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를 통해 나오는 생각만이 어떤 가치를 지닌다 프리드리히 니체

-.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곽복록 옮김

-. 동서문화사, 1976

 프로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mlim Nietzsche)1844 10 15, 프로이센령 작센주의 작은 마을 레켄의 목사관에서 루터파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같이 성직자 명문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31살로 국왕 프리디리히 빌헤름 4세의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던 터라 이 일가족의 앞날은 밝아 보였다.

 이러한 가계(家系)에 대해서 니체는 커다란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뛰어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조상의 유산이라고 믿었다. 또 니체는 '그리스도교'를 유감없이 비판할 수 있는 어렸을 때의 그리스도교적인 환경이 좋은 추억만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하고 이와 같은 성직자의 가계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

 근시였던 니체의 아버지는 강아지에 발이 걸려 현관 돌계단에서 굴러 떨어졌고, 그때 머리를 강하게 부딛힌 탓에 뇌진탕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이듬해 1849 4 30, 뇌연화증으로 35세의 나이에 젊은 생애를 마쳤다. 곧이어 다시 불행이 찾아왔다. 1850 2월에 두 번째 생일을 맞은 막내 요제프가 치아가 원인이 되어 갑작스런 경련을 일으키며 죽고 말았다.

 연이어 찾아온 가족의 죽음은 니체의 어린 마음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신의 죽음이라고 하는 그의 사상 안에 깃든 그 생생한 내용은 아마도 사랑하는 자와의 영원한 이별이라는 이때의 체험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가장을 잃은 데다 어린아이까지 잃은 일가는 그 저주스런 땅을 뒤로 하고 그 해 4월에 근처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자레 강변의 오래되고 아름다운 고을 나움부르크로 이사를 하였다.

3. 니체의 가족들과 소꼽친구들

 어머니는 스파르타식의 엄격함과 검소함으로 니체를 교육했다. 하지만, 니체의 내부에 간직된 독창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해 사람은 바로 외할아버지였다. 어머니가 자기 아들의 이상한 고집을 자신의 아버지에게 호소했을 때 그는 딸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다. "얘야, 너는 저 애가 어떤 아이인지 전혀 모르고 있구나! 저 애는 평생 동안 내가 본 애들 중에 가장 비범하고 재능이 있는 아이란다. 저 아이의 그런 성질은 그대로 내버려 주는 것이 좋단다"라고 말이다.

 니체와 누이동생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우애가 돈독했다. 명랑하고 활발한 누이동생 엘자베트에게 오빠는 상냥한 놀이 상대였을 뿐만 아니라 존경할 만한 절대의 권위이기도 하였다. 오빠에 대한 누이동생의 존경의 마음은 그녀의 유년시대나 소녀시대를 통해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존경하는 마음에서 오빠가 쓴 것을 모아 보존해 두었다가 그녀의 '보물방'을 채우곤 했다. 누이동생이 여섯살부터 시작한 이 일은 평생에 걸쳐 계속되어, 후에 니체에 대한 귀중한 자료원이 된다. 그녀가 설립한 니체 문고 자료의 거의 대부분은 그녀가 그렇게 모아둔 것들이다. 어머니가 작고한 후에는 발광한 니체를 돌보는 것도 이 누이동생의 몫이었다.

 또 어린 니체의 인간성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그 밖의 사람으로서 빌헬름핀델과 구스타프 구르크라고 하는 두 어린 소꼽친구와 그 가족들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니체는 이 소꼽친구 핀델의 아버지로부터는 문학과 미술의 교양을 습득할 수 있었고, 괴테의 위대함을 배우게 되었다. 또 다른 친구인 쿠르크의 아버지로부터는 좋은 음악을 취미를 배웠다. 이렇게 귀족적 교양이 풍부한 환경의 혜택을 받아, 후년의 니체의 문화비평 무기가 되었다.

4. 포르타 학원과 대학에서의 성실한 탐구생활

 포르타 학원에서 6년 동안 생활하면서 니체는 고전적 교양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문학,철학,음악,종교 등 각 분야에 걸친 보편적인 교양을 배웠다. 그는 고전문헌에 대한 자유로운 탐구나 포르타 학풍이었던 역사적, 비판적 연구 방법의 영향을 받아 남몰래 종교에 대한 회의적인 관점을 품으면서 차차 종교보다도 고전의 세계로 향하게 되었다. 셰익스피어나 바이런을 읽으면서 니체는 일체의 기성권위를 태연히 무시하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이 강력하고 자유로운 거인들 앞에서 니체가 받은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1864 10월 니체는 라인 강변의 대학가에 있는 본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부와 철학부에 적을 두었다. 본 대학에는 리츨이나 얀 등의 뛰어난 학자가 있어서,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19세기 역사과학의 정신이었던 비판적·실증적 방법으로 비판·해석하는 뛰어난 학풍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대 문헌학 연구를 통해서 신학에 대한 그의 회의는 점점 심화되어 갔다.

 1865 10월부터 바젤 대학 부임까지 약 4년을 지낸 라이프치히 대학에서의 생활은 매우 성실했다. 그곳에서 리츨 교수의 신임을 얻어 공부하면서 쇼펜아우어를 발견하였고, 또 바그너와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니체는 전 생애를 통해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이 좋은 스승들을 얻어, 학자로서 또 사상가로서 자신의 뛰어난 재능이 아름답게 꽃피고 열매를 맺는 시기를 맞게 되었다.

5.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와의 만남과 그로부터의 독립

 186510월 말 또는 11월 초의 어느 날, 니체는 이 헌책방에서 우연히도 소펜하우어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견한다. 마치 그를 위해 쓰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할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가 쇼펜하우어의 염세철학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본의 아니게 보통의 학생생활에 적응하려고 했다가 자신의 참모습을 잃을 뻔 했던 본 시대의 생활을 회상한 당시의 니체가 자기혐오를 느꼈던 것에도 한 원인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끌었던 것은 쇼펜하우어의 철저한 결벽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아무리 어두운 결론이 예상되더라도 그것이 진리라면 자진해서 거기에 복종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와 세계의 실상에 대한 성실한 구명심에 대해 니체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1868 11 8일 니체는 리츨 교수 부인의 소개로 라이프치히의 브로크하우스 저택을 방문 중인 바그너와 첫 만남을 가지게 된다. 1869 4월 바젤대학에 부임한 니체는 휴가를 이용하여 트리프셴의 바그너와 그의 부인 코지마와 함께 얘기를 나누며 마음을 터 놓는다. 서로 상대를 만나기 위해 그때까지 살아온 것 같은 기쁨마저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1874 8월 바그너의 초대로 바이로이트를 방문한 니체는 그곳에서 바그너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 후 표면적인 만남은 이어졌지만 니체는 종교와 도덕 등의 기성권위에 연연하지 않고 삶의 창조적인 충동에 충실하고자 했던 왕년의 영웅 바그너가 아니라, 종교적인 구원의 가르침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예술을 그 도구로 바치고자 하는 쇠락한 노인의 모습이었으며, 대중의 갈채에 지극히 만족해 하는 타락한 예술가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두 사람의 완전한 단결은 1878 1월에 바그너가 니체에게 종교에의 귀의를 표현한 작품 <파르지팔>을 바치고, 니체가 바그너에게 종교로부터 결정적인 이반(離叛)을 고한 저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바친 것을 계기로 초래되었다. 그러나 니체는 바그너의 타락을 비판한다거나 하여 지난날 존경하던 벗에게 타격을 가하는 일은 끝까지 자제했다. 하지만 바그너는 이 젊은 친구에게 분노의 글을 서슴지 않고 공표했다.

6. 자유로운 리얼리스트로 성장하다

 바그너와의 결별은 이상주의적 로맨티스트인 청년 니체가 자유로운 리얼리스트의 장년 니체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성장은 그 결과로써 그의 사상적 독립을 가져오게 되었다. 니체의 그러한 독립을 촉진한 또 하나의 동인은 질병과의 싸움이었다. 니체는 병으로 인해 대학교수라는 직위에서 퇴임함으로써 모든 공적인 의무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렇게 자유주의적 실증가로서의 사상은 이러한 질병과의 싸움을 헤쳐 나옴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졌다. 완전한 고독 속에 있었던 이 시기의 니체는 심신의 건강을 찾아 여러 곳을 방랑하고 정신의 독립을 찾아 자유로운 탐구 실험에 전념하는 나날을 보낸다.

