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국인의 삶 출간 계기

5 : 일제강점기하의독립운동가-저술가서영해

    일제강점기시대, 재외 한국국민들의고통스러운 삶과감성, 이국에 살면서 느기는 부모 형제와 조국에 대한 향수, 그리움을생생히느낄있는예술적표현인문학 작품 세 편이 있다.  

    서영해는어느한국인의, 한국역사소설 (1929)프랑스에서, 강용흘은초당 (1931) 미국에서, 이미륵은압록강은흐른다 (1946)독일에서집필했다.이들사람은감수성과성격, 활동 분야가  다르고, 이들의생활배경이국가도서영해는프랑스, 이미륵은독일, 강용흘은미국으로각기다르다. 

    다만공교롭게도일제의탄압을피해외국에유학하면서비슷한시기에각각다른나라에서자전적 전기를것이 공통점이다. 모두고국인한국을그리워하며것이다.

    1910-1945사이에, 독립 투사들의생명을 노력에도불구하고, 한국은서구국가들의기억에서점점사라지고있었다. 그리고, 1945년에한국이해방이되었음에도, 그 직후인 1950-1953년의 6.25전쟁과가난한시절이지속되면서한국의존재는여전히미미했다.

    서양에서고국을잃은 슬픔과울분, 돌아갈없는고향 산천에대한애절한향수, 보고싶은부모 형제와친구들, 그리고쉽지않은 만리 타국에서의삶과체험을사람은자서전적형식으로술했다.

    이들의자전적전기의커다란구도와 주제는비슷하지만, 안에서발산되는이들의감성과문체는매우 다르다. 그러니또한이분들의 저작물에 대한서구 독자들의반응도달랐을 것이다.

프랑스, 서영해어느한국인의일생, 한국역사소설

    저술가의주요 저서의출판연대순으로, 프랑스에살았던  서영해의어느한국인의, 한국역사소설 (Autour d'une vie coréenne. 이하어느한국인) 1929년으로가장먼저출판되었다.

    서영해 (Seu Ring-Hai, 1902-1949?) 1902년에 부산 영주동 서 약방네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위 본명은 서희수다. 1919 3.1운동에참여하고, 일본경찰의추적을피해중국 상해(上海)망명했다. 이곳에서임시정부의막내였던그는장건상, 조소앙,선배의권유로 파리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중국 상해 임시 정부의 소개로 중국 여권을 발급 받아 192012월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아마도 정석해, 이용제, 등과 같은 여객선으로 도착한 듯하다.

    그는프랑스에도착하여, 외교에기본이자 필수도구인불어를완벽하게배우기위해초등 학교 2학년에 등록하교 고교 과정까지를 월반을 하면서 6만에마치는, 언어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불어 습득에 많은 노력을 한 것같다.

    당시 20세인 나이를 속이고 보배(Beauvais)의 초등 학교 2학년에 입학하여 월반을 하면서 불어를 배웠다. 6년 반만에 고등 학교까지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1928년에 파리 대학교 문과 대학인 소르본느(Sorbonne) 대학에 입학했다. 1929년에는 파리의   언론 학교도 졸업했다.

    당시파리에는대한 민국임시 정부주파리위원부(대펴부)있었는데, 위원부대표김규식이 1919 8미국으로 건너간, 이관영과황기환이차례로업무를맡았지만, 1921 7황기환이미국으로떠난후에는 사실상 활동이중단되었다.

    그 후유학생이던서영해가임시 정부수반김구선생과프랑스유학중인한국학생들과의사이에연락 업무를맡게 되었다. 그는 1928년에 <고려통신사>  (高麗通信社)설립하고상해대한 민국임시 정부의() 프랑스통신원으로활약했다. 또한아프리카에도오가며 활동하고, 프랑스신문에기사를게재하기도했다. 그는필력을통하여유럽 각국의언론사들에게한반도독립에대한당위성과일제의만행을알리는데전념하였다.

