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교로 다시 돌아갈거다 언제 졸업할지는

나는 학교로 다시 돌아갈거다 언제 졸업할지는

2022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 예순여섯 중학생

“딸, 엄마 다음 달에 중학교에 입학해.” 2년 전,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마치 ‘오늘 저녁으로 볶음밥을 먹었어.’처럼 예사로운 어투로말이다. “무슨 학교?” 나는 정확히 알아들었음에도 되물었고, 엄마는 “응, 중학교.” 하며 나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서나 보았던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바랜 할머니가 교복을 입고 어린 학생들과 함께 등교하는 모습 말이다. “내가 다녔던 여중은 아니지?” 먼저 물어보려던 건 그게 아니었으나, 반사적으로 엉뚱한 문장이 튀어나왔다. 내 질문을 이 해한 엄마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호응했다. “맞아. 거기서 네 후배랑 같이 수업 들을 거야. 교복은 네 거 입으면 되겠다. 남 안 주길 잘했네.” 그 말에 안색이 창백해지자 엄마는 이내 웃음기를 거두고 덧붙였다. “농담이야. 내 손녀뻘인 애들이랑 같이 다니는 건 아니고……, 이 주에 한 번, 지정 학교로 3년간 등교하면 중학교 졸업 학력을 주는 학교야. 평소에는 인터넷으로 수업 듣는대. 너네처럼.” 나는 그 대답에 안심했으나, 동시에 부끄러워졌다. 엄마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하긴커녕 혹여나 자신이 졸업한 학교에 엄마가 신입생이 될까 전전긍긍하는 딸이라니. “그래, 잘됐네. 잘해 봐.” 나는 묘한 수치심에 과장된 어조로 응원하며, 엄마를 놔둔 채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녀의 첫 등교까지 겨우 이 주를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학업을 계속하지 못한 것은 엄마에겐 치명적인 콤플렉스였다. 세상은 그녀에게 줄줄이 태어난 동생들을 부양할 의무를 쥐여줬음에도, 공부할 권리는 주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감내했다. 그 시대의 여자들이 모두 그랬으므로. 그게 엄마에겐 ‘보통’이었으니까. 나는 그런 엄마의 콤플렉스를 이해했다. 초등학교라도 마저 졸업하기 위해 담임 선생님 집에서 식모살이해야 했던 그 마음을, 어린 내가 들이민 수학 문제에 못내 당황해했던 그 마음을, 오빠들이 아닌 나를 좀 더 낯설고 먼 곳으로 보냈던 그 마음에 공감하고 위로할 줄 알았다. 같은 시절을 살진 못했더라도 시대라는 견고한 벽을 넘어 전해지는 마음이 있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엄마를 저지하는 건 그런 엄마의 마음을 짓밟는 것과 같았다. 막연하게 엄마를 응원하는 것 말고 내가 해도 되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바깥세상으로 가서 마음껏 자라고 와.” 대학에 입학한 뒤 집을 떠나던 날, 엄마는 나를 한 번 끌어안은 뒤 그렇게 말했다. 그건 엄마의 손을 놓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유년 시절부터 나의 등을 밀어주었던 문장이었다. 내가 한 해가 다르게 커가고, 적응할 틈도 없이 환경이 변화할 때마다 엄마는 나의 눈을 응시하며 단단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어깨를 부여잡고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얼굴은 평소와는 달랐다. 양 볼과 이마는 생기있게 반짝거렸고, 올곧은 눈동자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내가 아닌 멀고 아득한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는 반평생 그 말을 받아먹으며 살을 찌웠다. 그러나 스무 살이 된 이후부터는, 엄마의 말을 들으면 마음에 무거운 짐이 쌓이는 기분이 들 었다. 어른이 된 나에게 성장만큼 피곤한 일은 없었다. 당장 내 앞에 놓인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급급한 와중에, 성장이란 말은 과분했다. 이제 나에게는 내 삶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밤을 새워 공부하는 건 배우기 위해서가 아닌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였으며,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경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내 몫이 된 온갖 보험료와 공공요금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더, 더, 더 자라렴. 그래서 이곳을 떠나 먼 곳으로 서둘러 날아가렴. 엄마의 말은 마치 채찍처럼 나를 다그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어깨에 실린 양손의 무게도, 총명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도 못내 버거웠다. 나는 이제 자라는 게 아닌 늙어가는 일만 남았구나. 강의실 구석에 앉아결국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겨우 스물몇 살이 정의한 것치곤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딸, 화자는 작가랑 뭐가 다른 거야?" "딸, 0은 왜 유리수가 아닌지 설명 좀 해줄래? 