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메시아적 극단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리스도는 삶을 발명한다”!
바디우의 <사도 바울>에 나오는 문장이다. 물론 이 역학점 에서의 그리스도는 언어와 그리스적 이성의 인식의 맨틀을 뚫고 들어오는 어떤 충격으로서의 ‘도래’를 상징하는 그 무엇이다. 이 도래적 충격을 통해서 비로소 삶은 유한의 제한된 시공에서 영원이라고 하는 무한적 전망에 발화된 전격적인 의미의 윤리적 우주를 만난다. 한편, 키엘케고르는 이 행복한 경험을 ‘순간’이라는 비언어적 언어로 호명하고 있는데 이 ‘순간’의 경험으로 인간은 ‘인식’의 “맹목적인”(역시 바디우의 표현이다)‘---이다’라고 하는 서술과 규칙 언어를 탈구하여 역사와 영원이 만나는 행복의 지평을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독자들은 바로 이 도래적 지점과 근본적으로 연관이 있는 아감벤의 메시아니즘을 일단 인식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일말의 어려움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 어려움은 이‘순간’이라는 용어를 둘러 싼 그 무엇들이 어떤 개념이 아니라 기독교적 체험에 관계된 좀 특수한 범주의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키엘케고르의 방식으로 우회하면 그 체험은 해석학적 인식으로 공유될 수 있는 방식에서는 좀 벗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키엘케고르가 볼 때는 “영원한 것과 역사적인 것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한 역사적인 것은 다만 기연에 지나지 않는다.” 막연히 수평적으로 공간의 표면위로 흐르는 기계적 시간과 그 시간을 나름대로 포획하고 체계화하려는 관념적 세계로서의 인식론적‘역사’는 충분히 인격적인 시간이 아닌, ‘나’아닌 소외된, ‘나’의 외항에 무심한 간격을 가진 객관적으로 산포된 채 잔혹하게 발전하는 관념, 외적 시간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도덕적 중력과 가치범주에 의해 재단되고 주물화 된다고 하더라도 그 주형의 시간은 문자 그대로 관념적인 체계로서 나의 참여가 온전히 투사될 수 없는 건조한 거리의 시간이다. 그 동공화된 비 중력 지대는 나를 둘러 포위하고 끊임없이 나를 유실시키고 있지만 나의 존재의 힘과 그 의미로 포획될 수 없는 지나치게 공공적이거나 주체적 힘으로 가로지를 수 없는 비인격적으로 단절되고 분절되는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거대유실 공간인 것이다. 이 영원의 신비가 박탈된 메마른 시간, 고도제한의 늪에 걸려있는 그 겨르롭고 권태한 절대적 유한의 고통을 과연 인간은 견뎌낼 수 있을까?

이 현세적 인식론적 시간은 그러므로 비 인식론적 시간, 의미 수행론적이고, 그 의미인 한에 행위수행적인 주체의 시간에 의해 역전되고, 충돌, 만나고 화해될 필요가 있다. ‘나’라고 하는 유한의 고도제한의 제약을 가지고서도 나를 초월하여 연장되고 펼쳐지는 현세적 외적 시간을 의미화 시키고 존재의 힘으로 포월해 내고 ‘나’의 인격적 의미와 전망으로 투과시켜 낼 수 있는 기적 같은 ‘기술’사유형식, 가치의 전환점은 그렇다면 이 세계 내에서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것이 만일 가능하고 그것이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면 그러면 그 사유형식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고 향유될 수 있을까?

아감벤은 과감히 이 질문에, 이 지점에 메시아니즘, 즉 ‘남겨진 시간’이라는 특이한 시간관을 들고 나온다. 바울의 ‘---이 아닌 것처럼’의 그 절묘한 단절과 역설적 화해, 균형을 가로지르는 황금분할적 가치적 시각과 그 패러다임이 인간의 의식 속에서 작동되는 비/언어적 방식이라고 하는 바울의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메시아적 극단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 바울의 메시아니즘, 더 정확히는 아감벤의 메시아니즘, 그 남겨진 시간은 그러면 어떤 시간인가? 우선 이해를 우회하여 메시아적 시간이 아닌 반 메시아적 시간을 먼저 체크해 보는 손쉬운 편을 택해 그 시간을 반사해 보자.

