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스타코 비치 교향곡 5번 명반 - syoseutako bichi gyohyang-gog 5beon myeongban

쇼스타코 비치 교향곡 5번 명반 - syoseutako bichi gyohyang-gog 5beon myeongban

쇼스타코 비치 교향곡 5번 명반 - syoseutako bichi gyohyang-gog 5beon myeongban

아이러니의 음악,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1937년 초연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은 '혁명’이라는 부제를 붙이기도 하는데 어둡고 음울한 1악장을 거쳐 환희에 차오르는 4악장에 이르는 곡의 구성은 마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쇼스타코 비치 교향곡 5번 명반 - syoseutako bichi gyohyang-gog 5beon myeongban

아이러니의 음악,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1937년 초연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은 그의 교향곡 중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곡에는 ‘혁명’이라는 부제를 붙이기도 하는데 어둡고 음울한 1악장을 거쳐 환희에 차오르는 4악장에 이르는 곡의 구성은 마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떠올리게도 하죠. 초연 당시 이 곡은 빛나는 승리의 쟁취, 투쟁 등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는 평을 들으며 소련의 사회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러한 평가가 이 곡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냐는 의문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 계기는 바로 1970년대 후반, 쇼스타코비치의 구술 증언을 정리하여 출판된 회고록인데 이 내용에 따르면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5번 교향곡에 대해 소련 당국의 압박 속에서 만들어진 ‘강요된 환희’라고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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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 비치 교향곡 5번 명반 - syoseutako bichi gyohyang-gog 5beon myeongban

실제로 이 시기 소련의 예술가들은 사상이라는 잣대로 작품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고 쇼스타코비치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부르주아적이라는 비난을 들었고 예정된 신작의 초연을 무기한 연기할 만큼 정신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죠.

이러한 위기를 넘기게 해준 작품이 바로 5번 교향곡입니다. 모두가 예상하듯 소련 당국의 입맛에 맞는 음악이었고 다시금 쇼스타코비치는 ‘인민의 작곡가’로 추앙 받습니다. 

정치적인 잣대로 쇼스타코비치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가 뒤바뀌는 아이러니한 일이었죠. 물론 이 곡이 음악적으로 매우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예술가에 대한 사상적 통제라는 씁쓸한 단면이 존재했던 것이죠.

이 곡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한국 초연과 관련된 이야기인데요.

1978년,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뉴욕필을 이끌고 내한공연을 추진했습니다. 이때 프로그램에 포함된 곡이 바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이었죠.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반공정책으로 쇼스타코비치 실연은 커녕 음반조차도 마음대로 들을 수 없어 소위 ‘어둠의 경로’를 통해 입수한 LP를 애호가들끼리 암암리에 돌려 듣던 때였죠. 

이런 시기였으니 당연히 정부는 뉴욕필의 연주 프로그램에 대해 난색을 표합니다. 

하지만 번스타인은 이 곡을 허용하지 않으면 내한공연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강하게 으름장을 놓았고 이에 정부가 백기를 들어 1979년 6월 29일 역사적인 한국 초연이 실현됩니다. 번스타인에 의해 의도치 않게 사회주의 예술 해금의 물꼬가 터진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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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은 그의 모든 작품 중에서 단연 압도적인 음반 수를 자랑합니다. 수많은 명반들이 있지만 오늘 추천하고자 하는 음반은 베르나르드 하이팅크/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1981년 녹음(DECCA)입니다.

하이팅크 특유의 중용적인 해석은 누구에게나 부담 없이 다가오며 로열 콘세르트허바우의 안정된 연주력과 음색은 음반의 완성도를 더욱 높여주고 있습니다. 2000년대 이후 여러차례 재발매 되어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장점입니다. 또한 첼리스트로 더욱 유명한 로스트로포비치/워싱턴내셔널심포니의 음반(DG)도 쇼스타코비치와 절친했던 음악 동료의 해석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음반이죠.  

