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보이드 고통스러움 - jomboideu gotongseuleoum

오늘 말씀들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으며, 오늘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어서,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프로그램에서 아주 열심히 봉사하는 모든 분과 함께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질과 저는 40여 년 전에 세미나리 반에서 함께 수업을 들었습니다. 세미나리 반에서 복음에 대해 더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녀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었고, 더 깊은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제가 세미나리에 대해 좋게 느끼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제 부모님도 대학 시절에 종교 교육원에서 서로 알게 되셨고, 결혼 후 종교 교육원 건물에서 하례식을 하셨습니다. 부모님이 종교 교육원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제가 종교 교육원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질과 저는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이 제 자녀 하나하나에게 미친 영향력을 무척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저희는 아홉 자녀를 두었습니다. 막내를 제외하고 모두 결혼했습니다. 막내는 2주 후면 선교 사업을 마치고 귀환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한집에 살며 아홉 자녀를 가르치고 양육하던 때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당시에 웹캠 같은 것들이 없었다는 점이 무척 기쁩니다. 하루 24시간 우리 가정을 촬영하는 “존슨 캠”이 있었다면 정말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저희 삶의 상당 부분을 자녀를 키우며 보냈기에, 저는 다른 부모들을 관찰하고 우리의 양육은 어떠한지 분석하는 데 늘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냈으니 제가 양육에 관한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일 거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더라도, 저는 훌륭한 부모가 되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보인 두 가지 경향에 대해 잠시 집중해 보려 합니다. 그런 부모는 바로 자녀를 의롭게 양육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부모들을 뜻합니다.

제가 관찰한 첫 번째 경향은 그런 목표가 있는 부모들은 긴 안목으로 결정을 내린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당장 가장 쉬운 것이 아니라 자녀의 장래, 영원까지 생각하여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될지를 토대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들에게는 자녀들이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이 되도록 돕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아는 감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이러한 부모는 자녀들이 스스로의 삶에 대한 긴 안목을 갖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흔히 부모들은 그 순간 무엇이 자신들을 나아 보이게 하거나 단기적으로 가장 하기 쉬운 것이 무엇인지에 근거하여 결정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동네의 작은 가게에서 사탕 몇 개를 훔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죄지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어머니는 곧 제가 한 일을 알아내셨습니다. 그때 어머니에게 가장 쉬웠을 일은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하며 도둑질에 대해 꾸짖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제게 오래 남을 교훈을 주고 싶으셨기에, 저를 다시 가게로 데려가 가게 주인에게 제가 한 일을 말하게 하고 어머니가 시키는 심부름을 해 훔친 사탕값을 낼 돈을 벌겠다고 다짐하게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사촌 가족이 운영하던 가게라, 그곳으로 데려가 제게 죄를 고백하게 하신 일은 어머니에게 약간 부끄러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머니는 그 순간 ‘사촌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보다는 제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에 더 마음을 쓰셨습니다.

자녀의 학업 및 학교 프로젝트 대부분을 대신 해 주는 부모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자녀가 학교에서 잘하기를 바라지만, 학습에 도움이 되도록 고안된 숙제를 대신한다면 사실 자녀의 학습에 심각한 손상을 초래할 뿐 아니라 그들의 장래까지도 위험에 빠트리게 될 것입니다. 때로 우리 아이들이 학교나 다른 활동에서 얼마나 두각을 나타내는지, 어떤 상을 받았는지 자랑하고 싶은 압박감에 자녀가 실제로 배우고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도외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자녀들이 부모의 행동 뒤에 숨은 동기가 이기심인지, 아니면 자녀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이라 믿기 때문인지를 분명히 설명해 내지는 못하더라도 감지할 수는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 그렇듯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헌신적인 부모가 되고자 노력했던 의로운 부모님에게 태어난 것에 감사드립니다. 오래전에 저는 아이들이 제 부모님처럼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에 대해 깊이 숙고하며 그렇게 되도록 도우려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다가 부모님의 성품이 다듬어지고 지혜와 지식을 체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들이 삶에서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것을 헤쳐나가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제 아이들도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것이며 인위적으로 아이들을 삶의 모든 고통스러운 결과로부터 보호해 줄 수는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긴 안목으로 그들의 삶을 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강력한 방법은 우리 스스로 자녀들이 되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일 겁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처럼 되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자녀가 장차 되었으면 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자녀에게 강한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을 자녀들이 본다면 그들도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상황을 어떤 이유로, 어떻게 다루는가가 무척 중요합니다. 제가 관찰한 두 번째 열쇠는 훌륭한 부모들은 교육 및 지도에 관한 참된 원리를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교리와 성약 121편에 잘 요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성구들은 신권 지도력의 원리에 해당하지만, 양육에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이들 성구에서 “하늘의 권능은 의의 원칙이 아니고서는 통제되거나 다루어질 수 없다”1는 것을 배웁니다. 만일 우리가 “조금이라도 불의하게 사람의 자녀들의 영혼을 통제하거나 지배하거나 강압하려 하면, …… 여러 하늘은 스스로 물러가며, 주의 영은 심히 슬퍼[합니다.]”2

