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러지 못했을까 그때 꺾었다면 시들었어도 나의 것

그 말을 마치자마자 콜린은 갑작스레 입을 뻐끔뻐끔 말을 잇지 못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건물에서 반쯤 가려져 들어오는 하얀 달빛에도 여실히 콜린의 창백한 뺨이 어느샌가 붉어지고 도드라진 동그란 귀도 새빨개졌다. 콜린? 아서가 불러도 콜린은 침대에서 나체로 달려나가 화장실로 가 문 잠그고 숨어버렸다. 잠긴 손잡이를 억지로 열려들며 아서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콜린은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후로 콜린은 전처럼 아서의 과거 이야기도 들어주고, 카페로 놀러 온 기사들의 얘기도 들어주며 아서를 대하려 하는게 눈에 보였지만 은근히 주제를 바꾸려고 했다. 게다가 멀린의 멀자만 나와도 눈이 빼죽 올라간다. 눈치라고는 완전 F인 아서마저도 콜린이 질투라는 감정을 스스로 어색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질투를 안하려고 해봐도 그게 제 맘대로 억제가 되지 않자 스스로 분통이 터지나보다. 아서가 일부러 므얼린-부르자 콜린이 아서에게 뭔가 한소리 하려고 하다가도 씨발-욕을 지껄이며 방으로 들어가 대뜸 문부터 잠갔다. 아서는 숨소리마저 죽이며 문에 귀를 갖다댔다. 발을 쿵쿵 구르고 베개에 주먹질을 하는지 투닥투닥하는 소리가 들린다. "...친구였대잖아." 작게나마 들리는 목소리에 아서는 문앞에서 웃음을 참으며 굴렀다. 질투하는 콜린, 생각보다 귀엽다.

-혹시말이죠. 콜린이 멀린의 후손쯤 되는 관계가 아닐까요? 그래서 그렇게 닮은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판박이처럼 닮아서 이상하기는 하지만요.

퍼시벌의 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멀린이라고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낳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나. 아서는 콜린에게 혹시 네 부모님, 아니 직계든 방계든 혹시 마법사 비슷한 사람이라도 있지 않을까? 묻고 싶었다. 모르겠으면 어디 물어볼 사람이라도 있느냐고도. 하지만 요새 콜린은 아서의 과거에 관련된 얘기를 불편해 했기에 아서는 간략하게 기사들 중 한 명을 만났다는 말 외에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서는 우유가 든 머그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이런 대화는 어렵기만하다. 자꾸 이름만 부를 뿐 시덥지 않은 얘기만 하는 아서를 보며 콜린은 그냥 말하라며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음, 괜찮다면말야 네 부모님에 대해서 묻고 싶은데."

"멀린이 내 부모님이나 증조부 혹은 조상들 중 한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거야?"

"어떻게 알았어?"

"그냥 생각났어. 어쨌든 결론만 말하자면, 난 몰라. 난 고아였고, 고아원 기록 뒤지면 나오겠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그냥 지하철 의자에 버러져 있었대. 그리고 18년이 지나도록 부모님이라고 추정되는 사람 한 명도 안찾아왔고 나는 그대로 고아원에서 나와 그나마 잘하는 컴퓨터로 먹고 살게 된 거고. 그게 다야."

"....아, 미안."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아서. 솔직히 나는 감정자체가 조금 결여되어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런 쪽에. 부모님 안계셔서 한 번도 슬프거나 비참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고, 너...외에는 친구관계로도 하루 이상 만나 본 적도 없고. 한 회사에 진득히 붙어 있어본 적도 없어. 프리랜서가 편하고, 일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고. 돈없으면 굶고, 있어도 이걸 모아서 부자가 되고싶다는 생각도 없어, 정말. 난 그래. 뭐 하나에 집착하거나 가지고 싶다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음, 그런 것 같아. 난 뭘 갖고 싶다고 간절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나 참 이상한 것 같아.

아서는 잠시 침묵했다. 처음에는 저와 비슷하다 생각했다. 콜린만큼은 아니지만 아서 역시도 무언갈 간절하게 갖고 싶다는 물욕이 그다지 크지 않았기에. 그치만 '이건 다른거라구 멍청한 왕자님아.'하는 멀린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야 왕자님이며, 왕이지. 당연히 다 가졌고 가질 수 있으니까 욕심이 없는 거야. 가질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애초에 포기하는 거랑 달라.'

