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제를 얘기하면 앞에 이야기는 다 어디 - geu munjeleul yaegihamyeon ap-e iyagineun da eodi

1. 단 하나의 연주?

가) 1950년대, 생애의 말년에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 교향악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한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공연을 본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토스카니니는 이 연주를 듣고 나서 “이게 어디 베토벤 교향곡인가, 푸르트벵글러가 작곡한 곡이지”라는 투로 불평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런 평가는 연주가 독창적인 해석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악보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 악보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리라.

유명한 피아니스트 호로비츠의 ‘자유로운’ 연주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악보에 있는 그대로 연주한다는 이들과 달리 “악보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연주가 악보를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통해서 일종의 창조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긴 듯하다. 그는 매번 똑같은 연주가 아니라 항상 다른 연주를 들려주는데, 한 연주회에서 슈만의 작품집 「어린이 정경Kinderszenen」을 연주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 앙코르 곡으로 한 번 더 ‘트로이메라이Traeumerei’를 들려준다. 그런데 같은 날 밤에 들려준 같은 곡의 두 연주는 동일하지 않았다. 마치 두 곡을 연주한 것처럼.

‘하나의’ 악보에 대한 수많은 연주들이 ‘동일한’ 원본에 대한 수많은 복사, 유사한 재현, 주석에 지나지 않는가? 하나의 악보와 수많은 연주를 이런 틀에 따라서 원본 악보에 가장 가까운 연주(물론 완벽하게 일치하는 연주는 없을 것이다)와 그렇지 않은 연주로 구별하고 평가해야만 하는가? 연주가 복사, 재현에 지나지 않는다면 모든 연주는 사실상 무의미하거나 불완전한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다양한 연주를 참된 것/그릇된 것으로 등급화하지 않고, 각각의 것을 악보에 대한 나름의 해석/실현으로 볼 수는 없는가? 이런 연주-사건들이 악보의 가능성을 구체화하고 원-악보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악보지상주의와 각 연주자의 개성을 강조하는 관점들이 공존하는 음악의 드넓은 장에서 우리는 다양한 해석의 프리즘 가운데 어느 한 연주를 즐기고 싶다.

나) 카프카의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법 앞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살펴보는 작업의 하나로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는 세 해석 방향을 보고자 한다. 초대된 주인공들은 데리다, 카프카 자신, 아감벤이다. 이들은 각각 자신의 관점에서 「법 앞에」를 연주하고 「법 앞에」를 새로 쓴다. 저자 까지 동참하는 이런 해석과 재창조의 놀이는 우리가 텍스트 앞에 서서 의미의 단일성과 다양성에 관한 질문을 할 때 늘 느끼던 궁금증을 다소나마 해소 시킬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는 접근할 수 없는 법/텍스트에서 의미의 불확정성을 강조하고, 카프카는 이 텍스트를 『소송』의 한 장에서 문지기의 눈으로, 문지기를 위하여 해석하는 사례를 보여준다. 그리고 아감벤은 이 텍스트가 실패한 시골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기 위해서 법의 문을 닫는 시도로 해석한다.

법 앞에 한 문지기가 서 있다. 이 문지기에게 한 시골 사람이 와서 법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시골 사람은 곰곰이 생각 하고 나서 그러면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가능하오.”문지기가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된다오Jetzt aber nicht.”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언제나처럼 그렇게 열려있고 문지기가 옆으로 비켜서 있어서 그 시골사람은 몸을 굽히고 문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그것을 본 문지기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한다. “그렇게도 끌린다면 내 금지를 어기고 들어가 보오. 하지만 내 힘이 장사라는 걸 알아두시오. 게다가 난 말단 문지기에 지나지 않소. 그러나 홀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문지기가 서 있는데 갈수록 힘이 센 문지기가 서 있다오. 나조차도 세 번째 문지기의 모습을 쳐다보기도 힘겨울 정도라오.”시골 사람은 그런 어려움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법이란 정말로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피 외투를 입은 그 문지기의 모습, 그의 큰 매부리코와 검은 색의 길고 가는 타타르족 콧수염을 뜯어보고는 차라리 입장을 허락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결심한다. 문지기가 그에게 의자를 주며 앉으라고 한다. 그것에서 그는 여러 날 여러 해를 앉아 있다. 그는 들어가는 허락을 받으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자주 부탁을 하여 문지기를 지치게 한다. 문지기는 가끔 그에게 간단한 심문을 한다. 그의 고향에 대해서 자세히 묻기도 하고 여러 가지 다른 것에 대해서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지체 높은 양반들이 건네는 질문처럼 별 관심 없는 질문들이고, 문지기는 마지막엔 언제나 그에게 여전히 들여보낼 수 없다고 한다. 그 시골 사람은 여행을 위해서 많은 것을 장만해 왔는데, 문지기를 매수할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용한다. 문지기는 주는 대로 받으면서도 “나는 당신이 무엇인가 소홀히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려고 받을 뿐이오”라고 말한다. 수년간 그는 문지기를 거의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다. 그는 다른 문지기들은 잊어버리고, 이 첫 문지기만이 법으로 들어가는데 유일한 방해꾼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처음 몇 년 동안은 이 불행한 우연에 대해서 무작정 큰소리로 저주하다가 후에 늙자 그저 혼자말로 투덜거린다. 그는 어린애처럼 되었고 문지기에 대해서 수년간이나 열성적으로 관찰한 탓에 모피 깃에 붙어있는 벼룩까지 알아보았으므로, 그 벼룩에게 자기를 도와서 문지기의 마음을 돌려 달라고 부탁한다. 마침내 그는 눈이 침침해진다. 그는 자기의 주변이 더 어두워진 것인지, 아니면 그의 눈이 착각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 어둠 속에서 법의 문에서 꺼질 줄 모르는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오래 살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가 죽기 전에 그의 머릿속에서 그 모든 시간에 대한 모든 경험들이 여태까지 문지기에게 물어보지 않았던 단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졌다. 그는 문지기에게 눈짓을 한다. 이제 굳어져 가는 몸을 더 이상 똑바로 일으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문지기는 그에게 몸을 깊숙하게 숙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키 차이가 그 시골 남자에겐 매우 불리하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아직 뭘 더 알고 싶은 거요?”문지기는 묻는다.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 군요unersaettlich.” 시골 남자는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법을 절실히 바랍니다. 그런데 왜 지난 수년간 저 말고는 아무도 입장을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문지기는 그 시골 사람이 이미 임종 가까이 왔음을 알고 희미해진 그의 귀에 들리도록 소리친다. “이 곳에서는 당신 말고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 받을 수 없다오. 왜냐하면 이 입구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오. 이제 가서 문을 닫아야겠소.”

