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 윤봉길 사람은 왜 사는가

존경하는 김철배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님, 허홍청 중화인민공화국 상해시 홍구구 정협 주석님, 그리고 오늘 행사에 참석하신 한·중 내빈 여러분!

오늘은 윤봉길 의사께서 역사에 길이 남을 상하이 홍구공원 의거를 단행하신지 78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시고 이역에서 고혼이 되신 의사님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우리 민족이 빛을 잃었던 시기에 의사께서는 등불이 되어 겨레를 이끌었던 한 줄기 의로운 빛이었습니다.

78년 전 의사께서 보여주신 숭고한 살신구국의 의혈정신은 세월이 흐를수록 향기를 발해 우리의 가슴을 적시고 있습니다.  

의사께서는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려 국권을 빼앗기고 실의에 빠진 민족에게 조국 광복을 향한 불굴의 용기와 힘이 되었습니다.

굳은 신념으로 그 힘들고 어려웠던 여건에 농촌부흥활동을 펼친 농민운동가이며, 위대한 사상가로 영원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1932년 홍구공원에서 일본을 향해 던진 폭탄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나아가 자유와 평화를 염원하는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당시 전 세계 약소국가들에게 희망을 안겨 준 정의의 횃불이었습니다.

의사께서는 시인 청년이기도 했으며, 실력배양과 경제부흥을 주창하며 현실을 개조하고 변화시키는 민족의 선각자였습니다.

해가 갈수록 의사를 더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해지는 것은 남기신 나라사랑 정신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사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의사의 구국정신과 나라와 겨레를 위한 고귀한 삶이야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밑거름이자 정신적 지표였다고 생각합니다.

자리를 함께 해 주신 여러분!

우리 대한민국은 전대미문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특히 올해는 세계 경제 분야의 최상위 협의체인 G20 정상회의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됩니다.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국격도 한층 더 높아졌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선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온 국민이 꺾이지 않는 의지와 높은 이상으로 역사의 가시밭길을 헤쳐 왔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땀과 열정이 이루어 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넘어야 할 산도 있습니다. 북한 핵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고 주변국의 역사 왜곡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민족자존을 지키고 조국 사랑의 결의를 실천해 보이셨던 윤봉길 의사를 비롯한 선열들의 위국헌신 정신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오늘 행사가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국민 모두의 가슴속에 나라사랑과 민족번영을 위한 노력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한국과 중국은 1992년 수교 이후 여러 분야에서 비약적인 관계 발전을 이룩했으며 작년에는 양국 관계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우리 두 나라는 항일전쟁을 같이했고 아세아 평화와 공동번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바로 내일 4월 30일 대한민국의 이명박 대통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호금도 주석 간의 정상회담이 또 있을 예정입니다. 한·중 간 더욱 긴밀한 관계 및 우호증진을 위해 토의할 예정입니다.

이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자세로 양국 관계의 내실을 다지고 아주 가까운 이웃으로서 함께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민족을 위해 멸사봉공하신 윤봉길 의사께 한없는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바칩니다.

행사를 준비해 주신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와 중화인민공화국 상해시 홍구구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0.  4.  29.

국가보훈처장    김 양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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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자 : 국가보훈처장 연설일 : 2021.04.29

오늘은 우리 민족 독립운동사에 영원히 기억될 매헌 윤봉길 의사님의 상하이 의거 89주년입니다.
겨레의 염원이었던 조국독립을 위해 일신을 바치셨던 의사님께 깊은 경의를 표하며, 그 숭고한 정신을 엄숙한 마음으로 되새깁니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홍구공원에 울려 퍼진 지축을 흔드는 폭음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향한 열망이자 겨레의 함성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전범을 심판한 의사님의 의거는 민족말살 정책으로 억눌려있던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다시 안겨준 커다란 울림이었습니다.
또한, 일제의 부당한 국권침탈과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각인시키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의사님께서는 의거에 앞서 농촌계몽운동에도 앞장서셨습니다.
19세의 나이에 부흥야학원을 설립하고, 20세 때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 등에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이후 홍구공원 의거로 일제에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시기까지 오직 조국과 민족의 앞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셨습니다.

“백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택했습니다”
동포들에게 남긴 유서에서 우리는 의사님의 뜨거운 조국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록 25년의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조국독립을 위해 산화한 ‘영원한 청년 의사’로 언제나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쉴 것입니다.

자리에 함께하신 여러분!

