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장 21절 - magabog-eum 1jang 21jeol

본문: 마가복음 1장 21~28절

21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즐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제목: 권세 있는 예수님의 교훈

①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1절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랍비로 인정받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당시 회당예배에서는 회당장이 구약성경에서 한 부분이 담긴 두루마리 성경을 가지고 나와 읽어 주면, 누군가 그것을 해석해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사역을 하셨는데, 그것을 3중 사역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3중 사역은 선포, 설교, 치유입니다. 선포는 전파하는 것이고, 설교는 가르치는 사역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설명하고 설교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청중의 반응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청중들의 반응은 놀라움이었습니다. 청중들의 반응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가르침의 내용과 방식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당시의 랍비들이었던 서기관들은 모세의 권세를 기대어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권세로 가르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배운 것을 전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책을 지으신 분으로서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르치는데 확신있게 분명하게 가르칠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놀라움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②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이 들린 사람이 있어

마가는 마침이란 말을 이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침이란 말은 어떤 경우나 기회에 알맞게 또는 공교롭게란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을 확증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귀신은 더럽습니다. 귀신은 불결합니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을 더럽히고 불결하게 만듭니다. 전에 서울에서 사역할 때, 새벽에 교회를 가게 되면, 사람들이 토한 것들을 보게 됩니다. 더럽습니다. 더러운 귀신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도 더럽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여기에서 귀신의 입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놀라기는 했지만 그분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③예수께서 꾸짖어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향하여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창조에 나타난 말씀의 능력입니다. 귀신에게 명하자, 귀신은 순종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다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그런 일을 처음 부었습니다. 그것은 폭발력이 있는 이야기거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말씀>

마가복음 1장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나눔>

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하시며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고,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2. 이어져 나오는 상황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고 잠잠하고 나오라 하니 귀신들린자에게서 귀신이 쫓겨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귀신을 내어쫓는 힘이 있었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교훈이나 윤리를 가르치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권세에 사로잡힌 이 땅을 하나님께로 돌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혔던 이가 해방되었듯, 모든 우상에게 사로잡힌 이 땅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선포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세상의 권세에서 아버지께로 인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5. 악한 원수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엑소시스트’ 영화 같은 것들을 보며 귀신 들림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귀신은 이를 넘어서 권력과 부와 명예와 성취의 우상을 세우고 이를 숭배하게 함으로 우리를 그것들의 종으로 삼아버립니다. 진정한 귀신 들림은 ‘우상숭배’의 삶인 것입니다.

6.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우상숭배를 무너트리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십자가의 은혜가 있고, 부활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우리를 사랑하사 죽기까지 우리를 위해 희생한 놀라운 은혜의 복음이 있습니다. 그 복음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우리는 이제껏 우리를 사로잡았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되고, 자유롭게 되어 진정한 구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7.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진정한 해방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우상들과, 그 우상들로 현혹하는 귀신들이 복음 앞에서 완전히 무너집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되고, 이 떵은 예수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평화, 정의를 이루게 됩니다.

8.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4장 18~19절에서 선포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9. 우리는 지금 무엇의 포로입니까? 무엇을 보지 못합니까? 우리는 지금 무엇에 눌려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은혜의 해를 선포합니다. 이는 구약에서 내내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때가 이루어졌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 앞에 서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권위있는 말씀에 우리를 내어 맡기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10. //www.youtube.com/watch?v=R6thChChUiU (꼭 들어보세요!!)

