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짱

* 웹 가독성을 위해 인쇄본과 달리 띄어쓰기가 많습니다.

* 예님 (@Um__sik) 커미션으로 받은 만화는 인쇄된 책 안에는 따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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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오이카와! 요즘 이와이즈미,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냐?”

“저어, 이와이즈미 선배, 요즘 기분이 좋아보이시던데…”

“이와이즈미랑 어제 어디 갔었냐? 엄청 들떠있던데. 재밌는 곳이면 나한테도 좀 알려주라!”

최근 들어 배구부원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소문을 듣기 시작했다. 사실, 나에 대한 소문이야 시도때도 없이 생겨있고 조금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니까 신경 쓰지 않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왜냐하면 … 이번엔 그 타깃이 내 절친인 이와이즈미 하지메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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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쨩과는 어릴 때부터 함께였다. 우린 등하교는 물론이요, 점심시간이며 부활 시간까지 쭈욱 붙어있다. 3학년인 지금은 반이 갈라져서 수업 시간엔 떨어져있지만 …, 앗. 집에 가서 자는 동안도 떨어져있네. 하지만 그 외에는 정말 이와쨩과 꼭 붙어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라, 서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가 가장 먼저 알아채는 게 당연한 거였고, 지금까지도 그래왔는데. 뜬금없이 나타난 이와쨩의 ‘좋은 일’ 이란 건 뭐야! 암만 생각해도 모두가 입 모아 저런 소릴 하는지 모르겠더라.

이와쨩 기분이 좋아 보여?

좋은 일이 있는 것 같다고?

들떠 보여? 어디가? 어떤 점이!

나는 아무리 눈 씻고 쳐다봐도 평소의 이와쨩밖에 안 보이는데, 생판 남인 너희들이 먼저 이와쨩의 좋은 일을 알아채고 그런 소릴 하는데?!

며칠 째 끊이지 않는 소문 때문에 집에 돌아가서도 ‘이와쨩한테 생긴 좋은 일이 뭘까?’ 하는 생각에 멍하니 이불에 누워서 잠도 못 자고 애먼 이불만 뻥뻥 차던 게 몇 일째인지. 이걸 이와쨩 본인에게 직구로 물었다가는 연습은 안 하고~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며 강속 스파이크로 등짝이나 얻어맞을 게 분명해서 일부러 빙빙 돌려서 떠본다든지, 나름대로 열심히 캐봤지마는 먼지 한 톨도 안 나오더라. 대실망.

“야, 오이카와. 너는 이와이즈미랑 질리게 붙어있으면서 그걸 몰라? 딱 봐도 풍기는 분위기가 전이랑 완전 딴판이잖아!”

“그러니까 말이죠… 오이카와 씨 생각엔, 좋은 일이라고 할 만한 특별한 일이 이와쨩에게 생긴 적이 없거든요?”

“… 야. 야. 변명 그만하고 얼른 소꿉친구 타이틀 떼. 지나가는 멍멍이도 ‘요즘 이와이즈미 씨 좋은 일 있는 것 같죠?’ 하고 묻더라.”

“맛층! 이상한 농담 그만 둬!”

부활을 마치고 우리 모두가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라커룸에 들어오면, 목에 흰 수건을 걸친 이와쨩이 제일 먼저 앞장 서 ‘나 먼저 씻고 온다.’ 며 샤워실 쪽으로 나갔다. 뾰족뾰족한 머리칼이 문 너머로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나면, 제 할 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맛키와 맛층이 휙! 나를 구석으로 질질 끌고 가 추궁하기 시작한다.

‘오늘은 알아낸 게 있냐?’ 또 시작이다. 또 시작이야. 이게 무슨 탐정 놀이도 아니고! 끈질기게 캐묻는 두 사람에게 나는 어제도, 오늘도 ‘아니!’ 라고 답했지만, 인제는 이 대답이 답답하기라도 한 듯이 소꿉친구 그만두라는 둥, 썩 기분 좋지 않은 농담까지 하는 두 사람에 나는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너희들 때문에 이와쨩한테 계속 신경 쓰는 것도 짜증나고, 솔직히 나라고 별 수 있나? 짚이는 게 없어서 답답한 건 매한가진데! 이대로 당하기만 하는 건 억울하지 싶어서, 오늘은 내가 허리에 손을 단단히 짚고서 녀석들에게 반문해보였다.

“그럼, 맛층하고 맛키가 생각하는 이와쨩의 좋은 일이라는 게 뭔데?”

“…….”

“맨날 좋은 일, 좋은 일 타령하면서 오이카와 씨를 쪼아댈 정도면 뭔가 확실하게 단정 짓고 있는 게 아니겠어? 응? 그렇지?”

내가 반격할 줄은 몰라서 당황한 걸까나. 좀처럼 대답하지 않기에 도발하듯 말꼬리를 올리면 ‘정말 말해줘도 되나?’ 하고 갸웃하는 두 얼굴. 서로 묘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귓속말로 쑥덕거리는 듯 싶다가 이내 음! 하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돌아선 둘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이건 방과 후에 뭘 먹으러 갈지 고민하는 표정보다도 더 심각하군! 그리고 …

“여자 친구가 생긴 건 아닐까.”

“그래, 그거. 여자 친구.”

두 사람의 입 속에서 내 눈 앞으로 뚝! 떨어진 폭탄 하나. ‘여자 친구’

여자 친구? 이와쨩 ‘과’ 여자 친구?! 내가 아는 그 이와쨩에게 여자 친구가 생긴 것 같다고!? 아무리 추측이라지만,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너무 충격 먹어서 뒷목 잡고 쓰러질 뻔했다.

“에에에엑?! 이와쨩한테 여자 친구?! 그럴 리가 없잖아!”

“오이카와, 진짜 너만 못 느끼는 것 같은데.”

“이와이즈미가 요즘 들어서, 딱 사랑에 빠진 남자 같다고?”

“봄의 풋풋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는 거야.”

“무, 뭔 놈의 봄 분위기야! 봄 지난 지가 언젠데! 이제 여름이야?!”

“딱 좋네, 봄의 남자, 이와이즈미 하지메.”

“고등학교 3학년, 이와이즈미. 봄날을 만나다.”

“… 너희들,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면서 너무 멀리 간다?”

“그의 봄날에 함께 하는 운명의 여자는 누구인가!”

“아, 그러고 보니 나 이와이즈미 여자 취향 못 들어봤다. 어떠려나? 완전 궁금해!”

“…….”

