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3장 주석 - yohan-ilseo 3jang juseog

요한일서 3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3:1)
우리는 어떠한 사랑을 받았는지, 그리고 받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우리를 계획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죄를 짓는 그 순간부터 구원의 계획을 알리시고 그 계획과 약속대로 하나 뿐인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의인으로 칭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으로 우리를 의인으로 칭하여 주시고 자녀 삼아 주신 것입니다.(롬5:1~10) 현재의 우리는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가는 터라,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이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박국 선지자의 말처럼 믿지 않는 자들이 더 잘 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하1:1~3)
하지만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실 때에는 이러할 것이라고 요한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이 땅에서는 우리가 잡고 사는 그 참소망이 드러나지 않고 눈으로 볼 수 없어서 마귀는 바로 그 점을 붙들고 계속 우리를 미혹하고 속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이미 육신의 삶을 통해서도 충분히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여도 그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할 수 있고 달려가고 나아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을 지키고 신앙을 지키고 나아가려는 우리를 유혹해서 넘어뜨리려고 하는 존재가 바로 마귀입니다.
요한은 마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 요일 3:7~10)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나도 모르게 죄 가운데 있고 죄를 짓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발견하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우리에게 죄책감과 절망감을 더욱 더 강하게 하면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우리를 나락에 빠지게 합니다. 그런데, 이 순간 죄가 무엇인지 다시 정립하는 것이 필요합닌다. 죄는 하마르티아, 궁수가 과녁을 쏘았을 때 화살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그 단어에서 비롯하여 사용된 말이 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의 방향에서 완전히 어긋나 있나요? 만일 하나님의 방향이 아닌 곳으로 나가고 있다면 다시 돌아오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향에서 빗겨 나가지만, 다시 그것을 발견하고 다시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오고 결국 하나님의 길로 계속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아합니다. 아무 생각이 없이 그저 자신이 원하는대로 자신의 마음이 기뻐하는대로 자신의 욕심과 욕망과 끝없는 자신의 지식의 교만을 향해서 달려가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마귀의 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게 하고, 성령님을 부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날마다 기쁨을 잃고 소망을 갖지 못한채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그 어느 부분도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완전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기억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전적인 하나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깨닫는 것, 하나님의 길과 어긋나게 가고 있다고 깨닫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깨닫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다시 돌이키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 번 우리 안에 새기며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려야할 감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으로 향하며 하나님의 빛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마치 지그재그로 가는 것 같지만, 결국 그 방향은 하나님의 뜻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녁의 목표에서 완전히 빗나가고 벗어난 것, 그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 않아하고 두기 싫어하는 것, 그것이 죄인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에 가인과 같이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신의 의와 자신의 생각대로 드린 제사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고 가인은 분노하였습니다. 가인의 마음과 헹위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의 행동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배는 나를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내게 축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시간 입니다. 그런데 이 예배의 시간조차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를 위한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찌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죄의 심판자의 대상자들이 바로 이러한 자들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어찌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주인 삼은 우리들이 어떻게 불의와 짝이어 불의 가운데 계속해서 나아가며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에, 때로 빗나가고 때로 깨어질 지라도 그것을 깨닫는 순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보다 직선의 방향으로 어떤 사람은 지그재그로 어떤 사람은 약간 어슷하게, 모두의 시간은, 그리고 모양은 제각각 다르지만 결국 믿는 자들의 방향은 한 방향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이들의 여정 가운데 이렇게 한 방향으로 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길은 어떤 이들에게는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방법의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자신을 내려놓고 구원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루어졌으며 이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 믿는 자들에게는 가장 축복되고 감사하고 쉬운 방법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 자기 자신이 주인된 자들에게는 가장 어렵고 힘든 방법인 것입니다.
오늘 저희의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뜻이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우리의 몸이, 우리의 삶이 모두 그것을 알고 그 뜻을 향해 가고 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 때로는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삶의 모습이며 은혜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분의 방향으로 이끄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가장 선한 방향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믿고 우리 삶에서 놓아야 할 부분은 과감히 놓고 결단하여 달려나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아직 하나님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자들에게 우리가 중보자로서 그 뜻을 전하며 거룩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1. 2장에서 이단의 유혹이 빠지지 않도록 권면한 요한이 3장에서는 또 ‘서로 사랑하라’ ‘범죄하지 말라’고 권하고 있다. 우리가 그래야 하는 이유를 요한은 무엇이라고 하는가?(1-5)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주를 향한 소망 때문이기도, 3):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는가(1)? 우리 죄를 없이 하시려고 그 분이 나타나셨는데(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느냐(5)? 하나님의 사랑이 만병을 다스리는 약이다. 덮어놓고 ‘죄지으면 지옥간다’는 말을 하기보다는 먼저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2. 그리스도인 중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본문의 표현을 이용하여 대답한다면? ‘저 놈 참 이상한 놈이야’, ‘야, 무슨 재미로 사니?’, ‘도대체 왜 그래? 지금이 어느 땐데 케케묵은 소리하고 있어?’, ‘돌았니?’

    세상이 알지 못하는 사람(1): 불신자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성도에게는 반드시 있다. 실제로 이기적이거나 어리석게 처신해서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비난을 받지 않으면서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1).