  

3. 접근할 수 없는 법/텍스트 앞에서: 데리다의 해석

데리다는 카프카의 「법 앞에」를 의미의 불확정성을 드러내는 두드러진 예로 보고 이 텍스트가 다양한/무한한 의미들을 산출할 수 있는 바탕이라고 본다. 그는 ‘법 앞에vor dem Gesetz’를 글자 그대로 옮긴 préjugés, devant la loi를 글 제목으로 삼으면서, pré-jugés로서 ‘법-앞’에서 선-입견들préjugés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살핀다.1)

그는 해체-구성을 통해서 법 앞에서 ‘실패한 시골 남자’를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이 텍스트 앞에서 의미에 다가가지 못하는 독자들의 어찌할 수 없음을 주제로 삼는다.

데리다는 ‘법에 접근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법이 지닌 보편타당성을 환기시킨다.2)

이야기에서 시골남자는 법에 다가가려고 한다. 그런데 법은 어떤 곳에 있어서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그러한 것인가? 그 안에 들어가거나 나올 수 있는 경험적인 것인가? 시골남자는 마치 법이 ‘어떤 것(quelque-chose; some-thing)’이거나 어떤 곳에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법에 다가서려고 하고, 법을 현전présenter하도록 해서 이 법과 일정한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우리는 이런 법말고도 사랑, 희망, 진리와 경험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랑을 만지고, 희망을 손에서 놓치고, 진리를 눈으로 보려고 하곤 한다.)

그러나 법은 보편타당성(普遍妥當性:All-gemein-gültigkeit)을 지닌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타당성을 지닌 법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어떻게 그런 법과 관계 맺을 수 있는가?

(칸트는 실천 이성을 통해서 선한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인 도덕 법칙을 제시한다. 이런 도덕 법칙은 정언명령의 형식을 취하는데, 이것은 개인이 구체적으로 해야 할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행위가 따라야 할 형식적 규칙을 제시한다. 곧 자기 행위가 따라야 할 준칙Maxime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하라고 명령한다. (“네가 동시에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의지하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 하라.”) 이런 도덕 법칙에 따르는 ‘모든’ 행동은 ‘보편적으로’ 선하다. 따라서 도덕법칙은 어떤 경험적 내용도 포함하지 않지만 보편타당한 선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이다.)

과연 보편타당한 법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보편타당한 법은 어떠한 경험적 내용도 지니지 않는 추상적인 형식이기 때문에 해결하기 어려운 난점을 지닌다.

보편타당한 법을 ‘특정한 내용을 지닌 것’으로 정의한다면, 이 ‘특정한’ 내용 때문에 그 자체로 보편타당할 수 없다. 경험적인 어떤 것은 그 자체로 보편타당성을 ‘지금’, ‘여기에’ 온전하게 구현할 수 없다.3)

그래서 시골남자가 믿듯이 그가 ‘법 앞에서’ 법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그 문 ‘안’에 들어갈 수 있는데, 문지기가 가로막기 때문에 법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오해와 달리 ‘법 안에’ 들어가려고 하는 시도는 원리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법 앞에’ 설 수도, ‘법 안으로’ 들어갈 수도 법 ‘바깥으로’ 나올 수도 없다.

(물론 카프카가 ‘법 안’을 공간적 이미지로 제시한 것은 이런 보편타당성의 담지지인 법을 마치 가시적인 어떤 것인 것처럼 문학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이처럼 (순수한 형식인) 법 자체는 ‘어떠한 내용도’ 지니지 않으므로 누구도 ‘법에 접근할acceder à la loi’ 수 없다. 따라서 카프카의 이야기는 법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실패할 수밖에 없고, 이런 실패 자체가 하나의 의미 있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데리다는 『법 앞에』가 법에 접근할 수 없음, 불가능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라고 본다. 그런데도 시골남자는 법이란 보편적인 것이어서 항상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기에게만 허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런 실패는 무의미한 것인가? 이러한 실패하는 과정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닌가?4)

나) 법의 대리자 앞에서

이야기에서 법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그런데 그는 ‘법 앞에서’ 문지기의 허락을 기다리면서 스스로 결정을 유보한다. 스스로 포기하는 이런 모습은 이런 금지가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금지, 금지의 내면화라고 할 수 있다.

