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헌금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 jong-gyo heongeum eotteohge sayonghaeya haneunga

종교 헌금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 jong-gyo heongeum eotteohge sayonghaeya haneunga

▲국내 한 기독교 용품 서점에 비치된 각종 헌금봉투들. ⓒ크리스천투데이 DB

1. 지난 9일에 열린 광화문 집회에서는 주최 측인 ‘문재인하야 범국민투쟁본부’ 대표 전광훈 목사가 참가자들에게 헌금을 걷었습니다. 교인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돈을 내달라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오늘 순서 중 가장 기쁜 시간 돌아왔습니다. 무슨 시간일까요? 헌금하는 시간이죠, 헌금.”

교회를 안 다니시는 분들도 모두 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집회 현장에서 이렇게 돈을 걷는 것은 ‘기부금법 위반’입니다. 종교단체가 신도에게 모금하는 것은 예외지만, 신도가 아닌 불특정 다수에게 걷은 것은 법 위반이기 때문입니다. 1,000만 원 이상을 모으려면, 사전에 관공서에 등록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난 3일 집회에서만 1억 7,000만원을 걷었습니다.

더 의외인 것은 이 헌금함에는 헌금의 처분 권한을 전광훈 목사에게 위임한다고 돼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부분도 사회법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성경 어디에도 그런 법은 없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목사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기독교에서 말하는 ‘헌금’이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으로, 교회를 통해 교회와 교인, 그리고 이웃을 향한 나눔을 목적으로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총칭해 모든 것의 주인인 ‘하나님께 드린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바칠 ‘헌’자로 표기하여 헌금(獻金)이라 칭합니다.

그렇다면 모금(募金)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모금의 사전적 의미는 ‘성금(誠金)이나 기부금 따위를 널리 모음’입니다. 그래서 ‘모을 모’자를 사용합니다.

모금은 공공의 필요를 위해 역시 자발적으로 모아지는 금전을 가리킵니다. 이 헌금과 모금은 자발적이라는 점과 공익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헌금은 신앙고백적 행위이고, 모금은 공익을 위한 개인 의지의 표현인 점이 다릅니다.

3. 오늘날 교회마다 주일헌금은 물론이고, 갖가지 ‘헌금’을 당연시합니다. 십일조 헌금과 절기 헌금, 건축 헌금과 장학 헌금, 여신도 헌금과 남신도 헌금, 심방 헌금, 생일 헌금, 또한 작정 헌금과 여러 감사 헌금….

교인들로서는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명분의 것들입니다. 이러한 헌금 내역은 매주 주보뿐 아니라 개인 신상카드와 함께 기록됩니다. 출석 통계와 헌금 내용은 재직 임명이나 구역장, 장로 추천시 담임목사에게 집계되어 보고됩니다.

그러나 헌금 사용 내역은 제직들의 모임인 ‘제직회’에서만 공개됩니다. 익히 아는 바 헌금 목적에 부합하는 항목의 지출은 사실 매우 미약합니다.

소위 대형교회로 불리는 부자교회라 할지라도 ‘교회운영비’가 헌금 지출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담임목사 사례비를 비롯하여 후생복지비, 자녀 학자금, 목회비를 포함하면 어마무시한 액수입니다.

헌금 대부분이 ‘목회자 사례비’와 ‘건물유지비’로 지출되는 현실은, 말하자면 바쳐진 헌금들이 자체 소비로 사용되는 구조라는 의미입니다. 그에 반하여 ‘모금’은 거의 전액이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고발되기까지 합니다.

4. 목회자의 시각으로 바라보아도 한국교회 헌금은 그 목적과 사용에 있어 사실상 헌금이라 할 수 없는 지경에 와 있습니다. 헌금의 항목은 갈수록 다양해지는 반면, 헌금 지출 항목에는 변화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공개적으로 받을 돈인양 헌금을 요구하며 대가성 복을 남발하지만, 사용처는 그 목적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헌금이 아닌 수금(收金)에 가까운 형태입니다. 수금이라 함은 ‘받을 돈을 거두어들인다’의 의미로, 미수금과 미납금과 같은 용도를 뜻합니다.

‘모여!’ 하면 모이고, ‘헌금!’ 하면 쓸어 넣는 이것을 종교라 할 수 있을까요. 헌금이 과연 무엇인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좋은 계절 이 가을,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기를, 그리하여 온 땅과 생명 위에 빛을 발하는 교회되기 원합니다.