3.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자존심을 지키는 사람)은 컨닝을 하거나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다. 다른 누구 때문이거나 법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더럽힐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장차 하나님을 대면할 자이기 때문에(2, = 주를 향한 소망 때문에):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도 온전하지 않지만 장차 하나님을 ‘계신 그대로 볼 것’이므로 우리를 더럽힐 수 없다. 현재보다는 장차 될 일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춘향이가 변사또의 요구를 한사코 거절한 것과 비교해보라.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거지 신세로 전락했지만 끝내 자신을 거지라고 인정할 수 없었던 거지 왕자는 결국 자기의 자리를 찾게 된다.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남들이 보기에 그럴 듯한 삶이 아니라도, 다른 학생이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삶이 못 된다 해도(육체의 소욕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누구인가?

4.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왜 이렇게 무력한가? 겁도 많고 못 하는 일도 많고... ?

    현실보다는 장래의 모습을 그리며 현실에 굴복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마 5:48). 지금은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거나 말거나 장래에는 우리가 그 분과 같아질 것이라는 소망을 간직해야 한다. 그 날이 되면 우리도 ‘주와 같은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하게’ 될 것이다(빌 3:21).

5. 요한이 이 글을 쓰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영지주의자들 중에는 자신들이 가진 ‘영지(영적무지로부터 해방된 영적 통찰력)’로 인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거리낌없이 행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어떤 행위도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지적하는 말이 무엇일까?

    죄는 불법이다(4): 그걸 누가 모르나?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는 것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가 아니라고 우기는 자들 때문이다. 그러면서 예수만이 죄가 없으시다(=죄를 없앨 자격이 있다)고 강조한다, 아니, 죄를 없이 하는 유일한 방법이 예수뿐임을 강조한다.

6. 그 분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으며(6),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9)고 하는데 우리는 어떤가?

    여기서 말하는 ‘죄’는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속적이고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범죄를 말한다. 본의가 아닌 실수나 욕심 때문에, 순간적인 판단착오로 잘못한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7. 아무리 마귀지만 100% 죄만 지을까?(8)

    처음부터 범죄함이란 100% 죄만 짓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역의 무리에 가담했다면 그 무리 안에서 행한 어떤 선한 행위도 선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8. 혹시 잘못했을 때 괴로워하고 하나님께 가슴 아파하며 회개하는 것은 우리 속에 무엇이 있기 때문인가?

    하나님의 씨(9):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시 119:11, 렘 31:33)과 성령(롬 8:11, 고전 3:16)일 것이다.

9. 하나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녀인지는 무엇으로 구별되는가?

    의를 행치 않거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마귀의 자녀이다(10): 물론 이 경우에도 결과보다는 동기적인 측면을 더 중시해야 한다.

10.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알 수는 없다. 요한은 여기서 가인의 죄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의를 행치 아니하고 형제를 사랑치 아니함, 혹은 동생의 의로움에 대한 시기.

11.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조건이 무엇인가?(14) 좀 이상한데?

    형제를 사랑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조건이 될 수는 없다. 단지 생명으로 들어가게 된 자의 외적 증거 중에 하나일 뿐이다.

12. 형제를 미워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15-16)

    그가 우리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16): 우리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 그 분이 목숨을 버리셨는데(요 15:12-13) 우리가 그 형제를 미워할 수 없다. 미워하는 것이 곧 형제를 죽이는 것이니(15), 그 분이 목숨을 버려 살려놓은 형제를 우리가 죽일 수는 없다.

13. 가인과 아벨을 짝지으면 마귀의 자식과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은 가인과 예수를 짝지어 놓은 셈인데, 어떻게 짝이 되는가?

    형제를 죽인 자와 형제를 살리는 자

14. 인간의 사랑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다. I love you는 I love myself through you라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다. 여전히 이기적인 면이 강하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사랑: 무조건적이요, 내리 사랑이다. 자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는 사랑이다.

15. ‘형제의 궁핍함’이란 어쩔 수 없는 궁핍함을 뜻한다. 믿는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나고 일할 곳도 없는 경우 말이다. 그런데 게을러서 궁핍한 것은 어떡하지? 아예 도와줄 것을 기대하고 궁핍을 즐기는 자는?

    무조건 퍼주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점을 기억하면서 도와야한다. 본문의 ‘보고도’라는 말은 그냥 한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켜보는 상태’를 말한다. 당연히 도와야 할 처지인지를 살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었다고 본다. 실제로 어떻게 도와야할지를 분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도와주어야 한다.

16. 요한이 독자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말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성도들이 당면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효과적인 처방이다. 그러면서 노파심에서 당부하는 말은 무엇인가?

    실천하라(18):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행함없는 믿음이 믿음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사랑한다면 당연히 행함과 진실함이 따르는 법이지만 노파심에서 사족을 덧붙인 것이다.

17. 요한의 말처럼 그렇게 사랑을 행하면 사랑받는 사람이야 좋겠지만 사랑을 실천하는(주는) 사람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을까?

    받는 사람보다 더 큰 유익이 있다(19, 21-22)): 자신이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되는 유익이 있다. 이것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아는 기쁨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체험하는 기쁨이다. ‘하나님 앞에 담대함’이나 ‘기도의 응답’이란 보너스도 있다(21-22). 주의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이 모든 것들을 이루기 위한 조건은 아니다. 믿는 자의 의무일 뿐이다.

18. 혹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을 수 있다면(20) 그게 무엇일까?

    형제를 사랑하지 않았을 경우의 양심의 찔림: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형제 사람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얼마나 고통스럽겠느냐는 말이다.

19. 어떻게 주 안에 거할 수 있는가?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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