와, 진짜. 진심으로 어이없어. 웃음도 안 나와. 이와쨩이 ‘사랑에 빠진 남자’ 라니. 그것도 봄날의 풋풋한 남자?! 나는 그럴 리가 없다며 마구 손을 내젓고 ‘이제 농담 그만해.’ 짐짓 화난 얼굴도 해보였지만 두 사람은 조용히 할 생각은 죽어도 없는지, 오버스러운 말투로 대사를 읊듯이 조곤조곤 나를 놀려먹기에 바빴다.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외팔짱을 낀 채 노려보고 나면, 그제야 평소의 말투로 돌아와 ‘사랑에 빠진 이와이즈미’ 에 대해 추측한 바를 알려주는 두 사람이었다.

~ 사랑에 빠진 이와이즈미의 증거 ~

첫째, 이와쨩의 인상 쓰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요즘 들어 무표정한 얼굴을 해도 전혀 무섭지가 않고, 평소라면 내가 얻어맞거나 한 소리 들을 법한 일에도 유한 표정을 하며 넘겼다고 한다. … 생각해보면 들어맞는 것 같기도 해. 나 요즘 들어 이와쨩한테 예전만큼은 안 맞았었다 …)

둘째, 부활동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자꾸 어딘가 쳐다보는데, 그 시선을 따라가면 ‘오이카와 팬클럽’ 과 다른 여자애들이 우르르 섞여있는 무리가 꼭 있다. 이와쨩의 사랑 상대는 혹시 팬클럽 여자애들? 아니면 혹시 주위에 팬인 척 숨어서 몰래 눈길이라도 주고받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

셋째, 위에서 말한 ‘쳐다보는 행동’ 의 빈도가 점점 잦아지고 있다. 옛날에는 꺅꺅대는 목소리와 오이카와의 팬클럽이 만든 오색찬란한 응원 팻말이 신경 쓰여서 자꾸 쳐다봤었다지만, 이제는 여자애들이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코트에 드러눕는 이와이즈미가 갑자기 여자애들을 신경쓰기 시작했다고? 정말 예사롭지 않다.

등등. 기다렸다는 듯, 내가 눈치 채지 못했던 소소한 부분까지 하나 둘 턱턱 쏟아 놓는 말에 ‘이와쨩한테 여자 친구라니!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라 굳어져있던 마음 위로, ‘혹시 정말 생겨버린 거 아냐…?’ 하고 의문의 새싹 하나가 퐁글, 솟아올랐다. 물론 그 새싹이 무럭무럭 자랄 만큼 계속 얘기할 순 없었다. 촉촉이 젖은 채로 돌아온 이와쨩이 ‘너희 그렇게 꾸물대다 날 샐 거냐? 안 씻어!?’ 폭풍 잔소리를 쏟아내며 우리를 샤워실로 마구 밀어댔으니까.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물만 묻히고 부실로 돌아오면 이미 돌아갈 준비 만만으로 의자에 앉아 내가 옷을 갈아입기만을 기다리는 이와쨩이 있어,

“그럼 내일 보자.”

“내일 봐!”

두 사람과의 얘기는 나중으로 밀어두고 쫄래쫄래 옆에 붙어 집으로 향한다. 언제나와 같이 노을 진 운동장, 걸을 때마다 기분 좋게 살랑이는 이른 저녁의 바람과 발끝에 툭툭 걸리는 모래알들, 늘 오던 시간에 플랫폼으로 들어온 전철, 그리고 내 옆에 계속 붙어 있는 이와쨩. 이와쨩과 함께하는 내 하굣길은 변함 없이 그대로인데, 남들이 보기에는 아니래. 제일 중요한 이와쨩이 변해버렸대. 여자 친구가 생긴 것 같다는데. 음, 정말 이와쨩한테 여자 친구가 생긴 거면 어떡하지?

… 가만 있어보자, 음. 내가 여자 친구 있었을 땐 등하교도 따로 하고, 점심도 따로 먹었었지. 그러면 이와쨩도 그래야하는 게 맞지 않을까? 이와쨩이 친하게 붙어 다니는 여자애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 혹시,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하고 비밀 연애하고 있는 걸까나. 그리고, 지금은 여자 친구가 없는 날 위해서 생길 때까지 옆에 붙어 다녀주려는 거지?!

몇 정거장 가지도 않는 전철 안에서 내 ‘이와쨩의 여자 친구’ 새싹은 끝도 없이 불어나 굵은 줄기가 되었고, 인제는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그 나무처럼 머릿속을 뚫을 듯 높이, 아주 높이 솟아났다.

“야, 안 내려?”

“… 어? 어, 어…”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냐, 너!”

“미, 미안해, 이와쨩…”

이와쨩이 내 옷깃을 끌어당기며 내리라고 소리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콩까지 맺혔을 걸. 전차에서 내리며 힐긋 훔쳐본 이와쨩의 얼굴은 여전히 심통난 표정으로 가득했다. 이것 봐! 평소와 다를 게 조금도 없다구. 매일 이 얼굴을 봤단 말야. 하루도 빠짐없이. 달라졌다면 내가 제일 먼저 눈치 채야 하는데. 계속 그래왔고, 못 할 리가 없는데. 그렇지만. 맛키와 맛층의 말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었다. 왜냐면 걔들이 주장하는 증거들을 완전히 부정할 순 없었으니까! 걔네는 뭔데 나보다 이와쨩이 변한 걸 더 잘 아는데?!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억울한 마음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괜히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도 같았지만 꾸욱 참았다.

아악! 안 참아져!

내가 모르는 이와쨩의 달라진 점이라니!

나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이와쨩의 변화라니!

이젠 ‘좋은 일’ 에 대한 범위가 하나로 좁혀졌으니,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에게 듣는 거라지만 … 물어보기가 무섭다. 만약에, 정말 이와쨩한테 여자 친구가 생긴 거라면 ‘아, 이제 니가 알아채버렸으니까 앞으로는 여자 친구랑 다닐게.’ 하고 쌩하니 내 옆을 떠나버릴까봐서. 그리고 음, 만약에 아니라면 이상한 소리했다고 한 대 얻어맞겠지? 아프겠다. 그렇지만, 맞아도 좋으니 없었으면 해. 그냥 … 혼자는 외로우니까. 좀, 좀 이기적인가, 나? 으으.

“야, 오이카와.”

“응?”

“너 아까 부실에서부터 영 수상한데. 무슨 일 있는 거냐.”

“… 응? 아, 아니. 무슨 일이 있겠어. 별 일 없어요, 이와쨩.”

“거짓말 치고 있네. 내가 널 몇 년이나 봤는데?”

“진짜야, 정말정말.”

“… 수상해.”

“내가 귀신을 속이지, 이와쨩을 속일 수 있겠어?!”

“그건 그렇지만 …”

“정말 아무 일 없대도!”