ALBUM Bernard Haitink : Icon

1937년 초연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은 그의 교향곡 중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ALBUM Shostakovich: Symphony No.5 / Prokofiev: Romeo And Juliet - Suite No.1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5번 교향곡에 대해 소련 당국의 압박 속에서 만들어진 ‘강요된 환희’라고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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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체제의 억압 속에서 내면의 굴곡을 작품으로 승화한 소련 작곡가 프로코피예프(왼쪽)와 쇼스타코비치. 동아일보DB

쇼스타코 비치 교향곡 5번 명반 - syoseutako bichi gyohyang-gog 5beon myeongban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베토벤 교향곡 5번 C단조는 교향곡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다. 단순한 음형을 조합하고 변형해 거대한 건축물처럼 쌓아올렸다는 점이 이후의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힘겨운 투쟁처럼 1악장을 시작하지만 끝악장인 4악장에서는 승리의 영광을 외치듯이 끝난다. 이른바 ‘암흑에서 광명으로’의 독일 이상주의적 모델을 확립했다는 점에서도 이 곡은 특별하다.

교향곡의 이상적 모델을 확립한 베토벤이 기념비적인 5번 교향곡을 써놓았으니, 그 뒤에 오는 후배 작곡가들도 5번이라는 숫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 1악장 서주 부분 선율은 ‘운명의 동기’라고 불린다. 이 동기는 네 개 악장에 걸쳐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마지막 4악장에선 운명을 극복하고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달리 들어보면 어딘가 비장하고, 운명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모습을 밝게 위장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베토벤이나 차이콥스키나 교향곡 5번을 쓰는 것은 개인적 문제였지만 1915년에 핀란드 작곡가 시벨리우스가 처한 문제는 달랐다. 시벨리우스는 1914년에 조국인 핀란드 정부로부터 새 교향곡 작곡자로 위촉받았다. 시벨리우스는 전 세계에 핀란드를 대표하는 이름이었고 새 교향곡은 이듬해인 1915년, 시벨리우스 자신의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연주될 예정이었다. 베토벤 5번에 맞먹는 기념비적인 곡이 되어야 했다.

머리를 싸매고 있던 시벨리우스의 눈에 멀리 하늘에서 점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백조 열여섯 마리였다. 시벨리우스는 ‘백조들이 햇살이 비치는 안개 속을 은색 리본처럼 사라져갔다, 그 울음소리 이미지는 금관악기 같았다’고 적었다. 이 백조들이 시벨리우스를 구했다. 시벨리우스는 백조 소리의 이미지를 E플랫장조의 도-솔-도 시-솔-시라는 단순한 음향으로 형상화했고, 5번 교향곡의 마지막 3악장에 넣었다. 새 교향곡은 성공을 거두었다.

소련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의 경우는 문제가 더 복잡했다. 1937년 11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 나왔다. 40분 이상 갈채가 이어졌고 공산당 간부들은 이 곡이 공산주의의 최종 승리를 상징하는 곡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훗날 쇼스타코비치의 지인들이 증언한 내용은 이렇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 곡은 누가 당신을 뒤에서 몽둥이로 내리치면서 ‘너의 임무는 기뻐하는 것이다, 너의 임무는 기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당신은 휘청거리며 일어나 앞으로 행진하며 그 말을 중얼거린다.”

프로코피예프는 1929년에 교향곡 4번을 내놓은 뒤 15년 동안 교향곡을 쓰지 않았다. 그는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5번에서 겪은 내면의 굴곡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마침내 교향곡 5번을 내놓은 때는 1944년이었다. 나치의 침공을 겪은 소련이 독일군을 물리치고 공세로 돌아서 승리를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이때 발표한 교향곡 5번의 마지막 4악장 악상기호는 ‘알레그로 조코소’, 즐거운 알레그로다.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다. 프로코피예프 천성에 쇼스타코비치 같은 무거운 비극성은 없었다.

그러나 이 곡의 유머와 즐거움은 천진난만한 낙관주의도, 영광스러운 찬가도 아니었다. 쇼스타코비치의 5번 교향곡에 못잖은 아이러니와 풍자가 들어있는 것을 청중들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구소련을 대표한 두 음악가 중 쇼스타코비치는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에도 22년을 더 살았고 비교적 편안한 말년을 보냈다. 프로코피예프는 스탈린이 죽은 바로 그날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그것 또한 두 사람의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올 가을 여러 작곡가들의 교향곡 5번이 국내 무대를 수놓는다. 이달 29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얍 판 츠베덴 지휘 KBS교향악단이 베토벤 교향곡 5번과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5번을 이어 연주한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은 이달 28, 29일 오스모 벤스케 예술감독 지휘로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서울시립교향악단 정기연주회에서, 이어 11월 19일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지휘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에서 잇따라 무대에 오른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