먼저 전술된 바와 같이 인격적 의미와 충만으로 중력화 되지 못한 기계적이거나 인식론적 시간은 메시안적 시간이 아니다. 그냥 간단히 아감벤의 이런 문장을 옮겨 본다.

“‘시간’을 계산하는 시계에 사용되고 있는 것과 같은 현세적 시간은 ‘Jetzt-Zeit'라고 부르자.---Jetzt-Zeit에 있어서는 황홀하고 수평적인 시간성이 감추어지고 평준화 되어 버린다. 벤야민은 이 부정적인 함의를 뒤집어 그 단어에 호 뉸 카이로스 ho nyn kairos가 바울로가 지니고 있는 것과 동일한 메시안적 시간의 패러다임이라는 성격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다.”(235.)

역사 자체에 궁극의 절대의 권위를 부여, 역사와 영원을 역사내적 시간에 종합, 일치시키려는 급진적 마르크스주의자의 혁명적 시간도 메시아적 시간이 아니다. 아감벤에 의하면 무력한 권태의 시간에 반하여 세계내적 목적을 가지고 자극적 충동을 추동하는 계급투쟁적 시간은 마르크스 자체를 향해서도 최악의 오독일 뿐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남겨진 시간의 의미는 아니다.(60.)

이와 연동하여 지젝의 시간도 충분한 메시아적 시간은 아니다.(메시아니즘과 관련이 있는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는 <남겨진 시간> 의 3년 후인 2003년도에 출간된 것으로 그 책의 내용은 아감벤에 대한 일말의 비평도 담고 있다. 여기서는 아감벤의 관점으로 많은물소리가 그를 역으로 독해해 보는 일말의 기획을 포함한다. 이 기획에는 물론 많은물소리의 이해와 관점도 반영되어 있다.)

아감벤의 역설적 시간은“---이 아닌 것처럼”이라는 언표가 말해주듯 역사에 대해 일말의 유예와 공간적 거리를 우선 설정한다. (그럼으로써 그 다음의 연속적인 역설을 통해 영원과의 행위수행적인 참여를 좁히며 더 큰 책임의 현재를 노린다.) 신과의 역설적 관계에서 그 거리가 우선 왜 설정되며 그 거리를 통해 무슨 의식적 변동이 작동될 수 있는가? 아감벤의 ‘거리’는 역시 어떤 인식론적 시간, 관조의 유예공간은 아니다. 그 거리는 신의 주권적 넘침과 은총이 발생, 그 이월의 힘으로 존재의 변화와 감격이 생성, 호환되는 신적 공간이 ‘순간’으로 체험되는 소중한 충돌의 후속공간이다. 그 신의 존재와 유한의 존재가 충돌하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틀리며 호환되는 가운데 유한한 인간은 더욱 유한하다고 하는 존재의 한계적 저층을 자각하고 동전의 양면처럼 배면에 배착되어 있는 신의 영광을 투과하고서는 양면으로 동시에 자신의 존재감에 대하여 신적인 신성이 경험된 결과로 나타난 ‘거리’인 것이다. 인식론적 이해로 하면 하나의 관념적 관조로 읽혀 질 수 있지만 이처럼 인식을 초월한 초월적 인식으로 하면 그 거리는 ‘별것도 아닌’공간이 아니라‘많은 것’이 발생하고 일어나 뒤집힐 수 있는 역동적인 함의의 결과, 존재의 소유권이 재배치되는 거래공간인 것이다.