딸, 딸……." 엄마는 주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학교에 입학한 뒤부터 내게 끊임없이 질문했다. 엄마를 유난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문장은 대개 비슷했다. ‘이제는 너무 늦었다.’라는 것이었다. 분명 반세기를 훌쩍 넘게 살아온 사람이 되돌아가기에는 멀고 험난한 길이 맞았다. 그러나 엄마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치 뒤에서 누가 밀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교과서를 향해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엄마가 내게 궁금해하는 건 과목뿐만이 아니었다. 컴퓨터를 켜는 법, 인터넷 강의 속 선생님 목소리의 크기를 조절하는 법부터 학교 친구들에게 호감을 쌓는 법이나 선생님께 질문하는 법 마저 난 대답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런 엄마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으나, 질문이 빼곡히 쌓이 자 금세 귀찮아졌다. “딸, 지금 바빠? 엄마가…….” “엄마, 나 지금 인강 듣잖아. 엄마 스스로 알아봐봐, 좀.” 그 말을 내뱉은 즉시 나는 후회했다. 그러나 날 선 문장들은 어느새 공중에 흩어져 바닥에 가라앉고 있었다. 엄마가 모르는 게 많은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엄마의 동생들이 교복을 챙겨 입고 있을 때 그녀 홀로 공장에 있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게 아니라……, 엄마가 이번 기말고사 전교 1등을 했대. 종업식 때 학생들 대표로 상도 받는대. 방금 담임 선생님한테 연락이 왔네. 방해해서 미안, 할 거 해.” 엄마는 멋쩍은 얼굴로 그렇게 말한 뒤 이내 다급하게 방을 빠져나갔다. 내가 그래서는 안 됐다. 엄마가 어떤 표정으로 모니터 속 칠판을 바라보는지, 어떤 심정으로 모르는 문제를 자정 넘어까지 붙들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오빠들이 아닌 나를 먼 곳의 고등학교로 보내고 내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을 때 어떤 마음으로 나를 와락 끌어안았는지 아는 내가. 나는 실수를 깨닫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무심한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빨래를 개는 엄마에게 말했다. “축하해, 엄마. 이번 주에 학교 가는 거지? 같이 가. 일등 했는데 교실에 커피라도 한 잔씩 돌려야지. 이제 내가 엄마 학부모니까…….” 학부모라니. 무심코 뱉은 말이었으나 내가 입에 담기에는 어색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 말을 듣자마자 태양처럼 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말, 우리는 함께 엄마가 다니는 중학교로 향했다. 나는 진짜 ‘학부모’라도 된 것처럼 담임 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반 친구들에게 커피를 한 잔씩 돌렸다. 예상은 했으나 반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엄마 또래의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그들은 모두 파도 같은 세월을 돌고 돌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교실의 부산스러운 공기와 책상의 반질반질한 감촉을 그리워했을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딸, 곧 시작한대.” “응, 난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엄마는 내게 한 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딸. 그리고 낮게 속삭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복도 창문을 통해 앞자리 친구들과 말갛게 웃으며 대화하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이내 종업식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 선생님이 엄마를 호명했다.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자기 일인 양 기뻐하며, 있는 힘껏 손뼉을 쳤다. 엄마는 민망한 듯 수줍게 미소 지었지만, 분명 환희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엄마의 생기 어린 얼굴을 보며, 배 안쪽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제야 나는 엄마가 했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속삭이듯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 바깥세상에서 마음껏 자라고 와. 엄마가 내게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키가 반 뼘은 자란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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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육실습생 정민주

