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이름 짓는 방법

조선 시대에 양반이나 족보가 있는 집안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항렬 

돌림자를 바탕으로

집안에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조선 시대 이름 짓는 방법

하지만 족보가 없는 집안의

자녀들은안의 어른 누군가가

생각나는 대로 짖거나

아무 의미 없이 부르기 쉽게 짖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다 보니 이름이 삼돌이, 만석이

쇠돌이, 삼룡이, 언년이, 순복이 처럼

겹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조선 시대

이름을 짓게 된다면 어떤 이름이 나올까?

그래서 독보적인 조선 시대

 내 이름 짓기 표를 준비해 봤다.

아래 표를 보고 자신이 태어난 달과

태어난 날짜를 바탕으로

자신의 조선 시대 이름을 알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래처럼 2월 7일생이면

이름이 쇠돌이다.

자신이 만약 김씨면 김쇠돌

박씨면 박쇠돌이다.

4월 1일생이면 만식이

10월 6일 생이면 언년이다.

또한 11월 12일생이면 이름이 개복이가 된다.

만약 8월 5일에 태어났다면 이름이

지금의 욕과 같은 쌍놈

8월 6일에 태어났다면 쌍년으로

실제로 이런 이름이 조선 시대에 존재했었다.

그리고 이름을 알면 쉽게 생일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재미로 드라마 '추노'에서

이다해가 연기한 노비의 이름은 언년이었다.

그렇다면 언년이 생일은 10월 6일생이 된다.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78)

당신 이름은 몇 가지입니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태어나면 이름을 짓는다. 하지만 조선 시대엔 호칭이 하나가 아니었다. 태어나면 아명(兒名)을 쓰다가 석 달이 지나 부모나 조상이 지어 주는 본명(本名)을 받는 경우가 있었다. 부모 등이 짓는 본명은 이름을 더럽히면 집안을 욕보이는 것으로 받아들일 만큼 중시했다. 『예기(禮記)』 ‘곡례(曲禮) 상’에 이름 짓는 법이 나온다.

조선 시대 이름 짓는 방법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태어나면 이름을 짓는다.[중앙포토]

“이름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믿음이 있고, 의로움이 있고, 물체를 닮음이 있고, 사물의 이름을 빌림이 있고, 친척과 유관함이 있다. 태어날 때 특별함이 있어 그걸 본 따 이름 짓는 것이 믿음(信)이고, 덕(德)을 나타내는 글자를 사용하여 짓는 것이 의리(義)이고, 공자(孔子)가 니구산(尼丘山)을 닮아 ‘구(丘)’라 함과 같이 물체를 닮음을 형상(象)이라 하고, 공자 아들 리(鯉)와 같이 사물 이름을 빌려 짓는 것은 빌림(假)이고, 아버지와 관계있는 글자를 사용하는 것을 류(類)라 한다”고 했다.

또 이름으로 지으면 안 되는 것도 있다. “자식 이름을 지을 때는 나라 이름(國名)으로 짓지 않고, 해와 달로 짓지 않고, 질병 이름으로 짓지 않으며, 산과 강 이름으로 짓지 않는다”고 했다.

『예기』는 그 이유를 “자식 이름 짓는 일은 아버지의 책임이다. 이름 짓는 것은 가르침을 주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래서 작명(作名)할 때 첫째, 나라 이름으로 짓지 않음은 겸양을 가르치기 위해서며 둘째, 해와 달로 이름 짓지 않음은 공손함을 가르치려는 것이고 셋째, 질병 등으로 이름 짓지 않음은 수양에 정진해 덕으로 나아가게 하는 까닭이며 넷째, 산천으로 이름 짓지 않음은 모든 일의 원인과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도록 함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또 우리는 이름 지을 때 부모나 조상의 이름 자를 피하도록 했다. 자식이 태어나면 석 달이 지나 아버지가 이름을 짓고 사당에 고했다. 이름을 지을 때는 자식이 종신토록 가르침으로 삼을 만한 뜻을 담는다. 또 그 자식의 훗날 자손이 피휘할 때 어려움이 있을 것까지를 염려한다. 이름 하나도 이렇게 원대하게 심사숙고한 것이다.

또 우리 조상은 본명은 죽어서도 남기 때문에 함부로 쓰지 않았다. 그리고 성년이 돼 관례를 하면 아명을 버리고 본명과 통하는 자(字)를 받는다. 자를 줄 때는 지은 뜻과 이유 등을 밝히는 글을 꼭 함께 지었다.

조선 시대 이름 짓는 방법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는 1558년 도산에서 처음 만난 이후 편지를 주고받았다. [중앙포토]

보통은 지금껏 살펴본 세 가지 즉 아명, 본명, 자로 살아가지만 영향력이 커지면 자의든 타의든 호(號)가 있게 된다. 아명은 자를 받으면 쓸 수 없고, 본명은 족보나 관직 같은 공식적인 곳에 사용되고, 자는 윗사람이나 친구 사이에 쓰이고, 호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퇴계 이황은 율곡 이이보다 35세 연장이다. 두 사람은 1558년 도산에서 처음 만난 이후 편지를 주고받는다. 편지를 보면 율곡은 ‘상퇴계선생(上退溪先生, 퇴계 선생께 올립니다)’으로 퇴계 호를 썼고 퇴계는 율곡에게 보낸 편지에 ‘답이숙헌(答李叔獻, 이숙헌에게 답하다)’으로 율곡의 자를 써서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지금은 본명만 있고 아명이나, 자는 간 곳 없고 너도나도 호를 만드는 세상이 되었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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