서영해의 한국 관련 저서

    그는 1929파리에 « 어느한국인 » (Autour d’une vie coréenne)이란 책을 썼다. 이 책은 주 프랑스임시 정부홍보국격인아장스코리아출판사 (Editions Agence Korea, 고려 통신사)에서  출판했다. 불어제목밑에한국역사소설이라고한글과한자로세로로썼다. 제목과달리, 작품은소설도아니고, 역사적사실에바탕을역사서도아니다.

    작품으로서의가치는거의없고, 자료없이기억을더듬어것이므로저서의구성도체계적이지못하고불어문장도 별로좋지않다. 하지만, 서영해는 이 책에서 열렬한애국심으로한국의독립을변호하고있다.

    작품의 1부에는박선초라는애국지사의항일운동이묘사되어있고, 2부는주인공의어린시절을통한한국 생활의기록, 한국인들의애국적거사를이야기하고, 일본인의잔학성에대해고발한다. 그러면서한국에대한자부심도여러 외국인들의  입을빌어인용했다.

    예를들어어느영국인은한국인들이독일인들보다 100앞서 금속인쇄술을발명했다쓰여 있다. 이는 1377년에금속활자로인쇄한직지 심체 요절가리키고있다고보는데, 직지 1911플랑시컬렉션경매보석상베베르에팔리긴했지만, 책이쿠랑의한국 서지언급되어있었기때문에서영해도이를알고있었을지 모르겠다.

    또한그는한국이이탈리아 사람들보다 “100여년앞서측우기를발명했다고 기술했다. 측우기는동양에서는 1442세종 대왕장영실에의해발명됐고, 서양에서는 1639이탈리아 인베네디토가스텔리 (Benedito Gastelli)의해발명되어, 실제로는 197년의차이가난다.

    이순신 장군의잠수함” (거북선)최고의엔지니어들도감탄해마지않는발명이라고적었다.

    어느미국인의 말을빌려, “한국민족이그렇게수없이외세의침략을받았음에도살아남을있었던것은한민족의끈기와 지구력덕분이라고했고, 어느프랑스인은한국인의인간미와외국인에대한자발적인개방성을칭찬했고, 어느독일인은한국은아시아의스위스라고말했다고기록했다.

    책의마지막부분에는기미 독립 선언서불어로 번역되어실려있다.

    서영해의역사소설이문학적가치가결여된 비해, 그가번역한거울, 불행의근원, 한국민담 (Miroir, cause de malheur! et autres contes coréens, Paris, Ed. Eugène Figuière, 1934)한국의대표적인민담을체계적으로제대로소개했다는 점에서의의가크다고본다. 책에는거울, 불행의근원 (옹기장수)’, ‘윤회’, ‘수숫대의핏자국’, ‘흥부와놀부’, ‘고양이와개와여의주’, ‘나무꾼과 선녀’, ‘별주부전’, 그리고노예신분에서해방된사람의잔인한복수이야기 등이실려있다.

    권선징악, 전화위복이민담의주된형식이고, 특히노예신분에서해방된사람의잔인한복수라는주제는일본에대한서영해의울분을 그대로반영한것이아닌가생각된다. 그러면서동시에, 민담들을통하여프랑스독자들에게전통한국사회의관습과풍습, 도덕적가치관, 구전문학을소개한공로가상당히크다고본다.

파란만장한 서영해의 삶

    1934 4 2임시 정부각의에서외무규정을채택했다. 후에주미위원부대표로는이승만을, 주불위원부대표로는서영해를 임명했다. 임시 정부는 해방  직전인 1945 3월 서영해를 주불 대표로 임영했다.

    서영해의 행적은 1946년에 귀국하여 귀국하여연희전문 (연세대학)에서 일시교편을잡은 것까지는  알려져 있었다. 그후의 행방은 묘연했다.  

    이진명 교수가 국사 편찬 위원회의 요청을 받고 파리7대학 이옥 교수와 공동으로영국-프랑스와 한국 독립 운동이란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국사 편찬 위원회 발간 « 한민족 독립 운동사 6 – 열강과 한국 독립 운동 »(1989)에 실려 있다.

