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은 왜 고장난 자동차를 광고했을까 독후감

폭스바겐은 왜 고장난 자동차를 광고했을까?

2016 독서목록 9/120 (2016.2.4)

[폭스바겐은 왜 고장난 자동차를 광고했을까?: 경영자들이 읽는 이솝우화] — 자일스 루리/중앙books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있듯이 기업들도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 창업주의 창업스토리, 회사가 성장하는 이야기, 위기에서 벗어나는 이야기, 그리고 망하는 이야기까지. 그리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일부는 우리는 열광하게 만든다. 나는 지금도 애플의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기분좋은 흥분감이 일곤 한다.

자일스 루리의 [폭스바겐의 왠 고장난 자동차를 광고했을까?]는 재미있는 기업의 이야기들을 묶은 책이다. 저자인 자일스 루리는 광고, 마케팅 분야에서 일을 하면서 기업들을 가까이 보았기에 이런 책을 쓰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 책의 이야기들은 올드하고 진부하다. 저자가 비즈니스를 통해 알게 된 정말 기가막힌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은데, 이 책의 이야기가 진부한 것은 왜일까? 그 올드함과 진부함이 이 책을 펼쳤을 때 생긴 기대감이 금세 없어지게 한다. 게다가 요즘은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서 기업들과 관련된 스토리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보니 이 책의 효용성은 더욱 떨어진다.

재미있는 스토리가 어지간한 광고보다 훨씬 효과가 크다. 그리고 그 스토리가 감동적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우리나라의 기업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가만보자, 독립운동을 도왔다던 기업이 어디였더라? 참 그리고 친일에 앞장선 기업들도 있다지, 아마?

한줄요약 : “기업들의 이야기, 참신하지는 않음”

★★★☆☆

포로는 왜 감옥에서 펭귄을 그렸을까

1987년, 영국 성공회 대주교인 테리 웨이트가 시아파 무슬림 단체에 납치당했다. 웨이트 주교는 당시 서방 세계에서 탁월한 협상 중재자로 알려져 있던 인물로, 납치되기에 앞서 리비아에 억류된 서방 인질 10명을 석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실 납치되던 날도 인질들을 석방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자신이 구하고자 했던 인질들과 함께 레바논에 억류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발생하자마자 전 세계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그날부터 테리 웨이트는 4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독방에 눈가리개를 하고 라디에이터에 묶인 채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야 했다. 자주 두들겨 맞았고 참수해버리겠다는 협박에 시달렸다. 천식으로 고생도 많았다. 이동할 때는 거대한 냉동차에 실리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던 감시요원들은 점차 테리 웨이트의 행동과 인품에 감동하기 시작했다. 심적으로 그를 챙기기도 했다. 하지만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몇 달을 갇혀 지내던 어느 날, 그와 친해진 한 감시요원이 책을 한 권 구해주겠다며 호의를 베풀었다. 평소 책을 무척 좋아하던 테리 웨이트는 수많은 책 중에서 어떤 것을 갖다 달라고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모국어로 된 책을 읽을 수 있는 다시 없는 기회인데, 특정한 책을 요청한다 해도 감시요원이 이해할 수 있을까? 역사나 철학, 문학, 신학 같은 추상적인 단어를 어떻게 몸짓으로 설명할 것인가, 또 뜻을 이해 한다고 해도 그 책을 찾아서 가져다줄 가능성은 얼마나 되겠는가.

한참 을 고민한 끝에 테리 웨이트는 어떤 책을 가져다달라고 할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책 귀퉁이에 새가 그려진 책이면 아무거나 좋다고 얘기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말한 새가 무언지 감시요원이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검은색과 흰색으로 된 새, 펭귄을 그려주었다. 그것은 바로 펭귄 출판사의 심벌이었다.

1991년 웨이트 주교는 약 5년이 지난 1,763일 만에 레바논에서 석방되었다. 그동안 테리 웨이트는 레바논 감시요원들이 간혹 전해주는 펭귄출판사의 책을 읽으며 힘든 시간을 견뎌냈다. 풀려난 뒤에 누군가 그 에피소드를 듣고 무슨 의미였는지 물었다. 주교는 펭귄출판사에서 출간한 거라면 어떤 책이든 상관없이 읽으 만하리라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좋은 책을 읽고 싶다면 펭귄 책을 골라라. 테리 웨이트의 이 지적이며 극적인 에피소도는 펭귄출판사의 귀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다. p.18~20

펭귄출판사 책도 한 번 읽어봐야 겠구나.

