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분 닮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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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분 닮을 수 있을까

2021년 12월 26일 특송가사

유휘봉 | 2021.12.25 11:34 | 조회 914 | 공감 0

꿈이 있는 자유 

'예수'

(intro)

주님 날 위해 지신 십자가

허물 많은 내 삶에 늘 흐르면

죽었던 내 영혼 살리시네

메마른 나의 맘을 적시네

내가 만난 가장 큰 사랑 예수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

이제 내가 사는 것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분이 사는 것

내가 만난 가장 큰 용서 예수

세상 모든 어둠 힘을 잃고

우리 가진 모든 미움 녹아지리라

어떻게 그 분 닮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 길 걸을 수 있나

내가 만난 가장 큰 이름

세상 모든 어둠 힘을 잃고

우리 가진 모든 미움 녹아지리라

어떻게 그 분 닮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 길 걸을 수 있나

내가 만난 가장 큰 이름

내가 만난 가장 큰 이름

내가 만난 가장 큰 이름 예수

(outro)

어떻게 그분 닮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분 닮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분 닮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분 닮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분 닮을 수 있을까

봄ㆍ여름ㆍ가을동안 다소 탄력성을 가졌던 모든 세포들이 이제 찬겨울의 냉기 때문에 오히려 움추려드는 계절이다. 그러면서 냉각되어지는 우리마음에「그리스도 탄생」이라는 불씨로 뜨겁게 불을 지펴야할 그런때이기도하다.

그것은 또 우리 인생의 대주제가 될수 있는「기다림」의 의미도 될 것 같다.

일년내내 그리스도 사랑에 무딘 감각으로 살다가도 해마다 성탄 전후가 되면 흔히 남용되는 상투적인 감정인지는 몰라도 더욱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싶어지는 유별스러운 때이다. 음악에 있어서도 화음이 이루어 질려면 강할 때가 있고 약할 때가 있듯이 예수님에 대한 나의 열정도 그것과 유사했으리라 여기며 약간의 자위와 더불어 신앙생활의 반성도 겸해본다.

어떻게 그분의 모습을 닮을수 있을까? 자신에게 늘 물어보는 질문이지만 그 정답의 완성점에 이르지 못해 또 다시 중복되는 물음을 되풀이 해본다.

낮은 데서부터 오신 그분의 삶은 바로「겸손」이다. 난 어떠했는가? 높은 곳을 향해서만 날려고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고향잃은 이방인이 아니었던가?

그렇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벗 즉 자식됨과 벗됨에 있어서 그 명분을 갖추지 못해 간혹 방향감각을 잃은채 미궁을 헤매며 지내기도 했다. 지금에야 겨우 빠져 나갈수 있는 정확한 통로를 찾아본다.

영혼이 흔들릴 때 그것을 바로 잡아 줄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일 것이고, 내가 찾고있는 통로의 길잡이는 지금껏 열심히 쌓아 올렸던 천연적인 높은 탑과 오랫동안 다듬어 놓았던 넓은 성을 무너뜨리는 작업이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마음의 미로를 헤쳐 나갈수 있고, 그 나아갈 길 모퉁이가 더욱 낮혀지고 편편해 지기를 소망해 보면서 이 작업을 위해 예수님의 낮추어 보이심을 진정 본받고 싶다. 내가 가장 낮은 곳에 있다면 더 이상 내려갈 자리가 없을 것이다. 또 그 자리가 분명 가장 평온한 명당자리가 될것이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는 쉬웠다. 그러나 지금 그 자식의 도리, 명분을 갖추며 살기는 보통 어려운 것이아니다. 연습장이나 써 버리기쉬운 종이위에 낙서해 버리듯 그렇게 쉽게 신자생활을 해온 지금까지가 부끄럽다. 그러면서 그 부끄러움을 잘 세탁해보고 싶은 야무진 욕심도 가져본다.

하나의 예술작품이 예술가에게는 영광이 되는것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구세주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되는 그런 것이어야 되리라. 이 삶이 꼭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좁은문을 약속해 주리라 믿어본다.이 영원한 삶에 대한 또 한번의 새로운 충전「하느님의 자녀, 예수님의 벗된 명분」이라는 좌우명하에 지금에라도 내 남은 삶을 그분과 함께 고이 손질해 가고 싶다.또다시 새롭게 오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 .