 1882, 루 폰 살로메와의 시련을 용감하게 극복한 니체는 '그 고뇌에도 불구하고'그 해 말에 이탈리아의 제노바와 라팔로에서 휴양하며 영기(英氣)를 키웠다. 1883 2 3일부터 13일까지 불과 열흘 사이에, 그리고 그의 대표작 된 불후의 명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를 환희에 도취하여 단숨에 써 내려갔다.

7. 마지막까지 생명의 불꽃을 태우다 가족의 품에 잠들다.

 1888,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이 마지막에 더욱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그는 잇따라 아포리즘의 명작들을 써 내려 간다. 그리하여 7월 에는 <바그너의 경우>를 쓰고, 8월에는 <우상의 황혼>, 9월에는 <안티크리스트>를 완성한다.

 속물문화가 지배하고 있던 독일에서는 그가 계속 무시당하고 있었지만, 문화의 선진지 프랑스와 교양의 나라 덴마크, 스웨덴 등에서는 당시 유럽 최고의 교양인이라고 할 수 있는 뛰어난 사람들이 니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징후에 고무된 니체는 기쁨과 평안한 기분 속에서, 12월 마지막 저술 <니체 대 바그너> <디어니소스 찬가>를 썼다.

 마비성 정신장애(뇌매독)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뒤, 니체는 어머니에게 인계되어 1897년에 그녀가 죽을 때까지, 어머니의 자애로운 간호를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그때서야 일기 시작한 자신의 사상에 대한 시대의 반향을 말없이 지켜보기라도 하듯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1900 8 25일 정오 바이마르에서, 니체는 여동생 엘리바베트의 품에 안겨 56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이번 니체의 <즐거운 지식>을 읽으면서, 나는 대학교 1학년 시절을 떠올렸다.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면서, 도서관에서 캠퍼스에서 심지어는 수업중인 강의실에서도 펼쳐 놓았다. 그 책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수 많은 삶의 의문들과 해답들이 다양하게 담겨 있었다. 무심코 책을 펼치면 주옥 같은 글귀들이 나왔으며, 나를 깨달음의 세상으로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정반대의 책을 만났다. 형식은 닮았지만, 내용은 달랐다. 톨스토이 <인생독본집>이 도덕적이고 기독교가 윤리가 밑바탕이라면, 니체의 <즐거운 지식>은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는 개념들을 뒤집어 놓았다. 처음 읽을 때에는 한 문장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조금씩 느낌으로 읽기 시작했으며, 니체의 인생을 알고 난 뒤부터 그의 사상에 빠져들어갔다.

 지금까지 나의 생각들이 뼈 속 깊이 박혀있는 도덕적 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도 독자들의 윤리적인 생각을 의식하면서 진정한 나의 목소리를 밖으로 끄집어 내지 못했다. 하지만 니체는 그 동안 느끼지 못했던 생명력이 나의 내면에서 솟아나게 해주었다. 다양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을 허약하게 만드는 것은 서양의 형이상학과 기독교라고 말하고 있으며, 반대로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로마 신화라고 말했다. 니체의 사유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신화 속 영웅을 깨웠다.  그리고, 우리 내면의 불안과 고통 속에 억눌려 있던 감정을  분출시켜주었다. 니체는 고통이야말로 창조의 원천이고 성장의 동력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고통을 긍정한 것은 니체 삶이 고통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끝없이 질병의 찾아왔으며, 다시 회복되는 일상의 반복이 니체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지나면 그는 다시 새로운 창조의 의지의 남은 생명을 불태웠다. 획일적인 가치의 짐을 떨쳐 버리고 경쾌하게 춤추고 웃으면서 생의 고통과 즐거움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니체의 글은 짧은 형식의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깊이 있는 사상들을 줄여서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 이상을 쓰지 않았다. 획일적인 틀 안에서 내용을 구성하기 보다는 독자들이 어느 페이지를 보더라도 자유롭게 사유하도록 펼쳐놓았다. 마치 배를 타고 탁 트인 바다로 모험을 떠나는 느낌이었다. 반면에 니체는 독자의 호응에 안달했던 저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책이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에 승리감을 가졌다. 그리고 독자에게 튼튼한 위장과 튼튼한 이로 자신의 책을 소화해주기를 바랬다. 그는 책을 내기 위한 의도적 글보다는 자유로운 사유가 담긴 책을 읽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신용에 의거해서만 살아간다"라고 했다.

 지금까지 써온 나의 글들이 '과연 진정한 나의 글이었는지?' 자문하게 되었다. 니체가 "그대는 그대 자신이 되어야 한다"말처럼 온전한 나 자신이 되도록 진실로 존재하는 유일한 자아의 목소리를 내야겠다. 순간순간마다 나의 가능성을 실현하면서 긍정적인 삶을 글로 표현하는 진정한 작가의 모습으로 말이다.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농담, 음모 그리고 복수

148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결핍에서 철학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풍요와 활력에서 철학을 할 수 도 있다. 전자의 경우 그들은 버팀목으로든, 진정제, , 속죄양, 기분전환, 혹은 자신을 고립시키는 수단으로든지 간에 아무튼 자신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한편 후자에서 철학은 아름다운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것은 승리감에 도취한 감사의 기쁨이며, 그마저도 결국 개념의 하늘에 우주적 대문자로 새겨져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다.

155 2 나의 행복

    추구하는일에 지치게 된 나는

    발견하는일을 배우게 되었다.

    역풍을 만난 이후로 나는

    어떤 바람과도 함께 갈 수 있게 되었다.

158 12 빛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눈과 마음이 시들기를 원치 않는다면

     태양을 향해도 그늘 속을 걸어라!

159 23 해석

    나를 해석하려면 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해석자는 될 수 없다.

    다만 자신의 길을 가는 자가 있다면

    그는 나의 모습도 밝은 빛 속으로 높여 주리라.

160 25 소망

    타인의 마음은 잘 알면서도

    내가 누군지, 그것을 모른다!

    내 눈은 나 자신과 너무 가까워서

    내가 보았던 것, 그리고 복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한층 멀리 자리잡을 수 있다면

    나도 내게 더 유익할 수 있으련만.

    하지만 내 적만큼 멀지는 않은 곳에!

    가장 가까운 친구조차도 역사 너무 멀다.

    그와 나 사이의 중간 지점!

    너는 나의 소망을 알아맞힐 수 있겠느냐?

163 36 청년기의 글

    젊은 날 가졌던 내 지혜의 알파와 오메가를

    나는 여기에서 다시 듣는다. 그러나 무엇을 들었던가?

    그 시절 그대로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내 귀에 이해되는 것은 그저

    내 청춘의 끝없는 아아!’오오!’.

164 43 권고

    네가 원하는 것이 명성이냐?

    그렇다면 이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라.

    적당한 때에 스스로 체념하라.

    명예를!

165 46 피곤한 자의 판단

    모든 지친 자는 태양을 저주한다.

    그들에게 나무의 가치는 그림자뿐!

166 52 발로 쓴다

    나는 손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발도 항상 함께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확고하고 자유로우며 용감하게

    혹은 들판을, 혹은 종이 위를 달린다.

167 54 나의 독자에게

    튼튼한 치아와 튼튼한 위장

    내가 너에게 바라는 건 이것이다!

    그리하여 네가 내 책을 소화하면

    나와도 사이가 좋아질 터!

1

174 완전한 진리에서 나오는 웃음으로 자기 자신을 비웃는 것. 이에 대해선 이제까지 가장 우수했던 사람들도 진리에 대한 충분한 감각이 없었던 것이며, 가장 하늘의 은총을 받았던 사람들도 사실은 극히 미약한 천재성밖에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웃음에도 미래가 있다! ‘종족이 전부이며 개인은 언제나 무나 다름없다.’라는 명제, 이것이 인간성 그 자체에 결합되어 각자에게 늘 이 최종적인 해방과 무책임을 향한 길이 열릴 때, 분명 그때에는 즐거운 지식만이 남게 될 것이다.

