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수협 문제 어디 수산물인지 확인불과

부실조합 통폐합

정부는 수협중앙회장도 농협중앙회장처럼 비상임화하고 부실한 수협 조합은 통·폐합해 조합 수를 줄이기로 했다.

24일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민·관 공동기구인 수협개혁위원회는 23일 2차 회의를 열어 수협 개혁의 방향을 이같이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수협개혁위는 당초 중앙회장의 권한 축소, 부실 수협 조합의 통·폐합 등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나 최근 농협중앙회 개혁이 탄력을 받으면서 위원들 간 개편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부실 수협 조합에 대해서는 통·폐합 등 구조조정을 전제로 정부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다만 현재 94개인 수협 조합을 몇 개로 줄일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수협 94개 중 6곳(전남 완도·장흥·흑산도, 강원 고성·동해·삼척)은 순자본비율이 -20% 이하로 부실 상태에 빠졌고, 38개 조합도 순자본비율 0∼-20%로 부실이 우려되고 있다.

“말도 마라. 울기도 많이 울고 참 고생 많이 했다. 처음엔 서울역 근처 염천교에서 조기 떼서 다라 이고 다니면서 팔았제. 그러다 노량진으로 시장이 옮기면서 1973년에 건너왔어. 하루 2~3시간 자면서 통행금지 끝나자마자 출근해 막차 타고 퇴근했제. 하루에 쌀 한 말 팔고 가면 잘 판다고 했는데 장사 잘됐어. 평생 비린내가 몸에 배고, 손도 발도 꽁꽁 얼었지만서도 생선 팔아 얼라들 공부시키고 시집·장가 다 보내지 않았나.”

일본의 수협 문제 어디 수산물인지 확인불과
이미지 크게 보기

서울 노량진수산시장 상인 정말순씨(80)는 빛바랜 흑백사진을 꺼내보듯 옛 기억을 더듬었다. 경북 문경에서 결혼 후 상경해 먹고살려고 서른다섯 살에 시작한 일이 평생의 업이 됐다고 했다. 노량진에 도매시장이 막 생겼을 무렵엔 밥 먹을 곳도 마땅치 않아 국민(초등)학교 다니던 딸이 오빠와 남동생 밥을 해먹이고 엄마 도시락도 싸왔다고 했다. 그땐 어린 자녀를 맡길 곳이 없어 생선 넣던 ‘다라’에 앉힌 채 장사한 새댁도 많았다고 했다. “너무 고생시러워 자식한테는 안 물려주려고 했는데….” 이제 50대 중년이 된 딸은 이곳 시장에서 엄마와 함께 장사를 하고 있다. 노량진수산시장에는 정씨 모녀처럼 2대에 걸쳐 어물(魚物)을 파는 가족이 적지 않다.

88년간 수도권 시민들의 밥상에 ‘기름진 생선’을 공급해온 수산물도매시장 노량진수산시장이 예정대로라면 내년 1월 인근 현대식 건물로 이전한다. 노량진수산시장의 연원은 19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역 옆 염천시장에 설립된 경성수산(주)이 뿌리다. 경성수산은 해방 후 서울수산물시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1971년 서울 도시미화 작업에 밀려 염천교시대의 막을 내리고 노량진으로 이전해 이름을 바꾸고 지금에 이른다. 초기 70~80명이던 상인 수는 681명으로 늘었다. 여기에 중도매인 185명, 산지유통인 2240명, 하역원 200명, 기타 종업원 2082명 등을 합치면 노량진수산시장을 생계터전으로 삼는 이는 3400여명에 달한다. 일일 이용객은 3만명에 이른다. 야간 통행금지가 사라진 1982년 이후엔 24시간 365일 밤낮으로 불을 밝힌 ‘잠들지 않은 시장’이기도 하다.