    이 논문을 작성하면서 이진명 교수는 이옥 교수께 서영해의 행적을 물어 보았다. 그에 대하여이옥 교수는 ‘1960년대에 북한을 방문한 프랑스 공산당 인사들 중에, 평양에 그들(프랑스 인들)보다  불어를 더 잘하는 사람이 있더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 당시 북한에서 그렇게 불어를 잘 하는 사람이라면 그사람이 서영해가 아닌가 싶다 ‘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서영해는 1949년경이나 그후에 월북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진명 교수가 서영해의 해방 후의 행적에 관해 알게 된 것은 80여 년이 지난 2018 41일이다. 그날 서영해 선생의 형인 서한수 선생의 종손녀 서혜숙 씨가 종조부 서영해에 관한 이야기를 1993년에 처음 들었다고 하면서 이진명 교수에게 메일을 보냈다. 서울에 거주하는 서혜숙 씨는 오스트리아에 사는 서영해의 증손녀 수지(Suzie, Tel. :  43676811884926, e-mail: )가 있다는 사실을 신문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고 했다. 수지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도서관에  근무하는데 이번트 기획 담당자라고 한다. 수지는 2016 411일 파리7대학교에서 개최된 한국 독립 운동에 관한 학술 회의 때 참석했다. 그때 이진명 교수도 참가하여 논문을 발표했고, 서영해의 증손녀 오스트리아 인 수지도 만났으나 언어 문제로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고 한다.

    서혜숙 씨가 이진명 교수와 연락을 취한 것은 이 교수에게 2019년이 1919년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인데, 이를 계기로 <'부산의 잊힌 독립운동가' 서영해>(가제) 단행본을 출판할 계획인데 이 저서를 집필해 줄 수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교수는 자기는 적임자가 아니므로 국민대학 교수 장석홍 교수 또는 다른 분에게 문의해 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때 서혜숙 씨는 자기의 종조부 서영해가 1948 (47) 26세의 여교사 황순조와 결혼했으나 김구 암살로 신변에 위혐을 느끼고 상해로 도피한 후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 부인 황순조는 한국으로 돌아 와서 살다가 1989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생전에 서영해 소장 장서와 자료들을 한국의 국립 중앙 도서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메일에 서영해와 손녀 수지에 관한 « 경향 신문 » 원희복 기자의 기사 3편의 링크를 보내 주었다. 이진명 교수는 큰 관심을 가지고 원희복 기자의 기사들을 읽었다.

    해방 후의 서영해의 행적을 « 경향 신문 » 원희복 기자의  2005 418일자기사다시쓰는독립운동열전 V - 3. 서영해파리대사의외교투쟁및 서영해의 오스트리아 인 손녀 수지 왕(Suzie Wong)에 관한 기사를 통해 알아 보면 다음과 같다.

귀국 후의 서영해의 기구한 운명

    원희복 기자의 기사에 의하면 오스트리아 빈 출신인 엘리자베스 C 브라우어 (엘리자) 1930년대에 프랑스에 유학을 와,  파리 미술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때 파리에서 13년 연상의 한국 독립 운동가 겸 기자인 서영해를 만났다. 한국의 독립 운동가 서영해와 오스트리아 출신 여성 예술가는 파리에서 사랑했고, 두 사람은 1937년 빈(Vienna) 시청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리고 엘리자는 남편 서영해의 성씨를 따엘리자베스 서’(Elisabeth Seu)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들 부부 사이에 1939920일 비엔나에서 아들스테판 칼 알로이스 솔가시 서가 태어났다.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역시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934년 서영해를 만나러 파리에 왔다가 프란체스카를 만난 것이다. 사실 서영해는 이승만과 형님 아우하는 사이였고, 프란체스카 여사와도 가까웠다.

    서영해의 조카 서정인 선생은서영해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편지 심부름을 자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사람의 결혼은세계적격랑소용돌이에휘말렸다. 히틀러는 1938오스트리아를합병하고, 1939 92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임신한엘리자가고향빈으로돌아와아들을낳은것이바로이때다. 그러나독일에 합병된오스트리아는프랑스의적국(敵國)이었다프랑스가일본과같은침략자들인나치독일의수중에넘어갔기때문이다.

