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 의 종착지 재진입 - changjoju ui jongchagji jaejin-ib

KOREA TOWN NEWS | JAN 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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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검색결과

  • 청십자 신협 제39차 정기총회 청십자 신협이 4일(목) 오전 10시 부산 KT범일타워 6층 대강당에서 제39차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회의에 앞서 가진 기념식에서 땅끝교회 김운성 목사가 기도하고 부이사장 조운옥 장로가 연혁보고 했다. 상임이사장 이대길 이사장은 기념사에서 “지난 해 만만치 않은 금융환경 속에서 당기순이익 9억 6천만 원을 시현했다”면서 조합원에게 3%의 배당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475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회의에서는 의사일정 확정과 감사·결산보고서, 2016년 사업계획 및 예산 승인의 건, 2016년 상임이사장 보수 결정의 건, 정관 및 정관부속서임원선거규약 일부개정의 건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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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4
  • 사랑의 쌀 6천포, 이웃들에게 전달 부산성시화운동본부(본부장 안용운 목사)는 지난 2월 3일(수) 오후 2시 해운대 홈플러스 4층 주차장에서 제13회 사랑의 쌀 나누기를 개최했다. 이날 예배는 박현수 목사(사회복지위원장)의 사회로 최병석 목사(사회복지부위원장)가 기도, 유연수 목사(부본부장)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유연수 목사는 설교에서 “오늘 나눠드린 사랑의 쌀을 통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 영생을 얻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교회와 기관, 개인의 사역들을 통해 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2부 전달식에서는 미리 배정된 구역에 따라 쌀 6천여 포대를 전달했다. 박현수 목사는 “부산지역 대형교회인 수영로교회와 호산나교회를 비롯해 많은 교회와 개인들의 후원으로 이뤄졌다. 이를 통해 교회가 이웃을 적극적으로 섬길 수 있는 통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부산성시화운동본부는 내년에 열릴 제14회 사랑의 쌀 나누기 행사부터 배부 기준이 변경된다고 밝혔다. 지금까지의 신청제가 아닌 추천제로 대상을 선정해 배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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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4
  • 친딸 살해, 시신 11개월 방치한 친부가 현직 목사 여중생 딸을 빗자루 등으로 폭행해 숨지게 한 뒤 11개월가량 시신을 집에 방치한 범인이 친부로 밝혀지면서 대한민국이 충격에 빠졌다. 특히 이 엽기적인 참극을 벌인 친부 이모씨(47)가 현직 목사이자 모 교단 신학대 교수로 알려지면서 충격을 더하고 있다. 부천소사경찰서는 이씨가 지난해 3월 17일, 가출한 딸 이양을 빗자루와 빨래 건조대 막대로 5시간 동안 폭행한 사실을 진술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딸이 사망한지 보름가량 뒤인 3월 31일에 가출신고를 했다. 경찰은 사망한 이양의 친구와의 면담과정에서 “작년 3월 15일쯤 이양을 만났을 때 종아리와 손에 멍 자국이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본격 수사에 착수했고, 2016년 2월 2일 이씨의 집에서 이불에 덮여 있는 이양의 시신을 발견했다. 발견 당시 이양은 반백골화 상태였다. 이씨는 딸의 시신을 장기간 집에 방치한 이유와 관련해 “기도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딸의 시신이 전혀 관리되지 않았고 방향제와 양초, 습기제거제 등을 발견했다면서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고 밝혔다. 이씨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사회적 비판과 형량을 낮추기 위한 거짓 진술을 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독일 유학파 출신인 이씨는 최근까지 모 신학대학교의 겸임교수로 재직했으며, 부천시 소사구의 개척교회 담임목사를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유학 중 암 투병을 하던 부인과 사별 후 귀국해 백씨와 재혼 했다. 경찰은 이씨와 계모인 백씨 뿐 아니라 백씨의 동생(이양의 새 이모) 또한 폭행에 가담한 정황이 있다고 밝혔다. 한편, 교회 재정 횡령, 성범죄, 칼부림, 도박사건 등 목회자들의 도를 넘는 행위들이 연신 보도되고 있는 가운데 이번 사건으로 기독교에 대한 비난과 적대감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목회자의 윤리의식에 대한 지적도 속속 제기되고 있다.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목회자의 인성과 영성, 인격보다 목사의 학위나 학벌이 자격조건으로 내세워져 영성과 윤리의식 없는 목사를 양산하고 말았으며, 지나치게 많은 목회자를 배출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병폐를 다시 한 번 다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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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4
  • 통합 부산노회 장로원로회 제24회 정기총회 지난 2일(화) 땅끝교회(김운성 목사)에서 예장통합 부산노회 장로원로회 제24회 정기총회가 개최됐다. 이날 이종흔 장로(땅끝교회)가 신임회장으로 선출됐다. 총회에 앞서 가진 예배는 부회장 이종흔 장로의 인도로 부회장 정경식 장로가 기도하고 서기 노일성 장로가 성경봉독 했으며, 김운성 목사가 ‘갈렙처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어진 회무처리에서는 각종 보고 후 임원개선이 진행됐다. 신임회장 이종흔 장로는 “회원 장로님들의 노후 삶의 질에 향상을 도모하고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시도록 노력 하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24회기 임원명단이다. △회장 : 이종흔(땅끝) △수석부회장 : 정경식(대연) △부회장 : 정선기(산성), 노일성(항서), 서영태(김해감천), 김시영(부산영락) △총무 : 이홍자(부산진) △부총무 : 유인상(문현중앙) △서기 : 이무준(감만) △부서기 : 강대용(송도영광) △회록서기 : 장종철(장유대성) △부회록서기 : 이병현(김해) △회계 : 최동영(대성) △부회계 : 안해연(청학중앙) △감사 : 최명성(대지), 신이건(은성) △고문 : 김동수, 배준기, 박태신, 박만택, 정종택, 조원경, 강병국, 박우배, 이강준, 박재을, 이규정, 이상화, 이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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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안상욱 주한필리핀명예총영사 취임 안상욱 박사(고신대)가 지난 1월 28일(목) 오후 3시 주한필리핀영사관에서 주한필리핀명예총영사로 취임했다. 이날 부산 금정구 구서동에 필리핀 총영사관 개관과 함께 안상욱 교수의 취임식이 함께 진행됐다. 안 교수는 필리핀 불라칸에 대학을 설립하고, 지역 단체에 재정 지원 및 양국 국민 간의 우호관계를 육성하는 데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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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창원소명교회 한현욱 목사위임 및 권사임직 창원소명교회는 지난 1월 16일(토) 오후 3시 창원소명교회당에서 목사위임 및 권사임직 감사예배를 가졌다. 이날 예배는 박영호 목사(새순교회)의 집례로 송선규 장로(창원영광교회)가 기도, 황권철 목사(밀알교회)가 ‘영광스러운 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2부 위임식은 위임국장 박영호 목사의 집례로 한현욱 목사의 위임식을 가졌고, 이상영 목사(명곡교회)의 권면이 있었다. 3부 임직식은 한현욱 목사의 집례로 권사임직 및 권사취임을 가졌다. 4부 축하에서는 옥수석 목사(거제교회)와 이상규 교수(고신대)가 축사를 전하고, 강봉식 장로가 교회를 대표해 임직자에게 예물을 증정했다. 이날 임직자를 대표해 박미정 권사가 답사를 전하고 이인덕 목사(반송제일교회)의 축도로 이날 행사를 마쳤다. 이날 임직자는 다음과 같다. ▲권사임직 : 이금숙, 박미정 ▲권사취임 : 황쌍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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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국제다문화사회연구소 발기인대회 및 창립총회 국제다문화사회연구소(소장 이병수 교수)가 2월 1일(월) 오전 7시 30분 사학연금빌딩 4층 웨딩홀에서 발기인대회 및 창립총회를 가졌다. 다문화 가정, 외국인 유학생, 다문화 현장사역자 및 교계 인사 1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예배는 유연수 목사(수영교회)가 기도, 조영호 목사(자문위원장, 소명교회 원로)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민영란 목사(부산장신대 이사장)의 축도로 마쳤다. 총회는 정우진 목사(제3영도교회)의 사회로 창립선언문 채택 및 낭독, 정관채택, 임원선출에 이어 초대회장인 이병수 교수(고신대)의 인사말이 있었다. 이병수 교수는 “다문화 사역은 여러 영역의 협력이 중요하다. 여럿 색깔의 구슬을 꿰는 역할을 연구소가 감당할 것이다. 앞으로 다문화 사회를 섬기는 좋은 모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연구소는 부산, 울산, 경남지역 150여 개의 교회가 동참하며 67개 대학 133명의 교수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날 선출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소장 이병수 교수(고신대) ▲총무이사 이신열 교수(고신대) ▲서기이사 이현철 교수(고신대) ▲재무이사 소진희 교수(고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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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고신대복음병원 거제 신현동인회와 진료협약 체결 통해 40년전 약속 지킨다 고신대학교복음병원(병원장 임학)이 거제 신현동인회(회장 정영만)와의 진료협약을 통해 거제신현동인회 지정병원으로 선정됐다. 고신대복음병원은 거제 신현동인회와 27일 협약식을 갖고 신현동인회의 각종 행사 시 무료건강검진, 건강강좌 및 종합 검진시 할인 혜택을 제공하고 신현동인회와 공동으로 거제지역 보건의료와 나눔의료 등을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신현동인회는 32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거제시내 4개동의 상공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단체로 매년 해돋이행사, 지역 내 독거노인 돕기, 저소득층 자녀 장학금 지급 등 없는 자의 편이 되고 약한 자의 힘이 되는 거제시를 대표하는 봉사 단체이다.고신대학교복음병원 임학 병원장은 “거가대교가 생기기 전부터 고신대복음병원은 거제 지역민 건강 지킴이 역할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왔다”며 “신현동인회와의 진료지정병원 협약을 통해 한층 더 거제 지역의 건강을 책임지는 병원으로 나아 가겠다”고 말했다. 신현동인회 정영만 회장은 “부울경을 대표하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3차 의료기관인 고신대병원과의 협약을 계기로 회원들이 건강증진의 혜택을 받아 나눔과 돌보는 행사에 더욱 정진할 수 있을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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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동서대 패션디자인학과 3학년 신주영씨 ▲ 왼쪽부터 신주영, 이유나 씨 동서대(총장 장제국) 패션디자인학과 3학년 신주영 씨가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제2회 케이퍼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았다고 26일 밝혔다. 대상을 받은 신주영 씨에게는 200만 원의 상금과 함께 핀란드 헬싱키 ‘사가퍼(Saga Furs) 디자인 센터’ 연수 특전이 주어졌다. 한국모피협회가 주최하고 국제모피협회(IFF)가 후원한 콘테스트는 모피 산업 발전과 젊은 층의 모피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마련됐다. 지난 3월 15일부터 5월 말까지 협회를 통해 접수된 총 136개의 모피 디자인 스타일화를 1, 2차에 걸쳐 심사하고, 최종 10개의 디자인을 선정해 실물 제작 후 결선을 진행했다. 대상작은 'The Waterfall in Winter'. 폭포수를 모티브로 했다. 상의는 폭포가 떨어지면서 부딪혀 나오는 색상과 겨울의 눈 덮인 새하얀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화이트 폭스 퍼를 사용하였고, 하의 스커트는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을 연상시키기 위해 타조 퍼를 이용하여 전체적인 느낌을 살렸다. 특히 일반적인 모피 옷의 투박하고 한정적인 디자인을, 우리나라 전통한복 실루엣의 느낌을 살려 세련되고 고급스럽게 디자인했다. 한편, 같은 학과 이유나 씨도 눈의 결정체를 모티브로 디자인한 'Crystal Of Winter'라는 작품으로 이번 대회에서 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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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고신대학교, 모이커피컴퍼니 및 평사리가는길 간의 산학협정식 고신대학교(총장 전광식) 산학협력단(단장 손현근)은 지난 1월 27일(수) 모이커피컴퍼니(사장 도재욱) 및 평사리가는길(사장 강정진)과 상호 협력 발전을 위한 산학협정식을 가졌다. 이번 협약은 양 기관의 상호 우호적인 협력을 바탕으로 공정무역 커피와 녹차 관련 제품 판매를 통해 기술교류, 학교 및 기업 활성화를 위해 추진됐다. 모이커피컴퍼니와의 주요 협정 내용은 멕시코 치아파스의 공정무역 커피생두를 판매하여 수익창출, 평사리가는길간의 협정 내용은 녹차 제품으로 개발한 녹차 비누, 고급 녹차, 녹차치약, 양념소스를 판매해 상호 발전을 도모한다. 고신대학교 전광식 총장은 “세계 속 무역 거래량 2위로 커피가 국내와 세계적으로 관심이 높다”며 양 기관과의 산학협력을 기쁘게 생각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감을 가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모이커피컴퍼니 도재욱 사장은 “공정무역 커피를 목표로 좋은 품질의 커피를 통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커피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평사리가는길 강정진 사장은 “시대를 넘어 드보라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한다. 기업의 이윤을 남기지 않고 70주년 은혜의 물결이 가득한 학교를 위해 힘쓰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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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오피니언 검색결과

  • [소강석칼럼] “간절함이 없는 자리, 핑계뿐”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집회와 세미나를 해왔습니다. 어쩌면 저만큼 많은 연합집회와 목회자 세미나를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흰돌산기도원에서 4천 명이 모여 2박 3일 동안 했던 목회자 세미나, 또 양수리수양관에서 있었던 그 유명한 한신목회세미나에 단골 강사로 갔습니다. 그리고 각 교단과 신대원에서 하는 세미나나 특강을 셀 수 없이 다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에서 2,500여명의 목회자들이 모인 생명나무 목회 컨퍼런스를 몇 번을 하였습니다. 작년에도 600여 명의 미자립교회 목사님들을 초청해서 위드 코로나 세미나를 하며 1인당 백만 원 이상을 드리며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번만큼 간절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을 갖고 세미나 원고도 제가 다 작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고를 부교역자들에게 돌리고, 몇 분의 전문가에게 보내서 보완할 것 있으면 보완의 의견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보완해 준 부분도 있지만, 보완할 것이 없을 정도로 원고 내용이 충실하고 원고만 봐도 가슴에 전율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원고를 보고 또 보면서 부족한 부분은 빨간펜으로 체크를 하였습니다.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 내용인데도 원고를 또 보고 또 보았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되는가 생각을 해보니까, 가장 어려운 때 성도들의 땀과 눈물이 젖어 있는 헌금으로 컨퍼런스를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이 그렇지 500명이 넘는 미자립 교회에 100만 원씩 지원금을 준다는 것이 보통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거기에 들어가는 행정비, 광고비 하면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데 제가 간절한 마음을 안 가질 수가 없지요. 또 미자립교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코로나 후유증을 극복하고 초토화된 예배를 회복하며 교회를 세울 것인가”, 이런 기대감을 갖고 온 자립교회 목사님들을 생각하니까 간절함이 안 생길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이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목사님들이 저녁 7시가 다 되어가는 데도 거의 한 사람도 꿈쩍하지 않고 끝까지 경청을 하였습니다. 자립교회 목사님들도 교회 세움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었고 절박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강의 초두에서 이 세상에 새로운 교회는 하나도 없다고 그랬습니다. 이 땅에는 진정한 모델 교회도 없다고 그랬습니다. 진정한 모델 교회는 어뉴 처치(Anew Church), 즉 성경적 원형교회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새에덴교회도 모델 교회가 될 수 없고 전혀 새로운 교회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성경적 원형 교회로 가기 위해 새에덴교회가 어떻게 최선을 다했고 몸부림 쳤는가를 말씀드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팬데믹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함께 우리의 공적 교회를 세워갈 수 있는가를 나누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간절함이 있으면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길이 보이고 방법이 보이고, 얼마든지 하이 콘셉트를 가지고 창의적 목회를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간절함과 절박함이 없으면 맨날 핑계만 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코로나 팬데믹 때 얼마나 간절함을 가졌었던가요. 지금도 얼마나 간절함을 가지고 있는가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 성도를 향한 간절함, 교회 세움을 향한 간절함이 얼마나 있는가요.” 제가 목사님들께 묻고 되물으면서 찬양을 인도했습니다. 원래 부교육자들에게는 약 30분씩 강의 시간을 주기로 했는데, 제가 워낙 인심이 좋아가지고 “여유를 갖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50분도 하고, 어떤 분은 1시간도 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막상 제가 강의를 마무리를 할 때 시간에 쫓기는 것입니다. 제가 넉넉하게 마무리를 하고 자세히 강의를 해야 되는데 시간에 쫓겼습니다. 그렇다고 8시, 9시까지 붙들어둘 수도 없는 것이고요. 제가 만약에 3, 40분을 더 활용했더라면 마지막에 찬송도 하고 기도회도 하면서 목사님들의 눈이 눈물로 흠뻑 젖고 흐르도록 할 수 있었는데 시간에 쫓겨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아쉽게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더구나 박주옥 음악목사님도 목사님들 앞에서 노래를 한곡하기를 원해서 그 희망도 들어주고, 또 청소년오케스트라의 연주 시간도 드린 것입니다. 결국 제 강의 시간을 다 할애해 준 것이죠. 물론, 아쉬움이 있는 만큼 저는 강의에 열변을 토하였습니다. 마치 따발총처럼 말을 쏟아내고 입술에 모터를 단 것처럼, 긴박한 강의, 간절함이 넘치는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강의 시간이 축소되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절박하고 간절한 심정이 다 전달이 됐습니다. 그리고 알아들을 것 다 알아들었다고 위로를 해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말씀을 듣고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간절함이 있는 곳은 길과 방법이 보이고 간절함이 없는 자리에는 핑계뿐이라고.” 부디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교회 세움을 향하여 헌신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고, 참석한 모든 목회자들에게 간절함의 나비 효과가 더 크게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22-11-04
  • [시사칼럼] 새로운 자본주의(C-Capitalism)가 필요하다 프랑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는 1819년 <메두사호의 뗏목(Le Radeau de la Méduse)>을 발표합니다. 한 때 나폴레옹을 태우기도 했다는 전함 메두사호가 아프리카 세네갈 연안에서 좌초(坐礁)한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부자와 귀족들은 구명정을 타고 탈출한 반면 나머지 150명 가까운 승객들은 버림을 받았고 급조한 뗏목에서 2주일을 견뎌야 했습니다. 동료의 시신을 먹으면서까지 버텼건만 생존자는 불과 15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당시의 참상은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자본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예고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공산주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선전포고를 날렸습니다(1848,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이후 불황 등으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는 그러나 극적으로 변신에 성공합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복지제도 등이 마련되었고, “수정자본주의”라고도 부르는 <자본주의 2.0>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냉전 시대를 지나며 자본주의는 전 세계를 전장(戰場)으로 치열한 쟁투를 벌이면서도 승승장구를 거듭합니다. 그러나 1970년대 석유파동을 겪고 또 실업율과 인플레이션이 동반 상승하는 새로운 현상으로 인해 또 다시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 때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를 새로운 이념과 도구로 삼고 한 번 더 변신을 꾀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소련연방을 비롯한 공산주의 체제들이 일거에 몰락했기 때문입니다. 기업인이자 저술가인 피터 반스(Peter Barnes)는 이를 <자본주의 3.0>(2006)이라 불렀습니다. 적수가 없어져버린 자본주의는 그러나 점차 괴물로 진화되어 갔습니다.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SPC 불매운동’을 알고 있습니까? 지난 10월 15일, 평택의 제빵공장에서 일하던 20대 초반 여성 노동자가 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사측은 현장을 일부 천으로만 가린 채 계속해서 공장을 가동했고, 시민들의 분노가 이 지점에서 폭발해 해당 기업의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케팅학의 대가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는 이러한 형태의 자본주의를 “기업자본주의(Corporation Capitalism)”라 불렀습니다(Confronting Capitalism, 2015).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알게 된 투기적 금융자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카지노(Casino) 자본주의”, 최근 전기자동차 보조금철폐조치에서도 알 수 있는 미국 위주의 “카우보이(Cowboy) 자본주의”, 정부와 기업과 유착 관계로 인해 시장을 왜곡하고 불공정을 양산하는 “정실(Crony) 자본주의” 개념들이 연이어 등장했습니다. 날로 심각해지는 양극화나 환경문제 등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듯 보였습니다. 경제평론가인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tsky)가 <자본주의 4.0>을 들고 나온 때도 바로 이 무렵입니다. 그는 동명의 저서에서 구체적인 전략이나 정책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자본주의는 현존하는 위기를 결국은 잘 극복하고 다시 회생하리라는 희망적인 예언을 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자본주의는 어떤 모습일까요? 코틀러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인간적(Humanistic) 자본주의”나 “인도적(Humane) 자본주의”, 이를 위한 “포용적(Inclusive) 자본주의”와 “건강한(Healthy) 자본주의”를 표방하면서, “깨어 있는(Conscious) 자본주의”와 “온정적(Compassionate) 자본주의”라는 개념들을 제시했습니다. 지난 이백 년 동안 자본주의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힘의 근거는 뭐니 해도 ‘변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주하고 집착했다면 자본주의는 벌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신할까요? 윤리적인 색채를 가미한 전술했던 두 개의 ‘C-자본주의’에 더해, ‘회개하는(Contrite) 자본주의’와 자본-노동과 국가-시민이 서로 ‘협력하는(Collaborative) 자본주의’ 그리고 개발과 환경이 ‘양립가능한(Compatible) 자본주의’라는 또 다른 ‘C-자본주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소망해 봅니다. 아울러 우리 스스로는 외국의 자본이나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한국인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Corea Capitalism)’를 모색하고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니, 물질자본이 아니라 영적자본,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예수주의를 지향하는 ‘성경적 자본주의(Cannon Capitalism)’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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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은혜의말씀] 하나님이 거하실 집(출 25:8~9)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두 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십계명이고, 또 하나는 성막입니다. 십계명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어떻게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라면, 성막은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할 성소(거룩한 장소)를 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성소의 모양과 규격, 만드는 방법까지 세세하게 알려주십니다. 성소는 하나님께서 직접 계획하신 거룩한 장소였기 때문에,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모형이자 그림자입니다. 나아가 성소는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막 건립의 이유와 건축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8절)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지만, 또 한편으로 특별한 장소를 택하여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겠다는 말씀하십니다. 그곳이 바로 성막입니다.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 안입니다.(요1:14)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을 모신 성전입니다.(고전3:16) 우리의 매일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성일입니다. 2. 죄인을 만나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만 가지고 내려 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만날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막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축복의 미팅 장소입니다. 그래서 회막이라 부릅니다. 인간이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죄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고후5:17) 교회는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세상에 세우신 집입니다. 둘째, 성막은 어떻게 지어야 합니까? 1.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지어야 합니다.(9절) 성막은 아무렇게나 지으면 안 됩니다. 왜요? 성막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교훈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생각대로 짓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이해하고, 성경의 지식을 얼마나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잘 순종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2. 헌신의 예물을 통해 지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막의 모든 것을 계획하셨지만, 백성들의 헌신을 통하여 이 역사를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동역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우리를 통해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 최고의 헌신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헌신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일하십시오!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일에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헌신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큰 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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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교회음악칼럼] 교회음악의 새로운 이해 3 지난번에 이어서 말씀을 중심으로 보다 디테일하게 어떻게 찬양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언제 찬양을 할까? 야고보서(5:13)는 찬양하고 싶을 때, 시편(42:5)은 찬양하고 싶지 않을 때 그리고 시편(57:8) 새벽에, 시편(119:62) 저녁에 찬양하라고 한다. 즉 찬양의 삶 살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보면 레위인들은 24시간 하나님을 섬겼고(찬양, 예배), 신약 히브리서(13:15)에서는 항상 찬양의 제사를 드리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합3:17-18)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바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감사의 찬미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다. 어디에서 드려야 할까? 시편149:5, 시편113:3에서는 어디에서나 드려야 한다고 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 드리는 찬양을 좋아하신다고 하셨다.(시22:22,25, 시26:8,12, 시27:4, 시35:18, 시68:24-26, 시69:9, 시107:32, 시122:1) 나아가 모든 나라와 백성들 앞에서 찬양해야 한다고도 했다.(시96:3, 시40:3)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 뿐 아니라 당신의 영화롭고 위대한 역사가 불신자들을 포함한 만민들, 온 땅위에 충만하게 선포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드려야 할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선포되거나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사야서에서 나의 찬송을 부르라고 하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주파수에 우리가 맞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잡음이 되어 전달이 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시103:1, 시42:5-6), 진심으로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집중하여 드려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출15:26, 창22장, 겔48:35) 무엇으로 드릴까? 입술로(시119:171), 마음으로(시13:5), 춤추며(시149:3, 시150:4), 손뼉 치며(시47:3), 영혼으로(시103:1), 악기들로(시150:3-4, 시15:16) 만군의 주요 전능자를 모든 것을 동원하여 찬양해야 한다. 다윗이 찬양한 것을 우리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데 그는 즐겁게(삼하6:15, 삼하6:16, 삼하6:21) 힘을 다하여(대상13:8, 대상16:5) 또 큰소리로(대상16:42, 대상15:16) 날마다(삼상18:10) 신령한 노래(대상25:1-3)로 감사의 찬양(대상16:4)을 드렸는데 우리도 날마다 순간마다 이와 같이 찬양하는 삶을 살아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베푸시는 선한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이 시대에 신실하고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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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코로나 이후 설교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코로나19 이후 교회가 다시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두려움이 생길 정도로 모임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교회 안에 다음세대나 새 가족들이 유입되는 것도 너무나 힘든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위기가 곧 기회라고 했던가.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는 한국교회 안에 오래도록 고착화된 예배와 설교 형태에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 새로운 설교학 운동의 바탕에서 현대설교의 변화를 강조하는 장신대 총장이자 설교학 교수인 김운용은 그의 저서 『새롭게 설교하기』(Rethinking Preaching)에서 이제 지금까지의 설교학적 전통과 이슈들에 대한 “재숙고”(re-thinking)와 설교 사역의 재구성(re-forming)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처럼 새 가족의 초청과 정착을 위해서 보다 새롭고 도전적인 설교와 예배의 형태에 대한 변화가 필요한 때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필자는 부산 성민교회에 부임하여 7년여의 사역을 해오면서 코로나19 이후 주일 설교형태를 ‘이미지 전개형 설교’로 바꾸고 예배에 ‘이미지 전개형 광고’를 도입했다. 이러한 변화는 다음세대와 함께 교회를 찾는 젊은 부모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가족단위의 새 가족 등록을 늘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때도 전세대가 함께 예배하는 데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예배와 설교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그럼 필자가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는 이미지 전개형 설교와 광고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이미지 전개형 설교란? 이미지 전개형 설교란, 설교자가 영상매체 등을 이용해서 회중에게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마치 책을 넘기듯이 한 장씩 전개해 나가면서 은혜를 함께 나누는 방식의 설교이다. 이 설교는 청중의 내적 심상으로서의 이미지의 활용을 강조하는 현대의 설교학적 흐름에서 출발하지만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방법론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이미 많은 설교학자들이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더욱 효과적이고, 호소력이 있기 위해서는 “시각적 이미지”를 위해 눈에 그려볼 수 있는 다채롭고 풍요로운 언어,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언어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서 설교에 시각적 요소를 가미하거나 강조하는 노력을 해 왔다. 그러나 이미지 전개형 설교는 단순히 언어 사용에 있어서 이미지적 요소를 넣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회중들의 눈앞에 계속해서 펼쳐나가듯 제시하면서 동시에 설교자의 언어로 이미지를 해석하면서 설교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기존의 설교 전달방식과 큰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물론 예전에도 설교를 시작하면서 한 두 장의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회중들을 주목시키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지 전개형 설교는 단순히 몇 장의 이미지를 서두에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론에서 결론까지 계속해서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설교의 내용을 이미지로 제시하고 이미지와 함께 고민하고 이미지를 통해서 풀어가는 형태의 설교이다. 이 이미지 속에는 문자 텍스트나 변형된 이미지, 영상과 소리도 포함된다. 이러한 설교 방식의 필요성은 교회를 처음 나온 다음세대들이나 새 신자들이 부담 없이 설교를 듣고 예배에 참여하게 된다는 점이다. 새 신자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고 기독교적 용어에도 익숙하지 않다. 그런 이들에게 성령이나 성막, 제사장, 사마리아인, 도피성 등의 설교 용어는 독해가 불가능한 외국어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들을 이미지와 텍스트로 구성된 화면을 통해서 보여주면서 설명하면 훨씬 더 이해가 잘 되고 메시지를 납득할 수 있다. 또한 코로나19 이후 온라인예배가 많이 드려지면서 가정에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화면을 통해서 예배하는 가정들은 부모와 자녀가 함께 앉아서 예배에 참여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이 때 어린 자녀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며 인내해야 하는데, 특히나 30여 분간의 시간 동안 화면으로 설교자 얼굴만 바라보며 듣는 설교는 집중력을 떨어뜨리기 쉽다. 이럴 때 이미지를 잘 활용해서 설교를 전달하면 어린 자녀들도 설교 내용에 호기심을 가지고 끝까지 설교를 듣고 말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물론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설교의 부담이 크고 돌아서면 설교라고 할 정도로 해야 할 설교도 많다. 그래서 구두로만 설교해도 원고작성에 시간이 많이 들고 준비에 어려움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더욱 듣고 싶은 설교, 찾게 되는 설교는 비교적 적은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더욱 설교의 준비와 전달에 정성과 준비가 필요한 때인 것이다. 이미지 전개형 설교를 도입해서 새 가족들과 다음세대를 배려하는 설교를 준비해 보자. 당장 교회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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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2-11-04
  • [다음세대칼럼] 참된 영적 스승 필자는 5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중3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내가 왜 교회를 다녀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있기까지 수많은 스승들이 계셨습니다. 우리가 스승이라고 말할 때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의 선생님을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회자들이 스승이십니다. 성도들의 존경과 신임으로 임직을 한 중직자들도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학교에서 가르쳐 주시는 교사들도 스승이십니다. 무엇보다 가정에서 양육해 주시던 부모님께서도 엄격하게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필자에게는 수많은 스승들이 계셔서 제가 이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스승들이 기독교계에 많을 때 교회 안에서 다음세대가 잘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영적 스승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가 무엇일까요? 먼저,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8절에서 ‘아들 디모데야’라고 편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2절에서도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다음세대를 바라보는 스승의 태도는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좋은 지식을 전하고, 좋은 환경을 제공해도 사랑이 없는 교육은 헛수고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가 있습니다. 많은 스승들이 있습니다.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있지만 현실은 참 어둡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5절 말씀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않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라고 기록합니다. 사도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통하여 자녀를 낳는 심정으로 제자를 양육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필자가 만나는 청소년들은 위기 청소년들이 많습니다. 이 청소년들을 지도하다보면 지독히 말을 듣지 않는 청소년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열매를 거두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좋은 스승은 바로 아버지의 심정으로 양육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영적 스승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양육하는 스승입니다. 두 번째, 아버지의 마음으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17절은 하나님 말씀만이 모든 사람을 온전하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교육의 교재는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온전하게 만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다음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에 너무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모두 좋은 대학 진학과 연봉이 높은 곳에 취업하는 것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학교의 성적보다는 생명의 말씀이 더 소중함을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단순한 대학 진학보다 믿음의 비전을 키우고, 노력하는 것이 훨씬 중요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임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의 본을 보이는 부모, 교사,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세대에게 말씀을 읽는 모습, 묵상하는 모습,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순간순간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영적 스승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참 스승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참 제자의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참 스승,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적 스승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다음세대가 세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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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신앙교육나침반] 코로나 키즈와 함께 하는 추수감사절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 걸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뒤바뀐 세상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 거 같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다음세대는 우리의 생각 그 이상으로, 코로나로 인해 잃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빠르게 흡수하여 성장하는 다음세대들에게, 코로나 펜데믹은 그들에게 큰 구멍을 남겼습니다. 펜데믹으로 인한 깊은 두려움과 불안감은 이 아이들의 몸과 영혼에 고스란히 흡수되어, 자해와 자살과 같은 극단적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우울감과 무기력 같이 침습력 강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코로나시대를 살아가는 다음세대는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견디기 위해 자신의 몸을 아프게 하고,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가학적인 것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다음세대가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작은 한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아이들의 작은 한숨은 불안과 두려움을 삼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내뱉는 소심한 외침, ‘힘들어요. 도와주세요!’입니다. 지금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 ‘환경을 초월한 감사와 찬송’입니다. 올해 추수감사절은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교회의 다음 세대에게 전혀 감흥이 없는 절기일지 모르겠습니다. ‘이 힘들고 두려운 터널 속에서 무엇을 감사하라는 거지?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지?’ 교회는 추수감사절 예배와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 아이들에게 분명히 전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터널 속에서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 평소보다 더욱 강하게 자신의 양을 붙잡고 지키시는 목자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란다.” 교회의 모든 세대가 한 자리에 모여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와 놀이시간을 마련해보십시오. 불안하여 떠는 다음세대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감사의 능력을 받아서 힘차게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온 세대가 가을 열매를 이용해서 즐겁게 감사할 수 있는 감사의 송축 놀이 세 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❶ 앗싸! 감사!: 밤이나 도토리를 높이 던지면서 “앗싸!”라고 외치고, 종이컵으로 “감사!”라고 말하며 받습니다. 혼자 받기 또는 두 사람이 주고받기를 할 수 있습니다. ❷ 감사의 파워: 불평을 상징하는 종이컵을 세웁니다. 이때 종이컵 안쪽에 1-10까지 점수를 적습니다. 감사의 가을열매를 던져서 넘어뜨리거나, 테이블 위에서 진행할 경우 손가락으로 열매를 튕겨서 불평을 테이블 아래로 떨어뜨립니다. ❸ 송축해: 빈 계란박스 안에 감사이름, 감사장소, 감사물건, 감사추억, 감사음식과 같은 주제를 적습니다. 박스 안에 작은 도토리나 콩을 넣고 흔든 후에, 뚜껑을 열어서 감사열매가 들어간 곳의 내용을 보고 감사를 고백해봅니다. 올해 추수감사절에는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음세대와 함께, 감사와 송축을 통한 치료와 회복을 경험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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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2-11-04
  • 트리축제는 역사속으로....(?) 부산지역 겨울철 대표축제로 자리매김했던 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가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최근 경찰청이 업무상횡령과 지방재정법위반 혐의로 부산기독교총연합회 관계자 3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문제는 이들 3명은 2017년 트리축제에 관련된 혐의로 송치되었는데, 경찰청에 사건을 진정한 관계자들은 “2018년 이후 사건이 더 크다”고 진술 하고 있어 추가 송치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금년 트리축제는 부산중구청이 직접 주관한다. 그런데 중구청은 최근 입찰공고를 통해 ‘2022년 광복로 빛 축제(가칭) 빛 시설물 설치운영 용역’ 입찰공고를 발표했는데, 비록 가칭이지만 ‘트리축제’가 아닌 ‘빛 축제’로 명칭을 변경한 것. 여기에 종교색체를 띄지 말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구청 트리축제 담당자는 ‘내년에도 중구청이 직접 주관하는가’ 질문에 “내년 축제는 검토된 것이 없다”고 원론적인 답변을 해 왔지만, 사실상 기독교계와 선을 긋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교계 일부에서는 “힘들게 얻은 트리축제인데, 관리를 잘못해서 이 지경이 되었다”며 “교계안에서도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분명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부산기독교총연합회 관계자는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실이 아니다. 경찰 조사가 끝나지 않았고, 검찰조사도 남아있다”며 혐의를 강하게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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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2-11-04
  • 복음병원 노동조합 쟁의행위 83.9%로 가결 민주노총 복음병원 지부가 10일 총파업을 예고한 가운데, 조합원들의 대상으로 한 ‘2022년 임단협 쟁의행위 찬/반 투표’가 10월 31일(월)부터 11월 2일(수)까지 진행됐다. 여기서 조합원들의 반대가 많았을 경우 사실상 10일 총파업은 철회되지만, 투표결과 조합원 83.9%의 찬성으로 쟁의행위가 가결됐다. 이번 투표는 전체 조합원 1,457명(휴직자, 한국노총 조합원 포함)가운데 1,146명(78.7%)이 투표에 참석했으며, 이중 962명(83.9%)이 쟁의행위에 찬성했다. 반면 180명(15.7%)이 반대했고, 무효는 4표로 집계됐다. 현재 복음병원은 ‘의료기관 인증평가’와 ‘상급종합병원 재진입 평가’를 앞두고 있어, 이번 총파업이 진행될 경우 병원에 회복하기 힘든 막대한 손해가 예상된다. 때문에 학교법인 이사회(이사장 김종철 목사) 중심으로 파업만은 막아보려는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복음병원 노동조합은 오는 9일 오후 6시 병원 6동 로비에서 전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파업전야제를 개최하고, 다음날 10일 오전 6시 30분부터 총파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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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2-11-04
  • [목회자칼럼] 확증 편향(선택적 사고) “한국교회, 분열과 함께 확증 편향 회개해야…” 지난 달, 우연히 본 기독교 신문의 헤드라인입니다. 저 한 문장 중 ‘확증 편향’이라는 낯설지 않은 단어가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정신’ ‘나와 너를 넘어 우리라는 공동체성’ 등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치는 결코 확증 편향과 같이 있을 수 없는데, 한국교회가 확증 편향 속에 있다고 하니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 되었나, 막막함이 차올랐습니다. 확증 편향은 자신의 신념, 가치, 판단과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에는 다 무시하는 ‘선택적 심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그 외에 것들은 보지도 듣지도 않는 태도를 일컫습니다. 몇 해 전부터 현대인의 모습을 지칭하는 단어로 ‘확증 편향’이 등장했고,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확증 편향을 꼽고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정보만 취합하고 다른 것들은 무시해버리는 현상이 일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고 보니, 확증 편향의 시대가 맞는 것 같습니다. 부모와 자녀를 보면 부모는 자녀의 마음을 이해하기 보다는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를 취합해 자녀에게 강요하고, 자녀 또한 부모의 말을 들어 고치려 하기 보다는 자기 입장을 타당하게 해 줄 근거 찾기에 급급합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서로 이기려고 하는 모습 속에서 확증 편향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갈등 구조인 보수와 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는 진보의 말을 들을 생각도 없이 오로지 보수쪽 의견을 듣고, 그 의견을 더 많이 취합하므로 자신들의 신념을 강화시킵니다. 진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진보에게 유리한 내용들만 골라 골라 자신들의 신념의 탑을 쌓습니다. 우리나라 보수와 진보는 확증 편향의 정확한 사례로, 이들을 보면 절대 하나 될 수 없고, 끝까지 자신의 길이 진리인 것 마냥 목소리를 낼 것이 확실합니다. 사회가 이럴 때, 교회는 어떨까요? 교회는 확증 편향과는 거리가 멀게 자신의 의견을 양보하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하려고 애쓸까요? 같은 교회에서 같이 예배드리며 같이 소그룹 나눔을 하는 교인들도 몇몇 성도들은 “말씀이 최고이기 때문에 무조건 말씀 중심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또, 어느 성도들은 “봉사를 통해 섬기는 것이 최고이기 때문에 식당봉사, 성가대 봉사 등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정도 수준이면 그래도 괜찮은데, “나는 기도원파이다. 나는 성령파이다. 나는 직통계시파이다” 등으로 확증 편향을 가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런 성도들은 자신이 믿는 방법만이 진리라는 확신을 갖고, 다른 방법은 믿음이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수긍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인 확증 편향이 교회 안까지 깊숙이 들어와 성도가 판단하고 결정하는데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이미 선택적 사고에 붙잡혀 있는 체계 속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 “내 생각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자기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짐으로 너도 나도 자기가 가진 정보는 다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너가 잘못됐어”라고 지적하면,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우리의 생각은 항상 잘못될 수 있습니다. 어제 내가 알던 것이 오늘 잘못된 사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자만이나 독선은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항상 내가 틀릴 수 있다고 가정하며 상대방을 이해하고 대화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변화되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받아들이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 편향 속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는 나의 잘못을 고치려는 결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받아들이는 유연함을 가질 때 확증 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발전하는 자세와 태도’입니다.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참된 교제가 있을까요? 자기 신념만이 진리라고 우기는 정치 집단 속에 합의와 타협은 있을까요? 내가 가진 신앙만이 참된 믿음이라 고집하는 성도에게 성령의 하나됨이 있을까요? 이처럼 확증 편향적 자세는 고립, 대립, 경쟁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반대로 발전하는 자세와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제 세상이 말하는 확증 편향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예수님이 원하는 가치고 돌아가야 합니다. 자발적인 순종과, 다른 이들을 향한 환대의 정신이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성숙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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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칼럼
    2022-11-04

인물 검색결과

  • [성탄절 특별 좌담회] 경남학생인권조례 무엇이 문제인가? 일시 : 2018년 12월 11일 정오 장소 : 마산교회 대담 : 나쁜학생인권조례제정반대 경남도민 연합 상임대표 원대연 목사 상임사무총장 제정립 장로 상임위원 김영길 목사 상임위원 이성완 목사 지도위원 전상우 목사 사회 : 신상준 국장 ▲ 12월10일 마산교회에서 있었던 좌담회 모습 신상준 국장(이하 신) : 경상남도교육청(교육감 박종훈)이 지난 10월 18일 ‘경상남도 학생인권 조례안’을 입법예고 한 뒤, 경남이 ‘학생인권조례’ 문제로 혼란스럽습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계가 강력히 반대를 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그 반대 일선에 서 있는 ‘나쁜학생인권조례제정반대 경남도민연합’ 임원진들을 모시고, 반대하는 이유와 앞으로의 계획 등을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본보 독자들께 간단한 성탄절 메시지를 부탁드립니다. ▲ 원대연 목사 원대연 목사(이하 원) :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구주 예수님의 성탄을 기뻐하고 찬송하며 하늘 복이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이성완 목사(이하 이) :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큰 기쁨의 성탄절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제정립 장로(이하 제) : 2018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무겁지만 이런 고난과 모든 짐을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주님 오심에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의 생명되신 주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한국기독신문 독자 여러분 가정에도 성탄의 기쁨을 통해 모든 염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기는 복된 시간 되시길 기도합니다. 전상우 목사(이하 전) : 온 세상을 덮는 흰눈처럼 어둠의 절망과 부정, 불법속에서 흰눈처럼 덮어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쳐나기를 축복합니다. 김영길 목사(이하 김) : 한 해 동안 우리 교회가 주님 앞에서 얼마나 겸손 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 땅 위에 겸손하게 내려오신 주님을 송축하며 다가오는 2019년 한 해 동안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성도 여러분 되기를 기도합니다. 신 :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지금 경남 교계가 ‘학생인권조례’로 시끄럽습니다. 이번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그 발단과 경과과정 등을 설명해 주십시오. ▲ 제정립 장로 제 : 학생인권조례는 지난 2009년, 2012년, 2015년 등 이미 몇 차례 제정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 해 왔었습니다. 전교조 경남지부, 참교육학부모회, 민주노총 경남본부 등 소위 진보적인 단체들은 2012년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경남본부'를 결성해 도민 4만 여명의 서명을 받아 '경남학생인권조례안 주민발의'를 시도했지만, 옛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이 절대다수인 경남도의회 교육상임위원회가 안건 상정을 부결시켜 제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경남 교육청은 지난해 2017년 11월 교원, 청소년, 노동계, 시민사회단체, 법률전문가로 구성된 '인권친화적 학교문화 조성을 위한 TF팀'을 꾸려 경남 학생인권조례를 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교계가 우려를 표하자, 여러차례 만남을 통해 ‘동성애 문제’ 등은 넣지 않겠다고 이해를 구해 왔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지난 6월13일 지방선거에서 박종훈 교육감이 교육감에 당선되었고, 바로 학생인권조례를 실시하겠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10월18일 수많은 도민들의 반대 목소리를 듣고도 ‘경상남도 학생인권 조례안’을 입법예고 했습니다. 11월20일에는 공청회를 개최했는데, 한마디로 ‘불공청회’였습니다. 청소년 인권단체인 ‘아수나로’ 팀들을 불러 진행요원으로 삼아, 반대하던 학부모의 갈비뼈가 두 대나 부러지는 등 파행 공청회가 되었습니다. 12월 19일에도 다섯 개 권역에서 동시 공청회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공청회 다음은 경남도의회에서 심의해 의결 할 예정입니다. 신 :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번에 박종훈 경남교육감이 발의한 ‘경남학생인권조례’가 어떤 문제점을 갖고 있습니까? 원 : ‘인권’은 우리나라 헌법 제10조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그리고 헌법 제37조에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 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 할 수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처럼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인권이란 천부인권으로서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이며, 인간이 태어나면서 본래 가지고 있는 자연권이며, 누구나 보장되는 ‘보편적 인권’입니다. 그러나 경남학생인권조례에 담긴 인권은 계급투쟁적 인권관, 마르크스 주의 인권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들은 인권이 천부인권이 아니며, 인간이 역사 속에 얻어낸 역사적 산물로서, 오로지 투쟁과 쟁취로서 약자들이 얻어낸 인간의 권리라고 규정합니다. 강자에 대비되는 약자, 소수자의 인권의 가치만을 부여함으로서 상대적 인권 개념인 것이죠. 신 :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원 : 이미 조례를 제정한 서울시 교육감 등 전교조의 사상적 배경을 둔 진보 교육감들의 공통된 인권 개념입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4개 도시(서울, 경기, 전북, 광주)의 학생인권조례의 인권 개념과 동일하고, 인권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되는 대부분의 현장이 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즉 학생인권조례안의 인권은 특정 사상을 가진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파당적 성격이 농후한 것으로, 학생들에게 이러한 파당성을 주입하려는 의도로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교육기본법 제6조는 ‘학교 교육이 정치적, 파당적, 개인적 편견을 전파하지 않아야 한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교육의 중립성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에 경남학생인권조례는 당연히 폐지되어야 합니다. ▲ 전상우 목사 전 : 학생인권옹호관에 대한 과도한 권한도 불법입니다. 경남학생인권조례 제42조(학생인권침해사건의 조사)에는 ‘학생인권옹호관은 구제신청이 있는 경우에는 인권침해를 받았다고 주장되는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사건에 대하여 조사한다. 다만, 사안이 중대하거나 향후 유사한 사건의 예방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등 조사를 하여야 할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 학생인권옹호관은 피해당사자의 동의없이 조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학생인권옹호관이 교사를 직접 조사하고, 그 결과에 따라 교사의 징계를 요청하는 권한을 가진 것은 국가사무와 관련된 것으로, 조례안의 제정 범위를 넘어선 위법한 것입니다. 지난해 4월 전라남도 송경진 교사의 자살 사건 생각납니다. 학생들과 가벼운 신체접촉이 있었지만, 경찰 조사에서 성추행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고 무혐의로 내사 종결되었는데, 학생인권옹호관은 이 사안을 직권으로 다시 2달여 동안 조사했고, 해당 교육지원청은 메뉴얼에 따라 송씨에 대해 직위 해제 및 대기 발령을 했습니다. 진상 조사에 나선 전북 학생인권교육센터는 강제전보 조처까지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송경진 교사는 자택에서 억울함과 수치심을 호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교육공무원법 제43조 제2항은 국공립학교 교원의 경우 교육공무원으로서 ‘형의 선고나 징계처분 또는 교육공무원법에서 정하는 사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강임, 휴직 또는 면직을 당하지 아니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또 사립학교법 제56조 제1항은 ‘사립학교 교원은 형의 선고 징계처분 또는 사립학교법에 정하는 사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휴직 또는 면직 등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아니한다’는 규정도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교원의 징계처분과 그 밖에 그 의사에 반하는 불리한 처분에 대한 소청심사를 위한 교원소청심사위원회를 교육부에 두고(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 제7조 제1항), 교원의 교육활동 보호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기 위하여 각급 학교에 학교교권보호위원회, 시·도교육청에 시·도교권보호위원회를 두도록 하고 있습니다. 법률에 보장된 교원의 지위에 대한 침해를 가하는 학생인권옹호관 규정은 지방자치법 제22조, 제9조에서 명한 국가사무를 침해하는 것으로 조례의 범위에 속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학생인권 침해 구제와 관련해 학생인권옹호관이 교사를 직접 조사하고, 그 결과에 따라 교사의 징계를 요청하는 권한을 가진 것은 국가사무와 관련된 것으로, 조례안의 제정 범위를 넘어선 위법한 것이기에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 : 또 다른 문제점은 없습니까? ▲ 이성완 목사 이 : 청소년 보호법에도 저촉됩니다. 경남학생인권조례는 ‘UN 아동권리 협약’ 및 상위 법률에서 인정하는 청소년의 미성숙과 상반된 입장에서 ‘청소년을 완성된 인격체’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인과 동일한 권리가 학교 내에서 주어져야 한다고 법제화하고, 이러한 조례에 준하여 교육감이 세부규칙을 정하여 경남 전역의 유치원을 포함한 모든 학교의 규칙의 제 개정을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교육기본법에서 정하는 학교의 교육 목적 및 상위 법령인 청소년보호법 상의 의무를 위반하고 있습니다. UN아동권리협약 12조에는 ‘당사국은 자신의 견해를 형성할 능력이 있는 아동에 대하여 본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견해를 자유스럽게 표시할 권리를 보장하며, 아동의 견해에 대하여는 아동의 연령과 성숙 정도에 따라 정당한 비중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법률에서도 19세 미만의 청소년에 대해 미성년자로 규정하고, 이 청소년들이 건전한 인격체로 성장하도록 청소년보호법을 제정해 놓고 있습니다. 청소년 보호법 제1조에는 ‘청소년에게 유해한 매체물과 약물 등이 청소년에게 유통되는 것과 청소년이 유해한 업소에 출입하는 것 등을 규제하고 청소년을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보호ㆍ구제함으로써 청소년이 건전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렇듯 미성숙한 청소년의 자격과 한계를 인정하고 건전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보호받도록 구체적인 법안을 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상위법의 취지와는 반대로 경남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을 성인과 동일한 한 인격체로 보고, 성인에게 주어진 모든 사상적, 정치적 자유, 집회의 자유, 스마트폰 사용의 자유, 성생활, 임신, 출산 등의 모든 자유권을 평등하게 학생에게도 똑같이 줘야 한다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 김영길 목사 김 : 가장 큰 문제는 성적지향, 성정체성의 차별 금지 및 성인권 교육 실시를 담은 내용입니다. 경남학생인권조례 제16조(차별의 금지)에는 ‘학생은 학년, 나이, 성별, 성 정체성, 성적 지향, 종교,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학교, 출신국가, 출신민족, 언어, 장애, 용모 등 신체조건, 임신 또는 출산, 가족의 소득수준, 가족의 형태 또는 상황, 인종, 경제적 지위,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질병 경력, 징계, 학교의 종류나 구분, 교육과정 선호도 또는 학업성적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아니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또 17조(성인권교육의 실시 등)에는 ‘① 학교는 학생의 성인권 교육을 정기적으로 실시하여야 하며, 교육과정에 성평등의 가치를 적용하여야 한다. ② 교직원은 성폭력피해나 성관계 경험이 있는 학생에 대하여 편견을 가져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교육청에서 주장하는 대로, 위 조례가 성폭력 피해를 당한 학생에 대해 교원이 차별을 하지 않고, 비밀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극단적이고 제한된 상황에 적용되는 특수한 조항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청소년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적극적으로 학생들에게 (성인권 교육을 통해)주지시키고, 그러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생각됩니다. 그 근거로는 박종훈 교육감의 행정요원, 학부모네트워크와 더불어 찬성집회를 이끌고 다니는 ‘아수나로’ 청소년 인권단체 소속의 소위 청소년 활동가가 공식적인 입장을 담아 쓴 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진보적 인권단체들의 인권신문지인 ‘인권오름’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사회는 청소년들의 연애와 성행위를 금지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청소년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고 임신, 출산을 했을 때 필요한 지원을 할 의무가 있다. 한 번에 다 해달라고 하지 않겠으니, 우선은 방해하지나 말아 달라. 우리, 사랑 좀 하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조례안이 담고 있는 학생인권에 대한 정체성은 표면적으로는 성폭력피해를 거론하나, 제17조 2항에 분명히 명시했듯이 성관계 경험이 있는 학생에 대한 차별의 금지를 명하는 것으로 훨씬 그 적용범위는 넓습니다. 제16조의 차별의 금지 조항에서 성정체성, 성적지향의 자유와 보장을 명시하고, 청소년에게 임신과 출산이 한 인격체로서 주어진 성적자기결정권이기에 차별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며, 이러한 성인권을 가르치는 교육을 학교는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 조례의 실체입니다. 신 : 경남학생인권조례 제16조(차별의 금지)와 17조(성인권교육의 실시 등)를 살펴보면 동성애가 확산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 : 경남도교육청이 예산을 지원하여 창원여성의 집에서 올해 아동 성평등 강사 양성과정을 진행했습니다. 그 교육 커리큘럼을 살펴보면 ‘동성 양성 트렌스젠더’, ‘인권과 성평등’ 등 아동성인권 교육이라는 수업에서 아동들에게 성행위를 할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이 과정을 수료한 강사들이 조례가 제정되면 초등학교를 비롯한 경남의 모든 학교에서 위 교육에 입각한 성인권 교육을 실시하여 우리의 초등학생을 포함한 청소년들에게 성정체성, 동성애를 포함한 성적지향, 출산과 임신 등 성적자기결정권을 정기적으로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교육기본법 제17조의4(건전한 성의식 함양)에는 ‘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학생의 존엄한 성(性)을 보호하고 학생에게 성에 대한 선량한 정서를 함양시킬 수 있도록 필요한 시책을 수립ㆍ실시하여야 한다. ② 제1항에 따른 시책에는 학생 개인의 존엄과 인격이 존중될 수 있는 교육적 방안과 남녀의 성 특성을 고려한 교육ㆍ편의시설 마련 방안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조례안에 담긴 성평등은 우리나라 헌법과 교육기본법에 전제된 남녀 양성평등교육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지방자치단체는 남녀평등정신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현하라고 상위법에 명시되어 있기에, 이에 반하는 조례를 제정하는 것은 위법합니다. 신 : 현재 전국적으로 서울, 경기, 광주, 전북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어 있습니다. 이들 지역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후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전 : 첫째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된 모든 지역에서 기초학력이 떨어졌습니다. 교육받지 않을 권리도 ‘학생의 권리’라며 보충수업을 받지 않는 학생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또 ‘무상급식’ 공약으로 ‘교육예산’을 밥값으로 전용하여 타지역의 학생들보다 교육의 지원을 덜 받게 된 것도 학생들의 학력 저하에 한 몫을 차지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과외를 시킬 수 없는 서민가정 학생들은 구조적으로 도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 학생들에게 교사를 지배계급으로, 학생은 억압받는 피지배층으로 교육하여 대결구도를 만들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된 후 교권침해가 심각해 졌습니다. 김 : 몇 가지 실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2011년 광주에서 학생인권조례 통과 후 2012년 중 고등학교 전 과목 성적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서울에서는 ‘교내에서 뽀뽀하지마’ 하며 학생 뒤통수를 때린 교사가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경기도 교육청은 수업 중 영상통화를 하는 학생에게 5초간 엎드려뻗치기를 시켰다고 교사에게 징계를 줬습니다. 특히 심각한 것은 학생의 폭언, 욕설, 수업방해, 폭행, 성희롱, 학부모의 교권 침해 등으로 여교사들이 눈물로 보낸다는 학교장의 수많은 증언 등이 있습니다. 신 : 도민들의 여론이 궁금합니다. 경남도민연합이 경남학생인권조례와 관련한 경남 도민들의 여론을 수렴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실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이 : 여론조사 기관 (주)공정에 의뢰하여 지난 11월17일 하루 동안 경상남도 만19세 이상 성인남녀 1,003명을 대상으로 유선자동응답 전화조사를 한 결과가 있습니다. 먼저 ‘박종훈 교육감이 경상남도 교육을 위해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가 무엇인지 의견을 수렴하였습니다. 그 결과 도민의 과반인 52.6%가 ‘전국 하위권인 경남 학생들의 학력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는 응답을 보였습니다. 다음으로 ‘학교시설 및 급식의 품질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19.1%), ‘학생의 인권 신장을 위해 인권조례를 제정해야 한다’(15.3%) 등의 응답 순서를 보였습니다. 또 학생들의 교복 착용에 대한 도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도민 10명 중 7명은 학생들이 교복을 착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고, 평소 학생들의 학교생활에서 인권침해 정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 결과, 도민의 47.4%가 ‘인권침해가 없는 편’(인권침해가 없는 편(36.5%)+인권침해가 거의 없다(10.9%))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47.4%로 ‘인권침해가 있는 편’(44.1%)(인권침해가 있는 편(28.6%)+인권침해가 매우 심하다(15.6%))에 근소하게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경상남도교육청이 입법예고한 ‘경남학생인권조례’와 관련한 도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도민의 과반인 52.4%가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찬성 25.2%보다 2배 이상 반대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학생인권조례 제정 시 학생들에게 미칠 영향을 묻는 질문에 도민의 33.3%가 ‘학습 분위기가 좋지 않아져 성적이 하락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응답이 많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성적인 타락으로 성희롱, 성범죄가 증가할 것’(26.9%), ‘학교 폭력이 줄어들고 민주시민으로 성숙하게 될 것’(22.1%), ‘동성애자 등 소수자의 인권이 향상될 것’(3.8%) 등의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신 : 11월25일 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반대 특별연합집회에 2만 명이나 운집했습니다. 앞으로 제정 반대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제 : 보안상 모든 내용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반대집회와 100만명 서명운동, 교육청 집회 및 1인 시위, 법적 대응도 준비중입니다. 물론, 우리안에서 기도회와 설명회 등을 통해 학생인권조례 실체를 도민들에게 계속 홍보하고 알려 나갈 계획입니다. 신 : 퀴어축제가 서울과 대구에서 개최되어 오다가, 이 정부 들어 부산(2017년)과 제주(2017년), 광주(2018년), 인천(2018년)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인권’이 강조되면서 학생인권조례도 제정되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 이 정부가 인권을 중시여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친동성애 단체들이 이번 기회에 동성애를 확산시키겠다는 의도를 갖고 많은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퀴어축제를 전국에 확산시키면서 인권조례 및 차별금지법 등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정부는 동성애,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핵심 위치에 임명하고 있습니다. 예로서, 진선미 여성가족부장관, 이석태 헌법재판관,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이 대표적인 인물 등입니다.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은 취임사에서 차별금지법을 만들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석태 헌법재판관은 군대 내에서의 항문성교를 금지시키는 군형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 헌법에 동성애,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조항들을 넣으려고 시도하였지만, 많은 국민들이 반대함으로써 무산되었습니다. 금년 8월 국무회의에서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을 통과시켰는데, 그 안에 동성애 옹호하는 차별금지법 제정, 성평등 정책 시행 등이 들어 있습니다. 이번 정부는 집요하게 동성애,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려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한 2005년부터 교과서에 동성애자를 차별하면 안 된다는 내용 등의 동성애 옹호 내용들을 넣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교육을 받은 세대들이 상당히 배출되었기에, 젊은 층을 포함한 사회적인 분위기가 동성애에 우호적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대부분의 언론들을 포함하여, 인터넷 내용들도 동성애 우호적인 내용들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언론의 동성애 우호적인 내용, 정부의 동성애 옹호하는 정책, 젊은이들을 포함한 사회적 분위기 등에 힘입어서 동성애 옹호 단체들이 더욱 자신감을 갖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실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 : 위기의 상황입니다. 이럴 때 교회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원 : 이럴수록 목회자들은 더욱 열심히 성도들과 교회 다음세대 학생들에게 동성애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여서 동성애의 문제점을 바로 알게 하고 사회에 나가서, 자신 있게 주위 사람들에게 동성애 문제점을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례 또는 법률은 공권력을 갖고 규제할 수 있는 힘이 있기에, 교회가 힘을 모아서 동성애 옹호하는 조례와 법률을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동성애 차별금지는 단순히 동성애자들의 피해를 막는 것이 아니고, 동성애 자체를 정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이 만들어지면, 교회가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서구교회처럼 무너지게 됩니다. 따라서 동성애 차별금지는 종교, 표현 등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임을 교인들과 국민들에게도 알려야 합니다. 다행히 많은 교수, 의사, 법조인 등의 전문가들이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전문가들을 교회에 초청해서 교인들에게 올바른 지식을 쌓도록 하면 얼마든지 신앙을 지키고, 오히려 세상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힘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목회자들이 자신감을 갖고 중심에 서서 외치기만 하면 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갖도록 유혹하지만, 우리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기에 어떤 환경에서도 넉넉히 이길 것을 확신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사안은 정치적 해결이나 거래할 수 없는 ‘진리 문제’입니다. 순교하는 마음으로 대처해야만 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신 : 바쁘신 가운데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쁜학생인권조례제정반대 경남도민연합’이 뜻하는 바가 잘 이뤄질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인물
    • 좌담/대담
    2018-12-19
  • “한국교회를 일으키는 마중물의 역할을 하겠다” ▲ 이사장 허원구 목사(중간), 본부장 이규현 목사(우), 사무총장 박현수 목사(좌) Q. 이사장님의 취임 소감은? A. (허원구 목사)부산성시화운동본부는 간절한 열망으로 모인 동역자들의 모임이다. 이사장으로 섬기게 되었는데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교회의 본질을 추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귀한 동역자들이 함께 모여 새로운 다짐을 하는 날이다. 더 열심히, 더 많은 동지들과 함께 부산을 거룩한 도시로 만드는데 힘 있게 달려가겠다. Q. 본부장님께서 향후 추진할 일들은 어디에 중점을 둘 계획인가? A. (이규현 목사)성시화가 잘되고 있지만 더 많은 교회가 참여하고 연합하는 일이 일어나면 좋겠다. 목회자들 사이에 있는 패배주의, 침체된 분위기를 걷어내고 행복감을 회복시키길 소망한다. 그러면서도 현실에 대한 성찰, 평가에 대해 엄격하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교회 미래에 대해 좀 더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빗장을 여는 성시화운동본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영적 활기, 생동감, 다이나믹이 일어나는 무브먼트가 일어나길 바란다. 그동안 진행한 성시화 6대사업을 바탕으로 열매가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고민할 것이다. 특히 다음세대를 일으키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일은 몇몇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 전체가 함께 달라붙어야 될 수 있다. 힘을 그냥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교회들의 연합이 상승작용을 일으키길 바란다. 부산을 넘어 한국교회 전체로 가길 기대하고 있다. 지금은 서울지역 교회들의 연합이 무너져가기에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키는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할때라고 여긴다. 그동안 거의 서울 일변도였지 않나? 서울을 일으켜야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다. 그래서 서울을 일으키는 일에 부산교계가 연합함으로 도전할 수 있길 바란다. Q. 총회에서 보고한 2019년 사업계획 중 ‘2020 해운대집회 출범식’이 있었다. 2020년 연합집회를 계획 중인가? A. (이규현 목사)아직 자세한 구상은 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부산에 규모 있는 교회 목회자들을 만나 프리토킹을 하고 다양한 생각을 나누며 함께 길을 찾겠다. 이제 연합집회는 단순히 많이 모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모이는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가 중요하다. 과거 여의도에서 있었던 집회처럼 모이는 그 과정이 중요하다. 여의도집회는 굉장했다. 요즘엔 대중 집회를 잘못하면 빛 좋은 개살구가 되는 것에 그치고 만다. 내용 없는 우리만의 잔치가 될 수 있다. 사회적 책임, 모였을 때 우리가 가져야하는 책임에 대한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사회에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많은 이 때, 모여서 무엇을 할 것인지 거기서 어떤 선언들이 나올 것인지가 중요하다. 많은 준비들이 필요하다. 2년간 준비를 거칠 계획이다. 그동안 목회자들의 갱신운동, 회개운동과 함께 평신도지도자들이 회복되는 일들이 있어야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Q. 부산성시화운동본부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어야 할 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A. (허원구 목사)그동안 한국교회 흐름은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여 왔다. 그러나 부산은 독특했다. 부산성시화운동본부가 처음 조직될 당시에는 부산의 대형교회인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님과 호산나교회 최홍준 목사님께서 시작하셔서 좋은 기초석이 되었다. 이후 중대형교회 목회자들을 세워주시고 그 분들은 스며들고 일꾼을 키워주셨다. 현재 부산성시화운동본부는 40~50대 목회자가 탄탄하다. 60~70대 이상의 선배 목회자들은 서서히 물러나고 다음세대를 일으키고 있다. 성시화에서 실제로 뛰는 사람들은 40~50대 목회자들이다. 타 지역과 달리 젊은 목회자들이 잘 조직되어 탄탄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한 작은 교회까지 참여하는 모임이 되어 가고 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구분 없이 전체가 일하는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 성시화에서 매월 진행하는 목회자기도회는 실제적으로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월 5천원, 1만원의 회비를 내며 성시화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은 교회의 참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라 생각한다. 다만 이것이 좀 더 확산되어 부산지역 1800교회가 모두 참여하는 성시화운동본부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Q. 실제적인 업무를 담당할 사무총장의 각오 및 계획은? A. (박현수 목사)본부장님이 그리고 있는 계획들과 큰 꿈들이 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현장에서 힘껏 도울 것이다. 6대 사업과 함께 실행위원장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부분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동안 성시화는 대책하고 반대하는 일을 많이 해왔다. 그것도 해야 하지만 이제 좀 더 선제적으로 기독교 이미지를 쇄신할 필요가 있다. 부산에 선한 영향력을 미쳐 기독교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는데 기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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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0
