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드라마 태종 이방원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이성계의 몇 번째 아들이며 몇 번째 부인에서 태어난 자식일까요? 학창 시절 배웠던 역사가 가물가물 해지는 나이가 되었는지 도대체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태종 이방원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려면 이성계 가계도와 태종의 왕위 등극 과정의 역사는 알아야겠죠? 오늘 드라마 이야기보다는 이성계와 이방원이라는 인물에 대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성계는 누구?위화도 회군으로 역사책에 남겨진 인물,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명언을 남긴 최영 장군을 제거한 인물이지만, 조선왕조를 창건했고 500년 역사의 기틀을 다진 이성계의 집안은 고려와 원나라 사람이었습니다.
이성계는 고려말 1335년에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선조는 전주에 살았지만 고조부가 간도 지방으로 이주해 원나라 관리를 지냈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그런데 이성계가 어떻게 고려의 무관이 되었을까요? 원나라가 쇠퇴하자 부친인 이자춘이 고려로 귀하하였습니다. 즉, 아버지까지는 원나라 사람이었던 거죠. 이자춘의 귀화로 고려인이 된 이성계는 전쟁에서 올린 공으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특히 아버지의 나라였던 원나라 나하추가 함경도 홍원으로 침입했을때 함흥평야에서 이를 격파하였고, 공민왕을 폐위하려는 최유를 최영과 함께 무찌른 고려의 심복이자 출정한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뛰어난 무인이었습니다.
이성계 가계도에 부인이 6명그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이후 같이 일했던 최영 장군을 치고 정도전과 함께 1392년 신왕조 건립하였습니다. 왕이 된 이성계에게는 부인이 6명이나 되었습니다. 자식은 무려 8남 6녀랍니다.
하지만 자식을 낳은 부인은 4명, 그중에서도 아들을 낳은 부인은 단 2명에 불과합니다. 부인이 많을수록 아들을 세자에 책봉하려는 권력다툼이 심했던 당시였기에 2명의 부인만이 아들을 낳은게 다행이었을까요?
하지만 이성계는 본부인 신의왕후 한씨에게서만 아들 6명과 딸 2명을 낳았습니다. 이 6명의 아들들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된 거죠.
결과적으로 조선의 제1대 왕인 태조 이성계는 둘째 아들 영안대군을 제2대 왕인 정종을 선위 하였고, 정종은 왕이 된 지 불과 2년 뒤 정안대군을 제3대 왕인 태종으로 선위 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태종 이방원입니다.
이성계 가계도 구분신의왕후한씨신덕왕후 강씨성비 원씨정경궁주 유씨화의옹주 김씨미상아들진안대군 영안대군(정종) 익안대군 회안대군 정안대군(태종) 덕안대군무안대군 이안대군----딸경신공주 경선공주경순공주--숙신옹주의령옹주
드라마틱한 태종 이방원의 인생태종의 인생은 드라마틱 합니다. 그래서 드라마로 만들었나 봅니다. ㅎㅎㅎ 이방원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말에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헌했으나 정도전과의 갈등으로 왕세자로 책봉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방원은 갈등을 빗던 정도전과 남은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아버지 이성계로부터 왕권을 선위 받아 본인이 아닌 둘째 형 이방과(영안대군)를 왕의 자리에 앉혀 정종의 시대를 만들었습니다. 다섯째 아들이 말이죠.
이후 넷째형인 이방간(회안대군)과 제2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방간 세력을 제거하고 후사가 없던 정종에게서 강압적으로 왕건을 양위받아 2년 만에 본인이 왕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로써 태종 이방원이 탄생하게 됩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지만, 건국자인 이성계보다 화통하고 진솔하며, 포용력과 카리스마를 모두 갖춘 왕의로써의 자질을 보여줬던 태종입니다. 또 그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한글을 만들고 과학으로 국력을 키워 지금도 국민으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세종대왕입니다. 메뚜기 떼가 창궐하자 몇 마리를 잡아오게 한 후 가장 큰 놈을 골라 "네놈이 백성의 곡식을 갉아 먹는다니 차라리 내 오장육부나 갉아먹어라!!!"라고 대성일갈을 내지르면서[29] 메뚜기를 삼켜버렸고 깜짝 놀란 신하들이 혼비백산하며 빨리 의원을 불러오라고 명을 내렸는데 태종 본인은 멀쩡했으며 이후 메뚜기떼는 사라졌다고 한다. 중국 당태종[30]에게도 같은 일화가 있는데 야사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둘 다 성군의 면모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정조도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현륭원)과 관련한 비슷한 일화[31]가 있다.