하면, 바로 이 지점, 아감벤의 ‘거리’가 어떤 인식론적인 대상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초월적 존재자가 교차된 특별한 의미의 장소로 읽히느냐의 차이는 신의 전능성에 대한 믿음. 즉 신관의 성격에 따라 달려 있다. 신의 신성을 인식하는 강도가 클수록 그 거리에서는 ‘특별하게 엄청난 것들이’이 발생하는 도래적 발화점의 후속공간으로 이해되고 그 강도가 약할수록 신의 역동성이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지점에서‘별로 생길 것이 없는’(인간의 주체적 책임이나 인식론적 긴장이 채워지는), 오성의 공간으로 읽혀 질 것이다.

어떤 메시아적 극단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전자 즉, 신의 신성이 경험되는 지점이 노리는 것은 물론 이 경우, 은총이라고 하는 초 인식론적 파토스의 생성점이다. 곧 바디우가 말하는 ‘넘침’의 숭고한 자리이다. 초월적 존재나 세계의 존재의 인격적 넘침의 능동적 힘으로 해서 인간은 수동성이라고 하는, 책임의 짐을 극복하는 어떤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데 이 의식의 역학적 좌표에서 그것이 정초되는 것이다. ‘나’보다도 더 초월적인 인격적인 거대 존재의 힘에 감격으로 압도되고 그 존재가 살아있는 힘으로 나를 가로지를 때 향후, 소명의 존재감격을 향유하게 되고 그 감격에 따라 자신에게 우연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역사적 자리에 대해서는 뒤집힌 소명의 자기감격을 자각적으로 체험, 이후 더욱 견고한 자기정체성을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곧 역사와 영원이 이렇게 해서 조우한다)

한편, 그러한 역학 장치에 의해 생산, 증폭되는 이 존재의 근원저층의 자산은 의식의 역동성을 투과하며 곧 역사내적 현실에 대해서도 개체존재를 그 충만한 의미의 존재감으로 자신의 역사적 공간에서 행위 수행적으로 더욱 의미 있게 밀어 올릴 것이다. 또한 이렇게 ‘새롭게’된 존재의 행위수행적 참여는 ‘나’란 존재가 그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전적으로 책임지고 소유할 수 있다고 하는 광범위한 자기 억압과 어떤 의식적 집착을 벗어나 그 모든 것을 향유하되, 눌릴 수 있는 ‘소유권’의 방식이 아니라 눌리지 않고 향유하되 더 큰 책임 의식을 일으키는‘사용권’, 곧 겸허의 자유를 경험하는 방식을 포함하며 그럼으로써 더욱 역사에 대한 참여적인 동인을 작동시킨다. 곧 ‘---이 아닌 것처럼’더 크게 존재한다는 아감벤의 역설은 기본적으로 이런 국면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보다 강하다”(76.)

이렇게만 보더라도 사실상,(의식역학적으로 읽는다면)아감벤의 시간과 그 유예적 거리를 이해하는 것은 우선 기본적으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근원적으로 작동시키는‘은총’이라고 하는 신적인 세계에 관계된 체험적 개념을 공유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은총이야말로 ‘---이 아닌 것처럼’의 역설을 작동시키는 살아있는 의식의 힘인 것이다.

그런데 이에 반해, 이런 역학구조망을 갖는 함의에 비해 지젝의 시간에서는 그 사유의 성격상 이 ‘은총’의 중핵적 파토스가 잘 보이지 않는다. 먼저 지젝의 신은 이렇게 은총과 ‘넘침’을 뿜어내는 존재의 힘이라기보다는 인간과 같이 결여와 결핍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인식론적 대상의, 확대된 그 무엇이다.

“우리 인간은 신의 도움에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우리가 신을 도와야 한다---창조개념 자체가 신의 자기 응축(Self-contraction)을 암시한다. 신이 우선 신 자신 속으로 물러나 자신의 전능함을 제약한 것은 ‘무’를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신은 먼저 ‘무’를 창조했고 이어 그로부터 세상을 창조했다. 세상을 창조함으로 세상에 자유를 준 것이고, 세상이 돌아가게 만든 것이고. 세상에 개입할 권한을 포기한 것이다”(<죽은 신을 위하여>,222.)

