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냐건 그냥 웃지요 그의 이름은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돌같이 하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고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관용은 미덕이다. 가서 발병난다. 주었을 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관용은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황금 보기를 돌같 죽는다.미덕이다. 왜 사냐건 웃지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임 으랴.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황금 보기를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이 하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왜 사냐건 웃지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관용은 미덕이다. 가서 발병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관용은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며 죽는다.미덕이다.

나이 오십이 되기 전에 요절한 시인 김상용(金尙鎔)의 대표적인 시 중에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것이 있다. 자연에 묻혀 살며 삶을 관조하는 듯한 이 시는 다음과 같다: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이 시 속에서 작가는 평화로운 전원적 삶을 살기를 소망하는 것 같다. 따뜻하고 해가 잘 드는 남쪽으로 창문을 내고 흙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그의 바람을 소박하게 말하고 있다. 구름, 즉 세상의 헛된 유익이나, 혹은 명예 따위가 그를 유혹한다 해도 그는 거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마음속으로 풍성하게 자연을 즐기며 살고 싶다는 말이다. 왜 사느냐고 묻지 말라. 이 평화로운 삶의 기쁨, 그것이 곧 삶의 여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시의 내용에 대해서나 그 해석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우리에게 누가 왜 사느냐고 물으면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어떤 목적으로 왔으며, 어디로 향해서 달음질치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인가? 지난 역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 철학자들과 종교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대답을  그 나름대로 주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무엇이 정답인가? 누가 우리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주는가? 또 이 질문은 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인가?

우리가 왜 사느냐에 대한 답에 따라서 우리 삶의 질이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의 속도를 한 번 조용히 멈추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름대로 하나님의 사역을 하면서 사는 우리 크리스천들이지만 정말로 내가 어떤 삶의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곰곰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왜 새벽부터 일어나서 늦은 밤이 되어야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있는지, 왜 우리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지, 왜 내 주위의 이웃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지를 한 번 돌아보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우리 삶의 질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느냐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반응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세속의 물질과 명예에 두기도 한다. 따라서 그 사람은 자신의 목표대로 열심히 달려간다. 그런 사람들의 머리에는 세상의 돈과 명성에 대한 욕망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세상 욕망을 향해 친구도 이웃도 돌아볼 사이 없이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간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속 욕망의 부질없음을 일찍 깨닫고 세상  욕심에 마냥 초월한 모습으로 살아가기 원한다. 때론 수염도 깎지 않는 도사와 같은 모습으로, 혹은 모든 것을 도통한 것과 같은 태도로 세상을 등지려 한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문화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닮아가고 있다. 복음과는 본질적으로 상치되는 세속적이고 인본적인 세계관을 우리도 모르는 새 답습하고 있다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인생은 단 한 번 밖에 없다. 그러므로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겨라”라고 부추긴다. TV와 같은 미디어를 통해 계속해서 우리의 관점을 세상의 초점으로 흐려 놓는다.

Life is short! Just do it! 등의 문구들이 우리 삶의 목적을 대변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참된 성경적인 우리 삶의 목표를 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의 삶의 경험을 돌아보고 평가해야 한다.
참 자유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의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 크리스천들은 성장을 위해서 고통을 감수하며, 새로운 출생을 위해서 죽음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통해서 세상의 불의와 맞설 수 있음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한 순간에 깨달아지는 것도 아니다. 교회를 통해서, 훌륭한 교사들을 통해서, 존경받는 목사님들을 통해서 가르침을 하나씩 하나씩 깨우치게 될 것이다. 우리 인간의 지독하게 부패한 죄성,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그리고 구원 등과 같은 기독교의 참 진리가  바른 크리스천으로서의 세계관을 형성시켜 줄 것이다.

이런 바른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분명해진다. 마음과 뜻과 영혼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어떤 위치에 있든지, 내가 어떤 사람이든지간에 항상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누군가가 우리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그냥 웃을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산다”고 대답할 수 있는 귀한 크리스천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여러분은 어떤 별명을 가지고 있나요? 누군가를 바라보며 불현듯 찾아온 번뜩이는 생각은 개성 넘치는 별명으로 남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별명을 지어주는 동시에 다양한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죠. 가끔은 이름보다 별명이 더 익숙할 때도 있고요. 그리고 여기, ‘행복을 그리는 화가’라는 별명을 가진 이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바 알머슨(Eva Armisén, 1969~)’. 행복을 그린다는 기분 좋은 별명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알머슨이 일러주는 행복의 비밀, 함께 보러 가볼까요?

😳한국과 이런 인연이…?!

  에바 알머슨은 1969년 스페인 5대 도시 중 하나인 사라고사에서 태어났어요.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알머슨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미술을 공부했죠. 그는 코카콜라 광고를 통해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요. 이후 전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답니다. 한국의 기업들과도 다양한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했어요! 라면부터 카페, 은행, 화장품까지 국내의 다양한 브랜드가 그녀의 작품을 사랑했죠. 알머슨 역시도 한국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고요. 그는 특히 제주 해녀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는데요. 해녀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을 관찰하고, 해녀를 주제로 한 동화 <엄마는 해녀입니다>의 삽화를 그렸답니다.

