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주]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겠다는 약속은 참사 당일에 벌어진 일을 복기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4.16연대는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을 추진하며 인권으로 4.16을 기억해보자고 제안한다. 기억은 행동이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는 열망은,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행동이 되어야 한다. <인권오름>과 <프레시안>에 매주 공동 게재되는 연재기사가 하나의 실마리가 되기를 바란다. 재난의 시대를 산다. 위험은 도처에 널려있고, 이내 재난으로 닥쳐온다. 재난은 제대로 예측되지도 수습되지도 않기 때문에 위기감은 일상이 되었다. TV 드라마나 영화, 소설, 웹툰 등 대중문화는 지속적으로 재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매일 매일이 재난에 대한 보도로 가득차 있다. 갈수록 재난과 파국에 대한 상상력이 확대되는 것은 우리의 세계가 그렇기 때문이다. 과거에 재난이 인간
외부, 즉 자연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면, 이제 재난은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문명으로부터 온다. 예컨대 쓰나미라는 자연재해가 방사능 유출이라는 인공재해와 만난 후쿠시마 원전 참사는 우리 시대 재난의 성격을 고통스럽지만 정확하게 보여준다. 재난의 시대 그러나 재난의 반복이 ‘재난의 시대’를 규정하는 전부는 아니다. ‘재난의 시대’라는 것은 무엇보다 자본주의라는 삶의 조건이 재난을 계속 ‘생산’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는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철학자 한병철은 “침몰한 세월호는 한국인만의 문제가 아니며, 가라앉는 배를 탈출한 선장은 공공심을 그저 망상이게 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육신”이라고 말한다. 세월호의 원인은 “규제완화, 노동 유연화, 민영화를 야기한 신자유주의”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규정짓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체제는 세월호 참사를 이미 예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그리고 그 당대적 판본인 신자유주의의 성격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세월호’는 언제고 어디에서고 다시 우리를 덮칠 수
있다. 위험은 어떻게 분배되는가 그런데 현대의 위험은 평등하지 않다. 벡에 따르면, 우리 시대의 위험은 ‘결핍사회’에서 부(富)가 분배되었던 위계와 질서를 따라 분배된다. 위험이 실현된 것인 재난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공평하게’ 닥쳐오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대형 참사에서 10대에서 20대 초반에 이르는 청소년 피해자가 특히 많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누가 더 빈번하게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살펴볼 수 있게 한다(이동연; 2014, 23쪽). 이때 ‘승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근대화가 생산해 온 위험은 “거대한 사업거리”다. “위험은 경제학자들이 오랫동안 찾아 온 탐욕스러운 수요”인 것이다. “굶주림은 채워질 수 있으며 궁핍도 채워질 수 있으나, 문명의 위험은 밑빠진 독과 같은 수요를 가지고 있어서 충족될 수 없으며 무한히 자가 생산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온갖 위험에 대한 위협 뒤에 따라붙는 보험 광고를 흔하게
본다. 미리 미리 대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험에 가입한다고 해서 위험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보험이란 재난의 예방과는 무관하다. 보험은 재난에 대한 예측을 통해 장사를 하고, 그 예측이 현실이 되었을 때에는 가능한 지불을 유예시킨다. 보험이야말로 위험과 재난이 어떻게 시장을 만들어내는지 잘 보여준다. 위험의 확산과 상업화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다.” (벡; 2006, 58쪽.) ▲ 4.16 인권선언 풀뿌리 토론 (출처: 4.16연대) 안전이라는 판타지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재난이 반복될 뿐만 아니라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채로 지속되면, 이는 사회적 위기가 된다. 그리고 공유된
위기감은 인간 존엄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폐기해 버리는 반동적 복고주의의 도래를 불러온다. 사람들이 불안감 속에서 “자유나 평등 같은 근대적 가치보다 ‘안전’을 갈구”하게 되기 때문이다(문강형준; 2012, 22쪽). 유동성의 시대를 견뎌낼 견고한 세계관, 무너지는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구조적 안전망, 나의 불안을 잠재우고 위로해 줄 수 있는 문화와 정서. 대중은 이와 같은 것들을 생명을 사지로 내모는 지배적 체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과 연합함으로써가 아니라, 전통적인 질서, 이미 익숙해서 이해하기 위해 따로 애쓰지 않아도 되는 신념 체계, 그리고 이미 힘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득권의 인정 등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는 것들에서 찾으려 한다. 안전하다는 감각은 기존의 질서가 유지되고 그 질서를 유지해 온 권력에 의존할 때 더 쉽게 획득되기 때문이다. 상실의 고통이 경제 논리에 의해 간단하게 밀려나는 것 역시 우리가
이런 ‘쉬운 길’을 택하기 때문이 아닐까. 고통은 구체화되지 않지만, 경제는 쉽게 수치화되어 보여진다. 그리고 이런 경제논리란 한국 근대화 안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그 설득력을 갖춰왔다. 혐오는 어떻게 생산되나 국가 역시 재난을 체제와 구조의 문제에서 건져내어 재빠르게 개인의 문제로 만드려는 노력 안에서 혐오를 조장한다. 그렇게 세월호는 ‘일개 교통사고’가 되고, ‘유병언이라는 부도덕한 개인만의 책임’이 되며, 특정 정치세력이 정쟁의 기회로 삼는 오염의 장이 되거나, 일부 유가족이 생떼를 쓰는 몰지각의 공간이 된다. 예컨대 특별법을 제정하면 국가의 질서와 안위가 무너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법석을 떤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 참고문헌 덧붙임 손희정 님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