같은 ‘신성’에 대한 기술이라도 지젝의 신학 기제에서는 이와 같이 신성에 대한 감격이 인간화로 반환되고 있으며 그러한 자기 이유로 다시 신은 인간의 얼굴로 역전되는 방식으로 인지된다.(이런 전복의 방식으로 기독교의 내적 추동적 의식을 논리적으로 신학화하고 그 것으로 자신의 유물론적 기획의 기제의 근저로 삼고자 한다.) 인간이 신의 자기수축 공간에 기입되는 저러한 주체적 발동을 초청하는 신관의 방식에서는 아감벤이 말하고자 하는 그 ‘거리’의 전제적 조건인 존재의 감격이나 추동, 호환이 발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절대와 결여의 양층적 배합의 구도가 아니라 지젝식의, 결여와 (또 다른 역설로 반환된) 결여의 만남에서는 당연히 바울적 의미에서의 영원, 키엘케고르적 의미의 ‘순간’이 발생하는 그 조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와 영원의 만남이 아니라 역사와 (역사의 성격의 국면을 약간 상회하는 다른 형이상학적)또 다른 국면의 의식 장치와의 만남일 뿐이다. 존재의 감격이 발촉 되지 않는 그 만남에는 그러므로 오직 인간의 인식론적 투여와 책임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인데 지젝의 유물론적 의식의 자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기입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메시아적 극단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사건(바디우의)을 만드는 주체의 결단 없이는 사건도 없다.(사건의 시간이 무르익기를 기다린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진정한 혁명은, 언제나 절대적 ‘현재’-‘지금’이라는 무조건적 시급함-속에서 발생한다. 진정한 혁명에서는 예정론과 근원적 책임감이 겹쳐진다---오히려 행위를 향한 극단적 충동이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이제는 그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행위’의 결과를 끌어내야 한다-는 참을 수 없는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죽은 신을 위하여>, 219.강조는 지젝 스스로 한 것)

하여 아감벤의 탈각적‘거리’에 대해 “과도한 형식주의”라고 읽고 있는 지젝의 비평(지젝,175.)은 아감벤의 그것으로 볼 때는 일단 어긋나 보이고 또한 그 ‘거리’에 대해“메시아적 경험의 순수한 형식적 구조”라고 평한 부분, 그리고 그에 터하여 “아무런 내용도 들어 있지 않”다고 한 독해는 그가 기본적으로 사안을 자신의 유물론적 기획을 향하여 지나치게 인식론적 렌즈로만 보고 있다는 반증을 드러내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게 시각, 또 다른 유물론적 시간과 현실을 치열하게 기입하고자 하는 지젝에게 이런 문장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일까?

“사도 바울이 말하는 거리는, 세속적 정념의 무익함을 깨달은 초연한 관찰자가 취하는 거리가 아니라, 철저하게 관여하는 투사가 투쟁에 적절치 않은 구분들을 무시하는 데서 나오는 거리다.”(<죽은 신을 위하여>,233.) 같은 거리에서 아감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이와 같이 지젝에게는 그냥 중요하지 않는 인식론적 거리, 별로 의미 있는 그 무엇이 일어날 것이 없는, 오히려 인간 주체가 투입되는 무 중력적 지대로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위한 참을 수 없는 부담, 지금 ‘이 시간’에 대한 책임과 주체적 소유권이 강렬하게 투사되어야만 하는 과도한 긴장의 시간은 아감벤이 볼 때에는 역사와 영원이 행복하게 만나는 충분한 지점은 아니다. 아마도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이 <죽은 신을 위하여>보다 더 늦게 출간되어 그를 역으로 비평할 일이 있었어도 아감벤은 그러한 요지로 비평하지 않았을까? 그에게는 ‘넘침’의 존재의 감격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이런 유물론적 투사의 시간에 반해 한편, 일부 근본주의 기독교에서 보여지는 메시아 대망주의의 시간도 남겨진 시간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역사적 재림이라고 하는 그 종말의 초점에 함몰되면 또 한편의 소중한 남겨진 현실은 일직선으로 탈 역사적 조악에 빠져 버릴 것이므로 그것이 바울의 남겨진 시간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메시아적 시간과 종말론적 시간의 혼동”일 뿐이며 그럼으로써 그것은 “메시아적 고지에 대한 방심할 수 없는 오독”(107.)에 불과할 것이다.