살 만 한 날들

자카르타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사진 좀 보내봐.”

한국에서 나의 생사를 궁금해 하는 이들로부터 일 주일에 한두 번 정도 사진을 보내 달라는 연락을 받곤 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그제서야 SNS를 통해 근황을 알리는데 소홀해 있었음을 깨달았다. 문득, 그 행동이 타인의 눈을 통해 나의 일상을 인정받으려 하지 않아도 괜찮은, 스스로 주어진 하루를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확신어린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았다. 누군가 봐 주지 않아도, ‘살 만한 하루였다는 총족감이 채워진 날들이 찬찬히 지나고 있었다.

살 만 하다라는 감정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를 뜻하진 않는다. 석연찮은 상황이 생겼음에도 감히 포기하려 들지는 않는 천진함을 볼 때 드는, 해볼 만 하다는 마음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수업 시간에 제비뽑기 통이 마땅히 없자 A3용지 네 테두리를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깊이로 접어 만든 간이 접시를 사용했던 것. 화병이 없어 정수기용 물통 모양의 클레오 병에 물을 9부정도 담아 길에서 산 장미꽃을 꽂아 - 사실상 띄워 - 놓았던 것. 웃음을 터지게 한 것들은 누가 봐도 어설프지만 태연히 시도해보는 열정어린 마음이었다.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이하 직스)에서의 실습 기간은 충분히 살 만 했던 날들이었다. 날씨, 음식, 물가와 같은 생활 측면은 물론, 무엇보다도 직스라는 계기로 만나게 된 사람들이 그런 마음이 들게 했다. 직스의 학생, 교사, 현지인 근로자, 실습 동료. 이들은 각자 모든 부분에서 완벽했다기보다 서로 모자란 구석을 하나 이상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초임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모호한 역할을 수행하는 교생, 9명이라는 전례 없는 숫자의 실습생들을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에 받아야 했던 교사, 막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학교에 다시 적응해야 했을 학생들. 모두가 처음 맞는 낯선 상황이었음에도 누구 하나 당황스러움을 내색하지 않았다. 어색해도 담담히 서로를 마주해보려는 노력들이 쌍방으로 오갔다. 첫 대면이 기분 좋게 피로했던 이유다.

기분 좋은 피로감은 실습 3주차에 접어들어 실제로 수업 준비를 하기 시작했을 때 즈음 가장 진하게 찾아왔다. 학생들이 수업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지 어떻게 알아볼까 고민해보면서 결코 알 수 없음을 깨달았던 무렵이다. ‘교사애쓰는 마음을 숙명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직업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교실이라는 공간이 주는 느낌은 학생으로서 발을 들일 때와 상당히 달랐다. 파티나 세미나와 같은 특정한 목적을 가진 장이 입장하는 사람에게는 우연히 들어선 곳일지 몰라도, 기획자의 입장에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한 계획 하에 돌아가는 곳인 것과 비슷하다. 교실의 분위기와 질감은 꽤 소상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교사의 설계로부터 결정됐다.

특히 수업 시간 내 교사는 학생을 관객으로 둔 배우 같았다. 해당 수업을 성공적으로 끌어오기 위해선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북돋기도, 때로는 조용히 기다리기도, 때론 시청각 매체를 사용하기도 하며 적재적소에 균일한 모습으로 본인을 등장시켜야 한다. 정해진 시간 내에 할당된 차시를 나가기 위해선, 학생들의 수업에 대한 소화력을 그때마다 확인해 속도조절을 하는 게 필요했다. 그런데 이 부분이 꽤 어려웠다. 학생들의 우렁찬 대답은 종종 속이 비어 있기도 했고, 모두가 같은 자리에 밑줄을 긋는 게 흔히 있는 일이 아니며, 눈앞에서 답을 확인한 쪽지가 등 뒤 칠판에서는 자유분방하게 붙어 있기도 했다. 일지 속에서 헤매던 기록을 보더니, 하루는 담당 교사가 웃으며 말했다. “학생들이 이해했는지를 확인하는 건 몇 십 년을 겪은 교사들에게도 힘든 일이에요.”