(시골 남자는 법과 거리를 둔 채로, 위계질서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하급관리를 보고서 자기 결단을 유보한다. 그는 문지기의 말을 듣고서 법으로 ‘들어가지 않기’를, 허락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를 결단한다. 그것은 ‘결단하지 않기를 결단’한 ‘비 결단의 결단’이다. 물론 이런 비 결단 때문에 기다림이 시작되고,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리고 법에 이르는 길은 우회하는 길일 수밖에 없어서 법과 마주하기 전에 먼저 문지기라는 ‘대리자’와 마주해야 한다.

데리다는 시골남자가 법 자체가 아니라 그 대리자/문지기 앞에 나아갈 뿐이라고 본다. 법 자체는 보이지 않으므로 시골남자는 법의 문이 아니라 문지기를 보고 있다. 데리다는 이런 배치를 통해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법 자체가 아니라, 법의 대리물, 법의 특정한 형태, 법의 경험적 내용, 법조문의 글씨들, 법이 실행되는 구체적인 사건들, 또는 (바른/그른) 판결들 등의 경험적 사례들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까닭에 시골 남자는 ‘법 앞에devant la loi’가 아니라 ‘대리자 앞에devant la représentants’ 있다.

데리다는 이런 ‘법과 관계 맺을 수 없음’, ‘비-관계’를 (차이 짓기와 비루기를 양의적으로 수행하는) 디페랑스différance로 이해한다.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은 ‘지금은 안 되는jetzt aber nicht’ 까닭에 금지된 것은 아니고, 다만 지연, 유보될 뿐이다. 따라서 현재적 금지는 지연시킴différer이다. 문지기의 금지는 나중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현재에도 문은 열려 있고, 시골남자는 문지기의 말에 상관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법에 대한 현재의 금지는 법안에 들어가는 것이 ‘나중에는’ 가능하다고 암시함으로써 시골 남자를 계속 법 앞에 머무르게 하는 점에서 시간적 지연, 시간적 간격temporisa tion을 낳는다. 그리고 법 ‘앞’의 문은 공간적 경계의 표시로서 공간적 간격 내기espacement를 보여준다. 이처럼 시골남자는 ‘법 앞에서’ 공간적 간격과 시간적 지연의 벽에 가로막힌다. 데리다는 문지기들의 권력도 디페랑스로 해석한다. 나중에야 가능한 허락이 미래의 정해지지 않은 시간으로 연기된다면, 이런 지연은 끊임없이 존재할 무수한 문지기와 그들의 지연시키는 능력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연은 시골남자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끝이 없는’ 것이다. (“법은 끝없는 지연을 명령한다. 법은 관계(férance, relatio)를 거부하고, 지시를 방해하고, 지연시킨다en différant.”)

데리다는 차이짓기-미루기(différance)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표상representer하지 못하게 하고, 침입하지 못하게 한다”고 본다. 이것은 법이 ‘여기 있다’라고 말할 수 없도록 하는 법의 법la loi des lois이자 법 절차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것도, 제도적인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일종의 유령이다.

따라서 법의 진리는 비-진리, 진리 없는 진리verité sans verité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법은 법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맹목적인 지킴이가 지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지기가 법을 지키고 법이 어떤 본질을 지닌 것으로서 그로부터 권력이 나온다는 ‘편견préjugés’이 ‘법-앞에서pré-jugés’ 마련된다. (문 앞에 서있는 문지기는 무엇을 지키고 있을까? 그는 ‘이’ 법의 문 안에 ‘법’이 없음을 알지 못하게 하려고 지키며, 그렇게 지키고 있는 까닭에 그 안에 무엇인가가 있으리라고 기대하거나, 중요한 그 무엇이 있으리라고 믿게 한다. (문지기는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법이 없음을 은폐하려고 지키고 있다. 이런 부재의 지킴이가 법의 권위를 만들고 법의 현존에 대한 일정한 기대와 욕망을 만든다.)

데리다가 볼 때, 법 ‘앞’에 있는 우리는 법 ‘바깥’에 있으므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법은 나중에 출입을 허락하는 ‘약속 아닌 약속’으로 기다리게 하고 붙잡아 둔다. 항상 열려있는 문은 욕망을 자극하고 법 앞에 기다리게 하므로, 우리는 법의 이름, 이미지, 기표와 그 효과에 사로잡혀 있다.

다) 법 안에 없는 법, 법이라는 기표

데리다는 「법 앞에」라는 텍스트에서 ‘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지적한다. 카프카의 텍스트에서 법은 침묵한 채 이름만 지니므로, 그것에 관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다.5)

그는 「법 앞에」라는 이야기가 다른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만을 서술한다고 본다. 게다가 이런 자기 지시도 명료함이 아니라 ‘텍스트를 읽을 수 없음’, 텍스트의 자기모순을 나타낼 뿐이다.

“텍스트는 법처럼 스스로를 지닌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그것도 자기와의 비동일성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것은 발생하지도 않고,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도달하도록 허락하지도 않는다. 텍스트는 법이며, 법을 부여하고, 독자를 법 앞에 버려둔다.”

이처럼 「법 앞에」라는 텍스트는 문지기와 시골남자의 이야기 외에는 법에 관한 어떤 것도 나타내지 않으며, 법은 단지 이름, 이미지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법은 자신에 대해서 침묵하므로, 그것이 어떤 것인지 (선인지, 악인지) 알 수 없고, 단지 ‘법’이라는 기표로 존재할 뿐이다.