이성호
크리스찬북뉴스 운영위원, 포항을사랑하는교회 책임사역자

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설교학을 담당하는 김창훈 박사가 개혁신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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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3.2 헌금 설교의 방향

헌금 설교를 하는 우선적인 목적은 청중들이 바르고 온전한 헌금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헌금 설교의 바른 방향이 필요하다. 필자의 판단으로, 그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3.2.1 바른 물질관 정립

오늘날을 흔히 '물질 만능의 시대' 라고 한다. 돈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고, 최고의 권력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소위 '맘모니즘(Mammonism, 배금주의)'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교회와 성도들도 예외가 아니다. 양명수는 Jacques Ellul의 『하나님이냐 돈이냐』의 번역서 서문에서 돈의 영향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일갈하였다.

돈, 돈은 힘인 동시에 하나님이다. 돈만 있으면 안되는 것이 없는 세상이다. 돈은 사람의 능력을 나타내는 징표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까지도 가늠하는 수단이다. 돈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교회 역시 돈의 지배를 받고 있다. 돈이 있는 교회가 축복받은 교회요, 하나님이 함께 하는 교회다. 돈은 세상을 지배하는 통치자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교회까지도 마음대로 지배하는 통치자가 되었다. 이제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으로 인한 의인' 이라는 것은 표어에 지나지 않고 '돈으로 인한 의인' 이 교리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돈이 실질적으로 어떤 유용성과 구체적 사용 가치를 가졌느냐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돈은 자율성을 가지고 스스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돈과 하나님이 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실제로 Richard Foster가 주장한대로, 돈은 성도들을 유혹하고 마음을 지배하려고 도전하는 하나의 힘(power)이요, 하나님과 경쟁적인 위치에 있는 하나의 인격체(a rival god)가 되어 버렸다. 물론 성경은 물질의 복이나 부 자체를 잘못이나 죄로 정죄하지 않는다. 또한 가난한 삶 자체를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모범적인 삶의 형태로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성도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고, 돈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또한 그것을 매일 매일 실제로 경험하며 살고 있다.

이렇게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잘못된 상황에서 헌금의 매개가 되는 돈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른 가치관을 정립시켜주는 것은 설교자(목회자)의 중요한 임무이다. 특별히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에 대한 '청지기적 태도' 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우리는 단지 관리자이고, 또한 관리자로서 우리는 위임받은 것을 주인의 뜻대로 잘 활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이러한 청지기적 태도로 탐심과 끝없는 욕심을 버리고(엡 5:5), 자족하는 삶을 살게 해야 할 책임이 설교자(목회자)들에게 있다(빌 4:12-13; 딤전 6:6). 한 걸음 더 나아가 설교자들은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특별한 사랑을 베푸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물질에 대한 바른 가치관 즉 청지기적 태도를 가질 때 바르고 온전한 헌금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3.2.2. 헌금을 드리는 과정과 자세

성경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헌금이 되기 위해 헌금을 드리는 과정과 자세가 중요함을 말씀한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온전한 헌금이 되기 위해서는 헌금이 정당하게 번 소득이어야 함을 말씀한다. 신명기 23:18은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고 말씀한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헌금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합당한 삶의 열매가 동반되어야 함을 말씀한다. 이사야1장에서 하나님은 당시 이스라엘이 제멋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예물과 예배를 드리고 기도할 때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씀한다.

"그러한 것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 내가 싫어한다.... 내가 곤비하였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하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사 1:11-15)

하나님께 정성을 다하여 헌금을 드리면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 참으로 귀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삶의 열매가 동반되지 않는 단순한 종교적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열매와 함께한 예물과 예배를 원하신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금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중심)이 동반되어야 함을 말씀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가식적인 모습을 보시면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라고 책망을 하셨고, 호세아 6:6에서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신다.

이상과 같이 성경은 헌금(제물) 자체보다는 헌금하는 과정이나 자세가 중요함을 말씀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의 많은 설교자들이 헌금을 드리는 과정이나 자세에 대해 크게 강조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성도들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거짓과 탈세와 불법을 행해서 손가락질을 받는 삶을 살면서도,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이나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처럼, 단지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고 물질을 드리는 것으로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헌금의 과정과 자세를 강조하는 메시지는 바른 헌금 생활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3.3.3. 성경적 헌금관 정립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많은 교인들은 기독교의 정체성과 헌금의 본질에 어긋나는 헌금 생활을 하고 있다. 온전한 헌금 생활을 하기 위해 헌금의 본질을 바로 아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헌금을 드리는 바른 자세는 무엇인가? 필자는 크게 네 가지라고 생각한다.

