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장례식은 문학 모독 문인단체는 왜 침묵하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등단 40년을 맞은 작가 박완서 선생이 80세의 일기로 22일 오전 6시17분 지병인 담낭암으로 투병 중 별세했습니다.

고인은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생났으며 숙명여고 졸업, 서울대 국문과를 중퇴했습니다.

자신의 깊은 상처를 되새기며 독자들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글을 써왔습니다.

때로는 자본주의가 만든 황폐한 인간성을 통렬히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동화집‘나 어릴 적에’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부숭이의 땅힘’ ‘보시니 참 좋았다’ 등이 있다.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던 그녀는 2006년 문화예술계 인물로는 처음으로 서울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김광하(도이상사 대표), 권오정(성균관대 의대 학장), 김장섭(대구대 교수) 등이 있습니다.

박완서 선생은 임종 후에도 문인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전해져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22일 오전 5시20분쯤 경기 구리시 아차동 자택 별세한 박완서 선생은 서울 강남구 서울삼섬병원 장례식장에 빈소가 차려졌고
고인의 빈소 입구에는 '부의금을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는 안내문으로
평소 생활이 힘든 문인들을 생각했던 고인은 유족들에게

네티즌들은 “문학계의 큰 별이 졌다” “최근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셨던 분인데 슬프다” 등 애도하고 있다.

▲2009년 = 장편 '세 가지 소원', 동화집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나 어릴 적에', '문학동네' 가을호에 단편 '빨갱이 바이러스' 발표

 

책 장례식은 문학 모독 문인단체는 왜 침묵하나
  

  박완서 선생님께서 1월 22일 향년 80세의 나이로 별세하셨습니다. 지난해 암 진단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발 건강하길 바랬는데... 처음으로 문학 공부를 시작한 스무 살 시절. 작가론 시간에 처음 만났던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은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문학'을 제 삶처럼 가깝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젊은 시절을 따라 현저동 신설동을 거닐기도 했었고, 군 시절에는 입대 전 구입한 '박완서 소설전집' 모두 읽으며 소설가의 꿈도 키웠으니까요. 지난해 등단 40주년이셨고 계속 선생님의 작품을 조금 더 배우고 싶었던 제 바람. 

  현대 문학계의 큰 별이 졌습니다. 부디 하늘 나라에서도 행복하셨으면.....

* 10년전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 연보와 기사 연재된 칼럼과 시대별 작품을 정리했었습니다.  조금 더 보태 남겨봅니다.  이 포스팅이 추모하는 많은 분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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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완서 연보

1931(1세)

▷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에서 출생.

1934(4세)

▷ 아버지를 여읨. 어머니와 오빠가 서울로 나가고 혼자 조부모, 숙부모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1938(8세)

▷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 현저동 골짜기에서 살다. 매동 초등학교에 입학.

1944(14세)

▷ 숙명여고에 입학하다.

1945(15세)

▷ 소개령 때문에 개성으로 이사하여 호수돈여고로 전학 여름방학 때 박적골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서울에 와서 숙명여고에 복학숙명여고 시절 소설가 한말숙, 시인 박명성, 김양식과 같은 문과 반에서 공부한다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소설가 박노갑이었다

1950(21세)

▷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 6월 초순에 입학식이 있고, 곧 이어 6.25가 발발하여 학 교를 다닌 기간은 며칠 되지 않는다. 오빠와 숙부가 돌아가고 가족 부양을 위해 미8군 피엑스의 초상화부에 취직하다. 그곳에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되는데, 박수근 화백과의 만남은 데뷔작 『나목』에 형상화되어 있다.

1953(24세)

▷ 4월 21일 직장 동료인 호영진과 결혼하다. 1954년에 첫딸 원숙을 얻은 후 원순(1955), 원경(1958), 원균(1960), 원태(1963), 모두 1남 4녀를 두다.

1970(40세)

▷ <나목>으로 <여성동아>의 여류장편소설 모집에 응모하여 당선되다.

1971(41세)

▷ <세모>(여성동아 3월호), <어떤 나들이>(월간문학 9월호) 발표.

1972(42세)

▷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현대문학 8월호), <다이아몬드>(한국일보) 발표. 7월부터 장편 <한발기>를 『여성동아』에 연재하기 시작.

1973(43세)

▷ <부처님 근처>(현대문학 7월호), <지렁이 울음소리>(신동아 7월호), <주말농장>(문학사상 10월호) 발표.

1974(44세)

▷ <맏사위>(서울평론 신년호), <연인들>(월간문학 3월호), <이별의 김포공항>(문학사상 4월호), <어느 시시한 사내 이야기>(세대 5월호), <닮은 방들>(월간중앙 6월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신동아 8월호), <재수굿>(문학사상 12월호) 발표.

1975(45세)

▷ <카메라와 워커>(한국문학 2월호), <도둑맞은 가난>(세대 4월호), <서글픈 순방>(월간조선 6월호), <겨울 나들이>(문학사상 9월호), <저렇게 많이!>(소설문예 9월호) 발표. 평론 <'나목' 근처 - 그 정직한 여인들>(문학사상 9월호) 발표.

1976(46세)

▷ <도시의 흉년>(문학사상), <휘청거리는 오후>(동아일보)를 연재. <어떤 야만>(뿌리깊은 나무 5월호), <포말의 집>(한국문학 10월호), <배반의 여름>(세계의 문학 가을호), <조그만 체험기>(창작과 비평 가을호) 발표. 첫 번째 창작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일지사) 출간.

1977(47세)

▷ <흑과부>(신동아 2월호), <돌아온 땅>(세대 4월호), <상>(현대문학 4월호), <꿈을 찍는 사진사>(한국문학 6월호), <여인들>(세계의 문학 여름호),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문예중앙 겨울호) 발표. <휘청거리는 오후>(창작과 비평사) 상하권, 수필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평민사), <혼자 부르는 합창>(진문출판사) 출간.

1978(48세)

▷ <낙토의 아이들>(한국문학 1월호), <집보기는 그렇게 끝났다>(세계의 문학 봄호), <꿈과 같이>(창작과 비평 여름호), <공항에서 만난 사람>(문학과 지성 가을호) 발표. 연작 콩트 <화랑에서의 포식>(향장), <욕망의 응달>(여성동아) 연재. 창작집 <배반의 여름>(창작과 비평사)과 수필집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한길사) 출간. <한발기>를 <목마른 계절>(수문서관)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1979(49세)

▷ <내가 놓친 화합>(문예중앙 봄호), <황혼>(뿌리깊은 나무 3월호), <우리들의 부자>(신동아 8월호), <추적자>(문학사상 10월호) 발표. 창작동화집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 <마지막 임금님>(샘터사) 출간. 이 둘은 제목은 다르지만 수록 작품은 동일하다.

1980(50세)

▷ <육복>(소설문학 11월호), <그 가을의 사흘동안>(한국문학 6월호) 발표. <엄마의 말뚝1>(문학사상 9월호), <침묵과 실어>(세계의 문학 겨울호) 발표. <한국문학>에 <오만과 몽상> 연재 시작. <살아있는 날의 시작>(전예원) 출간. <그 가을의 사흘동안>으로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하다.

1981(51세)

▷ <천변풍경>(문예중앙 봄호), <엄마의 말뚝 2>(문학사상 8월호), <쥬디할머니>(소설문학 10월호) 발표. 평론 <기이한 독서경험>(문학사상 3월호) 발표. <도둑맞은 가난>(민음사) 출간. <엄마의 말뚝 2>로 제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다.

1982(52세)

▷ <로열복스>(현대문학 1월호), <유실>(문학사상 5월호), <무중>(세계의 문학 여름호) 발표. <한국일보>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연재. 평론 『소설 이전에 주제가 있었다』(현대문학 2월호) 발표. 단편집 <엄마의 말뚝>(일월서각), 장편 <오만과 몽상>(한국문학사), 수필집 <살아있는 날의 소망>(학원사) 출간.

1983(53세)

▷ 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문학사상 3월호), <아저씨의 훈장>(현대문학 5월호), <무서운 아이들>(한국문학 7월호), <소묘>(소설문학 8월호) 발표.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민음사) 출간.

1984(54세)

▷ <재이산>(여성문학 1집), <울음소리>(문학사상 2월호), <저녁의 해후>(현대문학 3월호), <어느 이야기꾼의 수렁>(문예중앙 여름호), <지알고 내알고 하늘이 알건만>(창작과비평사 84년도 신작소설집 <지알고 내알고 하늘이 알건만>), <움딸>(학원 9월호) 발표. <주부생활>에 <떠도는 결혼>을 연재. 풍자소설집 <서울사람들>(글수레) 출간. 7월 1일 영세를 받는다.

1985(55세)

▷ <해산바가지>(세계의 문학 여름호), <초대>(문학사상 10월호), <애보기가 쉽다고?>(동서문학 12월호), <사랑의 일기>(창작과비평사 85년도 신작소설집 <슬픈 해후>), <저물녘의 황혼>(문학과 지성 신작소설집 <숨은 손가락>) 발표. (문학사상)에 <미망> 연재. <떠도는 결혼>을 제목을 바꾸어 장편 <서 있는 여자>(학원사)로 출간. 11월 일본을 여행하다.

1986(56세)

▷ <비애의 장>(현대문학 2월호), <꽃을 찾아서>(한국문학 8월호) 발표. 1982년에서 1986년까지 쓴 중단편을 모은 창작집 <꽃을 찾아서>(창작사)와 수필집 <서 있는 여자의 갈등>(나남) 출간.

1987(57세)

▷ <저문날의 삽화 1>(분노의 메아리 전예원), <저문날의 삽화 2>(또 하나의 문화 4호), <저문날의 삽화 3>(현대문학 6월호), <저문날의 삽화 4>(창작과 비평) 발표.

1988(58세)

▷ <저문날의 삽화 5>(소설문학 1월호) 발표.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다.

1989(59세)

▷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창작과 비평 여름호), <家>(현대문학 11월호) 발표. <여성신문>에 3월부터 8월까지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연재. 삼진기획에서 같은 제목의 책을 단행본 출간.

1990(60세)

▷ 카톨릭 잡지인 <생활성서>에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제목의 일기 연재. 전 3권으로 된 <미망>(문학사상사) 출간. 수필집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햇빛출판사) 출간. 11월에 성지순례를 떠나다.

1991(61세)

▷ <우황청심환>(창작과 비평 여름호) 발표. <엄마의 말뚝 3>을 (작가세계)에 연재.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정민사), 회갑 기념 소설집 <저문 날의 삽화>(문학과 지성사), 콩트집 <나의 아름다운 이웃>(작가정신) 출간. 장편 <미망>으로 제3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하다.

1992(62세)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출판사), <박완서 문학앨범>(웅진출판사), 산문집 <산과 나무를 위한 사랑법>(샘터사) 출간.

1993(63세)

▷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상상 창간호), <꿈꾸는 인큐베이터>(현대문학 1월호) 발표. <꿈꾸는 인큐베이터>로 제38회 현대문학상과 중앙문화대상(예술 부문)을 수상하다.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를 제1권으로 <박완서 소설전집>(세계사) 출간 시작. 소설전집 제2, 3, 4, 5권으로 장편 <도시의 흉년>(상․하), <살아 있는 날의 시작>, <욕망의 응달> 출간. <엄마의 말뚝>이 『Le piquet de ma mere』(Actes Sud)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된다.

1994(64세)

▷ 창작집 <한 말씀만 하소서>(솔), 창작동화 <부숭이의 땅힘>(한양출판사), 소설전집 제6, 7, 8, 9권으로 장편 <목마른 계절<, 소설집 <엄마의 말뚝>, 장편 <오만과 몽상>,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출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 제25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다.

1995(65세)

▷ 『환각의 나비』(문학동네 봄호) 발표. 장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웅진출판사), 수필집 『한 길 사람 속』(작가정신) 출간. 소설전집 제10, 11권으로 장편 『나목』, 『서 있는 여자』 출간. 『환각의 나비』로 제1회 한무숙 문학상을 수상하다.

1996(66세)

▷ <참을 수 없는 비밀>(창작과 비평 겨울호) 발표. 소설전집 제12, 13권으로 장편 <미망>(상․하) 출간.

1997(67세)

▷ 티벳․ 네팔 여행기 <모독>(학고재), 동화집 <속삭임>(샘터사) 출간. 장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제5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하다.

1998(68세)

▷ 수필집 <어른 노릇 사람 노릇>(작가정신) 출간. 문화관광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다.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창작과 비평사) 출간.

1999(69세)

▷ 묵상집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여백),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문학동네, 전5권) 출간. <너무도 쓸쓸한 당신>으로 제14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하다. 영역 단편선집 <My Very Last Profession>(M.E. Sharpe) 출간.

2000(70세)

▷ 9월 '2000 서울 국제문학포럼'에서 <포스트식민지적 상황에서의 글쓰기> 발표. 제14회 인촌상 문학부문 수상. 수필 선집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세계사), 장편 <아주 오래된 농담>(실천문학사) 출간. 박완서 문학 30년을 정리한 기념비평집 <박완서 문학 길찾기>(세계사) 출판됨.

2001년(71세)

▷ <그림움을 위하여> (현대문학 2월호) 발표. <그림움을 위하여> 제1회 황순원문학상 수상. 1994년 출간했던 <부숭이의 땅힘>을 손보아 <부숭이는 힘이 >(계림북스쿨) 출간.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의 영문판 <Three Days in That Autumn>(유숙희 옮김) 지문다에서 출판됨.

2002년(72세)

▷ 첫 산문집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 출간 25주년을 맞아 세계사에서 증보판을 출판함. <그 남자네 집> (문학과사회 여름호) 에 발표. 여성작가 16인 신작소설집 <파스타치오 나무 아래서 잠들다>(동아일보) 에 <아치울 이야기>가 실림. (현대문학 8월호)에 문학 에서이 <구형예찬> 발표.  산문집 <두부>(창작과비평사) 출판. <박완서 문학앨범> 개정증포반 <우리 시대의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 를 웅진닷컴에서 출판. 20여년전 어린이 잡지에 연재했던 동화와 어릴 적 이야기를 모은 동화집 <옛날의 사금피리>를 열림원에서 출판.

2003년(73세)

▷ (문학동네 봄호) <마흔아홉살> 발표. (창작과비평 여름호) <후남아, 밥먹어라> 발표. 김남조, 김후란, 박완서, 전옥주, 한말숙 5인 에세이집 <세월의 향기>(솔과학) 출판. 첫 동화집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에 수록ㄷ괴었던 <옥상의 민들레꽃>을 만화로 재구성한 <옥상의 민들로꽃>(그림 강웅승) 이가서에서 출판. 스폐인 살라망카대의 김혜정 교수와 Francisco Javier Martin Ortiz 교수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스폐인어로 번역한 <Aquella Montana Tan Lejanna>가 스폐인의 트로타 출판사에서 출판.  박완서 소설로는 처음으로 스폐인어권에 소개됨.

2004년(74세)

▷ 1979년 펴낸 첫 동화집에 수록되었던 6편에 <보시니 참 좋았다> <아빠의 선생님이 오시는 날> 등 최근에 쓴 2편을 새로 추가해 동화집 <보시니 참 좋았다>(그림 김점선) 이가서에서 출판. <현대문학> 창간 50주년을 기념한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을 현대문학사에서 출판. 일기 <한 말씀만 하소서>를 별개의 단행본으로 세계사에서 출판.

2005년(75세)

▷ 청소년을 위한 만화로 재구성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 2>(그림 김광성)를 세계사에서 출판. <조그만 체험기>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엄마의 말뚝 2> <해산바가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것>을 엮어 <20세기 한국소설>시리즈 '박완서'(20세기 한국소설 35) 창비에서 출간. 12편의 기행산문을 모아 기행산문집 <잃어버린 여행가방>을 실천문학사에서 출간.

2006년(76세)

▷ 1998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왔던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추가하여 개정판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전 6권) 문학동네에서 출간. 문학예술인으로 처음이자 여성으로서도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제 16회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

2007년(77세)

▷ 산문집 <호미>를 열림원에서 출간. 이해인, 방혜자, 이인호와 함께 대담집 <대화>를 샘터에서 출간. <옥상의 민들레 꽃>등으로 휴이넘에서 교과서 한국문학 시리즈를 출간.  소설집 <칠전한 복희씨>를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

2008년(78세)

▷ 산문집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을 열림원에서 재출간. <그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자전적 대표 소설을 (박완서 소설전집 17)  세계사에서 출간.

2009년(79세)

▷ 10편의 짧은 이야기들을 모은 단편 소설집 <세가지 소원> 마음산책에서 출간. <어른노릇 사람 노릇> 작가정신에서 재 출간.

2010년(80세)

▷ 4년 만에 에세이집 <못 가본길이 더 아름답다> 현대문학에서 출간. 우리시대 대표문인들이 들려주는 반성의 의미를 담은 산문집 <반성> 에서<좋은 일 하기의 어려움>이라는 글로 더숲 출간. 2009년 조선일보를 통해 연재됐던 문인들의 에세이집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중 <내 식의 귀향> 이라는 글로 21세기북스에서 출간.

2011년(81세)

▷ 1월 22일 경기 구리시 아천동 자택에서 별세.

- 장르별 작품목록

장편소설

『나목』/ 여성동아(부록) 1970

나목 / 열화당 1976

도둑맞은 가난(『나목』재수록) / 민음사 1981

나목 / 작가정신 1990

나목(박완서 소설전집10) / 세계사 1995

나목․도둑맞은 가난(1981년 출간한 『도둑맞은 가난』의 개정판) / 민음사 1997

『한발기』/ 여성동아 1971. 7~1972. 11 연재

『휘청거리는 오후』/ 동아일보 1976. 1. 1~1976. 12. 30 연재

『도시의 흉년』/ 문학사상 1975. 12~1979. 7 연재

『휘청거리는 오후』/ 창작과비평사 1977

휘청거리는 오후(박완서 소설전집 1) / 세계사 1993

『욕망의 응달』/ 여성동아 1978. 8~1979. 11 연재

『목마른 계절』(원제는 『한발기』) / 수문서관 1978

목마른 계절 / 열린책들 1987

목마른 계절(박완서 소설전집 6) / 세계사 1994

『살아있는 날의 시작』/ 동아일보 1979. 10. 2~1980. 5. 30 연재

『도시의 흉년』/ 문학사상사 1979

도시의 흉년(박완서 소설전집 2․3) / 세계사 1993

『욕망의 응달』/ 수문서관 1979

인간의 꽃(원제는 『욕망의 응달』) / 수문서관 1984

욕망의 응달 / 우리문학사 1989

욕망의 응달(박완서 소설전집 5) / 세계사 1993

『오만과 몽상』/ 한국문학 1980. 12~1982. 3 연재

『살아있는 날의 시작』/ 전예원 1980

살아있는 날의 시작(박완서 소설전집 4) / 세계사 1993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한국일보 1982. 1. 5~1983. 1. 15 연재

『오만과 몽상』/ 한국문학사 1982

오만과 몽상 / 고려원 1985

오만과 몽상(박완서 소설전집 8) / 세계사 1994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민음사 1983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박완서 소설전집 9) / 세계사 1994

『떠도는 결혼』/ 주부생활 1982. 4~1983. 11 연재

『서있는 여자』(원제는 『떠도는 결혼』) / 학원사 1985

서있는 여자(박완서 소설전집 11) / 세계사 1995

『미망』/ 문학사상 1985. 3~1990. 5 연재(1988. 10~1989. 6 연재중단)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여성신문 1989. 2. 17(제11호)~1989. 7. 28(제34호) 연재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삼진기획 1989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박완서 소설전집 14, 일기『한 말씀만 하소설』와 중편

「서울 사람들」 함께 수록) / 세계사 1999

『미망』/ 문학사상사 1990

미망(박완서 소설전집 12․13) / 세계사 1996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웅진출판 1992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웅진출판 1995

『아주 오래된 농담』/ 실천문학 1999년 겨울호~2000년 가을호 연재

『아주 오래된 농담』/ 실천문학 2000

『그 남자네 집』/ 현대문학 2004

소설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일지사 1976

『창 밖은 봄』/ 열화당 1977

『배반의 여름』/ 창작과비평사 1978

『꿈을 직는 사진사』(『창 밖은 봄』과 수록작품 동일) / 열화당 1979

『도둑맞은 가난』(소설선집) / 민음사 1981

『엄마의 말뚝』/ 일월서각 1982

엄마의 말뚝(박완서 소설전집 7) / 세계사 1994

『그 가을의 사흘 동안』(단편선집) / 나남 1985

『꽃을 찾아서』/ 창작사(창작과비평사) 1986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단편선집) / 심지 1987

『저문 날의 삽화』/ 문학과지성사 1991

『한 말씀만 하소서』/ 솔 1994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출간 20주년 기념) / 한양출판 1994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단편선집, 문고판) / 삼성 1995

『울음소리』(단편선집) / 솔 1996

『너무도 쓸쓸한 당신』/ 창작과비평사 1998

『어떤 나들이』(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1) / 문학동네 1999

『조그만 체험기』(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2) / 문학동네 1999

『아저씨의 훈장』(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3) / 문학동네 1999

『해산바가지』(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4) / 문학동네 1999

『가는 비, 이슬비』(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5) / 문학동네 1999

『박완서(20세기 한국소설 35)』/ 창비 2005

『환각의 나비』/ 푸르메 2006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1~6』/(1999년 문학동네 개정증보판) 문학동네 2006

『교과서 한국문학』(그 여자네집, 옥상의 민들레 꽃, 자전거 도둑,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우황청심환, 배반의 여름, 황혼 』 휴이넘 2007