“… 너, 한 번만 속아준다. 근데 내일 부활 때도 정신 사납게 그러고 있으면 한 대 얻어맞을 줄 알아라.”

“그럴 일 없거든요! 오이카와 씨 연습 때는 늘 초집중 상태야!”

“그래, 그러면 됐다.”

집으로 가는 마지막 골목에서 이와쨩은 평소와 다른 내 모습을 알아챘는지 수상하다며 계속 찔러댔지만 난 당황하지 않고 부정으로 일관했다. 여전히 미심쩍다는 표정 만만의 이와쨩이었지만, 내가 하도 아냐! 하고 쨍알대니 부활에만 지장 없게 하라면서 대화를 끝내버렸지. 그게 다행스러우면서도 괜히 서운했다. 평소보다 나한테 덜 관심 가자는 것 같고, 막. 그런 기분 있잖아. 귀찮으니까 어~ 그래라~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구, 방금. 아 — 의식하기 시작하니까 아무렇지 않았던 행동들마저 자꾸만 달라 보인다. 이런 기분 같은 거 … 딱 질색인데. 어떻게든 명확하게 답을 듣고 편해지고 싶다, 정말!

그렇지만 난, 서로의 집으로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했다. 문 안으로 사라지는 이와쨩을 멀거니 지켜보기만 했지.

“…….”

현관에 들어와 신발 벗고,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계신 어머니께 ‘다녀왔습니다’ 인사, 닫혀 있는 안 방 문에 또 한 번 인사한 후에 곧장 내 방으로 직행했다. 그리곤 교복도 갈아입지 않고 발라당, 이불 위로 엎어져 누웠지. 이와쨩은 뭘하고 있을까? 씻으러 들어갔으려나, 아님 나처럼 이불 위를 뒹굴고 있을까. 배고프다고 아주머니한테 조르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여자 친구한테 집에 잘 들어왔다는 연락이라도…? 까지 생각하고 있으면 아래서 어머니의 ‘토오루 얼른 내려와서 저녁 먹으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크.

“금방 내려갈게요!”

교복을 대충 던져 벗고 평상복을 기워 입으며 퉁탕퉁탕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분명히 집에 오는 길에는 배가 고팠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넘어가지를 않네….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넋 빠진 얼굴을 하고 있으면 어머니가 ‘토오루, 무슨 걱정이라도 있니? 아까 들어올 때두 근심걱정 다 끌어안은 표정이더니. 밥은 제대로 먹어야지.’ 하셨다. 눈치 없기로 소문 난 우리 어머니가 알아채실 정도면, 온 얼굴에 드러나는 모양이네 …

결국 난 참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와 이와쨩에게 메일을 보냈다.

[이와쨩, 혹시 여자 친구 생겼어? 나한테 비밀로 할 생각하지 말구.]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몇 초 지나지 않아 딩동, 하고 울린 알림음. 타이밍 좋게 날아온 누군가의 메일이 아냐. 믿기 힘들지만, 이와쨩이 이렇게나 빨리 답장을 보내왔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

[누가 그래?]

정말로 꾸밈없는, 평소와 똑같은 말투! 마음 한편에 그득히 쌓여있던 불안함이 사그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 역시! 이와쨩이 여자 친구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암암! 따끈한 휴대폰을 끌어안고 액정에 쪽쪽, 입 맞추며 바동바동 이불 위를 구르고 있으면 곧이어 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화면을 보니 전화를 건 건 다름 아닌 [이와쨩♥]. 전화를 받자마자 터져 나오는 이와쨩의 우렁찬 목소리.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

“ [인마, 너 왜 답장을 안 해!] ”

“앗, 이와쨩 답장했었어? 응? 나는 평소처럼 늦을 줄 알았지이.”

답장을 빨리 안 해줘서 삐친 걸까?

“ [니가 보내자마자 칼 같이 답장했거든?! 그래서. 누가 그랬는데. 나 여자 친구 생겼다고.] ”

“아니, 글쎄 말야. 요즘 주변에 있는 애들이 다 그런단 말야! 특히, 그! 맛층이랑 맛키가 엄청! 막막 이와쨩 요즘 여친 생긴 거 아니냐구, 소꿉친구가 돼서 그런 것도 모르냐고 엄청 쪼아대고 잔소리하고! 혼내고! 막 그랬다니까? 나 진짜 억울했어, 이와쨩. 응, 이와쨩한테 진짜 물어보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너무 답답해서 물어본 거야. 진짜 없는 거 맞지? 응? 응응?”

“ [그래, 없다니까. 내가 무슨 여자 친구냐. 생겨도 말하겠지.] ”

“하긴, 그치? 이와쨩 얼굴에 여자 친구가 생길 리 없지! 그건 유치원 때나 가능한 일이니까~”

“ [죽는다. 그래, … 여하간 아니니까 발 씻고 잠이나 자.] ”

“응! 알았어! 이와쨩도 잘 자구~ 오이카와 씨 꿈 꿔!”

“ [악몽 꾸라고 하지 마. 망할카와.] ”

“너무해!”

그 날 밤, 나는 간만에 두 다리 쭉 뻗고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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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기쁜 소식!”

“뭔데?”

“글쎄, 이와쨩이 여자 친구 없대!”

“…….”

“에? 그건 어디서 들었는데?”

“그야 당연히 이와쨩 본인한테서 들은 거죠!”

“뭐? 진짜? 안 믿겨!”

“너 거짓말 치는 거 아니지?”

“아니거든요!”

“…….”

“이제까지 이와쨩 여친 생겼다고 설레발 친 녀석들 다 조용히 해!”

이와쨩과 메일을 주고받은 다음 날,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이와이즈미 요즘 좋은 일 있어?’ 하고 물었던 사람들에 한해서) ‘이와쨩은 여자 친구 없대! 내가 직접 물어봤어!’ 몇 번이고 열변을 토했다. 얼마나 애타게 말하고 다녔으면, 1학년 여자애 하나가 ‘3학년의 이와쨩이라는 선밴 여자 친구가 없으시다나봐…’ 라고 말하는 거 다 들었다니까? 하! 속 시원해! 물론 옆에 있던 이와쨩한테 좀 얻어맞았지만, 그래도 좋아! 진즉에 물어볼 걸! 왜 혼자 그러고 있었지?! 너무 신나서 그 날은 하루 종일 발이 한 5센티는 땅 위에 붕붕 떠있는 것만 같았다.

근데, 딱 하나 문제가 있었으니 …

다른 사람들은 ‘이와쨩에게 여자 친구가 없다’ 는 내 말에 긍정했지만, 우리 아오바죠사이 배구부 내에서는 아직도 ‘그럴 리가 없다’ 는 입장을 내놓고 있는 거였다.