먼저, 헌금은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정하는 '믿음과 감사의 표현' 이어야 한다. 위의 역대상 29:11-14에서의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고백과 감사는 헌금을 드리는 자가 가져야 할 기본 자세이다. 헌금은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어떤 것을 기대하며 주는 복채도 아니고, 선심성의 부조나 기부금도 아니다.

다음으로, 헌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 이어야 한다. 헌금은 벌을 받을까봐 또는 화를 면하기 위해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나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고 싶은 것처럼, 즐거움과 기쁨과 자원함으로 드리는 것이다(참고. 잠 3:9, 고후 8:3).

세 번째, 헌금은 '물질의 표현' 이어야 한다. 믿음과 감사와 사랑의 마음은 물질로 표현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이 있기 때문이다(마 6:21). 따라서 헌금은 '인색함' 으로가 아니라 과부가 자신의 모든 소유(생활비 전부)를 드린 것처럼(막 12:41-43)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 드리는 것이다.

네 번째, 헌금은 '정성의 표현' 이어야 한다. 헌금은 건성으로 대충 드려서는 안 되고 헌금에는 정성이 담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헌금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금은 미리 준비함으로 드려야 하고(고후 9:5, 7-8),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꼭 써야 할 것을 아끼고 떼어서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헌금을 드리는 바른 자세에 대한 메시지는 필요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 안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왜곡된 헌금관에 대한 끊임없는 깨달음과 도전과 자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설교자는 성경에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지만 오늘날 교회마다 다양하게 실행되어 오는 여러 가지 헌금 제도와 관련하여 성경적 원리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십일조는 오늘날도 유효한가? 십일조를 반드시 출석하는 교회에 드려야 되는가? 십일조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세전, 세후, 또는 생활비에서)? 들어오면서 헌금함에 헌금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예배 시간에 헌금 바구니를 돌려야 하는가? 헌금자 명단을 주보에 기록해야 하는가? 아니면 기록하지 말아야 하는가? On-Line헌금은 어떤가? 헌금의 종류는 조정될 필요가 있는가? 등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설명해야 한다. 물론 교회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가지형태를 취할 수는 있겠지만, 설교자(목회자)는 교회의 헌금 제도를 통해 헌금의 본질이 드러나도록 해야 하며, 기회가 되는대로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 성경적 관점에서 설명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온전한 헌금 설교를 위해서 설교자는 물질관의 정립, 헌금관의 정립 그리고 헌금을 드리는 과정과 자세에 대한 바른 교훈들과 지침들을 필수적으로 헌금 설교에 포함시켜야 하고, 자주 반복적으로 그러한 메시지들을 통해 바르고 온전하게 헌금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전하고 자극해야 한다.

4 헌금 설교의 방법

모든 설교는 효과적이고 설득력이 있어야 하고, 설교를 통해 신앙과 삶에 변화가 나타나야 한다. 이제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는 헌금 설교를 통해 신앙과 삶에 변화를 이끌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지침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4.1 청중 분석

설교는 특정한 사람이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청중들을 대상으로 특정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효과적이고 능력 있고 실제적 필요(actual need)를 채우는 설교를 위해서 청중을 분석하고 고려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설교자가 고려해야 할 청중 이해의 범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모든 사람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똑같이 고려해야 하는 근본적인 부분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타락한 존재로서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여전히 한계 상황에 있는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다음은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것이다. 모든 민족들은 그들 나름대로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전통과 특징들이 있다. 한국 교회에서 사역하는 설교자들은 한국 교회와 한국인만이 가지는 독특한 신앙 문화와 정서를 고려해서 설교해야 한다. 세 번째로, 좀 더 구체적이고 좁은 범위에서의 설교의 상황과 환경 그리고 대상에 대한 고려와 이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청중들의 신앙 수준, 지적(교육) 수준, 생활환경, 예배 환경 등과 같이 좁은 범위에서의 청중과 청중이 처해있는 상황과 환경 등을 고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큰 범위에서 세 가지 부분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고려할 때 설교자가 특정한 상황에 있는 청중들을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헌금 설교도 마찬가지다. 먼저 이 땅에 사는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갖는 공통적인 한계는 헌금의 매개가 되는 돈에 대해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접근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위에서 언급한대로 한국 교회는 전반적으로 헌금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고, 헌금과 관련하여 많은 부작용을 경험하고 있으며, 기복주의, 세속화, 이교화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 전반의 상황과 헌금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인식을 고려하고 반영하여 설교해야 한다. 세 번째로 각 지역 교회마다 헌금 설교에 대한 인식과 상황이 다르다. 헌금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경험한 교회도 있고, 그렇지 않는 교회도 있다. 따라서 설교자는 각 지역 교회가 처한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서 지혜롭게 접근해야 한다.