2010년 2월 10일, 수요일
본문 : 마가복음 1장 21절-45절 / 찬송가 206 주님의 귀한 말씀은
올해 중학교 1학년에 진학하는 제 아들이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적부터 유난히 겁이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처럼 조금만 어두운 곳에는 혼자 있지 못하고 겁을 냅니다. 어릴 적에 저에게 “아빠, 귀신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때 저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고 겁을 먹고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원재는 예수님 믿는 사람이지“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지?“라고 질문하면 제 아들은 손으로 자기의 가슴을 가리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원재와 함께 계신 것을 귀신이 본다면 어떻게 할까?“하면 ”먼저 도망가지“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원재는 귀신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겠네“하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입니다. 저도 혼자 늦게까지 있다가 불을 다 끄고 걸어서 지하로 내려갈 때면 간혹 등골이 오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저는 저에게 묻습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지” 저는 속으로 제 가슴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사라지곤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제자들을 거둔 예수님께서 하신 처음 사역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한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갈릴리 호수의 한 마을인 가버나움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신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라는 청년의 말씀을 들으며 깜짝 놀랐습니다. 청년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하나같이 지금까지 그 박식한 서기관들의 입을 통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그들의 폐부를 찌르는 말씀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서기관은 율법 박사 혹은 성경학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었고, 가르침과 설교와 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자들로서 대단한 명성을 펼쳤습니다. 따라서 학식이 있는 서기관들과 나사렛 출신의 시골 청년 예수를 비교한다는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가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들 갑작스러운 청년 예수의 등장과 그가 전한 말씀에 놀라고 있을 때,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거룩한 회당 안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고,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를 향해 외칩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편안하게 살고 있는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라며 청년 예수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모습에 더욱 놀라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내쫓아버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시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갈릴리 전역에 퍼졌습니다. 회당에서 나온 예수님 일행은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이 집에는 오랫동안 지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베드로의 장모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주시고 쉬려하는데,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전해들은 많은 사람들이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고,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문전박대하지 않고 다 치유해주셨습니다. 특히나 귀신들로부터 치유해주실 때는 자신의 실체를 잘 알고 있는 귀신들에게 예수님 자신의 실체에 대해서 함구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귀신 축출사역은 마가복음의 시작에 기록될 정도로 예수님 사역의 일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포함한 그 어떤 이들도 예수님의 실체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귀신들만은 예수님이 누구인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 이 귀신들을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빌립보에 건너간 사도바울의 사역이 서술되어있는데,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외쳐대는 점치는 귀신 때문에 여러 날을 괴로워했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예수의 이름으로 이 귀신을 내쫓게 됩니다. 왜 사도 바울도 귀신을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앞서 살펴본 마태복음에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 번에 걸친 마귀의 시험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마귀의 시험을 거절하셨고 마귀를 꾸짖으셨습니다. 즉 마귀는 동반의 대상이나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물리쳐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죄의 시작은 바로 뱀과 대화를 하는 것이 발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뱀이 무슨 말을 하건 단호하게 대처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뱀의 말을 믿게 되어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자신의 실체를 알고 있는 점하는 귀신을 도구로 삼았다면 하루아침에 귀신이 태도를 돌변해서 자신을 비난한다면 바울의 사역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늦게 까지 자신을 찾아온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치료하느라 피곤할 법도 한데, 다음 날 새벽 일찍 예수님은 한적한 곳로 가셔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르지 않는 권능의 샘물이 바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자신의 권능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공급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이처럼 자기만의 개인기도 시간을 갖았다는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과의 개인기도 시간을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쫓는 무리를 떠나 제자들과 갈릴리 전역을 다니시면서 전도하고 축귀사역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자신의 병을 치유해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나병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죄의 결과를 상징하는 질병으로 그 환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이 박탈당한 채 유대인들의 공동체 밖으로 소외되었습니다(레 13:45-46). 소외된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자신을 향한 믿음을 보시고, 손수 그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내밀어 대시고 치유해주셨습니다. 나병 환자가 집 안에 들어서는 경우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부정함을 입는 것으로 간주할 만큼 의식법에 철저했었던 당시 상황으로는 예수님 스스로가 부정을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레 13:45, 46). 그러나 예수님께는 자신의 부정보다도 나병환자의 병의 치유가 더 소중했습니다. 이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의지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무한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본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불쌍히 여기사' 그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에게 대셨다. 이 불쌍한 병자의 간절한 소원과 믿음은 즉시 그를 간절한 마음으로 돕고자 하시는 구주로부터 응답을 받았다. 이처럼 신속한 응답은 주님의 의지와 능력과 사랑이 하나로 뭉쳐진 결과로 이뤄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나병환자와 외적인 면에서 비교하면 우리가 더 깨끗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비교한다면 각자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우리의 건강이, 내가 처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면 오히려 이때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삼아야할 것입니다. 악화된 이 상황이 있기에 하나님 앞에 더욱 더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게 됨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즉 내가 직면하고 있는 이 모든 상황들이 바로 나를 더욱 더 성숙된 나로 만들어주시기 위한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주님께 나아갈 때에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상황을 종료시켜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굳센 나병환자가 자신의 병이 완치되자, 이내 예수님의 부탁을 저버렸다는 사실 앞에서 다시 한 번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병에 걸린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청을 들어주셔서 그에게 15년의 삶을 덤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오히려 15년이라는 삶을 자신을 위해 탕진했고, 결국 그는 악한 왕으로 평가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 민감하기보다는 응답받은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에 대한 평가가 결정될 것입니다. 오늘 각자의 기도제목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나를 향해 내미시는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시며 그 손길에 감사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복된 하루로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새벽 주님의 전으로 우리를 불러주시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시간과 건강과 심령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벽 일찍 아버지 하나님과의 개인기도 시간을 통해 영적양분을 취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처럼, 우리도 이 새벽기도와 묵상을 통해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양분을 공급받기를 소망하오니 충만케 채워주시옵소서. 주님! 악한 것에는 한 순간이라도 한눈을 팔거나 타협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악한 것에는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주시옵소서. 우리가 처한 상황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우리를 향하신 섭리임을 믿고, 상황 너머에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손길에 민감한 하루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응답만을 바라보며 기도하기보다는 응답받은 이후의 삶을 더 충실히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로 되어져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또한 사람들과 주님 앞에서 더욱 더 겸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작성: 이창호)

Toplist

최신 우편물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