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설렘에 사람은 얼마나 순수해지는가

제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 출애굽기 20:15 •

십계명은 8계명을 기점으로 인간 생명의 필수적인 면을 다루는 데
서, 조금 덜 중요해 보이는 문제들, 인간의 상호관계에 영향을 주는 면
들로 이어지고 있다. 덜 중요하다는 말은, 사람이 경시할 수 있다는 말
이 아니라 ‘사람의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다’(마6:25)고 하신 예수님
의 말씀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모세의 율법 세계에서 7계명 까지
를 범하는 자는 죽음에 처해졌다. 그러나, 8계명부터는 사형은 아니다.
이 말은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바른 관계와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이 최고의 주요 문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반역적인 인간의 죄는 하나님께서 중요시하시는 순서를 뒤바꿔 버
리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현대의 법률들은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
보다, 물질 등 소유물에 관한 것에 훨씬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만일
한 사람이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등을 외친다
면 외면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무주택자가 어떻고, 세금이 어떻고, 개
인의 자유가 어떻고 등을 떠들어댄다면 들어보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100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인간의 모든 죄는 하나님이 중요시하는 것을 무시하는 데서부터 싹이
돋는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7계명까지를 무척 중요시하시고, 8계
명부터를 주신 뜻을 마음에 새길 때, 8계명의 바른 이해가 가능할 것이
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간도 귀하고, 그 인간 상호간의
관계도 역시 중요한 문제다.

‘도둑질하지 말라’
이 계명은 도적질을 그저 눈살 찌푸리는 정도로 지나치며, 다양한

수단과 방법의 도적질이 교묘히 행해지고 있는 현대에 특히 주의하여
들어야 할 계명이다. 탁월한 상술, 장삿속, 제국주의 등의 용어로서 실
제적인 ‘도적질’을 위장하고 미화시키고 있는 세대임을 알아야 한다. 실
지로, 수완이 좋은 ‘큰 도적’은 사회적으로 끄떡없이 서있고, 부족한(!)
좀도둑만 상습 절도범 등의 낙인이 찍히고 있다. 뒤틀리고 거꾸로 가는
본성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의 중요성에 무게를 달리하며, 계명
을 범하면서도 그 심각성을 모르는 일이 허다하다. 현세대는 남의 소유
를 불법적으로 가로채는 일이 생명을 빼앗는 일보다 훨씬 흔하게 일어
나고 있다. 사람이 제정한 법률도 생명보다 소유물에 관한 것이 더 발
달 되어있다. 대중사회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홀히 하는 데에는 관대하
고 아예 문제시도 하지 않는다. 어떤 미신과 우상을 섬겨도 말하지 않
는다. 그런데 자기 소유물에 손을 대거나 일방적인 행위로 접근하는 것
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제 8계명 101

1. 제 8계명의 뜻

우선 8계명은 사람의 소유권을 인정함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
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순응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 상호간에는 어느 누구도 개인의
소유를 제한 또는 간섭할 수 없다. 사람은 창조 때부터 소유하며 관리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제 8계명은 개인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사람이
사물을 소유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 곧 선물로 받거나, 노동의 대가로
받든지, 아니면 도적질을 하는 것이 있다. 8계명은 앞의 두 가지는 허용
하지만, 세 번째 도적질로 소유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이유는, 처음
두 가지는 인간의 기본적 관계의 법칙인 사랑과 노동에 근거하기 때문
이다. 이는 인간 상호 간의 신뢰와 사랑을 북돋우며, 피차 소유의 능력
과 노동의 참 의미를 알게 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상으로 가까
이 가게 한다. 그러나 도적질은 이 두 가지 법칙을 모두 어긴다. 도둑은
자기가 훔친 물건의 주인을 사랑할 리가 없고, 도둑맞은 사람은 도둑을
사랑할 수가 없을 것이다. 도적은 노동 없이 소득을 얻으려 함으로 신성
한 노동의 법을 어긴다. 이와 같이 8계명은 소유권, 사랑과 노동의 특
권을 인정하는 반면, 이 법을 어기는 다른 행위, 도적질을 금하고 있다.

인간 개인, 사회와 국가의 모든 문제를 바로 풀어가려면, 먼저 하
나님과의 관계 정립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 생애를 여호와 하나님
께 맞추어 살기를 소원했던 다윗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

102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4:7)고 고백했
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보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라
는 사실이 더 만족스럽고 기뻤다(시23:1).

하박국 선지자의 인생 고백도 감동적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
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
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인생은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 것보다
귀하다. 사실 사람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경외하는 삶을 소원한
다면,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보다 세상이 먼저 보이고, 사람이 더 커 보이
는 죄 성을 지니고 있기에, 이 여덟 번째 계명을 따로 주셔야 했다. 이
런 관점에서, 가나안 정복 전쟁 초기 아간의 범죄(수7:20-26)를 돌로
쳐 죽임으로 해결하는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목적
을 공유하지 못할 정도로 영이 죽어버린 아간이 행한 일은 결국 도적질
이었다. 열 명의 경찰이 도둑 한 명 잡지 못한다(!)고 한다. 그만큼 정상
이지 못한 사람의 머리가 빨리 회전하기에, 그 종적을 추적하기가 어렵
다는 말이다.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된 인간의 마음은 비
상한 아이디어를 개발한다. 도적질하지 말지니라는 계명도 잽싸게 피
해 간다. 저소득층의 약점을 휘어잡고 임금 착취를 해도 말할 수가 없
다. 말하면 그나마 일자리도 지키게 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교묘
한 수법으로 탈세를 하면서 힘있는 자 몇이 그럴듯한 방어막을 친다.

제 8계명 103

2. 신약 성경의 가르침

신약의 가르침은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
라’(엡4:28)는 한 말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말씀은 대조적인 모
습을 제안함으로서 도적질을 강하게 금하고 있다. 도적질의 정반대의
일, 곧 구제하는 자가 되기 위해 제 손으로 수고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다. 제 손으로 수고하지 아니하고 얻은 모든 것이 도적질에 해당함을
암시하고 있다. 소유물은 노동으로 얻어져야 하며, 얻은 소유물은 자신
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보다 더 약한 자도 위함임을 알아야 한다
고 가르친다. 신약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을 ‘거룩한 나라’로 지칭하는
데(벧전2:9), 이 거룩한 나라에서는 자신만을 위해 소유물을(비록 자
기 손으로 수고하여 얻은 것이라 해도) 쌓아두고 사용할 때 이것 역시
‘도적질’에 버금가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
로 곤경에 처했을 때,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물질적 도움을 베푼 일(고
후8-9장), 사도 바울의 험한 전도 여정에 끝까지 물심양면으로 함께한
빌립보 교회가 소개되어 있다(빌4:14-16). 앞에서 밝힌 제 8계명이 종
합적으로 이해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반영되기를 원한다. 양극
적인 면을 주의하자. 도적질은 남의 소유를 불법적으로 훔쳐 자신의 것
으로 삼는 행위다. 그러나 구제는 나의 소유를 풀어 힘없고 굶주리는
사람을 무상으로 돕는 행위다. 한쪽은 훔치고 그릇된 방법으로 소유하
고, 다른 한쪽은 일하고 주는 참된 방법이다. 도적질을 정의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선물로 받은 것, 일해서 얻은 소유 외에는 모두가 도적질로
모은 것이다. 이 기준을 사회적으로, 상업적으로 또는 오늘날 우리의

104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국민으로서의 삶에 비추어 본다면, 언뜻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많은
점들이 비도덕적인 것으로 부끄럽게 드러난다.

신약은 도적질의 개념을 좀 더 발전시켜 교훈한다. 약한 자들과 가
난한 자들과 더불어 거하면서, 아무리 자신이 일해서 얻은 소유라 할지
라도 소유물의 여분을 약한 자들과 나누지 않는 것도 도적질의 한 부
류로 밝힌다. 신체적 장애나 기술이 없어 일을 할 수 없지만, 도적질해
서라도 먹으려 하지 않고, 굶고 헐벗고 추운 데서 잠을 자야하는 이웃
이 있으면,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어 최소한의 삶은 영위하도록 해야 한
다. 이 정신이 초대교회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행4:32-35). 교회의
이런 한몸된 행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공동체의 하나 됨을
해치는 행위는 비록 도적질해서 모은 재물이 아니라 할지라도, 진정한
도적질임을 성경은 가르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은 물질
에 대한 욕심과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좋은 말 듣기를 열망한 죄로 인
함이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중심자리에 모시지 않은 것이 이중삼중
의 죄를 범하게 했다(행5:1-11).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 개념에서 볼 때, 도적질로 물질을
모으지 않고 힘써 일해서 모은 물질이라 할지라도, 단순히 자신만을 위
한 목적일 때 ‘도적질’에 해당한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에 의
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자기희생은, 세상의 모든 사람의 필
요를 채우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생애가 우리의 궁극적 모델이
다. 하늘나라의 모든 영화로움을 이 땅의 비천한 죄인들을 위해 모두
동원하시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나아

제 8계명 105

가는 자는, 신약의 가르침을 심령 깊숙이 영접할 수 있을 것이다. 마땅
히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십일조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말3:8).