  • “소외된 이들의 이웃이 되어 희생적인 사랑 감내할 것” 부산 NCC 회장으로 선임되신 소감을 밝혀 주십시오. - 지금 한반도는 정전 협정 65년 만에 평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매우 중대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때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희생으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회복하고 굳게 지켜나가는 평화의 공동체로 서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부산 NCC 회장이 된 것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한반도에 평화를 주시도록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겠습니다. 보수적인 정서가 강한 곳에서 진보적인 색체를 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NCC 활동하는데 있어서 어떤 점이 가장 힘이 듭니까? - 예수님과 제자들은 당시 사회에서 철저하게 배척 당했었고, 이후의 사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20세기 초반 나찌 정권의 박해를 받던 독일 고백교회도 당시 사회 안에서 비주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진보가 주류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부산 NCC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산의 정서가 보수적이어서 진보 운동이 위축되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잔혹한 독재 정권 시절 그에 맞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와 평화의 담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부산 NCC가 위원회(상임, 특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상임위원회가 활동하는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 상임위원회로는 교회와사회위원회, 교회일치위원회, 선교위원회, 신학위원회, 여성위원회, 인권위원회, 평화통일위원회, 환경위원회 등이 있고, 특별위원회로는 장애인위원회, 다문화위원회, 종교대화위원회, WCC위원회, 노숙인사회복귀지원위원회, 역사편찬위원회, 생명사랑위원회, 청년위원회, 교육훈련위원회, 조직강화 특별위원회 등이 있습니다. 이중 교회일치위원회는 매년 2월 그리스도인 일치기도회를 통해 종교간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평화통일위원회는 지난 한 해 동안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회원교회를 순회하며 평화통일 기도회 및 통일 관련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그리고 환경위원회는 환경주일 연합예배로 함께 환경과 생태계 보전을 위한 운동을 펼치고 있고, 특히 장애인위원회는 지난 11월 6일-8일 NCCK와 NCCJ(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함께 한일 NCC 장애인 합동교류회를 부곡 로얄호텔에서 실시하였습니다. ‘장애인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합동 교류회에서는, ‘장애인이 어떻게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주체일 수 있는가’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있었고, 전쟁에 대한 경험, 사회 속의 경험, 그리고 신학과 사회학의 접목과 조화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금년 주제가 ‘그리스도의 사랑, 부산을 새롭게’라고 들었습니다. 주제에 맞는 어떤 활동계획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 그리스도의 사랑은 희생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희생과 죽음이 없는 부활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고 희생할 때, 사회는 비로소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소외되고 그늘진 곳에서 신음하는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부산 NCC가 그래왔듯이 그들의 이웃이 되어 희생적인 사랑을 감내할 것입니다. 각 위원회 별로 그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갈 것입니다. 교회와 사회위원회는 지역과 순환하는 방안을 모색 및 실천할 것이고, 교회일치위원회는 종교간 일치와 연대, 여성위원회는 사회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모색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평화통일위원회, 환경위원회 등 역시 자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지역의 여러 단체들과 연대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것입니다. NCC 운동하면 우리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와 평화통일, 인권운동 등을 실천하면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NCC 활동이 과거에 비해 많이 위축되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NCC 활동을 활성화 시킬 계획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 NCC 활동이 위축된 것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부터였습니다. 정작 변화된 것은 없이 ‘문민정부’라는 슬로건에 속아 긴장감을 내려놓으면서 스스로 위축을 자처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교회의 고유한 사명과 역할이 있습니다. 현재의 부산 NCC는 작지만 묵직한 역할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킨 것은 언제나 다수의 주류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소수의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는 사순절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영성 쇄신을 위한 성화 그리기를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기름과 같은 것입니다. 영성이 깨어나면 그 다음 할 일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끝으로 지역교계에 당부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 부산 NCC는 지난 세월 그리스도교 일치 및 한반도의 정의 평화 운동에 힘써왔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사랑의 연대를 이루고 계셨듯이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한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대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도구로 쓰임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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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22
  • “의료선교는 의료인들만의 사역이 아닙니다” ▲ 호산나교회 김태규 장로 먼저 부울경의료선교협의회 회장에 추대 되신 소감을 밝혀 주십시오. - 두렵고 떨리는 마음입니다. 먼저 주님 사역에 쓰임 받음에 감사드리지만, 그동안 해 왔던 것보다 사역의 지경이 영적으로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넓어졌기 때문에 부담이 많습니다. 또 세대교체를 자연스럽게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중간 가교 역할도 잘 해야 합니다. 그런점에서 부담이 큽니다. 협의회가 의료계통의 학생들, 선교단체 및 기관, 선교병원과 교회들의 network를 잘 이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새로운 임원진과 협력해서 나아갈 예정입니다. 전국적으로 열리는 ‘의료선교대회’가 따로 개최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울경의료선교대회는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부울경의료선교협의회’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 의료선교대회는 전국적으로 2년마다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 2009년 제11회 전국의료선교대회가 호산나교회에서 개최된 바 있습니다. 당시 처음으로 제1회 의료선교사대회도 함께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는 수영로교회에서 동시 개최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대회들을 통해 수많은 의료관계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network를 그냥 사장하기 보다는 그 중간 연도인 짝수 해에 부산, 울산, 경남지역에서 지방대회로 시작하면 좋겠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현 세계로 병원 이사장이신 이승도 장로님, 현 병원장(당시 고신대 복음병원 교수) 정현기 장로님, 그리고 저와 황수섭 목사님, 최상림 목사님, 호산나교회 정경래 집사로 구성된 첫 임원진을 구성하고, 제1회 부울경 대회를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에서 개최하면서 부울경의료선교협의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부울경 의료선교협의회와 함께하는 부산과 울산, 경남지역 병원과 대학, 선교팀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단체는 많습니다. 고신대 복음병원, 동아대병원 등 대학병원과 세계로 병원, 일신기독병원, 진주복음병원 등 종합병원, 호산나교회 의료선교회, 온천교회 의료선교회 등 각 교회 의료선교회와 고신대 의과대학, 간호대학, 동아의대 IVF 등 의과대학 및 간호대학, 부산누가회, (사)부산의료선교회 등 선교단체 같은 다양한 기관 및 단체들이 함께 협력하고 network하고 있습니다. 이번 부울경 의료선교대회에서 그동안 부울경지역 의료선교발전을 위해 헌신한 이승도 장로와 정현기 장로에게 감사패가 전달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어떤 역할을 감당해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 이승도 장로님과 정현기 장로님은 부울경의료선교협의회 탄생과 지금까지 협의회가 유지, 발전해 오는데 큰 공로를 세우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수고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회가 잘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제5회 부울경 의료선교대회가 지난 10월27일 호산나교회에서 열렸는데요. 금번 대회에 대한 총평을 부탁드립니다. - 남북회담 이후 북한선교와 제주도 예멘 난민 문제로 국민의 관심이 높은 상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의료인들이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떤 시각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지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통일 한국 특히 북한 탈북민과 북한 주민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사역을 어떻게 펼쳐야 할지, 또 무슬림 난민들에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주되심을 알릴지에 대해 많은 준비와 이해가 있어야 하겠다고 느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새 집행부가 구성되었습니다. 기존과 다른 새로운 변화를 기대해도 좋습니까? - 새 집행부가 구성되었지만, 아직 모임을 갖지 못했습니다. 빠른 시일에 만나서 앞으로 해야 할 사역의 방향과 방법에 대해 깊이 논의하고 추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물론 사역의 방향과 역할은 전 회장단에서 추구했던 연결고리 역할이지만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으로 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겠습니다. 끝으로 지역교계에 대해 당부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 '의료선교'에 대한 편견과 오해들이 없었으면 합니다. 의료선교는 의료인들만의 사역이 아닙니다. 의료선교는 주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 중 하나인 치유사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교회의 관심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치유사역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동참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기도를 당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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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07
  • “주님 오실때까지 전도운동은 계속됩니다” 2014년 11월5일 출범한 부산복음화운동본부가 4주년을 맞이했다. 오는 10월30일 극동방송 공개홀에서 4주년 기념식도 가질 예정이다. 지난 23일 순복음금정교회에서 윤종남 목사를 만나 지난 4년 동안 느낀 소회감,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 등을 들어 보았다.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 내가 부기총 대표회장 시절(2012년) 부기총 증경회장님 몇 분이 찾아와서 “남은 생애 전도하면서 살고 싶다”며 복음화운동본부 창립을 권유 받았다. 당시에는 그분들의 뜻을 오해했었다. ‘또 다른 정치색 짙은 연합기구를 만들 수 있겠다’는 걱정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2년 동안 그 분들을 지켜보면서 복음에 대한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난 2014년 11월 ‘나라사랑, 영혼구원’이라는 목적으로 복음화운동본부를 창립했다. 그리고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외형적으로도 많이 성장했고, 초창기의 미숙함도 지금은 노련함으로 극복하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은 복음에 대한 열정이다. 한 영혼을 전도하려고 애쓰는 그 마음만은 변하지 않았다. 지난 4년 동안 전도대회를 몇 차례나 개최했나? 그리고 전도대회 이외 행사들도 많았던 것 같다. - 금년 11월 6일 부산고운교회에서 전도대회가 펼쳐진다. 이 대회가 38회 대회이다. 그동안 몇차례 부흥성회가 있었고, 전도컨퍼런스도 개최했었다. 여름에는 해수욕장 전도를 펼쳤고, 12월에는 트리축제가 펼쳐지는 광복동 국제시장 인근에서 전도 운동을 해 왔다. 앞으로도 다양한 곳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복음화운동본부가 될 것이다. 그동안 37회 대회를 펼치면서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다. - 첫 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서면에서 전도대회를 개최했었는데, 롯데호텔 주차장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다가 쫒겨난 경험이 있다. 첫 대회라서 사실 긴장을 많이 했었다. 무엇보다 성도들이 전도에 대한 열정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이후에 다시 서면에서 전도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도 롯데호텔에서 쫒겨난 경험이 있다.(웃음) 하나님께서는 전도 중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다양한 상황을 경험하게 하신다. 이 모두가 시간이 지난 지금 좋은 추억인 것 같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해 왔다는 것이다. 이 사실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시대가 변했다. ‘시대에 맞는 트렌드가 있다’는 말도 있다.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불편한 지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그런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전도하다보면 불편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사람을 보곤 한다. 그렇다고 사람 시선이 따갑다고 복음전하는 것을 게을리 할 수는 없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노방전도를 하셨고, 우리나라에 온 초기 선교사들도 거리에서 복음을 전했다. 때로는 복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까지 했다. ‘시대적 트렌드’라는 지적이, 어쩌면 우리가 복음을 편하게 전하려는 자기변명이 아닐까 고민해 보아야 한다. 또 복음은 얼굴을 보면서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온라인 상이나 SNS에서 그냥 읽는 복음이 얼마나 마음에 와 닿을지 의문이다. 개인적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복음을 전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4주년 기념행사가 있다고 들었다. 소개해 달라. - 매년 11월 첫주에 기념행사를 갖고 있다. 2년마다 대성회나 친목성 행사로 진행된다. 1회때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 초청 대성회를 개최했고, 2회 대회때는 친목 행사를 가졌다. 작년 3회 때는 손기철 장로 초청 성회를 개최했고, 금년에는 친목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10월30일 부산극동방송아트홀에서 ‘설립 4주년 기념식 및 기념세미나’를 개최한다. 그동안 복음전도에 앞장 서 오신 부기총 증경회장님들과 성도님들이 모두 모여서 기념식을 가질 예정이다. 또 순복음금정교회, 부곡교회, 금사교회 축하찬양단의 찬양과 해피앙상블 공연, 김현일 목사님의 특강 등이 있을 예정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 개인적인 바램이 있다면, 전국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낮은 부산과 경남의 복음률이 50% 이상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처럼 전도운동을 열심히 할 생각이다. 주님 오실때까지 복음화운동은 계속 될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그동안 수고해 주신 원로 목사님과 성도님들께도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비록 사람들은 몰라줄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위로해 주실 것으로 믿는다.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이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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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2018-10-24
  • “진솔한 글로 후손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었다” ▲ 학교법인 동서학원 박동순 이사장 올해 팔순을 맞아 회고록을 출간한 학교법인 동서학원 박동순 이사장. 1965년 그야말로 황무지 같은 땅에 영남기독실업학교를 세웠다. 19명의 신입생으로 시작한 학교는 학교법인 동서학원 아래 경남정보대학, 동서대학교, 부산디지털대학교, 이렇게 3개 대학으로 발전했다. 10만 명이 넘는 졸업생, 2만여 명의 재학생과 1천명의 교수, 직원이 재직하는 큰 교육기관이 됐다. 학교법인 동서학원의 설립자인 故 장성만 박사가 교육가, 정치가, 목회자로 왕성한 활동을 펼친데는 그의 곁에서 늘 동역한 박동순 이사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 8월 25일 동서대학교 컨벤션홀에서 ‘2018학년도 2학기 개강감사예배 및 보직자 간담회’가 있었다. 더불어 박동순 이사장의 팔순기념 출판회를 가졌다. 이날 출판회에서 박 이사장의 장남 장제국 총장(동서대)은 “오늘의 동서학원이 있기까지 훌륭한 리더십과 섬김으로 학교를 이끄신 이사장님께 감사하다”고 말했고, 차남 장제원 국회의원은 “선친 장성만 초대 이사장님이 존경받는 인물로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훌륭한 내조 때문”이라고 말했다. 팔순회고록 <내 잔이 넘치나이다>(도서출판 카리타스)를 출간한 박동순 이사장을 만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박동순 이사장의 신간 <내 잔이 넘치나이다>(도서출판 카리타스) Q.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요? A. 8월 30일이 제 팔순이었습니다. 이후에는 글을 쓰기 힘들 수도 있으니 건강과 상황이 허락될 때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말보다 진솔한 글로 남기고 싶어 책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어차피 제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니 재료를 모으기보다 머릿속에 있는 기억들을 메모하며 꺼내었습니다. 팔순이 8월이니 7월말에는 책을 출간할 계획으로, 4월부터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글을 다듬고 또 다듬고 하다 보니 생각보다 조금 늦어지긴 했습니다. Q. 책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제가 사회적으로 활동을 많이 하지 않았기에, 제 신분에 대한 신뢰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출생과 가정환경 등 신분에 대해 밝혔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만난 이야기로 어떻게 만났고, 미국 유학 생활은 어땠는지, 학교를 설립할 때의 이야기, 12년간 동서대 총장으로 섬기면서 겪은 이야기들을 적었습니다. 또한 제가 본 남편의 이야기도 적었습니다. 남편의 삶의 자세, 자녀들에게 어떻게 가르쳤고, 크리스천 정치가로 어떻게 활동했는지 적었고, 그 외 제가 후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남겼습니다. Q. 글의 맛깔스런 표현력이 돋보였습니다. 글을 쓰는데 힘든 점은 없으셨는지? A. 문학을 했기에 글을 쓰는 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청년시절엔 성경은 물론 책도 많이 읽었고 영화도 많이 보았습니다. 성경은 시편, 잠언, 전도서, 로마서 등을 특히 좋아해 많이 읽었고, 쿼바디스, 로미오앤줄리엣, 전쟁과평화 등 영화도 많이 보고 주제곡도 따라 부르곤 했습니다. 옛날엔 좋은 영화가 많았습니다.(웃음) 그리고 영시도 많이 외웠고, 좋은 문장을 적어두기도 했습니다. 우리 때는 그런 감성적인 문화들이 많아서인지 글을 쓰기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퇴근 후 집에 돌아가 글을 썼습니다. 보통 저녁 10시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면 밤 2~3시가 될 때까지 빠져들곤 했습니다. 다음날 출근해야하는 걱정에 중단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평소 순간순간 기억나는 것은 메모하고, 시간을 쪼개어 틈틈이 글을 썼습니다. 이미 책을 출간했는데도 ‘아, 그거 썼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지만 다시 책을 쓸 자신은 없네요. ▲ 남편인 故 장성만 박사의 존영 앞에선 박동순 이사장 Q. 글을 쓰며 중점을 둔 부분은? A. 과거를 회상하다보니 나를 자랑하는 것이 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솔하게, 사실 그대로 쓰자고 결심했습니다. 우리 가정의 아이들이 나의 삶을 봐 왔기에 거짓이 없게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동서가족인들이 보았을 때 공감할 수 있도록, 누가 보더라도 진솔하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제게 백번을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진실하게, 정직하게 썼습니다. 제가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진실할 때 모든 것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Q. 제목인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뜻은 무엇인지? A. 어머니께서 20대이던 시절 호주선교사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확실한 믿음을 가진 어머니는 믿음생활이 철저한 분이셨습니다. 이는 제 형제 모두 합창할 정도죠. 어머니는 애국적인 마음은 물론 신앙에 입각한 철저한 믿음생활을 사셨습니다. 그게 참 고마울 뿐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정말 어렵고 좌절될 때 내가 예수님을 안믿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제게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주신 어머니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남편 장성만 박사의 초상화를 바라보며)저 양반이 나를 정말 사랑해주었습니다. 저 남자의 큰 사랑을 받았기에 힘을 합쳐 함께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또 동서가족에 대한 사랑과 감사한 마음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학교가 어려울 때 교직원들 모두 반발하거나 분규 없이 이제껏 지내왔습니다. 서로를 믿고 신뢰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좋은 만남들을 허락하셔서, 제가 변화되고 믿음을 갖고 능력을 갖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신앙심, 남편의 사랑,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과 신뢰로 저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 잔이 넘치도록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Q. 책을 본 주변의 반응은 어떤지요? A. 큰 아들인 장 총장이 제게 인쇄들어가기 전 먼저 글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여줬더니 딱 한마디 하더군요. 눈물이 났다고. 오히려 제가 핀잔을 줬지만, 제 마음이 전달된 것 같아 고마웠습니다. 주변에서 책을 본 후 여러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은 김형오 전 국회의장님입니다. 남편과 정치인 선후배로 알고 지냈는데, 이번에 여행 후 집에 돌아와 책을 읽다보니 진솔하고 마음에 감동이 와서,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었다며 편지를 보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또 여러 지인들이 잠이 안와서 책을 보며 자려고 했다가 한번에 다 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안지겹다고 말씀들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Q. 팔순잔치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A. 시대가 시대인만큼 따로 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한 학기를 시작하고 끝날 때마다 3개 대학 교직원들이 함께 모여 개강종강예배를 가집니다. 그런데 묘하게 제 생일이 8월말이라 2학기가 시작하는 여름방학이 끝날때, 남편의 생일이 음력 11월 2일이라 겨울방학 시작 때입니다. 이번 2학기에는 1부 개강예배, 2부에 출판기념회로 가졌습니다. 직원들 모두 참석은 힘들고 300명, 지인 60명을 초청해 함께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동안 뵙지 못했던 분들을 오랜만에 만나니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Q. 인생의 많은 시간을 학생들 앞에 서서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캠퍼스를 밟는 학생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A. 앞서 말했듯 진실한 말이 감동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명문장은 아니더라도 입학식, 졸업식 식사(式辭)를 제가 모두 직접 작성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늘 말하던 것은 ‘before 동서 after 동서’, 학교 오기 전에는 당신이 누구였든지 간에 학교를 마치고 나갈 때는 좋은 친구를 만나고, 좋은 스승을 만나 아름다운 추억과 꿈을 만나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걸 명문장으로 쓰는 건 싫더군요. 제 진정으로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말해왔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습니다. ▲ 故 장성만 박사의 동상 앞에 선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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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스천파워
    2018-10-15
  • “교단을 혁신하겠다” 금년 103회기 예장 통합 목사부총회장에 당선된 김태영 목사를 지난 10월5일 백양로교회당에서 만났다. 총회를 위해 어떤 정책을 갖고 있는지, 지역사회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할 것이지 많은 질문이 있었지만, “총회장이 아니라 부총회장이기 때문에 너무 많은 말을 하면 안된다”며 총회 정책 부분에서는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핵심 정책 몇가지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었다.<편집자주> 근 40년 만에 부산에서 통합측 부총회장이 탄생했다. - 먼저 부족한 저를 사용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우리교회 성도님들과 당회가 하나 되어 저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신 것에 대해서도 잊을 수 없다. 교회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어떤 직분도 감당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부산에서는 오랜 시간이 흘렀다. 우리교단 총회 역사를 살펴보면 43회(1958년)회 부산에서 최초로 노진현 목사님(부산중앙교회)이 총회장이 되셨다. 그런데 이때 합동과 통합이 갈라지는 시점이고, 노 목사님이 합동으로 가셨다. 그 이후가 김두봉 목사님(소정교회)이신데, 63회(1978년) 총회장으로 피선되셨다. 그리고 3년 뒤 부산영락교회 고현봉 목사님이 66회(1981년) 총회장에 당선되셨지만, 현재는 교회가 백석대신 교단 소속이다. 어떻게 보면 김두봉 목사님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고, 내년 총회장에 피선되면 41년 만에 부산에서 총회장이 탄생하는 것이다. 후보 소견 발표에서 ‘교단 미래 백서’를 만들겠다고 주장했다. - 교회가 대사회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고 있고, 신뢰도는 떨어지고 있다. 어떤 혁신이 없다면 앞으로 한국교회는 급속하게 쇠퇴할 수 있다. ‘교단 미래 백서’는 이런 시대에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교단의 헌법과 제도, 교육, 구조, 신학대학 등 근본적으로 변화가 필요하고 혁신해야 된다고 본다. 한마디로 교단을 혁신하자는 취지다. 잘못 생각하면 기존 법과 제도가 잘못되어 있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 내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바꾸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 것인지 설명해 달라. - 3년 정도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본다. 부총회장 시절에는 혁신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총회장 시절에는 전국으로 다니면서 공청회를 가질 예정이고, 총회장을 마칠 때 구체적인 청원안을 상정할 예정이다. ‘교단 미래 백서’는 기성세대가 아닌 젊은 목사와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 낼 생각이다. 30-40대의 젊은 목회자들과 토크 콘서트를 통해 교단의 정책과 현장의 괴리를 직접 느껴 볼 생각이다. ‘미래 백서’이기 때문에 이 분들의 생각과 주장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총회 정책기획기구개혁위원장도 역임 하셨다. 교단 내 신학대학 통폐합 문제에 대해 ‘특성화’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셨는데.... - 교단이 7개 신학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교단안에서는 기구개혁을 통한 신학대학 통폐합 문제가 몇 년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신학교 통폐합은 힘들다고 본다. A대학이 B대학에 통폐합 된다면 A 대학 동문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 A 대학 교수들의 생존권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말이 통폐합이지, 통폐합 자체가 쉽지 않다. 내 주장은 작은대학으로 가자는 것이다. 7개 대학마다 신학, 복지, 영성, 농어촌, 기독교교육 등 자신들만의 특성화를 갖고 대학을 운영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애우나 특수목회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 있다면, 복지에 특화된 대학에 지원해서 특수목회를 배우는 것이다. 그 대학만의 고유의 색깔을 입히는 작업이 통폐합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역교회를 위해서 어떤 계획이 있나? - 내가 부총회장에 나서는 것에 대해 부산지역 3개 노회가 많은 도움을 주셨다. 생각하고 있는 계획이 하나 있다. 3개 노회(부산, 부산동, 부산남)가 함께 하는 행사를 만드는 것이다. 선교대회가 될지, 아니며 부흥집회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3개 노회가 함께하는 행사가 전무했다. 조만간 3개 노회장님들을 모시고 함께 고민하겠다. 원래 3개 노회는 하나에서 출발했다. 이번기회에 통합측 교회들이 함께 힘을 모으고, 지역사회에 어떤 긍정적인 역할을 할지 고민해 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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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2018-10-08
  • “시대에 맞는 변화를 고민하겠습니다” 기독문화대상이 제정 취지를 설명해 주십시오. - 부산이 우리나라 제2도시지만 모든 것이 수도권 중심이 되어서 정치 경제 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까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어요. 이 같은 사정을 잘 아시는 장성만 목사님께서 포럼 창립 때부터 낙후된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의 문화 창달을 위해 문화대상을 제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이사님들도 장 목사님의 뜻에 공감하고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장 목사님의 생각이나 우리 이사님들의 생각이 같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부울경 지역에서 기독교문화운동을 일으켜보자는 공감대가 이루어졌다고나 할까요. 이런 것이 문화대상을 제정한 취지라고 볼 수 있지요. 13회째를 맞이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요. 일부에서는 기존 ‘문화예술’, ‘교육’, ‘봉사’ 부분 이외의 분야에도 문을 열어 주셨으면 하는 바램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올해의 목회자상’, ‘선교사상’ 같은 부분에 대한 시상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 그렇지 않아도 지난해 이어 올 해도 ‘민석 지도자대상’을 시상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꼭 격려해드려야 할 훌륭한 목회자가 계시면 추천을 받아서 특별상으로 수상을 할 계획입니다. 선교사대상이라고는 별도로 분리해서 생각해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우리가 네팔에서 의료선교를 하시는 양승봉 선교사와 중국 한족의 한센인 선교를 하신 이명남 선교사를 표창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울경출신 선교사 등은 봉사나 교육부분을 통해 수상 할 수 있습니다. 역대 수상자 중 이사장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 수상자가 있으시면 소개 해 주십시오. - 모두 훌륭한 분들이 수상했기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이라고 한다면,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님이 생각이 납니다. 이상규 교수님은 시상식 후에도 다른 모임에서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요. 참 실력이 있고, 겸손한 분이어서 오래토록 교제하고 싶은 분입니다. 내년 3월에 우리 포럼에서 행사를 계획하고 있는데, 이 교수님께 부탁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믿고, 함께할 수 있는 분인 것 같습니다. 심사 과정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독문화대상 수상자 심사는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 심사 이전에 우리 포럼 실행이사회가 해마다 심사위원 선정에 고민을 합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울이지요. 후보자 접수를 마감하면 실행이사회가 심사위원을 구성하고,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심사를 합니다. 하지만 심사 기준이나 심사위원들을 언론에 먼저 소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심사하는데 불편을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사위원들은 수상자 발표 후에 소개 할 예정입니다. 초창기보다도 지원자의 숫자가 적은 것 같습니다. 어떤 변화를 모색해야 되지 않는냐 는 지적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그럴 수 밖에 없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벌써 12년째 같은 지역에서 같은 분야의 수상자를 모집 했으니까요. 문화대상 제정취지는 계승하면서 방법은 시대에 맞추어 변화 할 수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 포럼 전체 이사님들이 공감해야 되고, 또 교계 여론도 감안 해야겠지요. 적절한 때에 교계 내 여론을 듣고 우리 포럼 이사님들과 상의를 하겠습니다. 21세기포럼이 기독교문화 창달을 위해 문화대상 이외에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신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많지요.(웃음) 2008년도에 기독교문화연대를 결성해 드리고 매년 상당한 금액을 지원하고 있어요. 금전이 전부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 포럼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문화사역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전100인위원회를 통해서 청소년들의 비전을 위해 수년째 격려하고 있고 또 목양회, 교목협의회, 교수협의회 등에도 지원을 하면서 이들의 사역을 돕고 있지요. 이런 것이 지역사회에서 기독교문화를 조성해 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번 문화대상과 관련해 교계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 기독교문화 창달과 숨은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제정한 기독교문화 대상이 금년 13회째를 맞이 했습니다. 주변에 정말 신실한 신앙인으로 숨은 인재들이 있으시면,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21세기포럼이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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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2018-09-21
  • “장기기증등록 연령을 낮춰 희망등록은 가능하게” ▲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부산지부장 이광연 Q.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저희 재단법인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는 지난 1991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장기기증을 통해 타인의 생명을 살리자는 목적으로 서울에서 설립되었고 부산은 이듬해인 1992년에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부산을 포함하여 전국에 14개 지부가 생명나눔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저희 본부가 하는 주요사업은 첫째, 장기기증을 알리고 활성화시키기 위한 홍보와 교육사업 둘째, 장기기증자와 이식대기자를 발굴하여 연결하는 장기이식 결연사업 셋째, 장기기증자와 뇌사자 장기기증 유가족들의 심리와 건강을 돌보는 사후관리사업을 하고 있으며 넷째, 경제적으로 어려운 만성신부전환우들이 투석과 요양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투석요양시설 ‘라파의 집’을 제주도에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특히 최근 2, 3년 동안은 뇌사 장기 기증자 유가족을 예우하는 사후 관리사업에 좀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Q. 전국 타 지역과 비교했을 때 부산지부 현황은 어떻습니까? A. 저희 본부는 1년에 약6만 여명의 장기기증희망등록자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이 숫자는 우리나라 한 해 전체 장기기증등록자의 60~70퍼센트에 해당하는 숫자인데 이 중에서 약 8천명은 부산지부를 통해 참여하신 분입니다. 전체 참여인원으로는 서울 다음으로 많은 분들이 참여하였고 인구비율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분들이 참여하십니다. 부산지역의 개신교 비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열악하다고 하는데 감사하게도 부산지역의 교회와 또 대학생들의 참여율이 매우 높은 편이라 많은 시민들이 생명나눔운동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Q. 9월 9일은 장기기증의 날이라고 들었습니다. A. 저희 본부는 지난 1997년부터 한 사람의 장기기증을 통해 ‘9명의 생명을 구(9)하자’는 의미로 매년 9월 9일을 장기기증의 날로 정하고 올해로 22번째 행사를 가져오고 있으며 부산시도 저희 본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조례를 통해 2017년부터 9월 9일을 ‘장기기증의 날’로 정 하고 올해로 2회째 행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부산시청 녹음광장에서 행사를 가졌습니다. 행사장에서는 뇌사장기기증자들을 추모하는 사진 전시회와 장기기증 홍보차량을 통해 시민들에게 장기기증을 쉽게 알리는 시간을 갖고 추모리본, 팔찌 만들기, 캘리그라피체험 등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Q. 최근 장기기증희망 등록연령을 낮추자는 서명운동이 진행 중이라 들었습니다. 설명 부탁드립니다. A. 우리나라 전체 장기기증희망등록자가 140만 여명 정도인데 안타깝게도 실제 희망등록자가 최근 5년 사이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불필요한 규제 때문인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장기기증 희망 등록시 미성년자의 경우 법정대리인의 동의는 물론 증빙서류(가족관계증명서)까지 첨부해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 때문입니다. 특히 장기이식법 시행규칙 제7조 1항에서 규정하는 미성년자는 민법상 만 19세 미만이므로 대학1년생의 상당 수가 자기 스스로의 판단으로 장기기증 등록을 할 수 없는 상황이며 실제로 각 대학교 장기기증 홍보캠페인 시 장기기증 등록을 했다가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장기기증 등록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학생들이 다수입니다. 미국은 만 13세 이상이면 누구나 본인의 의사만으로 장기기증 등록을 할 수 있고, 일본은 15세, 호주는 16세, 남아공은 16세 이상부터 장기기증 등록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헌혈이 가능한 만16세로 장기기증등록연령도 낮추자는 것이 저희의 요청입니다. 실제 장기기증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족의 서면 동의를 거쳐야 가능하므로, 등록단계부터 서류 첨부는 불필요한 규제입니다. Q. 장기기증에 대한 교회의 참여는 어떠한지요? A. 현재 부산지부는 양문교회 강동현 목사님이 운영위원회장을 맡고 계시며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부산지역 교회의 참여율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높은 편입니다. 현재까지 부산지역 246개 교회가 장기기증희망서약에 참여하여 주셨고 일방적으로 찾아뵙고 행사 요청을 부탁드리는 데도 불구하고 흔쾌히 이 사역의 필요성을 지지해주시고 참여해 주시는 목사님들과 교회에 많이 송구스럽고 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면이 허락되면 참여해주신 모든 교회를 언급하고 싶은데 교회의 크기와 참여성도들의 숫자에 관계없이 마음으로 지지해 주심에 더욱 열심을 다함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교회의 참여가 더욱 필요한 운동입니다. 지금 이 기사를 보시는 목사님과 장로님 그리고 성도 분들 중 교회의 참여를 원하시면 언제든 연락(051-808-0131)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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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2018-09-11
  • “특화되고 차별화 된 대학으로 바꿔 놓겠다” 수협중앙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최근 부산장신대 제8대 이사장으로 선출된 김임권 장로. 서울과 부산을 오가면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김임권 장로를 23일 오전 코모도호텔에서 만났다. 부산장신대 이사장직에 대한 그의 솔직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 김임권 장로 부산장신대 8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셨습니다. 먼저 소감을 밝혀 주십시오. - 학교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문제가 많다”, “통폐합되어 없어진다”는 등 부정적인 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부산장신대가 ‘강도 맞은 이웃’이라는 생각이 됩니다. 아픈 부분을 돌아보고 치료해서 최소한 안전한 곳까지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걱정 근심만 갖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기도와 행동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부산장신대를 위한 기도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대학기본역량진단평가에서 1차 탈락하고 2차 발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대학이 좋은 평가를 많이 받았는데, 이번 결과에 대해 많은 분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대학이 빨리 충격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요. - 오늘(23일) 2차 발표가 있습니다.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학사일정은 총장님께서 잘 이끌어 가실 것으로 믿습니다. 이사회의 역할은 총장님이 학사 일정을 잘 이끌어 가시도록 협력하고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총장님이 발전기금 모금에 나서는 것을 반대합니다. 총장님은 학사 일정이 최우선 되어야 하고, 학사일정에 대한 모든 책임은 총장님에게 있다고 봅니다. 내일(24일) 총장 선출이 있습니다. 총장으로서의 덕목, 혹은 기준 같은 것이 있습니까? - 총장인선위원회에서 적합한 인물을 이사회에 상정할 것으로 봅니다. 그 분들 가운데서 이사님들이 투표하여 선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와 신학교는 목사와 총장을 뽑는 기준이나 방법이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세상의 방법과 달라야 하는데, 마치 기업 CEO 뽑는 느낌입니다. 이력이나 경력보다 그 분의 영성과 살아온 삶이 더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지만, 다음기회에는 좀 더 다른 방법을 연구하고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임기 중 ‘이것만은 꼭 이뤄 놓고 가고 싶다’는 것이 있습니까? - 저는 우리 대학의 방향에 대해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냥 총회 산하 7개 지방신학교 중 하나로 살아 갈 것인지, 아니면 부산장신대 하면 떠오르는 특화된 대학으로 가야하는지 말입니다. 지금 부산장신대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가 뭐가 있습니까? 복지부분에서 선전을 하고 있지만, ‘부산장신대’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딱 떠오르는 키워드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해외선교’나 ‘농어촌 선교’ 같은 특화된 이미지 말입니다. 해외선교나 농어촌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 찾도록 만드는 특화된 이미지 말입니다. 현대는 이미지 싸움입니다. 특화된 이미지를 통해 지방사립대학이 살아가기 힘든 이 시대를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 볼 생각입니다. 그런 특화된 이미지를 갖기 위해 앞으로 어떤 노력을 해 나가실 계획이십니까? - 제 개인의 생각만으로는 안됩니다. 먼저 여론을 모아야겠지요. 오는 9월 중 이사님들과 교수님들, 그리고 각 노회 관계자님들을 모시고 2박3일 정도 워크샵을 개최 할 생각입니다. 여기에서 다양한 분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나갈 계획입니다. 끝으로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수협중앙회 회장이셔서, 수협쪽 일 때문에 부산장신대일에 소홀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있습니다. - (웃음)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수협중앙회 일은 3년 정도 해 왔는데, 어느 정도 파악이 되어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는 메인이 부산장신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각오로 일 할 생각입니다. 지역교회의 많은 기대와 관심, 그리고 기도를 당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인물
    • 인터뷰
    2018-08-23

문화 검색결과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17 : 감정 “인간은 기쁨과 슬픔을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섬세하게 직조된 기쁨과 슬픔은 신성한 영혼을 위한 안성맞춤의 옷, 모든 비탄과 갈망 아래로 비단으로 엮어진 기쁨이 흐른다.”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중 일부 1. 서로 잡아먹는 비굴한 울혈(鬱血)사회와 감정의 윤리 윤평중 한신대 교수의 말에 의하면 우리 사회는 ‘울혈(鬱血)사회’이다. 국민이 화병에 걸린 사회라는 것이다. 사실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는(아니 나는) 쉽게 화를 내고, 남 탓을 일삼지 않는가? 나아가 신문 사회면(아니 1면)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저지르는 증오범죄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화병의 원인은 무엇인가? 윤평중 교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공정성과 부당한 대우”가 그 원인이라고 한다. 『비굴의 시대』(한겨레출판사, 2014)에서 우리 시대 가장 급진적이고 예외적인 지식인인 박노자 교수는 지금 한국 사회를 ‘전례 없는 더러운 시대’, ‘서로 잡아먹기를 탐내는 사회’라고 말한다. 사회적 연대 의식은 증발하고, 저마다 자신과 몇 안 되는 피붙이들의 잇속만 추구하고,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각자도생의 사회라는 것이다. 이제 ‘인간이 사라져가는 곳’이며, 정치적으로는 파시즘이 위세를 떨치고 있으며, 유신 때보다 더한 ‘공포를 먹고 사는 사회’라고 본다. 박노자 교수는 『당신들의 대한민국1/2』(한겨레출판사, 2001/2006)에서 한국 사회에 유령처럼 떠도는 뿌리 깊은 전근대성도 질타하고 있다.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체제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전근대적이고 극단적인 우상숭배’라는 교집합을 이끌어낼 수 있다.”라고 말한다. 타인에 대한 적극적인 폭력을 가르치는 군사문화, 굴종과 타협을 강요하는 대학 사회의 현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우리’의 선 밖으로 내몰고 있는 인종주의적 편견 등은 박노자의 눈에 비친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따라서 박노자는 이 땅, 대한민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제도적·사회적 폭력에 대해 울부짖고 있다.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라고 말한 고 신영복 교수의 말은 지식과 감정과 실천의 문제를 잘 요약한다. 감정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칸트(I. Kant)의 냉철한 이성과는 달리 감정을 긍정하고 지혜롭게 발휘하자고 이성을 주장했던 스피노자(B. de Spinoza)는 ‘이성의 윤리학’이 아니라, ‘감정의 윤리학’을 옹호했다.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말이다. “우리들의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층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한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정념(passiones)은 우리에게 기쁨(laetitia)과 슬픔(tristitia)의 감정을 설명해 준다.” 즉 우리는 타자를 만났을 때 기쁨과 슬픔 둘 중 하나의 감정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자신이 더 완전해졌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고, 반대로 자신이 불완전해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때 전자를 기쁨의 감정이라 하고 후자를 슬픔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슬픔과 기쁨이라는 상이한 상태에 직면하게 된다면, 슬픔을 주는 관계를 단절하고, 기쁨을 주는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 인간의 행복한 삶일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감정의 윤리학이 기쁨의 윤리학으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 낙타, 사자, 어린아이 2. 르상티망의 낙타와 저항하는 사자 스피노자는 분노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분노(indignatio)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좀 더 명료하게 말한다면, “우리와 유사한 대상에게 불행을 준 사람에 대해 분노한다.”라는 것이다.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F. M. Dostoevsky)의『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느꼈던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노파를 죽이고 그 돈을 빼앗아라. 그리고 그 돈의 도움으로 나중에 전 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헌신하라. 네 생각은 어때, 하나의 하찮은 범죄가 수천 개의 선한 일로 무마될 수는 없을까? 하나의 생명을 희생시켜 수천 개의 생명을 부패와 맞바꾸는 건데, 사실 이거야말로 대수학이지 뭐야! 게다가 저울 전체를 놓고 보면 이런 폐병쟁이에 멍청하고 못된 노파의 목숨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이나 바퀴벌레의 목숨, 아니 그만도 못한 목숨이야. 남의 목숨을 좀먹고 있거든.” 『죄와 벌』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분노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소냐라는 창녀를 만나면서, 그는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분노는 타당한 것이지만, 자신에게는 한 인간을 단죄할 수 있는 권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라는 냉혹한 사회 구조를 보고 그것을 향한 비판적 실천으로 나가지 못한 시대적 한계도 포함한다.니체(F. W. Nietzsche)는 권력의지에 의해 촉발된 강자의 공격욕에 대한 약자의 격정을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고 불렀다. 사전적 의미로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원한, 분노, 질투 따위의 감정이 되풀이되어 마음속에 쌓인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더 적극적으로 약자가 강자를 ‘진정한 선이나 삶의 가치를 모르는 불쌍한 인간’이라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인류는 원래 도덕적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행위의 기준은 고귀와 비천이라는 미적 가치관뿐이었다. 강자에 대한 반감이 이러한 가치관을 전도시켜 이른바 도덕적 선악의 관념이 생긴다. 그리고 그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심리가 바로 르상티망”이라고 한다. 기독교 도덕관의 핵심은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약자의 르상티망을 엿볼 수 있다. 풍요의 신(이집트 태양신 라와 가나안 풍요의 신 바알과 바벨론의 신 마르둑까지)으로 상징되는 고대 근동의 강대국들의 신과 로마제국의 힘과 권력과 같이 맞설 수 없는 강자에게 학대당한 스트레스를 발산하지 못한 채 르상티망에 빠져 있는 것이 기독교 도덕관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예수는 약자들에게 강자를 악인으로 간주하고 강자를 정의를 모르는 자라고 불쌍히 여김으로써 정신적 우위에 서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것이 예수가 약자에게 베푼 도덕관의 정체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기독교)의 도덕관은 르상티망을 바꿔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기독교인들은 근원적인 원한과 분노에서 도망갈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극복은 무엇인가? 니체는 인간 정신의 발달 과정을 ‘의무와 복종을 상징하는 낙타의 단계’, ‘부정과 자유의 정신을 뜻하는 사자의 단계’, ‘망각과 창조를 의미하는 어린아이’의 3단계로 나누고 있다. 그 가운데, 낙타의 정신은 금욕과 복종이다. 낙타는 전통과 명령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져 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져야만 그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렇게 낙타처럼 노예의 근성을 쫓아 무거운 짐을 지고 들어가는 길은 사막이다. 영성의 길이 아닌 노예의 길이 사막인 것이다. 낙타처럼 살면 삶이 사막화된다. 겁이 많은 낙타는 두려움 때문에 복종한다. 이렇게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살면 스스로의 욕망이 좌절되고 자존심이 상처를 입어서 그 정신이 르상티망이 되는 것이다. 무서움 때문에 무릎을 꿇고는 살지만 그 속에는 원한의 감정이 쌓여 간다. 이 르상티망이 자신에게는 죄의식으로, 타인을 향해서는 공격적인 분노로 나타난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일어난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고 덮어씌운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깎아내리고 공격하는 것으로 자기 방어를 삼는다. 니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타의 정신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니체의 사자의 정신 단계에 이르면, 정신은 용감하고 자유로워진다. 인습을 비판하고 불의에 저항한다. 니체는 “황량한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이곳에서 정신은 사자가 되고, 자유를 쟁취하여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따라서 사자는 전통의 질서에 저항하며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옛 주인 되는 용과 대결한다. 사자는 “사물의 모든 가치는 나에게서 찬란하게 빛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자는 자유를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또한 무엇을 획득하려고 무릎을 꿇는 법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사자가 아무리 자유를 쟁취해도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자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어떻게 삶을 긍정할 것인지 알지 못한다. 부정의 정신이 긍정의 정신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분노에서 죄의식으로 넘어갔다면, 니체의 사자의 단계는 자본주의에 저항한 맑스(K. Marx)의 모습을 라스콜리니코프에게 투영한 것이다. 그러나 맑스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3. 자긍심의 아이 스피노자는 자긍심(acquiescentia in se ipso)에 관해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라고 정의한다. 즉 되돌아본 자신의 모습이 긍정적일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 아름답고 매력적인지를 확인할 때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사실 낙타 같은 사람들만 많으면 비겁한 세상, 혹은 정신병동이 된다. 그래서 사자의 정신 단계로 변화되어야 하지만 사자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는 못한다. 자유와 창의적인 존재들은 있지만 조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에 의하면 아이의 정신 단계가 되면 인생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저항하고 투쟁에 주력하는 단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사자는 비판하고 부정하지만 아이는 자기와 세계를 긍정한다. 이러한 아이의 단계는 순수이고 긍정적이며 창조적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순수이고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자 놀이이다.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이고, 최초의 움직임이며, 거룩한 긍정이다.” 아이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몸을 그대로 본다, 아이는 르상티망을 망각한다. 아이는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처럼 언제나 새로운 시작으로 재미있는 놀이를 발명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꿈을 좇아서 자발적으로 놀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이러한 아이의 단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고,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4.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니체가 바라본 아이들이 꿈꾸는 세상, 더 이상 서로 잡아 먹기 위해 싸우는 세상이 아닌, 비굴한 울혈사회가 아닌 기쁨의 세상, 기쁨의 윤리학, 나아가 기쁨의 신앙은 도대체 가능할까? 앞서 언급한 박노자는 자신이 꿈꾸는 대한민국을 이렇게 제시한다. “노조의 지원을 받는 좌익 정당들이 국회 의석을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나라, 공산당의 기관지까지도 국고 보조금을 받아 발간하는 다양성의 나라, 입사 때 여성이나 장애인이 ‘정상적인 남성’보다 더 유리한 평등의 나라, 노동운동가들이 감옥에 잡혀가지 않는 나라, 학생들이 교수를 만날 때 노르웨이처럼 동등한 인간으로서 웃으면서 악수할 수 있는 나라,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에 각종 원조를 제공하는 일이 덴마크처럼 지성계의 가장 중대한 관심사가 될 수 있는 나라, 여성들이 손님의 냉면을 잘라주는 ‘음식집 아줌마’ 정도의 역할밖에 맡지 못하는 나라가 아닌’ 그런 대한민국이다. 따라서 박노자는 자본의 한계를 직시하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집권만을 위한 정당 운동이 아닌 폐허를 딛고 일어나,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고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슴에서 발까지가 엄청 먼 여행이 될지라도,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의 힘’만 있다면 못 이룰 것도 없는 것이다 “새로운 참사가 계속 일어나도 아무런 투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결국 역사 앞에서 커다란 죄를 짓는 일일 것”이라는 말에 (최근 박근혜 정부의 세월호, 메르스, 개성공단 폐쇄, 노후원전 재가동과 신규원전 건설, 생화학 세균무기 쥬피터 프로젝트 실시, 사드 설치 참사 등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다. 헤게모니 이론으로 유명한 안토니오 그람시(A. Gramsci)는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I’m a pessimist because of intelligence, but an optimist because of will).”고 했다. 합리성이 아닌 힘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딱 맞는 말이다. 그람시는 “소수의 혁명 보다는 다수의 조금의 혁명이 더 혁명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람시의 다음의 말에서 우리는 낙관을 발견한다. “지금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이 순간에 나는 조용히 다시 내 할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게다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즉 사람은 그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뭔가를 계획하고 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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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21
  • [기독교교양읽기 16] 진정한 화해는 십자가 아래서만 가능하다 “기억하라! 진실하게 기억하라!” 저자는 1984년 유고슬라비아 군대에서 당했던 심문의 기억으로부터 이 책을 시작한다. 정보장교 G대위의 심문을 받으면서, 그는 주위의 모든 사람이 자기를 옭아매기 위한 수단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미국인과 결혼하고 서구사회에서 공부했으니 스파이가 틀림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빨리 실토하라고 다그쳤다. 별다른 내용이 나오지 않자, 갑자기 심문을 멈추었다.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심한 고문을 받지는 않았으나, 제대한 이후에도 그때 받은 학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G대위는 저자의 마음속에 편안히 자리 잡고서 거듭거듭 그를 심문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겨우 그를 한구석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와의 관계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G대위가 비록 가해자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와 화해해야 그 악연이 해결됨을 깨닫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기억하라!”고 말한다. 기억하더라도 진실하게 기억해야 한다. 가해자가 내게 행한 악행을 피해자가 진실하게 기억하는 것에는 이미 그 악행에 대한 정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정죄는 심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해의 한 요소이다.저자는 기억이 구원의 수단이 되려면, 기억 자체가 구속(救贖)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억의 종말》 || 저자인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현재 예일 대학교에서 신학과 윤리학을 가르치면서 예일 신앙과문화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배제와 포용》 《베풂과 용서》 등이 있다. 원제 The End of Memory. 홍종락 역. IVP, 2016. 16,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우리나라의 사회갈등지수는 상당히 높게 나타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015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1년을 기준으로 할 때 OECD 국가 중에서 5위였다. 우리보다 갈등지수가 높은 나라는 터키를 비롯해 그리스, 칠레, 이탈리아였다. 2010년에는 2위였다. #먼저 정죄해야 ‘진정한 화해’ 가능해김길구 : 오늘 이야기할 이 책의 주제는 다소 묵직합니다. 피해에 대한 기억과 용서, 그리고 화해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위안부 문제, 옥시 문제 등 사회적 갈등이 갈수록 증폭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김현호 : 지난 6월 26일은 UN이 정한 ‘고문 생존자/피해자(victims) 지원의 날’이었습니다. 1998년부터 지켜온 이 날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을 인내해온 이들에게 우리의 존경을 표하는 날”(코피 아난 UN사무총장)입니다. 나쁜 권력에 고난을 당한 기억은 한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립니다.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날인 것 같습니다.김수성 : 저자가 겪었던 ‘심문의 기억’을 읽으면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기억났습니다. 저자가 심문을 당했던 해가 1984년이었고, ‘빅 부라더’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거짓 기억이 동원되었고, 날조한 역사를 새로 써넣기도 했다고 합니다.김길구 : 당시 유고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 정치적으로 상당히 혼란을 겪을 때였습니다. 결국 1991년 연방이 붕괴되면서 내전을 겪었고, 인종청소라는 추악한 역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이렇듯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었던 분쟁지역에서 평화신학을 공부했고, 화해를 주장했다는 것이 우리에게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김현호 : 시대적 갈등문제를 해소하는 방안에 일조하는 책인 것 같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화해 문제를 뛰어난 통찰력으로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남북 분단,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역사의 질곡에서 벗어나 진정한 화해를 모색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회가 이념을 떠나 서로를 이어주고 만나게 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김수성 : 저자는 무조건적인 화해만을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정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원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즉, 정죄할 것은 정죄하고 화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야 진정한 화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김길구 : 우리나라의 경우 역사 문제는 물론이고, 세월호 사고와 최근 부각된 옥시 사건 등 다양한 사회적 갈등도 제대로 치유되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증폭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계가 갈등의 당사자가 아닌 화해자 역할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 화해는 진실하고 정의롭게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여기에는 정죄가 포함된다.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함에 힘입어 용서가 이루어진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진실하고 정의로운 기억을 무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진 출처: zesukchon.com] #‘값싼 은혜’로 진실 봉합해서는 안돼김수성 :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하게 기억하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그동안 심리학적으로 많이 연구된 기억과 관련된 문제점을 적시합니다. 소위 ‘거짓기억증후군’으로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기억하는 것에 주의하라고 강조합니다.김현호 : 현재 우리나라에서 갈등이 치유되지 않고 증폭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요? 정부나 기관에서 유리한 것만 기억하려고 하고, 불리한 것은 덮어두려고 하는 것이죠. 세월호의 경우, 사고가 발생한 원인이나 구조상의 문제점 등은 덮어두고 보상금만 내세우며 이제 그만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빨리 잊기를 원하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김길구 : 저자의 말처럼 악행의 기억은 오히려 상처를 줄 수도, 무관심을 낳을 수도, 상처를 덧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진실하고’ 여기에 더하여 ‘정의롭게’ 기억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진리인 것 같습니다. 자기합리화로 기억을 왜곡하려 해서는 상처가 곪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불거진 옥시 문제도 비슷합니다. 배상금만 지급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교만함이 엿보입니다.김현호 : 교회에서 죄에 대한 회개는 철저하게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람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문제는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일부 교회에서는 ‘은혜롭게’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사회적 갈등이 빨리 봉합되기를 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봉합은 그냥 숨기는 것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언급되었던 ‘값싼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김수성 :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용서하고 치유하기 위해서이고, 서로가 화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물쭈물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정죄해야 합니다. 진실하고 정의롭게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죄 없이는 용서가 있을 수 없고, 용서 없이는 치유도 화해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김길구 : 여기서 우리가 ‘사과의 기술’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과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구체적으로 보상하는 단계를 거칠 때라야 용서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진정성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진정성이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성 없이는 사회적 갈등 해소 못해김현호 : 저자는 진정성에 더하여 십자가의 죄사함을 내세우며 모두가 화해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기독교적 전통에서 ‘자발적 용서’는 상당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대속하심에 힘입어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신앙적 용서라 할 수 있습니다. 김수성 : 이 책에서는 기억과 용서, 망각 등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많이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십자가 보혈에 의존하지 않고는 그러한 행위 모두가 불완전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모두가 불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김현호 : 우리 사회에는 앞으로도 갈등이 불거질 소지가 많습니다. 세대 갈등을 비롯하여 양극화에 따른 소득 갈등, 다문화가족의 급증으로 인한 갈등 등. 그만큼 교회가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정부 등에서 기왕에 벌어진 갈등을 빨리 잊을 수 있도록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하고, 교회 공동체는 그 상처를 감싸주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김수성 :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다. 우리의 몸과 영혼이 피폐해질 수는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성전이다. 때로는 폐허가 된 성전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신성한 공간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절실한 지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김길구 : 진실하게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불의를 행하는 것이고, 잘못된 기억은 오히려 피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 우리 사회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는 그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구조적으로 변화를 가져와야 우리 사회에도 화해의 바람이 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억을 구속(救贖)해야만 합니다.다음에는 최병성 목사의 포토 에세이 《길 위의 십자가》(이상북스, 2016)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화해의 제자도》 / 에마뉘엘 카통골레 / IVP《왜 용서해야 하는가》 /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 포이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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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06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16) 1. 동물 실험: ‘원숭이에게 미사일 쏘기’ “왜 사람들은 건물이나 예술작품과 같은 인간의 창조물을 파괴하면 ‘야만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신의 창조물을 파괴하면 ‘진보’라고 치부하는가?” (간디) 해마다 500억 마리의 동물이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물고기를 빼면 매년 250억 마리의 동물이 인간의 음식이 되기 위해 죽고, 매년 4천 만 마리의 동물이 모피가 되기 위해 죽어간다.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의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라고 마하트마 간디는 말한바 있다. 그러나 고양이가 사람을 보고 도망가고, OECD 국가 중 유기견 수출 1위(고아 수출 1위일 뿐만 아니라!)인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동물들이 살기에 대한민국은 그리 좋은 나라가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동물은 법적으로 철저히 ‘물건’이다. 물건은 ‘인권’이 아니라, 사람의 ‘물권’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동물은 소유와 점유의 객체가 되고, 그 권리자인 인간에게 처분권이 있다. 동물은 다른 물건과 마찬가지로 사용되고 처분되고 심지어는 필요가 없으면 폐기된다. 2010년 11월 구제역이 처음 발생한 뒤 매몰 살 처분된 가축 수가 무려 350여만마리에 달했다(부산 시민 인구가 이 정도도 된다). 그뿐인가? 살충제, 부동액, 브레이크액, 표백제, 탈모제, 눈 메이크업, 잉크, 선탠오일, 손톱 광택제, 마스카라, 헤어스프레이, 페인트, 지퍼 윤활유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 많은 상품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모두 동물을 이용한 독성 실험을 거친 것들이다. 동물은 인간의 윤택한 삶을 위하여 실험실에서도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밖으로 눈을 돌려보자. 시카고 대학의 ‘쥐를 33일간 잠재우지 않는 실험’, 오레곤 대학의 ‘갓 태어난 생쥐의 앞다리를 잘라 그럼에도 자기 몸을 단장하는지 관찰하기’, 하버드 대학의 ‘사냥개에 플루토늄 주사하기’, 옥스퍼드 대학의 ‘10일 된 새끼 고양이 양 눈을 꿰매 시력 상실의 영향에 대해 관찰하기’, 케임브리지 대학의 ‘생쥐의 두뇌에 헤르페스 바이러스 주사하기’, 미 국방부의 ‘원숭이에게 신경가스, 청산가리, 방사능, 총알 혹은 미사일 쏘기’, 미 농무부의 ‘어미 뱃속에 있는 새끼 돼지 태아의 목을 자르고 그것이 임신한 암퇘지의 인체 화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관찰하기’, GM의 ‘자동차 충동실험에 돼지나 원숭이 이용하기’ 등은 분명 ‘인류 문명의 진보’와 ‘동물의 고통’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곧, 인류의 진보는 동물 학대와 정비례하는 것이다. 2. 동물해방과 동물신학 탐구: “성차별, 인종차별을 넘어 종차별도 극복가능한가?”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한 모든 인간은 나치’라고 말하는 호주 출신의 도덕철학자이자, 동물윤리학자인 피터 싱어(P. Singer)는『동물해방』(인간사랑, 2006)이라는 책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어떠해야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동물의 권리(animal rights)’ 분야의 바이블인 이 책은 동물의 권리와 복지를 위해 “인간의 도덕적 관심에 동물을 포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동물이 단지 인간의 종(species)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되며 이러한 ‘종차별주의(Speciesism)’를 반대함으로 종간의 원칙적 평등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서구 역사에서 종차별주의의 발생사적 근원을 찾으면 로마와 기독교라는 두 문명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로마제국은 콜로세움 등의 원형경기장에서 수많은 동물들을 사람들의 호기심 거리와 놀이의 대상으로 여기고 학살했다. 이러한 경기는 시민들에게 먹을 양식을 배분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행사였다고 하니 가히 로마의 동물학대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동물과 함께 학대당했던 초기 기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신성시했기 때문에 인권의 신장에 큰 기여를 했지만, 동물과의 관계에서는 인간과 다른 종간의 차별을 공고히 한 종교가 되었다. 따라서 싱어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기독교)는 여러 면에서 진보적이었으며, 그리하여 로마인의 제한된 도덕적 영역을 엄청나게 확장시켰다. 하지만 인간 아닌 다른 종에 대한 처우와 관련시켜 생각해볼 때, 그러한 교의는 구약성서에서의 인간 아닌 동물들의 낮은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저하시켰다. 구약성서에는 인간이 다른 종을 지배해야 한다고 쓰여 있지만, 그래도 거기에서는 다른 종들의 고통에 대한 희미한 관심이나마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는 동물에 대한 가혹 행위에 반대하는 어떠한 명령도 찾아볼 수 없으며, 동물의 이익을 고려하는 권고 또한 찾아 볼 수가 없다.” 종차별은 사실상 ‘인종차별(racial discrimination)’과 ‘성차별(sex discrimination)’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종차별이 도덕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근거는,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잠재하고 있는 지적 능력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가령 유색인종은 백인에 비해, 여성은 남성에 비해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는 오해처럼 종차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 다른 종(동물)을 차별하는 것은 인간이 그들보다 지적 능력이 탁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은 인간에 비해 하등동물이니 거기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동물 학대의 이유는 첫째,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고 특권적 지위를 누린다’는 전제이며, 둘째는 ‘동물은 도덕적 권리의 합법적 주체가 아니라’는 전제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전제에서 동물이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기반으로, 차이는 ‘특별한 도덕적 배려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데, 차별의 근거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오늘날 인종차별이나 성차별도 그러하듯,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지적 능력 운운하며 그 차별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만일 그것을 인정하면 무뇌아로 태어난 아기(혹은 치매 노인들)는 침팬지보다 그 지능이 못하니 그 생명권을 연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싱어는 이렇게 말한다. “설령 좀 더 나은 지적 능력을 소유한다고 해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할 수는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좀 더 나은 지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로 인해 인간에게 인간 아닌 존재를 착취할 권한이 부여되지는 않는 것이다.” 사실 인류의 역사는 도덕 지평 확대의 역사이다. 여성과 흑인, 사회적 약자와 장애인, 혹은 소수 종교인들과 동성애자로 그 도덕적 배려와 책임의 지평이 확장되었다. 그러나 성과 인종을 넘어 종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동물권 신학의 핵심인 ‘관대함의 윤리(ethics of generosity)’를 부르짖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신학부 교수이자, 기독교 채식주의자인 앤드류 린지(A. Linzey)는『동물신학의 탐구』(대장간, 2014)에서 싱어가 말하는 연약하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는 ‘평등한’ 고려가 아니라, ‘더 큰’ 고려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싱어의 공리주의보다 칸트의 의무론을 따르며 동물의 권리 신학인 동물신학을 전개하고 있는데, 동물과 같은 약자에게 ‘도덕적 우선순위’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린지는 이렇게 말한다. “윤리에서 내가 견지하는 이론적 입장은 약자와 상처 입기 쉬운 자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권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3. 예수와 동물들: “노새를 때리지 마라. 자비를 얻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동물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기독교 사상은 동물 복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1세기부터 8세기에 이르는 초기 기독교 외경 문학은 종종 예수와 동물과의 관계에 관해 다루고 있다. 특히 콥트교회의 문서조각은 ‘노새를 치유하신 예수’의 모습을 들려준다. “그 일은 주님이 도시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산을 넘어 가실 때에 일어났다. 그들은 산에 당도했고, 올라가는 길은 경사져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짐을 실은 노새와 함께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동물은 쓰러져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 남자가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노새를 때렸고, 노새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남자에게 다가가 말씀하셨다. ‘남자여, 왜 당신은 당신의 동물을 때리는가? 당신은 이 동물이 고통에 괴로워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자 이 남자는 대답하여 말했다.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내가 만족할 때까지 이놈을 때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놈은 나의 재산으로, 큰돈을 주고 샀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이 나를 알고 이 사실에 대해 알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 중 몇몇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주님, 그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그가 노새를 어떻게 샀는지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들은 노새가 어떻게 피를 흘리는지 보지 못하고, 어떻게 신음하며 울부짖는지 듣지 못하느냐?’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여 말했다. ‘아닙니다. 주님, 그놈은 신음하고 울부짖지만 우리는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슬퍼하며 외치셨다. ‘노새가 하늘에 계신 창조주께 하소연하며 자비를 구하며 우는 것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너희들에게 화가 있으리라. 그러나 이 노새가 고통을 호소하며 울부짖게 만든 자에게는 세 배나 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동물에게 다가가서 손을 대셨다. 그러자 노새는 일어났고 상처는 치유되었다. 예수께서는 그 남자에게 말씀하셨다. ‘가라, 그리고 지금부터 다시는 노새를 때리지 마라. 그러면 너도 자비를 얻을 것이다.’” (곱트교회 문서조각) 마태복은 5장 7절의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긍휼의 대상이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동물들을 소개한 ‘유사 마태복음서’도 있다. 인용해보자.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지 삼 일째 되던 날, 마리아가 동굴에서 나와서 마구간으로 들어가 그 아이를 구유에 눕히자 황소와 당나귀가 그에게 경배했다. 그럼으로써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것이 성취되었다. ‘황소는 그의 주인을 알고 당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안다.’ 그리하여 그 동물들, 황소와 당나귀가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 그분께 끊임없이 경배했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예언자 하박국이 말 한 것이 성취되었다. ‘두 동물 사이에서 당신은 나타나실 것입니다.’ 요셉은 삼 일 간 마리아와 함께 같은 장소에 머물렀다.” (유사 마태복음) 아기 예수의 가족이 사막으로 들어갈 때 사자들과 흑표범들과 다른 동물들이 나타나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구절도 있다. 계속해서 유사 마태복음의 내용을 인용해보자. “처음에 마리아가 그들을 둘러싸는 사자들과 흑표범들과 여러 야생 짐승들을 보았을 때 그녀는 큰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아기 예수는 그녀의 얼굴을 기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어머니. 저들은 어머니를 해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저를 서둘러 섬기려고 오는 겁니다.’ 이 말과 함께 예수는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몰아냈다. 사자들은 그들과 함께 계속 걸었고, 그들의 짐을 옮기는 짐승들과 황소들, 당나귀들과도 함께 걸었다. 이들과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자들은 이 중 단 하나도 해치지 않았다. 사자들은 그들이 유대로부터 함께 있다가 데려온 양들 사이에서 온순했다. 양들은 늑대들 사이를 걸었으며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중 어느 하나도 다른 동물에 의해 다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라는 예언자의 말이 성취되었다.” (유사 마태복음) 4. 역지사지, 역지감지, 역지식지의 세상: ‘사자가 소 여물을 먹는 하나님 나라’ “인간들이여, 당신들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뽐내지 마십시오. 동물들은 죄를 짓지 않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위대함을 가지고 땅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통과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서 우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말한다. 그러나 역지감지(易地感之)도 필요하다. 사지는 머리로 하지만, 감지는 가슴으로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 단계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 그대로, ‘사자가 소가 먹는 풀을 뜯어 먹는 것’, 곧, 강자가 약자의 주식을 먹음으로 자신의 체질을 변화시키는 것, ‘역지식지(易地食之)’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돼야 정말 조화로운 평화의 나라가 올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실생활에서 이러한 역지사지, 역지감지, 역지식지의 생명 존중의 사상을 실천했다. 까치를 위해 감을 다 따지 않은 ‘까치밥’, 음식을 먹기 전제 조금 떼어내 뭇 생명과 더불어 먹고자한 ‘고시래’, 콩을 심을 때 세 알을 심어 한 알은 새가 먹고 다른 한 알은 땅 속 벌레가 먹게 한 농부의 배려, 길을 나설 때 미리 지팡이로 땅을 쿵쿵 굴려 벌레들이 도망하게 한 나그네의 세심한 배려, 하루 수십 리씩 걸어야 하는 소들을 위해 소장수들이 소에게 신겨준 ‘쇠짚신’, 작은 생물이라도 해할까봐 뜨거운 물도 식혀 버렸던 어머니들의 살뜰한 살림살이, 소가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도록 은어를 사용하며 한순간에 소의 명줄을 끊고자 노력했던 백정들의 우직한 배려, 한 집안에서 더불어 먹고 사는 존재들을 사람이나 짐승을 가리지 않고 모두 생구(生口)라고 불렀던 포용적인 마음, 또한 불교의 영향을 받아 오랫동안 실천했던 채식위주의 삶 등. 생각해보라. 아버지 기스의 암나귀들을 찾으러 떠났던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던 것처럼(사무엘상 9장 참조), 동물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혹시 알겠는가!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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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6
  • [신간] 둥근 별 안유환 목사가 쓴 소설 <둥근 별> 신이건 장로(한국기독신문 사장) 왜 <둥근별>이라 이름 지었을까? 인간의 생사화복,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주먹을 불끈 쥐면 둥근 주먹밖에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우리는 누구나 부모, 형제들과 첫 만남으로 시작해서 돌아가는 귀착점도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끝맺음하기 때문일까? 둥근 원으로 반짝거리는 하늘에 수놓은 무수한 이름 모를 별을 보며 붙인 것일까? 아쉬움이 남는 이 땅의 만남을 통해서 누구나 갖고 있는 향수, 마음의 고향을 두고 이름 지었을까? 매우 궁금해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 안유환 목사와는 그가 젊은 집사였던, 지방지 부산일보 문화부 기자 시절부터 교계기자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는 열심히 다니던 교회가 담임목사와 교인간의 갈등을 겪는 것을 보며 신앙의 회의를 느꼈다. 어느 날, 교회를 개척하는 동료들과 함께 새 둥지를 틀었다. 그때부터 그는 교계 영적 지도자는 어떻게 가야하고, 어떤 흔적을 남겨 놓아야 하는지에 고민했고, 고민 끝에 잘 다니던 일간신문 기자직을 내려놓고 광나루신학대학원에 입학을 했다. 3년간 수학한 끝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부산의 변두리에 위치한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때부터 그는 시를 썼고, 중년 목회시절에는 수필을 썼다. 조기은퇴를 한 이후 삶의 경험을 토대로 소설을 쓰게 됐다. 이번에 그가 출판한 둥근별을 읽으면서 ‘그랬구나. 출발지와 종착지가 같은, 결국 하나의 둥근 원에 지나지 않는 평범한 기독교적인 신앙으로 그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목회를 하면서 또 은퇴 후의 삶을 소재로 삼고 그리운 현대인의 향수를 수북이 쌓아 묻어두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이번 소설 <둥근별>의 핵심을 나름대로 정리했다. 그는 잘 나갈 때 직장을 그만뒀고, 목회에 성공할 때 조기은퇴를 했다. 텃밭을 가꾸고 귀향해 노을이 물드는 초저녁 오늘을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밀레의 ‘만종’을 연상시키듯 살아가고 있다. 조용히 천국의 만남을 향해 준비하는 여정에서 이런 소설집을 냈다는 생각에 부럽기도 하고 삶의 여유를 가진 안 목사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평화가 오고 삶의 여유와 함께 마치 고향을 찾아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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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서