일본의 수협 문제 어디 수산물인지 확인불과

신선한 어물이 넘쳐나는 노량진수산시장은 24시간 불을 밝히며 손님을 맞는다. 지난 23일 오후 2시 장을 보러 나온 시민들이 활어 매장을 둘러보고 있다. 김창길 기자

지난 23일 오후 8시부터 오전 2시까지 시장 주차장엔 전국 산지로부터 생선과 조개류를 싣고 온 5t 트럭들이 쉼 없이 밀려들었다. 하역인부들과 용달차들이 몰리면서 더욱 분주했다. 오전 1시 4000평이 넘는 경매장에 들어서자 산더미처럼 쌓인 생선박스들을 앞에 두고 경매사들과 중도매인들이 거수수지식(손가락 신호)경매 또는 전자경매 방식으로 물건값을 흥정했다. 경매사들은 일반인은 알아듣기 어려운 ‘호창(呼唱)’으로 분위기를 잡아가며 낙찰자와 낙찰가격을 지목했다. 호창은 경매사마다 제각각이었다. 20년 경력의 경매사 김백수씨(48)는 “호창은 한번 입에 붙으면 바꾸기 힘들어 난 처음부터 백제가요 ‘정읍사’의 후렴구인 ‘어기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를 추임새로 넣어 상품 내용과 가격을 소개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20년간 신도림 집에서 매일 지하철 막차를 타고 출근했다”며 “한강바람이 바로 들이닥치는 노량진수산시장은 우리가 체감하기엔 서울에서 겨울이 제일 먼저 오는 곳”이라고 말했다.

오전 1시 조개류부터 시작한 경매는 오전 1시30분 선어, 오전 3시 활어·냉동 등 품목별로 순차적으로 진행돼 오전 6시까지 이어졌다. 경매가 끝난 수산물들은 중도매인의 손을 거쳐 시장 내 판매상인과 이동판매 차량, 백화점·유통업체로 분산됐다. 시장 판매상인도 오전 4시 전후 출근해 수산물의 ‘물’이 좋은지 꼼꼼히 살폈다. 중도매인 고수종씨(53)는 “오늘은 날씨가 안 좋아 제철인 방어 값이 다른 때보다 비쌌다”며 “항상 살아서 튀는 물고기들을 보니 잠을 못 자도 즐겁다”고 했다. 알뜰시장에서 팔 생선을 사기 위해 오전 5시 장을 보러 온 노영일씨(41)는 “서울에서 가장 값싸고 신선도가 높다고 생각해 10년간 매일 이 시간에 방문했다”며 “시장이 새 건물로 가면 좀 더 깨끗해질 것 같기는 하다”고 말했다.

일본의 수협 문제 어디 수산물인지 확인불과

노량진수산시장은 오랜 역사와 명성만큼이나 많은 부침을 겪으면서 다양한 얘깃거리를 낳았다. 상인 김병국씨(62)는 “초창기 땐 시장이 정말 허허벌판 같아서 경매가 끝난 자리에서 축구를 하곤 했다”며 웃었다. 김씨는 이어 “장사 잘된다는 소문에 1970~80년대엔 중동에서 번 돈으로 여기서 장사를 시작했다가 망하고 다시 중동에 나간 사람도 부지기수”라고 귀띔했다. 실제로 노량진수산시장은 1985년 가락동농수산물시장이 개장하기 전까지 서울의 유일한 수산물도매시장인 데다 신용카드도 없던 시절이었던 만큼 현금이 넘쳤다. “옛날엔 경매장에서 생태를 100짝, 200짝씩 사서 그 자리에서 팔았어. 그땐 상인 수도 적고 임대료나 세금으로 떼이는 것도 없다 보니 벌이가 좋았지.” 상인 유승희씨(64)의 회고다. 유씨는 “특히 정치는 못했어도 전두환 전 대통령 때가 가장 호황을 누렸다”고 말했다. 상인 김동성씨(55)는 “돈이 가득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퇴근하는 날도 많았다”면서 “얼마나 돈이 흔했으면 ‘노량진 돈은 개도 안 물어갔다’는 말까지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단잠에 곯아떨어져 있을 때 안 자고 고생한 결과였다. “그땐 목욕탕이 있나, 물이 뜨시기를 했나. 돈 아까워 물만 살짝 묻혔제. 우린 생선도 안 먹었어. 하나라도 더 팔아야제.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팔 땐 고개가 빼각빼각, 허리·엉치가 뽀개지는 것 같았고, 시장에 있을 땐 아무리 추워도 촛불도 잘 안 켰다.”(정말순씨)

당시 상인들은 겨울이면 빈 새우젓 깡통 등에 촛불을 켠 뒤 뚜껑을 덮고 그 위에 스티로폼을 깔아 추위를 견뎠다. 요즘은 깡통에 구멍을 내고 숯을 넣어 난로 대신 이용한다.