3. 현대에의 적용

넓은 의미에서 8계명은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어떤 형태
의 집단이나 정부, 공산주의를 금하고 있다. 정직하게 얻은 모든 것은
개인의 소유임을 밝힌다. 성경은 자기가 가졌다 해서 무조건 소유라 하
지 않는다. 자신의 땀으로 얻은 소득이 아닌 것은 도적질의 소산이다.
남의 책을 빌린 후 되돌려주지 않고, 남의 책이나 글에서 얼마의 내용
을 절취하는 것은 보통이 되어버렸지만, 구멍가게에서 훔치다가 들킨
힘없는 자들은 법정에 서야 하는 것이 현대의 실상이다. 소위 문명사회
라 하는 곳에서도 적당량의 도적 행위는 오히려 애교와 같이 되어버렸
고,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죄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도적질의 죄는 속임수를 통한 획득에 심각하게 나타난다. 사람의
가치가 그의 소유물로 측정되는 현대에는, 광적인 소유욕이 정직과 성
실의 원칙을 짓밟아 버린다. 눈가림과 부정직, 거짓말 등이 오히려 환
영을 받는 상도덕의 타락한 모습이 보인다. 소매가게에서 적당히 손
님을 속여 넘기는 재주가 없고, 솔직하게 대하는 바람에 매상이 오르
지 않는다 해서 해고된 경우도 있다. 오늘날과 같은 상업적 냄새가 짙
은 사회에서는, ‘도적질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이 관심이 아니요, 오히려
‘발각되지 말지니라’는 말로 바꾸어 자신의 언행의 기초를 삼을 것이다.

106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저울로 속이고 계산으로 속이고, 광고로 속이는 모든 것이 8계명을 어
기는 것이다. 사람 앞에 적당히 속이며 발각되지만 않으려 하고, 하나
님의 계명은 안중에도 없는 회사나 직장을, 무조건 물질욕에 의해서만
택하는 사람도 똑같이 8계명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도박 역시 도적질과 같은 죄에 해당한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소유권의 고유한 법칙, 사랑과 노동에 의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고, 부당하게도 많은 양을 차지하고 싶어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오
늘날처럼 정직하게 일하며, 이마에 흐르는 땀의 대가를 얻어 살려하기
보다, 어떻게든 심지어는 상대방을 속이고 해쳐서라도 쉽게 빨리 많이
소유를 불리려 하는 세대도 없다.

8계명은 동족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형태에서도 지켜지지 않고 있
다. 저임금과 시간 초과, 형편없는 노동 조건과 근로자를 위한 복지 시
설 및 위생 시설도 없이, 그저 주인의 소유만 빨리 늘리기 위해 광분하
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바로 노동자의 시간과 건강과 금전을 도적질
하는 것이다. 약자의 기본적 인권을 유린하여 얻은 물질로 자신의 육신
을 자랑하고 즐기는 일이 많이 드러나고 있다.

노동자가 주인의 시간과 물질을 도적질하는 경우도 있다. 일은 적
당히, 눈가림으로 하면서 임금은 제대로 요구하는 것이다. 야고보의 지
적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
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약5:4-5).

제 8계명 107

8계명은 개인의 차원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한 국가에도
적용이 되어야 한다. 많은 나라들이 헌법이라는 울타리로 하나님의 계
명을 약화시키고, 왜곡시키고 있다. 강자가 약자를 계속 착취하며 지
배 계급으로 군림하도록 조장하는 제국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등
은 용납될 수 없다. 약소국이 강대국의 놀잇감이나 식민지가 되는 일
도 있을 수 없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소서’(마6:9-10) 하고 기
도하는 자는, 이 땅에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소유권과 바른 소유가 보
장되고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교회의 교제는 사랑에 근거하
며 피차 섬기는 일에 근거한다.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도적질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을 영원히 이행해 나갈
것이다(엡4:28).

4. 제 8계명에 대한 구약 백성들의 불순종 / 순종 예

1) 불순종의 예
가. 야곱이 고향으로 향할 때 라헬이 아비 집의 수호신 드라빔을 훔
침(창31:15-19).
나. 여리고 성 정복시 아간이 시날산 외투, 은, 금을 도적질해 숨김
(수7:1, 20-21).
다. 말라기 선지자 시절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은 일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과 같음을 지적함(말3:8-9).

2) 순종의 예
가. 사르밧 과부의 엘리야 선지자 섬김(왕상17:10-16).
나. 수넴 부부의 엘리사 선지자 섬김(왕하4:8-11).

108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다. 성전 건축 준비를 위해 온 백성이 즐거이 드리는 역사를 이룸
(대상29:9).

라. 모든 것이 열악한 중에도 오직 여호와 한분으로 만족하는 삶(합
3:17-19).

5. 제 8계명에 대한 신약 백성들의 불순종 / 순종 예

1) 불순종의 예
가. 세리들이 정한 세금 외에 힘없는 백성들을 늑탈하는 행위(눅
3:13).
나. 군병들이 정해진 봉급 이외에 강포로 물질을 취함(눅3;14)
다.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쳐 나오며 물질을 취함
(몬18).

2) 순종의 예
가. 세리장 삭개오의 재물 관리(눅19:1-8).
나. 초대교회 성도들의 물질생활(행2:44-45, 4:32-35).
다. 구브로 출신 바나바가 밭을 팔아 사도들의 사역을 도움(행4:36-
37).
라. 두아디라 성 자주장사 루디아의 바울 일행 수종(행16:14-15).

제 8계명 109

110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제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 출애굽기 20:16 •

아홉 번째 계명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인격과 명성을
보호하는 것이고, 둘째는 거짓 증거를 통해 마치 명예로운 자처럼 여겨
지는 일을 방지하는 것이다.

명성 곧 좋은 평판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하는 백성이 가지고 싶
어하는, 매우 가치 있는 것이다. 이런 명성과 평판을 누리는 사람이 가
진 오직 한 가지 부끄러움은 죄 문제이다. 하나님 앞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3:10)는 기준에서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일상생활 중 온전치만
은 못한 것도 부끄럽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하지 않는 사람
에게는 소유물이 적은 것도 부끄러이 여겨지고 학력이 좀 부족한 것도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가난하고, 무
엇이든 잘 해내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함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괴롭히고 무겁게 하는 요인들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작고 무명인 것은

112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 중 일부로서, 세상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
는 영광스러움을 향한 도전일 수 있고, 가난은 하나님을 향해 부유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합3:17-19). 이 모든 상태에 죄 문제가 걸리
는 요소이지만 악에 물들지 않은 명성과 평판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땅에 사는 인간으로서 더 이상의 영예로움은 없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는 인격에 의존하는데, 인격은 명성과 평판에 의해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격은 한 사람의 됨됨이를 빚는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반
사시킨다. 명성 또는 평판은 한 사람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견해가 빚
어낸다. 사람은 옆 사람들의 평판과 하는 말에만 의존하면 안 된다. 자
칫 세속의 옅은 가치관과 일시적인 풍향에 좌우되기 쉬운 함정이 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 특히 사두개인들이 취한 처세술(!)을 생각
나게 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의 이런 명성과 평판의 시험을 통과
하면서 연단된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해서든, 사람을 향해서든 거짓 증거하지 않는
자는 ‘완전한 자’로 인정받으며 살 수 있는가? 마음 아프게도 세상은
그런 자들을 외면하고 조롱함으로, 죄에 지배된 마음을 따라 대했음
을 보여준다. 바알 숭배에 깊히 물든 아합왕 시대, 나봇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포도원을 마치 하나님이 물려주신 것과 같은 마음으로 경작
하고 있었다. 이 때 왕비 이세벨의 간사한 혀 놀림으로 거짓 증인들이
세워지고, 나봇은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다.
포도원은 아합이 차지했다(왕상21장). 포로 후기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도하던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도 거짓 증언들이 얼마나 이스라엘
의 회복역사를 훼방했는가!(스4:11-16, 느6:5-7)

제 9계명 113

예수님의 생애 역시 거짓이 진리를 압도해버린 단적인 예가 된다.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을 정면으로 어긴 자들에 의해 예수님은 죽
으셨다. 이것은 물론 이 계명을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지켜야할 인간들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니
까 말이다

1. 제 9계명의 뜻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인간본성은 예수님의 하시는 모
든 일을 제대로 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예수님이 갈릴리 지
방에서 각색 병자들을 고치실 때, 많은 백성들은 그 능력이 하나님께
로 온 것을 믿고 열광했다. 그러나 당대 소위 엘리트 그룹이라 자처하
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다(마
9:34)고 선전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 하시는 예수님을 제거
하려 끈질기도록 거짓 증인들을 내세웠다(마26:59-61). 그런 사람들
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소욕, 야망을 마음 중심에 뿌리 내렸기에 보는
것을 보는대로 이해하거나,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 거짓 증
인들은 자기들끼리도 일치되지 않아 허우적거렸다. 이유는 각기 바라
는 바가 자기 위주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최종적으로 이용한 사
람은,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며 처세하던 빌라도의 현실적
선택을 빌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마27:23-26).