    2016-06-03
  • [기독교교양읽기 ⑮] 교회가 ‘후반기 삶’의 안내자 역할 해야 “천직은 하나의 명작이 아니라, 인생 전체라는 걸작이다!” 우리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직업 선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 새로운 고민이 하나 다가온다. ‘과연 내 직업이 천직인가’라는 고민이다. 우선 먹고살기 위해 하나의 직업을 택해 대충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뜬금없는 고민이다.일자리 부족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천직을 찾기 위한 여정을 결코 마다하지 말라는 저자의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천직이란 단시간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걸고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스런 연습기간을 견뎌내야만 하고, 전혀 엉뚱한 일을 하다가 돌아오기도 하며, 다른 사람의 도움도 받아야 하고, 다양한 일을 하면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그동안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자기계발서가 나타났다가 스러졌다. 그럼에도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저자는 성공이란 평생에 걸쳐 무엇을 남기느냐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관계없는 일처럼 보이던 것이 의외로 나중에 도움이 되고, 그러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찾고, 비록 미완성으로 끝날지라도 하나의 족적을 남기는 것이 바로 천직의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여타 자기계발서가 살아가면서 무엇 하나라도 뚜렷이 이루어야 성공이라고 강조하는 것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일의 기술》 || 저자인 제프 고인스(Jeff Goins)는 강연가이자 저자이며, 파워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웹사이트를 방문한 사람이 전세계에서 400만 명이 넘을 정도다. 저서로는 《난파》 등이 있다. CUP, 2016. 13,8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요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가 겪는 가장 큰 문제는 젊은이들은 물론 노후를 대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취업할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천직’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치가 아닐까 하는 고민을 안고 좌담을 시작했음을 먼저 밝힌다. #천직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김길구 : 세대를 막론하고 취업과 관련된 환경이 급변하는 시대입니다. 한때는 아이들이 어른을 가르치는 세태라고 해서 관심을 끌었던 신인류[돈 탭스콧, 《N세대의 무서운 아이들》(1998)]가, 이제는 일자리를 두고 인공지능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직업에 대한 고민이 한층 깊어져가는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김현호 : 이 책 표지에 나와 있는 카피를 의미 있게 읽었습니다. ‘일의 기술이라 쓰고 삶의 기술이라 읽는다.’ 단순한 자기계발서라고 하기에는 영성적 사명으로서의 일에 대해 강조하고, 영성적으로 땀의 평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가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김수성 : 천직이란 단숨에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생의 여정으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라면서 결론을 맺는데 대해 공감했습니다.김길구 : 얼마 전 잡코리아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남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 중 47퍼센트 정도가 “두 번째 직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20대도 34퍼센트, 40대는 65퍼센트가 두 번째 직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할 만큼 현재 직업이 불안정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김수성 :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책을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한 실패 가운데서 천직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깊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부딪쳐보는 것이 중요합니다.김현호 : 소명을 정의하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업을 구했으나, 자신이 계획한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틀어졌을 때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자기 정체성을 지켜가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확장해가는 것에서 천직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김길구 : 그동안 우리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소명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끊임없이 찾아야 하고, 그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가슴 뛰는 일을 찾아내고 부딪쳐야 한다는 것이죠.김수성 : 그래서 저자는 ‘미완의 작품’을 남길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평생 천직을 찾아 헤매고 결국에는 미완이겠지만, 그 과정에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포트폴리오’로 인생의 지평 넓혀야김현호 : 소명이 딱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라는 ‘포트폴리오 인생’에 대한 언급도 의미 있는 지적인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직업을 통해 자기 인생의 지평을 넓혀가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상당히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직장생활 외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김길구 : 몇 년 전 미국 LA에 갔을 때 일입니다. 공식 초청방문이었는데도, 주말에는 나를 초청한 분의 얼굴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알고 보니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는데 주말이면 무대에 서기 위해 연극에만 집중한다고 하더군요. 또 하나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김현호 : 요즘 우리 아이도 비슷한 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일을 마친 직장인들이 한데 모여 보컬 연습을 한대요. 그러다가 봉사를 가기도 하고, 초대를 받아 공연을 하면서 자기의 ‘끼’를 발휘한다는 거죠.김수성 : 문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는 것이죠. 살아가기에 급급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여유가 ‘사치’로 여겨질 것입니다. ‘투잡’을 하지만 소명이나 천직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한 또 하나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김길구 : 흔히 ‘천직’이라 일컫는 학교 교사들도 유럽의 경우 평균 재직기간이 5년 정도에 불과하고, 미국에서는 ‘투잡’도 흔하다고 합니다. 다중 직업이 일반화되는 추세라고 할 수 있죠. 우리나라에도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런 변화 추세에 아직 준비가 덜되었다는 것입니다.김현호 : 젊은이들의 경우 그런 상황을 ‘회전축’의 지혜로 활용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현실의 어려움에만 매몰되지 말고, 약간 빗겨나서 다른 길을 모색하면 자기의 소명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의 천직과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한 직업이 나중에 중요한 자산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 농구에서 크로스오버는 한쪽 발을 ‘회전축’으로 이용, 순간적으로 방향을 전환함으로써 상대 수비를 뚫는 기술을 가리킨다.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뜻밖의 사태와 실패를 만났을 때, 이를 회전축으로 삼아 미래로 나아가라고 충고한다. [사진 출처: 유튜브 사진 캡처] #유료 자원봉사로 지역사회 활성화해야김길구 : 최근 우리나라의 경우, 인생 후반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부산의 한 병원에서 주차관리요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한다는 공고가 나가자 지원자 중에는 시중은행 지점장과 증권사 간부, 중견 건설업체 임원, 공무원 출신도 있었답니다.[국제신문, 2016. 5. 16]김수성 : 우리가 직시하고 있듯이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파트 경비 등 계약직 업무가 대부분입니다. 앞으로 유료 자원봉사제도를 적극 도입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의 보수를 보장함으로써 양질의 인력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이들의 업무 만족도도 높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김현호 : 우리 교회가 이런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지역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일을, 유료 자원봉사 등을 통해 지역의 인력이 진행한다면 그 효과는 상당할 것입니다. 지원처와 필요처를 연결시키는, 그 다리 역할을 교회가 하는 것이죠.김길구 : 여태까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등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왔지만 투자에 비해 효과는 미미합니다. 선진 외국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가 지역사회와 손잡고 이런 일에 적극 나선다면 바람직한 시스템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부는 낭비를 최소화하면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김수성 : 인공지능 시대에,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을 서로 연결시키는 능력은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는 이런 역할을 감당하기에 가장 좋은 곳입니다.김현호 : 천직은 헌신과 함께, 즐거움 또는 만족도가 높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역할이 절실한 이유가 여기도 있습니다. 올바른 직업관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김길구 : 무기력, 무관심, 무의미. 소위 ‘3무’라고 합니다. 이 말을 결국 인간소외 현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수록 자동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교회의 사명 중 하나가 인간소외 해소에 있다면, 여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다음에는 평화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가 쓴 《기억의 종말》(IVP, 2016)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노동, 직업 그리고 하나님 나라》 / 정병길 / 성약출판사《일의 신학》 / 폴 스티븐스 / C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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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교양 읽기
    2016-06-02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⑮ : 말(씀) ▲ 다양한 예수상 1. 말(言)의 복수 우화 ‘양치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늑대가 온다는 거짓말을 즐기다가 진짜 늑대가 나타나서 그 밥이 되고 말았다는 비극적인 소년의 이야기인데, 흔히 ‘거짓말하면 벌 받는다’라는 도덕교훈을 위해 단골로 인용되는 우화이다. 인문학자인 이왕주 교수에 따르면 이 우화는 훨씬 더 심오한 언어철학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그 소년은 거짓말 때문에 천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말의 박해 때문에 복수를 당한 것이다. 소년의 입술에서 학대당한 ‘늑대가 온다’는 말이 복수의 칼을 휘두른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다. 첫째는 말이 현실을 만들어내며 둘째는 그 현실 안에서 말이 스스로 무력해져버리는 것이다. 늑대가 나타난 것은 첫째의 증거고, 사람들이 소년의 외침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던 것은 둘째의 증거다.” 문제는 이 비극이 동화 속의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물론이고 인간이 살았던 모든 세상에서 조금씩은 다 이 양치는 소년의 운명에 몰려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 진(秦)나라 시황제를 섬기던 환관 조고(趙高)는 시황제가 죽자 황제의 유서를 위조하여 태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어리고 어리석은 호해(胡亥)를 내세워 황제로 옹립했다. 이후 조고는 호해를 온갖 환락 속에 빠뜨려 정신을 못 차리게 한 다음 교묘한 술책으로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한 원로 중신들을 제거하고 자기가 승상이 되어 조정을 완전히 한 손에 틀어쥐었다. 어느 날 조고는 입을 다물고 있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자를 가리기 위해 술책을 썼는데, 사슴 한 마리를 어전에 끌어다 놓고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저것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폐하를 위해 구했습니다.” “승상은 농담도 심하시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니(指鹿爲馬)’ 무슨 소리요?” 조고는 완강하게 말한다. “아닙니다. 말이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호해는 중신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니, 제공들 보기에는 저게 뭐 같소? 말이오, 아니면 사슴이오?” 그러자 대부분 조고가 두려워 “말입니다.”라고 대답했지만, 그나마 의지가 남아 있는 사람은 “사슴입니다.”라고 바로 대답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대답한 사람을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가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러고 나니 누구도 감히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조고와 같은 환관의 마지막은 무엇인가? 나중에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유방의 군대가 서울인 함양으로 밀고 올라오는 가운데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3대 황제로 옹립했으나, 똑똑한 자영은 등극하자마자 조고를 주살해버렸다. ‘양치는 소년’과 같이 거짓된 현실을 창조한 거짓말은 지속되지 못하고 징벌의 칼날로 변하여 자신을 발화한 인간을 엄벌한 것이다. 논리적이고 감성적인 말에 의한, 냉철하고 비판적인 이성과 공감과 배려의 감성이 상실되고, 난폭한 감정과 편견의 말들이 휘몰아쳤던 세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거기에는 말이 있었다. 2. ‘발화된 말’과 ‘수육된 말(씀)’의 자기희생 역사적 기독교는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역사, 교훈과 행동 등 예수의 전 운명 때문에 생겨났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교회의 선포, 선교, 신앙 진리의 내용이고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대상으로서 예수는 복잡한 인간 이해의 범주(해석학의 차원)에서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것이 바로 기독론인데, 다음과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예수가 기독교의 신앙과 실천의 궁극적 척도인가? 그는 쿠바의 게릴라 대장 체게바라인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빛나는 전태일인가,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을 위한 투쟁가인가? 그렇다면 위대한 민중 항쟁사의 가장 큰 분수령을 이룬 전봉준은 예수인가. 민중신학자의 주장처럼 민중이 예수인가. 혹은 감상적 경건주의자와 낭만적 신비주의자가 그리는 것처럼 역사적인 현실과는 동떨어진 피안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예수인가. 그는 영적이고 내적인 세계에만 관여하는 골방 주인인가.” 따라서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말은 간단하게 표현되었지만, 기독론이라는 제목 아래, 신학에서 다양하게 논의되어온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고 따르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던진 예수의 말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들려온다. 그림 <다양한 예수상>처럼 다양한 기독론과 예수상이 전통적으로 해석되어온 것이다. 따라서 ‘어떤(?)’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는 믿고 고백하며 증거 하는가? 기독교와 기독교인은 어디에서 왔는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그의 삶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과 그 답은 기독교의 존폐가 걸린 문제라 할 수 있다. 즉 신학은 이 질문에 대해 거듭 새롭게 대답을 해야 하며, 그 대답을 통해 창조적으로 세상을 변화시켜가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교회는 제 기능을 상실하고 도태될 것이다. 에밀 부룬너(E. Brunner)에 의하면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이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인간이 되었다는 성육신 사건에 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칼 바르트(K. Barth)의 기독론 진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그에게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그것은 요한복음에 기초한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있던 말씀(logos), 곧 이성과 법칙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성과 법칙이 우리 가운데에 임하셨다고 한다. 죄 없고 흠 없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말의 씀’은 ‘말씀’으로 우리말에서는 공경어가 되기도 하지만, 해석학적인 작업을 거치면 이제까지 발화된 말을 귀로 듣고 실천했던 종교가 ‘말을 씀’으로 쓰여진 문서(말씀)를 해석하는 해석학적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저 찬란한 메시지로 인하여 우리는 신학적 상상력을 되찾을 수 있으며 해석학의 바다를 향하여 노를 저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향해의 목적은 쓰여진 말들의 파편을 찾는 것이다. 이제껏 진리를 찾아 헤맨 인류 역사를 김성곤 교수는 이렇게 평가한다. “태초부터 있었던 말씀(the Word)은 곧 발화(utterance)의 힘으로 천지창조를 가능케 했던 완벽한 언어/로고스이자, 절대적인 진리/신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인간은 원래 그 말씀과 직접 교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 말씀 곧, 진리는 베일에 가려졌고, 신은 인간으로부터 떠나버렸다. 그 후 인간은 그 사라져버린 진리를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으며 그 결과로 스스로 진리를 발견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또는 자신이 신의 합법적인 후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들은 권력을 쥐고 스스로의 신념을 절대적 진리로 선포했으며, 거기에 반대하거나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단과 적 그리스도라는 죄명으로 억압해왔다. 그러나 사실 이 세상의 종말(apocalypse)과 파멸(annihilation)을 재촉하는 진정한 적 그리스도(anti-Christ)는 바로 그들 자신이었다(파멸과 연관되는 이 모든 것은 A자로 시작된다. 사실 A자는 알파벳, 곧 모든 문자의 시작이자 동시에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파멸은 다시 처음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두 계층 간의 싸움과 갈등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발화된 말’이 인류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말의 씀’으로 수육(육신을 입음)되었을 때, 그 말씀의 해석(기독론)은 다양해 졌으나, 다시금 말의 씀을 단 하나의 발화된 말로 왜곡하려는 적그리스도들 때문에 차이를 존중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교리, 배타적인 신앙이, 자기 부정이란 십자가의 종교인 기독교를 이상한 종교로 만든 것은 아닐까? 사실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알아낸 탓에 평생 모욕과 수난이 그칠 새 없었던 갈릴레이(G. Galilei)는 말년에 이르러 미쳐 돌아버렸다. 그러나 그는 옳았고, 당대의 배타적인 기독교인들은 잘못했다. ▲ 배타성의 희생자 갈릴레오, 세르베투스, 베잘리우스 진지한 성서주의와 전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세계관을 펼친 세르베투스(M. Servetus)는 법학과 의학을 전공하며 당시 과학 저서들을 번역하고 편집한 과학자였으며 개인적으로 신학을 연구한 신학자였다. 혈액 순환설을 제창했으며 ‘유대인의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른다’는 성서의 기록을 무시한 채 당시의 지리학설을 쫓은 죄로 종교 개혁자 칼뱅에 의해 불에 태워져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데, 사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담은『삼위일체론의 오류에 대하여』(1531)를 출판하여 ‘말씀’은 영원한 하나님의 자기표현 방식인 반면, 성령은 사람들 마음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활동 또는 능력이라고 주장하며 성자는 인간 예수와 영원한 ‘말씀’의 결합이라고 말했으나, 가톨릭과 개신교인들은 그의 복잡한 책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그리스도교 회복」(1546)이라는 글에서 세르베투스는 성부와 그의 아들 그리스도가 니케아 신조 때문에 모욕을 당했으며, 교회가 타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구속되었고 1553년 칼뱅에 의해 이단혐의로 재판 받아 화형 당했다(당시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이단으로 고소하기는 하였으나 화형은 반대했다). 세르베투스를 처형한 사건은 개신교도들 사이에 이단자에게 사형을 부과하는 문제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시대적 한계로 인한 장 칼뱅의 배타성’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되었다. 따라서 1903년 세르베투스가 죽은 그 장소에 장로교 교인들은 기념비를 세웠다. 그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칼뱅의 후예로써 감사한다. 우리는 시대의 오류에 대해서 회개한다.” 남녀의 갈비뼈 수가 같다는 상서롭지 못한 사실을 밝힌 근세 해부학의 대부 베잘리우스(A. Vesalius)는 교리 수호에 부심했던 교권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구태여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어육(魚肉)으로 변했던 여자와 흑인과 유대인의 박해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차이와 주변을 보는 시선은 이처럼 한때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백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고생시킬망정 한 명의 이단자를 놓치지 말라’는 중세 이단 심문소의 원칙처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롭고 낯선 것이란 그저 박해의 대상일 뿐이었다. 차이와 주변을 수용하는 성숙한 시대정신은 ‘발화된 말’이 ‘수육된 말씀’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삶의 지평에서 수육된 말씀을 발화된 말로 교리화, 획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차이나는 수육된 말씀들을 배움의 조건으로 삼을 때 성숙한 깨침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수육된 말씀은 자기희생의 상징인 ‘유월절 어린양’이다. 사실 차이와 주변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과거의 지식인들에게는, 배타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지금의 지식인들에게도 ‘앎의 새로운 지평’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종교인들에게는 ‘성숙과 깨침’을 위한 화두가 된다. 곧, 자신의 동질성을 타자에게 강조하지 않고 타자와 자아와의 차이를 박해가 아닌 배움의 조건으로, 나아가 자기희생의 태도로 접근하는 겸손이야말로 한국 개신교가 나갈 성숙의 징표가 될 것이다. 3.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그 다스림 서양 최고의 고전인 호메로스의『일리아스』첫 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자신을 모욕하자 아킬레우스는 그의 목을 쳐버리겠다며 칼집에서 칼을 뺀다. 그때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나타나 아킬레우스의 금발을 등 뒤에서 잡아당긴다. 그 순간 아킬레우스는 노여움을 삼킨다. 이성과 지혜가 분노의 불길을 제압한 것이다. 따라서 ‘분노를 노래’하는 대서사시인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이러한 지혜로운 행동 때문에 역으로 ‘분노의 다스림’에 관한 시가 된다. 태초에 있었던 발화된 말, 곧 이성과 질서가 우리 가운데 죄 없고 흠 없는 ‘어린양’으로 임했다는 것은 ‘양의 희생과 이성의 제 역할’이 4?13 총선 이후 이 땅을 바로 세울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올바른 이성으로 지록위록(指鹿爲鹿)을 발화해야 할 것이며, 분노의 불길은 지혜의 손길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본은 바로 발화된 말이 말의 씀으로 어린양 예수가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인 십자가 정신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따라서 인문학자의 다음의 외침은 참다운 말씀의 종교인 기독교인들의 외침도 되는 것이다. “누가 말에서 뜻을, 이름에서 실질을 박탈했는가. 누가 언어를 떠도는 유령으로 만들었는가. 바로 양치기 소년과 같은 거짓말쟁이들이다. 기억해두자. 우리가 해방되기 위해 진정 필요한 존재는 거짓말하는 똑똑한 지도자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양치기 소년이라는 것을.”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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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20
  • [기독교교양읽기 ⑭] ‘안식과 희망을 주는 문화운동’ 전개해야 대중음악 속에서 찾은 기독교 영성 이야기 대중음악과 기독교. 쉽게 조합하기 어려운 만남이다. 그런데 저자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대중음악을 얕보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22곡의 음악을 펼쳐 보이며 “자, 이래도 내 말이 틀렸느냐?”고 반문한다. 영미 팝송이 14곡, 한국 가요가 8곡이다. 1960년대 음악에서부터 2009년 음악까지 다양하다. 머리말에서는 역사적인 증거까지 들이댄다.‘설마’하며 대충 읽었다. 설핏 지나치다가 ‘이런 신앙고백이 숨어 있었구나!’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꼼꼼히 읽었다. 인터넷을 뒤져 음악을 들었다. 이들 음악이 내 마음속으로 성큼 새롭게 다가온다. 반전이다. 이 책의 묘미라 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아는 만큼 들린다.글을 쓰다말고 몇 시간째 음악만 들었다. 한 곡 한 곡 듣다보니 도저히 중간에 그칠 수가 없었다. 다양한 버전으로 듣기도 하고, 처음에 부른 것과 그 후의 것을 비교하며 들었다. 2003년에 U2의 보노(Bono)가 솔로로 부른 ‘원(One)’에 이어, 파바로티(Pavarotti)와 함께 부른 ‘아베마리아’를 듣고서야 겨우 음악을 껐다. 얼얼하다. 이 감동을 그대로 간직한 채 글을 써야 하는데, 나의 필력은 미진하기 짝이 없다. 아쉬움은 독자 여러분이 직접 음악을 들으며 풀기 바란다.◈ 《윤영훈의 명곡묵상》 || 저자인 윤영훈은 미국 얼라이언스 신학교와 드루 대학교에서 종교와 대중문화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 현재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빅퍼즐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문화운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문화시대의 창의적 그리스도인》 《현대인과 기독교》 《복음주의와 대중문화》 등이 있다. 이 책은 월간 잡지 〈워십리더〉에 2년여 연재했던 글을 묶은 것이다. IVP, 2016. 15,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김현호 대표는 이 책을 읽는데 김기석 목사의 《흔들리며 걷는 길》이 자꾸 생각나더라고 했다. 이 책의 부제가 ‘길 위에서 자유롭게’이다. 대중가요와 기독교를 접합하여 기독교인에게 소개하는 길이 어쩌면 ‘흔들리며 걸어야 하는 길’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문화가 대중문화로 확산되기도김길구 : “고등학생 때 신해철은 우리에게 우상이었어요.” 신해철 씨가 의료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을 때, 우리 아들이 한 말입니다. 문득 내가 아들 세대와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는 한 시대를 이끌어온 가수임을 알게 되었고, 덕분에 아들과의 세대차를 조금은 좁힐 수 있었습니다.김현호 : 인터넷에서 이들 음악을 찾아 들어가면서 이 책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너무도 멀리했던 어릴 때의 감성이 물씬 살아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소개된 음악은 대부분 시대정신을 잘 읽어낸 작품인 것 같습니다.김수성 : CCM이 무언가 하고 백과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의 약자로, ‘대중음악의 형식을 취하면서 기독교 정신을 담아내는 모든 장르의 기독교 음악’이라고 해놓았더군요.김길구 : 사실 대중음악과 교회음악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포크송을 퍼뜨린 ‘세시봉’ 멤버들은 거의 다 교회에서 노래하던 사람들이었죠. 교회 문화가 일반 대중문화로 확산된 경우라 할 수 있을 겁니다.김현호 : 이들뿐만 아니라, 대중가수들의 출신을 보면 어릴 때 교회생활을 한 이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찬양하고 보컬 활동 등을 하다가 자기의 ‘끼’나 음악적 재질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당시는 교회가 대중문화의 산실이 되기도 한 것 같습니다.김길구 : 최근 청소년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것은 교회가 청소년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교회 교육이 한편으로는 청소년들의 문화와 예술의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너무 교조적으로만 인식, 현상을 성과 속으로만 구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김수성 : 교회가 대중문화를 저급문화로 분류하는 경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문화를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로 구분하는 것도 문제지만, 미디어의 대중화로 모든 것이 대중문화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교회문화도 마찬가지죠. 좋아하는 찬송을 파일로 변환시켜 스마트폰에 넣어 다니면서 어디서나 듣는 세상입니다. #수단을 선택할 때 목회적 판단도 중요김길구 : 이 책에 소개된 노래 가사를 보면 마치 옛 선지자들이 일갈하는듯한 느낌조차 듭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적절한 음악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마빈 게이의 ‘What’s going on?’은 사랑으로 전쟁과 갈등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는가 하면,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는 하나님조차 들어올 자리가 없는 우리의 삶을 고백합니다.김현호 : 개인적으로 최근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를 많이 불렀는데, 라트비아의 민요에 가사를 붙인 번안곡이더군요. 한 러시아 가수가 이 민요를 ‘백만 송이 장미’라는 제목으로 발표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심수봉 씨가 인생의 의미와 기독교 신앙을 담은 자신만의 고백을 가사에 녹여냄으로써 감동이 더해진 것 같습니다.김길구 : 역사적으로 봐도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랫말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노랫말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음악은 시대를 불문하고 오랫동안 인기를 얻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가지는 생명력과 절대적인 사랑이 힘든 생활에서 위안을 얻고 희망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등이 그런 작품 같습니다.김수성 : 장기하와 얼굴들이 노래한 ‘싸구려 커피’를 들으면서 오늘날 취업을 비롯해 막연한 미래 때문에 힘들어 하는 청년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잖아’에서는 위정자들의 입에 발린 말에 절망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았고요. 암울한 시대에 노래하는 시인들이라는 생각이 듭디다.김현호 : 최근 한류로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걸그룹의 노래는 삶이 담보되지 않은 음악인 것 같습니다. 물론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다지만, 반짝하다가 사라지는 노래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에 비해 삶의 무게와 그 가치가 깊숙이 담긴 노래는 오랫동안 사랑을 받죠.김수성 : 최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노랫말은 상당히 직설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성세대에게는 선정적이기도 하고 퇴폐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힙합이나 랩에 빠져든 청소년도 많습니다. 교회가 청소년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수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김길구 : 그런 문제는 리처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언급했던 기독교 세계관적 입장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교나 교육을 위한 다양한 수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에 적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상업주의, 배금주의 등에 물든 문화를 걸러내는 비판적 안목도 필요하지만, 목회적 판단에서 허용할 수 없는 수단도 있다는 것입니다. 니버는 이를 ‘변혁의 문화’라고 합니다.김수성 : 일리가 있는 지적이기는 하지만, 상당수 우리나라 교회의 경우 아직도 교조적인 면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청소년이나 청년들이 갈수록 교회에서 벗어나는 현실에서 대책은 무엇인가요? #인류애를 노래하는 분위기 조성해야김현호 : 상업 문화가 판치는 현실에서, 꼭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인류애와 삶의 가치를 노래하는 분위기라도 조성해야겠죠. 교회의 문화운동이라고 할까요, 가치 존중 사상의 전파라고 할까요. 교회가 청년정신과 감성을 노래하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 먼저 시민적 성숙과 교회의 포용적 자세가 우선되어야 하겠죠. 교회나 사회 모두 역사와 문화적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화가 궁극적으로 ‘안식’을 의미한다는 스킬더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희망을 주는 문화운동’은 언제든 펼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인식을 조금만 바꾸면 될 것입니다.김수성 : 한편, 교회가 이들 대중가요를 터부시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김현호 :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타적 크리스천이 아니라 변혁적 크리스천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되었던 가수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교회로 하여금 대중가요를 멀리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김길구 :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그 사람의 말뿐만 아니라 행위나 삶의 모습에서도 경건성을 요구합니다. 그렇기에 신앙적인 노래를 불렀지만, 몇몇 가수는 그들의 삶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배척한 요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본질적인 규범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김현호 : 상업 문화가 판치는 현실에서, 꼭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인류애와 삶의 가치를 노래하는 분위기라도 조성해야겠죠. 교회의 문화운동이라고 할까요, 가치 존중 사상의 전파라고 할까요. 교회가 청년정신과 감성을 노래하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 먼저 시민적 성숙과 교회의 포용적 자세가 우선되어야 하겠죠. 교회나 사회 모두 역사와 문화적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화가 궁극적으로 ‘안식’을 의미한다는 스킬더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희망을 주는 문화운동’은 언제든 펼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인식을 조금만 바꾸면 될 것입니다.김수성 : 한편, 교회가 이들 대중가요를 터부시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김현호 :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타적 크리스천이 아니라 변혁적 크리스천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되었던 가수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교회로 하여금 대중가요를 멀리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김길구 :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그 사람의 말뿐만 아니라 행위나 삶의 모습에서도 경건성을 요구합니다. 그렇기에 신앙적인 노래를 불렀지만, 몇몇 가수는 그들의 삶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배척한 요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본질적인 규범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미국의 저명한 강연가인 제프 고인스(Jeff Goins)가 쓴 《일의 기술》(CUP, 2016)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긴 시간 동안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신국원의 문화이야기》 / 신국원 / IVP《그리스도와 문화》 / 리처드 니버 /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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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교양 읽기
    2016-05-04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⑭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다. 그리고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짓게 하셨다. 이렇게 아담을 쫓아내신 다음 하느님은 동쪽에 거룹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 (공동번역 창세기 3장 22-24절) “그때는 우리는 새로운 창조주가 되어 우리가 만든 기계인 아담과 하와가 우리 인간들이 금지시킨 선악과를 베어 물고, 기계들의 에덴동산인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그리 어색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래 전 우리 인간은 창조주에 그렇게 도전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최병학, 『현대사상과 영화이야기』 중에서) 1. 알파고의 승리 ▲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에게 알파고가 가져간 승리는, 이제 우리 인간이 기계(와 더불어 인공지능)에 관하여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이 될지 해치는 이리가 될지?)임을 가르쳐준 사건이었다.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가 <인간vs기계>(동아시아, 2016)에서 한 말처럼 “알파고의 승리는 어쩌면 그동안 경쟁자 없이 지구를 지배하던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고 말했던 마셜 맥루언(M. McLuhan)의 의수 이론(義手 理論)은 세련된 기술결정론(technological determinism)의 결정판이었다. “기술은 자율적으로 변화 한다”라는 기술결정론은 끝없이 다양해지는 욕망을 채워 주는 것을 미끼로 사람에게 계속 새로운 기술개발을 요구하고 있다. 동시에 “자율적으로 변하는 기술이 사람과 사회의 변화를 주도 한다”라는 말은 매체가 인간 존재 방식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계를 사랑하라”는 세련된 기술결정론과 맥루언의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명제는 기계의 바다 속에서 살아남기란 이러한 기계의 파도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 타는 법을 익히고 즐기는 것임을 뜻한다. 이제 바야흐로 인간 정체성의 문제는 “어떤 미디어와 결합되느냐?”가 된 것이다. 2. 혼종의 길?탈육신(disembodiment)의 시대에 전통적인 존재는 더 이상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과 결합하거나, 기계, 나아가 네트워크와 결합하게 되는데, 이러한 혼종(hybrid)을 통해 존재를 확장하며, 존재의 새로운 터전으로 사이버스페이스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혼종의 운명은 1998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스스로 사이보그(Cyborg)가 되는 수술을 감행하여, 인류 최초로 사이보그가 된 케빈 워릭(K. Warwick)을 통해서 구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이보그(cyborg)는 1950년대 말 미국의 맨프레드 클라인즈(M. E. Clynes)가 만든 용어로, 인간과 기계간의 통신을 뜻하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생물(organism)의 합성어이다. 아무튼 <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가>(김영사, 2004)에서 워릭은 미래사회에서는 기계가 인간보다 지능이 뛰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인간은 이러한 사회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더 진보적으로 미래사회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날짜: 2050년 1월 1일. 지능적인 기계(intelligent machine), 아니면 로봇이 인간에게 지구를 물려받을 것이라 예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그다지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예측이 빗나갔음은 분명히 입증되어왔다. 지구는 사이보그가 지배하고 있다. 사이보그는 새롭게 개발된 컴퓨터 네트워크 제어장치의 슈퍼 지능을 가동한다. 인간과 기계가 결합되어 업그레이드된 형태의 그것은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 지능을 사용할 수 있다. 사이보그는 강력한 팔다리와 같이 직접적인 신체 조건의 개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신적 연계 방식 체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의 두뇌는 무선장치를 이용해 직접 중앙 컴퓨터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생각만으로 네트워크에 접속되고 지적 능력과 기억을 불러낼 수 있다. 반대로 중앙 네트워크는 정보를 얻거나 임무를 수행시키기 위해 개별 사이보그를 불러들인다. 이렇게 네트워크는 하나의 통합된 체계로 가동된다. 하나의 개별적인 사이보그가 네트워크의 무선 접속 없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고, 개개의 사이보그가 없는 네트워크 또한 상대적으로 무력한 것이 된다.”영화 <로보캅>이나 <아이언맨> 등에서처럼, 인간의 정체성이 기계와 결합되는 혼종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고, 역으로 영화 <공각기동대, 攻殼機動隊>에서처럼, 정보가 신체성을 입어 인간 혹은 생물체가 되는 존재의 확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실 로봇 공학 전문가인 미국의 한스 모라벡(H. Moravec)은 <마음의 자식들>(Mind Children, 1990)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이미 완료되었으며, 미래사회는 사람보다 수백 배 뛰어난 인공두뇌를 가진 로봇에 의하여 지배되는 후기 생물사회(post-biological)가 될 것이므로, 인류의 문화는 사람의 혈육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모두 넘겨받는 기계, 곧 ‘마음의 자식들’에 의하여 승계되고 발전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바 있다. 역시 화제작 <로봇>(Robot, 2000)에서는 2050년 이후 지구의 주인이 인류에서 로봇으로 바뀐다는 대담한 논리를 전개한바 있다. ▲ 영화 <터미네이터>의 한 장면 3. 21세기 초인과 사이버 주체1990년대 말 이후 유럽의 인문학 논쟁을 이끌고 있는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배아복제를 비롯한 유전공학의 기술적 성취를 철학적 사유의 반석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그는 니체(F. W. Nietzsche)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하버마스(J?rgen Habermas)와 대립하면서 독일 철학계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가 하면, 나치즘(Nazism)과 잇닿은 궤변론자라는 악평도 받고 있다. 여러 면에서 ‘독일적’인 배경을 지닌 그의 사유는 21세기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의 기획’이라 불린다. 그는 근대적 휴머니즘의 패러다임을 비판하며 ‘포스트 휴머니즘’(post-humanism)을 주창한다. 그에게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 야만성과 투쟁해온 과정이다. 전통적 휴머니즘은 이를 위해 문자를 매개로 한 ‘길들이기’ 전략을 택했지만, ‘문자의 시대’가 끝나면서 이 방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이른바, 새로운 미디어 사회의 도래와 함께 인간의 공존이 새로운 토대 위에 서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인류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화’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쟁과 제국주의, 그리고 미디어를 통한 인간의 일상적 야수화”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슬로터다이크는 유전공학에 주목한다. 그에게 인문학적 교육이나 유전공학은 모두 ‘사육(길들임)’의 한 방식이며,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간섭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제 새로운 존재의 탄생, 혹은 인간성 창조는 현대 과학기술의 총아인 유전공학을 활용해야하며 바람직한 인간성의 기준을 설정하기 위해 철학자와 과학자의 연합이라는 ‘21세기판 초인’이 필요하게 된다.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한길사, 2004)은 말 그대로 ‘차라투스트라의 기획’으로, 자연의 과정인 선택적 탄생을 기술로 가속화하는 것이다. 영화 <가타카>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그 일례이다. 따라서 나치즘을 기억하는 현대인들은 슬로터다이크의 말을 단순히 시대착오적인 니체주의자의 궤변으로 간단히 일축하였지만, 그의 문제의식은 미국이 주도하는 21세기적 지구화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그냥 넘길 수만도 없을 것이다.동시에 생물학적 주체(Bio-I)에서 사이버 주체(Cyber-I)로 전환되어 가는 존재의 확장은 이제 디지털이 중심이 되는 존재인 ‘디지털 생물학’으로 넘어간다. 가령, 피터 벤틀리(P. Bentley)는『디지털 생물학』(김영사, 2003)에서 미래 디지털 기술이 생명의 특성을 모방함으로 기존의 모든 차원을 뛰어 넘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가령, 생물처럼 번식하고 다양하게 ‘개체변이’를 일으키는 소프트웨어가 가능할 것이다. 부여된 임무를 완수할 경우에는 생존하고 후손을 남기며, 실패할 경우에는 도태되게 함으로 소프트웨어 스스로 진화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벤틀리는 미래에 디지털 공학과 생물학이, 컴퓨터와 생물체가 매우 유사한 형태를 갖는 단계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한다. 디지털 형태의 의미소(meme)가 자체 복제를 넘어 진화하기 시작할 경우, 궁극적으로 자연계에서 생명체가 거듭해온 진화의 형태와 흡사하게 될 것이라 보는 것이다. 4. 영혼 불멸? 인간 멸망? “크리스(주인공 로빈 윌리엄스) : 이게 진짜 나요? 앨버트 교수 : 나란게 뭔데? 자네 신체? 크리스 : 어쩌면… 교수 : 그럼 신체가 없으면? 크리스 : 그래도 나죠. 교수 : 어째서? 크리스 : 생각은 할 수 있으니까. 교수 : 생각 역시 우리 몸의 일부인 뇌를 통해서 하는데? 크리스 : 하지만… 생각이란 무형의 것으로 나를 존재하게 해 주죠. 교수 : 바로 그거야. 존재에 대한 믿음. 그게 해답이야. 크리스 : 세상에… 진짜야. 교수 :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어. 생각만 하면 돼. 생각이 현실이고, 몸이란 환상이야…. 아이러니컬하지 않아?”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천국보다 아름다운>(1998)에 나오는 위 인용 대사는 플라톤의 관념론에 기초한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인간 존재란 몸은 삭제되고 정신만 있는 관념적 존재가 된다(물론 영화에서 이곳은 천국이지만). 몸의 구속을 받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확장해 나갈 수 있고, 현실의 불안과 한계를 극복하여 사멸하지 않는 세계를 찾아 나선 인간의 탐구 열정은 천국이 아닌 현실에서 천국의 모습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고대 플라톤의 이데아(idea)로부터 그 발생사적 연원을 찾을 수 있겠지만, 오늘날 사이버스페이스와 인공지능은 이러한 상황을 가능하게 하였다. 2012년부터 본격화한 딥러닝(deep learning) 이후의 인공지능은 전혀 차원이 달라졌다. 방대한 데이터(=빅데이터)를 그냥 집어넣어 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축적된 자료를 분류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알파고와 같은 기계에 지능이 생긴 것이다. 김대식은 인공지능을 ‘약한 인공지능’과 ‘강한 인공지능’으로 구분하는데, 알파고나 무인 자동차(우리는 이 무인 자동차의 아담을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맛보았다)를 같은 인공지능이 약한 인공지능이라면, 영화 <터미네이터>의 터미네이터와 같은 독립성이 있고 자아가 있고 정신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는 인공지능을 강한 인공지능으로 구분하며, “강한 인공지능은 인류를 파멸로 이끌 ‘재앙’이 될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인류보다 지적, 물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될 강한 인공지능이 판단하기에 인간이란 종이 지구에 불필요하거나 해롭다면 인류의 멸종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대식의 경고이자, 대안이다.“강한 인공지능이 어느 한 순간 인간을 놓고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지구에 왜 있어야 되나? … 만약에 제가 강한 인공지능이라면 ‘지구-인간’이 더 좋으냐, ‘지구+인간’이 더 좋으냐 하고 물어볼 거예요. 강한 인공지능 입장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구-인간’이 더 좋다는 논리적인 결론을 충분히 낼 수가 있다라는 거예요. … 약한 인공지능은 100% 실현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는 일이 이미 기계 같다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진 유일한 희망은 ‘우리는 기계와 다르다’입니다.”영혼 불멸을 추구하는 인간이 그 ‘추구’의 욕심으로 인해 ‘멸망’당하는 것이다. 처음 창세기의 신은 우리를 추방했지만, 이제 우리가 만든 제2의 아담과 하와는 두 번째 창세기에서는 창세기의 이름을 던지고 요한계시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멸망시킬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라) 확신하거나!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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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21
  • [기독교교양읽기⑬] 현대 도시인들에게는 ‘단순함’이 필요하다 “아직도 길을 찾기 위해 멈추지 않을 뿐” 이 책은 한 교회에서 30년 동안 사역한 저자가 안식의 기간 동안 이탈리아, 터키, 조지아(그루지야), 아르메니아 등에 있는 교회와 수도원 등을 순례하며 영성의 시간을 가진 기록이다. 단순히 40여 일의 유럽 여행기라 하기에는 지그시 무게감이 느껴지고, 그렇다고 철학서나 비평서라 하기에는 에세이 같이 큰 부담없이 읽히는 미묘함으로 다가온다.그는 1980년대 초 양성우 시인이 낭송한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피를 토하듯 울부짖는 “모래야 나는 얼마나 작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 나는 얼만큼 작으냐”라는 대목에서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날 많이 아팠다고 고백한다. 아직도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저자는 길을 찾기 위해 멈추지 않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안한다.책을 읽는 내내 그의 예술적 안목과 문학적 감수성에 빠져들게 한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문학적 향기도 맡을 수 있다. 그러나 순례길 곳곳에서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을 아파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영성의 끈을 놓치지 않는 신앙인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오랜만에 참으로 ‘괜찮은’ 책 한권을 읽었다는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 ◈ 《흔들리며 걷는 길》 || 저자인 김기석 목사는 청파교회 담임목사이면서 문학평론가이다. 깊이가 있는 글쓰기로 기독교문학의 새로운 층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은 책으로 《삶이 메시지다》 《오래된 새 길》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등이 있다. 포이에마, 2014. 13,8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이해한다.” 한때 유홍준 교수가 그의 책에 인용해 널리 알려졌던 말이다. 정조 때 문장가인 유한준의 글에서 따온 말이다. 김기석 목사의 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 이 말이 떠올랐다.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기독교의 뿌리에 대해서 관심 가져야김길구 정말 이 책 한권을 읽고 나서 서너 권의 책을 읽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중세의 예술 작품 감상에 이어 인문학적 소양을 과시하는가 하면, 기독교 역사와 사상, 그리고 우리 교회의 현실까지를 놓치지 않고 연결시켜 이야기합니다. 최근 부각되고 있는 ‘통섭’을 보여주는 책인 것 같습니다.김수성 저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부터 시작해서 함석헌의 ‘얼굴’까지 10여 편의 시를 곳곳에서 읊조리며 순례를 계속한 것입니다. 그 시에는 저자가 하고 싶은 말들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겠죠.김현호 저자와는 10년 가까이 알아왔는데, 그분의 서재에 꽂힌 책을 보면 마치 박물관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저도 책을 취급하지만 희귀한 책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분은 문학을 통해서 먼저 하나님을 만났고, 그 이후 신학을 했다고 밝힐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김길구 저자는 로마에서부터 순례를 시작합니다.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가톨릭의 교회와 교부들, 수도원 등을 살펴보면서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재조명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요?김현호 가톨릭교회의 부패로 인해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궁극적으로 가톨릭교회는 초대 기독교의 역사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라는 전체적인 시각으로 오늘의 현실을 보기 위해 로마를 먼저 방문한 것 같습니다.김길구 맞는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교회의 지나친 물질주의와 성장주의에 대해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것은 마치 종교개혁 이전과 비슷한 양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아름다움과 초기 교부들을 이야기하면서 그 속에 숨겨진 신앙의 본질을 이야기한 것은,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하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김수성 최근 우리나라에도 중세에 관한 서적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뭉뚱그려 ‘암흑의 시대’라고만 알려졌지만, 실상 중세에는 뛰어난 기독교 사상가와 예술가를 배출한 시대라는 겁니다. ‘기독교’라는 그늘에 가려 우리 사회에서는 이에 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언제까지나 흔들리며 길을 걷는 순례자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답 없는 삶이라 해도 묻고 또 묻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사진은 프랑스 떼제공동체에 있는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출처: http://dowym.com). 지금부터라도 본질로 돌아가야 김현호 저자가 머리말에서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부하들이 ‘로터스’ 열매에 빠져 그 섬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했듯이, 우리 교회도 이제는 본질의 문제로 돌아가야 합니다. 특히 프란체스코의 ‘청빈’ 이야기는, 우리 교회의 현실에서, 언제 들어도 가슴이 울울해집니다.김길구 평생 ‘벌거벗은 몸’으로 살았던 프란체스코가 묻힌 조그마한 교회를 방문한 후 저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길이 9미터, 폭 4미터에 불과한 작은 예배당이지만 이곳은 결코 작지 않다.” 그리고는 “문제는 건물이 아니라 정신이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가 반문하게 합니다.김현호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읽을수록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책입니다. 여행에 관한 정보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정보들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읽다보면 자꾸만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그러면서 부끄러워지기 때문입니다.김수성 그래서 책 제목에 ‘흔들리며’라는 말을 넣은 것 아닐까요? ‘흔들리면서도 결국 제자리 찾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겠죠.김현호 현대인들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믿음의 길로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익숙함이야말로 편한 것이지만 둔감해지는 것’이고, ‘길들여지다는 것은 곧 영혼의 타락’이라는 말을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두드러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소외되었던 사람들을 부각시키려한 노력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거대 교회 권력에 억눌려 역사에 묻힌 사람들, 지금도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고난받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잊지 않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볼로냐 협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주거, 노동, 식생활 해결을 위해 조직한 협동조합이 지금은 4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김수성 2001년 아씨시에서 열렸던 ‘평화를 위한 기도 모임’에서 채택되었던 ‘평화를 위한 십계명’을 읽었습니다. 이것을 아직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는데,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김현호 ‘한가함’에 대한 언급도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분주함에 길들여져 한가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철학자는 이런 분주함은 ‘폭력적’이고 ‘자기 착취’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김수성 기도원을 소개하는 글을 보다보니 몇 년 전에 봤던 ‘위대한 침묵’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생각납디다. 기도와 침묵, 예배와 노동으로 이어지는 수도사들의 일상이 보는 내내 얼마나 무겁게 짓누르는지 몇 번에 걸쳐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책을 읽으면서 그 다큐를 다시 봤는데, 여전히 힘겹더군요. 분주함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성과 청빈의 생활화 떼제공동체 김길구 저자는 순례를 떼제(Taize)공동체에서의 생활로 마무리합니다. 떼제의 생활은 한마디로 ‘단순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떼제 찬양의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물을 찾아 어둠 속에서 방황합니다. 목마름만이 우리를 앞으로 나가게 합니다. 목마름만이 우리를 앞으로 나가게 합니다.”김현호 떼제공동체는 기업이나 독지가의 후원, 가족의 유산마저도 일절 받지 않고 오직 노동으로 벌어들인 것만 가지고 생활하고 봉사한다고 합니다. 이 정신은 프란체스코의 ‘청빈’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김수성 개인적으로 부산 인근에 이런 공동체가 하나 있으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종교를 초월하여 지극히 단순한 생활, 적당한 노동을 하면서 지친 영혼을 달래고, 영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곳이 될 것입니다.김현호 떼제공동체는 예수님께서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풀었다는 믿음에서 출발했지요. 저도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을 들고 유럽을 기웃거리고, 떼제공동체에 들어가 한동안 머무르고 싶습니다.김길구 우리에게 절실한 모범을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템플스테이가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목마름과 단순한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참가하는 기독교 신자들도 제법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어떤 길로 나가야 할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조금 특별한 책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대중음악 속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찾고자 노력한 《윤영훈의 명곡묵상》(IVP, 2016)입니다. 긴 시간 동안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1, 2》 / 공지영 / 분도출판사《일상순례자》 / 김기석 /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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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교양 읽기
    2016-04-07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⑬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1.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세상에서 전쟁 이야기만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이 바로 전쟁이다.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던 폭력성과 욕망의 표출, 그리고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생존하려는 인간 의지의 분출, 전쟁은 바로 이러한 욕망과 의지의 실험장이자 대결장이다. 기본적으로 전쟁은 국가가 하는 일이고, 전쟁은 살인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발생에는 언제나 전쟁과 함께 폭력이, 폭력과 함께 변절자들이, 변절자들과 함께 꼭 희생이 따른다. 동시에 전쟁은 사회적 약자인 어린아이와 여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온다. 일본군이 ‘군대의 효율성 때문에 군위안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한홍구 교수는 군위안부는 사기 진작도 진작이지만, 병사들이 성병에 걸리는 걸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가령, 병사 하나가 성병에 걸리면 그 한 병사만 기동을 못 하는 게 아니라, 그이를 들쳐 엎고 가야 할 여럿이 있어야하기에 성병에 걸려 걷지 못하는 병사가 한 명만 있어도 네댓 명의 전투력 손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성병을 방지하면 몇 십만 명을 더 징병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보는 거죠. 그런데 남자 몇 십만을 징병하는 대신에 총 들고 싸울 일 없는 여자 몇 십만을 들여보내면 군대를 100만 명, 200만 명 더 징병한 셈이나 마찬가지겠죠. 인간을 생각하지 않고 효율성을 따지다가 보니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특강: 한홍구의 한국현대사 이야기』, 한겨레출판, 2009) 성서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눅15:3-6)에서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우리의 99마리 양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전쟁은 효율성 면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이기면(지면 정반대이겠지만) ‘땅과 재물은 물론이고, 노예를 획득할 수 있는 고대 전쟁’으로부터 현대의 ‘정의로운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변화를 인류의 삶에 그 흔적을 남겼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물론이고 종교와 철학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곧, 인류의 문명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인 것이다. 성서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성서의 출애굽에서 가나안 정착사, 이후 왕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아니 예수 당시까지도 끊임없이 전쟁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도 전쟁은 그 자체로 끔찍한 폭력이다. 따라서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의 다음의 말은 타당하다.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2. 68,452,000명 대 134,756,000명: 입다의 딸과 레위인의 첩 이야기 “여성에게 조국은 없다”라고 말한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옳았다. 전쟁은 여성을 무국적자로 만들며 희생을 요구한다. 구약 사사기의 ‘입다의 딸’과 ‘레위인의 첩’이 이에 해당 된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12부족이 국가로 발전해가는 단계인 가나안 정착과정에서 벌어지는 전쟁 이야기이다. 그런데 성서는 이러한 전쟁으로 인해 희생당하는 여성들을 감추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입다는 아버지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로 나중에 본처의 아들들에게 쫓겨나 돕 땅에 거주하며 잡류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암몬이 이스라엘을 칠 때 입다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요청으로 이스라엘의 장관이 되어 전쟁에 나서게 된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쟁에서 입다는 서원을 하게 된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사사기 11:30-31).” 그러나 전쟁에 이기고 미스바로 돌아왔을 때 입다의 무남독녀가 소고를 잡고 춤추며 영접하였다. 그 결과 딸은 죽임을 당한다. 입다의 전쟁은 자신의 승리(장관이 되기 위해)를 위해 타인의 목숨을 놓고 하나님과 거래를 한 것이었으나, 여성인 그 딸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렇듯 전쟁은 여성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사실 전쟁법은 가급적 적의 군인만을 죽이고 무장하지 않은 일반 시민을 죽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반 병사보다는 시민들이, 죄 없는 백성들이, 힘없는 여성과 아이들이 더 많이 살해당한다. 국가에 의해 살해된 외국인의 수는 68,452,000명이고, 자국민의 수는 134,756,000명(20세기에 한해서)이다. 이것은 군대가 국민을 외국의 적으로부터 지킨다는 명분을 의심하게 만든다. ‘테러방지법’의 속뜻이 국민을 감찰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이듯, 전쟁은 지배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기 위한 최초이자, 최후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입다의 딸은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입다의 ‘부당 거래’를 폭로한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11:36)” 전쟁의 극단적인 폭력의 한가운데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사사기 19장에는 이스라엘 동족간의 전쟁인 ‘베냐민 전쟁’의 기원에 관해 설명해주고 있다. 에브라임 산지의 어떤 레위인이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았으나,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레위인은 첩을 찾아 베들레헴으로 가서 데리고 돌아오다 베냐민 지파의 땅인 기브아에서 한 노인(에브라임 사람으로 기브아에 거주하는)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그날 밤 그 성의 불량배들이 노인의 집에 찾아와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22절)’고 한다. 그러나 노인은 그들에게로 나와서 말한다.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19:23-24)”고 했으나, 무리가 듣지 않았다. 남성들의 폭력과 음행에 여성은 한낱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레위인은 자기 첩을 그들에게 끌어낸다. 그리고 벤야민 지파 사람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고 밤새도록 능욕하다가 새벽에 놓아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죽었다! ▲ 죽임을 당한 레위인의 첩 이렇게 죽임을 당한 첩을 레위인은 나귀에 싣고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 시신을 열두 조각 내고 이스라엘 각지파마다 보낸다. 이후 이스라엘 자손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미스바에서 모여 벤야민 지파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동족 상잔은 참혹했고(“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 20:28), 베냐민 지파는 멸절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한 지파의 멸망을 두고 볼 수 없어 ‘야베스 길르앗 여자들’과 ‘실로의 여자들’을 빼앗고 납치하여 베냐민 지파의 후손을 잇게 하였다. 베냐민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여성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죽임을 당하고 납치를 당하고, 짓밟히는 존재인 것이다. 3. 거룩한 전쟁?: “3차 세계대전에는 어떤 무기가 사용될지 몰라도, 4차 세계대전에서는 돌과 방망이로 싸울 것이다” 구약성서의 “야훼는 전쟁의 용사(출15:3)”라는 말에 대한 잘못된 반응이 세 가지 있는데, 첫째 회피하거나, 아니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반응이 있고(대부분 진보적인 평화주의자가 이에 해당될 것), 둘째 이러한 전쟁신 관념을 근거로 군사행동 내지는, 혁명과 테러의 정당성을 찾거나(극단적인 근본주의자나 보수주의자, 그리고 편향적인 진보주의자가 이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 이미지와 대조하여 구약의 하나님의 이미지를 ‘전쟁 용사’로 비하시키며 대립시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초대교회의 이단인 마르시온(Marcion, 85~160)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복음서 중에서 구약의 하나님과 관련된 부분들을 삭제하여 누가복음과 바울의 10서신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의 용사로서 야훼의 ‘거룩한 전쟁’ 이데올로기를 김이곤 교수는『출애굽기의 신학』(한국신학연구소, 2003)에서 ‘눌림 받는 자를 변호하고, 억압자로부터 피억압자를 해방시키는 해방 이데올로기’로 본다. 곧,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사를 ‘정복설’에 따라 이해하고, 구약의 거룩한 전쟁 이데올로기를 지배 이데올로기적 전쟁 이념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은 성서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관점이며, 오히려 알트·노트학파(The Alt-Noth School)의 평화적 ‘이주 가설’과 멘덴홀(George E. Menderhall)과 갓월드(Norman Golttwald)의 소외된 계층의 반란 및 ‘혁명 가설’¹에 근거하여,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해방 이데올로기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약자(히브리인)를 강자(애굽)로부터 해방시키는 이러한 야훼의 해방 의지는 ‘고난의 떡을 먹고 희생의 피를 마시는’ 신약의 십자가 사건과도 연결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야훼의 해방 역사는 ‘인간의 전쟁 참여(신인협력사상)’와 폭력수단의 사용을 거부한다. 서두에 인용한 출애굽기 14장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대신 싸우시니 인간은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신인협력을 부정하는 것은 세속 왕권을 부정하며 ‘야훼의 유일한 왕권 이념’과 ‘야훼에 대한 절대 배타적인 신뢰’로 이어진다(이렇듯 성서의 배타성은 ‘다른 종교 자체’에 대한 배타성이기 보다는 ‘세속 왕권과 지배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에 복종하는 종교’에 대한 배타성이다). 기원전 8세기 시리아와 에브라임이 반 아시리아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유다를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유대 땅과 아하스 왕의 마음이 바람에 휩쓸린 수풀처럼 흔들려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이사야는 야훼의 말을 이렇게 전한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사7:4-9).” 오직 야훼, 오직 예수만인 것이다. 바울 사도도 전쟁을 이용하는 권력자와 그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잘 간파하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세상에 약자를 위해 강한 자를 무너뜨리시는 야훼의 거룩한 전쟁은 이렇게 지금의 전쟁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말이 귓가에 선하다. “3차 세계대전에는 어떤 무기가 사용될지 몰라도, 4차 세계대전에서는 돌과 방망이로 싸울 것이다.” 4.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이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죄의 문제: 시민의 정치적 책임』 (엘피, 2014)에서 “죄에는 4가지가 있는데, 첫째, 법률가의 관심사인 법적인 죄, 둘째, 인간의 운명에 공명하고 예술가적 인간에게 영감을 주는 형이상학적 죄, 셋째, 윤리학자나 정치철학자들의 사유를 진작시키는 도덕적 죄와 정치적인 죄”라고 한다. 적용을 해보자. 가령, ‘법적인 죄’는 소수의 독일인 전범들, ‘정치적인 죄’는 독일 국적자 시민 전체, ‘도덕적 죄’는 나치의 만행을 방관한 독일인들을 포함한 유럽인들, 그리고 ‘형이상학적 죄’는 수용소 생존 유대인을 포함한 인류 전체로 넓어진다는 것이다. 권력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 때문에 우리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의와 인권을 실현하는 권력을 지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서는 이것을 야훼의 거룩한 전쟁이라고 본다. 따라서 야스퍼스에 의하면 정의에 봉사하는 의미에서 권력투쟁에 함께 나서지 않는 것도 ‘정치적인 근본 죄이자 도덕적 죄’가 된다. 야스퍼스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이비 교리와 ‘나만 무죄’라는 속물적 윤리 모두를 배격한다. (…) 침묵하는 태도 또한 ‘가면’이다. (…) (죄와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회피적인 태도에서 자라난 마음은 은밀하고 무해한 욕설로 해소되고, 냉혹한 불감증, 광적인 격앙, 표현의 왜곡을 통해 무익한 자기소모에 이른다”고 말했다. 맹자도 이렇게 말한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이다.” 불의한 권력을 따를 것인가? 오직 예수를 따를 것인가? 믿음은 결단에서 시작된다! 각주)-----------------1) 멘덴홀은 히브리인의 가나안 정복을 농민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이스라엘에서 열두 지파 조직이 시작되던 초기에는 통계적으로 중요하게 기록할 만한 팔레스타인 정복은 없었다. 거주민들의 급격한 대치가 일어났던 것도 아니고, 대량학살이 벌어졌던 것도 아니며, 왕정 행정지도자들에 대한 불가피한 축출을 제외하고는 본토 거주민들에 대한 대규모의 축출도 없었다. 요컨대 그 동안 일반적으로 알려져 왔던 그런 뜻의 팔레스타인 정복은 실제로 없었다. 그 대신에 다만 사회-정치적 과정에만 관심을 갖는 일반 역사가들의 견지에서 본다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은 농민들이 가나안 도시국가들의 결속된 조직망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일종의 농민혁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George E. Menderhall, “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 The Biblical Archaeologist Reader, vol.3(1970), p.107. 여기에 동의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정복 가설’, ‘이주 가설’, ‘혁명 가설’ 가운데 어느 것을 받아들이고 어느 것을 거부하느냐는 것보다, 이 세 가설들이 저마다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과 관련한 다양한 모습들 가운데 하나씩 그 배경을 밝혀주는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최병학 목사 경성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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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1

이단 검색결과

  • [신천지 회심자]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있으니 절대 이단에 속일 없다고 생각했다” 모태신앙으로 목회자 가정의 자녀인 K양은 주일학교 때는 성경암송과 성경고사로 전국 어린이 대회에서 상을 받았을 만큼 누구보다 성실히 예배생활을 지켜왔다.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선교단체에 들어가서 리더로 섬기고 대표단과 간사로 추천 받을 정도로 열심히 활동을 했다. 그런데 대학교 3학년의 어느 여름날, K양은 신천지와의 악연이 시작됐다. 도서관 앞에서 자신을 심리학과 시간 강사라고 소개하며 논문자료를 위해 설문조사 중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도서관 앞이었고 교수라는 말에 K양은 의심 없이 설문에 응했다. 며칠 뒤 그 여교수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교수는 K양에게 조금만 지도하면 아주 발전 가능성이 큰 사람이라며 더 조언을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K양에게 자신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와 같은 아이들을 돕기 위해 무료봉사를 하고 있으며 천주교인이라고 설명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여교수는 천주교인이 아니라 신천지인이었고, 교수도 아니고 심리학과조차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K양은 그 여교수라는 사람에게 속아 심리 상담을 시작했고, 어느 순간 종교이야기가 나왔고 자연스럽게 성경공부로 이어졌다. 그 당시 K양은 신천지가 이단이며 교주이름이 이만희라는 것, 심리 상담을 통해 접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포교법이 이렇게까지 치밀하고 여러 사람을 동원해 자신의 나이와 이름, 직업까지 모두 속이며 활동한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K양은 자신이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고 있으니 절대로 이단에 속을 리가 없다고 자만했다. 그러나 신천지의 독약은 서서히 K양에게 스며들었다. K양은 신천지의 재밌고 은혜로운 말씀에 정신없이 빠져 들어갔다. 어느덧 6개월의 센터과정을 졸업했고, 그곳이 신천지임을 알게 됐지만 K양은 신천지 교회로 가게 됐다. 그러나 목사의 딸인 K양이 신천지 교회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리기란 정말 막막한 일이었다. 계속해서 고민하던 K양에게 신천지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가출을 할 것을 권유했고,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신천지를 오해해서 핍박하고 있지만 신천지가 완성되는 그때에는 가족들이 다 이해하고 오히려 고맙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만약 K양이 신천지 신앙을 지키지 못하면 K양과 가족까지 모두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며 계속해서 가출하도록 설득했다. 그리하여 K양은 괴롭지만 결국 가출을 하게 됐고 가족을 위해 비장한 각오로 신천지 생활을 하게 됐다. 신천지에서의 생활은 군대와 같았고, 마치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았다. 또한 철저하게 이기적이었다. 영혼을 사랑하기 보단 자신들의 실적과 데이터를 위해서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K양의 삶은 점점 메말라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던 중 K양의 마음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인터넷으로 신천지에 대해 반대하는 자료를 검색했고, 고민 끝에 신천지에서 나와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또 하나의 난관에 부딪혔다. 신천지가 아니란 생각에 나왔지만 다시 하나님을 믿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너무나 지쳐있었고, 신천지는 틀렸지만 신천지에서 배운 교리만큼은 기존교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그런 K양에게 신천지에 대한 의문을 풀기위해 이단상담실을 함께 찾아갈 것을 간곡하게 권유했다.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신천지 교리가 깊이 박혀있었기에 끊임없는 의문과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치고 올라와 K양의 마음속은 전쟁터와 같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상담을 받으며 신천지의 비유풀이와 실상들이 하나도 맞는 것 없이 틀렸으며, 온갖 이단들의 교리를 혼합해놓은 것임을 확실히 알게 됐다. K양은 신천지에서 배운 교리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다시금 하나님께 나오게 됐다. K양은 자신의 간증을 통해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조금이나마 줄고 가정과 교회가 더욱 경각심을 가져 안전하고 더욱 튼튼한 울타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이단
    • 신천지회심자
    2016-07-06
  • [신천지 회심자] “상담을 하면 신천지에서 나올 수 있다” 중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찬양단 리더를 맡았고, 고등부 학생회장까지 했던 S군은 서울로 대학진학을 하면서 새 교회를 찾아야 했다. S군은 대학생활을 하면서 아는 지인이 있었던 CCC에서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S군은 자신이 고등학생 때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생각을 하게 됐다. 예전처럼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교회만 출석하는, 자유스러워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예전처럼 돌아가야지’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때 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길에 한 여성이 S군에게 말을 걸어오면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 여성은 자신을 작가라고 소개하고 연극에 쓸 소재를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몇 가지 질문을 하던 여성은 S군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그냥 가볍게 도움을 주는 거라고 생각한 S군은 의심 없이 연락처를 건네주었고, 며칠 뒤 두 번째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남을 가졌다. 그 여성은 S군에게 어떤 성격인지 알아보기 위해 심리테스트 같은걸 한다면서 애니어그램을 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심리상담 후 자연스럽게 종교 이야기를 하게 됐고, 신앙의 회복을 위해 성경을 같이 나누기로 했다. 같이 성경을 나눈 곳은 신천지 위장교회였다. 그곳에서는 성경공부만 한 게 아니라, 연극을 만들어 공연을 하거나 일반 교회에서 하는 여러 가지 행사를 했다. 그래서 신천지 위장교회라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공부를 계속했던 S군은 4개월 뒤에 그곳이 신천지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S군은 신천지 수료식을 하고 신천지에 들어가 전도활동도 시작했다.1년 뒤 S군은 부모님에게 신천지라는 것을 들키기 됐다. 부모님에게는 신천지에 안 간다고 거짓말을 한 뒤 몰래 이메일을 통해 신천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의논했다. 그러나 그 거짓말 또한 며칠이 지나지 않아 부모님께 들키게 됐고, S군은 부모님의 설득에 의해 이단상담실을 찾았다. S군은 신천지의 말씀이라면 어디에서, 어떤 말을 들어도 이기고 나올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상담을 하면서 신천지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S군은 상담을 받기만 하면 신천지를 나올 수 있는데,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이런 기회가 없다는 것이 참 아쉽다고 말했다. 지금이라도 그곳에서 나오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S군은 신천지를 한국 땅에서 없애는데 앞장서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 이단
    • 신천지회심자
    2016-06-02
  • [신천지 회심자] 영어공부로 시작된 신천지 교육 2013년 여름,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가 영어를 가르쳐준다며 한 언니를 소개받은 A양. 토익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터라 그 언니에 대한 신뢰가 며칠 만에 생겼다. 그렇게 토익 공부를 가르쳐주던 언니가 갑자기 성경도 함께 배워보지 않겠냐고 권유했다. 처음에는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영어를 잘 가르쳐주는 언니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었던 A양은 거절하지 못했다. 또한 친한 친구와 같이 배운다는 안도감에 부모님께는 영어 스터디 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센터를 다녔다. A양과 친구는 같은 무교인데도 불구하고 친구가 너무 잘 믿는 모습에 괜한 승부욕이 생겼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공부해 A양은 센터에서 치르는 시험은 항상 100점을 맞았고 학교성적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결과 학교 성적은 많이 떨어졌지만 센터시험은 잘 쳤고 A양은 오히려 이를 뿌듯해 했다. 그렇게 6개월 과정을 마친 A양은 이 곳이 신천지임을 알게 되었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A양은 신천지 모임에 빠짐없이 나가고 대중교통이 끊길 때까지 열심히 신천지 활동을 했다.그 해 신천지에서는 9월에 만국회의를 한다고 했고 청년들은 꼭 카드섹션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특히 아직 전도하지 못한 자들은 이번이 하늘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A양은 이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카드섹션에 참여하게 되었다. 카드섹션 연습은 너무 힘들었다. 한번 연습할 때 기본 세 시간이고 야외에서 연습할 때는 햇볕이 너무 쨍쨍해서 피부가 다 탔다. 그래도 한번 시작했으니까 끝까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견뎠다.어느 날, 부모님에게 발각이 된 A양은 끝까지 신천지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아시는 부모님은 상담을 받을 것을 권유하셨다. 신천지에서는 상담 받으러 가면 성경적으로 얘기를 하나도 안하고 세상적인 얘기만 한다던데 상담을 받으러 가보니 신천지인들보다 훨씬 성경을 잘 알고 있어서 A양은 놀랬다. A양은 첫날 상담 받으러 갈 때 신천지에서 배운 말씀으로 이겨야겠다고 갔지만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서 충격을 받았고, 이에 계속 우기며 화를 냈다. 이틀째, 3일째 상담을 듣자, A양은 상담실에서 듣는 말씀이 맞았고 분별을 하기 시작했다. A양은 친한 친구도 거기에 빠져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힘들고 그 친구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됐다.