형제의 의절, 아디다스와 푸마

신발공장에서 일하던 크리스토프 다슬러에게는 아돌프와 루돌프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두 아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갔다. 주위에서 ‘아디’라고 불리던 동생 아돌프는 아버지가 하던 일을 이어받아 부엌에서 직접 운동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반면에 ‘루디’라고 불리던 형 루돌프는 도자기 공장에서 관리직으로 잠깐 일하다 가죽 도매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루디는 1924년 7월 고향 마을로 돌아와 동생이 하던 사업에 동참했다. 상호를 다슬러 형제 신발공장으로 바꾸고 두 형제가 함께하자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될 예정인 1936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있을 때, 아디는 이것이 하늘이 내려준 좋은 기회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형과 함께 만든 스파이크가 달린 운동화를 가방에 가득 담아 올림픽 선수촌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디는 미국 단거리 육상선수인 제시 오언스를 설득해 자신이 제작한 신발을 신고 올림픽에 출전하도록 했다. 이는 흑인에 대한 최초의 상업적 후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언스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네 개나 따내는 기적을 이루었다. 육상 최초의 올림픽 4관왕이 탄생하자 다슬러 운동화까지 덩달아 유명해졌다. 두 형제의 책상에는 전 세계에서 날아든 주문서와 응원의 메시지가 가득 쌓였고, 다른 국가대표팀 선수나 감독도 다슬러 운동화에 관심을 보였다. 사업은 엄청난 호황을 누렸고, 1930년대 후반에는 한 해 평균 20만 켤레가 넘는 운동화가 팔렸다.

하지만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아디와 루디도 함께 사업을 하면서 수차례 언쟁을 벌이고 갈등을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간신히 둘 사이를 이어주던 갈등관계마저 종지부를 찍고 형제는 서로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

1943년 연합군이 독일을 폭격할 당시 루디와 그의 가족은 방공호에 대피해 있었는데, 얼마 후 아디 부부도 그곳으로 피신해왔다. 루디는 동생이 들어오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비열한 자식도 곧 이쪽으로 올 거야.”

루디는 동생이 말하는 사람이 연합군이 아니라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분노했다. 얼마 뒤에는 루디가 나치 친위대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아디가 밀고해 형이 미군에 붙잡힌 후 둘 사이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형제는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1947년에 완전히 갈라섰다.

그 후 루디는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고 처음에는 이름을 루돌프와 다슬러를 조합한 루디로 지었다가 1948년 ‘푸마’로 이름을 바꿨다. 한편 아디도 1949년 ‘아디다스’라는 회사를 차렸는데, 그 이름은 ‘온 종일 나는 스포츠를 꿈꾼다All Day I Dream About Sport’의 머리글자라는 말도 있고 아디와 다슬러를 조합한 말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런 두 회사의 경쟁은 치열하고 냉혹했다. 고향 마을 역시 두 파로 갈렸는데, 그 덕분에 ‘목이 구부러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누군가가 마을을 방문하기라도 하면 어떤 브랜드 신발을 신었는지 확인하느라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디다스는 승승장구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 2:0으로 서독을 이기고 있던 헝가리 선수들이 갑자기 내린 비에 미끄러지며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반면, 서독 선수들은 우천에 대비해 미끄러짐을 막을 수 있는 아디다스의 축구화를 신고 있어서 기적 같은 3:2 역전극을 연출한 것이다.

아디다스에 늘 선두를 내주던 푸마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강력한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월드컵 결승전, 경기 전 펠레는 주심에게 양해를 구하고 축구화 끈을 다시 묶었다. 축구 황제 펠레의 축구화에 새겨진 푸마의 로고가 전 세계에 방영되었다. 브라질의 우승으로 월드컵의 막이 내리고 푸마의 매출은 수직상승했다. p.25~28

그리고 그 형제가 결국 세계 스포츠화를 다 먹어버렸다.

기네스 맥주 하프 로고에 숨은 비밀

기네스 맥주의 창업주인 아서 기네스는 1759년에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폐허로 있던 한 양조장을 헐값에 9,0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임대 계약을 맺고 본격적인 맥주 생산에 들어갔다. 그 후 10년도 안 돼 기네스 엑스트라 스트롱 포터라는 맥주를 만들어 호평을 받았고, 영국으로 수출되면서 크게 성공했다. 이 상품이 바로 훗날 기네스 스타우트로 더욱 유명해진 흑맥주이다.

맥주가 성공적으로 잘 팔리고 있던 무렵, 1862년이 되자 기네스는 브랜드 이미지를 확고하게 정착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아일랜드 국가 상징인 켈틱 하프를 선택했다. 아이시리 하프, 브라이언 보루 하프라고도 하는 켈틱 하프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데, 그 유래를 알려면 최소한 1,000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주 오래전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아일랜드 전역을 통일한 브라이언 보루 대왕은 하프를 아주 좋아하고 연주 실력 또한 출중했다고 한다. 12세기 역사에 대한 현존하는 기록을 보면 십자군 전쟁 중에도 켈틱 하프를 연주했고, 또 하프를 연주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을 할 정도로 아일랜드 사람들은 하프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그래서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기호로 하프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켈틱 하프는 전통, 아일랜드, 즐거움을 뜻하는 거의 완벽한 상지이었기에 아서는 1876년 하프를 그려 넣은 마크를 상표로 등록했다.

