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아 연대기 책 - nania yeondaegi chaeg

[소설] 나니아 연대기 (Chronicles of Narnia)

이젠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나는, 반지의 제왕 리뷰에 이은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작품들 리뷰' 그 제 2탄.;;;

예전 반지의 제왕 소설 리뷰를 적으면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이 반지의 제왕은 책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끝을 거의 다 꿰어맞출 수 있었다.' 고.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개인 선호작품 순위 3위를 차지하고 있는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는 내게 있어서 완전 반대의 소설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바로 다음 장에 무슨 내용이 나올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럼 좋은 거 아니냐고? 뭐... 좋은 말로 하자면 이야기가 창의적이고 독특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근데 (나 같은) 사람에 따라서는 이야기가 좀 황당하다? 엉뚱하다? 라고 느낄 수도 있고.

아마도 이것은 (반지의 제왕과는 달리) 나니아 연대기는 제대로 아동용 소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지는 특성이 아닐까 싶다. 아동용 소설 중에선 이야기 구성이나 설정이 좀 황당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소설을 못 봤거든. 진짜로, 이건 나니아 연대기뿐만 아니라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엘리나 퍼즌의 '작은 사랑 이야기' (원제: 작은 책방) 나 '찰리와 초콜릿 공장' 부터 (미안하지만 개인적으론 그리 재밌는지 잘 모르겠는) '해리 포터' 에 이르기까지, 모든 아동용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바다. 그리고 그래야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아이들의 생각은 어른의 그것과 많이 다른 법이니까. 아동용 소설에서는 캐릭터의 성숙도나 이야기의 개연성/치밀함이 주 매력 포인트가 아니라 아이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구성/설정의 독특함이 가장 주요 매력 포인트인 것 같다. 다만 다른 점은 각 이야기, 혹은 작가별로 그 호기심과 상상력을 충족시키는 독특한 구성/설정을 어떤 느낌으로 이야기 속에 집어넣느냐-가 좀 다를 뿐이지... 예를 들자면 '작은 사랑 이야기' 에서는 꿈 속에서 들리는 동물간의 대화-처럼 환상 같고 꿈 같은 아름다움으로, '찰리와 초콜릿 공장' 에서는 초콜릿 강과 설탕 배, 흘끔 뒤돌아보는 네모 과자-처럼 때로 너무 뻔뻔하다 싶을 만큼 황당하지만 그러나 달콤하고 따뜻한 유쾌함으로, '해리 포터' 에서는 기기묘묘한 동물/마법/약초 등을 비롯해 심지어 유령까지 등장하는, 정말 '어떻게 이런 걸 상상해냈을까' 싶을 정도로 독특하지만 조금은 으스스함으로-하는 식으로.

나니아 연대기가 이 호기심과 상상력을 충족시키는 방법은 굳이 말하자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기 위해 성경적인, 혹은 신화 속 컨셉을 소설 속 장치로 바꾸어 적용함으로' 인 것 같다. 말하자면, 나니아 연대기는 위에 언급된 다른 소설들과는 좀 다르게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어떠한 목적을 뚜렷이 가지고 있기에 이 목적으로 인해 이야기의 구성이나 설정, 흐름이 도저히 일반적인 이야기에 견주어 생각해서는 따라잡기 힘들 만큼 팡팡 튀게 되는 것인 셈. 또한 하나의 컨셉을 전혀 다른 이야기에, 그것도 읽는 이의 눈에 너무 뻔히 보이지는 않게끔 변형시켜 적용하려면 은근히 머리를 싸매야 한다. 물론 수많은 기독교 변증서를 펴낸 C. S. 루이스의 천재성도 단단히 한 몫하는 것 또한 사실이고. (천재가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천재-로 분류되는 사람은 다른 일반적인 사람과 사고방식의 회로 자체가 아예 좀 다르다. 이런 사람이 이야기를 쓰니 일반적인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

영화 및 영화 등장 캐릭터들은 이미 나올 때마다 한 편 한 편 (대충이나마) 리뷰를 한 터라 영화 리뷰는 의미가 없을 것 같고... (근데 정작 맨 첫 영화인 '사자와 마녀와 옷장' 은 안했다는 게 함정.;;;)

대신 여기에서는 소설 7개를 각각, 간략하게나마 전부 다 다뤄볼까 한다. (엄청나게 길어지겠군...;;;)

자, 그럼 시작.