175 삶을 사랑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와 이웃의 삶을 촉진시켜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해야만 한다왜냐하면이라는 것이 뭐라고 불리든, 또 앞으로 뭐라 불리게 되는 상관없다. 어쨌든 필연적, 자발적으로 아무런 목적 없이 일어나던 일이 앞으로는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듯, 도리와 궁극의 규정인 듯 보이게 된다. 그것이 생존 목적을 가르치는 도덕 교사가 등장하는 까닭이다.

182 우리의 눈에 보이는 도덕적 자질, 특히 눈에 보인다고 믿어지는 자질은 그 자신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완전히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자질 그것은 타인에 대한 장식도 무기도 되지 않는다 은 또 그 자신의 길을 걷는다. 분명 그것은 전혀 다른 길이며, 신묘하고 불가사의한 현미경을 가진 신을 즐겁게 하는 선과 미세함과 구조를 갖춘 길이리라. 예컨대 우리는  우리의 근면, 우리의 명예심, 우리의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세상이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밖에 우리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우리의 근면, 우리의 명예심, 우리의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 파충류 비늘에 대해서는 아직 현미경이 발명되지 않았다!

183 우리는 모두 비밀 정원이나 밭을 우리 안에 지니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언젠가 분출할 때를 기다리며 성장해 가는 활화산과 같다. 다만 이 분출의 시기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차도

184 템포는 음악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 발전의 힘에서도 중요하다. 우리의 경우에는 정열적이고도 느긋한 정신의 템포로서 발전의 안단테가 꼭 필요하다. 그리고 보수적인 가계의 정신은 실로 이러한종류의 것이다.

184 의식은 유기체에서 가장 최종적으로 발전한 것이며, 따라서 가장 미완성이고 무력한 부분이다. 의식으로부터 무수한 실책이 생겨나고, 그것이 동물이나 인간을 필요 이상으로 빨리 호메로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운명을 넘어서’ –파멸에 도달하게 한다.

184~185 지혜를 자기 몸에 동화시켜 본능으로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새로이 점진적으로 인간의 눈에 들어온 것으로서, 아직 확실하게 인식되지 않은 과제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우리의 착오만이 우리에게 동화되어 왔다는 사실, 우리의 모든 의식은 착오와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 사람들에게만 인식되는 과제인 것이다!

185 뭐라 했는가? 학문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에게 되도록 많은 쾌락과 최소한의 불쾌를 주는 데에 있다고? 그러나 가령 쾌락과 불쾌가 한 개의 끈으로 이어져 있어서, 한쪽을 되도록 많이 가지려는 자는 다른 한쪽도 되도록 많이 가질 수밖에 없다면 어떻겠는가? ‘하늘을 찌를 듯한 환호를 욕심내는 자는 또한 죽을 만큼의 비애도 각오해야 할 수밖에 없다면 어찌될 것인가? 실제로 그러할 것이 틀림없다! 적어도 스토아주의자는 그렇다는 것을 믿었고, 그들이 인생에서 되도록 적은 불쾌를 얻고자 되도록 적은 쾌락을 구한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다. (‘가장 덕이 높은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격언을 말할 때, 그들은 이 학파의 대중을 향한 표어와 함께, 신사들에 대한 회의론적인 날카로운 평가를 보여 준 것이었다.

185 실제로 우리는 학문을 통해 한쪽 목적과 함께 다른 쪽 목적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학문은 인간으로부터 기쁨을 박탈하고, 인간을 차갑고 기계적이고 스토아적으로 만드는 그러한 힘으로서 많은 사람들에 더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학문은 또한 위대한 고통을 가져오는 것으로서 발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아마 동시에 그 반대의 힘, 즉 환희의 새로운 별을 빛낼 위대한 능력도 발견될 것이다!

186 기쁨이나 고통을 줌으로써 우리는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뿐이다! 먼저 우리의 권력을 좀더 느끼게 해야만 할 것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고통을 준다. 쾌락보다는 고통이 권력을 느끼게 하는데 더욱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186 누군가에게 고통을 가할 때는 기쁨을 줄 때만큼의 쾌감, 그토록 순수한 쾌감이 거의 없다. 그것은 아직 우리에게 권력이 부족하다는 증거이거나, 또는 이 부족함에 진력이 났다는 표시이다.

187 반면 한번 기회가 생기면 맞서 싸우는 것이 명예롭다고 생각되는 동등한 자들에 대해서는 그만큼 정중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원근법적인 쾌감으로, 기사들은 조심스런 예의로 자신을 낮추면서 서로 대결했던 것이다.

별다른 긍지도, 원대한 정복에 대한 희망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동정이 가장 쾌적한 감정이다. 그들에게는 손쉬운 획득물 모든 번민하는 사람 이 매력적인 것이다. 여기서는 보통 창녀의 덕이라고 불리는 동정이 인기가 높다.

187 우리는 낡은 것, 확실히 소유하고 있는 것에 점차 권태를 느끼며 다시 다른 것에 손길을 뻗친다.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그곳에서 3개월 정도 생활한 뒤에는 더 이상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의 먼 해변이 우리의 소유욕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 소유물은 소유됨으로써 대개 시시해진다.

187~188 우리가 자신에게서 느끼는 쾌락은, 새로운 것을 계속해서 우리 자신 속에 흡수해 변형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하고 있다. – 소유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어떤 소유물에 권태를 느끼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권태를 느낀다는 것이다.(너무 많아도 사람들은 고민한다 버리거나 나누어 주고 싶은 욕구 또한 사랑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다.

188 그러나 소유의 충동이 가장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성 간의 사랑에서이다. 사랑하는 자는 상대를 무조건 독점하고자 한다. 그는 상대의 마음과 육체에 대한 절대권을 요구한다. 자기 혼자만 사랑받기를 원하며, 상대에게 최고의 존재로 임하려 들고, 상대를 지배하려 한다.

188 결국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고 무미건조하고 무가치하게 여겨져 어떠한 희생도 치를 수 있고, 모든 질서를 어지럽히고, 무슨 이익도 무시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성애의 이런 난폭한 소유욕이나 부정이 모든 시대에 걸쳐 그토록 찬미되고 신성화되는 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사람들이 이러한 성애로부터 에고이즘의 반대라고 생각되는 사랑의 개념을 끌어낸다. – 사랑은 분명 에고이즘의 가장 솔직한 표현일 텐데 는 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88~189 때로는 지상에도 일종의 사랑의 지속, 두 사람 상호의 소유욕이 새로운 욕망과 소유욕에, 즉 그들을 초월한 이상으로 향하는 공동의 고차원적 갈망에 길을 양보하는 사랑의 지속이 있다. 그러나 누가 이 사랑을 알겠는가? 누가 이 사랑을 체험했겠는가? 그것의 참된 이름은 우정이다.

189 이리하여 그 산에 오르게 되고, 그리고 실망한다. 돌연 그 산과 우리 발아래에 펼쳐진 풍경이 마치 마법에서 풀린 듯이 보인다. 우리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위대함은 선과 아름다움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더욱이 절대로 위로부터가 아니라 밑에서 바라볼 때만 감화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그대들의 주변에도 자기를 일정하게 먼 거리에서 조망했을 때 비로소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을 매력적이며 쾌활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자기인식은 그들에게는 금물이다.

191 하늘 높이 자라려는 나무가 과연 비바람이나 눈보라를 겪지 않고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불이익과 반대, 증오, 질투, 의심, 냉혹, 탐욕, 횡포 등등은, 덕의 위대한 성장에 거의 반드시 필요한, 저 알맞은 환경의 구성 성분이 아닐까. 약한 천성의 인간을 쓰러뜨리는 독은 강자에게는 강장제이며, 강자는 또한 그것을 독이라 부르지 않는다.

191 예로부터 찬양 받아 온 여러 미덕들은 결코 사심이 없거나’ ‘비이기적인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 미덕(근면순종순결경건정의 등)이 그 소유자에게는 대체로 유해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터이기 때문이다.

191~192 사람들은 근면한 사람을 칭찬한다. 그가 바로 그 근면 때문에 자신의 시력을 해치고 정신의 독창성이나 참신함을 상실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몸이 망가질 때까지 일한청년을 칭찬하고 애석해하길 마지 않는다.