그리고 기네스 맥주는 순항을 거듭했다. 1922년, 아일랜드가 독립 국가를 선언하고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가 공식적인 국장(國章)으로 켈틱 하프를 사용하겠다고 할 때까지는 말이다.

기네스 맥주는 새로운 정부에 반대 의사를 표하느냐 아니면 1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회사를 대표하던 하프를 포기하느냐 하는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어느 것도 선뜻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연히 거울에 비친 모습을 들여다보던 누군가가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하프의 좌우를 바꾸면 어떻겠는냐는 것이었다. 그보다 더 깔끔하고 영리한 방법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정부 역시 그 제안에 기꺼이 동의했다. 아일랜드 정부로서도 그것이 입장을 180도 전환한 첫 번째 사례가 아니었을까? 이런 사연으로 지금까지 기네스 맥주 하프는 직선으로 이루어진 공명통이 늘 왼쪽 방향으로 세워져 있고 아일랜드 국장 하프는 항상 오른쪽 방향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아일랜드 공식 하프는 대통령 직인, 여권, 아일랜드 공화국기는 아니어도 아일랜드 공화국 동부에 있는 렌스터의 깃발, 아일랜드 유로 동전, 아일랜드 국립대학 같은 몇몇 유명한 국영기관 로고에 등장한다. 한편 기네스 맥주의 로고는 하프 그림과 브랜드 이름, 아서 기네스의 유명한 서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p.54~56

기네스 맥주가 마시고 싶다.

피아니스트도 가입한 트럭 찾기 팬클럽

‘에디 찾기’는 일종의 컬트 게임으로, 영국에서 회원 수가 2만 명이 넘는 팬클럽을 자랑한다. 게임 방식은 에디 스토바트라는 금색 글자가 적혀 있고 초록색과 하얀색, 빨간색이 섞인 독특한 화물차를 찾는 것이다. 에디 스토바트는 본사가 잉클랜드 칼라일에 있는 화물 수송회사의 이름이다.

영국의 유명 피아니스트인 줄스 훌랜드를 비롯해 많은 팬들은 여행길마다 가급적 최애한 많은 화물차를 찾으려고 서로 경쟁한다. 팬이든 아니든, 일단 게임이 시작되면 에디 스토바트의 화물차를 찾기 시작한다. 운전기사에게 손을 흔들어주면 대답으로 경적소리를 들어야 게임이 끝난다.

애디 스토바트 이야기는 에디가 농업 관련 하청회사를 설립하는 1950년대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사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에디의 아들 에드워드 스토바트가 14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회사 일을 돕게 되면서부터다.

에드워드가 처음으로 한 일은 화물차를 가동할 수 있도록 새로운 수송 일감을 찾는 것이었다. 사업 자체가 워낙에 계절을 많이 타는 일이라 쉽지 않았지만 에드워드는 능력을 발휘해 나갔고 곧이어 사업 규모도 커지기 시작했다. 에드워드가 20세가 되는 1975년에는 에디 스토바트라는 이름을 내걸고 여러 운송 업무를 전담하는 화물 수송회사로 자리를 잡았고, 1년 후에는 칼라일에 있는 대규모 창고로 이사했다. 1980년 무렵에는 화물차가 25대로 늘어나고 직원도 35명이나 되는 회사로 성장했다. 사업이 꾸준히 성장을 거듭해 점차 하청을 받는 일에서 벗어나 애완동물 사료회사인 스필러스와 금속 전문업체인 메탈박스 같은 제조회사들과 직접 거래하는 방식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성공의 비결은 어떤 주문이든 절대 거절하는 일 없이 열심히 일하는 데 있었고, 그 결과 약속한 시간에 정확히 배달하는 회사라는 평판을 얻었다.

또 한 가지 비결은 브랜드 이미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믿음에 있었는데, 에드워드는 그럼 생각을 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화 물 운송업을 얘기하면 지금까지 오랫동안 거칠고 무책임하다는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대체로 트럭이나 용달차 운전기사들은 뜨내기 일꾼이나 부랑자로 떠돌다가 일을 맡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서비스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업체에도 모범이 될 만한 몇 가지 규칙을 도입하게 되었죠.”