『도둑맞은 가난』(총서년 핸두문학선 031)/ 문이당 2007

『친절한 복희씨』/ 문학과지성사 2007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현대문학 2010

콩트

『이민가는 맷돌』/ 심설당 1981

『서울사람들』(풍자소설집) / 글수레 1984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민가는 맷돌』과 일부 작품 중복) / 작가정신 1991 / 2003(개정판)

에세이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평민사 1977

『혼자 부르는 합창』/ 진문출판사 1977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 한길사 1978

『살아있는 날의 소망』/ 학원사 1982

『지금은 행복한 시간인가』(자선 에세이) / 자유문학사 1985

『서있는 여자의 갈등』/ 나남 1986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햇빛출판사 1990

『한 길 사람 속』/ 작가정신 1995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출간 20주년 기념) / 한양출판 1994

『모독』(티베트․네팔 기행기) / 학고재 1997

『어른노릇 사람노릇』/ 작가정신 1998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묵상집) / 여백 1999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등단 30주년 기념 에세이 선집) / 세계사 2000

『자전거 도둑』(동화집) / 다림 2000

『두부』/ 창작과비평사 2002

『한 말씀만 하소서』/ 세계사 2004

『잃어버린 여행가방』/ 실천문학사 2005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 실천문학사 2006, 열림원 2008

『호미』/ 열림원 2007

『생애 최고의 날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박완서 정호승외)/ 조화로운삶 2007

『대화』(박완서, 이해인, 방혜자, 이인호 대담집)/ 샘터사 2005

동화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동화집) / 샘터사 1979

『산과 나무를 위한 사랑법』(동화집) / 샘터사 1992

『부숭이의 땅힘』(장편동화) / 한양출판 1994

『속삭임』(동화집) / 샘터사 1997

『이게 뭔지 알아맞춰 볼래?』(그림동화) / 미세기 1998

『자전거 도둑』/ 다림 2000

『옛날의 사금피리』/ 열림원 2002

『보시니 참 좋았다』/ 이가서 2004

기타

『박완서 문학앨범』/ 웅진출판 1992

『박완서 문학 길찾기』(박완서 문학 30주년 기념비평집)/ 세계사 2000

『옥상의 민들레꽃』(ㅎ만화로 보는 한국문학 대표작선 003, 강웅승 그림/ 이가서 2003

『나목에 핀 꽃』(그림 소설을 읽다 2, 박항률 그림/ 실천문학사 2005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 2(김광성 그림)/ 세계사 2005

번역

'엄마의 말뚝'/'번역이란 무엇인가'(영역), 유영란 옮김, 태학사, 1991

'엄마의 말뚝1/ Le pequet de ma mere : recit (불역), by Kang Go bae,

helene lebran, le majang, arles : actes sud, 1993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das familienregister : Roman (독역),

by helga picht, berlin : Volk and Welt ,1994

'나목'/ The naked tree(영역), by Yu Young-nan, East possession and other story(영역)

by Chun Kyang-ja, Armonk, N .Y :M .E sharpe, 1999

'저문 날의 삽화' 외 外 5편/ A sketch of the fading sun(영역),

이현재 옮김,New York : White pine,1999

'그 가을의 사흘 동안' / Three Days in That Autumn(영역), 2001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Aquella Montana Tan Lejana 2003

출처 : 세계사 박완서 소설 전집 1993년 초판~

2. 박완서 관련 신문기사와 칼럼 모음

꼴찌를 향한 격려…25년만에 내용 보강 (2002.04.12) 조선일보

  70년대 제일 유명한 산문집이었을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가 다시 나왔다. 25년 만이다. 이번 책은 후에 나온 글들을 보태고, 초판본의 내용을 새로 다듬었다. 70년대 초부터 90년대 전반부까지 약 20여년 동안 쓰여진 글 45편이다. 박완서의 책을 대할 땐 늘 독자의 가슴이 울렁댄다. 한 줄 한 줄 읽어가다가 속절없이 따뜻해진다. 글로 박완서를 만날 때 뭉클하게 당하고 마는 그 느낌은 얼마나 기대가 되던가.

  나는 그런 표정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꼈다. 여직껏 그렇게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그렇게 정직하게 고독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그는 환호 없이 달릴 수 있기에 위대해 보였다.(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1976년)

한국인들은 그때부터 우리말 사전에서 꼴찌라는 말을 다시 발견했다. 꼴찌의 인권을 기억해내고, 그 말을 온 사방에 유행시킨 것은 박완서의 덕이었다. 마라톤뿐이 아니라 교실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우리는 꼴찌를 향한 따뜻한 격려의 눈길을 회복했다.

  박완서의 산문은 옛 시절의 화면을 오늘날의 공간으로, 생생하고 현재적으로 살려내는, 특이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어머니가 여우를 만났다는 평안도 개성의 긴등고개 이야기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건만 박완서가 들려주면 마치 어제 일어난 일 같았다. 박완서의 어린 시절은 영어의 ~ing가 붙은 그 속도감으로 우리 곁을 스치고 있었다. 창고에 묻혀 아련해진 것들이 느닷없이 생생한 빛깔로 광 밖에 꺼내질 때 독자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없는 게 없이 마을을 먹여 살렸던 뒷동산, 논 가장자리의 군우물, 새끼줄로 엮어 진흙을 싸바른 흙다리 얘기는 그 시절 범박한 우리네 모습이었을 것이지만, 박완서의 입을 빌리는 순간 마치 판타지 영화에서처럼 정물화 속의 먼지 앉은 인물들이 화판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참척의 고통에 짓눌려 있을 때 주변의 적당한 무관심이 때론 우리에게 숨구멍이 된다는 것을, 베네딕도 수녀원 얘기를 들으면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절박한 삶의 엄정함, 간절한 삶의 구성짐을 참 듣기 좋게 들려주었다.

청솔 가지가 탁탁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탈 때의 활기찬 불꽃과 향긋한 송진 냄새는 내 향수의 가장 강력한 구심점이다.(내가 잃은 동산, 1993년)

  그 시절은 참으로 봄날이 길기도 길었고 아이들 주전부리의 콩볶아 먹기처럼 구수했다. 소설을 쓸 때 필요했던 상상력의 긴장을 잠시 내려놓고 그저 떠오르는 대로 편안하게 쓰는 글이어서(실제로 에세이를 쓸 때 그가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되려 독자들을 빨아들이는 힘은 더 강력했다.

  문학담당을 맡고 나서 맨 처음 만났던 작가가 박완서였다. 그때 그에게 신(神)을 물었던가. 아차산에 밤을 따러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침에 들어가건 오후에 들어가건 해질 녘 숲을 빠져 나올 때 그들이 딴 밤의 분량은 대개 비슷비슷하다고 했다. 그는 그것을 신의 손길이라고 했다. 박완서의 글 쓰는 힘은 어디에 비밀이 있을까. 자연에 순응하는 삶에서 거스르고 투쟁하는 삶으로 넘어가길 강요하는 세태에 대한 이질감이 아닐까

( 김광일기자 )

한국 대표 소설 오디오복 출간,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등... (2002.03.18) 한국일보

  커뮤니케이션 는 한국의 대표적 단편소설 100편을 CD 80장에 녹음한 오디오북이 출간했다. 수록작은 이해조의 '자유종',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김동리의 '등신불', 이청준의 '서편제',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 등이다. KBS 성우 서혜정씨가 나레이터, 피아니스트 박용준씨가 배경음악, 현직 고교교사 이만기씨가 해설을 각각 맡았다.

현대문학 살리기 예술인들이 나섰다 (2002.02.26) 조선일보

  재정 위기에 내몰린 출판사 현대문학 양숙진사장이 행복해 하고 있다.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現代文學)> 이 극심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문인들과 각계 문화예술인들이 서로 돕겠다며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 고은(高銀), 소설가 박완서(朴婉緖), 박맹호(朴孟浩) 민음사 대표, 오경환(吳京煥) 한국종합예술학교 미술원장, 천호균(千鎬均) 쌈지 대표, 최열(崔) 환경연합 사무총장 등 100여명이 모여 지난해 말 현대문학을 살리자는 뜻을 모아 현대문학을 아끼는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후원회를 결성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성금을 보내거나 정기구독을 신청하는 등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성금 대열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도 계속 늘어나고 있어 문학계의 잔잔한 화제가 되고 있다. 문인들의 성금 후원에 이어 오는 5월에는 한국종합예술학교 미술원장인 오경환 교수의 주도로 예술인들이 모여 현대문학 돕기 전시회를 연다. 지금까지 발간된 현대문학의 표지를 모두 모아 문학지의 반세기 역사를 표현하는 대형 작품을 중심으로 약 50여점의 드로잉 전시물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아직 구체적인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으나 3일간의 일정으로 서울 현대화랑에서 열릴 예정이다. 양숙진 현대문학 사장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손길을 받을 줄은 몰랐다며 고마움을 전하면서 한국 문학이 아직 건재함을 보여주어 든든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현대문학은 1955년 발간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호도 빠지지 않고 한국 문학잡지의 명맥을 유지해온 우리나라 최장수 문학지(文學誌)다. 2월 현재 통권 566호를 기록하고 있다. 소설가 박완서(71)씨는 나에게 문학적인 동기를 부여해준 것이 바로 현대문학이라고 말하며 50년대 창간 당시를 회상했다.

  박완서씨는 그동안 출판사로부터 무료로 받아오던 잡지에 구독 신청을 하면서 일정액의 후원금을 10년치 구독료라는 말과 함께 현대문학사에 찔러줬다. 문단의 사정을 아는 다른 문인들은 원고료를 받지 않거나 만나는 사람마다 구독을 권하고 있다. 이 같은 도움으로 독자 수가 대폭 늘어 폐간 위기에 놓인 현대문학이 일단 위기는 넘기게 됐다. 하지만 매달 생기는 1000만원의 적자를 면하기 위해서는 정기 구독자가 지금의 두 배는 되어야 한다고 한다. 만성적인 적자를 해결하려면 현재의 도움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문학 평론가이자 번역가인 김화영 고려대 교수는 경제 논리로만 따진다면 사라져야 마땅할지 모르지만 현대문학이 우리 문단에서 차지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현대문학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한국 문학이 설자리를 잃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문학의 위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양숙진 사장은 한 달에 책 한 줄 읽지 않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백화점에서 수십수백만원짜리 물건을 샀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비단 현대문학뿐 아니라 한국 문학, 나아가서는 독서 문화 자체가 점점 소외 받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일반인들의 관심을 호소했다.

양숙진 사장은 1997년부터 월간 현대문학 제8대 주간으로 일해오다 2000년 3월 (주)현대문학 대표이사로 취임해 대표 이사직과 주간직을 겸하고 있다.

( 유나니 주간조선 기자 )

[명작 명문장] 박완서 '엄마의 말뚝'에서 (2001.12.17) 한국일보

"지나간 세월 역시 부정되어서는 안될 것"

  지나간 세월 역시 부정되어선 안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선언으로 끝나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 이러한 선언의 근거가 되는 한 가계의 상경기와 그들이 서울에 마련한 괴불마당집에 얽힌 사연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엄마의 말뚝>은 송도(松都) 인근에 위치한 박적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젊은 엄마가 어린 남매와 함께 자리를 잡아가는 이야기다. 셋방살이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인왕산 아래 현저동 꼭대기에 집을 마련한 엄마가 감개무량하여 말한다.

 "기어코 서울에다 말뚝을 박았구나. 비록 문밖이긴 하지만…."

기쁨과 아쉬움이 섞인 이 말 속에는 지난 시절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왔던 많은 사람들의 심정이 담겨 있다. 일신의 입신이든 가문의 영예든, 목적을 향해 적수공권으로 길 떠나는 사람의 흉중만큼 거룩한 것은 없다. 소설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을 말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이렇게 부정되어서는 안될 그 무엇에 대하여 말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그 무엇을 이렇게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우린 현저동 괴불마당집을 잊지 못했다. 특히 어머니는 늙어 가실수록 더 심했다. 무엇이든지 그 시절하고 대보려 드셨다. 한 문장도 보태고 버릴 것 없이 이어지는 이 회고담 소설은, 가능성의 힘이 그러하듯이 지나간 세월의 힘이야말로 우리의 삶에 보탬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이 명작인 까닭은 이렇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투영해 볼 수 있는 근거와 여유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의 말뚝>을 읽은 것은 이십여 년 전,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현저동 꼭대기 고모님 댁에서였다.

그곳에서 독립문과 퇴계로를 지나 학교에 다니던 스무 살짜리 천둥벌거숭이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 소녀가 놀던 골목길을 걸어다니면서, 소설가가 되지 못한다면 어쩔까 하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내게 이 소설은 자신과 소설가라는 직업인의 운명적 연관성을 비끌어 매주는 주술적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그 날을 돌아보며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나는 참으로 성공을 해도 까무러칠 정도로 성공한 셈이다.

  최근 나는 소설선집 작가의 말에 내 아들과 같은 지난날의 내가 지친 나를 부축하고 있다고 썼다. 엄마의 말뚝 말미에는 소설의 화자가 사십여 년 만에 어린 시절 자신이 살던 괴불마당집을 찾아보는 장면이 있다. 이와 같이 나도 곧 이십여년 전 내가 엄마의 말뚝을 읽던 현저동 꼭대기를 찾아가 볼 작정이다. 그곳에 박았던 나의 말뚝은 이 소설을 읽던 날의 감동과 같이 건재한 지 돌아봐야겠다.

(마르시아스 심<소설가>)

박완서씨 책 장례식은 문학모독 통탄 (2001.11.18) 조선일보

  소설가 이문열(53)씨와 관련된 일련의 문학적․사회적 사건들에 대해 문인들의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 원로소설가 박완서(70)씨는 이번 주 발간되는 계간 <문예중앙>(겨울호)과 인터뷰에서 지난번 책 장례식은 문학이 모독당하는 일이었다고 말하고,장례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이를 사후 묵과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문인단체들도 통탄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나섰다.

  이문열씨는 지난 7월 신문 없는 정부 원하나 홍위병을 떠올리며 조선․동아 신문 칼럼에서 언론사 세무조사와 일부 시민단체들에 대해 개인적인 염려를 담은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이어 이를 비난하는 추미애 의원의 취중 발언으로 물의가 있었으며, 국회 문화관광위 최재승 의원이 통일문학전집에서 이씨의 작품을 배제시켜야 한다고 서면 발언, 또 한차례 시끄러웠다.

  이 일들은 일정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였던 정치․문학의 관계를 긴장시켰으며, 문단 내에서도 정치적․이념적 입장을 도드라지게 하면서 갈등요인으로 잠복했다. 급기야 지난 11월3일 이씨의 사숙이 있는 경기도 이천 부악문원 앞에서 이문열 돕기 운동본부라는 단체의 회원 30여 명이 이씨의 책 수백 권을 관처럼 묶어 모의 장례식을 치르는 사태에 이르렀다.

박완서씨는 인터뷰에서 내가 이문열씨와 같은 생각을 하거나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전제, (그러나) 작가에겐 최소한 그런(책 장례식 같은) 상처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박씨는 이어 그리고 수많은 문학 단체의 침묵은 또 뭡니까. 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떠한 발언도 없이 그냥 넘기는 건 문학하는 사람들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라고 밝혔다. 박씨는 18일 전화통화에서 "그때는 정말 참담한 느낌이었다"면서 이문열씨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를 떠나서 그는 일단 존중 받아야할 작가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특히 책을 관속에 넣고, 아이에게 책표지(영정)까지 들린 것은 충격이었다󰡓고 말하고, 문학단체가 이씨를 옹호해야 된다는 뜻이 아니라, 문학이 이렇게까지 돼야 하는가에 대한 입장 표명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 김광일기자 )

'미당 황순원문학상' 출간 수상자 박완서 '그리움을 위하여' (2001.10.09) 한국일보

중앙일보사가 제정한 제1회 미당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중앙일보 문예중앙 펴냄) 두 권이 출간됐다. 미당문학상 작품집에는 수상작인 정현종의 '견딜 수 없네' 등 본심에 오른 시인 10명의 작품이 수록됐다. 본심 최종 후보작의 작가는 고재종 김명인 김혜순 나희덕 송수권 정진규 최하림 허만하 황동규 등이다. 황순원문학상 작품집에는 수상작인 박완서의 '그리움을 위하여' 외에 최종 후보작인 김영하의 '크리스마스캐럴', 김원일의 '나는 두려워요', 박범신의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윤후명의 '달의 향기', 이혜경의 '일식', 전성태의 '퇴역레슬러', 최일남의 '명필 한덕봉'이 실렸다. 시상식은 12일 오후 4시 호암 아트홀에서 열린다.

[시상] '대숙명인상' 받는 소설가 박완서씨 (2001.05.17) 동아일보

  소설가 박완서(朴婉緖․70)씨가 22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도곡동 숙명여고에서 대숙명인(大淑明人)상을 받는다. 개교 95주년을 맞는 숙명여고는 해마다 학교와 사회에 기여한 동문들에게 자랑스런 숙명인상을, 그 중 한 명을 뽑아 대숙명인상을 수여해 왔다. 올해 자랑스런 숙명인상에는 원로 섬유예술작가 서수연(徐壽延․84)씨 등 10명이 선정됐다. 졸업한지 51년 만에 손녀뻘되는 동문들 앞에서 상을 받는 박씨의 소회는 각별하다. 1944년부터 6년동안 매일 아침 한 시간씩 걸어서 통학했던 학창시절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이기 때문.

  좋은 교육환경에서 유능하신 선생님들로부터 배웠던 기쁨이 제일 컸어요. 특히 문과반 담임이셨던 소설가 박노갑 선생님에게 엄격한 문장 교육을 받았던 경험이 지금까지도 제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6․25 전쟁으로 대학을 포기해야만 했던 그는 당시 받았던 교육이 글 쓰기 밑천의 전부였다. 급우였던 소설가 한말숙(韓末淑), 시인 박명성(朴明星)씨와 교유한 것도 큰 힘이 됐다. 당시의 자극이 박씨가 마흔이 넘어 늦깎이로 문단에 데뷔해 문학의 꿈을 이루게 한 힘이었던 것.

  박씨는 학창시절 추억을 묻자 어휴, 뭐 그런걸이라며 얼버무렸다. 학창시절 특별하게 기억나는 일은 없네요. 간혹 자습시간 빼먹고 화신극장에 영화 보러 갔던 일 정도지요. 정말 모범생이었거든요. 졸업 때 우등상도 받았어요.

서랍 속 일기장처럼 가슴에만 묻어두고 싶은 것일까. 그의 대표작으로 자전적 소설인 엄마의 말뚝에도 이 때의 기억을 싣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본인은 자꾸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윤정훈기자>

박완서 소설 '아주 오랜 된 농담' CD 도서로 (2001.05.07) 한국일보

  소설가 박완서씨의 15번째 장편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이 한국시각장애인도서관에서 CD도서로 나왔다.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허위와 위선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내는 박씨 특유의 날카로운 사회현실 비판 정신이 이 작품에서도 오롯이 살아있다. 고령의 나이에도 식을 줄 모르는 창작력과 오히려 풍성해진 젊은 필체가 거침없이 느껴진다.

  <아주 오래된 농담>은 크게 두 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화자 심영빈의 매제인 송경호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고, 심영빈의 결혼생활과 일탈, 현금과의 불륜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한 축이다. 자칭 재벌인 Y건업의 장남 송경호가 암으로 죽음을 맞는다. 그의 죽음은 그것조차도 돈과 권력의 과시 수단으로 생각하는 그의 가족에 의해 본인은 병명도 모른 채 죽어간다. 송 회장은 아들의 장례식을 찍은 장편의 비디오를 보며 어떤 인사가 참석했는지, 장례식이 얼마나 화려하고 성공적으로 치러졌는가를 과시한다. 아들에게 병명을 알리지 않은 것도 아들의 여린 마음에 대한 배려가 아닌, 실상은 유산에 대한 그의 결정권을 배제하기 위한 의도였다. 의사로서 명성이 있는 심영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결혼과 불륜의 관계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이면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영빈의 아내 수경은 두 딸을 가졌지만 아들에 대한 욕심으로 계획된 출산을 준비한다. 아들을 낳아야지 만 어머니로서의 지위가 확보되는 것이라는 수경의 그릇된 믿음은 생명에 대한 신성함도 여지없이 무력하게 만든다.

  한편 영빈은 이런 아내에게 혐오를 느끼면서 초등학교 동창인 현금을 만나 불륜 관계를 맺는다. 둘 사이가 깊어지면서 자유분방한 이혼녀인 현금은 처음으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열망을 품는다. 그러나 자신이 불임임을 알게 된다. 몸은 살아 있지만 정신이 먼저 소멸한 수경의 출산과, 열망은 살아있지만 이미 몸이 쇠퇴한 현금의 불임. 죽음의 뒤틀림만큼 탄생의 뒤틀림도 극에 달해 있음을 보여준다.

지은이는 이를 통해 인간으로서 가장 숭고해야 할 죽음과 탄생마저도 돈의 잣대와 가부장적 이념으로 퇴색하고 인간의 사랑과 애정이 얼마나 변형되고 왜곡될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배현정기자

여기 아동 도서 코너 맞아요? 박완서씨등 작가들의 동화 (2001.04.02) 한국일보

  요즘 서점의 아동 도서 코너에는, 낯선 이름의 지은이가 펴낸 책들이 제법 많이 꽂혀 있다. 어른들이 읽는 시나 소설을 쓰던 시인작가들이 최근, 어린이들을 위한 동시나 동화를 써서 책으로 펴내는 일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부족한 창작 동화 필자를 보완하는 한편, 아동 문학가와 다른 색깔의 작품으로 관심을 끌어 보자는 계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요즘 선보인 소설가시인들의 동시들을 살펴본다.