1. 마법사의 조카

아는 사람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나니아 연대기는 C. S. 루이스가 2차 대전 당시 자신의 집에 피신 왔던 아이들과 지내게 된 것을 계기로 아이들에게 기독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로 좀 더 쉽게, 아이들의 취향과 눈높이에 맞추어 말해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쓰기 시작한 이야기이다. (이것만이 이유는 아니었지만 이게 큰 이유 중 하나였다.) 해서 나니아 연대기의 일곱 이야기는 각각 기독교의 일곱 교리/이론을 말하고 있다 한다.

그 중 첫 번째 이야기인 (그러나 사실 쓰여진 순서대로 하자면 2번째인가, 그렇지 아마?) 이 마법사의 조카는 기독교 교리 중 '창조론' 을 이야기로 풀어낸 이야기이다. 생각하면 당연하지. 성경 자체가 천지창조로 시작하는 것을. 창조론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성경 나머지를 제대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그냥 0에 수렴한다고 보면 된다. 시작부터 이해가 안 되는데 무슨 진도를 빼.

엄마가 항상 왜 영화로 만들지 않는 거냐-고 아쉬워하는 이 이야기는 (나니아 연대기의 다른 모든 좀 덜 유명한 이야기가 다 그렇듯이) 의외로 재밌다. 특히 하얀 마녀가 런던으로 와서 마차 지붕위에 올라타서 기갈 부리는 장면은... ㅋㅋㅋ 오만한 자가 딴에는 자기를 내세운다고 하는 게 사실은 얼마나 바보 같고 우습게 보이는 모습인지를 단면적으로 드러내주는 모습. 더불어 다음 이야기인 '사자와 마녀와 옷장' 에 나오는 옷장의 기원(? 재료?) 및 조금은 뜬금없어 보이는 나니아에 설치된 가로등이 왜 거기에 있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은 덤.

2. 사자와 마녀와 옷장

이야기 순서상으로는 두 번째에 해당하지만 쓰여진 순서로 봐도, 그리고 영화로 만들어진 순서로 봐도 1위인 이 이야기는 나니아 연대기 일곱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야기이다. 반지의 제왕의 저자인 톨킨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루이스가 드디어 인기를 얻을 만한 작품을 써냈다.' 라고 했던. (참고로 이때 톨킨은 아직 '호빗'을 발표하기 이전이었나 그랬을 거다. '반지의 제왕'은 단연코 아직 발표하지 않았을 때였다는 것. 그래서 사실 작가로서의 이름은 톨킨보다 C. S. 루이스가 먼저 얻었다.) 이 이야기를 쓰게끔 만든 것은 C. S 루이스의 집에 피난 왔던 여자아이 루시의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에서부터였다고 한다. "옷장 안에는 뭐가 있어요?" 라는. 그 질문이 C. S. 루이스로 하여금 "그러게? 옷장 안에는 과연 뭐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지. (근데 이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염소인간 툼누스 씨가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우산을 펼친 채 눈 내리는 밤 가로등 아래에 서 있는 이미지는 C. S 루이스가 15살 때부터 상상해왔던 이미지라고 한다. 따지자면 이 이야기의 가장 시초는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셈;;;) 참고로 나니아 연대기에서 C. S 루이스가 가장 사랑을 준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캐릭터 루시 페벤시는 바로 이 루시-를 모델로 탄생한 캐릭터이다.

기독교 이론 중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론/구원론을 다룬 이야기인지라 누가 봐도 다른 6개의 이야기에 비해 '아, 이거 기독교 아동소설이구나' 라고 눈치챌 수 있는 색채가 가장 강하게 묻어나는 이 이야기는, 그런데 의외로 가장 먼저 쓰여져서 가장 먼저 인기를 끈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선 나니아 일곱 이야기 중 '가장 인기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마도 다루는 주제가 너무 확실하다 보니 호불호도 확실하게 갈리는 것이 아닐까... 싶긴 한데.

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이 이야기는 한 번만 봐선 그 진가를 모른다. 두세 번은 깊이 음미를 해봐야 그 맛이 느껴지지. 영화 개봉 당시 나는 진짜 그랬다.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 '음... 잘 만들긴 했는데 뭔가 살짝 심심한 듯하다.' 라고 했다가 두 번째 봤을 땐 '음? 저번보다 재밌네?' 했다가 세 번째로 봤을 땐 '뭐야?! 왜 내가 이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심심하다' 라고 느꼈던 거지? 내가 미쳤었나봐!' 라고 했거든. 이렇게 느낀 데에는 아마도 예전에도 한 번 언급했던, C S 루이스 특유의 '굵직한 뼈마디로만 이루어진 것 같은' 이야기 구성도 한 몫하는 것 같고. 나니아 연대기의 이야기들이 대체적으로 다 그렇긴 하지만 이 '사자와 마녀와 옷장' 만큼 이야기 내에서 장면 전환이 껑충 껑충 뛰어넘어가는 느낌이 나는 이야기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처음 보면 (살코기가 많이 없으니) '맛이... 없다고 말할 수준은 아닌데 근데 좀 먹을 게 없다.' 싶지만 두세 번 반복하다 보면 곰탕 국물이 우러나오듯 그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듯.