두려움과 강압, 조종, 불의한 지배력으로는 자녀에게 바라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결실을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하늘의 권능을 불러오지 않았기에 우리가 원하는 결과는 낳지 못합니다. 통제와 강압, 조종으로 맹종을 낳을 순 있어도, 개심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자녀에게 실제로 진전이 있다면, 강요해서가 아니라 강요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실제적인 영적 성장은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도록 강제되거나 강요될 때가 아니라 옳은 일을 하기로 선택할 때에만 오기 때문에 불의한 지배력은 실제적인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옳은 일을 하도록 강요한다면 실제로는 반항심만 키울 수도 있습니다.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도자는 온화하고 온유하게 권하고, 설득하고, 격려하고, 권고합니다. 회원들은 영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응합니다. 오직 이런 종류의 반응만이 도덕적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행위가 그 사람의 성품과 기질을 나타낼 때, 다시 말해 지식이나 신앙, 사랑, 또는 종교적인 의도에서 나올 때만 도덕적인 것입니다. 두려움과 강제력은 도덕적 행위를 낳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물인 선택의지에 반하기 때문에 왕국에는 그것이 거할 곳이 없습니다.”3

제가 관찰한 훌륭한 부모들은 자녀를 향한 사랑에서 동기를 얻지, 헛된 야망이나 자존심, 또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한 노력에서 동기를 얻지 않습니다. 그들은 설득, 오래 참음, 온화함, 온유함, 친절함, 순수한 지식 등과 같은 하늘의 권능과 연결된 의의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자녀와 상호 관계를 맺습니다.4

이러한 의로운 원리를 사용하여 아이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우리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신뢰할 것이며,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운명을 신나게 펼쳐나가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양육의 두 원리인 긴 안목을 갖는 것과 교육 및 지도에 관한 참된 원리를 활용하는 것은 부모는 물론 교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들 원리를 특히 새로운 졸업 요건을 충족하도록 배움의 수준을 높이려는 우리의 노력에 비추어 고찰해 보고 싶습니다. 이러한 요건은 우리가 학생들과 함께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목적을 달성하도록 돕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저는 최근에 누군가에게 새로운 요건에 대한 반응 중 하나가 “좋아, 마침내 만만치 않은 뭔가가 생겼군.”이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이 요건들이 학생들을 고무하고 돕기 위한 것이지, 학생들을 어렵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학생들이 이러한 요건을 충족해 나감에 따라 그들의 배움이 한층 높아지도록 돕는 핵심 역할을 담당할 것입니다.

제가 선교 사업을 떠날 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로 가거나 동반자와 잘 지내거나 복음을 가르치는 것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지만, 학교 다닐 때 저는 영어가 최악의 과목이었고, 외국어는 할 줄도 몰랐습니다. 제가 배울 수나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는 언어 훈련 선교부(현재 우리가 MTC라고 부르는 것)에서 용기를 준 한 교사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긴 안목으로, 단어를 외우고 문법을 익히는 것 이상을 보도록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언어를 배워 다른 사람들의 삶을 축복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게 해 주었습니다. 저와 다른 선교사들에게 큰 기대를 거셨던 그분은 거짓없는 사랑과 설득으로 우리가 그 기대에 부응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저에 대한 그분의 격려와 믿음 덕분에 저는 언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시켜서가 아니라 저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과 그 교사분이 그런 소망을 키워 주었는데, 어느 쪽도 강제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언어 교사의 영향력이 제가 교사가 되기로 결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제 부친께도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부친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우리는 부친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시는 것을 녹음해 두었습니다. 부친이 그 특별한 교사에 대해 언급하신 부분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두 명의 교사에게 각기 다르게 반응하셨던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는 큰 아버지인 돈과 함께 작은 시골 학교에 다니셨습니다.