널리 알려진 소설가 박완서 씨의 장편 동화 '부숭이는 힘이 세다'(계림북스쿨 펴냄)의 줄거리는 이렇다.

서울대 "논술점수 5~7점差 나게" 서강대는 박완서의 소설 출제 (2001.01.09) 한국일보

  서울대는 9일 실시한 논술시험의 채점을 강화, 예년보다 큰 점수 차가 나도록 해 약화된 수능시험의 변별력을 보완키로 했다고 밝혔다. 서울대는 이를 위해 올해 논술을 처음으로 인문사회예능계와 자연체능계로 분리 출제했다. 이에 따라 올해 논술 성적 편차는 5~7점까지 벌어져 당락의 결정적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 인문 예능계 논술에선 중국 문호 루쉰(魯迅)의 '작은 사건(一件小事)' 전문과 슈바이처의 자서전 '슈바이처의 생애' 일부 등을 제시한 뒤 '공통으로 나타난 삶의 자세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해 논하라'고 물었다. 자연 예체능계에서는 고교 과학교과서 등을 참조해 자체적으로 보완 작성한 글과 최근 국제의학저널에 실린 글을 제시하고 인간과 동물의 지적, 정서적 능력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느냐는 논점을 중심으로 기술토록 했다.

  서강대는 인문계열과 사회계열 공통으로 플라톤의 '파이돈', '장자(莊子)', 박완서의 '한말씀만 하소서'에서 발췌한 글들을 지문으로 제시하고 '죽음에 대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태도가 각기 다르게 드러난 이 글들의 차이점을 기술하고 인간이 죽음에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논술하라'고 요구했다.

  폭설로 인한 교통난으로 불편을 겪는 수험생을 고려,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8개 지역에서 동시에 논술 및 면접을 치른 동국대는 혈연, 지연, 학연 등 각종 '연고(緣故)'에 대한 지문을 제시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연고주의와 건강한 공동체 문화에 연고주의가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묻는 문제를 출제했다.

김용식기자

[문학마을] '박완서 문학30년' 특집호 발간 등 2000.12.11 (한국일보)

  매호 한 작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계간 '작가세계'는 2000년 겨울호를 '박완서 문학 30년' 특집호로 발간했다. '작가세계'는 "1991년 봄호에 이미 박완서 특집을 마련했지만 올해가 그의 등단 30주년이고 개인적으로 고희를 맞는다.

[문학기행] 박완서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 2000.11.01 (한국일보)

'시간의 더께'는 분노를 연민으로 바꾸나. 작가는 서문에서 젊은이들 보기에는 무슨 맛으로 살까 싶은 늙은이들 얘기가 대부분이다. 늙은이 너무 불쌍해 마라. 늙어도 살맛은 여전하단다. 그래 주고 싶어 쓴 것󰡓 이라고 했다. `너무도 쓸쓸한 당신' 은 박완서씨의 일곱 번째 창작집이다. 18년 전 `엄마의 말뚝' 에서 시작한 소설 위의 시간은 그 `엄마' 를 지나 어린 딸이 엄마가 되고, 엄마가 다시 할머니가 된 곳까지 흘러왔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사는 것을 맛있어 하면서 산다. 늙음의 육체적 추함을 감출 수 없듯 그는 쓰고 불편한 것의 맛을 아는 게 연륜이고, 나는 감추려야 감출 길 없는 내 연륜을 당당하게 긍정하고 싶다󰡓고 했다. 9편의 단편은 어쩔 수 없는 그 추함에 대한 쓸쓸함과 연민이다.

  `우리도 느끼고 재미있어‘ 는 느끼고 고하는 사는 맛에 대한 이야기이다. 연애감정은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정열이 비어있기에 `마른 꽃' 은 늙음의 속성을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없음을 안다. `환각의 나비' 는 가족으로부터 떠나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완전히 털어 버린 치매 노인의 모습이다. 평생 난봉꾼으로 애정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이 살아온 남편을 받아들이고 죽어가는 어머니는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들의 관계와 삶은 `난해한 영화' 이기에 딸은 다시 한번 아버지를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싶어한다.

  처가에 절을 하며 사는 아들의 졸업식에서 만난 별거중인 남편의 초라한 모습, 그것이 다 못난 제 팔자 탓이라고 경멸하면서도 정강이의 모기 물린 자국에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을 본다. 그렇다고 그의 노인이야기가 `꽃잎 속의 가시' 처럼 가족 속에서의 존재와 죽음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꽃잎 속의 가시' 의 기막힌 사랑의 사연을 통해 정신대문제를 슬쩍 건드리기도 하고, `J-1' 비자를 가지고 한국을 보는 미국의 시각에 분개한다. 늙었다고 마음과 생각까지 함께 늙었다고 하지 마라. 너무나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남편. 그러나 밖에서는 살아 남기 위해 너무나 비굴하게 구는 남편. 참고 살던 아내는 어느 때인가부터 남편에 대해 적의를 느낀다.

  언젠가는 헤어져 혼자 살기를, 아니면 복수를 꿈꾼다. 늙어서 봐라. 아파도 눈이나 깜짝 하나 봐라. 백살도 넘어 살 것 같은 저 인색함이란. 저 꼴 보기 싫어서라도 내가 빨리 죽어야 할텐데. 많은 아내들은 이렇게 말하거나 생각한다. 그래서 황혼이혼이 늘고, 한 집에 살면서도 필요한 말만하고 딴 방을 쓴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 노인들은 함께 산다. 늙어가면서 남편의 못된 성격, 무신경한 태도, 추레한 모습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다. 차라리 멋지게 성공해 보아란 듯이 노후를 맞이했으면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라고 하면서 외면했을 텐데.

  그 남편이 어느날 숟가락질을 제대로 못해 밥을 흘린다. 정말 거지가 돼 나타나거나, 아파서 누웠다. 이제 아내의 복수가 시작되는구나. 그러나 아내들은 그 기대를 배반한다. 아니 자신을 배반한다. 인생이 불쌍하다. 그나마 내가 돌보지 않으면 누가 저 인간 거들떠라도 보겠느냐. 저 영감보다 내가 조금 늦게 죽어야 할텐데.박완서씨는 `연민'이라고 했다. 스스로 가부장적인 문화에 얽매여 의무감으로 모든 것을 바치고 초라해진, 살을 맞대고, 같이 자식을 책임지면서, 세월을 공유해온 남자에 대한 측은한 마음. 약자를 동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연민은 세월을 공유하지 않고는 생기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연민이자, 늙음과 삶의 허망함에 대한 연민이다. 모성을 자극하는 연민이야말로 여성성의 고귀한 부분이다.󰡓 그의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 은 연민들로 가득하다. 그의 연민은 때론 노추를 잔인하게 폭로하며 확인시키고, 때론 세월의 상처를 쓰다듬는 손길이 되고, 아직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열정이 된다. 늙음을 아는 자, 아니 늙음을 가진 자가 아니고는 그 늙음 속에 기든 아름다움을 알 리 없다.

  단편소설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 아내도 시골아이들 꽁꽁 언 발을 세워놓고 졸업식에서 장장 반시간 이상 연설을 하는 초등학교 교장인 남편이 죽도록 미웠다. 그래서 딸의 대학진학을 핑계로 별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들 졸업식 날 그는 허방을 밟듯이 사돈에게 아들을 빼앗겼다는 상실감을 느끼고는 남편을 택시에 밀어 넣고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러브호텔로 간다.

  어느새 신도시까지 쳐들어온 러브호텔. 그만큼 사랑할 공간이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할 사람을 잘못 만나 모두들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일까. 가을 한강변을 따라 이어진 러브호텔에서의 사랑은 비닐판으로 가린 자동차 번호 판만큼이나 엉성하게 `욕정' 을 숨기려 한다.

그러나 초로의 아내는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자신의 `욕정'이 아니었다. 일생을 헛산 것 같은 허전함, 그래서 검부러기라도 움켜잡듯 한 것이 고작 그토록 지긋지긋해 했던 남편의 정강이었다.

군데군데 모기 물린 자국이 있는 그 초라한 정강이를 보고는 연민이 목구멍으로 뜨겁게 치받쳐 오는 것은 바로 그 모습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세월의 때가 낀 고 가구를 어루만지듯 남편의 정강이를 어루만지면서 그는 자신의 늙음으로 그 늙음 뒤에 남겨진 허방의 인생을 어루만진다. 작가는 말한다. 이를 누가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가.󰡓 늙은이의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적어도 같이 아이를 만들고, 낳고, 기르는 그 짐승 같은 시간을 같이한 사이' 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닥칠 늙음의 속성들, 이를테면 기름기 없이 처진 속살, 우수수 떨굴 비듬, 게걸스런 식탐, 의처증과 건망증이 범벅이 된 잔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단편 `마른 꽃' 의 주인공은 딸의 은근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조박사와의 결합을 단호히 거부한다. 아차산의 단풍이 늦가을 햇살을 받아 더욱 붉다. 15년 전 박완서씨는 그 산자락에 삼태기처럼 담긴 아치울 마을(경기 구리시 아천동)에 집을 장만했다. 그동안 작업실로 쓰다 2년전 집을 새로 지어 아예 이사를 왔다. `노후에 마음 붙일만한 곳'을 찾다, 이이화씨에게 한문을 배우러 오다 마음에 들어 자리잡은 곳이다. 잡목으로 우거진 아차산 밑으로는 실개천이 돌아나가고, 몇 년 전만 해도 마을 앞 논에서는 개구리가 우는, 시인 정지용의 `향수' 같은 마을. 특별한 풍경도 아니다. 어릴 때 그가 살던 고향도 이랬고,

  단편 `환각의 나비' 에서 치매에 걸린 영주 어머니가 나비처럼 날개를 접고 자유롭게 쉬는 마을이기도 하다. 영주는 작가의 친구이다. 친구는 몇번이고 집을 나간 어머니를 데리고 왔다. 그러나 끝내 그 어머니는 모습을 감추었다. 방송을 하고, 전단을 붙이고, 전국을 뒤져도 끝내 어머니를 찾을 수 없었다. 친구는 치매에 걸려서도 빨래를 깔끔하게 개고 채소를 다듬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익힌 따뜻하고 여문 손길을 그리워한다고 했다. 그 친구에게 위로가 되라고 이 소설을 썼다. 너의 어머니는 편안한 곳에서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완전히 털어 버린 그 가벼움, 그 자유로움으로 어디 낯익은 마을, 천개사 포교원 같은 곳에서 지낼 것 이라고. 천개사 포교원이란 낡은 집도, 그 집이 있는 원주민 동네라는 곳도 실제는 없다.

  아니 이런 마을과 집은 어디든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 자신이 사는 아치울만 해도 몇 년 전 마을 곳곳에 이런 집이 있었다. 옛날 영주 어머니가 하숙을 치던 종암동 낡은 집도 다를 게 없다. 그의 가출은 고생스런 기억으로의, 고달프고 추웠지만 어머니로서 살았던 시간으로의 회귀이다. 작가는 모든 게 빨라진 시대가 시간에도 영향을 미쳐 노인들의 자연스런 기억상실과 평화를 깬다고 했다. 그래서 영주의 어머니처럼 시간이 고여있던 유년시절의 공간으로 숨어버리는지 모른다고 했다. 어떤 얘기든 내 얘기처럼 쓰지만, 이 소설들만큼 편안하게 쓰고 읽은 적은 없었다󰡓 는 박완서씨. 아직도 글 쓰기를 즐기는 그는 곧 일흔이 된다.

박완서씨등 '환경홍보사절' (2000.10.05) 조선일보

  소설가 박완서, 가수 이미자씨 등 문화예술계 인사 21명이 6일 환경부의 환경홍보사절로 위촉된다. 강원룡 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과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은 사절단 고문으로 참여한다. 환경부는 사회적 영향력이 큰 저명인사들이 방송출연, 칼럼기고, 공연, 또는 집필을 통해 자연스럽게 환경사랑과 생명존중 정신을 전해주도록 홍보사절로 위촉했다󰡓고 밝혔다.

  홍보사절은 이들 이외에 소설가 김주영 이경자, 방송작가 송지나, 의사 이시형, 사진작가 김태정,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강동석, 피아니스트 김영호, 배우 문성근 유인촌 송승환, 연출가 이윤택, 탤런트 김창숙, 영화제작자 심형래, 방송인 임백천 김연주 부부, 아나운서 황현정, 유도선수 안지영, 양궁선수 이은경씨 등이다. 이들은 6일 낮 2시 김명자 환경부장관과 함께 은평 시내버스공영차고지에서 서울역까지 천연가스 시내버스 시승식을 갖는다. 앞으로 환경연극제와 음악제 등 다양한 환경 프로그램에도 참여한다.

( 김수혜기자 )

'서울 국제문학포럼' 9월26~28일 세종문화회관서 국제문인 사교의 장 ' 박완서씨등 여러 문인들도 참여 2000.09.15 (한국일보)

올 가을 서울서 국제적인 문학 지식의 사교장이 펼쳐진다. 86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월레 소잉카 등 세계적인 문인들이 초청돼 새 천년의 문학담론을 논의하는 <서울 국제 문학 포럼>이 대산문화재단 주최로 오는 26~28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되는 것.

소잉카를 비롯한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 등 세계적인 문인과 석학 19명과 김우창 박완서 유종호 이문열 정현종 황석영 황지우 최장집 등 국내 문인 학자 55명이 참여, '경계를 넘어 글 쓰기 다문화 세계 속에서의 문학'을 주제로 새로운 시대의 글 쓰기에 대해 토론한다.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들 인세지금 위임 소송 2000.01.03 (한국일보)

「이상(李箱)문학상」 수상작가들이 작품집 출판사를 상대로 인세지급을 요구하는 위임소송을 제기했다. 수상작가들과 저작권 신탁계약을 맺은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는 3일 ㈜문학사상사를 상대로 서적제작․복제․배포금지 및 6,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법에 냈다. 협회를 통해 소송에 참가한 작가들은 김승옥, 박완서, 윤흥길, 조세희, 오정희, 김주영, 김원일, 조해일, 이제하, 유재용, 김만옥, 박양호씨 등이다.

협회는 소장에서 『피고가 77년부터 제정된 이상문학상의 수상작품집을 출판하면서 상금만 지급한 뒤 별도의 인세지급 없이 계속 서적을 판매해왔다』며 『피고는 작가들과 출판권 설정계약이나 저작권 양도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는 만큼 부당 이득금을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단법인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는 88년 문화체육부장관 허가로 설립, 우리나라의 문예․학술 분야의 저작권에 대하여 저작권자들로부터 신탁을 받아 이를 관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문학사상사측은 『협회 측이 98년 7월부터 문학상 수상작품집에 대해 저작권법 위반이라는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을 계속해왔다』며 『이번 소송을 계기로 민․형사상 모든 법적 대응을 해나가겠다』고 반박했다.

김영화기자 

한국문학 작품,6개 언어권서 번역 출간 (1999.11.01) 연합뉴스

  한국문학 작품들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지원으로 6개 언어권에서 번역돼 해외에서 출간됐다. 번역된 작품은 6종이며 언어권은 영어, 불어, 독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포르투갈어 등 6개이다. 영어권에서는 박완서씨의 단편선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外」(미국 샤프출판사), 불어권에서는 조정래씨의 소설집 「유형의 땅」(프랑스 아르마탕 출판사),폴란드어권에서는 이호철씨의 장편 「남녘사람 북녘사람」(폴란드 노빌리타스 출판사) 등이 번역, 출간됐다. 이밖에 최인훈, 신경숙, 윤후명씨의 작품이 수록된 「한국단편소설선」(독역),「한국동화집」(러시아어역), 「이상 오감도 外」(포르투갈어역) 등이 출간됐다.

(서울=연합뉴스 현영복기자)

[박경리-박완서 만남]『토지문화관은 미래공간』 (1999.06.03) 동아일보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초여름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던 지난 2일, 작가 박경리(72)와 박완서(68)의 만남은 그랬다.

  두 사람만의 오붓한 만남은 선배 박경리가 후배 박완서의 새집을 찾아 이뤄졌다. 교유한 세월이 30여년 이지만 박경리가 박완서의 집을 찾기는 5년만이고 그것도 이번이 두 번째. 박완서는 지난해 서울의 아파트생활을 정리하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차산 기슭(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으로 이사했다. 박경리는 마중 나온 박완서의 손을 맞잡으며 이번이 아니면 정말 다시는 못 올 것 같아서라며 반가워 했다.

  이번이라는 단서, 박경리에게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지난 3년 간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온 강원도 원주의 토지문화

이 완공돼 9일 개관식이 열린다. 그는 이날을 계기로 이기주의자로 변신을 선언하겠다고 말했다.

  ▽박경리〓이젠 정말 글 쓰고 뒷산 가꾸는 일에만 몰두할 거요. 소설 쓸 때는 그렇게 지긋지긋하고 끔찍하더니 󰡐토지문화관일에 휩쓸려 세상사에 시달려 보니까 새벽에 뻐꾸기 소리 들으 며 글 쓰던 시절이 너무 그리워, 책상 앞으로 돌아가야지. 거기밖엔 살아갈 길이 없어요.

  ▽박완서〓저는 이기주의라고는 차마 말못하고 늘 나는 개인주의자예요라면서 번잡스러운 일들을 피해왔어요(웃음). 서울을 떠나 이 곳으로 온 뒤에 저도 정신적으로 많이 건강해지는 걸 느낍니다. 봄 산에 새순 돋는 것, 그만큼 황홀한 광경이 있을까요.

  토지문화관 이사를 맡은 박완서와 이사장인 박경리. 두사람에게 이 새 문화공간은 어떻 게 운영해야 할지 공통의 화젯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박완서〓처음에는 그 큰공간을 보면서 󰡐아휴, 이걸 어떻게 하나 했는데 완공된 모습을 보니 이 런저런 구상이 막 떠올라요. 저는 토지문화관이 자연과 어우러진 것처럼 문학 미술 음악 영상 만화 무엇이든 넘나들어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실험의 장이 됐으면 해요.

  ▽박경리〓나도 분야를 막론하고 사는 데 관계되는 것은 이 곳에서 다 해보자고 생각해요. 문 화 정치 경제 무엇이든 현안을 놓고 토론하는 공간은 어떻겠어요. 전문가들이 때로는 멱살 잡이까지 해가며 결론에 이를 때까지 몇날 며칠이라도 토론하는 공간이 돼야겠지요.

  ▽박완서〓너무 문학에 경도돼서 운영되지 않길 바랍니다. 소설 토지 때문에 생긴 공간이니 문학 에 한정해 이용하자고 든다면 고시촌 밖에 더 되겠어요.

  ▽박경리〓나는 문화에 대한 보수적인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아요. 젊은이들이 와야 미래공간이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나 박경리의 마음은 이미 토지문화관에서 책상 앞으로 돌아와 있다. 요즘 그는 돋보기로 일어사전을 들추며 토지 일어번역에 몰두한다. 토지1부 2백자 원고지 6백장 분량을 한 달만에 일어로 옮겼다. 극일(克日)을 위한 일본언론도 이제부터 써야할 큰 주제.

  박완서는 가까운 지인들 조차 그가 곧 칠순을 맞는다는 사실을 자주 잊게 만든다. 세월이 흘러도 무뎌지지 않는 그의 시선과 필치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펴낸 작품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창작과비평사)은 노경(老境)의 심리를 절묘하게 포착해낸 작품으로 호평을 얻고 있다.

  ▽박완서〓저는 절필도, 노(老)대가도 싫어요. 그냥 죽는 날까지 현역이고 싶습니다.

  ▽박경리〓몸은 늙어도 글에는 늙은 흔적이 나타나면 안 되는 거지. 치열하게 쓰려면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안돼요. 치열한 것, 그건 삶의 능동성이고 모든 생명의 본질이에요.

90년대 문학, 특히 여성소설가들에 대한 비판적 논평들에 대해 두 작가는 작품이 말하게 해야한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박완서〓여자작가가 많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참여하는 남녀숫자가 비슷해진 거겠죠. 90년대 문학 위기론을 얘기하지만 그건 남녀를 불문하고 공통된 현상 아닌가요. 어느 시대에나 가볍게 소비되는 작품과 시대를 거치며 걸러지는 작품은 공존해 왔어요. 저는 뭐 그리 걱정하지 않습니다.

  ▽박경리〓창조사회에서는 남녀 구별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들어내는 물건을 갖고 평가 해야죠.

대쪽같은 두 작가. 그러나 손자들에 관한 한 두 사람은 보통의 할머니였다. 손자 둘을 둔 박경리는 집 안 곳곳에 여섯 손자의 사진액자를 놓아둔 박완서를 표나게 부러워했다. 그리곤 지나가듯 말했다. 갓난아기일 때 업고 있으면 허리가 아프면서도 하루하루 몸무게 불어나는 게 얼마나 신통하든지. 할미가 돼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마음이요.

〈정은령기자>

[인터뷰] `어른노릇 사람노릇' 펴낸 박완서씨 (1998.03.11) 한국일보

"내 나이 67세, 이젠 세상물정 말할 때 됐죠" .

  소설 쓰는 틈틈이 수필을 통해 세상사에 대해 발언해온 작가 박완서씨가 새 에세이집 '어른노릇 사람노릇'(작가정신간)을 냈다.