아서는 콜린을 만났던 첫날을 아침을 생각했다. 지저분하고 작은 집. 콜린은 자신이 아서왕이라고 주장하는 허황된 말을 곧이 믿지는 않았지만 헛소리라고 말하는 대신 그냥 받아들였다. 아서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살게 내버려두었다. 돈을 훔친다거나 콜린에게 해를 가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것따위는 상관 없이. 나가든 말든 상관없었고, 생활비를 내든 말든 상관없어 했다. 집으로 들어 온 길고양이나 다름없이 대했다. 먹이를 준다해도 언제든 자신이 원할 땐 떠나리란 걸 아는 사람처럼 그다지 정을 주지도 않았다. 키스, 애무, 섹스. 신체적접촉이 과연 친밀한 행동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너무 외로워서 했던 최소한의 언어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냥 너의 몸만 원했다, 다른 건 필요없다는 자기방어. 하지만 그 이상은 두려워 말하지 못하고 살갗만 맞비비며 상대방이 제 외로움을 알아주길 바라는 속내. 

아서는 이제서야 콜린이 천애고아였으며 친구조차 없다는 걸 이제서야 알았다. 함께 산 지는 4개월 가까이 되어가고 사귄지는 100일이 되어가는데도 콜린은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어떻게 해달라 주장한 건 유일했다. 사랑해달라, 떠나지 말아달라. 그 외에는 그냥 받아들일 뿐이다. 

콜린이 질투라는 감정에 어색해 했던 게 이해되었다. 누군가를 절실하게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으니 질투라는 감정 역시도 처음 겪었겠지. 일부러 질투를 유밣하고 싶어 멀린으로 부른게 미안해졌다. 그리고 이전에 그웬의 이름을 무심결에 부른게 미안해졌다. 그냥, 다 미안해졌다.

"나는, 음, 아무렇지 않아. 정말이야. 너처럼 죽다 살아난 것보단 낫지. 크큭, 안 그래?"

어느새 울고 있었는지 콜린은 뺨위의 눈물을 재빨리 훔치고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샤워를 하는지 물소리가 한참동안 들렸다.

-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주문을 하기 위해 서있는 여자는 추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따뜻한 실내에 발개진 뺨을  마른 손으로 비비며 말을 못 이었다. 당황하면 뺨을 비비고 손을 맞잡던 습관, 그대로다. 아서는 그 길던 머리칼 어쨌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미소도 따뜻한 눈빛도 그대로다. 기억에 남아있는 그대로.

"그웬. 정말, 너야?"

"맙소사. 신이시어."

아서는 그웬의 몸을 가득 끌어안았다. 

그웬은 영국에서 태어나고 초등학교까지는 여기서 마쳤지만 아버지께서 미국의 지부로 전근을 가셔야 했기에 그 이후는 미국에서 계속 생활했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연락을 하고 지냈기에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이 되면 매해 영국으로 되돌아오고는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여름, 비행기를 타고 오는 어느순간 갑자기 밀려드는 기억에 혼란스러워 한참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팠다고 했다. 그웬 역시도 다른 기사들처럼 과거 카멜롯의 기억들을 제대로 적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있던 자신의 동생 엘리안 역시 그웬과 같은 경험을 했으니까. 자신이 아서왕 전설 속의 여왕님이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겨울방학이 되고 다시 영국으로 들어와 자신의 기억을 확인하고 싶었다고 한다.

"매일 아침 검술훈련 대신 일요일 아침 축구를 하고 있어."

"정말? 역시 주장은 당신이겠지?"

"물론이지. 여기서도 가웨인은 말이 많고 퍼시벌은 힘으로 밀어붙이고 리온 경은 회계로 골치가 아프지. 물론 당신처럼 지금의 이름이 있지만 서로는 기사였을적 이름을 더 익숙해 해. 너도 엔젤보다는,"

"그웬이라고 부르는 게 나아. 그게 내 이름이니까, 아서. 그럼 멀린은 뭐해? 응원하고 있나?"

"멀린은, 그게..."

아서는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말했다. 자신은 너와 다른 기사들과 달리 현재의 기억이란 것이 없이 아서왕이었을 때 기억만 남아있다고. 반면에 콜린은 멀린이었을 때 기억 없이 현재의 기억만 남아있어 자신도 기사들 중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또한...

"우리 지금 사귀고 있어, 멀린이랑 나랑. 음, 같이 살고 있지."

"호오."

"호오? 그게 다야?"

"그럼 왜 나를 두고 바람피냐고 머리끄덩이라도 잡을 줄 알았어?"