어떤 메시아적 극단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이러하듯 아감벤의 시간은 이 모든 시간의 저 너머, 혹은 그 시간을 가로지르며 있다. 그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이미 그 시간은 앞의 반사경에 의해 어느 정도 분명해진 만큼 이제부터는 중복을 피하고 좀 더 편하게 반 메시아적 시간에 보완하여 그를 따라가 보자.

먼저, 그 시간은 존재의 권력욕구(소유권)가 기본적으로 탈각된 보다 존재론적 시간이다. 아감벤의 논리로 하면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의 혁명은 바로 이 존재의 소유권의 조정여하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인간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주체적 소유권을 주장할수록 자신과 모든 세계는 객관의 괴리감으로 밀려나 전적인 상실을 경험하게 되고 그 소유권을 부정하고 무화함으로써 자신과 세계를 모두 얻고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아감벤이 애써 언표 하고자 하는 모토는 바로 이와 같은 역설의 종교율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이전부터 있었던 메시아적인 사용과 소명이외의 것이 아니다”(52,53.)

잃음으로써 얻는다고 하는 이 상호호환의 거래관계는 물론 잃음으로써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전제를 가정하는 것이고 그 전제위의 더 큰, 어떤 것은 잘 보이지 않는 이성의 저 너머로 숨어 있는 초월적인 범주로 설정되는 것을 또한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초월은 인식론적 세계로는 보이지 않는데, 어쨌든 그 세계와 충돌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부르심’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아감벤은 바울이 자신의 편지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언급이 전무한 것을 주목하고 바울의 그리스도에 관한 인지를 재 기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특이한 인지, 즉 인간 예수가 아니라 초 역사적 권위의 “예수라는 구세주”로서의 인지를 이름이다. 바로 바울이 인지한 이 초역사적 권위와의 만남이‘부르심’이 발촉되는 자리인 것이다.

이 초역사적 권위와 역사적 유한의‘나’가 만날 때 (유한이 초월을 기입하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유한이 초 역사에 압도되어 오히려 그 초월적 세계로 기입되어 버린다. 그렇게 더 큰 의지에 기입되고 만 유한적 존재는 한편, 그 무한적 권위에 질식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포월하고 조망하는 권위를 가로지르며 자신의 유한함과 한계를 자각하게 되고 동시에 세계를 포월하는 그 시각을 비전하는 감격적 내면을 획득하게 되며 향후 새로운 세계성을 경험하게 된다. 무한을 투과하면서 자신의 존재성이 유한성에 대한 자각으로 깨어지는 한편, 그 역설적 가역성으로는 무한적 시각의, 존재의 신적 감격성을 획득하면서 인격적 힘에 의해 더 크게 증폭된 자기 정체성을 향유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의 신은 성능이 좋고 강력한 여과 장치와 같은 기능을 한다. 유한에 대한 각인과 기억만 통렬하게 남기고 존재를 신적인 차원으로 팽창시켜 배출시키는---)

이렇게 ‘무한’에 의해 투과될 때 인간은 비로소 가장 겸허한 저층의 자기 인식을 또한 향유로써 소유하게 되고, 그 낮은 겸허의 하한선에서는 또 상한의 신적 영광을 비전하며 그 반사되는 역광으로 또한 가장 상층의 무한적 존재의 영광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곧 겸허의 최저층과 신적 영광의 최상층을 자신의 내면, 한 공간 면에서 향유할 수 있는 사유형식이 이렇게 해서 가능해 지는 것이다. 바로 이 특이한 의식에서 이전의 자신에 대한 유한적 소유권은 기각되고 허물어지게 되고 이후 더 큰 의지, 신의 권한에 따라 자신의 소유권을 반환하는 조건으로, 신의 타자적 소유권, 그 인격적 힘의 우주망 속에 자신을 무화시킴으로 신적 역사를 투사할 수 있는 탈각적 향유의 권리(사용권)를 역설적으로 얻게 된다.