  올해 67세인 박씨는 "나도 이젠 세상물정에 대해 뭐라 이야기할 나이가 되지 않았는가"라며 "한 늙은이의 생각들을 그냥 적어놓은 것"이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겸손에도 불구하고 수록된 30여편 글엔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한 여성의 깐깐함이 특유의 거침없는 화법 속에 드러나 있다. 그는 요즘 같은 시절, 어른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파고들기도 하고, 창작과 씨름하는 작가의 내면고백을 들려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시선을 붙드는 것은 IMF시대를 사는 한국인에게 던지는 '쓴소 리'들이다. 박씨는 "요즘 사태에 대한 어떤 가르침을 기대하고 내 글을 읽지는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에세이엔 한국 60대들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의 무게가 실려 있다. 일제때 태어나 한창 나이 에 전쟁을 체험했고 4․19, 5․16이란 역사의 격랑을 탔던 세대다. 역사에 남길 일이라곤 '뼈빠지는 고생으로 가난을 극복한 일'밖에는 없었지만 '여름엔 쉰밥 씻어먹고 겨울이면 윗목에선 걸레가 어는 추위를 견딘' 은근한 자긍심을 바탕에 깔면서, 박씨는 고통스런 오늘을 반성한다. IMF 구제금융 요청 전날까지 경제 파탄을 은폐한 당국엔 '6․25때 끝까지 서울을 사수한다고 거짓말한 이승만 정부와 다를 게 없다'고 질타한다. 그간의 '흥청망청 세태'를 뼈아프게 꼬집는다.

  그러나 '당장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식의 냄비 같은 근검 캠페인도 박씨에겐 걱정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우리는 뭐든 조급한 게 걱정이에요. 너무 갑자기 잘 살게 됐을 때 두려웠던 것처럼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너도나도 절약을 외치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아요. 쓸 수 있는 사람은 써야 경제가 살죠.". 그는 "지금 우리 어려움은 50년대 빈곤에 비하면 댈 것도 아니다"라 며 "이런 시기를 견뎌낼 수 있는 진짜 저력은 그런 조급함이 아니라 우리민족 고유의 넉넉한 마음뿐이란 생각"이라고 말했다. "행복은 성적 순도 아니지만 국민소득순도 아니에요. 그 으스대던 1만 달러 소득이 졸지에 5천 달러로 줄었다고 지레 불행 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어요.".

( 김명환기자 )

[방송] 추석 안방극장, 양귀자-박완서 맞대결 (1997.09.02) 조선일보

  이번 추석 연휴에는 인기 여성작가의 작품을 텔레비전 드라마로 보 게 된다. 박완서와 양귀자다. MBC는 추석특집극으로 양귀자의 '누리야 누리야 뭐하니'를, SBS는 박완서의 '오동의 숨은 소리여'를 각색한 '약속' 을 방영한다.

'누리야…'는 엄마를 찾아 나선 아홉살 소녀가 주인공이다. '약속'은 아내를 여읜 뒤 갑자기 늙어버린 남편의 고독을 그린다. 한낱 개인의 눈으로 바라본 삶의 흔적이란 점에서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가족과 삶에서 일상의 틈새를 보여주는 것도 둘 다 갖고 있는 미덕이다.

  추석 전날 15일 방영되는 SBS '약속'(밤 9시30분․박남준 극본 장 형일 연출)은 반평생을 동반했던 아내가 죽은 뒤 혼자 남은 남편의 고뇌 가 주제다. 신구가 아내 잃고 괴로워하는 평하역을 맡고, 반효정은 남편을 걱정하며 세상을 마감하는 아내 윤영을 연기한다. 효자지만 아버지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역은 길용우, 며느리는 이경진이 등장한다. 이덕희가 큰딸 진화, 맹상훈이 진화의 남편역이다. 아내 윤영은 몇 달째 병석에 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전직 중학교 교감 평하는 정성껏 뒷바라지하지 만, 죽음은 어김없이 찾아든다. 옷장을 뒤지던 평하는 아내가 자기를 위해 여러 달치 속내의와 양말을 찬찬히 정리해놓은 것을 발견하고 비탄에 젖는다. 큰아들 집을 찾은 평하는 아버지의 외로움을 챙길 줄 모르는 자식내외에게 실망한다.

  선이 굵은 드라마 '형제의 강'을 연출했던 장형일PD는 "주인공 같은 쓸쓸한 말년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며 "우리 모두 느끼게 될 지 모르는 아픔을 진솔하게 담는다"고 했다. 연휴 마지막날인 17일 오전10시부터 2시간 동안 방송할 '누리야…' (임선경 극본, 김정호 연출)는 가족을 잃은 어린 소녀가 엄마를 찾아가는 고난의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아버지를 잃고 그 충격으로 소식도 없이 사라진 엄마를 찾아 나선 누리를 통해 가족과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누리역은 이정윤, 누리를 친동생처럼 돌보는 영발 오빠 역은 최재성 이 연기한다. 영발과 함께 누리를 보살피는 강자역은 김현아가 맡았다.

  부모 없이 혼자 살고 있는 누리는 천사원에 자신을 보내겠다는 담임 의 말에 무작정 엄마를 찾아 서울로 떠난다. 엄마가 보낸 편지 주소만 들고 엄마를 찾아 나서지만 주소지는 이미 공사장으로 변해버렸다. 서울 역에서 만난 강자 언니와 함께 식당 일을 하며 누리는 엄마를 찾아다닌다. 깡패들에게 쫓기다 트럭짐칸에 몸을 숨겼던 누리는 운전기사 영발 눈에 띈다. 죽은 여동생을 닮았다고 누리를 측은해 하던 영발은 엄마 찾기에 함께 나선다. 김정호PD는 "명절 때면 더 마음 아픈 시간을 보낼 소외된 이웃을 한 번쯤 생각하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어느 날 누리의 집에 시골에서 고모 할머니와 그 손자인 부숭이가 찾아온다. 뜻밖의 손님 때문에 조용하고 단란했던 누리네 집은 시끌벅적해진다. 하루는 누리가 부숭이의 괴상하게 생긴 가방을 내다 버렸는데, 그 가방은 돌아가신 부숭이의 어머니가 병석에서 손수 만들어 주신 것이었다.

  이 일로 벌어진 싸움에서 누리는 뜻밖에도 자기보다 몸집이 훨씬 작은 부숭이에게 지고 만다. 부끄럽고 분해하는 누리에게, 고모할머니는 부숭이의 강단이 '땅 힘' 덕분에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부숭이는 몰래 시골로 돌아가 버리고, '땅 힘'이 뭔지 궁금해진 누리는 고모할머니를 따라 시골로 가면서 이야기는 이어진다. 이 동화는 땀 흘려 일하는 즐거움, 자연의 교훈, 겸손을 통해 배우는 진정한 자존심, 사랑과 우정의 진정한 가치 등을 일깨워 준다.

< 윤정호기자 >

-박완서 칼럼 모음 (출처 한국일보)

배려(配慮) - 박완서․소설가 1999.09.16

  유년기의 추석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여라」 그 자체였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귀한 시절이라 떡과 과일이 풍성하고, 고무신 한 켤레라도 새 것으로 얻어 신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청소년기의 추석도 나쁘지 않다. 차례를 대낮에 지낸 적도 있다. 집안 내 남자들이 이 집 저 집 몰려다니면서 차례를 지내고 우리 집까지 오는 동안이 그만큼 걸렸다. 십촌까지도 집안 내로 쳤다. 그 시절의 명절이나 제삿날은 격조했던 친척들이 모여 회포를 풀고 화해하는 날이었다.

전후에 결혼하고 추석을 겪으면서 여자에게 명절이 결코 즐거운 날이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전쟁 때문에 나는 외딸이 돼버렸는데도 추석에 친정에 갈 수 없었다. 시댁은 맏이가 아니어서 차례를 큰댁에서 지내고 성묘 가는 인원만도 이십 여명이 넘으니까 나 하나 빠져도 자리도 안 날텐데 기를 쓰고 챙기시는 시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친정에선 어린 조카 둘이서 달랑 차례를 지낼 생각을 해도 서글펐지만, 고인을 위한 의식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 계신 어머니가 딸 기른 허망감을 지긋이 안으로 삭이고있을 생각을 하면 설움이 지나 분노가 복받쳤다. 우리 자랄 때만해도 효도를 인간 덕목의 으뜸으로 쳐서 부모 은공을 모르면 금수만도 못하다고 배웠다. 그렇다면 결혼과 동시에 낳아주고 길러주고 사랑해준 부모에 대한 정과 의무는 싹 잊어버리는 게 신상에 편하게 되어있는 여자라는 존재는 뭔가. 인간도 아니라는 소리와 무엇이 다른가.

  내가 시집살이하던 50~60년대는 농촌 인구가 70~80%를 차지할 때여서 지금처럼 귀향전쟁이란 말은 없었다. 도시로 나온 시골 사람은 입하나라도 덜려고 식모 살이 내보낸 소녀들이 고작이었다. 나도 그런 처녀를 데리고 있었는데 추석과 구정 두 차례 귀향시켜주는 것은 필수였다. 추석 선물을 챙겨 내려보내면서 내 신세는 그 애만도 못하다는 모멸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시부모님이 우리 집에 대한 배려를 하도록 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결렸다.

  이제 내가 배려를 할 차례가 되고 나니 아들이 없으니 내가 시어머니 되었을 때 어떻게 여자로서의 며느리 입장을 배려하리라 벼르던 것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딸들을 위해서도 배려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딸들이 스트레스 안 받도록 안 기다리고 안 섭섭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섭섭하다는 감정 없이 무심하게 명절을 넘길 수 있는 것은 딸들이 보고싶을 때 볼 수 있는 거리에 사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날짜나 시간이 겹치지 않게 신경을 써준 사돈댁의 배려도 있었으리라. 명절에 시골에서 서울 자식 집으로 올라오는 부모님 또한 자식에 대한 배려라 하겠다. 그러나 선조를 기리고 생존한 부모님께 효도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아들 위주인 것만은 변함이 없다. 시댁에 가서 차례 모시고 손님 치를 생각을 하면 명절이 되기도 전에 미리 몸살이 날 것 같고 연휴가 긴 것까지 끔찍스럽게 여겨진다는 며느리들이 늘어나는 것도 단지 일 하기 싫어서만 은 아닐 것이다. 남편을 사랑하면 당연히 그의 선조나 부모에 대해 효도하는 마음이 우러나는 줄 아는 여자에 대한 왜곡을 못 참아서가 아닐까. 지금 같은 출산율의 추세라면 앞으로는 외딸과 외아들이 결혼하는 일도 전체 결혼의 반수에 가까워질 듯 하다. 양가가 다 같은 날 차례를 고집한다면 딸 노릇 며느리 노릇 사이에 끼어 여자들이 받을 스트레스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아들 가진 쪽의 지혜로운 배려만 있다면 부부가 따로 각자의 부모를 찾아가거나 여자는 시가로, 남자는 처가로 가는 교차 방문도 가능한 일이 되지 않을까. 여기서 구태여 아들 가진 부모라고 한 것은 아직은 그들이 기득권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이 탓인지 아무리 옳지 못한 전통도 전통인 이상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다고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찮은 것에서 배우기 - 박완서․소설가 1999.10.12

  지난 여름엔 비가 많이 왔다. 장마다운 장마가 지기도 전에 올 여름 장마는 끝났다는 일기예보가 있고 나서 곧 연일 엄청난 비가 내렸다. 장마가 아니라 게릴라성 호우라고 했다. 예측을 못했으니까 게릴라일 수밖에 없으려니 하면서도 신조어를 따라잡기가 참으로 버겁다. 더위와 비 때문에 지겹기만 하던 여름도 가고 보니 순식간이었다.

  백일홍 분꽃 채송화 봉숭아 한련따위 여름화초들이 게릴라성 호우에 거의 쓰러지거나 녹아 없어져버리고 남아있는 것도 추레해졌다. 바로 안방 문 밖에는 옥수수도 몇 포기 심었었는데 겨우 씨만 건지고 한 개도 따먹진 못했다. 될만한 장소가 아니었는데도 여름내 그대로 놔둔 것은 빗소리 때문이었다.

  옥수수 잎이 곧 비를 몰고 올 수상쩍은 바람에 불안하게 웅성거리는 소리나, 굵은 빗방울에 와삭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가 태어나고 자란 유년의 방에 돌아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수확보다는 소리를 위해, 착각을 위해 옥수수를 심은 나의 감수성은 얼마나 아니꼽고 도시적인가.

  지금 그 옥수수는 자취 없고, 옥수수에 짓눌려 기를 못 펴던 칸나가 마지막 꽃을 붉게 피우며 그 풍성한 잎을 너울대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룻밤만 된서리가 내려도 속절없이 흙으로 침잠할 것들이다. 봉숭아는 늙어 수명을 다하면서 흩뿌린 씨에서 무수한 어린 싹이 봄이런듯 돋아나고 있다. 그 철모르는 것들을 솎아주지 않고 내버려두었더니 한 뼘도 자라기 전에 서둘러 신생아 입술 만한 꽃을 피운 것도 있다. 계절의 순환이 얼마나 엄혹 하다는 걸 그 철없는 것들도 알아버린 모양이다. 그 조급증이 애처롭다. 더위와 비바람을 견디어낸 백일홍 맨드라미 샐비어는 아직도 붉은 빛이 덜 퇴색했지만 그 안에 스민 적막을 속일 수는 없다.

  장미도 이제는 끝물인가보다. 빛깔은 여름보다 더 요요하나 연달아 필 봉오리를 거느리고 있지 않다. 그 얼마 남지 않은 꽃들을 탐해 벌들이 여름보다 더 많이 모여든다. 산과 들의 야생 꽃들이 거의 사라지자 우리 마당에서 마지막 단물을 탐하는가보다. 그러나 곤충들도 완연히 기운이 빠져 그렇게 왕성하게 웅웅대던 벌들도 양지쪽 벽에 늙은 파리처럼 붙어 있다가 힘없이 떨어져 발에 밟히고 만다. 끝물 노란 장미가 하도 정교하길래 가만히 코를 대보니 그 안에 벌이 두 마리 들어있다. 죽은 것도 아닌데 건드려도 날지 못한다. 그 안에서 임종을 맞으려나.

  내가 요새 마음 붙이고 사는 것들은 이렇게 하찮고 속절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내가 이런 사치를 누려도 되는 것일까. 문득 겁이 날 정도로 그런 것들은 다 나에게 넘치는 것들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건강 하라든가, 젊어 보인다는 걸 가장 큰 덕담으로 치지만 나이보다 젊지도 늙지도 말고 나이만큼 살아가는 게 가장 큰 건강이라는 것도 그 보잘것없는 것들한테 배운 지혜다.

  요새도 여전히 비가 잦다. 봄비는 하루가 다르게 나무에 물을 올리더니 가을비는 하루가 다르게 조락을 재촉한다. 마당에서 지금이 절정인 것은 국화밖에 없다. 간밤의 비로 쓰러진 남쪽 울타리 밑의 국화를 일으켜 세우려다가 고개를 들어 아차산을 바라본다.

  우리나라 정치가들은 최고의 권좌까지 올랐던 분들도 다들 시골 출신들인데 왜 그 자리에서 물러난 후 낙향하는 분이 없을까, 문득 이상해진다. 서울에서 뚝 떨어진 시골에서 호젓이 살면 왕년의 추종자들을 줄줄이 거느리고 관리하지 않아도 되고, 청와대 만찬에 초대받지 않아도 되고, 그럼 저절로 생활이 단순 소박하게 되고 생활비도 덜 들어 연금만 가지고도 쓰고 남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구태여 재직 시에 그 많은 돈을 무엇 하러 챙기겠는가. 권좌에서 물러난 분의 정직한 회고록을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건 그런 분들 중 낙향하는 분이 없다는 것과도 관계가 있을성싶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박완서․소설가 1999.11.09

  직업상 얼굴 없는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다. 전화로 원고 청탁이나 강연 요청을 받을 경우 목소리만 듣고도 상대방의 연령이 점점 젊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아마 내 나이 탓도 있지만, 존댓말을 헷갈리게 쓰는 때문도 있는 것 같다. 우리말의 복잡다단한 존칭 체계가 좀 단순화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도 그런 대화를 통해 요즘 젊은이들이 존칭 때문에 얼마나 혼란을 겪고 있는지 생생하게 느껴져서이다.

  20~30대의 기자가 나를 부를 때 성명에다 선생님 정도를 붙이는 게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교수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단지 「씨」자만 붙이기도 한다. 교수님이라고 부를 때 나는 한 번도 대학에 강의 나간 적이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교수님이라고 할 때는 아부를 좋아하는 사람 같아 호감이 안 간다. 전에는 「씨」자만 달랑 붙이는 걸 좀 무례하다고 생각했는데 교수님보다는 오히려 편하다. 고유명사에다 「씨」만 붙이면 존댓말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고맙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고마워요」하는 것도 전에는 귀에 거슬렸는데 「요」자만 붙여도 존댓말로 쳐줘야지 않을까 눙쳐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박완서씨 고마워요」하는 정도 밖에 존댓말을 못쓰는 젊은이도 내가 그쪽 성명을 물어보면 김철수라고 말하지 않고 『「김」자 「철」자 「수」자 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다가는 제 자식 이름도 『우리 아기는 「나」자 「리」자 입니다』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남 앞에서 웃어른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무엄하다 하여 꼭 성함을 밝혀야 할 경우 한 자 한 자 「자」자를 붙여 부르게 한 게 점잖은 댁의 자녀교육이었다고는 하나 요즈음 세상에는 안 그래도 크게 책잡힐 것 없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자신의 이름은, 꼭 한자로 무슨 자인가를 밝혀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그런 식으로 말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끙끙대며 그렇게 말하는 젊은이를 보면 안쓰럽다.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게 복잡하면 기본정신보다는 쓸데없는 것부터 익히게 되는 것 같다. 손자가 할아버지한테 『이 신발 엄마께서 사주신 거야』라고 말한다면 고쳐줘야 할 틀린 어법인데 요새는 TV에 나와 재롱부리는 똑똑한 어린이까지 『엄마께서 아빠께서』라고 말하니까 「께서」 대신 「가」를 쓰는 어린이는 가정교육이 덜 된 어린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존댓말의 기본은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데 있기 때문에 대등한 관계에서는 별로 문제될 게 없을 텐데 가장 대등한 관계인 부부간의 호칭이 오히려 가장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서로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신혼부부에게 『여보 당신이란 좋은 말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했더니 꺄악 소리를 지르며 닭살이 돋을 것 같다나. 「여보」 「당신」이 좀 드라이하긴 해도 닭살이 돋게 징그러울 건 또 뭔지 잘 이해가 안 된다. 나야말로 닭살이 돋는 것은 요즘 새댁들이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걸 듣을 때이다.

  스타에게 열광하던 오빠부대일 적의 환상을 내 남자에게 전이시키고 싶은 소녀취미는 연애기간에 대충 졸업해야지 않을까? 결혼은 그 어느 누구와 바꿔치기 할 수도 없고, 착각해서도 안 되는 유일한 남자와 여자와의 만남인 동시에 양가의 가족이란 그물 안에 편입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성인 남편을 가장 가까운 근친을 부르는 호칭으로 부른다는 건 망측스럽기도 하거니와 기존의 조화로운 관계 망을 혼란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설사 여자에게 오빠가 없다고 해도 장차 아들도 낳고 딸도 낳게 될 게 아닌가. 여보 당신이 싫으면 서로 이름을 부르자. 이름은 자신을 존재케 한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과 꿈이 담긴 선물이고 자신이 남과 다른 고유한 존재라는 걸 인식하게 한 최초의 울림이고 자신이 지닌 거중 가장 오래 된 것이고 무엇보다도 부르라고 지어준 것이다.

세기말은 있긴 있나? - 박완서․소설가 1999.12.10

  나는 30년대 생이고, 그 때 우리의 평균수명은 사십몇세였다. 회갑을 넘긴 노인은 친척이나 마을에서도 희귀했고 오십만 넘어도 허리가 휘고 이가 빠져서 그런 나이까지 산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철이 들고 어미가 된 후에도 내 자식들 공부 마치고 결혼시킬 때까지가 내가 살고 싶은 최대한이었기 때문에 두 세기에 걸쳐서 살 수 있으리라 곤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어떤 돌발사고가 없는 이상 두 세기에 걸쳐서 사는 걸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70대란 나이가 싫고 내 계획에 없던 새로운 세기가 좀 무섭다. 운전도 못하는 주제에 대중적인 교통수단내의 핸드폰 통화소리가 지겹고, 밤새도록 사이버 세계에서 노닐다가 등교시간에 허둥대는 손자가 이방인처럼 낯설다.

  아무리 세기가 바뀐다 해도 그런 것들을 내가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비록 컴퓨터로 글을 쓴다고는 하나 그건 나에게 필기도구가 좀 더 편한 걸로 바뀌었다는 것 외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물건이고 모임이고 온통 밀레니엄자가 붙어 다니는 걸 보면 새로운 세기란 새로운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상품일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 무슨 꼴을 더 보게 될지 두려워질 때마다 깊은 골짜기처럼 몇 백년을 변화 없이 고여있던 농경사회에서 끌려나와 「칙칙폭폭」 괴수처럼 검은 입김을 토하며 달리는 거대한 증기기관차를 타고 도시로 향하던 유년기를 회상하며 자위하곤 한다. 그 때 그 어린 계집애는 불과 몇 시간 동안에 몇 세기도 훌쩍 뛰어넘었노라고.