193 무조건적인 근면이 확실히 부나 명예를 가져다 주지만, 그와 동시에 그 부와 명예를 누리게 하는 유일한 통로인 감각의 예민성을 앗아가는 예를, 또 권태나 정열에 대해 반항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예를.(인간 역사상 가장 근면한 시대인 현대는 그 엄청난 근면과 돈으로써 보다 많은 재능이 돈과 근면한 시대인 현대는 그 엄청난 근면과 돈으로써 보다 많은 재능과 돈과 근면을 생산해 낼 뿐이다. 돈을 벌기보다는 쓰기에 더 많은 재능이 필요한 시대다.

197 부패의 시대는 과실이 나무로부터 떨어지는 시대이다. 나는 지금 개인들, 즉 미래의 씨앗을 심는 사람들, 새롭게 정신적 식민운동과 국가적사회적 결합을 형성하는 창시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패라는 것은 한 민족의 가을에 대한 비방에 지나지 않는다.

199 , 그것은 죽음을 우리 몸으로부터 부단히 떼어 놓는 과정이다. ,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약해지고 늙은 것들에 대하여 잔혹하고 인정사정없이 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 그것은 죽음에 이른 것초췌해지는것늙은 것에 대해 경건한 마음이 없다는 말 아닐까? 결국 부단히 살해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은 모세는 말한다. ‘살인하지 말라!’

199 속세를 떠난 사람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 그는 더 높은 세계를 추구한다. 그는 모든 것을 긍정하는 사람보다 아득하게 멀리, 높이 날아가고자 한다. 그는 비상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내버린다. 그중에는 그에게 반드시 무가치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것이 많이 포함된다. 그는 그것들을 높은 곳에 대한 욕망의 희생물로 삼는다. 그런데 이런 희생과 내버림이야말로,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는 유일한 것이다.

201 이리하여 모두가 끊임없이 그들의 주변에 들어오는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성격과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 같지만, 그들 주위는 활기가 없어져 간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큰 도시와 유사하다. 명성은 그들의 성격처럼 끊임없이 변화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변화하는 수단이 이 변화를 바라고, 때에 따라 이런저런 현실 또는 허구의 성질을 끄집어내 무대에 올리기 때문이다.

201 그들이 바라는 바는 그만큼 한층 견고하게 흔들림 없이 저 멀리까지 빛나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때때로 희극이나 무대 연출을 필요로 한다.

202 모든 위대한 인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이 있다. 모든 역사는 그 덕분에 재차 저울 위에 올라간다. 그리하여 과거의 많은 비밀이, 그것이 숨어 잇던 은신처에서 튕겨 나온다. 그의 태양 아래로. 앞으로 무엇이 또 역사가 될지 우리가 실필 길은 전혀 없다. 과거는 아마 본질상 계속 발견되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이리라! 지금도 여전히 많은, 시간을 거슬러 작용하는 힘이 필요하다!

206 보수를 위해 일을 구한다는 점은 문명국가에 사는 거의 모든 인간에게 똑같다. 그들 모두에게 일은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별로 주의 깊게 일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저 그 일이 충분한 이익을 가져다 준다면 충분하다. 그런데 일의 기쁨 없이 노동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특이한 사람도 잇다. 골라 잡기 좋아하고 쉽게 만족하지 않은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일 그 자체가 최대의 수익이 아니라면 충분한 수익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렇게 독특한 인종에 속하는 이가 여러 부류의 예술가와 명상가이다.

206~207 또한 일생을 사냥, 여행, 연애, 모험에 소비하는 한가로운 사람들도 그러하다. 이들 모두는 그것이 쾌락과 관계될 때만, 그리고 필요할 때만 육체적 고통이나 힘들고 가혹한 일을 감당하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철저히 게으르다. 설령 빈곤, 불명예, 건강이나 생명의 위험 등이 이 게으름에 연결되어 있을지라도. 그들은 권태보다도, 차라리 즐거움이 없는 일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들의일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권태가 필요하다. 사상가에게 또 모든 독창적인 정신에, 권태는 그 순조로운 항해나 즐거운 바람에 앞선 유쾌하지 못한 마음의 잔잔한 바다이다. 그들은 그것을 견디어 내야만 한다. 그런 거의 영향이 사라질 때를 계속 기다려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확실히 평범한 인간은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이다! 권태를 여러 방법으로 우리 몸에서 내쫓는 일은, 즐거움 없는 일을 하는 것만큼이나 천박하다.

214 이런 고민을 원하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를 기쁘게 하고 스스로에게 무언가를 보태려는 힘을 느낀다면, 그들은 또한 자기 특유의 내면적 고민을 창조하는 일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때 그들의 창조물은 더욱 정교해지고, 그들의 만족은 좋은 음악과 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세계를 고뇌의 부르짖음으로, 지나치리만치 고뇌의 감정만으로 가득 채워 버리고 있다! 그들 스스로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타인의 불행을 벽에 그린다. 그들은 항상 타인을 필요로 한다! 끊임없이 또 다른 타인을 필요로 한다! 나의 친구들이여, 용서해 다오. 내가 감히 나의 행복을 벽에 그리려는 것을.

2

222 내가 이제까지 가장 노력했고 지금도 가장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물이 무엇인가 하는 점보다는 사물이 무엇이라 불리는가 하는 점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하는 일이다.

224 남자는 자신의 소음 한가운데, 온갖 구상이나 기획의 격랑 한가운데 있을 때, 조용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자기의 곁을 미끄러져 가는 모습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행복과 은둔을 동경하게 된다. 그 존재가 바로 여성이다. 남자는 그 여성 곁에 자기의 보다 좋은 자아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224 여성들의 매력과 그 가장 강력한 작용은, 철학자의 말을 빌려 말하면 원격작용인 것이다. 그러나 그 작용에는 우선 필요한 것이 있다. – 거리라는 것이!

225 비를 품은 따뜻한 바람이, 음악적인 느낌과 선율을 만들어 내는 기쁨을 일으키는 것은 왜 일까? 교회를 가득 채우고, 여성들에게 사라의 황홀함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도 그와 같은 바람이 아닐까?

226 사람들이 한 청년을 현자 앞에 데리고 와서 말했다. ‘보십시오. 여자 때문에 타락한 자입니다.’그러자 현자는 고개를 흔들며 미소지었다. ‘그렇게 한 것은 남자다.’ 그는 말했다. ‘여자를 타락시키는 것이야말로 남자다. 여자의 모든 결함을 남자가 보상하고 고쳐야만 한다. 왜냐하면 남자는 멋대로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여성은 그 이미지를 흉내 내어 자신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231 대중적은 것은 어느 때이건 가면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가면 같은 것으로 하여금, 이러한 가극의 선율이나 카덴차 속에서 리듬의 도약과 즐거움 속에서 깡충깡충 뛰어다니게 놔두면 좋겠다.! 저 고대인의 생활을 보라! 어떻게 우리에게 그것을 이해시키겠는가! 만약 우리가 가면의 즐거움, 모든 가면 같은 것의 스스럼없는 양심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233 본디 정열적이라는 것은 지극히 말수가 적은 것이다! 침묵하여 낭패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말이 되어 나올 때는, 더없이 혼란하여 그 부조리 때문에 스스로도 수치를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 덕분에 이러한 무대 위의 부자연스러움에 길들여져 잇다. 마치 또 다른 부자연스러움, 즉 노래하는 정열을 이탈리아인 덕분에 용서하는 것, 그것도 즐거이 용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34 그리스인은 이 길을 어디까지라도 따라간다. 두려울 정도로 멀리까지! 그들은 무대를 될 수 있는 한 옹색하게 구성하여 안쪽 깊숙이 있는 배경이 부여하는 모든 효과를 금지한다. 그리고 배우로 하여금 표정의 움직임이나 가벼운 동작을 불가능하게 하여, 그를 과장되고 딱딱한 가면을 슨 색다른 형태의 인물로 바꾸어 버린다. 이처럼 그들은 정열 그 자체로부터도 깊은 배경을 일반적으로 공포와 동정을 일으키는 정경의 자연적인 효과에 대항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섰다. 그들은 공포와 동정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234 무엇이 그리스 비극 시인의 근면창의경쟁심을 가장 많이 부채질했는지 살펴보라. 감동으로 관중을 사로잡으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아테네인은 아름다운 이야기 쪽에 귀 기울이기 위해 극장에 다녔던 것이다. 그래서 소포클레스가 노렸던 것은 아름다운 이야기 쪽이었다! 나의 이러한 이단적인 견해를 관대하게 용서해 달라!