사도 바울의 생애 역시 거짓 증거가 꼬리를 물고 따라다녔다. 데
살로니가 전도시에도 ‘괴이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114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했다. 그리고 바울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며,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고 전파했다고 증언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쉽게 혼란을 야기 시킬 수 있는 거짓 증언이었
다(행17:5-8). 거짓 증거의 특징은 멀리 보는 것이 약하다는 것이다. 언
제든지 탄로날 수 있는 사실인데도 우선 필요한대로 말해 버리는 것이
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원성에 마음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면, 너무 쉽
게 거짓증거를 따라가 버린다. 세상은 사실 거짓증거가 더 우세한 고지
를 점령하고 횡행해 보이는 면이 많다. 엘리야 선지자도 ‘모두 바알에
게 무릎을 꿇고 나만 혼자’라는 절박한 외로움을 토해내야만 했다(왕
하19:10). 하박국 선지자의 답답한 마음은(합1:2-3) 오늘 우리도 동감
하는 면이 많다. 수많은 시편 기자들도 부르짖는 내용이었다.

거짓 증거의 최대 피해자는 예수님이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
은 없다. 예수님은 마치 건축자들이 쓸모없다하여 버린 돌(시118:22-
23, 눅20:17, 행4:11, 벧전2:7)과 같이 여겨지고, 싫어 버린바 된 처지
였고, 멸시를 받아야 했다(사53:3).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지상생애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따라 승리로 연결되었음을 놓쳐서는 안 된
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하나님의 집 모퉁이 돌로 쓰임 받은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지상 사역 중에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렇게 격
려하셨다. 세상에 종말이 오기 전에,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한다는 이
유로,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과 관원들 앞에
끌어 갈 것이라 한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오히려 이런 일이 예수 그
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미리 염려하거나
어떻게 변명할까를 염려하지 말고, 자기 백성의 모든 여건에 함께 하

제 9계명 115

셔서 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당당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
럴 때 주님은 자기 사람들로 대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지혜로운
말과 능력을 더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대적에게 넘겨주어 죽임을 당하
게 할 것이요,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
게 된다 하셨다. 그렇지만 세상의 이런 적대 행위는 성도의 머리털 하
나도 상하게 하지 못할 것이라 안심시킨다(눅21:12-19). 세상의 거짓
증거는 하나님 백성의 명성과 평판을 파괴하지 못한다. 오히려 용광로
속에서 제련되어 나오는 정금과도 같이, 더 영롱하게 하나님의 진리 되
심과 그 영원하심을 반사하게 한다(욥23:10, 단3:8-30).

거짓 증거의 기원은, 창조 직후 아담과 하와 부부를 넘어뜨린 뱀을
이용한 사단에게 있다(창3장). 하와에게 접근한 사단(뱀)이 마치 하나
님의 말씀인 것처럼 가장하여 증거했을 때, 하와 부부는 너무 쉽게 무
너졌다. 사람의 본성 밑바닥에는 항상 ‘쉽게, 많이, 내가 드러나는’것을
갈망하는 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줄을 사단은 꿰뚫어 보고 있다. 그래
서 사람은 땅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는 동안 늘 참되지 못한 수준
에서 헤매기를 잘한다. 그러나 이런 사단의 거짓 증거에의 유혹에는 한
계가 있다. 사단이 제아무리 하나님과 그 백성을 무너뜨리려 안간힘을
쓴다지만, 그것은 한갓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정도에 머문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 사단의 머리를 부수어버리신다(창3:15). 하나님의 최
후, 마지막 승리를 예언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 백성은 이 땅
에 오셔서 사단세력의 온갖 거짓과 훼방에도 굴복하지 않으시고, 영원
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동행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그 길

116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을 가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님을 섬기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를 존
귀히 여기신다(요12:26).

거짓 증거를 생각할 때, 그로인한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효과도 꼭
주의해야 한다. 우선 눈에 보이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앞서 보이려 하
는 말, 조금이라도 쉽게 많은 소유를 얻기 위해 하는 말, 사람들이 좋
아할 것 같아 하는 말.... 이런 말들은 흔히 참되지 못한 말이요, 오래
동안 새겨들을 말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스라엘이 남북 왕조로
분열 상태에 있을 때, 놀랍게도 많은 선지자 호칭을 가진 자들 까지도
거짓을 증거 했다(왕상22:5-9 여호사밧과 아합왕 시대). 이럴 때 마음
이 하나님으로부터 먼 사람은 거짓 증언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더
마음에 둔 자는 비록 소수의 말일지라도 신중하게 듣는다. 아합은 400
인의 ‘선지자’들이 하는, 듣기 기분 좋은 말을 듣고, 여호사밧은 오직
한 사람 미가야의 말에 마음을 두었다. 결과는 한 사람 미가야의 말이
참으로 드러났다.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야고보는 로마의 식민지 시대에 살
면서 예수님을 형으로 두었으면서도 믿지 않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부터 예수님을 구약에서 예언하고 약속한 메시야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야고보는 인간의 모습을 실제적으로 직시하며,
그 위에 하나님의 교훈으로 권면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야고보는
언어생활에 대해 말한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
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
라’(약1:26) 마음과 말은 함께 해야하고 그것은 경건에 기초해야 한다

제 9계명 117

는 주장이다. 계속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 고 선언한다. 사람의 말은 거룩
하신 하나님 존전에서 정결해야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사람 중 연약한 자들에게, 현실적 긍휼을 베풀 수 있어야 함을 힘주어
말한다. 이런 사람의 입에서 거짓 증거가 나올 리가 없다. 그래서 야고
보는 또 말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
에서 나느니라’(약3:6) 샘 하나에서 쓴물과 단물이 같이 솟을 수 없듯
이, 우리 사람도 하나님 편에 서든지, 아니든지 둘 중 하나에 서게 된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으면 그 혀는 하나님을 말하고, 그
말은 거짓 증거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
으면 빛이신 하나님을 싫어하게 되기에 결국 그 혀는 거짓을 증거 한다.
이 거짓 증거는 실제로 지옥에서 유래한 것이고 지옥으로 향하게 한다.

2. 제 9계명이 의도하는 것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명령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에 관하여 요구하는 계명이다. 마치
제 3계명이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고 하심으로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지하고 신실해야 함을 조건
으로 하신 것과 같이 제 9계명도 사람과 그 이웃의 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와 같은 원칙과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분명히 하신다. 하나님
은 하나님이 아시는 사람을 기준해서 사람을 대하신다. 무슨 뜻인가!