신적 권위에 발촉된 수동적 은총이 인간을 단순히 관조의 숙명적 배면으로 퇴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더 상승되고 재창조된 정체감으로 현실에 대한 태도와 전망을 더욱 건강하게 몰입하게 한다는 아감벤의 통찰은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 전 우주에 대한 무한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탈구하고, 사용권이라고 하는 유쾌한 자기자유의 감격으로 해서는 삶의 열정에서 더욱 큰 삶의 동기를 추동해 내고 한편, 그러면서도 자신을 스스로 침식시킬 수 있는 과도한 집착이나 불필요한 긴장들은 이로써 치유되고 극복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이야말로 인간 내면의 혁명이 아닌가? 곧 부르심을 경험하기 전보다 이후에 삶에서 더 많은 열정과 영원적 의미, 전망으로 추동되면서도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내’가 그 모든 것을 해야만 하고 해내어야만 한다는 그 집착과 불안,‘자의식’을 무화시킬 수 있는 행복의 방식이라면 이야말로 혁명적 거래가 아닌가? 아감벤에 의하면 이 거래를 노리고자 하는 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회개, 개심’이며 이 내적 혁명은 바로 이 소유권의 양도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혁명적 변환을 통한 자기 정체성은 어떤 정치적 자각도 아니며 급진적 마르크스주의자가 말하는 계급의식과도 다른 양상의 자각인데 이 존재감은 한편, 유예된 시간, 종말의 시간에 의해 의미적으로 수축된 시간,(역사적 종말로 지시되고 있지만 현실의 시선을 압류해 버리는 역사적 종말이 아니라 종말로 설정된 그 ‘끝’에 의해 현실이 더욱 의미화 되고 긴장화 된 시간)에 의해 더욱 적극적인 의미와 목적으로 투사되면서 그 존재의 힘으로 해서 결국 정치적 함의까지 포함하기에 이른다. 존재의 진정성을 확보한 존재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정치적이지 않은가?

“바울로의 편지 중에서 직접 실제적인 정치적 유산과 같은 것을 제시해야 한다면, 필자는 남겨진 자들이라는 관념이야말로 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100.)

곧 그러면 다시 중복하여 메시아(그리스도)의 권위, 존재적 힘 앞에서 모든 역사와 공간을 향하여 소유권이 양도된, 사용권의 자유로 이행된 시간이야말로 아감벤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의 시간이며 그 자유의 시간을 근저로 하여 그 시간이 또한 역사적 시간 속에서‘끝’에 의해 수축된 남겨진 시간으로 경험되고 수행되어 지금 ‘이 시간’현재에 특별한 목적과 의미가 투사되는 시간이 바로 메시아니즘의 그것이라는 것이다. 소유권이 재 조율되며 신적 의미에 투과된 시간이 이렇게 역사적 현실을 대상지로 만나면 한편, 그 시간은 사실상 존재적 충실에 의해 이렇게 지금 ‘이 시간’을 향해서는 확대되어 거의 유물론적 시간으로 까지 상승하게 되는데 사실 아감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시간은 바로 이‘현실’에의 진리적 충실이라고 하는 최고조의 시간이다. 아감벤은 이 메시아니즘의 시간을 이미지라고 하는 의식의 범주로 설명하는 발터 벤야민의 특유한 사유의 글을 이렇게 옮기며 자신의 본문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그 부분은 아감벤을 자극한 주요 문장이었으am로 여기에도 그대로 옮겨 본다.