235 그리스인들의 경우에는 그 사교감각이 현재와 과거의 프랑스인의 그것에 비해서 훨씬 뒤쳐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인 가운데 가장 재치 있는 사람에게서조차 그렇게 적은 재치를, 그리고 가장 총명한 사람에게서 조차 그토록 적은 에스프리를 발견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아아! 사람들은 이제 내가 말하는 바를 믿지 않으리라. 그렇지만 내 영혼에게는 이런 것이 얼마나 많이 떠돌고 있는가! ‘침묵이 소중하다라고 마르티알리스는 탄식했다. 모든 수다쟁이들과 같이.

236 고대 로마를 자기의 것으로 취하였다. 그리고 로마는 또 얼마나 고대적인 그리스의 훌륭하고 고귀한 모든 것에 난폭하고도 단순한 방식으로 손을 댔던가! 그것을 얼마나 제멋대로 로마의 현재로 해석했는가! 얼마나 고의로 거리낌없이, 순간이라 불리는 나비 날개의 가루를 털어 버렸던가!

237 시라고 하는 것이 생겨났던 저 고대에도 사람들은 결국 이익을 안중에 두었던 것이다. 그것도 매우 큰 이익을. 즉 사람들이 리듬문장의 모든 구성분자를 새롭게 조직하고 단어의 선택을 명령하고, 인간의 사상을 보다 어둡고 이상하고 희미하게 만드는 새로운 색깔을 부여하는 힘 을 문체의 한가운데에 끌어들였던 그 시대에 말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미신적인 이익성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운율이 있는 시구를 산문보다 더 잘 기억한다는 점이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237 리듬은 말하자면 하나의 강제력이다. 리듬은 그것에 굴복하고, 또 영합하도록 하는 누르기 어려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발걸음뿐만 아니라 영혼도, 계속 울리는 이 박자에 따른다. 추측컨대 신의 영혼 또한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이간은 리듬을 써서 신을 강제하고 제압하려고 시도했다.

238 어원상 선율은 진정제를 의미한다. 그 자체가 평온한 것이 아니라, 그 여파가 사람을 평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39 인간은 초기에 예견하는 신보다는 높은 신으로 여겨졌던 아폴로를 자기 편으로 함으로써 미래를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제의 양식을 갖춘 기원의 말이 운율에 따랄 정확히 제창되면 그것은 장래를 구속한다. 그것은 리듬의 신이며 운명의 여신들조차 구속할 수 있는 아폴로의 발명품인 것이다.

239 가장 진지한 철학자들조차 다른 것들은 엄밀하게 온갖 확실성을 갖고 취급하면서도, 그의 사상에 힘과 신빙성을 부여할 때에는 여전히 시인의 언어를 빌려온다는 점이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그러나 진리의 입장에서는, 시인이 진리에 반대하는 때보다 동의하는 때 더욱더 위험하다! 호머가 말하는 것처럼 시인은 참으로 거짓말을 많이 한다.

241 여기에 어떤 음악가가 있다. 그는 번민하고 짓눌리며 가책을 받았던 영혼의 나라로부터 음조를 발견한다. 게다가 말이 없는 동물들에게조차 언어를 준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음악가와 비교할 때 솜씨가 훨씬 뛰어나다. 늦가을의 음색을 연주할 때 최후의, 가장 최후의, 가장 짧은 쾌락의 형용할 수 없는 감동적인 행복을 표현하는 데 그에 견줄 많나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영혼의 비밀스럽고도 기분 나쁜 한밤중 거기에서는 원인과 결과의 실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며 당장이라도 무엇인가가 ()로부터출현할 것 같다 을 표현하는 울림(소리)를 알고 잇다. 말하자면 가장 쓰고 싫어할 만한 물방울과 가장 달콤한 물방울이 뒤섞인, 쭉 들이켰던 행복의 빈 잔에 남은 찌꺼기를 아는 것이다. 그는 거기서 남들보다 훨씬 능숙하게 행복을 찾아낸다. 그는 더 이상 뛸 수도 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걷지조차 못할 만큼 피로에 지친 영혼들이 어떻게 발을 질질 끌며 걷는지를 안다. 그는 숨겨진 고통, 위안 없는 이해, 고백 없는 작별의 조심스런 시선을 안다. 그는 숨겨진 고통, 위안 없는 이해, 고백 없는 작별의 조심스런 시선을 안다. 아니! 모든 비밀스러운 비참을 노래한 오르페우스로서, 그는 누구보다도 더 위대하다.

242 무너져 가는 집의 구석진 곳에 조용히 앉아 있기를 무엇보다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다. 사실 그는 거기에서 세상으로부터, 또 자기 자신으로부터 몸을 숨기고 그의 진정한 걸작을 그린다. 그 걸작들은 전부 매우 짧은 것들이다. 종종 단지 한 음절에도 미치지 못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비로소 그는 완전히 선하고 위대하며 완벽하게 된다. 아마도 거기에서만.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알기에 그는 너무 허영심이 강하다.

243 책이나 기록 같은 것들은 사상가에 따라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사상가는 책 속에 빛을 모은다. 그의 마음속에 번쩍였던 인식의 광선으로부터 재빨리 훔쳐 낸 빛을

다른 사상가는 우리에게 그림자만을 줄 뿐이다. 낮 동안 그의 마음속에 쌓아 놓았던 것의 검은색이나 회색 잔상을 재현하는 것이다.

244 산문의 대가들은 거의 항상 시인들이었다.—공공연하게든 은연중에든, 또는 단지 침실에서만이든 간에 는 사실을 주목하라! 실제로 사람들은 좋은 시를 마주 대했을 때에만 좋은 산문을 쓰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문은 시에 대한 끊임없는 우아한 전쟁이기에. 산문의 모든 매력은 그것이 끊임없이 시를 피하고 거기에 대항한다는 점에 있다. 모든 추상적 표현은 시에 대한 농담으로서, 말하자면 조롱 섞인 목소리로 낭독될 것이다. 모든 건조성과 차가움은 사랑스런 시의 여신을 가련한 절망으로 밀어 넣으리라. 때로는 잠시 동안의 화해와 조화가 있다. 그런가 하면 갑작스런 반발과 비웃음도 있다.

245 B: 아니, 그렇다면 당신은 왜 쓰는가?

    A: 그런데 나의 친구여. 솔직히 말한다면, 여태까지 나의 생각들을 털어버릴 다른 어떤 방식도 발견해 내지 못했다.

    B: 왜 당신은 생각들을 털어 버리고자 하는가?

    A: 왜 그렇게 하려느냐고? 내가 그렇게 하려 한다고? 아아, 나는 어쩔 수 없기에….

    B: 아니, 됐네! 됐어!

246 광대한 혼의 깊이와 배경의 풍부함을 갖춘, 어둡고 고뇌하며 불타오르던 인간, 웃음이 삶의 약이며 웃지 않았던 날에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했던 사상가, 그 샹포르는 프랑스인보다도 오히려 이탈리아인인 단테나 레오파르디와 가까운 부류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샹포르르이 마지막 말을 알고 있다. 그는 시에예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아! 나의 친구여.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가. 청동처럼 견고하지 않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나는 마침내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죽어 가는 프랑스인의 말은 아니다.

250 이 철학자의 이렇나 종류의 탈선이나 악덕은 항상 무엇보다도 먼저 받아들여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탈선이나 악덕은 항상 가장 쉽게 모방되고, 오랜 준비훈련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251 유대인에 대한 바그너의 증오는 쇼펜하우어적이다. 유대인의 가장 위대한 행위조차 바그너는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실로 그리스도교의 발명자가 아닌가!