118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투명하심을 닮았고, 또 그런 사람되어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은 여망이 있음을 아시고, 그렇게 기대하고 대하신다는 말이다. 하나
님이 사람을 대하실 때 보여주시는 중요한 원칙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주변 사람들의 눈에 비쳐지기를 원하는 것을 축으로 삼지 않으신
다는 것이고, 또 그 주변 사람들의 그에 대한 여론과 보는 관점에도 의
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생애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목자삼아 살기를 소원
했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
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
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
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1-4). 하나님의 사람을 대하시
는 면에서 드러나는 온전한 지식, 앎을 고백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
람이 사람을 대할 때에도 상호 이런 믿음과 신뢰 가운데 행할 것을 요
구하신다. 사람도 나의 속을 보고 있고 알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정
직한 관계를 이룰 것을 원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은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런 제한도 사람의 정직한 마
음을 뿌리로 하는 한 참된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사람이
진실되게 말하는 것이고 이웃을 성심으로 대하는 것이다. 사람의 상호
동거는 각자의 진실된 성품과 행함과 기능에 의존한다. 장님 세 사람
이 코끼리에 대해 말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장님 중 한 사람은 코

제 9계명 119

끼리의 배를 만지고, ‘코끼리는 벽과 같은 동물이다’고 했다. 둘째 장님
은 다리를 만지고, ‘코끼리는 기둥과 같은 동물이다’고 결론했다. 세 번
째 장님은 코를 만지고, ‘코끼리는 구렁이와 같은 동물이다’고 자신있
게 말했다. 이 세 장님은 모두 틀렸지만, 장님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모
두 옳은 결론을, 정직하게(!) 내렸다 보아야 한다. 그들은 제한 속에서,
그들이 경험한 바를 정직하게 소신껏 말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증거하는 대로, 옳고 그름
을 따라 결론을 내려가는대로 엮여져 간다. 누구든 자신과 너무 다른
시선과 말들에 대해 크게 좌우될 필요는 없다. 사실이 아닌 것은 개념
치 말고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갈 길을 가면 된다. 그러할 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도록 지음받은 사람들이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바로 정립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온전하지 못하지만, 그래서 이웃 형제에 대한
이해를 그릇되이 가져 잘못된 증거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런 중에도 하
나님의 온전하심을 향한 믿음과 기대를 놓치지 않고 한 길을 갈 때, 점
차 온전한 관계로 빚어져 거짓 증거의 상처로부터 놓여나게 된다. 여기
서 피차의 부족함을 겸허히 시인하고 서로를 영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욥기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각기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한 나름
대로의 독특한 확신을 가진 자들이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
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 그리고 부스 사람 엘리후는, 사람이 하나님
께 대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며, 무엇이 죄인가에 대한 양보할 수 없는
주장을 폈다. 욥 역시 이들에게 지지 않았다. 이들 모두 자신들의 소신
을 붙들고 나아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들은 모두 결함이
있었다. 하나님이 이들의 부족함을 지적하셨을 때, 그들은 조용히 영접

120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했다. 이들은 무슨 교훈을 주는가! 사람은 사람의 견해와 말보다, 하나
님의 정답을 기대하며 최선을 다해 ‘하나님 앞에 서기’(CORAM DEO)
를 힘쓰는 것이다.

3. 제 9계명은 어떻게 범해지는가?

무엇보다 먼저 ‘정의를 실현한다’를 표방하는 법정에서 발생한다.
법원은 세상의 정의를 지키고 바로 잡는 일을 하는 곳으로 알고 있다.
세상 사람들의 불확실하고 제한된 모든 것을 명쾌히 밝혀주고, 쓰러지
고 묻혀가는 정의를 바로 세워주기를 사람들은 기대한다. 그리고 이 법
정에서 선고되는 것에 매이곤 한다. 그러기에 법정에서는 거짓 증거가
설 자리를 얻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일이 발생한다.
소위 위증이라는 것이 슬며시 파고들어 정의로운 방향이 설수 없게 해
버린다. 위증이 위증임이 드러나 처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오히려
위증이 이기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정치 세계에서 알게 모르게 일어나
는 현상이다. 그럼으로써 제대로 인생길을 달려보고 싶은 자가 깊은 상
처를 받고,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망가져버린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
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이 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코앞의 실리
만 좇는 사람들이 그때 그때 서는 줄서기에 따라 진위가 바뀌어 버린
다. 권력과 돈의 힘은 누구도 이길 수 없다는 자조적인 말을 흔히 듣는
다. 공개적으로 위증이 발 디딜 수 있도록 법정이 보증을 서주는 인상
을 받을 때가 있다. 정치인들이 자신이 속한 정당의 현실적 필요를 위
해 말을 바꾸면서도 자기들은 가장 옳은 말만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
다. 우선 표를 얻어야 당선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피상적인 흐름을 따

제 9계명 121

르려 분주하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몹시 실망하
지만, 그럴수록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정의로우심을 사모하게 될 것이
다.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간은, 곧 새벽이 오고 있음을 말해 준다 하
지 않는가! 세상의 어설픈 모습은 오히려 사람을 하나님의 온전하심으
로 이끌어 간다(마24:4-6).

노골적이고 뻔뻔스러운 죄는 중상모략이요 악의에 찬 거짓을 유
포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차마 행해서는 안 될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이런 상처를 입히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마치 허리케인이 휘몰아치듯 치고 다닌다. 오직 자신의 목적
을 위하는 마음이다. 홍수심판(창6-8장)의 뜨거운 맛을 보고도 인간은
그것이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고, 자신의 정욕대로 소욕대로 행한 결과
였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동방으로 이동하다가 시날 평지에 이르
렀을 때, 또 하나의 커다란 욕망을 드러낸다. 그것은 대(탑)를 높이 쌓
아올려 사방팔방에서 다 보일 수 있게 하여, 하나님대신 자기들을 중심
으로 사람들을 모으고자 하는 시도였다. ‘우리 이름을 내는’것이 목적
이었다(창11:4). 사람들에게는 올라가고자 하는, 그것도 남들 보다 더
높이 오르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 하나님보다 더, 적어도 하나님만큼은
높아지고자 한다(창3:5). 현재까지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은 두바
이에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건축물 높이 보다 더 위험하고 자칫 병
적인 높아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의 눈에 가장 높은 사람이 되
고자 하는 욕망이다. 인류 역사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 높아지고자
하는 경쟁의 연속이다. 오르기 위해서는 계단을 밟아야 하듯, 사람 위
에 높아지기 위해서는 사람(!)을 밟고 올라야 한다. 밟힌 사람의 마음

122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이나 입장은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그 입장이 생각된다면 그렇게 오르
려 시도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하나님을 축으로 하지 않은 인간의 모든
삶은 이렇게든 저렇게든 거짓을 증거하게 된다.

이런 수법의 거짓 증거도 은근히 많다. 이런 이야기다. 한 사람에
대한 평판은 참 좋았다. 장기간의 그의 삶과 말과 행함이 모든 사람의
인정과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을 보면서 은근히 시기하
고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 사람만 인정하고 높
이는 것이 싫고, 그 자리에 자신이 자리 잡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말들이 오고가는 중에 한마디 했다.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해 전혀 다른
각도의 소문이 떠돌던데…’ 하면서 자리를 떴다. 그 이후로 그 평판 좋
던 사람에 대한 의심의 먹구름이 덮히기 시작했다. 사람 속에는 믿기보
다 안 믿고 의심하고, 그 의심하는 바를 꾸미고 부풀리는 근성이 있다.

거짓 증거는 점잖은 모양, 침묵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한 사람에
대한 사실이 아닌 말이 부정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정말 존
경할 만한 사람일수록, 그에 대한 부정적인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
며 부풀리고 뒤틀려 나간다. 이 때, 누군가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
지 않는다. 어찌보면 그 존경할 만한 사람을 보호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그의 침묵, 조용함은 더 큰 파괴력을 행사한다. 그는 나
중에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어떤 해로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이런 자세는 거짓 증거를 하지 않으려는 사람의 처신이 아니
다. 참을 참이라 말하지 않으면 어린 아이들이 떠들 것이고, 돌들이 외
치리라 했다(마21:15-16).

제 9계명 123

그릇된 동기를 심어 거짓 증거로 확대시키는 방법이 있다. 예수님
의 능력의 사역, 약한 자와 병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이른 아침부터 밤
늦도록 일하시는 예수님을 두고, 유대의 왕이 되고 싶어 저토록 열심이
라 떠들어대는 자들이 많았다. 심지어 로마의 가이사(황제)가 되는 것
이 목적이라고 소동을 부렸다. 이런 왜곡되고 악의에 찬 증거로 인해
예수님의 생애는 고난에 고난으로 점철되어야 했다.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영접한 사람은 정말 온 마음으로 교회
를 섬기고 성도를 사랑한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어떤 목적도
없다. 그런데 비뚤어진 마음들은 이를 두고 ‘저 사람 장로되고 싶은 모
양이다, 권사되려 선거 운동하는 것이다’ 등의 악담을 늘어놓는다. 그
러면, 그런 말을 듣는 본인들은 말할 수 없는 배신을 느끼고, 주변 사람
들의 마음도 개운치 못한 혼란의 안개에 덮이기 쉽다.

아첨도 거짓 증거의 한 모습이다. 단순히 사람을 기분 좋게 하려고
사실이 아닌데도 사실처럼 말해 추켜 올리고, 사실은 몇배로 부풀려 말
한다. 앞에서는 왕자처럼 여왕처럼 여기는 것 같이 보이다가, 돌아서서
는 다른 말을 한다. 영혼과 인격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이다. 당사자
도 그 아첨을 믿지 않고 주변 사람들도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도, 겉
으로는 동참하는 체 한다. 이런 공동체는 어둡고, 모두들 점점 거짓에
익숙해지다가 흩어지고 만다.

