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의 부르심 을 아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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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독교인들이 삶에 있어서 주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한다. 진리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께 부름을 입었고, 그분을 추구하며,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부르심이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개인적인' 부르심에 있어서 지속적인 혼란을 경험한다. 목회자 또는 에베소서 4장 11절에 나와 있는 5가지의 사역(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에 대한 부르심을 받았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특별한 부르심을 알고 싶어하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어떤 일을 해야할 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야 할 지, 언제 선교를 해야할 지 등에 관한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특별한 인도하심을 받고자 한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보여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자신의 방향과 부르심에 대해 매일 불안해하며 사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분은 당신이 율법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만족케하기 위해 죽으러 오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알 수 있는가?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주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만족케하는 3가지 단계'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 모든 기독교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을 향한 일반적인 부르심을 알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4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상을 좇아간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푯대는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믿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2.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닮고자 몸부림쳐야 한다.

우리들 중 일부는 이것을 오해하여 우리의 말, 행동, 외모 등과 같이 종교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추기 쉽다. 물론 이러한 일들도 분명히 생기지만, 우리의 초점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마:23~26).

우리의 초점이 우리의 성품에 있기 때문에, 평소 '부르심'하면 떠오르는 생각들을 멈추게 된다. 대신 하나님 나라에서의 역할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3.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할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할 수 있는대로 그분과 연합해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17~21)

우리의 초점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우리의 초점은 역할과 사역을 생각하는 대신,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그분께 많은 이들을 인도하는데 쓰임을 받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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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을 받아