화물 운송업계의 일반적 관행을 깨고 친절과 봉사, 단정하고 깨끗한 외관으로 직원들을 무장시킴으로써 에드워드는 고객에게 강력한 브랜드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었다. 나아가 전체 화물 운송업계의 얼굴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뜯어 고칠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미지는 영국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매우 중요한 무기입니다. 첫인상을 심어주는 기회는 오직 한 번뿐입니다.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어야 하고 언제 어디서나 공손해야 합니다. 이제 운전기사들도 그런 이미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에드워드는 직원들에게 정중하고 예의 바른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넥타이와 깔끔한 초록색 상의를 입게 했다. 근무 중에 규정대로 옷을 입지 않고 있다가 걸리면 징계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단지 넥타이를 매고 일한다고 해서 에디 스토바트의 화물차와 운전기사가 눈에 띈 것은 아니었다. 직원들은 각자 몰고 다니는 화물차를 항상 깨끗하게 유재해야 했는데, 화물차마다 모두 여자 이름을 붙여놓은 점도 흥미로웠다. 에드워드는 넥타이와 유니폼 자체가 중요한 사항이 아니라 그렇게 갖춰 입으면 스스로 규율을 정하고 지키게 된다고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바람직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운영해 나간다면 적은 비용으로 조직을 꾸려 나갈 수 있습니다. 우수한 품질과 적절한 규칙은 비용을 낮추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실제로 직원들이 차량을 깨끗하게 관리하고 유니폼을 입은 다음부터 우리는 전체 비용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할 여유가 없다고 얘기하는 이들이야말로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죠.”

마지막으로 이 회사가 두드러질 수 있었던 또 한 가지 중요한 비결이 있다. 에드워드는 직원들에게 지나가는 사람이 손을 흔들거나 신호를 보내면 같이 손을 흔들어주고 우렁찬 경적소리로 화답하도록 항상 당부했다.

그 결과 ‘에디를 찾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 다음에는 팬클럽과 스토바트 기념품가지 등장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고속도로를 달릴 기회가 생긴다면 눈을 부릅뜨고 에디 스토바트의 화물차를 찾아보길 바란다. 그러면 어디선가 한 대쯤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손을 흔들고 경적소리를 들으면 에디 찾기 게임이 끝나는 것이다. p.72~76

기업이 잘 하면 소비자들이 자체적으로 홍보를 하고 이벤트를 벌인다. 아주 좋은 사례인 듯하다.

집단지성의 힘으로 재기에 성공한 캐나다 금광회사

캐나다 토론토에 위치한 세계 빅3 금광회사인 ‘골드코프’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파업은 계속되고 부채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생산원가는 터무니없이 치솟고 시장 상황도 만만치 않은 가운데 채굴 사업을 중단해야 할지도 모르는 지경에 처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대부분 골드코프가 반세기 동안 채굴해 온 캐나다 온타리오의 레드호 광산이 고갈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상당한 금이 매장된 새로운 광산을 찾지 못한다면 골드코프는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골드코프의 롭 맥이웬 사장은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맥이웬 사장은 우연히 강연회에 참석했다가 소스 공개를 통해 전 세계 개발자와 함께 컴퓨터 운영체제를 만들어냈다는 리눅스 얘기를 듣게 되었다. 리눅스 방식에 주목한 맥이웬은 광상업계의 불문율을 깨고 색다른 접근을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회사가 소유한 지적 자산을 기밀 사항으로 보호하는 대신에 막대한 비용을 들여 개발한 지질 데이터를 비롯해 여러 소중한 정보와 지식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회사 인터넷 웹사이트에 공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리눅스가 소스를 공개했듯이 탐사 과정을 공개하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이런 시도는 폐쇄적인 사업으로 알려진 광산업 분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도전이자 위험이었다. 하지만 액이웬은 내부에서 빗발치는 심한 반발과 우려를 뿌리치고 220평방킬로미터 규모의 광산에 대한 총 400메가바이트어치의 정보를 웹사이트에 게재했다.

맥이웬은 전 세계 누리꾼들에게 금광을 찾는 탐사에 참여하도록 촉구했다. 그리고 ‘도전 골드코프’를 통해 금 매장 후보지나 효율적인 탐사 방법을 제안하는 참가자들에게 총 57만 5,000달러의 상금을 지급하겠다고 공표했다.

이 소식은 인터넷을 타고 빠르게 전파되어 몇 주 동안 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의견이 골드코프 본사로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대략 50개국에서 1,000명에 이르는 탐사자들이 이 콘테스트에 참가했다.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고픈 참가들을 살펴보면 지질학자를 포함해 대학원생, 경영 컨설턴트, 수학자, 군 장교 등 다양했느넫 그 밖에 골드코프의 경쟁사 직원들도 많았다고 한다. 맥이웬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수학, 고급 물리학, 인공지능시스템, 컴퓨터그래픽, 비유기적 문제를 유기적으로 해결하는 방법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기업 내부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갖가지 놀라운 능력이 발휘된 것입니다. 처음에 컴퓨터그래픽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라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니까요.”

참가자들은 레드호 광산에서 무려 110개의 금광 후보지를 찾아냈고, 그 가운데 80퍼센트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실제로 상당량의 금이 발견되었다. 정확히 220톤이 넘는 금이 채굴되었는데, 돈으로 환산하면 30억달러를 훨씬 웃도는 양이다. 이는 상금 57만 달러를 투자해 거둔 어마어마한 수익이 아닐 수 없었다.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골드코프는 최첨단 기술과 효율적인 탐사 방법론, 질적으로 향상된 지질 모형을 접할 수 있었다. 정보 보허가 아닌 정보 활용에서 대안을 찾고자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어었고, 마땅한 해결책이 없어 보이던 막막한 상황에서 문제 해결의 전제 자체를 전환시켜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매출 1억 달러 규머에 불과하던 골드코프는 이제 매출 90억 달러 규모의 거대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p.104~107

열린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려주는 일화다.

