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78호 83호 차이 - gugbo 78ho 83ho chai

국보 제78호 반가상과 국보 제83호 반가상의 비교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

 특별 전시장에서는

다른 유물들은 사진 촬영이 불가능했지만, 국보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특별히 이 두 유물만 모셔진 공간에서 전시를 했고,
다행히 촬영이 가능했다.

두 반가상을 구경하고 나오려다가 두 반가상을 비교하는 영상이 있어 흥미롭게 보았다.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이 국보 제83호보다 먼저 만들어졌고,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역시

아는 만큼 눈에 보인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세 번째 일본편에서 유홍준은

국보 78호, 83호 반가사유상을 비교하는 역사학자 안병욱의 견해를 들려준다.

안병욱은 83호가 78호보다 낫다고 평가한다.

발의 표현 때문이다.

“78호는 곰발바닥처럼 평발인데 83호는 엄지발가락을 살짝 비튼 가벼운 움직임이 있다.”

안병욱의 비교는 일본의 국보 1호인 고류사 반가사유상과 83호를 대상으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손에서 우위가 갈린다.

“광륭사(고류사) 반가상은 그저 상투적인 수인(手印·손 모양)으로 원을 그리고 있지만

국보 83호는 얼굴에 손을 대고 명상하다가 법열에 들면서 입가에 미소가 감돌고… 손가락은 뺨에서 막 떨어지는 순간을 나타냈으니

이것이 훨씬 높은 예술성을 지녔다.” 안병욱의 심미안에 감탄하며

유홍준은 “명작의 비밀은 이처럼 디테일에서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다”고 적었다.

안병욱이 78호, 83호를 비교한 것은 2004년 전시회 때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서 용산으로 이사하면서 다른 유물은 모두 빼고, 두 점만 남겨 전시할 때였다.

한국 불교 조각 중 최고로 꼽히는 두 유물의 우열을 비교하는 ‘모험’은 78호, 83호를 한눈에 보고 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은 좀처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교체전시, 해외 대여 등으로 두 점이 함께 전시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78호, 83호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회가 2004년 이후 처음으로 열렸다.

9월 25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되는 ‘고대불교조각대전-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 특별전이다.

광륭사 반가상은 없지만

일본을 비롯해 중국, 인도 등의 불상을 여러 점 모아 한국의 불상과 비교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특별전은 반가사유상이 인도에서 만들어진 후 중국,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진 과정을 더듬는다.

반가사유상은 불교 수행의 기본 자세인 가부좌에서

한쪽 다리를 지면에 딛고 있는 ‘반가’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철학적 행위인 ‘사유’가 합쳐져 탄생했다.

‘신성과 인간미가 하나의 작품에 융화되어 빚어진 예술품’이라고 해석된다.

6, 7세기의 고대 한국은 반가사유상이 절정을 맞은 무대였다.

당시 성행하던 미륵신앙과 결합돼 미륵보살상으로 완전히 정착했고, 독립된 공간에서 숭배되며 일본으로까지 전해졌으며,

 경북 봉화군 북지리에서 발견된 반가사유상은 남아 있는 것만 1.7m에 이르는 대형 작품도 등장하는데,

없어진 상반신까지 합치면 3m에 달할 것으로 추정돼 동양 최대의 것으로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세속의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시작한 반가사유상의 인간적 사유는 시간이 흐르고 불교가 동쪽으로 전래되면서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신의 사유로 점점 바뀌어 갔다”고 설명했다.

이 영상을 통해 두 반가상을 다시 보게 되었고,

역시

아는 것 만큼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사진 원오원아키텍스]

왼쪽 다리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린 채 오른쪽 손가락은 볼을 살짝 누르며 깊은 생각에 잠긴 싯다르타.
반가사유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던 싯다르타의 모습을 형상화 한 불상으로 삼국시대인 6~7세기에 크게 유행했다. 예술적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내에서도 각각 국보 78호와 8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꼭 봐야 할 전시물로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2일부터 상설전시관 2층에 전시실 ‘사유의 방’을 개관하고, 대표 소장품인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을 함께 전시한다. 두 반가사유상을 독립 공간에서 함께 전시하는 것은 1986년, 2004년, 2015년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현재 용산으로 옮겨진 뒤로는 세 번째다.

◇국보 78호·국보 83호 어떻게 다른가
비슷한 시기에 같은 모델(싯다르타)을 대상으로 제작한 반가사유상이지만, 차이점도 적지 않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머리에 쓴 보관(寶冠)이다.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권강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는 "탑처럼 보이는 장식이 솟아 있는 이 보관은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한 특이한 형식으로 흔히 일월식(日月蝕)이라고 한다"며 "일월식의 보관 장식은 원래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관에서 유래했는데, 비단길을 통해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보살상의 보관으로 바뀌어 사용됐다"고 설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사유의 방'에 전시된 국보 78호 반가사유상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반면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머리에 삼산관(三山冠) 또는 연화관(蓮花冠)이라고 불리는 낮은 관을 쓰고 있다. 또한 국보 78호와 달리 상반신에 옷을 전혀 걸치지 않은 채 단순한 목걸이만 착용하고 있다. 권강미 학예사는 "단순하지만 균형 잡힌 신체,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표현된 옷 주름, 분명하게 표현된 이목구비로 보아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국보 78호보다 조금 뒷 시기인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대체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廣隆寺)의 목조반가사유상과 매우 닮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삼국의 불상이 고대 일본으로 전래된 유력한 증거로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사유의 방'에 전시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어디서 만들어졌나?
공교롭게도 두 반가사유상 모두 정확한 출토지가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백제 또는 신라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정만 나왔을 뿐이다. 최근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 양식과 흡사하다며 고구려 불상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국보 83호도 마찬가지다. 1920년대 경주에서 발견됐다고만 알려져 있을뿐 관련 자료나 근거는 없다. 제작한 나라는 신라와 백제로 나뉘어 있는데, 현재까지는 신라쪽에 보다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623년조에 신라에서 가져온 불상을 고류지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불상이 국보 83호와 유사한 목조반가사유상으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사유의 방' [사진 원오원아키텍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사유의 방' [사진 원오원아키텍스]

한편 이번 전시전은 상설전시관 2층에 439㎡ 규모의 새 전시실을 조성하고, 명칭도 ‘사유의 방’으로 명명했다. 박물관 측은 "소극장 크기의 전시 공간에 어둠을 통과하는 진입로, 미세하게 기울어진 전시실 바닥과 벽, 아스라한 반짝임을 주는 천정 등을 구상했다"며 "현재를 벗어나 다른 차원에 있는 듯한 추상적이고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반가사유상에 집중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를 설계한 최욱 건축가는 “반가사유상의 에너지와 공간이 일체화 된 느낌을 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유성운 기자

관련 게시물

Toplist

최신 우편물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