252 ‘정열은 스토아주의나 위선보다 낫다. 악에 대해서도 진솔한 것은 전통적인 도덕에 열중에 스스로를 잃는 것보다 아직은 낫다. 자유로운 인간은 악할 수도 있고 선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자유한 인간은 자연에 대해 수치이며 천상 또는 지상의 위안을 공유하지 못한다. 결국 자유로워지고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신의 노력으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누구에게나 자유는 기적적인 선물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259 우리는 도덕을 초월해야만 한다. 또한 당장이라도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의 염려스러운 긴장을 느끼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을 초월하여 춤추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광대 없이는 못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술 없이 살 수 있겠는가? 그대들이 아직 얼마간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동안은, 아직 우리의 동지가 아니다!

3

269 붓다가 죽은 뒤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수 세기 동안 동굴 안에 그의 그림자를 안치했다. 거대하고 섬뜩한 그림자를. 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의 세상이기에 분명 앞으로도 수천 년에 걸쳐 신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온갖 동굴이 존재하리라. 그리고 우리는, 계속 신의 그림자를 정복해야만 한다!

276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스스로를 자신의 무게와 정도에 따라 평가하는 것 그것이 그 시대에는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려는 경향은 광기로 여겨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고독은 모든 불행과 고통에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자유의지가 악한 양심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가 자유롭지 못하면 못할수록, 한 행위에 어떤 개인적 의향보다 군집본능이 더 많이 표현되면 될수록, 인간은 더욱 더 자신을 도덕적이라고 느꼈다. 무리를 해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개인이 그것을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개인 속에서, 그리고 이웃이나 심지어 모든 대중 속에서도 양심의 바늘을 자극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사고방식은 참으로 참으로 많이 변하였다.

287 이에 반해 그리스인들은 차라리 죄는 하나의 고귀함을 가질 수도 있다는 인식을 지녔다. 이를테면 프로메테우스이 경우에서처럼 도둑질조차도, 또 아이아스의 경우처럼 미칠 듯한 질투심의 표현으로 가축을 무분멸하게 살해하는 것조차도, 그리스인들은 죄에 대한 하나의 위엄을 창안하려는 욕구에서, 또 그 안에서 고귀한 가치를 구현하려는 욕구에서 비극을 창작하게 되었다.  반면에 모든 문학적 재질들과 숭고함에 대한 애착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비극에 내재된 심오한 본질을 알지 못했다. 그 비극은 하나의 예술이요 쾌락이다.

294 우리는 사물에게 새로운 색깔을 주어 왔다. 또한 거기에 계속해서 새로운 책을 칠하고 있다. 그러나 옛날의 거장 과거의 인류 이 보여주는 색채의 화려함에 맞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295 너희는 술에 취해 종종 계단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인생을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취한 덕분에 떨여져도 갈비뼈를 부러뜨리지는 않는다. 너희 근육은 너무 느슨해져 있고 너희 두뇌는 너무 어리석어, 계단의 돌들이 얼마나 딱딱한가를 알지 못한다. 너희에 비해 우리에게 인생은 커다란 위험이다. 우리는 유리로 만들어졌으니까. 단지 서로 쿵하고 부딪치기만 해도 우리는 고통스럽다! 만일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만다!

296 에고이즘은 감정의 원근법이다. 가까운 것일수록 크고 중요해 보이며, 반대로 사물이 멀어짐에 따라 그 크기나 중요성은 줄어든다.

296 위대한 승리의 가장 좋은 점은, 그 승리자에게서 패배의 두려움을 없애 준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에게 말한다. ‘언젠가 한 번쯤은 져도 괜찮지 않을까? 나에게는 지금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여유가 있다.’

298 자신을 깊이 있게 알고 잇는 사람은 명석함을 얻기 위해 힘쓴다. 대중에게 자신을 깊이 있게 보이려는 사람은 애매함을 얻으려 애쓴다. 대중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이든지 깊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 겁이 많아서 물 속으로 들어가기를 꺼린다.

301 그는 사상가이다. 이것은 사물을 실제로 존재하는 상태보다 더욱 단순화하는 법을 그가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304 그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가 아이를 갖지 않기를 바라자. 그는 아이에게도 질투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아이가 될 수 없으므로.

306 목소리가 큰 자는 섬세한 것을 생각할 능력이 거의 없다.

308 늦게 깨닫는 사람들은 생각한다. 느림도 바로 인식의 일부라고.

310 수학의 정밀함과 엄격함을 되도록이면 모든 학문에 도입하자. 이 방법을 쓰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이 방법으로 우리 인간의 사물에 대한 관계를 확정 짓기 위해서이다. 수학은 단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지식에 이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311 책이란 책을 모두 뛰어넘은 저편으로 우리를 데려다 주지 못하는 책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311 과거 전체를 되찾고 싶어 하는 자아, 아울러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무엇 하나 잃지 않으려는 자아! , 내 탐욕의 불꽃이여! , 내가 몇백 명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 이런 탄식을 겪어 보지 못한 자는 누구든지 지식을 추구하는 자의 정열도 알 수 없다.

313 승자는 우연을 믿지 않는다.

313 독창성이란 무엇인가? 우리 모두의 눈앞에 있지만 아직 이름이 없으므로 불릴 수 없는 어떤 것을 보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 있는 평범한 것, 그것은 이름이 있어 비로소 사물로서 보이는 것이다독창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명명자들이기도 했다.

314 너의 양심은 무엇을 말하는가?

    너는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

315 너는 어떤 자를 악하다고 부르는가?

     항상 남에게 모욕을 주려는 자를.

    네게 가장 인간적인 행위란 무엇인가?

    누구도 부끄럽게 하지 않은 것.

    무엇이 자유의 징표인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

4부 성 자누아리우스

323 비록 우리가 현존재의 아름다운 혼돈에 직면하여 모든 사려 깊은 이성이나 선의 존재를 부인한다 해도, 여전히 가장 고된 시험을 거쳐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 인격적 섭리라는 사상이 가장 날카로운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은 검증이라는 최상의 변호사를 데리고, 자기가 만나는 모든 것이 언제나 최선이 된다는 점을 우리가 분명히 경험하도록 해준다. 매일, 매시간의 삶은 바로 이 명제를 다시 증명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바람도 없는 듯 보인다. 그것은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즉 나쁜 날씨, 좋은 날씨, 친구를 읾음, , 비방, 편지가 도착하지 않음, 발목을 삠, 가게를 들여다봄, 반론, 책을 펴는 것, , 기만이 모든 것은 당장에 또는 매우 발리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판명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깊은 의미와 이익으로 가득한 것들이다!

326 이들 홀이나 정원에서 산책할 때, 우리는 차라리 우리 자신을 돌이나 초목으로 바꿔 우리 자신 안으로 산책하기를 바란다.

327 정신의 어떤 태도들 때문에 위대한 인물조차도 그가 천민이나 반천민 출신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곤 한다. 무엇보다도 그 점을 드러내는 것은 그들 사상의 걸음걸이이다. 그들은 걸을 줄 모른다.

336 반면에 나는 지속적인 습관을 싫어한다. 마치 폭군이 가까이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다. 지속적인 습관이 필연적으로 탄생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사태에서, 나는 내 신변의 공기가 나를 짓눌러 오는 것처럼 느낀다. 예컨대 관직이나, 똑 같은 인간들과 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것, 고정된 주거, 변함 없는 건강 등이 그런 것들이다.

337 나는 이 통찰을 길 위에서 낚아챘다. 그것이 날아가 버리지 못하도록 하려고 손에 닿자마자 서투른 말(언어)로 그것을 재빨리 붙잡아 두었다. 그러나 그 통찰은 무미건조한 말에 부딪치자 바싹 말라 죽은 채, 말에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이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왜 내가 이 새를 잡았을 때 그렇게 행복한 느낌을 받았는지 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341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모든 도덕을 나는 싫어한다. ‘이것을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면에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반복해서 하도록 하고, 밤은 밤대로 그것을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그리고 그 일을 되도록 잘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나를 선동하는 도덕이다.

342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가 내버려 두는 것을 결정한다. 우리는 행동함으로써 내버려 둔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요 나의 신조, 플라시툼이다. 반대로 나는 누을 크게 뜨고 자신의 영락을 위해 노력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부정적인 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덕의 본질은 부정과 단념이기 때문이다.