“아니, 글쎄. 이와쨩 본인한테 들었다니까? 여자 친구 같은 거 없대!”

“그럼 말이다, 아직 사귀는 단계까지 진도가 안 나간 걸 수도 있지.”

“그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아직 고백을 못했다든지, 아니면 … 차였다든지.”

“하아 … 진짜.”

하나마키와 마츠카와, 그리고 이제는 이와쨩을 제외한 모든 부원들이 말한다.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거 아냐?’ 라고. 내 사전에 좋아하는 사람은 당연히 이꼬르 여자 친구.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당연히 내 애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누구한테 빼앗겨서 시시덕거리는 거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머릿수로 따지면 도저히 이 애들을 이길 수가 없었기에, 뭔가 더 확실하게 보여줄 만한 수단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뭘 생각해도 이와이즈미 본인을 무대에 세워 ‘나는 여자 친구가 없습니다.’ 라는 말을 눈앞에서 들려줘야지~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더라. 내가 개인적으로 메일을 보내서 물어보는 것 정도야, 이와쨩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냥저냥 받아줄 수 있겠지만. 남 앞에 세웠을 땐 얼마나 불같이 화를 낼 지 미지수여서 직접 실행은 못 했었는데 …

“이와이즈미, 너 요즘 엄청 사랑에 빠진 남자 같은 거 알아?”

“…?!?!?!?!?”

정말 뜬금없이, 부실에서, 그것도 옷 갈아입고 있는 이와쨩에게 대뜸 질문을 던진 맛키 때문에! 나는 성큼성큼 이와쨩에게로 뛰어가

“이와쨩, 좋아하는 사람 있어?!”

하고 소리쳤다. 그래! 이건 기회야. 여기서 이와쨩이 개소리하지 말라는 둥, 나를 때리면 말야. 그러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와쨩이 공식적으로 발언한 게 되는 거니까! 음! 나쁘지 않겠어! 생각했지.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이와쨩이, 정말이지.

맛키의 말을 빌려 ‘사랑에 빠진 남자’ 같은 얼굴로.

뺨을 붉히면서 (진짜 안 어울려!)

한참 뜸을 들이다가,

입술이 떼일락 말락 하는데,

어, 어, 어 … ?

“어, 있는데. 그건 왜.” 했다.

부원들이 이와쨩을 얼싸안고 ‘와아아~ 누구냐! 누구냐!’ ‘대체 이와이즈미 선배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이 누구에요!!’ ‘우리 학교는 맞죠?’ ‘와~ 이와이즈미 선배가 드디어!’ 하며 기뻐해주고 있는데. 그 안에서 나만 배신감 만만한 기분으로 멀뚱하니 서있게 됐다. 이와쨩이 날 쳐다보며 ‘물어본 놈은 왜 꿀 먹은 벙어리마냥 하고 있냐?’ 했지만, 대답하지 않고 내 락커 앞으로 가 연습복으로 갈아입는데만 신경 썼다. 애들은 한참 와와 거리다가, 내가 정말 아무 말도 없이 있으니까 조용해져서는 각자 할 일을 했지. 뒷머리에 누군가의 시선이 쿡쿡 박히는 게 느껴졌는데, 그건 아마도 ‘사랑에 빠진 이와쨩’ 씨가 질문한 주제에 쌩 무시하고 삐쳐버린 나를 노려보고 있는 거겠지, 생각하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

연습을 하면서 딴 생각을 하게 된 건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나는 다른 녀석들이 이와쨩에 대해 지겹도록 묻던 그 때에도, 연습 시간만은 멋지게 집중해냈었다. 그만큼 연습은 내게 있어 중요한 부분이었고, 다른 생각이 비집고 끼어들어올 만큼 호락호락한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근데, 자꾸만 이와쨩 생각이 난다. 여자 친구는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며 수줍어하는 이와쨩이 내 머릿속 한 구석을 멋대로 차지하고 있었다. 매일 못생겼다고 놀려먹긴 했지만, 이와쨩. 그래. 남자답고, 뒤에서 바라보는 팬들도 꽤 많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면, 이와쨩한테 여자 친구가 생기는 걸까. 그 좋아한다는 애한테 고백해서 잘 되면, 그러면,

— 이와쨩은 분명히 내 곁을 ….

“오이카와! 너 인마,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해!”

이와쨩의 우렁찬 목소리와 꽁! 한 꿀밤에 꼬리를 물대로 물었던 내 생각들이 순식간에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손 하나는 진짜 맵다니까 …

“… 이게 다 이와쨩 때문이잖아.”

잔뜩 볼멘소리로 꿍얼대면 이와쨩은 긴 한 숨을 푸욱 내쉬다가 ‘자! 휴식!’ 하면서 나를 질질 끌어 앉히고는 옆에 털썩 주저앉아 몸을 기대왔다. 땀 냄새, 그리고 연습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심장 소리가 닿은 부분을 타고 그대로 흘러들어왔다.

“… 너, 내가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 게 그 정도로 충격이냐?”

나직한 목소리가 물었다.

“… 응. 무지무지.”

굳이 진심을 숨기진 않았다. 충격인 건 사실이었으니까.

“…….”

내 대답에 이와쨩은 묵묵부답. 애간장타는 마음에 조금은 놀리듯이, 진심을 조금 섞어서 말 한 마디를 톡 던져본다.

“고백할 거야, 이와쨩? 조만간 여자 친구 생기는 거야?”

“아니, 그럴 일 없어.”

장난이랍시고 나름대로 해맑게 웃어보려던 나와 달리, 차분하고 나직한 이와쨩의 목소리는 ‘그럴 일 없다.’ 고 말했다. 말투는 물론이고 표정까지 단호해서 ‘아까 내가 본 사랑에 빠진 남자는 어디 갔어?!’ 하고 물을 뻔 했지. 침착하자, 침착하고 …

“왜?”

허나 이와쨩은 더 이상 답해주지 않았다.

“자, 연습 재개!”

내게 기대있던 몸을 떼곤 벌떡 일어나 코트로 종종 뛰어갈 뿐이었지. 나는 그 침묵이 껄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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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쨩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선포 후로 나는 자연스럽게 그 애 주변의 여자애들을 신경 쓰게 됐다. 이와쨩은 자길 졸졸 따라다니는 내가 귀찮았는지 몇 번 크게 소리도 지르고 화도 내더니 이젠 내가 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대단한 철벽이 되었다.