  지금 창밖에 겨울 나무들은 앙상하지만 의연하다. 나무들의 마지막 허영인 단풍의 시간은 꽃의 영광만큼 짧았다. 모든 영광과 허식을 벗어 던진 나무의 아름다움, 겨울 숲의 적요가 마음에 스미는 물빛 새벽에 한잔의 커피는 나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낙이다. 커피 취미는 점점 까다롭고 복잡해져 이제는 인스턴트보다는 원두커피가 입에 맞고, 원두를 갈 때의 소리와 냄새까지도 좋고, 뽑아낼 때의 향기도 헤이즐넛인지 블루마운틴인지 아이리시인지 알아 맞출 수 있는 코가 나를 으쓱하게도 한다. 무엇보다도 한 잔의 커피가 주는 머리가 쨍하니 투명해지는 듯한 각성의 시간과 은은한 평화를 좋아하고, 행복이 별 건가 바로 이게 행복이지 싶은 충족감을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무청 데친 것에다 멸치 넣고 된장 좀 풀어서 부글부글 끓인 것이다. 그 시커먼 우거지 줄거리를 서리서리 밥 위에 얹어서 먹는 맛과 바꿀 수 있는 진미를 나는 아직 모른다. 나는 싱싱한 무청만 보면 길이나 시장 모퉁이에서도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주워 담는다. 싱싱한 무청이라고 다 맛있는 건 아니다. 나는 어떤 무청이 맛있는지 손으로 만져보면 당장 안다. 그냥 데쳐도 맛있는 것도 있고 껍질을 벗겨서 데쳐야 먹을만한 것도 있다.

  IMF에서 벗어난 건지, 새 천년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올 연말엔 유난히 모임이 잦다. 초대받았다고 다 가는 것도 아닌데도 어제는 점심 저녁을 다 양식으로 먹는 호사를 누렸다. 그러나 밤에는 속이 편치 않아 잠이 안 왔다. 과식한 것 같기도 하고,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한 종잡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부엌에 나와 냄비 뚜껑을 이것저것 열어보니 마침 무청 우거지를 멸치 넣고 지진 된장찌개가 남아 있었다. 그걸 몇 줄기 맨손으로 집어먹는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들뜬 소화기관이 제자리에 정비된 것처럼 개운해졌다. 그 맛은 내 궁핍한 시절의 기억인 동시에 궁핍할 때도 불행하지만은 않았다는 기억이기도 하다. 커피와 우거지를 동시에 신봉하는 내 몸의 이중성이 가소롭기도 하지만 대견하기도 하다.

그만하면 새 천년이 나에게 허락한 시간도 허위단심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내가 불안해하는 건 새 천년이 아니라 내 몸의 70대였던 것이다. 시간, 지는 형체도 마디도 없으면서 우리 몸에 어김없이 마디를 긋고 지나가는구나.

'박하사탕'이 주는 삶의 의미 - 박완서․소설가 2000.01.24

  아직까지는 시대의 변화에 그럭저럭 잘 적응해가며 살아왔다고 믿고 있었다. 나를 스쳐간 변화의 물결에 전적으로 동의한 건 아니더라도 일시적인 낯가림에 불과했을 뿐 결국은 길들여지는 게 더 편했던 것은 그 변화가 꾸준히 곤궁에서 풍요로, 불편에서 편리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만약 점점 못살게 되고 점점 더 불편해졌다면 적응하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생활양식이나 윤리도덕에 아무리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가 닥쳐도 결코 안 놀랄 것처럼 믿었던 것은 무슨 근거가 있어서 생긴 자신감이라기 보다는 자기 정체성의 포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밀레니엄 이브, 안방에 앉아서 세계각국의 눈이 돌게 기발하고 화려한 새 천년맞이 행사를 보면서 참 사람은 오래 살고 볼 거라고 신기해하면서도 21세기를 적응하는 것은 지금까지 그래온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괴로운 것이 되리라는 비관적인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엄청난 호들갑과 낭비는 이유를 따지기 전에 우선 비위에 거슬렸다. 그렇게 한번 덧난 비위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은 게, 호경기란 이름으로 호들갑과 낭비는 더욱 기승을 부릴 기세이니 말이다.

  일년 열 두달 허구 헌 날 뜨는 해가 어느 날 서쪽에서 뜬다고 해도 못 알아보고 살 무심한 도시인들이 별안간 신들린 듯이 일제히 이 산 저 산, 이 바다 저 바다로 해맞이를 가고 금줄을 쳐서 보호해야할 진짜 새 것인 신생아에게까지 다만 새해 자시(子時)에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카메라를 들이대서 만천하에 공개하는 호들갑을 무슨 수로 이해할 것이며, 돈을 많이 번 사람은 많이 쓰고 잘 써야 못 번 사람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쯤은 안다고 해도 오늘날의 주 소비층은 주로 한 번도 돈을 벌어보지 않은 청소년층이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또 돈벌이의 방법도 생산적이거나 창의적인 일로 자기가 속한 사회에 이익 되게 버는 도덕적인 치부와, 사기나 횡령 등 부도덕한 돈벌이 중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근면과 절제를 최고의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우리 같은 구닥다리들이 무슨 수로 이해하겠는가. 비위에 거슬린다는 건 결국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왜 사나.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그러니까 기차게 소비하기 위해 산다는 것 이상의 정답이 없는 세상에 문학이 발붙일 곳 또한 점점 협소해지다 마침내 밀려나고 말 것 같은 것도 새 천년의 우울한 전망 중 하나였다. 자기가 몸 바쳐 종사하고 긍지를 느끼던 일이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보는 것처럼 허망한 일은 없다.

  그러나 뜻밖에도 근래에 본 「박하사탕」이라는 영화는 큰 위안이 되었다. 아아, 영화를 이렇게도 만들 수가 있구나. 실은 좋은 리얼리즘 영화의 전범 같은 영화였는데도, 스토리는 없고 허황한 눈요깃거리만 있는 영화에 길들여진 눈엔 착실한 줄거리가 있는 것까지도 신선하게 여겨졌다. 이야기라야 별 것도 아니다. 평범하다 못해 누추한 한 인간이 시간의 더께를 한겹 두겹 벗고 순수한 알몸으로 돌아가는 개인사다. 그러나 그의 개인사에는 더러운 우리의 근세사가 맞물려 있다. 그것을 견디고 살아낸 그는 비천하고도 위대하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살아내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개인도 집단적인 광기에서 끌어내면 아무하고도 바꿔치기 할 수 없는 고유하고 아름다운 하나의 세계가 된다. 오래간 만에 만난 슬프고 아름답고 고통스러운 영화였다. 더욱 반가웠던 것은 문학이 기를 쓰고 있어야 할 까닭 같은 것까지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잊으라 잊으라 하면 잊고, 앞만 보고 달리라면 달리면서 살아왔다. 가다 뒤돌아보는 것조차 우리를 그렇게 밀어붙인 얼굴 없는 힘에 대한 거스름이었다. 거스르면 다친다. 그러나 아무도 반성하지 않고 좋은 꿈을 꿀 수 없다.

내 맘대로 - 박완서․소설가 2000.02.19

 『야아, 햇살이 어느 새 이렇게 도타워졌냐』 나는 비닐봉지에 올망졸망 묵은 나물을 꺼내 물에 담그다 말고 놀러온 손녀에게 말을 시켰다. 저절로 나온 감탄사였을 뿐 대답을 기다리고 한 말은 아니었다. 말해 놓고 나서 그건 내 목소리가 아니라 어릴 적 듣던 할머니나 어머니의 목소리였던 것 같아 아득해졌다. 목소리뿐 아니라 말투까지 영락없이 그들처럼 말하고 있었다.

  손녀는 흘긋 한번 쳐다보고 나서 대답 없이 보던 만화책에 다시 열중했다. 그 애는 아마 햇살이 도타워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었을 것이다. 나도 그맘때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동지 지난 지 며칠만 되면 할머니는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아침해가 비치는 봉창을 바라보면서 『야아, 해가 노루꼬리만큼 길어 졌지』하고 말을 시키곤 했다. 그 소리도 무슨 뜻인지 몰랐다.

  햇살을 길이나 부피로 헤아리는 경지는 나이와 함께 오나보다. 늙어빠지면 길이와 부피뿐 아니라 무게로까지 느끼게 된다. 햇살은 이제부터 춘분 무렵까지가 어깨에 지고 다니기 알맞은 무게가 된다. 그때가 되면 그 무게가 벌써 노구(老軀)에는 버거워지고 만다.

아주 벽촌에서 유년기를 보냈는데도 음력에 설을 쇤 기억이 없다. 떡 하고, 엿 고고, 두부 만들고, 차례 지내는 행사를 모조리 양력 신년에 했다. 그 때 우리 집은 뭐든지 할아버지 맘대로였다. 결코 신식 할아버지는 아니었고, 양력을 권장하다 못해 강요한 식민지 시대였지만 일제가 하란 다고 할 분도 아니었다. 끝끝내 창씨를 못하게 한 것도 그 분이었으니까. 방학해서 손자들이 귀향해 느긋하게 쉴 때 차례를 지내지 무엇 하러 놀려주지도 않는 날 도둑질하듯이 급하게 차례를 지네냐는 것이었다.

  그 분은 이렇듯 차례나 제사를 산 사람들이 될 수 있는 대로 편하게 많이 모일 수 있는 축제 정도로 생각했다. 여자들도 다들 차례나 제사에 참예토록 한 것도 상투 튼 어른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창씨를 안한 것보다 그게 더 자랑스럽다.

  결혼하고 내 살림을 하게 된 후 지금까지 우리 집 역시 양력으로만 설을 쇤다. 양력으로 신년은 틀림없이 아이들 방학중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자 우리 정부는 음력에 설을 쇠는 걸 금하지는 않았지만 설 연휴가 따로 생긴 것은 근래의 일이다. 그렇지만 손자들이 모여서 며칠씩 지지고 볶아도 시간에 좇기지 않고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 역시 방학중이 좋다. 또 양력을 권장했다 음력을 권장했다 정부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대로 따라 하지 않고 맘대로 하는 재미도 나쁘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음력 설날을 덤덤하게 지내는 건 아니다. 남들이 일제히 법석을 떨 때 그 집단적 열정에서 몇 발자국 비켜나서 구경하는 재미는 또 얼마나 좋은지 혼자 맛보기 아까울 지경이다. 보따리 보따리 싸들고 고향 가는 사람으로 붐비는 서울역이나 버스터미널,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고속도로를 온종일 비쳐주는 TV를 보고 있으면 매를 먼저 맞고 난 사람처럼 근심 걱정은 사라지고 저절로 한유(閑遊)의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또 1년 중 가장 극심해지는 시장판의 물가고와 속임수에서 비켜나 있을 수 있는 것도 이게 웬 떡이냐 싶은 가외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즐거운 것은 설만 쇠고 나면 완연하게 도타워지는 햇살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설쇠고 나서도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날이 많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햇살이 도타워지는 게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융단처럼 도타워진 햇살의 무게가 답답해서 땅 속의 씨앗과 뿌리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며 왁자지껄 깨어나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투명한 날이다. 나는 대보름에 먹을 오곡밥과 나물 준비를 하고 있다. 설은 음력으로 안 쇠지만 음력 대보름을 놓친 적은 없다. 묵은 나물이 가장 맛있어지는 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도 내 맘이다.

봄이 오는 소리 - 박완서․소설가 2000.03.19

  아침마다 다시 뒷동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겨울동안엔 산에 가지 못했다. 그 대신 운동부족을 느낄 때마다 동네를 한바퀴씩 돌곤 했는데 어느 날 평지에서 넘어지면서 발목을 접질려 며칠 고생을 했다. 평지라고 안심하고 딴 생각을 하다가 그렇게 됐다. 포장된 길이었는데도 움푹 패인 데가 있었다. 넘어지면서 엄마 생각을 했다.

  어려서도 넘어지길 잘했다. 넘어져서 무릎에 생채기를 내고 들어올 때마다 엄마는 걸을 때는 걷는 생각만 하라고 타이르곤 했다. 엄마는 내가 서두르거나 다리가 부실해서 잘 넘어지는 게 아니라 딴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넘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뒷동산은 높지는 않지만 길이 가파르고 돌도 많다. 발밑을 조심조심 정신을 집중해서 걷는 생각만 해야한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훨씬 더 집중력을 요한다. 높낮이가 일정치 않은 울퉁불퉁한 길을 한 번도 헛딛지 않도록 알아서 발목의 힘을 조절해주는 눈과 머리와 발의 신속한 교감이 신기하고 고맙다.

  늙어갈수록 산은 오르기보다 내려올 때가 더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내리막길이라고 방심하면 다리가 오락가락하면서 헛딛게 된다. 올라갈 때 힘을 다 써버리면 결코 의젓하게 내려오지 못한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특히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내려오는 기술이 영 젬병인 것 같다. 아직도 산골짜기 음지엔 눈이 남아있다. 북향받이 비탈을 타고 내려오면서 얼어붙은 작은 폭포들은 장엄할 것도 아름다울 것도 없이 비닐을 쳐놓은 것처럼 남루하다. 그러나 계곡을 흐르는 물은 어찌나 맑고 깨끗하고 명랑한지 매일 봐도 기적처럼 경이롭다. 갈수기라 수량은 많지 않지만 머지 않아 찬란하게 깨어날   초목들의 생명력의 원천이 바로 저거로구나 싶어 절로 경건해진다.

며칠 전에는 산에서 꿩을 보았다. 내가 꿩을 본 것보다 먼저 꿩이 나를 보았을 것이다. 앙상한 숲 속 푹신한 가랑잎 사이에서 인기척에 놀란 꿩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지금까지 숲에서 본 가장 큰 새가 까치였기 때문에 꿩은 그렇게 갑자기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커 보였다. 숲에서 꿩을 본 날은 온종일 기분이 좋았다. 우리동네 뒷동산엔 꿩이 산단다, 그렇게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날이었다. 꿩 뿐 아니라 숲엔 많은 새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온갖 새들의 다양한 지저귐을 들을 수 있다. 오늘 아침엔 바로 머리 위 큰 나무에서 날카로운 새 소리가 들렸는데 내 귀엔 꼭 󰡐쭈삐 쭈삐하고 우는 것 같았다. 그 새는 인기척에도 지저귀기를 멎지 않았는데 꼭 나를 놀려먹으려는 것처럼 거침이 없고 당돌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새일까 나무를 올려다보았지만 아직도 떨구지 못한 몇 안 되는 갈잎과 구별되는 새의 모습을 찾아내진 못했다. 아마 소쩍새가 살고 있을 것이다. 작년 여름내 소쩍새 소리를 들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 새가 어떻게 생긴 새라는 걸 알아낸 건 텔레비전의 자연 다큐멘터리 프로를 통해서였다. 이렇게 야행성이거나 몸집이 작아 사람 눈에 잘 안 띄는 새 아니면 점점 더 숲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더군다나 꿩은 덩치가 클 뿐 아니라 인간의 입맛에까지 든 새이니 어디 이 깊지 않은 숲에서 오래 살아남길 바라겠는가.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꿩이 인가의 마당까지 내려와 어슬렁거리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숲은 산불 같은 재난이 없이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나무를 베고 과수원을 만들기도 하고 배드민턴 장이나 운동기구를 설치하기도 한다. 산 속에 텃밭을 만들고 농막을 짓기도 한다. 개발제한지역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대대적으로 일어나지는 못하고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간다. 내가 세상 보는 눈이 삐딱해서일까. 눈치껏 야금야금 자연을 먹어 들어가다가도 선거철만 되면 거침없이 성큼성큼 먹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걸 어쩔 수가 없다. 매사를 이런 눈으로 보기 싫어서라도 선거 철이 어서 끝났으면 싶다.

한의 눈물 먼저 닦아줘라 - 박완서․박완서 2000.04.23

  선거전의 일이다. 여론조사기관에서 집으로 걸려온 전화를 세 번이나 받았다. 다 다른 기관에서 걸려온 거고, 또 기계 음이 아니고 육성이어서 성의껏 친절하게 받았고,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했다.

민주정치 하는데 여론조사라는 게 필요한 거라면 오차가 적게 나도록 협조하고 싶었다. 또 지금 우리는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를 남에게 들키고 나서 찍혔을지도 모른다고 찜찜한 느낌을 갖게 되는 치사한 세상에 살고 있지는 않다고 믿고 싶었다. 아마 나에게 남아있는 어떤 개운치 않은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YS가 당선되고 나서였다. 나는 어떤 신문에 시평을 쓰면서 나는 YS를 찍지 않았다는 얘기를 했다. 그 신문에서는 그 시평을 실어주지 않았다. 유신시대와 군사정권시대, 그 생각하기도 싫은 더러운 시대에도 나는 소심하고 비열하여 마치 철조망 밑을 기는 버러지처럼 몸조심을 잘했기 때문에 짤릴만한 글도 써본 일이 없었다. 근데 명실공히 문민정부 벽두에 그런 일을 당하니 불쾌하고 황당했다. 찍혀도 내가 찍힐텐데 왜 그걸 안 실어 줬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또 찍힌다는 게 뭔지도 실은 잘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우리는 이름 없는 양민들까지도 찍히면 어떡하냐 하는 막연한 공포감에 짓눌려서 살던 시대는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에 내 소신에 당당하고 투명하고 싶었다. 투표당일 출구조사가 크게 어긋났다고 한다. 나는 출구조사를 당하지 않았다. 당했더라도 그때는 마음이 꼬여있었기 때문에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투표도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했다. 협조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투표하기 사흘 전에 터뜨린 남북정상회담 발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거가 끝나고 발표를 했더라면 얼마든지 신나고 신선한 충격이었으련만, 너무 잘 맞춘 타이밍이 뻔한 술수처럼 보여서 󰡐DJ, 당신마저도…하는 실망의 소리가 절로 나왔다. DJ처럼 남북문제에 당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너무 억울하게 당한 게 안돼서 뽑아줬다고도 볼 수도 있다. 그가 보통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금도 악몽을 꾸지 않을까 싶게 심하게 당한 술수의 칼자루를 이번엔 자기가 쥐다니. 집권당의 정치단수가 얼마나 높은지는 몰라도 유권자는 유권자대로 풍진세상을 살아남으면서 능구렁이가 다 돼 있는 것을 집권당이 박빙의 차이로 패배한 지역이 많은 것도 선거랄 임박해서 흔들린 투표심리로 읽힐 수도 있지 않을까. 낮은 투표율도 단순한 정치 무관심으로만 볼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치에 대한 냉소나 멸시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내가 남에게 당해서 싫었던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나, 내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같은 소리이고 뿌리가 다른 종교들이 공통으로 설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 정도의 지혜를 노정치가에게 기대한 것도 과욕이었던가. 발표시기를 선거에 절묘하게 이용하려 했다는 혐의만 뺀다면 남북정상회담은 가뭄의 단비 같은 기쁜 소식이요, 현정권의 큰 성과임에 틀림이 없다. 꼬인 마음을 풀고나면 잘 되기만을 소원할 밖에 없다. 그러나 남북문제는 선거에 이용돼서도 안되지만 공명심에 이용돼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이 분단의 고통에 대해 뭘 아는가. 분단의 고통은 참다 참다 한이 되었고 한이 곰삭아 신성한 것이 되었다. 함부로 찝쩍거리지 말라. 높은 사람끼리 만나는 것만 수가 아니다. 이미 갈만한 사람은 다 갔다왔다. 밀사의 자격으로, 돈 보따리를 짊어진 싼타의 자격으로…. 아마 정말 만나야 할 사람, 오가야 할 사람만 아직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통일은 먼 훗날에 되어도 좋으니 그들의 실개천 같은 눈물의 흐름부터 먼저 트게 하라. 그들의 입장에서 뭐든지 시작하라. 아직도 도처에 실개천이 숨어있다는 걸 호재로 알아라. 실개천이 모여서 대하가 되는 것이 순리이다.

인격의 거품 - 박완서․소설가 2000.05.21

  안경점에 갔다가 요즘은 로비스트 린다 김이 썼던 것과 같은 선글라스가 대유행이란 소리를 들었다. 값도 수월찮은 고가품인데도 품귀라고 했다. 사석에서 심심풀이로 찧는 입방아에서도 미모와 빼어난 옷태를 화제 삼느라 그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무슨 의혹을 받고 있는지 검찰수사가 흐지부지 된 게 옳은 건지 그른 건지, 본질적인 것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군사력 증강과 관련된 큰 사업마다 그의 입김이 작용 안한 사업이 없다더라, 누가 어디서 얻어들은 소문을 그럴듯하게 얘기해도 진위를 따지기보다는 보아하니 능히 그럴만한 인물이더라 하는 식으로 전적으로 믿어버리려 든다. 그가 의식한 건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는 세련되고 당당한 이미지로 국민을 상대로 성공적인 로비를 한 것과 다름없다.

린다 김은 고급 로비스트고 신창원은 한낱 흉악한 파렴치범에 지나지 않지만 린다 김 안경의 유행은 신창원이 검거 당시 입었던 티셔스를 생각나게 한다. 신창원은 도피생활이 워낙 길었고 그가 남긴 행적중에는 미담을 엮을만한 선행도 있는 것처럼 알려지면서 군중심리가 그를 동정하는 쪽으로 형성됐고, 심지어는 의적처럼 말해지면서 검거되기를 바라지 않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건 신창원의 책임이 아니라 부패한 권력층에 대한 반발과 진저리가, 체격과 용모가 그럴듯해 보이고 제법 고민까지 하는 흔적을 도처에 남긴 도적을 통해 그런 과분한 이미지로 분출한 게 아니었을까. 동정과 아쉬움 때문에도 신창원의 체포가 대단한 구경거리였다고 해도 그가 입었던 티셔쓰까지 유행될 건 뭐였을까. 내 눈에는 싸구려 시장 물건으로 밖에 안보이는 게 꽤 고가에 외제 브랜드라 했고, 진품은 물론 시장에서도 그와 비슷한 유사품을 만들어 숫제 신창원 티셔쓰츠라고 이름 붙여 날개 돋힌듯 팔려 나갔다고 한다.