의사님을 비롯한 독립유공자 한 분 한 분의 생애는 우리 민족이 걸어온 숱한 어둠속에서도 빛났던 장엄한 애국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애국정신은 오늘의 번영된 대한민국을 만든 토대일 뿐만 아니라, 더 큰 미래로 나아가는 나침반과 같은 시대를 초월하는 교훈입니다.
정부는 윤봉길 의사님을 비롯한 선열들의 정신을 우리 국민들이 일상에서 기억하고 계승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뜻 깊은 기념행사를 준비해주신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명노승 회장님과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 번 윤봉길 의사님께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함께하신 모든 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공공누리가 부착되지 않은 자료는 담당자와 사전에 협의한 이후에 사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치서숙에서 한문학에 매진하던 윤 의사가 왜 농민독본을 쓰게 됐을까? ‘묘패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매헌윤봉길월진회의 얘기를 인용해본다. “어느 더벅머리 총각이 묘패를 한 아름 안고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 총각은 3년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묘를 쓰고, 묘패를 꽂아놨는데 집이 가난해 남의 집 머슴살이로 살다가 한참후에 성묘를 가게됐다. 묘패가 많아 어느 묘가 어버지인지를 몰라 묘패를 모두 뽑아왔고, 이 중 아버지의 묘패를 가려 달라고 윤 의사에게 부탁했다. 윤 의사는 이 묘패가 있던 자리를 기억하는지 물었고, 그 총각은 그것까진 생각못했다며 주저앉았다.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 학문을 해서는 안되겠다’고 깨닫고, 윤 의사는 오치서숙을 뒤로 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윤 의사는 묘패사건을 겪은 후 곧바로 농촌계몽운동에 발을 들였고, 이 때 쓴 책이 바로 농민독본이다. 농업을 특히 강조한 책은 3권의 농민독본 중 제3권. 주요 내용을 보면, ‘오늘날 조선에 있어서 총생산 18억원 가운데서 농산물이 13억원을 차지하고 있어 이것 때문에 우리의 목숨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조선에서 농민이 이처럼 가난하다는 것은 전 조선이 못살게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농민의 손으로써 농민을 본위로 한 정치와 경제와 문학과 예술과 교육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등이다. 하나같이 농업이 없으면 나라도 없음을 강조한 말들이다.

농민독본과 함께 부흥원도 윤 의사가 남긴 족적 중 하나다. 농촌을 부흥시키자는 결의를 담은 부흥원의 실천목표는 ‘증산운동을 펼쳐야 한다’, ‘마을 공동의 구매조합을 만든다’, ‘일본 물건을 배척하고 우리 손으로 만든 토산품을 애용한다’, ‘부업을 장려해야 한다’, ‘생활개선이다’ 등 다섯가지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야학당을 개설해 농민들에게 농민복돈을 가르치며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던 중 윤 의사는 1929년 4월 23일 ‘날로 앞으로 나아가고 달마다 전진한다’는 취지의 ‘월진회’라는 조직을 구성, 농촌계몽운동에 점점 속도를 붙여갔다.

4년여간 농촌을 일으키기 위해 몸을 던졌던 윤 의사는 더 큰 꿈을 위해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장부가 뜻을 세워 집을 나아가면 그 뜻을 이룰 때까지 살아돌아 오지 않는다)’이란 유서를 남긴 채 중국으로 망명했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한 이후 1932년 8개월여만에 일본의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그가 걸어온 평탄치 않을 길, 83주기를 맞은 올해 농업이 홀대받고 있는 현실에서 그의 농업정신은 다시한번 가슴에 새겨야 하지 않을까?

#윤봉길 문화축제

4월 29일. 봄비가 쉼없이 내리던 이날, 충남 예산군 충의사에서 ‘매헌 윤봉길 의사 4·29상해의거 83주년 기념 윤봉길 문화축제’가 열렸다. ㈔매헌윤봉길월진회가 윤봉길 의사의 정신을 고이 받들기 위해 마련한 이번 행사에는 이우재 ㈔매헌윤봉길월진회장, 홍문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황선봉 예산군수 등을 비롯해 예산군민 등 관계자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우재 회장은 “윤봉길 의사가 10대 후반의 나이로 애국계몽운동, 농촌운동, 협동조합운동 등을 이끌기 위해 손수 조직했던 게 바로 월진회”라며 “월진회 정신을 비롯해 윤봉길 정신을 살리고 이를 마음속에 새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황선봉 군수도 “우리나라가 주권을 뺐겼을 때 목숨을 바쳐 이 나라를 지켜주진 분이 윤봉길 의사인 만큼 윤 의사의 애국애족정신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고, 홍문표 위원장은 “자유, 평화, 복지가 담긴 윤 의사의 정신을 대한민국의 정신으로 승화발전시키는데 노력하자는 제언의 말씀을 드린다”고 주문했다.

조영규 기자

#매헌농민상 수상자를 만나다

‘매헌 윤봉길 의사 4·29상해의거 83주년 기념 윤봉길 문화축제’가 열리던 날에는 본보와 ㈔매헌윤봉길월진회가 공모한 ‘매헌농민상’에 대한 시상식도 함께 진행됐다. 매헌농민상은 농민권익부문(농민권익증진 및 복지향상을 위해 노력한 개인, 단체), 신농업부문(새로운 농업기술개발 및 영농실적이 우수한 농민), 여성농업인부문(여성농민의 지위향상과 농업발전에 기여한 여성농업인) 등 세 부문에서 1명씩 수상하는데, 이번에는 여성농어업인부문에 이례적으로 2명을 선정했다. 이들 중 신농업부문의 함승주 씨(강원 평창)는 사정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농민권익부문/이상국 환경농업단체연합회장(한살림 상임고문) 
“농업 소중함 계속 알려나갈 것”

“농업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얼마나 소중한 것이지 알려야죠.”