문득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대학 교수들도 강의실에 들어갈 때 이럴까?” 아닐 거라는 답이 나왔다. 학생이 이해하는 정도를 고려하려는 의지의 유무가 초등·중등학교 교사와 대학 교수를 가르는 하나의 기준인 듯 느껴졌다. - 내가 경험한 - 교사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학생의 입장을 굳이 알아보려는, 알아보겠다는 어려움을 택한다. 반면 교수는 당신의 기대에 학생의 지적 수준을 맞춰두고 강의를 진행한다. 닿을 수 없음에도 포기하지 않는, 학생에게 다가가려는 마음, ‘애씀을 기꺼이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교사를 해볼 만 한 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교사의 애씀을 처음 경험한 곳으로 직스를 만난 건 꽤나 복된 일이었다. 교생으로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교사가 들이는 마음이 부질없게 느껴지지 않은 건, 직스 학생들이 되돌려준 애쓰는 마음덕분이었다. 학생을 생각하는 게 교사의 일이라면, 교사를 바라보는 건 학생의 몫이었다. 놀랍게도, 직스 학생들은 교사의 사랑을 잘 받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루는 유하의 <오징어>라는 시를 이해하는 숙제를 낸 적이 있었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 쉬는 시간에 교실에 들어가자, 학생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더라. “여기서 빛은 오징어에게 좋은 의미 아니야?” “아니지, 여기서 빛을 따라가면 오징어가 죽잖아.” “그런데 빛을 따라간다는 건 좋아한다는 거잖아.” 서로 다 다른 말을 하지만, 자신의 답을 말하고 있었다. 정답을 짚어내는 정형화된 해석력은 없을지라도 해석을 해보려 애쓰는 마음을 가진 아이들을 봤다.

그날, 직스 학생들을 착하다라고 묘사하는 참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교사의 말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순종이 아니었다. 교사가 기대하고 준비한 교육상에 부응해 보려 같은 농도로 애쓰는, ‘착실하다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이런 학생들이라면, 더 애써보고 기대해보고, 도전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살 만 하다는 마음을 주고받은 나날이 지났다. 기억을 잘 하지 못해 기록을 하는 내게, 잊지 못할 만큼 인상적이고 소화할 만큼 일상적인 장면들이 쌓였다.

올해 서울에서 맞을 두 번째 여름이 자카르타에서의 여름을 상기시킬 듯하다. 스포츠데이 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1년 내내 여름이어서 저 나무가 늘 저 모습으로 서 있어요. 변함 없이.” 내게 직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몸피로 서 있는 그 나무 같다. 언제나 여름이어서, 한결 같은 품으로 팔 벌리고 있어 줄 것 같은 곳.

처음으로, 가 본 곳에 다시 가고 싶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곳이라는 장소보다 거기에 있는 사람이 중요해지기 시작할 때 이런 마음이 든다는 것도.

해서, 자카르타에서 또 살아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보고 싶은직스 사람들 덕분에.

소속대학(전공)

사범대학() 영어교육전공

실습생 이름

강 윤 상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에서 보낸 4주간의 기간은 저 스스로 많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고민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가장 많이 느꼈던 점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러 일들을 제가 너무나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었고, 실제로 거의 삼년 가까이 교회에서 유치원생 아이들을 돌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도 직업이 되는 순간 힘들고 고된 일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교생 실습 기간에도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과연 마냥 행복하고 재미있을지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다행히 이곳의 학생들은 처음 어색해하는 저에게 먼저 다가와 주었고, 단순히 교육실습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저에게 무한히 애정을 보내 주었습니다. 덕분에 처음 마주하는 환경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고, 어느 순간 바라보니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 최대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려 하는 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교생 기간은 제가 직업으로서 아이들을 마주하더라도, 그 태도에 변함이 없이 학생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해 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에 더불어 한 가지 제 심경에 온 큰 변화가 있다면, 교사라는 직업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 것입니다. 교육실습을 나갔다 오면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생각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왔지만, 그것이 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교육행정가를 꿈꾸던 저는, 이번 교육실습을 거치면서 교사라는 직업이 저에게 잘 맞고, 제가 충분히 만족할 만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전에도 교사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의 부정적인 면이 아이들에게 전해질까봐, 부족한 교수 능력 때문에 학생들의 영어 학습에 방해가 될까봐 고민하면서 생각을 접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 수업을 해 보면서 담당선생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나니, 스스로 부족한 점만큼 제가 가지고 있는 좋은 면모도 많이 발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제 자신이 노력을 통해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 확실히 결정을 내리지는 못하였지만, 교사라는 직업을 다시 생각해 본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이번 교육실습이 저에게 큰 의미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무리 짓기에 앞서, 저를 맡아주신 영어과 임선영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어색해하는 저를 대하기가 선생님께서도 쉽지 않으셨을 텐데, 아무런 내색 없이 항상 저를 미소로 맞이해 주시며 많은 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힘든 실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습 둘째 날부터 바로 조종례를 같이 들어가며 학생들과 얼굴을 익히게 하여 주셨고, 실습 기간 동안 최대한 저를 배려하시고 자율권을 주셔서 어렵지 않게 실습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와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내주셔서, 평소에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선생님과 많이 나눈 것 같습니다. 잊지 못할 추억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교감선생님과 교육실습생 담당 한혜진 선생님, 그리고 저희 실습생들을 위해서 여러모로 배려해주시고 챙겨주신 많은 선생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소속대학(전공)