독일인들의 국민차, 폭스바겐의 부활

1945년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 뒤 영국군이 점령한 볼프스부르크라는 도시에는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공장이 하나 있었다. 공장 지하에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폐기된 자동차 부품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전기 전자 기술자 부대를 지휘하는 영국군 찰스 래드클리프 대령과 이반 허스트 소령은 우연히 이 쓸모없어 보이는 자동차 잔해들을 발견했다. 만약 그들이 소용 가치를 알아채지 못했다면 적지 않은 자동차 자재들은 영원히 고철 더미로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놓친 중요하 자산을 알아보고 활용했다. 즉, 이 공장의 시설과 자재가 단기적으로 당장 차량 확보가 시급한 영국군을 위해 저비용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해결책이 되고, 장기적으로는 패전국 독일이 회생할 수 있는 자립 기반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공장에 남아 있던 자재들은 다름 아닌 폭스바겐 비틀을 생산하던 부품이었다. 1933년 히틀러가 정치적 기반을 다질 목적으로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에게 튼튼하고 저렴하며 연비가 좋은 ‘국민차(폭스바겐이라고 알려진 브랜드의 뜻은 독일어로 ‘국민의 차Volks wagen’다)’를 개발하라고 지시한 후, 비틀은 1938년에 볼프스부르크의 공장 기공식에서 첫 모델이 공개되면서 수천 대가 제작되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폭스바겐 공장은 군수공장으로 바뀌었고, 히틀러의 ‘경제 기적’을 이루려던 국민차는 생산이 중단된 채 그동안 생산된 자동차마저 모두 군수물자로 이용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외관상으로 보아도 공장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지만 허스트 소령은 둘러보자마자 공장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발전 설비가 있는 건물에서 파편과 잔해를 치우고 보니 일부 잔해는 공격을 받기 전까지 가동된 흔적을 위장하려는 듯 그곳에 덮여 있었다. 게다가 부품의 상태와 모양으로 판단하건대 여러모로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국민차를 제작할 수 있는 애초의 청사진이 연합군의 폭격으로 모두 파괴되어 사라진 상황에서 허스트 소령과 래드클리프 대령은 남아 있는 부품들로 국민차를 복원하기 위해 애썼다. 두 사람은 커다란 종이 두 장에 기술 도안을 새롭게 그리고 각각 18가지로 구역을 나눠서 부품과 사양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앞으로 자동차 산업 분야에서 대중적 인기를 끌게 될 차량이 재탄생되려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런 다음 허스트 소령은 영국군에 차량 2만 대를 주문하도록 설득해서 1946년부터 생산이 재개되었다. 정식 이름은 T형 포드를 약간 변경해 ‘타입1 비틀’로 정했다. 전쟁 직후라 원자재가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강철과 유리, 타이어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일이 무엇보다 어려웠다. 식량 또한 공급 부족에 시달렸으므로 공장 노동자들의 영양실조도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그래서 공장 옆 잔디밭에는 채소를 심어 식량을 조달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1946년 3월, 드디어 비틸 1,000대가 생산되었다.

1949년 5월, 폭스바겐 자동차회사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영국군이 폭스바겐 공장 운영을 독일 정부에 양도해 BMW의 기술자 출신이자 독일 자동차 오펠Opel의 임원이었던 하인리히 노르트호프가 새 경영자로 취임했다. 그때부터 폭스바겐은 정상궤도에 올라섰고 해외 시장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품질과 성능을 향상기커 타입1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는데,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독일에서는 서민의 발로,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저렴하고도 튼튼한 차량으로 사랑을 받았다.

세계적 인기에 힘입어 1955년에는 100만 대 생산을 넘어섰고 덕분에 폭스바겐과 독일 경제는 되살아날 수 있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뛰어난 광고 덕분에 주목을 받으며 1960년대에는 연간 20만 대 이상이 팔려나갔다. 그리고 2003년 7월을 끝으로 1세대 비틀의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총 2,000만 대가 넘게 제작되었다.

허스트 소령은 1951년 말 군에서 제대하고 영국으로 돌아가 민간인으로 평범한 삶을 살다가 2000년 3월 10일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볼프스부르크의 폭스바겐 공장 근처에는 독일 재건을 위해 애쓴 소령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이반 허스트를 본떠 이름을 지은 거리가 지금도 있다. p.115~118

지금의 비틀은 정말 별로지만, 과거 비틀은 정말 이뻤다.

