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팅게일 통계적 업적 - naiting-geil tong-gyejeog eobjeog

나이팅게일, 통계와 위생

나이팅게일은 젬멜바이스 이후 약 7년 정도 후에 활약한 여성입니다. 젬멜바이스가 수술시에 소독을 해야 한다고 1847년 말과 1848년 초에 이미 학계에 보고를 했습니다. 그 이후 이에 대한 글들이 발표가 되었지만, 뜻 밖에도 이러한 사실은 당시 의사들의 반발에 널리 퍼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초기에 젬멜바이스의 주장은 단순히 산욕열이 전염성이 있는 질병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되었고, 이것은 이미 그전에 발견된 사실이었기 때문에 새로울 것이 없다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젬멜바이스는 비엔나의 병원에서 계약이 갱신되지 않아서 결국 비엔나 병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다페스트로 옮긴 후에 한 병원에서 무료 진료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에도 산욕열을 치료하기 위해서 소독을 해서 사망률을 0.85%까지 낮추었지만 그의 방법은 널리 퍼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론은 1856년이 되어서야 다시 주목을 받게 됩니다.

나이팅게일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크림전쟁에서 간호사로서 활약했던 여성입니다. 나이팅게일은 죠섭캠벨의 “신화의 힘”에서 말하는 영웅의 모습을 거의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일단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자기 인생을 개척했으며, 부자의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천하다고 여긴 간호사가 되어서 전쟁터에 참여하여 간호를 한 여성의 이야기는 영웅담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의 일반의 이야기는 그녀에 대해서 잘 알려주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그녀가 간호사로서 헌신적인 여성이 아니라, 실제로는 매우 뛰어난 지적인 여성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림 1 나이팅게일이 근무했던 병원의 모습

나이팅게일은 1854년 11월 4일 크림전쟁에 참여해서 1856년 2월 전쟁이 끝나자 그해 7월에 복귀합니다. 즉 그녀가 크림전쟁에서 활약한 기간은 단 2년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크림전쟁의 야전병원에서 환자들이 대부분 전쟁으로 인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 전염병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비위생적인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림 2 환자를 받고 있는 나이팅게일 (Jerry Barrett (died 1906))

그녀는 아주 현명해서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해서 윗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나이팅게일 로즈 다이어그램 이라는 것입니다. 아래의 다이어그램은 통계적인 자료를 다이어그램으로 보여준,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뛰어난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사망률의 위험성과 원인을 설명하는데 확실한 효과를 보였습니다. 사실 그녀는 크림전쟁이 끝나고 1859년에 뛰어난 수학실력, 특히 통계학 실력으로 왕립 통계학회에 정식회원이 됩니다.

위의 다이어그램에서 보듯이 그녀는 위생의 문제를 매우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1854년은 젬멜바이스의 업적이 다시 널리 알려지게 되는 1856년 이전이고, 런던의 1854년 콜레라 전염병이 돌았던 이유가 오염된 물에 의한 것이라고 존 스노우가 발표한 1855년 보다 약간 빠른 것입니다. 위생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이 바로 이 시기에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루이스 파스퇴르가 미생물의 존재를 처음 알아낸 것은 이보다 늦은 1860~1864년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젬멜바이스가 위생의 중요성에 대한 내용을 보고했지만, 그것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젬멜바이스의 주장은 수술에 대한 것으로 한정짓는다면, 위생의 중요성을 최초로 통계학적인 지식을 사용해서 알려준 사람은 바로 나이팅게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이팅게일은 위생을 철저히 함으로써, 병사들의 사망률을 42%에서 2%대로 뚝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생의 중요성을 그 이전에도 분명히 알고 있었겠지만, 남들을 설득하는데 뛰어난 재주를 가진 나이팅게일은 통계학을 이용했고, 특히 로즈 다이어그램을 사용하여 프리젠테이션을 했다는 것은 정말로 탁월한 능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글에서는 그녀가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언급하는데, 이것이 그녀가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녀는 유복한 집안에서 가정교사를 통해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정규과정보다 우수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이 후에 근대 간호학의 창시자로 인정받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뛰어난 간호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녀의 과학적인 사고 능력과 이를 바탕으로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녀의 업적은 결국 적십자의 창설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급격히 늘은 이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양상태가 좋아지고 위생이 개선된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젬멜바이스와 나이팅게일, 존 스노우의 업적은 결코 잊을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최근들어 일부 위생가설을 들어서 요즘 사람들이 너무 위생적이라서 아토피등이 생긴다고 말하면서 위생을 좀 소홀히 해도 된다는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물론 흙에서 노는 것이 아주 때로는 건강하지만, 그것은 병에 걸리지 않을 수준에서 그렇게 놀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만약 병에 걸릴 정도로 비위생적인 상황에서는 결국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백의의 천사', '등불을 든 여인'으로 잘 알려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통계에 관해서 포스팅 하겠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중요한 요소기술 중 하나가 바로 '빅데이터(Big Data)'입니다. 빅데이터는 수십 테라바이트 이상의 대량의 정형 또는 비정형 데이터로부터 가치를 추출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기술이며 이를 뒷받침 하는 학문이 바로 통계학입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우리에게 현대 간호학의 기틀을 마련한 '백의의 천사' 즉 간호사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팅게일은 간호사이기도 하지만 영국 왕립통계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인 통계학자이자 사회개혁가로도 활동 했습니다. 