  상품포장에서부터 영상매체가 내보내는 온갖 상품광고와 오락프로등 우리는 온종일 현란한 이미지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적인 이미지는 쾌감을 줄뿐 아니라 모방심리를 자극한다. TV 연속극도 등장인물의 운명을 쫓아 보는 게 아니라 의상과 악세서리 쫓아서 본다. 말도 안되는 얘긴데도 옷태가 나는 미모의 탤런트가 매일 갈아입고 나오는 의상을 감상하는 재미만으로도 볼만하고, 세련되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해서 뜬 프로에 나온 의상과 악세사리는 즉시 그 계절의 유행을 주도하게 된다.

  때로는 그걸 입은 스타의 이름이 즉석 브랜드가 되기도 한다. 인기인이 아니라도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대는 훌륭한 인격이 좋은 인상이 되어 나타나리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현란한 이미지에 현혹된 눈은 내적인 아름다움에 끌리는 시력을 이미 마비시키고 말았다. 모임에서 유행에 한참 뒤진 옷을 입고 주눅이 안들기도 어렵지만 초라한 사람 얕보지 않기도 힘들다. 상품하고 포장이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이미지하고 속내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걸 알건만도 그렇다.

  요즈음에는 TV에서도 북한의 뉴스시간을 잠깐씩이나마 볼 수 있다. 특히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는 우리가 취재한 그쪽의 참상보다는 그들이 일상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을 잠깐씩이나마 볼 수가 있다. 거리의 모습이나 아나운서의 모습은 우리의 유행감각과는 한참 뒤떨어져 있다.

  그걸 우리의 50년대나 60년대하고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어렵게 살면서도 공산권이 모조리 붕괴할 때 홀로 그 체제를 유지하며 살아남은 그들의 진정한 속내는 뭘까? 그걸 알고 겁 내자는 게 아니라, 바로 보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지껏 우리끼리 해온 사람 보는 방식의 경박성은 일단 반성해 볼 일이라고 생각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인가 기쁨인가 - 박완서․소설가 2000.06.18

  나는 내가 생각해도 징그러울 정도로 감동에 인색한 편이다. 남이 다 우는데 나만 눈물이 안나와 민망해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는 1983년에 KBS가 마련한 이산가족 상봉 때도 그랬었다. 이미 그 전 해에 한국일보에다 진정한 만남의 어려움을 다룬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연재하느라 눈물보다 진한 진이 다 빠져버린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작년에 남들이 하도 좋다고 해서 가본 금강산관광도 나는 별로 좋은 줄 몰랐다. 이구동성으로 표하는 경탄에는 경치 이상의 엄청난 뜻이 함유돼 있을 터였다. 그래서 우는 사람도 있었고 감격의 고함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이북이 고향인 노인들이 감회가 남다른 듯했다. 그러나 나는 그곳이 단지 휴전선 이북 땅이라는 것만 가지고 귀향의 기분이 나지지가 않았다.

  관광의 기분도 나지 않았다. 일탈(逸脫)이나 모험, 홀로 멍하니 머무르거나, 소요하며 음미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관광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나는 아직도 금강산을 통과했을 뿐 구경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방법으로 이북 땅을 밟음으로써 그 누구의 관심이나 간섭도 받지 않고 홀로 외롭고 쓸쓸하게 표표히 고향 땅에 들어서고 싶다는 나의 순결한 꿈을 지키지 못하게 된 아쉬움만 남겼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위해 방북 하던 날, 이웃에 사는 부인이 아침 마실을 왔다. 왜 오늘 같은 날 텔레비전을 안보냐고 해서 아, 참 하면서 리모콘을 눌렀더니 전용기가 이미 순안공항에 착륙해 있었다.

  평양시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인파를 보여주면서도 우리 측 리포터의 말투는 북측에서 누가 영접할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약간의 뜸을 들이고 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우리 대통령이 기내에서 나와 감개무량한 듯 환호하는 시민들과 북녘산하를 바라보고 나서 트랩을 내려왔다. 도착한 정상과 마중 나온 정상이 부드럽고 소탈하게 웃으며 서로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 순간 가슴이 화끈해 지면서 눈에서 눈물이 넘치려고 했다.

  마실 온 부인이 옆에서 뭐라고 말을 시켰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만 열면 눈물이 당장 오열로 변할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걸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도 내가 왜 우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전혀 얘기치 못한 눈물이었다. 내 생전에 고향 땅을 밟게 될 거라느니 곧 통일의 날을 볼 거라는 하는 생각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로 살아온 50년 세월, 그 미움이 비롯된 6․25동란, 한 에미 자식이 좌우로 갈라져 서로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저 놈은 빨갱이다, 저 자는 반동이다라는 말 한마디로 등뒤에서 총을 쏠 수도, 쳐죽일 수도, 그 집안을 젖먹이까지 멸할 수도 있었던, 우리 모두 사람도 아니었던 그 잔인했던 증오와 살상의 세월을 살아남아 마침내 오늘을 보는구나, 그건 기쁨도 슬픔도 아닌 일종의 허망감이었다.

  그 동안 나를 버팅겨 온 건 극좌와 극우를 똑같이 용서할 수 없다는 증오의 힘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데올로기라는 게 도대체 뭐관데…하는 냉소주의도 일종의 이데올로기도 일종의 이데올로기인 것을. 극좌와 극우를 똑같이 증오했다는 건 어쩌면 두 이념을 똑같이 신봉했다는 뜻도 된다. 자식을 국군으로도 인민군으로도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에미의 가슴속처럼. 반공교육만 철저히 받아온 전후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때 서로가 서로에게 똑같이 사람으로 차마 못할 짓을 많이 했다.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말 처지가 아니다. 깨끗이 비길 수밖에 없다. 형제간에 죽자 사자 싸우다가 승부가 나지 않고 비기게 되었을 때 허망해지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에미의 입장에선 그 이상의 최선이 어디 있겠는가.

공항에서 생긴일 - 박완서․소설가 2000.07.16

  김포공항에서의 일이다. 자식한테 노후를 의탁하려고 이 나라를 아주 떠나게 된 친지의 배웅을 나갔다. 영이별이 될 것 같은 예감 때문에 천천히 작별을 아쉬워하려고 넉넉한 시간에 집을 나섰더니, 길까지 잘 뚫려서 너무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별 수 없이 한시간도 너머 혼자 우두커니 기다려야 했다. 만나기로 한 은행 앞은 단체여행을 떠나려는 아주머니 할머니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고 있었다. 모처럼의 나들이로 들떠서, 거침없이 서로 찾고 부르고 웃고 떠드는 소리로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지만 그들이 어렵사리 얻어낸 해방감이 감염됐는지 나도 덩달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단체로 수속을 끝낸 가이드가 나타나 큰 소리로 호명을 해가며 여권과 탑승권을 나누어주자 그 유쾌한 무질서는 단박 성적표 받을 차례를 기다리는 초등학생처럼 숨죽인 긴장으로 바뀌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기 여권을 받았는지를 확인하고 난 가이드는 공항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모님들 우리 공항을 한 번 자세히 봐두시기 바랍니다. 관광객들도 따라 안내를 김포공항부터 시작할 모양이었다. 지금부터 제가 모시고 갈 나라의 공항하고 이 공항하고는 같은 건설업체가 지은 겁니다. 물론 우리 국내업체죠. 공교롭게도 낙찰가가 똑같아서 같은 돈을 들여서 지은 건데 그쪽 공항은 이 공항과는 댈 것도 아니게 아름답고 으리으리합니다. 곧 보시게 되겠지만 같은 돈 들여서 지은 거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겁니다. 왜 그런지 다 아시죠? 우리의 부실공사가 어디 돈이나 기술이 모자랍니까. 중간에서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고 실지로 들이는 돈은 총 공사비의 반의반도 안되니까 그렇게 되는 거죠.

  너도나도 턱을 크게 주걱거리며 조용해졌다. 아이들처럼 즐거워하다가 시무룩해지니까 그들이 견디어 온 치사한 세월만큼이나 참담한 주름살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관광을 그런 식으로 시작해도 되는 건지, 나도 옆에서 좀 놀랐고, 또 가이드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도 없었지만, 내가 정말 놀란 건 노년층 관광객의 표정에 나타난 전적인 동의(同意)와 체념이었다. 아마 그때 그들의 마음속으로는 우리나라의 온갖 이름난 부실공사로부터 작게는 말단 관공서나 교통경찰한테 직접 당한 수탈까지가 일순간에 꿰뚫고 지나갔을 것이다.

  고위 공직만 거쳤다하면 그의 공식적인 수입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막대한 재산을 형성해도 으레 그러려니, 망한 기업주가 국민을 모조리 빚쟁이로 만들고도 자기는 해외에 엄청난 외화를 도피시켰다해도, 그게 어디 처음 당하는 일인가, 웬 호들갑. 하는 식으로 체념부터 해버린다. 권력이나 재벌의 부정부패에 대해 흥분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 게 국민정서처럼 돼버렸다. 그런 정서를 가진 국민이 해외에서 과연 기 죽지 않고, 무시당할까봐 조바심하지 않고, 편안하고 의연하게 관광을 즐길 수 있을까.

왜 우리에게는 부정부패 없는 투명한 정치가 이다지도 지지부진 어려운가. 우리 생전에는 도저히 못 볼줄 안 통일의 물꼬까지 튼 현 정부가 아닌가. 만일 부정부패 없는 투명한 정치가 통일보다 더 어렵다면 통일의 노력보다 더 앞서서 해결했어야할 문제가 아닐까. 이 나이에 무릎 꿇라면 꿇고 엎드려서라도 진실로 진실로, 간절히, 간곡히, 마음으로부터 겸손되어 빌고 싶다. 부정이 통하지 않는 투명하고 정직한 정치 한 번만 보고 죽게 해달라고.

황홀한 만남 - 박완서․소설가 2000.08.13

  작년에 이웃집에서 화초를 한 뿌리 얻어다 심었다. 상사초라고 했다. 이름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꽃도 안 피고 잎은 곧 시들어버렸다. 잘못 옮겨 심어서 죽었나보다고 생각하고 곧 잊어버렸다. 잊어버리고 있는데 장마 중에 꽃대가 올라와 꽃이 피긴 했지만 영양실조가 역력한 파리한 꽃이 피자마자 장대비를 맞고 쓰러져 못 일어나고 말았다.

잎도 꽃도 될성부르지 안길래 뿌리도 성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금년 봄에 제일 먼저 땅을 뚫고 올라온 게 상사초 잎이었다. 산에 아직 잔설이 남아 있을 때였다. 아직 일년초들은 눈도 트기 전에 수선화를 닮은 싱싱한 잎이 홀로 너울대더니 여름도 되기 전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동안에 무성해진 한련 봉숭아 따위에 묻혀서 상사초는 있었던 자리조차 불분명해졌다. 장마 중에 두 개의 꽃대가 십 센티미터나 올라온 걸 발견하고서야 아야, 참, 상사초가 여기 있었지 겨우 생각이 났다. 잎이 진 지 두 달은 지나서였을 것이다.

  그 꽃대는 하루에 십 센티미터씩 자라는 것 같았다. 발견한 지 사나흘만에 오십 센티미터가 넘는 긴 꽃대가 되었고, 꽃대 끝의 꽃봉오리도 여러 송이였다. 분홍도 아닌, 보라도 아닌, 청승맞은 빛깔로, 나리 꽃 모양의 통꽃이 뭐가 그렇게 급한지 무리 지어 한꺼번에 피어난 걸 보니까 이상하게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같은 뿌리에서 난 잎과 꽃의 서로 만날 수 없음을 왜 옛사람들은 상사(相思)에 비하였을까. 예쁜 이름이라 생각했던 게 잔인한 이름으로 여겨졌다. 우리의 토종 화초나 야생꽃 이름 중에는 예쁜 것도 많지만, 너무 극 사실적이어서 잔혹한 것도 꽤 있다.

  며느리밥풀이나 며느리 밑씻개 따위 풀이름에는 잔혹한 여인애사(女人哀史)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상사초 또한 남녀의 자유로운 연애감정에 대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계와 질투 섞인 가학취미가 스며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대는 상사하는 사이의 못 만남은 커녕 잠시의 엇갈림조차 불가능한 세상이다. 핸드폰이라는 물건 때문에, 연인들은 만나기로 한 장소에 이르르기 전부터 어디만큼 왔나를 시시각각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저러다가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까싶게 계속해서 속살거리면서 만날 지점까지 가는 연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게 요즈음 세상이다. 그래서 나는 상사초한테 네가 무슨 상사초냐, 너는 이제부터 상극초 아니면 웬수 꽃이나 돼야할 것 같다고 비꼬아 주었다.

  며칠 전 시내에 나갔다가 늦게 들어간 날이었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곧장 상사초에게 이끌렸다. 저만치서 보기에, 산에서 기묘한 새가 한 쌍 날아와 내 집 마당에서 잠시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조심조심 다가가니 상사초였다. 마침 온종일 내리던 비가 개고 중천에 상현달이 걸려 있었다. 그 청순하고도 요염한 달빛은 저절로 달의 절정은 만월이 아니라 상현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분홍도 아닌, 보라도 아닌 상사초 꽃이, 얼굴 씻고 나온 반달 빛을 만나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요요하게 빛났다.

  그 때 처음으로 나는 상사초의 꽤 진한 그러나 야하지 않은 향기까지 맡을 수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상사초가 피어난 건 저 달빛을 만나고자함이었구나, 떨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달과 꽃이 각각 자신의 최고의 순간을 던져 저리도 황홀하게 교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 또한 그것들의 그런 순간과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까짓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싶게 삶이 비루하고 속악하여 치사하게 느껴질 때가 부지기수로 많다. 이 나이까지 견디어온 그런 고비고비를 생각하면 먹은 나이가 한없이 누추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삶은 누추하기도 하지만 오묘한 것이기도 하여, 살다보면 아주 하찮은 것에서 큰 기쁨,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싶은 순간과 만나질 때도 있는 것이다.

3. 박완서 작품의 시대별 감상

1) 70년대 작품의 감상과 문학적 배경

-1970년대 박완서 문학적 배경

  신설동 집에서 살던 당시 박완서의 남편은 백화점에서 장사를 했었는데 대기업이 밀려들어오면서 규모를 축소시키며 결국에는 백화점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제조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주로 조명기구를 만들었는데 이른바 소규모 가내공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박완서 남편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삶을 꾸려 나갔다. 집에서 200m정도 떨어진 곳에 남편의 공장 집이 있었는데 그곳은 일본식 2층집이었다. 공장 집은 하도 낡아서 다다미방이 바스러질 것 같았다. 박완서는 거기로 점심을 해다 나르면서 그 2층 다다미방에서 「나목」의 초고를 썼다. 박완서 이때 지쳐서 몸이 말라갔다.

첫 번째 작품 「나목」여성동아에 당선되면서 박완서는 문단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다. 박완서는 밝은 웃음으로 그늘이 없어 보였지만 그의 소설에는 깊은 상처와 삶의 또 다른 모습이 표현된다. 「나목」으로 50만원의 고료를 받았는데 1970년 당시에는 꽤나 큰돈이었다. 박완서 남편과 아들 원태를 데리고 속리산으로 기념여행을 다녀왔다.

등단 후에도 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나목」도 집안 식구들이나 이웃들에게는 언제 썼는지 모르게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작품이었고, 박완서 여전히 집안 식구들의 저녁상을 위해 무거운 시장 바구니를 들고 언덕을 올랐다.

「세모」, 「어떤 나들이」,「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지렁이 울음소리」등은 박완서의 초기 단편들로 특히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와「지렁이 울음소리」는 각각 『현대문학』과 『신동아』에 실렸었다. 「지렁이 울음소리」는 원래 제목이 「몬로는 시인이었대」였었다. 그런데 편집실에서 작품은 좋은데 제목이 너무 이상하니까 바꿔주었으면 했다. 등단한지도 얼마 안된 신인 작가인데 너무 파격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문학과지성』에 다시 실리게 된다. 그 당시 『문학과지성』에 작품이 실린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문학과지성』과『창작과비평』은 계간지로서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교과서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박완서는 여성잡지 출신의 주부 작가의 수준을 넘어서 제대로 된 비평가의 관심권 안에 들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1970년 11월에 전태일이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분신자살 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정치권력과 그 반대 세력, 또 자본가와 노동자의 투쟁의 연속이었다. 박완서의 단편들과 수필은 그런 와중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무감각을 꼬집었다. 특히 1072년 10월 유신 이후 정치권력의 서슬이 퍼럴 때조차 박완서 가능한 방법으로 용기 있게 글로써 저항했다.

「도시의 흉년」은 1976년『문학사상』에 연재되었는데, 이병주의「행복어 사전」과 나란히 실려 대학가의 화제를 뿌렸다. 그 때는 문학지망생이 아닌 사람도 『문학사상』을 교양지로 끼고 다닐 때였다. 또 『동아일보』에는 「휘청거리는 오후」가 신문 연재 소설로 실리기 시작했다. 이 때 원서의 어머니는 망령이 점점 심해져 원서를 점점 지치게 했다. 밤에도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자고 아침에도 부자연스럽게 일어나곤 했다.

1979년 『동아일보』에 「살아 있는 날의 시작」이 연재되었다. 이 작품은 어머니의 망령이 한참일 때 고생하며 쓰여진 작품으로 같은 해 원서의 어머니는 기력이 쇠약해져 돌아가셨다. 1980년 여름 소설집 『살아 있는 날의 시작』을 출간했다. 이 책의 후기를 박완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이야기를 신문에 연재하는 동안 내가 접할 수 있는 독자의 반응이란 목청 높은 비난 아니면 냉랭한 무관심이었다. 고독한 작업이었다. 고독에 못 이겨 주제를 흐지부지하거나 적당히 가당(可當)하지 않고 내가 담고 싶은 메시지에 끝까지 충실했음을 내 나름의 성과라고 자위하고 있다. 작품을 끝내고 났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나의 글은 다른 아무하고도 아닌 바로 나 자신과의 싸움의 흔적일 뿐인 것 같다.

이렇게 70년대 박완서의 문학적 배경은 대체적으로 힘들고 고달픈 시작의 단계였다. 늦은 등단이었지만 끝까지 자신의 일에 매달릴 줄 아는 끈기와 열정으로 80년대, 90년대에도 여전히 독자들에게 사랑 받는 문학의 대가로 성장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던 것이 70년대 박완서 문학의 특징이다.

- 1970년대 박완서 주요 작품 감상

나목 (1970년 여성동아)

  주인공 이경은 한국 전쟁 중 서울 명동의 미8군 PX의 초상화부에 근무한다. 그녀는 자기 때문에 두 오빠가 폭격으로 죽었다는 죄 의식이 있으면서, 동시에 두 아들을 잃고 망연자실한 상태로 살고 있는 어머니와 암울한 집안 분위기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최 사장은 우람하고 큰 중년의 사나이, 옥희도를 데려온다. 그러나 새로 온 옥희도는 환쟁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그러나 이경은 황량한 풍경이 담긴 눈을 가진 옥희도에게 마음이 끌린다. 이경은 옥희도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이 때론 아프고, 때론 감미롭고 어쩌면 두려워, 어떤 뚜렷한 감정을 추려 낼 수는 없어도, 그 생각에서 조금도 헤어나지를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다이아나 김이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다. 이경은 다이아나의 애인에게 온 편지를 읽어 주고 대신 편지를 써 주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다이아나가 자신의 초상화를 미국의 애인에게 보낸다는 이야기를 하자 이경은 얼떨결에 옥희도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러나 옥희도가 그린 초상화를 본 다이아나는 심하게 빈정거린다. 옥희도는 스카프에 그린 초상화를 뺏어 아무렇게나 구겨 뭉갠다.

그 다음 날부터 옥희도는 감기 몸살로 인하여 결근하였고, 왜 결근하는지 모르는 이경은 PX 전공(電工) 태수와 함께 옥희도를 찾아간다. 거기서 옥희도의 부인을 보고 호감을 갖는 자기에게 화가 나 곧 돌아오게 된다. 해가 1952년으로 바뀌고 이경이 21세가 되었다. 옥희도는 다른 환쟁이들과 같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경과 옥희도는 우연히 예전의 그 장난감 가게에서 만난다. 여기서 그를 만난 이경은 온종일 같이 있던 사람 같지 않게 그에게 새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는 응석 부리듯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걸었다. 옥희도와 이경은 아무런 약속도 안 했으면서 매일 밤 어김없이 침팬지 앞에서 만났다. 눈이 몹시 온다던가 날씨가 유별나게 춥다든지 하면 완구점 앞의 구경꾼은 둘일 때도 있었다.

어느 날 태수는 형님과 형수님에게 색시감이 있다고 소개시켜 준다고 하고는 이경에게 양해를 구하고 같이 나갔다. 완구점 앞에서의 옥희도와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이경은 곧 태수와 그의 가족들과 있었던 일은 잊었다. 그냥 뿌연 회색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이경과 옥희도는 매일 완구점 앞에서 그들의 '함께 있음'을 즐겼다. 그리고 이경은 옥희도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지만, 옥희도는 어울리는 사이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이보다는 어울리는 사이가 더 축복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며, 태수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옥희도는 진짜 화가가 되고 싶다고, 미치도록 그리고 싶다며 말하고는 며칠 동안 나가지 못함을 이경에게 말한다.