새로운 접착테이프의 탄생

3M 사의 연구 보조원으로 일하게 된 딕 드루는 지금까지 여러 방면에서 진로를 모색해 왔다. 한때는 밴조 연주자를 꿈꾼 적도 있고 기술자 과정을 밟다가 중도에 그만두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얼마 안 되는 화학 지식을 기반으로 3M 사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딕이 입사할 무렵 3M 사는 최초로 사포와 다른 연마제를 제작하던 중이었다. 딕이 입사하고 처음 맡은 임무는 회사가 새로 개발한 웨토드라이 방수 사포의 샘플을 근처 자동차 정비소로 가져가서 시험해 보는 일이었다.

1923 년 어느 날 아침, 딕은 회사 근처에 있는 정비소로 들어가다가 “내가 본 것 중 최악이야”라는 푸념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자동차 투톤 도색을 하던 기사가 애서 마무리한 작업이 완전히 엉망이 돼버린 것을 확인하고 잔뜩 성질을 부리던 중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딕은 다가가서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었다.

당시 혈기 왕성하고 떠들썩한 20대들 사이에서 투톤 도색 차랴이 엄청난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투톤 도색을 하려면 한 가지 색상을 칠하는 동안 자동차의 다른 부분을 제대로 가린 다음에 작업해야 하는데, 그 일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그 작업을 위한 도구도 따로 마련된 것이 없었으므로 두꺼운 방습지에 강력 접착테이프를 사용하거나 낡은 신문지에 서류용 풀이나 수술용 접착테이프를 사용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문제는 페인트칠이 마르고 나면 테이프를 떼어내야 하는데, 종이나 테이프를 떼어낼 때 접착력이 강해 얼룩이 지고 새로 칠한 부분까지 같이 떨어져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작업이 헛수고로 끝나고 만다.

딕의 임무는 적극적으로 방수 사포를 소개하고 시범을 보여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 순간 딕의 머릿속에는 지금 필요한 것은 접착성이 약한 접착제라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무모하게도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기사에게 공언하고 말았다. 3M 사가 새로운 테이프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요소를 이미 확보한 상태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접착 성분과 연마 성분을 동시에 지닌 광물질을 이용해 사포를 만들었던 것이다. 딕은 그런 광물질을 테이프 접착제에 넣는다면 도색을 마친 다음 벗겨내기 쉬운 접착테이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딕은 이런 생각을 하며 실험실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광물질을 어떻게 적절하게 배합해야 하는지 초조한 마음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면 가림용으로 특별히 고안된 테이프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것이다. 딕은 연마 성분이 포함된 접착제를 개발하기 위해 며칠 동안 씨름했다. 하지만 상사인 맥나이트는 딕을 불러 지금 매달리는 과제를 접고 원래 진행하던 방수 사포 작업으로 돌아가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다시 본업으로 돌아온 딕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그런 재료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생각하느라 다른 일에 집주하지 못하고 다시 실험실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그러고는 상사의 지시를 무시한 채 열의를 다해 그 일에 매달렸다.

마침내 딕은 광물질이 최적으로 배합되었다고 생각한 연구 결과를 들고 상사에게 찾아갔다. 그런 다음 새로운 접착테이프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제지 기계를 구매할 수 있게 자금 승인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상사는 잠시 제안을 고려하는 듯하더니 단호하게 거절해 버렸다.

별수 없이 실험실로 돌아온 딕은 포기하는 대신에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궁리했다. 다행히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났다. 자신에게는 연구원 자격으로 최대 100달러까지 물품을 구입하거나 비용을 승인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로 99달러짜리 물품 구매 주문서를 주저없이 작성했다.

딕은 필요한 기계를 구매해 가장자리에만 접착제를 두른 시제품을 정성껏 만들었다. 그런 다음 정비소로 가져가서 성능 실험을 해보았다. 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테이프가 떨어져 나가자 실망한 자동차 도색 기사가 투덜거리며 딕에게 말했다.

“집어치우고, 당신네 구두쇠 보스한테 가서 테이프에 풀 좀 더 바르라고 하쇼!”

접찾제를 조금 발라서 테이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 도색 기사는 딕의 보스를 구두쇠(Scotch, 스코틀랜드인scot의 형용사로 스코틀랜드인은 구두쇠라는 인식이 있었다)라며 욕을 했다. 딕은 그가 야박하다는 뜻으로 사용한 ‘스카치Scotch’라는 발음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완성될 접착테이프의 이름으로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딕은 기사의 말대로 접착제를 좀 더 충분히 발라 시제품을 보완한 후 스카치 마스킹 테이프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출시했고 큰 반응을 얻었다.

나중에 딕은 상사 맥나이트에게 자신이 요구한 기계의 자금을 어떻게 간신히 마련할 수 있었는지 털어놓았다. 마스킹 테이프가 거둔 성공을 고려한다면 맥나이트가 딕을 해고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맥나이트가 딕을 벌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아주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게 드러났다. 딕이 이어서 듀폰 사의 셀로판 종이를 재료로 마스킹 테이프의 변형 상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1930년에는 기름, 합성수지, 고무 등을 이용해서 투명한 접착제를 만들고 뒤에 셀로판을 입힌 스카치 투명 테이프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늘 유용하게 사용하는 스카치테이프다. 스카치테이프로 성공한 3M은 1950년부터 다국적기업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p.166~170

스카치테이프에 이런 일화가 있었구나.