  한국에서 다양한 활동을 오래도록 펼친 까닭에서인지, 그는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 이후 한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스페인 예술가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그 역시 한국에서 맺은 연을 잊지 않고 꾸준히 내한해 팬들에게 근황과 더불어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기도 하고요. 코로나19라는 벽을 맞닥뜨려 한동안 만나볼 수 없었던 그가 3년 만에 한국 관객을 위한 신작을 들고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12월 4일까지 용산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에서 진행되는 <에바 알머슨 특별전 : 에바 알머슨, Andando 展>으로요!

책 <엄마는 해녀입니다> ⓒ 네이버 북

👀행복 찾아 삼만 리

  알머슨 작품의 주요 특징은 둥근 얼굴과 웃는 입이에요. 작품 속 인형과 강아지까지 모두 미소를 띠고 있죠. 가슴의 하트 모양과, 발그레한 볼, 파마머리 같은 요소도 자주 볼 수 있답니다. 알머슨은 대부분 유화로 작업을 하는데요. 판화, 도자기, 조각, 설치 미술 등의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기도 해요. 이번 전시에서는 그녀의 도자기 작품과 애니메이션 일러스트 작업까지 만나볼 수 있답니다.

  알머슨은 동화 같은 그림체로 일상을 담아내요.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소소한 행복이 느껴지죠. 단순하게 그린 작품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행복에 대한 알머슨의 고찰이 담겨 있어요. 이번 전시회의 제목인 ‘Andanado’는 ‘걷기’라는 뜻이에요. 그가 걸어온 길, 걸어가는 길,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함축했다고 볼 수 있죠. 알머슨이 행복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살펴보며 우리의 걸음도 한번 돌아볼까요?

작업 중인 에바 알머슨 ⓒ 인터파크 티켓 홈페이지

💖행복은 ‘관계’에 있지 않을까요?

  알머슨은 행복과 관련해 ‘관계’에 의미를 둬요. 나와 타인의 관계, 나와 세상의 관계, 나와 나의 관계에 말이죠. 그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해요. 그리고 알머슨이 말하는 사랑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믿어주고, 들어주고, 안아주고, 기념하는 것이죠. 사랑에 대한 알머슨의 행동, 상황, 느낌은 작품에 고스란히 나타나요. 특히 코로나를 계기로 시작한 격리자의 초상화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랍니다. 처음 격리자의 사진을 받아 하나둘 그리던 것이 어느새 100개가 되었죠. 이를 통해 알머슨은 물론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객마저도 아무것도 아니던 관계가 점점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얽히는 과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날 벽에 걸린 작품을 보던 두 명의 관람객 역시 이런 이야기를 나눴어요. “너무 사랑스럽다!”

격리자 100인의 초상화를 모아 완성한 작품 ⓒ여성신문

  또 그의 작품 세계에서 인상 깊은 부분은 ‘나와 나의 관계’입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작가 자신이 바라본 알머슨의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말이에요. 알머슨에게 그림은 대피소이자 보호막의 역할을 하는데요. 그림을 통해 휴식이 필요함을 깨닫고, 두려움을 응시할 용기를 얻고, 자신의 길에 확신을 다지는 거예요. 이번 전시에서 알머슨은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솔직히 드러냈어요. 숱한 어려움과 힘듦 사이에서도 강인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우리가 단단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알머슨의 가치관을 알 수 있었죠. 알머슨의 작품을 볼 기회가 생긴다면, 화려한 색과 미소 뒤에 있는 의미를 느껴보세요. 그녀가 전하는 행복과 사랑을 훨씬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에바 알머슨 특별전 전시 포스터 ⓒ 중앙선데이

솔직 핵심 정리 노트

ㅇ박수갈채드립니다

  • - 굿즈샵이 잘 꾸며져 있어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양하게 소장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답니다! 
  • - 국내에서도 몇 번 전시가 이루어졌지만, 이번 전시는 역대 최대 규모의 알머슨 전시예요! 2022년에 그려진 신작까지 만나볼 수 있답니다.

ㅇ요건 쫌 아쉬운데

  • - 큰 작품이 많아서 멀리서 봐야 하는 작품이 다수 있음에도 경계선과 작품 사이의 거리가 짧은 편이었어요. 사람이 많은 주말에 가면 충분히 감상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아요.

💬Editor’s Comment

  우리 삶에는 ‘찰나’에 놓치는 것들이 너무도 많아요. 관계의 시작과 끝은 정말 한 순간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언제 어디서든 사랑이 튀어나올 수 있게 말이죠! 흔히 관계의 대상이라 생각하지 않는 나 자신에게도 말이에요. 전시의 마지막, 에바 알머슨은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에 대한 선택권은 오롯이 우리 스스로에게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전시를 마무리합니다.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해도 괜찮습니다. 성공과 실패가 모여 우리라는 존재가 됩니다” 

  별명은 결국 그 별명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는 나로부터 탄생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스스로 자신의 별명을 지을 수도 있겠죠? 오늘은 나와 내가 어떤 관계이고, 나에게 어떤 별명을 붙여주고 싶은지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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