그 대신에 누군가가 ‘오이카와는 왜 네 뒤만 졸졸 따라다니냐?’ 하고 물어보면 “얘가 뭐 언제는 안 그랬냐.” 대변해주곤 한다. 내가 아무리 들러붙고, 한 여자애를 콕 찝어 저 애랑은 무슨 사이냐고 꼬치꼬치 캐물어도 이와쨩은 시큰둥한 얼굴로 잘 받아줬다. 주먹이 날아오지 않아서 좀 어색했지. 옛날엔 때리는 게 신경써주는 거란 생각에 등짝이라도 얻어맞지 않으면 괜히 서운하고 삐치기도 했었지만. 지금 이와쨩이 나를 때리지 않는 건, 나름대로 충격 받은 나를 조금이라도 배려해주고 있는 건가 싶어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그 때마다 가끔 ‘그 여자애랑 잘 돼가서 기분이 좋은 건 아닐까? 그래서 안 때리는 걸지도…’ 같은 망상이 퐁글퐁글 샘솟아 분해지고, 다시 들뜨는 나날의 반복이었다.

그러던 내게, 오랜만에 러브레터가 도착했다.

[오이카와 군에게. - 스즈키 치하루]

익숙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아 한참을 끙끙대며 머리를 쥐어짜내면 … 아! 이 아이. 이와쨩과 같은 반 애다. 게다가 이와쨩과 꽤 친하게 어울리던 여자애였지. 단발머리에 동그란 눈,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꼬리, 앙증맞은 키, 그리고 이와쨩이랑 투닥투닥 싸우면서 복도를 뛰쳐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 얼마 전에 치하루에 대해 물어봤을 때 이와쨩은 그녀와 정말 친한 반 친구일 뿐, 그 외에 별다른 건 없다고 말했었지만. 나는 두 사람이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정말 별다른 게 없을까?’ 란 의심을 품고 있었다. 헌데 그 애가 나에게 고백했다니.

“… 정말이지, 이거 …”

LOVE 가 큼지막하게 적힌 분홍색 스티커를 똑, 떼어내 봉투를 열면 거창한 편지지가 아닌, 작은 메모지 하나가 있었다. [점심시간에, 혹시 괜찮다면 옥상에서 만날래?] 동글동글 귀여운 필체가 그 위에서 빙글 돌며 나를 부르고 있다. 그 애는 만화책에서 나올 법한 수줍은 얼굴로. 옥상의 살랑이는 바람에 흠뻑 젖어 나에게 “좋아해, 오이카와 군. 나랑 사귀어줄래?” 했다. 나는 늘 그랬듯이, 날 좋아한다고 고백해오는 사람은 거절하지 않았기에 그녀와 사귀기로 했고 우리는 방과 후에 만남을 기약하며 옥상을 떠났지. 애인이 생기면 이와쨩한테 말하곤 했으니까, 몸이 그걸 기억하고 잽싸게 이와쨩네 반으로 뛰어갔는데. 문득 마음 한편의 ‘이와쨩이랑, 치하루랑, 정말 친구 사이 맞겠지?’ 란 생각이 꾸물대며 ‘이번엔 이와쨩한테 비밀로 할까?’ 했다. 하지만 나 혼자만 비밀로 해봐야, 둘이 친한 사인데 치하루가 말하면 끝일 테고. 치하루한테 ‘이와쨩한테는 우리 사귀는 거 비밀이야!’ 라고 말하면 ‘왜?’ 답이 돌아왔을 때 뭐라고 변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으니까. 그냥 평소대로 굴자, 며 성큼성큼 익숙한 자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직 점심 시간인데도 묵묵히 책상에 앉아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는 귀여운 뒷통수. 어깨를 확 잡아채 놀라게 한 후에, 빈 앞자리를 꿰차앉고 ‘이와쨩! 나 방금 무슨 일 있었게!’ 마구 들썩대면 호들갑 떠는 날 질색팔색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이와쨩이 ‘됐고,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해. 왜 이렇게 난리야?’ 했다. 치. 재미없다니까, 진짜. 여전히 노트에 시선을 콕 박은 채로 날 쳐다보지도 않는 이와쨩의 못생긴 콧날을 보면서, 나는 퉁퉁 대답했다.

“나 여자 친구 생겼어.”

“그새? … 아, 너 혼자 있은 지 좀 됐나.”

“그새라니, 응, 나 좀 오래~ 혼자 있었잖아.”

“어어. 그러셔. 그래서 이번 여자 친구는 누군데? 말해도 모르겠지만.”

“이번엔 이와쨩이 아는 사람이지롱.”

“내가 아는 사람?”

“응. 이와쨩네 반. 치하루쨩.”

내가 말하는 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턱 괸 채로 형광펜을 직직 긋던 이와쨩은, ‘치하루’ 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퍼득, 고개를 치들었다. 그 눈빛은 마치 믿을 수 없는 일을 본 사람처럼 떨리고 있었다.

“… 치하루? 스즈키 치하루?”

“응! 그 치하루쨩. 글쎄, 귀여운 얼굴로 고백해오지 뭐야~”

“…….”

“이와쨩?”

평소 같으면 ‘이번에는 좀 오래 가겠냐?’ ‘어쨌든, 축하한다.’ 면서 웃지는 않아도 내 어깨를 팡팡 치며 응원해줬을 이와쨩인데, 웬일인지 침묵뿐이다. 인제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보면서 목 뒤부터 허리께까지 주욱 지끈거리며 열이 올랐다. 이와쨩이 좋아하는 그 여자애, 역시 치하루가 아니었을까. 이 반응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라.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 묻진 못했다. 수업을 알리는 예비 종이 울려왔고, 다음 시간엔 과학실로 이동해야하는 난 자리를 떠야했다. 뛰쳐나가는 와중에 흘깃 돌아본 이와쨩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 날 이후로 난 치하루와 등하교는 물론 학교생활 전반을 함께 했다. 부활이 끝나는 늦은 시간까지도 기다려주는 치하루 탓에 이와쨩과 말 섞을 일이 점점 드물어졌지. 여자 친구가 생기면 늘 그랬었는데. 계속되는 소통의 부재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대화는 아직도 그 날에서 끊겨있다. 부활동 땐 언제 그랬냐는 듯 얘기하곤 하지만, 음 … 코트 위에서 내지르는 모든 것들은 대화보다야 본능이 강하니까.