“그것은 진정한 역사시간, 진리의 시간의 탄생과 합치된다. 과거가 현재에 빛을 비춘다거나 또는 현재가 과거에 빛을 비춘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란 과거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하나의 성좌배열적인 관계 속에서 지금과 전광석화처럼 결합하는 것이다.---그것은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지적인 것이다.---읽혀지는 이미지, 즉 인식가능성의 지금에 있어서의 이미지는 모든 독해의 기저에 존재하는 이 위기적이고 위험한 순간의 각인을 최고도로 유지하고 있다.Benjamin 1999a,463.”(238.)

이쯤되면 물론 존재가 어떤 특정의 정치적 계급의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존재의 자각과 시간의 충실은 사실상 정치적인 의미와 거의 분리가 불가능할 정도의 ‘충실’이 되고 있지 않는가? ‘남겨진’이라고 하는 긴장과 존재적 충실이라는 고탄력은 서로 배합되어 시간 자체를 의식의 수축된 힘에 의해 중력적으로 휘어지게 하고 확대, 변용되게 해 더욱 최고조의 시간으로 밀어 올린다고 하는 현대물리학적 발상을 응용한 이러한 사유 또한 어쨌든 신선하고 획기적인 통찰이라고 하겠다.

한편, 이에 또 이해를 위해 덧붙여져야 하는 것은 ‘제6일 에이스 에우아게리온 테우Ⅱ’의 ‘신앙의 언어’부분에서 밝힌 언어의 어떤 폭력성을 통한 인간 무화에 관한 부분이다. 신앙의 진실에의 충실과 같은 비언어적 범주는 지시적 논리, 그리스적 언어의 구멍을 관통하여 신앙의 언어를 창조해 내며 행위수행적인 언어로 올라간다. 곧 “존재와 본질의 저편에”설정, 변화의 힘을 수반할 수 있는 언표적 언어가 그것인데 여기에서 역시 인지되는 것은 이성적 언어의 한계와 그에 관계된 언어의 어떤 권력적 의미에 대한 회의이다. 역사적 언어는 지시하고 재단, 편집, 규정할 뿐 그 말이 처한 현실과 일치시켜 주지는 않는다. 그 언어로만 하면 그것은 역사적 현실과 언제나 기본적으로 간격을 생산하고 고착화 시킨다. 근원적 내용을 마모시키고 은유의 실제적 힘을 첨삭시키며 그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에 대해서도 객관의 건조한 권위로 결박하고 가두어 버린다. 그런데 여기에 신적 근원을 관통한 신앙언어는 역사적 언어의 근원간격을 돌파하고 지시와 규정을 넘어서 모든 현실적인 관계와 밀착되게 하며 또, 변화와 효과의 인격적 힘을 행위적으로 수행할 수가 있다. 바울의 언어가 독특하고 행위수행적인 국면을 띠는 것은 바로 이 메마름을 넘어선 그 어떤 초 언어적 차원의 범주이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아감벤에게는 그리스적 개념 언어는 부족하다. 그 너머에 더 본원적이고 현실과 일치시킬 수 있는 인격적 힘을 응축하는 언어가 기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메시아니즘의 응축된 의식의 확장에는 기본적으로 이 일치의 본원성, 또한 기본적으로 함의될 수 있는 그 무엇이 내장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에 연관하여 한편, 바디우도 철학은 진리를 창조하거나 소유하는 장치가 아니라 다만 사건의 의해 발생한 진리를 사후적으로 규명하고 담아낼 뿐이라는 견해의 연장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쓰고 있는데 아감벤과 관련하여 인용할 만하다.

어떤 메시아적 극단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지식이라는 형상은 그 자체가 율법의 형상과 마찬가지로 예속의 형상이다. 그와 결합되어 있는 지배의 형상은 실제로는 하나의 협잡이다. 지배자를 축출하고 아들들의 평등을 정초해야 한다”(<사도바울>,117.)