    국민대 장석홍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서영해가나중에귀국해회고한바에따르면그는일본의밀고로나치에체포돼 6개월간감금 생활까지했다. 우여곡절끝에풀려나중국인기자로행세하던서영해는나치의체포령이다시떨어지자지하로잠적, 프랑스 레지스탕스와함께 3년여를활동한다.’고 밝혔다.

    때문에 서영해와 부인 엘리자베트는 생이별을 했고, 서로 연락도 취할 수 없었다. 그들이 헤어진 후 엘리자베트는 같은 동네에 사는 중국인 왕 씨과 재혼하면서 아들의 이름이스테판 왕으로 바뀌었다.

    스테판 왕(서영해의 아들)의 딸이 수지 왕이다. 그러니까 수지 왕은 서영해의 손녀다.

    서영해는 1947신문기고에서 "거기서(레지스탕스 운동에서)나는문화가높은불란서인이자유를위해어떤희생도불사하는투쟁의과감성을봤다. 문화인들의 타협을모르는의연한태도도배웠다"회고했다.

    당시친하게지냈던레지스탕스대원 '마르셀 테닌'후에나치에체포돼총살당한것을애석해하기도한다.

    서영해가임정외교 부장조소앙에게 보낸편지(1940 10 15파리)에는파리는일군점령하에있으며통신이두절돼중국인 군의관편에보낸다서두와함께프랑스의레지스탕스양상을설명하고임정의프랑스외교 대응책을지시해달라고요청하고 있다. 당시임정에있었던김자동임시 정부 기념 사업회장은서영해선생은드골이영국으로망명해자유프랑스 운동을하는소식을중경에 있는임정에전했고, 임정은그를런던 주재대표로임명했다말했다.

    1945 5 7독일이항복하고유럽에평화가왔지만서영해와엘리자는재결합하지못했다. 1945 10 10엘리자는같은 마을에살던중국인의사식닝재혼했다.

    수지 왕의 증언에 의하면 서영해의 첫째 부인 엘리자베스 C. 브라우어는 오스트리아에서 1977년부터 사진 작가로 활동하면서빈과 이탈리아에갤러리곳을소유했다고한다. 그의 작품이 빈의 세계적 박물관 알베르티나와 프랑스 국립 도서관 등에 소장될 정도였다. 그러나 엘리자는 1970년 이후 아들과 거의 교류를 끊고 살았다. 엘리자는 이후 한 번 더 결혼했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들스테판 칼 알로이스 솔가시 서’ (Stephan Karl Alois Solgasi Seu)는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이름이스테판 칼 알로이스 솔가시 한닝 왕’(스테판 왕)으로 바뀌었다. 그는 빈 응용 예술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해 건축가가 됐다.

    수지(Suzie)는 아버지 스테판에 대해아버지는 워커홀릭일 정도로 성실한 건축가로, 학교 아파트 리모델링을 감독하기도 했고 빈 지방재판소 재건축도 그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스테판 왕은 73세인 2013 1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1947 5귀국한서영해는그 해에연희전문(연세대)경성 여의전(고려 대학교의과 대학) 이화 여전(이화 여대) 등에서틈틈이불어를가르쳤다. 그는당시일본인이만든불어교재를모두버리고자신이직접타자기로초급불어라는교재를만들어 가르쳤다. 그에게불어를배운제자가차범석 국작가, 김동길연대교수, 이동원외무부장관등이다. 그는 일본을극도로싫어해일식집에도가지않을정도였다

    서영해는이승만이오스트리아출신프란체스카여사와 연애당시편지를전달해주는이승만과매우가까운사이였다. 하지만그는정치적으로이승만보다김구를 추종했다. 해방 후임정요인과함께귀국한그는김구, 조소앙, 장건상등과어울려고국에서해야일을 도모했지만여의치않았다. 1948 419김구와 김규식이추진한남북 협상에통신사  기자자격으로방북을하기도했다.

    그는 1948부산에서당시 26세의경남 여중교사황순조와결혼했다. 서영해의 재혼이었다. 조카서정인씨는 사실큰 아버지는프랑스유학중 오스트리아 여학생과결혼해 아들까지뒀으나귀국할헤어진것으로알고있다 우리집안이부산의교육자집안이어서자연스럽게일본유학을마친여선생님과결혼했다.’말했다. 