    • 이단
    • 신천지회심자
    2016-05-20
  • [신천지 회심자] “말씀이 맞으니 신천지도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 약 2년간의 신천지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돌아온 J양을 만났다. J양은 어린 시절 친가 가족들의 전도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매주일 교회를 다녔고, 시간이 흘러 타 지역에서 대학 생활을 하며 교회와 조금씩 멀어지게 되었다.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J양은, 교회와 멀어져 생활하는 것도 양심의 가책이 되었고, 지금 당장 죽으면 지옥에 가게 될까봐 항상 두렵고 괴로웠다고 말했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알게 된 교회 성도와 한달간 성경공부를 한 뒤, 정식적으로 6개월 정도 성경공부를 하면 절대 흔들리지 않는 복음과 진리와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 끌려서 J양은 센터를 다니게 되었다. J양은 센터에서 배우는 말씀이 너무 재밌고 참 진리를 알아가는 것 같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센터라는 곳이 신천지인줄 몰랐지만 3개월 정도 공부 후에, 신천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부터 신천지가 이단이라고 알고 있었던 J양은 처음에는 걱정스럽고 놀랐지만, 말씀이 맞으니 신천지도 맞을 것이라 생각하며 더 애착을 갖고 열심히 다녔다. 신천지인이 된 J양은 친구들도 전도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가족들도 전도를 했다. 우연한 계기에 J양의 가족들이 센터의 실체와 J양이 먼저 신천지로 전도되어 가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J양의 가족들은 신천지인 것을 알게 된 이상 센터에 가지 않았고, J양도 가족들의 도움으로 신천지에서 빠져나와 상담소에서 상담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 J양은 상담을 듣지 않으려했지만, 자신은 진리를 가진 사람이니 말씀으로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상담소에 갔다. 한 번, 두 번 상담을 받으면 받을수록 J양은 자신이 너무나 무지하고 교만했으며, 얼마나 가족들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교육을 듣는 시간동안 가족들이 항상 J양 곁을 지키며 함께 했다. J양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인도하심을 깨닫고 구원의 확신도 얻게 되었다. J양은 신천지라는 이단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고 가족들의 사랑과 주위 분들의 기도로 된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도 하나님과 교제하고 전국의 이단 상담소와 아직까지 이단에 빠져있는 하나님의 예정된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 이단
    • 신천지회심자
    2016-04-21
  • [신천지 회심자]“교회에서 한 번도 이단 대처방법 및 예방교육을 받은 적 없어” A양은 고등학교 친구를 통해 소개받은 선교사와 신천지 공부를 하고 신천지에 들어갔다. 신천지에서 여러 가지 임원을 맡으면서 열심히 신천지를 생활을 하다가, 부모님께 발각이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신천지에서는 A양에게 가출할 것을 권유했다. 부모에게 전화를 할 때는 공중전화로만 하게 했고, 기존 핸드폰은 없애고 다른 사람의 명의로 새 핸드폰을 하라고 했다. 가출을 한 A양에게 신천지는, 혼자 자취를 하고 있는 기존의 신천지인을 소개시켜 같이 살게 했다. 한 달이 지나서 A양은 신천지에게 다시 집에 들어가겠다는 의사를 표현하자, 신천지는 가출한 지 2년 정도는 지나야 부모가 포기한다며 가출한 A양이 집에 들어가는 것에 반대했다. 이에 A양은 신천지를 오히려 설득했고, 다시 집에 들어가서 신천지를 다니게 되었다. 집에서 신천지를 다니던 A양은 가족의 설득에 의해 이단상담실에서 상담을 받게 되었다. 신천지가 완벽하고, 말씀으로도 틀린 것이 없다는 100%의 확신을 가지고 있던 A양이었지만 상담을 통해 신천지 교리의 모순점과 잘못된 점들을 확인하고는 신천지가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신천지를 탈퇴했다. 신천지에서는 A양이 의아해하고 궁금한 것들에 대해서 다시 설명을 해주겠다며 설득을 했지만, 신천지의 허황된 교리를 알게 된 A양은 뒤돌아보지 않고 신천지를 나왔다. A양이 신천지를 탈퇴하자, 신천지는 A양의 동생이 일하는 직장 앞에서 ‘강제개종 수하 노릇 그만하라’는 문구로 1인 시위를 하면서 신천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A양의 동생에게 피해를 주려는 행동을 했다. 결국 A양의 가족들은 경찰에 허위 사실로 신천지를 고소했고, 신천지인들의 반성문과 다시는 이러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고소를 취하했다. 신천지는 신천지인들에게는 사랑을 베풀고 친절하지만, 신천지로 미혹하다가 실패된 사람이거나 신천지를 탈퇴한 사람들에게는 냉정하고 불친절하게 바뀐다. A양은 모태신앙이지만 한 번도 교회에서 이단에 대한 대처방법 및 예방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신천지라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 한 번이라도 교회에서 이단 예방 교육이 있었더라면 신천지에 들어갈 확률이 낮았을지도 모른다. 각 교회에서는 신천지의 공격적인 접근방법과 대처법에 대한 예방교육을 하는 것이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지키는 방법이라고 A양은 말했다.
    • 이단
    • 신천지회심자
    2016-04-07
  • [신천지 회심자] “어려운 말씀이 쉽고 논리적이라 좋았다” 모태 신앙으로 자라 기독교 대학교를 졸업한 A양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A양이 형식적인 신앙을 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며 지내던 22살의 어느 주일 예배에서 A양은 신앙에 대한 큰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존재가 당연했지만 성경을 읽어도 이해가 안 되고, 문체도 어렵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그저 멀게만 느껴지고 추상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답답했다. 교회 설교와 말씀 프로그램, 수련회에서도 이 답답함을 해결해주지 못했다.또 A양은 당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한창 하고 있었다. 전과를 생각하기도 했고 미래를 생각하며 편입을 생각하기도 했던 어느 날, 너무 답답한 나머지 시내에 있는 한 공원에서 바람 쐴 겸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20대 후반 쯤 되어 보이는 여자 두 명이 다가와서 인도로 단기선교를 간다고 하며 말을 걸어왔다. 중학생 때 일본으로 단기선교를 다녀온 경험이 있었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었던 A양은 마음의 문을 열고 기독교인이라는 동질감을 느끼며 그들과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A양에게 이미지 메이킹을 해준다고 했고, 그 이미지 메이킹은 외적인 모습이 바뀌어도 결국 내적인 모습이 바뀌어야 한다며 내적 이미지 메이킹으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항상 어려웠던 말씀이 쉽고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기초부터 배우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것이 신천지 교리의 시작이었다. 6개월 후 A양은 신천지로 입교해서 팀장으로 일하며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 까지, 학교가지 않는 날이면 하루 종일 센터에 있었다. 그러다가 부모에게 발각이 됐고, 부모의 강한 설득 끝에 상담실을 찾게 됐다. 첫째 날, 상담을 받으려면 사인을 해야 한다는 말에 신천지에서 절대 하지 말라고 했지만 여기 온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마음에 사인했고 상담을 받았다. 절대로 신천지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단의 계보와 여러 가지 비리, 덕이 되지 못하는 이만희 씨의 행적에 지금까지 신천지에서 보낸 시간들이 아깝다 생각이 들었고 신천지를 탈퇴했다. A양은 “3년에 걸친 신천지 생활을 정리하고 일상으로 돌아왔으며 거기서 빼앗긴 3년의 시간을 교훈삼아 앞으로의 삶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말했다.
    • 이단
    • 신천지회심자
    2016-03-24
  • [신천지 회심자] "신천지 탈퇴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 2012년 친구를 통해 심리상담사를 만나게 되어, 그 상담사를 통해 신천지인 줄 모르고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된 B군은 모교회에서 찬양인도를 하고 있었기에 영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학교 공부에 소홀해 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성경을 하나씩 알아간다는 기쁨은 컸고, 3개월이 지나서 신천지인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신천지 교리에 세뇌된 후였기에 신천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B군은 ‘신천지에 가는 것을 방해하면 가족도 인연을 끊을 수 있다'는 마음과 '신천지에서 나가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신천지에서는 활동의 모든 부분을 보고하고, 통제 받아야 하는 부분이 힘들긴 했지만 신천지에서 나오는 것은 지옥 가는 것이라는 그 두려움 때문에라도 나올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B군은 가족들에게 신천지 신도라는 것이 발각이 되었고, 가족과 옥신각신 하는 가운데 이단상담소를 가게 되었다. 신천지에서는 상담소에 가면 감금, 폭행을 당하니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신천지의 진리로 싸워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상담실에 갔다. 그러나 상담소는 신천지가 말했던 감금과 폭행은 전혀 없었고 모든 것을 성경으로 반증해 주었다. 2시간도 되지 않아서 B군은 1년여 동안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다. 상담소에서의 공부를 통해서 B군은 올바른 성경관과 진심어린 찬양, 눈물의 기도를 다시 회복하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B군은 자신과 같은 신천지 성도들은 한결같이 다 착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단지 잘못된 교리에 사로잡혀 있는 피해자들이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그들이 신천지의 잘못된 점을 알고 나올 수 있도록 각 교회에서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 이단
    • 신천지회심자
    2016-02-25
  • [신천지 회심자] "교회의 사랑 회복과 진실성 회복이 필요" C군은 대학시절 길을 가던 중, 자칭 심리학과 대학원생을 만났다. 그 대학원생은 졸업을 위해 논문에 사용할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하다며 성격테스트를 부탁한다고 했다.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대학원생을 만나 3회 테스트를 해주었고, 마지막 애니어그램이라는 테스트를 하고 결과를 듣게 되었다. 그 대학원생은 C군에게 “성격이 긍정적이라 좋다. 그러나 문제가 닥쳤을 때는 회피하는 스타일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경적으로 클리닉을 받아야 성장할 수 있다”라고 했고, 이 말에 C군은 그 대학원생이 소개시켜 준 사람과 성경을 공부하고 신천지에 갔다. 신천지 생활을 1년 넘게 하던 중 부모님에게 발각이 되었고, 이에 C군은 다시는 안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6개월을 몰래 다시 신천지 생활을 했다. 6개월 뒤 또다시 부모님께 들켰을 때에는 신앙의 자유가 있으니 자신의 신천지 생활을 인정해달라고 부모님께 간곡히 부탁을 했다. 이에 부모님께서는 C군에게 ‘네가 믿는 진리가 맞다면 상담실에 가서 말씀으로 싸워 이기라’고 하셨다. 그리고 성경에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니 네가 말씀을 믿는다면 부모 말에 순종하여 상담을 받아보라는 말씀에 C군은 상담을 받기로 결정했다. 처음 상담을 받을 때는 부모님 때문에 억지로 듣는 상담이라 마음이 좋지 않았고 상담실에 대한 불신이 컸다. 그러나 상담을 받으면서 신천지의 잘못된 점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완벽해보인 신천지의 진리가 허점이 있고 틀린 부분을 확인하면서 C군은 신천지를 탈퇴했다. C군은 우리 기성교회에 사랑과 진실성이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기성교회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사랑을 신천지 교인들에게서는 느꼈다고 한다. 비록 신천지 교리가 틀려서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불쌍해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기성교회가 사랑과 진실성을 회복한다면 신천지에 빠질 확률이 적을 것 같다고 C군은 말했다.
    • 이단
    • 신천지회심자
    2016-02-03
  • [신천지 회심자] "예방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A군은 4년 전 스마트폰에 기독교 관련 어플에 가입하여 기도제목을 올렸다. 그 기도제목을 보고 신분을 속인 신천지인이 자연스럽게 접근해왔다. 기도제목을 보니 신앙의 열정이 있는 사람 같다고 한번 만나서 기도제목도 함께 나누고 신앙적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다. 그렇게 신앙적 교제를 하던 중 한국기독교심리상담을 하는 분이라는 사람을 소개 받았고, 그 사람을 통해 성경에 대해서 공부를 했다. 그렇게 열심히 신천지 공부를 하고 활동을 하던 중 교회 전도사님에게 신천지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게 되었다. 전도사님의 끈질긴 설득에 할 수 없이 부산성시화 이단상담실을 방문했다. 상담을 받으면서 신천지의 잘못된 것이 드러나자 놀라기도 하고 충격을 받았다.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이단에 빠진다고 생각했던 A씨는 본인 스스로가 이단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신천지가 틀렸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담이 계속 진행되면서, 신천지의 모순이 계속해서 드러나자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그리고 신천지를 탈퇴했다. 신천지를 탈퇴한다고 하자, 신천지에서는 끈질기게 설득을 하기 시작했고, 신천지를 나가면 저주를 받고 지옥에 간다면서 협박을 하기도 했다. A군은 교회에서 신천지가 이단이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신천지가 어떻게 접근하는지, 신천지에서 무슨 내용을 가지고 미혹하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한번이라도 신천지에 관한 예방교육을 들었더라면 신천지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A군은 말했다. 신천지를 탈퇴한 후 A군은 교회 청년 수련회에서 자신의 사례를 들어서 신천지의 위험성과 접근방법에 대해서 발표했다.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A군은 청년수련회 뿐만 아니라 전 성도를 대상으로 매년 1회 이상은 이단예방교육을 교회 차원에서 해서, 자신처럼 신천지를 몰라서 피해받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 이단
    • 신천지회심자
    2016-01-14
  • [신천지 회심자] 가정을 붕괴시키도록 사주하는 신천지 A씨는 6년 전 군대를 다녀온 뒤 어머니를 통해 신천지에 빠졌다. 가족 중 아버지를 제외하고 모두(3명)이 신천지에 빠진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신천지에 쏟아 부었다. 순종형이기 때문에 신천지가 시키는 일은 모두 해 왔다. 자연스럽게 가정과 학교에 소흘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느끼면서도 이 일이 진리이기 때문에 신천지에 대한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 신천지와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신천지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게 된 이후였다. 교회 중직자였던 아버지는 스스로 교회일을 내려 놓고, 가족의 회복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설득에 못이겨 상담을 하면서, 신천지는 A씨의 가족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A씨에게는 “제주도에 가서 아버지에게 공중전화를 해라, 그러면 아버지 폰 번호에 제주도 번호가 찍혀 있을 것이고, 너는 바로 서울로 가서 활동을 해라. 그러면 절대 찾지를 못할 것이다”라고 했고, 어머니께는 “남편을 자극해 폭력을 유발시켜 증거자료(구타자국)를 남겨라. 그리고 경찰에 신고 한 후 법원에 접근금지가처분 신청을 제기해라”고 뒤에서 사주했다. A씨는 이 모습을 지켜보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소중한 가정을 붕괴시키는 신천지가 참된 집단인지 의문을 품었고, 이후 신천지 측의 갖은 협박을 받으면서도 상담을 통해 신천지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A씨는 “신천지는 스스로 참된 곳이라고 말하면서도, 가족들을 속이고 가정을 붕괴시키려고 했다. 그런 이중적인 모습을 겪으면서 많은 회의감이 들었고, 결국 신천지를 벗어 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천지를 위해 가족을 버리라는 신천지 집단은 분명 이단 사이비집단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 이단
    • 신천지회심자
    2015-12-31

기고/강연 검색결과

  • 토마스 선교사의 입국, 활동 그리고 죽음 이 글은 2016년 8월 31일 부산 부산진구 부전동에 위치한 부전교회에서 행한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순교 150주년 기념 예배 및 심포지엄’에서 행한 강연을 요약한 것임, 이 글에서 고무송, 『토마스와 함께 떠나는 순례여행』(쿰란출판사, 2004),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1』(생명의 말씀사. 2004), 오문환, 『토마스 목사전』(평양, 1928), 프라이스 스텔라, 『조선에 부르심을 받다』(Korea. com. 2016)와 Hamilton, Moffett, Rhodes 등의 자료를 참고하였으나 각주로 처리 못한점에 대하여 양해를 구한다. 토마스 선교사의 입국, 활동 그리고 죽음 ▲ 이상규(고신대학교, 교회사학) 시작하면서 부산지역의 부전교회를 비롯하여 주변의 여러 교회가 연합하여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150주년을 기념하여 함께 이를 기념하게 된 것은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일을 추진하여 주신 한국기독교사연구소의 박용규 소장님과 이 뜻에 공감하여 기꺼이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부전교회와 박성규 담임목사님, 그리고 당회와 성도들에게 감사한다. 부전교회는 부산지역을 대표하는 건강하고 건실한 교회이고 박성규 담임목사는 부산의 영적 갱신과 부흥을 위해 헌신하시는 영적 지도자라는 점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오늘 모임에 토마스 선교사에 대해 깊이 연구하신 박용규 교수님이나 토마스 목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수득하신 고무송 목사님과 같은 학자가 강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양했으나 부산에 살고 있다는 이유에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을 송구하게 생각한다. 오늘 필자는 토마스 선교사가 걸어갔던 26년의 삶의 여정을 뒤돌아보고 오늘 우리들과 우리 교회에 주는 가르침이 어떤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16세기 독일의 위대한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뒬러(Albrecht Durer, 1471-1528)는 ‘그림’(painting)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첫째는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초상화를 그렸다. 오늘 우리의 ‘기림’(commemorate)도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고, 둘째는 토마스 목사가 걸어갔던 믿음의 길을 기리는 일이다. 이 목적을 위해 우선 토마스 목사가 살아갔던 삶의 여정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들의 신앙과 삶, 그리고 오늘의 교회 현실을 성찰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1. 출생과 가정 배경, 학교교육 로버트 저마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는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1810-1884)와 메리 윌리암스(Mary L. Williams, 1817-1895)의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는 당시 웨일즈의 위대한 설교가이자 웨일즈 부흥을 주도한 윌리엄 윌리엄스의 제자인데, 중부 웨일즈에 있는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1837년 4월 18일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1839년 여름 라야더(Rhayader)의 터바나클 교회 부임했는데, 바로 이곳에서 둘째 아들 저마인 토마스가 출생했다.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이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강력한 성령의 역사 일어났고 교회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이곳에서 목회하면서 1795년에 창립된 런던선교회에 후원금을 보내기 시작하는데, 후에 그의 아들이 런던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으로 향하게 된 것은 흥미로운 관련이 아닐 수 없다. 로버트 토마스 목사는 1848년에는 몬머스셔(Monmouthshire)의 하노버교회로 이동하게 된다. 이때 저마인 토마스는 8살이었다. 토마스는 이곳 하노버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토마스의 교육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최초의 공교육이 이루어 진 곳은 란도버리(Landovery) 칼리지에 3년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그는 헬라어와 라틴어, 그리고 프랑스어를 공부했는데 이때부터 다른 아이들에 비해 언어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 그가 언어에 재능이 있었다는 점은 그 이후의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후 토마스는 오스포드대학교 지저스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나이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이 보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도제식 의학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스텔라 프라이스(Stella Price)에 의하며 토마스는 외과의사가 되는 교육을 받으라는 주변의 권고를 받고 워터만(Waterman) 의사 휘하에서 2년간 의학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왕실의사면허 시험 제도가 있어 공인된 의사 밑에서 훈련을 받고 시험에 합격하면 의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2년여 이런 교육을 받았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고, 육신의 치료자보다는 영혼의 치유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든 중 잉글랜드 노스헴톤 지역 온들(Oundle)에 있는 알프레드 뉴스 학교(Alfred Newth’s school) 보조교사로 부름을 받고 약 1년간 일하게 된다. 이 학교 교장 알프레드 뉴스는 중국선교를 준비했던 사람으로 로버트 모리슨에게 중국어를 배운 인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알프레드 뉴스를 통해 중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토마스는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캐를라인 갓프리(Caroline Godfrey)였다. 토마스는 주일에는 온들 회중교회에 다녔는데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던 중 존 갓프리의 외동딸 캐를라인 갓프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여성은 토마스보다 2살 연상으로 후일 아내가 된다. 일 년 간의 교사생활을 마감한 토마스는 고향 하노버로 돌아갔고, 이때 아버지 청으로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것이 히브리서 13장 8절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본문의 설교였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의 신앙고백이었을 것이다. 토마스는 1857년에는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 입학했다. 온들에 있을 때 교장이었던 알프레드 뉴스의 친형인 새무엘 뉴스가 당시 학장이었다. 이곳에서 2년만에 학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3년간 최고의 금액인 밀스장학금을 받았다. 이 시기가 웨일즈의 영적 부흥기였는데 토마스는 교수드르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 년 간 휴학했는데, 휴학기간동안 지역교회에서 설교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복학한 그는 중국선교에 대한 조바심으로 학교에 조기 졸업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가 선교의 이상을 갖게 된 데는 귀츨라프의 영향 또한 없지 않았다. 토마스는 1832년 충청남도 보령시의 고대도와 조선 해안을 방문했던 귀츨라프의 항해기를 읽은 것으로 보이는데, 귀츨라프가 서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성경을 보급했듯이 후일 토마스도 동일한 방법을 선택했다. 1859년 10월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소속의 록하르트(Lockhart) 선교사의 설교 듣고 큰 감명을 받는데, 그의 설교 또한 선교사의 길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록하르트는 1861년에는 영국공사관의 공의로 베이징에서 활동하게 된다. 2. 선교사로의 길 토마스는 1863년 5월 뉴칼리지 졸업했다, 휴학기간을 포함하여 6년이 소요되었다. 졸업 후인 5월 29일에는 런던의 회중교회에서 온들에서 만난 캐롤라인 갓프리와 결혼했다. 이때 토미스는 23세, 아내는 25세였다. 결혼 6일 후인 6월 4일에는 목사안수 및 선교사 파송식이 거행되었다. 이로부터 7주 후인 7월 21일 토마스 부부는 그레이브센드(Gravesend) 항구 떠나 상해로 출발했다. 그가 중국으로 가게 된 것은 몇 가지 연쇄적 영향도 없지 않았지만 당시 중궁은 인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선교지였고, 가장 많은 선교사가 파송된 지역이었다. 토마스는 영국을 떠난지 4개월 만인 1863년 12월 첫주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 런던선교회 상하이 지부장 무어헤드(William Muirhead)의 충심의 영접을 받았으나 두 사람 간의 친밀한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상하이 도착 2개월 후인 1864년 2월 4일 자로 부모님께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데 이 문서에는 당시 정황을 헤아리게 해 주는 중요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도착 4개월 후인 1864년 3월 11일 런던선교회의 그리피스 존(Griffith John)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한커우(漢口)로 갔는데 그 기간동안 임신 중이던 부인은 유산하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1864년 3월 24일 2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토마스는 타지에서 아내의 죽음을 맞게 되었고, 이 일로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사별의 아픔이치유되기도 전에 토마스는 또 다른 고뇌에 빠졌는데, 상하이지부장 무어헤드와의 갈등이었다. 선교관의 차이에서 유래한 갈등은 토마스에게는 심각한 현실이었다. 상하이에 주제하는 영국인을 위해 목회했던 무어헤드는 상하이가 선교 중심이어야 한다고 보았으나 토마스는 자국민보다 중국인 선교가 우선해야 된다고 보았고, 한커우로 가고 싶어 했다. 토마스에게 신설되는 학교 교장직 요청을 받았으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음으로 이 사역은 그에게 매력적이지 못했다. 결국 토마스는 런던선교회를 사임하게 된다. 1864년 12월 7일이었다. 곧 이 일을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후회하게 되지만 토마스에게는 성급함과 무모함이 없지 않았다. 고무송 박사는 토마스에게는 모험정신, 강한 의무감, 무모함, 성급함, 엘리트 의식 등 몇 가지 기질 혹은 특징이 있다고 보았는데,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런던 선교회를 사임한 그는 현제 엔타이(煙臺)라고 불리는 지푸(Chefoo)로 이동하여 이곳 세관의 통역 및 감독관으로 일했다. 이때부터 1865년 8월 31일까지 약 8, 9개월간 일했다. 3. 제1차 조선 방문 지푸는 산동성 북부의 해안도시로서 조선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당시로 볼 때 외국과의 무역을 허용한 유일한 항구였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두 사람의 한국인을 만나게 된다. 이곳의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은 두 한국인을 만나게 되는데, 김양선에 의하며 그 두 조선사람 김자평(金子平)과 최선일이라고 한다. 윌리암슨은 이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는데, 토마스도 함께 초대되었고, 이들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듣게 뙨다. 즉 한국의 로마가톨릭 신자는 5만명이 이르고, 11명의 신부들이 비밀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런 접촉을 통해 토마스는 조선 선교를 자원하게 되고, 스코틀랜드성서공회 대리인 자격으로 1865년 9월 4일 ‘허락되지 않는 땅’(terra incognito)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이것이 제1차 조선방문인데, 윌리암슨으로부터 한문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보급 받았고 또 약간의 경비 지원도 받았다. 이대 김자평이 동행했고, 중국인 우웬타이가 항해를 맡았다. 그 달 13일에는 황해도 해안에 도착했는데, 이곳이 황해도 옹진 자라리(紫羅里) 근포(近浦)였다. 이곳에서 성경을 나누어 주며 전도했고 한양까지 가려했으나 배가 파선되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을 떠난 그는 만주의 피쯔워 항구를 거쳐 도보와 말을 타고 여행하여1866년 1월 4일 혹은 5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지푸를 떠난지 4개월 만이었다. 조선에 체류한 기간은 2달 반 정도였고, 체류한 곳은 서해안, 곧 황해도나 평안도에 속한 도서지방이었다. 김양선 교수의 지적처럼 토마스를 인도했던 김자평이 황해도의 ‘육도’였기 때문에 자기가 잘 아는 지역으로 안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곳에서 성경책과 기독교 문서를 배포했다. 이점은 토마스가 두 번째 조선으로 향하기 일주일 전에 런던선교회 지부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재가입 되었고 근무지는 베이징 지부로 결정되었음을 통보 받았다. 즉 재가입된 것은 1865년 9월에서 11월 사이로 판단되는데 이 점은 토마스가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조선을 방문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토마스가 런던 선교회 티드만 회장에게 보낸 조선방문 보고는 당시의 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소중한 정보를 제공한다(스텔라, 100). 4. 제2차 조선 방문 고종 3년인 1866년은 우리나라 최대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가 있었던 해였고 이때 대원군은 천주교를 금압했을 뿐 아니라 약 8천명의 천주교인이 죽임을 당했다. 이 때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베르뇌(Berneux) 주교를 비롯하여 9명의 프랑스 주교들이 참수되었다. 천주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오가작통법으로 감시했고 해안은 봉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두 번째 조선을 방문하게 된다. 토마스는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선행을 시도했다. 그러든 중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으로부터 통역관으로 조선으로의 동행을 요청했다. 로즈 제독은 베이징의 프랑스 대사관을 방문했는데,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Bellonet)에게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소식, 특히 프랑스인의 처형 소식 알려주었다. 벨로네는 로즈에게 조선 진격을 요구했고, 약간의 조선어를 알고 있는 토마스에게 로즈 제독의 통역관으로 조선 동행을 요청한 것이다.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토마스는 조선으로 갈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서 텬진에서 로즈 제독과 합류하여 지푸를 거쳐 조선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로즈 제독은 베트남 사이공에서 일어난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그리로 가게 됨으로 원래 계획이 취소되었다. 토마스는 조선으로 갈 길을 찾기 위해 일단 지푸로 갔다. 여기서 필요한 경비도 마련할 계획이었다. 여기서 다시 윌리암슨과 한국인 김자평을 만났는데 이들을 통해 조선방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든 중 1884년 7월 29일 지푸에 커다란 선박이 나타났다. 그것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였다. 원래 이 배는 1861년 영국에서 건조한 범선으로 ‘프린세스 로얄’호로 불렸으나 1863년 1월 미국으로 넘겨져 미 해군에서 사용하였고, 1865년에는 경매에 넘겨져 상선으로 개조되었다. 남북전쟁 당시 위력을 떨친 남군의 장군 셔먼으로 이름을 따 제너럴 셔먼으로 개칭되었으나 더 이상 해군 함정이 아니라 영국의 메도우 사(Meadows Company) 소속 상선이었다. 이 배는 조선에서 팔릴만한 비단, 유리그릇, 천리경, 자명종 등을 싣고 텬진항을 거쳐 지푸로 온 선박이었다. 토마스가 어떻게 이 배에 승선하게 되었는가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행을 의도했던 토마스에게는 조선행의 호기였다. 그 배가 어떤 성격의 배인지, 조선 방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따질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토마스는 베이징을 떠난지 26일 만인 1866년 8월 9일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했고, 이날 셔먼호는 조선으로 향했다. 알렉산더 윌리엄슨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양의 한문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공급받았다. 제너럴 셔먼 호는 무장한 상선으로 승선인은 선주 미국인 프레스턴(W. Preston)을 비롯하여 항해사 윌슨(Wilson), 선장 페이지(Page), 화물관리인 영국인 호가스(G. Hogarth), 토마스 선교사, 두 사람의 중국인 이팔행 등 항해안내원, 그리고 중국인과 말레시아인 선원 등 24명으로 파악된다. 후의 일이지만 고종실록에는 프레스톤을 보래돈(普來敦)으로, 페이지를 파사(巴使)로, 호가스를 하갈특(何噶特)으로, 토마스를 최란헌(崔蘭軒)으로 표기했다. 물론 최란헌이라는 표기가 토마스를 표기한 것이 맞느냐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다. 지푸를 떠난 제너럴 셔먼호의 첫 경유지는 백령도의 두무진 항이었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성경을 나눠주었고, 이때 제너럴 셔먼호를 목격했던 한 조선인의 목격담이 스텔라 프라이스는 자신의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124쪽). 곧 백령도를 떠나 돛섬으로 향했는데, 여기서 중국인 선장 우웬타이(Yu-Wen-Tai) 만나게 된다. 그는 여러 차례 조선의 해안을 왕래하며 장사했던 중국인이었다. 다시 배는 대동강 안쪽으로 행진했다. 외국선박의 입항이나 접촉을 금지했던 조선의 사정을 알고 있던 선원들은 안전을 위해 더 이상 진출 우려했으나 선장과 선주는 우웬타이의 경고를 무시했다. 조선 사정이 밝은 우웬타이는 더 이상 안내할 수 없다며 지푸로 돌아갔다. 그러나 셔먼호는 자만했다. 5. 대치상황과 제너럴 셔먼호의 최후 8월 16일에는 용강면 다미면 주용포항에, 8월 17일 금요일에는 황주 송산에 정박했다. 예상되는 바이지만 강둑에는 이양선을 보기 위해 조선인들이 몰려들었고, 조선관리는 긴급 회합하여 선박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셔먼호는 입항을 고집했다. 고종 3년, 곧 1866년 음력 7월 15일자 고종실록에는 당시의 상황이 언급되어 있다. 배는 더 진행하여 8월 20일에는 평양 초리방 사포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도 서양 선막은 구경꺼리였다. 많은 이들이 구경하러 몰려왔다. 오문환에 의하면 홍신길이라는 소년도 작은 배로 셔먼호 근처로 접근했고, 토마스는 갑판에서 그를 맞이하여 방으로 데리고 기독교 문서를 주고 그에게 케이크를 맛보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감자를 보았다고 한다. 또 그날 밤에는 인근 쑥개마을에서 장인국 지달수 지달체 지택구 지택붕 지택주 장용국 지달해 표명보 등 아홉 사람이 토마스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들 중 장용국 외에는 천주교 신자들인데 천주교 신자들을 보호해 줄 프랑스 선박을 기다리고 있던 중 셔먼호로 찾아간 것이다. 토마스는 자기는 천주교 신자도 프랑스 함대도 아니라고 말하고 개신교 선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성경과 기독교 문서, 그리고 빅토링여왕 얼굴이 새겨진 동전까지 주었는데, 천주교신자들은 성모 마리아상으로로 오인했다고 한다. 오문환 장로 기록의 정확성은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인과의 접촉의 사례로 제시되고 있다. 얼마 후 지달수와 지달해는 서양인 접촉했다는 이유로 참수되었다고 한다. 다음날 조선관리가 선박의 철수를 요구했을 때 셔먼호는 교역을 원한다며 비단, 유리, 망원경, 자명종을 조선의 쌀, 인삼, 종이, 호랑이 가죽 등과 교환하자고 했다. 그러나 교역을 금하는 정책에 따라 이를 거절했다. 거듭된 경고를 무시한 것은 제너널 셔먼호의 오만이었고 신중치 못한 처신이었다. 대치상황은 약 2주일간 계속되었다. 조선 관리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제너럴 셔먼호는 평양행을 고집하고 8월 21일에는 평양 신장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도 구경꾼들이 몰려오았고, 토마스는 성경책 나눠주었다. 토마스로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면 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성경 받은 김영섭은 후에 기독교신앙을 받아드렸고, 두 아들 김종권과 김성집은 후일 장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조선 관리 김낙수는 선박의 도래경위를 조사하고 철수를 요구했다. 8월 22일 셔먼호는 평양 만경대의 작은 선 두로도에 닻을 내렸다. 토마스 이곳에서 100권의 성경 배포했다고 한다. 평양감사 박규수는 셔먼호의 공격에 대비하여 만경대를 둘러싸는 방어선 구축 지시했다. 그럼에도 셔먼호 대동강으로 계속 진입했다. 8월 27일에는 보다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다. 셔먼호 승무원들이 순시대장 중군(中軍) 이현익을 억류한 것이다. 조선에 무단 침입했을 뿐 아니라 퇴거를 거부하고 조선관리를 억류한 일은 심각한 일이었다. 셔먼호의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혹은 물이나 식량, 연료를 공급받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없지 않으나 방자한 행동이었다. 선원 중 한 사람은 이현익의 관원 명찰을 빼앗은 일을 더욱 그러했다. 이현익의 억류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셔먼호에 돌을 던졌고, 석방을 요구했다. 관군은 사격을 가했다. 셔먼호 측에서도 발포했다. 이런 와중에서 박춘권(朴春權)이 혼자 배를 저어 가 이현익을 구출했다고 한다. 오문환에 의하면 그가 후에 평양의 장로교회 첫 인물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다. 셔먼호가 수세에 몰리자 더욱 낙폭하게 대응했다. 8월 28일 발포를 시작했고, 8월 31일에는 조선인 7명 사살되고 5사람 중경상을 입었다. 사태는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고종의 허락에 따라 평양감사 박규수는 셔먼호 공격을 지시했다. 9월 3일이었다. 박규수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서 개방론자였으나 셔먼호의 무단접근은 용인될 수 없었다. 곧 강 수위는 낳아졌고 배는 좌초되었다. 9월 4일 달빛도 없는 그믐밤이었다. 결국 선원은 쑥섬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작은 거룻배에 나무를 싣고 불을 붙여 셔먼호로 접근시켜 셔먼 호 불태웠다. 선원들 불길을 피해 강밖으로 헤엄쳐 나왔으나 강변에 정렬해 있는 군인들에 의해 창에 찔려 주임을 당했다. 토마스 목사도 남은 성경책을 안고 배에서 띄어 내렸다. 강가로 끌려나온 그는 모래사장에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성경을 관군에게 내밀었다. 관군의 칼은 토마스의 가슴을 내리쳤고 토마스는 9월 5일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토마스의 시신은 대동강변에 묻혔다. 6. 토마스의 순교 이후 토마스의 최후에 대해서는 상이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배가 불타고 선원들이 죽임을 당할 때 토마스는 뱃머리에서 홀로 야소(耶蘇)를 외치고 남은 성경을 뿌렸다는 기록이 있는가하면, 한석진 목사는 토마수가 순교한지 26년이 지난 1892년 당시 목격자로부터 제널 셔먼호가 불탈 때 토마스가 성경을 던지며 ‘야소’를 외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을 남겨주고 있다. 그런가하면 백기를 흔들며 목숨을 외국인도 한 두명 있었다고 한다. 그 한 사람이 토마스였을 것으로 말하는 이도 있다. 기록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을 균형 있게 판단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토마스의 죽음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제너럴 셔먼을 구경하라 갔던 소년 최치량(崔致良, 1854-1930)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는 12살 때 숙부와 함께 1866년 9월 3일 토마스 순교장면을 목격하였고, 토마스 목사가 뿌린 한문성경 3권을 주었다고 한다. 책 소지자에 체포 명령이 내려 대부분 성경을 소각하거나 강변에 버렸다. 최지량도 이 성경을 집으로 가져 오지 못하고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에게 주었다고 한다. 박영식은 이 성경을 가져와 찢어 벽지로 사용했다. 오랜 후 최치량은 사업에 성공하여 물상객주(物商客主)가 되어 평양 대동문 안에 집을 사 여관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그 여관의 전 주인이 박영식이었다. 최치량은 이 벽지로 사용된 성경을 읽고 또 한석진의 전도로 회심하였고, 평양에서 최초로 마펫에게 세례를 받고 평양지역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널다리골의 홍종대(洪鐘大)의 집을 사서 예배처소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평양장대현교회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서구와의 불행한 접촉이었으나 그 이후 역사는 흥미롭게 전개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과 미국간의 외교문제로 발전하였고, 널리 알려진 바처럼 이 일이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 6)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대결과 접촉이 후일에는 조미 양국 간의 통상조약(1882)으로 발전하여 외국인의 조선 거주를 보장 받게 된다. 결국 1884년에는 알렌이 입국하게 되는데, 토마스 순교 18년 후의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박용규 교수는 토마스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보이지 않는 이정표가 되었다고 말한다. 오문환은, 토마스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신자마다 예수를 믿었고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한국교회의 거룩한 도성이 되었다고 했다. 7. 남은 문제: 토마스는 순교자인가 침략자인가? 토마스 목사는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로 남아 있었다. 그가 죽임을 당하고 60년이 지난 1926년 평양의 오문환 장로는 토마스 목사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소책자를 발간했다. 그것이 토마스의 생애와 조선 기독교사의 분수령이 되는 양란(洋亂)에 대한 기록이었다. 1927년에는 토마스 기념회가 조직되었고, 1927년 5월 8일 토마스 목사가 묻힌 쑥섬에서 토마스 목사 순교 60주년 기념예배가 거행되었는데, 이때 1천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1932년 9월 14일에는 대동강변에 토마스기념예배당을 건립했는데, 1933년 10월 14일 봉헌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10여년 이래로 토마스를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그 의 죽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감리교의 존스(G. H. Jones) 이래로 초기 선교사들은 토마스 목사를 순교자로 이정해 왔고, 설사 게일의 경우처럼 순교자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복음을 위한 그의 숭고한 죽음을 기리고 있고, 그를 정치적 희생자라든가 침략자로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토마스를 순교자로 볼 수 없다거나 심지어는 침략자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토마스는 무장상선을 타고 입국했기 때문에 순교자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조선에 와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순교자로 칭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 그가 죽은 이유가 기독교 복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제너럴 셔먼호의 부당한 처신과 횡포에 기인하는 정치적인 죽임이라고 주장하다. 일견 고려할 점이 전무한 것은 아니지만 1860년대 상황에서 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토마스가 복음의 열정, 곧 조선 선교의 이상을 가진 점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로는 조선 입국 방법이나 경로를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설사 무장상선이라 할찌라도 셔먼호 승선이 조선으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제너럴 셔먼호의 신중치 못한 점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셔먼호로 입국했기 때문에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선교사가 내한 한 이후 무엇을 했는가가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1863년 이래로 선교사 신분이었고, 이미 조선을 방문하바 있고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내한 즉시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그의 죽음이 복음전도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주장도 고려할 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기독교가 금압된 당시 상황에서 서양인의 죽음, 특히 서양선교사의 죽음을 비종교적 행동으로만 취급할 수 없다. 1866년 병인양요 때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죽음은 정치적 성격이 강했고, 외세에 의한 침략세력으로 간주되었다. 그 누구도 프랑스 신부의 죽음을 순교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금지된 상태에서 ‘선교사의 현존’ 자제가 정치적 행위일 수 있고, 정치적 침략세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토마스 목사가 제너럴셔먼호로 입국한 일이나 셔먼호의 부당한 혹은 불법적인 행위는 지탄받을 수 있지만 토마스 목사는 조선인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려는 선한 의지는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가 죽임을 당한 후 초기 선교사들을 시작으로 한국교회는 토마스를 순교자로 간주하고 그의 죽음의 의미를 기념해 왔다. 15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토마 목사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오늘우리의 모습을 성찰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 기고/강연
    • 강연/특강
    2016-09-08
  • 이슬람(2) (이 글은 5월 25일(수) 거제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부산이단대책세미나 강의안입니다.) 이슬람(2) ▲ 이만석 목사 (현. 한국이란인교회 담임, 4HIM 대표)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 이슬람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첫째 : 이슬람의 타끼야(Taqiyya) 교리를 알아야 한다. 타끼야란 위장 즉 거짓말을 허용하는 교리다. 이를 이란어사전에서 찾아보니 “피하다, 삼가다, 절제하다”등의 뜻이 있는데 종교적인 의미로는 “금전적이나 생명의 손해가 예상될 경우 자신의 생각이나 종교를 숨기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슬람 외에 어떤 종교가 교리적으로 거짓말을 허용하는가?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의 말(부카리 하디스)을 인용하여 세 가지 경우에 거짓말을 허용하고 있다. 즉 1. 전쟁 상황에서 승리를 위해 적을 속이는 것 2. 다투고 있는 두 그룹을 화해시키기 위한 거짓말 3.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아내를 속일 필요가 있을 때 등 그런데 이슬람의 교리를 보면 “비무슬림들과는 항상 전쟁상태”라는 것이다. 이슬람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을 둘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평화의 집(Dar al Salam)과 비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전쟁의 집(Dar al Harb)으로 나눈다. 그러므로 비무슬림들은 전쟁의 집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거짓말이 용인되며 특히 그들을 이슬람으로 복속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슬람을 미화시키는 모든 거짓말은 허용될 뿐 아니라 장려된다. 심지어는 꾸란의 번역도 미화, 왜곡 번역이 허용된다. TV 강연에서도 이슬람의 교리에 대해서 미화시킨 거짓말로 강연할 수 있다. 한 번의 거짓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슬람에 대한 호감을 갖게 할 수 있다면 알라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논리다. 예를 들면 “한 손에 칼을 한 손에 꾸란을”이라는 사상은 이슬람에 없으며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거짓말이다. 이슬람의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를 보면 이슬람의 신앙고백과 칼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이슬람의 대표적 사상이지만 타끼야 교리에 의해서 평화의 종교로 둔갑시켜 대한민국 교과서에서 이런 구절들을 모두 삭제하였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말은 꾸란 9장5절을 표어로 만든 것이다. 꾸란 번역도 거짓으로 미화시켜 놓았는데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3장 54절을 들 수 있겠다. 원래 3장 54절은 “그들도 알라를 속이려 했고 알라도 그들을 속이려 했는데 알라는 최고로 잘 속이는 분이시다.”라는 내용이며 영문번역은 이렇다. And they (the disbelievers) schemed, and Allah schemed (against them): and Allah is the best of schemers.(Pickthall역) 그런데 아랍어 꾸란 원문을 보면 이 문장에서 Makara라는 단어가 세 번 사용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보급된 아랍어 사전은 최영길, 이두선 씨가 엮은 것인데 거기서 찾아보면 Makara는 “속이다. 거짓말하다”라는 뜻 밖에 없는 단어다. 그렇다면 “알라는 가장 잘 속이는 분”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전을 만든 최영길씨가 번역한 한글 꾸란은 그 단어를 ’가장 훌륭한 계획자’라고 번역해 놓았다. 경전을 번역하는 태도가 이런 정도라면 나머지 문서들이나 교리와 율법의 왜곡과 미화는 얼마나 심할까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 우리가 가장 많이 속고 있는 것들 중 하나는 이슬람의 신 알라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이슬람은 알라(Allah)라는 신을 섬기고 있는데 이는 창조주 절대자 전능자 유일신을 의미하며 기독교나 유대교에서 믿는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철저히 타끼야(위장)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알라라는 신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소속되었던 꾸라이시 족속의 종족신이었으며 라트(Lat) 우짜(Uzza) 마나트(Manat)라는 세 딸을 두었던 메카의 카아바 신전에 안에 있었던 360개 우상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슬람 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꾸란에 이슬람의 신은 기독교의 신과 같은 분이라고 분명히 명시 되었다고 한다.(꾸란29:46) 꾸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용은 진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누구도 그 권위를 부인할 수 없는 이슬람의 경전 꾸란과 기독교의 경전 성경을 비교해보면 확인할 수 있다. 성경: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행16:31, 마16:16) 꾸란: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자는 믿음에서 떠난 불신자다.(꾸란5:17, 꾸란5:72) * 성경과 꾸란의 이 두 구절은 이를 계시한 영이 정반대의 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하나가 성령의 계시라면 하나는 악령의 계시가 분명하다. 성경: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해 열어 놓으신 유일한 길이다. 꾸란: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만든 상상의 산물이다.(꾸란4:157) *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은 인류를 지옥으로 보내기 위한 사단의 최대의 전략이다. 성경: 예수께서 그리스도(구세주)라는 것을 부인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다.(요일2:22) 꾸란: 예수는 장차 아흐마드(무함마드)가 온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주러 왔다.(꾸란61:6) * 예수 그리스도를 무함마드의 발아래 두려는 간악한 거짓말이다. 성경: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다.(요일2:22) 꾸란: 신에게 아들이 있다고 하는 자들 때문에 큰 저주가 임할 것이다.(꾸란19:88-91) * 이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이슬람의 알라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이 외에도 이슬람의 알라는 수시로 계시의 내용을 취소하고 다른 구절로 대체할 수 있는데(꾸란2:106), 하나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응하리라(마5:18)고 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일부일처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이혼절대불가를 말씀하셨는데 꾸란에서는 일부다처를 허용하고(꾸란4:3) 이혼은 두 번까지(꾸란2:229)라고 한다. 이 외에도 하나님은 소통이 가능한 인격적인 신이지만 알라는 인간과 직접 소통이 불가능하며(꾸란42:5) 하나님은 심판권을 인간에게 양도하지 않으셨는데(롬12:19) 알라는 인간들에게 심판을 집행하라며 어디서 발견하든지 살해하라(꾸란9:5, 꾸란4:89, 꾸란4:91)고 하는 등 모든 면이 다른 신이지만 같은 신이라고 주장하며 속이고 있다. 셋째 : 기독교와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같이 섬기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이것도 거짓이다. 우리가 이슬람의 주장들을 들어보면 그럴 듯하게 들리는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나 꾸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성경의 인물들과 같다는데서 혼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엄청난 금액의 홍보비를 투자한 덕분에 학계가 속아왔고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말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강력하게 주장한다고 다 믿을 수는 없다. 한 번 확인해 보자. 성경 : 아브라함의 아버지 이름은 ‘데라’였다.(창11:31) 꾸란 : 아브라함의 아버지 아름은 ‘아자르’였다.(꾸란6:74) * 아무리 이름이 똑 같다고 해도 아버지가 다르다면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성경 : 아브라함의 이름은 99세 때부터 바뀐 이름이다.(창17:5) 꾸란 : 아브라함은 어려서부터 그 이름이 바뀌지 않았다.(꾸란21:60) * 그 때는 수백세를 살았기 때문에 99세는 젊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지만 성경은 90세의 사라가 나이 많아 늙어서 낙이 없다고 했다.(창18:11-13) 성경: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예루살렘)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다.(창22:2) 꾸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이스마엘을 번제로 드리려 했다.(꾸란37:102-107) 성경: 아브라함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쪽으로 간 일이 없다. 꾸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메카의 카아바 신전을 건축했다.(꾸란2:127) 이 외에도 이슬람의 가르침에 의하면 아브라함을 불 속에 던졌는데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알라께서 구해 주셨다고 하는가 하면(꾸란21:69) 아브라함이 책을 계시 받았다고 한다.(꾸란87:19) 이로 볼 때 꾸란의 아브라함은 성경의 아브라함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꾸란의 예수도 성경의 예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꾸란의 예수는 아랍어로 이싸(Isa)라고 하는데 성경의 예수는 아랍어로 야슈아(Yashua)라고 한다. 이것을 한글로 모두 예수라고 번역하여 속이고 있는데 꾸란의 예수는 알라(Allah)만을 섬기라고 전도하며 다녔던 무슬림이었으며(꾸란5:72) 삼위일체도 거짓이며(꾸란5:73)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고(꾸란4:157) (부활도 없이) 그대로 승천했으며(꾸란4:158)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며(꾸란19:88) 성자 하나님도 아니고(꾸란5:17)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도 아니고(꾸란5:72) 다만 무함마드가 올 것을 미리 알려 주기 위해서 왔던(꾸란61:6)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꾸란5:75) 한다. 꾸란에 등장하는 성경인물은 성경의 내용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들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자신의 종교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성경에서 이름을 빌려다가 활용하며 계시를 빙자해 만들어낸 이야기들로서 역사적으로 입증할만한 근거 자료가 전혀 없는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고 속지 말아야 한다. 넷째 : 대한민국의 딸들을 구해야 한다. 며칠 전에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관내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관리하시는 외사과 담당자를 만났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관내에 거주하는 이슬람국가에서 온 사람들 중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에서 오신 분들이 30명 정도 살고 있는데 100% 한국 여성들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산다는 것이었다. 남녀평등 시대를 지나서 여성 상위시대에 살고 있는 한국 여성들이 무슬림들에게 속아서 결혼하고 무슬림이 되어서 평생을 이슬람 율법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슬람에서 여성은 남성의 절반의 가치를 가지는 존재다. 상속도 남성의 절반을 받아야 하며(꾸란4:11) 여성의 증언은 남자의 증언의 절반의 가치가 있으며(꾸란2:282) 여성은 원할 때 씨를 뿌릴 수 있는 밭이라고 꾸란은 말한다.(꾸란2:223) 특히 알아야 할 점은 이슬람의 결혼 개념은 한 번 결혼하면 평생을 산다는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아랍어로 결혼을 ‘니카’라고 하는데 이는 원래 ‘성관계’를 의미한다. 꾸란에는 성관계와 결혼을 ‘니카’라는 한 단어로 혼용하고 있다. 그래서 결혼계약서는 성관계 계약서이며 남편이 메흐르(Mehr:혼자금으로 번역됨)라는 금액을 주고 독점 성관계 계약을 한 것이다. 아내는 평생의 반려자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성관계의 도구로 계약을 통해서 매입한 것이며 따라서 원하면 구두로 3회만 통보를 하면 이혼할 수 있다.(꾸란2:230) 이혼이 이렇게 쉬운 이유는 이미 돈 주고 산 물건이기에 언제든지 더 좋은 물건이 보이면 하나 더 취하든지 혹은 바꾸거나 버리든지 할 수 있는 권리가 구매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한민국에서는 결혼 당시에 메흐르(혼자금)를 정하는 법이 없기에 원할 때 부담 없이 버리고 달아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슬람권에서 온 불법체류자들이 한국여인과 결혼하여 합법 체류자격을 얻은 후에 한국 국적을 얻으면 이혼하고 조국의 본처를 초청해 와서 같이 사는 사례도 종종 있다. 이슬람의 결혼식에서는 신과 하객들 앞에서 평생을 이 사람만을 반려자로 사랑하며 동거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순서가 없다. 그러므로 무슬림과 결혼하고자 하는 자매가 주변에 혹시 있다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그녀를 구해줄 수가 있을 것이다. ㉠ 남편이 당신 외에 다른 여인들을 또 얻는다고 해도 결혼하고 싶은가? 꾸란에는 무슬림들은 4명의 아내까지 얻을 수 있도록 허락한다.(꾸란4:3) 내 남편은 안 그럴 것이라고 속단하지 말라. 종교적으로 허락된 사항이며 자신의 권리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있다. ㉡ 언제든지 구두로 3회만 통보하면 간단하게 이혼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최근에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혹은 e-mail로도 3회 통보하면 이혼이 성립된다고 한다. 이혼은 남편의 권리이며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이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원하면 언제든지 아내를 바꿀 수 있다.(꾸란4:20) ㉢ 아내가 불순종하면 구타할 수 있는 권리가 남편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꾸란4:34)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남편이 아내를 때릴 때 제3자는 왜 때리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하디스)고 말했다는 것은 이슬람의 율법이다. 최근에는 영국에서도 샤리아 법정이 생겨서 이슬람 율법으로 재판을 받기에 아내를 구타하는 무슬림들을 처벌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그 결혼은 원천 무효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한국에서는 부부로 혼인신고해서 같이 살 수 있지만 남편이 귀국하면 아내는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는 한 부부자격으로 함께 살 수 없다.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해서 선교목적으로 결혼했어도 남편의 나라에서는 그의 개종은 합법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인과의 결혼을 인정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 ㉤ 이혼한다면 자녀는 무조건 남편의 소유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이슬람의 율법의 규정이기 때문에 남편이 사망했을 경우에도 남편의 가족들이 원한다면 억울해도 아이를 빼앗기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 이슬람에서는 아내와 재산 공유를 해야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아내에게는 의식주를 제공하고 성관계를 갖는 것이 전부다. 모든 재산은 남편의 것이고 아내는 여러 명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남편과 재산을 공동 소유한다면 분배에 많은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 이슬람에는 이혼 위자료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결혼 당시에 이미 메흐르(혼자금)를 몸값으로 치렀기 때문에 의식주 제공으로 충분하며 이혼 시에는 더 이상 아무런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여인의 몸을 평생 독점 사용할 수 있는데 해방시켜준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혼은 아랍어로 딸락(Talaq)이라고 하는데 이는 해방시킨다는 의미이고 남성만 이혼한다(딸락을 준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으며 여성은 이혼 당한다(딸락을 받는다)는 의미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용법이 한정된 단어다. ㉧ 여인이 이혼 당하면 숙정기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숙정기란 태중의 아이가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3번의 생리를 볼 때까지 남편의 집에 머물면서 기다려야 하는 기간을 말하며 그 기간 중에 남편은 원하면 이혼을 취소할 권리가 있으며(꾸란2:228) 기다리는 동안 의식주는 남편이 제공하며 임신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떠나야 하고 임신이었다면 출산과 동시에 떠나야 한다.(꾸란65:4) 이슬람의 결혼 문화를 들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같은 문화권에서 살면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도 결혼을 한 후 함께 마음 맞춰 살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인데 언어도 문화도 제대로 모르고 이슬람 율법도 모르면서 어떻게 함부로 몸을 허락하고 평생의 운명을 맡길 수 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더구나 저들은 타끼야 교리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위장하고 속일 수 있다. 우리가 이슬람의 정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특히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속히 알려 줘야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다문화 정책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무슬림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것을 방관하고 있다. 오히려 산유국 출신이라고 우대하고 있는 경향까지 보인다. 그러나 이슬람의 정체를 바로 알지 않으면 유럽처럼 우리나라에도 이슬람 때문에 큰 재앙이 올 수 있다. 유럽에서 일어나는 지하철 테러나 열차테러나 학교 테러 등의 소식은 이대로 가다보면 멀리 않아 우리 가족들이 그 희생자 명단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꼭 알아야 하는 것은 무슬림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슬람은 악한 영이요 악한 가르침이지만 그 영에 속고 있는 무슬림들은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며 우리의 사랑의 대상들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 하늘에 속한 악한 영들에 대한 싸움이다.(엡6:12) 그러므로 무슬림들을 미워하며 육적인 싸움으로 몰고 가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 와 있는 무슬림들은 악한 거짓 영에 속고 있는 불쌍한 피해자들이다. 그들을 위해서 사랑으로 섬기면서 주님께 기도해서 그들의 감겼던 눈이 떠지고 참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이 이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라고 생각된다. 여러분들의 사람의 섬김과 기도를 통해서 수많은 무슬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와 구원에 동참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한다. 4. 무슬림들은 왜 타문화에 적응이 힘들까? 한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홍익인간을 숭상하는 단군의 후손으로서 단일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20세기 후반부에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가끔 길거리에서 눈과 머리카락 색깔이 다른 외국인을 만나면 깜짝 놀라서 그 외국인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곤 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서면서 외국인들이 급증하더니 이제는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숫자가 150만을 넘어섰고, 한 해 동안 결혼한 부부들 중에서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이 10% 정도나 된다고 한다. 이제 대한민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으며 어쨌든 우리 주변으로 몰려든 외국인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장관급 인사 15명을 포함한 전문가들 50여명으로 구성된 국민 대통합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두고 다문화정책이 우리나라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독일의 안젤라 메르켈 총리나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프랑스의 사르코지 전 대통령 같은 유럽의 선진국 지도자들은 자기 나라의 다문화 정책이 이슬람 때문에 실패했다고 이미 공언했다. 그들도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인들을 융화시켜 평화로운 복지국가를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해 다문화 정책을 추진했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다문화주의자들은 유럽의 실패를 거울삼아 제도를 보완하고 풍성한 재정을 포함한 정책적 지원을 하면 우리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환상에 속고 있는 것 같다. 유럽의 정상들과 정치인들인들 왜 그런 생각을 안 해 봤겠는가? 재정지원 뿐 아니라 기존의 정책과 제도와 법을 바꿔가면서까지 무슬림들의 비위를 맞춰 평화롭게 공존하려고 노력해봤으나 안 되더라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다. 우리나라가 유럽에서 실패한 다문화정책을 억지로 추진한다면 우리는 그들보다 더 비참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이 그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복지혜택이나 재정이나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유럽보다 결코 높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무슬림들은 유럽에서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 문화에 동화될 수 없었을까? 그것은 특별히 문제가 많은 무슬림들만 유럽에 모여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Sharia)의 기본 정신 때문이다. 샤리아의 기본정신은 “알왈라 왈바라(Al Walla, Wal Bara)”이다. “알왈라(Al Walla)”는 무슬림들끼리는 국적, 성별, 피부색, 인종, 언어, 신분에 관계없이 무조건 돕고 보호하고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말이다. 반면 “왈바라(Wal Bara)”는 이슬람 외의 종교를 가진 자들과는 국적, 성별, 피부색, 인종, 언어, 신분에 관계없이 절대로 존경하거나 사랑하거나 친절을 베풀거나 돕거나 친구로 사귀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철저히 미워하며 대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 때문에 이슬람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열성적인 무슬림들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며, 특정 지역에 무슬림들끼리 모여살기를 선호하고 자신들의 신앙과 문화를 지키는 게토를 형성해 그 영역을 넓혀 나가게 된다. 둘째 : 이슬람의 세계관 때문이다. 이슬람에서는 세계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한 쪽은 무슬림들만 살 수 있는 “평화의 집(다르 알 쌀람:Dar al Salam)”이며, 또 한 쪽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포함한 불교 힌두교 배화교 라마교 유교... 등 이슬람 이외의 모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사는 “전쟁의 집(다르 알 하릅: Dar al Harb)”이다. 그래서 열성적인 무슬림들은 설교나 강연들을 통해서 이슬람 이외의 문화권의 사람들과는 항상 “지하드(알라를 위한 전쟁)”상태라는 것을 의식하며 살도록 교육 받는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이런 교육내용이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지만, 종종 그들의 교과서에 실린 이런 내용들이 서방세계의 매스컴에 폭로되어 충격을 주기도 한다. 