이제 묘하게도 법과 텍스트는 같은 구조를 지닌다. 그래서 이 텍스트 ‘앞’에 서 있는 독자들은 시골남자와 같은 운명에 처한다. 이 텍스트는 우리를 그것 앞에서 기다리게 하는데, 끝없이 기다리게 할 뿐, 어떠한 내용도 제시하지 않는다. 데리다는 이 텍스트가 다가갈 수 없고, 파악할 수 없으며, 어떤 의미도 갖지 않기 때문에 읽을 수 없고, 손댈 수 없는 텍스트라고 본다.

이런 해체-구성하는 작업은 법 앞에서 ‘실패한 시골 남자’를 부각시키고 이 텍스트 앞에서 (마치 법 앞에서 법에 다가가지 못하는 시골 남자처럼) 텍스트의 의미에 다가가지 못하는 독자들의 어찌할 수 없음을 부정적으로 의미화한다.

이제 관점을 바꾸어서 ‘법 앞에서’ 시골남자와 함께 오랫동안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 ‘문지기’를 전면에 내세워서 글을 다시 읽어보자. 시골남자가 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고 뒤늦게야 그 문이 ‘그만을 위한 문’이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던 문지기의 눈으로 보면 이 글에는 어떤 다른 의미들이 들어있을까?

카프카가 『소송』에서 신부와 카가 대화하는 장면에 삽입한 이 이야기는 독립된 작품으로 읽을 때와 달리 신부-문지기의 관점에서, 다른 주인공과 그가 수행하는 법적 절차에 주목한다면 텍스트 해석의 다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런 관점 전환은 (시골 남자의 실패한 이야기가 아니라) 본연의 의무 수행이 지닌 의미를 되새기면서 법과 그 절차와 관련된 해석의 장을 마련할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법적 절차가 개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영역까지 포섭하면서 법적 당위가 삶의 현실까지 스며드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카프카의 세계에서 법과 현실을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 방향은 기존 해석의 지평을 공유하면서 그 해석의 폭을 넓히고 해석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법과 질서의 관점에서 다양한 해석을 제한하고 봉쇄할만한 자원을 동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지기를 앞세운 신부의 해석방향은 해석의 자유에 맞서서 법적 권위를 해석의 형식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따라서 신부는 문지기를 가해자나 법-권력의 대변인으로 보는 관점을 거부하고 문지기의 고유한 논리와 법의 집행에 초점을 맞추어서 해석한다.

가) 성당에서 만난 신부는 카에게 「법 앞에」를 들려준다. 신부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듣던 카는 얘기가 끝나자마자 문지기가 시골 남자를 속였다고 지적한다. (P183)

이것은 카가 결정적인 사항을 뒤늦게야 알려주는 문지가가 의무를 방기했거나 ‘소극적으로’ 방해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신부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자기는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전달했을 뿐인데) 글에는 기만에 관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P183)

카는 문지기가 시골 남자를 구할 수 있는 말을 제때에 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는데, 이에 대해서 신부는 문지기가 “그 전에는 질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거나 말할 필요가 없었음을 상기키시고 문지기가 의무이행에 소홀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카는 문지기의 의무란 “낯선 자들을 막고” “그 입구로 들어가도록 정해진 그 시골 남자를 마땅히 들여보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맞선다.

그러자 신부는 문지기의 태도에는 어떤 잘못이나 모순도 없다고 지적한다.

“당신은 그 글을 제대로 존중하지 않고 이야기를 바꾸고 있군요. 이 이야기에서 문지기는 법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과 관련해서 두 가지 중요한 설명을 하는데, (......) 첫 부분은 ‘지금은 그를 들여보낼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부분은 ‘이 입구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둘 사이에 모순이 있다면 당신 말이 옳고 문지기가 그 남자를 속인 것이겠지요. 그런데 둘 사이에 모순이라곤 없어요. 그 반대로 첫 번째 설명은 두 번째 설명을 암시하기까지 하지요. 문지기가 그 남자에게 장차 들여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친 것은 자기 의무를 넘어섰다고까지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당시에는 그 남자를 돌려보내는 것만이 그의 의무처럼 보이니까요.” (P183-4)

잠시 이들의 대화에서 주목할 만한 점을 살펴보자. 먼저 하나는 겉으로 (시골남자의 관점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것도 앞뒤 연관을 잘 살피고 심층적으로 이해한다면 일관된 정합성을 따르는 것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문지가가 어떤 잘못을 범한 것이 없음을 치밀하게 논증하는 것은 곧 문지기 개인의 잘잘못이 아니라 법적 절차가 오류를 범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텍스트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내용을 변경해서는 안 되는 점을 강조하여 텍스트를 글자 그대로 존중할 것을 환기시킨다.

이 두 측면은 상관적인 것이다. 문지기의 관점에서 올바른 해석을 하면 시골 남자 쪽에서 모순이나 문제점으로 보이는 것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이어서 신부는 문지기가 임무를 엄격하고 성실하게 수행하는 점을 부각시키는 해석을 소개한다. 문지기는 오랫동안 “한 번도 자기 위치를 벗어나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닫으며, ‘나는 힘이 세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자기 직무의 중요성을 숙지하고 있고, 자기가 말단 문지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점으로 보아 “상급 문지기들에 대한 경외심도 지니고” 있다.(P184) 그는 시골 남자가 온갖 부탁을 한 까닭에 지치기도 하지만 자기 의무를 수행하면서 동정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이보다 더 의무에 충실한 문지기가 있을까요?” (P184)