4.2 매개자로서의 설교자

H. Marshall McLuhan은 "매체가 메시지이다" (The medium is the message)는 금언(金言)을 남겼다. 이 금언은 설교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설교를 위해서 메시지 자체보다도 설교자의 신앙과 삶과 인격이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래서 Dennis Kinlaw가 "설교에 있어서 최대의 문제는 설교의 준비가 아니라 설교자의 준비이다"라고 하였다. 김남준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설교 작성 방법이나 설교 행위 스타일을 바꾸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설교하는 자신이 바뀌려고 하지는 않고 있다고 하면서 언제나 잠들었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는 영적 각성 한 가운데는 하나님이 깨우는 설교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헌금 설교도 마찬가지다.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헌금 설교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이다(참고. 대상 29:3-9; 대하 31:2-10). 물질에 대해 늘 욕심을 부리고, 삶에서도 근검 절약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헌금에 있어서도 본을 보이지 않는 목회자가 헌금(돈)에 대해 설교할 때 은혜와 감동과 도전을 받을 사람은 없다. 또한 그렇게 헌금과 돈 문제에 있어서 모범이 되지 못한 설교자는 양심적으로도 헌금(돈)에 대해 설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효과적인 헌금 설교를 위해서 설교자는 헌금 생활과 물질 사용에 본을 보이면서, 종종 자신의 헌금 생활과 돈의 관리나 지출 문제에 대해서도 적절한 범위에서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설교자도 인간이기에 완벽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헌금 설교와 관련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당신이나 잘하세요!"와 같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 또한 해가 거듭 될수록 물질과 관련하여 성숙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딤전 4:12-16).

4.3 정규적 실행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반적으로 헌금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고, 그동안 많은 부작용이 있었고, 또한 많은 오해가 있을 수 있기에 헌금 설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임의로 하는 것보다 정규적으로 일 년에 한두 차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연초에 한 번 그리고 7월 정도에 한 번 해서 두 번 하든지, 아니면 연초나 다른 적절한 때에 한 번 정규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연속 강해 설교를 하는 경우라면 이러한 정규적인 시기에 추가하여 본문을 따라 자연스럽게 헌금(돈)에 대한 설교를 할 수도 있다. 또한 필요할 때(예를 들어, 교회당 건축이나 재난이나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의 구제를 위해) 특별한 헌금을 위해 설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특별 헌금을 위해 설교할 때에는 교회 전체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공감대가 형성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또한 교회 전체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경우에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지만 담대하고 분명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경우에 초신자와 경제적으로 여력이 없는 자에게는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하며, 헌금 때문에 시험들었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4.4 바른 주해와 적용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 헌금에 대한 설교가 부정적으로 비춰지고 오해가 많았던 대표적 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설교자가 본문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피상적으로 주해하면서 헌금 설교를 했기 때문이다.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는 헌금 설교를 위해서는 항상 본문의 의미와 의도를 바르고 온전히 주해하고 적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십일조 헌금에 대해 설교할 때 가장 많이 애용되는 본문이 말라기 3:7-12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그 본문을 인용하여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도둑질하는 것이고,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 쌓을 곳이 없도록 축복하신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성도들은 겁을 내거나 복을 받겠다는 마음으로 십일조 헌금을 하기도 한다. 물론 그 말씀으로 십일조에 대해서 그와 같은 설교를 하는 것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라기 3장을 피상적으로 인용하는 것이다. 말라기 3장은 단순히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또한 십일조 헌금에 대한 독려가 말라기 3장의 핵심 메시지가 아니다. 우선 말라기서의 핵심 내용은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의 선포이다. 당시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하나님께 합당치 않는 삶을 살면서 부정하고 불성실한 예물을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고 그들 가운데 어려움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오직 삶을 새롭게 하고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함을 말씀한다. 요약하면, 말라기 3장의 주된 메시지는 단순히 십일조보다는 하나님께 합당한 삶과 공의로운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해서도 십일조의 본질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믿음과 감사의 표현인 것을 말씀한다. 그러니까 성경 전체와 말라기의 문맥과 역사적 배경을 통해 본문의 의미를 바르고 깊이 드러내지 않고 피상적으로 접근하여 십일조의 의무와 결과만을 강조하는 것은 본문과 십일조 헌금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또한 예배당 건축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애용되는 성경은 학개서이다. 많은 교회에서 예배당을 건축할 경우 학개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도들에게 예배당 건축 참여(특히 헌금)를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학개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선지자 학개는 바사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고국으로 다시 돌아온 유대 백성들이 폐허가 된 고국의 상황에 좌절하면서 강대국인 바사에 동화되려는 움직임이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정체성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최고의 어쩌면 유일한 방법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다. 학개 선지자가 말하는 성전 건축은 단순한 예배 처소의 건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재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며, 약화되어진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의 회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지자 학개의 말씀은 오늘날 많은 교회의 예배당 건축과는 근본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이러한 말씀의 진정한 의도와 핵심을 안다면 예배당 건축을 위해 학개서를 쉽게 인용하지 못할 것이다.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는 헌금 설교를 위해서는 반드시 본문의 의미와 의도를 바르고 온전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 때 목회자와 성도 사이의 신뢰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반대로 역사적 문학적 문맥을 무시하면서 본문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피상적으로 접근한다면,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러운 일일 뿐 아니라 성도들도 그러한 설교에 결코 심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4.5 재정의 투명성