1988년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형 전기환씨가 시장 운영권을 강탈하려다 큰 파문이 일었다. 청와대 민정수석비서실 비서관들이 전씨의 청탁을 받고 조직적으로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시장은 ‘5공 비리의 온상’으로 신문에 날마다 대서특필됐다. 그 무렵 시장에선 ‘주먹 좀 쓴다’는 깡패들이 질서정돈과 상인보호 명목으로 금품을 갈취하기도 했다. 그해 11월 전씨가 구속된 후 시장은 재인수 절차에 들어갔다. 한국냉장, 수협, 원래 운영권을 가지고 있던 노량진청과시장 등 3자가 치열한 각축을 벌인 끝에 한국냉장이 운영권을 따냈다. 2002년부터는 수협이 운영했다.

상인들은 “1990년대 이후 국내에 대형마트가 생기고 대형마트·백화점과 전국 산지의 직거래가 늘면서 과거 같은 호황은 옛말이 됐다”고 말했다. 가장 힘들었을 때는 의외로 1997년 IMF 구제금융 시절이 아니라고 했다. 김병국씨는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바다 생물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던 때, 올해 메르스 공포가 휩쓸 때가 제일 힘들었다”고 말했다.

세월 따라 인기 어종도 바뀌었다. “1970년대엔 삼치가, 80년대 초엔 아귀가, 요즘엔 갑각류가 인기”라고 한다. 활어가 대세가 된 것은 운송기술과 생선을 오래 살리는 기술이 접목된 1990년대 들어서면서다.

같은 공간이지만 업장의 매출은 제각각이다.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역시 ‘자리’다. 판매장에는 고급(활어), 냉동(동태·홍어 등), 조개류, 대중(고등어·갈치 등 선어), 젓갈류, 건어물 구획이 정확히 나뉘어 있다. 구역마다 A~C급 자리가 있다. 상인 문갈단씨(66)는 “큰 통로의 코너 자리가 A급, 좁은 통로 코너가 B급, B급 중에서도 행인이 잘 안 들어오는 안쪽 자리는 C급”이라고 설명했다. 한 상인은 “3년에 한번씩 추첨을 통해 자리를 정하는데, 어느 위치인가가 3년 장사를 좌우하기 때문에 C급에 당첨된 사람이 A급에 당첨된 사람에게 수천만~1억원 정도의 프리미엄을 주고 자리를 맞바꾸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냉동은 오후 4시 전후, 선어 및 조개류 판매 상인은 오후 8시 정도 장사를 끝내고 오전 4시 무렵 다시 나온다. 활어 매장만 24시간 문 연다. 활어 매장은 세월의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기폭제는 “한류 열풍을 일으킨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라는 게 수협노량진수산(주) 홍보담당 이정문씨의 설명이다. 김수현이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전지현에게 개불을 사주는 장면이 방영된 이후 하루 500여명의 중국 관광객들이 지하철 등을 타고 찾아오는 관광명소가 됐다는 것. 하지만 이들이 주로 구입하는 것은 개불이 아닌 갑각류다. 24일 오후 10시 시장 내 활어 판매장에서 대만인 관광객을 상대하고 있던 중국동포 한선순씨(38)는 “중국인 중에서도 내륙인의 경우엔 생선회를 접할 기회가 없던 터라 잘 못먹어 킹크랩, 랍스타를 주로 산다”며 “활어와 갑각류를 파는 매장과 양념집의 90%는 다 중국동포를 종업원으로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홍콩에서 함께 온 미키(30)·소이(22)·젠리(31)씨는 “여행책자를 보고 처음 시장을 찾아왔다”면서 “비린내가 많이 나지만 시장이 엄청 크고 킹크랩도 싱싱해 한국에서의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예정대로 내년에 새 건물로 이사를 해도 노량진수산시장의 역사와 삶은 계속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겨운 재래식 풍경은 추억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시아버지 제사 준비를 위해 서울 후암동에서 왔다는 윤미정씨(72)는 “30년도 넘게 이곳을 다녔다”며 “정이 많이 들어 새 건물로 가면 느낌이 어떨지 모르겠다. 조금 아쉽지 않을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