-

치하루와 교제한 지도 어느 덧 한 달하고도 이 주째에 접어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요번에 신작을 냈는데, PV부터 완전 기대돼! 혹시 괜찮다면 같이 보러갈래, 오이카와 군?’ 이번 주 주말은 치하루가 좋아한다는 영화의 개봉일에 맞춰 진즉 데이트 약속을 잡아놓았고, 은근슬쩍 ‘나 이번 주말에 치하루쨩이랑 영화 보러 간다?’ 자랑하면 이와쨩은 당연스럽게 그 영화감독 이름을 줄줄 읊었고 ‘거참, 부럽네. 염장 지르냐.’ 면서 비아냥댔다. 그러면서도 내 쪽은 한 번도 쳐다보지 않는다. 어쩐지 상심한 얼굴. 눈이 마주치면 분명 그 때의 눈빛이 보일 지도 모르겠어. 나는 직감했다. 역시, 이와쨩은 치하루를 좋아하고 있었던 게 틀림 없다고. 내가 여자 친구랑 데이트하러 간다고 했을 때 이런 반응을 보인 건 정말 …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번이 처음이니까! 절대로 맞아! 어쩌다가 난 이와쨩이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고백 받아 버린 걸까 … 기구한 운명이여 …

* * *

영화 보러 가기로 약속한 주말이 하루 밖에 남지 않은 금요일. 치하루와 손잡고 등교하는 길에도 끊임없이 우정과 사랑 (이라기엔 너무 과할지도 모르지만!) 사이에서 고민해왔다. 지금은 내가 치하루와 사귀는 사이지만, 절친인 이와쨩을 위해서라면,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이어주고 싶어서. 그야, 이와쨩이 고등학교 … 아니, 중학교 때도 그랬나? 여자 친구 사귄다고 말한 적이 없었거든. 늘 나랑 붙어 다녀서 그런 걸까 싶었지만, 그래도 이와쨩 나름대로 남자답고 시원시원해서 좋아하는 여자애들도 있었고, 고백도 나만큼은 아니지만! 꽤 받았다고 들었으니까. 하지만 여자 친구가 없었다는 건, 그 고백들을 모두 거절했다는 거겠지. 그랬던 이와쨩이, 드디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거다. 다른 사람들이 ‘사랑에 빠진 남자’ 라고 말할 정도로.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다면 역시, 소꿉친구로써 이와쨩과 치하루가 잘 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내 나름대로의 멋진 역할 아닐까!

“오이카와 군,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 응?”

“아까부터 엄청 인상 찌푸리면서 생각하고 있길래.”

“… 앗, 미안. 집에 일이 조금 있어서 …”

“중요한 일인가보네. 좋게 해결 됐으면 좋겠다!”

“응,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고마워, 치하루쨩.”

그렇지만 걱정스럽게 나를 올려다보는 얼굴에 조금 미안해져버리고 말았어. 치하루가 조금만 나쁜 여자애였으면 좋았을 걸. 왜 이렇게 착한 거야! 정말이지… 아, 아냐, 나쁜 여자애였으면 이와쨩이랑 이어주려고도 안 했을 테니까! 또, 나쁜 여자애를 좋아하는 이와쨩을 어떻게 말려야하나 완전 걱정이었을 거야… 치하루. 미안해. 나는 너를 이와쨩이랑 이어주기 위해서, 조금은 상처입힐 지도 모르겠네. 그렇지만, 이와쨩 정말 좋은 아이니까. 분명 나보다도 너를 위해줄 거라고 생각해!

분명 전에, 이와쨩은 우리가 영화 보는 걸 부러워했었지? 이 약속을 이와쨩에게 자연스럽게 넘겨주는 건 어떨까? 어차피 치하루하고 이와쨩은 친하게 지내는 사이니까 어색하지는 않을 테고. 내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약속을 넘겨주면 이와쨩도 내가 다리 놔주려는 걸 알아채고 멋지게 이것저것 준비하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둘을 이어주기 위해 이 방법만큼 딱 맞는 건 없었다. 언제 말하면 좋을까 눈치보고 있었지만, 부활이 끝날 때까지 입도 벙긋 못해버렸어. 간만에 이와쨩과 하교 하는 길, 겨우겨우 ‘있지, 이와쨩. 이따가 잠깐 우리 집에 와 줄래?’ 얘길 꺼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래서, 집까지 부른 용건이 뭐냐? 그냥 오는 길에 말할 것이지.”

“중요한 얘기였단 말야!”

집에서 편하게 입는 후줄근한 잠옷 대신 밖에 나갈 때나 입을 법한 평상복을 입고 온 이와쨩은, ‘나는 지금 귀찮다. 네가 용건을 말하면 바로 집에 가버릴 것이다.’ 는 오오라를 풀풀 풍기면서 내 방문 앞에 멀찍이 서있었다. 저기요! 그렇게 귀찮아하면서 옷은 왜 그렇게 입고 오셨는데요! 속마음이 우렁차게 외쳤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이와쨩이 씩씩대면서 방을 떠나버릴 게 분명해서, 나름 간절한 표정으로 ‘중요한 얘기였으니까 밖에서 못 해!’ 하면 조금은 누그러진 이와쨩이 방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풀썩 앉았다.

“그래, 뭔데.”

“… 있지이, 이와쨩. 주말에 약속 있어?”

“… 주말은 왜?”

“나 실은,”

“어.”

얼른 말하지, 눈빛으로 나를 채근하고 있던 이와쨩은 주말에 약속이 있냐는 내 물음에 순간 눈이 반짝. 할 일 없었나? 왠지 기대하는 눈빛인데! 조금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실은…, 하고 말을 늘이면 다시 한 번 째릿하고 시선이 꽂혀들어 바로 용건을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치하루쨩이랑 영화 보러 가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가족 행사가 잡혀버렸거든…”

“… 근데.”

에. 갑자기 눈빛 엄청 무섭게 바뀌었어.

“그러니까 말야, 나대신 이와쨩이 같이 영화 보러 가 줄 수 있을지 하고…”

끝을 맺는 둥 마는 둥 얘기를 끝내면, 이와쨩이 꽤 복잡한 얼굴로 있다 나를 쏘아붙인다.

“네 여자 친구랑 잡은 데이트 약속인데, 내가 왜 거길 대신 가냐?!”

정말 맞는 말이에요, 이와쨩. 그렇지만, 너는 치하루를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대신 가줘야 한단 말씀!

“그야 역시 좋아하는 영화는 개봉일에 봐야 하는 게 맞기도 하고, 치하루쨩이랑 이와쨩은 친하니까! 같이 놀러간다는 느낌으로 가 줄 수도 있잖아~”

몇 번이고 예행연습을 했던 변명은, 실전에서 직접 내뱉고 들어봐도 썩 멋진 이유다. 약속은 미룰 수도 있으나, 좋아하는 영화는 역시 개봉 당일에 봐야 해! 그리고 치하루랑 이와쨩은 친하니까 같이 놀러간다는 느낌으로 갈 수 있지!

“… 같이 놀러간다는 느낌?”

“응!”

“하, 진짜.”

“… 이와쨩?”