사범대학() 지리교육전공

실습생 이름

최 윤 영

일상으로 돌아와 대학 수업을 들어왔는데, 문화지리학이라는 강의에서 장소 마케팅에 대해 배웠습니다. 꿈이었나 싶다가도, 8학년 사회 수업 때 했던 장소 마케팅이 생각나면서 지난 4주가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교생실습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워 갔습니다. 선생님들의 피드백, 동료 교생들의 피드백, 그리고 학생들이 표정과 리액션으로 해 준 피드백을 통해서 수업의 테크닉을 익히고, 학교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관찰하고, 조회와 종례를 하며 교사의 일상이 이런 것이구나, 배웠습니다.

반면 교생실습이 끝나갈 때 즈음부터 생각하기 시작해서, 아직까지 답을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찾지 못할 것 같은 영역이 있습니다.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평생 정답은 찾지 못할 거라는 기분이 듭니다.

교사가 된다면, 매년 만남과 헤어짐을 겪게 되겠죠. 하지만 교생이었던 제게는 너무나 익숙하지 않은 일입니다. 학생들에게 마음을 주고자 했는데 진심이 전달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이 제게, 그 이상의 기쁨을 돌려주었습니다. 그 이후 바로 헤어지게 되었구요. 그 헤어짐이 너무나 익숙하지 않은 것이고, 이미 한국과 인도네시아라는 거리가 생겨버렸기에 더 마음이 이상합니다. 다시 만날 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니까 이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아른거리고, 특히 11학년 2반의 22명이 너무나 눈에 밟힙니다. 깔끔하게 학생들이 다시 일상으로 잘 돌아갈 수 있게 인사했어야 하는데 제가 너무 미련이 남아 연락처도 주고 나중에 밥도 사준다고 했습니다. 아직도 너무 보고 싶다보니, 이 인연이 끝이 아닐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만 듭니다.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닌, 다시 만날 수 있는 열린 결말이라고 믿고 있어요.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처럼, 사람 일은 어찌될 것인지 모르는 거니까요.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 사범대학에서 공부하며 여러 학생들을 만나면서 많은 생각을 해 왔습니다. 성공한 교사의 학생들은, 교사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아 바르게 성장하지만 교사를 답습하면 안 되기에, 본인의 개성을 발전시켜 나가며 성장해야 하기에 그 교사를 금방 잊어버릴 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간혹 그 선생님 덕분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 정도 생각하려나요. 우리반 학생들에게 필요할 때 연락하라고 했던 것도, 정이 많이 들어서 계속 연락하고 잡담도 하고 싶으나 본인들의 학교생활에 더욱 충실했으면 하는 마음에 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학생들이 해 준 말 중에, ‘사회쌤은 원래 쌤같아요이런 말을 들을 때, 그리고 특히 마지막날 선생님 같은 교사가 되고 싶어요같은 편지를 받으면, 너무 고맙고 미안하고 울컥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교생으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JIKS 학생들이 해 준 게 아닌가 싶어요.

교생실습을 하면서 대표교생으로 연구수업을 한 것도 좋은 경험이었고, 체육대회나 창의력 페스티벌과 같은 행사들도 기억에 남지만, 지금 여운이 남는 것은 사람이네요. 많은 인연들을 만났지만, 대학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을 인연들이, JIKS의 학생들과 선생님들인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빛이 난다고 느껴질 만큼, 감사한 인연들을 너무나 많이 만나서 꿈만 같았던 4주였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11학년 2반 사랑합니다!

소속대학(전공)

보건전공

실습생 이름

김 혜 람

자카르타에서의 한 달간의 교육 실습.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교생을 낯선 곳에서 한다는 생각에 설렘도 있었지만 선생님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도 있었다.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하여 마중 나오신 연구 부장 선생님을 잘 만났고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정말 친절하게 맞이해주셨다. 그 미소를 보며 학교에서의 생활이 즐거울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나는 간호학과로 보건 과목으로 실습을 하게 되었다. JIKS에서는 초등학교에서 보건 수업이 진행되어 나는 초등학교 수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수업을 하며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고 아이들 한명 한명이 다 사랑스러워 보였다. 제일 처음으로 수업을 하게 된 곳은 3학년 1반이었다. 3학년이어서 알고 있는 것도 적고 생각하는 것도 어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설명하는 것 모두 아이들이 잘 이해했고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었다. 나는 설탕의 섭취를 줄이자는 주제로 수업을 진행하였는데 학생들이 이 수업을 기억해주고 또한 실생활에서 실천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학생들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였고 수업을 통해 전달할 기회가 있어서 감사했다.