그웬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옛날이잖아, 기억뿐이라고 아서. 나도 사랑하는 남자친구도 있어. 그리고 멀린이랑 그렇게 된게 마냥 이상하게 들리지만은 않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 이야기를. 나는, 당신의 연인이었고 당신의 아내였기도 하지만 더 긴 시간을 카멜롯의 여왕으로 지냈어. 당신이 짊어지고 있었던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지고 나라를 통치하기란 내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 멀린이 곁에서 도와주고 지켜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왕이 되었을는지도 몰라. 정말이지 고마웠어. 

그리고 항상 멀린에게 미안했어. 당신을 잃고 나는 슬퍼하는게 당연했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먼저 떠난 당신을 원망이라도 했는데 멀린은 항상 나를 위로할 뿐 그냥 웃더라. 지켜주지 못했다고 미안해 하더라. 되려 나한테. 외로워보였어. 그 누구에게도 마음주지 못하고 슬프다는 말도 못하는 멀린이 가여웠어. 가이우스도 돌아가시고 정말이지 혼자가 된 멀린은 늙지도 죽지도 않은 불멸불사가 되었는데 나는 늙어가고 기사들은 하나둘씩 노환으로 죽고. 기어이 멀린 혼자만 남으면 어떡하나 싶어 나는 어쩔땐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걱정하는데 멀린은 그냥 괜찮다고만 해. 괜찮다고. 

그리고...나는 수많은 드루이드와 예언자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지. 당신과 멀린이 운명으로 이어진 존재란 것을. 우정, 사랑, 충성? 이런 단어로 형용할 수 없는 그 이상이란 걸 알았기에 언젠가 당신이 다시 태어나 멀린을 외롭지 않게 함께해 주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신께 빌었지. 

"후아. 정말 이 얘기를 천 년 전에 당신에게 하고 싶었는데. 드디어 내 소망이 이루어진거야. 멀린은 행복해 해?"

"그렇게 만들어 주고 싶어."

"그럼 됐어. 어떻게 당신 일하는 중이었잖아!"

"매니저가 내 얼굴을 퍽 마음에 들어 하거든. 그리고 가웨인과 거의 그런 분위기라 나한테 잘보이고 싶어 해."

"정말 못말려."

그웬은 테이블 위 쟁반에 차곡차곡 컵을 정리하고 행주로 훔치기까지 했다. 이런 걸 아서 네가 한다니. 또다시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나중에 기사들과 멀린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여민 그웬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대신 아서는 그녀의 손등에 입맞추었다.

"행복해?"

아서는 물었다. 콜린은 무슨 생뚱맞은 질문이냐는 듯이 안경너머로 아서를 보았다. 컴퓨터 앞 의자에 앉은 콜린을 질질 끌고와 소파 위로 끌고오니 밤새도록 일하느라 충혈된 눈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하나도 안 행복해. 끔찍해. 무슨 프로그래밍을 거지같이 해놔서..."

"나랑 함께하는 게 행복하냐고."

"너도 거지같아. 카페에서 일하면서 커피는 너무 쓰고 청소도 안하고 빨래도 안해. 옷 취향은 또 까탈스러워서 비싼 옷 아니면 눈에도 안주고 그냥 대충 입으면 안돼? 오늘 그렇게 아웃렛 몇 바퀴나 돌았어야 했어? 진짜 짜증나, 너. 혼자 옷사러 가면 될 거 나를 꼭 끌고가고 말야. 살려고 하는 것마다 다 트집이고. 내 옷은 하나도 안 사주고. 덕택에 나 오늘 또 밤새야 한다고!"

"흐음, 행복하다는 얘기네."

"다음부터 어디 갈때 나 놔두고 가. 꼭 콜린, 콜린, 멍멍이 이름처럼 불러대며 나 데리고 나가려 하지 말고. 놔, 이거. 저거 내일까지 해야해."

콜린은 의자를 다시 컴퓨터 앞으로 옮긴 후 등을 구부렇게 말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서는 자세 나쁘다고 허리를 곧게 펴게 한 뒤 목덜미에 입맞춘 뒤 부엌으로 들어갔다. 콜린이 말하는 쓰디쓴 커피를 만들어 주기 위해.