하, 터져 나온 헛웃음 소리에 살짝 아래를 향하고 있던 시선을 올리면 이와쨩이 퍽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름을 불러보지만, 대답 없이 한참 나를 응시하더니 이내 싸늘하게 식어버린 눈을 폭 감는다.

“너, 치하루가 싫으냐?”

“뜬금없이 그런 걸 왜 물어?”

그리고 한다는 말이 ‘치하루가 싫냐?’ 는 질문. 어이가 없다. 나한테 나쁜 놈 낙인이 찍힐 지언정 이와쨩이 좋아하는 사람과 이어지라고 한 몸 바쳐 도와주고 있는데, 쓸데없이 토나 달고! 정말이지, 눈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적어도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렇게는 못 해. 아무한테나 데이트 약속을 미뤄버리다니. 싫으면 그냥 헤어져라. 나는 네가 바쁠 때 대신 나가주는 대타도 아니고, 치하루도 너한테 이런 취급 받을 녀석 아냐.”

이와쨩이 단순히 치하루와 같은 반 친구 사이였다면, 이렇게까지 정색하면서 말하진 않았겠지. 내 전 여자 친구들 때에는 뭘 하든 신경도 안 썼다. 심지어 무슨 일도 있었는지 알아? 러브레터를 받았는데, 너무 바빠서 ‘대신 거절해주라, 이와쨩!’ 부탁하면 맛있는 걸 사주는 전제 하에 대신 나가서 내 고백도 거절해줬었다니까? 내 연애에 있어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있었던 주제에. 이번엔 너무나도 진지하게 화를 내니까… 나는 이와쨩이 치하루를 신경 쓰는 게 너무 밉고 싫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날을 바짝 세워버렸지.

“이와쨩, 답지 않게 왜 그렇게 정색해? 나랑 사귀는 게 네 친구라서 그런 거야? 아니면 치하루쨩한테 무슨 마음이라도 있어?”

“뭐?”

당황한 얼굴. 왜? 치하루를 좋아하는 네 마음을 들켜버린 게 무서워? 아니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너무 생소해?

“평소엔 내가 뭐, 좋아해서 사귄 것처럼 말하네? 걔가 날 좋아한다고 고백하니까 사귀어 준 거잖아. 늘 옆에서 보고 있었으면서 이번엔 새삼 왜 그렇게 화내는데?”

“넌 그게 …!”

“내가 뭐 틀린 말했어?”

“…….”

한 번 세워버린 날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삐끗하면 이성을 놓아버릴 정도로 내 마음 속 말들을 우수수 쏟아내고 나면, 이와쨩은 기가 찬다는 듯 숨을 거칠게 들이마셨다가, 훅 하고 멈춰 길게 심호흡했다.

“하아 …”

그리고, 방금 전까지 불꽃처럼 분노에 차있던 남자는 금세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내 눈 앞에 있다. 이제 더 용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이와쨩은

“그래, 알았다. 내가 갈게. 치하루한테는 니가 말 해놔라.”

한 마디를 남기곤 쌩하니 내 방을 떠나버렸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표정은 어떻게든 숨겨도 몸은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이지. 뭐, 지금 상태의 내가 할 말은 아닌가.

“아, 이렇게까지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생각했던 대로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은 상황 탓에 머리가 아프다. 어쨌든 목표는 달성했으니 괜찮나, 싶으면서도 자꾸만 이와쨩의 진지한 표정들이 떠올라 이불 안으로 꾹꾹 파고들었다.

씻어야 하는데 … 모르겠다. 그냥 내일 아침에 씻을래.

-

“… 우으.”

이른 아침에 눈이 반짝 떠졌다. 머리가 복잡해서 잠을 설칠 줄 알았더니, 푹 자버렸어. 아직 곤히 잠들어계실 부모님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샤워하고 주방에서 간단하게 토스트 몇 장 만들어 방으로 올라오면, 창 밖 너머의 커튼이 휙 하고 걷혔다. 이와쨩이 일어난 모양이야. 들키면 곤란하니까, 내 쪽은 반쯤 젖혀있던 커튼을 잡아당겨 온전히 가려냈다. 작은 빈틈을 만들어 힐금힐금 훔쳐보려고 했는데, 꽤 잘 보인다. 잔뜩 떠버린 머리에 헐벗은 잠옷 차림으로 급히 밖으로 나가는 걸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늦게 일어난 모양. 푸흐흐 웃으면서 토스트를 한 입 냠냠. 이와쨩이 쿵쾅대며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 * *

“… 뭐야, 저거.”

옷 걸칠 생각은 않고, 허리춤에 수건 하나만 달랑 둘러 묶은 이와쨩이 커다란 전신 거울을 안고 방으로 돌아왔다. 이와쨩 방에는 거울이 없으니까, 저건 아마 안방에 있었을 전신 거울이겠지. 거울은 왜? 라고 생각하자마자 이와쨩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쪽으로 간 걸 보니 옷장이라도 막 뒤지고 있는 걸까? 생각하기가 무섭게 옷을 산더미로 끌어안은 이와쨩이 끙끙대며 침대에 대충 엎어놓는 걸 봤다. 아아, 좁은 틈으로 보고 있으니까 너무 답답해. 바로 옆에서 보고 싶다. 저렇게 열심히 준비하는 이와쨩 처음 봤단 말야!

그 셔츠 패턴 촌스러워… 그 바지 너무 딱 붙는 거 아냐? 엑, 이와쨩 그런 옷도 있었어?! 어째서, 나랑 만날 때는 안 입어줬지?! 그거, 그거 잘 어울린다! 아! 잘 어울린다니까, 그거 놓지 마아!!! 으응, 그 양말은 별로 아냐? 어차피 신발 신을 테니까 상관없나…? 아! 아주머니 올라오셨다. 맞아요! 그 셔츠 안 어울리죠~ 앗, 그 바지요? 아, 괜찮다. 잘 어울린다. 역시 아주머니 센스!

이와쨔아아앙!!! 왁스로 머리 그렇게 세우면 안 돼!! 완전 고슴도치!!!

아, 아주머니 도와주신다! 왁스도 도와주신다! 감사합니다!

준비를 다 마친 이와쨩이 창문에 커튼을 쳐버린 후, 꽤나 멋지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나오는 것까지 훔쳐봤다. 이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해. 저렇게 멋진 이와쨩은 처음 봤어! 거 봐,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잘 보이려고 꾸미면서, 왜 내가 제안했을 때 그렇게 화 낸 거야? 싶으면서도 아. 괜히 그랬나. 정말 치하루랑 이와쨩이 잘 되면 어쩌지.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미묘한 감정이 자꾸만 내 가슴 안쪽을 빙글빙글 돌았다. 진짜 가족 행사라도 잡혔다면야 어영부영 시간은 지나보냈을 텐데. 하루종일 이불 위에서 뒹굴거리며 두 사람은 어쩌고 있을까 고민하다가 까무룩 잠들고 깨기를 반복했다.