구제, 오늘의 말로 자선사업은 하나님께서도 중요시하는 일이다.
불가항력적으로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나 과부나 고아들,
또 나그네를 돌아보는 일은 사람으로서 외면해서는 안될 일이다. 하나

124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님이 주신 자연환경과 생명과 건강이 있는 동안, 서로 돌아보며 함께
의식주를 해결해 나가는 것은 당연하고 또 보기에도 좋은 일이다. 그런
데, 이 구제, 자선사업도 부풀려 선전하고, 그 자선사업이라는 것을 미
끼로 더 많은 이윤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의 구제 원칙, 곧 나
팔을 불지 말 것과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분부를
아예 무시해 버린다(마6:2-4). 구제를 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가 하나
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경험하고 누려야 할텐데, 사람이 모든 것을 가
로채 버리는 것이다.

국가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개인 개인도 거짓 증거의 죄악 아래
처해 있다. 국가가 취하는 이념에 따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또 하지 못하는 예는 공개된 비밀이다. 자국의 이해관계를 따라 말하
고 발표를 하는데, 거기에는 어떤 객관적 사실을 입증하기 어렵고 또
허용도 하지 않는다. 국가도 어느 쪽이 실권을 가졌느냐에 따라 여론
이 바뀐다. 무엇이 문제인가! 객관적인 목표나 근거에 의한 정책이 아
니요 단지 자신들의 기회,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한데 마음이 있기 때
문이다. 이런 바람을 타면서 힘없는 백성들은 알면서도 거짓 증거에 동
참해야만 살 수 있다.

4. 오늘에의 적용

거짓 증거는 오늘날 개개인의 삶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다. 일과
후 찻집에서 만나고 여러 모양의 모임의 자리에서 그저 부담 없고 준
비없는 말들을 할 때, 특별한 의도 없이 오고가는 말들이 진실을 오염

제 9계명 125

시켜 버리는 일이 많다. 경건성을 기대하기 어려워 아쉬움이 크다. 디지
털 문명의 혜택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이로 인한 폐해도 많다. 오늘날
은 누구나 뉴스를 만들 수도 있고 공포할 수도 있다. 전화기로, 컴퓨터
로 어떤 내용이든 마치 공적으로 인증받은 내용인 것처럼 표현해 버린
다. 아무라도 ‘그것은 가짜다, 가짜 뉴스다’ 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들
은 진위를 살피기도 전에 자기 취향대로 받고 확대하고 각색해서 전파
해 버린다. 핍박과 고문, 투옥과 같은 방식으로 거짓을 종용하던 시대
는 지나갔다 할 수 있다. 살기 좋은 세상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새로운 방식, 곧 의심, 확실치 않은, 모든 것을, 아무도 믿지 않
는 구름이 짙게 덮여있는 세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진실되이 대하지 못하고 그대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처럼 피곤하고 삭
막한 것도 없다. 한번 거짓을 말한 후에는 옆의 형제를 속였고, 지금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허물을 시인하기 싫어 계속 거
짓을 밀고 나간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자고 생각도 없이 남의 말을
뿜어내는데, 그 말들이 어떤 결과를 낼지는 고려할 마음도 없다. 무심
코, 재미로 던진 돌에 올챙이가 맞아 죽는다고 한다. 얼마 전 20대 처
녀 연예인이 이런 풍조를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 내가 진지하게 생각
하지 않고, 그저 쉽게 떠도는 말의 풍향에만 흘러다니다 보니, 할 말,
하지 못할 말이 구분이 안되는 세상이다. 현대사회는 창조적 1프로가
움직여간다는 말을 누군가가 했는데 부정하기 어려운 지적이라 본다.

9계명은 하나님 앞에 사는 우리 인간을 보호하는 아주 소중한 계
명이다. 하나님의 밝으심처럼 밝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같이 거룩하며,
하나님의 신실하심 처럼 신실하게 살게 하는 계명이다. 언어생활과 여

126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러 가지 행함을 통해 하나님이 생각나도록 살기를 소원케 한다.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
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
다’(시139:3-4). 다윗의 시이다. 영국의 극작가 Shakespeare는 ‘내 지
갑을 훔친 자는 쓰레기를 훔친 것이다. 그러나 내 좋은 이름을 훔친 자
는 그것으로 자기는 어떤 유익도 취하지 못하면서 나를 무척 초라하게
만들고 만다’고 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는 계
명은 제 3계명과 맥을 같이 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해
야 하듯 사람은 사람을 사람으로, 즉 하나님이 그 형상을 따라 지으신
참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랑은 서로를 닮게 한다. 하나
님의 진실 되심을 함께 경외하고 사모하는 자들은 서로를 진실되이 대
한다. 9계명을 지킬 수 있는 비결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한다’에 있다.

5. 제 9계명에 대한 구약 백성의 불순종 / 순종 예

1) 불순종의 예
가. 하나님의 길을 훼방하고, 거꾸로 치닫도록 유도하는 사단-거짓
의 출발(창3:1-5).
나. 아벨을 죽인 가인이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고 발뺌(창4:8-9).
다. 아합왕의 나봇의 포도원 탈취에 동원된 거짓 증거자들(왕상
21:1-16).

2) 순종의 예
가. 백성들이 인정하는 사무엘의 삶(삼상12:1-5).
나. 아말렉의 종 되었던 애굽 소년이 다윗을 시글락으로 인도함으로,

제 9계명 127

끌려간 백성과 재물을 되찾게 함(삼상30:11-20).
다. 모르드개의 아하수에로 왕 암살 음모 고발(에6:1-2).

6. 제 9계명에 대한 신약 백성들의 불순종 / 순종 예

1) 불순종의 예
가. 헤롯이 동방박사들에게 아기 예수가 있는 곳을 알려주면, 사실은
살해하려면서 자기도 경배하겠다고 함(마2:7-8).
나.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님이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고쳤다
고 증언하는 바리새인들(마9:32-34).
다. 체포된 바울을 처형되게 하려 거짓을 늘어놓는 변사 더둘로(행
24:5-9).
라. 체포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해지게 하려 사람들이 증언하나, 모두
입증되지 않음(막14:53-56).

2) 순종의 예
가.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예수님의 역사로 눈을 뜨고, 위압적으로
심문하는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자신을 눈뜨게 했
음을 증거(요9:9-34).
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현장을 지키던 백부장이 ‘이는 진실로 하나
님의 아들이었도다’고 고백함(마27:54).
다. 바울의 생질이 바울을 죽이기 위해 모인 40여명의 결사대의 음
모를 천부장에게 사전에 알려 바울 암살을 방지함(행23:12-22).

128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제 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
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 출애굽기 20:17 •

열 번째이자 마지막 계명인 이 계명은 앞선 계명들과 사뭇 다른 모
습을 보인다. 이 계명은 둘째 돌판 곧 인간 상호간의 도리를 매듭한다.
앞선 계명들은 드러나게 범하는 죄목들을 열거했다. 이런 계명들에 대
한 불순종은 금방 또는 조금 후 이웃에 의해 발각된다. 그런데, 열 번
째 계명은 인간의 내면적 또는 숨겨진 죄성을 말하며 금한다. 이 계명
은 아무도 모르게 범해질 수 있다. 이 계명을 범하는 것도 짧은 시일 또
는 좀 오랜 시일이 걸릴 수도 있지만, 분명히 드러나게 되어있다. 직접,
간접적으로 범행의 결과로 인한 고통을 당한다. 세상에서는 아직 행동
으로 옮겨지지 아니한 범행음모는 실제 범행에 비해 그냥 지나가거나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집행은 다르다. 마음에 그
범행에 대한 씨앗이 뿌려진 것 자체부터 범행으로 간주하신다. 마음에
탐심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
낸 것이다. 이것은 바로 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130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말지니라’는 법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과 통한다.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
이 그 중심에 정착해 계심이 가장 안전하고 정상이다. 그런데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곧 탐심에 의한 다른 것이 자리를 잡는
데, 이것은 남편도 모르고 아내도 모르고, 심지어는 자신도 모르는 사
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찾을 때, 이 마
음을 탐심이라 요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 10계명은 사람과의 문제임과 동시에, 사람과 하나님
과의 은밀한 관계의 심도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신뢰와 만
족과 감사의 관계가 약해질 때, 자신의 현재에 불만족을 느끼며 옆에
있는 형제의 것이 부러워 보이고, 나의 것보다 많아 보이고 커 보이고
귀해 보인다. 보이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탐내게 되며, 마음에 계획
을 세워 자기 것으로 만들려 음모를 꾸민다. 행동으로 옮긴다. 행동으
로 나타날 때 까지 이웃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
타날 때까지 본인만 아는 터널을 통과하면서 마음의 온갖 속삭임 소리
를 즐긴다. 가룟 유다는 세상에의 유혹과 물질에 대한 욕심을 마음에
간직하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다른 제자들은 그가 예수님을 체포되도
록 입맞춤을 하기 까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그와 함께 했다. 제 10계
명의 탐심은 실로 신비할 정도로 그 움직임을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을 통해,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
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
다’(시142:5)고 고백한다. 사람의 마음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피난
처로 여겨 의존하고 안겨 있음이 안전하다.