바디우에서는 인식의 범주로 인한 것이 아닌, 인식의 너머에서 도래적으로 주어지는 그 진리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소유를 주장할 수 없는, 이성 밖이라고 하는 공영의 지대에서 발생되어 누구에게나 보편의 권리로 향유된다고 하는 그 ‘보편’이라고 하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자의식적 지식을 평가절하 하는 논리에서 저러한 문장을 쓰고 있지만 어쨌든 언어의 한계를 인지한다는 의미에서는 두 사람 다 상동하는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인간의 자의식적 권위를 무화하고자 하는 지점에서는 이해를 같이한다는 말이다.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한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율법이든, 스스로 개념을 지시하고 규정, 지식 권력적 차이를 축적해 간다고 하는 지성의 범주에서든 그 과정에서 작동되는 인간의 자의식과 그 권력적 의미를 포착하고 진리적 영역은 항시, 그 그러한 권력적 협잡의 권위와의 역학관계에서 반드시 그 협작적 권위를 무화시키는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통찰에서 상동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의식이 탈각되는 기획을 향하여 권력기제에 대한 무화의 기제 방식을 아감벤은 인간의 도덕의지(율법)와 소유권을 둘러싸고 있는 주체의 권력적 의식에서 그것을 주로 무화하고자 하고 바디우는 그것을 지식의 권위에서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 모든 방식에서 인간의 권위를 탈각한 지점 위에서 모든 이에게 차별이 없이 보편적으로 분배될 수 있는 자유와 은총의 지점은 도덕의 권위나 지식의 권위가 아닌 도래적 그 무엇을 통해서만이 경험될 수 있고 그 지점에서만이 모든 인간의 것에 배어있는 권력적 협잡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하는 보편근원에 대한 지점에서는 이해를 같이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세계내적 권위의 근원적 허위를 공개하고 그 허위를 메우고 치유할 수 있는, 언어 너머의 보편적 지점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 비밀의 공개는 메시아적 시간에서의 율법의 기능정지와 모든 권력의 실질적인 비정통성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184.)

“죄란 정확히 무엇일까? 죄란 자율성, 자동성으로서의 욕망의 삶이다.”(<사도 바울>,153.

(어떤 억압기제로도 지배하고 작동될 수 있는)도덕과 율법의 권위도 비정통적인 것이며 (차이를 생산하며 우월적 자의식을 촉발시킬 수 있는)지식의 권위도 비정통적이며 오직 존재, 그 자체가 무화되고 부정된 역설로 저층에 의해 근원 겸허로 재조정되어,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상대적 우월권을 주장할 수 없는, 절대 평등의 내적 기초에서만이 존재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그 메시아적 지점을 두 사람의 사유는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물론 바디우는 자신의 바울에서, 차이 없이 누구에게나 통한다고 하는 그 보편의 소통점에서 <사도 바울>을 정초해 나갔고 아감벤은 또한 자신의 바울에서 그 지점을 존재의 탈각된 자리, 메시아적 시간의 그 특이한 삶의 질감 내용으로 이끌어 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아감벤의 메시아니즘에는 이런 역설로 재창조된 존재의 힘이 기본적으로 설정되어 있어(지젝과는 다르고) 그럼으로써 그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모든 비정통적 권위가 폭로되는, 일종의 정치적인 함의까지 포월하게 되며, 이 역사 내에서는 그런 정열의 이유로 이후의 윤리적 세계가 아울러 유물론적 렌즈로까지 이행되기도 하는 것으로 읽혀 질수 있겠다.

이렇게 되면 지젝의 표현처럼 신학은 가공할만한 우군을 자기 편으로 확보하게 되는 것일까? 또 이렇게 되면 신학에서 본회퍼가 수행했던 기독교의 세속화, 비종교화는 아감벤에 이르러 타영역과의 이종교배를 통하여 또 다른 국면으로 구체, 광역화 되는 것이며 그로써 역시 지젝이 <죽은 신을 위하여>의 서두에서 일말의 어떤 조롱조로 말했던 경우처럼, 기독교의 수명은 다시 늘어나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