이경은 PX에 나오지 않는 옥희도를 찾아간다. 그녀는 옥희도의 집, 캔버스 위에서 하나의 나무를 보았다. 거의 무채색의 불투명한 뿌연 화면에 꽃도 열매도 잎도 없는 참담한 모습의 고목이 서 있었다. 화며 전체가 흑백의 농담으로 마치 모자이크처럼 오톨도톨한 질감을 주는 게 이채로울 뿐 하늘도 땅도 없는 뿌연 혼돈 속에 고목이 괴물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이경은 옥희도의 부인이 생활의 어려움만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는 그녀에게 화가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달음질쳐 나온다.

이경은 오로지 불투명한 공간에서 죽어 가는 고목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옥희도가 그린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을 그가 그 모든 것에 심한 기갈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경은 얼마 전 알게 된 GI의 기갈을 도울 수는 있어도 옥희도의 기갈을 도울 수는 없음을 서글프게 깨닫는다. 그리고는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녀는 옥희도의 부인을 생각했다. 그리고 옥희도의 집으로 가서는 잠을 청한다. 집에 돌아온 그녀에게 어머니는 어젯밤의 딸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눈치가 조금도 없다. 어머니가 밥상을 차리고 자리에 눕자 그녀는 양단이불 위에 힘없이 얹힌 까실한 손에, 정맥만이 비대하게 솟은 손을 만져 보았다.

어머니의 손은 뜨거웠고, 머리에는 꽤 높은 열이 있었다. 초췌한 어머니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호흡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룻밤이 지나도 어머니의 상태가 좋아지지 않자 그녀는 의사를 데리고 왔다. 진찰을 마친 의사는 상당히 위독한 상태라고 말하고, 처방을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곧 죽게 된다. 태수의 형수님은 이경의 모친상을 자신의 일인양 도와 주려 애를 쓰고, 태수와 결혼시키려 한다. 얼마 후 태수와 이경은 결혼을 한다. 세월이 흘러 이경과 태수는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간다. 어느 날 신문에서 고(故)옥희도 유작전의 기사를 읽고 태수와 함께 유작전에 간다. 거기서 이경은, 지난날 옥희도가 그리고 있던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이 지금의 자신에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裸木)이었음을 알게 된다.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1977년 평민사)

  작자는 가끔 별난 충동에 휩싸인다. 신나게 누군가를 위해 손뼉을 치고 싶어한다. 그러나 요즘은 그럴 기회가 별로 없어 아쉬워한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길거리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찾기도 힘들고, 최근 들어서 스포츠에 무관심했다고는 하나 예를 들어 국제적인 운동 경기도 예전만 못하다고 아쉬워한다. 그리고 스포츠의 이러한 경향은 무조건 이기고 1등만 해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화되면서 사회 전반에도 사소한 언쟁에 각종 경쟁에만 치우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내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작자가 탄 버스는 멈춰버리고 만다. 정거장도 아닌 곳에 버스가 멈춰버리자 안 그래도 요즘 신나는 일이 없어 우울해 하던 작자는 버스 안내양에게 벌컥 짜증을 내고 만다. 그러다가 버스가 멈춰 서게 된 이유가 마라톤 경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최근 들어 보이는 심심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버스에서 무작정 내린다. 그리고는 마라톤 선두 주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도착지점으로 가게 되지만 그곳에서 본 사람들은 얼마 되지도 안거니와 마라톤에 대한 기대도 별로 없는 듯 보여 잠시 실망하게 된다. 그러다가 1등이 결정 나고 그런 뒤에도 교통 체증이 그대로 이자 작자는 문득 꼴찌 주자의 얼굴 표정이 궁금해진다.

시간이 흐르고 저기 멀리서 마지막 주자가 골인지점을 향해 마지막 질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왠지 모를 희열에 휩싸인다. 항상 1등의 얼굴만이 감동을 주고 멋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작자는 그 마지막 꼴지의 얼굴 표정에서 정직하게 고독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는 차도로 뛰어들어 환호성을 지르며 꼴찌에게 박수를 보낸다. 뜻밖의 장소에서 환호하고픈 오랜 갈망을 마음껏 풀 수 있었던 작자는 날아갈 듯 즐거워한다. 그리고 끝까지 달려서 골인한 꼴지 주자에게도 감동을 받으며 갈채를 보낸 것을 뜻 깊게 생각한다.

꿈을 찍는 사진사 (1977년 한국문학 6월호) 

  꿈을 찍는 사진사 김영길 그는 사랑하는 여인 옥순이의 꿈을 찍어주는 사진사다. 그리고 그가 사는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마치 지붕조차 하얗게 색칠되어 있을 것만 같은 집은 꿈을 찍는 사진관이다.하지만 그는 신참내기 교사이며 교사생활에 좌절과 실망감 그리고 교사로서의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한다. 그런 그에게 부모들의 촌지가 유혹을 던지고 하숙집주인 석구의 엄마의 유혹도 보태어진다.

  잠시동안 여자친구 옥순이에게 멋진 데이트를 시켜주고 싶은 맘에 촌지를 쓰지만 곧 자신의 월급으로 채워놓고 그는 받았던 촌지들을 불우한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사용한다. 스스로 뿌듯히 여기지만 아무도 그런 그를 잘한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진정한 좋은 교사란 없는걸까? 교사생활에 대한 확고함을 잃어가던 영길 그런 영길에게 최악의 시련이 닥쳐온다. 사랑하는 옥순이가 서울집 언니 집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다른 좋은 조건의 남자와 결혼하라고 강요하는 언니 곁에서 있고싶지 않다며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자신의 품에 안겨 우는 옥순이. 너무나 순수하고 애기같은 자신의 사랑을 잃어버릴까 두려워진 영길은 그녀의 날개를 꺾어 놔서라도 자신의 품에 안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제로 그녀와의 사랑을 다져 두려하자 그녀는 품속에서 재빨리 도망치고 그 대신 하숙집주인인 석구 엄마가 대신 그의 욕망을 채워준다. 하지만 욕망을 충족시킨 여운을 수습하기도 전에 옥순이가 그 모습을 보게되고 그 장면에 충격을 받은 옥순이는 급히 뛰쳐나간다. 잠시 뒤 옥순이 언니의 전화한통이 걸려오고 교통사고를 당한 옥순이를 향해 병원에 뛰어갔지만 그곳엔 빨갛게 물든 옥순이의 노란 바바리와 그녀의 시체가 있을 뿐이다. 결국 꿈을 찍는 사진사가 되고자했지만 될 수 없었던 영길.. 그는 사랑하는 여인의 꿈을 찍어주는 사진사가 되고자 했던 자신의 꿈도 잃었다.

창밖은 봄 (1977년 열화당)

  비쩍 마른 여윈 몸을 갖고있는 길례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신경질적이고 고상한 척 하는 교수 댁의 가정부로 있다. 하지만 길례는 단 하나의 안식처였던 이곳에서도 곧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물역가게 정씨는 나이는 많지만 심성이 착하고 길례를 아껴주고 힘이 되주던 사람이다. 그런 둘의 꾸밈없는 만남을 다른 이들은 왜곡하고 불결하게 보고 그들을 그 동네에서 영원히 추방시킨다.

  정말 어이없게도 그 둘이 만나왔던 교수 댁의 뒷방에서 그들이 했던 건 고작 서로의 건강을 위해 맛나는 음식을 먹고자 했던 것뿐이었거늘.. 하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둘은 함께 삶을 영위하기로 약속하고 그 작은 안식처에 또다시 행복을 느낀다. 간신히 어렵게 공사장에서 야방을 보며 돈을 버는 정씨. 그런 그는 힘들었지만 길례와 자신들의 아기를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 하지만 곧 겨울이 닥쳤고 그들의 삶은 또다시 흔들린다.

  그러던 중 정씨는 얼어붙은 수돗물을 녹여 물을 나오게 해주는 일을 따라다니며 돈을 벌게되었고 점점 더 그 일에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한다. 길례는 자신들의 보금자리가 다시 안정적으로 정착해나가자 더 없는 행복감을 느끼지만 곧 그런 그들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쳐온다. 일을 나갔던 정씨가 행방불명이 되어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몇날며칠을 기다리고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정씨. 결국 길례는 유명한 점쟁이 백봉어른을 찾아간다. 자신을 찾아온 길례에게 남편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알려주고 비법까지 가르쳐 주지만, 길례는 가르쳐준 비법을 다른 이에게 뿌리면 자신으로 인해 그 사람이 액땜을 하게되니 싫다며 다른 비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그런 착한 길례를 보며 길레에게 만들어 논 비법을 놓고 가라고 하며 봄이 오면 남편은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 길례는 하루하루 봄이 오기를 바라며, 정씨가 돌아올 날을 행복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하지만 남겨진 길례가 만들어 논 비법을 보며 백봉어른은 왠지 자신의 일에 대한 불길함과 회의감이 느껴지고 하루빨리 일에서 손을 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더 이상 남을 점쳐주며 불길하게 살고싶지 않다는 결심을 한 백봉어른, 그는 겨울만 지나면 봄만 온다면 이렇게 봄을 다급히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 정씨는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바보처럼 누명쓴 채 남의 집 연탄 가게 일을 봄까지 도와주기로 약속하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봄이와 어서 와서 자신이 길례 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이렇게, 세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삶에서 봄이란 계절을 새로운 희망의 상징으로 삶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따뜻한 창 밖의 봄을 기다리고 있다.

도시의 흉년 (1979년 문학사상)

  주인공 지수연은 수빈과 쌍둥이 자매로 태어난다. 그러나 수연은 쌍둥이 남매는 상피 붙는다는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이모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 후 국민학교에 들어갈 무렵, 할머니의 싸늘한 눈총을 받으며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지만 차별 대우 속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낸다.

  1.4 후퇴 때 빈집을 털고, 양공주의 포주 노릇으로 돈을 모아 동대문 시장의 거부로 떠오른 수연의 엄마는, 국민학생인 수빈과 수연의 뒷바라지에 물질적으로 최선을 다한다. 그 후, 수연은 여자대학에 입학하고, 수빈은 1년을 재수하여 서울 대학에 입학한다. 수빈은 대학 재학 중, 돈이면 만사가 다 해결된다는 어머니의 가치관에 환멸을 느끼고 군에 입대한다. 군 입대 전, 사랑을 느꼈던 가난한 판잣집의 여대생 순정과의 중간 연락을 수연에게 부탁한다. 군에 간 수빈과 가난한 여대생의 연락원 노릇을 하던 수연은 집에서 금덩이를 훔쳐다가 첩 살림을 하는 아버지를 판자촌 동네에서 발견하곤 당황한다. 결국 수연은 군에 간 오빠의 뒷바라지를 빌미로 횡령한 돈을 아버지의 첩 살림에 보태주게 된다. 대신 훔친 금덩이를 아버지(지대풍)가 직접 집에 가져다 놓게 함으로써 가정의 평온을 꾀한다.

  그런데 아들을 낳은 아버지의 첩은 절름발이라는 약점을 이용해 교묘하게 수연과 그의 집에 접근해 온다. 그러나 수연은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첩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이 무렵 수연의 언니 수희는 법관인 서재호와 약혼을 한다. 그러나 일류병에 걸려 허세와 사치만을 좇는 어머니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는 수희를 시기한 수연은 형부가 될 그 남자를 일부러 유혹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다. 언니의 행복에 불행한 복선을 긋기 위해서다. 그 후 언니는 결혼을 하나 결국에는 이혼하게 된다.

  또한 그 무렵 휴가 나온 수빈은 순정과 장래를 약속한다. 그러나 물질 만능주의 가치관을 가진 어머니에 부딪쳐 귀대를 하루 앞둔 날 저녁, 심한 좌절감에 빠져 만취가 된 채 괴로워한다. 그 날 밤잠을 자던 수연은, 수빈의 괴로움을 쌍둥이 특유의 예지력으로 예감하고 속옷 바람인 채로 차고 속에서 괴로워하는 수빈을 도와 주려다가 집안 사람들에게 상피 붙는다는 오해를 받고 심한 구타를 당한다. 그리고 며칠 전 집에 와 있던 대고모 할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상피 붙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 다음날 아침, 수연은 자신의 결백을 이야기하러 어머니에게 갔다가 최기사와 어머니의 불륜을 목격하게 되고 아버지에게 첩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만다. 결국 가정에 파탄이 오고, 할머니는 절에 있는 양로원에 들어가고, 수연이 어머니는 반신불수가 된다.

  그리고 수빈은 순정과 결혼하여 그들이 바라던 가정을 꾸려 평온을 찾는다. 수연은 집을 나와 구주현이라는 애인을 면회갔을 때 만난 성미영의 집에 기거하면서 구주현이 경영하던 야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구주현의 석방을 기다린다. 그 후 석방된 구주현이 얼마전 별세한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수연도 그를 따라가 그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

2) 80년대 작품의 감상과 문학적 배경

-1980년대 박완서 문학적 배경

  박완서 남편에게는 의사 형님이 1분 계셨는데 납북도중 형님 내외분이 사망했다. 그러던 형님 내외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당시 집에 남아있어 죽지 않고 고아가 된 호원영(전쟁당시 6세)에게서 1983년에 연락을 받게 된다. 원영은 외국 입양도 거부한 채 운전기사를 하며 친족들을 찾기만을 기다렸으며, 박완서의 가족은 그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의 잃었던 姓도 되찾게 해주었다. 그는 가난하고 교육정도도 낮았지만 바르고 착한 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30여년이 넘는 동안 헤어져 있던 시간의 차이는 극복하기 힘든 것이었고, 그것은 「재이산」이란 작품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원영의 고아원 체험을 바탕으로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가 쓰여졌다. 「미망」을 쓰던 당시 4째딸 원균의 중상의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박완서는 이를 간호하면서도 집필을 늦추지 않았다.

  1986년 늦가을 남편의 폐암 진단을 받게 된다. 투쟁에 가까운 간호를 하는 도중에도 「저문날의 삽화」를 쓰게 되고, 「미망」의 연재도 계속 되었다. 결국 88년 5월 11일 남편 호영진이 숨을 거두게 된다.

그 해 8월 31일 박완서의 유일한 아들인 원태의 죽음까지 겪게 되었다. ‘평생 인간과 의학과 연극을 사랑하다 간 젊고 아름다운 영혼 여기 잠들다’라는 아들의 묘비명을 써주면서 박완서는 수녀원으로 가겠다고 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해인 수녀의 배려로 분도 수녀원 언덕 방에 묵게 되었다. 그리고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제목으로 일기를 쓰게 된다.

박완서가 휴식기에서 다시 집필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시인 고정희씨가 찾아와 원고부탁을 하고가 아니였을가 싶다. 박완서는 고정희 시인의 부탁으로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를 쓰게 되고 89년에 원태가 살아 있을 당시 사 놓은 워드프로세서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미망」도 재 연재되었다. 독자와의 약속을 지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때문이었는데 이는 『동아일보』 자전 에세이 「나의 길」에서 그 문학의 열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 있어 여기에 옮겨본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남겨진 자유가 소중하며 그 안에는 자식들도 들이고 싶지 않다”

  80년대는 한 가족을 받아들이고 두 가족을 잃는 기쁨과 아픔을 동시에 겪게된 시기이다. 이 시기 속에서도 불같이 뿜어져 나온 문학의 열망으로 그녀는 집필을 놓치지 않게 된다. 자전적 소설집 엄마의 말뚝을 시작으로 90년 미망 집필 완결까지 박완서는 끊임없이 그 열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한 가정의 어머니로써 한 가정의 아내로써의 위치를 잃게 되는 아픔을 겪어낸 그야말로 자유로의 열망이 아니었을까 싶다. 위 내용은 모두 ‘웅진출판사’에서 출간된 「박완서 문학앨범」이란 책중 박완서의 맏딸 호원숙이 쓴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이란 부분을 읽고 쓰게 되었으며 원숙의 예술가로서의 박완서를 조명하는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을 끝으로 80년대 문학적 특징을 마무리 하려한다.

 “어머니에게 글 쓰기는 숨쉬기와도 같았고 글을 읽는 것은 밥을 먹는 것과도 같았다. 어떤 상황도 고통도 숨쉬기를 끊어내지 못했다. 도리어 호흡과도 같았던 글 쓰기가 어머니의 운명과 고통을 이겨내게 만들었고, 소중한 작업 중에 빛나는 자유의 기쁨은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되었으리라”

- 1980년대 박완서 주요작품 감상

 엄마의 말뚝 1.2.3. (1980~1982년 세계사)

엄마의 말뚝 1.(1980년)

  오빠를 데리고 이미 서울에 나가있던 엄마는 나 역시도 신여성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나를 서울로 데리고 가기 위해 왔다. 나는 할머니 치마폭에서 엄마를 노려봤지만 종종 땋는 머리만큼은 엄마에게 맡길 정도로 애정에 굶주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엄마는 나의 믿음을 배신하고 머리를 댕강 잘라버려 나를 서울로 데려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기차와 국화빵, 전차는 나를 서울의 매력에 빠져들게 했지만 우리가 사는 곳은 현저동 상상 꼭대기라 부릴 만큼 허술한 곳이었다. 엄마는 과감히 그곳은 서울이되 서울이 아닌 “문밖”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리고 오빠가 성공하면 그 “문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셋방살이의 설움을, 엄마의 모진 타인에 대한 배척 속에서 나는 생기를 잃어간다. 그리고 매봉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지만 나는 “문안” 사람 속에도 “문밖”사람 속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엄마의 말뚝 2.(1981년)

  내가 없는 집안에서는 늘 일이 일어난다. 나중에 나는 그 안주인만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그 날은 친구 집에서 술을 마시고 온 날이었고, 불행은 엄마를 찾아오게 된다. 부러진 뼈를 잇기 위한 수술을 엄마는 반대하지만 나는 간신히 설득을 하게 된다.

그런 수술이 잘 경과되었음에도 엄마는 수면제 한 알에 오빠가 죽었던 그 시절 그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수술한 그 다리를 잡고 보호하려하였다. 다리는 엄마에게 아들이었다. 그 후 엄마는 남은 생애 모든 원기를 그 때 다 쏟아 부은 듯 생기를 잃어간다.

엄마의 말뚝 3.(1982년)

  오빠가 죽었을 때 우리는 오빠를 화장하여 뿌렸다. 그리고 엄마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와 내 조카들은 그 의견에 반대한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에 의해 그런 허술한 화장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의 의견과 다르게 우리는 묘자리를 알아본다. 엄마는 점점 대 소변도 가리지 못하고 결국 묘자리 완성을 기다린 듯 숨을 거둔다. 그리고 그 묘지 앞에서 나는 엄마의 이름과 해후하게된다.

그 가을의 사흘동안 (1980년 한국문학 6월호)

  60세 접어드는 한 여인이 옛 일을 회상하면서 지금 그녀가 원하는 것이 뭔가를 깨달아 가는 사흘 동안의 이야기다. 배경은 1950년대의 동란 중이던 그녀나이 만 27세 때부터 전개가 된다. 그녀는 변두리의 어수룩한 주택가에 그 동네 복덕방 영감의 소개를 받아 경성상회의 이층을 산부인과로 개업을 한다. 그녀가 산부인과를 선택한 이유는 아이를 받기 위해서 라기보다는 아이를 죽이기 위한 즉 낙태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날 경성상회의 주인인 황 씨가 배가 부른 딸아이를 데리고 온 것이 그녀의 첫 번째 손님이었다. 황씨는 그녀에게 자신의 딸이 부인병원에서 일어난 일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러면서 그 아이가 황씨에게 업동이로 들어온 것이라고 동의를 얻어낸다. 그녀가 처음 이곳을 선택했을 때의 예감처럼 그녀에게 양공주가 하루에도 몇 명씩이나 찾아와 소파수술을 하고 간다. 그럭저럭 30년 가까운 세월을 한곳에서 같은 일을 되풀이하면서 주위의 환경도 많이 변하게 되고 더는 변두리가 아닌 도심권에 가까운 동네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단 사흘밖에 안 남았다는데 대해서 심한 조바심을 느낀다. 과연 그녀가 그 일을 그만 두기 전에 하고 싶은 무엇이 있어서 일까?