-

란슬롯을 만난건 그웬과 만났던 이틀 후였다. 다른 기사들과 달리 미안함 반, 어색함 반으로 란슬롯과 악수를 한 뒤 간단한 대화와 연락처를 나눈 뒤 헤어졌었다. 일요일 아침 축구화를 신고 만나자고. 그 말에 란슬롯은 크게 웃었다. 그런데 일요일 아침까지는 이틀 남았는데 란슬롯이 거의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아이폰으로 전화를 하더니 혹시 카페에 계십니까? 물었다.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에 오후근무이지만 조금 이르게 출근하였다. 이미 란슬롯은 카페에 앉아있었다. 불안하게 손을 맞잡으며.

"저, 오늘 멀린과 닮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서는 대답없이 그저 의자에 앉았다. 솔직히 란슬롯은 멀린을 만나지 말길 바랐다. 그래서 어물쩡 다른 기사들도 만났다는 얘기를 했지만 구체적으로 멀린과 만났다는, 그리고 사귀고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말하지 않았을뿐.

"흠, 그래? 어디서?"

"이 근처에서 길가다가 우연히 봤는데, 정말 멀린인 것 같아 뒤쫓아가봤지만 놓치고 말았네요. 혹시 전하께서는 못 보셨습니까?"

"나는, 음, 비슷한 사람을 알고있긴 해. 하지만 멀린이 아니라고 하더군."

란슬롯을 처음 만났을 때, 콜린의 얘기를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콜린이 란슬롯을 만나게 된다면 옛날처럼 그와 가장 친한친구처럼 지낼 거라고 생각하니 뒷골이 저릿해지는 기분이었기 때문에. 예전에도 란슬롯과 멀린이 가장 친한 친구사이인 양 자신만 쏙빼고 둘이 속닥거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연인인 지금 란슬롯과 콜린이 그런다고 생각하면...아서는 곧 밝혀질 진실이었지만 죄책감따위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는 맹세를 했습니다. 멀린과의 비밀을 영원히 지켜주기로. 하지만, 계속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멀린이 우리 모두를 살려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말이죠."

"왜 그런 생각을 했지?"

"멀린은 마법사였습니다, 전하. 그 힘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만큼 위대했지요. 전설상 대마법사 멀린은 전혀 허구가 아닙니다. 아서께서 모르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기 주저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깐요. 마법으로 멀린은 저희들을 살려냈고 당신을 살려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마법사인 자신의 정체가 들킬까 꼭꼭 숨어버린 것 같구요. 저는 자신의 정체를 말하지 못해 슬퍼하는 그를 지켜봐왔기에 당신이 혹시 말하지 못한 멀린을 책하려 하신다면,"

"그런 거라면 걱정 안해도 돼. 알고 있으니까."

"결국 제가 죽은 이후로 멀린이 전하께 다 말씀 드렸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괜한 걱정하지 말라고 멀린에게 말했지만 그냥 웃더니...멀린은 당신에게만큼은 분명, 나타날 겁니다. 멀린은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으니깐요. 멀린이 나타난다면 제게 알려주십사 부탁드립니다. 언제나 멀린에게 제 죽음에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는 말을 하고싶었거든요."

아서를 대신해 죽으려는 멀린을 대신해 죽은 란슬롯의 이야길 듣고 아서는 한동안 멍해졌다. 구체적 사정은 몰랐으니깐. 멀린이 란슬롯의 죽음 이후 그렇게 상심했던게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밖에도 란슬롯이 아는 여러 이야기들. 아서를 뒤에서 끊임없이 마법으로 지켜주었던 멀린의 이야기는 막연히 짐작했던 것들이 구체적으로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걸 왜 자기한테 얘기하지 못했나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세상제일가는멍청이. 멍청한 시종 멀린.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기분이 나빠졌다. 아서는 의자를 정리하다 벽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가이우스 외에 멀린이 마법사인 걸 아는 사람은 자신이 가장 먼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란슬롯이, 먼저였다.

이해는 했다. 자신은 카멜롯의 왕자였고 왕이었다. 법을 수호하기로 맹세를 하였고 멀린이 마법사란 걸 아는 이상 멀린을 재판대에 세워야 하나 고민을 했겠지. 멀린이 말했던대로, 분명 자신은 멀린이 마법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택의 기로에 처했을 것이다. 혹은, 마법사인 걸 숨기기 위해 마음고생을 했겠지. 그걸 고생으로 생각지 않더라도 멀린 입장에서는 아서를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라 생각했다. 아서는 십분 멀린의 입장을 이해했다. 안다. 머리는.