전쟁상태라면 그들의 모든 행동은 일반적인 윤리 기준으로 평가하면 안 되고 전시행동지침이 적용된다는 의미이다. 전시에는 적을 속이는 것은 훌륭한 전략이고 적의 요인들을 암살하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며 많은 적들을 죽인 사람은 영웅이 되고 다른 사람들이 본받아야할 모델이 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면 온 세계가 혐오하는 오사마 빈라덴 같은 끔찍한 테러범이 이슬람권에서는 영웅으로 존경받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 무함마드의 행동지침 때문이다. 무함마드가 보여주었던 행동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무슬림들의 모델이며 율법의 근원이 되었다. 이를 아랍어로 우스와 하사나(uswa hasana)라고 한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힘이 없을 때는 “종교는 강제로 하지 말지니라(꾸란2:256)”라며 유화정책을 폈다. 그러다 주후 622년 메디나로 이주한 후 세력을 결집하여 힘이 생기자 주변의 족속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고, 주후 630년 고향인 메카(Mecca)까지 점령하고는 “이제부터는 두 개의 종교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특히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변질된 경전을 가지고 있는 타락한 무리이기 때문에 “가장 사악한 피조물”(꾸란98:6)이라며,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는 “이교도들은 어디서 발견하든지 살해하라”(꾸란9:5)고 명령했다. 그래서 이슬람은 초기부터 전쟁과 칼로 세력을 넓혀 나갔다. 어떤 이들은 “한 손엔 꾸란을! 한 손엔 칼을!” 이라는 사상은 이슬람에 없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의 여러 교리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슬람의 핵심교리이다. 이슬람의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 도안을 보면 녹색바탕에 이슬람의 신앙고백을 중앙에 아랍어로 적어 놓고 그 밑에 전쟁용 칼을 그려놓았다. 이는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이슬람의 핵심교리를 확실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넷째 : 이슬람의 나지스(NaJis) 혹은 나제스(Najes)라는 사상 때문이다. 이는 비무슬림들은 더러운 존재들이라는 관념이다. 이슬람권에 가면 비무슬림들이 쓰던 잔으로는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비무슬림들이 주는 음식은 안 먹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몇몇 유별난 사람들이 아니라 정상적인 이슬람 율법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취하는 행동이다. 이슬람에서 가장 거룩하다고 여기는 도시 메카를 향한 고속도로 수십 Km 전방에는 “여기서부터 비무슬림들은 통과할 수 없습니다”는 대형 간판을 볼 수 있다. 또한 죄수들을 고문실로 끌고 갈 때 눈을 가리는데, 죄수가 무슬림이 아니라면 수갑 채운 손을 잡아끄는 대신 짤막한 몽둥이 끝을 잡고 따라오게 한다고 한다. 이는 비무슬림들을 불결하게 여기는 꾸란에 기록된 나지스 사상(꾸란9:28) 때문이다. 다섯째 : 이슬람에서는 비무슬림들을 친구로 삼는 것을 죄악시한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것은 꾸란에 기록되어 있는 명령이다.(꾸란3:28, 4:139, 4:144) 유럽에서 이슬람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는 사람들을 위해 안내하며 질문에 답변해주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 거기에서 어떤 사람이 비무슬림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도 되는지를 문의하였다. 이슬람 성직자는 이렇게 답변했다. “그 초청에 응하는 것은 비무슬림들을 친구로 사귀지 말라는 알라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가면 안 된다.” 심지어 꾸란에는 “비무슬림들은 가장 사악한 짐승들”이라고 정의한다.(꾸란8:55) 짐승들 중에는 애완용으로 사랑받는 동물들도 있다. 그러나 사람만 보면 달려들어 공격하는 사악한 짐승은 보이는 대로 사살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이슬람 외의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사악한 짐승이라는 꾸란의 구절 때문에 이슬람권에서는 이를 적용한 잔인한 살인사건들이 종종 발생한다. 심지어는 유럽친구들과 사귄다는 이유로 자기의 친자식들을 명예 살인하여 알라에게 충성심을 증명하려는 헌신된 무슬림들의 기사가 가끔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여섯째 : 타크피르 문화 때문이다. 이슬람에서 카피르(Kafir)는 불신자라는 뜻이지만 배교자 혹은 이교도를 포괄적으로 칭하는 말로 “죽여도 좋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타크피르”는 카피르를 처형할 때 무슬림들이 외치는 구호 같은 것인데, 지금도 타크피르를 외치면 주변의 무슬림들이 돌과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어 카피르에게 폭력을 행하여 죽이기까지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슬람에서는 자경단이라는 것이 있는데 배교자, 간음한 자, 살인자 등 주요 범죄를 한 자들은 법정에 끌고 가지 않고 직접 처형할 수 있다는 샤리아 율법에 근거를 둔다. 따라서 카피르에게 임의로 폭력을 가해도 처벌 받지 않는 것은 이슬람권에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집단으로 몰려가서 기독교인들이 예배드리는데 불을 지르거나 결혼식장에 몰려가 테러를 저지르는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이슬람 학자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5인방 중의 하나이며 이슬람에 관한 책을 120권이나 쓴 유수프 가라다위는 “만일 배교자를 살해하라는 율법이 없었다면 이슬람은 오래 전에 없어졌을 것이다”고 말했다. 일곱째 : 딤미(Dhimmi) 사상 때문이다.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기독교인이나 유대교인들로부터 목을 자르지 않는 대가로 받는 인두세(지즈야-Jizya)라는 세금제도가 있었는데, 이런 세금을 내고 목숨을 부지하는 하층민들을 딤미(Dhimmi)라고 불렀다. 이 딤미 제도는 철저한 인권 유린, 폭력과 무거운 세금으로 타종교인들을 괴롭히던 제도였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을 통치할 때 없애버렸다. 그러나 그 정신은 아직도 무슬림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열성적인 무슬림들은 꾸란을 읽다가(꾸란9:29) 이 제도가 사라졌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속히 샤리아로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어 21세기에도 이 제도를 실행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매주는 아닐지라도 모스크에서 설교를 통해 이런 가르침을 받고 있는 무슬림들은 타문화에 적응이 거의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이미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무슬림들도 많은데 왜 하필 극단주의자들의 견해를 들먹이며 혐오감을 조성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단주의 무슬림들이 깜짝 놀랄만한 테러를 저질렀을 때 그 많은 평화주의자 무슬림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들도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로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이슬람의 궁극적인 목표에는 동의하지만 성취 방법에서만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인 것이다. 5.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종교인가? 우리는 이슬람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종교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즉 아브라함의 종교를 이삭을 통해서 전수받은 사람들이 기독교와 유대교인들이라고 한다면 이스마엘을 통해서 전달 받은 사람들이 바로 무슬림들이라고 하는 설명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슬람의 신 알라(Allah)와 기독교와 유대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섬기던 바로 그 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기독교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종교를 타락시키고 경전으로 내려 준 성경을 변질시켰기 때문에 무함마드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 경전의 원본을 내려보내어 아브라함의 종교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 이슬람이라는 주장을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없이 반복되는 이런 거짓말에 속아서 오늘날의 중동사태를 배다른 형제들의 싸움이니 이삭과 이스마엘의 싸움이니 하면서 무슬림들의 근거 없는 주장을 대신 홍보해 주고 있는지 모른다. 무함마드는 과연 이스마엘의 후손인가? 이 문제를 생각하자면 거슬러 올라가서 아브라함부터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경의 아브라함(Abraham)과 꾸란의 이브라힘(Ibrahim)이 과연 같은 인물인가? 우선 성경의 아브라함은 아버지 이름이 데라(창11:31~32)라고 되어 있는데 꾸란의 이브라힘의 아버지 이름은 아자르(Azar)라고 한다.(꾸란6:74) 우선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는데 99세 때부터 하나님께서 바꿔주신 이름이다.(창17:5) 그런데 꾸란의 이브라힘은 젊었을 때부터 이브라힘이라고 불리던 사람이었다.(꾸란 21:60) 또한 성경의 아브라함은 이방인들에 의해서 불속에 던져진 일이 없는데 꾸란의 이브라힘은 이방인들이 그를 불속에 던진 것을 알라께서 구해 주셨다고 한다.(꾸란21:68~69) 꾸란의 여러 주석에 보면 그를 태워 죽이려던 이방인들은 앗수르왕 니므롯의 백성들이라고 한다.(김용선 주석, 최영길 주석) 특별히 성경에 아브라함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간 일이 없는데 꾸란의 이브라힘은 메카에서 이스마엘과 함께 카바(Kaaba)신전을 건축한 사람이라고 한다.(꾸란2:125~127) 그리고 이슬람의 제 2경전이라고 불리는 부카리의 하디스(Sahih al Bukhari)에 보면 이브라힘은 이스마엘에게 이혼을 명령했다는 것이다.(Bukhari hadith volume4 book55 number584) 성경과 꾸란의 이러한 극심한 내용상의 차이는 성경의 아브라함과 꾸란의 이브라힘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라도 메카에 가서 살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스마엘이 메카로 간 것이 아니라 바란 광야에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창21:21) 우리 성경은 ‘그가 바란 광야에 살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애굽 여인을 아내로 얻어 주었다’고 되어 있어서 애굽 여인과 결혼할 때는 그가 바란 광야에 살았지만 평생을 거기서 살았다는 말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때에’라는 말이 없다. ‘그는 바란 광야에 살았다. 그리고 그의 모친이 애굽 여인을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며 킹제임스 번역이나 굳뉴스 바이블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이스마엘의 거처는 바란 광야 즉 이스라엘 남쪽이며 모세가 열두 정탐꾼을 보냈던 가데스바네아 북부의 바란 광야였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이 메카에 가서 살았다는 이슬람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보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이스마엘의 후손들 중 어떤 사람이라도 메카에 가서 살았고 그들의 후손 중에 무함마드가 태어나서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친절하게도 이스마엘의 후손들의 거처까지 알려주고 있다. '이스마엘의 자손들은 하윌라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 편에 거주하였더라’(창25:18) 그런데 하윌라에서 술까지 통하는 지역이 어디인지 우리가 잘 모른다. 그러나 친절하게도 영어 성경에 보면 거기가 어딘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Near the border of Egypt(이집트 국경 부근)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쉽게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스마엘의 모친인 하갈은 애굽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스마엘의 아내도 애굽 여인이었다.(창21:21) 그렇다면 이스마엘과 그의 후손들이 애굽 근처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언어이자 할머니의 언어를 그 자식들과 손자들이 자연스럽게 배웠을 것이기 때문에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살았을 것이라는 것이 자연스런 추측이며 성경도 애굽 국경 부근에서 살았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 측의 주장을 합리화 하려면 이스마엘의 몇 대 후대의 자손들이 언젠가 메카로 이주해 와서 그 조상 이스마엘이 아브라함과 함께 섬기던 그 창조주 하나님을 섬겼었는데 그 후손 중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주장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인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훌륭한 학자가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근거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시편 83편을 읽어 보면 3절에 ‘주님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의 원수들이 누구란 말인가? 6절에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 이들이 주님의 원수들이라고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마지막 18절에 보면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마치고 있다. 즉 이스마엘 후손들과 하갈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원수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며 살았던 것이지 그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그대로 대대손손이 물려 주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하갈의 복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장래를 예언해 준 것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He will lie in hostility toward all his brothers.’(창16:12) 이스마엘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형제들과 대적하며 살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으며 이스마엘의 후손들도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였더라.’(창25:18)라고 번역되었지만 영어 성경에 보면 ‘they lived in hostility toward all their brothers.’라고 되어 있다. 이스마엘은 그의 형제들과 적대적 관계로 살 것이고 그의 후손들 역시 그 형제들 즉 이삭의 후손들과 적대관계를 가지고 살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었고 또 그 예언대로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시편83편) 그러므로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전수받은 그 믿음을 충성스럽게 지키다가 무함마드 때에 그 믿음을 크게 확산시켰다는 주장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원수로 살았다는 성경 말씀과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부카리의 하디스에 보면 이브라힘이 이스마엘과 하갈을 데리고 메카에 와서 거기 버려두고 갔다고 한다. 그 때 메카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천사가 파준 우물 잠잠(ZamZam)에서 물이 흘러나오자 주르훔(Jurhum) 족속의 사람들이 와서 함께 살기를 청하였고 그 때 이스마엘은 젖먹이 였으며 그들이 이스마엘에게 아랍어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갈은 주르훔 족속의 아랍 여인과 이스마엘을 결혼 시켰다는 것이다. (Sahih Bukhari volume4 book55 number584) 그래서 이스마엘은 아랍인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는데 성경에 의하면 이스마엘은 메카에 가지도 않았으며 이집트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러나 이 하디스를 기초로 하여 후대 사람들이 무함마드의 족보를 만들어 내었다. 이슬람의 제2의 경전인 부카리의 하디스에 이스마엘은 주르훔 족속에게서 아랍어를 배웠다는 것을 보면 아랍인들은 이스마엘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스마엘이 모든 아랍인들의 조상이라는 말은 거짓이라는 것이 이슬람 내부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후대에 만들어진 무함마드의 족보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씨엗 유쑤프(Syed Yusuf) 등의 대부분의 이슬람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무함마드는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 까이달(Qaidar-게달)의 후손이라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부카리의 하디스가 만들어지기 거의 100년 전에 무함마드의 전기 ‘씨라툴 라쑬알라’를 최초로 펴낸 이븐 이스학(Ibn Ishaq)같은 비중있는 학자들의 자료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이스마엘의 첫째 아들인 나빗(Nabit-느바욧)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자료는 모두 무함마드부터 이스마엘 까지를 25 세대로 그 족보를 소개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웹싸이트에는 30세대로 소개하는 곳도 있다) 무함마드는 주후 570년에 태어났으며 아브라함은 주전 2000년 전 사람이다. 그 두 사람 간을 연결하는 인물들이 본인들을 제외하면 23명이라는 족보는 누가 봐도 약 2570년간을 채우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하디스에 무함마드가 자신의 근본에 대해서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자기(무함마드)는 무다르(Mudar)의 후손이며 그것은 지브리일(Gibriil) 천사가 자기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는 점이다. (Ibn Sa'd, Kitab al-Tabaqat al-Kabir, Volume I, p. 4) 무함마드 자신도 몰랐고 그 조상들에게 전해들은 것도 아니고 자신의 가문이 간직하고 있었던 족보에 근거한 것도 아니며 다만 천사가 말해주었다는 아무도 입증할 수 없고 증거도 찾을 수 없는, 계시를 빙자한 무함마드 개인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그것을 근거로 부카리의 하디스에 보면 무함마드가 키나나(Kinana)의 아들 나드르(Nadr)의 자손 무다르(Mudar)의 종족에 속하였다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Sahih al Bukhari, volume 4, Book 56, Number698) 물론 후대 사람들은 이들의 이름을 무함마드의 족보에 포함시켜서 명단을 만들어 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슬람 이전의 문헌에는 이스마엘과 무함마드가 혈통상으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자료가 없다. 이는 모두 이슬람 이후에 무함마드가 했다는 말을 수집하여 엮은 하디스에 근거를 두고 만들어진 것인데 그 하디스라는 것들이 무함마드가 죽은 지 약 200년 후부터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 지가 200년이 넘은 사람이 살았을 때 했다는 말을 수집했다는 것의 신뢰도가 어느 정도나 될까를 상상해 보기 바란다. 그래도 무슬림들이 경전처럼 여기는 부카리의 하디스에서는 종종 황당한 기사들이 발견되는데 예를 들면 ‘지구 상의 최초의 성전은 메카의 카아바 신전(Masjid ul Haram)이고 두 번째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Masjid al Aqsa)인데 그 두 건축물 사이의 역사적인 간격은 40년 이라는 것이다.(Sahih al Bukhari Volume 4 Book 55 number 585) 카아바 신전이 자기들 말로는 이브라힘과 이스마엘이 건축했다면 주전 1950년 경에 건축했다는 말인데, 무함마드가 주후621년 어느 날 밤중에 천마(天馬)를 타고 방문했다는 예루살렘 성전(Masjid al Aqsa)과 역사적 차이가 40년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때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Titus)장군에 의해서 파괴되어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무함마드는 거기 가서 선지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고 주장하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오늘날 이슬람의 성지가 되어 있는 것이다.(꾸란17:1 참조) 이슬람의 제2경전이라고 하는 부카리의 하디스가 이 정도 수준이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종교가 아니라 무함마드가 속했던 꾸라이시(Quraish) 종족의 신 알라(Allah)를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한 신으로 교묘하게 둔갑시키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이름을 메카로 끌어들여 그가 자신의 서자인 이스마엘과 함께 카아바 신전을 건축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 무함마드가 창시한 종교인 것이다. 그러기에 전에는 이슬람을 마호메트교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근거 없는 비성경적 말을 함으로 본의 아니게 그들의 거짓말을 홍보해주는 어리석은 행위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 기고/강연
    • 강연/특강
    2016-05-27
  • 이슬람(1) (이 글은 5월 25일(수) 거제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부산이단대책세미나 강의안입니다.) 이슬람 ▲ 이만석 목사 (현. 한국이란인교회 담임, 4HIM 대표) 1. IS는 가짜 이슬람인가? 최근에 이라크의 순니파 무장단체인 소위 이슬람국가(IS)의 잔혹한 만행으로 온 세상이 놀라고 있다. 한남동 이슬람 사원의 이주화 이맘은 IS 때문에 이슬람의 이미지가 나빠지자 서둘러 조선일보를 통해서 인터뷰 기사를 내면서 선긋기에 나섰다. 한마디로 IS는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이슬람의 얼굴로 가장한 자들”이며 가짜 무슬림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매스컴을 통해서 대부분의 서방세계 정치인들의 입을 이용하여 대중에게 여과 없이 홍보되고 있다. 심지어 교황청 국무장관 안드레아 토르넬리 추기경은 이태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근에 발생하고 있는 중동의 기독교인들 살해 현상은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충돌이 아니라 개인적인 폭력”이라고 말했다.(Vatican Insider 2014.8.26.)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만일 그들이 가짜 무슬림들이면서 이슬람의 이름을 사칭하여 명예를 실추시켰다면 왜 세계적인 집단 시위가 일어나지 않고 잠잠할까?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이슬람의 경전 꾸란을 한 권 태우겠다고 했을 때 온 세계의 무슬림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며칠간 쉬지 않고 시위를 벌였었고 이로 인한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바그람 공군기지의 꾸란 소각 사건이나, 미국에서 별로 인기가 없어 관람자가 거의 없었던 “순진한 무슬림”이라는 짧은 영화가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내용인 것이 발견되었을 때도 세계적인 무슬림들의 폭력시위가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분노한 시위대가 리비아의 미국 대사 및 대사관 직원들까지 살해했었다. 꾸란 한 권 태우는 일이 이슬람의 명예를 얼마나 실추시켰을까? 만일 이슬람이 참으로 평화의 종교라면 IS처럼 이슬람의 이름으로 수천 명의 생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이 더 이슬람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국의 한 무슬림이 신문에 인터뷰 한 번 하는 것으로 그 모순을 뒤집으려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편 세계적인 집단시위가 일어난다는 것은 몇몇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각국에서 이슬람 성직자들의 선동과 동원이 없으면 세계적인 집단시위는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런던 시내에서 나이지리아계 영국 시민권자인 ‘아데볼라요’라는 무슬림 청년(28)이 영국 군인 릭비(25)를 차로 들이받은 후 칼로 난자하고 참수하면서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며 자랑스러운 듯 행인들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포즈를 취했다는 것은 꾸란을 한 권 태우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이슬람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킨 너무 유명한 사건이지만, 이로 인해 세계적인 무슬림들의 폭력시위가 있었다는 것은 들어본 일이 없다. 이슬람의 율법에서는 이슬람을 보호하기 위한 폭력, 혹은 배교자를 대상으로 하는 폭력은 처벌받지 않는다. 이슬람의 명예를 위해서 혹은 무함마드를 모독하는 자를 살해하는 행위 등은 정당화 된다. 심지어는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느라 정부가 집행하지 못하고 있는 이런 행위를 감행한 담대한 무슬림들에게는 격려 차원에서 상금을 지급하기도 한다. 이것은 비단 이슬람 국가 혹은 샤리아(이슬람 율법)로 통치되는 지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무슬림들이 소수인 지역에서도 이슬람의 성직자에 의해서 “살해하라”는 파트와(종교적 명령)가 떨어지면 알라의 이름으로 그 명령을 집행하려는 철저히 헌신된 무슬림이 언제든지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시각에 대해서 분노하는 무슬림도 있을 것이고 이런 견해를 부인하는 온건하고 순진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꼽틱 기독교 사제 ‘자카리아 보트로스’라는 사람의 예는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방송을 통해 이슬람의 경전 꾸란의 허구와 모순을 정확한 이슬람 내부 자료를 근거로 밝히고 있기에 그 방송을 보는 많은 무슬림들이 타종교로 개종하거나 이슬람에 회의를 품게 되는 현상이 퍼지게 되었다. 이에 이슬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알카에다는 그를 살해하는 사람에게 미화 6천만 불의 현상금을 지급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미국 정부가 이슬람 테러단체 알카에다의 수장 빈 라덴에게 걸었던 현상금 5천만 불보다 20%나 더 큰 금액이다. 또한 ‘악마의 시’라는 글로 이슬람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의 목에 걸린 현상금은 150만 불로 시작해서 300만 불까지 치솟았지만 자카리아 보트로스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들은 언론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미국과 유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슬람을 모독했다는 죄목을 붙여 살해를 명하면서 상금을 주겠다는 것은 누가 봐도 테러를 사주하는 행위다. 알카에다는 국제법을 무시하는 테러집단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치부하더라도, 살만 루시디를 살해하는 자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한 것은 호메이니의 명을 받들고 있는 이란 정부였다. 이란 뿐 아니라 이슬람권에서는 테러범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거나 영웅 대우를 함으로 테러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온 세계를 경악시킨 9.11테러를 사주한 빈라덴은 이미 죽었지만 지금도 이슬람권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고,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다는 이유로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한 살해범 ‘칼레드 이슬람볼리’의 이름은 테헤란에 한 거리의 이름으로 명명되었으며, 그가 옥중에서 부르짖는 사진을 넣은 기념우표까지 발행되었다. 그러나 굳이 상금을 걸거나 영웅 칭호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슬람, 꾸란, 알라, 무함마드 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한 이슬람 성직자가 그를 살해하라는 파트와(종교적 명령)를 선포하면 충성된 무슬림에 의해서 언제 어디서나 살해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사실 세상에는 테러와는 상관이 없는 수많은 무슬림들이 평화스럽게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이므로 테러와 관련짓지 말라고 강변한다. 설사 무슬림들이 모두 테러범은 아니더라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테러는 무슬림들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권에 살면서도 이슬람의 경전 꾸란에 심취하게 되면 꾸란에 기록된 이교도들에 대한 증오 개념에 세뇌되면서 돌발적 테러범이 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외로운 늑대’형 무슬림 테러를 수사하면서 벽에 부딪히는 이유는 그들이 현존하는 어떤 테러단체와의 연관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테러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의 핵심은 정치인들이 전문가들의 조언을 통해서 테러의 원인은 바로 이슬람의 경전 꾸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세계 인구의 20~25%를 점하고 있는 무슬림들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별 수 없이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지만 꾸란의 평화적 가르침을 오해하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테러범들이 문제다’는 견해를 고집하게 된다. 이것을 서양에서는 ‘정치적으로 수정된 견해(Politically corrected opinion)’라고 부른다. 종교에 관심이 없는 대부분의 순진한 대중은 계속해서 매스컴을 통해 귓전을 때리는 이런 왜곡된 견해를 보편적 정설로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 답답하다. 소위 평화주의 무슬림들은 이런 순진한 정치인들이나 매스컴을 이용하여 이슬람을 계속 평화의 종교로 믿도록 강요하는 한편, 이슬람의 정체를 알고 그들이 숨기고 싶은 혐오스런 참모습을 밝히는 사람들은 소위 증오법 혹은 차별금지법 등으로 묶어서 처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유럽에서 성공을 거두어 유럽인들은 이슬람에 대해서 부정적인 표현도 못하고 처벌이 무서워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슬람의 지상목표인 ‘샤리아로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원리주의자들의 폭력과 평화주의자들의 거짓은 무슬림들의 가장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무기다. 이들은 공동의 지상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서로를 비난하는 척하며 적당히 역할분담을 한다. 즉 IS처럼 과격한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보여준 행동모범과 꾸란의 명령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감히 접근이나 간섭을 못하도록 가능한 한 잔인한 테러를 자행하고 대중매체를 통해서 동영상을 공개하여 대다수의 소심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이는 꾸란에도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믿는 자들이여! 너희가 얼마나 잔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네 이웃의 불신자들과 싸우라. 알라는 항상 의로운 자들 편이시라는 것을 알라.(꾸란9:123) 이는 전쟁터에서 무장하고 대치하고 있는 적들과의 전쟁이 아니라 이웃에 살고 있는 불신자들, 즉 이슬람 이외의 종교를 믿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사주하고 있는 구절이다. IS는 바로 이런 꾸란의 명령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강대국들이나 알라의 법을 모르는 무지한 백성들의 눈치를 본다든지 체면이나 여론 때문에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명백하게 기록된 창조주의 말씀인 꾸란의 명령대로 실천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행위라는 종교적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소동이 사라지고 종교가 모두 알라의 이름으로 통일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꾸란8:39) 여기서 소동이라고 번역된 아랍어 피트나(fitnah)는 최영길 교수가 한글로 꾸란을 번역하면서 “알라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각주를 달았다. 전체적으로 이 구절은 지구상에 무슬림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죽여야 한다는 이론이 도출되고 이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이다. 어떤 죄를 짓거나 그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았더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고 다른 종교를 고집한다는 것만으로도 핍박과 살해의 정당한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꾸란9:5, 꾸란5:33 등 참조) 소위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들도 이들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이슬람 학자들이라면 부인할 수 없는 만쑤크(Mansukh)교리에 의해서 이미 취소된 평화로운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믿도록 많은 홍보비용을 투자하여 미화된 거짓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그 우두머리들은 같은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서로 역할만 분담할 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고 배후에서 서로 돕고 있다. 이것도 정확하게 꾸란에 명시되어 있다. 꾸란은 무슬림들이 비무슬림들을 친구로 삼지 못하도록 명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보호와 유익을 위해서는 허락한다는 것이다.(꾸란3:28) 그 한 예를 들어보자. 압둘 라흐만 알 아무디는 클린턴 대통령의 자문 위원이기도 했으며 9.11 테러 후에도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도회 때 강사로 초청받을 정도로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그가 테러집단으로 알려진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후원한다는 것과 모금을 하여 불법 송금한 것이 발각되어 2004년 재판을 받고 미화 75만 불 벌금과 23년 형을 받고 수감되어 있다.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지만 뒤로는 서로 돕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표면상 미국과 공조하는 것처럼 보여도 테러범들에게 가장 많은 송금을 하고 있다는 것이 위키리크스를 통해서 이미 폭로되었다. 이슬람 국가 IS(Islamic State)는 이름 그대로 이슬람의 경전 꾸란과 무함마드의 행동모범을 근거로 만들어진 샤리아를 철저하게 지키는 무장 단체로서 이슬람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가장 이슬람국가 다운 이슬람국가이며, 이것에 매력을 느낀 충성되고 헌신된 무슬림들이 세계 각국에서 모여들고 있다. 그들에 의해서 잔혹하게 고통 받으며 살해되고 있는 기독교인들과 비무슬림들을 지켜주고 보호하는 일을 위해서 물론 국제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힘을 모아야 하겠지만 우선 하나님의 보호를 간절히 구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 할랄 산업 육성 정책을 반대하는 열 가지 이유 우리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 국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국민들에게 행복을 주는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대통령의 노력을 적극 지지하며 감사하게 생각한다. 정부 정책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정부 세력과 동일시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리 가족들과 국가 안보를 위해서 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위해서 정부의 할랄 산업 지원 육성 정책을 폐기할 것을 촉구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래와 같은 심각한 문제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할랄이라는 것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의해서 “허용한다”는 뜻이다. 즉 해도 좋다는 것이지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을 “와집”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 의하면 고의가 아니고 모르고 먹었거나 어쩔 수 없어서 먹었을 경우는 알라께서 용서하신다(꾸란6:145)고 한다. 그러므로 할랄 인증만 받으면 17억 무슬림들의 식료품을 공급하게 되어 일확천금을 할 것처럼 홍보하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행위다. 둘째, 할랄 고기는 몇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하는데 첫째는 무슬림이 도축해야 하며 둘째는 도축할 때 반드시 아랍어로 “비스밀라(알라의 이름으로)”라고 외쳐야 하며 셋째 짐승이 죽을 때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방향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죽은 고기, 피, 알코올 성분, 돼지고기 등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위생과 전혀 관계가 없고 건강이나 웰빙과도 전혀 관련이 없으며 다만 이슬람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만 중요하다. 오히려 할랄식 도축은 매우 비위생적이다. 왜냐하면 짐승의 목을 반쯤 잘라놓고 피가 쏟아지는 채로 공중에 매달아 놓아 고통스런 짐승이 버둥거리는 동안 피가 사방으로 튀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생적인 도축장을 건설했어도 비무슬림이 도축을 한 것은 할랄이 아니다. 이를 “청결하고 안전한 먹거리”라고 홍보해 주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것이다. 셋째, 일반 도축은 전기충격으로 기절시켜놓고 짐승을 잡기 때문에 짐승이 전혀 통증을 못 느끼면서 죽지만 할랄 도축 방식은 피를 먹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짐승의 모든 감각이 정상인 상태에서 목뼈를 건드리지 않고 혈관과 식도와 기도를 자르고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그래야 심장의 펌프 작용으로 피가 분출되기 때문이다. 짐승은 거꾸로 매달려서 피를 분출하면서 모든 감각과 의식이 정상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죽는 그 순간 까지 몇 분간 극도의 고통과 분노와 스트레스를 느끼면서 죽어간다. 이 때 짐승의 체내에서 인체에 해로운 독성이 생성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숨기면 안 된다. 이는 동물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면 안 된다는 현행 동물보호법에도 저촉되는 범법행위임에 분명하다. 주로 할랄 고기를 섭취하는 이슬람권의 평균 수명이 타문화권보다 짧다는 것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심지어는 1인당 국민소득 9만 불을 훌쩍 넘은 카타르도 평균 수명은 3만 불도 채 안 되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짧다는 것은 결코 기후 문제로만 돌려서는 안 되며 음식 문제도 분명 관련이 있다고 본다. 넷째, 할랄 도축장을 건설하는 것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할 문제가 아니다. 현재 할랄 고기의 대부분은 호주에서 수입한다. 그런데 호주산 쇠고기와 한우의 가격은 가격 경쟁이 안 된다. 등심을 기준으로 볼 때 2015년 초 축산협회의 조사에 의하면 호주산은 Kg 당 21,000원 이지만 한우는 34,000원이다. 한우를 도축할 때 할랄 도축사를 고용하고 할랄 관리인을 고용하면 인건비가 추가 부담되어 할랄 한우 값은 추가 상승요인이 있는 반면 호주산 쇠고기는 한국:호주 FTA에 의해서 관세를 매년 2.6%씩 인하하여 앞으로 15년 후면 관세가 완전 철폐되므로 가격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것이다. 할랄 도축장을 건설하면 그 비싼 한우 할랄고기를 누가 사먹을 것인가? 무슬림들 대상이라면 현재 수입하고 있는 호주산으로 충분하며 무슬림 관광객들이 대거 유입된다 하더라도 비싼 할랄 한우를 먹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이는 시장 조사와 수지 타산을 정밀 조사하여 개인과 업체가 결정할 일이지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밀어붙일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 30여 곳 있는 도축장도 20여 곳으로 통폐합하는 형편인데 할랄 도축장을 다시 만든다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섯째, 할랄 도축장에는 무슬림들만 근무해야 하기 때문에 잘 훈련된 할랄 도축사들을 수입해 와야 한다. 영국도 파키스탄 할랄 도축사들 5천명을 수입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슬람 율법에 철저한 원리주의자들일 가능성이 크므로 지역주민들과 필연코 마찰이 발생할 것이다. 이슬람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 유럽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아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할랄 인증에 소요되는 비용을 정부가 지원한다는 것은 특정 종교의 율법을 준수하는 일을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종교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할 정부가 이를 지원하는 것은 위헌의 소지가 있으므로 금해야 한다. 일곱째, 이슬람 율법에 “나지스(Najis)” 개념이 있는데 이는 더럽다는 뜻이다. 비무슬림들은 더럽기 때문에 상종하면 안 된다는 이슬람의 율법이며 비무슬림들이 만진 물건도 더럽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할랄 도축장에서 5Km 반경 내에 돼지 도축장이 있으면 안 되고, 비할랄 식품과 함께 운반해도 안 되고, 비할랄 식품을 조리하던 도구를 사용하여 요리해도 안 된다는 개념이다. 이는 무슬림이 아니면 더러운 존재들이라는 이슬람의 배타적 교리 때문에 그렇다. 이는 비단 음식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람도 무슬림들은 할랄(허용된 것)이고 비무슬림들은 하람(금지된 것)이라고 한다. 무슬림들 여성들(할랄)이 비무슬림 남성(하람)과 결혼하는 것은 금하며 그를 이슬람으로 개종시켜야 결혼이 허용(할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무슬림들이 음식과 식자재만 할랄로 만들어 팔면 된다는 생각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는 한 헛된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여덟째, 할랄 인증에 소요되는 비용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이슬람을 확산시키기 위한 포교 자금 혹은 이슬람 테러 자금을 지원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2011년 1월 5일 미국 기독교방송인 CBN은 70억불 규모의 프랑스 할랄 산업의 60%가 테러 단체로 잘 알려진 무슬림 형제단에 속한 기관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방송했다. 아홉째, 이슬람의 할랄 규정은 세계적으로 통일된 것이 없다. 국가마다 그 기준이 다르고 한 국가에서도 인증기관마다 기준이 다르다. 어제 있었던 할랄 기준도 무프티(Mufti)급의 성직자가 파트와(Fatwa)를 선언하면 언제든지 없어질 수도 있고 새로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가변적인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돈을 투자하면서 동분서주하는 행위는 결코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열째, 일반적으로 무슬림들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원리주의 무슬림들은 샤리아로 통치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쟁하고 있다. 오일 달러를 이용하여 샤리아의 영향력을 키우려 하는 것이 이슬람 금융 및 쑤쿠크(이슬람 채권)라고 한다면 음식을 통해서 샤리아의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것이 할랄 확산 전략이다. 할랄 인증을 받은 회사의 경영진은 많은 돈을 투자해서 어렵게 받은 할랄 인증인데 혹이라도 직원들 중의 한 사람이 이슬람 율법을 어기는 것이 할랄 관리자들에게 발각되어 인증이 취소될 것이 두려워 직원들에게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 준수를 강요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즐기는 소주와 삼겹살도 회사를 해롭게 하는 준범죄행위로 취급되므로 화기애애한 직장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할랄 장려 및 인증 비용 지원 정책은 식품산업 세계화를 통한 기업의 경쟁력을 키워주기 위한 경제 활성화의 일환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할랄 산업이란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를 지키게 하기 위해서 음식으로 그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이슬람 포교 전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유럽의 경우를 보건대 국가적 불협화음의 불씨가 될 것이다. 무슬림들이 급증하고 있는 유럽에서는 자경단을 조직하여 샤리아로 통치하는 지역이 프랑스에만 750곳 있으며 샤리아로 재판하는 재판소가 영국에만도 85개소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스웨덴에도 무슬림들이 완전히 접수하여 샤리아로만 통치하는 지역이 55개소 있으며 이 지역에서는 무슬림 자경단이 정부경찰을 공격하고 접근을 금지시킨다고 한다. 이는 유럽의 무슬림들이 특히 악해서가 아니고 유럽인들이 무슬림들에게 복지혜택 제공을 소홀히 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다만 이슬람의 경전의 가르침이 배타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에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므로 할랄 전략을 통한 이슬람의 율법 샤리아의 영향력 확대는 한국의 보편적 미풍양속과 심각한 마찰을 일으키게 될 것이 확실하다. 이런 일에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국민으로서 결코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킬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향유하며 후손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물려줘야할 사명이 있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할랄 산업에 지원하는 것을 당장 포기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 3. 일년에 한 번은 이슬람에 대해서 설교하라 2015년 말 현재 한국에 이주 노동자들이 60만명을 넘어섰고 노동 외의 목적으로 거주하는 외국인들까지 합하면 170만명을 넘는 외국인들이 우리 주변에 들어와 함께 살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들을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비용들이지 않고 선교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기회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문화충돌의 위기를 말하기도 한다. 굳이 어떤 예를 들지 않더라도 세상에는 다양한 문화가 있고 각 문화권마다 특색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아주 사소한 문제가 큰 피해를 불러올 수가 있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그 중에도 이슬람권에서 온 근로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매우 특별한 문화적 습관이 있기 때문에 제대로 알고 접근하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것이다. 유럽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즉 이슬람이라는 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곤혹을 치르고 있으며 심지어 스위스에서는 모스크에 첨탑 시설을 금지하자는 안건을 국민들이 서명운동을 벌여 국민투표로 통과시켰고, 프랑스에서는 여인들의 몸 전체를 가리는 부르카 착용을 금하며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는 벌금을 물리는 등 이슬람을 제재하는 법을 만들고는 있지만 이는 사후 약방문일 뿐 근본적인 대책은 미리 세웠어야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유럽뿐만 아니라 이슬람이 들어가는 곳은 어디서든지 범죄가 증가하고 사회 분열이 일어나고 폭력과 테러 사건이 난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유럽은 기독교 문화가 오래 전부터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이 제도적으로 적용되고 있어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였다. 그래서 소위 “똘레랑스(관용)”정신이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었기에 다른 문화에 대한 관용은 선진국 사람들로서의 성숙한 인격의 상징이라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산업혁명과 기술과학 발달로 경제가 급성장하다보니 노동인구가 부족하게 되어 가장 가까운 북아프리카에서 값싼 노동력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채택했다. 무슬림들은 본국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던 사람들이었기에 처음에는 유럽의 풍요를 체험하면서 그저 유럽에 거주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무슬림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태도가 달라지면서 무슬림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집단행동을 일삼아 사회적인 불협화음이 심화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1부4처를 인정해 달라든지, 학교식당에서 할랄 음식을 급식하라든지, 이슬람을 모독하는 자를 처벌하라는 법을 제정해 달라는 등 ... 이런 끈질긴 집단 시위를 통한 요구로 영국에서는 이미 각 도시에서 샤리아 법정이 85개나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현상들을 연구 분석한 독일의 메르켈 총리, 영국의 캐머런 총리, 프랑스의 싸르코지 전 대통령은 이구동성으로 이슬람 때문에 다문화 정책이 실패했음을 선언했다. 그런데 사회복지가 발달된 선진국에서 이슬람 때문에 실패했다는 다문화 정책을 대한민국 정부가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 기고/강연
    • 강연/특강
    2016-05-27
  • JMS의 포교전략과 대책(3) (이 글은 5월 25일(수) 거제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부산이단대책세미나 강의안 입니다.) JMS의 포교전략과 대책(3) ▲ 김경천 목사 (전. JMS 부총재) 예방과 대책 왜 젊은이들이 이단으로 몰려가는가? 이단에 빠지지 말라고 말만 하지 말고, 이단에 빠지지 않는 건강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전염병이 돌면 대책을 세우듯이, 이단들이 창궐하면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단들의 흡인력은 무엇이고, 우리 일반교회의 장점은 무엇인가 제시해야 한다. 일반 정통교회에서 아무리 이단사이비가 나쁜 곳이라고 말하더라도 결국 선택은 개인들이 하는 것이다. 개인들이 소비자의 입장에서 취사선택하게 되어 있다. 교회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1. 바른 성경공부 1) 교리공부의 강화 이단들과 경쟁하여 이기기 위하여 교리 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죄 사함과 중생의 문제, 구원의 확신, 부활문제, 휴거문제, 오병이어 기적을 비롯한 기적과 표적에 관한 문제들, 계시록 등에 대해 확신에 찬 설교와 강의, 교육 등을 보강해야 한다. 그리고 각론에 들어가서도 세밀한 교육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후에도 죄를 짓는가? 구원받고 죄 지으면 구원이 취소되는가? 어떤 때는 구원 받은 것 같고 어떤 때는 받지 못한 것 같고, 구원 받는데도 인간의 행위도 포함되어야 하는가? 믿기만 하면 되는가?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좀 약하지 않은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상급과 구원은 어떻게 다른가? 상급이 구원이고 구원이 상급인가? 내가 죄 사함 받았는가? 어떤 이는 다 받았다고 설교하고, 어떤 이는 일일이 다 회개해야 한다고 하고, 회개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세심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목사들은 예수님께서 피 흘리고 세운 단상에서 십자가 외에 다른 설교할 시간이 없다. 자기 집안 이야기, 자기 자랑, 교훈적이고 윤리선생과 같은 이야기, 다른 철학자 이야기, 신문 읽은 이야기로 장시간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들은 십자가 복음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 잠깐 예화로 족하다. 그런 설교들은 세상 사람들이 더 잘한다. 그 짧은 설교 시간을 예수 십자가 복음 외에 달리 전할 말씀이 또 있는가? 오직 예수 피 복음을 정확하게 전해야 한다. 그래야 교인들이 이단에 빠지지 않는다. 2)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대개 일반교인들이 이단에 빠지는 것은 성경을 확실히 알고 싶어서 궁금해 하다가 빠지는 것이다. 구원 받고 싶고 죄 문제 해결하려고 고민하며 두리번거리다가 이단의 마수에 걸려드는 것이다. 이단의 신도수가 계속하여 많아지는 것은 대부분 일반교회에서 계속 이단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바울의 3대 정신으로 목사들은 무장하여야 한다. 1. 십자가 외에 알지 않겠다. 2. 십자가 외에 자랑하지 않겠다. 3. 십자가 외에 전하지 않겠다. 사실 바울처럼 3층천을 구경하고, 사람으로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체험을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바울은 천국 간증이나 자기의 영적 체험을 말하지 않았다. 바울은 결국은 십자가 외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과거의 모든 기득권을 배설물로 여기고 아낌없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단의 교주들은 자기가 천국엘 갔다 왔네, 자기가 예수님과 황금 길을 걸었네 하면서 마치 자기와 친해지면 예수님과 친해질 수 있다는 듯이 신도들의 환심을 사고 물질을 탐낸다. 교회는 신비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어떤 사람의 천국 지옥 간증도 그로 인하여 십자가가 묻히지 않게 해야 한다. 십자가 외에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제시하는 말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천국지옥 이야기는 성경의 것으로 충분하다. 천국지옥 간증을 하더라도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증거 하면 안 된다. 교회에서 기적과 기사와 신유 그 어떤 것도 십자가 외에 자랑해서는 안 된다. 자랑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라고 하였다. 혹시 누가 기적과 이적을 행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으로 예수님과 이간질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은 마귀의 수족들이다. 교인들로 하여금 오직 말씀에 굳건하게 서게 해야 한다. 3) 교회 바깥에서의 성경공부 절대금지 지나치게 친절하게 다가오는 문화예술, 스포츠 행사, 설문지를 통한 접근 등도 조심해야 한다. 특히 교회 바깥에서의 성경공부는 철저하게 금지하고 조심해야 한다. 성경 공부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다. 이단들이 성경공부를 통해서 어린 영혼들을 미혹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경 공부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단의 성경공부를 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단에 빠지지 않는다. 잘못된 성경공부는 어린 영혼들에게 독약이다. 2. 교회의 경쟁력 강화 1) 변화된 환경에 적절한 대응 지금은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L. Berger)가 말한 것처럼 “이단의 시대”다. 이단(heresy)이란 원래 다수의 의견에 대하여 어떤 이는 소신껏 다른 의견을 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단의 시대란, 이단들이 많아졌다는 의미 보다는, 시대풍조 자체가 이단적이라는 말이다. 신앙도 이제는 더 이상 운명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 종교도 옛날에 가졌던 독점과 권위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예를 들면 천주교에서 파문을 하더라도 개신교에 와서 새 신자로 등록해 버리면 그만이다. 일반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한 교회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을 치리하면 그 사람은 근신하는 것이 아니라, 앙심을 품고 자기에게 동조하는 교인들과 작당(作黨)하고 나가서 바로 옆에다 교회를 세운다든지, 아니면 다른 교회에 등록하고 더 충성하여 자기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더 이상 파문과 출교가 교인들에게 견제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소비자들이 백화점에서 물건을 둘러보고 사듯이, 신앙생활에도 그런 현상이 도래한 것이다. 백화점과 대형마트들은 주변에 널려 있다. 지금은 고객이 왕이다. 교통이 발달하기 전, 과거에는 한 지역이나, 한 나라는 전부 한 종교였다. 운명적으로 지리적으로 한 지역의 사람들은 그 지역 종교만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도 교회도 신앙도 전부 선택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종교를 선택할 때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는 소비자처럼 종교와 교회를 골라서 택하게 되었다. 교회를 택할 때도 아파트의 한 건물에 교회가 7개나 들어서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새로 이사 온 교인은 7교회를 다 둘러보고 자기에게 제일 잘 맞는 교회를 택한다. 그와 같이 정통과 이단도 지금은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내가 속한 집단이 저 집단을 이단이라고 하면, 저 집단에서는 내 집단을 이단이라고 규정한다. CBS에서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이란 것을 방영해도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싸잡아서 욕하며 밥그릇 싸움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여야 한다. 상품을 많이 팔려면 물건자체가 품질이 좋아야 하고, 직원도 친절해야 하고, 포장도 좋아야 하고, 애프터서비스도 좋아야 한다. 물론 광고도 잘해야 한다. 목사의 설교가 광고나 홍보의 행위라면 문화선교는 고객을 우리 상점으로 오게 하는 판촉활동이 될 것이다. 지금은 짝퉁이 범람하고 유사상품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내 고객을 충성스럽게 붙잡아 두고, 새 고객을 계속하여 끌어들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개혁주의는 계속하여 개혁해야 하는 것이다. 교역자들의 마인드가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다. 예수님도 나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겨주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다. 당연히 목사들은 왕으로서 군림이 아니라 종처럼 철저하게 낮아지고, 섬겨주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주님이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목사들은 종의 종이 되어야 마땅하다. 백화점의 직원처럼 친절해야한다. 텔레마케터들은 고객들이 아무리 모욕적인 언사를 써도 참는다. 매출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불친절하다고 보고되면 파면당하기 때문이다. 은행직원은 고객이 다가서면 벌떡 일어서서 맞는다. 목회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이 비행기 스튜디어스처럼 90도 각도로 인사는 안할 지라도 적어도 웃는 얼굴과 친절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가식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생명주고 산,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품은 세계 최고의 상품이다. 인류의 죄와 사망을 해결하는 예수님의 보혈보다 더 좋은 제품은 없다. 사실 진시황제가 찾았던 불로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인 것이다. 인류의 죄와 사망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는 없다. 이 확실한 상품을 가지고서도 시장점유율이 자꾸 떨어진다면 대리점 문 닫고 지점장 바꿔야 한다. 짝퉁과 유사제품에 자꾸 고객을 빼앗긴다면 근무태만을 들어 파면당해야 옳지 않은가? 교역자가 바뀌면 교회는 바뀐다. 2) 문화선교 강화 교인들끼리 조기축구라도 결성하고, 그 교회축구팀에 일반인들을 가입시켜서 자꾸 접촉점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야구선수가 있다면 야구팀을 만들어 교인들의 사회적 동물로서의 욕구를 해소시켜 줘야 한다. 그런 식으로 적극적으로 인적 네트워크를 가로, 세로로 형성해 나가야 한다. 낚시하려면 낚시 밥을 근처에 뿌려야 한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어망을 던져야 한다. 교회에서 산악회등도 만들어서 건전하고 세련된 행사를 자주 제공해야하는 것이다. 성도들 가운데 재능이 있는 분들을 적극 활용하여 전도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예를 들면 성도 중에 왕년에 탁구 선수가 있었다면 그 탁구를 문화선교의 지렛대로 삼으면 된다. 붓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활용해야 한다. 교인들의 인력(人力)을 집대성하여 전도역량을 극대화해야 한다. 교회를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전도의 장(場)으로 삼아야 한다. 일주일에 두세 번 예배 시간을 위해 일주일 동안 내내 교회 문을 잠가 놓아야 할 것인가? 대 예배실이 곤란하다면 교육관이라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3) 군선교 강화 젊은이들이 있는 곳에는 다 가야 한다. 특히 군인들 전도를 위해서 훈련소에도 가야하고, 군부대도 가야 한다. 훈련소에서의 훈병들의 심리는 단순하다. 어디에 가면 더 맛있는 것을 주는가를 보고 종교를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훈병은 한번은 절에 가고 그 다음에는 성당에 가고, 그 다음 주는 교회에 간다. 돌아가면서 각종 종교를 섭렵한다. 다 둘러보고 결정하려고 한다. 훈련소나 군부대처럼 좋은 선교의 장도 드물다. 4) 캠퍼스의 선교강화 채플이 있는 학교들은 채플을 강화하고 이단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연세대나 이화여대 등도 이단들의 주 활동무대이다. 이단들은 캠퍼스를 황금어장이라고 인식하여 혈안이 되어 달려드는데, 일반정통교회들이야 말로 더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5) 청소년들에 대한 선교지원강화 장년부가 수천 명 되는 교회에 청소년이 200명밖에 없다고 한다. 지금 장년부 세대가 죽고 나면 교회가 텅텅 비게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교회가 세상 학생들은 제외하고서라도 목사, 장로, 집사들의 자녀들까지 놓치면 정말 큰일 이다. 교회가 무너질 때 가장 먼저 유초등부와 청소년부가 사라진다고 한다. 청소년들이 교회를 자주 찾게 하는 프로그램을 많이 개발하여 적용해야 한다. 스포츠나 문화 활동, 장학금도 지원하고 방과 후 수업 등도 실시해야 한다. 물심양면의 지원이 필요하다. 3. 구령사업에 대한 최우선적 관심과 투자 해외 선교와 전도에 더 박차를 가해야 한다. 몽골 같은 곳은 밥만 먹여주면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다는 몽골 대학생의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교인들은 먹을 것 덜 먹고, 입을 것 덜 입고 피 같은 돈들을 주님의 몸 된 교회에 헌금한다. 그러면 그 돈이 주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인 선교와 구령사업에 우선 집중적으로 투자되어야 한다. 건물 보다 선교에 신경 써야 한다. 건물이 좀 낡았으면 어떠한가? 건물이 좀 좁으면 어떤가? 정 좁으면 한 번 더 예배드리면 된다. 무리하게 건축하다가 패가망신한 교회가 많다. 대개 그런 교회들은 이단들이 야금야금 사들이고 있다. 이단들에게 교회건물도 뺏기고, 교인들도 뺏기고... 이 일들을 어찌하면 좋은가? 예수님께서 피 값 주고 산 천하 보다 귀한 영혼들이 사탄의 손아귀로 넘어가고 있는데, 지금 교회가 건축이나 해서 목회자 이름이나 알리려 할 때인가? 꼭 필요하고 때가 무르익었으면 몰라도 무리하게 건축에 투자하지 않아야 한다. 대신 청년들을 양육하고 전도하는데 써야 한다. 교인자녀들 뿐만 아니라, 돈이 없어 공부 못하는 안 믿는 사람들의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힘이 닿는 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장학금도 주고, 소년소녀 가장들을 위해 쌀도 대주고, 사명감 있는 청년들은 신학교 보내서 공부도 시켜주고, 전도하는 학생들에게 선교비도 주고, 청년 사역하는 전문가를 양성하고... 이단 대책 하는 분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후원도 하고... 어디다 물질을 써야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까 기도하며 써야 할 것이다. 청년들 키워봤자 헌금도 안 나오고, 말만 많고, 돈만 많이 든다고 등한시 하면 안 된다. 청년들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이 나라가 산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차라리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한다. 교회 건축에 지나친 출혈경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유럽의 많은 교회 건물들이 지금 술집, 디스코텍, 회교 모스크로 바뀌었다. 영국교회는 지난 30년 동안 8000개 교회가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 영국은 더 이상 기독교 국가가 아니다. 어떤 한국교인은 자기가 다니는 한국교회를 지어준 영국의 모(母)교회를 찾았으나 그 감사방문을 맞이하는 영국교인이 한명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 것을 보고도 한국 교회는 정신 못 차리고 있는가? 오늘날 유럽교회들은 20-30년 후 한국교회의 미래상처럼 보인다. 건축에 돈 쓸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 구령사업에 헌금이 쓰여 져야 한다. 한 푼이라도 아껴 오직 전도와 선교 사업에 투자해야 한다. 4. 봉사와 구제활동 강화 이단들은 자기교주와 자기 단체의 이미지 고양(高揚)을 위해 목숨을 건다. 유학을 가는 이유도 선교를 위해서 간다. 사업을 하는 것도 전도자금을 대기 위해서 한다. JMS 같은 경우,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때, 가장 오래 동안 남아서 닦았다. 그것은 딱 한 마디 듣기 위해서이다. ‘당신들을 지도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분이 진짜 지도자요’ 라는 말 듣기 위해서이다. 우리 일반 정통교회들이야말로 의료봉사도 더 하고, 문화공연과 위로잔치도 베풀어 주고, 노숙자들이나 독거노인들을 위해 밥 주는 봉사도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의 덕을 널리 알려야한다. 사람이나 단체나 이미지가 좋아야 한다. 요즘 개신교가 개신교 천주교 불교, 3대 종교 중에서 국민들로부터 신뢰도가 가장 낮다고 한다. 신뢰도가 낮다는 것은 그만큼 영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전도가 안 되고 있다는 말이다. 보여주기식 행정이 아니라 실제로 진정성 있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어주기까지 하셨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고 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봉사와 구제는 기본적인 일들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것은 교회의 마땅한 도리이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 빛과 소금의 사명 매스컴에 종종 기독교 관련 악평뉴스가 보도된다. 예를 들면, 목사가 전철에서 여자의 신체를 촬영하다가 걸린다든지, 목사가 여신도와 간음을 했다든지, 목사가 사기 쳐서 피소되었다든지... 이와 같은 목사의 비행과 비리가 쏟아질 때마다 교인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간다. 교회의 비리는 언론에서 더 크게 다루기도 하지만, 그만큼 목사에게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목사 한명이 무너지면 교회 하나가 무너진다. TV에서 대형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교회 지도자들이 연루되어 있다. 목사와 교인들은 각자가 예수님의 얼굴들이다. 이방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을 통해 예수님의 얼굴을 본다. 요즘, 흔히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러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나쁘다 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게 웬 말인가? 인터넷 공간에서는 기독교가 개독교로 통용된 지 오래되었다. 교회 지도자들의 비행과 비리가 터질 때마다, 어린 신앙인들과 믿음 약한 영혼들에게는 치명적인 악재들이다. 교회 밖으로 사람들을 내 모는 역천행위들이기 때문이다. 이단들에게 교회의 비행과 비리에 대한 뉴스는 호재다. 그들은 교회에서 실망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을 향하여 양팔 벌리고 교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다. 아무리 택배 회사가 명성이 높고 신뢰를 많이 쌓은 회사라고 하더라도 결국 고객들이 만나는 것은 택배 직원이다. 고객들에게는 택배 직원이 그 택배회사의 얼굴인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택배 직원이 고객과 얼굴 붉히며 싸웠다고 치자. 그 고객은 그 택배 회사와 싸웠다고 생각하고 택배 회사를 바꿔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을 통해 예수를 본다. 기독교인들은 예수택배회사의 택배 직원들이고, 예수의 얼굴들이다. 교회에서 실망한 교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이만희나 정명석, 문선명, 안상홍으로 교주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가 강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에게 이웃이 되어 주셔서 우리를 살리셨다. 또한 우리도 안 믿는 사람들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 줘야 한다. 그들이 평소 오해하고 멀리하던 사람일지라도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며 여관에 맡기고 경비가 더 들면 책임지고 갚아주고... 대개 이단들도 교주들의 비행과 방종한 삶으로 스스로 멸망하게 된다. 주의 종들은 섰다고 하는 자들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으니 절대로 언행심사를 조심해야 한다. 성령 충만했던 다윗도 밧세바 라는 우리아의 아내의 벗은 몸을 보고 욕정을 참지 못하여 죽음보다 더 심한 고통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슬기로운 잠언을 쓴 솔로몬도 이방여인들로 인하여 우상숭배 하다가 나라가 두 동강 나는 징계를 받았다. 목사가 은밀하게 간음을 하더라도 언론을 통하여 백주 천하에 다 공개되고, 교회는 두 동강나서 쪼개지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한다는 것은 말로만 끝나지 않는다. 선행과 높은 도덕성으로 무장해야 한다. 6. 사랑의 실천 회사직원들이 회사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봉급도 아니고, 교통도 아니고, 복지도 아니다. 회사 동료, 상사 혹은 부하 직원과의 불화 때문이다. 불협화음 때문에 힘들게 들어간 직장이라도 그 직장을 떠나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교회를 떠나는가? 교인끼리 싸우고, 목사와 싸우면 그 교회가 싫어지는 것이다. 교회가면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워야지 누가 올까봐 가슴이 철렁 해진다면 교회는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수 피를 함께 나눈 형제들이다. 그러나 이권(利權)이 없으면 소가 닭 보듯이 무관심 한다. 그런 교회가 부흥할 리 없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의 공통적인 멘트 중의 하나는 외로웠었다는 것이다. 누구와 깊이 대화할 수도 없고, 외톨이 같았었다는 말들을 한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아무도 자기에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단에 갔을 때 그들은 친절했고, 자기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는 말을 한다. 부모가 들으면 가슴 치며 배신감을 느끼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말한다. 자식이 외로웠었다고 하면 외로웠던 것이다. 식당에서 손님이 ‘음식이 짜다’고 하면 짠 것이다. 주인이 국물 먹었을 때 안 짜더라도, 손님이 짜다고 하면 짠 것이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요” 라고 말하면 없었다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편협된 사고로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주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사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까 고치면 되는 것이다. 교인도 소비자이고, 고객이다. 고객이 항의하는데 불편을 해소해 주지 않으면 고객은 다른 매장을 찾게 되는 것이다. 제품은 좋은데, 직원들의 불친절과 미숙함으로 짝퉁회사(이단들)에게 고객을 계속하여 뺏긴다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을 것이다. 기독교는 원래 사랑의 종교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고 하셨다. 그리고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25:40).”고 하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치라 하신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교회가 건강해야 한다. 그러면 이단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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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27