8. 가족관계[편집]총 12남 17녀 (9명 조졸) 원경왕후 신빈 신씨 의빈 권씨 장녀 정순공주 5남 함녕군 5녀 정혜옹주 정빈 고씨 9남 근녕군 숙의 최씨 10남 희령군 숙의 최씨 11남 후령군, 선빈 안씨 소빈 노씨 8남 혜령군 10녀 숙혜옹주 효빈 김씨 김씨 4남 경녕군 15녀 숙안옹주 알 수 없음 이씨 왕자 2명(조졸), 옹주 2명(조졸) 17녀숙순옹주(숙의에게 양육) 자세한 내용은 태종(조선)/가족관계 문서 를 의 번 문단을 의 부분을 참고하십시오.9. 대중매체에서[편집]자세한 내용은 태종(조선)/대중매체 문서 를 의 번 문단을 의 부분을 참고하십시오.10. 관련 문서[편집]
[1] 현재 효령대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실제 어진은 이미 조선시대에 소실되어 전주 이씨 헌릉 봉향회에서 2013년도에 새롭게 제작된 상상화 어진이다. 아버지 이성계나 셋째 형 익안대군, 차남 효령대군, 그리고 손자인 세조의 얼굴을 통해 태종과 세종의 얼굴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태종 이방원의 친형인 익안대군(이방의)의 초상화는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아들이나 손자 얼굴의 중간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태종 이방원의 용모를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또한 어진에서는 빨간색 곤룡포를 입고 있지만 실제로는 1444년 세종 26년부터 빨간색 곤룡포를 입었고 그 전까지는 청룡포를 입었다.[2]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6-10[3] 상왕 및 태상왕 신분으로 4년 동안 병권 등 일부 분야를 대리청정 하였다.[4] 세종이 즉위한 이후 부왕인 태종을 태상왕으로 높히려 계속해서 시도하였으나 태종이 극구 사양하였고 결국 태종은 마지못해 승하하기 1년 전인 1421년(세종 3년)에서야 태상왕이 되었다.[5] 조선시대 군주 중에선 아버지인 이성계(태조, 즉위 후 이단(李旦)이란 이름을 씀)와 함께 묘호인 태종 대신에 이름이 더 잘 알려진 군주이며, 피휘와 외자 이름을 쓰지 않은 조선 사상 유일한 군주다. 오히려 태종은 자신의 이름을 마음껏 써도 된다고 허락하였다.[6] 태종(조선)/생애 문단 참고.[7] 후궁을 많이 들인 탓에 조선 군주 중 가장 자녀가 많다.[8] 왕의 적자를 대군으로 봉하는 작위 제도 개정은 태종이 왕이 된 이후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진안대군과 달리 대군 작호 소급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자세한 것은 대군 또는 후술 문단으로.[9] 굵은 글씨는 1871년 고종이 추가로 올린 존호이다.[10] 굵은 글씨는 1683년 숙종이 추가로 올린 시호이다.[11]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서 아버지인 이성계와 함께 묘호보다 본명이 더 유명하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왕위에 오른 뒤보다 오르기 전 행적이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군주 중에는 매우 희귀하게도 피휘를 안 했던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위 후 피휘를 위한 개명을 안 하는 대신 피휘 관리(처벌)도 안 하겠다는 관대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12]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의 경우 이방원도 세자가 될 가능성을 열어놓은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태조가 신덕왕후의 입김과 상황을 고려하여 이방원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 역시 신덕왕후 소생 자식들 중 이방석 쪽을 세자로 추천했다.[13] 이방원의 성격이나 정몽주 살해 등 과격한 행태에 아버지 이성계가 반감을 품었다는 추측 이외에 이방석이 형 이방번까지도 제치고 세자로 책봉된 것에 대해 철원 최씨, 안동 권씨, 황려 민씨 같은 고려 구 외척 세력과의 연결고리가 적은 편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지 이방번의 성격 문제로 막내아들 이방석이 세자가 되어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 외에도 왕후 역시도 조선 개국에 많은 도움을 준데다 태조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했다는 점에서 그 소생인 이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었다는 것 역시도 자연스러운 해석이다.[14] 방번은 원래 방원이 세자 문제와 관련 없었고 살릴려고 했으나, 태종 이방원 바로 위의 형인 회안대군이 "역적의 씨앗은 하나라도 살려둘 시 화근이 된다며, 꼭 살려둬선 절대 안된다"고 하면서 상의도 없이 성밖을 떠나는 방번을 길거리에서 그대로 죽여버렸다. 그 이후 갈등이 고조되어 제2차 왕자의 난이 초래되는 큰 불씨를 남겨놓게 된다.[15] 태종은 형 정종에게 묘호 대신 공정왕(恭定王)이라는 애매모호한 시호만 올렸으며 이로 인해 정종은 오랫동안 그 지위가 애매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는 무려 300년이 지난 숙종대에 다시 올린 것.