최근 들어 한국 교회 안에 내부 문제로 인해 심감하게 몸살을 앓는 교회들의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는 교회 재정의 불투명성과 무분별한 사용이다. 그러한 교회 재정의 불투명성과 무분별한 사용은 또한 성도들의 온전한 헌금 생활에 방해가 된다. 만약 교회의 헌금 사용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투명성을 상실하면 성도들이 헌금 생활을 그만 두든지 아니면 다른 교회나 기관으로 헌금할 장소를 바꿀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최고의 헌금 설교는 성도들에게 헌금하는 것이 보람이요 기쁨이 되도록 투명하고 바람직하게 헌금을 집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의 바람직하고 온전한 헌금 생활을 위해서 교회와 목회자는 교회 재정을 체계적이고 규모 있게 계획하며, 또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보람과 기쁨을 공유하도록 집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할 수만 있으면 예산의 수립과 집행을 위해 교회의 다양한 그룹(예를 들어, 젊은이와 노년층, 남성과 여성, 중직자와 직분이 없는 자 등)에서 대표성을 가진 지체들이 참여하도록 해야 하고, 그것을 또한 전체 공동체에 투명하고 자세하게 공개하고 평가받아야 한다. 교회와 목회자가 사명감고 책임감을 가지고 헌금 집행을 해야한다는 George Davis의 말은 인용할 만하다.

교회 안에 "내가 드린 헌금으로 교회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혹은 "교회가 너무 많은 돈을 낭비하기 때문에 십일조를 그만 두겠다" 혹은 "젊은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많은 돈을 허비하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교회가 헌금 사용에 있어서 무책임하다고 느낄 때 교회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가?... 모든 신자가 십일조가 내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돈이며 각개인은 하나님 앞에서 헌금을 드릴 책임이 있는 것처럼, 모든 교회 역시 성도들이 믿음으로 드린 헌금을 집행함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5 나가는 글

본고에서 헌금 설교가 왜 필요하며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논의하였다. 오늘날 헌금 설교에 대한 많은 오해와 부작용이 있지만, 필자는 헌금설교는 교회의 정체성과 본질 회복을 위해, 구별된 공동체로서 교회의 역할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그리고 성도들의 온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바른 헌금 설교를 위해 먼저 기복주의, 세속화 그리고 이교화 등의 문제들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온전한 헌금 설교를 위해 물질관의 정립, 헌금관의 정립 그리고 헌금을 드리는 과정과 자세에 대한 바른 교훈들과 지침들이 필수적으로 헌금 설교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효과적이고 능력있는 헌금 설교를 위해 청중분석이 필요하고, 설교자 자신이 매체임을 기억하며, 가능하면 정기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본문의 의미를 절대로 왜곡하지 말고 바르게 주해하여 설교하며, 재정의 투명성과 보람이 공유되는 헌금 집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아무쪼록 본고를 통해 한국 교회 안에서 바르고 온전한 헌금 설교가 행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끝)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