제 10계명 131

1. 제 10계명의 뜻

열 번째 계명을 살피는데 있어, 거기에 죄를 표현하는데 사용된 단
어들을 주의 깊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탐낸다(covet)는 말의 원래 의
미는 어떤 물체(대상)에 대한 설렘, 호기심을 말하는데, 곧 가지고 싶
어하는 마음, 내 것이 되게 하고 싶은 마음을 말한다. 단순한 설렘과 호
기심에 머물지 않고 소유하고 싶은 마음을 일군다. 신명기 5장은 모세
가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세대를 위해, 40여년 전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을(출19장, 20:1-17) 새롭게 선포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거기서 열 번째 계명의 ‘탐낸다’는 용어를 두가지 단어로 표기했는데,
하나는 처음 십계명 본문인 출20:17의 단어 설렘, 호기심, 가지고 싶어
하다의 뜻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히 바라다 갖고 싶어하다는 표현으로
기록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헬라어로 이 본문을 신약에 인용, 적용
하면서 다양한 용어 이해를 보인다. 제일 흔한 용어는 욕망, 몹시 갈망
(lust)이고, 바램, 욕구(desire), 탐냄, 갈망(covet)으로, 가끔은 색욕에
빠짐, 호색의, 육욕(concupiscence)으로 사용했다. 바울 사도의 이런
번역, 이런 용어 적용은 우리로 열 번째 계명을 이해하는데 소중한 방
향을 제시한다. 이 계명의 탐내다, 탐심의 기본적 의미는 ‘마음을 두다,
주 관심을 가진다’. 문자적으로 ‘헐떡거린다, 갈망하다, 몹시 그리워하
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이 말하고 있는 바는,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불법적으로, 몰래, 은밀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롬1:22-32). 이 계명을 범하게 되는 과정을 한번
상상해 보자. 눈으로 어떤 물체 또는 목적물을 본다. 그런데, 이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의 마음, 영혼을 움직이고 흔들고 이끌 수 있는 첫 관

132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문 역할을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잘못 감당할 때, 그것이 바로 안목
의 정욕(창3:6, 삼하11:2, 요일2:15-16)으로 이끈다고 지적한다. 보이
는 것을 욕심내고 가져야겠다는 마음을 품는 것이 탐욕, 탐심이다. 탐
심의 대상이 크고 많은 것인지 아니면 작고 미미한 것인지는 밝히지 않
는다. 그러나, 마음에 가지고 싶고 내 소유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일기
시작하는 것이 문제의 출발이다. 좋은 것을 보고 좋아하고 내 것이었으
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까지는 죄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보
이는 것을 관리하는 마음이 모든 문제의 근원을 잉태시킨다. 부럽고 욕
심나는 것의 질적인 면이나 양적인 면, 또 경제적인 것, 지식적인 것, 기
술적인 것 등을 구분해서 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자신의 것이 아닌
데 눈에 보여 부럽고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을, 어둡게 남이 알아
볼 수 없는 방법으로 취하려 시도하는 마음으로 정착시키는 것이다. 이
것을 탐심, 탐욕의 죄라 한다.

탐심이라 할 필요가 없는 경우들이 많다. 예를 들어, 친구 집에 들
러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들어, 이튿날 화랑에 가서 같은 그림
을 산 경우 탐심이라 말하면 지나치다.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인정하
고, 자신도 그 좋은 것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
좋은 것을 공정한 방법으로 갖기에는 역부족이고, 또 그 가치 만큼 자
기 소유를 투자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마음은 점점 그 좋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마음먹음이 탐심이다. 이 탐심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열 번째 계명은 앞의 계명 모두
를 종합한 것을 말하고 있고, 그 모든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 할 수 있
다. 왜냐하면, 열 번째 계명은 사람의 마음을 대하고 있고, 그 마음을

제 10계명 133

어떻게 운영 관리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정상이고,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따르는 것이 안
전하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12:34) 하나
님이 바로 나의 보물이 되게 사는 것이다.

열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의… 네 이웃의… 그의… 그의… 그의… 그
의… 네 이웃의…’ 라는 말을 일곱 번 연속하여 말하며 타인의 이익관계
에 있는 바를 열거하고 있다. 사람이 때가 되어 아내를 원하고, 남종을
원하고, 여종을 필요로 하고, 소와 나귀를 소유하고 싶은 것 자체를 죄
악시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땅에 거하며 생육하고 번성하며, 모든 동
식물의 세계를 다스리며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간다. 사
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편히 여기실 수 있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으신 피조물을 순리대로 관리해야 하는 청지기 신분이다. 그런데, 사
람이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목전에서 관리를 제대로 못하면, 바로 열
번째 계명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은 미치지 못하고, 마땅
히 투입해야할 영육간의 수고도 없이 이웃의 소유를 자기 것으로 만들
려 하는 것을 금하는 법령이다. 이웃의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필요 이
상으로 더 가지고 싶은 마음이 사람에게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
나를 거두어 식생활을 해결할 때, 백성들 중에는 필요 이상을 거두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필요 이상의 만나는 썩고 벌레가 먹게 함으로,
하나님은 백성에게 하나님이 명하시는대로 사는 것이, 필요를 안전하
게 공급받는 것임을 가르치기 원하셨다(출16장). 그런데, 우리 피조물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보며 가까이
하고 싶고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참 좋은 조각품이나 그림이 있으

134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면 갖고 싶고, 그래서 사진으로라도 가까이 있게 하고 싶어진다. 이런
모양의 마음이 궤도를 이탈하는 것을 열 번째 계명이 금하는 바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을 인해 마음이 움직이고, 가지고 싶은 것을 가
지고 마는 것이 죄인지는 율법을 알고 나서야 알았다고 고백하는 자가
있는데, 바로 사도 바울이다(롬7:7-8). 바울은 원래 모세오경을 비롯
한 구약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유대인이요,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
이었다. 그는 당대 율법학계의 양대 산맥을 이루던 샴마이와 가말리엘
학자들 중, 가말리엘의 학문을 열심히 배워 추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율법 중 탐심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배우고 나서야, 자신이 그
때까지 살아온 인생 여정이 탐심에 얼룩져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는 고백이다. 그러니까, 바울의 예수님 만나기 이전의 삶은, 남보다 열
심히 공부해서 남보다 앞서고, 남보다 열심히 뛰어서 남보다 많은 업적
을 쌓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그로서 가슴 뿌듯한
성취감을 누리고 싶은 류의 삶이었다 보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열 번째 계명의 탐심을 새롭게 배우기 전에
는, 바울의 예전 삶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는 바로 평균치
인간의 소박한(!) 인생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의 탐심
이해를 통해 자신이 바로 그 탐심에 끌려 살아왔음을 발견했다는 사
실은 놀랍다. 이 말은 사람의 열성과 목표가 하나님께 이르는 것이 아
니면, 그가 가지는 모든 계획과 원하는 바가 탐심, 곧 하나님께서 보실
때 ‘빗나간 화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탐심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
는 힘이 되어 하나님이 하셔야할 일을 원천봉쇄해 버리는 일을 한다.
이런 면에서 열 번째 계명은 첫 번째 계명과 밀접하게 통한다. 그러기

제 10계명 135

에 율법은 우리를 주께로 인도하는 가정교사 역할을 한다(갈3:23-25).