대형 은행을 설득한 스와치

스위스 시계는 오랫동안 사치품이자 장인의 훌륭한 공예품이라는 이미지를 지녀왔다. 그래서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지만 너무 비싸다는 평판을 받으면서도 부유층에서 꾸준히 선호하는 상품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 아시아에서 저렴한 시계가 제작되어 나오면서 스위스 시계는 경쟁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전지로 작동하는 쿼츠시계의 등장은 시계 산업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던 것이다. 1960년대 후반에는 거의 9만 명이나 되는 종사자를 거느리며 위풍당당했던 스위스의 시계 산업은 이제 종사자가 3만 5,000명 정도로 줄어들었을 만큼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쿼츠시계 기술이 도입되는 바람에 시계 산업에서 설 자리를 빼앗긴 스위스 시계는 차별성과 강점을 무기로 고유한 이미지를 널리 알려야 할 절대적 필요 앞에 당면했다. 그 결과 두 번째 시계second watch라는 의미의 스와치Swatch 브랜드가 탄생하여 이런 막중한 임무를 이끌게 되었다.

홍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위스 시계라는 기존의 인식에 변화를 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고품질 스위스 시계지만 비싸지 않다.’ 그렇게 엄청난 일을 어떤 식으로 접근할 것인가?

심사숙고 끝에 얻은 해답은 대형 시계를 만들어 스와치를 만방에 알리는 방법이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일단 독일에서는 그런 홍보를 시도할 만하다고 판단했다.

과제는 독일의 상업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장 높은 건물에 시계줄을 포함해 길이가 162미터에 이르고 무게가 13톤이나 되며 실제로 작동하는 금빛 스와치 시계를 매다는 일이었다. 시계는 브랜드명 ‘스와치’와 원산지 ‘스위스’, 놀라울 정도로 저렴한 가격 ‘60마르크’라는 세 가지 문구가 새겨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건물에는 독일의 대형은행인 코메르츠 은행 본사가 있었다. 지금은 스와치 그룹으로 이름이 변경된 SMH의 회장 니컬러스 하이에크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 거대하고 보수적인 고층건물에 시계를 매달아놓는 일은 대단히 도발적인 발상이였습니다. 재미있고 기발하지만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일이었죠. 다들 농담을 한다고 생각 했으니까요. 하지만 나중에 우리가 홍보를 마칠 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전하려는 메세지를 이해하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스와치가 모두에게 전한 메세지는 이런 내용이었다. 스와치는 스위스 장인이 정교하게 완성한 고품격 유산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지만 이제는 예전의 스위스 시계와는 달리 누구나 부담 없는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브랜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색다른 선전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사람의 노고가 깃들어 있었다. 먼저 아이디어를 제안한 사람과 그렇게 거대한 시계를 실제로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의 힘이 컸다. 하지만 그 밖에도 눈에 띄지 않게 실력을 발휘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독창적이고 빈틈없는 노력이 없었다면 코메르츠 은행에 스와치 홍보 계획을 설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코메르츠 은행이 동의해 주지 않았다면 영국 국회 의사당 건물 시계탑인 빅벤에 버금가는 독일의 유명한 시계 건물도 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코메르츠 은행을 설득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보다 은행 회장의 입장에 서서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 덕분이었다. 그런 계획을 추진할 때 맞닥뜨릴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를 확인한 다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미리 준비했던 것이다. 먼저 코메르츠 은행의 명성에 미치게 될 영향이었고, 또 한 가지는 과연 가능한 일일까라는 실현 가능성의 문제였다.

먼저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회사 기획팀은 몇 가지 독창적인 연구를 의뢰했다. 스와치의 잠재 고객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아니라 코메르츠 은행 고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였다. 이 노력은 여러모로 유익하게 작용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은행 고객들은 대체로 그런 선전 활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보다는 코메르츠 은행이 그런 대담한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어떤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두 번째 문제는 일단 시당국을 방문해서 그 계획에 대한 서면 허가를 받아냄으로써 돌파구를 열었다 이렇게 두 가지 문제를 사전에 해결함으로써 기획팀은 드디어 코메르츠 은행 회장을 만나러 갈 준비를 마쳤다. 여러 사람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은행 회장은 몇 가지 우려를 제기했지만 스와치 사가 기울인 빈틈없는 준비와 노력에 마음을 움직여 계획을 추진하라는 승인을 내렸다고 한다. 그 결과 1984년에 거대한 스와치 손목시계가 은행 건물 외벽에 설치 될 수 있었다.