어쨌든  나니아 일곱 이야기 중 가장 기념비적인 이야기라는 점에선 이견을 달 사람이 없는 이야기.

3. 말과 소년

나니아 일곱 이야기 중 세 번째 이야기인 이 이야기는 모든 이야기 중 유일하게 페벤시가 4남매가 나니아의 왕과 여왕으로 있을 시절-의 이야기이다. 다른 말로 유일하게 현대 세계가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짜임새가 촘촘하고 집중도가 높은 것 같다. 다른 세계를 왔다 갔다 하는 일 없이 한 세계 안에서 갖춰진 설정으로 쭉 나가니까. 또한 제일 '일반적인 이야기' 에 가까운 모양새를 취하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엄마가 '마법사의 조카' 가 영화화되지 않는 것을 아쉬워한다면 나는 이 이야기가 영화화되지 않는다는 게 은근 아쉽더라. 내가 보기엔 나니아 연대기 중에서 '은 의자'와 함께 이 이야기가 제일 영화화 하기에 괜찮은 구성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인데 말이지.

기독교 이론 중 '중생론'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구원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론으로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 에 대한 이론이라고 알고 있다. 구원론은 말 그대로 '믿음으로 인해 죄의 결과인 영원한 사망으로부터 구원되는 것' 이고. 같은 믿음의 서로 다른 기능을 각각 말하고 있다고 봐도 괜찮을 듯.) 을 이야기로 옮겼다고 보여지는 이야기. 덧붙여 나니아 연대기 중 (비록 주인공들 나이는 좀 어리지만) 거의 유일하게 로맨스 비스므리한 요소가 작품 전체에 깔려 있다는 것은 그냥 덤. 아마도 그래서 나니아 연대기 중 가장 '일반적인' 이야기 같은 느낌이 나는지도.;;;

4. 캐스피언 왕자

나니아 연대기 중에서는 4번째, 영화로는 두 번째 이야기인 이 이야기는 기독교 이론 중 견인론 (예수님이 믿는 이들을 이끌어간다는 이론) 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예전 영화를 리뷰할 때 잠깐 언급했었지만 원작 속 과거와 현재 이야기를 영화에서는 전부 다 현재 시점으로 짜맞추면서 어느 정도 긴장감을 조성할 수 있는 구성으로 이야기를 짜깁기를 했었다. 사실 나쁘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러는 바람에 영화는 소설 원작이 말하고자 하는 견인론의 모습을 거의 하나도 드러내지 못한다. 소설 속에서는 처음에는 루시의 눈에만 보이는 아슬란을 모두가 밤길 더듬는 것처럼 루시만 보고 한 발짝 한 발짝 따라가는 내용이 진짜 1/3 정도 되는 내용을 이루거든. 그러면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눈이 열려 점차 다들 아슬란을 보게 되는... 영적인 여정을 정말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내용을 뺀 것은 소설의 주제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면에서는 좀 아쉽긴 하지만 그러나 재미-의 측면에서 보자면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소설 속에서조차 사실 좀 갑갑하고 지루했거든.

그러나 나중에 루시, 수잔이 아슬란과 함께 텔마르의 마을들을 돌며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즐겁게 행진하는 장면이 빠진 것은 재미적인 측면에서 봐도 좀 아쉽다. 물론 일단 스토리를 다시 짜깁기를 한 이상 그 장면만 다시 넣도록 스토리를 몰아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알지만...

사실 이건 엄마가 제일 먼저 말했던 것이긴 한데, 이 캐스피언 왕자 편 영화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못 만든 것은 아니지만, 차라리 나니아 연대기를 영화화할 때, 아예 타겟 연령층을 확 낮춰 어린이들로만 잡고 그런, 아동용 컨셉에 충실한 제대로 아동용 영화로 만들었더라면 어떨까-하는. 전쟁씬이나 전투씬 같은 거 별로 안 넣고, 스케일도 줄여서, 예쁘고 유쾌하고 신기한 느낌에 중점을 두는 아동용 판타지 영화로 말이지. 앞선 '사자와 마녀와 옷장' 도 그렇고 뒤에 나올 '새벽호의 출정' 도 그렇지만 이 '캐스피언 왕자' 야말로 소설은 그래도 제대로 아동들을 위해 쓰였다-는 아이덴티티가 나름 분명한 데에 반해 영화는 아동용이라 하기에는 좀 어둡고 심각하고 어른용이라 하기에는 좀 아동틱-하다는 느낌이거든. (일단 다 제끼고 주인공들 나이부터 어리다 보니 어른으로서 감정이입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따른다;;.)