349 A: 나는 여전히 너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일가? 너는 찾고 있느냐? 오늘날 이 현실 세계에 네 안식처와 이상의 별은 어디에 있는가? 어느 태양 아래 어느 곳에서 네가 몸을 눕혀야, 많은 행복이 네게도 찾아오고 네 생존 의미가 승인이 될까? ‘그것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 풀어야 할 문제다.’ 너는 그렇게 나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공적인 찬ㅁ견이나 타인과 사회를 위한 배려 등은 마음속으로부터 쫓아 버려야 한다!’라고.

B: 내가 원하는 것은 그 이상이다. 나는 결코 찾는 자가 아니다.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의 태양을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354 이익을 좇는 삶이란 사람들에게, 끈임없이 자신을 기만하고 계략을 짜내고 남을 앞지르는 일에 언제나 정신을 기진맥진하도록 소모해 버릴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정한 미덕은 어떤 일을 다른 사람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해치워 버리는 것, 그것이다.

356 인식은 비웃고, 한탄하고, 욕하고자 하는, 서로 모순관계에 잇는 여러 충동으로부터 생겨나는 결과가 아닐까?

356 음악의 눈길이나 표정을 견디며 잘 응대해 주어야 하고, 그 기이한 점도 관대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우리가 음악에 길들여진 순간, 다시 말해 그것을 기대하고, 그것이 없으면 적막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보다 더 나은 것을 세상으로부터 원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것만을 원하는 겸손하고 진심으로 감동한 연인들이 될 때까지, 그 음악은 우리를 강제하며 박력있게 매료하기를 계속한다.

357 우리는 결국 생소한 것에 대해서 우리의 선의와 인내, 공정함, 부드러움을 베푼 보상을 받는다. 점차 그것은 베일을 벗고 그려낼 수 없는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드러난다. 그것이 우리의 환대에 대한 보답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방식으로 사랑을 배울 것이다.

364 한 작품의 궁극적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지식과 선한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아름다움의 산봉우리를 덮은 구름의 베일이 사라지고 태양이 그곳에서 빛나기 위해서는 매우 드문 우연의 행운이 필요하다.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정확한 지점에 서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영혼으로서 베일을 벗겨야 한다. 또한 이 아름다움을 붙들어 산봉우리를 계속 지배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표현과 비유를 구사해야 한다.

364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운 모든 것이 두 번 그리고 세 번 주어지기를하고 기도했다. 아아, 그들은 신에게 하소연할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신적이지 않은 현실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전혀 주지 않거나 또는 오직 한 번만의 아름다움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다. 즉 이 세계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물들이 아름다운 순간이나 그것이 드러날 기회는 너무 빈곤하다고. 그러나 분명 이것이 생의 가장 강력한 매력이리라. 삶은 아름다운 가능성의 황금실로 짜니 베일 약속하고 거부하고 수줍어하며, 냉소적이고 동정적인, 또 유혹적인로 싸여 있다. 그렇다. 삶은 여성이다!

5부 우리들 두려움 모르는 존재들

376 실제로 우리 철학자이며 자유로운 정신인 자들은 늙은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새로운 새벽빛을 받는 기분을 느낀다. 이때 우리 가슴에는 가마, 놀라움, 예감, 기대가 흘러넘친다. 비록 아직 밝지는 않다 하더라도 마침내 수평선이 우리 앞에 다시 펼쳐진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우리 배는 다시 모험을 떠날 것이며 온갖 위험을 무릅쓸 것이다. 인식의 모든 모험이 다시 허락되었다. 바다가, 우리의 바다가 다시 열리고 있다. 아마도 이렇까지 열린 바다는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으리라.

378 이렇게 하여 왜 학문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도덕 문제로 되돌아간다. ‘, 자연,역사가 비도덕적인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도덕은 존재하는가?’ 성실한 인간 학문에 대한 신앙이 전제로 하는 것처럼 저 과감한 의미에서 성실한 인간은 분명히 그 신앙을 통해 삶,자연,역사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긍정한다. 그들이 이 다른 세계를 긍정하는 한 그들은 바로 그 때문에 반대의 것, 즉 우리 세계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388 유럽인은 자신을 도덕적으로 위장한다. 길들여지기에 좋은 이유들을 달고 잇는 아프고, 병약하며, 절름발이인 동물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거의 반도 완성되지 않았으며 약하고 발육이 정지된 자이기 때문이다.

392 나는 묻고 싶다. 인식에 대한 우리의 욕구는 이 친숙한 것을 향한 바람이 아닐까? 모든 낯선 것, 익숙하지 않은 것, 의심스러운 것 속에서, 이제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 않을 어떤 것을 발견하려는 의지가 아닐까? 우리에게 인식이라고 명령하는 것은 사실 두려움의 본능이 아닐까? 아울러 지식을 성취한 자들의 환희는 안전감의 회복에 대한 환희가 아닐까? 세계를 이념으로 환원하고는 그것을 인식이라고 생각한 철학자가 있었다. 그것은 이념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이미 친숙했고, 그가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더 이상 이념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403 내기를 해도 좋다. 항상 위대한 도덕 용어들, 말하자면 정의라든가, 지혜라든가, 성스러움, 미덕과 같은 요란한 미사여구들, 그리고 으레 금욕주의 태도이다.(금욕주의는 인간에게 결여되어 잇는 것을 얼마나 잘 숨겨 주는지!) 항상 현명한 침묵이나 겸손이나 부드러움의 모든 이상주의적 외투의 유형들에게 휘감겨서, 불치의 자기 경멸자나 불치의 허영주머니가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다.

403 그들은 홀로 떠나, 조용히 되어 고독을 택하며 동굴에 숨어서 현자가 된다….. 뭐라고? 지혜는 철학자가 정신으로부터 숨으려는 은신처라고?

409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자극을 받아 비로소 사상으로 더듬어 가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문밖에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 걸으면서, 뛰면서, 오르면서, 춤추면서, 우리는 즐겨 적막한 산이나 바닷가의 길을 사색하며 걷는다. 길조차 생각에 잠긴 것 같은 길가를 걸으면서 생각한다. , 인간, 음악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걸을 수 있는가? 더욱이 춤출 수 있는가?’

417 나무들처럼 우리는 자란다. – 모든 생명이 그렇듯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한 장소만이 아닌 모든 곳에서, 한 방향이 아닌 위로, 밖으로, 안으로, 아래로 똑같이 성장한다. 우리는 에너지는 줄기, 가지 그리고 불리로 동시에 내닫는다. 우리가 어떤 일을 개별적으로 행한다든가, 개별적인 어떤 것으로서 존재하기란 불가능하다.

이것이 이미 내가 말했듯이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해 자라고 있다. 비록 이것이 우리의 불행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번개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서면 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그 점에서 우리의 숙명을 에누리 없이 존중하리라. 우리는 이것을 다른사람과 나누어 가지거나 전하지 않을 것이다. 높은 고지의 숙명, 우리의 숙명이여…..

424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그 가장 시대적인 것들을 우리 안에 던져 넣고, 시대의 부정한 새들이 오물을 떨어뜨리고, 어린아이들이 그 허섭스레기를 쑤셔 두고, 피로에 지친 나그네가 우리 곁에서 쉬면서 그 크고 작은 고통을 우리 안에 던져 넣는데, 우리는 이를 막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태까지 우리가 했던 대로 해 나갈 것이다. 사람이 우리에게 던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의 깊은 곳으로 끌어들이라 왜냐하면 우리는 깊으며, 잊지 않기 때문이다. – 그리고 다시 맑아질 것이다.

429 자기의 독자적인 체험이라는 모험을 통해 알려는 자는 누구든지 그 바람을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한 가지를 필요로 한다. 곧 위대한 건강이다. 이런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얻고 계속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건강은 반복해서 희생으로 제공되며 또 제공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니체의 생애와 사상

538 니체의 첫 번째 저서 <비극의 탄생> (1872)은 그가 고전학의 굴레에서 벗어났음을 보여 준다. 그는 이 작품에서 그리스 비극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전자는 중용,제약,조화를, 후자는 거침없는 정열을 표현함)의 결합에서 나왔으며,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와  낙관주의가 그리스 비극을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미학사의 고전으로 꼽힌다.

