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였을까 - wae hilosimawa nagasaki yeoss-eulk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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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쿠오카 공항에 내리자 우리 외교부에서 “후쿠시마 원전주변 반경 30km 철수 권고”라는 문자가 날아들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8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 주변은 위험하다는 얘기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방사성 오염수를 보관하는 탱크에서 2년여 전부터 누수가 발생한 것을 최근에 발견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사고 원전의 방사능을 원천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핵과 관련해서 일본만큼 불행한 나라는 없다. 2차 세계대전 때 원자폭탄이 두 차례나 투하됐고, 원전 사고로 엄청난 재앙을 입었다.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처음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왜 하필 히로시마였을까. 날씨 때문이었다. 원자폭탄 투하지점은 나가사키 고쿠라 니가타와 함께 4곳이 검토됐다. 이날 이들 도시 상공에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원자폭탄은 시야가 확보되어야 투하가 가능했다. 하지만 오전 7시부터 히로시마 상공 구름층이 흩어지자 이놀라 게이(Enola Gay)가 발진했다. 사흘 뒤에는 두 번째 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당초 목표는 군수산업기지인 고쿠라였으나 구름이 잔뜩 끼어 니가타를 지나쳐 나가사키로 날아갔다.

□ 2차 대전 종식을 위해 원자폭탄 투하는 반드시 필요했던 것일까. 앞서 5월 8일 히틀러가 이끌던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연합군의 입장에서는 싸움의 상대가 사라져버렸다. 이미 전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고 일본만 겨우 버티는 상황이었다. 얀 클라게의 저서 ‘날씨가 역사를 만든다’에 따르면 미국에는 여전히 힘의 과시가 필요했다. 2차 대전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해 볼 수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과학자들 중 상당수는 원자폭탄을 인간이 살고 있는 지역에 투하하는 것에 반대했다.

□ 절충안도 제시됐다. 태평양상 무인도에서 원자폭탄 실험을 하면서 일본군 장성들을 초빙해 항복을 받아내자는 제안이었다.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소련의 스탈린에게 폭탄의 위력을 과시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이 최대 피해자가 됐다. 그랬던 일본이 최근 2차 대전 이후 최대 국방예산을 투입하면서 군사대국화를 꿈꾼다는 소식이 그리 반갑지 않다. 행여 침략의 역사를 잊은 건 아닌지 걱정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군사적 긴장이 심화하는 것은 좋지 않은 징후다. 더욱이 우리는 북한 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간다.

조재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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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폭탄(우라늄이나 플루토늄 따위의 원소의 원자핵이 일으키는 핵분열 반응을 이용하는 핵무기)은 도시를 한 번에 날려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진 매우 위험한 폭탄이자, 처음으로 실용화된 핵무기이다. 

     이 원자폭탄의 공식을 만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보고, "내가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예견했었다면, 1905년에 쓴 공식을 찢어버렸을 것이다."라고 까지 말했다.

    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였을까 - wae hilosimawa nagasaki yeoss-eulkka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정당성을 따지기 전에, 먼저 왜 미국이 일본에게 이 같은 폭탄을 사용해야 했는지 알아야 한다. 세계 2차대전이 시작되고 얼마 후, 일본은 독일과 연합을 했다. 이 때, 일본은 미국의 진주만을 무차별 폭격을 진행했고, 이로 인해 중립을 지키고 있었던 미국이 세계 2차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유럽과 미국이 연합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독일은 항복했지만, 일본은 되려 전 세계를 자신들의 발아래에 둘 야망을 품는다. 일본이 항복 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미국은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각각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그렇다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에 대해서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필자는 주변 친구들에게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는 정당했었는가"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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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명에게 설문조사 한 결과, '원자폭탄 투하는 정당했다' 60%(9명) '정당하지 않았다' 40%(6명)의 결과가 나왔다. 

     먼저, 정당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않았다면 가미카제(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군의 전함에 충돌하여 자살 공격한 일본의 비인간적 특공대)와 같은 일본의 비인간적 행위들에 인해서 더 많은 피해가 일어났을 것이다"라고 대답함과 동시에, "전쟁을 끝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반면, '정당하지 않았다'를 주장한 이들은 "원자폭탄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즉사했고, 지금까지도 장기적으로 피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 또한 다수 존재함으로, 당시에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더 현명했을 것이다."라고 외쳤다. 실제로, 이 원자폭탄으로 인해 사망한 이들의 ⅔는 여성, 어린이, 그리고 노약자였다. 심지어 방사능에 노출되었던 부모의 자식에게도 방사능이 유전적으로 전해짐으로,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는 후대에도 지속되는 것으로도 밝혀졌다. 