그러면 나이팅게일이 통계학에 미친 영향과 업적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20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별장에서 영국의 부유한 상류층의 딸로 태어난 나이팅게일은 피렌체의 영어식 표현을 따서 플로렌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자라면서 간호사가 되어 다친 이들을 돌봐주는 것을 자신 인생의 신앙적 사명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절 간호사는 요양원에서 잡일을 하는 청소부에 가까운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하대 받는 직업이었다고 합니다.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나이팅게일이 간호사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1853년 러시아제국의 남하에 맞서 오스만 제국,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4국 연합국 간에 벌어진 크림전쟁에 군 간호사로 참전하여 영국군 야전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때 나이팅게일은 전투에서 사망하는 군인보다 후방 병원에서 위생문제로 인한 전염병이나 제대로된 치료를 받지 못해서 사망하는 군인이 더 많은 영국군의 최악의 의료체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 개선하고자 나이팅게일은 사망자수 등 병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숫자로 병원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통계 작성기준을 세워 기록체계를 통일 했으며 기준에 따라 입원자 수, 부상자 수, 사망자 수 등의 병상일지를 매일 상세히 작성하여 통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질병의 주 원인이 병원의 위생상태 때문이라는 점을 발견한 그녀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화장실과 오수구덩이를 말끔히 청소하고, 병동마다 환기구를 설치 했으며, 필요한 비품을 공급하는 등 병실 주변 환경에 대한 대대적인 개선 작업을 진행 했습니다. 

이렇게 개선 작업을 진행한 후 한 달이 지나자 42%에 달하던 환자의 사망률이 2%까지 떨어지는 성과를 거두며 이를 통해 체계적인 통계와 수치를 이용해 병원의 위생상태를 개선하면 사망률을 감소 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나이팅게일은 일 년 열두 달을 원 모양의 그래프로 나누어 매달 마다 사망한 사람들의 사망원인과 사망자를 표시한 '로즈 다이어그램'을 만들어 도표와 차트라는 수단을 통해 정보를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데이터를 시각화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나이팅게일은 1859년 영국 왕립 통계학회의 첫 번째 여성회원이 되었고 미국 통계학회의 명예회원으로 초대 되기도 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이 크림전쟁 당시 밤마다 등을 켜고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으며 이후 영국에서 조성된 '나이팅게일 기금'을 이용해서 1859년 세인트토머스 병원에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를 설립했고, 같은 해에 펴낸 '간호론'은 오늘날 간호학의 고전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나이팅게일의 이러한 업적에 따라 나이팅게일의 생일인 5월 12일은 매년 '세계 간호사의 날'로 지정 되었고, 1893년부터 간호학도들은 간호사로서의 윤리와 간호원칙을 담은 '나이팅게일 선서(Nightingale Pledge)' 의식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나이팅게일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를 빠르고 정확하게 찾고, 해결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기반으로한 분석적 사고력을 키워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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