매헌농민상은 이상국 회장에게 또다른 책임을 던져준 듯 했다. 그가 수상소감을 대신해 밝힌 내용만 봐도 짐작이 간다. 그는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농업이 있어야 하고, 모든 사회는 농업이란 바탕 위에서 존재한다”며 “어떤 상황, 어떤 시대가 되더라도 농업을 부정할 수 없는 만큼 이 농업의 소중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앞으로의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상국 회장은 한살림을 빼놓고 얘기하기 어렵다. ‘사람과 자연, 도시와 농촌이 더불어 사는 생명세상’을 모토로 하는 한살림. 2100여명의 생산자 회원과 50여만명의 소비자 조합원이 함께 이끌어가는 한살림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상생모델로 일찌감치 주목받아왔다. 특히 우리나라 생활협동조합의 시작을 알린 한살림은 친환경농업이 오늘날까지 자리를 잡는데 많은 역할을 해왔다. 그 중심에는 이 회장이 있었다. 그가 매헌농민상을 받게 이유를 “한살림이 생산과 소비를 하나로 묶어 농업의 문제가 생산자만의 문제가 아닌 만큼 소비자와 함께 고민해왔기 때문”이라고 유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회장은 “그간의 물질에 중심축을 두던 가치를 또다시 생명으로 전환토록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윤봉길 의사의 ‘농업은 생명창고’라는 말을 다시금 되새겨 힘을 낼 것”이라며 “농업없는 사회는 없듯, 밥상을 통해 농업을 살려내는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여성농어업인부문/김금자 씨
“여성들도 어엿한 농업의 주인”

충남 예산군 고덕면에서 20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금자 씨.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면서부터 축산에 뛰어들어, 현재 130여두의 한우를 키우고 있는 김 씨는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다”며 “감사하면서도 송구스럽다”고 매헌농민상을 받은데 대해 쑥스러워했다.

이처럼 수줍게 소감을 전한 김 씨였지만, 여성농업인에 대해 얘기할 때만큼은 당당했다. 핵심은 ‘여성도 어엿한 농업의 주인’이라는 것. 윤봉길 의사도 ‘우리 조선은 농민의 나라’라고 했듯, 농민의 나라에서 여성농업인들도 충분히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게 김 씨의 생각이다.

그녀는 “조금만 배운다면, 여성농업인들도 누구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 배움을 위해 지금은 공주대학교 마이스터대학의 축산과에 재학 중이다. 현재 3년째다. 이 같은 교육과정의 결과 김 씨는 축사를 짓는 것에서부터 축산과 관련된 일련의 모든 과정을 혼자 힘으로 해내고 있다. 특히 조사료도 120ha 규모에서 생산하고 있는데, 농림수산식품부와 농촌진흥청이 개최한 ‘2010년 동계 사료작물 사일리지 품질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것도 그녀의 노력 덕분이다.

“송아지가 태어나서 건강하게 자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 김금자 씨. 김 씨는 꿈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함께 하는 농업이 됐으면 한다. 나와 너, 서로 배우면서 농업이라는 큰 틀에서 다같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다.”

■여성농어업인부문/김명숙 씨
“이 땅서 난 쌀만큼 좋은 건 없어”

“빵 좀 먹지 말고, 쌀 좀 먹어요.”

김명숙 씨는 요즘 젊은이들이 쌀을 먹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9900㎡(약 3000평)의 규모에서 쌀 농사를 짓고 있는 김 씨의 평소 신념은 ‘내 땅에서 나는 쌀만큼 몸에 좋은 것이 없다’는 것. 천상 농민이었다.

예산군 광시면 마을 곳곳에 김명숙 씨의 발이 닿지 않은데가 없다. 부녀회장, 여성농업인회장 등을 맡으면서 어르신들의 식사를 챙기는 것은 물론, 필요한 일거리도 돕는가 하면, 또 고향을 떠나 힘들게 지내는 다문화여성들에게 고추장담그기 등을 알려주면서 이들을 마을공동체로 이끌어주고 있다. 김 씨는 “농촌에는 어르신들이 많은데 이 분들에게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 외에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오히려 겸손해했다.

농민의 딸로 태어나 지금까지 농사를 짓고 있지만 김 씨에게는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농사를 짓는 게 오히려 빚이 늘어나는 현실 때문이다. 그래도 농사를 손에 쥐고 있는 이유가 있다. “우리 가족이 수입산 대신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농산물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김 씨.

“농촌에 오래 살라는 얘기”라고 수상소감을 던진 김 씨에게는 단 하나의 바람이 있다. 한우 100두도 함께 키우고 있는 자신들의 농사를 자식들이 이어받는 것이다. 김 씨는 “아직 자식들이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나중에 철들면서 우리들의 땀이 담겨있는 농사를 해줬으면 한다”며 “농촌에 뿌리박고 함께 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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