열 번째 계명의 중요성은 그 광범한 적용 범위에 있다.
첫째, 각 개인의 삶을 비추어보게 한다. 탐심은 한 사람의 인생을
뒤틀리게 하고, 결코 목적하는 바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사도들은 개
인 개인의 삶에 성령의 열매로서 있어야 할 요소들을 제시한다. 사랑,
기쁨, 평강, 인내, 친절, 선함, 신실함, 온유, 그리고 절제다(갈5:22). 그
런데, 탐심이라 규정된 죄는 이런 성령의 열매가 맺히지 못하도록, 꽃
이 피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모든 아름다움을 더럽히고 부숴지게 하
고 만다. 사랑을 대신해서 의심과 미움, 기쁨 대신 슬픔, 마음의 고통,
평강 대신에 가시지 않는 불안, 인내 대신 조급함, 친절 대신 냉혹함,
선함 대신 비참함, 신실함 대신 불신과 배신, 온유함 대신 거만함, 절제
대신 자기과시욕이 지배한다. 열 번째 계명의 엄숙성은 이 계명이 하
나님의 선하심에 뿌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이 불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불로 심판하
시기 전에, 먼저 동산에는 싹이 돋고 꽃이 피며 산천초목이 열매 맺기
를 원하신다. 그 산천에 엉겅퀴가 무성하고 가시나무가 번성하기를 원
하는 분이 아니다.
둘째, 이 계명은 모든 사회생활을 살펴보도록 한다. 이 계명에 불
순종함은 사실 두 번째 돌판에 새겨진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모든 계
명을 어기게 한다. 고르반(하나님께 바쳐짐)이라는 말로 땅에서 부모
공경을 소홀히 하고 회피하려는 마음도 탐심의 결과다. 성결치 못한 모
든 생각과 자기 위주의 열심이 살인을 하게 만든다. 음탕한 눈, 음욕에
사로잡힌 마음이 간음으로 나타날 것은 뻔한 사실이다. 땀을 흘리지

136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않고, 법을 피해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마음이 도적질을 하게
할 것이다. 거짓 증거의 뿌리도 자신의 숨은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열
망에서 시작된다. 열 번째 계명이 지켜지지 않음이 인간관계의 모든 면
을 파괴하고 뒤틀리게 한다.

이 계명은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인간이 탐심에 이
끌린다는 것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조화
를 이루지 못하며,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함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
미한다. 그러므로 열 번째 계명을 지키지 못한다는 말은 인간과 하나
님과의 관계를 밝히고 있는 첫 번째 돌판의 계명들을 지키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인간이 이기적이고 단시적 존재가 되면서, 우상을
스스로 만들어 혼란스럽고 어두움 속에 처하게 되는 온상 역할을 한다
는 말이다. 탐심은 우상숭배다(골3:5).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 하나님
이 명하신 길이 아닌, 좀 더 안이하고 자신의 존재가 부각되기를 바라
는 숨은 동기가 꿈틀거리는 가운데, 하나님을 그저 이름만 부르는 격의
생활을 한다. 이사야 선지자(사1:12-16)등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흔들어대는 이스라엘의 외식적 신앙행위를 규탄한다. 모든 불
경함과 모독적인 생각과 행위는, 거짓 신을 만들어 섬기고 섬기다가 채
워지지 않는 욕망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모든 불경건은 욕
정의 부르짖음이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갈망하는 마음의 결과이다.
열 번째 계명이 뜻하는 바는 심오하고 그 영역이 넓다. 십계명 중 첫 번
째 계명과 열 번째 계명은 서로 밀접히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 두 계
명은 서로 조건부가 되고 있다. 만일 사람이 오직 여호와 한분만을 경
외한다면, 그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

제 10계명 137

을 것이다. 탐심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는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능
력이나 노력이 없이 무엇인가를 욕심내고 갖기를 열망한다면, 그는 하
나님을 진정 경외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필요를 자
신이 채우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방식을 통해서라도 가지려 할 것
이다. 그의 열망은 하나님 한분보다도, 세상의 이것저것에 더 매어 있
다. 사람이 한 가지 욕심내는 것이 있어야 한다면, 오직 주께 이르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빌3:14).

2. 신약의 가르침

열 번째 계명을 신약은 어떻게 수용하는가 하는 관심은, 한 점 의
문의 여지없이 명확하고 강조적으로 그 의미를 다시 드러낸다는 결론
을 내리게 된다. 예수님 자신의 이해 역시 어떤 차이도, 다른 견해도 없
다. 한 청년이 자기 형을 타일러서, 동생인 자기에게 유업을 나누어주
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삼가 모든 탐
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12:13-15) 하시고 곧 이어 어리석은 부자의 예를 소개하셨다. 그 부
자는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 소유할 것을 흡족하도록, 보관할 곳이 없
을 정도로 많은 물질을 소유했지만, 그것이면 다 되는 것같이 착각했
지만, 그가 알지 못한 것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의 영혼이
의탁할 곳이었다. 부자의 생각에는 물질이, 곧 세상 것으로 영혼의 안
식처가 될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자기 만족이요 착각
에 불과했다(눅12:16-21). 예수님은 솔로몬이 지혜가 출중했고 부국
강병을 이루어 세상에서 유명해졌지만, 사실은 들에 핀 꽃 하나만 못

138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한 것이었다고 엄숙히 단언하신다(마6:29). 사람은 먼저 하나님을 주님
으로 영접하고 그 분을 따라 사는 것이 부유한 삶을 누리게 되는 존재
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심령에 모시지 않고 어리석은 말을 하고, 음
행에 가담하며 탐심에 끌려 사는 자는 곧 우상숭배자라 규정하며, 이
런 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엡5:4-5)
고 단언한다.

야고보는 부자에 대한 풍자에서, 생의 만족을 소유에서 찾으려하
고, 온갖 노력을 금 은 보화를 더 쟁취하는데 집중하는 삶은 얼마나 가
증스러운 죄악인가를 폭로하며, 그런 삶의 방식이 세상을 얼마나 비정
하고 흉포하게 만드는지를 드러낸다(약5:1-6). 베드로의 표현은 더욱
격한 어조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
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
니 저주의 자식이라’(벧후2:14). 사람이 일단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음
에서 밀어내면, 그 마음이 치닫는 곳은 그야말로 추악함이요 지옥불이
다. 요한은 포괄적인 표현으로, 죄악된 삶으로 멸망해 가는 사람과, 거
룩한 삶으로 하나님을 좇는 사람을 대조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세상
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
느니라’(요일2:17).

히브리서 기자는 서신의 결론 부분에서, 하나님을 경홀히 하는 죄
를 반복하며 탐심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자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실한 삶을 영위하는 자들을 대조적으로 쓰고 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
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제 10계명 139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
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13:5-6).

다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 예수님의 전체적이요 결론적
인 말씀이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
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이 말씀은 제자들
의 마음이 땅의 것을 보물로 여기려는 성향을 감지하시고 주신 경고조
의 말씀이다. 제자들은 땅에 거하는 동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
까 무엇을 마실까 등을 인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을 가르치신다. 제
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하는 신분이
다. 삶의 우선순위 문제다(마6:33). 하나님을 먼저 섬기는 삶을 살 때,
소위 맘몬에게 속한 것은 하나님께서 더불어 공급하신다는 교훈이다.
제대로 말한다면 맘몬에게 속한 것이란 없다. 모든 물질은 하나님이 지
으신,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지으신 물질 등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흔하기에, 마치 물질은 맘몬의 것인 양 생
각되는 것뿐이다. 사람의 불신과 탐심은 우선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
지는 물질세계에 마음을 먼저 준다. 여기에 탐심이 파고들 수 있는 구
멍이 생긴다. 그로서 눈은 헛된 정욕에 이글거리고 볼은 자신도 모르는
홍조를 띠고 근육은 멋대로 울퉁불퉁해지고, 신경은 쉬임없이 헐떡거
린다. 이것이 마지막 삯은 사망이라는 곳을 향해 사는 삶이다. 크게든
작게든 의롭지 못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중심의 탐심의 불을 끄
지 않는 한 자신의 삶을 파괴한다.

140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3. 제 10계명의 적용

열 번째 계명이 오늘날 만큼 절실히 주목의 대상이 되고, 실천되어
야 할 필요가 있던 때가 있었던가? 인류역사 어느 시대보다 문명화되
었다는 이 시대에 탐심이 여러 모양으로 악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너
무 지나친 말일까? 소수자에 대한 압제, 야만적이고 비이성적 힘으로
군림해도 제압을 하지 못하는 현실주의, 하나님의 의로우심에는 관심
도 없이 힘만을 앞세우는 국가들, 이런 풍토에 젖어들어 탐심에 탐심을
더욱 불붙히는 세대다. 이런 세대는 탐욕의 수렁에서 맘몬신의 크고 웅
대함만 본다. Mr.Watt가 그린 맘몬은 마치 가진 것 없어 힘이 없는 자
들을 향해 고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면서, 불뚝 나온 배를 한껏
부풀리며 자신만큼 큰 자가 있느냐고 묻는 것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세
상은 힘있는 자에게로 모인다. 힘이 있는 자는 틀린것도 맞는 것이 되
어버린다. 정직하게 살려다가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없으면 비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지구상에는 200개가 넘는 국가들이 있다. 슬프
게도(!) 정말 순수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위 약소국 국민
들인 경우가 많다. 때 묻지 않은 마음, 때 묻지 않은 손이라는 말이 수
긍이 가는 사람들이 산다.