     만약 세계 4차대전이 일어나 핵무기가 사용된다면, 세계 5차대전은 이미 전부 폐허가 된 세상에서 돌과 나무를 가지고 싸우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이미 세계 2차대전을 통해서 전례없는 힘으로 문명을 한순간에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이, 우리가 앞으로 해야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유명한 평화주의자의 역할이 있었다는 사실은 핵무기 본질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39년 8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한 달 전 미 프린스턴대학 교수 엘버트 아인슈타인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헝가리 출신 물리학자 레오 스질라드였다. 아인슈타인처럼 나치를 피해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온 유대인 과학자였다. 그는 나중에 이탈리아 출신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부인이 유대인으로서 무솔리니의 탄압을 받자 미국으로 피신)와 함께 흑연을 감속재로 이용, 최초의 연쇄반응을 성공시켜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원자로를 만든 사람이다.

    스질라드는 친구인 아인슈타인에게, 나치 독일의 과학자들이 핵분열에 성공했으며 연쇄반응 실험에 몰두하는 것 같다면서 가공할 신무기를 만들 위험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발견한 질량-에너지 등식인 E=mc²이 핵폭탄 개발 원리가 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친구의 설명을 듣고 곧 깨달았다. 핵분열과 연쇄반응이 핵폭탄 제조로 연결된다는 것을. 스질라드는 미국도 대응책을 세워야 하니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올리자고 했다. 초안은 스질라드가 쓰고, 아인슈탄인은 교정을 보고 서명했다.

    문제는 어떻게 편지를 전달하느냐였다. 스질라드는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 국민적 영웅이 된 찰스 린드버그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 그가 고립주의자이고, 신나치 인물임을 알고는 포기했다. 이 편지는 결국 알렉산더 삭스라는 루즈벨트 대통령 친구를 통해 전달됐다.

    1939년 10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 직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 명의의 편지를 받은 루즈벨트는 군사문제 고문인 와트슨에게 이를 건네면서 "행동이 필요해"라고 했다. 과학자들로 급조된 위원회는 대통령에게 대응책을 건의, 육군이 관할하는 핵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계획'이 시작됐다. 뉴멕시코주 로스알라모스의 연구소를 중심으로 전개된 맨해튼 계획엔 한때 13만 명이 종사했고, 20억 달러(현재 가치로 230억 달러)가 들어갔다. 90%가 원자로 등 시설 건립에, 10%가 폭탄 제조·설계 등에 쓰였다.

    아인슈타인은 당초 핵개발 계획이 느리게 진전되자 1940년 3월 다시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썼다. '베를린에선 우라늄 프로젝트가 급진전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신속 대응을 촉구했다. 대통령은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하고, 아인슈타인도 참여토록 지시했으나 그는 감기에 걸렸다며 자리를 피했다.

    스질라드는 독일이 망한 후 핵폭탄이 일본에 투하될 것임이 확실해지자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70명의 과학자들로부터 서명을 받아 1945년 7월 17일에 트루먼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냈다. 이 탄원서는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원자폭탄을 쓰지 않고 재래식 무기만 가지고 일본 상륙전을 펼 경우 미군 피해는 1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됐다. 미국 정책 결정자들은 종전 후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아 엄청난 인명피해가 났다는 비난이 쏟아질 경우, 정치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맨해튼 계획을 지휘하던 글로브 장군은 스질라드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고, 서명자들을 해고했다.

    아인슈타인은 죽기 전에 핵폭탄 제조 요청 편지를 쓴 걸 후회하면서도 독일의 핵개발 정보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려 했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FBI가, 그의 평화주의적 성향 때문에 보안에 위험을 주는 인물이란 판정을 하였던 것이다.

    헨리 루이스 스팀슨은 2차 세계대전 때 미국 전쟁성 장관이었다. 그는 공화당원이었으나 민주당인 루즈벨트와 트루먼 정부 하에서 요직을 맡았다. 국익만 생각하는 불편부당한 자세 덕분이었다. 1945년에 그가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할 때 나이는 78세였다. 미국 지도부 인사들 중 최연장자였고, 공직경력이 화려했다. 이런 권위로 해서 대통령도 그를 존중했다. 1893년에 그는 마벨 웰링턴 화이트와 결혼했다. 신혼여행을 일본 교토로 갔다. 1,000년 고도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일본인들의 정직과 예절에 반했다.

    1945년 미국 지도부는 개발에 성공한 원자폭탄을 투하할 후보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1차 후보지로 추천된 곳은 히로시마, 교토, 니가타, 고쿠라였다. 이들 도시는 그때까지 폭격을 당하지 않았으며 군 시설이 있었다. 스팀슨은 교토를 제외시켰다. 신혼여행 때 좋은 인상도 한 몫했다. 일본의 정신이 담긴 이 도시를 파괴하면 민심이 흉흉해져 전후 관리가 어렵다는 것이 공식 이유였다. 원폭 투하지 선정위원회는 제외된 교토 대신에 나가사키를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