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일본이 왜 조선을 쳐들어왔나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본을 통일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복속시킨 영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과 명의 정복을 선언하였고, 1592년 명으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는 명분을 내세워 16만의 군대가 조선에 상륙시켰다. 예상치 못한 일본의 침입에 일방적으로 밀려 수도인 한양까지 내어 준 조선은 이순신이 이끈 수군의 연승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약으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명의 군대가 참전하면서 승기를 잡아나갔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7년간의 전쟁은 끝이 났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3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을 돕기 위해 참전한 명은 국력을 지나치게 소모하여 쇠약해졌고, 여진족이 세운 청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침략을 받은 조선은 인구가 격감하고, 국토가 황폐해졌으며, 많은 문화재가 불타는 등의 피해를 복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일본은 참전한 영주와 군사들을 제외하고는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선에서 끌고 간 도자기 기술자들과 학자들을 통해 에도 막부 시대의 문화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도공 이삼평의 묘

이삼평이 만든 아리타 도자기

(1) 참전의 배경

16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의 국가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다단하게 전개되었다. 明의 경우에 이른바 北虜南倭의 약탈적 침입으로 거듭 환난을 겪고 있었으니 특히 嘉靖帝 집정기(1522∼1566)에 이르러서는 그 같은 현상이 더욱 심해졌다. 북로의 침략에 의해 수도 북경이 수일간 포위된 일까지 있었으며, 동남해안 일대에서는 밀무역과 약탈을 감행하는 왜구가 자주 일어나 연해안의 군비를 강화하였지만 무력으로서는 해결하지 못하였다.056) 李鉉淙,<16世紀 後半期 東亞의 정세>(≪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264쪽.

한편 조선의 대외관계 역시 명의 입장과 큰 차이가 없었다. 조·명 양국간에 전통적인 우호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 외에는 북방의 여진족과 남방의 왜구에 의한 약탈·침략행위가 상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의 여진족은 15세기초까지만 해도 사실상 명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명의 세력이 점차 약화되는 과정에서 建州女眞 내부에 奴兒哈赤(누르하치)이란 영걸이 등장하여 여러 부족을 통합하면서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였다. 결국 누르하치는 뒤에 後金을 건설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주겠다고 제의해 왔을 만큼 이미 확고한 세력으로 발전해 있었다. 선조가 의주로 피란하게 되자 자발적으로 사신을 보내와 원조해 주겠다는 뜻을 전하였으나 유성룡 등은 여진족이 비록 倭侵에 대한 구원을 하러 오겠다 하나 그들의 참뜻을 알 수 없었으므로 邊將으로 하여금 좋은 말로써 그들의 제의를 거절하게 하였다.057) 李鉉淙, 위의 글, 268쪽.

이와 같이 어렵게 얽힌 대외관계 속에서 풍신수길이 일본열도를 통일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징후로 조·명 양국 모두에 또 다른 위기의식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1590년 정월 관동정벌을 끝으로 일본 열국의 통일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풍신수길은 휘하 장수들에게 자신의 명 정벌계획을 공언함과 동시에 당장 그에 대처할 것을 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肥前의 太守에게 명하여 전선을 건조케 하였으며, 열국에 명을 내려 肥前·一岐·對馬 3개처에 축성하여 명 정벌을 위한 館驛을 마련케 하였다. 아울러 지난날 왜구를 인도하여 南京으로부터 福建省 일대를 침략했던 汪五峰의 黨與를 불러모아 그 당시 명군의 전투력에 대하여 탐문하기도 하였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지략과 일본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반드시 명을 정벌한 다음 스스로 大明皇帝가 될 것임을 호언하기도 하였다.058) 諸葛元聲,≪兩朝平壤錄≫日本上, 만력 18년.

그런데 을묘왜변을 전후한 시기에 명이 당한 왜침의 환난은 조선측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극심하였다. 福建·江蘇·浙江·廣東省 일대의 동남부 연해지역이 약 40여 년에 걸친 왜구의 침략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 다.059) 崔韶子,<壬辰亂時 明의 派兵에 대한 論考>(≪東洋史學硏究≫11, 東洋史學會, 1977), 65∼66쪽. 그러나 명은 당시 왜구의 약탈행위가 남경지방까지 미쳤으나 수도권으로 확대되지 않은 것을 큰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임란 전에 이미 명에서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일본군이 조선을 경유하여 자국에 쳐들어올 것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琉球에 거주하고 있던 복건성 同安출신의 船商 陳甲이 귀국하여 巡撫 趙參魯에게 그 내용을 전함으로써 중앙에 알려져 있었으며, 같은 명인으로서 薩摩州에서 의업에 종사하던 許儀後로부터 보다 소상한 奏聞이 福建軍門을 통해 조정에 보고됨으로써 일본의 명정벌계획을 거듭 확인하였기 때문이다.060) 川口長孺,≪征韓偉略≫권 1. 특히 허의후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을 경우에 명이 취해야 할 備禦策까지 다음과 같이 개진하였다.