[16] 세종이 승하한 부왕(태종)에게 올리는 글이므로, 여기에 들어갈 휘는 세종의 본명인 '이도(李祹)'가 된다. 그러므로 비록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는 뒤에 오는 조사가 '은'으로 쓰여 있지만, '이도'를 적용하면 뒤에 오는 조사는 '는'이 맞는다.[17] 낌새[18] 즐거운 얼굴로 부모를 뵘.[19] 마지막 유언.[20] #.[21] 聖宗, 이방원을 지칭함[22] #.[23] 또한, 종묘에 불천위(不遷位)(옮겨지지 않는 위패. 세실은 종묘에 대대로 모셔도 5대의 대수에 포함되지 않는 큰 공덕을 쌓고 평가받은 왕에 한하여 종묘 정전(宗廟 正殿)에 계속 모시는 것을 말한다)로 지정, 존재되어 종묘에서 신주를 별전인 영녕전(英寧殿)으로 내보내더라도 세실로 정함으로써 아버지 태조와 함께 영원히 종묘 정전에 모시는 정말 크나큰 혜택을 누리게 된다.[24] 조선 제9대 왕인 성종(成宗)의 묘호와는 음만 같을 뿐, 한자 뜻이 아예 결이 다르다.[25] 이것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중국사 대표 피휘 사례 중 하나인 한나라의 고조 유방이다. 이름이 '邦' 자인데, 건달에서 황제가 된 뒤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아서 이 글자를 갑자기 못 쓰게 되어 버렸고, 그래서 그때까지 '수도' 라는 뜻으로 쓰이던 '國' 자가 나라를 뜻하는 글자로 대신 쓰이게 되었다.[26] 태종이 틀에 박힌 관습에 얽매인 사람이 아닌, 실리적인 사람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는 그 외에도 수없이 많다. 조선이 대역죄인에게 형식적으로는 능지형을 내리나, 실제로는 극히 비윤리적인 능지형을 안하고 거열형만을 하게 된 부분(물론 거열형도 끔찍하지만 능지형은 비교도 안되게 죽음의 고통을 너무 길게 가져간다)도 기록상 이방원이 언급하였기에, 이방원의 영향인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왕이 죽으면 그 자식들은 음식을 가려 먹는게 당시 지극히 당연한 법임에도, 그 중에 제일 중요한 아들인 세종이 고기를 매우 좋아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이 죽어도 상중에 고기(육선)를 마음껏 먹으라고 유언을 그렇게 남기고 죽은 인물이기도 하다.[27] 효(孝)령, 충(忠)녕, 성(誠)녕의 군호는 돌림자 '-녕'을 제외하고 의도적으로 유교의 중심 가치인 효와 충성을 의도하여 작명되었고, 이후 왕자들은 원래대로 명목상 봉토로서 땅 이름으로 군호를 삼았다.[28]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을 같이 활용한 용의 눈물에선 정안군, 정안공, 정안대군 3가지 호칭을 모두 들을 수 있다.[29] 《맹꽁이 서당》에도 이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 대성일갈을 들은 메뚜기가 "무식한 말씀 마시오. 메뚜기는 초식 곤충이라 곡식 외에는 안 먹소이다."라고 대꾸했다.[30] 이 둘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은데 아버지를 도와 국가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경쟁자였던 형제를 제거했고 후계자를 세울때 문제가 많은 첫째아들을 폐하고 셋째아들에게 넘겨주었다.[31] 송충이가 크게 번져 사도세자 묘 근처의 소나무가 모두 고사하여 말라죽는 일이 일어났다. 인부들이 잡아온 송충이를 집어 "내 아비가 억울하게 죽어 이 곳에 누워 계신데 그 나무를 갉아먹는단 말이냐?"하고 호통을 치고 그 송충이를 냅다 씹어 삼켰다. 그러자 하늘에서 까치떼와 까마귀떼가 내려오더니 그 송충이들을 다 먹어치웠고 이후로 무덤 근처에 송충이가 싹 사라졌다는 전설. 당태종이나 조선 태종의 일화가 백성을 위한다는 애민(愛民)의 면모를 강조한다면 정조의 일화는 효심을 강조하는 전개.[32]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귀는 파초잎과 같고 눈은 작고 네 다리는 통나무, 코는 누에와 같다고 나온다.[33] 現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의 장도로, 현대에는 율촌산단을 조성하면서 매립해서 육지가 되었다.[34] 만약 1500여 년 전 로마에서 잡혔다면 코끼리는 황제 앞에서 글자를 쓰는 등의 재주를 익혀 나름대로 쓸만한 수준이 되었겠지만 조선은 코끼리 서식지와 멀리떨어져있고 중국 최남단 지방이나 동남아 국가에서 사육사를 데리고 오는게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그걸 감안해도 코끼리는 키우는 데만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동물이었다. 오죽 비용이 많이 들면 아시아코끼리가 자생하는 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왕이 미워하는 신하에게 코끼리를 하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코끼리를 키우려니 살림이 거덜나고 그렇다고 죽이거나 다른데 넘기려니 왕이 직접 하사한 놈이라 불충이 되기 때문...[35] 다만 그렇다고 사관들을 몰살하거나 제도를 없애는 일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애시당초 당시 사관들이 너무 극성인 것도 있었고. 