  • JMS의 포교전략과 대책(2) (이 글은 5월 25일(수) 거제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부산이단대책세미나 강의안 입니다.) JMS의 포교전략과 대책(2) ▲ 김경천 목사 (전. JMS 부총재) 4. 포교전략과 활동, 특징들 1) 청년대학생 중심의 포교 처음에는 주로 대학생들이 주로 포교대상이었다. 청년대학생 때는 진리에 대한 갈망과 도전의식이 가장 활발한 기간이다. 청년대학생들이 성경 공부하다가 정명석을 재림예수로 깨닫게만 되면 학업이고 가족이고 취직이고 전부 뒷전이다. 청년대학생들은 재림예수를 만났다는 감격에, 바울이 기득권을 배설물처럼 여긴 것처럼, 그리고 베드로가 그물과 배를 집어던지고 예수님을 따랐듯이,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대학생은 학과 친구를 어떻게 하면 전도할까만 생각한다. 학점은 중요하지 않다. 취직은 B급이나 하는 것이다. 학과 친구는 전도의 대상일 뿐이다. 가족도 가족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전도할까 포교의 대상일 뿐이다. 반대하면 부모라도 그냥 사탄의 하수인으로 보이고, 심지어 원수가 된다. 어떤 대학생이 30개론을 듣고 정명석의 사명을 깨닫게 되면, 그 학생은 한명, 한명 전도하여 동아리를 만든다. 그 학생은 전도하기 위해 대학을 다닌다. 동아리에서 30개론을 가르치고, 계속하여 재생산이 일어난다. 전도된 학생이 다른 대학의 친구를 전도한다. 그 학생도 자기 대학에 가서 역시 동아리를 세운다. 그렇게 해서 전국적으로 대학마다 동아리가 들어가게 된다. 청년대학생들은 부모들이 주는 돈을 가지고, 학업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땅 끝까지 이르러 다시 오신 재림주님의 증거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건다. 2) 청소년들과 문화선교 최근에 JMS는 7만 선교 목표를 발표 한 바 있다. 정명석이 출옥하기 전까지 7만 명 정도 만들어서 선생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한층 열을 올리고 있다. 이전에는 대학가에서 주로 포교하였으나, 지금은 중고등학생들에게로 포커스가 맞춰지고 있다. 청년대학생들은 이미 JMS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어 포교가 쉽지 않다. 힘들게 포섭하여 교리공부 시키다가도 ‘여기가 JMS다!’라고 깨닫는다면 중도포기하기 때문에 대학생 이상의 성인들에게는 포교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 자연히 어린 중고등학생들에게 관심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들은 악평도 듣지 않았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 하는 단순함 때문이다. 그들은 그냥 재미있으면 된다. 누가 친절하게 대해주고 운동도 가르쳐 주고, 밥도 사주고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최고다. 교리는 상관없다. 특별히 예수님에 대한 충성도도 없거나 낮다. 누가 자기에게 재미있게 해주고, 잘해주는가가 관심사일 뿐이다. 오늘 자기에게 자장면이라도 사주는 사람이 더 좋다. 그렇지만 중고등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성경공부로 연결시키는 일은 드물다. JMS는 문화선교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남자들의 경우에는 운동을 통해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야구나 축구를 통해서다. JMS 회원 중 국가대표나 프로구단 출신의 야구선수가 전국대회규모의 야구대회를 열어 청소년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야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주말마다 훈련시킨다. 그리고 같이 샤워하고 같이 밥 먹으면서 친해진다. 친해지면 인성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30개론을 조금씩 가르치는 것이다. 학생들은 평소 야구를 너무 하고 싶어 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JMS는 그런 청소년들의 욕구를 채워주고 필요를 채워주며 전도하는 것이다. 야구 유니폼도 다 맞춰 입고 제법 규모 있게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자기가 그런 자리에 선수로 참가하여 뛴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이단이고 사이비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그렇게 신경써주는 JMS단체가 너무 고맙게 생각된다. 게다가 교리공부를 통하여 정명석은 예수님처럼 죄가 없지만 악평자들의 모함으로 누명을 쓴 것으로 배우게 된다. 청소년들은 눈물을 흘리며 JMS를 힘들게 하는 기성교회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게 된다. 축구는 더 세밀하게 조직되어 있다. 초등부부터 전국대회규모의 축구시합이 있다. 꿈나무 축구교실을 운영하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합숙훈련도 하며 그 조직에 녹아들게 한다. 그리고 축구대회도 지역마다 있고, 전국단위의 축구대회도 있다. 그리고 JMS의 전국체전 때는 세계에서 자신들의 국기를 들고 입장하여 올림픽을 방불케 하는 행사를 치르기도 한다. 평소 때는 조기축구나 일요예배 후 교인들끼리 모여 축구를 많이 한다. 축구에 한번 맛 들인 사람들은 축구하자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된다. 그들은 축구가 좋고, 사람들이 너무 좋고, JMS라는 단체가 너무 좋다. 그곳을 떠나서는 죽을 것 같다. 떠나봤자 할 것도 없고 그동안 재미있게 지냈던 인맥과 결별하는 것도 싫다. 이탈하면 자기혼자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생긴다. 오히려 JMS에서 잘릴까봐 두려움이 생기고 소속감은 더욱 공고해지는 것이다. 여자들은 치어나, 모델, 째즈, 무용 등 예술을 통하여 전도한다. 정명석이 1980년대 초반, 고려대와 연세대 정기전을 참관하면서 양교의 화려한 치어 쇼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 뒤로 JMS내에 남녀 치어 팀 들이 수십 개가 생겨났다. 치어리더가 되려면 여자들은 키 170, 남자들은 180은 되어야 한다. 해마다 전국 치어대회를 열기도 한다. 자체에서 우승하기도 쉽지 않다. 치어도 본부 치어가 있고, 지방 치어가 다 따로 있다. 정명석이 축구할 때면 본부 치어들이 나선다. 그 깊은 월명동 산골짝에서 밤이건 낮이건 정명석이 축구하면 치어복장을 한 치어걸들이 쭉 선다. 여자 회원들은 치어리더가 되고 싶어도 키가 작으면 될 수가 없다. 치어리더들은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정명석이 축구할 때마다 수십 명의 미녀치어리더들이 열심히 응원을 하니, 동네 축구지만 마치 프로축구나 국가대표 경기하듯 재미있게 바라보는 것이다. 모델은 슈퍼모델 대회가 따로 있다. 여자들 키가 178이상 되어야 한다. JMS의 수퍼모델 대회에 가보면 우리나라에 저렇게 키 크고 예쁜 여자들이 많이 있었나 하고 놀랄 정도이다. 정명석은 욥의 딸들이 동방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예뻤다고 했듯이, JMS의 회원들이 모든 종교 가운데 제일 예쁘다고 자랑하였다. 정명석은 이와 같이 성경을 통해 자기자랑을 한다. 그러나 참된 목사라면 성경 가지고 예수님을 자랑한다. 일반교회에서 야한 옷 입고 슈퍼모델 대회 같은 것 개최하기는 좀 부적절해 보이지만, 젊은 아가씨들이나 십대소녀들의 ‘예술성’과 ‘끼’를 발산케 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아이돌 그룹에 광란하며 반응하는 십대들의 끼를 교회는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 금식기도 해서 파김치 만들어 버리는 것이 답일까? 아니면 신나는 찬양을 통해서 발산해야할 것인가? 교회도 재미있어야 하지 않은가? 청소년들을 교회로 가게 하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가? 마치 시동 꺼진 차를 뒤에서 밀고 가듯이 힘들다. 그러나 그렇게 밀지 않아도 시동 걸린 비행기처럼 일반교회로 날아가게 할 수는 없을까? 이단들은 하나같이 예술성이 발달했다. 통일교의 리틀엔젤스는 말할 것도 없고, 신천지의 마스게임이나 카드섹션 등도 볼만한 광경을 연출하는 것은 틀림없다. 이단들은 행사 때마다 식전행사로서 올림픽의 식전 행사를 방불케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예술제를 보면서 ‘역사가 시작 되었구나’ 하면서 감격한다. 그 외에도 연극부가 있어서 정명석의 설교를 연극으로 재현해 보이기도 한다. 만화부도 정명석의 설교를 만화로 표현하기도 하고, 설교 때마다 삽화를 넣어 이해를 돕는다. 그 외에도 뮤지컬부 등 다양한 부서들이 있다. 3) 해외 선교 (1) 미국 미국은 총신대 졸업한 전도사가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특별한 지원은 없었다. 미국선교사가 카펫트 청소하며 힘들게 한명 두명 가르쳐 수료시켰다. 수료하면 한국으로 무조건 다녀가게 한다. 외국인들에게 한국 방문은 성지순례와 같은 일이다. 외국인들이 정명석에 대해 어느 정도 믿음이 생기면 한국의 선교사들은 뒷전으로 물러난다. 정명석은 철저하게 그 나라는 그 나라 사람들에게 맡기는 전략을 쓴다. 처음에 한국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은 토사구팽 당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선교사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속셈도 깔려 있다. 초대 미국 선교사는 JMS를 이탈하였다. 미국은 현재 200명 내외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2) 일본 일본은 고려대를 졸업한 한 학생이 일본 쯔꾸바 대학으로 유학하면서 시작되었다.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주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곧 바로 일본대학생 10명 정도를 전도하여 한국에 데리고 왔다. 그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 후 일본은 몇 백 명으로 불어났고, 선교사의 영향력은 너무 컸다. 통일교의 초대 일본 선교사가 일본을 개척한 다음에 배신하고 나갔다는 것을 염두에 둔 정명석은 JMS초대 선교사도 그럴 것이 염려되었는지 선교사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하였다. 그 일본선교사는 정명석이 자기를 일본회원들과 이간질하는 말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는 사업을 한다는 미명하에 JMS를 이탈하여 나갔다. 일본은 현재 3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JMS는 밖으로는 전혀 교회 같지 않다. 그냥 사회단체처럼 보인다. 예배가 끝나면 배구나 각종 스포츠를 통해 문화선교를 많이 한다. 그들은 자국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끈끈한 정을 JMS를 통해 맛보고 있다. 그들은 방송에서 JMS의 비리가 아무리 많이 폭로되어도 별로 흔들림이 없다. 일본은 유난히 엘리트 계층이 많다. 처음부터 대학생들을 포교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20-3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중견간부들로 성장했다. (3)대만 대만도 JMS에게는 특별한 나라이다. 천수이벤 전 총통이 유명해지기 전에 젊은 시절에 월명동을 방문한 바 있다. 그는 그 후에 국회의원이 되고, 타이페이 시장이 되고, 대만 총통이 되었다. 천수이벤 총통은 JMS의 대만 행사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었다. 정명석은 천수이벤 총통도 자기 제자라고 적극 홍보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 정명석이 중국에서 체포되었을 때 불리하게 작용되기도 하였다. 천수이벤은 그 후 부정부패로 20년 형을 선고 받고 현재 옥살이를 하고 있다. 그를 JMS로 전도했던 비서관도 질병으로 요절하였다. JMS에서는 그가 총통일 때는 그를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홍보하였으나, 지금은 전혀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대만은 JMS내에서 일본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대만과 일본 지도자들은 서로 경쟁하며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 대만도 2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4) 동남아, 기타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폴 등 JMS는 동남아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홍콩은 정명석이 일찍부터 공들인 나라이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장년부가 홍콩으로 이민 가면서 선교가 시작되었다. 나중에 정명석은 홍콩별장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고, 조사 받던 중 중국으로 밀항하게 된다. 말레이시아도 JMS의 국제 행사를 개최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모델이나 치어 등의 문화선교로 3000명을 동원한 바도 있다. 그 외에 전 세계 50개국에 걸쳐 뻗어 있다. (5) 해외선교의 특징 JMS의 해외선교는 철저하게 현지인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일반교회는 주로 교회에서 선교후원금을 보내주지만, JMS는 한국본부에서 대주는 일이 거의 없다. 이민을 가면 그 사람이 바로 선교사로 임명 받는다. 혹은 학생들이 유학을 가면 그 학생이 바로 선교사다. 그 유학생들은 부모들이 대주는 돈으로 공부는 소홀히 하면서 선교를 열심히 한다. 유학생이 선교사이고, 이민자가 바로 선교사이다. 장년부들도 이민 가서는 아르바이트 하면서 선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단의 부담 없이도 선교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현지인이 몇 명만 되면 한국에서 간 사람들은 뒤에서 관리만 하고, 담임 교역자는 전부 현지인들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몽골 같은 곳을 예로 들어보면, 일본의 한 여학생이 부모에게 몽골로 유학가고 싶다고 말하여 부모의 돈으로 몽골에 유학 갔다. 처음부터 그녀는 유학보다는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그녀는 혼자 30-40명을 전도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몽골은 밥만 먹여주면 얼마든지 더 많이 전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몽골의 대표자 몇 명이 한국으로 성지순례를 왔다. 경비는 몽골에서 사업하던 한국 회원이 대줘서 왔다고 했다. 그들은 한국에 성지순례를 와서 크게 감동받고 돌아갔다. JMS 선교는 구체적인 계획과 전략에 의하기 보다는 자발적 성격이 강하다. 일본 여학생이 몽골에 가서 선교하는 것이나, 한 캐나다 학생이 남아프리카로 가서 그곳에서 선교를 하여 몇 십 명을 만들어놓기도 하였다. 한국 교단에서 특별한 지원은 없었다. 자발적인 선교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자발적인 선교가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정명석의 사명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제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30개론을 새 복음이라고 하면서 가르치고 있다. 4) JMS의 구원관 JMS의 구원관은 카톨릭의 연옥사상과 비슷하다. 구약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선영계, 구원받지 못한 영들은 음부로 간다. 타종교나 선한 양심으로 산 사람들도 선영계로 간다. 거기서 죽어서라도 예수 믿으면 낙원으로 올라간다. 심지어 음부에 가서도 예수 믿고 낙원으로 올라갈 수 있다. 정명석에 의하면, 선영계에 간 영혼들은 그들이 살아생전에 땅에서 메시야를 기다렸듯이, 선영계에 가서도 계속하여 메시야를 기다린다. 거기에서라도 예수 믿으면 낙원에 올라가게 된다. 불교인도 천국이나 낙원은 못 가더라도 선영계는 간다. 석가모니도 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이다. 기독교가 전깃불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촛불이나 호롱불 정도는 된다. 그러므로 불교라고 해서 지옥 가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JMS의 구원론은 상당히 포용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다원주의이고 예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부정하게 한다. 마귀는 이와 같이 그럴싸한 교리로 다가온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죽은 다음에는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6)”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죽은 다음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죽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누가 살아서부터 믿겠는가? 죽어봐서 거기서 믿으면 될 일이다. 그러므로 죽은 다음에 기회가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살아서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 천하인간에 예수 외는 구원자가 없다. 시대별로 구원자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5) JMS의 율법주의 JMS의 율법주의는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선악과를 여자의 성기로 풀기 때문에, 성교하는 것은 원죄를 짓는 것으로 본다. 그들은 성교하지 않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갖게 된다. 성적으로 타락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게 된다. 성교는 오직 정명석의 허락받고 결혼해야 가능하다. 정명석의 허락 없이는 7년이고 10년이고 기다려야 한다. 성적으로 깨끗해지기 위하여 점점 성욕자체를 금기시하게 된다. 누구를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면 억눌러야 하고, 그런 감정이 생긴 것 자체를 회개기도 해야 한다. 당연히 이성교제도 하지 못한다. 심지어 유치원 때 남학생의 손잡은 것 까지 회개하라고 다그친다. 그러다가 약간의 신체접촉이나 자기도 모르게 로맨틱한 상상만 했어도 엄청난 죄책감과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너무 높은 수준의 실천과 성윤리를 강조하다 보니,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는, 죄책감과 죄의식이 너무 심해 정신분열이나 정신질환에 시달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자살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JMS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지 않는다. 천국에는 검은 색깔이 없기 때문에 지상에서부터 천국 생활해야 한다며 검은 옷을 입지 말라고 정명석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만약에 교역자가 검은 옷을 입고 있으면 불경죄로 인식될 수 있다. 그들은 밝고 환하고 깨끗한 옷을 입는다. 교회 올 때는 당연히 하나님 뵈러 오는데 최고로 신경 써서 잘 입고 가야한다. 청와대에 대통령 만나러 간다면 그렇게 옷 입겠느냐? 그런 율법적인 가르침을 사람들은 더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 철저한 율법주의에 단련된 JMS회원들은 일반교인들을 볼 때 자유분방한 민병대처럼 우습게 보는 것이다. JMS사람들은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일반교회에서 목사가 교인들에게 커피 마시지 말라고 하면 아마 다른 교회로 떠나든지 아예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도 속출할 것이다. 그러나 JMS 회원들은 정명석의 먹지 말라는 한 마디에 마시지 않는다. 아마도 몰래 혼자 집에서 마시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했다면 그는 ‘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에 꺼림하게 되고, 회개 기도해야 할 것이다. 마시지 말라는 이유는 건강 때문에 시작했지만, 정명석이 말했기 때문에 구원받기위한 교리처럼 받아들여진다. 이단들은 이와 같이 회원들의 생활의 세미한 부분까지 관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특징이다. 그 외에 라면, 과자, 탄산음료 등 건강에 좋지 않은 것들은 먹지 않는다. 술 담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다가 술 한번 마시면 지옥 가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목숨 걸고 술을 마시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만족감을 느끼고 교만과 자랑이 싹트는 것이다. JMS의 율법주의는 사람들을 조이면 조일수록 사람들로 하여금 역시 우리 선생님은 진짜 하늘 사람이야 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오늘날 일반 정통교회에서도 어떤 공로나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는다는 신율법주의가 판치는 것을 보니 안타깝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엡2:8). 6) JMS의 윤리의식과 거짓말 정명석은 회원들에게 철저한 율법주의를 요구하지만 정작 자기는 무법 방종주의나 상황 윤리자처럼 행동한다. 정명석에게 절대적이란 것은 없다. 그러나 나름대로 절대적 기준을 설정하고 지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새벽에 일어났을 때 기도하기 전에 절대로 다른 사람과 먼저 대화하지 않는다. 대변 보고 오른 손으로 뒤처리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른 손은 사람들에게 안수기도해주는 손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껌 같은 것도 한번 안 씹기로 한 후로 절대로 씹지 않는 것 등이다. 정명석의 그런 겉모습에 사람들은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하고 감동 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는 무법 방종주의자나 상황 윤리주의자처럼 행동한다. 예를 들면 상사병 걸린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그 아들의 연인의 모습으로 분장하고 아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들이 죽는 꼴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정명석은 아들을 살리려면 들어가야 한다고 강의한 바도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죽어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는 사는 것이 우선이다. 그의 그런 윤리의식이 성 스캔들을 양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기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서라면 여자회원들과 간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간음이 아니라 구원행위이고 은총을 베푸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짓말도 할 수 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르게 거짓말해도 좋다는 것이다. 거짓말은 모사(謀事)라는 미명하에 선한 행위로 포장된다. 그러나 거짓말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JMS 회원들도 점점 거짓말과 모사를 많이 쓰다 보니 서로 불신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정명석이 어떤 진실을 말해도 사람들 속에는 ‘선생님이 지금 무슨 모사 쓰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의구심을 갖는다. 어떤 때는 정명석이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회원들이 믿지 않자, 정명석은 “이것은 모사 아녀!” 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JMS회원들은 테러도 할 수 있다. 테러도 주님을 증거 하는 일이니 선한 일이다. 오히려 나간 사람들이 정명석의 비리를 폭로해도 가만히 있으면 정명석은 ‘너희는 내 제자도 아니다’ ‘지금 가만히 앉아서 뭣들 하느냐?’ ‘내 심정 맞춰서 행동하는 놈 하나 없느냐’ 며 테러를 부추긴다. 그것이 바로 테러를 명령하는 사인인 것이다. 그런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강한 충동감을 느껴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직접적으로 시키면 테러 사주로 걸리니까 회원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형식을 띠어 테러하도록 충동질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탈자들에 대한 테러가 여러 번 발생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상숭배도 엄격하게 규제하지 않는다. 가족을 전도하기 위해서라면 명절에 조상들에게 넙죽넙죽 절하라고 허용하기도 했다. 마음만 우상숭배 안하면 되지, 겉으로는 절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잘못이냐? 정명석은 자기의 그런 무법방종주의적인 행동을 이치(理致)라고 하였다. 그 말은 자기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통일교를 줄기와 같은 원리라고 한다면 자기는 가지와 같은 이치라고 하였다. 정명석은 거짓말의 달인이다. 그의 거짓말은 법정에서도 발생했다. 검사가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라는 질문에 “아니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당신이 중심인물이오? 라고 묻자 그것도 “아니오”라고 했다. 그것은 평소 자기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JMS 사람들은 선생님께서 지금 모사 쓰고 계시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예수님은 “네가 왕이냐?” 하는 빌라도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셨다(요18:37). 그리고 예수님은 도망가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정명석은 도망 다니다가 잡혔다. 정명석은 방송이 처음 터졌을 때 부리나케 해외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회원들에게는 해외 선교하러 나갔다고 말하였다. 검사가 “당신이 그렇게 무죄하다면 들어와서 의혹을 풀었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자 정명석은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들어왔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안 잡힐 줄 알고 도망 다녔다는 말인가? 자기가 죄가 없는데 누명을 썼다면, 그리고 순수하게 해외선교 나간 것이라면, 이렇게 강제송환되기 전에 진작 들어와서 의혹을 풀었어야한다. 정명석은 자기가 재림예수니까 무슨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림예수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상황윤리는 선한 일을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정명석의 거짓말은 그냥 성범죄를 숨기기 위한 악한 거짓말일 뿐이다. 7) JMS의 사업 JMS는 월명관광(버스임대업), 보험, 화장품, 생활필수품 등 다양한 사업들을 하고 있으나, 통일교나 다른 이단들에 비해서 사업성은 크게 떨어진다. 휴대폰 사업이나 부동산 사업 등 여러 가지로 투자했으나 다 망했다. 사기도 여러 번 당하였다. 정명석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물질주면 타락할까봐 사랑해서 주시지 않는다고 변명한다. 돈 많은 사장이 본부인과 둘째 부인에게는 물질을 주지만 마지막에 얻은 부인에게는 사랑만 주듯이, 하나님께서는 유대교(본부인)와 기독교(둘째 부인)에게는 물질 주셨지만 JMS(마지막 젊은 부인)에게는 사랑만 퍼부어 주신다는 것이다. 8) JMS의 봉사활동 JMS는 태안기름유출 사건이 났을 때 어떤 단체들 보다 최장수 봉사를 하였다. 다른 단체들은 휙 왔다 가고 휙 왔다 가고 하였지만, JMS 회원들은 끝까지 남아 현지인들로부터 최고라는 찬사를 들었다. JMS 의료팀은 대민 봉사활동을 자주 한다. 그리고 월명동에서 지역주민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한다든가, 문화공연을 통해서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봉사를 많이 하는 편이다. 전부 JMS의 이미지 향상을 위해 열심히 뛰는 것이다. 시골 사람들은 누가 되었든지 간에 맛있는 밥 주고 관광시켜 주고, 공연 보여주고, 의료서비스 제공해주는 사람이 최고로 생각 들게 마련이다. (사)밝은 미소운동이라든지 (사)빛사랑청소년회 등의 법인 등을 소유하고 있다. 이들 단체들은 2002년 대통령 표창장도 받은 바 있다. 이단들은, 비단 JMS 뿐만 아니라, 대민 봉사활동에 적극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9) JMS의 기적과 표적 예수님께서는 말세에 “많은 거짓 그리스도들이 나타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한 백성이라도 미혹하리라”(마24:24)고 하셨다. 모세 앞의 애굽 술객들도 모세와 똑 같이 지팡이를 던져 뱀을 만들었다. 정명석도 그런 것이 있었다. 정명석이 눈이 오라고 기도했는데 눈이 온 사건이 있었다. 정명석이 서울에 올라와 성향원이라는 허름한 집에서 무상거주하고 있었는데 집주인이 나가라고 하자, 겨울에 눈이 오면 차마 내쫓지는 못할 것이라며 눈이 오게 기도하자고 한 것이었다. 겨울이라서 우연히 눈이 온 것이었을까? 두 번째로 나가라고 한 날에도 눈이 오라고 기도했는데 눈이 왔다. 그리고 한번은 여름 태풍이 북상 중에 있었는데, 정명석이 설교 중에 “내가 태풍 눈을 빼 버릴꺼여!” 하며 눈 빼는 액션을 취하면서 설교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 뉴스를 보는데, 아나운서가 “북상하던 태풍의 눈이 빠졌습니다.”라고 멘트를 하였다. 정명석이 서해안 백사장에서 청년회원들과 배구를 하는데 그날 밀물 시간이 되었는데도 물이 올라오지 않았다고 한다. 월명동에서 행사를 하다보면 구름이 떠서 독수리 모양도 만들고, 사람얼굴도 만든다. JMS회원들은 항상 오늘은 독수리 구름이 뜨지 않을까 하고 이미 기대 심리가 높다. 독수리가 뜨면 JMS의 상징이 독수리니까 좋아한다. 정명석을 동방의 독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의 얼굴 구름이 뜨면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감격한다.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보면 금방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기적과 표적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 외는 아니라는 강한 믿음과 신앙의 정조가 있어야 한다. 10) JMS의 신비주의와 영적 현상들 JMS는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한 단체다. 정명석의 설교의 대부분은 자기의 꿈 이야기이다. 그가 받았다는 30개론 도표가 환상으로 계시 받은 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JMS 사람들도 “너 왜 자냐?”고 물으면 “꿈꾸려고요” 라고 대답할 정도로 계시받기를 갈구한다. 요즘은 계시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많이 나타났다. 토마스 주남의 “천국은 반드시 있습니다”는 책을 읽고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들이 여러 명 나타났다. 그리고 캐더린 백스터의 지옥간증, 천국 간증과 천주교 안나 수녀의 책을 읽고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정명석의 홍위병들이 되어 “천국 가니까 예수님과 선생님이 나란히 보좌에 앉아 있더라”, “생명책을 보았는데 누구누구의 이름이 있더라”, “이번에 새롭게 JMS신부들을 위해서 황금성을 만들었더라” “나가서 선생님을 악평하는 자들의 영혼들이 지옥에서 혀가 난도질 하는 광경을 보고 왔노라“ 고 간증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JMS 회원들 가운데 예수님을 못 보았다고 하거나, 천국지옥을 견학하지 못하는 사람은 명함도 못 내민다. 자연을 보더라도 그냥 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하여 무엇을 계시하는가 생각하며 의미를 찾는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중심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떨어지는 정명석의 계시와 자기들이 받는 환청이나 환상, 꿈에 더 의미를 둔다. 사탄도 광명한 천사로 분장하고 나타나(고후11:4), 사람들에게 천국지옥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40일 금식하신 예수님께도 사탄이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절하면 다 준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이단의 교주들이 계시 받았다는 주장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하다. 성경은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성경 떠나서 어떤 개인의 영적체험이나 신비경험이 우리의 신앙규범이 될 수 없다.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이다. 11) 월명동 개발과 약수 정명석은 10년 이상 월명동 개발에 온통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앞산 돌 조경이 다섯 번이나 무너졌다. 원래는 시멘트 콘크리트로 계단을 만들려고 했으나 환상이 보이면서 하나님께서 지금과 같은 돌로 쌓으라고 하셨단다. 땅을 파다가 보니 낙타 모양의 바위도 나왔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찾아왔던 동방박사들이 낙타타고 왔듯 재림예수인 자기의 출현을 그와 같은 상징물로서 보여준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돌 조경은 천국의 하나님 보좌의 형상이고, 앞에 있는 돌들은 네 생물이 보좌 앞에 있듯이, 네 가지 형상의 돌들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가관이다. 어찌 정명석의 생가가 하나님의 보좌가 될 수 있으며 4돌이 4생물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성경적 근거가 없다. 하나님 보좌와 정명석의 생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솔로몬은 그 멋진 금성전을 짓고도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모시기에 부족하거늘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8:27)” 하였다. 그런데 정명석은 자기가 쌓은 돌 조경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하는가? 가당치 않다. 월명동 잔디밭 밑에는 샘물이 있다. 어떤 권사가 기도하다가 예수님이 그 물이 약수라고 가르쳐줬다고 한다. 정명석은 어떻게 자기에게 먼저 안 가르쳐주고 권사에게 먼저 계시해 줄 수 있느냐며 말하기도 하였다. 독일 청년은 그 물을 마시고 불치병이 나았다고 청중 앞에 간증하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나았다고 하였다. 정명석은 하나님께서 월명동을 유명하게 하시려고 약수를 주셨다고 좋아했다. 정명석은 자기도 이가 아플 때 그 물을 머금고 있으니까 마치 마취주사를 맞듯이 통증이 가라앉더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정명석은 물의 효능을 너무 신봉한 나머지, 한번은 눈이 아프자 그 물을 발랐는데 오히려 눈이 충혈되기도 하였다. JMS 사람들은 그 물을 쉴 세 없이 떠 날라서 마신다. 박태선이 기도한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하였고,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능력의 생수라고 장사하여 팔더니만, JMS에서도 치유의 약수터가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복음이 없는 곳에서는 이와 같이 비본질(非本質)로 본질(本質)을 가려서 복음을 못 보게 한다. 월명동 수련원에는 그리스의 판테논(만신전)을 닮은 본부건물이 들어서 있다. 월명동은 본래 달밝골인데 정명석이 월명동이라고 개명하였다. 월명동은 정명석의 생가가 있던 곳으로 그곳은 그들에게 성지이자 마음의 고향이다. 교주들은 공통적으로 생가를 개발하여 성지화 작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JMS는 최근에 분당에 38억 자리 건물도 샀다. 원래 일반교회로 쓰던 장소인데 헐값에 샀다. 그리고 지역마다 교회를 짓거나 일반교회 건물을 매입하는 추세이다. 일반교회 가운데 무리한 건축으로 말미암아 은행이자를 못 낸 교회 건물들이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다. 성전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일반 정통교회에서는 외적 예배당의 건축보다는 내적 성전건축에 더 주력하여야 할 것이다. 12) JMS의 자기 증거 (1) 유별난 자기 사랑 정명석은 자기 증거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 그는 축구를 하더라도 혼자 50골, 60골씩 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어떤 때는 골키퍼를 30명씩 세운 뒤 골인시켜놓고 즐거워한다. 물론 제대로 막고 제대로 수비하면 정명석은 한골도 넣기 힘들다. 정명석의 팀은 A급 선수출신들이고, 상대팀은 B급의 아마추어들이다. 실력대로 붙어도 B팀이 질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B팀 선수들은 정명석이 볼 잡으면 막는 시늉만 한다. A팀 선수들은 슈팅할 수 있는 노마크 찬스가 와도 정명석에게 패스하여 정명석으로 하여금 슛하게 한다. 게다가 골키퍼는 반대방향으로 넘어지고, 들어간 다음에 슬라이딩한다. 치어들은 팔짝팔짝 뛰면서 골인을 축하한다. 빵빠레가 울려 퍼진다. 사람마다 이것은 김일성축구라고 한마디씩 한다. 그는 축구 유니폼을 입어도 혼자만 다른 색깔의 옷을 입는다. 야곱의 12아들 가운데 요셉만 채색 옷을 입었듯이, 자기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2) 시인 정명석 시를 쓰더라도 자기를 직접 증거하는 시들이 많다. 책을 쓰더라도 주로 독자들은 JMS회원 들이다. 정명석의 <인물났네>라는 다음의 시를 보자. 자신을 인물(人物)이라고 직접 찬양하고 있다. 그의 시는 주로 자기를 찬양하는 시이다. <인물(人物)났네> 인물(人物) 났네 인물났어. 백년이나 묵은 토담집에서 저 기와 요처(要處) 고대광실(高臺廣室) 그 높은 집도 하고 많은데 하필이면 첩첩산중 두메산골 토담집에서 인물이 났다니! 하기야 저 아브라함 링컨은 통나무 집에서 났고 예수는 베들레헴 촌락 움막집 말 마구간에서 났다지. 아! 고금역사 이후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의 영웅열사 성현성자들이 다들 그랬었지 움막이면 어떠하고 토담이면 어떠하고 통나무 집이면 어떠하랴 그저 천품 좋고 재질 능하고 제 때 나면 그만이지 지자(知者)는 강을 좋아하여 강가에서 낳고 인자는 산을 좋아하여 산에서 난다지 그렇고 그렇고 말고 그래서 그런 곳에서 난거지 아! 전설에 얽힌 대둔산 영산준령 인대산 노령산맥 쭉뻗어내 맞닿은 저 두메산골 월명동 백년이나 묵은 토담집에서 인물났네 인물났어 작고도 작은 마을에서 지구촌의 큰 인물이 났네 (1989년 1월 16일 영감의 시-선생님의 과거와 미래를 회상하며) (3) 수십 번의 죽을 고비 월남전에서 수십 번의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것도 자기를 오늘날처럼 쓰기 위하여 특별히 살려주셨다는 것이다. 정명석이 연못에서 목욕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베트콩들의 식수원이었다고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목욕하고 있었는데, 베트콩 3명이 따발총의 방아쇠를 당겼는데 총알이 안 나와 베트콩들이 한국군에 자수하여 그 사실을 말함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번은 베트콩이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는데 터지지 않았다고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막대기인 줄 알고 집었는데, 막대 수류탄이었다고 한다. 누가 갑자기 뒤통수를 때리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던졌는데 바위 구멍 속에 들어가 터져서 살게 되었다는 식이다. (4) 30개론 도표제작 30개론 도표를 금산에 있는 도표 화가에게 부탁하여 그리게 하였으나 자기에게 품삯 줄 돈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돈 대신 도표 하나하나를 설명하여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사람이 “당신 이 도표 가지고 나가서 성공 못하면 나한테 몽둥이로 맞아 죽을 줄 알아!”라고 하더란다. 그 말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처럼 들렸다고 한다. (5) 21년 수도생활 자기가 21년 동안 수도 생활한 것이 처음부터 21년 동안 하라고 했다면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조금만 더하면 군(郡)에서는 큰 소리 치겠다.” 그리고 “또 다시 조금만 더하면 도(道)에서는 큰 소리 치겠다.”고 하고, 그 기간이 끝나자, 또 다시 “조금만 더 하면 네 나라에서는 큰 소리 치겠다.”.... 또 다시 “세계에서는 큰 소리 치겠다.”고 했단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니 21년을 수도생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도 다 못 배웠으나 앞으로 계속 배워가면서 사명 감당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6) 수많은 귀신들 한번은 정명석이 영안으로 보니까 대둔산부터 인대산까지 귀신들이 가득했다.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귀신들이었다. 그 귀신들이 하는 말이 ‘저 놈을 죽여야 한다. 저 놈이 세상 나가면 우리들은 끝장이다’고 하면서 죽이는 시늉을 하더란다. 그러나 그 귀신들이 막상 몇 미터(m)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정명석의 이런 비슷한 간증들은 참으로 많다. (7) 영계 학교에서 1등하다 정명석이 영계학교에 처음 가보니 세상의 날고 기는 도사, 신령한 사람들은 다 와 있었다고 한다. 처음 수업을 듣는데 거의 한 글자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가면서 조금씩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다 알겠더란다. 영계학교에 올라갈 때마다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은 정명석 자기 혼자 남게 되었고, 그래서 1등 하여 재림 사명 받아왔다고 한다. (8) 붓 받은 사건 한번은 정명석이 예수님께서 그림을 그리는 대로 따라 그리고 있었다. 동그라미 그리면 동그라미 그리고, 세모 그리면 세모...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갑자기 사라졌다. 얼굴을 들어보니 저기 앞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려고 하더란다. 그래서 가시려면 가신다고 말이라도 하고 가야할 것 아니냐?고 했단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제 너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다. 이것이 마지막 붓이다”고 하면서 여러 개의 붓 가운데 가장 큰 붓을 뽑아서 던져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정명석이 그 붓을 받았다고 한다. 정명석은 그 붓이 무엇일까 고민하였고, 화가가 되라는 말씀인가 생각하다가 누가복음1장 2절에 데오빌로 각하에게 말씀을 적으려고 붓을 들었다는 글을 읽고 아하 말씀의 붓이로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한다. 정명석은 그 뒤로 입만 열면 말씀이 술술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가 예수님께 받은 붓은 가장 큰 붓으로서, 더 이상 해석할 것이 없는 마지막 나팔과 같은 큰 말씀의 붓이라고 하였다. (9) 꿈에 구직 여행을 떠나다. 정명석이 하루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고 기도하다가 잠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예수님이 나타나서 밤새토록 수십 군데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이 장로님이 경작하고 있던 제주도 감귤 밭이었다고 한다. 그 장로님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싱글벙글하며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에 오셨습니까 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는 사람 하나 네 농장에 맡기려고 데리고 왔다고 하더란다. 그러자 그 장로는 예수님의 부탁인데 자기가 어떻게 거절하겠느냐며 얼마든지 맡기라고 하더란다. 그러나 정명석이 가만히 보니까 귤 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평생토록은 못하겠더란다. 그래서 싫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아무 부담 갖지 말고 네가 싫다면 싫다고 하라시며 다른 곳으로 가셨다고 한다. 그러기를 40-50군데 했는데도 결국은 다 못 마땅하더란다. 그래서 정명석이 저는 평생 예수님만 따라 다닐래요 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 따라 다녀도 좋으나 배고플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도 예수님만 따라가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이 사명하게 되었노라고. (10) 골키퍼 하다가 군화 발에 채인 사건 정명석이 월남 다녀온 후 동네에서 축구시합이 있었다. 그때 정명석이 골키퍼를 하고 있었다. 정명석이 하도 날렵하게 볼을 잡아내곤 하자 상대방 선수가 일부러 정명석의 머리를 군화발로 있는 힘껏 찼다고 한다. 정명석은 떼굴떼굴 굴러서 쓰러졌다. 주변에서 죽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병원에서 누워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단다. 그 사람이 너를 찬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찼다고 하시더란다. 왜 차셨느냐고 물으니까, 배신해서 그랬다고 한다. 그냥 죽여야 하는데 죽는 이유라도 알고 죽이려고 왔다는 것이다. 무엇이 배신입니까? 고 묻자 왜 네가 아나운서 되려고 하였느냐고 물으시더란다. 정명석은 아나운서가 되어 방송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자기가 예수님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려고 한 것인데, 그게 어찌 배신이란 말입니까? 아니다. 배신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 것도 배신이다. 나는 너를 세계적인 사명을 주어 쓰려고 했는데 무슨 난데없는 아나운서냐 라는 것이다. 정명석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한번만 살려주면 세상사람 다 전도하여 드릴 테니 살려달라고 간구했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예수님의 화난 얼굴이 살짝 돌아오면서 어떻게 전도하려느냐? 고 묻더란다. 그래서 한명을 제대로 가르쳐서 구원시키고 그가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해서... 나중에는 전도할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 이와 같이 전도해서 지금 JMS단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때 형들은 자기가 죽을 줄로 알고 죽어도 한이나 없게 수술하자고 하더란다. 그래서 자기는 저 수술대 들어가면 죽는다고 하여 수술 받지 않고, 예수님이 고쳐줘서 살았다고 한다. 형들이 발로 찬 사람을 살인미수죄를 적용하여 벌하려고 하였으나 자기는 예수님의 뜻을 깨닫고 그 사람을 용서해 주었다는 것이다. 자기는 지금 세상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아나운서가 되어 이렇게 새 시대 새 말씀을 전하게 되었노라고 간증하였다. 다른 교주들도 이와 유사한 간증들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름대로 다 하고 있다. 정명석의 형들은 자기 동생이 축구하다가 발에 채인 뒤로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모친은 그 외에도 정명석이 옛날에 미친 행동을 했었다고 말하였다. (11) 정도령과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정명석은 자기야 말로 정도령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정(鄭)씨가 같고, 도령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도령은 진리를 전하는 사람인데 자기는 진리를 전하고 있지 않느냐? 자기야 말로 결혼하지 않았고, 진리를 전하는 정도령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대산 밑에 옛날부터 큰 사람이 난다는 전설이 있는데,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둔산에서 두 문을 통과하여 도를 닦는 사람이 도인이 되어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원효가 문(門) 하나를 통과하여 도를 닦았는데 그곳이 대둔산의 태고사 절이라면, 자기가 기도한 곳이 바로 독수리 봉인데 그곳은 돌 문(門) 두 개를 통과해서 들어가는 장소라고 하였다. 자기가 그곳에서 기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였다. 자기가 깨달은 도는 마치 “설한풍(雪寒風) 속의 생화(生花) 한 송이”와 같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여 주셨다고 한다. 1999년 8월 초 정명석은 프랑스 파리의 상공에 떠 있었다. 상공에서 바라본 파리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때 음성이 들리기를 “겉은 천국이나 속은 지옥이로다”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때는 바야흐로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해였다는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거의 다 바캉스를 떠나고 도시 전체가 텅텅 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정명석은 그곳에서 체전을 열었다.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와서 이런 평화의 체전을 열고 있으니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겠느냐고 말하였다. 정명석은 자기를 성경의 재림예수로 믿었기 때문에 한국의 정도령도 자기이고,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의 주인공도 자기라고 믿었던 것이다. 정명석은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그 지역의 전설이나 예언이 있다면 그것은 전부 자기를 두고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 기고/강연
    • 강연/특강
    2016-05-27
  • JMS의 포교전략과 대책(1) (이 글은 5월 25일(수) 거제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부산이단대책세미나 강의안입니다.) JMS의 포교전략과 대책 ▲ 김경천 목사 (전. JMS 부총재) 1. JMS란 무엇인가? JMS란 원래 정명석의 영어이니셜이다. 그래서 초창기의 회원들은 가슴에 "JMS"라는 뱃지를 달고 다녔었다. JMS는 정명석의 이니셜이 분명하지만, JMS측 사람들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새벽별(Jesus' Morning Star)의 이니셜이라고 항변한다. 그리고 JMS측에서는 계2:28에서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이긴 자에게 새벽 별(morning star)을 주리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자기들이야말로 바로 새벽별을 받은 이긴 자들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공식명칭도 "세계청년대학생MS연맹"이라고 하였다. 정명석은 JMS단체의 이름을 여러 번 바꾸었다. 방송이나 언론에 부정적으로 비칠 때마다 바꾸곤 하였다. 처음에는 애천 교회로 시작하여, 세계청년대학생MS연맹, 국제크리스찬연합, 기독교복음선교회로 이어지고 있다. 법인으로는 동서선교회가 있다. 동서선교회 이름으로 월명동 수련원 땅을 관리하고 있다. 월명동(정명석의 출생지)은 외부명칭은 수련원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성지 땅’으로 부른다. JMS교회들은 예수교 감리회로 간판을 걸기도 하고, 장로교라고 달기도 한다. 그리고 JMS교회는 간판이나 십자가 없이 창문에 교회 이름만 썬팅으로 마무리하고, 자기들만 알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신입생들은 처음부터 예배에 참석시키지 않는다. 되도록 30개론 다 듣고 수료해야 참석하게 한다. 2. 정명석은 누구인가? 1945년 3월 16일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정팔성과 황길례 사이에서 6남 1녀 중 3남으로 출생하였다. 위로 장남 정oo목사(성결교)와 차남 정oo목사(통합) 등이 일반교회 목사인 기독교집안에서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 집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은 장남이 어려서 동네에서 어린이들끼리 ‘춘향이 놀이’(무당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쥐고 있던 대가 흔들리며 ‘나는 베드로다. 예수를 믿어라’는 음성을 들으면서부터라고 한다. 정명석이 태어난 그 동네는 일제 때 금 광산으로 인해 제법 북적거리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화전민들만 남아 살던 지역으로 집이라고는 3채 밖에 없던 두메산골이었다. 형들은 공부하러 도시로 떠나고, 동생들도 돈 벌러 다 떠나고, 홀로 늦게까지 남았던 정명석은 나무하러 가서 기도하고, 굴에서 기도하고, 대둔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였다고 한다. 한번은 “나는 못 배웠습니다. 나는 가난합니다... 나는 못 생겼습니다”라고 신세한탄하며 기도하고 있었을 때, “누가 아니래?! 그렇지만 이제부터 내가 너를 가르쳐 주마”라고 하더란다. 그러면서 “너는 처음에는 창피하지만 배우고 나중에는 선생의 선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굴속에서 주로 기도를 하였는데, 가을에 굴에 들어갔다가 그 이듬해 나오기도 하면서 초인적인 수도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틈틈이 성경을 많이 읽었는데, 한번은 너무 어려워 땅에 묻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집에 읽을 것이라고는 만화책도 없었고, 다만 초등학교 교과서와 성경 책 밖에 없어 성경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성경책을 2000번 가량 읽었다고 자랑하였다. 정명석은 두 번씩이나 파월장병으로 월남 전쟁을 경험하였다. 월남전에서 수 십 번 죽을 고비에서 살아났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구해주셨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월남 전쟁은 메시야인 자기를 연단시키기 위해서 발생했다고 말할 정도로 자기에 대한 확신이 강한 사람이다. 바깥에서 보면 미치광이겠지만, 그를 재림예수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엉터리 주장도 진리처럼 통한다. 마치 기독교인들이 역사(歷史)를 구속사(救贖史)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 한 예를 들자면, 정명석은 주장하기를, 2002년 한국의 월드컵 4강은 자기가 재림예수라는 표적이라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적이 되듯이, 정명석이 ‘이 시대의 사명자’라는 표적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로 다시는 한국에서 월드컵도 열리지 않고, 한국이 4강까지 가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2012년 영국올림픽에서 홍명보호가 3위 성적으로 동메달을 땄다. 그리고 한국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도 개최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한국의 월드컵 4강은 비교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과 정명석이 무슨 관련성이 있는가?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강력한 표적이지만, 한국이 월드컵 4강을 하고, 심지어 우승할지라도 그것이 정명석이 재림예수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정명석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신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마치 예수님께 하나님의 신이 강림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자기에게 하나님의 신이 들어왔다고 주장하며 재림예수니, 보혜사 성령이니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만 40명도 넘는다. 전부 자기네 교주만이 진짜 재림예수라고 믿고 있으나, 예수님 말고는 전부 가짜 들이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24:5)”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것뿐이다. 정명석은 자기를 기도 많이 한 사람이라고 자랑한다. 대둔산에서 기도할 때는 너무 추워서 옆에 있던 소나무는 얼어 죽었는데, 자기는 살았다고 한다. 그 증거로 까맣게 된 손톱을 보여주며 그때 동상 걸린 흔적이라고 하였다. 모든 교주들이 하나같이 고생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여 마침내 계시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일맥상통,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자기가 한참 기도할 때는 번뜩하면 이산, 번뜩하면 저산, 자기가 어느 산을 생각하면 어느 순간 자기 몸이 그 산에 가 있더라는 것이다. 소위 축지법까지 썼다고 자랑하였다. 자기가 전주에서 전도하다가 밤에 출발하여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려 진산까지 와서 새벽기도에 참석했다고 한다. 참고로 전주에서 진산까지는 자동차로 달려도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이다. 그러나 나는 30년 가까이 그의 옆에 있었으나 그가 축지법 쓰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다만 이해하려 하다 보니, 지름길로 가서 좀 빨리 이동한 것을 두고 말하는가, 아니면 축구를 남보다 오랫동안 하는 것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이해하였을 뿐이다. 정명석은 그 외에도 거짓말(모사)과 과대포장이 심한 사람이다. 항상 부풀려 말하는 경향이 있다. 따르는 회원이 2만 명쯤이면 외부 사람들에게는 15만 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명석은 자기증거와 자기자랑에 목메는 사람이다. 항상 자기가 ‘이거 했다’, ‘저거 했다’ 하며 자기 증거 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늘 자기를 증거 하라고 독려하였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이 증거 잘못 해서 죽었다고 하면서...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정명석은 결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 아니다. 간혹 증거 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잠깐 이용하는 것뿐이다. 심지어 악을 행할 때도 "예수님도 그랬다"고 물 타기 하거나, "예수님께서 시켜서 하는 일이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악용하였다. 3. 30개론의 특징 1) 성경을 비유로 읽는다. (1) 오병이어 기적 실제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인 것이 아니라, 그날 생명의 떡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오천 명이라는 것이다. 열두 광주리는 열두 사도를 의미한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날 어린 아기가 내미는 도시락을 바라보시고, 떡을 떼고 또 떼서 사람들을 먹이신 것이 아니라, 도시락은 한쪽에 놓고, 그 대신 말씀을 전하여 그들로 생명의 떡으로 배불리 먹였다는 것이다. 만약에 사람들이 실제 떡을 먹고 배불렀다면 예수님을 떡집 아들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들었기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정명석의 비유론 해석은 질량보존의 법칙을 배운 사람들에게는 매혹적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오병이어로 5천명이 아니라 5만 명의 사람이라도 먹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에 말씀의 떡만 먹고 끝난 사건이라면 표적이라고 하면서 굳이 성경에 기록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오병이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실제 표적의 사건이었다. 이와 같이 성경을 비유로 풀거나 가현설(假現說)적으로 푸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고, 사탄의 미혹이다. (2) 베드로와 물고기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셔야 했을 때, 성경의 문자대로 베드로가 물고기 한 마리 잡아 아가미에서 돈을 빼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다는 세상을 비유한 것이고, 물고기는 사람을 비유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나가서 누구 돈 좀 없냐고 물었을 때 먼저 대답하여 돈을 꺼낸 준 사람이 물고기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도 돈이 필요할 때 사람들에게 말하여 그 필요를 해결해주는 사람이 물고기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바다에 나가 물고기 잡아서 돈을 꺼내 어떻게 바쳤을까? 하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런 가르침이야말로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성경의 기적들이 억지로 믿을 필요도 없이 술술 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어려워서 못하실 일이 있겠는가(창18:14).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만약 정명석의 말대로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서 돈 꿔서 낸 것이라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에는 실제적으로 기적과 같은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평소 설교자는 확신을 가지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증거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명석의 이와 같은 비유적인 해석방법은 성경의 기록을 실제역사로 보지 못하게 한다. 결국 재림에 대한 예언도 비유로 읽게 되는 바, 사람을 재림예수로 믿고 따르게 된다. 성경은 이와 같이 억지로 푸는 자들에게는 멸망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한다(벧후3:16). (3) 공중휴거 정명석의 공중휴거는 전반기와 후반기가 다르다. 전반기에는 공중은 하늘공중이 아니라 지구를 공중이라고 본다. 들림 받는다는 것은 새 역사로 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구약사람이 신약 사람 되는 것이고, 신약사람이 성약사람 되는 것이야말로 들림 받는 것이다. 구름은 깨끗해진 많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신약사람들(기독교인들)이 정명석을 재림주로 믿고 따르는 성약사람들(JMS)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휴거라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애굽에서 모세를 따라 나선 것이 휴거이고, 광야에서 여호수아를 따라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휴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휴거가 두 번 일어난다고 수정하였다. 육적 휴거(1차 휴거)와 영적 휴거(2차 휴거)가 있다는 것이다. 육적 휴거는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 정명석을 믿고 따르는 것이 육적 휴거요, 영적 휴거는 육적휴거를 이룬 사람들 중에 말씀 듣고 실천하여 빛나게 된 영혼들이, 성자본체가 하늘에서 영으로 내려올 때 올라가는 것이라고 한다. 평소 휴거에 자신이 없거나 거부감을 가졌던 사람들이라면 이런 가르침이 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생각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휴거는 두 번에 걸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몇 년 걸려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단번에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고전15:51). 성경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 그 예언이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하나님께는 사람들처럼 그 일이 어려운 일이냐 쉬운 일이냐가 중요하지 않다. 약속하신 일이라면 아무리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도 전부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도 불러 세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롬4:17). (4) 선악과 정명석은 선악과를 비유로 본다. 하나님께서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인간들의 입장에서 죽는다고 해도 따 먹을 것은 무엇인가? 남녀 성관계 아니겠는가? 하와가 따먹고 잉태하는 고통을 얻었는데 무슨 과일을 먹어야 잉태하는가? 입으로 따먹었다면 마스크를 하고, 손으로 따먹었다면 장갑을 꼈어야지 왜 하체를 가렸는가? 하체로 따 먹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따먹으면 죽을 과일을 만들어놓고 시험하는가? 왜 인간은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기어코 따먹었는가? 생식기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만들 수밖에 없었고, 인간들은 따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하와가 어린 나이에 성교하여 원죄를 지었듯이, 오늘날도 눈을 들어보라. 전부 온 세상이 성적인 문제로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가? 정명석은 선악과는 여자의 성기를 비유한 것으로 푼다. 정명석은 이와 같은 성경해석을 바탕으로 하여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육이 온전히 성장하기 전에는 절대로 성교하면 안 된다고 통제한다. 자기의 허락 없이 성교하는 사람들은 원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타락론으로 인하여 JMS 회원들은 자유롭게 이성교제를 하지 못한다. 이성교제 하다 보면 타락하게 되니까 아예 원천봉쇄 하는 것이다. 예배시간에도 남녀 따로 따로 앉는다. 심지어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강요한다. 10년이고 20년이고 정명석의 허락 없이는 결혼할 수 없다. 세상에 이런 통제는 북한 공산주의에도 없다. 그래서 허락받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결혼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합동결혼식이다. 간혹 부모의 강요에 못 이겨 스스로 결혼한 사람들은 JMS를 떠나야 하고(그것이 에덴동산에서 추방이다), 떠나지 않고 JMS에 남아 있더라도 낮은 급 구원을 받게 되고, 옆의 회원들로부터도 갖은 눈총을 받으며 평생 죄지은 자의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 정명석은 타락론을 강의할 때, “기독교 목사들은 밤마다 선악과 따먹으며 원죄 짓고 있으면서도 모른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JMS 회원들은 자기들만이 원죄를 해결하고 가장 깨끗한 주님의 신부라며 자긍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JMS 회원들은 엘리트의식과 영적 교만이 하늘을 찌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정명석은 성관계 하지 말라고 푸니 번성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양립할 수 없다. 정명석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악과는 영원히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성장하면 따먹게 하려고 하셨다고 변명한다. 그런 가르침은 통일교와 똑같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 선악과가 익은 다음에 따먹으라는 말씀이 있는가? 이와 같이 이단들은 성경에 없는 말을 지어내서 사람들을 종으로 삼고 이득(利得)을 취하는 것이 특징이다. 벧후2: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利)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성경에는 비유도 있지만 핵심은 전부 하나님의 약속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 만약 성경을 정명석처럼 비유로 읽는다면 해괴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트린 사건은 마리아가 향유옥합을 문자 그대로 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정명석의 비유론 식으로 해석한다면 신부가 첫날밤을 위해 향유옥합을 준비하였듯이, 처녀가 남편을 위해 평생 간직한 것이 무엇이냐? 바로 처녀의 순결이 아니더냐? 그러므로 ‘향유옥합을 깨트려라’ 라는 것은 ‘처녀의 순결을 내게 바쳐라’가 된다. 정명석에 의하면 자기는 완성한 아담이다. 그렇다면 익은 선악과는 따먹어도 괜찮다. 자기는 따먹어도 원죄에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정명석의 타락론은 그를 희대의 성범죄자가 되게 한 것이다. 선악과는 따먹으면 죽는 실제 과일이었다. 절대 여자의 성기가 아니다. (5) 불 심판 정명석은 불 심판을 말씀심판이라고 푼다. 자기가 전하는 말씀 들으면 구원, 안 들으면 심판받고 지옥 간다. 그러므로 자기가 지금 불 심판을 감행하고 있으니 재림예수라는 것이다. 꿩 잡는 것이 매라는 논리다. 물론 성경에는 말씀을 불로 비유한 것도 있다. 렘23:29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그러나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라. 소돔과 고모라 성이 유황불로 멸망 받았듯이,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하다 하셨다. 눅17:29-30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러므로 재림 때의 불도 실제 불이다. 그리고 베드로후서 3장의 7절 말씀을 보자.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개역한글> 이단들은 여기서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른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불 심판은 말씀심판이라고 우긴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자. 동일한 말씀이란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벧후3:5). 노아 홍수 심판 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물로 심판하셨다(벧후3:6). 그와 같이 종말에는 불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불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동일한 말씀이란 말씀으로 천지 창조하시고, 말씀대로 노아홍수 심판하셨던 하나님의 그 말씀. 그 동일한 말씀이 종말에도 말씀하신대로 불 심판 하실 것이다. 결코 비유가 아니다. 벧후3:7 사실 하늘과 땅은 지금도 하느님의 같은 말씀에 의해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하느님을 배반하는 자들이 멸망당할 심판의 날까지만 보존되었다가 불에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공동번역> (6) 구름 정명석은 구름을 사람으로 푼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자기 몸에 들어오셔서 자기를 타고 나타나셨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구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구름떼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믿고 따르니 그것이 바로 구름 타고 오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육신을 타고 나타나셨고, 자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따르니, 자기가 바로 구름타고 오신다는 재림예수라는 것이다. 거짓말이다. 제자들이 승천하시는 예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구름이 가리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천사들이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행1:11)고 하셨다. 그러므로 실제 구름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장 7절에도 “보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라고 하였다. 혹자가 나타나 ‘예수께서 구름타고 오시리라’는 명백한 역사적 예언을 불신하고, 비유로 해석하여 자기가 바로 구름타고 온 재림예수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정명석도 예외는 아니다. 이단들은 엘리야가 온다고 하더니 세례요한으로 왔듯이,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셨으나 전혀 다른 사람으로 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것도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부활하셔서 구름타고 승천하셨던 예수님, 그 예수님이 다시 하늘 구름을 타시고 영광중에 오시기 때문이다. 초림 예수와 재림 예수는 동일한 분이시다. 결코 다른 사람으로 바뀌지 않으신다. 히7: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 시대성(時代性)으로 읽는다. 정명석은 성경을 시대성으로 읽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시대성으로 읽는다는 것은, 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은 정명석으로, 마리아는 정명석의 모친으로, 베들레헴은 월명동으로 자동 번역하여 읽으라는 말이다. “너희가 구원을 얻을까 하여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은 곧 나를 증언하느니라(요5:39)”는 말씀을 읽는다고 치자. 