가슴은 자꾸만 뜨겁고 답답하다. 화가난다. 왜? 왜 자신이 먼저가 아닐까. 고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왜 자신이 먼저가 아닌 란슬롯이었을까. 다 안다는 눈빛으로 바라봐주고 마법으로 적들을 물리치고 난 뒤 잘했다고 훌륭하다고 칭찬해주고 추켜세워주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란슬롯이었을까. 왜 철저히 섬기고 지켜줘야할 시종의 입장에 머무른 채 마땅히 들었어야 할 인정을 왜 란슬롯에게 받았을까. 동료라 생각했는데, 친우라 생각했는데. 

란슬롯은 네 운명이 아니잖아, 멀린. 나라고. 나잖아.

자꾸 멀린에게는 애처럼 떼쓰게 될까. 아버지에게도 한 번도 어리광을 부린 적 없는데 멀린에게는 네가 가진 모든걸 나에게 달라고 우선으로 해달라고 조르고 보채는 건지. 자꾸 애처럼 굴게 되는 건지.

"나 원래 이런 남자 아닌데. 완전 망가졌다."

아서는 의자를 테이블 아래로 밀어넣고 한숨을 쉬었다.

사람의 화라는 게 그렇게 한순간에 사그라드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늦는다는 문자를 보낸 후 한참을 밖에서 배회하다 좀 진정되었다 생각되어 집으로 들어왔더니 멀린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콜린의 얼굴을 보니 당장 따지고 싶은 기분이 울컥 들었다. 그래도 멀린이 아니니까 참으려해도 태도와 말투는 자꾸만 퉁명스럽게 나가기 일쑤였다. 저녁 먹었어? 추운데 왜 밖에 돌아다니고 그래. 어서 씻고 와. 뭐하다가 이제 왔어? 너무나 일상적인 질문인데 목소리 듣는 것도 싫어지고. 자꾸만 표정이 무섭게 변하니 콜린 역시도 표정이 딱딱해진다.

"왜 이래? 왜 그러는 데 아서. 무슨 일 있어?"

"그냥 오늘 아무것도 안 물어보면 안돼?"

"...그럴게."

따지고 싶은 대상이 바로 옆에 있는데 말도 못하고 꾹꾹 참는 건 아서의 성격상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콜린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어깨를 흔들며  왜 나한테 먼저 말 안했냐고 따져묻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치밀었다.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한숨만 쉬니 안되겠는지 콜린이 이불을 걷어냈다. 얘기 좀 해. 콜린은 자신에게 화가 났다라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사람 눈치보게 만들지 말고 말해."

"너 아니야."

"그럼 멀린이야?"

"맞아. 그러니까 그냥 자면 안돼? 지금만 지나면 다 괜찮아질 것 같으니까, 제발."

"그냥 말해."

"왜, 나한테 먼저...! 아냐. 네가 안그랬어. 넌 콜린이잖아. 멀린이 아니니까 이런 말 들어야 할 필요 없어. 미안. 내가, 그냥 멀린이 내가 먼저가 아니었다는게 화가 나서 그랬어. 난 걔 비밀 안게 고작 이틀만이었다고. 이틀. 고작 이틀. 뭐 어찌할 새도 없이 난 죽어버렸어. 해주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는데. 고맙다는 말, 고맙다는 눈빛이라도 다. 그런데 그런 거 먼저 해버렸대. 란슬롯이라는 친구랑. 비밀을 죽을 때까지 지켜주고 뒤에서 인정해주고 추켜세워주고 그런 거 둘이서 먼저 했대. 알아, 나 진짜 찌질이 같이 구는 거. 그니까 제발, 나 그만 병신되지 않게 그만 건드려. 조금만 더 하면 너한테 화낼 것 같아."

"그게 뭐가 중요한데. 누구한테 비밀을 먼저 말했든 지간에,"

"멀린은 내 운명이야! 누구보다 내가 우선이어야 한다고!!"

멀린일까 콜린일까. 아서의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멀린이나 콜린이나 같은 사람인데, 콜린은 아니라 부정했다. 지금의 말은 무엇으로 들릴까. 네가 운명이라는 말로 들리지 않는건 확실하다. 자신이 콜린을 두고 운명이라 지칭하지 않은 것쯤은. 사랑일까, 우정일까. 그런 것은 이미 초월한 존재 그 자체였다, 멀린은. 이름을 무엇이라고 붙일지라도 적절한 말은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멀린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남자가 상처입은 표정으로 아서의 눈앞에 망연하게 앉아있을 따름이다.

"오늘은 여기서 자. 내가, 내가 소파로 가서 잘게."

"콜린, 내가..."

"그만하자. 그만, 내일 얘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