    사람은서울에서신혼살림을차렸다. 하지만서영해는 1949 626경교장에서김구가암살되자 신변에위협을느낀데다  이승만의정치노선, 남한만의단독정부수립과친일파가득세하는세태에실망하여다른 부부와함께외국에서계획을세웠다. 1948 10서영해부부가먼저상해 행배에올랐다.
    조카서정인씨는 큰 아버지는김구가암살되는것을보고자신도비슷한처지가것으로 생각했다 특히이승만이남한만의단독정부를만들려고면전에서심한언쟁을벌이기도 했다말했다

    서영해부부는 1948 10서울을떠나프랑스로가기위해중국상하이에도착했다. 중국국적에 프랑스여권까지있는서영해의프랑스입국은어렵지않았지만부인의프랑스입국비자가나오지않았다. 비자문제로 프랑스행이늦춰지고있던즈음세계적격랑서영해를덮쳤다. 1949 10 중국대륙이공산화것이다.

    상해에서 부인의 프랑스 여권을 기다리는 사이, 장개석 정권이 무너지면서 상해가 공산화 되었다. 한국인은 모두 억류 상태가 됐고 49 11월 정부 차원의 막후 협상끝에 한국행 수송선이 왔다. 

    그러나 당시 중국 국적의 여권을 가진 서영해는 중국인으로 간주되어 귀국하는 배에 타지 못하는 기막힌 처지가 되었다. 서영해는 부인에게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을 유지하시오, 오늘 같은 안타까움도 웃어 넘길 만큼 행복하게 살아 봅시다라는 말을 하고 헤어 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서영해의 소식은 끊어졌다. 

    서영해의 그후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프랑스에 온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중국에서 자살했나? 북한으로 갔나? 알 수 없다,

    혼자 한국으로 돌아온 부인은 교사로 복직, 40년 동안 소식없는 남편을 기다렸다. 부인은 경남 여고 교장을 끝으로 교직을 마치고 간직했던 남편의 책과 저서 등을 국립 중앙 도서관에 기증하는 등 신변을 정리하고 1989년에 세상을 떠났다. 서영해의 이런 비운의 행적은 1987주간 한국을 통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조카서정인씨는 1994큰 아버지서영해의행적을모아 독립유공자상훈을신청했고, 정부는 1995건국훈장애국장을추서했다. 

    국립 중앙 도서관에 기증된 자료들은 영해 문고로 보관돼 있다. ‘영해 문고국제 연맹  제출 조일 관계 사료집은 고대부터 한국과 일본은 역사가 다른 나라라는 설명,   강제 병합과 한국의 독립 운동, 등을 정리한 문건이다. 이 사료집 서문을 춘원 이광수가 썼다.

자유 프랑스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승인

    외국 국가에 의한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승인(reconnaissance) 획득을 위한 노력의 첫번째 중요한 결실은 알제리아에 수립된 드골 (De Gaulle) 장군의자유 프랑스’ (La France libre)으로부터의 임시 정부 승인이었다. 임시 정부의 자료에 의하면 자유 프랑스가 19452월에 주 베이징(북경) 대사를 통해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을 통지해 왔다고 한다.

    이와 같은 자유 프랑스의 한국 임시 정부 승인 통지가 있자 194533일 임시 정부는 각의를 소집하여 외교 대표단을 교환하기로 결정하고 서영해를 임시 정부 주 프 랑스 대표로 임명했다.  

    이진명 교수에 의하면 프랑스 외무부 자료관 고문서 어디에도 이 문서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한불 간의 외교 관계는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 재개되었다. 1945 8 15일 해방이 되고, 1948 8 15일 대한민국이 선포되고, 그 이듬해인 1949 2 5(프랑스 시간으로는 2 4) 프랑스는, UN, 미국, 자유 중국, 영국에 이어 다섯번째로 대한민국을 승인했다. 이로써 국교가 재개되어 양국은 상대국의 수도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공사를 주재시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