그 성경을 읽을 때마다 신구약 성경이 정명석을 증언하고 있다고 읽는다. ‘새벽별을 주리라’는 정명석을 재림주로 맞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흰 돌을 주고 그 위에 나의 새 이름을 쓴 것이 있나니 받는 자 외는 모르더라(계2:17)”는 계시록의 말씀도 흰 돌은 정명석, 예수님의 새 이름은 정명석, 이렇게 읽으라는 것이다. 마치 신약성도들이 구약성경 읽을 때 선지자들의 예언을 예수님으로 해석하면서 읽듯이 말이다. JMS회원들은 “받는 자 외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2:17)”는 말씀도, 자기들만 선생님을 알아보았기에 예언이 성취되었다며 감격감사 한다. 동방의 독수리도 답을 정명석이라고 믿기 때문에 당연히 동방은 한국, 독수리는 정명석으로 읽혀진다. 정명석은 항상 자기를 예수님과 빗대서 설교하기 때문에, 정명석을 배신하는 것은 예수님을 배신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정명석의 어떤 약점이 들어나도 정명석과 등 돌리기는 쉽지 않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오늘날 기성교회 목사들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몰라서 십자가에 못 박았듯이 오늘날도 기성교회 목사들이 “선생님”을 몰라보아 심정의 십자가를 지게 했다는 것이다. 십자가도 시대마다 다르다고 한다. 모세는 구리 뱀 십자가, 예수님은 나무 십자가, 재림주는 심정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다. 거짓말이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 밖에 없다. 모세의 구리 뱀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한 것으로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았듯이,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요3:14-15). 모세가 만든 장대 위의 구리 뱀은 모형(模型), 예수님의 십자가는 원형(原型). 다른 말로 하면 그림자와 실체. 그리고 끝이다. 더 이상 다른 십자가는 없다. 성경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책이고, 십자가의 복음은 영원한 복음이다(벧후1:25). 재림예수는 심판 주로 영광중에 오시기 때문에 초림 때와 같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는 일이 없다(히9:28). 교주들이 실정법을 어겨 감옥에 가게된 것은 자기 죄 값으로 간 것이다. 그러하기에 자기는 지금 ‘세상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졌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십자가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완전한 구원이다(히10:14).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모형으로 삼는 또 다른 십자가는 없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은 시대성으로 읽으면 절대 안 된다.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베들레헴에 태어나셨고, 그 예언은 단일회적으로 성취되었다. 그것을 월명동으로 시대성으로 재해석하면 안 된다. 그리고 나귀새끼 타고 오신다(슥9:9)는 예언도 그대로 다 이뤄졌다. 베들레헴을 자기가 태어난 동네라고 읽고, 구름을 비유로 푼다면 세상 누구라도 다 재림예수라고 주장할 수 있다. 시대성을 두고 읽으라는 것은 초림주는 예수, 재림주는 정명석 자기라고 말하고 싶은 내용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시대성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히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3) 영적으로 읽는다. - 부활문제 정명석은 예수님께서 육신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영이 부활하셨다고 가르친다. 육신이 살아나셨다면 왜 낙향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몰라봤겠는가? 육신이 살아나셨다면 왜 제자들과 함께 역사를 더 펼치시지 않고 사랑하는 제자를 떼놓고 승천하셨는가? 무덤이 비었다고 그것이 육신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히틀러 시체가 없다고 히틀러가 부활했다는 말인가? 6.25때 죽은 시체를 찾지 못했다고 해서 그 육신이 부활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영이 부활했기 때문에 잠긴 문으로도 들어오실 수 있었고, 동시에 여러 군데 나타나실 수도 있었다. 고기 잡수시던 모습도 영적 현상이다. 조상 영들도 제사상에 나타나 음식먹지 않느냐?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도 육신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영이 부활한 것이다. 육이 부활했다면 왜 예수님의 12제자의 명단에도 없고, 그 뒤에 특별히 뭘 했다는 말이 없느냐? 엘리야도 육신이 부활했다면, 변화산상에 나타난 엘리야는 무엇이냐? 기독교인들은 승천한 엘리야는 육이라고 하면서, 변화산상의 엘리야는 왜 영이라고 하느냐? 육으로 승천해서 영으로 재림했다는 말이냐? 아니다. 승천한 엘리야도 영이고 변화산상의 엘리야도 영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재림도 영으로 부활하셨으니 영으로 재림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육신도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영만 부활하여 구약시대는 선영계, 신약시대는 낙원, 성약시대는 천국으로 시대급의 구원대로 가는 것이다.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도 물과 같은 밋밋한 율법 말씀이 달콤한 신약말씀의 포도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날 포도주가 떨어진 그들에게 질펀하게 포도주를 마시게 한 것이 아니라, 그날 설교를 통하여 말씀의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중 포도주가 더 좋았다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으신 것도 실제로 걸으신 것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 바다를 유대교인들처럼 율법의 노(櫓)로 저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말씀으로 걸어가니 사람들이 귀신(이단)이라고 하였다. 그 바다에서는 귀신 출현설이 있었고, 세상 바다에서는 이단출현설이 있기로 예수님을 보자마자 귀신(이단)이라고 했던 것이다. 자기에 대해서도 이 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역시 성경의 역사를 전부 거짓말로 만드는 것으로 절대로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다. 성경에 기록된 실제적 역사를 영적인 사건으로 치부하는 것은, 초대교회 때 예수님의 육체를 환상이라고 해석하여 이단으로 정죄된 영지주의의 가현설과 똑 같은 주장이다. 성경의 기적은 실제역사이다. 4) 축소 확대로 읽는다. 한 가지 설명하고 그와 같이 그러하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런 교육을 천재적 교육이라고 자랑한다. 하나를 깨닫게 해주면 열 가지 백가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주 앞에 두 감람나무와 두 증인을, 하나님 앞에 모세와 엘리야라고 푼 후 어느 시대나 다 그러하다고 말한다. 모세와 여호수아,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루터와 칼빈, 남자와 여자... 축소하면 왼팔과 오른팔, 왼쪽 귀와 오른 쪽 귀, 왼 눈과 오른 눈, 정맥과 동맥, 자전과 공전, 암술과 수술... 확대하면 초림주와 재림주. 초림주는 예수 재림주는 정명석. 결국 예수님과 자기는 하나님 앞에 두 감람나무라고 한다. 자기를 재림주라고 말하기 위해서 두 감람나무와 두 증인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계11:4)는 증인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지 어떤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해석되어 있다(계1:20). 둘은 증거의 숫자이다. 그러므로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주님을 증거 하는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두 감람나무란 이단들의 주장처럼 문선명과 정명석, 혹은 박태선과 문선명, 이만희와 홍종효... 이와 같은 어떤 특정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더 확대하여, 가장 큰 두 감람나무는 성부 아버지와 성령 어머니라고 주장한다. 즉 그 말은 하나님도 부인이 있다는 말이다. 성경을 축소 확대하면 그와 같이 황당무계한 해석을 하게 된다. 그러하기에 성경은 더하거나 빼지도 말라고 경고하였다(계22:18-19). 하나님께 무슨 부인이 있다는 말인가? 부부신론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나 나오는 이방신론이다. 동방의 독수리 예언도 페르샤의 고레스로 성취되었다. 그것을 고무줄처럼 늘려 시대성이니 축소 확대니 하면서 한국의 정명석으로 풀면 안 된다. 이미 성취된 예언이다. 정명석처럼 성경을 읽으면 본문의 해석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줄었다가 하게 되고, 성경을 맘대로 더하고 빼서 읽게 된다. 성경은 더하거나 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다(계22:18-19) 바울도 기록된 것 외에 넘어가지 말라고 교육하였다(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고전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5) 영적체험을 바탕으로 해석한다. (1) 예정론을 뗄 때 한번은 정명석이 인삼 지주목을 사기 위해 쌀 40가마 값되는 돈을 아는 사람에게 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사기치고 나무를 갖다 주지 않았다. 게다가 그 사람은 정명석이 보는 앞에서 차용증서를 불태우고, 등잔대로 때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명석은 하도 기가 막혀서 망연자실 하고 있다가, 주일날 청주서문교회에 갔는데 그날 설교제목이 예정론이더란다. 정명석은 그렇다면 내가 사기 당한 것도 하나님의 예정이란 말인가? 그러면 하나님께 따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어느 농가에서 그대로 엎어져서 기도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앞에 8등신의 예쁜 아가씨가 서 있더란다. 그런데 손은 조금 덜 예쁘게 보였다고 한다. 그 때 음성이 들려서 “네가 이 아가씨와 결혼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 여자 전부와 결혼하는 것이지, 손이 안 예쁘다고 손만 자르고 데려 가겠느냐? 눈이 예쁘다고 눈만 뽑아서 데려가겠느냐?” 하더란다. 그러면서 그 아가씨가 지구로 확대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는 전체 인간을 예정한 것이지, 어찌 일부만 예정 하였겠느냐?고 하시더란다. 그리고 사람의 구원도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어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구별하여 놓았겠느냐? 라고 하시더란다. 구원도 조건대가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으심도 안 죽으실 수도 있었는데 사람들의 무지로, 그리고 세례요한의 증거부족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한다. 정명석은 그런 식으로 도표 하나하나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2) 타락론의 인봉을 뗄 때 정명석은 새벽에 기도 굴에서 나오면서 선악과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 맞아 이거야 하면서 주먹으로 돌을 쳐서 피까지 나왔다고 한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 그거 아니야, 너 그거 잘못 깨달았어!”라고 하시더란다. 그래서 자기는 “아니기는 뭐가 아녜요? 선악과가 여자 성기 맞다”고 하면서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였다고 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메시야인 내가 아니라고 해도 너는 끝까지 맞다고 주장했지? 잘했다. 그와 같이 네가 이 진리 갖고 나가면 세상 사람들이 다 들고 일어나서 네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메시야인 내가 아니라고 해도 맞다고 하면서 밀어붙였듯이, 너는 앞으로도 계속 하여 포기치 말고 밀고 나가라”고 하시더란다. “주님 제가 보는 것이 태양 맞지요? 그와 같이 선악과도 여자 성기 맞습니다.” 주님은 “그래 맞다. 너는 내가 아니라고 해도 맞다고 주장했듯이, 세상에 나가 이 진리를 전할 때 그 누구가 아니라고 해도 맞다고 하며 하나하나 이해시키며 가르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엉터리 해석을 하여준 주님이라는 영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성경을 이렇게 엉터리로 가르쳐 준 영이 절대로 예수님일 리가 없다. (3) 한때 두때 반때 한때 두때 반때는 JMS회원들이 최고로 자랑하는 교리이다. 정명석은 다니엘서를 읽을 때마다 한때 두때 반때가 늘 궁금했었다. 1972년 남한산성 부근 어느 교회의 사찰집사를 하고 있을 때, 눈이 허벅지까지 온 새벽이었다. 정명석은 눈을 쓸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머리가 총명해지며, 미국 돈을 한국 돈으로 환산하듯이, 한때 두때 반때는 환산해야 하느니라. 그러면서 한 때는 1년, 두 때는 2년, 반 때는 6개월로 풀어야 한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한때 두 때 반 때는 날짜로 고치면 1260일이다. 1일을 1년으로 환산하면, 1260일은 1260년이 된다. 그리고 성경의 미운 물건은 오마르 사원이고 그것은 688년에 세워졌다. 미운 물건을 세울 때 688년부터 1260년을 더하면 1948년이 나온다. 1948년은 육적 이스라엘의 육적해방, 그 다음 688년에 1290년을 더하면 1978년, 19789년은 영적 이스라엘인 기독교의 영적 해방, 자기가 1978년부터 말씀 전하여 기독교를 신약 주관권에서 해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1978년 6월 이전에 서울에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6월부터 사명을 펼치기 시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정명석은 1948년이 맞았음으로 1978년도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688년에 1335년을 더하니 2023년이 나온다. 그때가 정명석의 사명이 끝나는 해라는 것이다. 그러나 1일을 1년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1일은 1일이다.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신다고 하시고 그대로 3일 만에 부활하셨다. 노아 홍수 심판 때 40일 동안 비가 온다고 하셨는데, 문자 그대로 40일 동안 비가 왔다. 1일 예언이 1년으로 풀린 적이 없다. 그리고 미운 물건은 오마르 사원이 아니다. 마24: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병행구절을 보자. 눅21: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예수님께서 다니엘서의 멸망의 가증한 것을 (로마) 군대라고 해석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정명석의 미운 물건에 대한 해석은 틀렸다. 그리고 오마르 사원이 688년에 세워진 것도 아니다. 브리테니커 사전에 의하면 685년부터 691년도 까지다. 시작년도 틀리고 준공년도 틀렸다. 더구나 한때 두때 반때는 정명석이 태어나기도 전에 발간된 한에녹의 ‘영원한 복음’에 나온 도표와 똑같다. 표절을 한 것이다. 정명석은 1978년부터 21년 전반기를 뛰면 1999년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같은 일이 자기에게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검찰에 고소되고 방송에 나고 제자들은 다 도망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1999년 1월에 실제로 방송에 나오고 검찰에 고소되고, 제자들은 많이 흩어졌다. 정명석의 예언이 맞은 것이다. 그러나 메시야 선포를 여의도 광장에서 멋들어지게 하려고 했는데 방송을 통해서 원치 않는 방향대로 되었다고 했다. 정명석은 자기 사건을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우측 강도요, 자기를 조롱하고 비아양 거리는 사람을 좌측 강도와 같다고 하였다. 자기는 죄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도둑같이 심판해 버리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한일 월드컵의 해인 2002년 모든 법적 문제가 끝나고 부활하여 후반기 21년을 뛴다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법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그는 홍콩에서 중국으로 밀항한 후 숨어 지내다가 급기야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수감 중이다. 지금은 부활이 2002년이 아니라 2012년이라고 역사론을 수정한 상태이다.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져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그러나 정명석은 법적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고, 2002년 부활한다는 예언도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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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연/특강
    2016-05-27
  • 종말을 기다리는 하나님의교회 (이 글은 5월 25일(수) 거제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부산이단대책세미나 강의안 전문입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하나님의교회 ▲ 탁지일 교수(현. 부산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 교수) 1. 성령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은 한국사람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하나님의교회)는 한국인 남녀를 각각 “성령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으로 신격화한다. 설립자인 안상홍(安商洪)을 “재림 예수” “재림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으로, 그리고 1985년 안상홍 사후 후계자로 등장한 장길자(張吉子)를 “어머니 하나님” “새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 “성령의 신부” “어린양의 아내”로 믿고 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찬송을 “안상홍님 지으신 모든 세계”로 바꿔 부르고, “안상홍 하나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포교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안상홍님”에게 기도하고 “아버지 안상홍님 이름”으로 기도를 마무리 한다. 어린이들에게는 “십자가를 세우지 마세요. 일요일도 거짓말예요. 우리는 이 세상 교회 없는 어머니도 있죠. 우리의 구원자 안상홍님도 계신답니다. 안상홍님 믿어야 하늘나라에 가죠”라는 노래를 가르친다. 안상홍과 장길자 두 사람이 하나님으로 등장한 이유에 대해, 하나님의교회는 창세기 1장 26절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 나오는 “우리”라는 복수형 단어를 성경적 근거로 들고 있다. 즉 여기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히브리어 “엘로힘”은 복수 명사이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으니, 따라서 하나님은 복수인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엘로힘(אֱלֹהִים)”은, “엘로아”(אֱל֫וֹהַּ)의 복수(gods)로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한분 하나님(the supreme God)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하나님의교회는, 부정확한 성경원어 해석을 근거로, 한국인 남녀를 하나님으로 신격화하고 합리화하는데 이르게 된 것이다. 주목할 점은, 표면적으로는 안상홍과 장길자에 대한 신격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교회 실세는 김주철(金湊哲) 총회장이다. 하나님의교회 정관 제28조에 따르면, “총회장은 성령 안상홍 하나님께서 세우신 김주철님이시며, 영구직이다.”라고 명시하고, 총회장의 직무에 대해, “모든 회의의 의장이고, 진리를 전수하여 반포하는 책임자이며, 자산에 대한 최고 책임자로 총회 재정을 감독하고, 정관 및 규정의 최종 해석권자이며, 권징의 최고결정권자이고, 총회 운영부서 및 지역 교회를 통괄하는 책임자”라고 정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안상홍과 장길자는 겉으로만 신격화된 인물들일뿐, 막강한 절대 권력을 가진 김주철 총회장이 바로 하나님의교회 실세라고 할 수 있다. 2. 반복되는 시한부 종말 주장 하나님의교회 설립자 안상홍의 교리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곳은, 장길자와 김주철의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www.watv.org)가 아니라, 안상홍의 아들이 이끌고 있는 새언약 유월절 하나님의교회(www.ncpcog.co.kr)이다. 새언약 유월절 하나님의교회는,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가 안상홍의 교리를 계속 변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새언약 유월절 하나님의교회는 공식홈페이지에서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와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근본뿌리와 진리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세계선교복음협회(증인회)는 1985년도 이후에 안상홍님의 가르침에도 없고 성경에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하신 적도 없는 어머니하나님을 세우고 또한 시대별 구원자와 새이름이라는 교리의 바탕으로 예수님의 이름이 아닌 안상홍님의 함자로 기도를 올리고.... 현재는 살아생전 안상홍님의 책자와 육성말씀의 가르침보다는 그 곳에서 만든 교리를 바탕으로 책자를 만들어 어머니하나님을 증거하는데 큰 힘을 쏟고 있습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한다. 새언약 유월절 하나님의교회는 자신들이 안상홍의 가르침을 그대로 준수하고 있는 정통 후계자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홈페이지에는 안상홍의 모든 저서, 친필로 기록된 설교문과 교회연혁, 육성설교, 유품, 사진 등을 전자책 및 그림파일 형태로 게시하고 있어, 가장 정확한 안상홍의 원래 교리 연구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들 자료들에 따르면, 하나님의교회 교리는 시한부 종말론에 기초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교회는 “1988년은 세상종말”이라고 주장하는 전단지를 배포했다. 또한 안상홍은 그의 저서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에서, 1988년뿐만 아니라 2012년도 종말의 때라고 주장했다. 안상홍은 이 책에서 “서기 1844년에서 168년을 합하면 서기 2012년이 마지막 끝 날이 되겠습니다.”라고 주장했는데, 1844년은 하나님의교회가 뿌리를 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가 주장했던 종말의 연도이고, 168년은 모세가 성막을 세우는데 걸린 168일을 의미하며, 그리고 1844에 168을 더하면 2012년이 종말의 해라는 주장인 것이다. 하지만 1988년과 2012년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하나님의교회는 시한부 종말론 주장을 줄곧 부인해왔지만, 최근 수원지방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안상홍 사망 이후 1988년 종말이 온다는 취지의 전도서를 만든 바 있고, 1999년에는 신도들에게 Y2K나 1999년 지구멸망예언에 관한 설문조사를 벌였으며, 하나님의교회 내에서 2012년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주장 또한 제기되었던 점”을 이유로 들어 하나님의교회 시한부 종말론이 허위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한편, 어머니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하여, 안상홍은 교회 내에서 여성을 신격화하거나, 지도력을 갖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83년 측근 엄모 여전도사로 인한 분란에 대해, “예루살렘을 한 여자로 해석하다는 것은 정신환자 아니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설교를 통해 경고하고, 신부는 한 여성이 아니라, 144,000 성도들이라고 단언했다. 1985년 안상홍 사후, 서울과 부산 세력으로 교회가 분열되는 과정에서 김주철 총회장이 직접 작성한 글에 따르면, “장길자 전도사 본인 자신도 우상화 하는 것을 원치 않고 우리도 우상화 할 수 없다.... 144,000 성도들이 신부이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약속은 결코 지켜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는, 설립자 안상홍의 교리 중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만을 취사선택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 나아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필자가 방문했던 양산 통도사 인근 공원묘지에 있는 안상홍의 무덤은, 하나님의교회가 주장하는 내용과는 격이 맞지 않는 규모로, 벌초조차 되지 않고 방치된 모습이었다. 3. 종말은 실패해도 교세는 오히려 성장 하나님의교회 시한부 종말 주장에는 종말이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교회 시한부 종말 주장은 계속 실패했지만, 교세는 오히려 지속적으로 성장해왔다. 신격화된 안상홍이 사망하고 시한부 종말 주장이 실패하면, 신도들이 하나님의교회를 떠날 것이라고 우리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이는 국내외 이단들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상식의 눈’이 아니라, ‘신도들의 눈’을 통해서 바라볼 때 이해할 수 있다. 즉 신격화된 교주의 죽음을 받아드리고, 시한부 종말 주장의 실패를 받아드리는 순간, 신도 자신은 정체성의 심각한 혼란을 겪게 된다. 게다가 그 단체에 몸담고 헌신했던 지난날들을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은 이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다. 이러한 현실은 교주의 죽음과 시한부 종말 주장의 실패를 받아드리는 것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선택을 반대했던 가족들과 주변 지인들에게 받을 비난과 동정이 두렵기 때문이다. 결국 신도들은 스스로를 위해 교주의 죽음을 미화하거나 업그레이드된 신격화 과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또한 새로운 교리 변개를 통해, 새롭게 설정된 또 다른 종말의 때를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변개된 교리를 근거로 배수진을 치고 재무장한 신도들은, 외부적으로는 공격적인 포교활동을 통해 새로운 신도들을 영입하고, 내부적으로는 2세대 자녀들을 교육하면서 교세의 확장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하나님의교회는 자신들의 신도수가 수백만에 이른다고 주장하지만, 대략 20~30만 정도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단연 국내 최대 이단조직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들의 주력 연령층이 30~40대라는 사실이다. 특히 해외에도 다수의 외국인 신도들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해외선교사들 및 현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교회는 이미 복음전도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하나님의교회 해외교회 설립현황을 분석하면, 세계 곳곳에 수많은 모임처들이 세워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지구 반대편 페루에도, 힌두교의 나라 인도에도 수십 개의 하나님의교회가 짧은 시간 내에 세워져 운영 중이다. 현지 선교사들에 따르면, 하나님의교회가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건물을 세우고, 신도들을 미혹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하나님의교회 피해자들이 반대운동(www.examiningthewmscog.com, encountering-ahnsahnghong.blogspot.kr)을 펼치고 있다. 하나님의교회에 대한 국제적 차원의 공동대책 마련이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하나님의교회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에 따르면, 하나님의교회 재산이 3~4조에 이른다고 한다. 통일교처럼 사업을 하지 않는 하나님의교회가 어떻게 이런 거대한 자산을 가지게 되었는지 자못 궁금하다. 하지만 종말의 때로 주장했던 2012년에 하나님의교회가 했던 일을 보면, 그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된다. 종말의 때라고 주자했던 2012년 한 해 동안, 하나님의교회는 국내 29곳에 대형 교회를 건축하거나 매입했다. 과연 종말의 순간에 대규모 부동산을 매입하는 비합리적인 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종말의 때를 대비한 방공호 용도로 매입했을까? 과연 하나님의교회 지도자들은 정말 2012년을 종말의 때로 믿었을까? 분명한 점은, 하나님의교회 시한부 종말론이 실패와 재설정을 거듭하는 동안, 하나님의교회 교세는 성장하고 재산을 지속적으로 증식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4. 오른손이 하는 일은 반드시 왼손이 알게 하는 홍보전략 하나님의교회의 홍보 방식이 특이하다. 한편으로는 가가호호 방문과 거리포교 등의 직접적인 포교전략을 구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성격을 감춘 채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통해 긍정적인 노출을 시도하는 양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장길자가 대표로 있는 국제위러브유운동본부(www.weloveu.or.kr)와 새생명복지회(www.newlifewf.org) 가 그 전위조직들이다. 성경은 “너희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마태 6:3)라고 가르치며,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봉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하나님의교회의 경우는 정반대이다. 오히려 오른손이 하는 일은 ‘반드시’ 왼손이 알게 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하나님의교회 홍보 패턴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한 후, 그 내용을 상대적으로 통제가 용이한 지역 언론을 통해 기사화 한다. 둘째, 해당 기사를 가지고 지역 공공기관을 찾아가 상장 수여를 요청한다. 주민선거로 구성되는 지방자치단체들이 이를 거절할 명분을 갖기 어렵다는 것을 하나님의교회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수상 내용을 보도자료로 배포하여 다시 기사화하거나, 자신들의 인터넷 홈페이지나 신도들의 블로그에 올려 선전한다. 넷째, 이를 밖으로는 포교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안으로는 반대하는 신도들의 가족들을 안심시키고 설득하는데 사용한다. 이 과정을 국내외에서 반복하며, 주변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신흥종교단체의 사회적 노출 정도와 효과는 그 성패에 깊이 영향을 미친다. 통일교를 비롯한 1세대 이단들이 네거티브홍보(negative promotion)를 통해 자신들의 이름을 사회에 알렸다면, 최근 신세대 이단들은 포지티브홍보(positive promotion)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감을 사회에 각인시킨다. 즉 자신들이 사회적 역기능을 수행하는 위험한 사이비종교가 아니라, 친사회적인 평범한 종교단체인 것을 알리는 전략이다. 물론 이들의 최종 목적은 명백히 반기독교적이다. 즉 안상홍과 장길자를 하나님으로 세상에 알리며, 하나님의교회가 기독교의 대안세력으로 사회에 자리 잡기 위함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교회 홍보전략은 일면 성공적으로 보인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성공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시선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만약 사회봉사에 열심인 하나님의교회 신도와 비윤리적인 범죄를 저지른 기독교인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 과연 비기독교인들은 누구를 선택할까? 기독교가 아무리 이단을 교리적으로 정죄한다고 하더라고, 요즘 분위기를 볼 때 한국사회는 사회적 순기능을 하는 이단을 더 선호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교회는 사회적 비판에 직면하고 있는 기독교를 비판하며, 자신들을 타락한 기독교의 대안세력으로 세상에 내세우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개혁은 이단대처에 필수적이다. 개혁된 교회만이 날로 업그레이드되는 이단들의 도전에 응전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교회의 이단대처 현장에, 사리사욕과 정적제거의 목적을 가지고 이단문제를 악용하는 교회정치세력들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 기득권을 위해 이합집산 하는 이들 정치세력들이 바로, 이단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이단대처를 위한 연합활동을 방해하는 반교회적 세력들이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비판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판은,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우리 민족을 위해 헌신한 기독교를 향한 엄격하고 높은 사회적 기대치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의 불확실한 세상에서 민족을 위해 신실한 삶을 살았던 한국교회의 모습을 기억하는 한국사회는, 근래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에 대해 날카롭고 냉정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단과 주변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영적 신호를 읽을 줄 아는 교회만이, 스스로를 개혁할 수 있는 동력을 가질 수 있다. 5. 복면이단 하나님의교회 대처 가이드라인 시한부 종말 주장으로 사회와 가정에 혼란을 야기하는 하나님의교회는 사회봉사단체라는 복면을 쓰고 활발하게 친사회적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이들의 포교전략은 조직적이고 집요하다. 청소년들과 청년대학생들은 물론이고 어린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젊은 가정주부들에게 집중적으로 다가서고 있다. 거리에서 하나님의교회 포교자들에게 미혹된 청소년들이 하나님의교회로 자의반 타의반 이끌려 들어가 교리교육과 침례까지 받는 피해사례들이 발생하는가 하면, 집요한 가가호호 방문포교를 통해 미혹된 주부들로 인해 가정불화가 발생하기도 한다. 사회봉사라는 복면을 쓰고 정체를 감춘 채, 친근하게 접근하는 하나님의교회에 대한 예방과 대처 없이 한국교회의 복음전도와 이단대처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하나님의교회에 대처하기 위한 합법적 가이드라인 마련이 필요하다. 첫째, 접근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의교회 포교자들은 길거리 혹은 집을 방문해 집요한 포교를 진행한다. 거절에 익숙하지 않은 청소년들을 길에서 미혹해, 교리교육을 시킨 후 침례를 주기도 하고, 집을 방문해 교리교육을 시키고 집안 화장실에서 샤워기로 침례를 준 사례도 있다. 성경은, 이단에 속한 사람은 한두 번 훈계하고 멀리하고(딛 3:10),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요이 1:10) 권면한다. 하나님의교회 포교자들의 접근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특히 중고등학생들에게 집요하게 접근하는 하나님의교회 포교자들을 만나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나 공권력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도록 자녀들에게 경계예방 교육을 해야 한다. 둘째, 교회 밖 봉사활동에 신중해야 한다. 다양하게 진행되는 하나님의교회 봉사활동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자녀들이 사회봉사학점 이수를 위해 봉사활동을 해야 될 경우, 혹시라도 하나님의교회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봐야 한다. (물론 다른 이단들도 최근 사회봉사활동에 집중하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각 지역 자원봉사단체에도 하나님의교회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기 때문에, 봉사활동을 주관하는 단체에 대해 미리 확인한 후 사회봉사활동에 참여해야 한다. 셋째, 가면을 벗겨야 한다. 대통령표창 등을 수상했다고 선전하는 하나님의교회 정체를 주변 이웃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즉 하나님의교회는 한국인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으로 신격화하는 단체이며, 반복적으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해 왔고, 이로 인해 재산 갈취와 가출과 이혼을 조장한다는 사실이 재판을 통해 받아드려졌다는 점을 널리 알려야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교회를 경계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 하나님의교회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전하기 위해서, 한국교회가 다시 사회봉사의 아이콘으로 거듭나야 한다.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는 교회만이, 시한부 종말의 위기를 조장하며 ‘참된 하나님의 교회’를 오염시키는 ‘이단 하나님의교회’에 당당하게 대처할 수 있다. (「목회와 신학」(2016년 2월호) [부록] 이단 동향 분석 및 향후 전망 이단은 동시대 교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자신을 타락한 교회의 대안으로 내세운다. 그렇기에 이단현상에 대한 세밀한 연구는,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재확인하고,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하고 재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최근 이단사이비단체들의 활동을 분석하고, 향후 전망과 대처 방안을 제시해 보았다. 1. 사리사욕(私利私慾) 단 한 차례도 시한부종말론이 성공한 적이 없다. 성서는, 종말의 날과 때는 아무도 모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하나님의교회)의 멈추지 않는 시한부종말론과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의 144,000명 육체영생 교리를 내세운 조건부종말론에 수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어, 소중한 가족과 꿈을 포기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2012년 종말을 주장하던 하나님의교회가, 2012년 한 해 동안만 전국 29개 지역의 땅을 사고, 건물을 마련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했다는 점이다. 종말의 순간에 부동산을 매입하는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현재도 앞으로도 이들의 시한부 종말 주장은 계속될 전망이다. 또한 신도수가 144,000명에 이르면 육체영생하고 왕과 같은 제사장이 된다던 신천지는, 144,000명이 거의 찼다는 2015년에 부동산 매입과 건축에 혈안이 되었다. 144,000명이 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세상의 땅과 건물에 집착하는 신천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결국 시한부종말론과 144,000 교리를 내세운 조건부종말론은 거짓 명분일 뿐, 재산증식을 위한 사리사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거짓이 밝혀지기 전에 돈을 벌어야 한다는 계산, 돈이 있어야 신도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계산, 신도들이 통제되어야 교주의 신상에 문제가 생겨도 조직이 건재할 수 있다는 계산, 종말론적 이단들의 이런 얄팍한 계산에서 산출된 사리사욕(私利私慾)이 두드러진 2015년이었다. 2. 세대교체(世代交替) 주요 이단들의 세대교체가 진행 중이다.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이룬 이단은 하나님의교회가 거의 유일하다. 소위 “아버지 하나님” 안상홍씨에서 “어머니 하나님” 장길자씨로의 세대교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종교사회학적으로는 신흥종교로의 정착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교회에 대한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대처가 시급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과 신천지 등, 대다수 이단들의 세대교체는 현재 진행 중이다. 참가정을 표방하는 통일교의 세대교체는 부모자식 그리고 자식들 간의 진흙탕 싸움으로 진행되고 있다. 자식이 어머니를 “사탄의 핏줄”이라고 부르고, 자식들도 서로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참가정도, 참부모도, 참자녀도 없는, 명분 없는 재산과 권력 다툼의 모습만 노출되고 있다. 신천지는 지난 해 설립자 이만희씨의 후계자로 김남희씨를 지명했다. 그들의 주장대로 이씨가 영생불사한다면, 후계자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결국 이만희씨의 사후를 대비하는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상한 교리와 명분으로 포장되더라도, 이단들의 세대교체는, 첫째, 교주의 사후를 대비한 보험 차원의 사전 포석이며, 둘째, 교주 사후에 일어날 수 있는 신도들의 혼란과 이탈을 막기 위한 사전 통제장치의 마련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단들의 세대교체 성공이 어려운 만큼, 조직 분열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 예를 들면, 통일교 문선명씨의 부인 한학자씨, 그리고 아들들인 문현진, 문국진, 문형진의 권력투쟁이 진행 중이며, 신천지 내부에서도 영향력 있는 지파장들이 분리 독립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주목할 점은, 최근 주요 이단 세대교체(世代交替)의 혼란기가 한국교회 이단대처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3. 여성시대(女性時代) 이단들의 여성시대가 열렸다. 주요 이단들의 후계자들이 대부분 여성들이다. 통일교의 한학자씨, 기독교복음선교회(JMS)의 정조은씨, 하나님의교회의 장길자씨, 신천지의 김남희씨, 중국이단인 전능하신하나님교회(동방번개)의 양상빈씨 등의 여성들은 6천년 만에 태어난 재림주 독생녀, 어머니 하나님, 이긴자의 영적 배필, 혹은 재림 그리스도 등으로 신격화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서, 그것도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영역에서 여성지도력이 급부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여성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사회 핵심 지도력으로 여성들이 부상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관계가 있다. 이단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생존전략상 시대 트렌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남성을 후계자로 정할 경우, 현 지도자를 배신할 우려도 있고, 후계자를 꿈꾸는 여러 남성 2인자들 사이의 분란과 조직 분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김백문, 문선명, 박태선으로부터 시작된, 한국이단교리의 성(sexuality)적 특징과도 관련되어 있다. 한국이단들은 교리적으로 음양의 결합을 온전함의 상징으로 보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이들 여성 후계자들의 배후에는 일반적으로 전권을 가진 실세 남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뒤에서는 남성 중심의 조직이 가동된다. 통일교 한학자씨의 측근들, 하나님의교회 총회장 김주철씨 등을 비롯해, 카리스마적인 남성 창교자의 뒤를 잇는 여성 후계자 뒤에는, 남성 중심의 조직이 도사리고 있다. 이단 후계자들의 여성시대(女性時代)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단 조직 내 남성중심의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성격은 지속될 전망이다. 4. 사회봉사(社會奉仕) 사회봉사가 이단들의 특징이 되었다. 최근 성장하는 이단들은 앞 다투어 사회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나님의교회는 대통령상 수상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신천지는 낙후지역 벽화그리기와 이주민지원 등의 봉사활동에 힘을 쓰고 있다. 다른 이단들도 국내외 봉사활동을 전면에 내걸고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변화는,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봉사에 헌신적인 이단’과 ‘개교회주의에 집착하는 교회’가 있다면, 비개신교인들은 누구를 더 선호할까? 사회적 순기능을 하며 ‘표창장을 받는 이단’과 사회적 역기능을 노출하며 ‘비판의 대상으로 떠오른 교회’ 중에서, 한국사회는 누구를 더 선호할까? 사회의 동의와 공감을 결여한 이단규정은 마녀사냥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이단이 문제가 아니라, 이단을 규정하는 주체가 문제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고심하며 이단과 정통을 분별하는데, 한국사회는 이러한 이단논쟁을 교회의 밥그릇 싸움 정도로 보고 외면할 수 있다. 최근 성장하는 이단들은, 소수의 기독교인들에게 교리적인 인정을 받는 것보다, 다수의 비기독교인들에게 사회적인 공신력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한편으로는 사회봉사(社會奉仕) 활동에 헌신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을 저지르는데 망설임 없는 이들 이단들에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건강한 교회만이, 이단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건강성과 사회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지 못한다면, 이단 대처를 위한 영적 힘을 갖기 어렵다. 앞으로도 이단대처를 위한, 한국교회의 체질개선 지속되어야 한다. 5. 해외진출(海外進出) 한국이단들이 한류바람을 타고, 성공적으로 세계화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교파 간, 교회 간 경쟁을 통한 비효율적인 선교를 진행하는 동안, 이단들은 조직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선교 오지를 효과적으로 파고들고 있다. 이단 대처가 결여된 선교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가 되었다. 신천지처럼, 해외 교민사회에 침투하는 이단들도 있고, 하나님의교회와 기쁜소식선교회 국제청소년연합(IYF)처럼 현지인들을 주로 미혹하는 이단들이 있다. 신천지는 해외에 있는 친인척과 지인들에 관한 정보를 신도들로부터 수집하여, 그들만의 모략포교, 즉 거짓말 포교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교회는 국내에 방문한 외국인들에 대한 자원봉사활동을 매개로 관계를 형성한 후, 현지 침투를 시도하고 있다. 최근 해외에 설립되는 하나님의교회 숫자가 급증하고 있다. 선교사들로부터 이단들의 정체와 대처방안에 대한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국내차원의 이단대처를 넘어, 해외진출(海外進出)을 시도하는 한국이단들을 예방하고 대처할 글로벌이단대처네트워크의 구축이 필요하다. 이 네트워크는 교파주의의 틀 속에 갇혀있는 국내보다는, 현지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초교파 조직으로 구성될 때 효과적일 수 있다. 한국선교사들이 현지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신력 있는 영문 자료들의 제작 및 배포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6. 허망지설(虛妄之說) ‘거짓되고 망령된 말’로 미혹하는 신천지가, 동료 이단들의 추종을 불허하며 활동하고 있다. “모략”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 된, 반사회적이고 비성경적인 신천지의 거짓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가정과 교회 안에 불신을 초래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신천지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신천지로 인한 분열과 불신이 두려운 것이다. 초대교회부터, 이단은 거짓말을 앞세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분열시켜왔다. 거짓 형제들이 우리 안에 가만히 들어와, 예수 안에서 자유 한 우리들을 그들의 종으로 삼으려고 미혹을 멈추지 않았다(갈 2:4). 144,000을 명분으로, 부모자식 간에, 부부 간에, 형제자매 간에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거짓말이 난무하도록 신천지가 만들었다. 거짓말이 합리화된 기독교 종파는 없다. 기독교는 어떤 시대와 상황을 만나도,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만을 그리스도로 고백해왔다. 설령 이 믿음으로 인해 박해와 순교를 당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을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선포해 왔다. 결코 나의 믿음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인하거나, 숨기지 않았다. 기독교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기독교이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인 것이다. 허망지설(虛妄之說)의 신천지가 결코 기독교공동체에 속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7. 지피지기(知彼知己) 효과적인 이단대처에 있어서, 신속하고 공신력 있는 정보의 제공이 가장 중요하다. 부정확한 정보의 제공은 ‘흑색선전’과 다르지 않으며, 부정확한 정보의 활용은 ‘마녀사냥’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사회와 교회가 공감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이단정보의 수집과 제공이 필요하다. 이단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이단의 정체를 간파하게 해주는 동시에, 이단의 활동을 통재할 수 있는 합법적인 여건을 조성해 준다. 이러한 정보는 이단들마저도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이단을 비판할 경우, 오히려 이단들에게 반박할 수 있는 명분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하면 어떤 이단들이든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공신력 있는 정보를 통해 이단의 정체를 파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단 현상을 통해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며, 이단의 영향력이 기성교회와 교인들에게 폭넓게 자리 잡는 이유를 고민해야 한다. 이단대처와 교회개혁은 동전의 양면이다. 건강한 교회가 이단 바이러스를 잡는 항생제 역할을 한다. 8. 필승불패(必勝不敗) 교회는 반드시 이긴다! 이단은 예외 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지만, 참된 교회는 단 한 차례도 패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독교역사는 증언한다.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사회적 순기능을 감당해왔던 기독교에 대한, 한국사회의 높은 기대치가 날카로운 비판으로 표출되는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다. 교회가 이러한 뼈아픈 시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교회는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단이 문제라면, 교회가 답이다! 공권력과 언론은, 사건 발생 이후에야 개입하여 문제해결과 공론화를 위해 애쓴다. 오직 교회만이 이단의 본질을 간파하고, 사건을 예방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영적 건강성을 회복하고, 사회적 순기능의 전통을 잇는 교회가 이단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이단의 발흥은 주님 다시 오실 때, 세상 마지막 때의 표징이다. 이단은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미혹하며 어지럽힌다. 하지만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가 쟁취하실 최후의 승리에 대한 필승불패(必勝不敗)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목회와 신학」(201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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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27
  • [기고]최근 사이비 종교집단 ‘신천지’, 왜 이러나? ▲한때 신천지 교육장을 지내다 2006년 말 신천지를 탈퇴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 구리상담소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현욱 소장 약 한 달 전쯤부터 거리 곳곳에서 ‘한기총 해체와 CBS 폐쇄’를 외치며 서명운동을 벌여오던 사이비 종교집단 신천지가 지난 주 금요일에는 기독교연합회관과 목동 본사를 비롯해 전국 13개 CBS 지역본부 앞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가졌다. 근래 보기 드문 전국 동시 대규모 군중집회였던 터라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놀라워했다. 그렇다면 신천지 집단은 왜 이런 무리수를 두는 것일까? 이에 대한 원인을 몇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보고, 나아가 한국교회의 대응과 대처 방안에 대해 제언하고자 한다. Ⅰ. 신천지 집단이 CBS를 표적으로 삼아 집중 공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CBS가 ‘신천지 OUT!’을 선언한 후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신천지와 이만희 교주의 치부를 드러냄으로 그 여파가 신천지 내부로는 신도들의 갈등과 동요로 나타나고 있고, 외부로는 포교활동과 이미지 개선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이러한 신천지의 반응은 오히려 CBS의 ‘신천지 OUT!’ 활동이 신천지에 미친 타격과 충격의 정도를 반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CBS의 신천지 관련 보도 내용 가운데서도 이만희 교주와 교주 사후 후계자를 꿈꾸는 내연녀 김남희와의 동거 사실 폭로와 김남희의 권력 승계관련 보도와 신천지의 폐해를 전 국민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다큐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은 수만 명의 신천지 신도들을 CBS 앞으로 모으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천지로서는 더 이상 CBS의 ‘신천지 OUT!’ 활동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CBS를 압박해서 앞으로 신천지 관련 보도 시 부담을 주고자하는 측면이 있고, 나아가서는 다른 언론 매체들에게도 신천지를 함부로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이번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통해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Ⅱ. 신천지 집단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를 공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천지 이만희 교주 눈의 가시 같은 CBS가 신천지의 공격 대상이 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한기총을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의아해하며 묻는 이들이 많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만희 교주가 한기총이라는 단체의 성격을 모르고 있다는데 기인한다. 한마디로 무식이 원인이다. 일인독재 절대 권력의 신천지 집단은 총회가 있어 총회장이라는 교주가 대표성을 갖듯이 한기총이 정통교회 모두를 아우르는 한 교단같이, 한기총 대표를 신천지 총회장 격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의 주장에서 ‘신천지 교리와 한기총 교리 비교’, ‘신천지 총회장과 한기총 대표간의 공개 토론 요구’ 등의 표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한국교계에서 한기총의 이미지가 많이 훼손되었다는 판단 하에 한기총을 공격함으로 한기총에 대해 실망하고 비판적인 기독교인들의 동의와 관심을 이끌어내려는 포교 차원의 전략적인 측면이 있다. 셋째, 신천지 집단에 가장 위협이 되고 있는 안산상담소, 구리상담소 등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 소속 상담소들을 한기총 소속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신천지 집단에 속아서 미혹된 신도들을 상담과 교육을 통해 해마다 수백 명씩 회심시키고 있는 상담소에 대해 강제개종 운운하며 온갖 거짓말로 비판하면서 그 화살을 상담소와 무관한 한기총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Ⅲ. 최근 신천지 집단의 전국적인 서명 운동과 대규모 집회의 원인과 배경은 무엇인가? 첫째, 신천지 집단의 체제 결속과 내부 문제 봉합을 위한 자구책의 일환이다. 신천지대책전국연합과 CBS, 현대종교 등을 통해 신천지 내부 비리 그 중에서도 교주와 내연녀(마니와 나미의 만남)와의 관계가 폭로되면서 신천지 내부에 적지 않은 파장과 함께 탈퇴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마치 불안한 체제 안정과 내부 단속을 위해 전쟁 분위기를 조장하고 밖으로 미사일을 쏘아대는 북한 정권을 떠올리게 한다. 이 외에도 곧, 곧, 올 해, 올 해, 이제 5분 전, 5분 전이라는 이만희 교주의 말만 굳게 믿고 144,000명을 채우는데 혈안이 되었던 신도들이 144,000명이 다 차고 넘치는데도 별다른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오래된 신도들 사이에서 실망감과 함께 맹신에 균열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한눈 팔 겨를이 없도록 신도들을 노상 홍보와 포교의 장으로 내 몰고 있으며, 분위기에 취약한 청년들이 주로 동원된 이번 대규모 군중집회도 집단 최면을 통해 신도들을 통제하려는 저의가 엿보인다. 둘째, 신천지 집단의 교세와 위세를 드러내 보이고 싶은 이만희 교주의 성격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현재의 신천지 교세는 이만희 교주조차 상상도 못했던 만큼 커진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이비 교주들이 그러하듯 이만희 교주 또한 자기도취에 빠져있고 허세 부리기를 좋아하며 자랑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이 때문에 사이비 교주들이 대부분 마스게임, 포퍼먼스, 카드섹션 등을 포함한 대규모의 군중집회, 체육대회를 통해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만희 교주도 예외가 아니다. Ⅳ. 이러한 신천지 집단에 맞서 한국교회의 대응과 대처 방안은 무엇인가? 첫째, 범 교단, 초교파적 정통교회의 연합과 연대를 통한 공동 대처가 절실하다. 신천지 집단이 아무리 조직적으로 공세를 편다 해도 여러모로 우리 정통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피해가 수그러들지 않는 이유는 지나친 개교회주의와 극단적 이기주의에 기인한다. 더 이상 각개전투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 신천지대책기구를 발족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전략이 마련되어야 한다. 최근 신천지의 파상적인 공세가 오히려 정통교회 연합과 연대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둘째, 신천지에 빠져드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비밀 교육센터(일명 복음방, 센터) 폐쇄에 전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센터가 신천지인줄 모르고 속아서 거짓교리를 배워 세뇌된 사기 피해자들이 최근 해마다 2만 명씩 증가하고 있다. 이제는 사기 피해자들을 대량으로 양산해내는 근원지인 신천지 센터를 현행 학원법에 의거 처벌, 폐쇄 조치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여야 한다. 셋째, 신천지 비밀 교육장소 앞에서의 1인 시위를 통해 그곳이 신천지임을 알리는 일이다. 교회연합회, 기독교연합회, 성시화운동본부 등 지역별 연합회 주관으로 각 지역 내의 복음방, 센터, 위장교회 등 신천지가 비밀리에 운영하는 교육장소 앞에서 그곳이 신천지 비밀 교육장임을 알리는 집회나 시위가 중요하다. 물론 철저한 준비가운데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신천지의 불법 센터 폐쇄를 제외한 대응 방안 중 가장 공격적인 방법으로 신천지에 직격탄을 날릴 수 있는 치명적이고도 강력한 대응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복음방, 센터, 위장교회, 신천지교회 등 전국 신천지 비밀 교육장소 위치 현황은 구리상담소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함. www.antiscj.or.kr) 넷째,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 교리교육과 이단 예방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미혹의 원인이 먼저는 자신이 배우는 성경공부가 신천지라는 사실을 모르는 데서 시작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신천지 교리의 오류를 스스로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 분별력의 부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서 목회자 모르게 하는 성경공부를 엄금하고, 혹 속아서 성경공부를 하더라도 신천지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도록 신천지 성경공부의 특징을 알리고, 설령 신천지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더라도 배운 내용이 비성경적, 반복음적임을 분별할 수 있도록 바른 교리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답을 알아야 오답을 고르지 않듯, 바른 복음‧ 바른 예수를 알면 다른 복음‧ 다른 예수에 빠질 리가 없다. 다섯째, 최근 신천지의 전국적인 대규모 집회와 시위로 말미암아 조성된 한국교계의 신천지 에 대한 강력한 대응과 대처 분위기가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성명서 발표하고, 회의로 결의하고 결의를 다지고, 입장을 표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안 된다. 신천지 붕괴와 해체를 위한 장단기 계획을 세워 현실 가능한 일부터 차근차근 진행해나가야 한다. 신천지 집단과의 싸움은 이제 더 이상 몇몇 피해자들과 이단상담소만의 몫이 아니다. ‘관군은 없고 의병만 있다!’ ‘우리는 하는 일이 다 이래!’ 이러한 자조 섞인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이제는 한국교회 모두가 깨어 일어나 힘써 싸워야 한다. 올해 이만희 교주의 나이 86세, 그리 오래갈 싸움이 아니다. 그리고 승리는 이미 우리의 것이다. 할렐루야!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 구리상담소장 신현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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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11
  • [기고] 故 박영희 장로님을 하늘나라로 보내드리며 ▲ 故 박영희 장로 존경했던 박영희 장로님! 이렇게 마지막 인사도 없이 총총히 가셔야 했습니까? 거동이 여의치 않으신 지난 몇 년 방문 할 때마다 헤어지시기를 그렇게 아쉬워하시던 장로님을 혼자 두고 방문을 나서기가 너무 미안하고 안쓰러워 하다가 저도 이제 은퇴했으니 시간 여유가 생겨 금년부터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함께 있어 외로움을 덜어 드려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이렇게 총총히 떠나시니 더 잘해 드리지 못한 죄송한 마음 가슴이 저밉니다. 장로님과 함께한 영락에서의 40여년 동거동락한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갑니다. 박장로님은 제 인생의 맨토였고 삼촌같고 형님같은 소중한 분이셨습니다. 젊은 시절 불우한 청소년들의 교육을 돕겠다고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에 내려와서 영락교회에 출석하던 저를 처음부터 불러 곁에 두시고 교회의 제반 출판과 교회지 편집 교계 문화보급운동 등에 동참하게 해 주시고 30년 전에 부산기독교문화회를 창립하시면서 교파를 초월한 부산기독교계의 유명 목회자와 인사들을 두루 섭렵하시며 모임을 이끌어 가시어 부산기독교문화 창달에 큰 이정표를 세우셨습니다. 장로님은 사재를 털어 기독교문화의 불모지 부산에 서울의 이름있는 김형석 김동길 조동진 김진홍 등 강사들을 초청하시어 정기강좌를 개설했고, 훌륭한 교수 신학자들을 대거 초대하여 교회행정. 교회법. 회의진행법 등을 보급하는데 진력하셨습니다. 저는 장로님 덕분에 훌륭한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장로님은 미시적인 의학박사답게 매사에 너무나 치밀하셔서 조금도 빈틈이 없으셨으며, 일류학교를 나오신 명석한 두뇌만큼 쏟아내시는 일과 업무의 욕심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장로님은 글쓰기를 무척 좋아하시어 교계신문 잡지 등에 칼럼을 기고하셨고, 문단에 수필가로 등단하시어 두 권의 책을 내셨으며, 제1회 한국장로문학상을 수상하시기도 했습니다. 또 부산기독교문화에 기여한 공로로 부산 크리스챤 21세기포럼이 제정한 제1회 부산기독교문화대상을 받기도 하셨으며 상금 일천만원을 기독교문화회에 쾌척 하셨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했던 박영희 장로님! 지난 반세기 장로님이 계신 곳에 어디나 그림자처럼 항상 함께했던 세월 정말 즐거웠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또 함께할 일이 있으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박 장로님! 장로님은 참 많은 일을 하고 가셨습니다. 천성적으로 착한 성품탓도 있지만 귀가 얇고 마음이 여리셔서 이웃의 사정에 항상 말려들어가 여러번 어려운 일을 당하셨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욕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만년엔 무척 힘드셨지만 특유의 성품으로 극복하시는 모습이 안쓰러웠습니다. 주 한번 목욕을 도우면서 날로 수척해 가시는 모습이 안스러웠습니다. 그러나 효성스런 자녀들의 힘겨운 도움과 격려로 그래도 안락한 여생을 보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장로님! 이제 질병도 걱정도 없는 천국에서 편히 쉬십시오, 저희들도 곧 뒤따라 가겠습니다. 장로님께서 그렇게 자부심을 가져셨던 효성스런 두 아드님, 따님, 든든한 사위 그리고 착한 두 며느님, 또 그렇게 사랑스러워 하셨던 손주 손녀들 장로님의 신앙과 성품을 본받아 자랑스런 후손으로 잘 살아가는 것 지켜 보시고 늘 기도해 주십시오. 여기 모인 우리 영락의 권속들도 인자했던 장로님의 열정과 품성을 기억하며 교회를 지켜갈 것을 다짐하며 장로님을 마지막 보내드립니다. 장로님 편히 가십시오. 천국에서 다시 뵐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2016년 이월 열아흐렛날 못난 후배장로 안상진 드림
    • 기고/강연
    • 기고
    2016-03-14