먼저 대군을 출동시켜 조선을 급습하여 그 官長들을 모두 죽이고 火兵을 좌우사방에 매복시킨 다음 일본군이 내도하기를 기다렸다가 사면을 포위하여 공격케 할 것이며, 한편으로는 산동·산서지방의 군사들을 출동시켜 그 배후를 공격함으로써 수륙 양면에서 주야로 쳐부순다면 풍신수길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宣祖修正實錄≫권 25, 선조 24년 5월).

그가 미리 조선을 공격한 다음 그곳에서 일본군을 쳐부셔야 한다고 역설했던 까닭은 조선측이 일본군의 선봉이 되어 征明戰에 뛰어들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의혹은 당시 명나라 조정에 크게 팽배되어 있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선조 24년(1591)에 조선측 통신사 일행이 가져 온 풍신수길의 書契에, “대명국을 정벌하여 그 나라에 우리의 풍속을 심어놓고자 하는 데 그 때 귀국이 先驅가 되어 入朝한다면 우환이 없을 것”061)≪宣祖修正實錄≫권 25, 선조 24년 3월.이라 하여 조선의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은 예를 통해서도 그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선조 24년 8월에 유구로부터 명에 전달된 통보에 다시 일본이 入 寇하려 한다는 점과 조선이 그 향도가 될 것이란 사실이 전해지자 명나라 조정은 遼東都司에 명하여 조선에 咨文을 보내 倭情을 탐문케 하였다. 이 때 조선에서는 聖節使 金應南·陳秦使 韓應寅 등을 잇따라 명에 파견하여 왜정을 통보함과 동시에 조선측이 일본과 결부되어 향도가 된다는 소문이 허위임을 변명하였다.062) 崔永禧,<壬辰倭亂中의 對明事大에 對하여>(≪史學硏究≫18, 韓國史學會, 1964), 422쪽.

어떻든 명에서는 임진왜란 전년부터 조선측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면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그 방어책에 부심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자기 나라가 안전해지려면 반드시 조선을 지켜야 한다고 보았으며, 일본군이 조선 경내에 쳐들어올 경우 그 병화가 곧 바로 그들에게 미쳐올 것이란 점에 대해서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명은 일본군이 해륙 양면의 어느 쪽에서 조선을 공격해 오든지 간에 전쟁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 한 자신들에게 파급될 것을 분명히 예측하였다. 육상으로는 적이 북상 침공로를 잡아 한성-평양-압록강-요동-북경으로 진출할 것으로 예상하여 평양에 자체 방어선을 쳐야 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적이 주 공격로를 해상으로 잡아 전라도를 통해 쳐들어올 때에는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될 것으로 우려하였다. 당시 중국인들은 전라도의 위치를 산동의 對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까닭에 서해 해상의 수로로 진출할 경우 곧장 북경방면의 수도권에 밀어닥쳐 걷잡을 수 없이 위급한 지경에 빠져들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063) 崔韶子, 앞의 글, 70∼72쪽.

이같은 분위기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처음부터 조선측의 동정을 살피는 데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 임란 전에 무성했던 향도설이 완전히 불식되지 못한 데에도 그 원인이 있었지만, 일본군의 침략전쟁이 개시된 지 20일도 지나지 않아 수도를 빼앗긴 채 西幸을 재촉한 선조 일행의 행동을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란이 일어난 직후 조선정부에서 遼鎭에 자문을 보내 變報를 전한 후 수차에 걸쳐 요동과 明京에 구원사절을 파견하여 거듭 원병을 요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명측은 여기에 쉽게 응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사태를 관망하는 가운데 조선이 과연 일본군의 길잡이가 될 것인지 여부를 탐지해 가고 평양의 선조가 진짜 왕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등 조선측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差官을 보낸 것이 한 두차례가 아니었다.064) 李肯翊,≪燃黎室記述≫권 16, 宣祖朝故事本末 求救明朝收復京城.
≪宣祖實錄≫권 28, 선조 25년 7월 무오 참조.

그러나 결국 조선의 향도설이 허구임을 알게 되자 명에서는 조선에 대한 인식을 바꿔 “천자를 위해 나라와 집을 잃고 허다한 백성들이 모두 도륙을 당한 다음 한쪽 모퉁이에 피해와서 고초를 겪으면서도 오히려 변함없다”065)≪宣祖實錄≫권 28, 선조 25년 7월 무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비록 한 明使의 발언이긴 하지만, 천자를 위해 조선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표현 자체는 곧 일본의 침략목표가 조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명에 있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조선측에 대한 오해가 서서히 풀리면서 명의 태도는 점차 바뀌기 시작했고 6월 중순에 소서행장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된 것을 계기로 큰 변화가 나타났다. 평양성이 함락된 직후 선조의 渡遼內附案이 요동의 寬奠堡에 전해진 다음부터 명은 종래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조선에 파병하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였다. 즉 평양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들의 문안 마당에 적이 쳐들어온 것과 다름없다는 점에서 사태의 긴박감을 감지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신속히 군사를 파견하는 것만이 전쟁을 국내로 확대시키지 않는 최선책이라고 보았으며, 화근을 불러올 수도 있을 선조의 內附를 저지하기 위한 방안 역시 파병뿐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7월에 들어서 명의 神宗이, “마땅히 원병을 보낼 것이니 그 나라 대신을 宣諭하여 그들로 하여금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지키게 하라”066)≪明神宗實錄≫권 250, 만력 20년 7월 을미.고 한 諭旨와 함께 마침내 명의 출병이 실현되었다.