존슨 형제: “내가 1학년이 되었을 때, 돈 형과 나는 함께 학교에 갔다. 돈 형과 함께 학교에 다니게 되어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자유 의지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돌아다녔는데, 학교가 참 깔끔하다고 생각했지.

올슨 선생님은 네 개 학년을 맡고 계셨는데, 내가 선생님의 인내심을 건드렸었나 보다. 선생님은 ‘자리에 앉거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의 지시대로 바로 자리로 돌아갔지. 선생님은 내 머리를 잡고 약간 힘을 주어 밀어 버렸고, 나는 작은 1학년용 책상에 입을 세게 부딪혔어. 입술이 욱신거리며 부풀어 올랐지. 나는 학교 첫날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단다. 그리고 생각했지. ‘이런 것이 학교라면, 이런 사람이 선생님이라면, 나는 이제부터 학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어머니가 학교에 가라고 하셔서 가긴 했지만, 아주 반항적인 태도로 다녔지.

그래서, 학교에 다닌 첫 3년간 나는 읽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 쓰기도 배우지 않았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단다. 그저 나쁜 태도를 일관하는 방관자였어.

4학년이 되었을 때, 로스 쿰즈 선생님이 콜린스톤으로 부임해 오셨다. 선생님은 내가 읽지도 쓰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보셨지. 선생님은 어머니를 학교로 부르셨다. 선생님은 나를 곁에 두고 말씀하셨어. ‘존슨 부인, 아드님이 학업에 전혀 참여하지 않아요. 수업에 참여할 수 있게 우리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선생님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단다. 로스 선생님은 매우 민감한 분이셨어.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이 아이에게 정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특별한 공책이 있어요.’ 선생님이 직접 적은 내용이 있는 공책이었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나는 오늘 여전히 그 일이 생생히 기억나. 선생님은 말씀하셨단다. ‘존슨 부인, 이것을 아이에게 읽어 주고 개념을 배우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관찰해 보세요. 그런 후에 아이를 다시 데려오세요. 저는 이 아이가 똑똑한 아이라 믿습니다. 여기 네 학년 전체를 통틀어 가장 똑똑한 아이 중 하나일 거라 생각합니다.’

나나 엄마나 3년 만에 그런 긍정적인 의견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루나 이틀 후에,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주 짧은 기간 이후에 학교로 돌아갔다. 여전히 글은 읽지 못했지만, 모두 암기해 버렸지. 선생님은 ‘그럼 어떻게 했는지 한 번 볼까?’ 하고 말씀하셨어. 그래서 나는 그 공책의 매 쪽을 그대로 암기해 보였단다. 그러자 그분은 나를 껴안으며 ‘정말 총명한 아이입니다. 학교에서 잘 해나갈 겁니다.’라고 말씀하셨어.”

제 부친은 좋은 학생이 되셨습니다. 대학도 훌륭히 마쳤고 치과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늘 자녀 교육에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저는 로스 쿰즈와 같은 선생님이 안 계셨더라면 아버지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고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로스 쿰즈가 제 부친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깨닫도록 도운 방법과 강제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셨습니까? 그분은 제 아버지가 시도하고,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쿰즈 선생님은 추가로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제 부친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쉬웠을 테지만, 손을 내밀어 도와주셨습니다. 우리도 학생들에게 똑같이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학생은 자신이 무능하다고 느끼고 있을지 모릅니다. 또 어떤 학생은 제 부친처럼 반항적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학생을 도울 가장 좋은 기회는 우리의 행동을 참된 복음 원리에 두고 그들과 상호 교감하며 가르칠 때 찾아옵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을 돋보이게는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최상이 아닌 것들을 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가르쳤던 반은 교사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특히 크고, 활기 넘치고, 소란스러웠던 반으로 기억합니다. 어느 날 다른 세미나리 교사가 어떤 자료를 받아 가기 위해 수업 시간에 우리 반 교실로 들어와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제가 수업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거란 생각에 당황스러워 반원들에게 방문객이 있을 테니 훌륭한 반처럼 보이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반원들도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습니다.

