 편집하여 인간을 원하는 대로 설계하는 것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줄리언 사블레스쿠 교수와 같은 이들은 생명공학을 도입해 인간을 향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불거진 이른바 “포스트휴먼(posthuman)” 담론은 기계와 인간의 결합, 유전학을 통한 인간의 변화가 가져올 ‘인간 다음의 인간’을 상상한다. 유전자 편집의 측면에선 아마도 인간의 육체적, 지적 능력의 개선을 통한 더 나은 인간의 탄생을 말할 것이다. 물론, 아직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에서 포스트휴먼을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그런데도, 기술의 발전이 이를 충분히 가능케 하리라는 예상 또한 가능하다.

물론, 이들이 말하는 인간의 도덕적 능력의 향상 등 인간의 단점을 넘어서기 위한 기술 활용 주장에는 충분히 귀를 기울일 만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유전자 편집으로 우리가 바라야 할 것이 인간의 부족함을 덜어내고 더 낫게 만드는 것일까. 이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영화 <가타카>가 물었던 것처럼 삶의 가치에 대한 고민 때문일 것이다. 가치 있는 삶은, 과연 더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다는 그 조건으로 결정되는 걸까.

국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미국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센델 교수는 <완벽에 대한 반론>이라는 책에서 인간 향상론을 반대하며 그 근거로 “삶은 선물”이라는 오랜 표현을 끌어들인다. 유전자 편집은 질병 치료를 위해서만 허용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인간을 향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현실화된다면 삶은 더는 인간에게 선물일 수 없으리라고 외친다. 삶에 존재하는 의외성 때문에 그것은 선물일 수 있다. 만약, 그 조건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삶의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이다.

<두근두근 내 인생>이 보여주는 선물로서의 삶

다소 복잡한 센델의 논의를 따라가는 대신, 김애란 소설가의 2011년 작 <두근두근 내 인생>의 주인공 한아름을 통해 “삶은 선물”이란 말의 구체성을 살펴보려 한다.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소설은 조로증이라는 희소 질환을 통해 부모와 자식의 시간을 역전시킨다. 마치 아름의 글이 부모의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이 다시 아름을 낳은 것처럼. 물고 무는 질문을 통해 삶의 무게와 가치를 묻는 <두근두근 내 인생>은 2014년 영화로, 2015년 연극으로 각색되었다. 출처: 교보문고

올해 한아름은 부모가 그를 얻었던 나이와 같은 열일곱 살이 되었다. 지금의 통념에 비춰볼 때 그의 부모가 조금 성급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잠깐 접어두자. 아마, 소년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은 사라질 테니까. 이미, 여든의 세월을 지낸 얼굴을 한 그를 보면 말이다. 소년은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병인 조로증 환자로, 환자 중에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생존해 있는 축에 속한다. 조혼한 그의 부모는 가정을 꾸리기도 넉넉지 않은 형편에 그의 병원비를 대고 병간호를 하느라 하루하루가 팍팍하다. 노쇠할 대로 노쇠한 그의 신체는 한 부분씩 기능을 상실해 간다. 그는 젊어 보기 전에 이미 늙었다. 그런 삶은 어떨까. 그 시간에 선물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건 잔혹하지 않을까.

물론 소년 아름을 성인으로 대치한다면, 그 삶은 우리 모두에게 선물이 되기야 하겠다. 우린 때로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보고 내비치는 안도의 눈빛”을 보낼 수 있는 대상을 필요로 하며, 뭇 종교는 그 자리에 신앙의 대상을 놓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 삶은 다른 사람의 삶에 선물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소설 중 한아름이 이성의 감정을 느낀 대상인 이서하에게 보낸 고백의 편지에 적힌 것처럼 우린 “너보다 더 아픈 사람이 필요”한 경우가 있으니까. 위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보다 힘든 사람의 삶을 보면서 일말의 위안을 느끼는 것을 나쁘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누군가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을 내뱉은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남을 위한 것. 친구라곤 옆집의 60대 할아버지뿐이고, 친밀함을 느껴 마음을 터놓은 대상이 오히려 자신의 삶을 모욕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소년 아름의 삶을 선물이라고 하는 건 너무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통증은 공약 불가능하다는 아픈 사실을 “아플 땐 그냥 철저하게 혼자”라고 다시 표현하는 그의 삶을 보면서 누군가가 야속해지지 않기는 쉽지 않다.

다만, 유일하게 독자에게만 오롯이 전달되는 모습에서, 그 삶의 위안을 살짝 엿본다. 아름이 자신의 아픔으로 문장들을 조탁해나가는 모습을 살펴보는 것 말이다. 소설은 조로증에 걸린 한 소년의 인생 마지막 순간에 관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이야기꾼의 탄생”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2] 소설은 아름의 마음속에서 “낱말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치는 광경을 소복이 담아낸 풍경화다. 자신을 배신한 누군가에게 “내가 너를 볼 수 있게, 그 자리에 있어주었던 것, 고마워”라고 아름이 말할 때 담겨 있는 감정의 진폭은 소설의 마지막에 한아름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에 바친 헌사 ‘두근두근 그 여름’을 포근히 감싸 안는 표현의 넓이가 된다. “싸락눈, 만년눈, 소나기눈, 가루눈” 할 때 세상을 그려가는 단어 하나하나를 세심히 그러쥐는 아름의 손길을 보며, 그는 나보다 더 많은 아름다움을 만났으리라는 생각을 잠시 해 본다.

시들어가는 아름의 신체가 이야기꾼으로 탈바꿈하는 모습은 그에게, 그의 부모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아름의 삶을 선물로 비춰 보여준다. 바꾸어 말하면, <두근두근 내 인생>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선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삶이 선물’이라는 말은 그 안이 행복으로, 누릴 만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으로 가득한 삶일지라도, 인간은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삶은 선물일 수 있다.

사블레스쿠와 같은 인간 증강론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조로증에 걸린 아이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삶을 좋은 것들로 가득 채울 때 삶은 선물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이야기꾼 아름은 삶의 고통과 어려움을 아름다움으로 바꿔 내며 인간 존엄성의 조건을 보여준다. 좀 더 나아가, 우리는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유전자 편집이 새 생명에게 모든 조건을 결정하게 된다면, 조건을 벗어나 행동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자유가 그 가치를 상실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하는 근거가 되는 인간 자유의 퇴색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증강을 위한 유전자 편집의 가능성에 반대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 유전자 편집 자체를 부정한다거나, 질병 치료의 가능성을 넓히기 위한 탐구도 금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름이 보여준 것은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아름다움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위해 고통을 놓아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과유불급이다. 혈우병, 페닐케톤뇨증, 갑상선기능저하증 등 유전성 질환의 치료에 유전자 편집 연구가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단, 연구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고, 삶의 가치를 위한 수단의 자리에서 계속 연구되어 나아갈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정비해야 할 것이다.

주어진 삶을 소중히 가꿀 수 있도록 복무하는 유전자 편집은, 더 나은 인간을 말하는 유전자 편집과 그 지향하는 바도, 미래에 우리에게 가져다줄 열매도 다르리라 믿는다. 이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유전자 편집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도록 숙의를 거듭할 때다.

[참고문헌]

[1] 전방욱. “CRISPR-Cas9 사용이 제기하는 윤리적 질문들” 인격주의 생명윤리 2016;6(2):87-117.

[2] 차미령. “이야기꾼의 탄생과 진화 1-김애란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 읽기” 계간 문학동네 2011년 가을호. 문학동네.

김준혁/치과의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대학원생(의료윤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