  • 2008. 1. 17. 08:49
  • 주제별(글)/히브리서11장


말씀: 히브리서 11:8
요절: 히브리서 11:8 아벨, 에녹, 노아의 뒤를 이어 믿음의 좋은 평판을 받은 인물로 등장하는 이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를 통해 타락한 모든 인간들과 땅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멸하시고 심판하셨지만 홍수 이후의 사람들, 즉 노아의 후손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살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3:15의 여인의 씨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통해 구체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는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경고를 받아 두려움으로 움직였지만 이들 중 그 누구에게도 하나님은 씨에 대한 약속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은 씨에 관련된 어떤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아벨의 씨, 에녹의 씨, 노아의 씨란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씨에 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은 믿음의 아버지(조상)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이전에도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을 통해 동일한 믿음의 후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한 절 정도의 지면을 장식했지만 아브라함은 8-19절까지 몇 배의 지면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성경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롬4:16c)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중동의 많은 민족들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을 자처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자녀들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성도들의 관계는 육신적 혈통의 관계가 아니라 ‘믿음’으로 형성된 관계입니다. 갈라디아서 3:7절, [그런즉 너희는 믿음에 속한 자들 곧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녀인 줄 알지어다.](갈3:7). 아브라함과 우리는 [믿음]이란 영적 요소로 맺어진 가족 관계입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타고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그 누구도 선천적으로 [믿음의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롬10:17). 하나님은 우상의 고장 갈대아(바빌론 지역) ‘우르(Ur)’에 살고 있던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람은 우상 제작자였던 아버지 데라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그 지역에서 귀족이나 왕이 아니었고, 거부도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여호수아의 증언에 따르면 아브람은 우상 숭배자였습니다(수24:2). 주님은 우르에 살고 있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셨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말씀은 거창한 우주의 비밀이나 생명의 신비에 관한 것이나 영적 세계에 대한 것이나 미래에 펼쳐질 세상에 관한 예언이나 아무도 모르는 신비한 계시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은 병 고침이나 마귀를 내어 쫓는 권능이나 방언의 은사 같은 표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주신 말씀은 “이곳을 떠나라”였습니다. 어디로 떠나야 하는지 목적지도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람아, 아브람아” 부르셨고 “떠나라” 말씀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지도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안내자를 붙여 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서 자신이 살던 고향 [우르]를 떠났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더 나은 직장을 찾아서,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찾아서 고향을 떠나는 일이 많습니다. 자신이 알아서 살기 좋은 곳으로 가는 일은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순종해서 어디론가 떠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아브람은 ‘떠나라’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해서 떠났는데 이곳은 “훗날 상속 재산으로 받게 될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떠날 당시에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나갔습니다(8). 사람은 어느 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꿈이나 환상이나 빛이나 천사를 통한 신비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복음 전도자를 통해서입니다.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복음 선포’를 통해서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향해서 주님은 “나를 따라 오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앞서 간 어린 양의 발자취를 따라 가면 됩니다. 어떤 이들은 “나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기억이 전혀 없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에게 하늘에서 밝은 빛을 비추시면서 “사울아, 사울아...”하고 부르셨듯이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주님께서 친히 음성을 발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예는 아닙니다. 성경이 완성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전도자들이 세움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복음 선포의 어리석은 것으로 믿는 자들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나니](고전1:21). 하나님의 방법은 ‘복음 선포’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언제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나를 부르셨는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믿음의 본으로 제시된 아브라함을 통해 놀라운 은혜를 입기를 원합니다. 이전에 기록된 모든 것이 배움과 교훈(롬15:4)이요, 본보기(고전10:11)로 기록되었습니다. 주의 성령께서 말씀을 저희 마음 판에 선명하게 기록해 주시기를 거듭 간구 드립니다. 11:8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아 훗날 상속 재산으로 받게 될 곳으로 나가면서 순종하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나갔으며](8). 하나님은 메소포타미아 강 저편에서 우상을 숭배하며 사는 아브람이란 별 볼일 없는 죄인 한 명을 부르셨습니다. 여호수아의 증언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이르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이자 나홀의 아버지인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수24:2). 고고학적 사료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살던 당시 갈대아의 우르 지역은 3,000여종이 넘는 우상들이 있었고, 다신 숭배로 가득한 사회였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상이 가득한 도시에서 자식 하나 없이 늙어 가는 아브람을 누가 부르겠습니까? 젊고 인물이 좋다면 어디 써 먹을 곳이 있을지 모릅니다. 재능이 탁월하다든가 학문이 깊다면 또 누가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돈이 엄청나게 많다면 그 돈을 보고 누가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늙고 자식 없는 아브람’을 찾아 오셨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외모를 보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탁월하고 위대했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에 부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요, 자신의 목적과 은혜에 따른 것이라. 이 은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로되](딤후1:9). 이 원칙은 아브라함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셔서 그를 인류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만드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친구로 높여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해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친구로 삼으신 이 하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찾아 오셔서 자기 배를 섬기고, 우상을 섬기고, 정욕대로 행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던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친구로 삼아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친구가 되셔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시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인이 하는 것을 종이 알지 못함이라. 오히려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3-15).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았듯이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 올 세상의 심판에 대해서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했듯이, 우리 또한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친구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보십시오. [주는 우리의 하나님 곧 전에 이 땅의 거주민들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이 땅을 주의 벗 아브라함의 씨에게 영원히 주신 분이 아니니이까?](대하20:7).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씨야,](사41:8).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니 이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느니라, 말씀하시는 성경 기록이 성취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 일컬음을 받았느니라.](약2:23). 주의 벗 아브라함, 나의 벗 아브라함, 하나님의 친구. 이것이 하나님이 친히 부여하신 아브라함의 지위였습니다. 다시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아 훗날 상속 재산으로 받게 될 곳으로 나가면서 순종하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나갔으며](8).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이 구절은 창세기 12:1의 기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하고 공부해 보면 하나님은 아브람을 두 번 부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증언에 따르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첫 번째 부르심에 잘 순종하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사람들아, 형제들아, 아버지들아, 귀를 기울이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주하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과 친족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들어가라, 하시니 그가 갈대아 사람들의 땅에서 나와 하란에 거하였고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그분께서 그를 거기서 지금 너희가 거하고 있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7:2-4). 