그런데 문지기는 다른 본질적인 특성도 지닌다. 그는 “약간 단순하고, 우쭐대는 인물”로 보인다. 자기 힘과 다른 문지기들의 힘, 자신조차도 쳐다보기도 힘겨운 다른 문지기들의 모습에 대해서 한 말을 보면, 이 말들이 그 자체로는 옳더라도 말하는 방식이 “단순함과 자만심” 때문에 이해력이 흐려졌음을 드러낸다. (P 184-5) (이런 점 때문에 해석자들은 ‘동일한 사태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richtiges Auffasen과 오해하는 것Missverstehen은 서로 배제하지 않는다ausschliessen’고 지적한다.) (P185)

어쨌든 그런 “단순함과 자만심”은 입구를 지키는 임무를 취약하게 만들 수 있으므로 그것은 문지기의 성격에서 비롯된 허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문지기는 “천성적으로 친절한 것 같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공직을 수행하는 자”라고 보기 어렵다. 그는 금지되어 있는데도 시골 남자에게 “농담하듯이 들어가 보라고 권하기”도 하고, 그를 쫒아내지 않고 “글에 쓰인 바에 따르면 의자를 내 주어서 문 옆에 앉아 있게도” 하는 점에서 불필요한 친절을 베푼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시골 남자의 끈질긴 간청을 견디는 인내심, 간단한 심문들, 선물을 받는 것, 그리고 그곳에 문지기를 세워둔 불행한 운명에 대해서 시골 남자가 옆에서 아무리 큰 소리로 저주해도 그대로 용인하는 초연한 자세”를 지닌 점도 눈길을 끈다. (이것을 “동정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다.) “모든 문지기가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P184) 마지막에 문지기는 시골 남자의 손짓을 보고 몸을 숙이고 마지막 질문을 할 기회까지 준다.6)

이처럼 문지기의 관점에서 보면 색다른 점들이 많이 눈에 띈다. 임무와 관련하여 돋보이는 성실성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시골 남자의 관점에서 이런 점에 소홀하지 않았는가. (그들도 신명을 바쳐서 자기 맡은 바 임무를 충실하게....) 그리고 문지기의 단순함에 따른 약점을 지적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지나친 친절함과 배려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점을 함께 언급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인내심과 동요하지 않는 태도는 물론이고 동정심까지 지니고 있다니! 게다가 마지막에 보여준 태도(질문할 기회를 주는 것)는 시골 남자에 대한 배려를 잘 드러내지 않는가? 비록 그것이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지만.

카는 신부에게 시골 남자가 기만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아요. 나는 다만 그것에 관한 여러 의견을 들려줄 뿐입니다. 당신이 그런 의견들에 너무 신경을 쓸 필요는 없어요. 글은 변치 않는unveraenderlich 것이고 의견들은 종종 글에 대한 절망Verzweifelung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요.”(P185)

신부는 글의 본질적 불변성과 해석의 가변적인 제한된 점을 대비시킨다. 심지어 글에 내재하는 본질에 이르지 못해서 느끼는 절망까지 느끼는 경우도 있으므로 글의 숨겨진 의미를 온전하게 파악하는 것은 신부 같은 주석가의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 신부는 이런 해석 가운데 문지기가 기만당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이는 문지기의 “단순한 성격Einfalt”을 근거로 삼은 것인데, 그가 법의 내부에 대해서 모르고 입구 앞의 길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내부에 대해서 지닌 생각도 유치한 수준이고, “시골 남자에게 두려움을 주려고 언급했던 대상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도 두려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시골 남자는 법 안의 무서운 문지기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도 안을 기웃거리지만, 문지기는 아예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P186)

그런데 다른 해석자들은 문지기가 “법에 봉사하도록 채용되었기” 때문에 법의 내부에 들어간 적이 있으리라고 본다. (P186) 그렇지만 그가 내부로부터 문지기로 임명되었다고 하더라도, “세 번째 문지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내부 깊숙이 들어가 본적은 없을” 것이다. 그보다도 여러 해 동안 그가 다른 문지기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말고는 법의 내부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다.(P186)

이런 점들로 미루어볼 때 “문지기가 내부 모습이나 의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아무 것도 없으며”, “그것과 관련해서 기만당하고 있다는” 해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P 186)

이 때 문제는 문지기가 법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더라도 그의 의무를 수행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법에 대한 이해도는 법 자체와 관련해서 볼 때 별다른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데 이는 법의 의무를 수행하는 개인들의 이해가 법의 본질이나 실행에 부차적이고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난다. 물론 그들의 이해도가 높으면 좋겠지만 그런 점은 법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라) 다른 해석자는 문지기가 시골 남자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그가 시골 남자보다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오히려 그를 자기보다 낮은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점에서 시골 남자보다 낮은 지위에 있다는 것인가? 이는 “자유로운 사람이 매여 있는 사람보다는 우월하기uebergeordnet” 때문이다. 시골 남자는 자유롭고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데, 다만 법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금지 당하고 있을 뿐이고, 그것도 단 한 사람, 문지기에 의해서 금지당하고 있어요.”(P186) 시골 남자가 문 옆에 앉아서 평생을 머무르는 것은 강요Zwang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택한freiwillig 것일 것이다. 하지만 문지기는 “자기 직무 때문에 자기 자리에 매여 있으니 다른 곳으로 갈 수 없고, “아무리 그가 원한다고 하더라도 내부로 들어갈 수 없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P186)

그리고 그가 법에 봉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그 “입구를 위해서”, “그 입구로 들어가도록 정해져 있는 그 남자만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는 시골 남자보다 열등한 지위에 있는데다가 오랫동안 “기껏 헛된 봉사를 할 뿐nur leeren Dienst”이다. (P186)

사실상 문지기는 자유의지로 찾아온 이가 “원하는 만큼”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지기의 봉사가 끝나는 것도 그 시골 남자의 삶이 언제 끝나는가에 따라서 정해지므로 문지기는 결국 마지막까지 그 남자보다 열등untergeordnet”하다. (P187)

이런 점은 문지기가 시골 남자에 대해서 우월하거나 법이 개인 위에 군림하지 않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문지기는 봉사하는 자의 위치에 있고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관료적 체계의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자유를 포기하고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임무로 자신을 소진시키는 점 때문에 해석자들은 문지기에 대한 연민을 억누르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법에 무지한 상태로 법과 시골 남자를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고 있으니.......