보건 선생님께서는 자율동아리 MEDICAL을 운영하고 계셨다. 동아리를 통해 고등학교 학생들과도 만나볼 수 있어서 좋았다. 중학생, 고등학생 심폐소생술 교육을 위해 함께 영상을 촬영하기도 했고 상담도 했다. 간호학과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미래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었다.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학교는 학창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졸업하는 것을 아쉬워할 정도로 좋아했다. 그런 학교에 다시 온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고 교육 실습을 기대하게 했다. 실습을 하며 보건 교사라는 역할에 대해 알 수 있었고 어떠한 보건 교사가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기회도 가지게 되었다. 보건 선생님께서는 school nurse가 아닌 보건교사로서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해주셨다. 그 말이 기억에 남았고 전문성을 기르는 데에 힘을 써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한 달 동안 교육 실습을 지도해주신 학교 선생님들께 너무 감사했고 인도네시아에 잘 적응하고 좋은 경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했다. 떠나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고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감을 느꼈다. JIKS와 이곳에서의 생활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소속대학(전공)

사범대학() 체육교육전공

실습생 이름

정 상 한

jiks! 안녕하세요!

교생 선생님으로 여러분과 함께했던 체육교생선생님인 정상한 입니다!

한 달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학생여러분과 함께했는데 어느 샌가 시간은 빠르게 달려가 한국에서 이 글을 작성하고 있네요.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못 뵌지 1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보고 싶고 걱정이 되는 것은 그만큼 직스와의 인연이 깊었던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직스의 학생들을 마주하면 저의 행복했던 중학교 고등학교 학창시절이 생각나곤 했습니다. 학생 여러분이 앞으로 가질 시간들 중 가장 소중한 시간들인 지금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보고만 있는 선생님도 정말 찬란하게 감사했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여러분에게 앞으로 펼쳐지게 될 길고 긴 시간의 여행에서 고마운 동행자입니다. 친구들과 잘 지내고 건강히 자라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니 여러분이 잘 자라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건강히 예쁘게 자라는 여러분의 모습은 제가 jiks에 교생실습을 추억하게 될 가장 멋진 장면입니다!

정말 한 명 한 명 모두가 선생님의 눈에 화려하게 빛이 났습니다. 선생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한 명 한명 진지하게 많은 이야기들, 궁금해 하는 것들을 알려주고 여러분과 안녕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해주지 않네요. 이렇게 시간은 항상 후회와 미련을 남기니까 지금 이 순간에 이 공간에 최선을 다하는 직스 학생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교무실에서 마주했던 매일 아침 따뜻하게 인사해주셨던 모든 선생님들 정말 감사했습니다.(이미 선생님, 한혜진 선생님 감사합니다.)

여러분과 이별 했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이별은 없으니까 우리는 어디선가 언젠가 다시 보게 될 거에요!

언제든지 제가 필요하면 연락해주세요! 많이 보고 싶을 겁니다 jiks!!

쌤은 아직 멋진 어른이 되는 과정 안에 있습니다. 멋진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jiks와 함께한 것은 쌤에게는 영광이고 행복이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P.S

7-1: 항상 열심히 모든 일에 임하는 어른스러운 7학년 1! 앞으로도 에너지 넘치게 건강하게 자라렴!

7-2: 선생님 킨볼 심판 열심히 봤어...쌤이 미안해 울지마...

8-1: 넷볼도 열심히 농구도 항상 열심히 참여해줘서 참 고마웠고 그 똘망똘망한 눈빛들을 잊기 힘들거야!

8-2: 학교행사와 기념일이 계속 겹쳐 1번밖에 수업을 같이 못해서 쌤도 정말 아쉽고 그래도 항상 밝게 웃는 모습을 보니 쌤도 정말 기뻤고 앞으로도 그렇게 웃으면서 자라렴!