열 번째 계명을 범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비단 국가 차원만이 아니
다. 사회와 그 구조와 풍조가 유혹하고, 어쩔 수 없도록 궁지까지 몰아
간다. 1950년대, 60년대만 하더라도 지구상의 나라들은 크게 두 갈래
방향을 추구했다. 민주주의 아니면 공산주의로서 이념이 사람들의 주
관심사였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자본주의,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등장

제 10계명 141

하면서 사람들의 주관심이 경제로 집약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사람
사는 세상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맘몬, 두 주인 중의 한 주인이 전면
에 등장했다. 사람이 이념을 추구하며 고상하게 인생을 전개해 보겠다
는 생각을 너무 쉽게 증발시켜 버렸다. 중앙 집권을 위해 철저히 감시
감독하면서, 온 국민에게 공평한 기회와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큰소리
치는 어느 나라에는, 세 가지 색깔의 돈이 유통되고 있다 한다. 흰 색
깔의 돈은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공식적으로 지급하는 임금이다. 이 흰
색깔의 돈은 다수 국민이 받는 액수에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소위 자
본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 비하면 정말 공평해 보인다. 다음은 회색깔
의 돈인데, 이 돈은 법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이렇게 저렇게 알게
모르게 넘어가주는 돈이라 한다. 가진 것이 있고, 힘이 있는 자가 이런
돈을 만지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모두가 알지만 그냥 넘어가 준다.
검은 돈은 나라에서도 절대 금하는 것으로 표방하지만, 거래되는 돈이
다. 가령, 사형수의 사형 집행을 미루고 있다가 돈 많은 누군가가 필요
한 장기가 있어 거래를 은밀히 해오면, 그 때 집행하고 장기와 교환한
다. 자녀나 인척의 좋은 자리를 위해서도 이 검은 돈을 이용한다. 힘없
는 자는 감히 넘겨다 볼 수 없는 세상이요, 오히려 그 틈새기에서 짓밟
히기 일수다. 이 모든 거래와 과정을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세상이 그
렇게 굴러가니 입을 다물고 지나간다. 그러니 흰색의 돈은 그저 심심풀
이요 꼭 정직하게 성실하게 일해서 벌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다. 이러는 동안 사회는 점점 신뢰할 수 없는 사회, 정직하게 진실되게
일하고 살아야 하는 사회라는 인식이 엷어져 간다.

이런 풍조에서 사람들은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142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나도 새 책가방 사줘’ 졸라댄다. 이유는
자기 가방이 제일 낡았고 구식이더라는 것이다. 옆집은 좋은 차 타는데
우리 차는 고물이란다. 다른 아이들은 좋은 학원에 다니는데, 자기는
그냥 방에만 있어야 한단다. 부모는 자신이 힘들고 마음이 상하는 것
은 견딜 수 있어도 자녀가 다른 아이와 비교해서 뒤지고, 먹고 입고 들
고 다니는 가방등에서, 이런 것은 참는 일이 한계가 있다. 그래서 좀 더
나은 수입, 좀 더 좋은 차, 좀 더 그럴듯한 집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
님이 가장 소중하고, 하나님과 함께 함이 최고의 복이요 부요임을 붙
들고 살지 않으면, 사람은 이런 세상 흐름의 탐심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세상의 나라와 사회는 사람으로 열 번
째 계명을 범하며 살도록 유도하고 부추긴다고 볼 수 도 있다. 수영에
미숙한 사람이 감당키 어려운 파도와 같다고 위로할 수도 있다. 그러
나 우리가 명백히 알아야 할 것은, 이 계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우
리가 지켜 살 수 있기에 주셨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솔직히 열 번째 계
명 앞에서 ‘나는 무관하다. 나는 흠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
다. 이 계명 앞에서 우리는 죄인임을 시인할 수밖에 없고, 죄의 삯은 사
망이라는 선고를 받을 수 밖에 없다(롬6:23). 아홉 번째 계명까지는 어
찌어찌 피해왔을지 모르지만, 이 열 번째 계명 앞에서는 두 손발을 들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바울이(행9:1-
9), 오직 예수님만을 푯대로 삼고(빌3:14) 30여년을 살았다. 그런데,
그가 자신에 대해 발견한 사실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는 탄식이었다. 그 때까지

제 10계명 143

의 바울의 삶은 아마 사람들 중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을, 곧바른 것이
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
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5-6) 스스로에 대
한 확신이 대단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미련없이 버릴
수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였다. 예수님을 만나
알고, 그분을 따르면서 보니, 예수님의 모든 것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온전한 마음, 선한 양심을 따라 예수님만을 알
고, 예수님의 모든 것을 더 얻고자 좇아갔다. 그의 마음에는 오직 예수
님을 따르는데 필요한, 정한 마음이 있기만을 바랬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다윗의 기도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제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
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50:4) 이사야 선지자
는 혼탁한 세상에 살면서 오직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알게 하고, 함께 하나님 백성으로 나아가는 삶이었다. 이것을 이사야
의 욕심이라 해도 될 것같다.

4. 제 10계명에 대한 구약 백성들의 불순종 / 순종 예

1) 불순종의 예
가. 눈에 비옥한 땅으로 보이는 요단 온 들과 평지 성읍들을 택한 롯
의 현실적이고 세상적 관점에 의한 선택, 롯은 그 곳 사람들이 여

144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

호와 앞에 큰 죄인들임은 보지 않음(창13:5-13).
나. 광야 행군 중 만나를 거두며, 욕심껏 많이 거두었으나 되어본즉

같았고, 남겨둔 것은 썩고 벌레가 생김(출16:17-20).
다. 왕의 지위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인근 농민 나봇의 포도원을 비정

한 방법으로 탈취하는 아합왕과 이세벨(왕상21:1-16).
2) 순종의 예

가. 세상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비옥한 땅을 조카 롯에게 양보하고,
독자 이삭까지도 하나님께 바친 아브라함, 하나님의 웅대한 약속
을 받음(창13:5-18, 22:14-18).

나. 얍복강변에 이른 야곱이 하나님 한분과의 만남을 위해 그날까지
얻은 모든 것을 놓아보냄(창32장). 그의 이름 야곱이 이스라엘(열
국의 아비)로 바뀌는 축복 누리는 인생으로 전환됨.

다. 사람들이 의지하는 곡식의 풍성함보다, 주께서 마음에 주신 기쁨
이 더욱 소중함을 고백하는 다윗(시4:7-8).

라. 극한 어려움 중에도 엘리야 선지자를 공궤하는 사르밧 과부(왕
상17:8-16), 엘리사 선지자의 전도여행의 편리를 도모해 주는 수
넴 부부(왕하4:8-10).

5. 제 10계명에 대한 신약 백성들의 불순종 / 순종 예

1) 불순종의 예
가. 부모공경에 쓰여야 할 물질이 아까워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신이
가로채는 행위 -고르반(막7:10-12).
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가진 소유를 아끼려 하나님 앞에 정직

제 10계명 145

하게 행하지 못함(행5:1-11).
다. 에베소에서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이윤을 남기던 자들이 바울의

복음사역을 대적함(행19:23-27).
라. 바울을 심문하는 총독 벨릭스가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 것을 기대

하고 심문 과정을 유도함(행24:24-27).
2) 순종의 예
가. 초대교회 성도들의 물질생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이

웃과 더불어 나누기를 물질 소유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즐거워 함
(행2:44-45, 4:32).
나. 예루살렘 교회의 기근으로 인한 궁핍을 돕기 위한 마게도냐 교인
들의 희생적 헌신(고후8:1-5).
다. 바울의 사역을 돕기 위해 끝까지 물질로도 함께 한 빌립보 성도
들(빌4:10-15).
라. 초대교회 사역자들의 숙식과 모든 편의를 제공한 가이오(요한
3서).

146

II

새 계명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
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
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요한복음 13:34-35 •

십계명을 되새기면서 예수님의 윤리가 모세를 통해 주어진 십계
명의 뜻을 어떻게 정리하고 극대화하는지 보아야겠다. 어떤 측면에서
든 십계명의 가치와 기준을 저하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
자들에게 하신 말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
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를 진지
하게 묵상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가르침에서 율법을 성취하셨다. 예수님은
율법의 의미를 더욱 부요하게 채우시고, 행함과 말씀을 통해 단순히
기록된 문자 수준을 넘어 영적 의미를 발굴해 내셨다. 예수님을 선생
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이 십계명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고 말할 수 없다. 또, 십계명을 단순화시키고, 쉽게 가르쳤다고 지적

148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십계명, 사람의 첫 걸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