마) 다른 해석자는 문지기가 이런 점들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고 본다. 이는 “문지기가 자신의 직무와 관련해서 심각한 기만viel schwereren Taeuschung에 빠져 있기”(P 187) 때문이다. 이는 마지막에 그가 ‘이제 가서 문을 닫아야겠소’라고 하는데, 첫 부분에 나와있듯이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언제나 열려 있는 상태이다. 그처럼 그 문이 “그 문으로 들어가도록 정해진 남자의 생존 기간과 무관하게 항상 열려 있는 것이라면” 문지기는 그 문을 닫을 수 없을 것이다. (P 187)

그런데 신부는 이에 대해서 상이한 두 해석이 맞선다고 알려준다.

어떤 이는 문지기가 문을 닫겠다고 한 것은 “단지 대답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직무상의 의무를 강조한 것”이라거나 “시골 남자를 마지막 순간에 후회와 슬픔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그런 표현에도 불구하고 맥락을 고려하면 문을 닫을 수 없음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지기도 그 문을 닫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의견이 일치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문지기가 적어도 끝부분에서 지식 상으로도 시골 남자보다 열등한 상태에 있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시골 남자는 법의 문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보고 있지만 문지기는 문을 등지고 서있을 것이어서 그가 무슨 변화를 알아차렸음을 확인할 만한 언급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P 187)

문지기가 문을 닫을 수 있거나 닫을 수 없는 점은 외면적 차이를 드러내지만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는 문지기의 주관적 상태를 다르게 이해하는데 따른 차이일 뿐이다.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전체 맥락에서 볼 때 그의 권한 밖의 일이다.7)

카는 이런 ’해석들의 행진’ 앞에서 신부의 교묘하고도 나름의 설득력을 지닌, 텍스트를 자기 의견에 맞게 재구성한 설명들을 하나씩 되씹는다.8) 그는 그렇게 해석들을 음미하다가 자기 의견을 덧붙인다.

그는 “아주 훌륭한 설명” 덕분에 자기도 문지기가 기만당한 것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앞서 지녔던 의견을 포기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는 두 의견이 부분적으로는 겹치기 때문입니다. 문지기가 명확하게 보고 있는 지, 기만당한 것인지는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저는 시골 남자가 기만당했다고 했습니다. 만약 문지기가 기만당한 것이라면 그의 착각은 필연적으로 시골남자에게 옮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지기가 사기꾼은 아니지만 아주 단순한 자이므로 직무를 즉시 그만두었어야 할 것입니다. 문지기가 빠져있는 망상의 상태가 자기에게는 해가 되지는 않지만 시골남자에게는 엄청난tausendfach 해를 끼친다는 것을 신부님께서 고려하셔야 할 겁니다.” (P 187)

(이런 해석은 문지기-원인으로 시골 남자-결과를 파악하는 점에서 문제를 보는 관점이 상당히 달라졌음을 드러낸다. 문지가라는 독립변수가 시골 남자라는 종속 변수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바) 그러자 신부는 반대 견해를 제시한다. "이 이야기가 누구에게도 문지기에 대해서 판단할 권한을 주지 않는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어떻게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문지기가 “법에 봉사하는 사람Diener des Gesetzes이고 법에 속한 사람이므로 인간적인 판단을dem menschlichen Urteil 벗어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 187-8) 따라서 문지기가 시골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자신의 직무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로지 법의 문에 얽매여 있음은 세상에서 그냥 자유롭게 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의미가 있으니까요. 시골 남자는 이제야 뒤늦게 법으로 들어가려고 오지만 문지기는 그때 이미 그곳에 있습니다schon dort. 문지기는 법에 의해서 그 직위에 임명된 것이어서 그의 존엄성Wuerdigkeit을 의심하는 것은 곧 법을 의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P188)

이처럼 문지기는 법의 권력을 분유하고 그 작용에 참여하는 점에서 법의 일부이다. 그는 자유로운 삶(의 공허하거나 무의미함)과 달리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법의 필연적인 원리와 필연적인 절차를 실행하는 자라는 점에서 시골 남자가 넘볼 수 없는 법의 존엄함을 누릴 수 있는 지위에 있다.