  • 기독교적으로 학문하기 (이 글은 제9회 부울경기독교수 선교대회에서 발표된 기조강연입니다.) 기독교적으로 학문하기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 1. 머리말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삶의 거의 모든 분야를 결정하는 오늘날 자신의 신앙을 심각하게 취급하는 기독교 지식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기독교적으로 정치하고, 사업하고, 예술창조 활동 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기독교적으로 학문하는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쉽다 할 수 있다. 다른 어떤 활동보다 오늘날의 학문을 기독교 신앙과 조화시키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학자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고 있다. 자신들의 활동을 신앙과 연결시키는데 어떤 확실한 지침을 기독교 학자들이 제시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학문이란 정신활동이고 신앙과 가장 근접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 활동 거의 전부가 지식에 근거해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기대를 받고 있는 기독교 학자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 지식인들의 이런 고민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헬레니즘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복음을 전파해야 했던 초대교회 지식인들도 그들의 신앙을 그 시대의 학문과 연결시키는데 많은 고민을 했다. 당시의 학문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파하려 했던 Justinus, Clement of Alexandria, Origen, Irenaeus, Eusebius 등과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 철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 Tertullianus, 지식을 초월한 신앙을 강조한 Augustinus, Anselm of Canterbury, 그리고 양자의 종합을 시도한 Thomas Aquinas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있었다. 현대에도 Herman Dooyeweerd, Cornelius Van Til, Ravi Zacharias, Francis A. Schaeffer, Gordon Clark, G. K. Chesterton, C. S. Lewis, Carl F. H. Henry, Edward John Carnell, Bernard Ramm, Alvin Plantinga, Nicholas Wolterstorff, Bob Goudzwaard, Mark Noll 등의 학자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였다. 한국 교회도 이제 100여 년의 역사와 인구의 20%에 육박하는 신도를 가지고, 수많은 신학자들과 학자들을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과 학문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일어나고 같이 고민해야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2. 현대 학문에 대한 이해 현대 학문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내용은 전혀 없이 형식으로만 이루어지는 수학이나 논리학에서 내용이 거의 전부인 역사학에 이르기까지 현대 학문은 매우 다양하므로 공통되는 특징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모든 학문은 진리발견을 그 목적으로 한다. 사실을 밝혀내고, 주어진 현상을 바로 설명하며, 원리나 법칙을 발견하여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 역사학도 단순히 옛날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한, 두 가지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현재를 이해하며 미래를 준비하려는 것이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학은 단순히 사실을 연대에 따라 기록하는 연대기 혹은 실록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학문이란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 논리적 체계 (systematic)가 있어야 한다. 앞의 발언과 뒤의 발언이 서로 모순되어서도 안 되고, 모순되는 명제를 한 글에서 주장해서도 안 된다. 유기체에서 모든 부분이 다른 모든 부분과 정상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듯 한 학술논문은 전체적으로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하고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학문은 예술과 다르다. (2). 현대 학문에 사용되는 방법론의 기본은 인과론 (causality)이다. 물론 양자물리학에서는 인과법칙이 절대적이 아니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학문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인과론이고, 인과관계가 분명해져야 어떤 문제가 설명(explanation)되거나 예측 (prediction)될 수 있다. 물이 어는 것은 온도가 0도 이하로 내려갔기 “때문이고”, 그것을 알면 날씨가 추워질 때 물이 얼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현대과학은 그 이전의 Aristoteles 과학의 목적론과 대조된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에서는 인과론적 설명보다는 공감하는 상상(sympathetic imagination)을 통한 이해(understanding)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실증주의에서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사용되는 방법론이 같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3). 모든 학문은 원칙적으로 객관적 (objective)이라야 한다. 실제로 어떤 것이 객관적이며 그것이 사실 객관적인가에는 항상 논란이 있지만 모든 학문은 객관성을 목표로 해야 한다. 개인적인 감정, 감각, 이해관계, 경험 등은 사실을 왜곡할 수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general) 것이라야 보편적 진리란 전제가 깔려 있다. (4). 이론이나 결론은 직관, 경험, 자료에 의하여 실증될 수 있어야 (verifiable) 한다. 현대자연과학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논리적으로 일관성만 있으면 충분히 객관적이라고 믿었다. 모든 인간에 공통되는 능력으로서의 이성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이성의 논리적 판단에 어긋나지 않으면 진리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Galileo 이후의 현대과학에서는 논리학과 수학을 제외하고는 실증될 수 없으면 아무리 논리적이라도 진리로 수용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인문학인 역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5). 한 이론의 대상은 동질성을 가져야 한다 (homogeneity of the objects field). 즉 공통분모를 가질 수 있어야 같은 학문의 범주에 속할 수 있고, 동일한 체계에서 논의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영역으로의 전이 (“stepping into another field” - metabasis eis allo genos)는 허락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달(月)’과 ‘10원’은 동일한 이론체계에서 다루어질 수 없고, 심지어 ‘몸’과 ‘마음’도 동일한 체계 안에서 논의될 수 없다. “사람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졌다”는 발언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학문적 명제가 될 수 없다. 몸과 마음은 ‘존재’란 지극히 추상적인 공통분모 외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6) 학문은 넓은 의미에서 실용적 (practical) 이라야 한다. 이런 관점은 이미 Bacon에 의해 시사되었지만 Comte에 의하여 강화되었고, 최근에 와서는 매우 두드러진다. 최근에 과학과 과학기술의 차이가 점점 무시되고 있는 것도 그런 경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진리를 추구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진리란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다. 힘 혹은 능력이 있어야 믿을 수 있는데 지식은 힘이다 (Scientia est potentia, Bacon). 진리를 알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Savoir, c'est pour prévoir. Comte),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심리적 안정을 제공할 뿐 아니라 미래에 대응할 수 있다. 역사학에도 이런 의의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학문은 넓은 의미에서 실용적이다. 논리학, 수학, 천문학, 이론 물리학 같은 순수학문은 아무 실용적 가치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기초가 없으면 실용적인 학문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들 학문은 직접적으로는 실용적이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실용적이고, 실용적인 결과를 위해서 필수 불가결하므로 매우 실용적이다. 3. 경쟁관계에 있는 학문과 종교 예술과 달리 학문은 종교와 경쟁관계에 설 수 밖에 없다. 양자가 다 진리를 주장하고 (truth claim) 있고, 그 진리는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것이든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안 학문의 발달은 다른 어느 분야의 발달보다 인류에게 더 큰 힘을 제공하여 이익을 끼쳤고 사람의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인간이 개발한 다른 어떤 능력보다 더 큰 힘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인류는 학문에 대해서는 상당한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주장하는 진리와 그 진리가 가능하게 하는 힘 때문에 학문은 종교와 갈등관계에 서게 되었다. 학문과 종교의 갈등은 이미 학문의 생성과 발전 과정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상당히 오랫동안 학문은 종교를 “대체”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 종교를 대체 하고 유학은 고대 중국의 무속종교에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철학이 그리스 종교를 대체했다면 그 철학은 아직도 종교의 형태로 남아 있는 기독교와 경쟁관계에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초대교회 교부 Tertullianus는 철학의 도시 아테네와 신앙의 도시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하고 반문함으로 지식과 신앙의 갈등관계를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기독교는 인간의 모든 안전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의하여 보장받는 것으로 믿는 반면에 그리스 사상에서는 영원히 불변하는 존재와 법칙에 삶의 안전보장을 위탁한다. 그런데 그 존재와 법칙을 알아야 그것에 순응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진리를 아는 것, 곧 지식이 구원의 길인 것이다. 비록 서양 중세에는 Thomas Aquinas의 사상에 따라 자연의 영역에서는 이성이 그리고 초차연의 은혜 영역에서는 믿음이 지배하도록 영역을 분리함으로 학문과 종교의 불안한 공존이 시도되었지만 만족스런 조화는 이룩하지 못했다. 오늘날의 과학적 학문은 역시 그리스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고, 따라서 기독교적으로 학문한다는 것은 다른 편이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경기하는 것과 비슷한 어려움을 갖고 있다. 물론 현대의 과학적 학문에서는 종교적 요소는 거의 다 제거되었지만 그러나 그 유산은 아직도 남아 있다. 아직도 학문은 종교적 신앙과 경쟁관계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식은 실용적인 가치 이외에 그 자체로 진리요 다라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그 유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학문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 그 자체는 학문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어떤 형식적인 체계도 그 체계 안에서 그 체계의 타당성이 증명될 수는 없다 (Gödel). 학문에 대한 믿음은 인간 이성을 Archimedes의 거점으로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 성격을 갖는다. 학문의 권위가 인간 이성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믿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종교적 전제라 할 수 있다. 과학철학자 P. Feyerabend는 자연과학도 하나의 이념 (ideology)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4.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현대 학문 학문과 종교의 관계에는 3 가지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즉 (1) 역시 믿을 수 있는 것은 학문이란 입장과 (2) 성경이 더 권위가 있고, 학문은 성경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입장, 혹은 (3) 학문과 종교의 영역은 서로 다르므로 양자가 병존할 수 있고 상호관련도 상호갈등도 있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역시 믿을 수 있는 것은 학문이란 입장은 대부분의 비기독교 학자들이 취하는 것이다. 학문이 그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더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학문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미신에 불과하던지 학문이 제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제시하므로 학문과 갈등관계에 설 만큼 권위를 가지지 못하거나 갈등관계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학문의 결과에 더 의존하므로 학문은 그들에게 일종의 종교적 권위를 가진다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종교적’이란 함은 종교를 매우 넓은 의미로 이해해서이다. 상당수의 기독교인인 학자들은 (3)의 입장, 즉 학문과 종교의 영역은 서로 다르므로 양자가 병존할 수 있고 상호관련도 상호갈등도 있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부분적으로는 불신 학자들과 동의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손쉬운 타협이다. 상당하게 많은 경우 그런 입장을 견지할 수 있으나, 양자가 주장하는 진리가 상반되는 경우는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 대부분은 학문의 편에 서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는 (1)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2)의 입장, 즉 성경이 학문보다 더 권위가 있고, 학문은 성경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신앙의 논리적인 결론이다. 그 입장을 다음과 같이 변호해 볼 수 있다. 1)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는 모든 영역에서 절대주권을 행사하시고, 절대주권을 행사하지 않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절대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하나님은 성경이 가르치는 참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청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지배하신다. 논리, 법칙, 이성, 경험 등도 모두 하나님에 의하여 가능하고 하나님에 의하여 그 정당성이 보장된다고 믿는다. 학문이 발견한 진리도 그것이 진정한 진리라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7). 물론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진리로 믿을 때 가능한 주장이다. 학문의 결과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종교적 전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종교적 전제다. 2) 학문적 지식은 항상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A. 과학적 학문은 “이런, 저런 양상” (modality)을 대상으로 하고 “이것, 저것 등 개체”(individuality)를 상대하지 않는다. “노란 색”은 학문은 개나리가 가지고 있는 속성 혹은 양상이고 우리 집 뜰에 서 있는 “개나리”는 개체다. 학문은 보편적인 것을 취급해야 하는데, 양상만이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 우리 집 뜰에 서 있는 개나리는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개체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것을 취급하는 학문의 논의 대상이 아니다. 역사학은 “이순신”의 업적이나 영향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으나, “이순신 학”은 역사학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상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다만 존재하는 여러 개체들에 속해 있는 속성 (property)이다. “노란 꽃” 은 있지만 “노란 색”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하면 칠판에 그려졌거나 종이에 인쇄가 되어 눈에 보이는 3각형은 진정한 3각형이 아니다. 3각형은 세 직선으로 이루어지고 , 직선은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일 뿐 넓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3각형은 이미 하나의 개체이므로 기하학의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3각형의 내각의 합이 두 직각의 합과 같음을 증명하는데 분도기로 세 각을 제어서 합산하지 않는 것은 분도기로 젤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3각형이 진정한 3각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이 H₂O란 것도 비슷하다. 실재하는 물은 H₂O외에도 여러 가지 이물질을 다 포함하고 있다. 순수 H₂O는 3각형과 마찬가지로 이념으로만 존재한다. Max Weber는 사회과학에서 사용하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하는 것들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형(ideal types)이라고 주장했다. 세계 어디에서도 순수 자본주의 국가나 순수 사회주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학문이 취급하는 대상은 실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이념(ideas)들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 세계는 모두 개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노란 색을 보지만 그것은 노란 꽃, 노란 종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학문은 원칙적으로 개체들을 그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면 학문의 영역은 매우 제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만약 요즘 점점 더 인정되고 있는 것과 같이 개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양상들의 합 이상”이라면, 개체를 대상으로 할 수 없는 학문의 세계는 지극히 제한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B. 학문이 상대로 하는 대상은 항상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나머지는 동일하다는 전제하에” (“others being alike” = ceteris paribus)는 모든 이론의 불문율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모든 현상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한 가지만 변하고 다른 것은 모두 그대라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모든 물은 0도에서 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물이 실제적으로 다 0도에서 어는 것은 아니다. 물의 순도, 물이 위치해 있는 장소의 기압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물은 0도에서 언다”는 것은 물의 순도, 기압 등 다른 모든 조건이 가장 이상적인 상태에서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학문적 이론은 Procrustes의 침대가 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Procrustes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침대의 길이보다 키가 큰 손님은 머리나 발을 잘라서 침대에 맞추고 침대보다 짧은 사람은 잡아당겨 침대길이에 맞추었다. 말하자면 유기적이고 지극히 복잡한 현실을 학문적 이론으로 끌어 맞추는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Karl Popper는 마르크스주의가 그런 우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현실을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현실을 이념의 틀에 맞추기 위하여 온갖 강제를 다 동원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학문적 이론의 권위를 과대평가 하므로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Procrustes의 침대를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의 머리와 다리를 잘라버렸다 할 수 있다. C.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학문이 설명할 수 없다. Max Weber는 학문 (Wissenschaft)가 삶의 의미에 대해서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는 Tolstoy의 주장에 동감을 표시했으며 Wittgenstein은 그의 Tractatus에서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것들은 과학적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세계 바깥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삶의 의미, 사랑, 고통, 존엄성, 자유, 평등, 정의감 같은 것은 누구에게나 다 중요하지만 학문이 그런 것을 전제할 수는 있어도 설명할 수도 없고 그것에 도움을 줄 수도 없다. 이론적으로 사랑을 설명할 수도 없거니와, 설명된 사랑이 우리로 사랑하는데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 3) 학문도 하나의 게임이다. 게임의 특징은 그것이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동의하는 규칙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학문이란 게임의 규칙은 앞에서 제시된 학문적 이론의 요구조건들이다. 이 조건들은 어떤 그 타당성이 우리의 직관에 근거한 것도 아니고 어떤 절대적 권위에 의하여 결정된 것도 없으며 어떤 객관적 근거에 의하여 확실하게 증명된 것들이 아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자명한 것으로 보이지만 후에는 달라질 수 있는 역사적인 것들이다. 현대과학 이전 Aristoteles 물리학에서는 목적론이 자명하게 보였지만 지금은 인과론이 그렇지 보이고, 인과론도 양자 물리학에서는 절대적이 아니라 한다. 그들 조건은 궁극적으로 학문 공동체의 약속에 불과하다. Th. Kuhn과 M. Polanyi (Personal Knowledge)는 영원불변한 규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의 학문공동체(academic community)가 학문과 학문 아닌 것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Thomas Kuhn에 의하면 한 시대의 과학의 성격은 그 시대의 과학 교과서가 대변한다고 보았다 textbook science). 그리고 학문의 “혁명”에서 혁명 이후의 paradigm이 그 이전의 것보다 더 발전된 것이라 할 수도 없고 그 전의 것을 포함하거나 능가한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 책 이름에 “학문의 발전”이란 말 대신 “학문의 혁명”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게임이라 하여 심각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Huizinga는 인간의 문화 활동 거의 대부분을 놀이로 취급했다 (Homo ludens). 다만 그것이 어떤 만고불변의 규칙이나 영원한 직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약속에 의하여 만들어진 규칙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과 그 규칙에 적용되는 분야에서만 그 타당성이 인정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생물학적인 생존과 생활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에서 게임의 성격을 갖는다 할 수 있다.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으나 꼭 한국식으로 먹어야 사는 것은 아니다. 먹는 것은 놀이가 아니라 한국식으로 먹는 것은 놀이의 성격을 갖는다. 게임이기 때문에 학문은 상대적이고 부분적이다. 건물의 높이를 측량하는 방법에는 건물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물질이 땅에 닿을 때까지의 시간을 재어서 계산하는 방법, 3각 측량법도 있지만 긴 줄자로 재는 방법도 있다. 한 가지만 옳고 다른 것은 틀렸다 할 수 없다. 과학적 설명은 주어진 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학문을 하나의 놀이로 상대화하면 학문 발전에 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모든 학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비판적, 상대적 태도이고 그런 태도로 접근할 때 더 창조적이 될 수 있다. 창조는 “관념의 유희” (play with ideas)로 이루어진다. 학문을 종교적으로 절대화해 놓으면 비판적인 접근이 불가능하고 창조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기독교인이 더 훌륭하게 학문 활동을 할 수 있다. 5. 기독교적으로 학문하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명령은 학문 활동에도 적용된다. 진리 발견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기독교적 학문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학문적 진리 발견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될 때만 그것은 가치를 가진다. 만약 진리 발견 그 자체가 궁극적 목적이라면 학문은 종교의 위치에 서게 되고, 따라서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학문연구를 통해서 발견된 진리가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이 될 때 기독교 학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1) 그 진리가 정말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가를 재점검하고, (2) 그것과 모순된다고 생각되는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가 올바로 이해했는가를 반문해 보며, (3) 그런데도 해결되지 않았을 때는 당분간 기다리는 태도가 필요하다. 적어도 너무 성급하게 그 어느 쪽을 취할 이유는 없다. 지금의 상황이 절대적이고 그 이상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할 분 아니라 사실에 입각한 것도 아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 이외에는 영원불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학문적 연구로 발견된 진리는 얼마든지 바꿔질 수 있다. Ptolemaeus의 물리학은 Newton의 물리학으로 대체되었고, 그것은 다시 Einstein의 물리학으로 수정되었다. 양자 물리학은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한다. 우리는 가끔 과학의 발견을 이용하여 성경의 내용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본다. 그러나 이는 매우 위험할 뿐 아니라 주객이 전도된 방법이다. 지금 진리인 것으로 나타나는 과학적 발견이 항상 진리로 인정받으리라는 보증은 없다. 그리고 그런 시도는 과학적 지식을 과대평가하고 성경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즉 과학적 발견은 확실한 반면에 성경의 가르침은 좀 더 증명되어야 할 만큼 불확실하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성경보다 과학을 더 믿으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과학종교일 것이다. 과학의 주장이 과학보다 더 확실한 근거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으면 몰라도 그 자체로 절대적이라 믿으면 종교적 신앙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최근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학문과 기독교 간의 갈등은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특히 Richard Dawkins의 전투적이고 도발적인 저서들이 이런 논란에 불을 지피고 있다. 여기서 앞에서 언급된 3 가지 입장이 잘 구별된다. 창조론을 전혀 부인하고 진화론만이 옳다는 입장, 진화론은 과학적 이론, 창조론은 종교적 신앙의 내용으로 양자를 다 인정하는 입장, 그리고 창조론을 믿고 진화론을 상대화하는 입장 등을 볼 수 있다. 세 번째 입장에는 진화론은 전적으로 부인하는 ‘젊은 지구 이론’ (young earth creationism)과 진화적 창조론을 인정하는 입장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후자는 하나님께서 진화론적 과정을 사용하셔서 생명체를 창조하신다는 입장이다. 그런 주장은 창2:2-4절로 그 주장의 타당성을 성경으로 증명하려 한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진화론이나 창조론은 둘 다 과학적으로는 증명될 수 없는 믿음이다. 다만 진화론은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적 전제이지만 그 가설을 실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opper의 주장대로 과학이 성립하려면 반증가능성 (falsifiability)이 있어야 하고, 비록 이제까지는 반증되지 않은 경우라도 반증이 가능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과학적 이론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한 가지 경우로라도 반증이 가능하면 과학적 이론으로서는 그 자격을 상실한다. 진화론 가설에 대해서 창조론자들이 계속해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그 가설에 그만큼 약점이 많기 때문이다. 캠브리안 폭발 (Cambrian explosion)을 둘러 싼 논란들은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생물학적 증거를 둘러싼 문제들 외에도 진화론은 “우연”의 요소를 도입하지 않고 인간의 자아의식과 언어현상을 분명하게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설득력 있는 설명은 제시되지 않았다 한다. 물론 좀 더 확대해서 더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할 수 있다. 즉 진화론이 전제하는 자연의 동일성 원칙(the principle of uniformity of nature)이 과연 영원불변한 것인지, 그리고 과 그것에 근거한 외삽 (外揷=extrapolation)이 과학적으로 합법적인지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자연의 동일성 원칙이 영원불변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며,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어길 수도 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에 근거한 것이며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 같은 것도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법칙에 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6. 맺는말 신앙이 학문적 지식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식이 신앙에 의하여 결정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올바른 신앙에 입각한 지식만이 참 된 지식이다. 지식과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누구보다 더 많이 고민한 Augustinus나 Anselmus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 (Credo ut intelligam) 이란 결론을 내렸다. 즉 알아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안다는 것이다. 만약 학문적 노력에 의하여 어떤 진리가 확실하게 발견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진리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학문과 이성이 하나님과 독립하여 자율적이 되면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종교적인 신앙의 위치에 서고 만다. 그러므로 학문은 종교적으로 중립적이 될 수 없다. 참고문헌 Conford, F. M., From Religion to Philosophy. New York: Harper & Row, 1957 Feyerabend, P., Against Method, New Left Books, 1975 Gerth, H. H. & C. W. Mills eds. From Max Weber,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8, Holmes, Arthur F., All Truth is God's Truth, Grand Rapids, Eerdmans, 1977 Kant, Immanuel, Welches sind die wirklichen Fortschritt, die die Metaphysik sein Leibnizens und Wollf's Zeiten in Deutschland gemacht hat? 1804 Kuhn, Thomas,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2 Polanyi, M., Personal Knowledge: Towards A Post-Critical Philosophy, Chicago: Chicago University, 1974 Popper, Karl, The Poverty of Historicism, London and Henley: Routledge & Kegan Paul, 1957 Stevenson, J., ed., A New Eusebius: Documents illustrative of the history of the church to A.D. 337, London: S.P.C.K., 1957 Wittgenstein, L.,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2 Wright, G. H. von, Explanation and Understanding, Ithi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71 (영문 요약) To Do Sciences in Christian Way Christian academicians have been wrestling with the problem ever since Christian faith was introduced to the Hellenistic world. Most academic activities today have scientific character. They have to be systematic (logical), objective, empirical, useful, use the method of causal explanation and have homogeneous object field. Science is not value neutral as many claim; they are more for power than satisfying curiosity. Conflict between Christian faith and science is inevitable for they both claim truth and truth, whatever the kind, is supposed to provide security. Many insist that science has replaced faith, some tried uneasy compromise, some put them opposite to each other, and some tried to explain away Christian faith with science. But the ultimate validity of scientific knowledge cannot be proved scientifically. It itself has a religious presupposition. Both Christian faith and science claim truth and in some their claims collide each other. In principle we must put science under God’s sovereignty. If there is any truth in science, it also is God’s truth. The principles all sciences presuppose, such as the principle of the uniformity of nature, are, should be God’s principles if they are true. Science is limited because it deals only aspects of reality, not the individuals, while the reality is composed of individual objects. Scientific knowledge is inevitably abstract because the method requires them to leave aside those irrelevant aspects (ceteris paribus). Further, science can never explain or solve the most important elements of human life, love, meaning of life, human dignity, freedom, right, etc. Science is also a game. It is exercised according to the rules agreed upon by the contemporary academic communities. Therefore, they are temporal and transitory. If there is any conflict between science and Biblical teachings, (1) we should examine whether the scientific conclusion is truly valid. If is undoubtedly true, (2) we may reflect whether our understanding of the Bible is correct. If the conflict is still not resolved, we should wait patiently until further discoveries are made. Not all the so-called scientific truths have been valid always and our understanding of the Bible is not absolute. science, faith, truth, presupposition, game,
    • 기고/강연
    • 강연/특강
    2016-02-17

포토뉴스 검색결과

  • 부산 장로원로회, 거제 청마 유치환 시인 기념관 방문 부산 장로원로회(회장 김순욱 장로) 회원들이 4월 4일 거제 청마 유치환 시인 기념관에 방문했다.
      2018-04-26
    • 부산성시화운동본부 목회자위원회 주관 제주도 목회자 수련회 부산성시화운동본부(본부장 허원구 목사) 목회자위원회(위원장 황성건 목사) 주관으로 지난 4월2일부터 4일까지 제주도에 목회자 수련회를 다녀왔다. 이번 수련회는 부산지역 작은교회 목회자와 40대 목회자 90여명이 참석했다. 이번 수련회는 특강과 세미나, 제주관광 등 작은교회 목회자들에게 영적, 육적 재충전의 시간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8-04-06
      • 3.1절 앞두고 99년 전 일신여학교 만세운동 재현 호주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부산진일신여학교. 1919년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는 동료 교사와 학생들과 함께 나라의 독립을 위해 3월 10일 태극기 50개를 만들고 다음 날인 1919년 3월 11일 오후 9시,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항쟁은 부산과 경남지역 3.1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부산 동구(구청장 박삼석)는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오전 부산 동구 일대에서 대규모 3.1 만세운동 재현행사를 열었다. 부산진일신여학교에서 출발한 태극기 행렬은 99년 전 어린 여고생들의 함성처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동구청까지 약 1㎞를 행진했다.
        •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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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8
      • 부산에서 처음열린 퀴어축제 부산에서 처음열린 퀴어축제.
          2017-09-29
        • 부활절, 다양한 십자가를 만나본다 ▲ 박상용 집사작가 박상용 집사(서울산교회)는 지난 2012년부터 십자가 작품을 만들어 오고 있다. 현재 작품만 1,500여 점이다. 작년부터 ‘손양원 기념관 개관 1주년 십자가 전시회’와 ‘경남CBS/손양원 기념관 특별 십자가 전시회’등을 개최해 왔고, 금년에는 백양로교회 희년 기념 십자가 전시회(3/31일부터-4월20일까지)를 하고 있다. 박 집사는 “한국적인 정서가 담긴 십자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가장 한국적인 십자가를 통해 신앙 회복과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며 오늘도 십자가 작품을 연구하고 있다. 작가 박상용 집사는 2001년 한국서화미술대전 시각부분 입선과 대한민국전통미술대전 특선 외 다수 입상을 해 왔다. 2015년 국민일보(미션라이프)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소개되었고, 2016년 제24회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에서 입상했다.
          • 뉴스
          • 뉴스종합
          2017-04-10
        • 갈릴리 호수(긴네렛)에서의 일출 이곳 갈릴리호수는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고기를 잡게 하셨으며, 생선을 구워주면서 먹게도 하셨고, 주님의 양을 돌보도록 부탁하셨던 곳입니다. 2017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노아시대 하나님의 홍수 심판으로 비참한 모습이 사라지고, 방주의 뚜껑이 열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새해가 그런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진: 이내원 목사(부산영화교회)
            2017-01-05
          • 2016년 부활절 짜장나눔축제 부산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이성구 목사) 주최로 부활절 짜장나눔축제가 지난 21일(월) 부산진역 광장에서 열렸다. 포항짜장선교회, 광장밥상 등 5곳의 봉사단체의 섬김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노숙인을 위해 500인분의 짜장면이 마련됐다. 짜장나눔축제는 어렵고 소외된 이웃에게 짜장면 한 그릇을 통해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나누는 부활절 사랑 실천운동으로 올해로 4회를 맞았다.
              2016-03-24
            • 새해 소망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 옹정리에 위치한 한반도 지형에는 남과 북의 경계선이 보이지 않는다. 남북이 통일되어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소망하며 2016년이 평화통일 원년의 해가 되길 기대해본다. 촬영 : 사진작가 정판술 목사
                2015-12-31
              • 2015 부산역 성탄트리 점등식 부산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이성구 목사, 이하 부기총)가 지난 12월 6일(주일) 오후 7시 부산역 광장에서 성탄트리 점등식을 가졌다. 부기총 관계자 및 내외빈, 시민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1부 예배와 2부 점등식 순으로 진행됐다. 부기총 사무차장 임영문 목사의 사회로 가진 예배는 부회계 김경호 장로가 기도를, 회록서기 김기태 목사가 성경봉독을, 상임회장 박성호 목사가 설교를 맡았으며, 이성구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이어 상임회장 오순곤 장로의 사회로 진행된 점등식에서는 대회협력총장 김항재 장로가 내빈을 소개하고 청십자신협 이대길 이사장이 축사를 전했다. 한편, 부산역 성탄트리 점등식은 1998년부터 지금까지 18년째 개최되고 있다.
                  2015-12-08
                • 손양원 목사 생가 경남 함안군 칠원읍에 복원된 손양원 목사의 생가
                    201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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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담회] 북한 '종교박해 영상' 입수, "북한에 지하교회 실제 존재한다" (사)북한기독교총연합회(회장 이빌립 목사, 이사장 임창호 목사, 이하 북기총)는 지난 3월 20일(금) 오전 11시 한국기독교회관에서 ‘북한지하교회와 기독교박해’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이날 북기총은 북한국가보위성에서 제작한 북한 종교박해 영상을 국내 최초로 공개하며 “박해받는 북한지하교회와 제3국에서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는 국적 없는 탈북자들을 위해 한국교회가 진정어린 기도와 사랑으로 도울 것”을 촉구했다. [편집자 주] ▲ 지난 3월 31일(화) 오전 11시 고신대 부총장실에서 부활절 특집 좌담회를 가졌다. 이상규: 최근 북한기독교총연합회에서 공개한 영상이 화제가 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영상을 어떻게 확보하게 되었나요? 임창호: 이번에 공개된 영상은 북한국가보위성에서 제작한 것으로, 간부들의 교육을 위해 제작된 영상입니다. 4년 전 북한 고위간부 한사람이 탈북했는데, 이분과 친한 탈북자 한분이 저와 친합니다. 제가 북한 사역을 하는 걸 알기에 강의 자료로 동영상을 주신 것입니다. ‘종교미신에 빠지면 반역의 길을 걷는다’는 제목의 영상에서 북한 내 실제로 종교박해가 행해진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간부들을 교육시키면서 어떻게 하면 주민들이 종교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종교 집단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영상을 보면 ‘미신=종교=기독교’라는 공식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상규: 기독교를 미신으로 보는 시각은 역사가 오랜 오해입니다. 이미 로마시대 때부터 기독교를 미신, 특히 ‘해로운 미신’으로 몰아 부쳤지요. 임창호: 이번 영상에서 중요한 점은 실명이 거론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리춘화, 마필용, 차덕수 3명의 인물을 보여주면서 사진, 거주지, 족보 등 자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리춘화 씨는 점쳐주는 사람이다, 미신에 빠진 광신자라고 말합니다. 1948년 체포된 사리원 리찬수 장로의 딸이라고 소개하면서 리찬수 장로가 종교에 빠졌고 그의 딸인 리춘화 역시 종교에 빠졌다고 합니다. 마필용 씨는 안악지역에 있는 기독교인의 아들로 60년간 신앙을 지켜온 인물이라고 소개합니다. 천원수 주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면서 리금녀라는 여인을 꼬셔 전도를 시켰다고 말합니다. 은파군에 장영균, 사리원에 김춘희와 접촉했는데 이들도 50년간 신앙을 지켜왔다고 합니다. 2000년 종말이 온다며 왕국회관을 만들고 옷을 제작해 나눠주고, 남조선에서 온 출판물을 배포했는데 토종비결도 섞여있었다면서 북한 반역죄로 체포됩니다. 세 번째로 나오는 인물이 차덕수 씨인데 이 분이 중요합니다. 사리원에 있는 차덕수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분 이야기가 길게 소개됩니다. 대학 졸업 후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쟁이로 하여금 죄사함에 대해 배우고, 죽어도 죽지 않는 영생에 대해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중국에 가면 삼촌이 있는데 자세히 알 수 있다고 말해 중국 삼촌 집에 갔는데 삼촌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삼촌 집 옆에 교회가 있어 갔는데 그 교회가 서탑교회입니다. 북한보위는 말하기를 서탑교회는 목사로 위장된 남조선의 간첩을 훈련시키는 훈련소라고 말합니다. 중국에 있는 모든 교회는 남조선의 간첩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미신에 빠진 사람들이 남조선 간첩 소굴에 들어가 ‘남조선의 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온 차덕수 씨가 거짓으로 자수해서 용서해줄테니 앞으로 하지 말라고 하며 풀어줬는데 그가 장사하면서 함흥, 청진 등을 다니며 지난날 예수 믿었던 종교인 자녀들을 발굴해 지하 조직을 확장시켰다고 합니다. 사리원 교동교회 집사 아들 리기창을 접선하고 제룡교회 집사의 딸 김순녀를 찾아내 매주 일요일 산에서 숨어 기도하고 찬송하며 교리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영상에는 산에서 숨어 예배 드리는 사진이 나옵니다. 그리고는 일망타진 되었다고 말합니다. 몇 년간 수고해서 영상을 제작했다고 말하며, 종교는 마약, 아편과도 같다고 말합니다. 공화국 안에 기독교가 침투 못하도록 모두가 정신을 차려 찾아내야 하고 여기에 빠지면 안된다, 그리고 중국에 가면 교회를 가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발견된 찬송가, 성경책이 사진으로 나옵니다. 북한이 기독교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수년간 조사하고 찾아내 잡았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북한 정부가 북한 내 지하교회가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영상을 보면 황해북도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참고로 북한인권정보센터에서 출간되는 ‘북한 종교자유 백서’를 보면 유사한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윤여상 박사가 제작한 이 책은 2만 여명의 탈북민들을 인터뷰하면서 북한의 종교실태를 조사합니다. 여기에 보면 기독교를 접한 사람, 기독교인과 함께 감옥에 갔다 온 사람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북한 내 지하교회가 있음은 탈북자들의 입을 통해 증명했고, 영상을 통해 북한 정부가 증명한 셈이죠. 임창호: 이 교수님께서는 이런 영상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상규: 저는 5가지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 최근 북한이 마치 종교 자유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이런 현실에서 볼 때 북한에 종교자유가 있는 것은 허위임을 다시금 확인해 주는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둘째, 해방 후 70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지하교회가 존재하고 이를 통해 신앙이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고난을 이기면서도 긴 세월 동안 신앙을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줍니다. 셋째, 영상에서 나온 남한에서 받은 성경책을 보면 남한에서 행해지는 북한선교 활동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넷째, 전략적인 이유라고 할지라도 북한 정권은 기독교를 미신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통적인 공산주의 국가의 인식입니다. 기독교를 미신으로 이해한 것은 로마제국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기독교를 미신이라 썼는데, 이는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한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다섯째는 북한이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기독교를 ‘지하조직’ 혹은 반국가적인 행위, 간첩조직훈련소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병존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 이상규 교수(백석대 석좌교수, 고신대 명예교수) 임창호: 1962년 김일성은 사회안전성(현 인민보안성)에서 행한 연설에서 종교를 철저히 말살할 것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는 “우리는 종교인들을 데리고 공산주의 사회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천주교에서 집사 이상의 간부들을 모두 재판해서 처단해 버렸고 그 밖의 일부 종교인들 중에서도 악질들은 모두 재판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반 종교인들은 본인이 개심하면 일을 시키고 개심하지 않으면 수용소에 가두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대외적으로 한 말이 아니고 고위 간부들을 교육하기 위해 한 말이었습니다. 이상규: 저도 이 내용을 일반 신문에 보도된 것을 본 적 있습니다. 한국교회사 학자 중에서도 마치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책을 쓴 사람이 있어요. 북한어 허용한 지하교회가 있고 마치 보호받고 있는 것처럼 기술 했더군요. 그러나 이번에 입수된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김일성 스스로 기독교를 다 처단했다고 말하는 것은 북한 내 종교의 자유는 거짓이죠. 임창호: 맞습니다. 1975년 김일성의 비밀교시를 보면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많은 외국인들과 재외동포들은 우리에게 왜 종교를 못 믿게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를 허용하지만 인민들이 각성되어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국 남반부에 수많은 종교인들이 살고 있는데 우리가 종교인들을 다 죽인다고 생각하면 그들도 우리를 반대하는데 합세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도 불필요한 중앙 종교조직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상규: 종교단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죠. 임창호: 1986년 김정일은 “수령님께서 종교를 악용하는 반동적 지배계급과 제국주의자들의 책동을 배격하시었지 종교와 신자를 배척하신 일이 없습니다. 종교에는 나쁜 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점도 있습니다. 종교에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평화롭게 살라고 주장하는 것은 좋은 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죠. 그리고는 2년 후인 1988년 봉수교회가 설립되고 1989년 칠골교회, 2005년 제일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이상규: 대외 국제 여론을 생각하면서 세운 교회로 일종의 선전용이라고 봅니다. 이번 영상을 보면 북한은 기독교에 대한 정서가 변함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창호: 앞서 말했듯이 영상을 보면 황해북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다른 자료도 살펴보면 황해도 지역에 기독교 관련 내용이 많음을 볼 수 있는데, 기독교 역사학자로서 이 교수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이상규: 황해도는 지리적으로 볼 때 중국 산둥성과 마주보고 있습니다. 황해도 지역을 기독교의 요람이라고 불렀습니다. 1832년 귀츨라프 선교사도 황해도로 들어왔고, 1865년 토마스 선교사도 황해도로 오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황해도는 자립중산층이 비교적 강한 지역입니다. 자립중산층이 많다는 것은 진취적이라고 볼 수 있죠. 그래서 기독교를 빨리 받아들였고, 초기부터 기독교가 강한 지역이었습니다. 임창호: 우리나라 최초 교회였던 소래교회도 황해도이죠? 이상규: 맞습니다. 소래교회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1883년 설립 되었습니다. 한문으로 송천(松川)이니 원래는 ‘솔내’인데 자음접변 때문에 ‘소래’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대구면의 이름을 살펴보면 큰 대(大), 구원할 구(救)입니다. ‘큰 구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에 한국 최초 교회가 세워진 것이죠. 임창호: 40년도 북한교회사라는 책을 보니 교회가 평안남도에 608개, 평안북도에 549개, 황해도 560개, 함남 200개, 함북 130개입니다. 함남, 함북 지역에 비해 평남, 평북, 황해도 지역에는 500개가 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또 북장로교회가 1906년 황해도 재령에 본부를 세웠다는 자료를 보았습니다. 이상규: 북장로교 선교부는 11개 선교지부(mission station)를 설치했는데, 제일 먼저 생긴 곳이 서울이고 이어 평양과 부산에 세워졌고 이후 선천, 대구, 안동 등에 지부가 세워졌습니다. 재령에는 1906년 선교지부가 설치 되었는데 재령에서 일했던 선교사가 한위렴(윌리엄 헌트) 선교사이고, 그의 아들이 한부선 선교사(브루스 헌트)입니다. 한위렴 선교사는 재령 선교의 개척자였습니다. 임창호: 그렇군요. 이상규: 최근 재미교포 최모 목사가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신앙의 자유가 있다고 이야기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북한에 500개가 넘는 가정교회가 존재하고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합니다. 또 가정교회와 지하교회는 다르다면서 북한은 가정교회를 공식 교회로 인정하지만 지하교회는 불법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지하교회는 있을 수 없고, 북한에 지하교회가 있다는 주장은 사기라고 보도했습니다. 임 교수님도 보셨습니까? 임창호: 네. 저도 기사를 보고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북한의 영혼들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님들과 그들을 위해 기도했던 많은 한국교회 성도님들의 기도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습니다. 이상규: 그렇다면, 북한에 지하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가능할까요? 임창호: 탈북자들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을 보면 지하교회가 가능합니다. 첫째는 중국에서 훈련받고 북한으로 돌아간 이들을 통해 교회가 개척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나온 서탑교회처럼 중국 국경 지역에서 교회들이 도움을 주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둘째는 해방전부터 신앙을 가진 그루터기 성도들에 의해서 유지되는 지하교회입니다. 영상에서 나온 것처럼 누구 집사의 아들, 누구 장로의 딸이 아직 살아있다는 이야기죠. 셋째는 북한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개척되는 지하교회입니다. 제가 이 경우와 관련해 알아보니 북한 내 지하교회에 지도자가 없어 가르쳐줄 사람이 없고, 그래서 황당한 이야기를 하면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들이 리더십을 갖고 모임을 가진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글도 있고 지하교회 성도들을 통해 내려 온 이야기들을 조합해 자기 나름대로 만든 또 하나의 교회가 생겨나는 것이죠. 과거 카타콤이 300년간 지하에서 있다가 밖으로 드러났을 때 그동안 가르친 내용들이 혼란스러워 교회들이 교리를 정리하며 확인하는 작업들이 있었습니다. 지도자들 가운데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해서 성경을 이상하게 가르치는 이들이 있었는데, 북한 지하교회 역시 70년간 폐쇄되면서 독자적인 해석을 하며 교회를 이끈 지도자들이 발견되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상규: 저는 지하교회가 생존하다고 볼 때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루터기 신앙으로 은밀하게 신앙을 지켜온 순수한 그룹입니다. 1-2년 된 것도 아니고 공개적일 수도 없지만 오랜 시간 믿음을 지켜온 중요한 그룹이죠. 그리고 중국을 왕래하면서 중국 지도자든 한국 지도자든 그들을 통해 복음을 듣고 북한으로 들어가 지하교회를 조직한 그룹이죠.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지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교리보다는 조금 더 허황되고 정통성 보다는 현실적인 위로가 필요하니 우리가 말하는 ‘정통 기독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 임창호 교수((재)북민실 이사장, (사)북한기독교총연합회 이사장, 고신대 부총장) 임창호: 통일교가 김일성 생존 당시 북한에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국경지역에 건전한 선교단체 선교사들만 가는 것이 아니라 신천지, 여호와의증인 등 이단들도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밝혀진 것을 보면 신천지가 중국 우한에 들어가 포교활동을 펼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북한 안에도 이단 관련된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몰랐는데 한국에 와서 보니 그들이 이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건전한 선교사가 아닌 이단들이 국경지역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도움을 준다면 이단적 사상을 잘못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우려됩니다. 이상규: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단들의 목표는 국내뿐만이 아니라 외국 역시 그들의 포교 대상이 됩니다. 특히 외국에서 포교활동을 할 때는 재외한국인을 우선 대상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칩니다. 언젠가는 통일이 될 거라는 생각에 친북정책을 펼치며 가장 먼저 경제적 도움 주면서 접근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모집하고 비밀집회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임창호: 만민중앙교회에는 탈북민 2천 여명이 갑니다. 탈북민들에게 돈을 월 40만원 가량 주고 버스를 수십대 빌려 탈북자들이 참석하게끔 했습니다.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씨가 말하기를 탈북민들을 앞세워 선교전략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천지에서도 탈북민들에게 장학금을 주며 접근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영상에서도 나오듯이 2000년 재림을 주장하고 잡혀갔다는 내용을 볼 때 국내 다미선교회처럼 이단 사이비가 북한에도 있다고 봅니다. 이상규: 옛날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도로를 건설하던 중에 지하교회로 보이는 은밀한 처소가 발견되어 20여 명이 체포되어 잡혀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임창호: 그 내용이 ‘북한 종교 자유백서’ 이 책에 나옵니다. 함흥에서 다리 건설을 위해 기초공사 중 동굴이 발견됩니다.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있어 추적한 결과 수년간 예배처소 였음이 발견 되어 수십명이 잡혀갔다는 증언이 자료에 나옵니다. 이번에 공개된 영상이 국내에 들어온지가 2014년 이후인데, 그렇다면 영상 제작을 위해 걸린 시간을 계산한다면 2010년 이후라고 봅니다. 영상도 그렇고 탈북민들이 증언하는 내용을 들어보았을 때 최근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고 봅니다. 임창호: 이번 영상을 통해 북한 지하교회 성도의 실체를 확인 했다고 봅니다. 한국교회가 앞으로 어떤 자세를 갖고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보십니까? 이상규: 가장 큰 문제는 북한 인권 문제라고 봅니다. 인권 문제는 어느 국가에 한정된 것이 아닌 보편적 가치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 먹고 싶을 때 먹고 이동하고 싶을 때 이동할 수 있는 자유인데 이런 기본적인 인권조차 북한에서는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음은 한국교회가 어렵더라도 북한 기독교 신자를 돕고 생존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게 필요합니다. 조기련(조선기독교연맹)을 통한 북한 내 성도들 지원은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미국에 있는 메노나이트교회는 북한에 식량을 보냈는데 군사용으로 전용된 것을 보고 이후 학용품을 만들어 보냈습니다. 그들은 또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을 돕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북한 교인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말로만이 아닌 진실하게 북한 교인들을 돕겠다는 의지로 통로를 만든거죠. 한국교회도 관심을 갖고 특히 지하교회 성도들을 도와줄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전시용이 아닌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임창호: 북한 당국이 북한에 지하교회가 사실상 존재한다는 것을 전세계에 증명한 것이죠. 그런데 지하교회가 있니 없니 언급하며 소비적인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하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만5천명의 탈북자가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 북한 선교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상규: 탈북민들은 그들의 가족, 지인이 북한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 한국교회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제3국가에서 맴도는 탈북민들이 많습니다. 과거 일제 강점기 때 정신대에 끌려가 고생을 당한 이들처럼 탈북민들은 지금도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런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임창호:굉장히 중요한 지적입니다. 미국에서는 2012년에 중국 내 탈북고아 구출을 위한 법안을 통과 시켰습니다. 중국 내 탈북자 자녀들이 5만명이라고 합니다. 그중 엄마가 죽거나 북송되어 혹은 견디지 못해 가출한 아이들이 5천명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중국 내 북한고아 탈출법을 만들어 미국에 데려 갔습니다. 우리나라도 힘들게 법안을 만들었으나 현재 있으나마나한 법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교수님 말씀처럼 한국교회가 여기에 관심을 갖고 함께 대안을 마련해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실 때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상규: 원론적으로 말하기는 쉽지만 사실 세심한 연구가 필요하고 전문가 양성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도와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며 돕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어느 단체에 후원 했을 때 과연 그 돈이 제대로 쓰일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되죠. 그래서 북한 인권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국내 대학에 북한학과가 있지만 복음적인,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대학에서 북한학과를 설치하여 전문가를 키워내길 바랍니다. 아직 국내 기독교 대학에는 북한학과가 없어 아쉽습니다. 우리 주변의 교회, 학교를 보면 북한선교에 비전을 갖고 준비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또한 탈북자들 중에서 신앙이 좋고 북한을 향해 뜨거운 심장을 가진 이들이 있는데 이들을 북한 전문지도자로 키워내길 바랍니다. 임창호: 교수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기도가 끊이지 않고 북한을 향한 관심이 사그라지지 않는다면 통일한국을 향한 미래가 밝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부활의 기쁨을 북한에서도 함께 누리길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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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담/대담
                    2020-04-09
                  • (인터뷰)부산기독교유적지 소개 영상 만든 탁지일 교수 Q : 먼저 부산기독교 유적지 소개 영상을 만든 계기가 궁금합니다. A : 무엇보다도 스토리텔링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부산지역에는 기독교 유적지의 보존이 열악합니다. 그 이유는 ‘역사의식의 결여’라기보다는 ‘한국전쟁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국 각지로부터 일시에 몰려온 피난민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부산의 지형도 바뀌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기독교 유적지의 보존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현재 부산지역에는 동일한 역사적 ‘공간’은 남아있지만 그 ‘흔적’은 찾기 어렵습니다. 복음전도자들의 역사적 흔적과 증언을 남기려는 목적으로 동영상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만약 누구든지 이 동영상을 보며 부산지역의 기독교 유적지를 걷는다면, 소중한 공감과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수년 전에 한국연구재단에서 “부산지역 기독교 유적지 개발 및 활용방안 연구”라는 연구 과제를 수행했고, 그 후속 작업으로 부산지역 기독교 유적지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그 후 한 달에 두 번 정도 국내외에서 부산지역을 찾는 분들이 신청을 받아 탐방 안내를 했는데, 그 수요를 감당하기가 어려워 동영상 제작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이 동영상은 제가 소장으로 있는 부산장신대학교 부설 부산경남교회사연구소의 지원과 신대원 제자인 김한별 전도사의 도움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Q : ‘부산’은 한국교회에 있어서 어떤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A : 먼저 부산은 조선 복음화의 첫 기착지입니다. 미국, 캐나다, 호주에서 온 초기 선교사들이 그 첫발을 내딛은 곳이 바로 부산이라는 역사적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알렌과 아펜젤러의 일기를 비롯한 다수의 기록들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의 유입 경로나 그 우선순위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진실을 기록해, 복음화율이 열악한 이곳 불교의 땅에서 살아가는 다음세대 기독교인들이 자긍심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요한 목적입니다. 또한 부산은 복음의 피난처입니다. 내년은 한국전쟁 70주년입니다. 전국 각지의 기독교인들이 부산으로 피난 내려오면서, 부산은 한시적인 한국기독교의 중심이 됩니다. 이 시기에 많은 피난교회들이 도처에 설립되고, 부산지역 기독교는 성장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한국교회사적으로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의 아픔 속에서 이루어진 복음의 전국적 확산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로마제국 복음화를 위한 흩어지는 선교의 시작이었다고 한다면, 한국전쟁은 복음의 전국적 확산을 가능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부산이 있습니다. Q : 영상에 나오는 부산의 기독교 유적지들을 간단하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A : ‘부산의 기독교 유적지 순례’ 동영상에는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를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이 첫 발을 내딛은 기착지로부터 이곳 부산에서 순교한 선교사와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겨있고, 일제강점기 부산지역 3.1운동의 시발점인 부산진일신여학교와 한국전쟁 당시 산모와 영아들을 위해 설립된 일신기독병원의 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부산항 역사를 볼 수 있는 부산본부세관박물관, 그리고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에 관한 내용도 담겨있습니다. 지금은 부산의 평범한 일상이 이루어지는 도심 속 장소들이지만, 교회사 이야기들을 통해 바라보는 기독교 유적지들은 새로운 의미로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실제로 이 동영상 내용을 참조하여 교회 각 기관 및 가족 단위별 탐방이 가능합니다. 지난 6월 14일(금)에도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부설 한국기독교역사문화아카데미 회원들과 함께, 유튜브를 통해 동영상을 각자 시청한 후, 제가 직접 동영상의 장소들을 안내를 하며 탐방을 했습니다. Q : 혹시 경남지역 기독교 유적지 영상이나 이단관련 영상 제작은 계획이 있으십니까? A : 물론입니다. 올해는 특히 호주선교가 시작된 지 13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부산경남지역은 호주선교부가 선교를 담당했던 지역일 뿐만 아니라, 손양원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 등의 신실한 신앙인들의 이야기가 남아있는 곳입니다. 호주선교와 관련된 교회 및 유적지들에 대한 동영상 스토리라인을 구상 중에 있습니다. 여건이 허락 되는대로 제작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부산지역에 비해 마산, 통영, 진주, 거창 등 접근성이 쉽지 않은 넓은 지역에 기독교 유적지들이 분포되어 있다는 점이 고민입니다. 동영상의 제한된 분량을 고려할 때, 역사적으로도 중요하면서 현재적 의미가 있는 대상을 선별하여 촬영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혹시라도 좋은 제안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Q : 현재 현대종교 이사장 겸 편집장으로 있는데, 현재종교가 부산 토크 콘서트를 계획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이나 일정 등을 알고 싶습니다. A : 선친 탁명환 소장의 25주기를 맞아 지난 5월 25일(토) 서울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현대종교 이단 바로 알기 토크 콘서트>를 개최했습니다. 서울지역뿐만 아니라 전국각지에서 관심 있는 이단피해자, 일반목회자, 대학교목, 평신도, 청년대학생 등이 참여했습니다. “최근 이단 트렌드 읽기”(탁지일 교수), “캠퍼스 이단 바로 알기”(탁지원 소장), “이단 문제 관련 실정법 이해하기”(김혜진 변호사)의 주제 강의를 듣고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만간 부산지역에서 두 번째 <현대종교 이단 바로 알기 토크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정보전달식의 강연이 아니라, 전문가들을 통한 체계적인 분석과 실제적인 대안마련을 모색하는 소통과 공감의 자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구체적인 일정이 나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Q : 지난 2월 고 탁명환 소장 25주기 추모예식에서 디지털 자료집을 만들어 제공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요? A : 선친을 위해서 제가 할 일이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중 두 가지를 마무리한 것 같습니다. 첫째로, 2009년 선친 탁명환 소장이 30여 년간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해서 700여 쪽에 이르는 『사료 한국의 신흥종교』를 출간했고, 둘째로, 지난 2019년 2월에는 탁 소장의 저서 23권과 논문 90편 등을 PDF로 제작한 「이단연구 저서논문 자료집」을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이를 ‘한국교회사학회’ 학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했고, 이에 대해 학회는 저희 선친에게 감사패를 증정했습니다. 이제 남은 한 가지 과제는 선친이 발로 뛰며 직접 촬영하고 녹음한 오디오비주얼자료들을 정리하여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전의 두 과제들에 비해서 많은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감사하게도 얼마 전 한국연구재단의 중견연구자지원사업에서 “한국 기독교 신흥종교운동 오디오비주얼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 탁명환의 연구 자료를 중심으로”란 제목의 과제가 선정되어 향후 3년(2019~2021)간 연구비 지원을 받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면 모든 언론, 정부기관, 연구자, 목회자, 평신도들에게 대가와 제한 없이 제공할 예정입니다. Q : 끝으로 부산기독교 유적지 소개 영상과 관련해서 교계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 동영상을 교회와 모임의 용도에 따라 널리 활용해주시기를 꼭 부탁드립니다. 비록 제한된 예산과 제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완성도면에서는 미숙한 점이 많지만, 이 작업이 부산지역의 기독교 역사를 바로세우고, 다음세대들의 신앙적 정체성과 자긍심을 함양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부산의 기독교 유적지는 ‘역사성’과 함께 도심에 밀집되어 있어서 ‘접근성’과 주변 문화관광자원들과의 ‘연계성’이 뛰어납니다. 다른 지역의 교계에도 소개해주시고, 부산을 찾는 가족친지들이 계시다면 함께 부산 도심의 유적지 탐방을 계획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트리행사 시기와 연계해 진행한다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학교와 청년대학생들을 비롯한 교회와 기독교기관에서 이 동영상을 활용해서 각자의 특성에 맞는 탐방프로그램을 운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앉아서 듣는’ 것이 아니라 ‘걸으며 오감으로 체험하는’ 기독교 유적지 순례는 오래 동안 기억에 남을 소중한 배움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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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2019-06-13
                  • 고신대, 전소된 한산도교회 위해 복구 활동 ▲ 2월 8일 '한산도교회' 화재모습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마을 경남 통영의 한산도 작은 섬에 위치한 ‘한산도교회’ 목조건물로 지어진 한산도교회는 지난 2월 8일 화재로 흔적도 없이 내려앉았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던 상황. 이를 위해 총회와 교단에서 위로하며 물질로 후원하며 기도하고 있지만 한산도교회의 교인은 대부분 70-80대이고, 소수 인원이라 자체적 복구가 힘든 상황임을 고신대학교가 전해 들었다. 고신대학교는 그 소식을 듣고 총장님을 비롯한 학생, 교직원이 현장복구를 위해 나서기로 했다. 3월 16일(금) 아침 7시, 학생 30명, 안민 총장, 교수와 직원이 배를 타고 한산도섬에 있는 교회로 갔다. 전날 밤 많은 비로 인해 걱정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일하기에 가장 적당한 날씨를 허락하셨다. 현장에서 본 한산도교회는 나무로 만들어진 1층 예배당과 식당, 2층 사택이 까만 재가 되었고 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참담한 광경에 모두가 놀라며, 손을 걷어붙였다. 까만 잿더미를 밟으며 불에 타버려 이미 다 녹슬어 버린 철제, 못이 박혀있는 그을린 나무들을 분리해서 일일이 손으로 옮겼다. 재 속에 있던 교회의 흔적, 그 속에서 발견 한 타다 만 성경책과 유일하게 남아있는 결혼사진은 봉사자들을 눈물짓게 했다. ▲ 현장에 있었던 성경책 김정민 총학생회장은 “저희가 약 5시간 동안 복구를 했지만 남은 것을 두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다”며 “어려움을 겪은 한산도교회를 위해 계속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또, 임진호(직업재활상담학과, 12학번)학생은 “사람이 만든 교회(건물)는 시간이 지나면 썩거나 없어지게 된다. 우리가 교회가 되야한다. 돌아가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받은 것을 나누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한산도교회 김재곤 목사는 “먼 곳까지 직접 와준 학생들에게 고맙다. 교회가 무너짐으로 낙심하고 있었던 성도들도 손자,손녀같은 학생들이 와서 섬겨주는 모습에 격려가 되고, 작은 손길이지만 사랑과 위로에 너무 감사하다”고 전했다. 안민 총장은 “우리학교가 어려운 곳을 돌아보고 섬김의 삶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작은 손길이지만 교회와 성도님들에게 격려가 되고 학생들에게는 섬김의 삶을 훈련받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길 바란다”며 어려움을 당한 한산도교회 목사와 성도들을 위로하며 지속적인 관심을 요청했다. 고신대학교는 앞으로도 섬김의 삶을 실천하며 세상의 빛이 되길 소망하며 교단과 전국교회의 관심으로 이후에 새롭게 건축된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예배하고 찬양하는 시간을 기대했다. 또한 봉사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한산도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봉사를 마무리했다. ▲ (좌) 작업 전, (우) 작업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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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종합
                    2018-03-19
                  • [고신 7신] 드디어 고신과 고려, 하나되다 고신 총회와 고려 총회가 마침내 역사적인 통합을 이뤄냈다. 총회 둘째 날인 16일(수) 고신과 고려는 합병 선언문을 낭독하고 총대들의 박수로 하나의 교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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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16