아무튼... 결론? 예수님 잘 따라갑시다.;;;

5. 새벽호의 출정

예전 영화 리뷰할 때 나름 자세히 적었었으니까 간략하게 넘어가자...;;;

위에서 나니아 연대기 일곱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먼저 인기를 끈 건 '사자와 마녀와 옷장' 이지만 현재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말을 했었다. 이 다섯 번째 이야기인 '새벽호의 출정' 이 내가 알기로 현재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이야기이다. 기독교 이론 중에서는 성화론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이론) 을 그려내고 있는 이야기이고도 하고.

그 명성에 걸맞게 이 이야기는 정말 상당히 재밌다. 특히 중간부분은 거의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게 만드는 지경이다. 사라진 텔마르의 영주들을 찾기 위해 7개의 섬을 돌아야 한다-는 목적도 분명하기에 다른 나니아 연대기 이야기들의 약점인 '인과관계/이야기의 개연성이 좀 약하다' 는 단점이 거의 커버된다. 적어도 종반부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말이지. 거기에다 아동 판타지 소설 특유의 예측을 불허하는 구성/설정의 독특함은 여전히 함께 하고 있으니, 종반부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이야기가 거의 완벽하게 재미있다-라고 느껴진다. 7개의 섬들에 각자 존재하는 시험을 통해 성화의 길을 가는 데에 있어 어떤 유혹/시험이 기다리고 있는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점도 정말 마음에 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럽게도?) 얼핏 봐서는 기독교 소설-이라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없다는 점 또한 이 소설의 인기에 한 몫을 했다고 보인다. 물론 그건 '사자와 마녀와 옷장' 과는 달리 성화론-이라는 부분 자체가 (얼핏 보기에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교리는 아니기 때문에 그 덕을 본 것이 크지만.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지만 깊이 들어가면 기독교의 성화의 원리는 타 종교의 스스로 구도하는 원리와 완전히 다르다. 기독교에서 성화란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닌, 예수님/성령님의 힘으로만이 가능한 것이니까. 용으로 변한 유스터스가 스스로는 아무리 해도 용의 비늘을 벗겨낼 수 없었지만 아슬란이 벗겨주었을 때에야 용의 모습을 벗고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명확하게 기독교의 성화의 원리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럼 인간은 아무 것도 안하는 거냐고? 천만에. 한다. 그것도 아주 결정적인 부분을 한다. 인간이 해야 하는 몫은 '나는 성화되고 싶다' 라고 결정하는 부분이다. 그 부분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절대로 인간이 스스로 해야 하는 부분이다. 위의 유스터스 부분으로 돌아가서, 비늘을 벗겨낼 수 있는 것은 아슬란이지만 그건 오직 유스터스가 비늘을 벗고 싶어할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난 용으로 있는 게 좋아요!' 라고 하는데 억지로 소년으로 돌려놓지는 않는다.)

문제는 종반부, 정확히는 7개의 섬을 다 돌고 난 다음부터다. 처음의 목적을 달성한 여정은 이제 여정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가 사라진다. 근데도 여정은 계속 된다. 여기서 (나 같은) 독자는 '얘네 왜 계속 가니?' 라는 질문이 나오게 되는 것. 그래서 영화 리뷰에서 말했듯 영화에서는 이 이야기 역시도 구성을 조금 짜깁기하고 새로운 설정을 살짝 더하여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그래도 개연성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어쨌건, 영화에서건 소설에서건 결론은 같다. '성화가 끝나면 진짜 나라, 아슬란의 나라로 간다' 는 것.

6. 은 의자

헥헥... 끝이 다가온다. 힘을 내자.

나니아 연대기 6번째 이야기인 이 '은 의자' 는 개인적으로 위에서 잠깐 말했듯 이야기의 개연성/인과관계 면에 있어서 '말과 소년' 과 함께 가장 탄탄한 구성을 자랑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건 아마도 다른 이야기들과는 다르게 이 이야기에서는 아슬란이 초반부에 똭! 하고 등장해서 '앞으로 이런 이런 일이 일어날 건데 그럼 이렇게 이렇게 해라.' 라고 등장인물들에게 제대로 사명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 이야기는 기독교 이론 중 '사명론' 을 다루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성도로서의 의무-에 해당하는 삶의 측면 말이지.)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이야기가 맥을 잡으며 흘러간다. (역시 사람은 사명이 있어야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는 거야.;;;) '말과 소년' 과 함께 영화화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야기-라고 여겨지는 이유이다. 현재 영화 각본 재정비 작업 중이고 아마도 올해 겨울부터 촬영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라고 하고 있다는데... 좋다, 다 좋다. 제발 나와만 다오. 이 이야기 재밌단 말이다.

