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51:1-19 용서받음에의 기원(1-9절) (1-4)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 후에 깊고도 처절한 참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1-4절에 죄와 관련된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1절에 ‘죄악’, 2절에 ‘죄악’, ‘죄’, 3절에 ‘죄과’, ‘죄’, 4절에 ‘범죄’, ‘악을 행함’ 등 각 절마다 죄와 관련된 단어를 말하며 회개합니다. (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의 이 고백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죄인인 것에 대한 인정함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어머니 역시 죄인이고, 다윗은 그 죄인의 자궁 속에서 잉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이 그렇게 자연스러웠습니다. 다윗이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라서 이 시편을 기록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때에 사울왕이 군복을 입혀주었지만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다며 벗고서 싸우러 나갔고, 싸우러 갈 때에 그의 손이는 창이나 칼이 쥐여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물매와 돌멩이 5개가 전부였고, 사울왕에게 쫓겨 다닐 때에 그를 죽일 기회가 2번이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을 마음대로 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손을 대지 않았고, 심지어 블레셋까지 피난을 갔다가 미친 체 하며 나와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알지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신앙적으로 살고, 죄와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던 사람인데, 그 죄를 짓는 동안에는 죄를 짓는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선한 사람이었다면 그 죄를 지을 때에 느낌이 이상해야 하고, 이러면 안 되는 데라고 생각했어야 되는데 너무도 자연스럽게 죄를 짓는 모습에 놀라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죄를 짓는 것이 숨을 쉬는 것이나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편안한 원초적 본능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고서, 참회하면서 이 시편을 지었습니다. 거룩한 삶에의 기원(10-19절)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다윗은 자기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속을 “정한 마음으로 고쳐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창조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고쳐주십시오’와 ‘창조해 주십시오’는 동의어가 아닙니다. ‘고치는 것’은 본래 있던 것이 망가지거나 고장이 났을 때, 또는 많이 마모가 되었을 때에 복원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창조하는 것’은 본래 없었던 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본래 자기 속에는 정한 모습이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주시면 하나님만을 순수하고도 온전하게 섬기고 싶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이 하나님께 범죄하고서 느낀 감정은 하나님께 쫓겨난 기분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외면을 당해도 속이 상하고, 짓눌림을 받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이겠습니까? 또한 구약시대에는 성령은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때만 임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섬겼던 사울왕에게서 주의 성령이 떠나고 났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다윗이,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까 두려운 것입니다. 미국에서 목회자에게 하는 큰 욕 중에 하나가 “성령 받지 않고 목회해라”라고 합니다. 목회가 아니더라도 신앙생활에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동행하심이 없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결과과 초래될지 충분히 짐작되어서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윗이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은, 자신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구원의 즐거움’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고의적으로, 하나님께서 싫어하실 것을 알면서도 죄를 짓고 나면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해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신앙생활을 하는 재미도 사라지고 맙니다. 성경을 읽기도 하고,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주일이면 예배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기는 하는데, 마치 자신이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처절하게 참회를 하면서 깨달은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죄인인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사(예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릴 때에, 짐승을 죽이거나 곡식을 곱게 갈아서 제물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 짐승과 곡식은 우리를 대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제물인 짐승처럼 죽어야 하고, 곡식처럼 갈아지는 존재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 제사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렸을 때가 20살 정도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밧세바 사건을 일으켰을 때가 약 50세 정도 되었을 때였습니다. 약 30년 동안 그렇게 신실하게 살았던 다윗이 어떻게 그렇게 이전에 행하지 않았던 죄를 저질렀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시냇물에서 빠져나와 자기를 위해 스스로 만든 웅덩이에 스스로 갇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의 삶은 한동안 생명수가 아니라 독수였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자식을 범하고, 자식이 자식을 죽이고, 자식에게 쿠데타를 당해서 신발도 신지 못하고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다윗이 그러했다면 우리도 자기 웅덩이에 갇히게 되면 우리의 인생도 생명수가 아니라 독수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가정에, 일터와 학교에, 삶의 자리에 우리를 심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웅덩이 빠져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나누어 줌으로 생명의 신비와 생명의 역설을 맛보는 생명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하루도 '자기 웅덩이에 빠진 날'이 아니라 생명의 시냇물을 마시며, 흘려보내는 '생명의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우리는 다윗처럼 이러한 일을 직접 겪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받아들임으로 다윗이 깨달았던 것들을 동일하게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를 매일매일 자기 웅덩이로 만들어 그 속에만 머물다가 썩어 없어지는 인생이 아니라 은혜와 생명의 시냇물을 먹음으로 은혜와 생명의 통로로 사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그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작성 : 정한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