교리에 열거된 하나님의 속성 항목들은 그분을 구상하고 상상함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속성의 항목들 중 제일 먼저 고백되는 것은 그분이 ‘영’이시라는 것이다. 그 속성의 항목들은 우리의 삶에서 체험된 고백이고, 그분이 우리에게 밝히신 것이다. 문자적 의미에 매여 있으면 율법주의나 유대주의에 머물고 만다.

외우기 어려울 정도로 열거된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속성을 찾을 수 있다. 첫째, 그분이 영, 즉 영적 존재시라는 것이다. 우리가 고백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자신을 밝힌 것이다. 이것에 관련된 속성은 무한, 영원, 불변, 불가해적, 불가시적 자존, 자족, 편만, 전능, 전지 등이다. 이것은 그분의 주요한 본질(substance)을 일컫는 속성이기도 하다.

이것을 칼빈 선생은 “영”과 “완전”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1권 10장 2항). 이것은 우리가 경험하거나 닮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신적 존재임을 밝히는 속성의 항목들이고, ‘비공유적 속성’이라 부른다.

둘째, 우리를 향한 그분의 자비함이다. 여기에 관련된 속성은 지혜, 권능, 거룩, 공의, 선하심, 은혜, 용서 등이다. 이에 관해 칼빈 선생은 “자비함은 선하심에서 나온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심판과 공의를 행하는 분임을 언급한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우리와 관련된 속성이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고, 우리가 어느 정도 닮을 수 있지만 불완전하다. 이것을 신학적으론 ‘공유적 속성’이라 부른다.

이제 그 속성의 항목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도록 하겠다. 그분이 영이심은 환상, 내적 상상 또는 외적인 어떤 형상으로 만들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1계명을 설명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94~96문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94문은 “1계명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요구하나?”인데, 그 대답은 그분은 영이시기에 “모든 우상숭배, 마술, 마법을 행하지” 말 것, “성자들이나 다른 피조물들에게 기도하”지 말 것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것은 하나님을 가시적인 온갖 우상숭배를 금하신 것이다. 이어서 95문에서 “우상숭배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 대답으로 “유일하시고 참된 하나님 대신, 또는 그분을 제쳐두고 우리가 신뢰할 다른 어떤 것을 품거나 가지는 것을 의미하다”는 것이다. 결국 영이심은 그분의 뜻에 반대하여 우상숭배, 즉 어떤 형상화를 금하는 것이고, 오직 그분만 신뢰할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영이신데 우리가 어떻게 또 무엇으로 그분을 형상화할 수 있을까?

칼빈 선생은 우상숭배를 두 장(1권 11~12장)에 걸쳐 다룬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는 교육상 화상이나 형상이 요구되었다고 변명하면서 여전히 그것들을 숭배하고 있다. 또 숭배라기보다 존경할 따름이라고 변명하면서 우상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예술적이라고 변명한다(1권 11장 11~16항). 어떤 상징적 해석을 풀어 놓더라도 궁색한 변명이고 명백한 죄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편의주의”에 빠진 것이다(1권 11장 12항). 어떤 하나님에는 무관심하고 그냥 하나님이면 된다고 하는 그릇된 속임수에 불과하다(1권 4장 3~4항).

이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함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다. 다른 말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비함은 사랑이란 단어로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의 완전함은 하늘과 지상에 빛나는 긍휼, 선하심, 자비함, 공의, 심판 및 진리 등이다(1권 10장 1항).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체험하여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함(자비함)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함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분을 체험한 자가 그분에 대해 표현할 수 있는 공통적인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경 바디메오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외쳐 그분의 긍휼, 즉 자비함을 요청한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향해 외칠 수 있는 것을 그저 “불쌍히 여겨주소서!” 간청할 뿐이다. 구약성경의 자비함 또는 인자함은 신약성경에서 사랑으로 표현된다. 그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신약성경에 이르러 드러난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바라고 신뢰하며 삶에서 체험할 때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분께 기도할 때도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권한 것이다. 믿음의 체험은 그분을 삶 속에서 신뢰하는 것으로 “죄인이 그분의 자비함을 느끼고, 자신의 행위를 불신하고, 구원을 위해 그분의 자비함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때”를 의미한다(3권 11장 16항).

그분의 ‘지혜’는 우리를 이끄는 최선의 길을 아신다는 의미고, ‘진실하심’은 우리를 결코 속이지 않는다는 의미고, ‘거룩’은 하나님의 자신의 의지와 언제든 일치하신다는 의미고, ‘공의’는 그분이 공정하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분은 우리에게 언제든 무엇이든 신뢰할 수 있는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