이 시계는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시계로 기네스북에 올라가 있다. p.221~225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스와치처럼

값비싼 사치품을 대중의 간식으로, 허쉬초콜릿

왕실과 귀족들이 먹던 값비싼 초콜렛을 대량생산 방식을 도입해 대중화시킨 초콜렛 업계의 헨리 포드라 불리는 사람이 있다. 허쉬 초콜렛에 창립자 밀턴 허시는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인내와 끈기로 자신이 맡은 일을 수행하면서 조금씩 꿈을 이루어 나갔다.

1857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시골 마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밀턴은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농사일을 거들고 아버지가 오랜 시간 집을 떠나 있는 동안에는 어머니와 가족을 돌보느라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도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 이후에는 아예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지만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이 따르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성실히 살았다.

10대에 접어들면서 미터는 펜실베니아주 랭커스터에 있는 사탕 공장에서 4년 동안 견습공으로 일하고 인쇄소가 제과점 등에서 일했다. 1876년에는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직접 사탕가게를 열기도 했지만 6년 동안 열심히 일했음에도 사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꿋꿋한 밀턴은 좌절하지 않고 다시 툴툴 털고 일어나 콜로라도주 덴버 지방으로 이주했다. 그곳 제과점에서 일자리를 얻어 신선한 우유로 캐러멜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그후 노하우를 쌓은 뒤 뉴욕에서 두 번째로 사탕 공장을 차렸으나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1886년에 다시 랭커스터로 돌아간 밀턴은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하면 다시 랭커스터 캐러멜 회사를 설립했다. 다행이 캐러멜 사업은 성공가도를 달리며 미국 전역과 유럽으로 상품이 팔려 나갔고, 직원이 1,400명이 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밀턴의 꿈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1893년에는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갔다가 그곳에 출품된 독일제 초콜릿 기계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리고 바로 기계 몇 대를 사들였다. 당신 미국은 비위생적인 생활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상류층에서는 스위스 고급 초콜릿이 유행하던 때였다. 초콜릿의 가능성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랭커스터로 기계를 싣고 온 밀턴은 자신의 회사에서 만든 캐러멜에 초콜릿을 입혀 생산,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초콜릿에 대한 수요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예 캐러멜 사업을 과감히 매각하고 허쉬초콜릿 회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초콜릿 사업이 성공을 거두기까지는 또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 당시 인기를 끌던 밀크초콜릿은 대부분 스위스에서 철저하게 기밀이 부쳐진 공정에 따라서만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년 동안 끈질기게 실패를 반복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밀턴은 마침내 우유와 설탕과 코코아가 적절하게 배합된 맛있는 초콜릿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1907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키세스초콜릿은 허쉬초콜릿 상품 중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허쉬는 당시 유행하던 카카오버터 대신 식물성기름을 사용해 더운 여름에도 녹지 않는 초콜릿을 개발했다. 그리고 대량생산에 성고해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미군에 납품할 정도였다.

이로써 효과적인 비용과 공정으로 밀크초콜릿을 대량생산하는 오랜 꿈을 실현할 수 있었고, 부유한 사람들이 나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던 초콜릿을 누구나 맛보고 즐길 수 있는 기호품으로 바꾸어놓았다.

초콜릿 사업으로 대성공을 거둔 밀턴은 어려운 형편에 처한 학생들에게 무상교육을 제공하는 허쉬스쿨을 세우고 직원들의 산업 유토피아로 손꼽히는 허쉬마을 조성함으로써 사회공헌에 적극 앞장서기도 했다. p.230~233

허쉬의 일화는 조금 더 궁금하네.

자일스 루리 Giles Lury

폭스바겐 비틀을 몰고 레고 시계를 차고 다니며, 디즈니를 사랑하고 첼시를 응원하는 다섯 아이의 아빠이자 영국의 브랜드전략컨설팅회사인 밸류엔지니어스The Value Engineers 대표다.
세계적인 다국적 광고회사 DDB와 JWT, 리서치회사 HPI리서치그룹, CI컨설팅사 스프링포인트Springpoint에서 20여 년 동안 근무하며 광고, 리서치, 브랜드 등 마케팅 전 분야를 아우르는 전문가로 활약했다. 유니레버, 칼스버그, 켈로그 등의 생활용품 브랜드부터 보다폰, 소니에릭슨, 비스카이비 등의 정보통신 브랜드까지 다양한 업계의 광고 및 마케팅 전략을 수립해 매출을 이끌었다. 그가 진행한 광고와 프로모션은 IPA 광고효과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였으며, 영국 내 리서치 분야 최고상인 AMSO 리서치효과상을 수상하는 등 그의 전략은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국내에서 출간된 《시장조사의 기술》이 있으며 그 외 《브랜드워칭Brandwatching》,《애드워칭Adwatching》 등이 있다. 이 밖에도 BBC 라디오와 TV에 브랜드 전문가로 출연하고 있으며, 각종 잡지와 정기간행물에 마케팅과 브랜드를 주제로 한 글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