  바로 그것은 애기를 받아 보는 것이었다. 그녀가 개업을 했을 때 첫 손님도 산모였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30년 동안 단 하나의 산목숨도 받아 보지 못하고 그걸 의식적으로 피하는 사이 그녀는 소파수술 전문의로만 알려졌다. 예전 황씨의 딸이 낳은 아이인 만득이의 처가 만삭이 된걸 본 순간부터 간절히 바라고 바라던 일인 아이를 받는 일. 그러나 황영감은 그녀에게 사람백정이란 말을 하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이틀 전으로 시간은 앞당겨 진다. 요즘 그녀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린다. 아이가 우는소리...깨어나 보면 교회의 신도들이 새벽부터 예배를 하면서 우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그만큼 그녀에게 심리적으로 닿아오는 압박감일 것이다.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기도를 한다. '제발 저에게 살아 있는 아이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주옵소서...' 마지막 날 뜻밖에 찾아온 소녀의 배가 상당히 불러 있다. 그녀는 가슴이 울렁거리기까지 한다. 만삭이 된 저 소녀의 아이를 과연 받을 수 있을까?.. 소녀는 혼자 였으며 눈에는 수치심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눈물과 공포감이 서려 있다. 우선 그녀는 소녀를 안심시키고 차근차근히 상담을 하기 시작한다. 소녀는 결단코 자신이 임신을 한 것을 부인하며 죽고 싶다고 말을 한다. 그 소녀를 보면서 그녀는 자신의 옛일을 회상한다. 처음 그녀도 뱃속에 원치 않는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았을 때 선배 언니네 병원에 가서 울부짖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자신과 똑같았던 상황이 지금 그녀 앞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결심한다. 소녀의 아이를 받아내서 없애기로...다행히 수술을 끝마치고 나서 앉아 있는 사이 어디선가 희미하고도 확실하게 어떤 소리가 들려 온다. 그건 방금 소녀가 분만한 미숙아가 강보에 싸여 그런 기성으로 아직 목숨 붙어 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죽은 줄만 알고 있었던 아이였건만 그녀가 자신조차 모르게 미숙아에게 베푼 건 완벽하고 따뜻한 신생아 취급 이였다. 배꼽처리도 잘 돼 있고 기저귀까지 차여져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기르고 사랑할 수 있는 아기를 ..그녀는 아기를 품에 안고 미친년처럼 거리를 뛴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큰 병원을 찾기 위해서 뛰고 또 뛴다. 의사에게 품안의 것을 내 보였으나 이미 죽어 있었다. 아기를 안고 그녀의 새집으로 그곳에 아기를 묻어 준다. 교회당에서 신도들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꽃을 찾아서 (1986년 창작과 비평사)

 “나는 이 동네가 싫어요” 이렇게 시작하는 이 책은 장명환이라는 여자중학교 교장의 퇴임부터의 이야기이다. 그런 그에게 한 여학생의 부모가 여학생의 손목을 붙잡고 학교를 찾아오면서부터 일은 꼬이기 시작했다. 처자식이 있는 수학선생이 이 학년 여학생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그 부모가 교장실로 들어와 그의 멱살을 잡을 때 오히려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고플 만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들의 학생들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일을 조속히 해결하려는 교감에 의해 여학생의 부모에게서는 돈이 요구되었고, 그 돈을 주는 대신 더 좋은 조건의 학교로의 이직을 원하는 선생사이에서 그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사라는 자랑스런 직업 앞에서 그는 한 점의 부끄러움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수학선생을 파면조치하고 자신은 사퇴를 하였다. 그것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일이었음에도 여럿이 희생되고 이득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는 어리석은 짓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바로 그의 부인에게서도 원망을 받을 만한 일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집을 조금 작게 와서 부인의 한탄과도 같은 저 “나는 이 동네가 싫어요”라는 말에도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왜 싫으냐고 밖에 묻지 못했다. 동네 이름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그녀 앞에서 그는 조곤 조곤 얘기를 해보았으나 집을 좁혀 이사를 온 데다가 먼저 살던 동네마다 하등 나을 것이 없는 이곳이 맘에 들리 없는 그의 부인에게는 그저 잔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다세대 주택에서 마땅한 돈벌이가 없는 탓에 두 노부부는 곁방에 지요꼬 라는 일본 여자에게 세를 주게 되었다. 그로 인해 조금의 현금 적인 이득은 보게 되었지만 불편한 게 이만 저만이 아닌 장명환씨는 그때마다 늦게 본 막내아들을 일본 유학을 보내 공부를 시켰더니 잠깐 귀국해 결혼식만 올리고 다시 신부를 데리고 다시 일본으로 갔던 아들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지요꼬는 일본의 참한 규수의 표본이었다. 적지 않은 돈을 월세로 내고 있었고 아무 탈도 없었으며 두 노부부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도 했기에 주위에서는 셋방 놓기가 유행이었으나 어느 집 하나 성공한 적이 없었고 그때마다 지요꼬의 가치는 높아져만 갔다.

  그러던 중 명환의 대학 동창인 서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같은 사범대학 동료로써 그 아내들도 그 자식들도 모두 친구처럼 지내는 허물없는 친구였다. 그의 아들이 한국학에서 일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는 그 부끄러움을 만회하고자 일본의 금서를 지요꼬를 통해 받아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지요꼬에게 부탁을 했을 때 그는 생각 치도 못한 냉정한 거절을 당해야했고 그것은 확인우편이라는 것을 통해서까지 다음날 확인해 줘야하는 치욕마져 봐야했다. 그에 분통터진 그는 아무렇게나 길을 나서게 되고 여기 저기 조성된 화단에서 색색의 꽃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마치 신비의 꽃을 찾기 위한 걸음이었던 듯한 활력까지 되찾게 된다.

3) 1990년대 박완서 주요작품 감상

 한 말씀만 하소서 (1990년 생활성서)

  1988년 여름 박완서는 사고로 아들 원태를 잃었다. 자식을 앞세운 고통으로 밤마다 술을 마시고 수면제를 복용해야 잠에 들 수 있으며 먹은 밥조차 토해낸다. 그리고 아들의 죽움을 인정 안하며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데 참적의 고통을 당해야 하냐고 신을 끝없이 원망하지만 신은 대답이 없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수녀원을 찾았고 한 어린 수녀로 인해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원망에서 나라고 그런 일을 당하면 안 되는 것인가라는 반문을 제시하는 계기를 만들며 마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또한 자신이 죄가 주지도 받지도 않는 무관심이라고 신 앞에 승복한다.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고통의 휩싸이자 미국에 있는 막내딸네를 찾는다. 아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고장이라 홀가분했지만 이내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국인들의 말들이 그녀를 알 수 없는 소외감으로 빠져들게 하며 우리말을 그립게 한다. 그리고 아들 잃은 다음의 고통은 고국에서 죽지 못함이라 생각하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와 몇달후 박완서는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국에서의 우리말에 대한 그리움은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그녀의 욕구이자 이젠 아들 ! 없는 세상을 사랑하게 됐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의 도움과 남편과 아들과 서로 깊이 사랑하고 믿었던 추억이 그녀의 홀로 서기를 가능케 하였다. 박완서는 신께 사랑하는 능력을 주심에 감사하며 집착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본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1991년 정민사)

  제목에서도 유추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 이 작품은 스몰셀이란 암을 겪는 주인공이 여덟 개의 모자로 가족들 곁을 떠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암에 걸린 환자들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육신이 손을 들기 전에 정신이 먼저 손을 놓아버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진실과도 같은 현실 앞에서도 주인공원 예전보다 더 태연하게 생활을 해나가는 장면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주인공을 지켜보면서 가장 마음 아파한 화자(부인)는 암을 겪어가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주인공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아파했음은 자명하다. 가장 암세포와 닮은 세포가 머리카락 세포여서 항암제를 맞고 나면 머리카락이 빠진다고 한다.

그런 주인공의 민둥 머리를 가리기 위해서 주인공이 썼던 모자가 그가 죽고 난 후에 물질이상의 의미를 남긴 채 화자(부인)에겐 여운으로 되새김질되고 있는 것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 (1992년 웅진출판)

  박완서 자신이 체험했었던 유년의 기억을 되새기며 쓴 자선적 소설이다. 어린 시절 박절골에서부터 6.25 동란, 4․19, 5․16 군사혁명을 겪은 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박절골이라는 여유롭게 펼쳐진 시골의 한적함에서, 모든 마을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서울의 현저동 판자촌에서의 유년을 경험자로서, 솔직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오동(梧桐)의 숨은 소리여 (1992년 현대소설 봄호)

  김노인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노인 문제를 세심한 주의와 묘사로 잘 표현한 작품이다. 김노인을 통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시골에 살고있던 김노인의 부인이 죽자, 김노인의 아들, 며느리, 손자가 살고있는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죽기전, 부인은 서울에 살게되면, 며느리가 하는 일에 토달지 말고, 못본척 하라는 말들을 자주하곤 했다. 부인이 죽기 전에는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뭐 대수냐 싶었지만 함께 사는 하루하루는 김노인에게는 낯설고 정이 가지 않는 생활이었다.

  회사에 다니는 아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며느리와 손자들과도 밥상을 마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듯 했으나, 그런 깍듯함은 김노인을 점점 구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일하는 아줌마에 대한 연민과 정, 그리고 며느리의 여동생이 찾아와 손자들과 함께 갔던 놀이공원의 퍼레이드 하던 ‘쇼걸’을 보고 가슴 설레던 일 그러던 중 여동생의 동생을 잃어버려서 해프닝을 겪으면서 아들, 며느리가 주고받는 대화를 엿듣게 된다.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마저도 천덕꾸러기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 앞에 꽃이 피면 즐겁고, 잎이 지면 서러운걸 느낄 능력이 정정하다는 사실 앞에 김노인에게 있어 목숨은 보물단지라는 결말로 막을 내린다.

가는비, 이슬비 (1994년 한국문학)

 오늘 만나기로 한 김전무가 홀아비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에 그녀는 수치심을 느낀다. 그리고 생각에 빠진다. 수자는 결혼을 했고 연예를 하여 신의를 저버린 일이 없는 그들 이였지만 신혼 첫날밤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만다. 찬우가 그녀의 순결을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첫날밤 이후 섹스는 거칠기 짝이 없었으며 그녀에게 다른 신혼부부와 다름없이 행동하면서도 공치사하는걸 잊지 않았다. 신혼여행을 돌아오면서 넘치는 신접살림에도 신부의 흠을 메우기엔 어림도 없다는 시선으로 보며 기뻐하거나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그런 찬우를 보며 수지는 차라리 연민을 느꼈고 그렇게 7년을 살았다. 살면서도 성적인 면에서는 알면 밝히는 여자, 모르면 내숭이라 하여 모르는 것을 모르는 척 아는 것을 아는 척 할 수 없게 되버리며 자신의 욕망에도 정직하지 못하게 되버린다.

  그러다 광고를 통해 면접을 보아 취직을 하게 되었고 찬우와 정식으로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났다.

다른 남자에 대한 호기심과 기쁨을 느끼지 못한 자신의 탐색 겸 다른 남자와도 몇 번 자보기도 했지만 남자의 욕망에 비위 맞춰야 할 것 같은 조바심에 번번이 실패한다. 주위의 중매와 재혼을 거절한 것도 그런 까닭 이였을 것이다. 현관을 나서는데 이슬비가 내린다.

  자꾸 김전무가 만나자고 한 건 그의 차 앞에 편승했을 때 다리를 꼬고 앉은 자신을 보는 그의 시선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김전무를 만날지 말지 망설여보며 옛날 반갑지 않은 손님이 있었는데 가는날 비가 오더란다. 갈곳 없는 손님은 이슬(있을)비가 오네 하자 주인은 펄쩍 뛰며 아닙니다, 가는비가 옵니다 라고 했던 어머니의 옛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린 날의 환영을 보듯 몽롱하게 소녀를 그린다 천사처럼 티 없이 맑고 예쁜, 아무도 더럽힐 수 없는 천진 무구의 상징처럼 보인다. 갑자기 소녀를 해치는 강간범이 생각나며 살의를 느꼈고 모든 것이 안개가 걷히듯 확실해 진다. 조금도 아쉽지 않는 마음으로 이슬비가 오는구나 중얼대며 수자는 발길을 안으로 돌린다.

너무도 쓸쓸한 당신 (문학동네 1997년 겨울호)

  주인공의 아들인 채훈의 후기 졸업식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의 남편은 정년 퇴임한 교장 선생님으로, 재직시절 놋요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고리 타분하고, 지극히 형식을 중요시하는 성격을 가진다. 현재 남편과는 별거중인데, 소설 시작의 서두 ‘그녀가 경험한 졸업식은 하나같이 추웠었다’ 라고 말처럼, 남편과의 별거도, 딸의 졸업과 함께 대학 진학에 대한 갈등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채훈의 졸업식으로 별거중인채 학교앞 ‘파바로티’ 라는 커피숍에서 만난 이 둘은 만남은 오래된 별거의 기억처럼 따분하고 껄끄럽기만 하다. 졸업식 행사 때문에 학교로 들어간 주인공과 남편은, 졸업식 행사를 지켜보게 되고, 주인공은 아들 장모의 능청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심한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 불쾌감으로 막연히 남편을 데리고, 행사장을 빠져 나오게 되고,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남편이 사는 곳인, 버라니라는 동네를 가자고 하게 된다.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남편의 집에 가는 길은 멀고 길기만 하다, 이런 지루함 속에, 이 둘은 허기 감으로 돼지 갈비집을 가며 밥을 먹게 되고, 택시를 타 러브호텔로 가게 된다. 택시비와, 밥값, 호텔비까지 낸 구두쇠 남편을 생각한 주인공은 비아냥 거리며 말을 이으고, 채훈의 졸업식날 사돈댁에 식사라도 대접하려고 전부터 여축해온 돈이었다는 남편의 말에, 할말을 잃게 된다.

  러브호텔 안에서, 비록 별거중이지만, 잠든 남편의 말라 축 쳐져 있는 힘없는 정강이와, 때가 낀 손톱등 지나치게 초라한 남편의 삶을 보며 스스로 가부장의 고단한 의무에 마냥 얽매여 잊으려는 남편에 대한 연민을 생각하며 남편 정강이의 모기 물린 자국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아주 오래된 농담 (2000년도 실천문학사)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인 마지막 에피소드의 존재이다. 치킨박이라는 존재는 지금까지 전개됐던 내용에 적극 반문을 하며 독자에게 묘한 여운을 남기게 된다. 화자인 심영빈에 의해 이야기는 전개된다.

심영빈은 호흡외과 최고 권위의 의학 박사로, 대학 교수로, 또 가정을 거느리고 있는 좋은 아빠이다. 이러한 성공한 모습이지만 그는 가난한 하급 공무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정부패 공무원에 대한 누명으로 화병으로 돌아가시게 되고 때문에 어머니가 악착같이 집안을 이끌고 큰형은, 법대에, 심영빈은 의대에 들어가 의사로서 꿈을 키운다.

그러나 형은 고시에 계속 낙방하게 되고, 돌연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그의 막내 동생인 영묘는 잘 자라, 재벌가 Y 기업의 아들 송경호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재벌가와 결혼한 영묘는 순탄한 생활보다는 재벌가의 허의 의식과 집안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경험하며 힘겨운 날을 보낸다.

그런 힘겨운 날을 조금씩 익숙해져갈 때 영묘의 남편인 송경호는 암으로 병마와 싸우게 된다. 가족들은 모두 경호에게 병을 알리지 않고 모두 속이기만 한다.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할머니 역시 손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갖은 돈을 써가며 애쓰지만 할머니 역시 정작 손자의 병은 모를 뿐이다. 점점 암에 물들어 버린 경호는 죽음을 이루게 되고, 아들의 장례식때 시아버지라는 사람은 식장에 방문한 유명 인사를 비디오 카메라로 찍고 돌려보며 유쾌해 하는 모습에 영묘는 재벌들의 허의 의식만 느낄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잔잔해 질때쯤 영빈의 형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것도 형에게서가 모교인 H 대학에 10억원 이라는 막대한 돈을 기금 했다는 신문기사에서 말이다. 형은 막대한 인터넷 갑부가 돼서 성공한 사업가로 기부식을 위해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고, 이렇게 만난 두 형제에게는 어색함만 흐를 뿐이다. 영묘 역시 형의 도움으로 자식들과 함께 미국으로 공부를 위해 떠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치킨박이라는 박성남이 등장한다. 아파트에서 치킨집을 경영한다는 소박한 소시민, 조기 암 발견으로 충분히 고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도 그는 자살을 택한다. 아이들에게 집과 가게를 남겨 주기 위해서 죽음을 택한다는 유서와 함께....

그리움을 위하여 (2001년도 문예중앙) 

  두 노인네가 있다. 화자인 ‘나’는 상대가 되는 사촌 여동생보다 8살 위인데, 풍족한 노년 살이를 하고 있다. 반면 ‘사촌여동생’은 ‘나’의 집에서 파출부 식으로 일을 하며 돈을 얻어먹고 사는 노년 살이다. ‘사촌 여동생’과 ‘나’는 어릴 때 한집에서 같이 자랐지만 ‘나’는 공부 잘하는 낙인 되면서 공부만 하면서 곱게 자라 시집을 가게되고, 시집을 가서도 유복한 생활을 하게 된다. ‘사촌여동생’은 이와 반대로, 중학교를 낙방하고 집안 일을 거느리며 두 동생의 뒷바라지를 하게 된다. 결혼까지도 12살이나 더 먹은 유부남과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된다.

  두 주인공 모두 남편을 잃었지만, ‘사촌동생’의 어려운 생활은 아는 ‘나’는 ‘사촌여동생’을 안정된 일을 가지게 좋겠다며 파출부 식으로 고용하며 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화자 ‘나’ 에 대한 ‘사촌동생’에 대한 우월감은 그칠줄을 모른다.

그러나 ‘사촌여동생’은 낙천적인 성격으로 이에 대한 불만을 갖지는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사촌 여동생은 사량도라는 섬으로 바캉스를 가게 되고, 섬에서 며칠을 머무르며 교장선생님인상 같다는 인자한 사람에게 청혼을 듣게 됐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조롱하고 우습게 생각하지만, 결국 결혼을 하게 되고, 이런 조롱의 생각과는 다르게 너무나 행복해 사는 ‘사촌동생’의 모습을 보며 자신만의 상전의식을 포기하고 자매애를 생각하게 된다. 

4. 드라마 제작 및 번역 출간된 박완서의 작품

미 망 (MBC 미니시리즈로 방영)

  가난한 소작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전처만은 양반계급에 대한 분노를 안고 그 시대 가장 천시되던 상인의 길을 간다. 그는 남다른 예지력으로 상술을 발휘하며 당대에 손꼽히는 거상으로 발돋움하는데 유난히 반골 의식이 강한 송도상인의 한 삶으로서 조선팔도를 돌아다니며 양반들과 일제에 대한 분개를 가슴속 깊이 삭인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그의 뛰어난 기개를 이어받은 첫째 아들이 단명함으로써, 그는 손녀인 태임을 자신의 기운을 물려줄 자손으로 여기고 애지중지한 다. 태임은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아가며 도도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라난다.

  한편 태임은 어머니 머릿방아씨의 부정으로 인해 태남이라는 동생을 보게 되는데, 기우는 가세와 며느리의 비참한 죽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전처만은 태남을 태임에게 부탁하고 세상을 떠난다. 태임은 몰락한 양반은 자식이자 그의 집 머슴이었던 종상과 결혼을 한다. 종상은 비록 몰락한 양반의 자손으로 권세라고는 전혀 없는 청년이었으나 준수한 외모와 영특한 머리가 남달라 태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태임과 종상은 할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상업을 하고 슬하에 여란과 경우를 둔다. 신여! 성 여란은 봉건적인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을 거부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자 간도 땅으로 가나 곧 일본으로의 유학 길에 오른다. 반면 경우는 일찍부터 아버지 종상을 도와 고무공장을 하고 태남은 자신의 태생에 대한 열등감과 번뇌로 많은 시간을 방황하다가 독립운동에 가담한다.

우황청심환 (MBC 베스트 극장으로 방영)

  우황청심환은 남궁씨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물건이다. 그의 어머니는 중풍을 맞고 죽기 전까지 아들이 우황청심환을 주지 않았다 하여 끝없이 원망하였다. 그 물건을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성지 순례단을 통해 보게 된 것이다. 유럽 여행도 죽은 친구의 자리를 대신해 회사를 경영해오다 탄탄히 세우자 �i겨나는 눈에 티 나지 않게 포장된 위로 여행이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는 연변서 찾아온 그의 육촌들을 만나게 된다.

  아내에 지나친 혐오감 속에서도 그는 그들이 시기에 안 맞게 가지고 온 녹용이며 우황청심환을 팔아준다. 그럼에도 미안해한 기색 없이 남궁씨가 준비한 것을 잘 받는다. 허나 그 뻔뻔스러움은 부모의식의 당당함이라는 걸 알게되고 어처구니 없어 하면서도 미워하진 않는다.

  자신들이 가지고 온 걸 다 처분하고 그들이 떠난 남 밤에 그는 운동권이였던 아들 현이가 노동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겠다고 잡을 나가 근근 소식을 알려오다 얼마전부터 소식이 끊겼다는 사실을 아내를 통해 알게된다. 아내의 연변 손님에 대한 미움과 호의도 아들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은 남궁씨는 아내와 자신의 상처를 서로 위로 받는다.

오동의 숨은 소리여 (SBS 97년도 추석 특집극 ‘약속’ 이라는 제목으로 방영)

  김노인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노인 문제를 세심한 주의와 묘사로 잘 표현한 작품이다. 김노인을 통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시골에 살고있던 김노인의 부인이 죽자, 김노인의 아들, 며느리, 손자가 살고있는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죽기전, 부인은 서울에 살게되면, 며느리가 하는 일에 토달지 말고, 못본척 하라는 말들을 자주하곤 했다. 부인이 죽기 전에는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뭐 대수냐 싶었지만 함께 사는 하루하루는 김노인에게는 낯설고 정이 가지 않는 생활이었다.

  회사에 다니는 아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며느리와 손자들과도 밥상을 마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듯 했으나, 그런 깍듯함은 김노인을 점점 구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일하는 아줌마에 대한 연민과 정, 그리고 며느리의 여동생이 찾아와 손자들과 함께 갔던 놀이공원의 퍼레이드 하던 ‘쇼걸’을 보고 가슴 설레던 일 그러던 중 여동생의 동생을 잃어버려서 해프닝을 겪으면서 아들, 며느리가 주고받는 대화를 엿듣게 된다.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마저도 천덕꾸러기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 앞에 꽃이 피면 즐겁고, 잎이 지면 서러운걸 느낄 능력이 정정하다는 사실 앞에 김노인에게 있어 목숨은 보물단지라는 결말로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