7월에 파견된 명군은 중앙군이 아니라 遼東廣寧鎭守總兵官 楊詔勳 휘하의 요동지방 수비군이었다. 6월 중에도 遼鎭軍의 파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본군과의 정면전쟁을 목적으로 출병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7월 10일 경 압록강을 건너온 요동군은 副總兵 祖承訓, 遊擊 史儒와 王守官 그리고 千 摠 馬世隆 등이 거느린 약 3,500명의 병력이었다. 이들이 조선땅에 당도하였을 때는 날마다 비가 내려 도로가 진탕으로 되어 있었는데, 의주행재소에서는 이들의 작전을 돕기 위에 산천에 祈晴祭를 지내는 등067)≪宣祖實錄≫권 28, 선조 25년 7월 기사. 여기에 건 기대가 대단하였다. 그러나 조승훈의 지휘하에 무모하게 시도된 평양진공작전의 실패로 말미암아 조선측은 물론 명측이 받은 충격 또한 작지 않았다. 평양패전의 결과는 명측의 위기의식을 한층 고조시켰고, 이로 인하여 7·8월에 들어서 우선 산동·요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해안지방의 방어를 더욱 굳건히 하는 한편, 조선에 파병해야 할 東征軍 역시 대규모의 정예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명은 8월 중 兵部右侍郎 宋應昌에게 經略防海備倭軍務를 겸임케 한 다음 9월초 行人司行人 薛藩을 조선에 칙사로 파견하여 대군을 일으켜 파병할 것을 알려왔다. 그 후 3개월이 훨씬 지난 뒤에야 명군이 파견되었지만 李如松이 이끄는 4만여 대군이 출전함으로써 평양성을 탈환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명이 군사를 보낸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칙사 설번이 자국의 병부에 보낸 자문 내용에 대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그는 조선에 와서 전쟁 실태와 현지의 지세를 살핀 다음 본국에 보낸 글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사세를 돌아보건대 걱정거리는 조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의 강역에 있으며 어리석은 본인이 심려하는 바는 강역에만 그치지 않고 내지까지 진동될 것이 두렵다. 그러니 군사를 동원하여 토적하는 일을 한 순간인들 늦출 수 있겠는가. 대저 遼鎭은 京師의 팔과 같고 조선은 요진의 울타리와 다름이 없다. 永平은 畿輔의 요충이며 天津은 또 경사의 門庭이다. 2백년 이래 福建·浙江地方이 항상 倭患을 당하면서도 遼陽과 천진에 그 화가 미치지 않았던 것은 조선이 바로 그 울타리가 되어 막아주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 혹자는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 가서 치면 그들의 침략만을 속히 불러올 뿐이다”라고 하지만 본인의 생각으로는 정벌을 해도 올 것이고 하지 않아도 올 것이며, 정벌을 할 경우에는 평양의 동쪽에서 견제할 수 있으므로 그들의 침략을 더디게 하여 禍를 줄일 수 있지만 정벌하지 않을 경우에는 평양의 외곽으로부터 그들의 뜻대로 행동할 수 있으므로 빨리 쳐들어오게 될 것이며 화도 그만큼 커질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빨리 적을 치면 우리가 조선의 힘을 빌릴 수 있지만, 늦게 치면 왜적들이 조선사람들을 거느려 우리와 적을 삼게 할 것이므로 본인으로서는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토벌하는 일에 조금도 시간을 늦춰서는 안될 것으로 여겨진다(≪宣祖修正實錄≫권 26, 선조 25년 9월).

위의 자문에서 설번은 明帝의 칙사답게 명의 입장에서 조선과의 군사지리적 관계를 설득력 있게 개진한 다음, 명이 조선에 군사를 파병하든 하지 않든간에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명으로서는, 언제 적이 그들 경내에 쳐들어올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적의 세력이 평양으로부터 서쪽으로 확산되기 전에 급히 대병을 파견하여 미리 공격하는 것만이 최상책임을 강조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명이 곧 조선의 힘을 빌릴 수 있다고 본 그의 판단은 정확했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 역시 이 부분이다. 즉 명의 참전은 외면상 조선측의 청원에 의한 구원의 성격을 띤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오히려 조선의 힘을 빌려 명을 지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것은 칙사 설번이 자문의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사세의 본질이 조선의 문제가 아니라 명의 문제라고 역설한 점에서도 입증된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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