사명론을 다룬 이야기라 그런지 이 이야기는 주인공들이 아슬란의 말을 문자 그대로 듣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강하게 보여준다. 자기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슬란이 말한 것을 기억하고 그 징표가 나타났을 때에 그대로 따라야만 일이 제대로 풀리는 것. (유스터스와 질은 처음 두 번은 다른 데에 정신 파는 바람에 결국 미션 실패-가 되어버렸지. 그래도 처음 두 개를 실패했는데도 결국 세 번째 예언 받은 상황까지 가서 그래도 여행의 목적은 결국 성공시킨 걸 보면... 그래,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서 실패할 것까지도 미리 다 아시는 게 맞긴 맞다.)

인생을 가는 데에 필요한 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듣고 분별해낼 수 있는 능력-이다. 그건 어떻게 해야 생기냐고? 자꾸 하나님하고 친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됨. 근묵자흑 근주자적이란 말은 영적 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현상이거든.

7. 마지막 전투

드디어 마지막이다...

처음 이야기인 '마법사의 조카' 가 성경의 시작인 창조론을 다룬 이야기였으니 마지막 이야기인 이 이야기가 성경의 마지막인 종말론을 다룬 이야기일 거라는 것은, 아마 이 포스팅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굳이 말 안해도 짐작 가능한 사실일 거라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일견하기에 아이러니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이 이야기가 마지막 이야기로서 나니아 연대기에 이제껏 등장한 모든 (주요) 인물들이 진정한 해피엔딩-을 맞아야 한다는 면이 있는데 (왜 해피엔딩이어야 하냐고? 나니아는 뭐라 말해도 아동용 소설이다. 아동용 소설에서 해피엔딩 안 나는 것 본 적 있나?), 이 나니아 연대기에서 진짜 행복은 아슬란의 나라-에 들어가야만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앞의 모든 이야기에서 은은히 암시해왔었다. 그것을 가장 대놓고 드러낸 이야기가 바로 다섯 번째 이야기인 '새벽호의 출정' 이었고. 따라서 이 말은 나니아에 등장한 모든 (주요) 인물들이 이 이야기 끝에서는 다들 아슬란의 나라로 영원히,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갈 걱정 없이 완전히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의 세계를 영원히 떠나야 한다는 말이지. 좀 더 간단하게 말해볼까? 나니아에 등장한 모든 (주요) 현대 세계의 인물들이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게 진짜로 나니아 연대기에서 페벤시 4남매 중 수잔을 제외한 3남매를 비롯, 나니아에 방문했었던 모든 현대 세계의 사람들이 맞이하는 끝-이다. 스포일러이지만, 스포일러를 낼 각오를 하고 말을 하자면 이 마지막 이야기에서 모든 현대 세계 인물들은 열차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된다. 물론 자신들은 그 죽음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고서 나니아를 거쳐 아슬란의 나라로 들어가는, 행복하기만 한 여정이지만, 현대 세계에서 볼 때는 그들은 열차 사고로 비참하게 죽은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보면, 진정 믿는 이에게는 죽음은 하나도 비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그저 이 재미없는 세상에서 벗어나 드디어 영원히 즐거운 나라로 눈 깜빡할 사이에 옮겨가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

더불어 이 이야기에서 C. S 루이스는 아주 살짝-이지만 일반적으로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관에서 아~아주 살짝 넓어진 구원의 개념을, 그 가능성을 살그머니 언급하려 한 듯한 시도가 보인다. 그... 나니아가 아닌 다른 나라의, 아슬란이 아닌 다른 존재를, 그러나 정말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다 버리고 그를 찾고 그를 믿는 병사를 통해. 여담이지만 이 부분은 요즘 신학, 특히 성령론/교회론 부분에 있어서 아주 깊게, 정말 열띠게 갑론을박하며 파고 들어가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나라는 보수파 장로교가 워낙 강해 이런 신학이 별로 논의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곳 서양, 오순절 계통에서는 주요 토픽 중 하나다.) 성경이 무어라 확답을 주지 않고 있기에 그 누구도 결국 확답은 낼 수 없는 영역이지만.

이 긴, 일곱 이야기의 여정 끝에서 결국 나오는 말은 단 한 마디였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사도 요한이 써놓은 말.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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