그 교사가 왔고, 학생들은 더욱 열렬하게 자기의 역할을 연기했습니다. 제가 질문을 하자 모두가 손을 들었고, 훌륭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한 학생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말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존슨 형제님, 간증을 나눠도 되겠습니까?” 저는 그 학생에게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말했습니다.

그 교사는 잠깐이었지만 놀랍도록 집중한 반을 목격했을 텐데, 그것은 실제가 아니었습니다. 실제 모습을 그에게 들켰을 때의 당황스러움을 모면하고자 꾸며낸 가식이었습니다. 제 동기는 학생들의 삶을 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닌 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그해 후반에 제게 역효과를 낳았습니다. 당시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교육감이었던 스탠 피터슨이 저를 깜짝 방문했습니다. 스탠이 세미나리 반으로 걸어 들어 왔을 때는 방과 후 시간이었고, 저는 학생 몇 명과 제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스탠이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고 학생들은 자리를 뜨기 시작했지만, 한 학생이 우리 가까이에서 서성거렸습니다. 잠시 후에 저는 그녀에게 용건을 물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존슨 형제님, 떠나기 전에 제 간증을 나눠도 될까요?” 저는 얼굴을 새빨개졌고 그녀는 생긋 웃으며 자리를 떴습니다.

때로 우리는 학생들에게서 보고자 하는 발전이 안 보일 때 온화함과 온유함, 거짓 없는 사랑을 버리고 강요나 조종에 의지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강요나 조종은 개심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공과를 위해 해당 경전을 읽는 것은 졸업 요건 중 하나입니다. 학생들이 그렇게 하도록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돕느냐가 그들의 경험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학생들이 읽기를 원하지만, 그들이 “진정한 의도”5로 읽고 묻기를 바랍니다. 뭔가를 읽었다거나 종교 교육원이나 세미나리에서 사실적 지식을 배웠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목적의 핵심이기도 한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합니다.

1800년대 후반의 위대한 교육자였던 칼 지 매저는 교회 교육 기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 전기 작가는 그에 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는 교사, 심오한 영향력을 미치는 교사였다. 그는 학생들을 사랑했고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사람이 되도록 고무하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 ……

그의 규칙은 엄격하지 않았지만, 기대치는 대단했다. 그는 자신의 뜻에 순응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학생들에게 더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불러일으켰다.”6

저는 그와 같은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긴 안목으로, 우리 자녀와 학생들이 스스로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사람이 되도록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늘의 권능과 연결된 의의 원칙을 준수함으로써 아이들과 학생들이 발전하는 데 도움을 주기를 바랍니다. 이 신성한 사업을 하려면 하늘의 권능이 필요합니다. 이 사업은 그러한 권능 없이는 행해질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께서 보여 주신 노고와 젊은이들에 대한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며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압니다. 그 두 분은 우리와 우리 자녀, 우리의 학생들을 완벽한 관점으로 바라보시며, 오직 의의 원칙으로써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부모와 교사로서 좀 더 그분들과 같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

© 2014 Intellectual Reserve, Inc. 판권 소유. 영어 승인: 1/14. 번역 승인: 1/14 “Title Not Yet Given.”의 번역. 한국어. PD10051052 320

참조 보이기

  1.  

    1. 교리와 성약 121:36.

  2.  

    2.  교리와 성약 121:37.

  3.  

    3. Boyd K. Packer, General Handbook of Instructions (1963) 인용, “That All May Be Edified”: Talks, Sermons, and Commentary by Boyd K. Packer (1982), 253.

  4.  

    4. 교리와 성약 121:41~42.

  5.  

    5. 모로나이서 10:4.

  6.  

    6. A. LeGrand Richards, Called to Teach: The Legacy of Karl G. Maeser (2014), xxvi, xxx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