9-1: 참 많이 고맙고 또 고마운 반. 반 아이들 중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매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에 정말 감동했고 연구 수업 때 고마웠다.... 다들 이쁘게 멋있게 자라고 친구들이랑 싸우지 마..,

9-2: 애증의 반. 장난도 많이 치고 미운 정 고운 정 많이 들어서 한국 와서도 많이 생각난다. 다들 건강히 잘 지내고! 선생님이 그때 남겨서 했던 말 꼭 지키기! 한국 오면 꼭 연락해! 편지 열심히 썼으니까 여기다가 길게 쓰지는 않을게. 사랑한다.

9-3: 수업시간에 정말 고맙고 고마웠던 반. 승현이는 이제 쫌 철 들고~

모두가 생각날 정도로 선생님이 정말 감사했어. 선생님도 부끄럼이 많아서 3반이 다가온 만큼 쌤이 많이 못 다가간 것 같아서 정말로 미안해. 건강히 자라렴 3!

10-1: 평소에 잘하다가 마지막 수업 때 쌤이 화를 많이 낸 것 같아서 정말 많이 미안한 반. 열심히 참여하다가도 1반 여자애들 흥이 폭발함과 동시에 우리의 수업분위기도 폭발되었지....그러니까 조금만 흥을 줄이렴.

다들 꼭 건강하게 이쁘게 자라렴! 그리고 남자애들은 농구 좀더 열심히 해라ㅎㅎㅎㅎ

10-2: 쌤도 2반 학생이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제일 분위기 좋은 반. 한 명 한 명 모두 고마워서 쌤이 글로 어떻게 적어야할지 잘 모르겠네. 지금처럼 옆 친구 한 명 한 명 잘 챙기고 자라면 다들 정말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거야! 정말 고마웠다!

소속대학(전공)

사범대학() 사회교육전공

실습생 이름

고 가 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에서의 교육 실습이 체육대회를 마지막으로 끝이 나고, 잠시 잊고 지냈던 한국에 돌아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 보니까 잘 놀러 다닌 것 같던데, 재밌었냐고 물어봤다. 그 물음들에 대해 재밌었다라고 대답했지만 재밌었다라는 말로 실습 기간의 모든 감상을 표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실습생으로서 내가 한 달동안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먼저, 교사의 가장 큰 즐거움이 학생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평소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교육 봉사 활동이나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칠 기회는 많았지만 아이들에게 애정을 가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교사는 여름과 겨울에 휴가를 즐길 수 있고, 퇴직 후에도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직업이었고, 학생을 가르친다는 교사의 본업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육 실습을 하면서 담당 학급 학생들과 매주 사회 수업을 함께 하는 학생들을 만났고, 이 학생들은 나의 학생들이 되었다. 수업 준비가 힘들어도 수업 시간에 잘 들어 주고 참여해 주는 학생들을 보면 예뻐 보였고, 뭐든 하려고 애쓰는 아이들이 기특했다. 간혹 수업에 집중 하지 않거나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이 학생들조차 밉기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한 달 동안 학생들과 소통하며 변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교사의 가장 큰 기쁨은 학생들이라는 것을 알았고, 만약 내가 교사가 된다면 아이들을 보면서 힘든 일들을 이겨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중, 고등학교 학생들은 내 생각보다 더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8학년 도덕 수업에서 소수자 인권에 대해 학생들과 얘기를 주고 받은 적이 있었다. 수업을 준비할 때는 학생들이 과연 소수자에 대해 알고 있을지, 소수자 인권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잘 이야기해 줄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소수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열린 질문을 하자 아이들은 내가 예상한 것을 뛰어 넘는 수준의 다양한 대답을 해주었다. 이 수업을 통해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의 잠재력을 엿볼 수 있었던 또 다른 사례는 창의력 페스티벌이었다. 학생들은 각자 선택한 글짓기, 그림 그리기, 발명품 만들기를 두 시간동안 했는데, 평소에 장난끼가 많던 아이들도 두 시간을 집중해서 뭐든 만들어 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모습을 통해 학생들은 교사가 믿고 기다려주고, 약간의 정보와 동기 부여를 해주면 뭐든 이뤄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해외 한국학교 실습생으로서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은 본교 학생들처럼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 학생들을 위한 교육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자카르타 한국 국제학교로 실습을 오면서 내가 생각한 아이들의 모습은 인니어와 영어를 기본으로 할 줄 알고, 현지인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며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문화를 모두 경험하고 있는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인니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학생은 한 반에 한 두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과 문화적으로도 한국 아이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에 놀랐다. 스마트폰이 발달하면서 한국의 컨텐츠를 외국에서도 접할 수 있고, 한국인들이 다니는 한국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한국 문화를 주로 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생들이 인도네시아가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인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인도네시아 문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청소를 해주시는 분들은 모두 인도네시아 사람이었는데, 이 분들에게 인사를 하는 학생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청소 노동자 분들이 청소를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 자리조차 정리하지 않고 집에 가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외에도 교지에서 인니어가 한국어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다행이라고 쓴 한 학생의 글을 보았고, 운전기사와 가정부를 낮춰서 말하는 학생들도 종종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문화적 다양성을 익힐 것이라고 기대되는 해외 한국학교 아이들이 오히려 자문화중심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고, 이 학생들을 위해 현지 맥락을 고려한 교육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습이 모두 끝나고 담당 학생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던 때를 되돌아 보면 언제 만나자는 기약을 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아쉬웠다. 그럼에도 한국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안타까웠고,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어 주던 모습과 무엇이든 열심히 해보려는 모습이 예뻤던 나의 첫 학생들을 잊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교직에 뜻이 없는 채로 교육 실습을 했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교직의 기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학교 생활과 인도네시아 생활 전반에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해 주신 학교 선생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소속대학(전공)