물론 카는 그런 해석에 반발한다. “그런 의견에 동의한다면 문지기가 말한 것이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신부님 스스로 이미 상세하게 논증하셨습니다.” (P188)

신부는 다른 각도에서 충고한다.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참이라고 여길fuer wahr halten 필요는 없어요. 그것을 다만 필연적이라고, 달리 어쩔 수 없는notwendig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P188)

신부의 주장은 제한된 해석 능력을 지닌 인간이 신성한 말씀을 이해할 때 자신의 이해 범위가 미치는 진리(또는 진리로 여겨지는 것)가 아니라 신성한 필연성을 따라야 함을 지적한다. 법이 요구하는 것은 내용의 참이나 거짓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가치와 관련된 규범에서) 형식적인 보편성이나 필연적 절차이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경우에도 바람직한 해석은 참의 문제가 아니라 법적 질서가 요구하는 필연성이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

사) 카는 이런 “우울한” 결론에 불만을 품는다. “거짓이 세계의 질서가 되고 말았군요.” (P188) 그는 형식적 절차가 정당화되는 측면을 신부처럼 필연성의 논리로 보지 않고 거짓의 질서로 이해/오해한다. 시골 남자의 법/정의에 대한 청원은 정당한, 또는 부당함을 입증할 수 없는 법적 절차와 실행에 의해서 어디론가 증발하고, 끝없는 기다림과 무의미한 노력을 자각함으로써 법 안과 바깥이 구별되지 않음을 법이 삶의 모든 것을 포섭하게 되었음을 깨닫는 외침이 아닐까?

여기에서 신부가 끌어들인 교묘한 해석들에 대해서 개별적으로 내용을 검토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문지기와 시골남자의 관점이 대비되면서 법과 텍스트의 지킴이로서 시골남자의 자유와 법-정의에 대한 열망을 절차와 이행의 문제로 해소시키는 점을 놓쳐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처럼 시골남자의 해석으로부터 텍스트를 방어하는 신부-문지기의 공인된 해석은 법이 어떤 절차로 정당화되고 법의 지키는 과정이 어떤 논리를 제시하는 지를 보여준다.

해석의 다양성, 무한한 해석의 자유를 옹호하는 관점이 무-원리적(an-arche)인 점을 중시한다면 문지기(또는 그 대리인인 신부)에 의한, 문지기를 위한 해석은 해석의 무질서에 맞서서 일정한 질서, 권력과 의미를 연결시켜서 일정한 범위 안에 의미의 장을 제한하면서 ‘텍스트의 본질을 바탕으로 삼아서’ 공인된 해석들이나 주석이 거주할 수 있는 안전지대를 설정하고자 한다.

본질이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에 해석(A)와 해석(B)는 각자가 다양한 해석 가운데 하나로서 대등한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법과 질서의 수호자들은 특정한 해석들을 질서와 법의 이름으로 공인하고 전파한다. 해석은 무한할 수 있지만 그런 해석의 혼란과 아노미a-nomos를 벗어나서 유효한 해석들을 확정함으로써 규범nomos들이 통치하는 질서를 추구한다. 물론 그 규범은 어떤 내용도 지니지 않은 것이므로 삶의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고, 여기에서 규범에 일치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별도 그리 뚜렷하지 않다. 마치 법원이 현실과 구별된 곳에 있지 않고 카가 오가는 모든 곳이 법원이어서 삶 자체가 법의 대상이 되고 만 경우에는.9)

   5. 어떻게 법의 문을 닫을 수 있는가? : 아감벤의 해석

아감벤은 데리다를 비롯한 몇몇 해석자들이 카프카의 이야기를 법이 부과한 불가능한 임무 앞에서 시골 남자가 패배하거나 실패한 우화로 해석한다고 지적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야기를 매듭짓는 구절에 주목해서 시골 남자의 의도가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HS 64/131)

“이곳에서는 당신 말고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 받을 수 없다오. 왜냐하면 이 입구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오. 이제 가서 문을 닫아야겠소.”

아감벤은 법의 문이 항상 열려 있는 점이 바로 법의 침해할 수 없는 권력potere이자 법에 특유한 힘forza이라면, 시골 남자의 모든 행동이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기 위해서 결국 문을 닫도록 하려는 인내심 가득한 고도의 전략”으로 볼 수 없는지를 질문한다. (HS 65/131) 그리고 시골 남자는 결국 이런 시도에서 성공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비록 목숨을 대가로 바치긴 했지만, 오직 그에게만 열려있던 “법의 문을 영원히 닫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HS 65/131)

아감벤은 바인베르크Weinberg가 이 수줍어하면서도 집요한 시골 남자에게서 “저지당한 기독교적 메시아”의 형상을 볼 수 있다고 지적한 점을 실마리로 삼는다. (Weinberg, 1963, 130-1)

아감벤은 이런 해석을 일신교들이 메시아의 형상을 통해서 율법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점과 연결시킨다. 메시아의 도래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가) 법의 성취와 완전한 해소를 의미한다는 전제에서 받아들일 수 있다.)10)

이렇게 볼 때 메시아--그는 “의미 없지만 유효한” 법 앞에 시골사람처럼 서있다--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감벤은 그가 이미 무한정 유예된 법을 완성하지는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그것을 단순히 다른 법으로 대체할 수도 없는 아포리아 앞에 있다고 본다. (HS 65/ 132)

아감벤은 이와 관련해서 (도래하는 자에 관한 이야기Haggadah를 담고 있는) 15세기의 히브리 문서의 한 세밀화에 그려진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도래하는 장면에 주목한다.