본래 아브람이 살던 곳은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신 것은 3가지였습니다. 첫째, 너는 네 고향을 떠나라. - 아브라함은 말씀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둘째, 너는 네 친족을 떠나라. - 아브라함은 친족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와 조카 롯과 함께 동행함으로써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셋째,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들어가라. -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해서 나갔으나 도중에 하란에 머물러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신 땅으로 가는 대신 ‘하란’에 정착해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이 역시 불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대로 온전히 순종한 것은 고향을 떠난 것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1/3의 순종이었으며, 그의 믿음은 아주 연약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점을 볼 때 육신의 나이와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머물고자 할 때 꼼짝없이 하란에서 머물러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란에서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그냥 두셨고, 죽은 후에야 비로소 다시 말씀을 주시고 가나안 땅으로 옮기셨습니다(창12:1-3, 수24:3). 하란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205세를 일기로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움직이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버지 데라는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이르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이자 나홀의 아버지인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수24:2). 하나님은 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얽매이기 쉬운 죄와 무거운 짐을 벗고 달려야 합니다(히12:2). 때로 육신의 애정은 믿음의 길에 큰 걸림돌이 됩니다. 육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할 때 거기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성도들에게 흔하디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셔서 우상들과 다른 신들을 섬기는 온 세상에서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유일하신 참 하나님’ 한 분을 믿고 사는 독특한 민족을 만드시고자 계획하셨고, 이들을 특별한 백성, 제사장 민족으로 삼으셔서 온 세상에 하나님을 알리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우상 숭배자인 아버지와 혈육의 정에 이끌렸고, 거기에 매였습니다. 살던 땅을 떠나기는 했지만 친족을 떠나지는 못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함으로 슬픔과 비극을 당할 뿐 아니라 많은 시간을 지체합니다. 온전하지 못한 순종은 순례의 길에 큰 장애물이 됩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불완전한 순종을 할 때 그 불완전을 제거하고 온전함에 나아가는데는 많은 시간과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누가복음 9:59-60을 보십시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거늘 그가 이르되, 주여, 먼저 내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허락 하옵소서,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라, 하시니라.](눅9:59-60). 주님이 누군가를 복음 선포자로,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은 부르심입니다. 모든 사도들은 이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바울과 같은 경우에는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나를 구별하시고 자신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내 안에 계시하사 내가 그분을 이교도들 가운데 선포하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즉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였고](갈1:15-16)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부르심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요, 믿음의 순종입니다. 주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특권이요,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주의 부르심에 순종하기 전에 ‘먼저 내가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장사 지내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도 주님의 부르심보다 먼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두 번째 부르심의 기회가 있었지만 없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할 때 주님은 그럼 “네 할 일이나 해라”고 해 버리시면 그는 다시는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전에 주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들을 기억하고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12:1-3을 보십시오. [그런데 전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에서 나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하리니 네가 복이 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더라.](창12:1-3). 이 말씀들은 아브라함이 이전에 들은 말씀입니다. 그는 하란에서 멈춘 순례의 길을 계속 가고자 결단하고 움직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번에도 말씀에 문자적으로 그대로 순종할 줄 아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의 상황에 맞추어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에서 나와]라고 말씀하셨는데 조카 롯과 하란에서 얻은 물질과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믿고 순종하도록 훈련하는데 긴 시간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믿고 순종하지 못한 대가는 훗날 아브람이 톡톡히 치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네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첫째, 땅입니다. 둘째, 큰 민족입니다. 셋째, 큰 이름입니다. 넷째, 네가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가라든지 바빌론으로 가라든지 땅 이름을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지속적인 교제 가운데 꾸준히 인도함을 받아야 함을 말해 줍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이 말씀은 아브람에게 가장 매력적인 약속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브람은 75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는 말은 자식을 준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약속은 그대로 성취되어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의 거의 모든 민족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네 이름을 크게 하리니]란 주님의 약속도 문자 그대로 성취되어 이 땅에서 아브라함이란 이름은 지상의 어떤 이름보다 존귀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이름을 따라 자식의 이름을 짓습니다. Abraham Lincoln, Abraham Booth...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통해 메시야 왕국의 땅을 확정하고, 유다 민족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구약 성경을 보존하고, 메시야를 보내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이 땅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같이 뭔가를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을 부르셨습니다. 부르심(calling)과 택하심(chosen)을 혼동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부르시고 구원으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면 예수 그리스도 또한 그 사람을 선택하며 구원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1). 반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부르심을 받았고 택하심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열심을 내어 너희를 부르신 것과 택하신 것을 확고히 하라.](벧후1:10). 성경은 여러분이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는가를 분명히 이해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지각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을 통하여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 하나님은 왜 나를 부르셨는가? 무엇 때문에 나를 부르셨는가? 꼭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오, 그분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선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부르심의 상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빌3:14). 둘째, 거룩함에 이르게 하도록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정함에 이르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요, 거룩함에 이르도록 부르셨음이니](살전4:7). 셋째,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부르셨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 이것을 위하여 너 역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하였도다.](딤전6:12). 넷째, 주를 따르도록 하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너희가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벧전2:21). 다섯째, 복을 상속받도록 부르셨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설을 욕설로 갚지 말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축복하라. 이런 일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줄 아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복을 상속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여섯째,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도록 하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왕국과 영광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살전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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