사범대학() 역사교육전공

실습생 이름

백 인 석

JIKS의 교사, 학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 430일부터 525일까지 약 한 달 간 여러분들과 동고동락했던 역사 교과 교육실습생 백인석입니다. 비록 서면이긴 하지만, 여러분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이번 후기를 통해서 여러분들과 11로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나 소회 등을 가볍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짧은 글이니 지루하더라도 재미 삼아 한 번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지난 한 달 간 JIKS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들으며 한국에서 경험할 수 없는 여러 모습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JIKS에 오기 전까지 저는 해외한국학교라는 시설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저 해외에 사는 교민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세워진 학교이며 한국의 교육제도를 준수하고 있다는 것만이 제가 알고 있던 해외한국학교의 전부였습니다.

이런 배경 위에서 JIKS를 처음 접했을 때, 느낀 감정은 신기함이었습니다. 한국에선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모습들이 JIKS에선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선생님들은 교과 진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수업을 진행하였으며 학생들은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면서 그 과정 속에서 스스로 해내는 법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해외한국학교가 가지고 있는 대입 특별전형을 거론하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 달 간 JIKS 학생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부정적 평가에 대한 우려는 충분히 씻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학생 여러분들의 수행평가 과정과 결과를 지켜보면서 제가 속해 있는 대학의 전공 수업 진행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수능이라는 시험을 기준으로 보자면, 한국 유수의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이 우위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학과 사회는 시험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JIKS의 학생 여러분들은 남들보다 먼저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음으로 JIKS에서 느낀 감정은 부러움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나라의 문화나 언어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와서 여러 외국어를 공부했고 해외에 나가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해외에 나갈수록 좀 더 이른 시기에 나가지 못했던 아쉬움은 점점 깊어져 갔습니다. 저는 학생 여러분이 부럽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남들에겐 없는 자신만의 스페셜리티를 JIKS에서 만들고 있습니다. 한 달 간 JIKS에 있으면서 여러 학생 여러분들로부터 다양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개중엔 한국 대학으로 진학했을 시 겪게 될 애로사항에 대한 걱정으로 물어보는 질문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가볍게 답변하겠습니다. 학생 여러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잃지 말고 자신감 있게 보내세요. 여러분은 남들에게 없는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JIKS에서의 한 달이 제게 큰 자극과 영감을 주었듯이 저 자신도 JIKS에 계신 분들에게 좋은 자극이나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저 자신의 개성과 경험이 학생 여러분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나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달이란 짧은 기간 내에 전부 소화하긴 힘들더군요. 여러 친구들로부터 다양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아쉽습니다. 헤어지기 전에 여러 친구들에게 제 연락처를 남겼습니다. 앞으로 여러 고민이나 문제가 생길 때, 새로운 의견이 듣고 싶으신 분들은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만남은 짧게 끝나버렸지만 인연은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앞으로도 JIKS 여러분들의 건승을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