“… 으응.”

단풍처럼 예쁘게 노을 진 하늘이 밤의 색으로 차곡차곡 덮어질 즈음이면 커튼으로 가려져있던 이와쨩의 방 창문이 노란 불빛으로 화악 빛났다. 인제야 집에 왔구나. 이 시간 즈음이면 저녁까지 먹고도 충분히 남았을 시간이다. 영화만 보고 올 줄 알았더니만, 완벽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온 모양이지. ‘나는 네 대신이 아냐!’ 하고 소리칠 땐 언제고, 이렇게 늦게까지 참 즐거우셨겠어! 끌어안고 있던 이불을 잔뜩 잡아당기고 꽉꽉 꼬집어대면서 마구 바둥댔다. 정말 원하던 바였는데. 왜 이런 마음이지. 짜증나! 하지만 손은 부지런히 메일을 쓰고 있다.

[치하루쨩. 오늘은 정말 미안해… 갑자기 약속을 못 지키게 돼서. 이와쨩이랑 영화는 재밌게 보고 왔어? 사실, 다음으로 미루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네가 좋아하는 영화기도 하고, 개봉 첫날 보는 영화는 다른 느낌일 것 같아서 이와쨩한테 부탁했어. 괜찮으면 나랑 다음 주에도 그 영화 또 보러가자! 이번엔 못 빠졌지만, 다음부터는 여자 친구랑 한 약속 먼저 가버릴 거라고 못박아버렸어! 걱정 마!]

[오이카와 군은 가족 모임 잘 다녀왔어? 난 이와이즈미 군이랑 재밌게 보고 왔어! 다음 주에는 정말 같이 보러갈 수 있는 거지? 기대할게! 아, 그리고 오늘 이와이즈미 군이 무지 멋지게 차려입고 왔더라~ 학교에서랑은 달라서 좀 놀랐어! 원래 그래? 오이카와 군이랑 갔으면 더 좋았겠지만, 가족 모임이라니 별 수 없잖아? 즐거웠으니까 너무 신경 안 썼으면 좋겠어! 잘 자~ 월요일 날 보자!]

[이와쨩! 영화는 재밌었어? 오늘은 진짜 고마워!]

[재밌었어.]

-

~ 이 부분은 위의 내용과 이어지지 않습니다. ~

여름방학이다. 방학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끝끝내 우리는 서로에게 말 한 마디 걸지 않았다. 화해하지 못했다. 쨍한 햇볕이 가라앉을 무렵까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목이 말라서 냉장고에 있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문득. 개학을 하고, 졸업하면서도 앞으로 이와쨩과 영영 얘기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몇 년을 이어온 끈끈한 소꿉친구 관계가, 이렇게 허무하게 끊어져버리는 걸까. 서럽다. 이와쨩이 보고 싶었다. 같이 얘기하고 웃으면서 장난도 치고, 스포츠 용품점에 가서 서로 어울리는 트레이닝 복이랑 신발을 봐주던 옛날이 그리웠다. 우리가 대화하지 않은 건 몇 달 되지도 않은 일인데. 지금도 이만큼 괴롭다면 나중에는 얼마나 더 괴로울지 가늠이 안 됐다.

“…….”

곰곰이 생각해본다. 지금 내가 이와쨩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 나를 좋아하는 이와쨩을 내 곁에 꼭꼭 붙들어 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러나 저러나 해도 역시, 내가 그와 사귀는 일 뿐이었다. 솔직히 지금의 내가 이와쨩을 그런 의미로 좋아하고, 사귄다고 한다면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이와쨩의 마음을 얻어서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 이와쨩이 나를 좋아해주는 한 우리가 멀어질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와쨩을 불렀다. 자판을 또각대며 메일을 보낸 게 아냐. 그 애가 있을 창문으로 “이와쨩!” 하고 왁왁 소리를 지르다보면, 커튼을 젖히고 나타난 인상 잔뜩 찌푸린 얼굴이 ‘대체 무슨 용건이냐’ 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

“잠깐 집 앞으로 나와 줄래, 이와쨩? 할 말이 있어.”

* * *

“할 얘기란 게 뭔데.”

아. 씻지도 않은 잠옷 바람의 까치집 머리 남자에게 고백이라니.

“이와쨩, 우리 사귀자.”

“너, 날 좋아하냐?”

“응.”

“동정으로 하려거든, 그냥 그만 둬.”

사귀자고 말하면, 조금은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마음의 문을 꽁꽁 닫고서 ‘진짜 날 좋아해? 다 거짓말이지? 난 안 믿어.’ 털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저 이와쨩이 나를 좋아하는 건가 싶어서. 다부지게 주먹 쥔 손을 부드럽게 끌어당겨잡고, 진지하게 눈을 마주했다. 눈앞의 목울대가 움찔거린다.

“나, 이와쨩이 좋아! 그러니까 사귀자고 하는 거야, 진심이라구!”

“…….”

“그 때는, 이와쨩 좋을 대로 실컷 말하고, 내 생각은 들어보지도 않고서 도망갔잖아! 내가 붙잡으려고 얼마나 뛰어갔는데. 그리고, 계속 나랑은 얘기 안 하려고 하고, 자기 혼자 맘대로 끝내고!”

“…….”

“이제 늦었어? 나 싫어?”

작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에메랄드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들여다본다. 우는 듯 한 표정으로, 나 싫어? 하고 물으면, 곧

“… 안 싫어.”

부루퉁한 대답과 함께 도리도리.

“그럼 우리, 내일부터는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는 거지…? 물론, 애인 사이겠지만!”

“… 그래. 멍청아.”

이와쨩을 끌어안고, 부스스한 머리를 마구 쓰다듬고 부비대면 품 안의 몸은 왠지 모르게 따끈따끈해지고 있다. 부끄러운 걸까. 이제는 마음의 문이 살짝 열린 걸까?

“와아!”

“나 자다가 깼으니까 다시 자러갈 거야.”

“응응! 잘 자, 이와쨩! 오이카와 씨 꿈 꿔!”

귓불까지 벌개져서는, 이제 자러갈 거라면서 쿨하게 뒤도는 모습이 조금은 웃겨. 그렇지만, 이와쨩하고 다시 붙어있을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뻐서 그 뒷통수를 향해 쪽! 쪽! 잘 자란 뽀뽀 소리를 잔뜩 들려줬다.

~ 이 장면을 그려주신 예님 커미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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