“메시아는 말(전통적으로는 말처럼 그려진 당나귀)을 타고서 성스러운 도시의 활짝 열린 정문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문 뒤쪽의 창문에 비친 실루엣의 주인공은 문지기로 보인다. 메시아를 마주 보고 열려진 문에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온 청년이 나아갈 방향을 가리킨다. 이 인물의 정체가 무엇이든(아마도 예언자 엘리야 일 것이다) 그는 카프카의 우화에 등장하는 시골 남자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임무는 메시아가 성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준비하고 편의를 제공하는 것일 것이다--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인 임무인데, 이는 문이 활짝 열려있기 때문이다. 만약 법의 잠재성이 이 현실성으로 전환되도록 강제하는 전략을 敎唆provocazione라고 부른다면 그런 전략은 매우 역설적인 형태의 교사로서, 의미 없지만 유효한 법에 그리고 너무 활짝 열려있기 때문에 누구의 입장도 허용하지 않는 문에 적절한 유일한 형태이다. 따라서 시골 남자(그리고 세밀화에서 문 앞에 서 있는 청년)의 메시아적 임무는 바로 잠재적인 예외 상태를 현실화하고 문지기에게 법의 문(예루살렘의 문)을 닫도록 강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메시아가 일단 문이 닫힌 후에야, 즉 의미 없지만 유효한 법을 정지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그곳에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HS 65-6/133)11)

아감벤은 이런 이유로 이 이야기의 궁극적인 의미가 데리다가 지적하듯이 메시아주의적 맥락에서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 “도래하지 못하는 재림”(또는 “도래하지 않음이 도래한 재림”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이 이야기는 비록 아무 것도 도래하지 않은non accadere 것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해서 실제로 어떤 것인가가 도래하는 지come qualcosa sia effettivamente accaduro를 보여준다.”(HS 66/134)

이런 아감벤의 해석은 (그의 예외 상태에 관한 이론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와 관련된 논의를 보충할 필요가 있지만) 법 앞에서 이루어진 시골 남자의 ‘성공한’ 시도와 그것이 지닌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비잠재성impotenza의 형식에 주목한다.

이런 사고는 기존의 법을 보다 더 우월하고 완전한 새로운 법으로 대체-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효력을 멈추게 함으로써 법을 완성시키려는 시도를 부각시킨다. 이런 메시아적 임무는 변증법적인 지양(또는 부정 변증법적인 연속적인 지양)이 아니라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면서 완성에 이르게 하고, 나아가 법의 새로운 사용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런 점을 아감벤이 바울의 「로마서」를 해석하는 틀과 관련해서 살펴보자. 바울에게 메시아적 능력은 그 힘ergon을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허약함astheneia이라는 형식으로 가능적인 것으로 지속된다. 메시아적 잠재력dunamis은 ‘허약한’ 것이지만 그런 허약함을 통해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T166)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셨습니다.”(고린도 전서 1: 27)

이처럼 메시아적 능력은 (허약함이라는 형식으로 실현되고 작용하는 것처럼) 율법과 그 행위 영역에 그것들을 단순하게 부정하거나 무화시키지 않고 그것들을 작동하지 않도록in-opérantes 함으로써 효력을 지니게 된다. “율법에서 약속의 능력이 행위와 의무 규칙으로 전이된 것처럼, 이제 메시아적인 것은 이들 행위들을 작용하지 않게 하고 무위désoeuvrement, 유효하지 않고 효력 없음non-effectivité이라는 형식으로 그 가능태로 돌려놓는다. “메시아적인 것은 율법을 파괴함이 아니라 비활성화deactivation이고 수행할 수 없음inexécutabilité이다.”(T167) “메시아가 율법을 기능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 작용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서 가능태로 되돌리는 한에서만, 텔로스, 곧 종말la fin이자 동시에 성취를 표상할 수 있다. “율법을 성취할 수 있음은 그것이 미리 가능태의 비활동 상태로 되돌려져 있는 경우에 한에서 이다.” 메시아는 비활성화이면서 동시에 성취이다.(고린도 후서, 3:12-3)(T167)12)

메시아적인 예외 상태에서 ‘신앙의 율법’은 행위의 율법인 미츠바의 실천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고 ‘율법 없는 의로움(dikaiosunē chōris nomou: une justice sans loi)’의 현현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바울은 신앙의 율법이 행위의 율법의 배제/정지시킨다고 본다. 이때 신앙은 율법의 비활성화katargein이고 동시에 보존histanein이다. 율법 없는 의로움une justice sans loi은 율법의 실현이고 성취plērôma이다. (T181)13)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한, 이 한마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7: 22-3) 바울은 율법을 행위의 율법과 믿음의 율법으로, 죄의 율법과 신의 율법으로 구별한 뒤에 그것을 작동하지 못하게 하고 이행할 수 없는 것으로 구별하고 나서, 그것을 사랑의 모습으로 성취시켜서 총괄한다. (T183)

우리의 의도는 아감벤의 해석에 대해서 논구하는 것이 아니라, 카프카의 텍스트를 새롭게 해석할 가능성을 제안하는 새로운 사고와 카프카 텍스트의 다함이 없는 풍성함을 확인하는 데 있다.

  

그러면 이제 카프카의 네 번째 연주를 준비하기 위해서 저쪽에 있는 연습실로 가 보자.

<참고문헌>

Agamben, G. , Homo Sacer 1 : Il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 (HS.로 줄여 씀), Einaudi. 1995.

___________ , Il tempo che resta. Un commento alla Lettera ai Romani. (Le temps qui reste (tr.) Revel, J.) (T로 줄여 씀) Editions Payot & Rivages, 2000.

Derrida, J. , Préjugés, devant la loi, in: La Faculté de Juger, Les Editions de Minuit, 1985. pp. 87-140.

Kafka, F., Der Prozess, (hrsg), Brod, M.), (P로 줄여 씀) Fischer Taschenbuch Verlag, 1981.

Weinberg, K., Kafkas Dichtungen. Die Travestien der Mythos. 1963.

양 운덕, 문학과 철학의 향연, 문학과 지성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