540 니체의 책들은 대부분 다른 철학책처럼 논변과 반론을 가지고 상세하게 설명하는 확장된 산문의 형식이 아니라 경구, 성경 구절, 몇몇 문단으로 이루어진 단편화된 형태로 이루어졌다. 독자로 하여금 모든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하는 니체의 전형적인 방법은 설득적인 논변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인상의 이미지를 주는 것이다.

540 여기에도 주장은 있지만 암시의 형태로 등장하기 때문에 은유에서 의미를 이끌어 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방식은 논변이 아니라 통찰, 독자에게 번개의 섬광처럼 다가오는 통찰을 보여 주기 위해 채택된 것이다.

541 그는 늘 예술적 성취가 병리적 상황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41 그는 늘 홀로 병고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성공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1880년대의 그는 동정을 보내야 할 인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 끝없는 기쁨을 느끼며 이룩했을 자신의 문체로 한 권 한 권 책을 써내면서 어느 누구보다도 더 삶에 대한 경이와 힘과 기쁨을 찬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42 니체가 갈구한 인간의 참된 모습은 고뇌를 극복하여 힘차게 산다는 그리스 비극적인 자세였다. 그는 거기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의지를 발견한다.

542 니체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그리스 인은 아름다움과 빛의 신인 아폴로를 상징하는 강한 빛을 갈구한 긍정적인 민족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인생의 어둠이나 모순, 비합리성에 대한 감수성이 민감했다 한다.

그래서 그리스인은 부정적인 세계를 정규하면서 굳이 인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형체 잇는 사물을 파괴하여 새로운 사물을 탄생시키는 근원적인 의지력이다. 이 의지를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이름 붙였다.

544 겁먹지 말고

    네가 서 있는 곳을 깊게 파 내려가라!

    그 밑에 샘물이 존재한다!

    밑은 언제나 지옥이다!”라 외치는 것은,

     검은 옷의 은자에게 맡기자.

544 “이것을 하지말라! 그만 둬! 자신을 이겨 내라!” 이렇게 외치는 도덕을 니체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는 그와는 반대로 무언가를 해라, 계속해서 해라, 아침부터 밤까지 해라, 그리고 밤에는 그것을 꿈꾸라.” 이러한 격려와 용기를 주는 도덕, 그리고 이를 훌륭히 해내는 것, 가능한 한 혼자 훌륭히 해내는 것 외에는 무엇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도덕을 높이 평가했다. 이와 같이 살아가는 자들 중 삶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차례로 탈락한다.

544 니체의 엄격한 눈은 오로지 앞을 본다 무엇을 버릴지의 결정은 자신이 해야만 합니다. 나는 행함으로써 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니체의 신조였다. 그는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영락을 갈구하지 않았으며, 모든 퇴영적인 덕, 본질이 부정과 자기 단념 자체인 덕을 원치 않았다.

544 “당신은 현재를 살고, 또 살아 온 인생을 계속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아무런 새로운 것 없이, 온갖 고통과 쾌락, 사상과 탄식, 당신의 인생에서의 무수한 크고 작은 일들 전부가 당신의 몸을 회귀해야 한다. 더욱이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같은 순서와 맥락을 따라….” 악마와 이와 같이 고하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분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인가? 이 질문은 최대 위기를 맞은 여러분의 행위에 더욱 압박을 가할 것이다. 인간은 얼마만큼 자신과 인생을 안타까워해야 할까?

544 무언가를 쓰다 보면 점점 이해받고 싶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이해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것임이 분명하다. 누군가가 이 책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어도 책에 대한 저항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저자 니체의 의도였을지 모른다. 그는 아무에게나이해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모든 고귀한 정신과 취미는 그 자신을 전달하려는 경우, 듣는 자를 고른다. 듣는 자를 고르는 것으로 방어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쓰는 문체상의 섬세한 법칙은 동시에 사람을 멀리하고 거리감을 느끼게 하며 출입과 이해를 금한다.

545 여기서 지적에 두어야 할 점은 니체가 책의 구상을 아주 좋아했다는 것이다. 사후에 출판된 자료 중에도 이런 구상들이 수십 개나 포함되어 있고, 그 중에는 계획만 되고 실현은 안 된  <권력의 의지>에 관한 25가지 의 서로 다른 구상들이 들어 있으며, 구상으로서만 남아 잇는 책들의 구상도 몇 개 된다. 그는 또한 가상의 책들을 위해 수많은 표지를 그려 놓았고 출판 일자만 빼놓고는 거기다 제목, 저자, 출판사명 등을 잉크로 깔끔하게 써 놓았다.

545 새해에 그는 세상 사람들의 머리를 향해 자신이 가진 모든 정신적 포탄을 남김없이 쏴대기로 한 것 같았다.

547 이처럼 세계에는 처음부터 절대적인 진리,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을 니힐리즘이라 한다. 니힐리즘에서는 인간은 무엇을 위해에 대한 대답을 잃는다. ‘신은 죽었다란 인간의 최고 가치를 잃는 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니체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니힐리즘에 직면하는 때가 오리라 예언한 것이다.

547 의미 없는 세계를 긍정적으로 산다.  니힐리즘이 공공연해진 이 세계에서 어떻게 인간은 힘차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에 의미가 없다 한다면, 그것은 견디기 어렵지 않을까? 이 의미 없는 반복이라는 자세를 니체는 영겁회귀라는 극단적인 본보기로 표현한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에는 창조도 종말도 없다 시간은 둥근 원이다 .같은 것의 반복이 영원히 계속되는, 영겁회귀이다.

이러한 세계에는 꿈도 희망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생각한다. 이 세계를 잇는 그대로 받아들여 사랑해야만 한다고. 창조와 파괴가 영원한 둥근 고리의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이것이 생이었던가, 그렇다면 한 번 더!” 하며 순간을 다시 사는 것이다.

548 예를 들어 자신이 있는 사회의 세일즈맨이었다고 하자. 회사로부터는 할당량이 부과되어 있다. 자신은 할당량을 좀처럼 채우지 못한다. 다른 사원들은 자신을 점점 추월해 간다.

그런 이유로 뭘 이 정도 가지고! 힘내서 할당량을 채우자!’고 생각하면 좋지만, ‘내가 나쁜게 아니야, 상사가 나쁜거지라든가 회사가 나쁜거야’, ‘이 자본주의 사회가 나쁜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현실을 원망하는 것이다.

니체는 현실세계를 원망하는 것으로 인간의 힘찬 생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했다.

548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은 허구로, 진리의 세계는 달리 있다면 의욕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니체의 사상이 참신했던 것은 그가 도덕을 비판한 곳에 잇다. 일반적으로 도덕은 좋은 것이고, 누구도 그 진위에 대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그는 도덕을 비판했기 때문에 비난도 많이 받는다. 처음에는 모두에게 이해받지 못했다는 사실도 이해가 간다.

549 우선 니체는 진리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자만이 탄생시킨 망상에 불과하다 말한다.

549 니체에 의하면 진리가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인간적,생물적인 진리에의 충동이 존재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되면 진리란, 개개인 자신이 편한 쪽으로 만들어 나간 것임에 틀림없다. 이데아도 신도 인간의 날조이다 그리고 또한 도덕도 그것에 포함된다. ‘이것이 옳다고 외치는 사람은 어째서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시간에 도덕은 권력으로서 작용하는 것이었다.

551 가장 매력적인 니체의 이론은 스토아적 영웅주의라고 할 수 잇다. 즉 우리는 스스로 가장 어렵고 마땅치 않은 진리에 맞서 이를 분명하게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삶 그 자체 외에는 어떠한 보상도 없이 이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550 니체는 이 세계가 실재의 전체라고 믿었다. 무엇보다도 니체는 우리가 이 세계를 혐오하고 외면하고 거부하며 떠나야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결론을 거부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삶을 그 자체로 충실하게, 할 수 잇는 모든 것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체의 철학이 제기한 주된 내용은 신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554 무엇보다 삶을 긍정하는 가치를 받아들여야 하다고 니체는 말한다. 우리는 저마다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완전히 실현하면서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니체가 자주 쓴 표현 중 하나는 대담하게이다. 아마도 니체의 본질적인 가르침은 대담하게 너 자신이 되어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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