특히 민인생은 왕의 사적공간(사생활 공간)까지 침입한 정신나간 인물이라 사관 중에서도 특이한 편에 속했다.[36] 무력의 관한 기록은 활을 잘쏘고 사냥을 활발히 했다고 언급되있다.[37] 취미가 사냥이었던 인물인만큼 진짜로 신체 능력이 빈약한 사람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애초에 그에게 '병약하다'란 평을 한 이성계가 고려의 무장 시절 패배를 모르는 장수이자 불세출의 신궁인걸 생각하면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거기다 태조가 이 말을 했던 시점이 이방원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직전이었는데 비록 정몽주를 죽인 미운 자식놈이긴 해도 나라를 위해 먼 거리를 가겠다고 하니 태조 입장에서는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가 보기에 기특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을테니 이런 복합적인 마음 때문에라도 이런 말이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명나라와의 사이가 그닥 좋은 편도 아니어서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물론 당시 사정상 보낼 수밖에 없긴 했지만 이방원이 명나라에 가게 된 것은 자천타천이었는데 타천이 바로 정도전이었고 당연히 이는 남의 손을 빌어 죽더라도 좋지 않겠는가라는 차도살인의 심산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말이다.[38] 정도전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1차 왕자의 난 당시 두 아들은 아버지를 구하려다가 죽었고 한 아들은 집에서 자살했다. 장남은 임금을 모시고 있어서 살아서 수군이 되었다가 1407년(태종 7년)에 복직되었고 세종 시기 형조판서까지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39] 이방원이 형 이방간을 살려준 것에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는데 이미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왕실 내에서 피바람이 몰아친 마당에 동복형제까지 죽였다가는 아무리 진압의 명분이 정당하다 해도 민심이 매우 흉흉해질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앞으로 본인의 집권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 전체의 정통성에도 흠집이 날 수 있었다. 그래서 책임을 박포에게 모두 몰고 형 이방간의 목숨을 살려준 것. 이성계와 이방과가 동의한 것도 가족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이 부분도 있었다.[40] 세종의 장인 심온의 경우 과민 반응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다만 이 경우 아들이 어떤 인물로 자라날지 모르므로 최대한 아들이 왕 노릇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내린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세종은 결단력과 총명함을 겸비한 명군(성군)이었지만 만약 세종이 능력은 뛰어나나 정에 약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이었고, 심온의 가족들이 권력욕이 있었다면 외척들에게 휘둘릴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 실제로 심온 본인은 몰라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여러모로 자중하지 않고 태종의 심기를 꾸준히 건드렸다. 청송 심씨 가문의 권력 자체도 이미 태종이 숙청한 여흥 민씨에 못지않게 강력해 안 그래도 어그로가 뿜어져나오는 가문이었는데 몸을 사리기는 커녕 대놓고 숙청해달라는 수준으로 깝치고 나대고 다녔으니 태종의 숙청의 레이더에서 끝내 벗어날 수가 없었다.[41] 물론 이건 아버지와, 대업을 같이한 동지들과 함께 도모한 일이긴 하지만 이방원의 지분이 상당히 컸다.[42] 주로 자신이 세운 공을 믿고 권세를 누리는 공신들이 해당.[43] 실수든 아니든 왕의 침전에 무단출입하는 것은 한낱 국왕 시해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일로 엄청난 사건이다.[44] 고려시대 과거는 진입 장벽이 조선시대에 비해 훨씬 높았다. 이유는 고려시대의 과거 제도는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무과를 치르지 않았고 문과와 잡과만 치렀기 때문이었다. 그러하니 경쟁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어려운 시험을 불과 17세(현재 고등학교 1학년, 당시 응시자 중 나이 기록이 있는 사람 중 거의 최연소)에 해당하는 나이에 붙었으니 보통내기가 아니었다.[45] 정도전은 18세, 정몽주는 19세. 당대 여말선초의 제일 석학들과 비교해도 매우 뒤쳐지지 않는다. 특히 고려시대의 과거 시험은 족벌화가 매우 심해서 감독관의 제자들이 대부분 합격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 고평가 받을 부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